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에이스vs에이스(3)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박태오의 커브는 알고도 치지 못하는 공이다.
하지만 아무리 알고도 치지 못하는 커브를 던진다지만, 그 공을 자주 보게 되면 눈에 익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박태오는 타자들이 커브를 쉬이 칠 수 없게 다양한 구종과 섞어 던지는데, 그중에서 커브 다음으로 위력적인 공인 슬라이더가 경기 초반에 자주 등장했다.
-오늘 박태오 선수의 컨디션이 무척 좋은 것 같습니다. 경기 초반부터 슬라이더의 꺾이는 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3회 초의 두 번째 아웃을 잡아내는 박태오!
-오늘 경기 유일한 흠은 2회 초에 알렌 베이커에게 내준 볼넷을 제외하면 없는 것 같습니다.
-피칭이 정말 깔끔하네요.
-역시 국대 1선발입니다.
‘전형적인 정통파 투수.’
박태오가 조금 아쉬운 패스트볼을 갖추고도 좌완 파이어볼러처럼 공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여기가 한국 프로야구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의외로 제법 좋은 제구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피칭으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먹히지 않는다. 한국에서 145km/h의 공은 강속구이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평균 이하의 공이니까.’
그래서 최근에 박태오가 준비하고 있는 공이 체인지업과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박태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이 가진 패스트볼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슈우우욱! 따악!
-쳤습니다!
-하지만 그저 높게만 뜬 공!
-그대로 중견수가 자리를 잡고…. 그대로 글러브로 잡으면서 3회 초도 이렇게 끝이 납니다!
3회 초가 끝났다.
3이닝 동안 단 하나의 볼넷만 내주고 그 어떤 타자도 1루로 보내지 않은 박태오.
그가 주먹을 꽉 쥐며 대구 페가수스의 야수들과 함께 자신들의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정말 쉽지 않은 경기네…. 그런데 넌 왜 이런 경기만 하는 것 같냐? 상대가 대부분 그 팀의 1-2 선발급이잖아.
마운드로 올라가는 길.
강송구의 옆을 우다다 같이 네발로 따라붙은 우효가 의아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덕분에 다른 투수들이 상대 팀의 하위 선발을 상대해서 제법 쏠쏠히 승리를 거두고 있으니 나쁘지는 않지.’
지금은 완전히 망가진 내야진이 문제다.
2회 말에 나온 실책 하나.
삼루수로 오늘 경기에 나선 김상영이 어이없는 공을 놓치며 1루로 주자를 내보냈다.
다행히 다음 타자를 강송구가 깔끔히 잡으며 그렇게 이닝을 끝내고 마운드에서 내려왔지만….
‘만약 중요한 순간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무조건 1실점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겠지.’
마운드에 올라와 로진백을 들어 올리니 타석에 페가수스의 8번 타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졸 신인의 파릇함이 얼굴에 남아있는 것이 강송구의 눈에 들어왔다.
박진수가 사인을 보냈다.
몸쪽 코스의 싱커.
젊은 선수라면 배트를 휘두르고도 남을 코스로 싱커를 던져 범타를 유도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강송구의 생각은 달랐다.
절레.
고개를 흔든 강송구.
오히려 그가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으로 빠지는 초구 커브.’
그 사인에 고갤 끄덕인 박진수가 미트를 들어 올리며 걱정스럽게 강송구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지난 이닝에서 상영이가 저지른 실책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네.’
삼유간으로 범타를 유도해서 아웃을 잡는 것이 아닌 바깥쪽 코스로 공을 던지며 카운트를 쌓고 유인구로 삼진을 잡을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조금 빠지는 커브.
하지만 주심은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눈이 찌푸려진 타자.
강송구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박태오도 바깥쪽 코스로 커브를 던질 때 제법 낮은 공에도 스트라이크를 많이 받아냈지.’
그래서 몇몇 팬들은 ‘박태오존’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을 종종 댓글에 써놓기도 했다.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그런 존이 있기는 하지. 바깥쪽 낮은 코스에 커브를 던지면 유난히 후하게 잡아주는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강송구도 그 낮은 코스에 커브를 던지면 박태오처럼 스트라이크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커브를 던지기가 더 수월했다.
그리고 강송구의 커브가 페가수스의 타자들에게 더 위력적으로 보여지는 것도 이 바깥쪽 낮은 코스 덕분이었다.
