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ol's paradise (3)
아담 바이러스는 유럽의 작은 마을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바이러스를 퍼뜨린 흑막?
그런 건 이미 밝혀진 지 오래다. 프랑스 대기업이던 ㈜아담 제약회사에서 자기들이 개발한 백신을 팔기 위해 바이러스를 살포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퍼뜨린 제약회사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감염이 확산됐고, 그들이 만든 백신마저도 말을 듣지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돈에 눈이 먼 회사가 세상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에 감염이 된 이들이 아담이라 불렸고, 연구자들이 머리를 싸매 만든 백신의 이름 또한 제약회사에서 내걸었던 백신의 이름인 이브였다.
아담 제약회사의 사장은 일이 터지자마자 방공호에 숨어들었지만 결국 감염되어 죽었으며, 제약회사에 몸담고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맞아 죽거나 감염되어 죽었다.
인류가 위험에 빠지는 이유는 핵에 있지 않을까 고심했다던데,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의외의 방법으로 위협이 찾아왔다.
이 모든 건 석화를 비롯해 지프에 타고 있는 세 명의 군인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석화는 돌아오는 길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남은 땅콩을 꺼내 먹었다. 오물대고 먹는 소리에 곽수환도 석화가 깨어난 것을 알았다. 벌써 저 밖은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금세 시커멓게 변할 무저갱을 헤드라이트로 밝히게 될 터였다.
“아무래도.”
석화의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7차 아담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석 박사가 오죽 예뻐야 말이지. 놈 눈에 이브로 보였나 보지.”
아담이 반복한 단어를 곽수환에게 말했지만, 그는 아담이 그렇게 입 모양을 했다는 것을 보지도 못했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다.
“헌병대에서 오양석 박사님 연구에 관련한 자료를 이미 가져갔다고 했었죠?”
“아마?”
“그걸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곽수환이 입매만 쓱 끌어올렸다.
“부탁해볼게.”
아직 남아있다면 말이지. 상부에서 왜 석화를 눈여겨보라고 했는지 곽수환도 대충은 짐작했다. 확실히 저희들의 사람으로 품을 수 있을지 아니면 내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그 또한 어떤 이유로 오양석이 상부와 마찰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윗대가리들이 제거했다는 것도 팩트는 아니었고, 단순히 제가 유추한 것뿐이었다.
왜냐? 마더를 통해서 내려오는 메시지를 보면, 상부가 죽은 오양석 박사를 아직도 경계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에덴동산을 추적하라고 지시한 것도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였다. 에덴동산과 오양석과의 관계는 바로 저 자신이 혹시나 싶어 연관지어본 것뿐이고.
여태 상부에서 이런 식의 명령을 내린 적은 없었다. 반군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위협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에덴동산을 비롯해 오양석까지 상부가 관심을 쏟으니, 그 둘이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석화는 저보다도 더 많은 의심을 하고 여러 가설에 도달했을 수도 있었다. 사실 의심은 얼마든지 해도 상관없었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저희들에게 반기를 세우느냐 아니냐, 그 두 가지뿐이니까.
석화는 피곤한 듯 눈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도로를 밝히며 달려 나가던 차에 퍽! 충격이 찾아왔다. 석화가 놀라서 고개를 휙 들었다. 벨트를 매고 있었기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오히려 양상훈이 더 놀라 뒤를 돌아봤다.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네, 근데 방금.”
뭔가를 친 것 같은데…….
“사람은 아니고 불빛 보고 달려든 아담이요.”
기운이 다 빠진 아담인지 정면으로 치이지는 않고 측면에 들이박고 나가떨어졌다. 밖에 나와 있으니 쉘터가 얼마나 안전한 요새인지 실감이 났다. 석화는 어서 쉘터로 돌아가 이상 현상에 대해 김 박사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괜찮아?”
“네.”
석화는 벨트를 손으로 쥐고 곽수환을 돌아보았다. 앞좌석에서는 간간이 콧노래도 들려왔고, 곽수환은 뒷좌석에 놓여있던 큐브를 손으로 돌리고 있었다. 4x4 큐브인데 거의 절반쯤 완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금방 완성되는 것에는 흥미가 없는지 마구 흩뜨려 놓기를 반복했다.
찐득거리는 핏물을 뱉으며 괴물처럼 달려드는 아담을, 이들은 늘 상대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말이다. 석화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쓰였다.
앞의 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담을 보면서 낄낄대기도 했고 곽수환도 익숙한 일인 듯 행동했지만, 이들에게는 비일상이 일상이라는 사실에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제주도는…….”
“응?”
큐브를 돌리던 곽수환이 되물었다.
“평화로웠죠?”
“난 안 가봐서 몰라! 제주도 되게 좋다던데? 어때?”
이채윤이 조수석 헤드를 붙들고 뒤돌아 눈을 반짝거렸다.
“거긴 아담의 아 자도 보기 힘들다면서요.”
양상훈도 흥미가 이는지 운전 중에 말을 건넸다.
“모래사장에서 모지리처럼 돌이나 찾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평화롭긴 한 거겠지.”
“나중에 같이 가요.”
멈칫, 곽수환이 큐브를 돌리던 손을 멈췄다. 이채윤도 두 눈을 크게 떴고, 양상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박사님, 진짜지?”
“근데 언제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양상훈이 여기가 이 꼴인데 보내주겠냐면서 한숨만 토했다. 곽수환만 석 박사가 돌이라도 잘못 삼켰나 싶은 반응이었다. 사회성이라고는 제로에 가깝던 사람이 먼저 어디를 가자고 말하다니,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었다.
“아담이 없는 데는 처음일 테니까. 평화로울 겁니다.”
그 말에 곽수환이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석 박사가 지금 어떤 감상에 신호가 눌렸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들이 안쓰러워 보였나 본데, 그렇다면 애초에 단단히 잘못 봤다. 저를 비롯해 이채윤이나 양상훈은 평화를 바란 적도 없었고, 그 평화롭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도 모른다. 불안함이라는 것은 아담이 두려울 때나 생기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마음은 언제나 충분히 안정되어 있었다.
“석 박사.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도 세상이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을걸.”
곽수환이 큐브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아담이 나타나기 전이 평화의 시대라고 불리던데요.”
“이렇게 보면 간단하지. 박사가 있던 제주도나 여의도 쉘터는 아주 안전하지? 맨몸으로 다녀도 다칠 일이 없다는 소리고,”
“그렇죠.”
“아담이 나타나기 바로 전, 평화의 시대라고 불렸던 때를 생각해볼까? 그때도 지금 쉘터나 제주도처럼 안전한 국가는 있었겠지. 그런데 모든 국가가 전부 안전하지는 않았거든. 내전이 벌어지는 곳도 있었고, 실제로 갱단이 나라를 먹은 곳도 있었다던데? 박사는 운 좋게 그 똑똑한 두뇌를 타고났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그때도 내전이 있던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운이 좋았던 거겠고.”
“아, 나는 저 새끼 저런 말 할 때마다 아가리에 주먹이나 꽂아주고 싶어.”
이채윤이 주먹을 쥐고 뒤를 향해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석화는 곽수환의 말을 곱씹어봤다. 맞는 말이다. 저는 운이 좋아서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운이 좋아서 학습능력도 뛰어났고. 그런데 그 운이란 것을 가지기 위해 운동장 한 바퀴도 제대로 달리지 못하는 몸뚱이로 태어났다면 그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건가?
석화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개를 숙이고 땅콩이나 몇 개 더 주워 먹으려는 때였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저기 옆에서부터 쏘아져 들어왔다.
이 도로에 다른 차량이 있는 건가? 짧은 순간에 의문을 가졌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콰아앙!!! 하는 굉음이 터졌다. 좀 전과는 다른 엄청난 충격이 차체에 찾아와 지프가 함부로 빙글빙글 돌았다. 엄청난 원심력에 무슨 일인지 인지할 수조차 없이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박사님부터 지켜!”
이채윤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무지개처럼 색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4X4 큐브가 허공에 나는 장면을 본 게 가장 마지막 기억이었다.
***
끼이이이이익-!
양상훈은 함부로 돌아가는 핸들을 힘껏 움켜쥐며 차를 원래대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반동에 전봇대를 들이받은 지프는 옆으로 전복되어 버렸다.
곽수환은 벨트를 맨 채로 기절해 있는 석화를 우선 밖으로 빼내려고 했다. 지프가 옆으로 넘어가 버린 바람에 석화의 몸이 자신에게 한껏 쏠려 있었다. 곽수환은 재빨리 제복 안쪽에서 군용 나이프를 꺼내 벨트를 끊어냈다.
콰직, 그와 동시에 위의 차문이 뜯겨 나갔다. 옆에서 차를 들이받은 놈 같은데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놈은 석화의 팔을 잡아 휙 끌어올려 차 밖으로 이끌어냈다.
