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출사표 (1) >
"안녕하세요. 특별 방송, <노팅엄 FC>의 진행을 맡은 조쉬입니다."
방송인 조쉬가 시원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TV나 스마트폰으로 보던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참 신기했다.
조쉬가 날 흘긋 보고, 카메라를 향해 계속 말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손님을 모셨는데요. 바로 노팅엄 FC의 사장 겸 단장, 김도운 씨입니다."
옆에서 해설가 데니스와 분석가 제럴드가 정말 기쁘다는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는 날 향한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도운입니다."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눈앞에 보이는 촬영 스태프들도 날 신기하다는 듯 보며 환호와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이곳은 스카이스포츠 방송국 안의 촬영장이었고, 나는 우리 팀의 무패우승 이후 급히 편성된 프로그램 <노팅엄 FC>을 녹화하고 있었다.
방송 촬영을 피하지는 않지만, 굳이 찾아다니지도 않는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선수들 때문이었다.
우리 팀은 프리미어리그 우승 확정 후 승승장구해 무패로 리그를 끝냈고, 어제는 FA컵에서도 우승했으며 챔피언스리그는 결승전에 진출해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하면 우리는 잉글랜드 프로팀 사상 전무후무한 쿼드러플(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그만큼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었기에 잭슨은 내게 선수들의 언론 접촉을 최대한 차단해 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선수들도 결승전에 집중하고 싶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 팀은 이번 시즌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은 팀이었다. 세계 최고의 리그 중 하나인 프리미어리그에서 말이다.
그만큼 언론과 전 세계 축구 팬들의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걸 무시했다가는 구단 이미지가 무척 나빠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일단 내가 이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다. 또한, 기자들의 인터뷰 중 일부를 선수당 한 번씩 서면으로 해 주기로 했고, 공식 인터뷰에는 참여하는 식으로 많은 사람의 답답함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킴은 하나도 긴장하지 않는 것 같네요."
"아니에요. 긴장하고 있어요."
식사를 한두 번 한 적 있는 데니스가 날 편안하게 해 주려는지 말을 걸어왔다. 조쉬랑 제럴드도 지나가다 한두 번 인사한 적 있는 사이였다.
진행자 조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긴장하셨다고 말해도 질문 할 겁니다. 모시기 힘든 분이니만큼 분량을 많이 뽑아야 하거든요."
"···네, 준비됐습니다."
내 한 박자 느린 대답에 조쉬가 웃고 우리 넷 모두가 볼 수 있게 놓인 대형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질문하기 전에 일단 보시죠."
조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태프가 TV를 작동했다.
화면에 익숙한 장면이 나타났다. 내가 가운데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고, 내 뒤로 지난 시즌 영입했던 선수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영입발표를 했던 날의 영상인 모양이었다.
[다음 시즌부터 우리는 프리미어리그 우승,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릴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트레블입니다. 목표가 커진 만큼 팬분들이 더 큰 응원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즌에 뵙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날 보니 부끄럽기도 하고, 그때의 감정이 살아나 기분이 좋기도 했다.
"첫 질문은 이겁니다. 기분이 어떻습니까. 이제 딱 한 경기만 이기면 저 때 말씀하시는 대로 되는데."
"좀 건방지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리그 우승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입니까?"
제럴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팀은 강하니까요. 조직력도 금방 맞을 거고. 근데··· 무패우승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후보·로테이션 선수들이 리그컵을 우승할 줄도 몰랐고, FA컵에서도 한 번도 방심하지 않고 우승을 거머쥘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서 기분이 어떠십니까?"
"노팅엄의 사람들은 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런 가족이 힘을 합쳐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었는데··· 당연히 최고죠. 이렇게 아드레날린이 나오면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즘에는 늘 기분이 좋아요."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조쉬가 흐뭇하게 웃으며 스태프에게 눈짓했다. 스태프가 움직여 TV에 새로운 영상을 띄웠다.
바로 리그컵 우승 당시 이태양이 결승골을 넣는 장면이었다.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알았다. 시원시원한 골이었기 때문에 꽤 많이 봤으니까.
이태양이 활약하는 영상이 쭉 나오고 노팅엄의 선수들이 이번 시즌 첫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영상이 나왔다.
