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출사표 (3) >
내 대답을 들은 조이가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대답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얘기했다. 그동안 해왔던 대로.
"노팅엄의 단장으로 부임하고, 노팅엄을 키우면서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 됐어. 혼자서 모든 걸 하는 것보다는 함께하는 게 더 즐겁고, 행복하더라고. 성과도 좋고."
멋쩍게 웃어봤지만, 조이는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실패했던 20대 때의, 일만 알았던 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예전처럼 일이 많아지더라도 혼자 하려고 안 할게. 힘들 때는 기대고, 네가 힘들 때는 내가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함께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
속에 있던 말을 마친 나는 후련해졌다. 그래서 편안하게 미소지을 수 있었다.
이런 질문까지 던질 여유도 생겼다.
"차이면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친구는 친구야. 한 일주일만 어색하고 말자. 알겠지?"
내 말에 조이는 픽 웃더니, 이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펍의 사람들이 전부 우리 테이블을 쳐다볼 정도였다.
잠시 후, 펍의 사람들이 관심을 슬슬 끄기 시작했을 때, 조이는 웃다가 나온 눈물을 손으로 훑으며 내게 말했다.
"마지막에 그런 말은 왜 하냐?"
"뭐가."
"진지하게 얘기 꺼냈으면 끝까지 진지해야지. 빠져나갈 구멍이나 만들고."
"사람이 솔직해야지. 괜한 말 했다가 친구 잃는 건 무섭거든."
조이는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 날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기가 남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찰 거야.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어색해질 필요 없어."
**
탁, 탁탁.
조이는 차를 마시며 괜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음을 이해해 줬는지, 조이의 행동이 워낙 티가 나서 그랬는지 앞에 앉아있던 마리아가 먼저 물었다.
"할 말 있는 거죠? 점심 같이 먹을 때도 제 질문에 대답만 하고, 지금은 아예 말도 안 하고. 너무 티 나요."
마리아의 말에 조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이는 어제부터 김도운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하며 가장 먼저 마리아를 떠올렸다.
마리아가 김도운에 대해 직접 얘기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이는 마리아를 인간적으로 정말 좋아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안고 끙끙대기보다는 직접 얘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마리아를 앞에 두니 말을 언제 꺼내야 할지 몰라 이 지경까지 왔다.
마리아가 말했다.
"괜찮으니까 얘기해 주세요. 무슨 얘기인지는 대충 짐작 가거든요."
그 말에 조이는 마리아를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두 눈동자는 평온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조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도운이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역시 그렇네요. 잘됐어요. 정말."
조이는 마리아의 얼굴을 계속 살폈다. 말은 태연하게 해도 표정은 쉽게 감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리아의 표정은··· 진심으로 축하하는 얼굴이었다.
마리아가 말했다.
"저 사실 작년 즈음에 단장님 포기했어요. 옆에서 계속 두 분을 지켜봤는데··· 도저히 두 분 같은 관계는 못 되겠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요···?"
"네, 그래서 두 분이 이렇게 될 거 알았어요."
마리아의 한치 흔들림 없는 말에 조이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다행이다. 마리아랑 어색해질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마리아가 살짝 눈을 찌푸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해요. 저는 동료로서 친구로서 두 분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런 거 가지고 어색해질 리가 없잖아요? 아직 마음이 남아있었어도 진심으로 기뻐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사실 저 요즘 만나기 시작한 남자 있어요. 단장님만큼이나 매력 있는 사람이에요."
"잘됐네요!"
"이쪽 일 하면서 만난 방송업계 사람인데요···."
자연스럽게 수다가 시작됐다. 마리아는 만난 지 3개월 정도 됐다는 남자 얘길 열심히 했고, 조이는 열심히 들었다.
그렇게 슬슬 사무실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마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조이, 부케는 제 거예요. 알겠죠?"
"당연하죠."
"그럼 슬슬 가볼까요?"
"네."
