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한계는 없다!(3)
4회 초.
앙헬 풀리도가 마운드에 올랐다.
쉽지 않은 경기다.
예상은 했다.
라스베이거스는 작년 우승팀이고 올해 그 어떤 팀보다 정규시즌에 많은 승수를 쌓은 팀이었다.
거기다 그들의 에이스인 강송구는 정규시즌에 단 1점도 허용하지 않은 괴물 같은 투수였다.
그런 투수를 상대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긴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첫 타자를 상대로 가뿐히 아웃을 잡아낸 앙헬 풀리도가 다음 타자를 상대로 초구를 몸쪽으로 밀어 넣었다.
문제는 그 타자가 라스베이거스에서 가장 타격이 뛰어난 선수라는 점이 문제였다.
따악!
-쳤습니다!
-카디안 스타우트! 달립니다!
-그대로 1루를 지나서 2루까지! 2루까지! 2루까지!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카디안 스타우트의 2루타!
-깔끔한 안타였습니다.
‘쯧…….’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여기서 득점권까지 주자를 내보내다니.
하지만 앙헬 풀리도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는 자신의 구위를 믿었다.
다음 타자는 호세 피자로.
파워 하나만큼은 대단하지만, 타율은 고작 0.253인 타자이기에 그리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저 조심스럽게 승부하면 된다.
‘그것보다 퍼펙트가 깨졌군.’
아쉽기는 했다.
이내 승부에 집중하는 앙헬.
그가 초구부터 96마일의 포심을 던졌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초구를 조용히 지켜보는 호세 피자로.
이어지는 앙헬 풀리도의 피칭에 순식간에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까지 가며 타자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따악!
-높게 뜨는 공!
-그대로 잡아내는 코리 시거!
-내야 뜬공을 가뿐히 처리하면서 투 아웃!
-앙헬 풀리도가 카디안 스타우트에게 안타를 맞았음에도 흔들림 없는 피칭은 계속 이어나갑니다.
-확실히 안정감이 남다른 투수입니다.
이번 이닝의 마지막 타자가 될 수 있는 엘빈 하인리히가 덤덤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올해 스텟은 호세 피자로와 비슷한 수준.
타격폼을 바꾼 뒤로 외야 뜬공으로 많이 아웃을 당했지만, 그만큼의 홈런을 생산해 내며 라스베이거스의 승리에 많은 이바지를 한 4번 타자가 엘빈 하인리히였다.
초구부터 시원하게 돌아가는 배트.
공은 그대로 포수의 미트에 안착했다.
-초구는 헛스윙!
-앙헬 풀리도 선수의 컨디션이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공이 정말 날카롭습니다! 원하는 코스에 계속해서 들어가는 느낌이에요!
-말씀드리는 순간 2구째!
-다시 헛스윙! 이번에는 뚝 떨어지는 커브! 앙헬 풀리도가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좋지 않은 상황.
하지만 엘빈 하인리히의 눈은 달랐다.
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투수를 바라봤다.
이윽고 앙헬 풀리도의 위닝샷이 날아드는 순간.
엘빈 하인리히의 배트가 크게 휘둘러졌다.
빠아아악!
-큽니다! 큽니다!
-담장 앞까지! 담장 앞까지! 아니, 담장을! 담장을! 그대로 넘어갑니다! 호오오오옴런!
-엘빈 하인리히의 투런포!
-정규시즌에 42개의 홈런을 때린 엘빈 하인리히가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드디어 폭발합니다!
앙헬 풀리도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완벽에 가까운 체인지업이었다.
그런 공을 엘빈 하인리히가 제대로 때려냈다.
당연히 멘탈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은 아웃을 깔끔히 지워낸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러나 더그아웃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기 무섭게 그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fxxk!!’
큰 실수였다.
6이닝이나 7이닝을 소화하더라도 무실점으로 막아야 하는 게 오늘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방금 얻어맞은 투런포로 끝났다.
점수는 2 대 0으로 충분히 해볼 만하지만.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강송구였다.
이번 시즌 누구도 그에게서 점수를 빼앗은 적이 없다.
그야말로 미스터 제로에 어울리는 투수.
그런 투수를 상대로 2점 차이란 건 이미 경기를 지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래, 아무리 저 괴물이 정규시즌에 무실점 행진을 이어나갔어도 포스트시즌까지 그 기세를 이어나갈 수 없는 법이지. 무조건 무너진다. 무조건 무너질 거야.’