이번에는 제럴드가 질문했다.
"썬을 단장님이 직접 데려오셨다고 했죠? 군부대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영상 자료를 통해 이태양 선수를 봤는데 피지컬 자체가 월드클래스 급으로 보여서 잘만 다듬으면 먹힐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휴가 간 겸 입단 테스트를 제안해 본 건데··· 대박이 터졌어요."
회귀 덕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 이어서 말했다.
"이태양 선수는 제 기대를 넘어버렸어요. 솔직히 지금 주전 공격수들이랑 진짜 주전 경쟁을 하게 될 정도로 성장할 줄은 몰랐거든요."
"오··· 기자들과 저 같은 분석가들은 당연히 단장님이 썬의 잠재력을 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는 이태양 선수가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정도의 스트라이커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번 달에 같이 식사할 때 어떻게 그렇게 기량을 올릴 수 있었냐고 물어봤죠."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선수들이 자기 노하우도 잘 알려주고, 감독님이랑 코치님··· 그리고 분석관들이 계속 올바른 방향을 잡아주니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라고 말했어요."
방송에 나가는 이런 말 하나하나가 우리 노팅엄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다. 가까운 이익부터 생각해보면 선수들을 영입하기 쉬워질 것이다. 선수들은 대체로 성장 하고 싶어 하니까.
몇 가지 질문과 답이 더 오가고, 이어서 TV에는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그러니까 리그 마지막 경기 하이라이트가 나왔다.
바로 무패우승을 완성한 날이었다.
화면 속에서 알버트가 헤딩으로 골을 넣고 포효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어]
이어서 들리는 감자 머리 응원가 합창.
들으면 들을수록 좋은 노래였다. 저 경기에서 알버트의 결승골로 우리는 1-0으로 이겼다.
이번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경기 끝나자마자 선수들끼리 파티를 했어요. 감자 머리 선수들 은퇴 기념이라고 감자로만 만든 음식으로요."
"오, 파티마저 감자라니···."
데니스가 탄식하며 웃었다. 나도 파티 사진 보고 참 황당했었다. 계속 말했다.
"파티에서 먼저 은퇴하는 세 명이 다른 세 명 놀려먹는다고 실시간으로 감자튀김 먹는 거 보여주고, 은퇴 안 하는 세 명은 그거 보면서 부들부들하고··· 그러면서 파티를 즐겼대요."
다들 웃음이 터졌다.
다음 영상은 바로 어제, FA컵 결승전의 하이라이트였다.
칼의 컷백 패스를 받아 이태양의 선제골, 루앙의 크로스를 받은 미할리스의 헤딩골, 할리의 깜짝 중거리 슛으로 노팅엄은 3-1로 승리했다.
이번에는 데니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군더더기 없는 승리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경기 얘기보다는 다른 게 화제가 됐었죠."
영상에는 경기 후, 트로피 세레머니 전에 리찌 감독과 어깨동무를 한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잭슨이 나왔다.
데니스가 날 빤히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얘길 한 건가요?"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서. 나도 어제 그 장면 보면서 뭔 얘길 저렇게 하나 싶어 트로피 세레머니 후에 물어봤었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리찌 감독님이 어제 하신 인터뷰랑 비슷한 내용이었어요. 요약하면 '오늘 전술에 감탄했다. 완벽하게 졌다. 어떻게 저런 선수단을 완벽하게 조화시킬 수 있었냐. 나중에 술 한잔하면서 전술 얘기 좀 하고 싶다. 그리고 꼭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하길 빈다. 다음 시즌에 우리가 복수할 때, 보람을 느낄 수 있게.'라고 하셨대요."
"패배를 받아들이는 모습. 역시 리찌네요."
데니스의 말에 이어 조쉬가 자기 앞에 메모해놓은 걸 읽고, 입을 열었다.
"뉴캐슬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뉴캐슬이 이번 시즌에 노팅엄을 한 번도 못 이기지 않았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쉬가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화난 뉴캐슬의 구단주가 돈을 더 푼답니다. 이번 프리시즌에 3억 파운드가량을 풀 거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말했대요. 어젯밤에요."
"···무섭네요."
