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l's paradise (2)
석화의 집안은 제주도 토박이였다. 증조부모 전부 제주도 사람이었다고 했고, 할머니 역시 제주도 출신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그날은 정말 끔찍했지. 저 육지에 있던 뱃사람들이 제 배를 끌고 제주도 항으로 몰려드는데, 군대가 돌아가라고 경고 사격을 했지. 그런데 그 사람들도 살려고 왔는데 돌아가겠어? 아비규환이 되려는 때에 군대가 그 사람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인 거야. 아담이 되어서 죽은 사람만큼이나 멀쩡한 사람도 수없이 죽었지. 푸르기만 했던 바다가 시뻘겋게 변했어.’
국가 1급 재난 상황이 선포된 건 아담이 나타난 해였고, 제주도와 울릉도 등 섬의 모든 선박과 해상은 군의 통제 하에 일시마비상태에 들어갔다.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은 지역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으나, 그만큼이나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섬으로 향한 이들도 수없이 희생됐다. 조모는 자신들은 운이 좋아서 살았을 뿐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
석화의 모친은 조부모가 느지막이 본 소중한 딸이었다. 조산하는 바람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지만, 병원은 예전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조부모가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냈으나 그 때문인지 몰라도 모친은 죽을 때까지도 늘 병약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석화를 낳은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지켜봐온 결과, 석화 학생은 감정이 없어 보여요.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사람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잖아요? 평범한 사람들과 조금 다른 사람들……이요. 석화 학생이 특출한 성적을 보였기에 연구센터가 운영하는 S클래스로 보냈던 건데, 거기서도 저와 마찬가지인 사견들이 많더라고요. 석화 학생은 혹시 감정이 결여된 게 아닌가 싶은데…….’
‘무례한 말씀이시네요. 석화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갖고 움직여요. 본인이 약하기에 사람들과 깊이 관계를 쌓지 않으려는 것뿐이에요. 깊은 관계가 되면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니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세요.’
‘어머니, 석화 학생은 S클래스 수업을 이수한 후에는 레인보우 시티 연구센터로 이동하게 될 거예요.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길어야 석 달이면 충분히 마스터할 수 있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인재입니다. 아시잖아요, 어머니. 석화 학생도 제주도에서 나가야 합니다. 지금이야 어머니가 계시니 몸이 약한 석화 학생도 무리 없이 살고 있지만, 서울……. 아니 레인보우 시티 연구센터로 이동하면 석화 학생도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쌓아야 해요.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이요.’
‘제가 있어서 석화가 무리 없이 살고 있다고요? 잘못 알고 계시네요, 박사님. 사실은 그 반대거든요.’
머리가 들끓었다. 할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제주도 교육 센터를 책임지던 박사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들어왔다. 새카만 바다에 잠긴 것처럼 목소리만 웅웅거렸다. 그러다 서걱, 서걱, 머리카락을 누군가가 잘라주는 감촉이 느껴졌다.
‘서울은 많이 위험할 거야. 그린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돼. 알았지?’
어머니가 머리를 단정하게 이발해주고는 어깨를 토닥였다.
‘널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돼. 네 안전이 최우선이야.’
‘……안 그래요.’
‘서울로 올라가면 연구 센터에 있는 사람들 중에 널 도와줄 사람을 꼭 만들어 놔야 해. 얼마 전에도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뇌진탕도 왔었잖니.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그럴게요.’
어머니는 석화를 걱정했지만 석화는 반대로 어머니를 걱정했다.
갑작스레 멀미가 몰려왔다. 배를 타고 제주도를 빠져나오던 날처럼 바닥이 요동치는 것만 같았다. 몸을 뒤척거리자 차가운 무언가가 이마와 몸에 얹혔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석화는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축축한 수건이었다. 눈을 떠 동공을 굴려 있는 곳을 확인했다.
푸른색 천장 그리고 창문이 없는 방, 현관 근처에 욕실이 있는 익숙한 형태의 숙소였다. 그러나 책상과 테이블이 있는 위치는 제 방과 달랐다. 책이 몇 권 쌓아 올려져 있는 테이블을 보다가 침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곽수환이 있었다.
곽수환은 의자에 앉은 채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보니 정확히는 읽고 있는 중이었다. 한 장, 두 장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열 장쯤 넘겼을까, 곽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석화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는 조금 커다랗게 눈을 떴다. 수건을 갈아줄까 하던 참이었다.
“깼어? 기분은?”
“……괜찮아요.”
석화는 쉽사리 일어나지는 못하고 누운 채로 대답했다.
“책…… 보세요?”
탁 하고 책을 덮은 곽수환이 한 손으로 책을 쥐었다.
“무식한 놈이 활자 읽는 게 이상해 보여? 편견은 좀 버리지 그래.”
테이블에 책을 내려둔 곽수환이 수건을 가져가서 다시 찬물로 헹구어왔다. 좀 전까지만 해도 곧게 펼쳐서 몸에 덮어주던 곽수환이 이번에는 툭 던지고만 말았다. 석화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제 몸에 그 차가운 수건을 올려두었다.
“석 박사 경호 노릇하라고 내가 옆에 있는 건 맞는데, 아무래도 이건 시중 같지?”
석화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간신히 앉았다. 제 몸이 전라인 상태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래도 수건으로 상체와 하체가 전부 가려져 있어서 창피할 건 없었다.
이번에는 그가 미지근한 물을 건네줬다. 석화는 유리잔에 반쯤 담긴 물을 아주 천천히 나눠서 마셨다. 곽수환은 군용으로 지급된 검정색의 민무늬 티셔츠에 편해 보이는 바지 차림이었는데,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군번줄이 목에 걸려 있었다.
물을 마시는 동안 그걸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그가 군번줄에 달린 인식표를 잡아 올렸다. 앞에는 레인보우 시티의 마크인 참매가, 뒤에는 신원정보가 파여 있었다.
[육군 code major - 3121 곽수환]
전사자의 신원을 확인할 때 사용되는 인식표이기도 했다.
“좀 전에……. 뭐 보고 계셨어요?”
“석 박사는 자존심도 없어?”
석화가 한숨을 내쉬더니 컵을 옆에 내려두었다.
“있는데요.”
“내가 그쪽보다 연하인 건 알지? 그런데 나는 반말을 하고 박사는 나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네?”
“제가 존대하라고 말하면 할 겁니까?”
“안 하지. 제주도에서 봤을 때부터 나보다 꼬맹이인 줄 알았으니까.”
그럼 이제라도 존대를 하라는 말을 하려는데 기력이 딸려 한숨만 내뱉었다. 벽 쪽으로 이동한 석화는 다시 몸을 뻗고 누웠다.
“저 때문에 못 주무셨을 텐데, 옆에서 주무세요.”
더블침대지만 둘이 눕기에는 상당히 비좁았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고?”
“……네.”
“업어다 줘?”
석화가 더는 대답하지 않고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전라의 몸으로 등을 보이니 엉덩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가릴 생각도 없는 게 그냥 모든 것이 다 귀찮은 듯했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한 터였다. 곽수환은 팔을 교차해 셔츠를 벗고는 침대에 누웠다. 살이 맞닿지는 않을 만큼의 아주 작은 여유 공간이 생겼고, 석화는 수건을 펼쳐 길게 덮고 있었다. 석화가 누워있던 자리라서 그런지 축축한 열기가 머물렀다.
곽수환은 팔짱을 끼고 제게 등을 돌린 석화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엉덩이에 시선이 닿았는데 탱글탱글해 보여서인지 히죽 한 번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석 박사가 연구한 억제제 말이야,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지?”
아무 대답도 하기 싫어하던 석화가 관심을 보이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 바람에 곽수환의 발기한 성기가 석화의 맨 허벅지를 스쳤다.
“……억제제 언제 맞으셨어요?”
“날짜상으로는 어제?”
석화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손바닥으로 침대를 누르고 상체만 일으켰다. 발기한 부분을 빤히 보기에 곽수환도 장난기가 솟아서 손으로 쓱 문질렀다.
“부작용이 있다니까.”
무표정하지만 생각에 잠긴 까만 눈동자가 깊었다. 진짜로 억제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싶은 듯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불쑥 말을 내뱉었다.
“어디 보죠.”
“뭐?”
놀린 건 곽수환이었고 놀란 것도 곽수환이었다.
석화는 진지한 눈을 하고는 침대 밖으로 기어나가다시피 했다. 손짓을 해서 누워 있던 곽수환을 앉게 만들고, 저는 바닥에 앉았다.
“석 박사.”
얼떨결에 침대에 걸터앉은 곽수환이 당황한 목소리를 자아냈지만, 석화가 손을 내밀어 바지 지퍼를 내리는 게 더 빨랐다.
“그쪽이 비뇨기과 의사도 아니고 내 좆을 본다고,”
퉁! 말을 하는 동안에도 막힘없이 손을 놀리던 석화가 브리프를 끌어내렸을 때였다. 그 손길에 점차 기세 좋게 발기했던 좆이 해방감에 휙 고개를 쳐들었다. 석화는 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곽수환 소령님 성기가……. 방금 제 턱을 쳤어요.”
“누가 몰라.”
미치겠네. 곽수환이 머리를 뒤로 휙 쓸었다.
“사정은 가능하세요?”
석화는 연방 진지한 말투였다. 술 먹고 기절했다가 일어나서 남의 고추를 꺼내는 변이 바이러스 연구자라니……. 어쨌거나 꺼낸 건 너야. 그리고 억제제가 영 쓸모없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게 맞지. 멀쩡한 듯 보이지만, 아직 석 박사에게 술기운이 남아 있는 게 틀림없었다.
“모르겠는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석화는 브리프를 다시 올려주려고 했다. 그때 곽수환이 손목을 콱 쥐었다.
“일단 한번 빨아볼래?”
깜빡, 깜빡, 다시금 무드등의 불이 꺼졌다가 들어왔다. 석화의 얼굴이 보였다가 안 보이기를 반복했고, 곧이어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더러워서 싫어요.”
