< 76. 노팅엄 사람들 (1) >
"내일 오전 10시에 훈련장에서 구단 버스가 출발해. 선수단은 버스를 타고 히드로 공항으로 이동해서 토리노(투린)행 비행기를 탈 거야. 토리노 공항에서는 미리 렌트한 버스를 타고 토리노 FC의 훈련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호텔로 이동해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할 거야."
"그리고?"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야. 우리 선수들은 협조가 끝난 토리노 FC의 훈련장을 이용해 가볍게 저녁 훈련을 할 거고, 모레는 토리노 FC에서 오후 훈련을 한다고 했으니 오전에 훈련장을 이용하고 오후에는 알리안츠 스타디움(유벤투스 홈 경기장)에서 가볍게 적응 훈련을 할 거야."
나는 이번 원정 일정이 적힌 표를 보면서 조이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우리 노팅엄의 선수들은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유벤투스와의 원정경기를 치르기 위해 내일 유벤투스가 있는 토리노로 이동해야 했다.
"선수들 식사는?"
"내일 점심은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서 먹을 거고··· 토리노에 도착한 이후에는 마이크랑 파견 나간 요리사들이 호텔 주방을 빌려 선수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 거야."
"렌트한 버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버스 한 대를 더 준비해놨어."
"모레 우리 선수들이 토리노 FC의 훈련장을 쓸 때, 토리노 선수들의 개인훈련시간과 겹치지는 않을까?"
"토리노 측에서 오후 훈련이 3시라고 했으니 괜찮아. 우리는 12시까지만 훈련장을 이용하고 떠날 거거든. 우리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원하면 호텔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를 이용하기로 했고."
이미 조별예선을 치르며 해외 원정을 경험해봐서 그런지 운영팀에서 짠 스케줄은 무척 꼼꼼하고 효율적이었다.
몇 개의 질문을 더 던지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열어놓았던 창문으로 매섭게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몸을 떨며 물었다.
"으으···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는데 문제는 없을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창문을 닫았다.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상청에서 노팅엄셔주(노팅엄 시를 포함한 인근 지역)에 눈이 조금 올 거라는데 좀 많이 온다고 생각해도 버스가 움직이는 데는 문제 없어."
"철저하게 준비했네. 좋아좋아."
조이는 어떤 질문을 해도 척척 대답해줬다. 운영팀에서 그만큼 꼼꼼하게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챔피언스리그 16강 상대인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리그 1위 팀이었다.
그렇기에 잭슨은 하루라도 빨리 원정 지역에 도착해 적응 훈련을 하길 원했고, 운영팀이 응해준 거였다.
해외 원정 경기에서 일정을 잘 짜는 일은 정말 중요했다. 최소 몇백 키로미터를 이동하는 장거리 이동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일정을 조금 잘못 짜거나 변수가 생기는 순간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와 훈련 일정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홀짝이는 조이에게 말했다.
"별 문제 없이 계획대로 되겠지?"
"···불길한 플래그 꽂지 마."
"플래그라니."
2010년, 세계 최고의 팀이었던 바르셀로나도 화산재라는 재해 때문에 버스로만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이동을 해야 했고, 컨디션 악재로 인터밀란에게 패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걸 아는 조이도 내게 농담을 한 거였다. 나 또한 농담을 받아주며 떠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플래그를 꽂았던 것 같다.
왜냐면 이날 밤, 노팅엄에 큰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
"···거짓말이겠지?"
나는 어제 저녁 유소년 팀 단장과 함께 유소년 관련 서류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훈련장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나는 잠에서 깨자마자 창문을 통해 훈련장과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녹색 필드든 훈련장 근처의 빨간 지붕 집이든 번화가든 도로든 할 것 없이 전부 새하얗게 물든 그 광경을.
눈이 아주 많이 쌓인 것 같았다. 버스가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혹시나 해서 창문까지 열고 머리를 내밀어 다시 밖을 확인했다.
"망할, 빌어먹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눈이 거의 그쳤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사무실 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가며 스마트폰을 켜 노팅엄시의 기상청에서 하는 라디오를 들었다.
<밤새 노팅엄셔주에 평균 8cm 정도의 기습폭설이 내렸습니다. 특히 노팅엄시는 밤새 적설량이 15cm나 돼 교통이 마비되었고··· 전문가들은 환경 악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고···.>
흘러나오는 라디오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투덜댔다.
"망할 기상청. 눈 별로 안온다며···."
1층에 와서 보니 눈의 높이가 더 잘 보였다. 영국에는 이 정도의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제설 장비가 그렇게 많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며 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도운아. 나 지금 운영팀 사람들이랑 기습폭설 때문에 화상통화 중이거든? 금방 다시 연락줄게.
