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바깥 양반! 제발 안으로 공 좀 던져!(2)
고슴도치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지역에서 제법 알아주는 부자들로 매일 사과 한 조각과 포도 두 알은 먹을 수 있는 고슴도치들 사이에서 제법 뛰어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 도너 어서 오고!”
“땡칠이! 이야! 오랜만이잖아!”
“하하하! 소닉이! 가시가 완전 윤이 나는데?”
그들은 서로 웃으며 이번 파티를 즐겼다.
테이블에는 사과 조각들과 포도알들이 널렸고, 체리, 말린 무화과, 말린 바나나가 즐비했다.
그리고 환히 웃고 있는 고슴도치들 사이에서 가시가 조금 빠진 비루한 고슴도치 한 마리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땡칠이라는 고슴도치가 그 고슴도치를 보고는 놀랐다.
“뭐야? 자네 우효 아닌가?”
“어…. 어 땡칠이 오랜만이구먼.”
“어떻게 된 거야? 가시가 왜 그렇게 부실해?”
“아….”
우효는 대답할 수 없었다.
노후자금을 모두 날린 우효에게 이런 파티는 사치였으니까. 그리고 모두 우효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로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우효 저 친구 플레이어에게 노후자금을 모두 탕진 당했다더군.”
“뭐? 플레이어에게 노후자금을 탕진 당하는 멍청한 놈이 있었어? 그게 우효라고? 우리 도우미 사관학교 최우수 생도였잖아. 예전에는 하루에 사과 두 조각과 포도 세 알을 먹는 이 지역 최고 부자라고 미미가 사랑 고백도 했던 친구였는데….”
“쯧쯧쯧 이래서 고슴도치 인생은 모르는 법이라고. 누가 우효 저 친구가 저렇게 될지 알았겠나?”
“그것보다 조금 웃기는군. 요즘 누가 플레이어에게 노후자금을 다 탕진 당해서 저렇게 파산을 하지? 그리고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잘도 이 파티에 나오는군.”
“푸흐흐흣. 그러니까 말이야.”
“놔둬. 이제 이런 고급 과일들을 입에 넣지도 못할 친구인데…. 킥킥킥”
우효가 그런 고슴도치들의 조롱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강송구에게 모든 재산을 탕진 당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우효는 고개를 푹 숙이고 테이블 위에 있는 말린 무화과를 천천히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이제 오늘이 아니면 이런 과일을 쉬이 먹을 수 없다.
그렇기에 최대한 입에 쑤셔넣었다.
그럴수록 다른 고슴도치들의 차가운 시선이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 우효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우효씨.”
“아…. 미미.”
예전에 우효를 따라다닌 도우미 사관학교 최고의 암컷 고슴도치인 미미였다.
미미는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우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빈털터리인 우효는 예전처럼 자신 있게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랜만이네….”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날 조롱하려고 온 거야?”
그녀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효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미미는 고갤 흔들었다.
“아니에요.”
“뭐?”
“우효씨! 전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요.”
“미…. 미미!”
우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때 갑자기 세상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우효는 크게 당황했다.
“뭐…. 뭐야? 왜 이래?”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우효는 현실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강송구를 확인했다.
그래, 우효는 모태솔로였다.
그렇기에 고백을 받거나 고백을 한 기억이 없기에 어색한 부분을 바로 파악하고 꿈에서 깬 것이다.
그리고 우효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아, 씨펄 꿈.
* * *
톰 글래빈.
그렉 매덕스와 존 스몰츠.
두 거물과 함께 애틀랜타의 전성기를 이끈 선발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선수다.
그리고 그가 유명한 이유는 느린 구속을 두고 끈질긴 바깥쪽 승부와 심판을 가지고 논 뛰어난 제구력 덕분이었다.
우타, 좌타 가릴 것이 없이 그는 타자와의 바깥쪽 승부를 집요하게 가져갔는데.
존 바깥쪽에 공을 걸치게 던지거나 더 빼는 방식으로 주심의 눈을 속이고, 나중에는 존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존을 넘나드는 피칭으로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면서 좋은 성적을 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심판을 자기가 만든 존에 맞추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1회에 안타나 홈런이 많고, 볼넷도 상당히 많이 내어주는 스타일이었다.
[톰 글래빈의 바깥쪽]
-종류: 특성
-효과: 포심 패스트볼과 체인지업을 바깥쪽 코스로 던질 때, 제구력의 보정을 받습니다.
-바깥쪽 코스로 공을 던질 시 주심이 당신의 제구력에 속아 존을 넓힐 확률이 조금 늘어납니다.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 파악이 빨라집니다.