이윽고 무드등의 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더럽다니? 그 말 한 마디에 팽팽하게 불거졌던 좆이 한 꺼풀 수그러들었다. 그대로 머리채를 잡아서 입에 쑤셔 넣고 맛이 어떠냐고 하려다가 됐다 싶었다. 곽수환은 지퍼를 열어둔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팽팽하게 섰던 것도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석화가 누워있는 몸을 짓누르며 원래 자리로 기어갔다. 곽수환은 기막힘에 혀를 찼다.
사람을 돌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제 몸을 도움닫기 해서 넘어가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기운 없이 늘어진 꼴을 보니, 침대를 돌아서 올라가기도 버거웠던 모양이다. 전기가 완전히 나가버려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드러난 엉덩이를 손으로 콱 쥐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더러운 건 석 박사한테도 있을 텐데.”
“배설기관은 누구에게나 있죠.”
“더럽다고 생각하면 섹스도 못하겠네.”
무슨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한참 뒤에야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해파리랑 말미잘은 입과 항문이 같아요. 생각해보니까 안 더러울 수도 있겠네요.”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기어코 불이 들어오고 말았고, 전라로 등을 돌린 석화의 뒤태가 음영이 지고 번들거렸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지만 석화가 그새 잠이 들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모른 척 엉덩이를 손으로 훑었는데도 미동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곽수환은 그제야 무드등도 꺼버렸다. 두 손을 깍지 껴서 뒷머리에 대고 천장을 향했다.
애들 때는 이것보다 더 좁은 침대에서 부모와 같이 잔 적도 있었다. 아마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그때의 익숙함이 떠올라서겠지. 괜히 씁쓸해진 곽수환은 쓸데없는 생각 말자며 눈을 감았다. 옆에 누가 있는 잠자리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
여의도 쉘터가 처음부터 안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도 아담에게 몇 번이나 밀려난 전적이 있던 곳이었다.
7개의 색으로 구역을 지정하는 레인보우 시티는, 같은 지역일지라도 위험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는 했다. 그렇기에 현재 그린 구역인 여의도도 한때는 레드로 지정되었던 때가 있었다.
“의정부가 오늘 9시를 기점으로 레드에서 바이올렛으로 위험단계가 낮아졌습니다.”
국가 통합에 따라 각 시도별로 나뉘어있던 한국도 레인보우 시티라 불리는 도시가 되어버렸고,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구역으로 지정된 곳도 수많았다. 그러나 정확한 인구가 파악되지 않았다 뿐이지 산세가 험한 지역으로 숨어들어 사는 민간인들도 많았다. 다만 그들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수원은 옐로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이번 아담에게서 한 가지 이상 징후가 발견됐습니다.”
현장에 투입되는 소령들과 쉘터에서 지시를 내리는 영관장교들이 53층 군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장군인 박 소장도 함께였다.
술에 취해 하반신을 드러내보였던 양상훈이 멀쩡한 낯짝을 하고는 브리핑을 계속 진행했다. 아침마다 열리는 정기보고인 셈인데 오늘은 곽수환이 속한 불패 부대 차례였다.
“이상 징후?”
박 소장이 시가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뱉었다. 금연건물이건만 까마득하게 높은 장군에게 딴죽을 걸 사람은 없었다.
“공격을 받고 불리한 상황이 되면……. 놈들이 후퇴를 합니다.”
“……뭐?”
박 소장이 들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푹푹 찍어 눌렀다.
“그놈들이 군인도 아닌데 무슨 후퇴를 해?”
“그 징후는 현재 10레드 구역에서 3회, 3바이올렛 구역에서 2회 발견됐습니다.”
“그거 정확한 거야?”
“더 정확한 징후는 좀 더 파악한 후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양상훈이 절도 있는 자세로 반듯이 경례를 하고는 단상에서 자리로 돌아갔다.
“야, 곽 소령이.”
테이블 밑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곽수환이 박 소장의 부름에 몸을 쓱 일으켰다.
“새끼야, 군인이 빠져가지고는 자세가 그게 뭐야? 양 소령이 좀 본받아 봐, 엉? 기강은 다 어디 갔어?”
장 중령만큼이나 잔소리가 많은 영감이었다. 그래봐야 40대 후반이었지만.
“아담 회수팀이 그러던데, 네가 13레드 구역에서 수거한 아담이 말을 했다고. 그거 진짜야?”
앉아있던 자세는 불량했다고 쳐도 웬일로 군제복을 말끔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곽수환은 단상으로 가지 않고 자리에 서서 말을 시작했다.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 마치 아담으로 변이하기 직전의 사람으로 보였는데, 어쩌면 오청운의 아담 변이가 다른 이들보다 좀 많이 늦었을 수도 있겠고요. 보통 아담에게 감염되면 5분, 길게는 10분 안에 아담으로 변하니까 그것도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지하에 오청운을 제외하고 다른 아담은 없었으니까요. 자연발화도 아니고 자연아담이 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새끼야, 유추 좀 하지 마. 정확한 팩트만 전달해. 군인 새끼가 지 사견을 넣고 말이야.”
말은 저렇게 해도 박 소장은 장 중령만큼이나 곽수환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보다 석화 박사는 어디 갔어? 오늘 브리핑은 데려오라고 했잖아.”
“자빠져 자던데요.”
탱글탱글한 엉덩이 다 드러내놓고.
“곽 소령! 어디 감히 소장님 앞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장 중령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됐어, 됐어. 저놈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손을 내저은 박 소장이 불이 꺼진 시가를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군인들이 동시에 일어나 박 소장을 향해 섰다. 제복이 마찰하는 소리 또한 한결같았다.
“오늘 회의는 이만하고, 곽수환이 너는 조만간 현장 들어가자고. 상부에서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영창을 가지 않는 대신 석화의 경호 노릇을 한 게 그래봐야 며칠이다. 애초에 상부는 곽수환을 영창에 보낼 생각 따위는 없었다. 박 소장이 회의실을 나가고 이어 장 중령이 곽수환에게 다가가려는 때였다. 장 중령이 울리는 무전을 받았다.
[중령님, 석화 박사님께서 방에 계시지를 않습니다. 오늘 연구실에 출입 기록도 없습니다.]
“뭐?”
곽수환이 석화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기에 따로 찾아오라고 지시를 내린 터였다. 그런데 어디에도 안 보인다니?
장 중령이 인상을 와작 쓰고 곽수환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만 으쓱했다.
“석 박사 제 방에 있는데요.”
“야, 왜 박사님이 네 방에 있어?”
끼어들 타이밍을 재던 이채윤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박사님하고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장 중령도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눈앞에서 쓰러졌으니 제 방으로 데려왔죠. 밤새 간호도 했고요.”
술을 줬다는 이야기는 쏙 뺐다. 어차피 마신 사람도 석화였다.
“그랬으면 깨워서 모셔왔어야지. 몸은 좀 괜찮으시대?”
“글쎄요, 깨워도 안 일어나던데요.”
이봐, 석 박사, 하고 등을 툭툭 두드려보기는 했다.
“그럼 박사님 죽은 거 아니야?”
이채윤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곽수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남들 눈에도 석화가 어지간히 약해 보이나 보다. 그 와중에 어제 필름이 나가버린 양상훈은, 석 박사가 누구냐며 한가로운 소리나 해대고 있었다.
***
[그 녀석과 나의 사랑법]
석화는 침대에 걸터앉아 눈을 끔뻑거렸다. 저혈압 때문에 아침마다 이 고생이었다. 정신을 다잡는 동안 테이블에 있는 책의 제목이 저절로 시야에 들어왔다. 어젯밤 곽수환이 읽고 있던 책 같았다.
몸에 기운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석화는 ‘그 녀석과 나의 사랑법’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표지는 코스모스가 그려져 있었고, 꽤나 오래된 서적인지 종이 또한 변색되어 있었다.
석화는 무심결에 첫 장을 펼쳐 넘겼다. 시작부터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앞부분을 읽다가 책을 다시 놔두고는 테이블에 죽 올려져 있는 다른 책의 책등도 훑어봤다.
‘당신의 향기’, ‘사랑한다면 우리처럼’, ‘성의 굴레’, ‘선생님과의 하룻밤’ 곽수환이 좋아하는 글은 아무래도 사랑 이야기인 듯했다. 쉘터에 보관 중인 서적들이었고 대여코드도 적혀 있었는데, 선생님과의 하룻밤은 대여한 사람이 많은지 다른 책들보다 유독 낡아있었다.
석화도 아예 관심이 없는 건 아니라 책의 제목을 머리에 저장했다. 세상이 평화로웠던 때 발매된 것들이니 나중에 저도 한번 읽어볼 생각이었다.
이제 슬슬 나가봐야 하는데…….
삐빅, 삑- 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석화는 그쪽을 향해 섰다.
[개방합니다.]
인식자를 확인한 시스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당연히 곽수환이었고, 그 뒤로는 이채윤과 양상훈도 서 있었다. 불현듯 곽수환이 팔을 크게 벌려 문을 막았다.
“뭐야, 팔 안 치워? 안 보이잖아!”
이채윤이 따지는데도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고는 말했다.
“옷 입어.”
석화도 그제야 자신이 전라인 것을 깨달았다. 창피함에 후다닥 움직일 만도 한데 굼벵이처럼 느리게 몸을 돌려서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웠다. 그 바람에 곽수환이 헛바람을 내뱉었다.
왜, 옛날에는 군대에서 비누를 주워달라던 놈들도 있었다던데. 지금이 그 상황이었다면 석화는 그냥 잡아 잡수쇼, 하는 꼴이었다. 아무리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경계심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주변 따위는 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석화가 옷을 입은 것을 확인한 곽수환은 문을 막고 있던 팔을 떼어냈다. 이채윤도 석화가 맨몸인 걸 알고 나서는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중이었다. 석화는 밖으로 나오면서 이채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응, 박사님 안녕? 어제 쓰러졌다며 괜찮아?”
