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 오브 발할라-193화 (193/208)

# 193

193화. 찌꺼기 (3)

나는 무수한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뭐가 첫 번째인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그 기억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실패로 향하는 길이었다.

‘비다르에게 축복받지 못한 내’가 있었다. 툴툴대는 이그나르가 그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무식한 짓거리 때려치우고, 그냥 평범하게 일하라니까? 꼴이 이게 뭐냐, 젠장할. 그냥 내 식당에서 일해! 제국 놈들이 와도 그러려니 하고 웃어.

발악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세상과 타협했다.

그 기억에서 나는 끝까지 이런저런 잡일을 전전했다.

아, ‘숯불 세흐림니르 구이’는 결국 험상궂은 이그나르의 인상 덕에 망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못 배운 건 아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재료를 다듬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 물건을 정리하는 법. 다양한 일을 배웠다.

그래 봐야 세계는 니플헤임 습격을 막아 내지 못한 채 찌꺼기의 하계 진출을 방치했다. 그로 인해 미드가르드 전체에 무신론이 떠돌았고, 신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그걸로 끝.

그 기억의 마지막은 아스가르드가 말라죽듯 천천히 멸망했다는 것.

“지랄 같군.”

툭 내뱉었다.

다른 기억이 머리를 채웠다.

‘비다르 클랜에 들어간 내’가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꽤 활약했다. 적어도 T100에 오를 만큼. 비다르 클랜의 차기 클랜장으로 지목되어 ‘피 맛보는’ 이바르 라그나르손과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탓에 헬과는 접점이 없었다.

역시나, 니플헤임 습격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싸울 상대가 중간계에 있다는 것만 해도 답이 없었다.

역시나 실패.

‘마르스의 후원을 받아들이는 내’가 있었고, ‘이그나르의 듀오 결성을 거절하는 내’가 있었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가 이어졌다.

한 발짝만 잘못 옮겨도 온갖 실패가 뒤를 따랐다.

“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토르손을 발할라로 데리고 온 기억이 있었고, 아닌 기억이 있었다. 토르손과 부족민을 잊고 살아가는 기억에서 나는 초췌한 꼴이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발할라에 있는 숱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모든 기억을 흡수했다.

“후우.”

눈물이 흘렀다.

슬픔보다는 분함이 앞섰다.

내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의 최후가 뇌에 낙인처럼 박혔다.

개중에서는 이번 삶에서는 깊게 엮인 바 없던 이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토르손이 알면 화내겠는걸.”

피식 웃었다.

잡일을 전전하던 나의 세계에서 내 아내는 메이니였다.

내 팬클럽을 만들고 꾸린 회장. 기억 속 그녀는 하계에서의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언제나 움츠러든 채였다. 나 역시 그녀에게 좋은 남편은 못 됐다.

-꺄아아악!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그녀가 비명 지르는 소리.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이 그것이다. 일거리가 없어 허름한 집에서 술을 들이켤 때, 나는 그녀에게 폭언을 쏟아 냈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기억이다.

“…나와는 안 맞는 여자였지.”

메이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와 지나치게 가까울 수 없는 여자였다. 나는 섬세하지 못해 그녀의 상처를 들쑤시기 일쑤였고, 그녀는 나를 거부하고 달아날 용기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입 안이 썼다. 메이니 다음으로 인상 깊은 것은…….

“프레이야.”

그녀의 꼬득임에 ‘세스룸니르로 넘어간 나’는 세스룸니르 최고의 투사가 되었다. 프레이야의 열렬한 후원에 힘입어 세스룸니르가 발할라의 마이너리그가 아닌 발할라와 어깨를 견줄 수준의 리그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오드, 오드……!

아름다운 그녀의 몸을 안는 기억이 가득했다.

절정에 달할 때, 프레이야는 늘 가출한 남편, 오드를 불렀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쩌겠나?

신도 아니고, 한낱 투사인 내가 프레이야에게 마음에 들지 않노라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 기억 속 아스가르드가 어떻게 멸망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걸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으니까.

발할라가 싸울 때 세스룸니르는 그저 관망했다.

그러다 세상이 멸망했다.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이번 생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군.”

쓰게 웃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그녀에게 새겨진 오드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었으리라. 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내게서 다른 남자를 찾는 여자.

그 관계가 쭉 이어진다는 게 우스운 일이다.

프레이야를 떠올리니 비너스에 대한 기억도 떠올랐다.

-감히 내 아내를 꼬드기다니!