*
엠마는 트렌트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노팅엄 FC의 운영팀에 입사한 말단직원이었다.
그녀가 작년에 입사한 후, 노팅엄은 계속 승승장구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엠마는 화상 회의 중에도 쥐죽은듯이 가만히 있었다.
[UEFA에 연락해봤지만, 경기 전날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라 경기 연장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제설차도 시청에서 못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노팅엄시 전체가 마비됐습니다.]
직원들은 각자 알아볼 수 있는 걸 최대한 알아봤고, 절망적인 소식들을 전했다.
운영팀장 조이는 그들의 보고를 전부 듣고, 차분한 목소리로 직원들 하나하나에게 해야 할 일을 정해줬다.
[브랜이랑 엘리자베스, 베니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토리노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주세요. 히드로공항 쪽이 어렵다면 맨체스터공항 쪽으로 방향을 바꿔도 돼요. 비용은 얼마든지 들어도 되니까 빠르게 확인해주세요. 미키랑 피오나는 제설이 언제까지 될지 알아봐 주시고······.]
조이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부 선수단 일정에 최대한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방향이었다.
조이는 마지막으로 엠마에게 말했다.
[엠마는 원정 가려고 준비 중이던 팬들 연락처를 확보해 주세요.]
"네!"
엠마는 힘차게 대답했다. 침울한 분위기였기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모두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스마트폰 통화 가능한 상태로 둬 주세요. 우리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다들 힘차게 대답하고 화상전화를 끊었다.
엠마는 화상전화 프로그램이 꺼지자마자 조이가 지시한 대로 구단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조이가 지시한 명단 정리를 시작했다.
단순한 반복 작업이었기에 엠마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가장 친한 친구인 베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줄줄 얘기하며 작업을 계속했다.
"정말 큰일이라니까. 이러다 우리 선수단이 경기 시작 직전에 도착하면 어떡하지? 컨디션 다망가질 것 같은데···."
*
엠마의 베스트 프랜드이자 노팅엄의 팬이자 소규모 서포터즈 <파인스(소나무들)> 소속의 베키는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회사에서 오늘은 출근하기 어려울 거라고 갑작스러운 재해로 인한 휴가를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엠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엠마에게서 노팅엄 FC가 큰일 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구단에서 최선을 다해보고 있는데··· 솔직히 잘 될지 모르겠어.
"어떡해? 나 모레 경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말이야. 아, 팀장님한테 연락 왔다. 끊을게.
"응응. 힘내!"
-고마워.
통화를 마친 베키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모레 있을 유벤투스 경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경기가 망할지도 모른단다. 베키는 이 불안함을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파인스>의 단체 대화방을 켜서 엠마에게 들은 얘기를 적기 시작했다.
베키의 아이디는 소나무 33이었다.
소나무33> 여러분! 오늘 폭설 때문에··· (노팅엄 선수들의 원정 일정이 망가질 것 같다는 얘기) ··· 래요. 어떡해요 :(
소나무61> 큰일났네요
소나무29> 아··· 모레 원정 따라가려고 비행기표랑 경기 표도 다 사뒀는데ㅠㅠ
소나무1>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게 있나 알아봅시다
소나무3> 네!
소나무95> 알겠습니다!
<파인스>의 회원들은 베키와 함께 노팅엄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노팅엄의 어느 곳에서 이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는 <파인스>의 리더 벤자민도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은 <파인스>의 대화방에서 얘기를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이번 시즌 노팅엄의 모든 소규모 서포터즈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오크스>의 리더 맥켄지에게였다.
-맥켄지, 얘기 들었어요? 우리 회원 중 하나가 운영팀 직원이랑 친구인데 글쎄 말이죠···.
*
이른 아침이었지만 펍 <오크스>에는 술에 쩌든 사내들이 잔뜩 있었다.
이들은 어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느닷없니 내린 폭설 때문에 펍에 갇힌 노팅엄의 서포터즈 <오크스>의 회원들이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후까지 상황을 보는 거죠?"
"여보··· 미안해. 나도 이럴 줄 몰랐다니까? 아니, 소리를 지른 게 아니고···."
대부분 각 가정의 가장들인 이들은 회사와 가족들과 한창 통화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설로 인해 회사가 쉰다는 얘길 듣기도 하고, 부인에게 혼쭐이 나고 있는 회원도 있었다.
애초에 펍을 운영하는 맥켄지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다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어?"
<파인스>의 리더 벤자민이 보낸 문자였다.