한 놈은 아니다. 적어도 세 놈은 됐으며, 놈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중 한 놈이 휘발유를 차에 끼얹고 있었다. 불이 붙는 그 순간, 앞좌석의 이채윤과 양상훈은 너덜거리는 앞 유리를 박살내고 뛰쳐나갔고, 곽수환도 손을 뻗어 석화가 빠져나간 문을 올라타 차를 빠져나왔다.
곽수환은 홀스터의 콜트를 꺼내 석화를 들쳐 업은 놈의 다리를 저격했다. 허벅지가 관통된 놈이 휘청하자 다른 가면을 쓴 놈이 석화의 몸을 넘겨받았다. 놈은 차에 석화를 태운 뒤에 나머지 동료를 버리고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곽수환이 바퀴를 향해 저격을 하자 한 놈이 덤벼들었다. 군용으로 지급되는 나이프보다 좀 더 긴 종류의 나이프가 턱을 빗겨 찔러 들어왔다. 그는 몸을 뒤로 빼면서 대체 뭐 하냐는 듯 양상훈을 돌아봤다. 허벅지에 총을 맞은 놈을 상대로 제 동료 둘이 고전을 벌이고 있었다.
눈앞에서 석화를 놓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나이프를 고쳐 쥐어 가슴에 찔러 넣으려는 놈을 피해 몸을 굽혔고, 주먹으로 명치를 내질렀다.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던 놈이 다시 자세를 잡고 찔러 들어오려고 했다. 놈은 쉘터에 있는 군인들보다 좀 더 실전에 강해 보였다. 저희들과 힘으로 견줄 자라면 당황스럽게도 일반인은 아닐 것이다. 반군에도 돌연변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맞닥뜨린 건 처음이었다.
곽수환은 나이프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몸을 돌려 상대의 팔을 제압해 자신이 가진 나이프로 심장에 찔러 넣었다. 컥, 하는 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을 한 번 더 비틀자 상대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곽수환은 바닥으로 널브러지는 놈을 내려다봤다. 쿨럭, 하얀 가면 밑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허리를 굽혀 나이프를 빼낸 후에 피를 털어냈다. 동료와 싸우고 있는 남은 한 놈의 정수리를 향해 곧장 칼을 내던졌다.
나이프가 이마에 꽂히자 가면이 쩍 하고 갈라졌다. 툭, 가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곽수환이 고함을 쳤다.
“병신들, 한 새끼 상대로 뭐 해!”
동시에 놈의 등에 올라타 있던 이채윤이 목을 확 꺾어버렸다.
저기서 시뻘건 불길을 내뿜으며 불타고 있는 지프, 그리고 반군으로 추정되는 죽어있는 두 놈, 차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석화……. 곽수환은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비상 무전기를 들었다.
“가장 가까운 쉘터 연결하라, 여의도 쉘터 3121 곽수환 소령이다. 1급 위기발령, 수석 연구원이 납치됐다. 여의도 쉘터 소속이자 이름 석화, GPS 관제 열어서 추적해. 이쪽으로 차도 한 대 보내고.”
바닥을 향해 한숨이 꺼져라 숨을 쉬는 양상훈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대체 이 새끼들 뭐야?”
이채윤이 곽수환 근처에 널브러진 놈의 가면을 벗겨냈다. 처음 보는 낯선 자였다.
“군인도 아닌데 어떻게…….”
허벅지에 총상이 있었음에도 저희 둘과 대등하게 붙은 놈이었다. 양상훈은 손을 잠시 떨었는데 그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현상이었다. 아마 저 혼자 있었다면 이놈에게 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마저 했다.
“어떻게 해? 차 올 때까지 대기해? 석화 박사님 GPS 추적은 가능한 거야? 구하러 갈 수는 있는 거냐고! 넌 운전을 어떻게 한 거야! 병신이냐? 어? 옆에서 오는 걸 왜 몰라!”
이채윤이 발을 동동 굴렀다.
“헤드라이트도 안 켜고 덤벼들었어! 박기 직전에 켜서 몰랐다고. 하, 돌겠네, 진짜! 곽수환, 박사님이 다치지는 않겠지?”
석화를 데려갈 때 목숨만 살려서 납치한다는 심보로 보이지는 않았다. 총알에 허벅지가 관통된 놈도 제가 휘청거리기 전에 석화를 다른 놈에게 곧장 넘겼다.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듯하지만, 이마저도 확실한 건 아니다.
[석화 연구원 GPS 추적 성공. 이동 경로 진행합니까?]
“진행해. 석화 자기 구하러 가야지.”
곽수환은 무표정하게 지껄였다.
***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 최전방에 선 레인보우 시티, 우리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입니다, 입니다, 입니다.]
[번영은 끝났고, 인류는 쇠퇴했으며,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 저희들 잇속만 채우려는 자들이 지금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들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으며 아담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다, 다.]
지저분한 소리가 마구잡이로 섞여 들어왔다. 석화는 엄청난 두통에 몸을 웅크리고 신음했다. 아직도 빙글빙글 도는 차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토악질이 나와 구토를 했고 역류한 위액에 시큼한 맛이 느껴졌다. 숨을 헉헉거리다가 간신히 눈을 떴는데도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눈을 가린 것을 풀어내고 싶지만 두 손도 묶여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박사님?”
석화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흠칫 몸을 떨었다. 입술로 뭔가가 다가와 고개를 흔들자 안심하라며 상대는 미지근한 물을 흘려 넣었다.
“놀라셨을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쉘터를 나오실 때만을 기다렸기 때문에 저희도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석화는 이마를 꾹 누르고 싶었으나 뒤로 묶인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통이 엄청났다.
“안심하세요. 박사님을 위협하고자 모셔온 게 아닙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자아내는 남자는 석화의 입에 다시금 미지근한 물을 넣어주었다.
“……여기는.”
“저희가 임시로 만든 거처입니다. 전해드릴 말을 전달하면 안전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석화는 다시 한번 이마를 꾹 눌렀다가 고개를 들었다.
“안대를 벗겨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인 듯하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누구십니까? 저와 있던 군인들은…….”
“그자들을 상대로 박사님을 모셔오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저희도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무사합니까?”
“그럼요.”
남자가 나직하게 웃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음성은 부드럽지만 조급함이 묻어나있었다.
“지금부터 저희가 들려드릴 것은 오양석 박사님의 유언입니다.”
“……예?”
“저희는 석화 박사님께 남긴 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석화는 남자의 말을 들으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을 죽이거나 해코지를 할 셈이었다면 이렇게 안심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째서 차로 지프를 들이받으면서까지 자신을 납치했는지, 그 모든 것은 바로 오양석 박사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달칵,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 최전방에 선 레인보우 시티, 우리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입니다.]
쉘터에서 수없이 듣던 정규 방송이자 마더의 음성이었다. 이후로는 익숙한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저 소리가 들리는가?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
석화가 소리를 향해 좀 더 신경을 집중했다. 착각할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 오양석 박사의 목소리였다.
[석 박사, 자네가 제주도로 가고 나서부터 연락이 전혀 되지를 않으니 이렇게 따로 녹음을 남김세. 아마도 저 위엣놈들이 수작을 부렸겠지. 우리 함께 이야기 나눴던 게 기억이 나는가? 의아하지 않던가? 바이러스의 변이 말일세. 백신을 개발하면 바이러스가 또 변이를 하지. 그런데 과연 이게 자연스러운 일인가? 벌써 7차 변이까지 왔네. 내 석 박사와 함께 연구를 하며 백신이 아닌 치료법을 개발하려 했지.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에 석 박사가 내게 이야기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 치료법에는……. 찌직…… 즈즈즉…….]
타앙!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석화가 뒤로 몸을 물렸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심하세요. 방금 총성은 이 스피커에서 난 소리입니다.”
오양석이 남긴 전언은 여기까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총소리는……. 오양석 박사는 자신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다가 죽임을 당한 것만 같았다. 석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오양석의 말을 되새겨봤다.
백신이 아닌 치료법을 개발하자는 이야기는 오양석 박사와 종종 나누었다. 그러나 상부는 백신부터 개발하라고 종용해왔다.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만큼 다른 연구에 지원을 해주기는 어렵다는 말도 당시에는 물론 이해했다.
“박사님. 오양석 박사님께서는 계속 석화 박사님께 연락을 취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연락을 할 수가 없었죠.”
마치 석화 박사님과 오양석 박사님의 연락을 누군가가 억지로 두절시켜놓은 듯이.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석화는 아무런 말도 없이 숨만 조용히 몰아쉬었다.
“예,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저를 믿기도 힘드시겠지요. 그러나 그만큼 쉘터의 그 누구도 믿지 마셨으면 합니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반군……입니까?”
석화는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레인보우 시티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남자가 쓰게 웃었다.
***
“씨발! 열 받아! 아아악!”