석화는 문득 곽수환의 친구들은 다 반말을 일삼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석화 박사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불패 부대 양상훈 소령이라고 합니다.”
이채윤의 뒤에서 양상훈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 왔다. 곽수환의 친구라고 해서 다 반말을 하는 건 아닌가 보다. 그런데 처음 뵙는 사람은 아닌데.
“……바윗돌.”
“예?”
석화가 중얼거리자 양상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석 박사. 저 새끼 술 마시면 그냥 필름이 날아가. 어제 일은 기억도 못해.”
“응? 바윗돌이 뭔데?”
양상훈이 곽수환에게 넌지시 물었다.
“바윗돌은 무슨. 넌 모래알이야, 새끼야.”
양상훈이 갑자기 고추가 아픈 것 같다면서 손을 아래로 가져갔지만 주물럭거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들 어쩐 일로…….”
쓱, 곽수환의 앞으로 V자를 한 손이 튀어나왔다. 이채윤이었다.
“요즘 아담이 이상하다면서요. 양상훈 새끼 이야기 들어보니까 아담이 꼭 사람처럼 움직이나 봐요? 그치? 네가 봤다며.”
“좀 이상하기는 했어. 그동안은 몸에 충격을 받아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거든. 근데 도망가는 놈들이 있더라고?”
석화도 고개를 미묘하게 꺾었다. 아담이 도망을 간다고? 곽수환을 바라보니 그도 뭔가 찜찜해하는 듯했다. 그들이 겪은 오청운도 전에는 없던 기이한 현상이었다.
“어쨌든 우리 아침밥부터 먹으러 가요!”
박사님, 아직 몸 안 좋으면 업어줄까요? 이채윤이 엄지를 척 들어서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석화는 괜찮다면서 스스로 걷기 시작했다.
세 명의 소령이 평소보다 느릿한 걸음으로 석화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아담의 특이현상을 말해주러 온 것이라면 곽수환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아침까지 함께 먹으러 가니 기분이 이상했다.
제주도에 내려가기 전, 이곳 쉘터에서 꽤 오래 생활했지만 오양석 박사가 없으면 밥은 늘 혼자 먹고는 했다. 특히 군인들과는 친해질 일은 요원했고, 비리비리 약해빠진 저를 답답해하는 군인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석화는 일부러 걸음을 빨리해보려 노력했지만 괜히 힘 빼지 말자면서 본연의 속도를 지켰다.
늦은 아침식사인지라 식당은 한가로운 편이었다. 다만 남은 음식은 식어 있었고, 인기가 많은 김치는 이미 동이 난 뒤였다. 식당 직원이 첫날과는 다르게 석화의 식판에 밥과 반찬을 적당히 담아주었다. 밥을 먹다가 식판에 얼굴을 박은 소문은 날대로 났고, 어쩌면 음식낭비를 막기 위해 누군가가 적게 주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었다.
“박사님이 쥐 오줌만큼 먹는다던데 그것보다는 많네요.”
이채윤이 하하핫 웃으면서 석화의 식판을 가리켰다.
그래도 쥐 오줌보다는 많이 먹는데…….
석화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식판을 빈자리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는 이채윤과 양상훈이, 옆에는 곽수환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제가 식사 속도가 좀 많이 느립니다.”
석화는 수저를 들기 전에 양해부터 구했다.
“그래요? 난 엄청 빠른데!”
아니나 다를까, 앉자마자 거의 절반은 해치운 그녀였다. 그건 양상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전에도 느꼈지만 곽수환은 식사 속도가 저에 견줄 정도로 느린 편이었다.
“박사님은 천천히 드세요.”
양상훈이 친절하게 웃었다. 석화도 마주 웃어주고 싶었지만 입꼬리가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얼굴 표정을 바꾸는 일도 기운이 필요한 법이었다. 사람은 그냥 웃기만 하는데도 힘이 들어가니까. 풍부한 표정을 지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석화는 거기까지 기운을 쏟을 몸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많이 나아졌지만 어릴 때는 입만 슬쩍 벌린 채로 늘 멍해있었다. 결국 몸의 기운을 어떻게든 축적하기 위해 석화는 얼굴 표정이 퇴화해버린 것이다.
“박사님, 우리 밥 먹고 나서 같이 동물원 가야 돼요.”
“동물원이요?”
그녀에게 물으며 숨을 길게 내쉬자 곽수환이 제 식판의 물을 쓱 밀어줬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석 박사는 동물원이 어딘지도 모를걸.”
제주도나 울릉도가 아닌 지역에 동물원이 남아 있었나? 물을 마시던 석화는 의아해했다.
“8레드 구역에 있어요!”
레드 구역에 동물원이 있다니? 아담 바이러스는 동물에게도 전이되는 위험균이었다.
“그냥 우리가 동물원이라고 부르는 건데, 연구가 필요한 아담 놈들 가둬놓고 실험하는 데야.”
본래 공포영화나 좀비물의 재미난 점도 여기에 있었다. 연구를 한답시고 좀비를 잡아다가 어딘가에 가둬놓는 일은 사건의 전초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좀비가 밖으로 나오면서 아비규환이 되는 흐름 또한 익숙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레인보우 시티는 별의 별일들을 이미 다 겪은 도시였다.
약 30년 전, PTSD에 시달리던 군인 한 명이 쉘터 지하에 가둬두었던 아담을 풀어주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던 일도 있었다. 그일 이후로 연구할 아담이 있다면 그린 구역이 아닌 레드 구역에 가둬두고는 했다. 애초부터 위험분자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걸 이제는 동물원으로 부른다니, 자신이 없던 동안 새로운 말들이 생겼나 보다. 석화는 꼭꼭 씹은 밥을 삼키고는 다시 물로 입을 축였다.
위이이이이잉-
삐이이- 삐이- 삐-
순간, 고막을 파고드는 사이렌 소리에 석화가 한쪽 귀를 막았다. 눈꺼풀이 두어 차례 빠르게 경련도 했다. 이 사이렌이 이곳에 울려서는 안 된다. 말 그대로 이 쉘터 안에는 아담이 없을 테니까.
[Emergency, Emergency, 그린 구역 여의도 쉘터에 긴급 상황을 알립니다. Emergency, Emergency.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주세요. B-23에 아담이 출현. 3분 이내로 5층까지 전염 가능성 75퍼센트. Emergency, Emergency.]
신경질적인 마더의 경고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건 통합국가에서 지정한 1급 비상사태 경고 방송이었다. 이채윤과 양상훈을 비롯해 식당에 있는 모든 인원들이 전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 이채윤은 남은 밥을 한 입에 욱여넣었다. 양상훈이 소시지를 주워서 그녀의 입에 던져주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석화는 당혹스러운 경고음에 수저만 든 채로 굳어 있었다.
“석 박사.”
곽수환이 석화의 팔뚝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달릴래, 업힐래?”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없음에도 석화는 재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제가 뛰는 것보다 업히는 쪽이 좀 더 수월할 터였다. 석화는 대답 없이 곽수환의 뒤로 가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곽수환에게서 몸의 떨림이 느껴졌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그가 자신을 들쳐 업고는 기막히다는 듯 웃는 중이었다.
“가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석화가 그를 재촉했다. 비상사태에 맞춰 엘리베이터는 강제 종료 상태에 들어섰고, 마더의 판단에 따라 지하부터 순차적으로 폐쇄가 시작되고 있었다. 분명 지하에서 상층으로 합류하지 못한 군인들도 있을 것이다. 올라오는 길은 폐쇄되었으니 그들은 아담과 따로 붙게 될 테고 결과는 뻔하다. 그들도 전염되겠지. 박사들의 연구실이 고층에 있는 이유도 군인보다 대피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곽수환과 나머지 동료들은 여의도 쉘터의 최종 방어선 48층까지 막힘없이 올라갔다. 몇 층 올라가다가 쉴 법도 한데 달리는 속도는 처음과 달라지는 법이 없었다. 석화만 멀미 때문에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여의도 쉘터 20층 괴멸, 48층 폐쇄 카운트 1분 전. 59, 58, 57…….]
위험상황을 알리는 마더의 목소리는 사이렌과는 다르게 평이했다.
“아, 씨발. 무슨 초수를 세고 난리야!”
곽수환을 앞서나가는 부사관이 마더에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엄청난 속도로 뛰어 올랐다.
“똘수환, 그렇게 여유부리다가 뒈진다?”
이채윤이 먼저 가겠다면서 양상훈과 함께 더 먼저 달려갔다. 석화는 이대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하아, 곽 소령님.”
“달리는 건 난데 왜 석 박사가 숨을 몰아쉬어.”
“붙들고 있는 것도 힘이 들어서요.”
석화가 곽수환의 목을 감은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냥 두고 가세요.”
“장 중령님한테 뭔 소리를 들으라고. 입씨름할 시간 없으니까 목이나 꽉 붙들어.”
둘 다 같이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석화는 그의 등을 밀어내고 바닥에 서려고 했지만, 곽수환이 더 먼저 케이프를 끌어내려 석화를 감쌌다. 마치 포대기에 감싸인 듯한 모양새였다.
“내 동생도 이렇게 업어 키운 적이 없는데.”
곽수환은 조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석화도 더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 얌전히 그를 안았다. 저도 이렇게 쉼 없이 달려갈 수 있었으면 이런 신세를 질 일은 없었을 텐데…….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특별 취급을 받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게 싫었다.
[20, 19, 18]
이제 43층이었다. 18초 이내로 48층에 도달하기란 무리였다.
“괜찮으니 이제 혼자 가세요. 연구는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대체제가 많았다면 애초에 상부에서 나를 석 박사에게 안 붙였겠지? 꽉 잡아.”
곽수환이 46층의 계단 손잡이를 꽉 붙들고는 그 반동으로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랐다. 머리가 어질했다.
