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파괴 (2)
“까아악!”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알 게 무어더냐.”
후긴과 무닌의 걱정 섞인 울음에 오딘은 피식 웃었다.
대담하게 복면조차 하지 않고 하계로 뛰어든 오디슨의 부하들. 하계불가침 법을 걸고넘어지자면, 크게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약탈단에 속하기 전까지 용병을 했던 이들이 그걸 몰랐을까?
-찌꺼기다! 잡아!
-급하대서 일단 뛰어오긴 했는데… 괜찮은 거 맞지?
-당연하지 새꺄! 내가 용병 밥을 허투루 먹은 줄 아냐? 늬들한테 무시당해도, 단장은 단장이었어!
-거, 누가 뭐랬소? 성격이 그 지랄이니 무시를 하지, 칫.
-뭐? 으윽! 흐, 흔들린다! 밧줄, 밧줄!
거대한 찌꺼기의 몸에 매달린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오딘이 까마귀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하계불가침 법은 찌꺼기의 발생을 줄여 보고자 만들어진 법이다. 그 찌꺼기가 하계에 발을 디뎠을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지.”
스스로를 돌로 감싸 콜로소스가 된 찌꺼기는 마구 몸을 흔들었지만, 발할라의 전사들은 포기할 줄 몰랐다.
-크아아악! 이, 이이… 신의 애완동물이!
-지랄하네, 새끼! 폭탄 받아라!
콰르릉!
찌꺼기의 오른팔이 뚝 떨어져 굉음을 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찌꺼기가 마구 몸서리쳤지만, 찰싹 달라붙은 약탈단원들을 이기는 건 불가능.
거대한 찌꺼기가 발버둥 치며 무너진다.
“음, 폭탄은 좀…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나쁘지 않다.
-오딘을 위하여!
-오디슨, 이 새끼! 내가 시간외 근무 수당 받을 거야!
-크하하! 출장 수당도 추가해야지!
무너져 내리는 찌꺼기 위에서 약탈단원들이 버럭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네들이 언급한 오딘 탓인지, 도주하던 왕국의 전사들이 모두 함성을 내질렀다.
-오딘을 경배하라!
-그분께서 에인헤랴르를 보내셨다!
오딘이 씩 웃었다. 빛을 잃은 회색 눈에 비치는 광경이 흐뭇했다.
폭탄? 하계의 기술로는 아직 만들 수 없다? 그 모든 것은 신의 이름 앞에 정당화되었다.
-기적이다!
-맛이 어떠냐, 괴물 놈아! 신벌의 맛이 어떠냐고!
굳건한 신앙은 모두 오딘의 힘이 되리라.
멍한 하계의 여왕, 시그니료드가 라드게리타에게 물었다.
-오빠가……?
-그래, 오디슨이 보냈어. 전쟁이니 뭐니 해서 방송 스케줄이 없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방송 펑크였다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언니. 제가 신계의 사정에 밝지는 못해서…….
-아, 뭐… 그런 게 있어. 어쨌거나, 끝났네? 축하해, 시그니료드. 자랑스럽다. 네가… 제국을 무너뜨리다니.
라드게리타가 밝게 웃으며 시그니료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시그니료드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라드게리타가 한 말, 조금 전까지는 당연히 생각하고 있던, 가슴 벅찬 일이지만…….
-…그렇네요. 결국, 결국……. 이렇게 됐어요.
지금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남은 일은 많지만, 시그니료드는 명실상부 이 드넓은 땅의 주인이 되었다. 머리에 얹은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흐윽.
-뭐야, 왜 울어. 울지 마. 울지 말라니까……? 응? 흑.
시그니료드가 벅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아랑곳 않고 축하해 주던 라드게리타 역시 눈물을 보였다.
티 내지는 않았지만, 라드게리타의 마음에 깊게 남은 죽음의 흉터는 보통이 아니었다. 복수의 기쁨과 제 손으로 복수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시그니료드의 눈물에 자극받아 흘러내렸다.
두 여자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흐음.”
오딘은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저런 모습은 그에게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니까.
“까악!”
“…걱정할 것 없다.”
후긴과 무닌의 울음소리에 오딘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폭탄을 쓴 건 하계에서는 신화로 남을지 몰라도, 연맹에서는 물고 늘어질 거라고? 상관없다.
“연맹은 지금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까.”
그 말을 증명하듯, 뚜르르, 뚜르르- 전화벨이 울렸다. 연맹 의회에서 걸려 온 핫라인이다.
하지만 오딘은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협력자? 웃긴 소리지. 토벌하기 까다로운 악신(惡神)들과 타협한 자들의 말로일 따름이다.”
연맹의 끝은 머지않았다.
실권을 잃은 연맹은 곧 그 이름조차 잃어버리리라.
진정, 늑대의 시대에 어울리는 결과다.
“아래쪽은 충분히 봤으니, 이제 위쪽을 보자꾸나.”
오딘이 까마귀들을 쓰다듬으며 눈을 돌렸다.