이채윤이 소리를 지르다가 지프 조수석 등받이를 발로 내리쳤다.
“이 소령. 열 받는 건 알겠는데 나 앞으로 튀어나가겠다. 곽 소령, 여기서 2km 계속 직진하면 돼.”
운전대는 곽수환이 잡았고, 양상훈이 석화의 위치가 추적되는 GPS를 따라 방향을 설명했다.
GPS가 가리키는 곳은 동물원에서도 좀 더 밑의 지역이었다. 색으로 분리가 되지 않은 것을 보니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구역도 아니었다. 이로써 석화를 납치해간 자들은 반군이 확실해졌다. 다만 죽은 놈들의 시체를 수색했어도 어디 소속인지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었다.
“저기 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양상훈이 화면의 레이더를 보더니 엄지를 세워 오른쪽을 가리켰다. 레인보우 시티에 속한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칩이 이식된다. 곽수환은 그걸 개목걸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만큼은 톡톡히 도움이 됐으니 그 하나는 다행이었다. 그들의 뒤로 몇 대의 지프가 더 이동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쉘터에서 지원을 나온 군인들이었다.
“아, 진짜 쪽팔려서.”
양상훈이 뒤따라오는 지프를 사이드미러로 확인하더니 쯧 혀를 찼다.
“쪽팔린 건 알긴 해?”
곽수환을 비롯해 나머지 둘이 이런 식으로 역습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건 곽수환에게도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다.
“근데 그 새끼들 생각보다 많이 셌지?”
양상훈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솔직하게 물었다. 곽수환이 액셀을 더 깊게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
“A급 정도.”
여의도 쉘터만 해도 A급 군인은 몇 되지 않는다. 곽수환의 말에 양상훈이 기막힌 듯 한숨을 흘렸다.
“자기네 편을 그냥 버리고 갈 정도면, 반군 전력이 어느 정도라는 소리야?”
양상훈이나 이채윤도 반군을 직접 상대한 적은 손꼽았다. 대체로 조용히 처리해야 할 일은 곽수환이 상부의 지시를 받고 다녀오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야, 곽 소령.”
“시끄럽고, 계속 직진이야?”
“어. 근데 곽 소령아.”
양상훈의 태도가 어쩐지 이상했다. 흘끔 내려다보니 GPS 추적기를 들고 있는 양상훈이 손을 떨고 있었다.
“이젠 하다하다 별.”
어이없음을 넘어서서 비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 처음이다. 이런 느낌.”
“징그러운 표현 쓰지 말지?”
“야! 양상훈이 새끼 손 떨어!”
이채윤은 뒤에서 양상훈의 목을 팔로 감싸고 꾹 졸랐다.
“쫄지 마, 새끼야. 장 중령님이 세상은 넓고 힘 센 놈은 많다고 했어.”
그녀 나름대로의 위로인 것을 양상훈도 알았다. 곽수환은 양상훈 대신 직접 GPS 화면을 보면서 방향을 틀었다.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당황스럽게도 땀이 차올라 있었다. 석화가 평화의 시대라는 말을 운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 시대였다면 석화를 눈앞에서 놓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자신은 늘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나 보다.
처음에는 장 중령의 잔소리 때문일까 싶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업혀가던 석화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설마 차 안에서 그대로 기절한 채 죽은 건 아니겠지? 설마, 아무리 약하다, 약하다 해도 강단이 있던 석 박사가 아니었나.
GPS가 가리키는 곳은 이제 코앞이었다. 삐뚜름하게 걸려 있는 간판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무리 없이 운영되던 때처럼 빛을 흡수하고 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허니 모텔. 조악한 모양의 글씨체였다.
“모텔?”
그 앞에서 차를 세우자 이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기해.”
이채윤과 양상훈이 내리려고 하자, 곽수환이 그들을 만류하고 지프에 내장된 무전을 들었다. 뒤따라오던 지프의 군인들도 아직 차에서 대기 중이었다.
“현재 장소,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아담이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각자 무장을 하도록. 우리는 정문, 나머지는 후문으로 진입한다.”
[카피 댓.]
곽수환도 모든 지프가 수신을 받았는지 확인했다. 정문과 후문은 둘 다 쇠사슬로 문이 묶여있어 부수고 들어가야 할 성싶었다.
그는 반쯤 찢긴 케이프를 떼어내고 권총과 군용나이프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석화의 GPS 신호는 이동 없이 아직 저 안에 잡혀 있었다. 지프 상단에 매달린 조명등이 모텔을 밝혔지만, 내부로 들어가게 되면 손전등에 의지해야 했다. 후문으로 이동하는 군인들을 보고 나서 곽수환이 턱짓으로 정문을 가리켰다. 양상훈이 소음기가 달린 총으로 문의 쇠사슬을 끊어내는 때였다.
끄아아아악!
후문 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젠장. 곽수환이 발로 정문을 걷어차자 지프의 조명 빛이 안으로 쏘아졌다. 후문으로 몰려가 있던 수십의 아담이 휙 뒤를 돌아서 빛이 쏟아지는 이쪽을 향했다.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놈들과 아직 기운이 넘쳐 내달리는 놈들, 그리고 후문의 군인들과 싸우고 있는 아담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1층부터 정리해!”
곽수환이 소리치자 양상훈과 이채윤이 달려오는 아담들을 향해 총탄을 갈겼다. 한 발에 한 놈, 탄환을 다 쓸 때까지 정확히 정수리를 겨냥했고, 쓰러진 아담을 밟고 뛰어오는 놈들이 자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후문으로 쏠렸던 놈들이 정문의 불빛을 보고 이쪽으로 더 몰려왔다.
뒤에서부터 놈들을 해치우는 군인들과 앞에서부터 밀고 들어가는 셋이 아담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숫자가 모텔 안에 있다는 건 누군가가 고의로 놈들을 몰아넣었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곽수환은 달려드는 아담의 목덜미를 잡아들어 올려 몸과 머리를 완전히 돌려 버렸다. 썩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바닥으로 엄청난 핏물들이 번져 나갔다. 빗물을 헤쳐 나가듯 군화에 밟히는 핏물 소리가 찰박거렸다. 아담의 시체가 하나둘 쌓이고 후문 진입팀과 정문팀이 만나니, 처음보다 군인의 수가 줄어들어 있는 게 보였다.
“피해상황 보고해.”
그어어어! 곽수환은 뒤에서부터 달려오는 아담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긴 뒤, 바닥에 쓰러진 놈의 머리뼈를 발로 밟아 박살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여실하게 들렸다. 후문의 군인 하나가 질린 얼굴을 하고는 저희들의 숫자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두, 두 사람 사망했습니다.”
“시체는?”
“놈들이 뜯어 먹어치우는 바람에.”
곽수환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까딱하고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춰봤다.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해. 네가 이 소대 지휘자야?”
그는 후문 팀에서 가장 앞에 나와 있던 남자의 견장을 내려다봤다. 지원 나온 쉘터의 대위였다.
“……예, 그렇습니다.”
“웬만한 놈들은 다 튀어나왔을 테지만 위험요소가 남아있는지 알아보고 제거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한 곽수환은 군용나이프를 꺼내 쥐었다.
“알겠……. ……크어……. 쿨럭.”
대위가 대답을 하다 말고 기침을 쏟아냈다. 입을 막은 손바닥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동시에 그의 주변에 있던 군인들이 하나같이 뒤로 물러났다. 대위는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팔뚝에 긴 상처가 나 있었고, 뜯겨진 살점이 너덜거렸다.
“아……. 아니…… 컥.”
아직이라는 말을 하려던 대위가 다시 한번 기침을 쏟아내니 이번에는 코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그억……. 어……. 크으윽.”
고개를 흔들며 경련하던 대위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변이가 시작된 것이다.
“……대위님.”
후문 팀의 군인 한 명이 총을 꺼내 들었다. 대위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그를 향해 총구만 겨눴다. 떨리는 손을 보니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크억…….”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이마에 구멍이 난 대위가 뒤로 넘어갔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대위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은, 총을 발사한 사람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너도 죽고 싶어?”
대위의 이마를 저격한 이채윤이 이번에는 소리를 지른 군인을 향해 총을 겨눴다.
“아직, 아직 변이 전이었는데!”
“그럼 네 목덜미나 대주지 그랬어. 쓸데없이 감상에 사로잡히지 마. 그러다가 너희들 다 죽어. 제 몸 하나 제가 못 지키는 게 무슨 대위야.”
신랄한 이채윤의 말에 지원 나온 군인들도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고, 변이가 시작되면 장군도 죽여야 한다는 게 레인보우 시티의 군법이었다.
“정리되면 대위 시체는 가져가서 소각하든지 해. 이 소령 너는 나머지 놈들 상태 확인하고, 양 소령은 나 엄호해.”