하지만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회 말.
마운드에 오른 강송구의 피칭은 더 굉장했으니까.
-이번에는 왼손입니다!
-우타자에겐 오른손으로! 좌타자에겐 왼손으로! 오늘 캉은 정말 많은 것을 준비해 온 것 같습니다.
-앞선 디비전시리즈 5차전에서의 흔들리는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 전혀 다른 투수가 마운드에 오른 것 같습니다.
-솔직히 5차전에서의 모습도 놀라운 수준이었거든요? 꾸역꾸역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는 모습을 보면서 이 투수를 상대로는 쉽게 1점을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시원하게 헛스윙 삼진!
-선두타자를 깔끔히 잡아내는 캉!
4회 말의 두 번째 타자인 에릭 커를 상대로 강송구가 글러브를 바꿔 끼며 오른손에 적절히 로진을 발랐다.
초구는 몸쪽 포심 패스트볼.
앞선 이닝에서 100마일을 보여주던 강송구는 지금은 98마일 근처의 구속을 유지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100마일의 포심을 꽂아 넣으며 볼티모어의 타자들을 쉽게 요리하고 있었다.
에릭 커는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쌓이자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마운드를 바라봤다.
‘도대체 저런 투수를 어떻게 공략하라는 거야?’
볼티모어도 화이트삭스처럼 저 괴물에 관한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이트삭스처럼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저 화이트삭스는 5차전에 강송구를 고꾸라트릴 기회를 얻었지만, 볼티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투수를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5차전과 전혀 다른 투수였다.
슈우우욱! 펑!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 위닝샷은 너크볼이었습니다!
-가끔 모두의 머릿속에서 잊힌 너클볼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자주 써먹는 게 캉입니다.
-아! 에릭 커가 허벅지로 배트를 부러트립니다! 화가 잔뜩 났어요! 그가 분노합니다!
에릭 커가 배트에 화풀이하며 타석을 빠져나가고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티모어에서 가장 뛰어난 타격 능력을 갖춘 타자.
올해 0.313의 타율을 때려내며 카디안 스타우트보다 더 높은 타율을 기록한 타자가 데이비드 코르테스였다.
‘장타력은 지난 시즌보다 덜한 수준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안타를 때려내는 능력은 뛰어난 타자다.’
강송구가 조던 델가도에게 사인을 보냈다.
초구부터 강하게 나가자고.
포수가 고갤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이윽고 시작된 승부.
강송구가 다시 손을 바꾸었다.
그의 왼손에서 초구가 날아들었다.
슈우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초구는 커터입니다.
-좌타자인 코르테스가 가장 싫어하는 구종이죠? 그만큼 커터를 상대로 데이비드 코르테스의 타율이 제법 낮은 편입니다.
-맞습니다. 커터를 주력으로 쓰는 투수에게 그리 높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죠.
-말씀드리는 순간 2구째는 바깥쪽 체인지업.
-좋은 공입니다. 코스도 상당히 좋았어요.
슈우우욱! 펑!
“볼!”
유인구를 지켜본 데이비드 코르테스가 깊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타격자세를 잡았다.
‘오늘 캉은 긁히는 날이다.’
그 어떤 날보다 확실하게 긁힌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오른손의 구속이 100마일이 절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심해야 했다.
저렇게 유인구를 던지다가.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아웃!”
그래, 이런 공이 날아드니까.
102마일의 포심이었다.
강송구의 오른손이 굉장한 만큼 오늘 그의 왼손도 평소보다 무시무시한 공을 던지고 있었다.
깔끔히 4회 말을 정리한 강송구.
그가 마운드를 내려갔다.
데이비드는 풋가드를 벗으며 힐끗 강송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곧 다가올 FA 시기의 행선지를 말이다.
* * *
조던 델가도는 생각했다.
오늘 경기가 너무 잘 풀린다고.
그럴수록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집중했다.
그만큼 오늘 경기는 중요한 경기였다.
상대 원정 첫 경기이고.
그들이 가진 최고의 투수가 마운드에 오른 경기니까.
그렇기에 무조건 승리해야 하는 경기였다.
다행히 경기의 흐름은 순조로웠다.
5회 말.
점수는 2 대 0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죽여주는군.’