처음 들었다. 아직 기사화되지 않은 내용인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좀 무서웠다. 우리 팀 스쿼드가 워낙 좋아서 그렇지 뉴캐슬도 만만찮았으니까. 그 정도 돈까지 쓴다면, 매물만 있다면 우리 팀과 비슷한 급이 될 것 같았다.
이어서 나는 FA컵에 관련된 이들의 질문을 차근차근 답해줬다.
대단한 건 없었고 선수들의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들 궁금해 했다. 그렇게 슬슬 대화거리가 동났을 때, 조쉬가 정리하듯 말했다.
"노팅엄은 FA컵 우승으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했네요."
리그, 리그컵, FA컵, 이 세 개의 국내대회를 모두 제패하는 걸 도메스틱 트레블이라고 부른다.
"맨시티 이후로 8년 만이네요. 노팅엄에는 이번 시즌 이런 기록이 참 많습니다. 상만 탄 게 아니라 기록적으로도 많은 걸 이뤘어요. 자, 보시죠."
조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TV에는 영상이 아닌 자료화면이 떴다.
"노팅엄은 프리미어리그 두 번째 무패우승을 달성했어요. 그러다 보니 첫 번째 무패우승 팀이었던 03-04시즌 아스날과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죠."
아스날의 그 시절 순위표와 노팅엄의 이번 시즌 순위표가 나란히 있었다.
아스날은 26승 12무로 승점 90점, 노팅엄은 31승 7무라 승점 100점.
아스날은 73득점, 노팅엄은 91득점.
등등 직관적으로 성적을 비교할 수 있었다.
조쉬의 말이 시작됐다.
"저는 사실 제가 죽을 때까지 노팅엄보다 더 대단한 기록으로 무패우승을 달성하는 팀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신화적인 기록이에요."
"공감해요. 프리미어리그뿐만 아니라 전 대회에서 무패죠. 역사상 가장 강한 팀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을 정도죠. 챔피언스리그만 우승한다면 거의 확실시 되고요."
제럴드가 말을 받았다.
이어서 데니스도 말했다.
"98-99년 맨유에 이어 무려 28년 만에 트레블, 아니 잉글랜드 사상 최초의 쿼드러플을 달성할지도 기대됩니다."
계속 칭찬을 듣다 보니 괜히 민망해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직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도 안 치렀고, 상대가 작년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인데···."
"저희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지난 4강전에서 노팅엄이 보여준 저력 때문이죠. 전문가들이 정말 깜짝 놀랐어요."
조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서 TV에 챔피언스리그 4강 1, 2차전 하이라이트가 재생되었다.
상대는 프랑스 1위 팀 파리생제르망(PSG).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노팅엄은 그들을 총 4-0이라는 스코어로 제압했다.
조쉬가 영상을 보며 말했다.
"PSG는 이번 시즌 유럽 전체에서 최소 실점을 기록하고 있는 팀이에요. 그런 팀을 노팅엄은 결국 뚫어냈어요."
PSG는 유럽에서 가장 단단한 수비와 날카로운 역습을 무기로 삼는 팀이었다.
PSG는 우리를 상대로도 과감하게 내려앉았다. 에이스 킬리얀 음바페와 수비의 핵 벤자민 파바르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실용전술을 사용해서 노팅엄은 상당히 고전했었다. 특히 지금 TV에 나오고 있는 1차전이 PSG의 홈 경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분석가 제럴드가 말했다.
"저는 노팅엄이 고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반전의 이 장면을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후방에서 공을 잡은 로드가 최전방으로 롱 패스, 미할리스가 헤딩으로 공을 중앙 미드필더 라이언에게 보내고 라이언은 공을 잡아두지도 않고 논스톱으로 오른쪽 윙 칼에게 패스한다.
칼은 드리블해서 수비수를 끌어들이고 침투하는 중앙 미드필더 바비에게 패스, 바비는 공을 잡아두지도 않고 바로 반대쪽으로 낮은 크로스를 올린다.
공을 받은 루앙은 비좁은 공간을 드리블로 두 명을 뚫어내며 중앙으로 침투해 백힐로 미할리스에게 패스. 미할리스가 공을 잡은 곳은 골대 바로 앞, 미할리스는 가볍게 공을 차 골을 만들어냈다.
