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메이크 축구 명가-234화 (234/245)

< 76. 노팅엄 사람들 (2) >

"···정말 버스가 올 수 있을까?"

할리가 로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드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단에서 온다고 했잖아. 그러면 오는 거지."

"너는 저렇게 눈이 쌓인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안 걱정 돼?"

"응."

로드의 단호한 대답에 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 밖으로 눈이 한가득 쌓인 길이 보였다. 버스뿐만 아니라 자전거도 절대 다닐 수 없어 보였다.

"차 마시면서 걱정 좀 덜어내렴. 구단에서 알아서 해 준다며?"

할리의 어머니가 할리를 위로하며 찻잔 두 개를 내밀었다. 로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잔을 받아들었고, 할리는 뚱한 얼굴로 잔을 받아 마셨다.

[오늘 밤 내린 기습적인 폭설로 노팅엄시의 업무가 며칠간 마비될 수 있으며···.]

거실에 있는 TV에서 아나운서도 우울한 소식을 말하고 있었다. 켜둔 스마트폰의 기상청 앱에도 딱히 좋은 소식은 없었다.

할리는 운영팀에서 온 연락을 떠올렸다. 전화는 총 두 번이 왔었다. 첫 연락이 왔을 때 직원의 목소리는 정말 침울했다.

-일단 집에서 대기해주세요. 오늘 일정에 변동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연락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소리가 무척 밝아졌다.

-잘 해결될 것 같아요. 로드 선수랑 같이 있다고 했죠? 한 시간 내로 집 앞에 버스가 갈 거니까 출발 준비하고 기다려 주세요. 그럼 끊을게요. 다음 선수한테 전화해야 해서요.

할리는 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 로드와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방법을 뒤늦게 물으려고 했지만, 직원은 할리가 질문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할리는 구단 버스가 어떻게 집 앞까지 온다는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할리는 구단에서 로드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좋은 말을 해 준 거라는 의심까지 하기 시작했다.

버스가 오면 함께 타기 위해서 할리의 집에 짐을 챙겨 와 있는 로드는 할리가 그런 고민을 하든 말든 아까부터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지만.

"로드, 대체 뭐 보는 거야?"

"SNS···."

"뭘 보는 건데?"

할리가 로드의 스마트폰을 보려는 순간,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우웅!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 소리였다.

<할리~ 할리~ 할리~ 할리 콕스!>

이어서 익숙한 응원가도 들려왔다. 눈이 가득 내린 길에서 자신의 응원가가 들린다니.

할리는 로드의 스마트폰을 보려고 했던 걸 잊고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려 했다. 하지만 각도상의 문제인지 소리가 들리는 곳은 안 보였다.

할리는 로드에게 말했다.

"저거 무슨 소린지 좀 보고 올게."

할리는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로드도 말없이 따라왔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였다.

할리는 바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소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오른쪽과 왼쪽, 양쪽 길에서 사람들이 각종 제설기구로 눈을 치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노팅엄의 팬들이었다. 노팅엄 유니폼들을 입고 있었고, 유니폼이 없더라도 머플러를 목에 두르거나 노팅엄의 엠블럼이 새겨진 모자들을 쓰고 있었다.

"뭐야···."

팬들은 제설용 노동요로 노팅엄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터 소리의 정체는 제설용 송풍기 소리였다. 가장 앞에 제설용 송풍기를 든 팬이 길을 먼저 내고, 이어서 따라오는 팬들이 삽질해서 길을 넓히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가도 충분할 것 같은 넓이로.

"영화 찍는 건가···?"

할리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몇 명인지 가늠도 안 되는 수많은 사람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왜 눈을 치우는지도 모르겠고 왜 노팅엄 유니폼을 입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응원가를 왜 부르는지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로드가 할리의 옆에 서며 말했다.

"팬분들이 우리 원정 빨리 보내주겠다고 자발적으로 제설 작업을 해 주시는 거야."

"어? 넌 어떻게 알아?"

"이거."

