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ool's paradise (1) (1/23)

Fool's paradise (1) 


같은 날, 제주도 세화리 오후 5시.

“빨리 좀 와!”

장 중령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자상은 인상을 찡그리자 좀 더 도드라졌다. 장 중령의 뒤에서 느긋하게 걸어가던 남자는 걷는 중간중간 군화 끈을 다시 묶기도 하고, 팔을 교차시켜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이 새끼가 진짜! 빨리 안 와?! 돌 박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박사는 박사인데 돌 박사란다. 돌대가리가 박사가 됐나.

남자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는 앞선 장 중령을 따라갔다.

군화에 으스러지는 자갈 소리가 느릿하게 들렸고, 등 뒤로는 파도 소리가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약 300미터 전방에는 낡은 초가가 보였다. 갈대처럼 생긴 것을 수북이 얹고 그물로 얽어맨 지붕은 마치 퍼석퍼석한 더벅머리 같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저렇듯 열악한 집에서 무사히 살 수 있는 것도 이곳 제주도만큼은 아직 청정구역이기 때문이었다.

“돌 박사인지 뭔지 팔자 좋고.”

“뭐?”

“아, 맞다.”

불과 초가를 100미터 앞두고서 남자는 중요한 일을 떠올린 사람처럼 우뚝 멈춰 섰다.

“왜, 또 뭐!”

장 중령이 오만상을 쓰고는 남자를 돌아봤다.

[곽수환]

가슴팍에 달린 명찰 석 자에는 말라붙은 핏물이 번져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슨 글자인지 판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화장실.”

곽수환이 묵직한 아랫도리를 손으로 쥐어 보이고는 씩 웃었다. 안 그래도 팽팽하게 불거져서는 조만간 억제제 주사를 맞아야 할 것도 같았다.

“저 또라이 새끼. 넌 상부 명령만 아니었으면 내가 진작에 그 새끼들 밥으로 던져버렸어.”

“우리 장 중령님이야말로 한입거리일 것 같은데.”

곽수환은 합, 입을 벌렸다가 닫는 시늉을 하고는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여기 갈대숲 아무데나 싸지르면 되지, 화장실을 왜 찾아! 돌아와, 새끼야!”

다시금 멈춰 선 곽수환이 눈썹을 슬쩍 긁었다. 그는 귀찮은 기색을 풀풀 풍기면서 장 중령을 돌아보았다.

“난 그런 거 안 합니다. 군인이 경호는 무슨 경호입니까? 다른 놈 시켜요.”

“그럼 다시 영창 갈래? 엉?”

장 중령은 윽박을 지르면서도 곽수환의 눈치를 살폈다.

군대만큼 상사 부하의 규율이 엄격한 곳도 달리 없었다. 그런 계급 사회에서 중령이 소령의 눈치를 본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도 장 중령은 불과 일주일 전, 아니 곽수환이 여태 보여준 병신 같은 짓거리들이 재차 떠올라 이번에는 달래는 쪽을 선택했다.

“야, 그래도 현장 나가는 것보다는 박사님 경호하는 게 더 낫잖냐? 피 뒤집어쓰고 구린내 나는 현장보다는 따뜻하고 밥 제때 나오는 연구소에서 지내는 게 낫다고. 막말로 나한테 부탁했으면 난 뒤도 안 보고 수락했어. 이봐, 곽 소령이, 내가 너 아끼는 건 알지? 그러니까 일주일 전에 술 처마시겠다고 금지구역 뛰쳐들어가서 조용한 분위기 망가뜨려놓은 널 내가 이렇게 빼준 거 아니냐, 응?”

협박에 능한 장 중령이 유하게 나오는 이상 곽수환도 더는 빠져나가기는 틀렸다 싶었다.

“한 달.”

“뭐?”

“영창 가 있어야 할 기간이 한 달이었으니까 한 달만 한다고요.”

장 중령은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 다시 이리로 오라면서 손짓했다.

곽수환은 좀 전과는 다르게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로 장 중령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던 게 틀림없다. 힘만 무식하게 센 놈인 줄 알았더니 잔꾀도 제법 돌아갔다.

“그래서 새끼야, 오줌은 안 싸냐?”

“바지에 지리죠, 뭐.”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뭡니까.”

“할 일이 경호가 전부는 아니야. 여기서 박사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야 해. 그걸 설득하는 것도 네 몫이고.”

“돌 박사인지 뭔지가 서울로 안 간대요?”

“듣기로는 그렇다는 것 같지 뭐야.”

“그럼 기절시켜서 실어가죠.”

장 중령은 앞코가 딱딱한 군화로 곽수환의 정강이를 차려고 했으나, 그가 한쪽 다리를 뒤로 휙 빼서 피한 게 더 빨랐다.

“그랬다가는 영창에서 십 년은 썩을 줄 알아, 응?”

장 중령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제 초가까지 전방 10미터, 장 중령이 목소리를 키웠다.

“박사님, 모시러 왔습니다.”

곽수환은 어디 얼마나 꼰대 같은 영감이 나올지 자못 기대하면서 팔짱을 꼈다. 속으로 10초를 셀 동안에도 훤히 보이는 대청마루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버릇처럼 주변을 둘러보는데 주변에 있는 신발은 싸구려 슬리퍼 단 한 켤레였다.

박사님을 애타게 외치던 장 중령이 하는 수 없이 군화를 벗고 안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곽수환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턱짓을 해 바깥채에 가보라는 신호에 곽수환은 곧장 바깥채로 올랐다.

“야야! 신발 안 벗어!?”

“닦으면 될 거 아니에요.”

“넌 새끼야, 내가 너희 집에 핏물 잔뜩 굳은 신발 신고 쳐들어가면 좋냐?”

짜증 섞인 얼굴을 숨기지도 않은 곽수환은 군화를 대충 벗고는 다시 마루에 올라섰다.

“내가 못살지. 새끼야, 넌 양말은 또 어쨌어. 안 그래도 군수물자 지급품도 달려 죽겠는데, 술집에다가 벗어두고 온 건 아니지?”

부모님을 떠올리긴 싫어하는 곽수환이건만, 장 중령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옛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고작 양말 가지고 계속 투덜거리는 장 중령을 무시하고는 바깥채를 수색했다.

책이 잔뜩 쌓여있는 책상 외에 생활감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뿐이랴, 사람 머리통만 한 돌부터 시작해서 손톱만 한 돌까지 기다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래서 돌 박사인가 싶을 뿐, 구경할 맛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맨발에 닿는 온돌바닥은 얼어버린 강을 건너는 기분을 맛보게 했다.

문을 열고 나온 곽수환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더했다.

“돌 박사인지 뭔지 도망갔나 본데요. 우리도 그냥 철수하죠.”

그때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장 중령과 곽수환이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비척비척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저기 찾았네.”

곽수환의 목소리에 장 중령은 그래, 저기 오시네, 하면서 화색을 띠었다.

“내 양말.”

남자는 기다랗게 늘어진 뭔가를 양쪽으로 들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뭔가를 가득 넣어서 늘어진 군용 양말이었다.

***

같은 날, 세 시간 전. 제주도 세화해변 오후 2시.

곽수환은 태어나 제주도를 찾아와본 것이 처음이었다.

석다 풍다 여다,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아 삼다도라 했다던데 그것도 옛말이었다. 현재 제주도는 현 국가에서 인정한 안전지대였다. 돈 좀 있으시고, 직급 좀 높으시고, 국가 차원에서 보호를 받아야 할 인간과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제주도란 말씀이렷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해변을 걷던 곽수환은 거추장스러운 군복 케이프를 벗어서는 팔에 걸쳤다. 파도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고, 한때 바닷가 주변으로 성행하던 카페와 밥집들은 운영을 멈춘 지 오래였다.

다만, 한적한 해변에 서서 수평선을 보는 곽수환을 또 한 사람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심기는 어느 정도 불편해 보였다. 군 제복을 입은 남자가 이 해변에 있는 게 썩 달갑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 땅이 아니기 때문에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모래 사이사이에 파묻혀있는 보석들을 찾아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쭈그리고 앉아서 나뭇가지로 모래를 뒤적거리는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그림자가 졌다.

“뭐 하냐.”

시큰둥한 말투에도 눈만 끔뻑거리면서 나뭇가지로 모래를 쓱쓱 헤쳤다.

“이 한겨울에 슬리퍼 달랑 하나 신고, 너 그러다 발가락 동상 걸려서 잘린다? 내가 그런 새끼들 몇 봤는데 제대로 걷지도 못해요.”

오리걸음으로 옆으로 이동해서는 다른 부분의 모래를 팠다.

“이 새끼가 좀 모자란가. 뭐 하냐고.”

군인에게 좋은 기억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는 알지만, 저렇게 핏물이 말라 붙어있는 군 제복도 싫었다.

말없이 모래 사이에서 돌만 찾아내 손에 쥐고 있는 모지리를 보던 곽수환이 쯧쯧 혀를 찼다. 어디 높으신 분의 자제인 것 같은데 이런 놈을 해변에 혼자 내보내다니.

곽수환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차에 장갑을 두고 온 것을 생각했다. 아쉬운 대로 군화를 벗고는 제 양말도 벗었다. 오전에 새로 지급받은 양말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깨끗한 편이었다. 아직 빳빳한 감이 있는 양말을 내밀자 고개를 든 모지리가 의아해했다.

“신으라고.”

받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모지리 옆에 툭 놓고만 말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곽수환은 상대할 가치도 없겠다 싶어 모래를 발로 휘저으며 해변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얇은 셔츠에 그만큼 얇은 바지를 입고 있는 모지리가 눈에 밟혀 뒤를 한 번 돌았다.

“저 병신 새끼.”

모지리는 제가 준 양말에 모아둔 돌을 담고 있는 중이었다.

저런 새끼도 보호를 받는 판국에 저 육지에서는 진짜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도로 가서 양말을 뺏어올까도 생각했지만, 모자란 게 또 무슨 죄인가 싶어 장 중령에게 들어오는 무전만 받았다.

동시에 돌을 줍던 남자도 일어났다. 여기서 보니 꼭 검지손가락만 해진 군인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반말이야.”

쯧, 그는 양말에 돌을 차곡차곡 담았다.

***

[202x년 늦은 봄, 유럽의 작은 지방도시에서 전염병이 발생.

같은 해 여름, 유럽 전역과 북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모든 대륙에 급속도로 전염병이 창궐.

같은 해 늦여름, 백신이 개발되었으나 바이러스가 변이함.]

기계적인 키보드 자판 소리와 함께 스크린에 자막이 떠올랐다. 이어 아나운서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백신 개발과 바이러스 변이의 반복으로 202x년, 전염병 발생 2년 만에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 일 년 뒤 그 인구의 3분의 1이 다시 감소했고, 각 정부의 기능을 상실한 국가들이 속출했습니다. 치안과 법이 모두 무너지고 아비규환의 사태가 벌어져 전 세계에 비상사태가 선포됐으며, 인류를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 아래 국가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약 이백여 개의 나라로 분리되어 있던 세계는, 이제 단 세 개의 국가만이 존재합니다.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아무렴 세상이 세 개로 통합됐다지만, 오히려 좀 더 국수주의적으로 변했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TV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듣던 장 중령이 푸념을 토해냈다. 제주도 초가에서 제주시 세이프 센터로 이동하는 동안 박사는 생각보다 순순하게 따라와 주었다.

“박사님, 아시겠지만 저희는 박사님이 필요합니다.”

순순하기만 했을 뿐 박사가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건 여전했다.

“우리한테 필요한 게 돌 박사는 아니지 않나? 아니면 돌로 놈들 찍어 죽이는 기술 가르칠 건가.”

장 중령이 후,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곽수환의 팔을 잡아서 문 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윽박질렀다.

“네가 알아서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난 지금 수원에 비상 터져서 바로 올라가야 하니까, 알아들어?”

거칠게 팔을 놓은 장 중령이 박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빠져나갔다.

제주시 세이프 센터는 특1급 호텔을 개조해 안전가옥으로 탈바꿈한 형태였다. 카펫은 호텔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아직도 융단의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박사는 여전히 맨발이었고 돌이 가득 담긴 양말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테이블 의자에 앉은 박사가 양말에 있는 돌을 꺼내서 다시 걸러내고 있었다.

곽수환도 맞은편 의자를 끌어내 털썩 앉았다.

“당신 박사라며. 진짜야?”

“…….”

“돌에 빠삭해서 돌 박사냐고. 뭐, 그 새끼들 없애는 방법이 돌에 있대?”

반짝거리는 결정이 박혀 있는 돌을 발견한 박사는 그것을 들어서 형광등에 비춰봤다. 특이하게도 돌 안에 유리가 박혀 있었다.

휙, 곽수환이 그 돌을 낚아채서는 방 한쪽으로 던졌다.

“돌만도 못한 취급 받는 거 썩 유쾌하지 않거든. 너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야 내가 영창 생활을 피할 수 있다니까 협조 좀 해봐.”

곽수환이 던진 돌을 주우러 간 박사는 돌을 줍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다. 곽수환이 성큼성큼 걸어서는 손으로 문을 꾹 눌러 막았다.