[5, 4, 3]
마더의 카운터가 제로에 가까워졌고 석화는 저 때문에 곽수환도 개죽음을 당하리란 죄책감에 눈이 흐려졌다. 그 순간 곽수환이 48층을 향해 외쳤다.
“석 박사 날아간다, 받아!”
곽수환이 석화의 목덜미를 잡아 제 등에서 휙 끌어내렸다. 케이프를 풀어서 석화를 감싸고는 닫히기 시작한 철창 아래로 거의 던져놓다시피 했다. 양상훈은 케이프에 감싸여 오는 석화를 확 붙들어 일으켰다.
“나이스 캐치.”
양상훈이 좋은 패스였다면서 엄지를 척 세웠다.
“똘수환 씨, 어디 고생 좀 해.”
이채윤이 한가롭게 손을 흔들었다. 아담이 올라오고 있는 중일 텐데, 대체 이들이 왜 이렇게 여유로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령님이……. 곽 소령님이……. 저기.”
석화는 무표정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철창 밖의 곽수환을 바라봤다.
“석 박사 내 말 잘 들어. 인류를 위해서 머리 좋은 박사님 내가 살린 거야. 앞으로 나 잊지 말고, 내 거 안 빨아준 것도 후회하고, 더럽다고 한 것도 사과하면서 살아.”
곽수환은 장갑 낀 손으로 철창을 움켜쥐고는 진지하게 내뱉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서울에 올라온 지 그래봐야 며칠인데 암살당한 박사님뿐만 아니라 오청운 선배도 죽고, 안전하다고 자랑하던 여의도 쉘터가 아담에게 뚫리기까지 했다. 더욱이 최악인 건 저 때문에 곽수환의 목숨이 사지로 밀려난 것이었다.
어머니는 남을 위해 저를 희생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차피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반대로 자신 때문에 그가 희생당하게 되어버렸다.
“……곽 소령님.”
석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게 빨아달랄 때 빨아줬으면 후회도 안 남고 좋잖아. 잘 지내. 짧은 시간이었지만 석 박사, 당신 참 꼴릿한 사람이었어.”
“저 병신 새끼. 지금 영화 찍냐?”
이채윤이 낄낄거리면서 곽수환을 놀려댔다. 뿐만 아니라 48층에 들어오지 못하고 곽수환의 뒤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군인들도 낭패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전투태세에 들어가야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욕설까지 내뱉고 있는 중이었다.
양상훈이 휘청거리는 석화를 뒤에서 단단히 받쳤다.
“석화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은데.”
어깨까지 간헐적으로 떠는 석화를 보던 양상훈이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석화 박사님은 처음 겪어보는 거구나.”
“……네?”
“이거요, 별 거 아닙니다.”
별 거 아니라니? 석화는 눈에 의문을 가득 담아서 양상훈을 올려다봤다. 어쩐지 절박한 시선에 양상훈은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놀린 건 곽수환인데 수습은 제가 해야 한다니 혀도 차면서 말이다. 양상훈은 석화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진짜 별 건 아니고 비상훈련이거든요. 일전에 강남 쉘터가 아담한테 뚫리고 나서부터 실시된 건데, 지금처럼 시간 내에 못 들어오는 군인들은,”
“훈련 받아야 되거든. 똘수환 새끼는 처음으로 받는 거네? 아휴, 꼬셔라. 박사님, 그거 알아? 전에 똘수환이가 내가 딱 48층에 안착하는 순간 날 잡아 던지는 바람에 훈련 받은 적 있거든? 저 새끼 아주 나쁜 새끼야.”
석화는 여전히 하얗게 뜬 얼굴로 곽수환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실제 상황은 아니라는 거죠?”
철창 너머의 곽수환이 잘생긴 상판을 하고는 씩 웃었다.
“설마 석 박사, 쫄렸어?”
석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꽉 쥐었다. 떨림 때문에 잘 쥐어지지도 않았다. 입술도 여전히 경련하고 있었다.
“……개자식.”
[곽수환 소령 외 23인, 재훈련에 들어갑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주세요.]
마더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그 탓에 곽수환은 석화의 입에서 나온 게 정말 욕설이었는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CCTV 화면에서는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일 뿐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쉘터 지하의 군사훈련실은 아담 역과 군인 역이 나뉘어 훈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중에 아담 역을 맡은 곽수환이 보였는데, 군인들을 때려눕히고 같은 편인 아담까지도 공격을 했다. 뒤에서 달려드는 아담의 팔을 잡아서 엎어뜨리고는 주먹으로 얼굴을 내려치려다가 곧 연습이라는 걸 깨달은 듯 멈칫했다. 이어 뒤에서 덤벼드는 군인의 명치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저런 게 진짜 아담이면 우리는 진작에 다 전멸했을 겁니다.”
화면을 보던 장 중령이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뿌듯함도 저변에 묻어났다.
“오늘 일은 차라리 잘됐습니다. 곽 소령이랑 훈련하는 놈들은 그 나름대로 도움이 되겠고, 곽 소령도 앞으로는 좀 더 성실하게 굴겠죠.”
석화를 안고 뛰어올랐다지만 장 중령은 알고 있었다. 곽수환이라면 시간 내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심술이 났는지 아니면 변덕이 들었는지 몰라도 석화만 던져놓고는 죽도록 싫어하던 훈련에 참여했다.
“저기, 석화 박사님.”
“네.”
석화는 주머니에서 견과류를 물엿에 굳힌 스낵을 하나 꺼냈다. 입에 넣고 씹어 먹는 걸 의아하게 보던 장 중령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녀석이 좀 우악스럽기는 한데 나쁜 놈은 아닙니다. 곽 소령 혼자만의 전력으로 레드 구역 하나쯤은 충분히 소탕할 수도 있고요. 또 은근히 이게 좋아서 싸우면서도 제법 머리를 잘 씁니다.”
장 중령이 자신의 머리를 톡톡 하고 쳤다.
“그러니까 보호역을 바꾸는 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비상훈련이 끝나고 다짜고짜 경호군인을 바꿔달라는 석화를 훈련상황 중계실로 데려온 게 장 중령이었다. 얼굴에 표정이랄 게 없던 사람이 툭 치면 쓰러질 듯 허옇게 질려있기까지 했었다.
“이거 보십쇼! 이야, 곽 소령이 혼자서 일당백을 하지 않습니까?”
장 중령이 화면을 가리키면서 박수까지 쳤다. 이 녀석보다 더 세고 안전한 놈은 없다, 그렇게 말하려는 의도 같았다.
곽수환의 승리로 훈련이 중지되고 널브러진 군인들 사이에 있던 그가 감시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눈이 마주쳤을 리는 없지만, 석화는 다시금 주먹을 쥐었다. 비상훈련이 아니라 실제였다면 그가 아담으로 변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자신의 무기력함에도 속이 쓰렸다.
“막말로 비상훈련이 실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석화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장 중령이 쓰게 웃었다. 견과류를 절반도 먹지 못한 석화는 비닐을 꼬깃꼬깃하게 접어서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혼자서 레드 구역도 정리할 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우리 쉘터에 아담이 들이닥쳤다 하더라도 저 녀석만큼은 무사했을 겁니다. 박사님께서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오셔서 잘 모르실 테지만, 곽수환의 불패 부대가 괜히 불패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저 녀석들은 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습니다. 녀석이 조금 짓궂은 면이 있기는 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건 없던 일로 해주세요.”
장 중령은 석화가 고집스럽게 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사실 고집을 부려봐야 좋을 것도 없다. 모두가 손을 잡고 머리를 싸매도 모자랄 세상인데, 괜한 오기를 부려봐야 남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석화는 장 중령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연구동으로 걷기 시작했다.
보호구역인 제주도와는 다르기 때문에 서울로 오고부터는 저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비상훈련 때는 연구진과 쉘터에 있는 여타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었다. 아마 그들은 각층에 있는 대피실에서 대기했을 가능성이 컸다.
[개방합니다.]
연구실로 들어가자 김 박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비상훈련이었는데 어디 있다가 오셨어요?”
“방에 있다가 왔습니다. 늦었죠.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아차 싶었습니다. 훈련에 대해 말씀을 드린다는 게 미처 못 드렸거든요.”
김 박사는 겸연쩍다는 듯이 뺨을 긁었다.
“비상훈련이 시작되면 박사들은 34층 복도 끝에 있는 비상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거든요. 엘리베이터 박스 진입도 박사와 연구진들만 가능하고요. 그렇게 꼭대기로 이동해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합니다. 이게 저도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말씀을 드린다는 걸 깜빡했네요.”
“실제 상황에 대비하는 건가요.”
“뭐, 그렇죠. 어차피 우리 목숨이야 전부 군인들에게 달린 거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군인들의 목숨도 우리에게 달렸고요.”
아담의 7차 변이 백신 개발. 그게 이 쉘터에서 연구원들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이유였다. 김 박사가 의자 바퀴를 굴려 석화에게 다가갔다. 주변을 살펴보고 모서리에 매달린 감시 카메라까지 찜찜하게 바라보더니 조용히 귀엣말을 했다.
“최근에 해외 지부와 연락이 잘 안 되는 건 알고 계신가요? 연구원들은 그간 해외 지부와 연구 교환이 가능했잖아요?”
“그랬죠.”
석화도 연구동에 있던 시절, 해외 지부의 연구원들과 몇 차례나 교류를 한 적이 있었다.
“오늘 중국 지부에 있는 친구 놈하고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요. 듣자 하니 거긴 아담이 아직 7차 변이 전이더라고요? 어쩐지 갑자기 해외랑 전부 연락이 두절된다 싶더니……. 지금 우리 레인보우 시티만 고립된 거 아십니까?”
평소에는 영양가 없이 수다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놀라운 소식을 전달했다.
“정말 해외 지부와 연락이 안 된다고요?”
“예,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고립된 걸 확신했죠.”