로드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집 앞길 제설 완료!>

<구단 버스 출발합니다!>

<제롬 구출 완료!>

<헌터 형제 구출 완료!>

팬들이 제설 도구들을 들고 찍은 기념사진들이 SNS 글에 올라와 있었다. 각양각색의 팬들이 온갖 장소에서 눈을 치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가라! 노팅엄

#토리노는 우리가 보내준다

글마다 달린 해시태그에 적혀 있었다.

할리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두 로드와 할리를 위해서였다. 저 많은 사람이 모인 이유가 겨우 그거였다.

할리는 그들이 땀을 흘리며 다가오는 걸 보며 말을 잃었다.

그들은 팬들이 아니라 영웅처럼 보였다.

로드가 옆에서 말했다.

"모레 경기에서 지면 우리는 진짜 나가 죽어야 해. 대충 경기하는 놈 있으면 내가 욕할 거야."

"···무조건 이기자."

팬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길이 순식간에 뚫렸다.

할리의 집 앞에 도착한 팬들은 두 선수를 알아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눈을 다 치웠다는 것과 선수들을 찾았다는 기쁨이 담긴 외침이었다.

그리고 다들 점차 조용해졌다. 팬들은 로드와 할리의 말을 기다리듯 둘을 보고 있었다.

할리는 눈가가 찡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드도 마찬가지였다.

"왔다!"

한 팬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니 멀리서 제설차와 구단 버스가 보였다. 제설차가 앞서 있었고 거리를 두고 버스가 따라오는 모양새였다.

모인 팬들을 둘러보던 로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팬 여러분의 헌신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꼭! 승리로 보답할게요!"

<와아아아아아!>

둘 앞에 선 팬들은 이 말만 기다렸다는 듯 다들 삽이든 송풍기든 뭐든 든 채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할리는 순간 군대에 왔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어서 팬들은 할리를 바라보았다.

로드 또한 할리의 옆구리를 툭 치며 작게 말했다.

"뭐해. 너도 한마디 해야지."

"머릿속이 새하얀데···."

"그래도 하고 와. 안 그러면 버스 못 탈 줄 알아."

할리가 머뭇대고 있으니 어느새 제설차가 먼저 지나가고 버스가 도착했다. 로드가 팬들에게 손을 흔들며 먼저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할리에게 한 마디 남기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

할리는 버스 문 앞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키고, 한마디씩 내뱉었다.

"···정말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해 줄 수 있어요? 노팅엄 팬들이 세계 최고예요! 무조건 이기고 오겠습니다!"

막상 말을 내뱉으니 목소리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할리는 마지막에 주먹까지 흔들면서 말했다.

할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팬들은

<노팅엄! 노팅엄! 노팅엄!>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할리가 버스를 타고 문이 닫혔다.

팬들은 떠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응원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

노팅엄의 스트라이커 제롬은 로드와 할리가 차례로 버스에 오르는 걸 보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팅엄의 팬들이 제설기구들을 흔들며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제롬은 바깥의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옆에 앉은 미할리스에게 말했다.

"원래는 이 팀이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는데요···."

"그런데?"

"분명히 우승도 안 했는데 이 팀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막 드네요."

"···이 팀에는 우승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거든."

제롬의 말을 들은 미할리스는 잔잔하게 웃었다.

미할리스도 제롬처럼 바깥의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버스는 팬들을 위해서인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할리스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이가 자신을 발견한 후, 기뻐서 방방 뛰는 걸 볼 수 있었다.

미할리스는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아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옆에 있는 제롬에게 말했다.

"이기자."

제롬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반드시."

*

노팅엄의 선수단은 팬들의 도움 덕에 두 시간 정도만 늦게 토리노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원래 일정대로 충분히 진행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수들은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훈련을 위해 토리노의 훈련장에 모여 있었다. 영국이 추웠다는 게 잊힐 정도로 이곳은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선수들은 화기애애하게 있었다.

"다들 모여 앉아라."