[특성 퀘스트 목록]
-타자가 짜증을 내며 무릎으로 배트를 부러트리는 것을 3번 목격하기 (0/3)
-바깥쪽 코스로 삼진 200개 잡기 (0/200)
-1회에 볼넷 3개 내어주고 무실점으로 틀어막기 (0/1)
[특성 퀘스트 보상]
-특성의 효과 상승. (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모든 구종이 특성의 효과를 받음)
그리고 그런 톰 글래빈의 능력을 얻었다.
단순한 특성이지만, 강송구는 이 특성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펜에서 잠깐 공을 던져본 강송구.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바깥쪽 코스로 던지는 패스트볼이나 체인지업은 이제 공 반개 사이까지 컨트롤이 가능하다.’
이번 부산 원정.
강송구는 이 능력을 잘 활용하면 좋은 기록을 하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바깥쪽 코스의 제구력이 좋아진 것뿐이지만…. 나에겐 새로운 무기가 하나 쥐어진 것과 같다.’
자신 있었다.
부산 티탄즈의 타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타석에서 물러나게 할 자신이 말이다.
* * *
부산 티탄즈.
항상 상당한 투자를 받으면서 최근 30년간 우승에 도달한 적이 없는 기이한 팀.
단일리그 기준으로 정규시즌 우승 0회.
한국시리즈 우승은 1984년과 1992년을 제외하면 2030년인 지금까지도 단 한 번의 우승도 없는 팀.
2012년 이후로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한 적이 없는 팀.
하지만 그런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팀의 인기는 계속해서 이어져서 한국 내 프로야구 인기구단 중 세 손가락에 뽑히는 정말로 이상한 팀.
그게 바로 부산 티탄즈라는 팀이었다.
화끈한 타격을 자랑하지만, 정말 화끈한 수비를 보여주며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태우는 멋진 야수들.
압도적인 안경 에이스는 있지만, 그 외에는 궤멸적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투수들.
메이저리그 출신의 단장과 감독을 데려왔지만, 구단 내 파벌 싸움에만 정신이 팔린 능력 없는 티탄즈 출신의 코치들.
그야말로 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득한 팀이었다.
강송구가 미안해서 준 샤인 머스캣과 말린 무화과를 잔뜩 입에 넣고 있는 우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이거 완전 예전의 호크스 아니야?
‘호크스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런가?
‘적어도 투수진은 쓸만했어.’
-뭐…. 그건 맞지.
우효가 고갤 끄덕였다.
벌써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 사직 야구장.
1차전은 서로의 하위선발끼리 붙는 경기였기에 부산 티탄즈의 팬들도 타격전이 될 거로 생각하며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오늘 경기장을 찾은 것 같았다.
쌔리라! 쌔리라! 부산의 이태홍!
쌔리라! 쌔리라! 부산의 이태홍!
그리고 티탄즈 홈팬들의 예상처럼 1차전은 극단적인 타격전으로 물들고 있었다.
2회 말부터 터진 만루 홈런이 시작이었다.
부산 티탄즈의 타격이 불을 뿜고.
그 뒤를 이어서 호크스도 투런 홈런과 솔로 홈런을 때리며 바짝 부산 티탄즈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과열되는 두 팀의 타선.
승패가 갈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팀의 타격도, 투수도 아닌 수비에서 나온 한 장면 때문이었다.
-아! 부산 티탄즈! 여기서 공을 놓쳤습니다!
-이건 큰 실수인데요! 역전 주자가 그대로 홈으로 들어왔어요! 심조운! 이런 공은 놓치면 안 됐었거든요? 그냥 아웃 가져가라고 준 내야 뜬공이에요!
-삼루수 심조운의 실수로 역전 주자가 홈으로 들어가면서 티탄즈가 13대12로 역전을 허용합니다.
그때부터 호크스는 불펜의 필승조를 모조리 꺼내 들면서 1차전의 확실한 승리를 가져왔다.
-결국! 호크스가 티탄즈를 잡아냅니다.
-1차전의 승자는 호크스! 분명히 불펜을 많이 소모했음에도 호크스는 기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2차전에 나오는 투수가 바로 호크스의 토종 에이스이자 이닝이터인 강송구 선수거든요!
경기가 허무하게 끝나고.
사직 구장을 찾은 팬들이 야유와 욕설을 내뱉으며 티탄즈의 선수들을 비난했다.
“느그가 프로가?”
“마! 다 쌔리고! 끄지라!”
“문디 자슥들…. 만다꼬 질질끌면서 시간끌읐나? 니들 그카이 게임 할그믄 다 치아뿌라!”
“엥가이 못해뿌네.”
“햄이 네들 지켜본다. 단디 해라!”
그만큼 지금 티탄즈의 경기력은 정말 처참했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도 내일 경기만큼은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할 것이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고픈 프로는 없으니까.’
강송구가 조용히 부산 티탄즈의 타선을 바라봤다.
광주 유니콘즈와 비교하면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타선이 화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누구보다 견적을 내기엔 편한 것이 부산 티탄즈의 타선이었다.
