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출사표 (2) >
"감독님은 정말 좋은 분이라니까."
조이가 잭슨의 편지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이의 눈가는 촉촉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편지 내용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조이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인쇄소 다 알아봐 놨으니 내일 오전에 바로 작업 의뢰할게. 특별한 디자인은 필요 없지?"
"응, 우리 구단 엠블럼 정도만 들어가면 될 것 같아."
"좋아 좋아."
조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자신의 가방 안에 넣었다.
그 모습을 테이블 너머로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놓였다.
"돈, 손님들이 너랑 얘기하고 싶다 하는 거 막느라 죽겠어."
"하하, 고마워요. 알렉스."
조이의 아버지이자 포레스트 펍을 운영하는 덩치 큰 알렉스가 '사라의 특제 파스타'라는 이름의 이 가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식을 내 앞에 밀어주며 씩 웃었다.
나와 조이는 함께 퇴근해서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알렉스는 주문하지도 않은 맥주 한 잔을 내 옆에 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우리 딸 말 상대 해주는 것만으로도 수고비는 받았으니까."
"아빠···."
조이의 서늘한 목소리를 들은 알렉스는 움찔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조이 앞에 스테이크가 담긴 그릇을 옮겨줬다.
사이좋은 두 부녀의 모습에 나는 작게 웃고 알렉스에게 말했다.
"구단에서 그렇게 일하는데 집에서라도 쉬어야죠. 저도 집에 있을 때나 출장 다닐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을 때가 많아요."
"우리 딸이 그렇게 열심히 해?"
"직원들의 본보기예요."
알렉스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화제를 돌리려 했고, 나도 받아줬다.
느닷없는 칭찬은 사람을 민망하게 만든다. 조이는 알렉스가 가져온 맥주를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렉스와 나는 눈을 맞추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여보! 그만 놀고 일 좀 해요!"
"아니, 나 진짜 1분밖에 안 있었는데···."
"빨리 와요! 둘 방해하지 말고!"
펍 안을 울리는 조이의 어머니 사라의 목소리에 펍 안 사람들은 웃었고, 알렉스는 엉거주춤 사라를 향해 갔다.
나는 사라에게 귀가 붙잡히는 알렉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두 분은 늘 한결같아서 좋단 말이지."
"난 지겨워. 집에서도 둘이 맨날 붙어있고, 툭하면 '부럽지? 부럽지?'라고 물어본단 말이야."
"정말?"
조이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조이가 그런 나를 가만히 보기 시작했다. 거의 5초 넘게 그래서 나는 멋쩍어하며 물었다.
"왜?"
"그냥. 갑자기 너 노팅엄에 돌아오고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생각나서. 그때도 이 자리였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조이에게 어색함을 갖고 있던 나는 그날 여기서 속을 터놓고 얘기한 덕에 편안한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그리고 그날 잭슨 감독님을 처음 만나고 왔었지?"
조이가 갸웃하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감독님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편지까지 쓰다니···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감상에 젖던 조이가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싶어 조이를 보고 있는데 조이가 미소를 띤 채로 내게 말했다.
"아직도 생각난다. '같이 전설을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해서 감독님을 꼬드겼다고 했었잖아. 그 멘트는 아직도 웃긴단 말이지."
"···남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멋진 멘트였거든. 올해 초에는 그 내용으로 기사도 나갔다고. 사람들도 다 멋지다고 했어."
"하하하, 그래그래."
전반기 내내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으니 세계에서 손꼽히는 축구 잡지에서 잭슨의 독점 인터뷰를 했었다. 거기에서 내가 잭슨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들을 실었었고.
조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그날 이후 잭슨의 행보를 중얼댔다.
"4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직행. 첫 시즌에는 4위로 챔피언스리그로 진출했고, 이번 시즌에는 한 판도 지지 않은 팀을 이끄시는 감독님이 됐네. 앞으로 한 경기만 이기면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팀을 이끄는 감독님이 되는 거고."
"축구 역사책에 남으실 분이 되는 거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나랑 일주일에 서너 번씩 조깅하는 사이가 될 줄도 몰랐다니까."
나와 잭슨은 요즘에도 체력 관리를 위해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훈련장을 달리고 있었다.
선수 관련한 구단의 중요한 일은 잭슨과의 대화를 꼭 거쳤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 보내다 보니 사실 잭슨이 요즘에는 삼촌이나 할아버지 정도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 식겠다. 일단 먹자."
"어, 그러게."
대화에 너무 빠져있다 보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파스타에서 윤기와 냄새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휘적휘적 저으니 속에 감춰져 있던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단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조이나 나나 어릴 때부터 함께 식사를 많이 했기에 서로의 식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천천히 하는 편이었다. 제임스 녀석은 성격이 조금 급해서 혼자 빨리 먹고 아직 식사를 끝내지 못한 우리에게 재잘재잘 말을 거는 게 일상이었고.
그래서 우리 둘만 식사할 때는 음식을 조금 먹고 얘기하고 조금 먹고 얘기하는 식이 되었다.