전 세계 인터넷 통신망 같은 건 무너진 지 이미 오래전이었다. 인구가 반 토막 이상 나버려 통신망 설비를 유지할 인력도 부족했고, 아담들이 전선을 끊어먹는 등 온갖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사람의 손길이 끊긴 정유공장 또한 몇 달에 걸쳐 불타 없어진 곳도 수많았다. 여의도의 쉘터를 비롯해 각 쉘터의 마더는 온 전력을 끌어와 간신히 유지 중이었다. 그간 해외 지부와의 연락은 전화와 편지 내지는 직접 방문이었는데, 그 세 가지가 전부 막힌 게 바로 아담의 7차 변이 징후가 발견되고 나서였다.
“근데 박사님, 예전에도 궁금했는데 그 돌은 대체 뭐예요?”
석화는 저도 모르는 사이 손안에서 작은 돌을 굴리고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습관 중 하나였고, 열이 많은 만큼 돌을 쥐고 있으면 시원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냥 부적 같은 거요.”
“하하, 석화 박사님 입에서 부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이상하네요. 그러고 보니 전에 박사님이 모아두셨던 돌들 있잖아요.”
비품실로 사용되는 곳에 모아놓은 돌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 정신이 없던 바람에 둘러보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오늘내일 중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 박사가 먼저 운을 뗀 게 좀 불길했다.
“돌들이 왜요?”
“그거 오청운 박사가 거치적거린다면서 다 한강에 내다버렸거든요. 그, 아담으로 변했다는 소문이 나기 전에요.”
김 박사가 갑자기 당황했다. 이름 때문만은 아니라 늘 무표정해서 돌 박사라 불리던 석화의 이마가 눈에 띄게 구겨진 것이다.
“……그런가요.”
작은 돌들은 제주도로 내려갈 때 같이 가져갔는데, 무게가 나가는 것들은 이곳에 둔 게 화근이었다. 그래, 돌을 두고 간 저의 탓이지 그걸 버린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돌에 집착을 보이는 석화였다.
“어이구, 너무 심려치 마세요. 제가 예뻐 보이는 돌 있으면 박사님 드릴 테니 기운 내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꼭 예쁜 돌이 아니어도 되고, 이렇게 돌 안에 반짝이는 알이 들어있거나 꺼끌꺼끌한 감촉이 나는 현무암 재질도 좋습니다. 시멘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은 안 되고요.”
석화가 손에 쥐고 있던 돌을 쓱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냥 빈말일 뿐이었던 김 박사는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예예, 알겠습니다. 그런 걸 발견하면 꼭 주워서 드릴게요.”
석화는 가운 주머니에 돌을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쪽에 있는 연구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오양석 박사의 일지를 다시 머리에서 끄집어냈다.
아담의 이상행동과 이상변이를 보인 오청운.
분명 오양석 박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어떤 실험을 한 게 틀림없었다. 아마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려 했겠지. 그러나 그에 관한 자료는 일지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과거 1차부터 3차 백신은 달걀에 아담 바이러스를 지속 배양해 독성을 약화시켰다. 그 백신을 체내에 투입하면 독감주사처럼 아담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겨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4차 아담 바이러스는 좀 더 강력해졌고, 독성을 약화시킨 백신을 투여했음에도 감염 현상이 일어났다. 아담 바이러스는 더 이상 체내의 기억 면역세포로는 처치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석화조차도 이번 7차 변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동물원이라 부르는 곳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비상훈련이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렸다.
다시 한 번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7차 아담 바이러스는 앞서서 봤던 것과는 움직임이 사뭇 달랐다. 외부의 반응이 없으면 죽은 것처럼 정지해있던 세포가 약간의 자극을 주면 마치 폭주하는 광인처럼 날뛰어댔다.
그걸 보다가 문득 영상 속의 곽수환이 떠올랐다. 장 중령의 말대로 그는 대단하기는 했으나 손쓸 수 없이 날뛰는 이 바이러스처럼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자신을 살리려고 닫히는 문 안으로 던지기까지 했다. 아니지, 그는 훈련이라는 걸 알았으니 그저 놀려먹은 거겠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위험했던 건 아니니까, 목숨 부지했으면 아무리 훈련이라도 기쁜 일인 거라고. 그러나 주머니 속의 돌을 쥐고 있던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
“화났다면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훈련실을 빠져나온 곽수환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지만 어쩐지 거친 기운이 풍겨왔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석화는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밑을 내려다봤다. 예전에는 야경들이 훌륭했다던데 지금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물어물어서?”
그를 마주하니 낮에는 없던 생채기가 목덜미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시선이 닿는 것을 느낀 곽수환이 상처에 손을 대었다가 떼어냈다.
“경호도 바꾸라고 했다고.”
“그건 번복했습니다.”
“그럼 내일은 동물원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곽수환이 할 말은 전했다면서 먼저 몸을 돌렸다. 들어온 길을 돌아나가다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손으로 훑었다. 후, 하고 손에 쌓인 먼지를 불어내기까지 했다.
“석 박사, 지금 레인보우 시티에서 중상층의 기준이 뭔지 알아?”
석화는 대꾸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침묵했다.
“악기를 몇 개나 다룰 수 있느냐지.”
악기를 다룰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안전한 구역에서만 지내왔다는 뜻이다. 위험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들 도망치기 바빴고, 소리에 민감한 아담이 있는 곳에서 연주를 한다는 건 자살행위였다.
곽수환이 툭 하고 건반의 낮은음 하나를 눌렀다. 손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그럴싸한 화음이 탄생했고 석화는 그를 향해 곧게 섰다. 사실 조금 놀랍기도 하고 군제복과 피아노는 어울리지 않는 듯도 했다. 좀 더 피아노를 칠 줄 알았는데 그는 손을 떼어내더니 눈썹만 슬쩍 구겼다.
“편견 버리라니까.”
간다. 이번에야말로 미련 없이 라운지를 나가는 곽수환의 등에 대고 석화가 목소리를 조금 키웠다.
“곽수환 소령님.”
“왜? 나랑 말 섞기 싫은 거 아니었어?”
“장 중령님 말씀대로라면.”
석화가 말을 하다 말고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먹고 남겨두었던 견과류를 꺼내들었다. 그걸 천천히 먹더니 라운지에 있는 물을 가져와 입도 헹궜다. 그 행동들이 어찌나 느린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소령님은 오늘 마더가 카운트한 시간 내에 48층에 도착할 수 있었을 거라던데요.”
“그거야 나 한 몸일 때지.”
“저를 업고 있었어도 가능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곽수환은 석화를 바라본 채로 팔짱을 꼈다.
“맞아. 석 박사를 세 명이나 등에 지고 있었어도 가능했을지 몰라.”
“전 세상에 하나니까 그런 가정은 필요 없겠고요.”
“그럼 다시 말하지 뭐. 나라면 석 박사가 가지고 있는 돌들 전부 메고 달렸어도 가능했겠지?”
“그런 상황이 오면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하, 곽수환이 목을 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러셨어요?”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쓱 기울였다. 그러게, 왜 그랬을까? 하는 행동으로 보이기도 했다. 라운지의 조명은 한때 레스토랑으로 운영되던 시절 그대로라 은은하게 주변을 밝혔다. 물론 간간이 불이 깜빡거리기도 했다.
“석 박사 색다른 표정 좀 보고 싶어서?”
“예?”
“뚱한 표정으로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있어야지.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 죽으면 울어주기는 할 것 같데? 아까 그 철창 사이로 석 박사 눈이 어땠냐면, 곽수환 소령이 이렇게 죽을 줄 알았으면 빨아줄 걸 그랬네, 그런 눈이었거든?”
“……그러네요.”
그냥 놀리고자 한 말인데 석화가 진지하게 나오는 바람에 곽수환은 기분이 미묘해졌다. 기운 없고 늘 멍해있어서 그렇지 어쩌면 생각 이상으로 더 감정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장 중령에게 석화가 화가 많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반쯤은 확신하기도 했고.
“아까 개새끼라고 나한테 욕했지?”
“그런 적…….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석화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곽수환을 지나쳐 라운지를 나가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석화의 뒤를 천천히 쫓아갔다. 보폭을 빨리하지 않아도 느린 걸음을 따라잡는 건 금방이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때까지도 석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숙소가 같은 층에 있기에 하는 수 없이 같은 곳에서 내렸고, 석화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곽수환을 알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더럽다는 말은 하지 말걸.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늘 사지에 몰리는 군인인 곽수환이 그거 좀 빨아달라고 할 때 해줄 걸 그랬나. 당시에 정말로 0.23초 동안 생각했었다. 그러니 확실히 놀림당한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곽수환이 저를 우습게 보는 것도 같았다. 위엄을 보일 생각은 없지만, 앞으로 오늘 같은 일은 사양이었다.
석화는 자신의 방에 신원을 인식시켰다.
[개방합니다.]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간 석화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곽수환을 향해 얼굴만 빠끔히 내밀었다.
“곽수환 소령.”
웬일로‘님’자는 어디다 빼먹었나? 음산한 말투가 퍽 안 어울렸다. 곽수환은 웃고 있는 입매를 하고 어디 계속 말해보라며 자리를 지켰다. 석화는 안에서 문고리를 잡은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리고는 최대 빠르기로 입을 움직였다.
“내일부터는 저한테 반말하지 마시죠. 그리고 개새끼가 아니라 개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그가 헛바람을 토해냈고, 달려가 문을 잡는 것보다 더 빠르게 문이 닫혔다.
[폐쇄합니다.]
문을 열지 못한 채 갈 길을 잃은 손이 곧 주먹으로 변했다. 그는 퉁,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개자식이라고. 곽수환이 웃으며 고개를 한 번 털어냈다.
생각해보면 의외로 강단 있지 돌 박사.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저를 두고 혼자 올라가라고 말하지를 않나, 그것도 두 번이나 그랬다. 보통 생사가 달린 일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어 하는 게 제가 봐왔던 사람인데 말이다.