그래서 몇몇 구단에서는 박태오를 상대할 때 커브를 잘 던지는 투수와 매치업을 시키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박태오만큼 능숙히 커브를 다루는 선수가 몇 없기에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일도 많았다.
-강송구 선수 삼진! 삼진!
-지난 2회 말에서 나온 삼루수의 실책만 아니었다면 단 한 명의 타자도 1루로 보내지 않았을 강송구 선수가 3회 말의 첫 아웃을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번 이닝도 기분 좋은 출발을 보여줍니다.
-오늘 경기…. 역시나 투수전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9번 타자와 승부.
강송구는 4구 만에 유격수 앞 땅볼로 타자를 잡아내며 순식간에 투아웃을 만들어냈다.
다시 타순은 돌아서 1번 타자 이운호의 타석.
이운호는 이번에 우타석에 들어섰다.
‘우타석에서 내 커브를 더 지켜볼 생각인가?’
강송구는 그런 이운호를 보며 덤덤히 고갤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운호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강송구에겐 또 다른 커브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슬슬 너클 커브를 꺼내 들어야겠군.’
이번 이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써먹으면 될 것 같았다. 커브와 함께 중간에 섞여 날아드는 너클 커브.
아마 페가수스의 타자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발레리나처럼 타석에서 시원하게 한 바퀴 돌 것이다.
* * *
너클 커브.
누군가는 이 ‘너클 커브’를 보고 회전이 없는 마구인 ‘너클볼’과 비교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너클 커브는 너클볼과 전혀 상관이 없는 공이다.
너클볼이 손가락의 관절(Knuckle)을 구부려 공을 찍어 회전을 안 주는 공이 바로 너클볼인데, 너클 커브는 이 너클볼과 일부 닮은 그립으로 던져서 붙은 이름이다.
그 움직임은 너클볼과 전혀 다르다.
손가락 관절로 찍어서 던지는 이 너클 커브는 각은 더 작지만, 더 빠르고 브레이킹이 강하게 걸린다.
덕분에 더 많은 회전이 걸리게 된다.
그 덕분에 커브의 단점이라고 볼 수 있는 ‘커브가 손을 빠져나갈 때 위로 솟구치는 움직임’을 없앨 수 있다.
그래서 2010년대 후반부터 유행을 타서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는 구종이 되었다.
종종 ‘너클’ 커브란 이름 덕분에 생기는 혼동을 막기 위해서 ‘스파이크 커브’라고 부르자는 이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이미 너클 커브라는 붙은 이름이 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너클 커브를 던지는 투수가 한국에도 제법 있었는데, 한국 선수로는 정찬헌, 채병용, 장민재 선수가 너클 커브로 제법 재미를 많이 본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하고 너클 커브를 던지는 선수는 의외로 많지 않았다.
던지더라도 대부분은 외국인 용병들만 던지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전통적인 커브를 익히는 추세였다.
이유는 모른다.
4회 초.
박태오가 마지막 타자를 잡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강송구가 던진 커브가 신경 쓰였는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박태오의 커브가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떨어졌다.
그만큼 커브를 많이 던지기도 했다.
-널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은데?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그렇군.’
우효의 말처럼 박태오는 지금 강송구가 던지는 커브를 제법 의식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전반기 동안에 보여준 퍼포먼스도 그렇지만, 국내에서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커브를 던지는 선수는 강송구가 처음일 것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커브, 그 환상적인 커브를 던질 수 있는 새로운 선수가 생긴 것이다.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런 박태오를 잠깐 바라본 강송구가 더그아웃에서 포수 장비를 입고 있는 박진수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왜? 혹시 사인을 바꾸자고?”
“아뇨. 4회 말부터 너클 커브를 꺼내야 할 것 같습니다.”
불펜에서 본 강송구의 너클 커브는 일품이었다.
지금 바로 꺼내써도 이상할 것이 없는 공.
“그래, 그렇게 하자.”
강송구의 말에 박진수고 고갤 끄덕였다.
이윽고 찾아온 4회 말.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가는 박태오가 승부욕에 활활 타는 눈으로 강송구를 잠깐 바라보다가 페가수스의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데?
우효가 히히 웃으며 강송구를 놀렸다.
“귤 이주일”
-히익!
그리고 강송구는 가볍게 응징을 해주었다.
이번 이닝은 2-3-4로 이어지는 타선.
타석에는 페가수스의 2번 타자 김강일이 들어섰다.
첫 번째 타석에서는 강송구가 던진 컷 패스트볼에 허무하게 아웃을 헌납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타격 자세를 잡았다.