같은 구단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다르다.
"해피 아들이랑 아이샤 딸이 결혼하겠다고 난리래."
"둘 다 다섯 살도 안 되지 않았었나?"
"일곱 살, 여섯 살이야."
"···워우, 진짜 빠르네. 걔들 열 살 되면 선물이나 해 줘야겠다."
조이는 해피, 아이샤, 몰리, 로라 같은 4부리그부터 함께해온 직원들에게 들은 일상 얘기를 주로 했고,
"꼬마 천재 스카우트가 우리 유소년 팀을 강화해 주고 있어."
"조슈아?"
"응, 다음 시즌에는 영입 거의 안 할 거잖아? 그래서 우리 유소년들을 주로 보고 있는데 숨은 보석들을 많이 발굴해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시간 날 때는 유소년 단장이랑 열심히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러고 있지. 엄청 재밌다더라."
나는 선수들이나 스카우트, 코칭스태프 얘기를 주로 했다.
식사가 계속되고 얘기가 길어질수록 우리 입에서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마리아, 스티븐, 파머 부부, 마이크, 마야, 노먼 교수님, 샬롯 등등.
식사를 마치고, 사라가 가져다준 맥주를 마시면서도 얘기는 끝날 줄 몰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노팅엄 FC라는 구단을 위해 일하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름들이 끝없이 언급됐다.
잭슨이 어젯밤에 해줬던 말이 자연스레 와닿았다. 당연하다는 듯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노팅엄 FC라는 구단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보안팀장인 펠릭스 얘기가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잭슨 말대로네."
"뭐가?"
"어제 잭슨한테 편지를 받으면서 말이야···."
나는 잭슨의 길었던 이야기를 하나도 줄이지 않고 조이에게 말했다.
조이는 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래서 편지를 쓰셨다고 하셨어."
"소중한 걸 소중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라···."
조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나도 저 때는 부모님 생각이 먼저 나서 잭슨의 방을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었다.
"나는 그동안 정말 정신없이 달렸잖아. 유럽··· 아니 사실상 이번 시즌 세계 최고의 클럽이 될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잭슨이 왜 편지를 썼는지 이해가 잘 가더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이를 바라보았다.
잭슨에게 그 얘길 들었을 때, 부모님 다음으로 생각난 사람이 있었다. 언론에는 비치지 않지만, 늘 나를 도와주고 옆에 있어 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조이가 갑자기 웃어서 나는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러네, 나도 해피, 아이샤, 몰리, 로라한테···."
조이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자신의 곁을 지켜 준 직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너도 고마워. 노팅엄에 돌아와 줘서."
괜히 평소보다 더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아예 돌렸다. 조이가 그걸 놓치지 않고 말했다.
"어? 너 부끄럽니?"
"아니거든."
"귓불 빨개졌는데?"
"술 취해서 그런 걸 거야."
조이가 키득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일부러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조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니고··· 20대 때 연애에 실패하기도 했고··· 솔직히 지금의 관계가 무너져내릴까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친구, 제임스로.
"크흠··· 아무튼, 오늘은 자정까지 술 마시자. 제임스가 요즘 여자친구를 자주 데려오거든. 제임스 커플이 침실로 들어간 다음에 집에 들어갈 거야."
"정말? 저번에 커피숍에서 만났다는 변호사랑 잘 되나 보네."
"응. 이번에는 오래 갈 것 같아서 방 빼려고."
제임스는 당연히 상관없다고 했지만, 친구가 결혼할 각이 보이는데 당연히 피해 주는 게 맞았다. 제임스의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거니까. 사실 둘이 붙어서 꽁냥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눈꼴 시리기도 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선수들의 방을 알아봐 주는 직원에게 내 방도 부탁해놓았다.
조이가 틈틈이 우리 테이블을 훔쳐보는 자신의 부모님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요즘 독립해야 하나 싶어. 부모님도 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눈치가 많이 보일 것 같긴 했다. 우린 삼십 대 중반을 넘었으니까.
"그럼, 그냥 같이 살까?"
가끔, 본능이 이성보다 앞설 때가 있다.
머릿속으로는 고민하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비슷한 기회가 생기니까 제멋대로 튀어 나간 말이었다.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나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생각 못 하고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셨다.
조이 또한 내가 한 말이 믿기지 않는지 제대로 못 들은 건지 맥주를 마시려던 채로 굳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맥주를 내려놓았다.
"지금··· 뭐라고?"
조이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입안으로 집어넣기만 했다.
조이의 이어지는 물음에 나는 이 상황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같이 살자고?"
"음···."
순간, 잭슨에게 어제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연하듯 주변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그때 그 길의 꽃이 시들어 버린 것처럼 소중한 걸 소중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순간이 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회귀한 후 난 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 예상이 틀어졌을 때도 되든 안 되든 부딪쳤다. 어중간하게 남겨 놓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지난 시즌 선수들을 모을 때보다 더 긴장됐지만, 지금은 꼭 진심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응. 같이 살자."
< 79. 출사표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