단단히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못 궁금했지만, 저기서 불을 깜빡이는 감시카메라 덕에 생각만 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죠, 석 박사님. 개자식은 갑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왈왈 짖으면서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문 안쪽에서 석화는 선 채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곽수환은 목소리가 멀어질 때까지도 개 타령을 해대며 몇 번 짖기까지 했다. 그냥 무시할걸. 그사이 또 기운이 빠진 석화는 견과류를 감싼 비닐을 벗겨냈다. 저의 열 때문에 찐득찐득하게 물엿이 녹아 눌어붙어버렸다. 석화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누워서는 몸에서 나는 열을 돌바닥에 방출했다. 입에서도 홧홧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대놓고 욕을 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
인류가 지구에 미친 영향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다.
특히 도심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층 건물들, 공장, 발전소, 터널, 지하철 등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낸 게 인간이었으며 산물을 유지하는 관리자이기도 했다.
오래된 건물들은 보수를 해왔고, 하수시설과 전기도 사람의 손에 의해 안전하게 돌아갔다. 매일같이 관리하던 관리자의 손길이 끊긴 순간 얼마나 순식간에 황폐해질 수 있는지 사람들은 아담의 출현으로 알게 됐다. 처음 몇 년간은 화재가 연일 이어졌고 터널과 지하철은 물에 잠겼으며,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들 중 방치된 것들은 서서히 주저앉고 있었다.
여의도 쉘터 밖에 있는 한강 철교 역시 식물들이 잠식했으니, 어쩌면 인간과 동물을 제외한 생명체에게 지금의 지구는 유토피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리 쉽게 무너질 나약한 생명체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 진화의 속도를 무시하고 재빠르게 진화한 자들이 태어난 것만 봐도 그랬다.
또한 세상이 변화하고 불안한 심리가 지속됨에 따라 신흥종교도 수없이 생겨났으며, 신인류라면서 아담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나타났다. 그중에는 레인보우 시티에 반기를 세우는 반군들도 있었다. 레인보우 시티에 위협이 되는 자들을 제거하는 일 또한 군인들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곽수환은 하얀 벽을 바라보며 양상훈에게 얻어온 위스키를 마셨다. 위스키나 와인도 기존에 생산된 것들은 거의 동이 난 터라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고위층들만 누릴 수 있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아껴 마시는 일이 대부분인데 곽수환은 그런 것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지금도 벌컥 들이켜기만 했다. 프로젝트 빔을 가동시키자 [대기중]이라는 마더의 목소리가 방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마더, 코드 시크릿 3121 접속 허가를 요청한다.”
[음성 확인 완료, 코드 시크릿 3121 곽수환 님의 접속을 허가합니다. 1급 기밀까지 열람 가능합니다. 레인보우 시티 마스터의 메시지를 먼저 전달합니다.]
마더의 음성이 아닌 글씨가 화면에 떠올랐다.
[오양석의 연구 자료 파기, 이상행동을 보인 뒤 연구한 자료를 소각 완료한 것으로 보고됐으나 자택 지하의 오청운의 발견으로 확실하게 파기됐는지 알 수 없다. 석화 박사를 유심히 지켜보고 보고하도록.]
상부는 오양석이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뒤로부터 괴이쩍은 연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양석에게 그런 증상이 있었던가? 그런 양반이 저와 술을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그렇게 기막히게 했다고?
“알아보라던 교주 추적은?”
[준비합니다.]
마더가 벽면에 띄운 화면에는 화질 나쁜 사진이 여러 장 나열되어 있었다. 사과를 들고 있는 한 남자는 모든 사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신흥종교로 급부상 중인 에덴동산의 세력이 점차 커지는 중입니다. 통합국가에 소속된 레인보우 시티를 독립시키려는 집단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진에 사과를 들고 있는 남성이 교주라고 불립니다. 현재 신도들은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교주의 마지막 추적은 곽수환 님도 아시다시피 13레드 구역에서 끊겼습니다.]
술을 훔친다는 핑계로 13레드 구역에 다녀오고 영창까지 갈 뻔했는데, 그날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덕분에 석화의 경호원이 되었지만 말이다.
“교주가 오양석 박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정리해봐.”
[데이터 로딩중. 가능성은 없습니다. 제가 가진 데이터로는 접점이 나오지 않습니다.]
“쓸모없기는.”
아주 오래전 AI기능을 바탕으로 설계된 마더지만 축적된 정보 외에 뚜렷한 답을 내놓는 경우는 없었다. 결국 백신을 개발하는 것도, 아담을 멸종시키는 것도 인간의 몫이었다.
[종료합니까?]
“아니, 잠깐. 석화 박사 자료나 좀 띄워봐.”
몇 초간의 로딩이 있고 나서 벽면에 석화의 얼굴과 함께 자료가 떠올랐다. 곽수환은 나름 세세하게 적힌 석화의 정보들을 천천히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증조부부터 모두 제주도 출신,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고 어머니는 몇 년 전 타계. 제주도 학습센터에서부터 백신 연구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학습 성과를 보여 여의도 센터로 발탁. 여의도 쉘터에 있던 기간 동안 백신 연구뿐만 아니라 성욕 억제제 부작용을 없애는 데 성공했으며, 옥수수와 보리의 개량종 및 다양한 건강보조제를 개발함.]
석 박사가 서울에 있던 때는 아담이 7차 변이 전이었기 때문에 나름 한가했나 본데, 별 걸 다 개발하고 실용화시켰네. 곽수환은 다시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여의도 쉘터에 있을 당시 故오양석과 함께 돌연변이를 연구함.]
“돌연변이 연구?”
[유전물질 변화로 태어난 사람들을 조사하고 연구해왔으며, 석화 박사도 돌연변이에 해당함. 쉘터로 돌아오고 다시 돌연변이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임. 반군으로서의 기질은 보이지 않음.]
추가로 덧붙여진 하단의 내용에는 곽수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석화 박사의 돌연변이 집착 특성: 돌]
“종료해.”
곧 벽면을 비추던 프로젝트 빔이 꺼지고 주변은 어둡게 변했다.
***
“하, 춥다. 불알 얼겠네. 정액 탱크 얼면 큰일인데.”
지프 밖에 서 있는 양상훈이 입김을 길게 내뱉었다. 쉘터 1층에 차를 세워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탱크는 지랄. 똘수환이고 너고, 존나 짜증 나. 우리 순백의 박사님은 왜 안 나오시는 거야.”
“곽수환이 모시고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마 그럴걸?”
이채윤이 지프에 내장된 시계를 확인했다. 9시 15분이 됐는데도 곽수환과 박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올라갔다가 온다.”
케이프를 떼어내고 달려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럴 필요 없어.”
곽수환이 저기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제 덩치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석화도 보였다.
“야, 너는 박사님이 저렇게 큰 배낭 들고 오게 하고 말이야. 박사님, 이건 제가 들겠습니다.”
양상훈이 놀라서 얼른 배낭을 대신 받아들려고 했다.
“자기가 들겠다는데 뭘 어째. 그리고 크기만 컸지 엄청 가벼워.”
“예, 제가 메고 있어도 됩니다. 가볍습니다.”
“가볍다 못해 풍선 달아주면 날아가겠네.”
“불가능한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한 건 석 박사 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채윤과 양상훈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제 그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둘 사이가 한눈에 보기에도 냉랭했다.
“어휴, 추워라. 빨리 타시죠, 하하. 이러다가 정액 탱크 얼겠네.”
양상훈이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애써 웃으면서 말을 했는데, 그는 분명 봤다. 아주 미세하지만 석화가 눈살을 찌푸린 것을.
아침부터 계속 냉랭한 기운을 풍겼던 석화의 기분이 더 나빠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곽수환 때문이었다. 간신히 시간 맞춰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의무실로 갔더니 의무실장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의무실을 찾은 이유는 의무실장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배치되어 있는 주사용액을 찾아내고 사용자의 이름을 체크해두었다.
주사기의 바늘을 감싼 뚜껑을 빼고 주사용액을 쭉 빨아들였다.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쉘터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응급조치나 주사를 놓는 방법은 다들 숙지하고 있었다. 백신을 저 스스로 놓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석화는 소독솜으로 자신의 팔뚝을 문지른 다음 바늘을 쓰윽 꽂았다. 주사액을 몸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의무실 문이 열렸다.
‘석 박사?’라고 묻던 곽수환이 이내 ‘석 박사님?’으로 말을 바꿨다.
“아, 맞다. 개는 사람 말을 못하지?”
석화는 웃고 있는 곽수환에게 흘끔 시선을 줬다가 피스톤을 완전히 밀었다.
“그건 뭐야?”
문을 닫고 저벅저벅 걸어온 곽수환이 주사에 관심을 보였다.
“성욕 억제제요.”
“뭐?”
방금 제가 들은 게 정말이냐는 듯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석화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 채 소독솜으로 제 팔뚝을 꾹 눌렀다.
“수도승으로 전직하려는 건 아니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뜩이나 성욕도 없는 사람이 그거까지 맞으면 고자 된다고.”
“저도 성욕은 있습니다.”
아침마다 꼬박꼬박 발기도 한다.
“그리고 원래도 맞아왔고요. 연구할 때 성욕은 불필요하거든요.”
곽수환은 어쩐 일로 훅훅 치고 들어오는 석화에게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곧 악당같이 웃으면서 석화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래? 성욕이 있다고? 어디 넣어본 적은 있어? 넣자마자 기절하는 건 아니고?”
질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는데 이 또한 놀리는 게 분명했다.
“제가 분명 반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익숙해져. 이제 와서 나도 못 고쳐.”
아침부터 기운을 빼봤자 저만 손해였기에 석화는 곽수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곽수환 소령은 왜 온 겁니까?”
“석 박사 데리러 왔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곽수환이 제 목을 툭툭 두드렸다. 어제 훈련 중에 난 상처는 평범한 육체의 회복 속도를 무시하고 아물어 있었다.