둘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에서 나온 후, 마리아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두 분이 다시 만나고 어색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다시 맺어지다니··· 단장님이 오고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게 느껴지네요."
조이도 공감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승전에서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어요."
"감독님이 그런 편지를 썼는데 당연히 선수들이 잘해줄걸요? 팬들도 평소보다 두 배로 응원할 거고요."
"그러고 보니 그렇겠네요. 아, 업로드는 언제 할 거예요?"
멀리 독일까지 원정 응원을 와줄 팬들에게는 아주 비싼 종이로 인쇄한 편지를 경기장 입구에서 직접 배부해줄 계획이었다.
그리고 편지를 인터넷에 업로드하는 건 마리아의 팀에서 맡기로 했다.
"경기 전날에 하기로 했어요. 잭슨 감독님의 짧은 인터뷰도 함께요."
**
"할리, 방금 구단 SNS에 올라온 거 봤어?"
"응? 뭐 올라왔어?"
로드의 물음에 라커 앞에 앉아 신발 끈을 풀고 있던 할리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할리 옆에 앉았다. 할리는 신발 끈을 마저 풀고 로드가 내민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했다.
내일 열릴 결승전을 앞두고 뮌헨의 훈련장에서 마지막 훈련을 마친 다른 선수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잭슨이 쓴 편지?"
"응, 읽어봐."
로드의 재촉에 할리는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노팅엄의 모두에게>
안녕하세요, 노팅엄 여러분.
노팅엄 FC의 늙은 감독 잭슨 포터입니다.
저는 방금까지 이번 주 토요일에 있을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준비했습니다.
불과 5년 전에 스페인 3부 리그에서 해고됐던 60세의 무능한 감독이었던 제가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은퇴를 권유했고, 저를 찾는 3부 리그 이상의 구단은 없었습니다. 저 또한 선수들·코치들·보드진과의 수많은 다툼을 떠올리며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틀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독직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제게 먼저 제안을 해준, 잉글랜드 4부리그··· 그곳에서도 최하위였던 노팅엄 FC의 단장을 만나본 후에 말입니다.
그리고 김도운 단장님을 만나며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아직도 단장님이 했던 말들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6년 뒤에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하고, 10년 안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목표입니다.'
'저는 감독님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원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잭슨, 예순이면 젊어요. 알렉스 퍼거슨, 마르첼로 리피도 일흔 살까지 일했는걸요.'
'은퇴는 절대 안 됩니다. 잭슨은 축구계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함께 전설을 만들어 봅시다.'
등등.
김도운 단장님은 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저는 김도운 단장의 꿈같은 말에 마음이 끌려 노팅엄의 훈련장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로드, 할리, 라이언이라는 빛나는 원석들을 발견하고, 노팅엄과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적어도 3부 리그는 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5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눈앞에 두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노팅엄은 제가 부임할 당시만 해도 무너져가는 구단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리시즌에 들어서며 많은 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김도운 단장님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 많은 팬을 돌아오게 하고, 새로 끌어왔습니다. 5부 리그까지 강등돼도 남아서 끝까지 노팅엄을 응원해준 서포터즈들을 중심으로 응원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필드 위에서 그 변화를 지켜봤습니다.
팬들이 늘수록 제 의욕도 올라갔고, 책임감도 커졌습니다.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들 의욕적으로 경기에 임했고, 첫 시즌부터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3부 리그에서 우승했을 때, 알렉산더를 위해 보여준 카드 섹션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세상 어느 팀이 선수 하나를 위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카드 섹션을 보는 순간, 노팅엄의 팬들을 진정으로 좋아할 수 있게 됐습니다.
2부 리그 시절에는 좌절하기도 했습니다.
언론들의 공격은 익숙했지만, 노팅엄 사람들이 절 싫어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김도운 단장님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직원들이 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돕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좌절을 딛고, 플레이오프를 통해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무려 28년 17일 만에 말이죠.