곽수환이 대위의 시체로 한 번 시선을 줬다가 2층을 가리켰다. 뒤는 양상훈이 엄호하고 있으니 재빨리 2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에는 아담의 것으로 보이는 검붉은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더불어 지나가는 길마다 곽수환의 군화 자국도 붉게 남았다.
2층 입구로 들어선 곽수환이 손전등으로 복도를 길게 비췄다. 지그재그로 방문이 나열되어 있는 평범한 모텔 건물이었다. 문이 열린 곳도, 닫힌 곳도 있었다.
곽수환은 닫힌 문을 발로 걷어차고 안을 확인했다. 아담의 악취에 버금가는 곰팡이 냄새가 코를 훅 스쳤다. 닫힌 곳들을 전부 확인했음에도 석화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2층 클리어.”
모텔 건물은 총 3층. 석화의 GPS는 여기서 잡혔으니 3층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텅! 터엉! 텅! 3층으로 올라가던 곽수환이 고개를 들었다. 손전등을 휙 들어 비춰보니 3층의 입구는 교도소 문처럼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손을 뻗으며 쇠창살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아담 세 놈이 보였다. 양상훈이 세 놈의 정수리를 순차적으로 쏘고 나서야 문을 발로 걷어차 열었다.
“대체 이 새끼들 다 어디서 기어 나온 거야.”
양상훈이 널브러진 아담을 발로 걷어찼다.
“곽 소령, 이놈들 누가 다 여기로 유인해서 가둬놓은 게 맞지?”
“아마.”
곽수환은 3층 복도를 다시금 손전등으로 밝혔다. 2층과 마찬가지로 모텔방이 있었고 맨 끝 쪽의 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어깨부터 상체를 가로지르는 제복 벨트를 끌어내 일부러 첫 번째 방문을 향해 쳤다. 버클이 달려 있는 부분이 철문에 부딪히자 금속성 파열음이 터졌다. 양상훈도 곽수환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지켜봤다. 문이 열린 방 안에 아담이 있다면 이 소리에 분명 튀어나올 테니까. 그 짓을 몇 번 반복했는데도 주변은 고요했다. 곽수환이 제일 끝 방을 향해 고갯짓했고 양상훈도 고개를 끄덕했다.
저벅저벅 끝 방으로 걸어간 곽수환은 발로 문고리를 걷어찼다. 쾅! 밀려난 문이 벽에 부딪혔다가 돌아오는 것을 다시 차고는 내부로 들어갔다. 동그란 침대와 먼지가 잔뜩 쌓인 이인용 테이블, 그리고 투명한 유리창으로 감싸인 욕실은 인기척이 없었다.
모텔은 지하가 없다고 생각해 위로 올라온 건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듯싶었다. 곽수환과 양상훈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서 다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정리되어 있을 1층에 도착한 순간 양상훈이 숨을 들이켰다. 아담의 시체는 좀 전과 다름없이 쌓여 있었는데, 나머지 군인들까지도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이채윤 혼자 흰 가면을 쓴 덩치 큰 놈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이채윤이 가지고 있던 권총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칼로 싸움을 벌이는데, 그녀는 다리를 베였는지 절뚝거리기까지 했다. 곽수환이 총을 재장전해 흰 가면을 겨눴다.
“이 소령! 뒤로 빠져!”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채윤이 뒤로 휙 뛰었다. 그 타이밍에 탕! 곽수환이 총을 발사했다. 위협을 느낀 흰 가면은 뒤로 물러나더니 다짜고짜 정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총알이 어깨를 스쳤기에 놈이 도망간 자리마다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놈을 추격하러 달려 나가는 양상훈의 등에 대고 이채윤이 소리쳤다.
“따라가지 마!”
우뚝 멈춘 양상훈이 그녀를 돌아봤다. 곽수환도 재빨리 이채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제복 벨트로 다리의 상처를 꽉 묶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이채윤의 얼굴이 석화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따라가지 말라니?”
양상훈이 의아함을 담아 물었다.
“아까 그 새끼…….”
이채윤이 숨을 몰아쉬자 양상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존나 세.”
“그래 보이기는 하더라.”
양상훈은 괜찮냐면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곽수환이 죽어있는 군인 몇 명을 손전등으로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방금 그놈 혼자서 너하고 군인들 상대한 거야?”
“어, 몇 놈은 도망쳤어. 도망친 새끼들은 꼭 경질하라고 시켜. 그리고 저 새끼, 갑자기 지하에서 올라왔어.”
이채윤이 후문 방향을 가리켰다.
“양상훈, 너는 이 소령 데리고 지프로 돌아가 있어. 안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지혈부터 하고.”
“혼자서 괜찮겠어?”
“괜히 아담 만나면 골치 아파져.”
곽수환이 이채윤의 상처를 가리켰다. 양상훈도 알겠다면서 그녀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이채윤은 분함에 몇 번이고 숨을 씨근덕거렸다. 다음에 만나면 목을 따버릴 거야. 얼굴도 못 봤지만 이를 갈았다.
저 둘이면 아까 그놈이 와도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 그리고 그 정도도 못 버틴다면 애초에 불패 타이틀을 달고 있어서도 안 됐다. 곽수환은 후문으로 달려나가 왼쪽을 바라봤다. 쪽문이 하나 있었는데, 후문을 돌파한 군인들도 갑자기 달려든 아담 때문에 미처 확인을 못한 듯했다.
곽수환은 쪽문을 열고 밑으로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어, 크어어억, 어억.
저 아래 동굴 같은 곳에서부터 아담의 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곽수환은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걸음 소리를 비롯해 숫자가 족히 다섯 정도는 되는 듯했다. 그는 남은 탄환을 확인하고 입에 손전등을 물었다. 이어 권총을 장전하고 왼쪽 손목 위에 총을 든 오른손을 걸쳐 얹었다.
휙, 완전히 지하로 내려서자마자 빛을 발견한 아담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탕, 타앙, 탕! 남은 세 방을 발사해 세 놈을 처치하고 나머지 놈들은 달려드는 대로 정수리에 군용나이프를 꽂았다. 또 나머지는 손으로 머리뼈를 부쉈다. 순식간에 아담 다섯을 해치운 곽수환이 마지막 남은 놈을 향해 칼을 고쳐 쥐었다. 어으, 어으으, 어어. 고작해야 스물살 남짓할까? 거의 꺼져가는 조명 밑에 서 있는 아담은 덤벼들지 않고 연방 뒤만 돌아봤다. 마치 퇴로를 찾는 듯한 행동에 곽수환이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했다.
“뭐야, 너.”
어으, 아으, 무…….
놈이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휙휙 돌리며 꼭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버벅거렸다. 설마 저게 7차 변이 아담 중 특이한 현상을 보이는 종류인가? 곽수환은 그러거나 말거나 남은 한 놈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지금은 석화를 찾아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틀어 옆을 보니 열린 방문 안으로 사람이 보였다. 그는 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석화가 철창 안에 갇혀 있었다. 몸은 포박되어 있었지만 석화의 몸 어디에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안심을 하던 곽수환이 연거푸 철장의 문고리를 걷어차 문을 열었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석화가 계속 몸을 떨었다. 그는 두 눈을 가린 석화의 안대를 휙 벗겼다. 채도가 낮은 조명조차 눈이 부신지 석화는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사태를 파악하듯이 동공을 천천히 굴리던 석화의 눈이 커다랗게 팽창했다.
“소령님……!”
크어억! 살려두었던 한 놈이 기회를 노린 듯 이를 드러내고 덮쳐드는 순간이었다. 그는 아담에게 주먹을 꽂아 이를 박살내고 턱까지 뜯어내버렸다. 석화가 이번에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이제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자기, 무서웠지?”
하얀 뼈가 드러난 턱을 바닥으로 던진 곽수환이 장갑에 묻어있는 피를 털어냈다.
“데리러 왔어.”
석화는 장갑에서부터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천천히 들어 곽수환과 눈을 마주했다. 까만 제복 안의 흰 셔츠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웃고 있는 얼굴 군데군데에 핏물이 튀어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가 어깨를 붙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어지러워요.”
“입 산 거 보면 괜찮네. 일단 이거 이렇게 꽉 쥐고 있어.”
곽수환이 석화의 손목을 압박한 끈을 힘으로 끊어내고 손전등을 쥐여 줬다. 그는 의중을 묻지도 않고 석화를 들쳐 업었다. 등을 타고 석화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곽수환이 허벅지를 토닥거리고는 걸어 나가며 바닥의 아담을 발로 걷어찼다.
석화도 스스로 걷겠다는 고집 같은 건 부리지 않았다. 그가 해치우고 들어온 아담을 내려다보면서 입술만 작게 벌렸다. 총에 죽은 아담의 시체는 그나마 멀쩡한 편인데 그의 손에 박살난 놈들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장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엄청난 악취가 올라와 그제야 이를 악물었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몸의 떨림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곽수환은 진정하라며 허벅지를 다시 토닥거렸다.
