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68화. 영웅은 칭송 받는다 (3)
언제 와도 압도되는 풍경이다.
“후우.”
숨을 가다듬었다.
위가 뻥 뚫린 대전은 휑하다. 하지만 하늘이 지나치게 가까워 눌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압도되는가?
아니다.
불경한 말이지만, 오딘께서 앉아 계신 왕좌보다 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날 움츠러들게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
위그드라실 맨 꼭대기에 앉아 내려다보는 그 수리의 눈빛은 세월을 헤아릴 수 없을 만치 깊었다. 그 검은 눈동자가 날 볼 때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든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는 감각이 있었다.
공포와 닮았지만 약간 다르다. 대체 무엇인가?
멍하니 있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오딘의 앞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오디슨!”
와락! 헬께서 날 껴안으셨다.
그 가냘프고 부드러운 몸에 어쩔 줄 몰랐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아… 헬이시여. 여긴 어찌……?”
오딘께서 하계를 내려다보시는 대전이다.
헬께서 여기에 있다니.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였다.
그녀는 내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셨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그 빌어먹을 미라 놈이 감히!”
까드득!
이를 악무시는 헬.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 손길에 헬이 흠칫 몸을 떠셨다. 하지만 나만큼 놀라진 않았으리라.
이게 무슨!
“아, 미안하오.”
“아니… 뭐… 괜찮아.”
헬께서 얼굴을 살짝 붉히셨다.
감히 여신의 얼굴에 손을 대다니!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에게 어떤 사과를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니플헤임의 상태는?”
“아, 음… 뭐 내가 거기에 있다고 빨리 나아지진 않으니까.”
“…흠, 그도 그렇지만…….”
조곤조곤 이야기가 오갔다.
묘한 분위기가 헬과 나 사이를 감쌌다.
머쓱한 이 분위기를 어째야 하나? 킥킥- 경박스러운 웃음이 들려왔다.
“아주 뜨겁네, 뜨거워. 킥킥.”
펜리르다.
그는 언제나처럼 검은 안경에 반들거리는 검은 재질 옷을 걸쳤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쑤셔 넣고 건들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헬께서 눈살을 구기셨다.
“펠.”
“…아니, 누이. 어릴 때 별명으로 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그보다 오디슨.”
펜리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무슨 일이지? 눈을 끔뻑였다.
나는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오딘께서 부르셨다는 말에 긴장했고, 언제나처럼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의 눈빛에 움츠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변에 신들이 꽤 있었다.
펜리르가 내게 어깨동무한다.
“브라기한테 연락이 왔더군.”
“아, 그건.”
“기획사를 통하지 않고 대뜸 약속하면 어쩌자는 거야? 응?”
광고 모데르 계약서에 분명 그런 내용도 있었던가?
깜빡 잊었다. 사과를 하려 할 때 펜리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뭐, 누이 얼굴을 봐서 그 정도는 봐주지.”
“…헬의?”
“그래, 저런 얼굴은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의 말에 헬을 바라보았다.
깜짝 놀랐다. 헬께서는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펜리르를 씹어 먹을 듯 이를 갈고 계셨다.
펜리르도 그 표정을 봤는지, 헛기침하며 슬쩍 떨어졌다.
다음은 티르였다.
“음.”
티르는 침음을 흘렸다. 나 역시 비슷했다.
이전 그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계에서 그토록 믿고 따르던 이라는 걸 생각하니, 좀 더 그랬다. 마치 내게 안겼던 처녀가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된 것을 본 기분이다.
티르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생했다. 이집트 놈들은 연맹법으로 처벌받을 게다. 그럼…….”
티르가 날 스쳐 지나갔다.
연맹법이라. 나쁘지 않다. 그는 언제나처럼 딱딱하기 그지없다.
이 와중에도 전쟁이 아닌 법을 입에 담는 결투의 신이라.
“…역시 전사가 섬길 신은 아니었나.”
홀로 중얼거릴 때, 내 앞에 그림자가 서렸다.
슬쩍 바라보니 토르셨다. 토르는 복잡한 표정을 하시며 팔뚝을 내미셨다.
나는 그 팔에 팔뚝을 부딪쳤다.
툭.
간단한 인사를 하시고서 토르께서 밖으로 나가셨다.
펜리르도 다르지 않았다. 어깨를 툭툭 치고 간다.
“그럼 촬영 전에 한 번 더 보자고.”
마지막으로 남은 건 헬. 그분께서는 후우- 한숨을 쉬시고 오딘을 일별하셨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셨다.
