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롭고 평등한 신
예하는 거울 속에 있는 자신과 차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죄인처럼 어깨를 한껏 접고 거울 안을 흘끔흘끔 살폈다.
“…….”
벌집에 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뺀 것처럼 팅팅 부은 얼굴, 터진 콧등, 부르튼 입술, 핏발 선 눈알, 내내 묶여있어 시커멓게 죽어버린 손목, 여기저기 난자한 잇자국과 멍들. 그런 와중에도 피부는 윤이 났다.
다리 사이로 끈적한 애액이 흐른다. 예하가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하얀 점액질이 손바닥에 잔뜩 들러붙었다. 의미 없이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엉킨 액체가 예하를 올려다보며 킬킬 보기 싫게 웃었다.
쏴아아, 찬물을 틀었다. 거기다 손을 집어넣고 한참이나 있었다. 손가락 끝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서 있는 게 버거워 무릎이 후들후들 떨릴 때까지.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어째 약물에 젖어있었음에도 이다지도 생생한가, 싶은 기억들이 몰아쳤다. 어젯밤, 한건은 철저히 예하를 개 취급했다. 하지만 모든 걸 잃어버린 예하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웃기만 했다.
이미 몇 번 있었던 일이라 그리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발가락 끄트머리가, 손가락 마디마디가 자꾸 바스러진다. 조금 더 있으면 흩날리는 재처럼 바람 한 점에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약을 먹은 예하는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혀를 내밀고, 한건의 허벅지를 긁었다. 온갖 발악을 다 했다. 그러나 한건은 자비라곤 손톱만큼도 없었다. 자꾸만 바르작거리는 예하를 귀찮다는 듯 손목을 등 뒤로 돌려 묶기까지 했다.
“어흐, 으……. 제발, 아…….”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예하는 열과 성을 다해 그의 손을 빨았다.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과, 핏줄이 울룩불룩 솟은 손등과, 가지런히 정리된 손틉까지. 한건의 손끝마다 진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부족했다. 감당하기 힘든 갈증이 일었다.
갈증을 해소할 방도를 찾는 예하의 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규칙 없이 엉망으로 엉킨 세상은 무엇이 하늘이고 무엇이 땅인지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머리 위에 있던 샹들리에가 발밑을 나돈다. 굴러다니던 술병들이 일제히 일어나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강강술래를 했다. 그 꼴이 어찌나 우스운지, 예하는 한건의 손가락을 입에 넣은 채로 푸흐흐 웃음을 흘렸다.
분명 어둑어둑한 밤인데 쨍한 해가 떠 있었다. 눈이 부셔 눈살을 구기면 땅을 기어 다니는 구름이 발바닥이나 무릎께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생소한 감각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예하를 덮쳤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마약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대단했다.
“가만히 있어.”
“흐으…….”
한건이 나른한 손짓으로 예하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예하는 그 손길이 너무 좋아서 그르릉, 짐승처럼 목으로 울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해 가만히 있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꾸만 움찔움찔 경련하는 몸뚱이는 갈무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할짝할짝 그의 검지를 핥았다. 그저 혀로만 핥았다가, 목젖이 짓눌릴 때까지 삼키기도 했다. 그렇게 열심히 핥다 보면, 한건은 가끔, 아주 가끔 칭찬해주듯 혀를 짓이기거나 입천장을 긁어줬다. 예하는 그 찰나의 쾌락으로도 너무 좋아 끙끙 앓았다.
한건은 그런 예하를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모든 이에게 보여주며 너희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라, 손댈 수 없는 것이라 깨우쳐줬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간간이 술만 홀짝였으나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한건의 경고를 알아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예하를 바라보고 있던 세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야. 나 갈래. 이러다 질식사로 죽겠다.”
생머리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나도.”
아론 역시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재킷 단추를 채웠다.
“우린 가짜 오메가랑 떡치러 간다. 최한건 이 부러운 새끼.”
약쟁이는 떠나는 그 순간에도 알약을 손으로 쓸어 모아 자신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들은 그렇게, 무언가에 쫓기듯 부리나케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 와중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흘끔흘끔 예하를 눈으로 강간했다.
예하는 그들에게 시선 한 줌 정도는 던질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한건의 아랫도리 위에서 허리를 들썩이다 뺨을 얻어맞아 소파 구석에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와.”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발소리까지 소멸한 후, 한건은 그제야 예하에게 손을 뻗었다. 예하가 흐리멍덩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이리 와, 이리 와. 그게 무슨 뜻이더라. 한참이나 고민하다 뜻을 깨우쳤다. 삐거덕거리는 몸을 추슬러 그를 향해 기어갔다.
“하고 싶어?”
예하의 턱을 가볍게 움켜쥔 한건이 물었다. 이리 오라는 말은 그리 어려웠는데, 방금의 말은 금세 이해했다. 예하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어. 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한건이 욕망에 일렁이는 눈망울을 보며 조소했다. 그 순간, 예하는 한건이 돌팔이 말처럼 정말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저에게 모든 걸 선사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 지옥의 불구덩이로 밀어 넣었다가, 손길 한 번으로 천국까지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그런 대단한 신. 한건의 키가 쭉쭉 커지더니 종국엔 높다란 천장까지 다다랐다. 예하는 그의 손바닥 위에 공손히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그가 내려줄 쾌락을 기대했다.
“으…….”
코에서 질질 새던 피는 그쳤으나 숨쉬기가 어려웠다. 예하는 후욱, 후욱 입으로 가쁘게 숨을 내쉬며 그의 아래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한 한건의 체취 아래로 두툼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몇 번 볼을 비비며 눈치를 봤다. 다행히 손이 날아오거나 욕설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걸 허락이라 생각한 예하가 허겁지겁 입으로 바지 버클을 끌었다.
퉁, 튕겨 나온 성기가 눈두덩을 때렸다. 눈을 일그러트리며 귀두 끝을 핥았다. 이번에도 한건은 예하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저지를 가하지 않는다. 그래서 냉큼 성기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우욱…….”
여전히 엄청난 크기다. 그러나 한건은 예하가 그의 성기에 적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작은 뒤통수를 움켜쥔 커다란 손이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북, 목구멍을 찢으며 들어오는 살덩이는 몇 번을 물어도 버거웠다. 아마 앞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식도를 할퀴는 성기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흐우, 우…….”
숨을 쉬지 못한 예하가 본능적으로 목구멍을 조일 때마다 한건의 왼쪽 눈이 살풋 구겨졌다. 한건의 얼굴에 희미하게 만족감이 서렸다. 그의 두툼한 목젖이 거칠게 일렁였다.
예하는 목구멍을 찢어발기는 압박감에 눈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악착같이 버텼다. 제발 나 좀 거들떠봐줘. 나 좀 어떻게 해줘.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면 책임을 져.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죽이든가.
“어우, 윽, 컥.”
한건은 예하가 숨을 쉬지 못해 새파랗게 질려갈 때쯤에야 놓아줬다.
“쿨럭, 쿨럭. 허억……, 윽.”
예하가 타액으로 흠뻑 젖은 아랫입술을 맥없이 떨어트렸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앞이 핑핑 돈다. 그저 발정제만 먹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바닥에 정교히 새겨진 기하학무늬들이 죄다 튀어 올랐다. 둥둥 허공을 떠다니던 그것들이 예하의 머리를 밟고, 손등을 깨물었다.
사슬이 온몸에 칭칭 감긴 것처럼 갑갑하다. 근데 또 평온하기도 했다. 등 뒤로 묶인 손목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허나 이대로 뭉쳐서 소멸해버렸으면, 싶기도 했다.
엉망진창이다. 정신도, 이성도, 몸뚱어리도.
“엎드려.”
한건이 다른 명령을 내렸다. 예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꿈틀꿈틀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바닥을 짚고 서면 무너지고, 꾸역꾸역 세우면 넘어지고를 반복한다. 흘끔 살핀 한건의 얼굴에 지루함이 스쳤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가 자신을 이대로 버려두고 떠날까 봐 무서웠다. 그럼 이 비정상적인 흥분과 열, 그리고 환각을 추스르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홀로 땅을 기어야 할 터였다. 어쩌면 환각에 잡혀 가죽이 죄다 벗겨진 채 죽을지도 모른다.
“후욱, 후우.”
예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추슬렀다. 허나 팔이 묶인 상태라 중심을 잡는 게 어려웠다. 막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펄떡펄떡 필사적으로 뛰었는데, 여전히 땅 위였다.
쯧.
한건이 짧게 혀를 찼다. 그가 예하의 머리채를 쥐고 가뿐히 들어 올려 테이블로 내던졌다. 예하가 잘 닦인 볼링공처럼 테이블 위를 미끄러졌다. 테이블 위에 있던 것들을 와르르 아래로 떨어진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접시, 둔탁하게 떨어지는 위스키병, 깨지는 유리잔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세세히 고막을 파고들었다. 막 자궁을 헤치고 나와 세상의 소리를 처음 접하는 갓난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술에 젖은 볼이 축축하다. 역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테이블과 충돌한 어깨와 무릎이 아렸다. 퉁퉁하게 부푼 코도 아팠고, 한건에게 맞은 뺨도 쓰라렸다. 하지만 예하는 그 순간에도 한건을 향해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한건이 그러라고 했으니, 예하는 그래야 했다.
한건은 친히 바지를 내려줬다. 찬 공기가 예하의 둔부를 두드린다. 예하가 입술을 힘주어 겹쳐 물었다.
“으우…….”
곧 뜨끈하고 두꺼운 것이 골 사이를 문질러왔다. 아래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래로. 그 성의 없는 자극에도 뒷구멍은 촉촉하게 젖어갔다. 꽉 아물려 있던 주름이 그의 귀두에 눌려 벌어졌다가 오므라듦을 되풀이했다.
“으앙, 흐읏!”