석화가 그의 목을 조금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죽이려고?”
“곽 소령님, 괜찮아요?”
“석 박사는?”
쪽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석화가 손전등으로 비췄다.
“전 괜찮아요.”
밖으로 나온 곽수환은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반군이었지?”
“……모르겠어요.”
아니, 이렇게 대답을 해야 되는지조차 모르겠다. 저를 구하러 목숨을 걸고 온 사람인데 전부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되지 않을까?
“미안.”
석화가 눈만 깜빡거렸다.
“왜요?”
“경호한다는 놈이 제 일 하나 제대로 못 한 거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저조차도 정신을 잃었기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하나 확실한 건 차량이 전복되기 전에 그가 팔을 뻗어 자신의 몸에 충격이 덜 오게끔 막아줬다는 것뿐이다.
곽수환은 후문을 통해 정문을 질러가는 대신 건물을 돌아서 걸어 나갔다. 저기서 지프 한 대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뒷문에 다다라서야 석화를 내려놓았다.
“박사님! 박사님이다! 박사님,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뒷좌석에 앉아있는 이채윤이 문을 휙 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괜찮아요, 하고 내려다보니 그녀의 허벅지를 감싼 붕대가 보였다. 하얀 붕대에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일단 타. 여의도로 이동하자.”
석화가 고개를 끄덕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운전대는 곽수환이 잡기로 했고 양상훈은 조수석이었다. 지프의 가죽 시트에는 과천지부라는 마크가 붙어 있었다.
“이 소령님. 다리……. 다치셨어요?”
“이거? 괜찮아. 난 상처 나도 금방 아물어. 박사님은 진짜 괜찮지?”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상처가 제법 깊은 것 같은데.”
“꿰맬 정도는 아니야. 박사님도 진짜 괜찮은 거지? 땅콩 줄까? 똘수환이 박사님 배낭도 차에서 구출했는데 그 안에 땅콩 많더라?”
안 그래도 석화는 뒷좌석 중앙에 놓인 자신의 배낭을 봤다.
“이 소령, 말 좀 그만 시키고 석 박사 자게 놔둬라.”
곽수환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로 도로를 운전했다.
“많이 놀라셨죠? 여의도로 돌아가는 동안 한숨 주무세요.”
양상훈의 배려에 석화가 감사하다면서 고개를 꾸벅했다. 안 그래도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차체가 충돌할 때 들이닥친 충격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가벼운 뇌진탕 증세도 있는 듯했다. 몇 번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애써 꾹 삼켜 넘겼다. 석화는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차곡차곡 개어 유리창과 제 머리 사이에 댔다. 그런데 휙, 갑자기 몸이 이채윤에게 쏠렸다.
“나 여기 다친 거라 이 허벅지는 괜찮아.”
이채윤이 싱긋 웃으면서 다친 왼쪽 다리를 가리켰다. 마치 허벅지를 베고 누우라는 듯한 행동에 석화는 기겁을 해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채윤이 힘으로 꾹 누른 게 더 빨랐다.
“우리 몸에서 피비린내 풀풀 풍기는데 석 박사가 퍽도 베고 자겠다.”
“넌 왜 지랄인데? 편히 누우라고 그런 건데 왜 심사가 꼬여서 난리야. 내가 그 새끼 못 잡아서 화풀이 하냐?”
“그 새끼요?”
일어나려던 석화는 여전히 이채윤의 힘에 고정된 채였다.
“응, 내 다리 이렇게 만든 새끼. 이상한 하얀 가면 쓰고 덤벼드는데 진짜 존나 세. 장난 아니더라? 내가 아니라 양상훈이었으면 바로 뒈졌을걸?”
“야! 나도 붙어봐야 아는 거거든?”
“손까지 떤 주제에 웃기네. 똘수환, 박사님 지하에서 데려온 거지? 그럼 박사님은 그 새끼 얼굴 봤어?”
“……아뇨.”
“눈까지 가려놨더라. 그러니까 석 박사한테 그만 말 시켜.”
“눈앞에서 박사님 놓친 새끼가 말은.”
“저, 이제 그만 쉴게요.”
다시 설전이 시작될 것만 같아 석화는 얌전히 그녀의 다리를 베고 웅크려 누웠다.
“이 소령님.”
응? 이채윤이 방긋방긋 웃으면서 석화를 내려다봤다.
“다음에는 제가 해드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곽수환이 액셀을 거세게 밟았다.
“그렇게 따지면 나부터 업어줘야겠네.”
뭐야, 저 새끼 질투하나 봐. 이채윤이 낄낄거렸다.
***
여의도 쉘터에 도착하자마자 지프를 비롯해 그들이 입고 있던 옷과 가지고 있는 무기는 전부 소독 절차에 들어갔다. 사람이라고 다르리라는 법은 없었다.
감염이 되었는지, 상처가 어떤 상태인지 오히려 더 철저히 확인받았다. 베인 상처가 있는 이채윤은 혈액검사까지 해야 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오래 잡혀 있었다.
석화도 한참이나 검사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몸에 큰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받을 수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 뻗어 자고 싶었지만, 곧장 58층 상급자 회의실로 불려갔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상부에서도 관심을 보인 탓이었다. 수석 연구원이 납치를 당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석화 박사님. 신체검사부터 하겠습니다.”
석화는 상급자 회의실 앞에서 발과 두 팔을 벌렸다. 군인이 석화의 팔다리를 손으로 꼼꼼하게 훑고 나서야 클리어 사인을 보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니 진한 아로마 향초 냄새가 폐를 파고들었다. 금색 조명은 향초 향기만큼이나 내부를 따뜻하게 밝혔다.
말이 회의실이지 값비싼 카펫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좀체 보기 힘든 미술품들과 지금은 멸종된 동물의 박제와 광택이 흐르는 가죽 소파까지, 연구원이나 일반 군인들은 꿈도 못 꿀 공간이었다. 그리고 중앙 소파에는 석화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흔히 쓰리스타라고 불리는 이연태 중장이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신분이라 얼굴을 볼 일은 손에 꼽힐 만큼 적었다. 석화조차도 제주도에 가기 전에 본 게 다였는데, 당시에 이연태는 소장이었다. 아마도 제가 제주도에 가 있던 사이에 진급을 한 모양이었다.
“석 박사, 그동안 잘 지냈나?”
소파에 팔을 길게 뻗고 있던 이연태 중장이 진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는 군인이면서 군화를 신기는커녕 소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자네는 여전하군. 양말은 대체 어디다가 팔아치웠나, 하하.”
석화의 시선이 구두에 닿은 것을 아는 이연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석화는 그제야 저도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친구, 말수 적은 것도 여전해. 이리 와 앉아보게. 많이 놀랐을 텐데 따뜻한 차 한 잔도 좀 들이켜고.”
이연태가 석화의 등을 밀어 소파로 이끌었다. 석화는 중장이 이끈 대로 걸어가 가죽 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몸에 엉키는 쿠션감이 제법 좋았다.
“석 박사는 얼른 쉬고 싶을 테지만, 저 상부 사람들이 오죽 난리여야 말이지. 석 박사도 가둬두고 헌병대가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는데, 내가 직접 상대하겠다고 했네. 어때, 석 박사도 괜찮지?”
“예.”
이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솔직히 이야기하라는 일종의 반 협박이었다. 석화는 찻잔을 높이 들어 하단을 올려다봤다. 굴곡이 흠 없이 매끈한 잔의 밑에는 프랑스어가 쓰여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이연태가 눈을 찌푸렸다.
“찻잔이 예뻐서요.”
“그렇군. 가져가겠나?”
이연태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뇨.”
일전에도 느꼈지만 대화 상대로서 그리 유쾌한 친구는 아니었다.
“자, 그보다 석 박사. 유인원관에 가게 된 순간부터 이야기를 들어볼까? 누가 먼저 동물원에 가자고 제안을 했나?”
제안은 이채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채윤 소령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래, 맞지. 우리가 불패 부대 녀석들을 석 박사와 함께 동물원으로 보냈다네. 그럼 그 다음은?”
석화는 제가 유인원관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그곳을 나와 사고가 나기 전까지 일을 상세하게 이연태에게 설명했다. 이연태는 따로 메모를 작성하거나 타자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 이 방에도 영상기록장치가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차 사고가 난 뒤로는 기억이 전혀 안 난다고?”
“사고 당시 저는 기절했습니다. 납치되었다는 사실도 몰랐고요. 정신을 차려보니 곽수환 소령님이 저를 구하러 왔습니다.”
그래, 그렇군. 말을 흘리는 이연태는 뭔가 미심쩍어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석화는 무표정하게 이연태를 응시했고, 그에게서 다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럼 석 박사는 본인을 납치한 이를 마주치지 못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석 박사.”