이 무척 복잡한 과정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이로 인해 전반전 내내 두 개의 슈팅밖에 허용하지 않았던 파리 생제르망의 수비진에 균열을 만들었다.
선 수비 후 역습의 팀은 선제골을 먹으면 팀의 컨셉이 무너진다.
우리 팀은 월드클래스 선수들의 전술적인 호흡과 개인 기량으로 이런 파리의 약점을 완벽하게 공략했다.
제럴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대단한 선수들이 모였는데 호흡까지 좋고, 전술도 완벽해요. 마치 2000년대 후반의 바르셀로나를 보는 것 같아요. 더 대단한 게 뭔지 아세요? 그때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은 유소년 선수들이라 애초에 호흡을 많이 맞춰본 선수들이었어요. 그런데 노팅엄은 그 정도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계속 칭찬을 해 주니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조쉬가 말했다.
"아, 그거 아세요? 지금 노팅엄 다큐멘터리를 찍은 방송사에서 대박 났다고 파티 연 거요."
"정말인가요?"
"네, 그리고 우리 스카이스포츠에서는 구단 내부 출입 기자까지 있으면서 왜 다큐멘터리 기획 제대로 안 했냐고 박살이 났어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진행자 조쉬는 앞에 놓인 A4용지를 뒤집으며 말했다.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으니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보죠. 단장님은 요즘에 뭘 하시나요?"
일상 얘기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웃는 걸 멈추고 입을 열었다.
"다음 시즌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대형 영입이 있나요?"
"아뇨. 관계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다음 시즌에는 유소년들을 올려 쓸 계획입니다. 좋은 선수가 많거든요."
"그럼 이탈자는 없는 건가요?"
나는 확신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있는 선수들도 꼭 챔피언스리그에 우승해서 다음 시즌 슈퍼컵도 따내고, 클럽 월드컵에서도 이 팀으로 우승하고 싶다고 했기에 이적은 없습니다."
조쉬가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충격적이면서도 프리미어리그 팀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네요. 노팅엄의 스쿼드를 한 시즌 더 상대해야 한다니."
나는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조쉬는 선수들이 뭘 하고 있을지 앞으로 뭘 할지를 물었다.
"훈련과 집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을 겁니다. 아,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2군, 유소년 선수들과의 내부 친선 경기를 치를 예정입니다."
"그럼 직원들은···."
"마케팅부터 시작해서 운영까지··· 다음 시즌 준비에 한창입니다. 스폰서쉽에 각종 비즈니스 요청이 전 세계에서 들어오고 있어서 다들 정신이 없거든요. 퍼레이드도 준비하고 있고요."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못 하더라도 충분히 퍼레이드를 할 만한 성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코칭스태프는요?"
"지금이 일곱 시죠? 코치들과 분석관들은 4강이 끝난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 자료를 조사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 노팅엄의 훈련장은 밤에 망령들을 볼 수 있어요. 야근에 시달리는 코칭스태프들을 말이죠."
내 말에 셋이 킥킥 웃고, 데니스가 물었다.
"거기 가면 잭슨도 볼 수 있나요?"
"당연하죠. 오늘도 늦게까지 있을걸요?"
그 외에도 여러 얘기를 하며 촬영을 계속했다.
촬영 후에는 함께 식사했고, 다들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한 잔만 더 하자 반복하는 바람에 나는 자정이 다 돼서야 훈련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밖에서 감독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
"들어오세요."
노크하니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경을 쓰고 있는 잭슨이 있었다.
"촬영은 끝나셨습니까?"
"네, 회식까지 하고 왔어요. 근데 이 시간까지 일 하세요? 결승전까지 일주일도 더 남았는데 적당히 쉬면서 하시지···."
잭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일은 진작 끝났고, 뭘 좀 쓰고 있었습니다."
"뭘요?"
잭슨에게 다가가 책상을 살피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제 FA컵 우승 후, 트로피를 들고 있는 잭슨의 사진이 대문짝 하게 실린 신문 1면이었다.
기사 제목은
<노팅엄의 성공은 잭슨 덕분이다!>
이었다.
"감독님도 인간적이시네요. 이런 거 안 보실 줄 알았는데."