순간 귀두가 쑥, 들어왔다가 나갔다.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으나 두꺼운 맛을 잊지 못한 구멍이 벌름거리며 쾌락을 졸라댔다.
이미 한건과 뒹굴어본 몸은 간사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풀지도 않고 멋대로 쑤셔 넣는 행위가 좋다니. 그게 아니면 약쟁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약이 고통도 쾌락으로 바꾸는 마술을 부렸나.
“다, 다시…… 다시. 응?”
고개를 한껏 뒤튼 예하가 한건을 쳐다봤다. 한건이 입술을 핥으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드러난다. 예하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그를 기다렸다.
한건은 쉽게 오르가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귀두만,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깊게 들어왔다가 나감을 반복했다.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나,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봐선 꽤나 흥분한 것 같은데. 어째 감칠맛만 나게 하는 건지.
안달 난 예하의 발이 동동 물장구를 쳤다.
“왜, 왜에…….”
주제도 모르고 조르는 행동에, 한건이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가 예하의 등을 콱, 내리눌렀다. 며칠 전, 식사 중 예하가 엄지로 콩나물 대가리를 눌렀던 것처럼. 예하는 속절없이 테이블에 뭉개졌다. 갈비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내리누르는 힘은 점점 더 세졌다. 이대로면 분명 으깨지고 말 것이다. 그때, 그 콩나물 대가리가 어떻게 됐더라. 반으로 뚝 갈라졌던가. 예하가 희뿌연 정신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흐억…….”
“다른 새끼랑 떡치고 싶어?”
한껏 가라앉은 한건의 목소리가 박박 고막을 긁었다. 이건 질문일까, 협박일까. 아니면 경고인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에 대한 답을 찾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같잖은 부정뿐이었다.
“으, 아니……, 아니야, 아니…….”
“그럼?”
“흐어, 윽…….”
그렇게 어려운 질문에 답을 종용하는 건 폭력과 같다. 예하가 약쟁이에게 그런 말을 건넨 건 다분한 의도가 있긴 했다. 그냥, 너 빡치라고! 네가 너무 싫어서! 그런 말이 혀끝에서 달랑였으나 내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자신과 섹스해주지 않을 테니까. 내장 곳곳을 제집인 양 활개 치고 다니는 발정제를 잡아주지 않을 테니까.
“대답해.”
허나 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다. 등허리를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내뱉지 못한 숨이 꺽꺽거리며 역류했다.
“흐, 네가…….”
“…….”
“미……워서…….”
소름 끼치게 싫어서.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서. 예하가 핏발이 잔뜩 선 눈을 홉떴다. 테이블 위, 간신히 살아남은 술잔 하나에 텁텁한 빛이 담겨 있다. 그걸 몽롱하게 쳐다봤다. 유리에 한건의 모습이 비칠 듯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예하는 그가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으헙…….”
순간 한건의 성기가 부욱, 뒤를 찢으며 들어왔다. 흥분할 대로 흥분한 몸이긴 했으나 그의 것을 단번에 꿀떡 집어삼키기엔 부족했나 보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통각이 뒤통수를 꿰뚫었다. 허나 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으응! 아……. 흐으.”
“후우…….”
예하가 아랫입술을 터질 듯 깨물었다. 콱콱 뒤를 들쑤시는 것이 말도 못 하게 버겁다. 근데 또 말도 못 하게 좋았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여기가 어딘지, 저가 살아있기는 한 건지. 그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한건은 예하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허비한 시간을 두 배로 되받아가겠다는 듯 자비 없이 허리를 움직였다.
“너, 너무 아프…… 아! 좋아, 거기! 응, 하앗!”
“하.”
마구잡이로 뭉개지는 전립선과 강제로 벌어지는 내벽이 쾌감과 고통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신음은 쾌락에 가까웠다.
한건이 그런 예하를 비웃었다. 하지만 예하는 그 어느 것도 알 바가 아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눈앞에서 이름 모를 괴한이 쥐불놀이를 해댔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잔뜩 안으로 곱아들었다가도 쫙 펴졌다.
골반을 움켜쥔 한건의 큼직한 손에 키스를 바치고 싶었다. 목덜미 위로 흩어지는 그의 숨이 아깝다. 내가 다 받아먹어야 하는데.
“응, 아앗! 흐응.”
두꺼운 테이블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만큼 한건의 허리 짓은 셌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 한건의 성기가 들어왔다 나가는 게 수월해졌다. 예하가 흥분의 정점에 다다를 만큼 쾌락을 느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흐, 윽, 읏, 음, 아……!”
“하아, 하아…….”
가슴팍이 거칠게 들썩였다. 한껏 달아오른 숨이 비죽비죽 멋대로 입술을 비집고 나갔다. 예하는 허공 어귀를 의미 없이 응시하며 얼마 남지 않은 절정의 정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순 한건의 성기가 확 빠져나갔다. 놀란 뒷구멍이 벌름거리며 두툼한 성기를 다시 내놓아라, 농성을 벌였다.
예하의 몸이 휙, 가뿐하게 돌아갔다. 이제 희끄무레한 시야에 가득한 것은 공허한 응접실이 아니라 한건이다. 등 뒤로 묶인 팔이 아팠으나 고통을 쾌락으로 인지해버린 지 오래라 상관없었다.
한건이 느릿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의 진한 냄새가 콧구멍으로 돌진해왔다.
씨발. 너무 좋아. 진짜 너무 좋아. 미치겠어.
예하가 허벅지를 한껏 벌려 그의 허리를 감았다. 한건은 그러든 말든, 낮은 음성으로 으르댔다.
“싸지 마.”
“……왜에?”
예하의 말끝이 늘어진다. 하찮은 교태였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비비 몸을 꽜다.
“싸지 말라고 했어.”
한건은 이유를 알려주는 대신 한 번 더 경고했다. 그리고는 퍽, 엉덩이가 죄다 짓뭉개질 정도로 깊고 세게 성기를 욱여넣었다.
“흐익!”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싸지 마. 그건 일종의 벌이었다. 지금 예하에게 필요한 건 용솟음치는 발정제 기운을 토해내는 것이다. 일전의 경험에 의하면 못해도 세 번은 오줌발처럼 갈겨대야 숨통이 트였다. 한건은 그걸 허락하지 않을 생각인 거다.
예하가 팩팩 고개를 내저었다. 쾅쾅 온몸을 때려 부수는 듯한 허리 짓을 반복하면서, 절정에 이르지 말라는 건 불가능했다.
“흐으, 못, 못 해. 아응, 응!”
“싸기만 해. 어?”
“안, 돼……. 어흡. 으응, 흐으으…….”
한건의 협박이 웽웽 예하의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마약과 발정제, 거기다 술까지 알차게 흡수한 예하의 몸은 이미 통제가 불가능했다.
뭉툭하고 두꺼운 성기가 멋대로 전립선을 찌부러트리는 순간, 예하는 윗몸일으키기를 하듯 벌떡 일어서며 줄줄 정액을 토해냈다. 삐이, 이명이 울리고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하으…….”
예하는 한참이나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욱하던 안개가 개고, 자신이 있는 곳이 하늘도, 땅속도 아닌 한건의 집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을 때쯤. 코앞에 있는 한건을 올곧게 응시할 수 있었다.
흡. 절로 숨이 멎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는 한건의 눈동자가 홀쭉한 배 위에 흩뿌려진 정액을 핥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단번에 가느다란 목을 휘어잡았다. 뒤로 밀린다는 자각을 하기도 전에 뒤통수가 쾅, 테이블에 처박혔다. 숨이 막혔다. 이제껏 숱하게 느껴왔던 호흡 곤란과는 차원이 달랐다. 정말 단 한 줌의 숨도 허락되지 않으니 순식간에 그로기 상태가 찾아왔다.
한껏 벌어져 숨을 갈망하는 예하의 입술 위로 한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미끈하고 뜨거운 혀가 잔뜩 물어뜯어 헤진 입술을 샅샅이 핥았다.
“말, 하면.”
“흐억…….”
“들어, 좀.”
새까만 한건의 눈동자에 점점 핏기를 잃어가는 예하가 비쳤다. 새빨갛게 익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하얗게 질리는 꼴이 우스웠다. 예하가 버둥버둥 허리와 다리를 비틀었으나 돌덩이 같은 한건의 몸은 옴짝달싹 않았다.
“크어…….”
그러잖아도 탁하던 예하의 정신이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또렷하기 그지없던 한건의 얼굴도 그와 함께 녹아갔다. 몇 번 상상이나 해보던 죽음을 코앞에 둔 기분은, 역시나 별로였다. 온갖 환각제를 처먹었음에도 그랬다.
눈이 회까닥 까뒤집히기 직전에 한건의 손이 거두어졌다.
“콜록, 콜록! 흐억!”
두어 번 제대로 기침을 하기도 전에 단단한 성기가 다시 밀려 들어왔다. 약물에 내몰려 퇴화할 대로 퇴화해버린 뇌는 너무할 정도로 금세 쾌락을 받아들였다.
숨이 치받는다. 또 온 세상이 한건으로 가득 찼다. 들이마시는 숨도, 스며오는 체온도, 귓구멍을 울리는 숨소리도. 전부 한건이다.
예하의 눈앞이 희뿌옇게 번졌다. 배 속이 찌릿찌릿하고, 등줄기는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혀가 아무렇게나 나돌 때쯤, 한건이 묶인 예하의 손목을 풀어줬다. 냉큼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예하가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에다 코를 파묻었다. 볼을 비비고, 혀를 내어 핥고, 한건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짓을 해댔다.
한건이 나지막이 웃었다. 아니, 웃지 않았던가. 모르겠다.
그렇게 예하는 밤새도록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천국 같은 쾌락을 감내해야 했다.