맞은편에 앉은 이연태가 다리를 꼬았다. 인자하게 웃고 있던 얼굴의 주름이 다른 형태로 패였다. 미간에 금이 갔고 그 탓에 인상이 조금 사나워졌다.
“나는 어째서 석 박사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를 않네.”
석화는 여전히 표정 없이 이연태를 응시했다. 곽수환과 미리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조차도 자신이 납치범과 대화를 나눈 것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연태는 저를 떠보는 것이다.
“거짓말은 한 적 없습니다.”
“그럼 차 사고의 충격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건 아닌가?”
“이연태 중장님. 저는 제가 왜 납치를 당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건 헌병대가 알아내야 할 진실이 아닙니까?”
“허, 이 친구 보게.”
이연태가 어쩐 일로 공격적으로 나오냐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내선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결을 하더니 들여보내, 한 마디만을 했다. 서로를 바라본 채로 몇 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군화를 신고 있는 곽수환이었다. 검사실에서 샤워를 했는지 전투의 흔적은 그의 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새로 지급 받은 듯 빳빳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래. 곽 소령도 이리 와서 앉게나.”
곽수환이 이연태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는 석화의 옆에 와 앉았다.
“내 석 박사에게 일련의 상황을 들었네. 그런데 곽 소령에게도 들어야겠어. 지원나간 과천 쉘터 군인이 무려 일곱이나 죽었네. 대위 한 명과 하사 셋, 중사 셋이나.”
“대위라는 작자가 훈련병 수준밖에 되지 않던데 과천 중대, 제대로 돌아가는 게 맞습니까?”
굉장히 무례하군. 찻잔을 든 이연태가 낮게 중얼거렸다.
“곽 소령이. 장 중령과 박 소장이 예뻐해 준다고 앞뒤 못 가리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야. 또 바른 말로 석 박사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건 그대들 아닌가? 아주 실망스러워.”
상사의 실망에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지만 곽수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점에 대해서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급습한 자들은 반군으로 추정됩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 수 없고, 한 가지 확실한 건 불패 소대 엘리트 대원들이 그들을 상대로 고전을 했다는 겁니다.”
여의도 불패 소대는 현재 레인보우 시티의 전력 중 최고클래스인, S클래스에 해당했다. 그런 그들이 고전을 했다는 사실은 이연태도 긴장하게 했다.
“설마…… 돌연변이들이었나?”
“제 사견을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객관적인 사실만을 원하십니까?”
“사견을 보태어 팩트를 설명하게.”
“맞습니다. A급 이상, 혹은 S급 능력치를 가진 듯합니다.”
찻잔을 들고 있던 이연태가 마치 정지한 것처럼 행동을 멈췄다. 석화는 동공만 움직여 곽수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세는 반듯했지만 말투는 불손했다. 감히 장군의 앞에서 소령이 취할 수 있을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레인보우 시티의 장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곽수환 하나쯤 영창에서 평생 썩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 석 박사에게 들어보니 박사는 납치범을 전혀 모른다고 하던데.”
“그럴 겁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석화 박사님은 철창 안에 갇혀 혼자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아담이 있었습니다.”
흐음, 어느 쪽으로든 미심쩍음을 지우지 못한 이연태가 둘을 천천히 지켜봤다. 한 놈은 유들거리는 미소를 걸치고 있고, 한 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표정이랄 게 없었다. 그러나 둘 다 반군 기질을 보이는 자들은 아니기에 괜한 신경을 곤두세웠나 싶었다.
“어찌 되었든 고생이 많았네. 그리고 곽 소령이.”
이연태는 입을 축이고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과천 중대가 그렇게 걱정이면 곽 소령 자네가 내려갔다 오는 건 어떻겠나?”
“보내주신다면야.”
곽수환이 입꼬리를 바짝 올리고 웃었다. 어차피 너희들은 나 못 보내. 그 속내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사실상 S급과 A급으로 구성된 불패 부대의 핵심 지휘자가 누구인지 누구나 안다. 물론 꼭대기에 앉아서 말로 전달하는 지휘는 누구나 가능했다. 그러나 아담을 상대할 때는 변수가 존재했고, 심지어 최근에는 반군까지 가세했다.
현장의 선두에서 지휘하며 부대의 사기까지 올릴 수 있는 장교는 몇 되지 않았고, 곽수환도 그에 해당됐다. 그래봐야 소령이라며 네 까짓 게- 하고 언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장군들은 굳이 제 성질머리를 앞세워 행동하지 않는다. 행여 반감이라도 생겨 충성심을 잃게 되면 곤란하니 말이다. 곽수환도 그것을 알기에 속마음을 내뱉지 않았다. 아니꼬우면 너희들이 현장 나가든가. 어차피 장군들은 그러지 못할 것임을 안다.
콩.
서로 웃는 얼굴로 기 싸움을 벌이던 와중이었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던 석화가 테이블로 고꾸라졌다. 그래도 큰 참사가 일어나지 않은 건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와 테이블 사이로 손을 뻗었기 때문이었다.
“석 박사?!”
당황한 이연태가 벌떡 일어났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버텼죠.”
곽수환은 읏차, 소리를 내면서 석화를 안아 들었다. 기절한 터라 업을 수도 없고, 들쳐 메기엔 우리 돌 박사께서 뇌진탕 증세가 있으시니, 그저 두 팔로 석화의 몸을 받쳐 올렸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곽수환이 걸어가자 기절한 석화의 팔이 흔들렸다.
“자기야, 일어나.”
문을 열기 전이었다. 이연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저 또라이 자식이 분명 석화를 보고 자기라고 부른 것 같았다. 이연태는 멀뚱히 서서 인상을 찡그렸다. 발로 툭툭 문을 치자 대기 중이던 군인이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 내 정자 뽑아준다며.”
곽수환이 석화의 얼굴 가까이 대고 입술을 놀렸다.
저, 저, 저! 이연태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뒤에서 삿대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연태도 이상한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입에 무식한 자지를 물리려 했다고.
“곽 소령!”
문 밖으로 한 발 디디니 이연태의 사자후가 등에 부딪혔다. 돌아보니 얼굴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연태가 침까지 튀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너라도 강간은 못 봐줘! 당장 석 박사 내려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곽수환이 픽 웃고는 완전히 이연태를 향해 돌아섰다.
“박사님께서 제 정자를 연구 자료로 활용한다고 하는데, 강간이라니요.”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 혀까지 차고는 다시 발로 문을 밀었다. 이연태가 뺨을 바르르 떨었다. 저 새끼 여기로 부른 일에 심사가 뒤틀려서 저 따위로 나온 게 틀림없었다.
“곽 소령이, 내 상사로서 충고 하나 하는데. 너 그렇게 살다간 적만 쌓여.”
닫히는 문 사이로 이연태의 충고가 들렸지만 무시해도 좋을 말이었다. 곽수환은 곱게 눈을 감은 석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갔다.
곽수환은 제 품에서 비스듬히 얼굴을 튼 석화의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이마에 맞닿으려는 때였다.
“뭐 하려는 겁니까?”
하아, 석화가 깨끗한 동공을 들고 곽수환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제 이마를 손으로 막았다.
“글쎄. 소령의 키스로 석 박사를 깨울까 싶어서? 근데 처음부터 깨어있었으니 의미가 없었네.”
“알고 계신 겁니까?”
기절한 척한 거? 당연히 알았지. 곽수환이 웬일로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안 그렇게 봤는데 석 박사 음흉한 데가 있어.”
“빨리 쉬고 싶어서요.”
석화는 곽수환의 가슴을 손으로 밀어내고 저 스스로 바닥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숫자를 바꾸며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짜로 기절한 걸 어떻게 알았냐고? 안아 들었을 때 확신했지. 불편하다는 듯이 아주 미세하게 이마를 찡그렸거든. 게다가 앞으로 고꾸라지는 행세를 할 때는 제 몸을 사리던데, 손바닥에 닿은 이마에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야.
곽수환은 속으로만 생각하고 대답을 주지 않았다. 석화는 아직 남은 숨결의 느낌을 지우듯이 제 이마만 문질렀다. 그 바람에 이마에 열이 확 올랐다.
***
석화는 방으로 돌아와서도 침대에 앉아 벽만 바라봤다. 바로 쓰러져 자야 내일 일정에 무리가 없을 텐데 온갖 정보가 뒤섞이며 머리가 들끓었다.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 최전방에 선 레인보우 시티, 우리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입니다.’
“정오, 6시.”
그건 정규 방송이 나오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양석 박사가 유언을 남기기 바로 전, 저 방송이 나왔다. 그렇다면 오양석 박사가 죽은 시각은 오전 5시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음성이 녹음된 때는 마더의 정규방송이 나오던 시각이었다.