“어딜 가시려고.”

힘을 쓰기는 싫었는지 나직하게 한숨을 쉰 박사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나머지 돌은 놔두고 주워온 돌만 주머니에 넣은 박사는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숨은 쉬고 있는 건지, 눈을 일 분에 몇 번이나 깜빡이는지, 곽수환은 박사를 빤히 들여다봤다. 발갛게 얼어붙은 맨발과 달리 얼굴은 허여멀겠다. 반사적으로 아래가 묵직해지는 감각이 찾아와 서울로 올라가기만 하면 바로 주사부터 맞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당신 머리 좋아?”

“그쪽보다는요.”

순간 곽수환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머리만 좋은 반푼이인 줄 알았는데 말투도 아주 멀쩡했다.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생이지만 관료제와는 성향이 맞지 않아 몇 차례나 사건 사고를 일으켜 징계를 받고 영창을 가기를 반복……. 절 서울로 데려가야 하는 이유는 영창을 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어 나온 말은 여섯 살짜리가 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신선했다.

“그리고 나 돌 박사 아닙니다. 변이 바이러스와 돌연변이 연구자지.”

짝짝짝, 곽수환이 박수를 쳤다.

“잘됐네, 연구자님. 난 당신이 뭔 연구 하는지는 관심 없고, 서울이나 갑시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박사가 가슴팍의 피 묻은 명찰을 읽어냈다.

“곽……수환 씨?”

“편히 곽 소령이라고 불러도 되고.”

박사는 돌을 다 뺀 양말을 곱게 접어서 곽수환에게 내밀었다.

“양말 고마웠습니다. 서울은 가겠습니다. 곽수환 소령이 제 인도자가 아니면 말입니다.”

그 말은 곧 영창으로 돌아가라는 소리였다.

곽수환은 다리를 한쪽으로 꼬고는 테이블에 턱을 괬다. 진짜 기절이라도 시킬까 했는데 저렇게 주둥이가 살아있는 걸 보면 깨어났을 때 더 골치 아플 게 분명했다.

“왜?”

“저를 보호하러 오셨을 텐데, 그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시거든요.”

“맞아, 난 그 빌어먹을 영창만 안 가면 그만이야. 박사님은 영창이 어떤 데인지 모르지? 사람 밤잠도 못 자게 새끼들이 하루 종일 괴성을 질러대고, 구더기가 박사님 얼굴보다도 더 크게 뭉쳐있거든. 그거 터뜨리는 재미도 처음뿐이지. 군인한테는 인권도 법도 없나? 아리스토텔레스 왈,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국가만이 안정된 국가라고 했지. 근데 박사님한테는 이게 국가일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아니야, 알아?”

박사는 눈앞에서 나불대는 곽수환을 마찬가지로 빤히 쳐다봤다.

흐트러진 군복 안에 각 잡힌 체격은 두뇌보다는 육체파라는 것을 표출하고 있으나 인권을 운운하면서 고대 명언까지 끌어내는 걸 보니, 두뇌 쪽으로 열등감이 있는 사람인가 싶었다.

백신이 개발되면서 바이러스도 살아남기 위해 변이를 했고,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인류 또한 엄청난 인구감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진화 과정 속에 있었다.

아직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인간 이상의 능력치를 가진 돌연변이가 태어났으며, 그들은 신체 혹은 두뇌가 특화되었다. 다만 완벽히 진화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느 한쪽이 뛰어나면 반대로 어느 한쪽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모자라고는 했다. 박사 자신만 해도 두뇌를 얻은 대신 체력이 바닥이었다. 또한 돌연변이들은 각자 뭔가에 강한 집착 증세를 보이고는 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육지로 나가려고 시도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한 번 육지로 나간 건 스무 살 때였고, 그때 딱 죽지 않을 만큼 멀미와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제주도로 다시 돌아오는 일은 곧 공포였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스물 후반 무렵에나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여태 육지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것이다.

“인권을 운운하시는 분이 왜 군인이 됐습니까?”

“실컷 밥 처먹게 해준다고 해서. 내가 육사에 지원했을 때 동기가 한 백 명 됐거든? 뭐, 옛날에는 엘리트 집단이었다네? 그런데 지금 육사 출신 새끼들은 사실 다 총알받이거든. 밥 실컷 먹는 대신에 동료 놈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라고. 백 명이 넘던 그 인원이 다 뒈지고, 동기는 나를 포함해 이제 딱 네 명 남았어.”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던 곽수환이 앞에 있는 박사의 얼굴을 쓱 훑어 내렸다. 불쾌한 행동에도 박사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만 말았다.

“그러니까 말 듣자, 박사님? 나 같은 인재를 영창에 가두는 것 자체가 국가적 손실이니까 나랑 같이 서울로 가는 거다?”

곽수환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지만 눈에 웃음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가 수많은 군인들 중에 살아남은 네 명이라면, 영창으로 보내버리는 것은 군의 전력 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박사는 곽수환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더 고집을 부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좋습니다. 대신에 서울까지 올라가는 길에는 수면마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핫, 곽수환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값비싼 의약품들이 박사님 편히 주무시라고 있는 게 아니지. 제주도에서 돌이나 주우러 다니고 VIP 대접만 받다 보니 현실 파악이 안 돼?”

“압니다. 그런데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비행기 탈 때 잠이라도 안 자면 죽나 보지? 그럼 굳이 수면마취까지 갈 필요가 있겠어?”

곽수환이 손을 위로 향해 까딱까딱했다. 일어나라는 신호에 박사는 순순히 일어났다.

박사의 팔뚝을 잡아 벽으로 끌고 간 곽수환이 벽에 바짝 붙여 세웠다. 박사의 가슴팍을 커다란 손으로 꾸욱 누르고는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내릴 것만 같은 자세에 박사는 불쾌한 시선을 담고 그를 올려다봤다.

“숨 참아봐.”

“……숨이요?”

“응, 크게 들이켰다가.”

안심하라는 듯 가볍게 대꾸한 곽수환을 보면서 숨을 들이켰다가 참았다. 동시에 가슴에 닿은 손에 엄청난 힘이 실렸고, 숨이 끊길 듯한 압박감을 느끼자마자 박사는 정신을 잃었다.

***

같은 날, 오후 10시 여의도 쉘터 63빌딩.

“이 병신 새끼야! 내가 미쳐. 내가 너 때문에 명줄이 바짝바짝 타 들어간다고!”

“누군 알았습니까. 저렇게 약할 줄 알았냐고.”

“너희는 몸뚱이만 강철이고 대가리는 똥멍청이지! 대신에 박사님 대가리는, 아니 대갈통도 아니고 그 뭐냐, 두뇌는 천재적인 대신에 몸뚱이가 유리라고!”

“너희들이라니요? 나는 저 똘수환 새끼랑은 달라요, 중령님. 저는 빼줘요.”

검은 군복에 검은 케이프를 두른 군인 셋은,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는 박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장 중령이 분기탱천할 때마다 케이프의 붉은 안감이 흘끗흘끗 보였다. 군복은 동일하나 어깨의 견장이 계급을 대신 알려주었다. 녹색 견장은 중령이었고, 은색은 소령들이었다.

“채윤아, 제발 부탁인데 오늘은 곽 소령이랑 시비 붙지 말자, 응?”

장 중령이 그녀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내가 언제 시비 붙였어요. 항상 쟤가 붙였지.”

“주둥이 시끄럽다.”

곽수환이 박사를 내려다본 채로 지껄였다.

“저 봐요, 저 새끼 항상 지가 먼저 시비 건다니까요!”

이채윤이 삿대질을 하자 곽수환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가 놨다.

“일단 좀 기다려봐요. 심박수도 문제없다니까.”

곽수환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낀 채로 박사를 내려다봤다. 이렇게 오래 기절해있을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대충 한 시간이면 일어나겠지 했는데 군용 비행기에서 내려서 헬기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사님이 일어나서 네놈 짓거리를 기억 못 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어, 알아?”

“머리 좋다면서요, 다 기억하겠지.”

이채윤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곽수환을 향해 목을 찍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게 내가 데리러 간다니까 저 새끼 뭐가 예쁘다고 영창에서 꺼내줘요.”

“나가라.”

“왜, 내가 못할 말 했냐?”

“제대로 말했는데, 나가라고. 박사가 일어나자마자 네 면상 보면 또 기절할라.”

“뒈진다?!”

이채윤이 접이식 의자를 들어서 날리려는 것을 장 중령이 간신히 말렸다. 장 중령이 온 힘을 다해 막아내려 했지만 이채윤의 힘을 이기는 건 역부족이었다. 날아오는 의자를 곽수환이 손으로 잡고는 마찬가지로 날려버렸다. 야구놀이도 아니고 박사의 침대 위로 의자가 공 대신 날아다녔다. 골을 꾹 누르던 장 중령이 그만!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만하라고! 야, 이 소령! 자식아, 너도 그만해!”

“아씨! 나 이소룡 아니라고!”

이채윤이 이번에는 벽을 향해 의자를 내동댕이쳤다. 곽수환이 갑자기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63빌딩 박물관에는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하던 배우들의 영상 자료도 있었는데, 거기에 마침 이소룡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날로 이채윤의 별명은 이소룡이 됐고, 이제는 이 소령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저렇게 흥분을 해댔다.

“새끼야, 내가 언제 너보고 이소룡이라고 했어?! 이 소령이라고 했지! 그리고 넌 내가 누누이 말했지. 내 앞에서는 괜찮지만 다른 상사 앞에서는 안 된다고. 지금부터라도 조심해. 가뜩이나 쌍심지 켜고 보는 놈들도 많은데.”

화는 장 중령이 냈지만, 이채윤은 씩씩대면서 곽수환을 노려봤다. 장 중령은 둘 사이를 가로 막고 서서는 입을 다시 열었다.

“됐고, 채윤이 너는 양 소령한테 지원 요청 들어온 데나 가보고, 곽 소령 넌 여기서 꼼짝 말고 박사님 깨어나실 때까지 지키고 있어. 손이 발이 되게 빌든지 하라고.”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박사님 얼굴 너무 잘생겼어. 구경할래.”

이채윤이 박사의 얼굴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댔다.

“채윤아……. 제발.”

장 중령은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주름이 셀 수 없이 늘고 있다는 신호였다.

“농담이에요. 저 지원 나가볼게요. 그리고 저 새끼는 박사님 깨어나면 영창 보내버리라고 해요.”

“그건 박사님이 알아서 할 문제고 우린 나가자고. 야, 곽 소령이. 잘해, 엉?”

곽수환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했다. 둘이 나가자마자 곧 빌딩 안의 의무실은 고요해졌고 이따금 방향제 분사소리만 들려왔다. 곽수환은 천장을 향해 누운 박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다. 변이 바이러스와 돌연변이 연구자라고는 하는데, 정말 두뇌가 특화되어 있는지 끽 해봐야 스물 초중반이나 됐을까 싶건만 박사란다.

박사의 입술 안에서 달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마르는지 타액이 음습하게 엉겨 붙어 있는 듯했다. 곽수환이 이번에는 자신의 하반신으로 눈을 돌렸다. 억제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지금 여기에 의무실장도 없으니 이걸 어쩌나.

뭘 어째, 풀어야지.

“신세 좀 집시다.”

곽수환이 바지의 지퍼를 내리더니 한쪽 다리를 침대 상단에 올렸다. 팽팽한 성기를 손으로 죽죽 훑으니 좀 더 커다랗게 팽창했다. 쿠퍼액까지 새어나와 번들거리는 귀두를 박사의 달싹거리는 입에 가져대려는 때였다.

“악! 중령님! 중령님!”

날카로운 이채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곽수환이 좆을 쥔 채로 열린 문을 바라봤다.

“저, 저 새끼! 똘수환 새끼가 지금 자기 거시기를 박사님 입에 문지르려고 해요!”

쯧, 곽수환이 다리를 내리더니 얼른 지퍼를 채워 올렸다. 뒤늦게 달려 들어온 장 중령이 설마 싶다는 눈을 하고 곽수환을 쳐다봤다.

“너 이 새끼! 진짜야! 미쳤어?!”

“이 소령, 너 적당히 해코지해라. 내가 무슨 박사 입에 좆을 문질러.”

문지르려고 했는데 불발됐지.

“야! 내가 봤거든? 제대로 봤거든.”

“시끄러. 근데 왜 다시 왔어요?”

장 중령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곽수환의 하반신을 바라봤다. 기다란 케이프에 반쯤 가려져 있어서 발기를 했는지 어쨌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곽 소령이, 너 성욕 억제제 주사 맞은 지 얼마나 됐어.”

“억제제 안 맞아도 박사 입에 안 물린다니까.”

“내가 네 좆 봤는데! 존나 코브라보다 더 징그러운 거 봤는데! 내 눈 어쩔 거야!”

다음에 현장에 나가면 이채윤의 성대를 조준해버릴까 싶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장 중령은 아무리 정신 나간 놈이라도 설마 박사, 그것도 남자에게 그걸 들이댈까 싶어서 이채윤에게 핀잔을 주려는 때였다.