그는 마운드에 올라선 거인을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인생 최고의 선택은 보스턴에서 라스베이거스로 팀을 옮긴 것이라고.
이윽고 그가 미트를 들어 올리기 무섭게 강송구의 오른손에서 빠르게 공이 날아들었다.
슈우우욱! 펑!
“스트라이크!”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 정확히 미트로 들어왔다.
포구할 맛이 나는 상황.
스트라이크 존 경계를 들락날락하는 90마일 후반의 포심이 타자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Fxxk!”
볼티모어의 타자들은 입에 절로 F-워드를 내뱉으며 마운드에 있는 투수를 증오스럽게 바라봤다.
조던은 생각했다.
‘또 좋은 시계 하나 늘어나겠구나.’
강송구에게 받은 롤렉스만 3개나 된다.
한 번은 시계 대신에 차를 선물 받기도 했다.
아무튼.
오늘 제대로 긁히는 강송구를 보며 조던 델가도가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반대로 볼티모어의 누군가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 빠져 이를 갈고 있었다.
‘왜 저 망할 동양인을 무너트리지 못하는 거야! 왜? 내가 만든 위대한 팀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위대한 감독을 꿈꾸는 크리스 리차드.
그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원망 섞인 시선이 강송구에게 쏠렸다.
‘저놈에게 한계란 없는 건가?’
도무지 무너질 생각을 하지 않는 상대 투수를 보며 크리스 리차드 감독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예전과 달리 스트레스로 굵기가 얇아진 머리카락은 그의 성질에 쉽사리 뽑혀나갔다.
점점 비어가는 정수리만큼 강송구가 시원하게 아웃을 따내며 이닝을 깔끔히 지워 버렸다.
5이닝 동안 단 한 명의 타자도 출루하지 못했다.
크리스 리차드 감독이 급히 벤치코치를 찾았다.
“이봐! 저 망할 동양놈의 약점이 진짜 없는 거야?”
“전력분석팀에서 보내준 건 이게 끝입니다.”
“그게 말이 돼? 정규시즌에 약 240이닝을 던진 투수의 작은 버릇하나 못 발견했다고?”
크리스 리차드 감독이 성질을 부리는 것을 벤치코치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는 속으로 열심히 주먹 감자를 만들고 있었지만, 크리스 리차드 감독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6회 초.
볼티모어의 에이스.
앙헬 풀리도가 3명의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다시금 기세를 끌어올렸다.
“커모오오온!”
팀의 에이스가 저렇게 힘을 내는데 어찌 타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타자들의 두 눈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이어진 6회 말의 공격.
볼티모어는 강송구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자를 삼진을 잡아낸 강송구는 연이어 6회 말의 남은 타자도 삼진으로 잡아냈다.
-6회 말의 마지막 타자까지 삼진으로 잡아낸 캉!
-오늘 정말로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아직 단 한 명의 타자로 출루를 시킨 적이 없는 캉에게 남은 이닝은 이제 단 3이닝뿐.
중계진이 조심스럽게 대기록을 언급했다.
물론, 라스베이거스의 더그아웃은 덤덤했다.
“또 퍼펙트야?”
“캉이니까.”
“예전에는 캉이 퍼펙트만 하려 하면 심장이 두근거렸는데……. 이제는 이상하게 당연한 것처럼 돼버렸다니까?”
“매 시즌 2번씩은 꼬박꼬박 기록해 주니까.”
“그렇긴 하지.”
“난 캉이 16삼진으로 퍼펙트를 잡아낸다는 것에 100달러.”
“난 18삼진에 200달러야.”
“17삼진에 300달러.”
“지금 삼진이 몇 개지?”
“13개.”
“최대 22개네.”
“나도 16개로 할래.”
그들은 이제 강송구가 퍼펙트를 기록하며 몇 개의 삼진을 만들어낼지에 관한 내용으로 내기를 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에 7회 초의 공격이 끝났다.
내기를 끝내고 필드로 나서는 선수들.
강송구도 조용히 벤치에 앉아 있다가 마운드로 향했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있던 랜디 에드워즈에게 말했다.
“캡틴, 저 친구들이 들어오면 제가 22삼진에 1000달러를 걸었다고 전해줘요.”
그 말을 듣고 랜디 에드워즈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도 22삼진에 3000달러를 걸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