헌병대는 어째서 오양석의 사망시각을 새벽 5시로 생각한 것일까? 만일 정오나 오후 6시였다면 아직 김 박사가 연구실에 있었을 텐데…….
석화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책상에 놓인 컴퓨터를 가동시켰다.
[연구원 코드 넘버 310 접속 완료]
메인 서버 마더와 연결이 됐다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마더, 코드 넘버 310 연구원 석화의 헌병대 사건 기록 열람 접속 허가를 요청한다.”
[로딩중. 접속 불가. 코드 넘버 310은 열람 레벨이 부족합니다.]
뭐? 석화는 음성인식을 집어치우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헌병대 사건 기록 열람 서버로 들어가자마자 ‘Inaccessible’ 접근불가 화면이 떠올랐다. 석화는 수석 연구원으로 2급 기밀까지 열람이 가능했는데, 아예 헌병대 자료에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모든 헌병대 자료는 1급 기밀에 해당한다는 소리다. 혹은 누군가가 자신의 레벨을 고의로 낮춰놨거나.
“마더, 코드 넘버 310 기밀 열람 레벨이 몇입니까?”
[코드 넘버 310 석화 연구원의 열람 레벨은 비공개입니다.]
‘쉘터의 그 누구도 믿지 마셨으면 합니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납치범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백신이 아닌 치료제의 개발. 오양석과 그에 대한 대화를 나눈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까지도 종종 이야기를 했었으니까.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오양석 박사의 7차 백신 연구 자료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치료제에 관한 자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석화는 마더와의 접속을 끊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발바닥을 붙이고, 너무 많이 만져 마모된 조약돌을 손안에서 굴렸다. 두 눈을 감고 곽수환이 자신을 구하러 들어오기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납치범과 나눈 대화는 아직 생생했다.
***
“반군……입니까?”
“레인보우 시티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요.”
쓰게 웃은 남자는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두 다리를 몇 번 왔다갔다 움직였다.
“오양석 박사님을 살해한 사람은……. 이건 아직 억측일 테니 넣어두도록 하지요. 박사님.”
다가온 남자가 무릎을 굽혀 앉는 게 느껴졌다. 시커먼 안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청각은 좀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저희는 박사님께 선택권을 드리고 싶습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오양석 박사님의 말처럼 아담의 변이가 왜 이상한지, 레인보우 시티가 어째서 치료제 개발에 무관심한지 말입니다. 저는 박사님을 좋은 쪽으로 믿고 싶습니다. 오양석 박사님께서 그러하셨듯이요.”
선택권이라니? 저는 그저 상부에서 준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오양석 박사와 같은 사명감은 애초에 없었다. 제주도에서 어머니를 쫓아낸다고 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레인보우 시티에서 불이익을 준다고 했기에 명령을 따른 것뿐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는데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군요. 이곳은 안전하니 여기 가만히 계세요.”
가죽 끈으로 뭔가를 묶는 소리가 들렸다.
“박사님을 살해한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납치범의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석화는 남자가 있을 곳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여의도 쉘터에 반군이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랬다면 애초에 석화 박사님께 접선하기도 더 편했겠지요.”
성대에 막이 쓰인 듯 목소리가 답답하게 들렸다. 아마 납치범이 가면을 썼나 보다.
“저희라면…….”
“인사가 많이 늦었습니다. 저는 에덴동산을 책임지고 있는 서펀트라고 합니다.”
움찔, 석화가 묶인 손을 떨었다.
“처음 듣는 건 아니신가요?”
“오양석…… 박사님의 일지에서 짧게.”
“저희는 레인보우 시티를 믿지 않습니다. 아담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자들, 간악한 자들이지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오후 9시. 저희와 생각이 같으시다면 13레드 구역인 오양석 박사님의 자택에서 뵙겠습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칵 잠기는 소리까지 이어졌다. 석화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가려 하자 가면을 쓴 남자가 철창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대로 가만히 계세요. 곽수환 소령이 박사님을 구하러 올 겁니다.”
“……곽수환 소령이?”
“그자를 가장 조심하십시오. 그자야말로 썩어빠진 레인보우 시티의 수호자이죠. 나머지는 박사님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고 둔탁한 소리들이 뒤따랐다. 그륵거리는 이 소리는 분명, 아담의 것이었다. 석화는 몸을 더 뒤로 물렸다. 달려 나간 남자를 따라 아담들이 덤벼드는 소리가 들렸고 어느 순간 고요해졌다.
그억, 그으억, 쿨럭.
떨어진 곳에서부터 아담이 피를 토해내고 목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직, 지익, 발을 끄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싶었을 때 석화는 입을 꾹 다문 채 코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텅, 바로 앞에서 들린 소리에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아담 하나가 석화를 발견하고 철창 너머로 공격하려 했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석화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소리로 거리를 가늠했다. 식은땀이 얼음물처럼 등줄기를 싸하게 타고 흘러내렸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은 안전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이 묶인 채로, 그것도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소리를 지른다면 몇이나 될지 모르는 아담이 전부 제게로 모여들 테고…….
탕! 타앙! 저 밖에서 들리는 총성에 벽을 타고 일어났던 몸이 놀라 주저앉았다. 그어어어어! 비명 같은 짐승 소리에 골이 더 지끈거렸다. 누군가가 아담과 싸우는 듯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자신의 거친 호흡에 섞여 들어왔다.
뭐야, 너.
석화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분명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기에 환청이라도 들린 건가 싶었지만, 발걸음 소리는 점차 자신에게로 가까워졌다. 타닥타닥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는 발소리는 어쩌면 아담의 것인지도 몰랐다.
쾅! 쾅! 철문을 걷어차는 충격에 석화는 목소리를 짜내고 싶었다. 곽수환 소령이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서 음성이 나와 주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안대를 휙 벗기는 순간, 석화는 그를 끌어안을 뻔했다. 뒤로 두 손목이 묶여있지 않았으면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로지 소리에 의지한 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건 엄청난 공포를 수반했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였다. 번뜩거리는 눈으로 그의 뒤에서 달려드는 아담을 보고는 목소리를 짜내 그를 불렀다.
“소령님……!”
***
석화는 고개를 경련하듯 털어냈다. 지나간 장면을 돌이켜 회상하는 동안 또다시 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불안한 눈이 차차 안정을 찾으며 깊게 가라앉았다.
마더를 통해 에덴동산을 알아볼 수도 있었으나 열람 기록이 상부에 보고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안 그래도 이연태가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 상부에 전부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오양석 박사를 살해한 자가 이 쉘터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의혹과 함께.
그저 백신과 돌연변이에 대한 연구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소용돌이에 말려버린 기분이었다.
에덴동산은 뭐고, 반군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차라리 전부 무시하고 백신 연구에만 매진할까? 자신도 마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태 위의 지시만으로 움직여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실제로 겪었다.
석화는 자신의 두 손을 펴서 내려다봤다. 저의 땀 때문에 쥐고 있던 조약돌의 색이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만 해도 군인이 일곱 명이나 죽었다고 했다. 쉘터에 있는 자신은 안전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과 군인은 아니었다. 24시간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테니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게 용할 거다. 백신만큼 더 중요한 건 치료제였다. 아마 오양석 박사는 이미 자신보다 더 먼저 이런 일들을 겪었을 테고…….
아담이 왜 살아있는 생명체를 공격하는가?
석화는 그 사실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오양석에게 그 말을 했던 때도 기억한다. 여태까지 나온 결과는 아주 단순했다. 아담 바이러스는 마치 감기처럼 멀쩡한 생명체에 정착해 감염을 일으키는 감염 균이라는 것이다.
‘석 박사, 그렇다면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던 건 아니겠나?’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이었다. 오양석이 탄식하며 주름진 손으로 제 손을 맞잡았다. 석화는 돌을 다시 꽉 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질병.”
아담 바이러스는 치료가 가능해야 할 질병이다. 세상에 고치지 못할 병은 없다. 단지 그 치료제가 언제 개발되느냐가 관건이지. 석화는 제주도 학습센터에서 오래전 다양한 바이러스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메르스, 신종플루,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흑사병까지. 수많은 바이러스 중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제약회사는 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에 돈이 되는 백신과 치료제를 중점으로 만들었다. 또한 돈이 되지 않는 약은 개발을 중단하고는 했다. 아담 제약회사도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저희들이 만든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번영은 끝났고, 인류는 쇠퇴했으며,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 저희들 잇속만 채우려는 자들이 지금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들입니다! 그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으며 아담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습니다!’
반군의 사상에 동조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의심이 생겼을 뿐이다. 그 의심은 풀리면 그만이겠고. 그러나 헌병대 사건 기록 열람을 막아놓은 것이 촉진제가 되어버렸다. 석화는 복잡한 머리를 하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
“형, 오늘은 마트 운영 안 한대.”
동생이 빈 쌀통을 들고 돌아왔다. 쌀통을 안고 있는 손이 마치 고사리 같았다.