“채윤아, 너 아무리 곽 소령이가 싫어도 그렇지,”

“여기……. 서울이에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장 중령과 이채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천장을 향해 누워 있던 박사의 고개가 어느새 세 명의 군인을 향해 있었다. 그는 두 손을 가슴에 얌전히 포갠 채 다시 말을 했다.

“……그것보다 내 돌 어디 있어요? 그리고 물도 좀…….”

또 이어 한숨이 길게 새어나왔다.

“입술에서……. 비린내가 나요.”

***

곽수환은 차분히 물을 마시는 박사를 보면서 다리를 반대로 꽜다. 설마 입에 신세지려고 했을 때부터 깨어있던 건 아니겠지? 입술에 닿지도 않았는데 비린내가 난다니.

“나 하루에 두 번은 씻거든.”

박사는 곽수환의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냥 네, 하고 대답만 했다.

“그리고. 그, 저기, 뭐냐.”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지 곽수환은 입술을 닫았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난 그쪽이 그렇게 한참 기절해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존댓말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사과가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박사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다시금 물을 마셨다. 주변에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놈들만 있는지라 저렇게 물을 마시는 것도 어째 특이하게 느껴졌다. 곽수환으로서는 솔직히 답답하기도 했다.

“팍팍 좀 마시지. 무슨 물을 토끼 새끼처럼 오물거려.”

“체할 수도 있어서요.”

“물 마시고 체한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어보네.”

“자주 듣게 될 겁니다. 제가 자주 말하거든요.”

곽수환이 이번에는 반대로 다리를 꽜다.

박사의 겉모습만 보자면 비리비리한 느낌은 딱히 없었다. 전체적으로 하얗기는 한데 마냥 작고 여린 느낌은 아니었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또 그게 냉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멍해 보였지.

박사는 곽수환의 시선을 느끼고 컵을 손에 쥐었다. 마찬가지로 그를 빤히 바라봤다. 각 잡힌 제복이 답답한지 넥타이가 느슨했다. 말본새나 직업치고 거칠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군복보다는 수트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별 거 없는 생각만 하고 말았다.

“곽수환 소령님, 그렇게 계속 보시면.”

“보면 뭐.”

곽수환은 박사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체하겠습니다.”

“어떤 민물 가재 놈은 사람이 쳐다만 봐도 죽는다던데, 박사님이 그 수준은 아니겠고.”

“그 수준일지도 모르죠.”

박사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마냥 침대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박사는 일어나서 두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커다란 창으로 걸어갔다. 서울이라고 했을 때 장소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여의도의 쉘터라 불리는 63빌딩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주도에 내려가기 전까지 몸담고 있던 연구소 사무실이기도 했고.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니 한때는 열차가 쉴 새 없이 사람을 싣고 지나다니던 한강 철교가 보였다. 열차는 어느 한 곳에서 멈추어 있었고, 앞의 철길은 폭파로 끊겨 있었다. 열차가 얼마나 오랜 시간 방치되어있었는지는 철교를 둘러싼 덩굴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바이러스가 창궐해 온 육지로 퍼져나갔을 때는 장벽을 세우자는 의견들도 있었다. 그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바이러스는 겉잡을 수없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기에 장벽을 세울 만한 인력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서울에 있는 모든 다리와 철도를 폭파하는 일이었다.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시간을 벌기에는 효과적이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은, 박사 또한 각종 영상매체와 서적을 통해 쌓은 지식일 뿐이었다.

“서서 죽은 건 아니지?”

곽수환이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연구실은 아직 34층에 있습니까?”

“아마?”

“이동하겠습니다.”

“식사는 안 해?”

“연구실부터 들렀다가요.”

“마음대로 해. 그리고 이 방은 오늘부터 박사가 쓰면 돼.”

그 또한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제주도에 두고 온 돌들이 생각났지만 그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어차피 이 건물에도 제가 모아두었던 돌들이 있으니 우선 연구소로 내려가야 했다.

보호역할이라고는 하지만 곽수환은 마치 감시를 하듯 반발자국 뒤에서 박사를 따라갔다.

용도가 쉘터로 변경되면서 빌딩 내부는 기존의 모습에서 몇 번이고 탈바꿈을 했다. 엘리베이터만 해도 등록된 지문이 아니면 탑승이 불가능했다.

곽수환이 엘리베이터의 지문 인식 시스템에 손을 가져다대니, 그의 이름과 함께 무표정한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개방합니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린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중령한테 듣기로는 쉽게 제주도에서 나오지 않을 거라던데, 생각보다 순순히 따라왔네.”

잘 따라가겠다는 사람을 기절시킨 게 누군데.

그럼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박사는 고개를 끄덕했다.

“변이 바이러스 연구자로서의 사명 같은 건 없나? 제주도에서 희희낙락 사니까 좋아서? 백장 왈, 일을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는데 너무 편하게 지낸 거 아닌가.”

박사는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서 34층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어서 문이 열려서 이 좁은 박스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덜컹!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버튼 하나를 누르니 좁은 박스가 한 차례 울렸다. 급정지를 하는 바람에 멀미가 이는 듯했고, 엘리베이터 내부는 붉은 조명으로 점멸했다.

[Emergency, Emergency, 긴급 비상 멈춤을 알립니다. 지문 인식자인 곽수환 소령님께서 3초 이상 버튼을 누를 시 정상 가동되고, 짧게 한 번 누를 시 강제 개방됩니다.]

박사는 곽수환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그를 돌아봤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봐서는 버튼을 누르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농후했다.

“돌 박사, 우리가 왜 제주도에 있던 돌 박사를 여기에 데려온 줄 알아?”

그건 박사도 의아했다. 여의도 연구소에는 이미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석 연구원이 있었으니까.

“설마 오 박사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맞아, 그 노인네가 죽었거든.”

나이 지긋한 사람이었기에 노화로 사망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정확히는 살해당했고.”

“살해……요?”

“위험한 건 저기 저 밖에 있는 것들뿐만은 아니야.”

“오 박사님께서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겁니까?”

“그래서 그 건은 군사재판에 회부됐지. 정확한 건 헌병대가 조사 중이지만.”

원래는 영창행이었던 곽수환도 자신을 경호하는 인원으로 차출되어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했다.

설마 그 살인사건에 곽수환이 연루되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랬다면 저자를 자신의 경호원으로 배정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러니까 지금 저 군인은 쓸데없는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사님도 조심하라고.”

씩 웃은 곽수환이 비상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정확히 3초가 지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정상 가동됐고, 34층에서 문이 열렸다.

“그래도 그쪽이 민물 가재보다는 낫네. 놀랐다고 갑자기 죽지는 않잖아?”

“안 놀랐으니까요.”

박사 말대로 얼굴은 동요 없이 무표정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붙든 곽수환은 박사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강제로 잡고 있으면 위험합니다. 곽수환 소령님, 엘리베이터 사용 예절을 지켜주세요.]

“기계 주제에 말은.”

곽수환은 느릿하게 걷기 시작한 박사의 뒤를 다시금 따라갔다.

“어딘지 알고나 가는 거야? 여기서 일한 지 오래돼서 기억이나 하겠어?”

“곽수환 소령님, 이 건물은 안전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외출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구역을 벗어나는 일이 있을 때만 제 경호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박사는 천천히, 그러나 강경하게 곽수환을 향해 말했다.

“싫은데.”

그랬다가는 장 중령한테 무슨 잔소리를 들으라고. 곽수환은 어서 걸으라면서 앞을 턱짓했다.

박사는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피곤한 타입일 거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어쩌면 게이일지도 모르겠다고도 덧붙여 생각했다. 분명 자신의 입에 성기를 가져다대려고 하지 않았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발정 난 짐승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쉘터는 꽤나 높은 보안 수준을 자랑했고, 특히 연구동은 더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위험한 바이러스와 세균, 백신들이 수두룩하게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박사는 엘리베이터에서 약 50미터를 지나 코너를 돌면 일전에 사용하던 연구실이 나오는 것을 기억했다. 걸음은 느리지만 막힘없이 연구실을 향해 걷던 도중 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곽수환을 봤다. 그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케이프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동행은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곽수환도 지루한 연구실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 문 앞을 지키는 편이 더 났다고 생각했다. 박사가 지문을 인식하자 투명한 유리문에 신원이 떠올랐다.

[아담 바이러스 연구원 석화(34세) 인식 완료, 개방.]

“그럼.”

석화는 고개를 까딱하고 투명한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름 한번 제 표정처럼 딱딱했다.

***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나고도 변하지 않은 게 꽤 있는데, 그중 하나는 쉘터가 여전히 금연 건물이라는 것이다.

안에만 있는 게 답답해진 곽수환은, 순찰을 한다는 명분으로 지프를 타고 이동했다. 순찰은 2인 1조가 규칙이었으니 이채윤도 함께였다.

원효대교 남단 근처에 차를 세운 곽수환은 이채윤이 태우는 담배 연기를 한껏 맡았다.

“똘수환, 나랑 바꾸자. 응?”

“뭘.”

“너 현장 좋아하잖아. 네가 현장 나가고 내가 박사님 보필할게, 어때?”

비상이 들어온 의정부를 다녀온 이채윤이 단번에 담뱃대 절반을 빨아들였다.

“응? 좀 바꾸자고.”

“영창 가는 대신에 맡은 임무인 거 몰라?”

“우리 둘 다 원한다고 하면 바꿔줄걸?”

이채윤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자신도 연구실 앞에 죽치고 있는 것보다 날뛸 수 있는 현장이 더 나았으니까.

“어때? 콜?”

곽수환은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를 눈으로 무심히 좇다가 말했다.

“받고 거기다 담배 한 보루면 콜.”

“꺼져. 안 해.”

군사재판에 회부되던 날 곽수환은 가지고 있던 술과 담배를 전부 압수당했다. 강제 금주에 금연까지 하고 있기에 간접흡연이라도 해보고자 이채윤을 동행시킨 참이었다.

“박사님 성격은 좀 어때? 알아보니까 나이도 꽤 많더라? 미혼이고 사귀었던 사람도 몇 명 없었다는 것 같던데?”

곽수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석 박사에게 사귀었던 사람이 있었다는 말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서울 떠나 있은 지 몇 년이나 된 사람인데, 그런 소식은 대체 어디서 들어.”

“구내식당 아저씨가 그러던데? 먹는 것도 쥐 오줌만큼 먹는대. 몸이 약해서 어떤 날은 밥 먹다가 그대로 국에 코 박고 쓰러진 적도 있었다더라?”

“그런 양반인데 내 좆 물렸으면 그 자리서 질식사했겠네.”

곽수환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똘수환! 너, 이씨! 네 징그러운 좆 꺼내서 물리려던 거 맞네! 너 딱 걸렸어! 장 중령님이 내가 너 해코지했다고 막 뭐라고 하잖아!”

“시끄럽고, 저거 철조망 넘어오려고 한다.”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가 떼어낸 곽수환이 그 손으로 대교 끝을 가리켰다. 빌딩 반경 2km는 제주처럼 나름 청정구역이었다. 다만 가끔 저렇게 운 좋게 넘어오려는 것들이 있었다.

곽수환은 지프 안에 놓인 저격총을 꺼내 보닛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스코프를 4배율로 맞춰 저격대상을 찾아냈다. 대교의 경계인 철조망에서 흐느적거리는 꼴을 보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지 족히 석 달은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아담이라고 불렀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이 인류를 말살하고자 온 바이러스 이름이 되다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뭐 해, 저 새끼 대가리 안 쏘고.”

이채윤이 이번에는 담배 두 대를 입에 물었다.

“이 소령, 내기 할까?”

“내기? 무슨 내기?”

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이채윤이 눈을 반짝였다.

“내가 여기서 저 새끼 머리통 돌로 맞히는 거 성공하면 담배 한 갑. 콜?”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두 개비를 물고 있던 이채윤이 보닛에 담배를 내려놓고는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음을 뚝 멈추더니 바닥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여기서 200미터쯤 되려나? 한쪽 눈을 감고 거리를 가늠하던 그녀가 야구선수처럼 한쪽 다리를 올렸다가 전신의 힘을 어깨에 실어 돌을 날렸다. 이소룡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다 저 때문이었다. 육체가 진화한 이채윤의 괴력은 놈들의 얼굴뼈를 맨손으로 깨부수고도 남았다.

“야! 봤냐?! 무슨 내기도 말이 되는 걸 해야지, 이 쉬운 걸 하냐.”

곽수환은 의기양양해하는 이채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시 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제대로 빗겨나갔는지 놈은 여전히 철조망을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는 중이었다.

“어때, 콜?”

“안 해.”

이채윤이 다시금 돌을 들어서 던지려는 것을 곽수환이 먼저 저격했다. 탄환이 정수리를 관통하니 픽 하고 뒤로 넘어갔다.

“총알 아깝게.”

“슬슬 돌아가자. 석 박사 국에 얼굴 박을 시간이다.”

“뭐?”

“저녁 시간이라고.”

