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157화. 타락한 자들 (2)
불은 탈 만한 물건이 일정 온도 이상이 되었을 때 생겨나는 화학작용이다. 거기에는 탈 만한 것과 충분한 온도, 그리고 산소가 필수적이다.
요리에 있어서 불은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요리사인 이그나르는 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노라 자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허…….”
헛숨이 흘러나왔다.
이그나르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뜨, 뜨… 뜨겁지 않아……?
-추, 추워! 추워어어어!
-아아악, 내가, 내가 얼어붙는다!
불의 정령이 비명을 내질렀다.
샐러맨더를 탄 불의 정령들이 다른 이들을 독려했다.
-견뎌라! 견뎌! 지지 마라!
-아… 졸려…….
-눈 감는 순간 끝이다! 자지 마!
-이만하면 된 거 아닐까……?
불의 정령이 하나둘 고개를 숙인다. 온 세상을 태울 것처럼 일렁이던 불꽃은 이제 천천히 사그라드는 잔불이 되었다.
샐러맨더를 탄 지휘관급 불의 정령들은 그나마 버티고 있지만…….
-눈 뜨라고! 눈을… 어엇?
-키에에…….
불 도마뱀이라 해도 도마뱀이다. 오히려 다른 도마뱀들보다 온도에 민감하다. 날이 추워지면 동면에 들어가는 다른 도마뱀들보다 말이다.
샐러맨더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뿐.
화륵.
-어째서?
결국, 마지막 불의 정령까지 사라졌다.
수십, 아니 수백이던가? 불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많던 불의 정령이다.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그나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신성이니 권능이니 하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대단하다는 말로 끝낼 것이 아니었다.
이그나르가 침을 꿀꺽 삼켰다.
힐끗, 오디슨을 바라보았다.
‘괴물, 아니… 신이 되었어.’
신이 되었다는 건 진작 알았다. 하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서 그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새삼 오디슨이 새롭게 보였다.
“…온도를 낮춘 건가요?”
똑똑한 발키리 아가씨가 오디슨에게 물었다.
이그나르 역시 생각했던 바다. 검푸른 신성은 보기만 해도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으니까.
“아니다.”
오디슨이 고개를 저었다.
이그나르는 눈을 꿈뻑이고 물었다.
“그럼, 대체 뭐야? 분명히 서늘해진 거 같은데…….”
“그야, 불이 사그라들었으니 당연히 서늘해진 거 아닌가?”
오디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그나르는 그 웃음이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쓸데없이 잘생겨서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디슨이 흐흐- 웃음을 흘리며 으스댔다.
이그나르뿐만 아니라, 이라호드와 크레네, 토르손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오디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불쌍한 영혼을 아프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 말은?”
오디슨이 손아귀에 검푸른 신성을 일으켰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신성이다. 이그나르가 움찔 몸을 떨 때, 오디슨이 그 신성을 그에게 날렸다.
“으어억! 이게 무슨 짓이야, 새꺄!”
“오디슨! 뭐 하는 거예요!”
이그나르가 풀쩍 뛰며 놀라고, 크레네가 비명처럼 외쳤다.
오디슨이 씩 웃었다.
“축복이다.”
축복? 깜짝 놀라 풀쩍 뛰었던 이그나르가 눈을 끔뻑였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는데? 대체 무슨 축복? 떨떠름히 그를 보자니, 오디슨이 입을 열었다.
“지금 온도가 어떻지?”
웬 물음이란 말인가.
이그나르가 얼굴을 구기며 대꾸했다.
“온도? 온도는 무슨… 아무렇지도 않은… 어?”
이그나르의 눈에 다른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땀을 흘리는 모습이다. 불의 정령이 사라지고 서늘해진 느낌이 들었다고 하나, 여기는 무스펠헤임. 불의 땅이다.
대충 40~50도는 될 법한 온도.
“…안 덥잖아?”
이그나르가 중얼거렸다.
오디슨이 일행을 한번 둘러보며 으스댔다.
“이제 믿을 만한가? <지옥 불에도 변치 않는> 축복이다.”
오디슨의 별명이 그것이다.
지옥 불에도 변치 않는 붉은 마왕. 아레스의 용, 카드모스를 잡아내고 얻은 악명. 이전에는 그저 자신만을 감쌀 수 있는 권능이었다.
하지만…….
“그걸… 불의 정령들에게 쓴 거예요?”
“불쌍한 이들이지 않은가. 언제나 불타고 있다니.”
오디슨의 대꾸에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이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불을 둘러야 살아남을 수 있는 불의 정령들에게는? 지독한 저주다. 죽음에 이르는 저주.
이그나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냥 너 혼자 와도 되는 거 아니냐?”
“최소 인원이 다섯이더군.”
오디슨의 대답에 이그나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 없이 커다란 불의 정령 무리를 잡아냈다.
오디슨은 일행을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가자.”
그 말에 토 다는 일행은 없었다.
이전까지 수르트를 잡는 게 무모한 짓이라 여겼지만, 지금은 달랐다.
충분히 할 수 있다. 자신감이 차올랐다.
* * *
바다의 신, 뇨르드. 프레이와 프레이야 남매의 아버지로 유명한 신.
그 위명에 걸맞지 않게, 뇨르드는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어떻게…….”
벌써 한참이나 지났건만, 뇨르드의 중얼거림은 나아지질 않았다.