발정제는 여운이 길다. 거기다 마약까지 더해졌으니 여독 역시 곱절이었다. 예하가 뻑뻑한 눈을 간신히 치켜떴을 때 그는 한건의 품속이었다.
“…….”
가장 먼저 나신의 너른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고, 그 후에는 멀끔하게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늘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눈이 평온하게 감겨 있고, 비수만 골라 쏟아내던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뾰족한 선이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
예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잠자는 한건이라. 처음 마주하는 거였다.
눈을 뜨자마자 맡는 한건의 냄새는 여전히 몹시 환상적이었다. 예하는 며칠 전, 발정제에 취해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지끈거리는 허리와 뒤통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리는 코와 쓰라린 목젖이 거슬렸지만, 내장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는 발정제와 마약이 모든 통각을 씻어냈다.
“아으…….”
하지만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짓이기며 목구멍을 닫았다. 한건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일어나면 또 그 빌어먹을 출근을 할 텐데. 그럼 이 좋은 냄새도 사라질 텐데. 물론 팔 한 짝을 잘라주고 간다면 쉬이 해결될 문제지만.
한건의 냄새를 들이켜면 들이켤수록 몸이 나른하게 퍼졌다. 모든 힘과 의지를 상실한 사지가 침대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몸을 이기지 못한 정신 역시 깊은 수면으로 침몰했다. 아니, 한건에게 침몰했다.
그 때, 한건이 번쩍 눈을 떴다. 새까만 동공은 방금 잠에서 깼다고 하기엔 신기하리만큼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예하가 반쯤 눈을 감은 채 그와 눈을 맞췄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
“…….”
한건이 예하를 쳐다본다. 아주 집요한 눈빛이었다. 한건의 기상을 알리듯, 여유롭게 움직이던 그의 페로몬이 활발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그만큼 예하의 폐부로 밀려오는 냄새도 짙어졌다.
“…….”
“…….”
예하는 헤에, 무언가에 홀린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열심히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그의 냄새를 들이켜느라 바빴다. 한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그쯤, 한건의 손이 이불을 헤치고 나타났다. 마디가 굵고, 핏줄이 두드러진 손은 참으로 알파다웠다. 그 손이 느리게 예하에게 다가갔다. 종착지는 하얗고 말랑한 볼 위였다.
예하는 단단하면서도 어딘가 포근한 그의 손이 좋았다. 거기에 맥이 꿈틀거릴 때마다 풍겨 나오는 향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예하가 뻐근한 목을 뒤틀어 그의 손바닥에다 얼굴을 문질렀다. 한건의 엄지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볼을 눌렀다. 깨나 낯간지러운 스킨십이 여유롭고 나른했다. ‘여유’와 ‘나른’. 예하에겐 익숙지 못한 감정들이었다. 그러니 푸흐흐 절로 웃음이 셌다.
“…….”
한건이 그런 예하를 지그시 응시했다. 예하도 그를 보고 싶었다. 허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뻑뻑한 눈알은 반만 뜨고 있는데도 건조했다. 더 뜨고 있다간 뽕, 하고 빠져버릴 것 같았다. 힘겹게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그가 자도 괜찮다는 듯 귓바퀴를 매만져왔다.
좋다. 이곳은 확실히 천국이다.
그렇게 예하는 한건의 냄새를 마음껏 들이켜며 다시 잠이 들었다.
예하는 금세 눈을 떴다. 금세가 아닐 수도 있다. 하루가 꼬박 사라져버렸을지도. 아무튼, 다시 눈을 떴을 때, 한건은 여전히 예하의 앞에 있었다. 똑같은 포즈로, 똑같이 눈을 내리감은 채. 색색, 그답지 않게 평화로운 숨을 내쉬며. 다만 이전과 달리 보드라운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원래 옷을 입고 잤던가. 예하는 시간을 가늠하려 미간을 좁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건이 자신의 옆에 있던, 위에 있던, 아래에 있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구역질이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솟았다. 애당초 눈을 뜬 것도 메슥거리는 속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냅다 욕실로 달려갔다. 아마 실로 달리진 못했을 터다. 엉망인 다리는 꼭 뼈마디 몇 개가 없는 것처럼 삐거덕삐거덕 움직였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변기를 부여잡았다. 생전 처음 마약이라는 걸 경험하는 오장육부가 마구 뒤틀리며 거부반응을 비췄다.
“우욱, 욱…….”
나오는 건 없었다.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해 바짝 마른 목구멍은 침 한 방울 내뱉는 것도 아까워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차라리 내장을 토해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변기와 입을 맞추다 세면대 앞에 섰다. 그리고 뒤늦게 확인한 것이다. 전쟁통에 구르다 나온 듯한 꼴을.
욕실에서 한참이나 시간을 죽이던 예하가 절뚝절뚝 침대로 걸어갔다. 한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잠을 자는 중이었다.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이 신기할 정도로 진했다.
엉망진창인 저와 달리 흠집 하나 없는 피부. 쉭쉭 바람 새는 소리가 나는 제 숨과 달리 고요하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숨결. 예하의 탁한 눈동자가 한건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죽일까.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어떻게 죽이지. 어떻게 해야, 최한건을 죽이고 여기서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지. 증거는 어떻게 없애지. 목을 조르면 죽을까. 아니면, 무언가 찌를 게 있어야 하나.
예하의 눈동자가 휙휙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나 잡히는 게 없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두 손을 한껏 펼쳐 한건의 목을 그러쥐었다. 얇은 살갗 아래로 두근거리는 맥이 느껴졌다.
이걸 얼마나 짓누르고 있어야 죽을까. 예하가 천천히 아귀에 힘을 줬다. 단번에 누르면 벌떡 일어난 한건이 저를 또 바닥에 처박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다고 어깨가 결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눌리는 목젖이 오히려 손바닥을 찌르는 듯할 때쯤이었다. 텁, 손목이 잡혔다. 헉. 예하가 한가득 숨을 삼켰다.
한건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맞물리는 시선이 또렷하다. 방금 잠에서 깨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은 눈동자. 그 눈동자 안에 창백하게 질린 예하가 함빡 담겨 있었다.
“죽이게?”
한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껏 목이 눌렸다고 하기엔 너무나 올곧은 목소리였다.
“죽이면, 죽어 줄 거야?”
예하 역시 담담하게 대답했다. 방금까지 목숨을 앗아가려 했으면서. 죄악감이라곤 쥐뿔도 없는 음성으로.
애당초 단숨에 죽일 게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말았어야 했다. 그것도 힘없이, 퀴퀴하게 죽은 손목으로, 부들부들 경련하는 나약한 근육으로. 어쩌면 예하는 실패를 알면서 그의 목을 쥐었는지도 모르겠다.
예하가 손목을 뒤틀었다. 그러나 작약한 손목은 한건의 손아귀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힘을 풀어버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한건이 내릴 심판을. 벌을.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나. 아예 욕조에다 발정제를 담아 놓고 그 속에 처넣으려나. 아니면 일전에 언급했던 오메가 베이터에 처넣으려나.
한건의 침묵은 길었다. 예하는 그 긴 침묵 내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쿵쾅쿵쾅 발광하는 심장을 추슬러야 했다.
“닥터 불러줄 테니까, 자.”
한건이 내놓은 선고는 예하의 예상 밖이었다. 너무 예상 밖이라 넋이 빠질 정도였다. 물론 어이도 없었다.
“……자라고?”
“그래.”
예하의 손목을 던지듯 놔준 한건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침실을 가로질렀다. 예하는 어쩐지 허탈해져서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한건이 멀어진다. 이대로 나가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늘 그래왔듯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보고를 받고, 수십억을 줬다 뺐다 하겠지.
내가 그 좆같은 진통제를 또 한 바가지나 맞고 있을 동안. 죽은 듯 눈을 감고 자고 있을 동안. 너만, 멀쩡하게.
그걸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다. 안 꼴릴 수 없었다.
으득 이를 간 예하가 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냅다 한건의 등짝을 향해 집어 던졌다. 퍽. 둔탁한 소음이 일었다.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개새끼.”
“…….”
“씨발 새끼.”
“…….”
“병 주고 약 주고도 정도가 있지. 지랄 염병을 해라.”
예하는 생각나는 비속어를 죄다 내뱉었다. 그로도 분이 풀리지 않아 다른 베개도 들었다. 던지진 못하고 그저 쥐고만 있었다. 무서워서. 한건이 그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제 목을 꺾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헌데 한건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찮은 반항을 비웃지도 않았고, 발정제를 먹이지도 않았으며, 으르대며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달칵. 문이 닫히고 한건이 사라졌다. 남은 건 침대맡에 우두커니 선 예하 하나였다. 예하의 미간이 세모꼴로 모나게 구겨졌다.
“……뭐야.”
최한건이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
* * *
돌팔이는 예하의 몰골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전의 모습들도 영, 안쓰러운 모습이었으나 이번엔 정말…… 전쟁터에서 네 바퀴쯤 구르고 나온 몰골이라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 이런 몰골을 하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좆같으니까.”
예하가 먼저 돌팔이의 말을 가로질렀다. 절절 끓는 목소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엄했다. 돌팔이는 몇 번이나 입술을 오물오물 움직이며 말을 걸 낌새를 봤으나 워낙 험상궂은 예하의 표정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돌팔이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온몸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인 멍도 살피고, 손전등 같은 걸 치켜들더니 퉁퉁 부은 목구멍도 관찰하고, 코를 살살 흔들며 뼈에 금이 갔나, 핏줄이 얼마나 터졌나, 등등을 샅샅이 검사해갔다.
돌팔이가 주사를 놓고, 약을 바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그동안 예하는 멍하니 허공 어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한건에게 뒤를 대주다가 죽거나,
한건에게 찢겨 죽거나,
한건에게 목이 졸려 죽거나,
뭐가 됐든 필히 죽음을 맞이할 테였다.