그의 회색 눈에 무스펠헤임으로 진격하는 펜리르군이 보였다.
“허.”
몇십, 몇백 번이나 봐 온 광경이다.
“언제 봐도 멋지구나.”
멸망의 늑대가 자신의 창이 되는 것.
언제 봐도 기꺼운 모습이 그의 눈에 새겨졌다.
원래의 역사에서 펜리르를 묶지 않고 먹이로 길들였다면 어땠을까? 오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펜리르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문제가 있었으니…….’
오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은 없다.
실패한다면? 금화를 집어넣고 다시 새로운 시대를 이어 갈 뿐이다.
* * *
니플헤임에서 무스펠헤임으로 출진한 펜리르군. 그리고 무스펠헤임에서 니플헤임으로 행군 중이던 수르트군.
양군의 부딪힘은 필연이었다. 어느 누구도 적군을 맞이하여 당황하지 않았다.
“저 새끼들이 그 새끼들이지?”
“젠장할, 그날 퇴근하고 곧장 청혼할 예정이었는데……. 이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쉿!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펜리르군은 이미 수르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오디슨 약탈단의 보고 덕분이었다. 그 외 다른 약탈단의 보고는 없었다. 아니, 다른 약탈단이 귀환했다는 소식도 없었다.
“하, 젠장할……. 저 새끼들 때문에 약탈단 떡락, 실화냐?”
“미친놈, 약탈단에 투자를 했어? 돌았군.”
“누가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 알았나.”
“쯧쯧, 전쟁 끝나면 이핑그 강으로 가겠군.”
“참전 수당이 있으니까… 어떻게 되지 않을까?”
펜리르군은 수르트군을 얕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겨우 3천이 될까 말까 한 수르트군과 2만이 훌쩍 넘는 펜리르군. 전쟁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펜리르군에 속한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거인족은 겁도 없나?
수르트군의 의연한 대응.
“수르트 군단장이 말한 대로다!”
“전쟁, 전쟁이다! 아스가르드 놈들을 박살 내자!”
양군은 서로를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멈췄다. 니플헤임과 무스펠헤임이 만나는 안개벽을 뒤에 두고, 각 군단을 이끄는 군단장이 눈싸움을 벌였다.
레바테인을 어깨에 걸친 수르트가 히죽 웃었다.
“올 줄 알았다, 멸망의 늑대.”
“허! 그야 당연히 알았겠지, 등신 같은 놈. 니플헤임에서 출진하는 군단은 우리 군밖에 없으니까! 설마, 그 소리를 듣고 내가 ‘배신자가 있었다고?’ 하면서 깜짝 놀랄까?”
펜리르가 이죽거렸다.
수르트는 쯧쯧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저 하찮은 것들을 뭣 하러 끌고 왔는지 모르겠군. 멸망의 늑대라는 별명이 울 거다.”
“허, 재앙의 거인이 왜 이렇게 혓바닥이 길어? 엉?”
“흐흐흐, 그래. 그 말대로지.”
수르트가 레바테인을 꽉 쥐었다. 그리고 발뒤축으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것이 전쟁의 효시였다.
“아스가르드 놈들의 목을 뜯어내자!”
“크흐흐, 프레이야는 살려 두라고! 그 예쁜 것은 진상하기 좋으니까!”
두두두두두! 수르트군이 달렸다.
무스펠헤임의 뜨거운 열기처럼, 불꽃같은 진격이었다.
펜리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자! 거인족의 최후를 장식하라!”
아우우우우!
펜리르가 거대한 괴물 늑대로 변신해 바닥을 박찼다. 말에 올라탄 수르트보다도 더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늑대는 세상을 찢어발길 듯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은 무스펠헤임의 열기보다도 훨씬 뜨거웠다.
“가즈아아!”
“오늘이 바로, 거인 놈들의 제삿날이다!”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군단을 이끌고 펜리르와 수르트가 부딪쳤다.
수르트는 말 위에서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시뻘건 불길의 궤적을 그리며 레바테인이 펜리르에게 쇄도했다.
펜리르는 날렵하게 옆으로 뛰었다.
“크르릉!”
“흥! 네 날카로운 이빨로 재앙도 찢어 낼 수 있나 보자!”
콰아아앙!
레바테인이 부드럽게 휘어져 펜리르를 쫓았고, 펜리르는 앞발로 그 불덩이를 쳐냈다.
치이이익!
“크릉!”
“크하하하! 고기 익는 냄새가 나는구나!”
“컹! 이까짓 불똥으로 날 익히겠다고?”
펜리르가 펄쩍 뛰어 수르트의 목을 노렸다.
쏜살같은 공격에 수르트가 몸을 숙여 피했고, 다시 레바테인을 휘둘렀다.
쾅쾅쾅! 레바테인과 펜리르가 닿을 때마다 시뻘건 불이 일렁였고, 지독한 열기가 주위를 에워싼다.
“크흐……! 뜨, 뜨거워……!”
“젠장할! 저쪽 가까이도 가지 마! 익는다!”