***

쉘터의 구내식당 식단은 나름 호화스러웠다. 제주도가 귀빈들이 사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육지에서 소비되는 먹을거리들은 제주도에서 나는 작물인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제주도처럼 완벽하게 통제되는 곳이 더러 있었는데 섬이라 불리는 곳들이었다. 물론 이 건물에서 유전자 변형작물을 개발하는 일도 하고 있으니 서로 상부상조하는 셈이었다.

저녁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석화는 연구실을 나섰다. 그는 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서있는 곽수환을 쳐다봤다. 밖을 나갔다 왔는지 찬 기운이 제복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식사 안 하셨어요?”

“박사님이 나오길 기다렸으니까. 나 같은 일개 군인은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가시죠.”

시비조의 말에 발끈할 만한데도 석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곽수환은 박사만 보면 저도 모르게 말이 뾰족하게 나간다고 생각했다. 저 무표정한 얼굴이 어떻게 하면 깜짝 놀랄까, 또 뭘 하면 극적인 변화를 보여줄까 흥미가 생긴 탓도 있었다.

“우리 돌 박사 이름이 석화던데, 돌 주우러 다녀서 돌 박사가 아니고 사실은 성이 돌 석 자인 거 아니야?”

“저를 돌 박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곽수환 소령이 처음인데요.”

“뭘, 앞에서만 안 부르지 다들 돌 박사라 부르더만.”

“그렇군요.”

이번에는 석화가 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할머니가 제주도에서 물질을 하셨다더라고요.”

석화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물질?”

“해녀요.”

“누가 뜻을 몰라서 물은 줄 알아?”

엘리베이터는 구내식당 층에서 문이 열렸다.

“그래서 할머니가 해녀인 게 뭔 상관인데?”

먼저 나가려는 석화에게 곽수환이 말을 끝까지 하라는 듯 굴었다.

“석화는 돌이 아니라 굴을 뜻합니다. 전 돌 박사도 아니고요.”

곽수환은 구내식당을 향해 느릿느릿 걷는 석화를 보면서 콱 인상을 썼다.

“돌이나 굴이나, 씨발.”

느릿하게 걷는 듯하지만 어느새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딘가에 장 중령의 고자질 개들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성큼성큼 석화에게 다가갔다.

“굴 박사, 같이 가지?”

구내식당은 이미 한 차례 군인들이 쓸고 지나간 터라 평소보다는 한적한 편이었다. 석화도 그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느긋하게 나온 참이었다.

석화가 식판을 들고는 천천히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곽수환이 있었다. 쥐 오줌만큼 먹는다던데 배식을 하는 직원들은 아직 석화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밥과 반찬을 수북이 담아주었다. 석화는 식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작게 한숨만 쉬었다. 곧 빈자리를 찾았고, 그 맞은편에는 곽수환이 앉았다.

석화가 수저를 들고 국을 후룩 떠먹었다. 곽수환도 식사를 하면서 저 박사가 언제 국에 얼굴을 처박는지 속으로 초를 세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식사만 할 뿐이었다. 어찌나 느리게 먹는지 소처럼 안에 넣은 걸 되새김질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석 박사, 아담 바이러스 말이야.”

곽수환의 입에서 바이러스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석화였다. 그 바람에 고개를 쓱 들었다.

“그거 다시 변이된 게 맞아? 일전에 개발된 백신이 또 안 듣는다고.”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저도 상황 파악부터 하고 있어요.”

“감염된 것들이 진짜 생각이라고는 없는 게 맞아?”

“본능으로만 움직이죠.”

“생존본능?”

석화는 간이 심심한 어묵을 먹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렇죠. 바이러스도 죽기 싫어하니까 변이를 하겠죠. 곽수환 소령님과 저처럼요.”

진화의 중간에 선 자들이었다.

“그것들 옛날에는 그렇게 불렀다던데, 좀비라고.”

“서아프리카 부두교 신의 이름이 좀비였죠. 그리고 부두교 주술사가 소생시킨 시체를 뜻하기도 하고요. 편하게 좀비라고 칭하기는 하는데, 디테일은 다릅니다.”

밥이 들어가서 좀 살 만한지 막힘없이 말을 뱉어냈다.

“저딴 걸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낫잖아.”

“뭐로 부르든 어떻습니까.”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의외로 생각이 있는지도 몰라. 그놈들 자기들끼리는 공격하지 않잖아?”

곽수환이 오독오독한 소시지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럼 동족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 아니겠어?”

“이미 감염된 이들은 바이러스 보균자이기 때문에 퍼뜨릴 이유가 없어 공격하지 않는 겁니다.”

“그럼 놈들이 인간보다 낫네. 인간은 동족도 스스럼없이 죽이잖아? 얼마 전에 그 연구실에 있던 살해당한 노인네처럼.”

석화는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수많은 군인들을 겪어왔다.

쉘터에 배치된 군인들은 군에서도 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이었고, 육체가 극적으로 진화한 군인일수록 두뇌회전은 느린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심각하게 모자란 건 아니었다. 초등학생 같은 말투를 구사하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질 뿐, 상부에서 시키는 일은 곧잘 해냈다. 그들은 어떤 부조리한 일이라도 의심 갖지 않았다. 그렇기에 저에게 질문을 한 군인은 몇 명 겪어보지 못했다.

“곽수환 소령님은……. 생각보다 감성적이시네요.”

“어, 내가 좀 그래. 그래서 말인데 석 박사. 내가 석 박사 재미나게 해줄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하자.”

곽수환이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내가 지금 술이랑 담배가 다 끊겼거든. 근데 박사는 원하면 둘 다 쉽게 구할 수가 있잖아? 우리 석 박사 이름으로 술이랑 담배 몇 보루만 부탁하자고. 대신에 석 박사 돌 좋아하지? 제주도에서 급하게 올라오느라 돌도 못 챙겨왔잖아? 그건 내가 공수해줄게.”

은밀한 이야기를 대놓고도 해댔다.

딴죽을 걸어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석화는 식사를 마저 하기 위해 그런 건 다 무시했다.

“저는 술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영창도 다른 연구원들께 듣자하니……. 술을 구하러 위험구역에 들어갔던 거라더군요. 그것도 레드 구역으로요.”

쯧, 연구원 새끼들 입도 싸요. 곽수환은 됐다면서 밥이나 마저 먹으라고 손짓했다.

“술버릇이 안 좋다고도 들었습니다.”

덤덤하게 말하는 석화와 다르게 곽수환은 미묘하게 인상을 썼다.

“박사가 직접 봤어?”

황당하다는 듯 물어왔다. 석화는 대답 없이 미지근한 물로 입만 축였다.

“그럼 오늘 밤에 직접 보는 게 어때? 술은 박사가 가져오고.”

“곽수환 소령님, 에탄올의 분자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살면서 현미경 한 번 쳐다본 적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리 내가 눈이 좋아도 분자까지는 못 봐요. 석 박사는 얼른 밥이나 드시죠.”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밥이 식도까지 차오른 기분이었지만, 석화는 꾹 참았다.

“에탄올 분자구조가 딱 개처럼 생겼거든요.”

그래서 술을 마시면 개가 되는 거라고, 석화가 무표정하게도 지껄였다. 곽수환은 기가 차다는 듯 웃고는 불쑥 석화의 앞까지 얼굴을 가져다댔다.

“왈!”

곽수환이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냄과 동시였다. 푹, 석화가 국에 얼굴을 박았다. 깜짝 놀란 곽수환이 석화의 뒷머리채를 잡아들었다. 눈을 회까닥 뒤집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잠긴 눈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만 있었다.

“잠깐 현기증이 일어난 거라…….”

둥근 이마를 타고 콧등으로 무국이 흘러내렸다. 그걸 닦을 힘도 없는지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숨만 쉬었다. 그제야 곽수환도 머리채를 놓으려고 했다.

“잠시만……. 더 잡고 계실래요?”

“뭐?”

또 박을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고개가 푹 아래로 내려가는 바람에 얼른 손에 힘을 주었다. 졸지에 자신이 석화 머리채를 쥐고 흔든 꼴이 되어버렸다. 저기서 눈을 커다랗게 뜬 군인 하나가 곽수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역시 저놈이구나, 하는 표정을 했다.

그는 석화의 머리채를 쥔 채로 어떻게 말이 와전될까 싶어서 혀만 찼다. 그래봐야 장 중령에게 변명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 최전방에 선 레인보우 시티, 그린 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나오는 방송이었다.

현재 이 반도의 공식적인 명칭은 레인보우 시티였다. 총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그린 구역이라 불리는 곳이 가장 안전한 지대였다. 예상대로 레드 구역, 통칭 R구역은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술을 구한답시고 쉘터 하나 없는 레드 구역으로 쳐들어간 곽수환의 행동이 석화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숨 귀한 줄 모르는 술꾼, 딱 그 정도가 감상의 전부였다.

<오양석 72세, 34층 아담 바이러스 백신 연구 센터에서 변사체로 발견. 사망 직전 중앙 기둥을 등진 채로 서있던 상태로 추정됨. 베레타 M92F 구경 9mm 탄환이 심장을 관통, 그 자리에서 사망함.>

석화는 선 채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지금 이 자리가 오양석 수석 연구원이 변사체로 발견된 지점이었다. 탄환이 날아온 방향은 바로 저 유리문 앞이었다.

방탄유리로 제작된 연구실 입구는 연구원 외에 지정된 군인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사건이 있던 날 34층 CCTV 영상은 전부 꺼져 있었다.

그날 출입자 명단도 연구원들뿐이었기에 연구실에 있는 박사들이 용의 선상에 올랐지만, 베레타 M92F 종류를 소지할 수 있는 건 군인, 그것도 고위층뿐이었다. 게다가 사망시간은 약 새벽 5시경. 그 시간에 어째서 오양석이 이 연구실에 와 있었는지는 석화도 알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었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감도 뛰어났던 박사였다. 석화는 잠시 오양석 박사를 향해 묵념을 하다가 아차 싶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체가 발견된 자리를 밟고 서서 묵념을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항체가 생성이 되지를 않네요.”

저기서 김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양석의 제자나 마찬가지이던 김 박사는 석화가 있는 방향으로 의자를 튼 상태였다.

“그런가요.”

중앙에 서있던 석화는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아담 바이러스는 그야말로 공격적인 항원이었다. 현재 아담 바이러스는 7차까지 변이가 이루어졌고, 6차 백신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그들은 7차 아담 바이러스 배양액을 기반으로 백신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항체는 좀체 생성되지 않았다.

“백신이 뿅 하면 뿅 하고 나오는 것도 아닌데, 저 위에선 맨날 우리만 쪼고 말이에요.”

상부에서 왜 빨리 백신을 내놓지 않느냐며 닦달하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석화 박사님?”

“……예?”

“아니, 제 말 듣고 계신가 해서요.”

“듣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1차 때 면역반응을 보였던 사람은 전부 제주도 분들이었죠?”

“아, 제주도 사람이라고 해서 전부 면역반응을 보인 건 아닌데, 면역반응이 나타난 사람들은 빠짐없이 제주도 사람이거나 제주도를 방문했던 사람이기는 했어요.”

“변이된 2차부터는 그것도 소용없어졌고요.”

“그렇죠.”

이 또한 이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에 예전 연구원들이 남긴 자료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석화 박사님.”

“예.”

석화가 대답을 하면서 자신의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항체를 만들어내는 건 시간 싸움과도 같았다. 수백 혹은 수천 번의 실험을 반복해도 항체가 생성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연구원들은 가설이 성공할 때까지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했다.

“그……. 곽 소령님 말이에요.”

석화는 오양석이 남긴 7차 아담 바이러스 백신 연구서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곽수환 소령님 말입니까?”

“예에.”

김 박사는 쉽사리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지 조금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석화는 이어서 말을 할 생각이 없다면 더 캐물을 이유도 없어서 다시 연구서로 시선을 돌렸다.

석 박사가 모친의 부고로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일했던 사이였지만, 김 박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석화에게 친근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전보다 체력은 좋아졌는지 키보드에 얼굴을 처박는 일은 없었다. 그래봐야 아직 이틀째지만.

“그게 말이죠, 곽 소령님이 지금 석화 박사님 경호를 맡고 있기는 한데……. 조심하시라고요.”

김 박사가 다가와 좀 더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양석 박사님을 총으로 쏜 사람이, 곽수환 소령일지도 몰라요.”

***

“그 무식한 팔에 힘 좀 풀지?”

의사는 곽수환의 드러난 팔뚝을 툭툭 내리쳤다.

“힘은 무슨. 난 지금 아주 편안한 상태거든.”

흘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려 차트를 확인한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너 억제제 맞은 지 석 달도 안 됐는데 벌써 맞아?”

“알아, 그래도 맞아야 돼.”

억제제의 약효는 약 6개월간 지속됐다. 곽수환은 성욕이 남보다 뛰어난 만큼 남보다 약효의 지속 기간도 짧았다.

“아침 발기가 점차 우렁차지디?”

“낮밤 다 우렁차.”

“이소룡이가 그러던데, 똘수환 새끼가 석 박사 입에 자지 물리려고 했다고.”

의사는 설마 아니지? 하는 얼굴로 빤히 보았다. 하여간 말 흘리고 다니는 건 알아줘야 했다.