초구는 몸쪽 컷 패스트볼.
슈우우욱! 펑!
“볼!”
하지만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김강일이 배트를 내밀지 않고 참았다.
이어지는 공은 좌타자 바깥으로 빠지는 싱커.
이건 김강일도 참을 수 없었다. 바깥쪽 코스에 정직히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홈플레이트 근처에 와서 급격히 도망가는 싱커에 김강일이 식겁해서 배트를 억지로 멈췄다.
“스트라이크!”
하프스윙을 했다는 삼루심의 판단.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외쳤다.
굳은 표정의 김강일.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박진수와 강송구는 빠르게 사인을 교환하고 타자를 몰아붙였다.
슈우우욱! 펑!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3구째는 좌타자 바깥에 걸치는 백도어 커브.
절묘히 바깥쪽 낮은 코스에 들어간 공을 보고 김강일이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갤 흔들었다.
‘다시 커브.’
박진수의 사인에 강송구가 고갤 끄덕였다.
이번에는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커브였다.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자를 깔끔히 잡아낸 강송구.
바닥까지 떨어진 커브에 김강일이 너무나 허무히 삼진을 허용하고 타석에서 물러났다.
이어지는 다음 타자와 승부.
페가수스의 3번 타자 송강혁.
‘앞선 타석에서는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잡았었지.’
박진수가 사인을 슥 보내자 강송구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갤 끄덕이고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초구는 바깥쪽 패스트볼.
따악!
“파울!”
조금만 깊게 들어갔으면 안타가 나왔을 타구에 대구까지 찾아온 호크스의 원정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몰렸어도 큰 타구가 나왔을 공이었습니다.
-이런 패스트볼이 강송구 선수의 약점이기는 합니다만…. 역시 제구가 좋아서 그런가 좋은 타구가 나오지를 않네요.
-맞습니다. 조금만 강송구 선수의 제구가 흐트러지거나, 송강혁 선수가 힘이 좋은 타자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겁니다.
2구째도 바깥쪽.
이번에는 바깥으로 빠지는 컷 패스트볼이었다.
“볼!”
하지만 제법 빠지는 공.
3구째는 몸쪽 낮은 코스의 싱커.
우타자인 송강혁이 쉬이 배트를 내밀 수 없는 공.
“볼!”
하지만 이번에도 살짝 빠지는 공이었다.
박진수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힐끗 송강혁을 살피고는 바깥쪽 커브 사인을 냈다.
부우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깊게 떨어지는 바깥쪽 코스의 커브.
송강혁이 강송구의 커브 궤적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배트를 휘둘렀지만, 투수가 던진 커브의 궤적이 송강혁이 생각한 궤적보다 더 크게 떨어졌다.
당연히 헛스윙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운트는 2-2의 상황.
5구째.
강송구가 먼저 너클 커브 사인을 보냈다.
바깥쪽에 정확히 걸치는 코스.
박진수가 그 사인을 보고 고갤 끄덕였다.
그가 미트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숨을 길게 내뱉는 강송구.
그가 너클 커브 그립을 쥐었다.
‘스나이퍼.’
그리고 스킬도 사용했다.
빠르게 팔을 휘두른 강송구.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슈우우우욱!
송강혁은 짧은 시간에 투수의 손에서 빠지는 공이 붕 뜨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커브 궤적을 머리에서 지웠다.
‘패스트볼 계열의 공이다.’
그에 맞춰 빠르게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공은 빠르게 다가온 뒤에 그가 생각하지도 못하는 각도로 빠른 회전을 하며 떨어졌다.
‘어?’
송강혁의 배트를 도망친 공.
그 공이 정확히 박진수의 미트에 틀어박혔다.
펑!
“스-윙! 스트라이크 아우우웃!”
예상치 못한 공을 본 송강혁이 상당히 굳은 표정으로 잠깐 타석에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공이지?’
페가수스의 더그아웃도 제법 시끄러웠다.
“무슨 공이야?”
“종 슬라이더인가?”
“그렇기에는 궤적이 좀 달랐는데?”
소란스러운 페가수스의 선수들.
그 사이에서 박태오가 두 눈을 반짝였다.
‘너클 커브다!’
그의 시선이 마운드의 투수에게로 향했다. 4회 말의 두 번째 아웃을 너클 커브로 깔끔히 잡아냈음에도 그저 덤덤히 고갤 끄덕일 뿐인 강송구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