막 도착한 잭슨이 말했다. 선수들은 코치들이 선수들의 앞에 이동형 빔프로젝터 스크린과 빔프로젝터를 설치하는 걸 보며 스크린을 향해 모여 앉았다.

모레 상대인 유벤투스를 분석한 자료나 전술 자료를 보여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빔프로젝터에서 재생되기 시작한 건 선수들이 예상하지 못한, BBC의 뉴스 영상이었다.

선수들이 잭슨에게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스크린에 비친 아나운서가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이번에는 훈훈한 소식입니다. 기습 폭설이 내린 노팅엄시에서 정말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는데요. 자료 보시겠습니다.

이어지는 자료 화면에는 서포터즈의 리더들과 노팅엄의 운영팀이 함께 어느 곳의 눈을 치워야 할지 의견을 나누는 화상 회의가 먼저 나왔다. 이어서 노팅엄의 팬들이 자발적으로 길을 뚫는 모습들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길로 선수들이 버스에 타고, 토리노로 떠나는 영상까지 나왔다. 팬들은 버스를 보며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자료 화면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나운서가 다시 등장해 말했다.

-노팅엄의 팬들은 자신들도 노팅엄 FC의 일부라는 걸 이번 일을 통해 보여줬습니다. 이번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팬들은 무려 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선수들은 뉴스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노팅엄의 팬들은 노팅엄 FC가 괜히 동화의 팀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노팅엄의 선수들이 팬들의 헌신에 어떻게 보답할지··· 모레 경기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많은 축구팬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잭슨은 뉴스가 끝나자마자 빔프로젝터를 끄고 스크린 앞에 섰다.

"전 세계 언론에 다 뉴스가 났다. 방금 보여준 것도 한 시간 전에 뜬 뉴스다."

잭슨은 선수들과 코치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계속 말했다.

"원래는 경기 시작 직전에 너희들에게 동기부여용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여줘도 충분할 것 같았다."

이 뉴스로 인한 동기부여는 유벤투스와의 경기를 치를 때까지, 아니,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갈 거라고 잭슨은 생각했다. 팬들은 세계 최고의 팬이 뭔지 선수들에게 직접 보여줬으니까. 여기 모인 모두는 팬들이 보여준 헌신에 감동했을 거고, 보답하고 싶어 할 테니까.

예상대로 선수들뿐만 아니라 코치들까지 의욕이 펄펄 넘쳐 흐르는 얼굴들이 되었다.

잭슨이 그런 모두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자부심을 심어준 팬들을 위해 우리는 모레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할 거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보스!"

*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이 끝난 후, 노팅엄 SNS에는 한 영상이 올라왔다.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 같은 드레싱룸을 배경으로 선수들과 코치들이 모여 찍은 영상이었다. 로드가 가장 앞에 서서 대표로 말하고 있었다.

[이틀 전 아침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평생 기억하고 싶은 아주 멋진 날이었습니다. 팬 여러분 덕분에 선수단은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오늘 이탈리아 리그 1위 유벤투스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노팅엄은 오늘 경기에서 유벤투스를 3-0으로 이겼다. 원정경기에서 거둔 값진 승리였기에 2차전에서 4-0 이상으로 대패를 하지 않는 한 무조건 8강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로드의 마지막 말을 신호로 선수단이 주먹을 치켜들며 '노팅엄!'이라며 기합을 내질렀다. 화면은 어두워지고 노팅엄 FC의 엠블럼이 떠오르고 영상이 끝났다.

유벤투스전을 완벽하게 승리한 덕에 잔뜩 들뜬 팬들은 영상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오늘 경기 이겼으니까 됐어.

-눈 치우기 은근 재밌었어.

-오늘 경기 최고였다!

우후죽순으로 달리는 댓글들 속에서 한 댓글이 많은 추천 수를 받으며 가장 위로 올라왔다.

-우리한테 고마우면 1부리그 첫 우승컵으로 보답해라!

< 76. 노팅엄 사람들 (2) > 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