“얼른 놓기나 해. 석 박사한테 가봐야 돼.”

“뒷머리채까지 잡아서 국에 처박았다며?”

“전자는 맞는데 후자는 아니야.”

소독솜으로 팔뚝을 문지른 의사가 이번에야말로 억제제 주사를 성공적으로 놓았다. 화학적 거세까지는 아니고 발기에는 문제가 없으나 성충동만 감퇴시킬 뿐이었다. 육사 출신 군인이라면 누구나 맞아야 하는 필수 주사이기도 했다.

“내가 이 주사만 맞으면 기분이 아주 더럽다는 말이야.”

그럴 리 없겠지만 체내로 이동하는 약물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제복의 상의 단추를 풀어 한쪽 팔만 내놓았던 곽수환이 어깨를 한번 돌리고는 옷을 다시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줄 알아.”

“뭐가.”

“이 억제제 말이야. 주기적으로 맞으면 발기부전이 지속되는 부작용이 있었거든. 그 부작용 없앤 게 석 박사인데 넌 새끼야, 그런 감사한 박사님 상대로 네 거시기나 물리려고 하고 말이야.”

곽수환은 조금 놀랍다는 듯 눈을 키웠다가 곧 씩 웃었다.

“석 박사 덕분에 주사 맞고도 이렇게 내 아랫도리 튼실하다고 감사인사나 한 거지, 뭐.”

“면상 하나는 하여간. 세상만 멀쩡했으면 넌 얼굴로 밥 벌어먹고 살았을 거다, 새끼야.”

“글쎄다, 멀쩡한 세상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간다.”

곽수환이 웬일로 케이프를 제대로 걸치고는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군화소리가 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렸다. 부작용을 없앤 게 석 박사라는 말이지. 주사가 들어간 부분부터 화끈거리며 열이 퍼지는 것만 같았다. 곽수환은 제복에 가려져 있는 팔뚝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정작 석 박사는 그렇게 약한데 밤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연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여태 연인하고 헤어진 이유가 혹시 밤일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남의 자지는 구원해주면서 자기 성생활은 비루할 테니 그건 그것대로 아이러니였다.

34층의 연구실에 도착한 곽수환은 연구실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중앙 기둥을 기점으로 왼쪽에는 연구원들 책상이, 오른쪽에는 백신과 바이러스를 관리하는 곳이 있었다. 물론 밖에서 보이는 건 마치 연구실의 로비로 사용되는 듯한 중앙 기둥이 있는 장소뿐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댄 곽수환은 석화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손목을 들어 금이 간 손목시계를 보니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쥐 오줌만큼 먹는다지만 나름 끼니는 거르지 않고 잘 챙겨 먹는 석화였다.

[개방합니다.]

석화와 함께 나오던 김 박사가 곽수환을 보고 움찔했다.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이더니 이내 저 앞으로 후다닥 걸어 나갔다.

“석 박사, 지금 밥 먹을 거야?”

곽수환이 수저를 드는 시늉을 했다.

“아뇨.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어디를?”

서울로 데려온 지 며칠 안 됐지만 석화가 직접 나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제 보니 코트 안쪽에 권총 홀스터를 메고 있었다. 박사들에게 지급되는 글록 18C 자동권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등에 배낭까지 메고 있었다.

“총은 왜? 설마 그린 구역을 나가려고?”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장은 우리 몫이야. 시킬 게 있으면 말이나 해.”

“제가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같이 가시죠.”

석화가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박사님이 까라면 까야지 뭐. 곽수환도 결국 석화를 뒤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 석화는 낯이 익은 몇몇 사람들과도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이쪽.”

곽 소령은 석화의 팔뚝을 잡고는 자신의 지프로 이끌었다.

“성욕 억제제 주사, 석 박사가 부작용 없앤 거라며?”

우악스럽게 잡아 쥔 탓에 석화가 미묘하게 인상을 썼다.

“부탁을 받아서 부작용을 없애는 연구를 했을 뿐입니다.”

조수석에 올라탄 석화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벨트를 끌어와 단정하게 매는 꼴을 보고는 곽수환도 운전대를 쥐었다.

“그래서 어디로 모실까요?”

“곽수환 소령님이 술 훔치러, 아니 술 가지러 갔던 레드 구역이요.”

“……뭐?”

“거기가 오양석 박사님 본가가 있던 곳이거든요.”

석화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배낭에서 무덤덤하게 모포를 꺼냈다. 그러더니 제 몸을 감싸고는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13’ 레드 구역으로 쳐들어가자고 하고는 깨워달라는 건 무슨 소리야. 곽수환이 시동을 걸기도 전에 핸들을 툭툭 쳤다.

“이봐, 굴 박사.”

석화는 가만히 눈만 감고 있었다.

“레드가 왜 레드인지 몰라? 가장 위험한 구역이라고. 내 한 몸 건사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비리비리 약해빠진 굴 박사 데리고 가려면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

석화가 눈을 쓱 뜨고는 곽수환을 봤다.

“내려.”

곽수환도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

“내리라고. 필요한 거 말해놓으면 나 혼자 다녀올 테니까.”

“봐도 모를 거라서 안 돼요.”

곽수환이 입술을 뒤틀었다.

“왜, 내 머리가 돌대가리 같아 보여서?”

“곽수환 소령님. 저 소령님과 입씨름할 기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리라고.”

석화가 배낭에서 또 주섬주섬 생수병을 꺼내더니 천천히 물을 마셨다.

“오양석 박사님 연구일지를 보니까 당시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일지 중에 중요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있는데 제가 그분을 좀 압니다. 그분은 은밀한 자료들을 자기 본가에 가져다놓고는 했어요. 그 레드 구역도 원래는 그린 구역이었는데, 이번에 위험지역으로 바뀐 거라고 들었습니다.”

“아~ 이제는 박사님께서 헌병대 노릇까지 하시겠다?”

석화가 피곤한 듯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알겠습니다. 다른 분과 함께 가죠.”

벨트를 풀려는 석화의 손을 콱 쥐었다.

“다른 놈하고 동행하면 난 영창 가라고?”

“그럼 가든가요. 아쉬운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석화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곽수환이 하, 헛바람을 내뱉으며 웃었다.

“협박 한 번 무섭네. 가기는 하겠는데 석 박사 몸 어디 한쪽이 날아가는 건 책임 못 져.”

석화는 권총이 꽂혀있는 홀스터를 손으로 꼭 쥐었다.

“가요. 레드 구역에 도착하면 깨워줘요.”

그래놓고는 무신경하게도 바로 뻗어버렸다.

***

여의도에서 오양석 박사의 본가가 있는 레드 구역까지는 30분이면 충분했다.

레드 구역을 지키고 있는 건 군인들이었고, 제아무리 아담이 날뛴다고 해도 그 경계선을 넘지는 못했다. 애초에 아담의 7차 변이가 시작된 곳도 이곳이었다. 그랬기에 그린에서 순식간에 레드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구역에 들어서기 전, 검문소 초소에 다다른 곽수환이 지프를 세웠다. 창을 내려 신분증을 내보이는데 보초 하나가 곽수환을 곧장 알아봤다.

“곽 소령님, 설마 또 술집 털러 오신 건 아니죠?”

군인은 다짜고짜 사정하는 얼굴부터 했다.

“제발 좀 봐주십쇼. 저희도 그날 곽 소령님 레드 구역 들어가는 거 발견 못 했다고 엄청 깨졌습니다. 저희 좀 살려주십쇼.”

곽수환이 신분증을 제복 안쪽에 꽂아 넣었다.

“내가 또 털려고 왔으면 몰래 들어가지 신분증부터 내놔? 시끄럽고 철조망이나 치워.”

“그런데 그 옆에 분은……?”

설마 싶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건지 누구를 죽여서 유기한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안 죽었거든?”

“그래도 곽 소령님, 레드 구역은 동행자 신분도 확인해야 합니다.”

입을 작게 벌린 채 자고 있는 석화를 흘끔 봤다. 잘도 주무시지. 레드 구역에 오자고 해놓고는 벌써부터 기력이 쇠해서 내내 저러고 있는 꼴을 보자니 기가 찼다.

“내 애인.”

쓱,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석화의 뺨을 문질렸다. 영 눈을 뜨지 않기에 뺨을 톡톡 건드렸다.

“자기야, 자기야, 일어나. 레드 구역으로 데이트 오자며.”

톡톡톡, 자꾸 건드리는 바람에 석화가 눈을 슬며시 떴다. 창에 기댔던 이마가 지끈거리는지 손으로 그 부분을 문지르기까지 했다.

“도착……했어요?”

이어 배낭 안에서 칼로리가 높은 초코바 하나를 꺼내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석 박사. 오양석 집이 어딘지 주소나 내놓고 여기 군인 아저씨들하고 기다리고 있어.”

생수로 입을 헹군 석화가 새까맣고 어둡기만 한 저 앞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국가 재난 상태가 철회되지 않은 만큼 전력을 아껴야 하기에 밤낮으로 불이 들어오는 곳은 그린, 블루, 그리고 인디고 구역뿐이었다. 마침 손톱달이 떴기 때문일까, 손전등이 없으면 다니지도 못할 만큼 어두웠다. 석화는 이내 입술을 열었다.

“……그럴게요.”

곽수환이 뭐 이딴 박사가 다 있냐는 듯 기가 차 했다. 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석화를 손으로 막고는 액셀을 밟았다.

“뭐 하는……!”

갑작스러운 속도에 지프 타이어가 헛바퀴를 돌았다.

“철조망 안 치우고 뭐 해!”

그가 외치자 과열된 엔진 소리를 내던 지프가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열리기 시작한 철조망 사이로 차가 빠져나가고, 차체에서는 경고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삐-삐- Emergency, Emergency, 13 레드 구역에 진입하셨습니다. 차를 돌려주세요. Emergency, Emergency, Emergency.]

“누가 몰라.”

곽수환이 내비게이션에 달린 비상 알림을 꺼버리고는 한 번 더 액셀을 세게 밟았다. 옆을 보니 석화가 벨트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걱정 마.”

“……네.”

한 마디쯤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네, 란다. 곽수환이 소리 내서 웃었다.

“내가 술 가지러 들어왔던 날, 여기 있던 아담들 거의 전멸했거든.”

그 말대로 아직 남은 아담이 있을지도 모르기에 레드 구역으로 지정한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석 박사 운 좋은 줄 알아. 지금 레인보우 시티에 나 정도 되는 놈은 나 하나라고.”

“오양석 박사님, 곽수환 소령님이 죽인 거 아니죠?”

석화는 담담하게 물었다.

“누가 그래? 또 어떤 개가 헛소문을 흘리고 다녀? 하긴 그 영감 술친구가 나 밖에 없었으니 이상한 소문이 날만도 한데, 그거 말고 헛소문이 하나 더 있거든? 내가 석 박사 뒤통수 잡아서 국에다가 처박았다는 거. 그것도 헛소문인 건 알지?”

“네, 압니다. 나머지 소문 하나는 진짜인 것도요.”

“뭐?”

“제 입에 곽수환 소령님 발기한 생식 기관 가져다댄 거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에 가려던 발을 막고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말은 바로 하자고. 닿지도 않고 떼어냈거든.”

“왜 내 입에 가져다댔어요?”

어두운 도로를 밝히는 불은 헤드라이트뿐이었다. 곽수환은 의아한 얼굴로 석화를 돌아보았다. 석화는 모포를 차곡차곡 접어서 배낭에 넣고만 있었다. 차 내부가 어둡지만 무표정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통통해진 배낭의 지퍼를 채운 석화는 곽수환이 꺼버린 내비게이션을 다시 작동시켰다. 그리고는 오양석 박사의 본가 주소로 길안내를 시작했다. 200m 전방에서 우회전을 하라는 지시가 나오니 곽수환은 핸들을 그쪽으로 틀었다.

“꼭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닌가 본데.”

“네.”

그의 말대로 석화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기했을 테고 손으로 처리하기는 싫었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석 박사, 발기는 잘 돼?”

“……됩니다.”

“돌처럼 무미건조해서 밤일은 제대로 할까 싶어서.”

“돌은 무미건조하지 않은데요? 수분도 있고요.”

“아~ 그래서 그 소중한 돌을 모아서 남의 양말에 담으셨나.”

“양말은 왜 줬어요?”

위험지역을 달리면서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닌 것 같지만, 또 못하라는 법은 없었다.

“어떤 머저리가 추워 죽겠는데 맨발로 모래를 파고 있기에 동정심이 일어서?”

불현듯 시선을 내려보니 운동화를 신고 있긴 했는데, 여전히 양말은 보이지 않았다.

“양말에 원한이라도 졌어?”

“발에 열이 많아요.”

발에 열이 오르면 머리가 금세 아파지기에 추워도 양말을 거의 신지 않고는 했다.

[근처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 안내음에 곽수환은 상향등을 켜서 주변을 더 넓고 밝게 비췄다. 천천히 차를 몰면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둘러봤다.

“정확히 어느 집인지 알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어요.”

오양석 박사는 석화를 나름대로 예뻐했다.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는 이따금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기도 했다. 부인은 상냥했으며 그들의 아들인 오청운은 석화의 직속 선배였다.