“당신한텐 최한건이 신인데, 나한텐 악몽인가 봐요.”
예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잠시 멈칫한 돌팔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치료를 이어갔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목숨에 미련이 있진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오메가의 삶은 상상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훨씬 퀴퀴한 외로움을 가진 터라. 다만 아쉬운 게 하나 있었다. 아빠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
송 사장을 만나야 하는데. 아빠의 행적을 아는 듯했는데. 물어봐야 하는데. 예하가 이미 죄다 터진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어어, 깨물지 마세요.”
돌팔이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예하가 아차, 하며 아랫입술을 놔줬을 땐 이미 시뻘건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돌팔이가 쯧쯧 혀를 차며 연고를 들었다.
예하가 가까이에 선 돌팔이를 쳐다봤다. 똑똑한 사람이겠지. 한호 그룹의 주치의 정도면 제법 권력도 있을 거고. 인맥도 짱짱할 터다. 예하가 돌팔이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파요?”
돌팔이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예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하나도 안 아파요. 한두 번인가.”
“……아플 텐데.”
“됐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요?”
“부탁이요?”
“네. 어려운 건 아니고…….”
예하가 추욱, 눈꼬리를 늘어트렸다. 입술은 어정쩡한 호선을 그리고, 어깨는 어딘가 민망한 것처럼 삐뚜름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돌팔이의 눈이 가늘게 좁아들었다. 그걸 부정으로 생각한 예하가 분주하게 입을 놀렸다.
“제가 나중에, 최한건한테 돈을 엄-청 많이 받을 거거든요.”
“…….”
“그거 반 떼어다 드릴게요. 아니, 다 가져가도 상관없는데.”
죽을 때 돈을 들고 올라갈 것도 아니고. 애당초 원한 적 없던 돈이다. 애절하기까지 한 예하의 눈망울에 돌팔이가 흐음, 고민했다.
“무슨 부탁인데요?”
“들어줄 거예요?”
“들어보고요.”
이 새끼가……. 예하가 비죽 치솟는 비속어를 혀 아래에 숨겼다. 부탁하는 처지에 밉보여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자그마한 손이 꼼지락꼼지락 이불을 쥐어뜯었다.
“어…… 아빠……, 제가 아빠를 못 만난 지 좀 됐는데…….”
“…….”
“찾아봐 줄 수 있어요?”
돌팔이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를 되뇌었다. 아빠라……. 예하의 아빠라면 베타일 리는 없으니, 오메가인가. 아니면 알파인가. 전자든 후자든 흥미로운 존재임은 확실했다.
허나 그만큼 많은 위험이 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알파나 오메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돌팔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구린내가 난다. 구린내가 나는 것은, 가까이 두면 파리가 꼬였다. 파리가 꼬이면, 그걸 내쫓으려 팔을 휘두르게 됐고, 그렇게 휘적휘적 쓸모없는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안개 속에서 단잠을 즐기던 사자의 뺨을 후려치게 됐다.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합니까. 최 사장님이면 몇 시간 만에 찾으실 수도 있을 텐데요.”
“…….”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한건이라면 아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찾기만 하겠는가. 혹여 끔찍한 사고를 당해 이름 없는 들판에 묻혔다 하더라도, 멀쩡히 살려 앞에 대령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인간이지.
그러나 한건은 예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터였다. 그게 궁금하면 얼른 알파를 낳아주고 직접 찾으라 하겠지. 것도 아니면, 아빠의 정보를 캐다가 또 다른 협박으로 사용한다거나.
“그 새끼가 내 부탁을 들어줄 리 없잖아요.”
예하가 부루퉁히 대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네? 그야 당연히,”
“들어줄 겁니다.”
돌팔이가 단언했다. 넘치는 수준의 확신이었다. 예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음……. 그냥, 알아요.”
“…….”
“아마 강예하 씨만 빼고 대부분 이들이 알고 있을 겁니다.”
“개소리.”
“개소린지 아닌지는 직접 물어보고 판단하세요.”
돌팔이가 코를 찡긋거리며 익살맞게 웃었다. 헛웃음을 흘린 예하가 반박을 내놓으려 했다.
“입 좀 벌려볼래요? 얼마나 부었는지 보게.”
돌팔이가 쇠막대로 꾹, 입술을 누르는 바람에 막혔지만.
그리고 예하는 그쯤에야 비로소, 한건과 자신 사이에 저만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눈치챘다.
* * *
돌팔이는 돌팔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극진한 치료를 받고,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결이지 날아갈 듯 가벼운 건 아니었다. 아직 움직일 때마다 목과 손목, 무릎 그리고 코가 아팠다. 대놓고 아프다고 하기 민망한 부분도 아팠고. 좀 과장하면 온몸이 아프다고 해도 될 것이다.
“어흐으…….”
예하가 푹신한 베개에 뺨을 비볐다. 한건의 냄새가 났다. 이쯤이야 이제 적응해서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잠에서 깨고도 반나절을 중병에 걸린 듯이 침대에 누워만 있으려니 조만간 제대로 미칠지도 모르겠다는 겁이 났다. 몇 시간이나 무의미한 잡념의 파도를 헤엄치고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나와 문으로 향하는 그 몇 걸음 만에 다리에 힘이 풀려 고꾸라질 뻔했으나,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이제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건 밥 한 끼 굶는 것보다 익숙한 일인지라.
“어…….”
비척비척 침실을 나선 예하는 완전히 잊고 있던 존재들과 마주해야 했다. 마치 예하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짝 붙어오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의 도망이 있고 난 뒤, 그림자처럼 달라붙던 이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멍청하긴.
어정쩡한 미소를 지은 예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발을 옮겼다. 그저 산책 겸 나온 것인데, 이리 황송한 대접을 받으니 어디로든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쩐다. 어디로 간다.
목적지 없는 예하가 느릿하게 복도를 걸었다. 멀끔한 복도와 줄줄이 이어진 문이 이제 제법 눈에 익었다. 예하의 발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따로 문이 없이 넓게 트인 공간 앞에서였다.
새빨간 의자가 매력적인 바는 은은하면서도 진득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고 보니 집 안에 바가 있었지.
예하가 무언가에 홀린 듯 바로 향했다. 산책 대신 술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희뿌옇게 올라오는 백열등 빛 위로 수십 개의 술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온갖 언어로 쓰인 이름은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어도 어떻게 읽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하의 손가락만큼 작은 술이 있는가 하면, 허리통만큼 큼지막한 술도 있었다. 색깔이야 당연히 제각각이었고, 병 역시 독특했다.
한쪽 벽에는 각양각색의 술잔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예하의 손끝이 닿은 건 무겁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묵직한 자수정이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술만 고르면 되는데……. 뭘 알아야 말이지. 한건의 집에 있는 것이니 뭐가 됐든 억 소리 나게 비싸고 좋은 것들이겠지만, 모르고 마시면 똥인지 된장인지 어찌 안단 말인가.
예하가 흐음, 의미 없는 고심을 이어가며 술병만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데, 가느다란 손 하나가 어깨를 스치고 장밋빛 술을 쥐었다. 움트기 직전의 튤립 모양을 한, 아주 예쁜 술이었다.
“닥터가 목이 다 나을 때까지 부드러운 것만 먹이라 신신당부를 하던데, 꼭 드셔야겠습니까?”
문 집사였다. 그녀는 이미 잔에다 술을 따르고 있으면서 뒤늦게 만류의 말을 꺼냈다. 예하가 가까운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좀 늦게 낫죠, 뭐.”
마약도 아니고, 술인데. 이 정돈 괜찮지. 예하가 홀로 자위하며 문 집사가 따르는 술을 응시했다.
코스터를 놓고, 잔을 올린 문 집사가 딱, 손가락을 튕기더니 검지를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예하를 내내 따라다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휙, 사라졌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처럼 그들만의 제스처가 있는 듯했다.
“사과와 복숭아, 그리고 자두 향이 풍부해 매력적인 술입니다. 일조량이 높은 세르비아에서 만든 것이라 특히 답니다.”
“잘 모르겠지만 맛은 있겠네요.”
“얼음을 넣지 않고 미지근하게 먹는 것으로 다른 술에 비해 도수가 약하기도 하고요.”
“센 거 먹고 싶었는데…….”
“이거로 드세요.”
문 집사는 가볍게 예하의 의사를 무시했다. 그래도 먹으면 안 되니 침실로 돌아가라 하지 않는 게 어딘가. 예하는 약간의 불만이 있었으나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잔을 든 예하가 겁도 없이 꿀꺽꿀꺽 단숨에 반절을 들이켰다. 도수가 낮다더니, 후끈한 술이 목구멍을 숭덩 넘어가는 게 낱낱이 느껴졌다. 다른 것에 비해 약하다는 거지, 예하가 이따금 입에 대보던 소주에 곱절인 도수였다.
그래도 잔을 내려놓지 않고 꾸역꾸역 마저 삼켰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고작 한 잔에 속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문 집사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동안 사라졌던 남자가 삼단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껍질을 벗겨 버터에 구워낸 랍스터와 관자. 그리고 하몽을 두른 멜론, 잡다한 핑거푸드들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우와…….”
예하가 헤에, 넋 놓고 입을 벌렸다. 진통제를 한껏 맞은 덕에 배가 고픈지 몰랐는데, 맛깔난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배 속이 허한 게 느껴졌다.
먹어도 되냐는 물음 대신 물끄러미 문 집사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냅킨에 포크를 싸 예하의 앞에 내려놨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예하는 간만에 식욕이 돌았다. 앞서 마신 술이 식전주 효과를 내기라도 한 모양이다. 허겁지겁, 조금 바쁘다 싶을 정도로 음식을 입안에 넣으며 물 마시듯 술을 들이켰다. 그동안 문 집사는 아무런 말 없이 술만 따라주며 그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한참 열심히 음식을 씹던 예하가 새 포크로 쿡, 멜론을 찔렀다. 그리고 그것을 문 집사에게 내밀었다.