신은 인간보다 오래 산다. 그건 단순히 ‘오래 살 수 있다’가 아니다. 인간보다 훨씬 견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게 아집과 고집으로 엇나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적다.
인간처럼 혼란에 빠져 허우적댈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거의’라는 데에 있다.
“후우.”
한번 무너진 신은 그 충격을 견뎌 내기 어렵다.
뇨르드 역시 그랬다. 그렇기에 전쟁이 끝나고 거의 3달 동안 멍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
뇨르드가 눈을 꾹 감았다.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딘은…….’
까득,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골방 노인네가 될 수는 없었다.
뇨르드는 곧장 제 딸, 프레이야를 찾았다.
“…아버지.”
프레이야는 뇨르드를 보자마자 마법으로 차단막을 펼쳤다. 뇨르드가 내뱉을 소리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뇨르드가 말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이냐?”
“…오딘은 강해요, 아버지. 이번 전쟁만 봐도 그렇잖아요.”
“그렇기에 나서야 한다.”
프레이야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에요. 당장, 오딘의 눈을 가렸다고 해도 후긴과 무닌은 기억을 찾아낼 거예요.”
“…나도 안다. 그러니까…….”
뇨르드의 눈이 저 멀리 발할라로 향했다.
프레이야는 제 아버지의 이런 태도가 불안했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뇨르드도 바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딘의 눈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는 자를 만나야겠다.”
프레이야는 그만 포기하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빛 하나 없는 곳에 갇혀 있을 프레이를 생각하면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프레이야는 그저, 일이 잘되기만을 바랐다.
‘오딘이 오라버니를 가두지 않았더라면… 아니, 오라버니가 괜한 일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것도 아닌가.’
복잡하게 얽힌 감정 사이에서 프레이야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민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안다.
결국, 프레이야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모두를 잃지 않으려면.
* * *
짓지 않은 죄에도 벌이 내려지는가?
기본적으로 아스가르드가 속한 위그드라실은 신의 힘이 강하지만, 신의 명이라며 발할라에 사는 이들을 강제로 억압하지는 않는다.
찌꺼기 때문이다.
그 만약 때문에 하계 불가침이 생겨났으며, 그 만약 때문에 벌을 내리는 신들의 위세가 줄어들었다.
발할라도 그렇다. 신들에게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공평한 법이 있다.
그 법은 짓지 않은 죄에 대해 벌을 주는 걸 엄금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아니지.”
뇨르드가 중얼거렸다.
발할라는 황금의 도시다. 오딘 자체가 황금을 기반으로 마법을 부리다 보니, 황금을 긁어모으고자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황금은 그저 반짝이는 게 아니다. 황금에도 그림자가 있다.
짙고 짙은 그림자.
“…더럽군.”
지금 뇨르드가 자리한 이곳이 바로, 황금의 도시가 가진 그림자다. 빈민촌. 발할라 외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실패한 자들이 가득하다.
U500을 전전하다 불어나는 부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투사들, 그리고 사업에 실패해 빚을 진 자들, 마지막으로 범죄에 손을 대고 몰락한 자들.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의 별명은 ‘승강장’. 니플헤임의 망자로 추락할 이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 니플헤임을 운영하는 헬의 입장에서는 참 짜증 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헬이 이곳에 대해 안 뒤,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니플헤임의 추위 속에서 벌벌 떠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겁먹는다고 한 소리였다.
“…누구지?”
“몰라. 신경 쓸 거 있어?”
“없지.”
승강장의 주민들은 뇨르드를 보고도 슬쩍 눈치를 살피기만 했다. 실제로 다가오기에는 뇨르드에게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뇨르드는 흥- 콧소리를 내고 목적지로 향했다.
빈민굴인 ‘승강장’, 그 가장 깊은 어둠으로 향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허름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장소였다. 뇨르드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뇨르드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끔찍한 장소였다.
“…이런 곳에 신이 산다고……?”
그의 표정은 거인 왕국의 몰락 소식을 들을 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해할 수 없고, 있을 수도 없는 현실을 맞닥뜨린 당혹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뇨르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그 문을 열었다.
“계시오?”
끼이익, 쿵.
“어…….”
문이 떨어졌다.
짙은 어둠만이 가득한 실내는 뇨르드도 차마 발을 내딛기가 꺼려질 정도였다.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어둠.
뇨르드는 꿀꺽, 침을 삼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가 발길을 옮기려는 찰나…….
“뉘시오?”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뇨르드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으나, 이미 뇨르드는 어둠 속에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바다의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뇨르드는 움츠러들었다. 그가 말했다.
“나, 나는… 해신, 뇨르드요! 당신을 찾아왔소!”
“나를?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둠 속에서, 어디에서 들리는지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뇨르드의 귀를 때렸다. 뇨르드는 후우- 한숨을 쉬어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짓지 않은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자.”
대꾸는 없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값을 치르는 자.”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다.
“인과(因果)가 뒤틀린 복수를 피해 숨은 자.”
뇨르드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둠의 신, 회두르(Höður)여! 나 그대의 어둠 속에 감춰진 억울함을 풀어 주고자 여기에 왔소!”
원 역사에 기록되기를, 오딘의 후계자인 발두르를 죽인 자.
겨우살이를 쏘아 낸 자.
눈먼 신, 회두르가 작게 웃었다.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겠다고?”
“그렇소. 당신은 빛을 꺼릴 필요도, 복수의 칼날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소.”
뇨르드가 이어 말했다.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그 말에 어둠이 일렁였다.
마치 웃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