마르스가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죽이는 기억이었다.

‘마르스의 후원을 받은 나’는 비너스와 눈이 맞아 그의 족쇄를 벗어나고자 애를 썼던 모양이다. 그 외에도 다양한 내가 비너스와 얽혔지만, 하나같이 좋은 결말은 없었다.

“쯧, 역시 인연이 아니었어.”

마지막, 비너스의 유언은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지만…….

그녀와 나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둘 모두에게 그리 좋지 않은 일이었다.

고개를 저었다.

시그뉘와 결혼을 하거나 판도라와 결혼하는 기억도 있었다.

신과 여왕의 결합은 축복 속에서 이뤄졌지만, 시그뉘는 평생을 외롭게 지내야만 했다. 판도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는 본래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 반신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신계 연맹은 그를 막았다.

신이 하계에 개입하는 일을 막으면서 이뤄진 조치다.

신계와 하계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 보니, 시그뉘나 판도라는 남편 없이 독수공방해야 했다. 내가 그녀들을 몇 번 만나지도 못했건만, 그녀들이 느끼는 시간은 달랐다.

쓴웃음이 나왔다.

“그 코찔찔이 시그뉘와 내가 결혼이라니.”

고개를 저었다.

사촌 간의 결혼이 나쁜 건 아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시그뉘가 코를 찔찔 흘리며 오빠, 오빠- 하고 따라붙을 때부터 봐 왔기 때문일까?

어째 소름이 돋았다.

남은 기억들은 헬과 이라호드, 크레네에 관한 것들.

억지로 외면해 온 기억이지만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파국이 정해진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이 기억들을 떨치기도 힘들었다.

-오디슨, 우리 도망갈래요?

크레네의 말이다.

그녀가 운영하던 ‘목욕탕에 취직한 나’의 기억. 장사는 별로 안 됐지만, 내 멀끔한 얼굴 탓인지 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크레네가 날 사랑하면서 벌어졌다. 그녀는 내가 손님을 받는 걸 싫어했고, 넵투누스와 마르스의 압박을 피하고자 했다.

우리는 달아났고, 넵투누스의 부하에게 잡혔다. 상어를 닮은 그 괴물에게 내가 잡아먹혔고, 크레네는 절망했다.

“후우.”

심장을 조르는 분노가 치밀었다.

크레네와 얽힌 기억 대부분이 그러했다.

우리는 실패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그녀에게 물을 다루는 기술을 배우기도 했고, 알콩달콩 살기도 했으나… 결국 파국이었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모두 되돌릴 수 있다.”

아득- 이를 악물었다.

다음은 이라호드에 관한 기억이었다.

크레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풍성한 기억이 나를 덮쳤다. 내가 이라호드를 크레네보다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이라호드가 내 발키리였기 때문이다.

“그 무수한 기억 속에서 단 한 번도, 이라호드가 내 담당 발키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니.”

어찌 보면 놀라운 일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랬나?”

나는 이라호드에게 유난히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가 미인이라서 혹은 그녀가 날 담당하는 발키리기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이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익숙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의 이라호드는 내게 너무나 익숙했다.

어떨 때는 틱틱거리고, 어떨 때는 부드럽게 웃으며, 늘상 나를 걱정했다.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결과들은 언제나 좋지 않았지만.

-오디슨…….

시구르드의 이야기처럼, 발키리가 사랑을 한다는 건 금기였다.

이번 역시 그랬나? 이번에는 내가 신이기에 그 금기가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쓰게 웃었다.

이라호드는 수감되었고, 나는 이라호드를 풀어 낼 방법을 찾고자 공을 세우려 애썼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끝은 영웅담이 아니었다.

무수히 실패했고, 어쩔 때엔 포기하기도 했다.

그 무수한 기억 속에서 이라호드는 한결같이 말했다.

-당신의 인생을 살아요, 오디슨.

나 같은 건 잊고.

으득- 이가 갈렸다. 이가 잇몸으로 파고들며 입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다시 그녀를 잃을 수는 없다.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헬.”

죽음의 여왕.

모든 기억이 이라호드와 얽혀 있었다면, 헬과 관련된 기억들은 모두 ‘이번의 나’와 비슷한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운명이에요.

피식 웃었다.

“운명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운명일지도. 그렇다면 나는 그 운명을 뒤틀어 버린 자를 죽이겠다.

다시금 다짐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오딘은 어째서?”