펜리르군, 수르트군 따질 것 없이 양측 모두 대장들의 싸움에서 거리를 벌렸다. 끼어드는 순간 잿더미가 될 거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 부딪히는 것 외에도 할 일이 가득했다.
거인 기마병이 긴 할버드를 휘둘렀다.
“크어어억!”
할버드의 도끼날에 에인헤리가 닿을 때마다 그 몸뚱이가 뚝뚝 잘려 나갔다. 거인 기마병이 껄껄 웃었다.
“약해 빠졌다! 최후의 싸움을 위한 군대? 웃긴다!”
“젠장할! 에릭손이 죽었어!”
“저 개 같은 놈!”
붕붕붕!
할버드가 위협적으로 허공을 갈랐다. 그때마다 피와 비명이 주위를 채웠다. 하지만 그도 계속되지는 않았다.
푸욱! 히이이잉!
“어, 어어? 너, 넘어진다!”
“덮쳐!”
말을 노린 공격이 먹혔고, 말이 깜짝 놀라 제 주인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거인이 몸을 추스르기 전, 에인헤랴르가 덤벼들었다.
콰르릉!
“컥……!”
거인이 목을 부여잡았다. 목을 찌른 작고 날카로운 단검. 거인의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
“너, 너너……!”
“크흐, 이 야른시다 님의 <천둥소리>가 어떠냐!”
“쥐, 쥐새끼 같은 놈!”
거인이 손을 내뻗어 야른시다를 잡으려 했으나, 야른시다는 예전의 그 야른시다가 아니었다.
‘오디슨 놈에게 복수하기 전에는 당할 수 없다!’
야른시다의 몸이 마치 뱀처럼 부드럽게 손아귀를 피했다. 피하는 와중에도 그의 단검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서걱, 서걱!
“아악!”
“뭐 하는 거야! 덮치라고!”
야른시다가 거인의 팔뚝에 상처를 냈다.
목과 팔의 상처, 거인은 쓰라린 고통에 이를 갈았지만…….
푹푹푹푹!
“비, 비겁하다……!”
“지랄, 전쟁에 그런 게 어딨어?”
적은 야른시다 하나가 아니었다.
거인이 무수한 무기에 난도질되어 쓰러졌다.
“하하하! 잡았다!”
“젠장할, 이제 한 놈이야! 웃을 시간에 다른 놈을 잡으라고!”
“크어어어! 흐륑기르! 흐륑기르를 죽이다니!”
펜리르군과 수르트군은 호각지세였다.
숫자는 펜리르군이 더 많지만, 개개인의 강함은 수르트군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애당초, 인간과 거인은 1대1로 맞붙을 상대가 아니었다.
2만이 넘는 대병력과 부딪치면서도 거인족들이 겁먹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크아아아악!”
“죽어! 죽어! 죽어어어!”
싸움이 격해졌다.
바로 옆에 있는 전우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격전이었다.
하지만…….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울리는 굉음에 열렬히 싸우던 양군이 모두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튕겨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그림자의 정체는…….
“흐흐흐, 원래의 역사라고 했던가? 그 역사에서 프레이와 내가 동귀어진한다고? 그럴듯한 이야기다. 프레이 정도 되는 놈이 아니라면, 내게 맞설 수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킥킥, 웃음을 흘리는 이는 수르트였다.
끼잉- 펜리르가 부르르 떨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한 방 맞았는지, 입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렀다.
불길하게 윤기 나던 검은 털은 여기저기가 그을려, 불길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먼저 들 정도였다.
“으르릉…….”
펜리르는 말을 아끼고 이를 드러냈다.
뭐라도 걸리는 순간 찢어발길 것 같은 이빨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수르트는 피식 웃을 뿐.
“멸망은 천천히 다가오지.”
수르트가 레바테인을 짊어진 채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재앙은? 재앙은 어떻지? 눈치채지 못하게, 저항할 수 없도록 다가오는 것이다. 불에는 언제나 빛이 따르지. 내 르죄스(ljós, 빛)처럼.”
히이잉, 수르트의 애마, 르죄스가 울부짖었다.
“한 번, 한 번 걸리기만 하면……!”
그르릉- 펜리르가 중얼거렸다.
수르트가 피식 웃었다.
“느리기 짝이 없구나, 늪의 괴물이여. 그 어떤 늪도 빛을 빠트릴 수는 없다!”
그와 함께 번쩍- 르죄스가 달렸다.
처음의 돌격에서 르죄스의 속도를 아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펜리르는 움찔 몸을 떨었지만, 빛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죽어라, 멸망이여!”
레바테인이 화르륵- 주변 공기를 모조리 불살라 먹으며 덤벼들었다.
펜리르는 몸을 뒤틀었지만, 그를 피하는 건 무리였다.
“큭!”
펜리르가 이를 악물었다.
얻어맞고 다시 일어나는 것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춘다면, 수르트의 목을 확실하게 물어뜯을 수 있건만.
빛은 멈추지 않았다. 그 빛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아들을 너무 괴롭히는 거 아냐?”
빛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