“저기, 정원이 있는 집이에요.”

석화가 검지를 들어 대각선 방향에 있는 집을 가리켰다. 종아리께 오는 낮은 펜스가 둘린 집이었는데, 의아한 건 창문과 문에는 쇠창살이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레드 구역으로 지정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안전지대일 때부터 장치를 해뒀다는 거다. 물론 미리미리 대비하는 집들도 있는 편이라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석화가 벨트를 풀고 배낭을 메니, 조수석에 앉은 몸이 더 앞으로 튀어 나왔다.

“일단 차에 있을까요?”

“왜. 아담이 달려들면 석 박사가 나한테 민폐라도 끼칠까 봐?”

“아뇨, 죽기 싫어서요.”

덤덤하게 말하니 곽수환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그럼 나랑 같이 내리는 게 나아. 어차피 차로 헤집고 돌아다녔는데도 아담 새끼들이 안 나오는 걸 보면 정말 전멸된 것 같기도 하고.”

제복의 케이프를 떼어내 뒷좌석으로 던진 곽수환이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자 석화가 바닥으로 풀썩 내려왔다.

기괴한 아담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도 아니건만 막상 두 다리를 내려놓으니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빈 도시를 감싸고 있는 적막감은 기이한 고독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석화는 알고 있다. 그나마 생기가 돌던 때의 이 도시를.

오양석 박사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 식탁에 앉아있노라면, 박사가 키우던 덩치 커다란 개와 고양이가 다가와 애교를 부렸고,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곧잘 들려왔다. 아담이 나타나기 전의 세상은 늘 그랬을 것이다. 어느 날 침공해온 외계인도 아닌,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자 괴물이 그 평화를 깨부쉈다.

곽수환은 바람에 날아온 쓰레기를 발로 걷어차고 현관 부근에 섰다. 군용품인 검지손가락 길이의 휴대용 손전등으로 주변을 휙휙 비춰봤다. 마지막으로 비춘 곳은 현관문이었으나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총 줘봐.”

석화는 총을 주는 대신 손을 뻗어 도어락의 덮개를 열었다. 배터리가 다 닳았는지 푸른빛이 경련하듯 점멸하고 곧 사그라졌다.

“비밀번호 알아?”

“알았는데, 소용이 없겠네요. 총 드릴 테니 총기 사용 보고서는 곽수환 소령님께서 직접 작성해주세요.”

콰직-!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던 곽수환이 문고리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힘쓰기는 싫었는데 보고서 쓰기는 더 싫거든.”

이 소령이나 곽수환 소령, 그리고 그 외에 살아남은 몇몇 군인이 맨손으로 아담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평범한 육체를 탈피해 진화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 인류가 이 땅에 나온 때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진 진화는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석화는 잠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자신은 진화를 한 게 맞는 건가? 남들은 제 머리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저 자신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입력된 매크로처럼 연구를 반복할 뿐이었다.

석화는 숨을 작게 들이켰다가 내쉬면서 곽수환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행여나 어지럼증이 일어날까 봐 정신을 바짝 다잡았고, 그나마 차에서 잤던 게 도움이 됐던지 다리가 무겁지는 않았다.

“2층 서재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오양석 박사님 서재에 중요한 연구 자료들이 많거든요.”

“그 영감 죽고 나서 이미 헌병대가 한 차례 쓸고 갔을 텐데.”

“아마 제가 아는 곳까지는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삐걱, 삐걱,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석화는 곽수환의 뒤에 바짝 붙었다. 빙글 몸을 돌려 그의 등에 자신의 등을 맞댔다. 총을 꺼내 양손에 쥐고 그가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뒷걸음질로 계단을 탔다.

“석 박사, 지금 대체 뭐 해?”

갑자기 우뚝 멈춰 선 곽수환이 도통 모르겠다는 말투를 내뱉었다.

“엄호하는 건데요.”

이번에는 석화가 의아해했다.

“꼴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뒤로 올라오다가 나자빠지지 말고, 그냥 바짝 붙어서 제대로 따라오기나 해. 그리고 그건 집어넣고. 괜히 나 쏠라.”

석화는 자신이 쥐고 있던 총을 보더니 얌전히 홀스터에 꽂았다. 다시금 삐걱대는 나무 마찰음만 들려올 뿐, 아담 특유의 목을 긁는 짐승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이 이렇게 굳게 잠겨 있었으니 누군가가 침입할 수는 없었겠지.

조금 더 빨리 걸을 수 있었으나 곽수환은 행여 약골 박사가 휘청댈까 걸음을 맞췄다.

“여기서 왼쪽이요.”

계단을 올라와 왼쪽 첫 번째 방이 오양석 박사의 서재였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기에, 곽수환이 먼저 들어가 주변을 손전등으로 확인했다.

클리어. 가볍게 말을 하더니 손전등 끄트머리에 돌돌 말려있던 끈을 풀어서 조명등이 있던 자리에 매달았다. 형광등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주변이 환하게 변했다.

석화는 오양석 박사의 책장으로 걸어가 손으로 죽 훑으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책상에 걸터앉아 삐딱하게 세워둔 액자를 들었다.

밝게 웃고 있는 노인네와 그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고교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찍은 지 꽤나 오래된 사진 같아 보였다.

곧 흥미를 잃고는 석화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대체로 느릿하던 석화가 웬일로 빠릿빠릿해 보였다. 얇은 책 몇 권과 연구 자료로 보이는 것들을 제 배낭에다가 쑤셔 담고 있었다. 안이 꽉 차 잘 들어가지 않는지 모포를 꺼내 어깨에 두르고는 마저 자료들을 담아나갔다.

“곽수환 소령님.”

배낭을 메고 일어나는 석화의 모습이 힘겨워보였다. 툭 건드리면 배낭 무게에 뒤로 나자빠지지는 않을까 싶었다.

“끝났어?”

“거기서 일어나세요.”

석화가 다가오더니 커다란 책상을 밀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곽수환이 대신 책상을 휙 밀었다.

“하, 영감이 지 집에다가 땅굴을 파놨나.”

책상에 가려져 있던 바닥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석화는 그걸 또 힘겹게 들어 올리려다 팔짱을 끼고 있는 곽수환을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뭐?”

열어달라는 듯 그 자리에서 물러난 석화가 배낭끈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하지도 않았는데 인사부터 받는 건 또 무슨 상황이야.”

끼긱, 손잡이를 잡고 바닥의 문을 들어 올린 그때였다.

타다다다닥-!!!

무언가가 계단을 달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곽수환이 재빨리 석화의 멱살을 잡아서 뒤로 밀어버리고, 덤벼드는 것의 목덜미를 잡아들어 올렸다. 아담 특유의 괴성을 질러대는 놈이 곽수환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다.

“……선배?”

바닥에 나자빠졌던 석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친 듯이 경련하던 몸이 마치 정지한 것처럼 멈췄다.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던 놈은 곽수환의 손목을 제 두 손으로 쥐었다.

“……서, ……화……?”

놈의 입에서 불분명한 발음이 새어나왔지만 곽수환도 분명 들었다. 석화는 놈을 선배라고 불렀고, 놈은 석 박사의 이름을 불렀다.

“서, 선배?”

석화가 바닥을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저도 아담이 공격을 해온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달려든 이는 다름 아닌 오양석의 아들이자 자신의 선배인 오청운이었다.

“……화야…….”

선배가 손을 뻗으면서 애타게 불러왔다.

“……그어……. 숨……. 막……힌다. 서……ㄱ……화야.”

놔주라고 말을 해야 하나? 정말 선배가 맞는 건가? 석화는 삽시간에 혼란에 사로잡혔다.

“석 박사, 손전등 가져와봐.”

그의 선명한 목소리에 석화는 전등에 매달려 있던 손전등을 그에게 넘겼다. 목덜미를 제압한 채로 비춰보니 눈의 실핏줄은 다 터져 있었고, 입술 또한 굳은 피로 엉망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 돼.”

“네.”

석화는 한 걸음 물러난 상태로 다시 권총을 꺼내 쥐었다.

“아니, 그 총은 좀 집어넣고. 지금 이 거리에서 나랑 이 자식 잘 가늠해서 쏠 수 있겠어?”

그래도 안 들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다시 집어넣지 않았다.

“지금 이놈 상태 보면 아담이 맞는 것 같지?”

“겉으로 보기는요.”

“근데 아담이 우리처럼 말을 할 수 있었어? 그런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있었느냐고.”

“……제가, 제주도로 가기 전까지는 없었어요. 그리고 아직 다른 연구원들에게 그런 말은 못 들었고요.”

목이 잡혀 있던 오청운이 그어어, 하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소리만 내더니, 곧 숨이 막힌다는 말을 반복했다. 삐쩍 마르다 못해 미라 같은 몰골이었다. 그러나 처음보다 발음이 점차 정확해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곽수환은 제복 안쪽의 무전기를 꺼내 입에 가져다댔다.

“코드 넘버 3121 곽수환 소령이다. 13 레드 구역, 오양석 박사의 자택에서 아담으로 예상되는 놈을 발견했다. 변이중인지 뭔지는 몰라도 대화가 가능한 듯하다. 아담 회수 지원팀 지금 당장 오기를 요청한다.”

[카피 댓.]

무전 건너편에서 곧장 확답이 돌아왔다.

“계속 그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석화는 혼란스러워했다. 사람인가? 아담인가? 혹시 오양석 박사가 죽고 난 뒤 선배가 슬픔에 미쳐버린 건가?

크으어어어! 크르윽……. 흐으…… 크아악!

곽수환은 다시금 발광하며 공격하려는 놈을 그대로 벽으로 몰아붙였다. 피로 젖은 이를 닥닥거리며 사람을 물어뜯으려 하는 이것은 이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자신도 모자라 뒤에 있는 석화를 향해 눈을 번들거리는 아담일 뿐이었다. 곽수환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뒷주머니의 칼을 꺼내 아담의 안구에 찔러 넣으려는 때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나이프를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는 잠시 석화를 돌아봤다.

“아는 사람이라고 했지?”

석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이거 아담 맞지?”

상황판단이 1초라도 늦는다면 아담이 되는 건 자신들이었다.

‘아담으로 의심되는 것에는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마라. 즉각 사살해라. 그것이 네 부모일지라도 그들은 더는 사람이 아니다.’

교육 센터에서 수없이 배웠다. 그러나 감정이 앞서 그 쉬운 판단을 쉽게 내리지 못해 인류는 전멸할 뻔했다.

“석 박사.”

자신은 없으나 한 번 더 고개를 끄덕했다. 날뛰는 아담을 앞두고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일 자체도 당혹스러웠다. 통제가 되지 않는 곽 소령을 왜 군부에서도 쉬이 놓지 못하는지, 장 중령이 그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감싸고도는 이유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달려드는 아담에게서 타인을 보호했을 뿐더러 또 단번에 제압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진작 선배에게 목숨을 잃었을지도.

“석 박사, 나 원망하지 마. 원래 이놈들은 다 누구의 아는 사람들이고 이웃이고 가족이었어.”

푹, 곽수환이 아담의 숨통을 끊었다. 정확히는 신체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

[아담 7차 변이 보고서: 아담에게 지능이 생긴 것도 같다.]

여의도 쉘터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석화는 오양석 박사가 개인적으로 작성해둔 연구서를 확인했다. 그러다가 배낭에서 초코바 하나를 더 꺼내서 먹고는, 알약도 하나 씹어 먹었다. 한 통 가득 담아온 생수가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쉬 안 마려워?”

“안 마렵습니다.”

“난 마렵거든.”

그린 구역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곽수환이 차를 세우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석화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아담이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내 ……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차마 이름을 적어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석화는 말을 하기 시작한 아담이 누구인지 쉽게 유추했다. 오양석 박사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선배였을 것이다.

[에덴동산 놀라운 사실. 상부는 원하지 않는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뒷장으로 넘겼지만 더는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올라탄 곽수환은 물티슈로 제 손을 닦는 중이었다. 대체로 무표정한 석화이건만 이번만큼은 눈을 두세 번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무데나 볼일을 보는 사람이 볼일을 보고 손을 닦는다니…….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반대편 차선으로 아담 회수팀 차량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들이 밝혀대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곽수환의 매끈한 얼굴로 음영이 졌다.

“아무래도 석 박사가 연구한 그 주사에 부작용이 있는 것 같아.”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그가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잘생겼다는 말을 해대고는 했다. 석화도 문득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을 가볍게 쥔 곽수환이 석화를 향해 말을 이었다.

“자꾸 발기하잖아.”

석화는 곧 방전된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곽수환 소령님.”

눈을 감고는 애써 목소리를 짜냈다.

“내 입에……. 가져다대지 말아요.”

배낭에 두 손을 올려두고는 입을 벌린 채 또 금세 잠이 들었다. 핸들에 팔을 올리고 석화를 보던 곽수환이 짧게 웃었다.