"저도 사람입니다. 칭찬은 늘 기분 좋죠."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다음 주에는 챔피언스리그 첫 출전에서 빅이어를 들어 올린 감독!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시겠어요."
"허허, 그러면 좋겠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지금 기사를 읽던 게 아니었습니다."
잭슨을 따라 기분 좋게 웃던 나는 잭슨의 마지막 말에 갸웃하며 책상을 자세히 살폈다.
신문의 사진이 워낙 강렬해 못 봤는데 잭슨의 바로 앞에 A4용지가 있었고, 멋들어진 필기체로 긴 글이 적혀 있었다. 거의 꽉 차 있었다.
"뭐예요?"
"편지입니다."
나는 갸웃하며 물었다.
"편지요? 아내분한테?"
"아뇨. 노팅엄의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미리 물어봤어야 했는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시작 전에 이걸 팬들과 직원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해드릴 수 있죠.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그런데 읽어봐도 되나요?"
"쑥스럽지만···."
잭슨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다 적은 모양이었다.
나는 집중해서 편지를 읽었고, 이게 뭔지 깨달았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이건 출사표였다. 이 편지에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나서는 잭슨의 심경이 잘 담겨 있었다. 잭슨이 노팅엄에 와서 뭐가 좋았고 부터 시작해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내용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알리안츠 아레나를 노팅엄의 홈 경기장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달라고, 그러면 꼭 빅이어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좋은 내용이었고, 팬들에게 배부하면 아주 좋은 선물이 될 거 같았다.
그런데 잭슨은 왜 이 편지를 쓴 것일까. 나는 고민과 동시에 물었다.
"아무래도 이번 경기는 특별해서 쓴 건가요?"
"특별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축구공은 둥그니까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저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승 상대인 레알 마드리드가 우리보다 뛰어나다면 지겠죠.
그래서 지금 이 편지를 썼습니다. 결과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이 변할 수 있으니 지금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거든요.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승패에 상관없이 여러분들은 최고라고요."
"오···."
내가 들어오자마자 끓인 커피포트가 딸깍 소리를 냈다. 잭슨이 앉은 자리에서 차를 탔고, 찻잔 두 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 테이블에 앉아 편안하게 얘기하자는 뜻 같았다.
"고마워요."
나는 차를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잭슨은 바로 앉지 않고, 차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밤이었기에 창밖으로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경기장의 형체 조금과 훈련장이 보였다. 잭슨은 그걸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차를 몇 번 더 마셨을까, 잭슨이 드디어 내 앞에 앉았다.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뭐든 좋죠."
잭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스페인에서 감독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 자주 걷던 길이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훈련장까지 직진으로 올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일부러 그 길로 출근하기 위해 숙소에서 10분 일찍 나올 만큼 좋아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 감독 일 때문에 생기던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었죠."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아직 감이 안 왔기에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길을 걷는 게 싫어졌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하며 길을 자세히 살피니 바닥에 피어있던 꽃들이 다 졌더군요. 그 꽃들 덕에 길을 걸을 때 즐거웠던 거였습니다."
잭슨은 그때를 생각하는 건지 눈이 허공에 가 있었다.
"오래 살아 보니 인생도 그렇더군요. 당연하듯 주변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때 그 길의 꽃이 시들어버린 것처럼 소중한 걸 소중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잭슨은 수석 스카우트와 함께 우리 구단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속했다. 잭슨의 말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나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잭슨이 계속 말했다.
"그래서 저는 이 편지를 지금 쓴 겁니다. 가장 중요한 한 경기만 남겨놓은 이 타이밍이 감사를 표현하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결승전이 끝난 후에는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것 말고는 생각할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런 편지도 쓴 거죠. 아, 그리고 경기 전에 제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좀 하려고 합니다."
이제 편지를 왜 썼는지 완벽하게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잭슨이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방금 얘기를 나한테 했는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데 잭슨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제 앞에 감사해야 할 분이 계시네요."
됐다고 말하기도 전에 잭슨이 선수를 쳤다.
"킴, 절 찾아주고 믿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할까,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말이 필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잭슨은 방금 그 말을 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웃었다.
< 79. 출사표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