“같이 마셔요.”
“……저는 이곳에 고용된 직원으로 근무 중, 손님과 술자리를 함께하지 않습니다.”
“내가 손님이에요? 나도 고용된 사람인데.”
“…….”
“여기서 제일 비싸게 고용됐잖아요. 백억 크레딧.”
예하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분명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하나도 웃고 있지 않은 희한한 웃음이었다. 문 집사는 답하지 않았다. 예하 역시 애당초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예하의 포크가 다시 쿡, 멜론을 찍었다. 단전을 찔린 멜론이 질질 과즙을 흘렸다.
술과 친하지 않은 몸뚱이다 보니 금세 광대가 벌겋게 익었다. 벅벅 세게 볼을 문지르자 후끈한 열이 느껴졌다. 그게 싫어 또 한가득 술을 들이켰다. 아까만 해도 달고 맛나던 술이 말도 못 하게 썼다.
살짝 눈살을 구긴 문 집사가 술병의 뚜껑을 쥐었다. 다시 잔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예하가 턱, 그녀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그리고 이제는 병에 입술을 대고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알딸딸한 게 기분이 나쁜데, 또 한편으론 기분이 좋다. 이래서 다들 술을 마시나 싶었다.
“이건 최한건한테 뭐라고 보고할 거예요?”
“…….”
“왜, 그때 내가 나이프 하나 훔친 것…도 귀신같이 알고 말했잖아요.”
“…….”
“내가 오늘도 말할 거 뭐 하나 만들어줄까요? 으음…… 이번엔 포크? 응? 포크 훔칠까요?”
공통분모가 한건 하나니, 대화는 당연히 그에 관한 것으로 흘렀다. 예하가 푸후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혀가 무뎌진다. 꼭 남의 혀를 떼어다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뭐…… 물어도 안 가르쳐줄 거 아는데,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물어봤, 어요.”
예하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울 만도 하거늘, 굳게 다물린 문 집사의 입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예하가 바 위에 턱을 괬다. 방금까지는 혀만 무거웠는데, 지금은 머리도 무겁고 어깨도 무거웠다. 자꾸만 몸이 아래로 늘어졌다.
“그럼…… 이거는…… 대답해주세요.”
“…….”
“내가아,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까요? 나 좀 무서워요. 최한건이, 나 죽일 것 같아서……. 그거, 그거 오메가 베이터. 그것두, 사실 엄청 무서웠어요.”
“…….”
“나는, 진짜……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렇게 살려고 엄청 노력했는데에…….”
학교도 못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쥐똥만 한 곳에서 하고. 계좌 번호도 못 만들어서 요즘엔 아무도 안 쓰는 현찰 들고 다니고. 혹여 오메가인 게 소문이라도 날까, 눈앞이 핑핑 돌 만큼 아파도 병원 한 번 못 가고.
예하가 훌쩍, 코를 먹었다. 새삼 서러워서.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대체 절 왜 오메가로 낳아서 이런 삶을 살게 만든 건지. 차라리 낳지 말지.
예하가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막 입에 가져다 댔을 때였다. 문 집사가 조금 짜증스레 그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작게 마련된 싱크대에다 콸콸 술을 내버렸다.
“그럼 조용히 계시면 되잖습니까.”
“……뭐요?”
“최 사장님은 이유 없이 타인에게 상처 주실 분이 아닙니다. 생산성이 하등 없는 행동이니까요.”
“…….”
“강예하 님이 해야 할 일을 얼른 하고 나가면, 평범하게 사는 거.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요.”
“당신 진짜…….”
“부디 빨리 나가주세요. 많은 사람이 그걸 바라고 있어요.”
예하가 벙긋벙긋 입술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화도 나지 않았다. 모든 언어가 떠나고, 건조하기 그지없는 공허함만이 예하를 감쌌다.
예하가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엔 링거 바늘 자국이 찍혀 있고, 손가락 끝과 마디마디에 이리저리 쓸린 생채기가 가득한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세게.
내가 원해서 온 것도 아닌 곳에서, 나는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왜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고, 왜 이렇게 날카로운 혐오를 겪어야 하며, 왜 이렇게 아픈 비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내해야 하는가.
예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마구잡이로 요동쳤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공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 나……, 정원 갈 거예요.”
“침실로 돌아가시는 게,”
“갈 거라고요!”
“…….”
“따라오든지, 말든지.”
까득, 이를 갈며 으르댄 예하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바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도 문 집사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오늘 예하의 행동을 어떤 순서로 어떤 단어를 쓰며 보고할지 정리하느라 바빠서.
예하는 바깥 공기가 그리웠다. 텁텁하고 매캐한 공기가 그리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내내 실내에만 있다 보니 저절로 그리됐다.
그러나 예하에게 허락된 건 좋은 필터가 거르고 거른 청량한 공기뿐이었다. 누군가는 복에 겨워 미쳤구나, 비난하겠지만, 앞서 말했듯 예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감옥에 갇혀 있는 중이라 복이 복이 아니었다.
한건의 황야 같은 집에서 예하가 그나마 자주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당연 정원이었다.
느릿느릿 기다시피 걸어 정원에 도착한 예하가 털썩, 의자에 널브러졌다. 멍하니 허공을 주시했다. 오늘도 너울너울 부지런히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개가 어째 유독 날카로워 보였다. 손을 대면 베일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뻥 뚫린 천장이 밤을 맞이하기 직전의 탁한 노을을 쏟아냈다. 손바닥을 쫙 펼치니 그 안에 노을이 함빡 담겨왔다.
한건을 만나기 전에, 납치를 당하기 전에, 말도 안 되는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전에, 그러니까 한 달도 채 전에. 그때의 예하는 조금 어둡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알바하는 카페에 갈 준비를 한다. 가서 뜨문뜨문 오는 손님들에게 원하는 음료를 주고, 문을 닫을 때쯤 나타난 사장에게 대충 하루를 보고했다. 그리고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별로 할 것도 없는 집안일을 끝내고 나면 옥상에 올라갔다. 먼지가 움푹 쌓인 화분과 잡동사니들이 즐비한 회색 옥상은, 옥상이라 생각하면 흔히 떠올리는 낭만과 영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낭만을 기대하고 올라온 게 아닌지라 괜찮았다.
고작 삼 층짜리 주택 옥상에선 하늘보다 퀴퀴한 건물들이 훨씬 많이 보였다. 빙 둘린 고층 빌딩들 때문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반지하인 제집보단 나았다. 이따금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트랜지션의 후끈한 매연도 견딜 만했다.
예하는 올라온 높이가 무색하게 아래만 내려다봤었다. 열일곱. 아빠가 떠난 후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아빠가 돌아오면, 어느 방향으로 올까. 저기 오래된 편의점 옆의 좁은 골목? 옛날에 문 닫은 세탁소 앞길? 네온사인이 고장 난 부동산을 돌아서? 늘 셔터가 삼 분의 일쯤 내려와 있는 고물상 뒤로?
그렇게 한참을 상상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눈꺼풀을 깜박이는 걸 잊어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그쯤 되면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었다. 라이터도 꺼냈다. 카페 손님이 두고 간 건지, 버리고 간 건지 모를 라이터에는 낯선 가게 이름이 까맣고 투박하게 적혀있었다. 장미였나, 로즈였나. 아무튼 그랬는데.
얼마 후, 그 가게에서 무엇을 파는지 우연찮게 알게 됐다. 짝퉁 오메가. 점심때가 되어 어김없이 들른 삼인방의 대화를 훔쳐 듣다 알게 된 거였다.
‘후우…….’
대차게 뿜어낸 연기는 아쉬울 정도로 삽시간에 흩어졌다. 담배라니. 제가 이런 걸 들고 있는 꼴을 보고 아빠가 뭐라 그럴까. 엄청 혼나겠지. 그 상상만으로도 좋아 히죽거렸다.
그렇게 옥상에 있을 때, 예하는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라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아빠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올라온 옥상에서 하는 생각치곤 퍽 슬펐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아주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다지도 혼자인 게 선연한지.
예하가 벅벅 억척스레 눈두덩을 문질렀다. 쓰린 통각에 온몸을 흠뻑 적신 술기운이 조금 물러나는 것도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여기 있네요.”
초점 없는 동공으로 과거를 회상하는데, 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예하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예하는 흘끔 눈만 굴려 음성이 주인을 확인했다. 아론이었다.
“담배 있어요?”
“네?”
“담배. 몰라요?”
예하는 그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대뜸 담배를 요구하고 봤다. 내장을 속속들이 나돌아다니는 연기를 떠올리니 입이 간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니코틴이 고픈 게 아니라, 옥상에서 죽이던 시간이 고팠다. 찰나라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술…… 마셨어요?”
“네.”
아론이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고 옆에 엉덩이를 붙인다. 예하는 당장이라도 꺼져!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혹여 그가 담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금만 참기도 했다.
그런 예하를 대충 눈치챈 아론이 흐음, 목으로 신음했다.
“있긴 합니다만, 한건이가 담배 냄새를 안 좋아해서…….”
변명 한 번 기똥차다. 최한건이 좋아하지 않아서 못 주겠다니. 몸을 살짝 옆으로 튼 예하가 못마땅하게 아론을 응시했다. 아론은 진작부터 예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담갈색 눈동자 안에 뒤틀릴 대로 뒤틀린 예하의 모습이 비쳤다.
“뭐 어때요. 몇 대 맞고 뒤밖에 더 뚫리겠어요?”
“……그게 그렇게 쉽게 할 소립니까?”
아론이 한껏 미간을 좁혔다. 불쾌한 것 같기도 했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꼴에 질 낮은 농담을 취급하지 않는 고귀한 인간이라는 건가.