“레드 구역으로 가는 만큼 만반의 준비는 해둬야겠지.”
거의 다 낫기는 했지만, 혹시나 아담의 피가 튀어 환부에 스며들면 곤란하니까. 곽수환이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곽수환은 밴드를 꺼내 상처가 있던 곳에 탁 붙였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희미한 흔적만 남은 수준이었다. 허술한 척하지만 의외로 그렇지만도 않나. 석화는 연구자로서 곽수환에게 어느 정도의 관심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곽수환 소령님 정자 말입니다.”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곽수환이 앉아있는 석화를 내려다봤다. 소독솜을 쓰레기통에 넣고 걷어 올렸던 스웨터를 도로 내렸다.
“오양석 박사님이 살아계실 적에 상부의 지시로 저와 박사님이 돌연변이에 대한 연구를 해왔거든요. 당시에는 곽수환 소령님이 이 쉘터에 있지 않았고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전부 정자를 채취해 자료를 남겨뒀습니다. 그런데 곽수환 소령님 것은 아무리 자료를 찾아도 없더라고요.”
오양석 박사가 다른 누구도 아닌 곽수환을 빼먹을 리가 없다. 여의도 쉘터에서도 인정하는 군인이라고도 했다. 석화가 반듯이 앉아 곽수환을 올려다봤더니 그가 아, 그거? 하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영감이 살아있을 때 나보고 정자를 달라고는 했지. 근데 영감 얼굴만 봐도 이게 죽어버리는데 어떻게 줘.”
사실 정자를 채취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야한 영상이나 잡지를 보며 자위를 하고 컵에다 사정하는 방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려울 경우 고환에서 직접 채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긴 오양석 박사가 원했다고 하더라도 싫다는 곽수환의 정자를 억지로 채취하기란 어려웠을 거다.
“그러는 석 박사 본인 정자는 채취했어?”
“이미 오래전에 했습니다.”
“자위로?”
곽수환이 빈 의자를 끌어오더니 석화를 마주보고 앉았다. 두 다리를 벌린 채 그 앞을 손바닥으로 누르고는 어깨를 슬쩍 굽혔다. 그는 그대로 석화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석화가 대꾸했다.
“뭐 보면서 자위했어?”
“기억 안 납니다.”
“이성물? 아니면 동성물?”
“이보세요, 곽 소령님. 지금 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레드 구역 다녀오면 곽수환 소령님의 정자를 제출해주셨으면 합니다.”
곽수환이 턱을 문지르면서 슬쩍 웃었다. 여태 지켜봐 온 곽수환은 생각보다 웃음이 많았는데 실없어 보인다기보다 그냥 버릇 같은 표정인 듯했다.
“내가 분명 박사가 만든 성욕 억제제가 부작용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없는 것 같더라고. 오늘 아침에 발기가 안 되더라? 역시 똑똑한 석 박사님 연구가 틀릴 리가 없지.”
사람 열 받게 하는 데 뭐 있는 사람이었다. 석화는 열을 식힐 겸 돌을 찾았지만, 청바지를 입고 나온 터라 빈손이었다.
“고환에서 직접 채취해드리겠습니다. 레드 구역을 다녀와서 실시하죠.”
석화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수환도 뒤따라 일어나서는 석화의 뒤에서 속닥거렸다.
“이왕이면 부드럽게 해줘, 자기야.”
***
여기까지가 오전에 둘이 붙었던 전말이었고, 석화는 여전히 냉랭했으며 곽수환은 전과 같이 행동했다. 지프 안에서 가시방석인 사람은 운전하는 양상훈과 조수석의 이채윤뿐이었다.
도로를 달리는 동안 곳곳에서 아담 회수팀이 시체를 처리하고, 그 부근들을 방역하는 모습이 보였다. 석화에게는 낯선, 아니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사실 피치 못할 이유로 제주도에 있기는 했지만, 다시 여의도로 오기 싫었던 마음 또한 있었다. 쉘터는 완전한 요새가 아니었다. 저는 아담이 쳐들어온 것도 모르고 기절한 채로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수석 연구원이라 부르지만 한 번에 완벽한 연구 결과를 내놓지도 못했다.
처음 레인보우 시티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몰랐지만, 자신이 여의도 쉘터로 가지 않는다면 제주도에서 가족을 전부 내쫓겠다고 했었다. 보호받을 이유가 없는 시민이라면서.
상부라고 불리는 자들은 아담의 위협이 없는 곳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다. 제주도 내에서도 우도에 사는 이들은 바로 레인보우 시티의 최상류층 집단이었다.
지금 이 지프 안에 있는 군인들이야말로 곽수환이 말했던 대로 총알받이들이다. 밖을 내다보던 석화가 다시 지프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곽수환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석 박사.”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가 운을 떼었다.
“오양석 박사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아?”
분위기만 살피던 이채윤이 룸미러를 통해 뒤를 봤다. 재미난 이야기라도 했으면 했는데 또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창문을 연 채로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어떤 의미로 물어보는 겁니까?”
석화는 배낭에서 땅콩 몇 알을 꺼내 씹었다.
“오양석 박사와 같이 연구했었다며. 변이 바이러스든, 돌연변이든.”
“아! 나 그 돌연변이라는 표현 진짜 싫어. 이소룡이라는 소리보다도 더 싫어!”
이채윤이 꽥 소리를 질렀다. 곽수환은 지프의 앞과 뒤를 나눈 차단막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이채윤이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데도 방음은 제법이었다.
“오양석 박사님과 같이 연구를 한 건 맞습니다.”
“그 영감한테 특이사항 같은 건 없었고?”
석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오양석 박사를 떠올렸다.
돌이켜 생각해도 특이할 건 없는 수석 연구원이었지만,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상부에 아무런 보고도 없이 밖을 나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고, 연구소에 앉아 뭔가에 몰두하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면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물론 나타난 사람이 석화일 때면 안심을 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석 박사는 종교 같은 건 관심 없나?”
하아……. 석화가 피곤하다는 듯 다시 창밖을 보았다. 돌려 말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석화 본인도 할 말이 있을 때는 핵심만을 던지고는 했다.
곽수환은 뒷좌석 중앙에 달려있는 영상기록장치의 전원을 껐다. 블랙박스를 차단한 이유를 석화도 어느 정도는 짐작했다. 뭔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오양석 박사가 연구하던 게 뭔지 알지?”
“7차 아담 백신이요.”
“설마 그거 때문에 오양석 박사가 죽었을까 싶은데, 석 박사 똑똑하잖아. 오양석 박사 집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 중에 이상한 내용이 있지는 않았어?”
이 남자가 왜 갑자기 오양석에 대해서 깊숙하게 파고드는지 석화로서는 감이 오지 않았다.
“제가 가져온 자료는 찢겨나가거나 피로 얼룩진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근데 종교 이야기는 뭡니까?”
곽수환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한 손으로 어깨를 잡고 돌렸다.
“이참에 나도 종교에 귀의나 좀 해볼까 해서.”
“……안 어울리네요.”
나지막하게 지껄이니 곽수환이 손에 쥐고 있던 땅콩 몇 개를 가져갔다. 위로 던져서 제 입에 쏙 넣고는 몇 번 씹어 뭉개버렸다.
“에덴동산.”
말을 툭 던져놓은 곽수환이 석화를 면밀히 살폈다. 마더의 자료에서는 석화에게 반군 기질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은 또 모를 일 아닌가.
석화는 미소를 띠고 있는 곽수환을 마주 보면서 오양석의 일지를 떠올렸다.
[에덴동산 놀라운 사실. 상부는 원하지 않는다.]
말을 해야 하나? 어차피 자신의 자리에 있는 자료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읽을 수 있을 거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속이면 원치 않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레인보우 시티는 철저한 통제 속에 유지됐고, 그에 안전함을 보장 받았다.
“오양석 박사님의 일지에 에덴동산에 대한 언급은 있었습니다.”
“그래?”
곽수환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놀라운 사실. 상부는 원하지 않는다.”
“뭐?”
“일지에 적힌 건 그게 전부입니다. 그 외에는 없고요.”
에덴동산이 무엇인지, 상부가 뭘 원하지 않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저는 연구원일 뿐이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연구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건, 아무리 찾아봐도 7차 백신에 대한 오양석의 뚜렷한 연구 자료가 없다는 거다. 가설부터 시작해 실험이 진행된 내용도 없었기에 석화는 오양석 박사의 집을 찾아가봤다. 제가 알던 박사님이라면 아담이 변이했다는데, 가만히 손을 놓고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아씨, 끊었나 본데요? 곽 소령은 그렇다 쳐도 박사는 얘기가 또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석화는 아직도 그 목소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점퍼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돌을 만지작거렸다.
오양석 박사의 죽음으로 제주도에 있던 자신이 여의도 쉘터로 와야 했고, 13구역에 술을 훔치러 갔던 곽수환이 영창을 가는 대신 저의 경호원이 됐다.
쉘터 안에서는 경호가 필요 없는데도 곽수환이 저를 따라다녔고, 군인답지 않게 오양석 박사의 집에서 가져온 일지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 일지에 쓰여 있는 에덴동산을 먼저 언급한 것을 보면, 저가 모르는 뭔가가 곽수환에게도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오양석을 죽인 사람이 김 박사의 말대로 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곽수환 소령님이 정말 오양석 박사님을 살해한 사람이 아닙니까?”
곽수환이 완전히 몸을 옆으로 틀어서 석화를 봤다. 버석거리는 제복의 소리가 음산했다. 그는 손을 가져가 검지로 석화의 손바닥을 긁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주먹을 쥐려 했는데, 그가 땅콩을 굴려서 손목까지 끌고 갔다. 손으로 쥐더니 벌어져 있는 석화의 입에 툭 넣었다.