왜 이번 생의 나를 밀어줬지? 이전부터 나와 부딪힌 적이 많았는데?

기억 속에서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씨익 웃음이 나왔다.

“그렇군.”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알아챘다.

* * *

“…헉!”

놀라 벌떡 몸을 세웠다.

눈을 끔뻑였다.

“여긴…….”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생생한 감각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성공인가? 꿀꺽 침을 삼킬 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성공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발키리.”

“으응? 생각보다 안 놀라네요? 뭐… 그렇죠. 천사나 발키리나. 둘 중 편한 걸로 부르면 돼요.”

“그런가?”

익숙한 얼굴에 무심코 눈물을 흘릴 뻔했다. 하지만 아니다.

울 때가 아니라 웃을 때다.

빙그레 웃으며 내 발키리에게 말했다.

“천사처럼 예쁘군.”

움찔, 그녀가 몸을 떨었다.

황금을 녹여 놓은 듯한 머리카락과 천혜 절경을 보는 듯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이목구비.

그리고 시릴 듯한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에 당황이 서렸다.

어버버- 입술을 벙긋거린다.

“크, 크흐음!”

이라호드가 헛기침했다.

부끄러워하는 게 훤히 보인다.

“이, 일단! 당신의 담당 발키리는 저예요.”

“그런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라호드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전부예요? 보통 처음 발할라에 온 사람들은…….”

“왜 내가 ‘무한히 부활하는 멧돼지 다리를 뜯으며 헤이드룬의 젖에서 나온 벌꿀주를 들이켜며 발키리의 시중을 받는 게 아니냐’고 묻지 않느냐고?”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 세상에 그런 걸 묻다간 욕먹는다는 건 안다.”

“어, 어어어…….”

이라호드가 당황했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라호드와 떨어지긴 싫지만, 지금의 이라호드는 나를 모른다. 그러니…….

“일단은 좀 쉬고 싶군.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아, 그, 그렇네요!”

짝! 이라호드가 손뼉을 쳤다.

“그럼 저는… 딱 하나만 알려 드릴게요.”

“병원비는 자기 부담이라고?”

“어?”

눈을 끔뻑이는 이라호드.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의료보험이 안 돼서 아쉽기는 하군.”

“그, 그게… 어? 어떻게?”

어떻게? 그야, 무수히 많은 기억을 모조리 받아들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말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이라호드는 내 편이 아니라 발키리니까.

“더 할 말은 없나?”

“…그런 것 같은데요……. 혹시, 다른 신계라도 다녀오셨어요?”

“요즘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경력직 같은 신입을 구하는 게 요즘 세태 아닌가.”

어버버- 이라호드가 입을 벙긋거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 표정 뒤에 숨겨진 생각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저게 정상인가? 혹시 2회 차? 선배들한테 물어봐야지.

이라호드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으음, 그, 그럼 저는 이만…….”

이라호드가 떫은 감을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병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이대로 보내기엔 아쉬운데.

그녀를 불렀다.

“음? 무슨 일이죠?”

“카탈로그 안 주나?”

아! 이라호드가 탄성을 내뱉었다.

늘상 실수하는 부분이었다. 이라호드가 품에서 팸플릿을 꺼내 건넸다.

그러면서도 내 얼굴을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괜한 장난기 때문에 의심을 산 건가? 그래도 상관없다. 이라호드에게는 익숙하다.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그리 뚫어져라 보는 건 좀 부끄러운데.”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누, 누가…….”

“그럼 이만 가 보도록. 내일 다시 와라.”

이라호드가 무어라 말하려다, 허- 하고 헛숨을 토했다.

“뭐래 진짜!”

투덜거리면서 그녀가 병실을 나섰다.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나가지만, 그래도 내일 또 오겠지. 이라호드는 그런 여자니까.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 해도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럼…….

“오딘은 다른 세계로 올 때마다 날 잊는다.”

‘오딘과 비견될 대마법사였던 내’가 나에게 걸어 둔 마법 탓이다. 오딘에게서 날 숨기는 마법. 어찌 보면 간단한 마법이다. 오딘의 대마법에 슬그머니 섞여 들어가기에 절대 눈치챌 수 없는 마법이다.

몸도 버리고 세계도 버리고 가는 이의 쓰레기봉투에 슬그머니 작은 티끌 하나 섞어 놓는 게 어려울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 했다.

찌꺼기가 모여 가장 높으신 분을 잡아먹을 괴물이 된다.

작은 빈틈을 찌를 수 있는 최고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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