물론 그렇다고 관둘 예하가 아니었다. 몸은 엉망이고, 정신은 더 엉망이다. 더 떨어질 구렁텅이도 없었다.
“별것도 아닌 거로 되게 고고한 척하시네.”
“…….”
“당신. 혹여나 내가 오메가를 낳으면 육십억 주고 사가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래놓고 그런 말 하니까 아-주 우습네요.”
예하의 비아냥에 아론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래도 수치는 아는 인간인 모양이다.
예하가 푸후, 숨을 모아 뱉었다. 진한 술 냄새 쏟아졌다. 술은 감정을 요동치게 한다. 그래서 꾸역꾸역 억누르던 감정이, 자신도 숨기고 있다, 자각하지 못했던 감정이 불쑥불쑥 예고 없이 고개를 쳐들었다.
“팔자 좋게 술이나 마시고. 여기 이렇게 널브러져 있고. 그래서 내가 존나 멀쩡해 보이죠?”
“……그럴 리가요.”
아론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예하의 콧잔등에 새겨진 멍이 저렇게나 뚜렷한데, 거짓으로도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없었다.
예하가 쩝, 입맛을 다셨다. 머리끝까지 치솟아있던 전투력이 푸시식, 단번에 식었다. 손바닥 뒤집듯 하는 기분에 자신도 적응이 안 됐다.
이쯤 되니 제 성격이 원래 이 모양이었나 의심까지 됐다. 평소엔 한껏 어깨를 좁히고 고개를 수그리고 다녔는데. 가끔 부딪치거나 실랑이가 일어나면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그건 자기방어의 일종이었다. 가녀리고 약한 모습에 우스갯소리로라도 너 오메가야? 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그때, 아론의 손목에 자리 잡은 스마트 밴드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는 흘깃, 예하의 눈치를 한 번 보고 메시지를 열었다.
어차피 흥미도 없는 사업 이야기이리라, 그리 가늠한 예하가 일렁이는 분수로 눈을 돌렸다.
아론은 꽤 오랫동안 메시지를 확인했다. 손목을 까딱이니 홀로그램 자판이 나타났는데, 그걸로 분주하게 무언가를 보내고 받았다. 때때로 예하를 살피기도 했는데 그게 대화를 끊은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니면 혹여 예하가 메시지를 훔쳐볼까 감시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의자에 무릎을 올린 예하가 삐딱하게 턱을 괬다. 술 냄새가 자꾸 역류한다. 가만히 있어도 술을 마시는 느낌이었다.
“예하 씨.”
“네.”
아론이 나지막이 예하를 불렀다. 분주하게 주고받던 메시지가 끝난 듯했다. 예하가 여전히 분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요?”
아론의 눈썹이 들썩였다. 살풋 올라간 광대와 반짝이는 눈이, 어째 상기되어 있다. 파티를 앞둔 개츠비처럼.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기 직전의 어린아이처럼. ‘좋은 거’를 알려주는 사람이 본인임에도 그랬다.
예하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쪽한테 좋은 거요, 아니면 나한테 좋은 거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낯짝이 영 미심쩍다. 대가 없는 선의는 훗날 독이 될 확률이 높다. 서로가 원하는 것이 상충한다면 달라지겠지만.
“당연히 예하 씨에게요. 아,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그건 판단하기에 따라 다르겠네요.”
예하는 그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아론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듯했다.
그의 입술이 쩍, 뱀의 아가리처럼 벌어졌다. 모두가 숨기고 있던 비밀을 탈탈 털어내는 입술이 방정맞기 그지없었다.
“알파가 오메가를 발현시키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내가 말했었는데, 혹시 기억해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예하가 꾹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커멓게 멍든 손목이 아프다며 비명을 질렀지만, 짜증이 우선이었다.
좋은 거, 라고 해서 그래도 좀 기대를 했는데. 또 오메가다. 또. 하긴 제가 오메간데 오메가에 관한 이야기를 일절 끊고 사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했다.
“오메가는 발현시킨 알파의 냄새만 맡을 수 있고, 알파는 오메가에게 소유욕을 느낀댔나. 그거요?”
예하가 비아냥대며 반문했다.
“네. 기억하네요. 틀린 말이긴 하지만.”
“……예?”
예하가 늘어트렸던 목을 쳐들며 날카로이 반문했다. 한 번에 답을 주면 될 걸, 그 주변만 빙빙 두르는 그의 대화법이 영 시원찮았다. 눈두덩이 무겁다. 술기운은 어느 정도 물러갔으나, 대신 잠이 몰려왔다.
아론이 예하에게 바짝 엉덩이를 붙여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반짝반짝, 신나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예하는 뒤로 물러날 타이밍을 놓치고야 말았다.
“그때, 그 말. 앞에 말은 내가 했는데, 뒷말은 내가 하지 않았어요.”
“그랬나……?”
예하가 눈을 새초롬히 뜨고 며칠 전을 되짚었다. 하지만 발정제와 마약에 난도질당한 기억이 죄다 조각나 있어 되새기기가 어려웠다. 점점 구겨지는 예하의 낯에 결국엔 아론이 답을 알려줬다.
“한건이가 했죠.”
“……그래요. 그게 왜요?”
어렴풋이 떠오른다. ‘별거 아니야. 그냥 소유욕 같은 거. 그런 게 생겨. 비싼 물건에 남이 손대면 싫고, 훔쳐 갈까 불안하고. 그런 거.’ 지독히도 낮은 한건의 목소리와 함께 머리채가 잡혔었는데. 그 참혹한 손아귀 힘이 다시금 떠올라 벅벅 목덜미를 긁었다.
아론이 눈을 가늘게 뜨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거짓말이에요. 소유욕은 너무…….”
“너무?”
“가볍잖아요. 평생 한 알파에게 얽매여 살 오메가에 비해서.”
“…….”
그럼 다른 게 있기라도 하다는 걸까. 거짓말이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최한건이 거짓말을 했다니. 예하는 아론의 말이 썩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예하의 생각에, 한건은 살면서 거짓말이라고는 해보지 않았을 인간이었다.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그런 짓까지 해가며 숨길 무언가가, 혹은 아끼는 무언가가 없었을 테니까.
아론의 뒤꿈치가 탁탁탁, 방정맞게 바닥을 두드렸다. 입술을 연달아 세 번이나 핥기도 했다. 덩달아 예하까지 초조해질 정도였다.
“한건이는…….”
느릿한 아론의 말에 예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예하 씨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아?”
예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순간 어찌나 얼이 빠지는지. 하마터면 깔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경악에 물든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턱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사랑.
사랑이라.
사랑이라니.
혓바닥이 까끌거릴 정도로 낯선 단어다. 낯간지럽고 서정적이며, 감정의 꼭대기 층에 있는 것. 오메가로 태어난 제 인생에 그런 게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건과 사랑을 함께 떠올린 예하의 미간이 모난 세모꼴로 구겨졌다.
“미쳤어요?”
그저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물은 말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대단한 감정을 여기서 들먹이냔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최한건이 사랑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고개가 내저어졌다.
“아니요.”
아론이 고개를 저었다. 예하의 눈동자가 샅샅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혹여 약을 했나. 아니면 저처럼 술을 마셨나, 싶어서. 아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 전의 응접실에서처럼 두 손바닥을 옆으로 펼쳐 저울을 흉내 냈다.
“신은 완전 평등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평등을 유지한다니까요.”
“…….”
“그렇게 못 미덥다는 표정 지어도 어쩔 수 없어요. 과학적으로 밝혀진 거니까.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이론이나 이치 같은 거라고요.”
“그럼 신이 실수했을 거예요.”
예하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니면 신의 능력이 최한건한테는 듣지 않는다거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이번에는 아론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지구가 둥글고, 해가 뜨면 밤이 오고. 그와 상응하는 이치를 이야기하는데, 아득바득 아니라고 우기는 예하가 이상했다.
예하가 코웃음을 쳤다. 말간 얼굴에 고집이 가득했다. 아론은 그가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견고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딱딱했고, 또 어느 방면으론 아둔하기까지 했다.
“사랑. 그거 나도 잘 모르는데요. 보통 그거 하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잘해주고 싶고, 잘 보이고 싶고. 그렇지 않나요.”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네요.”
아론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예하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지식이야 주워듣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사랑이란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숱한 이야기나 비극, 희극, 혹은 전설에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주소재였으니까.
의자에 삐딱하게 기댄 예하가 야릇한 표정으로 아론을 주시했다.
“최한건이 섹스할 때 내 어딜 쥐는지 알아요?”
“어……, 글쎄요.”
아론이 께름칙한 표정으로 턱 아래를 긁었다. 난데없는 섹스 타령이 부끄럽기라도 한 듯했다.
“여기. 여기를 이렇게 쥐어요.”
예하가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꽉 힘을 줬다. 댕강 잘린 숨이 목젖에서 막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계속해서 힘을 줬다. 그래 봐야 한건이 저를 뭉갤 때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힘이었다.
꺽꺽, 숨소리가 기이하게 뒤틀린다. 눈앞이 희뿌옇게 번져갔다. 몇 번 경험했다고 익숙해진 죽음의 문턱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예하를 넋 놓고 쳐다보던 아론이 거칠게 손을 떼어냈다.
“뭐 하는 겁니까!”
“하아, 하아……. 처음에는 당장, 후우…… 죽을 것 같아서 엄청 무서웠거든요.”
“…….”
“근데 지금은 안 무서워.”
“…….”
“왜인지 안 물어봐요?”
“듣고 싶지 않아요. 이유가 아름답진 않을 것 같네요.”
아론이 대화를 끝내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가느다란 금발 머리가 여유롭게 넘실댔다. 그 아래로 길게 뻗은 목선과 넙데데한 등짝이 제법 괜찮았다. 상처 하나 없는 피부가 얼룩덜룩한 예하의 팔뚝과 완연히 비교됐다.