문자에는 이번 폭설 때문에 노팅엄의 원정 일정이 망할 것 같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맥켄지는 목소리를 높여 정신없는 분위기를 수습했다.
"자자, 다들 모여봐. 지금 집이랑 회사가 문제가 아니야. 큰일났어."
맥켄지는 <오크스>의 회원들에게 방금 들은 내용을 전달했다.
"아이고."
"그러고 보니 이번 원정에 우리 회원 중 절반 이상이 가지 않습니까?"
"다른 팀이 우리를 못 막으니 하늘이 우릴 막으려 하네요."
맥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크스의 회원들은 분개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노팅엄을 사랑하는 팬들 중에서도 특별한 팬들이니까.
맥켄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단을 위해 우리가 뭘 할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고."
"좋습니다!"
오크스의 회원들은 각자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직업이 소방관인 회원이 소방서에 전화를 해 제설장비에 대해 문의하기도 하고, 집에서 화염방사기를 꺼내오겠다는 무서운 회원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 스마트폰을 확인하던 한 회원이 말했다.
"런던으로 안전하게 이동하려면 빨라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오크스의 회원들이 모여 그가 보던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노팅엄 지역지 SNS였는데 시청에서 내일 아침은 돼야 주요 도로들을 뚫을 수 있다고 한 내용이었다. 노팅엄시가 애초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일이 없었기에 제설장비가 부족하고, 길이 막혀 시간이 지연돼 양해 부탁한다는 내용도 함께였다.
"미치겠네. 진짜."
이유가 어떻게 됐든 그래서는 하루나 늦게 된다. 맥켄지는 방법이 없나 고민하며 방금 보던 뉴스의 댓글들을 보았다.
그리고
"유레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삽 들고 나가자! 제설장비가 움직이기 힘들면 삽으로 길 뚫으면 되잖아.
단순무식한 내용이었지만, 이 문제의 해법이기도 했다.
맥켄지는 빠르게 머리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제설차가 있는 시청 근처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노팅엄을 제시간에 토리노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선수들의 집 앞도 치워주고··· 생각해야 할게 참 많았다. 혼자였다면 막막했겠지만 맥켄지는 혼자가 아니었다.
맥켄지가 목소리를 높여 회원들을 불렀다.
"다들 모여봐! 계획이 있다!"
**
#가라! 노팅엄!
#토리노는 우리가 보내준다
#지기만 해봐라
#유벤투스한테 지면 죽는다
세 종류의 해시태그가 달린 글과 사진들이 SNS를 정복하고 있었다.
나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노팅엄 팬들의 제설작업 인증 글을 보며 멍하니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노팅엄의 팬이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나와 눈을 치우는 인증샷을 올리고 있었다.
SNS를 통해 어디를 가장 빨리 치워야할지 알려주는 지도도 올라와 있었다.
-도운아? 도운아? 내 말 듣고 있어?
"어, 어어··· 지금 일어나는 일이 팬들이 알아서 도와주는 거라고 했지?"
-응···.
나는 조이와 통화도 하고 있었다.
조이는 아까 오크스의 리더에게서 '노팅엄의 팬들이 노팅엄을 돕고 싶어한다. 어딜 치워야할지 알려준다면 서포터즈의 리더들을 통해 팬들에게 부탁해 보겠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조이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미리 조사해놓은 대로 당장 치워야하는 장소들을 매핑(mapping)한 지도를 보내줬는데···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줄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노팅엄 팬들의 화력은 어마어마했다.
실시간으로 노팅엄 지역방송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큰 삽, 작은 삽 할것 없이 뭐든 들고 나와 길을 뚫고 있다고.
-제설차도 막 출발했대. 선수들 집 앞도 팬들이 치워주고 있대. 아, 시청에서 전화가 와서 끊을게.
"응, 파이팅."
나는 전화를 끊으며 훈련장 주차장을 바라보았다. 버스 기사님이 눈길을 달리기 위한 체인을 다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 입구에 삽을 든 팬들이 길을 다 뚫어내고,
<와아아아아!>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음···."
잭슨은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내 노트북으로 팬들이 올리는 제설 인증 사진들과 글들을 보고 있었고, 지금은 나와 함께 주차장 앞 길을 뚫어낸 팬들을 보고 있었다.
잭슨은 오늘 원정을 가야 했기에 어제 훈련장에 남아 유벤투스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 그래서 이곳에 있었다. 잭슨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살짝 올라와 있었다.
잭슨이 중얼거렸다.
"우리 팬들이 세계 최고입니다. 밤새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네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 원정은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그렇죠?"
잭슨은 제설삽을 든 채로 버스 주변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76. 노팅엄 사람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