자동차에는 다양한 연비가 존재했다.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연비가 안 좋은 경우도 왕왕 있었고, 생긴 건 폼이 나지 않아도 기름비가 절약되는 차종도 수많았다. 곽수환이 타고 다니는 지프는 군용으로 지급된 것으로 연비가 상당히 좋았다. 기름과 전력 등을 극도로 아끼는 시대였지만 큰 불편함은 없었다. 적어도 그린 구역에서 사는 이들은 그렇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석 박사는 연비 한번 똥이지.”

기름은 왕창 잡아먹지만 생긴 건 눈 돌아가게 예쁜 차 말이다.

곽수환은 쉘터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시동을 끄지 않은 채였다. 핸들에 팔을 기대고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석화를 감상했다. 지프에 기름이 소모되는 에어컨 기능은 없지만 히터는 문제없이 잘 나왔다. 지하 주차장의 차가운 온도와 차 내부의 열기, 그리고 두 사람이 내뱉는 숨으로 창은 점차 뿌옇게 변해갔다.

점차 아래로 내린 시선이 곧 석화의 허벅지에 다다랐다. 돌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만큼이나 소중하게 보고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저건 오양석의 서재에서 가지고 나온 연구보고서가 아니라 아담이 튀어나온 지하에 있던 서류였다.

***

“내려가 볼 거야?”

곽수환은 아담의 신체가 완전히 정지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른 쪽 눈에도 칼을 찔러 넣었고, 한 바퀴 돌린 뒤에 빼낸 칼을 휙 털어냈다. 석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원래 현장이란 다 이 모양이었다.

“석 박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벽에 붙어있던 석화가 그 벽을 타고 곽수환에게로 다가왔다. 아담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지 널브러져 있는 몸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내려……가봐야겠어요.”

손전등을 다시 쥔 곽수환은 아담이 튀어 올라온 지하 계단을 비췄다. 또 다른 놈들이 있다면 이미 달려들었을 테지만,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곽수환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체 썩는 퀴퀴한 냄새가 지하에 가득 고여 있었기에 뒤따라 내려가는 석화도 입으로만 숨을 쉬었다.

손전등으로 비춰본 지하 바닥은 여기저기에 변색된 피가 흩뿌려져 있었고, 저 끝에는 끊어진 쇠사슬도 보였다. 스탠드가 꺼진 책상은 마치 방금까지도 사람이 있었던 듯 펜과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놓은 펜은 이미 저 바닥의 피처럼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석화는 책상으로 다가가 연구 자료를 다시 배낭에 넣기 시작했다. 행동이 재빨라진 이유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담인가, 정말 아담이었나? 박사님이 죽고 나서 지하에 갇힌 선배가 굶주림에 미쳐 아담처럼 보인 게 아닐까? 분명 말을 했잖아?

어쩌면……. 사람이었던 선배를 죽인 걸지도 몰라.

곽수환 소령이 아담이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끄덕거렸으니 그와 공범인 셈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배낭의 끈을 더욱 꽉 쥐었다.

“이제 올라가요.”

이번에도 곽수환이 먼저 앞장섰고 석화도 그의 뒤를 따랐다. 머릿속에서는 인간인가 아담인가 하는 물음이 수없이 교차됐다. 석화는 같은 자리에 쓰러져 있는 선배에게 다가가 그의 혈액을 채취해가려 했다.

“그런 소문이 있었어.”

석화의 팔을 곽수환이 붙잡았다.

“소문이요?”

“노인네 아들이 아담이 되었다는 소문 말이야. 아들놈이 바이올렛 구역에 다녀온 뒤로는 연구실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거든. 다들 노인네한테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단 말이지? 그때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더라고. 이 꼴을 보니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네. 박사라는 작자가 제 아들이 아담으로 변이했다고 죽이지도 못하고 가둬놨나 본데.”

“아담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래? 그럼 난 이제 술 도둑에서 살인자가 되는 거고?”

곽수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기에 그만큼은 선배를 아담이라 확신한다고 느꼈다. 그 덕분에 석화는 불안한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아담 회수팀이 온다고 했으니 내가 살인마인지 아닌지는 그때 알게 되겠지.”

“만일 선배가.”

“석 박사.”

곽수환이 말을 잘라냈다.

“석 박사가 죽이지 말라고 해도 죽였을 테니까 결과는 같았을 거고, 이게 범죄라면 내 단독범행이야.”

그가 배낭끈을 위로 휙 들자 발끝으로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상태로 지프까지 내려갔고, 돌아가는 길에는 오양석 박사가 지하에 남긴 자료들을 보고 확신했다. 아마도 곽수환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그러다 방전이 된 몸을 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을 때, 오랜만에 오양석 박사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오양석은 무언가를 급히 서류 가방에 담고 있었다. 불안하게 연구실 주변을 두리번거린 오양석이 재빠르게 기둥을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는 때였다.

타앙! 단 한 발의 총성이 들리더니 박사가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주변으로 검붉은 피가 면적을 점차 넓혀 나갔다. 검은 옷에 검은 구두를 신은 남자가 오양석의 시체로 다가가 박사가 안고 있던 서류 가방을 쓱 빼냈다. 가방에 묻은 피를 닦아낸 남자는 그제야 검은 마스크를 끌어내렸다.

바로 곽수환 소령이었다.

“헉!”

퍼뜩 눈을 뜨자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빼내려는 다른 손이 보였다. 그 손에 검붉은 피가 묻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지만, 검은색 가죽 장갑일 뿐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꿈속에서 오양석 박사의 서류 가방을 가져가던 그와, 지금 곽수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바람에 경계심이 솟았다.

“이게 뭔지 나도 한번 볼까 싶어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며 석화는 잠기운을 물리쳐 나갔다. 곽수환이 봐도 상관은 없지만 꿈 때문에 괜스레 찜찜했다. 하긴 그래봐야 꿈일 뿐이지 않나? 굳이 고집을 피울 필요도 없어서 그에게 연구 자료를 내밀었다.

그는 반대로 내민 자료는 보지도 않고 시동을 껐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차가 밀릴 일은 없으니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저를 깨우지 않은 것이다. 석화는 먼저 내린 곽수환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곽수환 소령님.”

곽수환은 왜 부르냐며 뒤를 돌아봤다. 조금 주저하는 기색을 보니 고맙다 또는 고생했다는 뭐 그런 변변찮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저도 공범이 되겠습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석 박사, 그쪽이 입을 헤 벌리고 주무시는 동안에 아담 회수팀한테서 무전이 왔거든요. 헌병대가 날 가만히 놔둔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아?”

“아담이 확실하대요?”

“그것보다 우리 둘 머리가 정상이냐던데? 아담이 어떻게 말을 하냐고.”

맞다. 자신도 누군가가 아담이 말을 했다고 하면 믿지 못했을 테니까.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신분을 확인받은 뒤, 곽수환은 저희들의 방이 있는 층을 눌렀다. 그런데 석화가 연구동이 있는 층을 추가로 눌렀다. 나직하게 한숨을 쉰 곽수환은 제가 누른 층을 취소했다.

“실컷 재워놨더니 연구실로 가겠다고.”

[18층, 개방합니다.]

곽수환의 말과 동시였다. 엘리베이터가 18층에 서더니 문이 열렸다.

“어?”

제복을 입은 소령이 안으로 발을 딛다 말고 놀란 눈을 했다. 이내 하하 하고 웃자 술 냄새가 거나하게 풍겨왔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비번인 곽수환의 동료이자 육군 소령인 양상훈이었다.

“이게 누구야, 곽 소령이 아니신가.”

양상훈은 27층을 누른 뒤에 후우, 곽수환의 얼굴에다 대고 입김을 불었다.

“술 냄새 죽이지?”

마시고 싶지? 낄낄대면서 술주정을 부렸다. 입에 주먹을 처박아 주고 싶은 욕구가 물씬 차올랐으나 이 좁은 박스 안에서 싸움을 벌였다가는 석화가 놀라 죽을 수도 있었다. 민물 가재는 아니라지만 행여 어디라도 잘못 맞는다고 생각하면, 장 중령의 잔소리도 끔찍하다.

“석 박사, 여태 모은 돌 중에 비석으로 쓸 만한 거 있어?”

“그렇게 큰 건 없는데요.”

석화는 고개만 한 번 저었다.

“그럼 저 새끼 묘비석은 조약돌로 해야겠네. 좆만이 양상훈, 술 마시고 곽수환한테 시비 털다가 이곳에서 뒈지다. 거시기도 조약돌만 해서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뭐? 새끼야! 내 거시기가 얼마나 큰지 까봐? 어?”

그러면서 바지 지퍼를 내리고는 아랫도리를 휙 내밀었다. 곽수환이 서둘러 더러운 것을 발로 짓밟아 주려고 군화를 들어올렸다.

“조약돌보다는 크네요.”

무표정하게 대꾸하는 석화에게 양상훈은 꼬리를 흔들듯 자신의 것을 흔들어 보였다.

“그치? 내 거는 바윗돌이거든? 어? 근데 내 사이즈를 인정한 당신은? 아니! 우리 쉘터에 이런 얼굴이!”

양상훈이 얼굴을 들이대자 곽수환이 앞을 막고 섰고,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도 열렸다.

“바윗돌 깨지면 모래알이었지?”

곽수환은 군홧발로 꾸욱 양상훈의 하반신을 밀어서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내버렸다.

“아아악! 씨발! 야! 아악!”

짓밟힌 아랫도리를 붙들고 버둥거리던 양상훈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려는데 때마침 문도 닫혔다. 얼마나 마셔댄 건지 아직도 이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석 박사, 술 마시면 저런 게 개지. 내가 아니라.”

“곽수환 소령님.”

34층에 도착하자마자 석화가 그를 불렀다.

“먼저 자라는 말 같은 건 집어치우시고. 나 어차피 석 박사 방으로 갈 때까지 지켜야 되니까.”

“바윗돌 깨지면 돌덩이예요. 돌덩이 깨지면 돌멩이고요.”

레드 구역에서는 제 뒤에 바짝 숨어있던 석화가 연구동에 와서는 먼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씨발, 누가 돌 박사 아니랄까 봐 돌 타령은.”

***

엘리베이터 안에서 한 차례 가벼운 소란이 있었지만 석화는 아직도 마음이 좋지 못했다.

아담 회수팀으로 다시 한번 확인을 요청했고, 그 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리에 있던 약통 중 두 번째 자리에 있는 알약을 꺼내 먹었다.

[체력 보강용 임상 2]

체력 보강을 위한 임상시험 알약은 석화의 자리에 총 6통이 있었다. 그럼에도 좀체 군인들처럼 체력이 좋아지는 일은 없었다.

오양석 박사가 남긴 연구서.

정확히는 7차 아담 변이 일지는 군데군데 피가 묻어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 알지 못했으나 아마 선배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아담의 피라면 꺼림칙하지만, 말라붙은 이 피로 전염이 되는 일은 없었다.

아담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생명체, 즉 신체의 기능이 정지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활발하게 전염되는 항원이었다. 아담의 피를 먹었다고 해서 감염이 되는 것도 아니었으며, 바이러스가 혈액에 침투했을 때만 해당됐다. 게다가 오양석 박사는 분명 저와 함께 돌연변이 연구도 같이 진행해왔었다. 특이점을 가진 군인들을 상대로 연구를 해왔는데, 의아하게도 곽수환의 자료는 없었다.

석화는 저녁을 먹지 못한 대신 콩을 갈아 만든 샌드위치를 먹다가 전화기를 봤다. 깜빡거리는 불이 들어오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네, 연구동 석화입니다.”

[아, 석화 박사님? 다름이 아니고 13 레드 구역에서 회수한 시신 말입니다. 정말 아담이냐고 물어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정말 아담이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혈액응고 반응만 봐도 아담의 혈액이고요. 그런데 곽수환 소령님도 똑같은 질문을 하셨는데, 정말 아담이 말을 했습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다고요?]

아담 회수팀 측에서 미심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이 맞다면 이만 끊겠습니다.”

[잠시만요!]

다급하게 외치는 바람에 석화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그냥 귀에 붙이고 말았다.

[아씨, 끊었나 본데요? 곽 소령은 그렇다 쳐도 박사는 얘기가 또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나 상대방은 끊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이나 뱉어냈다.

곽 소령은 그렇다 쳐도 박사는 얘기가 다르다는 말은 뭐지? 석화는 좀 더 수화기를 귀에 꽉 가져다댔지만 뚝, 상대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만 들렸다. 떼어낸 수화기를 물끄러미 보던 석화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았다.

석화는 책상에 있던 진주처럼 동그랗고 오묘한 색을 가진 돌을 손에서 굴렸다.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 일지들을 순서대로 놓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에 수없이 많은 종이를 하나둘씩 읽어 나가려고 했다.

체력은 남들보다 뒤지는 대신 다행히 한 번 본 것은 마치 사진처럼 뇌에 저장되고는 했다. 오양석 박사의 일지는 순차적이지 않고 내용도 듬성듬성 비어있었기에 시간이 좀 걸리리라 예상했다.

곰곰이 생각해도 아담이 말을 한 건, 곽수환의 말대로 우리 둘 다 미쳤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선배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찌르릉, 찌르르릉-

일지를 내려다보던 석화가 고개를 들었다. 연구실 밖에서 누군가가 연거푸 벨을 눌러대고 있었다. 석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기둥이 있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여기서 투명한 유리창을 물끄러미 내다보니, 제복 차림의 곽수환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석화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혹시나 총이 들려 있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아직 남은 꿈의 잔해 때문이었다.