‘내일 경기. 완봉승을 노린다.’
강송구가 두 눈을 번뜩였다.
* * *
부산 티탄즈 원정 2차전.
벌써 사직 구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관중들이 오늘 경기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강송구가 과연 선동열 전 감독의 49.1이닝 연속 무실점 이닝이라는 대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찾은 야구팬도 꽤 되었다.
그리고 호크스의 불펜에서 강송구가 가볍게 공을 던지며 컨디션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로케이션을 바꿀 생각이야?”
“네.”
“괜찮겠어?”
갑자기 어제 자신과 감독님을 찾아와서 이번 경기만 자신이 주도해서 사인을 내고 싶다고 말하다니…. 평소의 강송구와 조금 다른 모습이어서 놀랐었다.
하지만 강송구는 확고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너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평소 강송구가 준 신뢰 덕에 이번 경기를 맡기겠다고는 했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고 국민의례를 끝내고 시구자가 마운드에 올라와서 시구하고 내려갔다.
1회 초의 마운드에는 부산 티탄즈의 팬들이 환장하는 안경을 쓴 토종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랐다.
우투수에 사이드암 투수.
140대 초중반의 포심 패스트볼과 하드 싱커를 섞어 던지며 우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
황규찬이 마운드에 올랐다.
부산 티탄즈가 사랑하는 토종 에이스답게 그는 삼진 하나를 섞어서 삼자범퇴로 1회 초를 끝냈다.
와아아아아!
사직 구장이 환호성으로 물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1회 말의 마운드에 오르는 강송구.
그를 보며 티탄즈의 홈팬들이 웅성거렸다.
“자가 갸가?”
“갸가 가다.”
“까리하게 생겼네.”
이윽고 강송구가 초구를 던졌다.
바깥쪽 걸치는 초구.
“볼!”
초구는 빠지는 공이었다.
138km/h의 포심 패스트볼.
부산 티탄즈의 리드오프인 박병철이 눈을 찌푸렸다.
‘별다를 건 없어 보이는데?’
강송구를 처음 만나는 그는 강송구의 패스트볼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포심 패스트볼은 많이 봐왔다.
그리고 이런 공을 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이윽고 두 번째 공이 날아들었다.
슈우우욱! 펑!
“볼!”
이번에는 빠지는 포심 패스트볼.
박병철이 타석에서 슬쩍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뭐지? 이렇게 제구력이 나쁜 투수였나?’
그건 아니었다. 강송구하면 생각나는 것이 다양한 구종과 제구력이었으니까.
‘오늘 컨디션이 영 아닌가?’
한 구는 더 지켜봐도 되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는 박병철. 하지만 3구째 이어진 공을 바깥쪽 코스에 살짝 걸치는 공이었다.
“스트라이크!”
“아….”
지켜봐야겠다고 하자마자 바깥쪽에 정확히 걸치는 공이 들어와 박병철이 당황했다.
하지만 다시금 던진 패스트볼이 존을 빠져나가는 코스로 들어가면서 다시금 볼 카운트가 올랐다.
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든 박병철.
‘그런데 이 투수…. 원래 이렇게 인터벌이 길고 바깥쪽 코스에만 공을 던지던 투수였나?’
하지만 강송구는 이미 주심과 대화를 끝냈다.
스트라이크 존의 경계를 알아낸 강송구.
그가 바로 5구째의 공을 던졌다.
강송구의 선택은 이번에도 포심 패스트볼.
그것도 아까 박병철에게 보여준 공보다 정확히 10km/h의 구속이 느린 127km/h의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스트라이크!”
“어?”
그제야 박병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까 스트라이크를 받은 공보다 공 반개가 빠지는 공인데…. 스트라이크라고?’
하지만 그런 의아함도 잠깐이었다. 박병철은 ‘주심이 오늘 바깥쪽 코스에 조금 후한 판정을 주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어떤 공을 노려야 할지 고민했다.
‘견적은 끝났다.’
오늘 주심의 바깥쪽 존을 파악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주심의 바깥쪽 존을 조금씩 넓히는 작업을 통해서 투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
강송구가 이번에도 바깥쪽 체인지업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고갤 끄덕인 박진수가 바깥쪽에 미트를 가져갔다.
이번에도 바깥쪽 코스였다.
아까보다 공의 절반 정도 빠지는 공.
초구에 볼을 잡아줬던 코스였다.
하지만 주심은 자신 있게 외쳤다.
“스트라이크 아웃!”
루킹 삼진.
조용히 공을 지켜보던 박병철.
그가 당혹감을 드러내며 주심을 바라봤다.
‘아까 볼을 잡아줬던 코스잖아요!’
하지만 박병철은 알 수 없었다.
집요하게 바깥쪽 코스에 공을 던진 강송구가 주심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