“이번 습격을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아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오.”
“그래, 그렇겠지. 니플헤임이 좀 정리되고 나면 초대할 테니까, 거절하지 말고.”
나는 씩 웃었다.
“초대해 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오. 엘류드니르의 밥은 맛있으니.”
“…만찬을 준비할게.”
헬께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시며 대전을 나가셨다. 그 뒷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이곳에는 이제 오딘만이 자리하실 뿐이다.
“가장 위대하신 분, 오딘이시여. 제가 바라던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찬란한 승리.
오딘께서 말씀하신다.
“그래, 승리. 그것이 진정 네가 바라던 것이더냐?”
고개를 끄덕이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야…….”
오딘께서 회색 외눈으로 날 보셨다. 그 눈빛이 꼭 내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사실이 그러리라.
오딘께서 내 영혼의 고통을 모르실 리가 없다.
영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영혼이 썩어가는구나.”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아픔을 어떻게 하면 달랠 수 있는지 모른다.
그저 오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날 구원하시길 바랄 뿐이다.
“훌륭하게 시험을 치렀으니 상을 내려야겠지.”
스윽, 오딘께서 궁니르를 잡으시고, 왕좌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내게 궁니르를 내미셨다. 간단한 동작에도 나는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땀이 주르륵 흘렀다.
내가 전사장 아저씨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 있다.
‘전사는 적의 무기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거야. 심지어 아군의 무기에도 말이야. 언제 누가 배신할지 모르는 거니까.’
그 말을 내 심장 깊숙이 새겼다.
어린아이가 나무로 깎은 창을 내밀어도 정색하고 쳐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오딘 앞이라 긴장의 끈을 놓았나? 아니다. 난 그 여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반응할 수 없었다.
오딘께서 내 목을 취하고자 하셨다면?
나는 이미 시체가 되어 있었으리라.
툭툭.
궁니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에게 축복과 이름을 내리겠다.”
오딘께서 말씀하시고 내게 이름을 내리셨다. 그 이름은 내가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내가 가장 총애하는 늑대여, 너의 이름은 프레키(Freki). 그 뜻은…….”
“굶주린 자.”
나도 모르게 대꾸했다.
오딘의 늑대, 게리와 프레키. 패배자의 영혼을 삼키는 늑대들이다.
그분께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프레키 오디슨. 너는 적의 영혼을 뜯어먹고 네 영혼을 불리리라.”
부르르 몸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다 못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감당하기 힘든 영광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을 내리겠다. 길고 긴 시험이 되겠지.”
“…하, 하명하십시오!”
감격으로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오딘의 뜻을 받들었다.
* * *
<프레키(Freki)>(1/1)
[패배자의 영혼을 일부 흡수하는 축복.]
<미스틸테인(Mistilteinn)>(0/1)
[단 한 번,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축복. 사용자 역시 반드시 죽는다.]
<미미스브룬느의 지혜>(0/0)
[세상을 비추는 거울, 물을 통해 온 세상의 지식을…….]
오딘은 펼쳐보고 있던 책자를 닫았다. 그 책자의 표지에는 ‘신계 연맹 축복일람’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온갖 제약이 신들을 옭아매는군.”
신계 연맹이라는 건 맹수의 입마개와 비슷하다. 평화를 위해 칼집에 자물쇠를 채우는 짓이다.
그로 인해 신계 간의 다툼이 줄었다. 그리고 신의 위엄 역시 줄었다.
통제된 위협은 공포가 아니다. 즐길 거리일 따름이다.
오딘은 이 상황이 그리 나쁘다 보지 않았다.
멸망을 늦추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멸망을 막고자 발호한 신계 연맹을 싫어할 리가.
이렇게 상호 간에 능력을 죄다 까발리는 것도 나쁜 건 아니다.
“올림포스 놈들이 그랬듯, 비장의 수 하나 정도는 모두 가지고 있으니…….”
딱- 오딘이 손가락을 튕기자, 책이 사라졌다.
그 책은 각 신계의 주신만이 가진 것. 신성과 직접 연결된 탓에 유출될 수 없는 책이다.
“…편법은 어디에나 있지.”
불안감을 툭 내뱉고, 오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침침해진 하늘이건만, 거대한 수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오딘이 그에게 말을 건다.
“이상하다 생각하시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대꾸하지 않는다.
오딘은 혼잣말을 이었다.