정작 곽수환은 한 손에는 위스키 병을, 나머지 손에는 잔 하나를 쥐고 있었다. 대체 뭐냐는 듯이 쳐다보자 씩 웃으며 턱짓으로 문을 열라는 시늉을 했다.

석화는 문을 열어주는 대신 월패드 스피커에 대고 운을 떼었다.

“무슨 일입니까?”

[석 박사 위로주 가지고 왔는데.]

그는 유리문 너머로 위스키 병을 흔들어 보였다.

“저는 술 안 마시는데요.”

[나 이거 양 소령한테 힘들게 얻어온 건데, 같이 좀 하지?]

석화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곽수환 소령님 신원인식부터 해주세요.”

그가 자신의 손가락 다섯 개를 유리문에 가져다댔다.

<레인보우 시티 소속 32세 곽수환 소령>

‘출입을 허가하겠습니까?’라는 알림도 월패드에 같이 떴다. 석화가 허가하자 이중 유리문이 순차적으로 열렸다.

“석 박사 생각보다 정 없네. 그냥 열어주면 되지, 뭘 신원확인까지 해?”

느슨하게 걸어오는 것 같았으나 군화 소리는 또박또박 들려왔다.

“여기서 오양석 박사님도 돌아가셨으니까요.”

“뭐, 조심하는 건 나쁘지 않지.”

“근데 왜 들어오려고 한 겁니까?”

“진짜 위로주 주려고 온 거라니까.”

석화는 흘끔 연구실을 돌아봤다가 다시 밖을 가리켰다.

“그럼 연구실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일하려던 거 아니었어?”

“맞습니다.”

곽수환은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위스키 뚜껑을 열었다. 잔을 채워서 석화에게 내밀고 저는 병째로 몇 모금 들이켰다.

“일해. 난 석 박사 안주 삼아서 술 마실 테니까.”

위로주는 무슨. 저를 방패 삼아 술을 실컷 마시겠다는 심보 같았다. 다시 내쫓을까 하다가 열어준 건 저이니 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철컥,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반자동권총인지 그 한 번의 소리로 끝이었지만, 석화는 제 권총을 어디다가 두었는지 생각해내고는 낭패한 기분을 맛봤다. 돌아오고 나서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던 것이다.

어째서 곽수환이 권총을 장전했는지는 모른다. 그건 살해당한 오양석 박사도 마찬가지였겠지. 오양석 박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곽수환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열람 기록이 남았다는 거다. CCTV는 그렇다 쳐도 출입을 관여하는 메인 서버인 마더(Mother)가 꺼지는 일은 없었다. 쉘터의 핵심 시스템이니까.

그렇기에 오양석 박사가 살해당한 날도 출입 기록은 문제없이 남아 있었다.

석화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뒤를 돌았다. 행여 총구가 자신에게 향해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으나 곽수환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여전히 술병과 빈잔 하나뿐이었다.

“곽수환 소령님.”

“왜?”

곽수환이 위스키로 젖은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였다.

“방금 왜 총을 장전한 겁니까?”

석화는 늘 그랬듯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총?”

“예,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곽수환이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가 다시 술을 들이켰다.

“내 이것도 총이 맞기는 한데.”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는데 정확히는 풀어진 벨트였다. 제복의 벨트를 푸는 소리를 총을 장전한 것으로 착각했던 거다. 조금 민망해진 석화는 다른 변명은 하지 않고 저의 책상으로 걸었다. 뒤에서 느릿하게 따라오는 곽수환이 어이없다는 듯 목을 울렸다.

“알고 보니 석 박사님이 피해망상도 가지고 계셨네.”

“꿈을 꿨거든요. 곽수환 소령님이 오양석 박사님을 죽이는 꿈을요.”

“개꿈이네.”

“그런 것 같아요.”

석화가 깔끔하게 인정하면서 위스키잔을 책상에 내려두었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말 위로주라면, 생각 이상으로 곽수환은 다정한 면도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봤던 쉘터의 여타 군인들과는 다른 듯도 했다.

군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한때 인간이었던 자들을 거침없이 죽여야 했다. 그 때문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거나, 견디지 못하고 제대한 군인들도 있었다. 제대라는 건 다른 말로 그린 구역에서의 퇴출이나 다름없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군대에 몸담고 있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석화는 오양석 박사의 일지를 확인하는 대신 잔을 들었다. 혀를 뾰족하게 내밀어서 맛을 봤는데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는 이상한 맛이었다.

“누가 누구보고 개래.”

다가온 곽수환이 혀로 술을 할짝거리는 석화를 가리켰다.

“곽수환 소령님이 다 드세요. 저는 이 정도면 됐습니다.”

석화가 잔을 내밀었지만 곽수환은 제 병에 있는 술만 마셨다. 그는 석화의 책상에 걸터앉아 늘어놓은 일지를 눈으로 내려다봤다.

“제가 출입을 허가해드리기는 했는데…….”

말을 하다 말고 그사이 연료가 소모됐는지 먹다 남은 콩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삼켰다.

“제가 허가한다고 해도 중앙 제어 시스템에서 허가가 떨어지지 않으면…… 들어올 수가 없거든요.”

쉘터에 소속된 군인이라도 중요한 자료가 있는 연구실을 함부로 드나들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곽수환은 출입이 허가된 군인 중 하나였다.

“소령 따위가 꼴에 상급자 취급 받는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저렇게 마시면 금세 취할 텐데……. 벌써 위스키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적은 없습니다. 단지 신기해서요.”

“그만큼 내가 엄청난 인재라는 거니, 그 더럽게 맛없는 단백질 샌드위치나 마저 드시죠.”

“조금 전에 아담 회수팀하고 통화를 했는데요, 정말 아담이 맞았다고…….”

“우리 둘 다 이거 취급당하겠던데.”

곽수환이 검지를 들어서 관자놀이에 대고 빙빙 돌렸다.

석화는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하고 운을 떼려다 말았다. 자신이 헛것을 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내용의 맥락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으니 말을 꺼내봤자였다.

“오양석 아들이 아담인 건 확실했지만 그 와중에 말을 했지. 그래서 석 박사가 마음에 담아뒀고, 지금도 찜찜해하고 있고.”

맞지? 하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잘 알던 사람이야?”

“박사님과 함께 몇 번 식사를 같이 한 사이였을 뿐,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석 박사는 사람보다 돌을 더 좋아하지.”

“아닌데요?”

그렇다고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돌보다는 사람이 좋단다.

곽수환은 두서없이 늘어놓은 오양석의 일지를 보다가 눈을 떼어냈다. 아담이라 확신했기에 죽이기는 했는데 저도 찜찜한 감은 있었던 탓이다. 여태 이 손으로 죽인 아담은 과장을 더해 시체만 쌓아놔도 쉘터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지만, 사람의 말을 구사한 놈은 없었다. 뭐, 그조차도 아담 바이러스가 재변이한 거라면 앞으로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과 아담을 구별하기가 힘들어질 테니까.

“알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고 그러면 원래 기분이 싱숭생숭해. 그러니까 그거 한 잔 쭉 들이켜고 잊어.”

예상치도 못했던 위로에 석화는 그저 잔만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잔잔했던 날 제주도 바다처럼 동그란 잔에 담긴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제야 손의 떨림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겁을 먹었었나? 먹었다. 선배가 그렇게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슬펐나? 슬펐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에는 감정이 크게 떠오르지 않을 뿐이었다.

“소령님.”

“응?”

“저 쓰러질 수도 있는데요.”

입가로 흐른 술을 손등으로 훔친 곽수환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제 간이 알코올을 잘 해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는 거라고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석화의 의중은 이해했다.

“석 박사, 인생 참 재미없겠어.”

석화는 호박색 술이 담긴 잔을 다시 지그시 내려다봤다. 곽수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손 떨림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러게요. 제 인생 별로 재미없습니다.”

석화가 안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숨도 쉬지 않고 마셨더니 알싸한 기운만 입술과 혀에 남았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던 때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그래도 막상 이렇게 마시니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아?”

곽수환은 놀란 눈으로 석화를 쳐다봤다.

“생각보다는요.”

목구멍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는 느낌만 빼면 나름 괜찮았다. 곽수환이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석화의 상태를 살폈다. 설마 죽지는 않겠지? 그런 시선 같았다.

“곽 소령님.”

“왜? 토할 것 같아?”

“아뇨.”

고개를 한 번 흔드니 골이 좀 어지러운 듯도 했다. 석화는 숨을 깊게 쉬었다가 뜨거운 숨을 길게 뱉어냈다.

“다행이네요. 세 번째 임상시험약이 나름 효과가 있었나 봐요. 소령님, 엉겅퀴라고 들어보셨어요? 거기에 대단한 약효 성분이 있거든요. 저도 술 한 잔 정도는 해보고 싶어서 엉겅퀴 씨앗에서 실리마린을 추출해서 간세포를 재생시키는 약을 만들어봤거든요. 위스키를 이렇게나 많이 마시고도 멀쩡한 걸 보면 성공적인 것 같아요.”

석화는 평소의 1.5배속이나 되는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얼굴도 점차 상기되고, 눈도 나른하게 풀려가는 중이었다. 엉겅퀴고 나발이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석화가 만든 약이 별 소용이 없다는 건 자명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몸도 점차 녹은 젤리처럼 늘어지는 중이었으니까.

“석 박사, 진짜 괜찮아?”

석화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의자를 끌고 가더니 펜을 쥐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간 보강용 임상 3]이라고 적힌 통을 들더니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는 건가 싶어서 지켜보는데, 글을 적다 말고 펜이 찍- 저 위로 올라갔다. 석화는 그대로 책상에 널브러져버린 뒤였다.

[위스키 약 150ml, 약 5분을 버티…….]

마치 다잉메시지 같았다.

***

정말 죽은 건 아닌가 싶어 검지를 길게 빼어 연방 석화의 코에 가져다댔고, 찬 수건으로 열이 들끓는 이마와 얼굴을 닦았다. 그럼에도 열은 좀체 내리지 않아 결국 석화의 와이셔츠 단추를 툭툭 풀어나갔다.

그렇게 땡볕에 돌 찾으러 돌아다니는 주제에 살은 하나도 안 탔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이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스윽 손을 내려서 움푹 파인 배꼽까지 내려가다가 확 주먹을 쥐었다.

세화해변에서 봤을 때는 제 취향이라고 생각했지만, 모지리였기에 양말만 주고 말았었다. 그런데 수석 연구원의 자리를 대신할 천재라니……. 손을 댔다가는 골치 아픈 일만 더해지겠지.

욕실로 가 수건을 찬물에 적시고 나와 셔츠를 마저 벗겼다. 팔을 들어 겨드랑이에 수건을 끼우려는데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맨들거리는 부분을 톡 손으로 건드리고는 수건을 끼워 넣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석화가 인상을 쓰면서 수건을 빼내려 했다. 곽수환은 석화의 팔을 교차시켜 잡고는 꼼짝도 못하게 막았다. 그대로 열이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석화가 그제야 슬며시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들어? 물 줄까?”

팔을 놔주고 물을 뜨러 가는데 등 뒤로 뭔가가 날아와 부딪혔다. 석화의 겨드랑이에 끼워놓았던 젖은 수건이었다.

“지금 열이 심해서,”

곽수환은 말을 하다 말고 눈썹을 난감하게 긁었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석화가 꿈틀거리면서 탈피를 시작한 것이다.

와이셔츠를 벗고, 바지와 함께 브리프도 끌어내렸다. 벗는 과정도 어찌나 느린지 허물을 벗는 동물 한 마리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기분이었다. 곧 전라가 된 석화는 팔다리를 대자로 벌렸다. 열이 많은 석화의 잠버릇 중 하나라는 걸 곽수환이 알 리는 없었다.

곽수환은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고는 뒤를 돌았다. 석화의 방으로 갈 수는 없으니 제 방으로 데려오긴 했는데 말이다.

“이거 봐. 진짜 개가 누군데.”

그렇다고 저 석화를 두고 나가기에는 내일 아침에 돌아왔을 때 변사체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석화는 분명 자신보다 연상인데도 뭔가 불안해 보였다. 체력이 너무 바닥이라 그런가. 아니면 오청운을 죽일 때 무표정했지만 허옇게 뜬 얼굴이 눈에 남아서 그런가.

곽수환은 수건 두 장에 다시 찬물을 묻혀 석화에게 다가갔다. 수건을 펼쳐서 상체와 하체를 덮어주고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갑자기 절실히 담배가 당겼다. 수중에 한 개비도 없었으니 남은 위스키만 연거푸 들이켤 뿐이었다. 불현듯 무드등이 깜빡거리면서 전력 공급에 이상이 있음을 알렸다. 가장 안전하고 부유한 쉘터라고 하지만, 전기가 나갔다 들어오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나도 인생 별로 재미없어, 석 박사.”

수건은 금세 석화의 열로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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