예하는 썩은 동태 눈깔로 그의 뒷모습에다 말을 던졌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 당신이 시작한 대화잖아.
“그 새끼랑 섹스하고 있을 땐 내가 내가 아니에요.”
“…….”
“차라리 죽고 싶어.”
“…….”
“근데 나를 이렇게 만든 새끼가 날 사랑한다고요?”
“…….”
“좆같은 소리 하지 마요. 웃기지도 않아.”
아론은 대답 없이 멀어졌다. 그 순간에도 단정한 그의 구두 소리가 추락하는 분수의 물소리와 맞물려 섞였다. 그게 어찌나 웃긴지, 예하는 한참이나 낄낄거리며 웃어야 했다.
발걸음이 올곧지 못하다. 정원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냈으니 술기운도 물러났으리라, 생각했는데 안일한 가늠이었나 보다. 몸이 축 처졌다. 손끝과 발끝이 찌릿찌릿하게 저리기도 했다.
근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디더라. 예하가 휘휘, 둔한 동작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이 비슷하게 생긴 한건의 집이라 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너무 헷갈렸다.
예하가 가본 곳이라곤 침실, 도망을 위해 하룻밤 묶었던 방, 어둠에 잠겨 뭐가 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홀, 방금 다녀왔던 바와 정원이 다였다. 정원에서 왼쪽으로 꺾어 복도를 쭉 걸어가면 한건의 침실이 나오는데. 오늘은 한참 걸었음에도 익숙한 방이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반대로 들어온 듯했다.
“아오…….”
이게 다 아론 때문이다. 괜히 같잖은 말로 머릿속을 죄다 헤집어 놔서…….
예하가 짜증스레 벅벅 목덜미를 긁었다. 그 와중에도 잘못 잡은 방향을 거슬러 갈 생각은 못 했다. 알코올에 흠뻑 젖었다가 말라가는 뇌가 영 온전치 않다. 꼬불꼬불한 길을 걷듯 휘청이던 예하의 발이 문득 뚝, 멈췄다.
“어…….”
최한건 냄새다.
동그란 콧구멍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래도 뒤를 돌아본다거나 하진 않았다. 한건의 냄새는 이보다 훨씬 진하니까. 뭐랄까. 지금의 냄새는 한건이 아니라, 그가 지나간 흔적에 가까웠다.
예하는 어렵지 않게 냄새의 근원을 찾아냈다. 문 없이 길게 늘어진 공간이 옆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하가 거리낌 없이 그곳에 들어섰다. 어차피 정처 없이 걷던 걸음인데 조금 더 돌아가면 어떤가, 싶었다.
가장 먼저 그리 크지 않은 네모난 공간이 나왔다. 마주 보는 양쪽 벽면이 거울이었다.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보던 예하가 괜히 코를 찡긋거렸다. 고주망태가 된 걸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 영, 별로였다.
더 깊이 들어가서야 예하는 지금 있는 곳이 드레스 룸이라는 걸 깨달았다. ‘룸’이라 칭하기 민망할 수준의 크기였지만.
샤워부스처럼 생긴 투명한 박스 안에 네다섯 벌 정도의 슈트들이 줄지어 전시돼 있다. 그런 투명 박스가 족히 스무 개는 넘어 보였다. 흰색, 회색, 감청색, 검은색 등 색별로 나누어진 와이셔츠 관도 있었고, 아예 한 벌씩 통째로 코디되어 걸려 있는 관도 있었다. 유리관 아래에서 은은한 흰색 조명이 쏘아졌고, 유리에는 손자국 하나 찍혀 있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니 가지런히 개켜진 티셔츠와 니트들이 색별로, 질감별로, 두께별로 수납되어 있었다. 고개를 한껏 쳐들어야 할 정도로 까마득한 높이인 찬장에는 수백 개의 구두가 강렬할 정도로 밝은 금빛을 받으며 번쩍였다. 더비 구두, 플레인 토, 로퍼 등 종류별로 정리된 구두들은 수납보다 전시에 가까웠다.
한가운데에 있는 낮은 서랍장 역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굳이 서랍을 잡아빼지 않더라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시계만 있는 서랍장이 두 개, 커프스단추만 있는 서랍장이 하나, 또 넥타이가 돌돌 말려있는 서랍장이 두 개였다.
“백화점이냐…….”
입술을 삐죽인 예하가 전투적으로 검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매끈한 유리를 손으로 주욱, 그었다. 보기 싫은 손자국이 생겼다. 그게 뭐라고 뿌듯해서 씨익 미소 지었다. 술이라는 건, 사람을 참 어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예하는 꽤 오랫동안 드레스 룸을 구경했다. 그저 신기해서였다. 그다지 물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렇게 삐까번쩍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 봐야 입고 나갈 곳도 없었다. 그냥, 화려한 남의 것. 그게 다였다.
얼마나 있었을까. 시계 안에 시계가 세 개나 더 있는 손목시계가 신기해 구경하던 예하가 슥슥 팔뚝을 문질렀다. 늘 최상의 온도를 유지하는 침실, 온화한 정원과 달리 드레스 룸은 에어컨이 셌다. 손끝에 닿는 가구도, 옷도 죄다 차가웠다.
으음, 목으로 신음한 예하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언가 걸칠 걸 찾았다. 후드나 코트 같은 게 있으면 좋으련만. 한건이 후드를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아직 겨울이 아닌지라 코트도 나와 있지 않았다.
고민하던 예하가 뭐가 다르게 생겼는지 잘 모르겠는 슈트 재킷 중 아무거나 하나를 들었다. 한건의 품에 딱 맞춘 슈트는 예하에게 우스울 정도로 컸다. 그래도 그렇지. 소맷자락으로 손끝도 나오지 않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작은 게 아니라, 최한건이 말도 안 되게 큰 거야.”
예하가 둘둘 소매를 접으며 불평했다. 그것도 잠시,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벙한 개그맨 같아 킥킥거리며 웃었다.
“하암…….”
한참이나 드레스 룸을 활개 치며 놀던 예하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눈알이 뻑뻑했다. 머리도 지끈거린다. 이제야 술이 깨려나 보다. 눈은 이미 반쯤 감겨 있었다. 가늘지만 긴 쌍꺼풀이 몽롱하게 풀렸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면 좋겠는데.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으나 소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폭신한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
뭐. 언제부터 침대에서 잤다고. 반지하에 있는 집엔 침대는커녕 매트리스도 없었다.
거리낌 없이 카펫 위에 누운 예하가 재킷을 여몄다. 연하지만 한건의 냄새가 났다. 어째선지 졸음이 곱절로 짙어졌다. 곧 예하의 숨소리가 색색, 잔잔히 가라앉았다.
* * *
“온(ON) 뱅크는 국내 은행 브랜드지만 전 세계 100개 국가에 지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만 1200여 개의 지사를 갖고 있으며, 올해 상반기 순이익은 약 이백사십이억 구천만 크레딧으로 전년 대비 41.9%나 증가했습니다.”
한건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메가를 발현시키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니, 알고는 있었는데 인지하지 못했다. 가볍게 여긴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한건의 엄지가 무의미하게 패드를 짓눌렀다. 의미 없는 터치의 반복에 패드가 팅, 팅 경고창을 띄웠으나 한건은 눈만 패드 위에 있을 뿐,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 통합 공인인증 서비스를 온(ON) 뱅크와 제휴하여 출시할 경우, 파급력은 물론, 홍보 효과까지 기대됩니다. 온 뱅크에서도 인프라 구축, 상품개발, 직원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적극적인 도움을 주겠노라…….”
‘오메가는 평생 자기를 발현시킨 알파의 페로몬밖에 못 맡아. 그럼 알파는?’ 아론의 그 말이 아니었으면, 요즘 내내 옆에서 시시덕거리는 예하의 환영에 중병이 의심된다며 닥터를 불렀을지도 몰랐다.
뭐, 중병이라면 중병일 수도 있겠다. 못 고치는 게 없는 요즘 시대에, 유일하게 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일 테니까.
“어…… 사장님?”
“…….”
사랑.
사랑이라.
사랑이라니.
몹시 낯간지러워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감정을 고르라면 두 번 생각도 않고 사랑이라, 그리 단언할 수 있었는데. 수많은 감정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건방진 생각의 말로가 이러하다니.
아론이 말하길, 신이 평등하다 했던가. 한 번도 그렇다 생각해본 적 없지만, 이번 기회로 깨달았다. 신은 뭘 만들던, 얼추 평등에 맞춰, 세상이 순리대로 잘 돌아가게 만든다는 걸.
한건이 픽, 조소했다.
일하고 있으면 예하가 주변을 돌아다닌다. 잠깐 허투루 숨이라도 쉬면, 옳다구나 하고 다가와서 시답잖은 말을 걸어댔다. 보조개가 드러나는 그 예쁜 웃음을 지으며, 참으로 다정한 목소리로. 가느다란 손가락은 말을 쉬거나 미소 지을 때마다 가볍게 손등을 쓰다듬었다.
때때로는 그저 머릿속에만 있기도 했다. 그럼 저절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잠은 잘 잤나. 밥은 먹었나. 뭘 먹었으려나. 문 집사가 어련히 알아서 완벽한 식사를 대령했을 테지만, 그냥. 궁금했다. 닥터가 들렸을 텐데. 약은 발랐나. 그 고약한 성질머리에 링거를 집어 던지진 않았으려나. 저번엔 바늘도 잡아 빼다가 내던졌다는데. 하여튼…….
출근하고부터는 덜덜덜 주책없이 다리가 떨렸다. 퇴근이 고파서. 있던 적 없는 일이다. 퇴근이 고픈 이유는 휴식이 필요해서도 아니었고, 잠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제 침실에 있을 작은 존재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였지.