“적어도 오디슨은 이상하다 여기겠지. 이제 와서 갑자기 투기장에서 싸워 가며 조절법을 익히라 했으니 말이야.”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아도, 오디슨은 싸움을 찾아다니리라.
오딘의 아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싸움에 중독되어 목숨을 내던지는 걸 유흥으로 삼는 녀석이다.
오딘은 오디슨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내가 이제까지 겪은 운명에는 없던 놈이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운명의 수레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니… 이번에는 거기에 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라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
오딘이 어깨를 으쓱였다.
“투기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건 쉽지 않겠지. 에인헤랴르 대표가 된다는 것이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딘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응? 이번 시험을 이겨 낸다면 무슨 보상을 줄 거냐고? 킥킥킥…….”
미치광이 신은 자신의 망상 속에서 들은 질문에 홀로 웃었다.
한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다는 것은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거리였다.
그렇기에 제우스는 여색을 탐하며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그리고 원시천존은 방법을 찾는다며 도망쳤다.
이집트 신계의 왕, 호루스 역시 비슷하다.
그의 눈은 상반된 별명을 지녔다. 해의 눈, 그리고 달의 눈. 그는 한쪽 눈을 감고 잔다. 나머지 한쪽 눈으로는 언제나 세상을 살피며 전전긍긍한다.
오딘은 그게 아직 젊어서 할 수 있는 짓이라 여겼다.
‘호루스 놈도 나처럼 될지 모르겠군.’
구역질처럼 치밀던 광증이 가라앉았고, 오딘은 쓰게 웃었다.
부담이 그를 미치게 했다.
“…오디슨이 이번 시험을 이겨 낸다면…….”
왕좌에 등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며 다짐하듯 말했다.
“내 자리라도 못 줄 거야 없지.”
투기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승리.
오디슨이 최고의 자리를 얻어 낸다면?
그의 신성은 승리의 색을 띠게 되리라.
전쟁 뒤에 찾아올 광명.
그것이 승리로 바뀐다 한들 별반 차이는 없으리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오딘은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운명이 낙원에 닿길 바랐다.
* * *
눈이 부시다.
빌어먹을 놈들이 번쩍거리는 번갯불을 계속 내게 쪼였다.
온갖 질문들이 날아들었다.
“오디슨 님! 이번 니플헤임 습격 사건에 휘말리셨는데요, 대체 거기에 왜 가셨는지…….”
“담당 발키리와 열애설이 났는데…….”
“오디슨 님!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온갖 질문들 속에서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딱 하나였다.
마이크를 붙잡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질문을 던지던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뭐지? 눈을 꿈뻑이고 마이크에서 손을 뗐다.
“오디슨 님! 레이프 에릭손과의…….”
“대체 어떻게…….”
마이크를 잡았다.
침묵이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이 신기해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앉아 있던 이라호드가 내 옆구리를 쿡 쑤셨다. 그녀가 ‘장난치지 말아요’ 입 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마이크에 입을 댔다.
“투기장에서 싸울 거다.”
오딘께서 내리신 세 번째 시험.
힘을 얻었고, 그 힘을 쓰는 법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제 그 힘을 조절하는 법을 배울 차례라 하셨다.
‘투기장으로 가라. 마침 네 출장 정지도 끝이 났으니, 그곳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라. 그렇게 한다면, 무한한 영광이 너를 비추리.
무한한 영광?
사실 그다지 관심은 없다.
그저 쓰라린 영혼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승리가 필요했다.
나는 패배자의 영혼을 씹어 삼키는 늑대다.
더불어.
“전사는 싸워야 하는 법.”
그저 싸우고 싶기도 했다.
이라호드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찰칵, 찰칵! 재차 빌어먹을 번쩍임이 내 눈을 따갑게 만들었다.
“아.”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정리하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먼저 창부터 만들어야겠군. 아누비스인가 하는 개자식한테 좋은 물건을 얻어 왔으니.”
내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내 목소리에 놀랐고, 이라호드는 제 이마를 짚었다.
기사들이 온갖 질문을 내던졌다.
“아누비스라면 이집트 신계 소속 아닙니까?!”
“이집트 신계와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네?”
“어어, 이거… 전쟁 준비 중이라는 그 기사랑 이어지는 거 아냐?”
“그거 헛소리라고 밝혀지지 않았던가?”
온갖 목소리가 울렸다.
이라호드가 내 귀에 속삭였다.
“…티르 님께서 과로로 쓰러지실지도 모르겠네요.”
티르가 과로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쁜 기분도 아니다.
히죽 웃었다. 그 순간 또 찰칵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