“어떤 결론을 내렸기에 거기까지 도달했어? 그런데 난 아니야. 또 모르지, 반군에게 죽었을지도. 아니면 오양석 박사를 싫어하던 동료일 수도, 아니면.”
“상부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한 오양석 박사를……. 상부에서 죽인 것일 수도요.”
땅콩이 입 안에서 눅눅해졌다.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데.”
꺼놔서 다행이네. 곽수환은 전원이 꺼진 영상기록장치를 가리켰다.
똑똑, 이채윤이 좌석 칸막이의 창을 두드렸다. 그녀가 ‘도착했거든?’ 입 모양으로만 뒤에 있는 남자 둘에게 말을 전달했다. 곽수환이 영상기록장치의 전원을 다시 켰다. 저에게로 팔을 휙 뻗는 순간 석화가 등을 바짝 뒤로 붙였다. 위협적으로 느낀 건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달칵, 문을 열어준 곽수환이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는 웃었다.
“내리시죠, 박사님.”
***
석화는 앞서서 걷는 이채윤과 양상훈을 천천히 훑어봤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 있는 곽수환에게도 신경을 집중했다. 군인 셋은 레드 구역에 들어섰음에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레드 구역이라고 하지만 동물원 반경 1km는 그린 구역에 버금가게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건 내부 모습이었다. 말만 동물원인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한 곳은 실제 동물원으로 운영되던 외곽의 사파리였다. 대신 맹수우리는 폐쇄되었으며 기존에 유인원들이 갇혀 있던 건물만 운영되고 있었다.
“석 박사, 그렇게 신나?”
곽수환이 석화의 얼굴을 가리켰다. 석화의 뺨은 평소와 다르게 상기되어 있었기에 마치 소풍 나가는 길에 들뜬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열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붉어진 거라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날씨는 입김이 나오다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신나? 박사님, 나도 신나! 동물원은 쉘터에서 영상으로만 봤는데 장난 아니더라? 옛날에는 사자랑 호랑이도 실제로 볼 수 있었대. 와씨, 나도 호랑이랑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오히려 이채윤이 아이처럼 신나서 방방 날뛰어댔다.
“호랑이 장난 아니게 세대. 근데 내가 더 셀걸? 박사님은 직접 본 적 있어? 맹수들은 제주도에서 보호하고 있다며?”
호랑이를 비롯해 맹수들 대부분은 멸종 위기종이라 통합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화도 직접 맹수를 본 적은 없었다.
“아뇨, 저도 못 봤습니다.”
“나도 한 번 붙어보고 싶기는 하네.”
양상훈이 갑자기 입맛을 다셨다. 맹수랑 붙어봐야 뭐 좋을 게 있다고. 그래도 힘자랑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석화는 그들의 순수함에 티가 날 듯 말 듯이 웃었다.
“설마 지금 웃은 건 아니지?”
“그런데요.”
석화가 배낭끈을 손으로 쥐었다.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폭소해본 적은 있어?”
“곽 소령님은요?”
“있겠지? 나 잘 웃잖아.”
글쎄, 곽수환이 폭소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원래도 무겁지는 않았지만 배낭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체력보강 약이 드디어 빛을 발휘하나 싶어 걸음을 빨리했는데, 몸이 뒤로 휘청했다. 곽수환도 석화가 앞으로 먼저 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저에게 딸려온 몸을 놀라 감싸 안았다. 알고 보니 곽수환이 배낭 고리에 손을 걸어 무게를 덜어주던 것뿐이었다.
석화는 허리를 감싼 손을 떼어내고 배낭을 그에게 넘겼다.
왜, 석 박사가 든다며, 그런 비슷한 말로 놀릴 줄 알았는데 곽수환은 한쪽 어깨에 메고만 말았다.
“고맙습니다.”
“힘들면 말해. 업어줄 수도 있어.”
“그 정도는 아직 아닙니다.”
열이 많은 석화는 따뜻한 쉘터나 지프보다 밖이 좀 더 나았다.
[유인원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도착한 건물을 올려다봤다. 3층 정도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유인원관이었다. 곽수환이 벨을 누르자 두꺼운 철문이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부는 난방이 되지 않는지 문을 열어준 군인의 입에서도 하얀 김이 솟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백골 소대 소속 강철오 대위입니다.”
각 잡힌 자세로 경례를 하는 대위에게 이채윤이 격식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바로 이동해. 여의도 쉘터 지시는 들었지?”
“예, 소령님. 7차 아담 셋을 저희가 포획했습니다.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대위가 먼저 앞장을 섰고, 모두가 들어서자 두꺼운 철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아담을 가둬놨다면 특유의 짐승 소리가 들릴 만도 한데 유인원관은 고요했다. 오히려 군인들의 군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고 이따금 쿵, 쿵 건물을 울리는 굉음만이 들려왔다. 석화도 아담을 직접 본 일은 수많았다. 물론 그들과 대치하는 군인만큼은 아니지만, 아담의 습성을 보기 위해 하루 종일 방탄유리 하나를 두고 지켜본 적도 있었다.
“이쪽입니다.”
대위가 안내한 곳은 방송실로 보이는 방이었다. 커다란 유리가 전면에 보였고, 사람 셋, 아니 아담 셋이 유리창 너머 좁은 방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들 왜 저래?”
양상훈이 먼저 물었다.
“반응을 주지 않으면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앉아있거나 누워있기까지 합니다.”
“예?”
석화가 놀라 반문했다. 대위는 석화의 목에 달린 연구원증을 보고 다시금 반듯하게 섰다.
“박사님, 잠시 놀라실 수도 있으니.”
조금 뒤로 빠지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석화는 좀 더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체력을 비축하는 것처럼 아담에게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
한참을 관찰하고 있으니 옆으로 다가온 곽수환이 쾅! 하고 유리창을 쳤다. 흡, 석화는 숨을 삼켰다. 창은 흔들흔들 떨림까지 느껴지는 듯했고, 동시에 벽을 향해 있던 아담 셋이 악귀처럼 창을 향해 달려들었다. 석화는 뒤로 물러서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바짝 힘을 줬다. 아담의 힘으로는 이 유리를 부술 수 없다는 걸 안다. 눈에 핏줄이 다 터진 채 입을 쩍 벌리고 사람을 공격하려는 아담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으니 조금 현실감이 멀었다.
“방음이……. 이렇게 잘 되는 겁니까?”
“방음이요? 아~ 아닙니다. 저놈들 잡아왔을 때 상부에서 지시를 내렸거든요. 그 때문에 혀와 성대를 다 잘라냈습니다.”
대위가 생긋 웃었다. 혀와 성대를 잘라냈다고? 아담의 괴물 같은 울음소리는 신경을 거슬릴 정도로 시끄럽기는 했지만 여태 성대를 잘라낸 적은 없었다. 아담 본연으로 관찰을 해야 하는데, 석화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아담들도 후퇴를 했습니까?”
이채윤이 창 앞으로 가더니 아담처럼 이마를 쿵쿵 부딪치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양상훈도 옆에서 잘한다면서 낄낄대고 웃었다.
“그건 저도 잘……. 저희는 잡아온 놈들을 가둬둔 것뿐이라서요.”
“혹시, 말 같은 건 하지 않았고요?”
“말이요?”
대위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뒷목을 쓸어내렸다.
“잡아오자마자 혀를 잘라내서. 그것도 잘.”
“박사님!”
이채윤의 목소리에 석화가 어깨를 울렸다.
“쟤네 후퇴하는지 안 하는지 궁금해? 내가 들어가서 싸워볼까?”
“아뇨. 그러지 마세요.”
“나 엄청 세. 저것들하고 붙어도 내가 이겨.”
“괜찮습니다.”
7차 변이 아담의 바이러스는 이미 연구소에 충분히 넘치도록 보유 중이었다. 다만 이상행동을 보인다고 하니 직접 보러 온 것뿐이다. 연구실에 주구장창 앉아있는 것보다 현장에서 뭔가를 얻어올 때도 있는 법이니까.
쿵!
쿵!!
유리창을 향해 아담 중 한 놈이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쿵!!! 이마가 깨지고 유리창에는 붉은 피가 묻어났다. 또다시 쿵! 석화는 기괴하게 번들거리는 아담의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머리를 박던 아담이 고개를 기이할 정도로 뒤틀었다.
하아, 놈이 숨을 내뱉자 유리창에 습기가 찼다. 천천히 입을 뻐끔거렸는데 믿을 수 없지만,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석화는 재빨리 동공을 이동해 나머지 아담을 봤다. 그들은 여전히 발광하는 중이었다. 또다시 입을 뻐끔거리는 아담을 응시했더니 놈은 같은 입 모양을 반복했다. 석화가 아담의 입 모양을 따라해 보려는 그 순간이었다.
“윽!”
촤아악, 아담의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엄청난 핏물이 솟구쳤다. 페인트를 흩뿌린 것처럼 유리창을 타고 찐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몸에 있는 모든 피를 토해낸 듯한 아담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근, 두근, 심장이 안에서 마구 요동쳤다.
“저거 끝장난 거 같은데?”
이채윤이 바닥에 널브러진 몸을 손가락질했다.
“예, 돌아가시는 즉시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박사님?”
“…….”
“박사님?”
굳어 있는 석화를 대위가 반복해서 불렀다. 곽수환은 그만 부르면 됐다면서 행여 석화가 뒤로 고꾸라지지는 않을지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이내 평정을 찾고 목소리를 냈다.
“저 아담들이 잡혀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보름 정도 됐습니다.”
“장소는요?”
“13레드 구역입니다.”
아담이 피나 내장을 섭취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은 대략 석 달이었다.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 아마 몇 년 이상 살아있는 놈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더 알아보실 사항이 없으면 폐기할까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아담을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일은 없었다.
“폐기해.”
석화 대신 곽수환이 답을 주었다. 언제 붉어졌느냐는 듯 하얗게 질린 석화를 그가 지켜봤다.
“이브…….”
석화가 중얼거렸다. 아담이 반복한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