엊그제. 예하가 제 친구의 허벅지에 매달려 야릇한 기운을 풍겼을 때. 그 말도 안 되게 좋은 냄새를 아까운 줄도 모르고 뿜어댔을 때. 분노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달아야 했다. 이제껏 숱하게 겪어온 화는 화가 아니었나 보다.
촘촘히 박힌 머리털이 죄다 타오르는 기분.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발바닥이 덜덜 떨렸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건방진 괴한이 뒤통수를 톱으로 쓱싹쓱싹 써는 듯했다.
결국엔 멋대로 예하를 움켜쥐고, 내던지고, 휘두르고, 짓밟았다. 그러나 썩 통쾌하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만 해도, 바닥을 설설 기는 예하에 화가 좀 풀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심장께가 묵직한 것이, 추라도 달린 기분이었다.
특히 오늘 아침, 제 목을 조르던 예하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찌나 선연히 뇌리에 박혔는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찾아오는 그 찰나의 어둠에도 그 모습이 상기됐다. 그러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통증이 자연히 함께 떠올랐다. 통증은 금세 몸집을 세 배, 네 배로 부풀려 한건을 집어삼켰다.
한건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제 말 한마디에 풍비박산 난 회사 관련자들이나, 그저 재벌이라면 아니꼽게 보는 서민들과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울분을 토하는 정치인들까지. 살인 협박도 숱하게 받아왔거늘. 고작 그 연약한 힘에 목이 좀 졸린 거로 이다지도 아프다니.
근데 그 모든 게 앙증맞은 감정의 놀음 때문이었단 말이지. 신이 만들어 놓은 이치에 따르면, 이 끔찍한 감정이 평생을 갈 거고.
“사장님?”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팀장의 애원에 한건은 그제야 생각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은 그가 본래 ‘최 사장’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순이익이 전년 대비 몇 프로나 증가했다고요?”
“41.9%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예?”
“온 뱅크는 이미 세 손가락으로 꼽히는 은행입니다. 근데 전년 대비 수익이 40% 이상 증가하는 게 쉬운 일이냐고요.”
“어…….”
“그리고 인프라 구축, 상품개발, 직원 교육까지 다 해준다 했다고요?”
“……예에.”
“대체 왜? 우리가 주는 건 그저 사용자의 편리성이지 이익이 아닐 텐데요.”
“…….”
“뒤가 구려. 탈탈 털어보고 먼지 안 나면 그때 다시 가져오세요.”
팀장은 그저 말일 뿐인데 몽둥이로 호되게 두드려 맞는 기분이었다. 다시 가져오세요. 그 말이 차라리 반가울 지경이다. 어쨌든 다시 가져올 때까지 한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으니까.
꾸벅 허리를 숙인 팀장이 자료를 챙겨 허겁지겁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빙 둘러앉은 각 부서의 헤드들이 흘끔흘끔 한건의 눈치를 봤다. 미팅이 끝난 듯한데, 도통 일어날 줄 모르는 사장님이라. 평소였다면 끝맺음 말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그였다. 몇 초의 시간이라도 낭비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
“…….”
널따란 공간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작 그 정적을 야기한 한건은, 또 죄 없는 태블릿을 꾸욱 짓누르느라 바빴지만.
* * *
한건은 퇴근이 조금 늦었다. 물론 집에서도 어스름히 해가 뜰 때까지 일하는지라, 퇴근이 퇴근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시간이 평소보다 늦었다.
짜증이 났다. 종일 나사 하나, 아니 수십 개가 빠진 듯 멍하니 있던 탓에 보통 때라면 한 시간 만에 끝냈을 일과, 보고와, 미팅에 세 시간씩이나 할애했기 때문이다.
갑갑한 넥타이는 진즉 끌었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에 샤워하며 여기저기 들러붙어 있는 예하를 털어낸 후, 못다 한 일을 마저 할 생각이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대충 넥타이를 걸친 한건이 늘어지는 걸음걸이로 드레스 룸에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멈춰야 했지만.
“…….”
예하의 냄새가 났다. 침실과는 꽤 거리가 되는 드레스 룸에 뜬금없이 예하의 향이라니. 한건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설마 또 도망이라도 치려는 건가. 그것도 앞뒤 좌우 창문 하나 없이 꽉꽉 막힌 드레스 룸에 숨어들어서? 이다지도 자욱이 냄새를 흘러가며?
한건이 쥐고 있던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김이 뿜어졌다. 빠른 걸음으로 와이셔츠가 걸려 있는 섹터를 지났다.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살폈으나 예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조그마한 몸뚱이니 옷 틈에 숨어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뾰족하게 선 한건의 검지가 툭툭 옷자락을 건드렸다. 가볍게 흔들리는 옷들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허나 예하는 도통 보이질 않았다. 냄새가 옅어지지 않는 걸 봐선 아직 이 공간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데.
막 시계 서랍장을 지나던 한건이 우뚝 멈춰 섰다.
“…….”
빼꼼 드러난 발이 곱게 모여 있다. 혹여 들킬까, 두려워하는 모양새도 아니었고, 발견 즉시 머리를 치받으려는 위협도 없었다.
“…….”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몸보다 훨씬 큰 저의 옷을 입고. 촘촘한 속눈썹이 박힌 눈꺼풀은 가지런히 내리고. 광대엔 연한 열을 띄워두고. 아랫입술은 살짝 벌어져 치아가 보일 듯 말 듯하고. 아무렇게나 둘둘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시퍼렇게 멍든 손목을 내놓은 채로.
한건이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성급한 오해로 성큼성큼 시끄럽게 드레스 룸을 휘저었던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대체 왜 여기서 자고 있냐는 의문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평화로이 자는 예하의 모습에 넋을 잃어서.
한건이 꾹,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예하가 자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게 아닌데, 마치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사랑이라는 걸 깨닫고 처음 마주하는 거라 그랬다.
한건이 예하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었다. 진한 그림자가 스쳤다가 사라짐에도 예하는 눈살 한 번 구기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져있나 보다. 그건 한건에게 아주 큰 행운이었다.
앞으로 몇 분은 더 이렇게 예하를 구경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런 잡음 없이, 그 어떠한 방해자도 없이, 오롯이 단둘이.
그 때, 예하의 볼이 일렁였다. 꿈속에서 뭘 먹기라도 하는 건지, 찹찹 입맛을 다셨다. 한건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스쳤다. 부지불식의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건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냥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조금만……, 만지면 안 되나.
“…….”
한건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어정쩡히 공중에 떠 있던 한건의 손이 천천히, 느리게 예하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의 검지가 동그란 코끝에 닿았다. 그저 닿았다는 것만으로 화들짝 놀라 손을 어깨까지 쳐들었다. 흡, 숨도 멈추고 예하를 관찰했다. 혹여 그 작은 손길에 깼을까 봐. 다행히 예하는 여전히 깊은 꿈속이었다.
손길은 금세 대담해졌다. 본디 나쁜 짓이 발전이 빠른 법이다. 이마를 부드럽게 매만졌다가, 볼을 꾹 눌러보기도 했다. 말랑한 살덩이가 포옥 손끝을 감쌌다. 그대로 내려가 입가에 멈췄다. 웃으면 참으로 예쁘게 파이는 보조개가 있는 자리였다.
“…….”
한건의 손이 보조개의 흔적 위를 아쉽게 맴돌았다. 딱 한 번 본 보조개. 몹시 보기 힘든 것이다. 예하가 온전한 상태에서 저에게 웃어줄 리 없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계속 보기 힘들겠지.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고. 한건이 비죽 못마땅하게 입술을 뒤틀었다. 아침마다 발정제나 마약을 먹여볼까. 그럼 매일 웃어줄 텐데. 예하가 알면 기겁할 생각도 해봤다.
“으응…….”
예하가 못된 생각을 하는 한건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꾸물꾸물 몸을 뒤틀었다. 그러더니 한건을 등지고 반대로 얼굴을 돌려버린다. 그런 예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한건이 여린 턱을 가볍게 움켜쥐어 자신 쪽으로 되돌려놨다. 예하의 눈가가 불편하게 구겨졌다. 허나 한건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건은 한참이나 예하를 관찰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제재하지 않으면, 온종일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강예하 님. 이만 돌아가심이,”
문 집사였다. 말을 하며 들어오던 그녀가 한건을 발견함과 동시에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같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얘 왜 여기서 자?”
“술을 드셨는데……, 길을 잃어 여기까지 오신 듯합니다.”
술에 취해 길을 잃었다, 라. 딱 예하 같은 이유라 한건이 웃음을 삼켰다.
소리 없이 다가온 문 집사가 예하를 깨우려 했다. 그녀의 손이 막 예하의 어깨에 닿기 직전이었다. 한건이 휘휘 손을 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됐어. 내가 데리고 갈게.”
“……직접 말씀이십니까?”
“응.”
한건이 예하의 목 뒤와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번쩍 들린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원래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인가. 그러고 보니 허리와 허벅지가 유독 가늘었던 것도 같고. 그래도 엉덩이는 제법 토실하니 상관없나.
한건의 머릿속이 하얀 예하의 나신으로 물들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예하는 잠결임에도 느껴지는 한건의 냄새와 온기가 그저 좋았다. 그가 널따란 가슴팍에 볼을 비벼왔다. 한건의 입꼬리가 슬핏 올라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드레스 룸을 벗어나고, 문 집사는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들을 묘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성 실장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늘었다.
뒤를 돈 그녀가 구석 어귀에 달린 패드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습도, 온도, 미세먼지, 살균, 공기청정 따위가 표시된 그래프가 떠올랐다. 다른 건 내버려 두고 온도만 조금 높였다. 며칠 전만 해도 적당했던 온도가 지금은 싸늘하게 느껴진다.
겨울이 이르게 오려나 보다.
< 2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