예순 살이 넘어서 성장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열정적인 팬들이 있고, 선수들은 승리를 늘 갈구하며 직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구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살면서 구단의 모든 구성원이 구단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이 구단의 일원인 것에 깊은 자부심을 느낍니다.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경기 시작 전에 노팅엄의 벤치에 앉아있으면 상대 팀 감독과 선수들의 얼굴이 굳어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다 팬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드레싱룸에서 막 나온 노팅엄의 선수들도 필드 위에만 올라오면 컨디션이 좋아지는 게 얼굴로 드러날 정도입니다.
이것도 팬들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노팅엄의 잔디를 밟는 순간, 노팅엄을 응원해주는 모두에게 힘을 받습니다.
이렇게 멋진 구단의 감독이라는 것에 저절로 자부심이 생겨날 정도로요.
그렇게 모두의 헌신이 몇 년간 모여 우리는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 FA컵 우승, 리그컵 우승이라는 멋진 성과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한 팀입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난 시즌 유럽 챔피언이자 이번 시즌 스페인 리그 챔피언입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크리스 앨런이라는 세계 최고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고, 그에 버금가는 선수들도 잔뜩 있습니다. 전설적인 감독 지네딘 지단은 선수 시절 그랬듯이 침착하고 아름답게 우리 노팅엄을 뚫어낼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
노팅엄이 레알 마드리드만큼 깊은 역사를 가진 팀은 아닙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가 그랬듯이 무수한 빅클럽들이 그랬듯이 노팅엄은 역사를 만드는 단계에 있습니다. 어떤 내용을 역사에 적을지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선수들은 이번 주 토요일에 여러분의 대표자로서 무시무시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새 역사를 쓰려고 합니다.
노팅엄의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노팅엄을 응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자기 자리에서 응원을 보내준다면 우리 코칭 스태프와 선수단은 그동안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걸 바칠 겁니다.
여러분이 이번 경기를 보고 몇십 년 동안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노팅엄이라는 팀이 어떤 팀인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증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잭슨 포터-
선수들이 대부분 편지를 읽고,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드레싱룸의 문을 열고 잭슨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전원이 들어왔다.
"자자, 다들 이게 이번 시즌 마지막 선수단 소집인 거 알고 있지? 평소보다 배는 집중해야 할 거다.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고 싶다면 말이지."
"···예! 보스!"
잭슨의 말에 선수들이 뒤늦게 답했다. 선수들의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잭슨은 선수들을 살피고, 의자 옆에 놓인 그들의 스마트폰을 살폈다. 그리고 왜 이런 반응이 나왔는지 깨달았다.
"뭐야, 다들 읽었나?"
"그렇습니다!"
평소보다 더 힘찬 대답에 잭슨은 씩 웃었다. 잭슨의 눈에는 눈가가 그렁그렁해진 선수들도 보였다.
잭슨이 그중 한 명에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할리, 질질 짜지 마라."
"···너무합니다. 보스."
잭슨은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드레싱룸을 한 바퀴 돌며 모든 선수와 눈을 한 번씩 마주쳤다. 내일 주전으로 출전할 선수들과 벤치에 앉을 선수들 모두를.
잭슨은 그렇게 한 바퀴를 다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모든 선수의 눈이 잭슨을 향했다.
"너희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세계 정상권의 선수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너희들이 모여 이룬 이 '팀'은 틀림없이 세계 최고다. 내가 확신한다."
선수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잭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이렇게나 진지하게 들어주는 선수들로만 이뤄진 선수단··· 잭슨은 그들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끼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 경기에서 지면 내 탓이다. 결승전이라고 떨 것 없이 너희들의 모든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희들과 이번 시즌을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로드를 시작으로 선수단이 합창했다.
잭슨은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징징거리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잭슨은 코칭스태프가 옆에 끌고 온 경기장이 그려진 화이트보드를 탁 소리 나게 치며 말했다.
"자, 낯부끄러운 말은 여기까지다. 다들 집중해라. 내일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줄 테니."
< 79. 출사표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