“비도 안 와서 마실 물도 얼마 없는데 어쩌지 형?”
“그러게, 누가 그렇게 많이 처먹으래.”
곽수환은 핀잔을 주면서 제 몫으로 남겨둔 생수통을 동생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아껴 마시겠다면서 물을 입에 넣었다가 입만 축이고는 다시 생수통 안으로 뱉었다.
“아빠는?”
“저기 방 안에 계셔. 보고 오든지.”
“그냥 안 볼래. 엄마는?”
“엄마도 아빠 방에 같이 계셔.”
“아…….”
아쉽다는 듯 말을 흘린 동생이 베란다 밖을 내다봤다.
[지옥으로! 망해라! 레인보우 시티! 구원이 내린다! 믿는 자, 화선 강당으로!]
낡아빠진 아파트 밑의 차들과 바닥에 피로 쓰인 붉은 글씨들이 보였다. 그들이 있는 곳은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지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흘에 한 번 마트를 열어주었고 지원자에 한해 군인들을 차출해갔다. 옆집에 살던 형제도 몇 달 전 군대에 자원을 했는데 여태 소식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형제가 어차피 다 죽었을 거라고 했다.
곽수환 형제의 부모도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쉘터에서 일을 했으며, 안전한 그린 구역에 집이 있어 출퇴근을 하고는 했다. 그러나 레인보우 시티는 시민 케어라는 명목 아래에 아이를 낳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곽수환은 허가 받지 않은 아이였고, 곽수환의 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들을 레인보우 시티에서 배제된 구역에서 키웠다. 시티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어디든 아담이 판을 치는 건 아니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전력이 있었고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어설프지만 용병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이 일정 이상 힘을 키우면 레인보우 시티는 그들을 반군으로 낙인찍었다.
부모는 일주일에 한 번 곽수환 형제를 보러 왔지만, 이번에는 돌아가지 못하고 저 안쪽 방에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게다가 부모님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발설되어서도 안 됐다. 곽수환은 찬장을 열어 안에 남은 통조림과 약을 확인했다.
“나갔다 올 거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옆집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해도 열어주지 말고. 알았지?”
“왜, 또 어디 가게.”
동생은 형의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곽수환은 몇 개 남지 않은 알약 하나를 동생의 손에 쥐여주었다.
“통조림 소시지 남은 거랑 같이 먹어. 잊지 말고.”
“응.”
동생은 비스코트 얼드리치 증후군을 겪고 있었다. 자가면역질환 증상을 늘 달고 살았으며 혈소판이 부족해 상처가 났을 때 지혈이 쉽게 되지도 않았다. 여태 면역체계를 올려주는 약에 의존해 살아왔는데, 레인보우 시티의 제약회사들은 약가가 낮다는 이유로 더는 약을 공급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래도 돈만 있으면 구하기 힘들지는 않았다. 곽수환의 부모는 브로커를 통해 제약회사에 약을 일정 돈을 주고 빼돌렸고, 동생은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곽수환은 겨우 열넷에 불과했지만, 잘 먹지는 못했어도 또래 아이들보다 발육이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동네 주민들은 형 혼자만 어디서 몰래 좋은 걸 훔쳐다 먹는 게 아니냐며 이간질도 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곽수환은 저 혼자 레드 구역의 마트를 털고는 했으니까.
곽수환은 다들 두려워하는 레드 구역이 좋았다. 특히 그린에서 레드로 단숨에 하락한 곳은 먹을거리가 많았다. 그날은 다행히도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곽수환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 3층에 살고 있는 애꾸눈 아저씨네 현관을 두드렸다.
애꾸눈에 다리까지 저는 아저씨는 레인보우 시티의 브로커와 연결을 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부모님이 저렇게 된 이상 동생의 약은 제가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험악한 인상의 애꾸눈이 짜증을 내며 문을 열었다.
“뭐야.”
“아저씨, 전에 아빠가 만일 연락이 안 되거나 하면 아저씨한테 동생 약을 부탁하라고 했어요.”
애꾸눈은 잔뜩 인상을 썼지만, 그도 예전에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만일 저희 부부가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아이의 약을 대신 구해달라고.
“돈은?”
곽수환은 레인보우 시티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꺼냈다. 화폐의 종류는 총 7개였고, 색도 일곱 가지였다. 그중 녹색이 가장 비싼 화폐 단위였다. 무지개가 온통 녹색으로 그려진 화폐를 내밀자 애꾸눈이 멀쩡한 눈에 돋보기를 가져다대고 진위여부를 확인했다.
“내일 모레까지 가져다 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
“꼭이에요.”
곽수환의 말을 무시한 애꾸눈이 거칠게 문을 닫았다.
“별 것도 아닌 새끼가 괜히 허세 잡고 인상 쓰고 지랄이야.”
닫힌 문에 대고 곽수환이 퉤 침을 뱉었다. 1층으로 내려가 부모의 차를 찾은 곽수환은 아직은 미숙한 솜씨로 운전대를 잡았다. 라디오를 틀어 레드 구역으로 지정된 곳에 대한 정보를 얻자마자 액셀을 밟았다.
곽수환은 아담보다 더 무서운 것을 안다. 그것은 굶주림이었다. 물론 아담과 직접 맞닥뜨린 적은 드물었다. 곽수환은 레드 구역 경계선에 다다르기도 전에 차를 세우고 샛길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마트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 아담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마트로 당장 뛰어갔다. 한동안 높으신 분들이 살던 곳인지 마트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신선식품들도 있었다. 물론 유통기한이 길지 않은 것들은 다 썩어 있었다.
비닐봉지는 소리가 날 수 있기에 배낭의 지퍼를 열어 통조림을 담았다. 가공식품은 대체로 유통기한이 긴 통조림들이었고, 당연히 맛은 없었다. 곽수환은 욕심을 부려 배낭의 지퍼가 닫히지 않을 정도로 식료품을 넣었다. 제주도산 생수를 보던 곽수환이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불순물 없는 신선한 물을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계란이 보여 한 판을 통째로 넣었다.
또 다른 배낭에는 가장 중요한 생수를 한가득 담았다. 배낭 두 개에 담긴 것만 해도 족히 30kg은 나갈 법했다. 열넷 아이가 메기에는 버거울 테지만, 곽수환은 저에게 손만 더 있으면 하고 바랐다. 이 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트 한편에 놓인 약품 진열대를 뒤져봐도 동생이 먹어야 할 약은 보이지 않았다. 곽수환은 주변을 둘러보고 달빛이 잘 들어오는 길을 벗 삼아 또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가방에서 통조림이 부딪히는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운 좋게도 아담은 나타나지 않았다.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세워둔 차를 향해 다시 발을 바삐 옮겼다.
“젠장.”
곽수환이 차를 발견하자마자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경계 초소에서 나온 군인이 세워둔 차를 발견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손전등으로 내부를 비추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하는 수 없이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차로 30분을 달려온 곳이니 뛰고 걸어서 가는 데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곽수환은 혼자 두고 온 동생이 눈에 밟혀서 쉼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배낭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 정도로 심장의 박동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곽수환은 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힘들지?’라는 말에 공감할 수 없었고, ‘무겁지?’라는 말에는 오히려 가벼움을 느꼈다. 소년은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 아파트의 10층까지 단숨에 뛰어올라 똑똑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벌써 아침 해가 떴기에 동생이 자고 있을 리는 없었다. 곽수환은 문고리를 한 번 돌려봤다. 잠겨 있었기에 덜컥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똑똑. 또다시 문을 두드렸다. 등 뒤로 느른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깨진 달걀의 잔해가 가방 안쪽에서부터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환아, 형 왔어.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주먹을 쥐고 다시 문을 두드리는 때였다.
[똑똑……. 똑똑똑.]
“!”
잠들어 있던 곽수환이 눈을 떴다.
그는 미약하게 인상을 쓰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다. 잠귀가 밝은 만큼 헛것을 듣고 깼을 리는 없었다. 테이블에 있는 탁상시계를 보니 바늘은 오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낡은 스프링이 제 추억처럼 삐걱거렸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는데,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좀 더 울림이 적고 둔탁한 두드림이었다. 그는 생수 뚜껑을 열어 통째로 물을 마시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문을 여니 저보다는 작은 키의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석 박사?”
몽유병이라도 있는 건가, 5시밖에 안 됐는데 남의 방문을 두드려대?
석화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손바닥을 펴서 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물로 씻었는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돌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도 이 돌로 두드린 듯했다.
“수분을 머금은 돌인데, 곽수환 소령님 드릴게요.”
“뭐?”
“받으세요.”
이건 또……. 곽수환은 가뜩이나 꿈자리가 사나워 기분도 저조한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석화를 보니 기가 찼다.
그는 문고리를 쥐고 문을 연 채로 석화에게 몸을 기울였다.
“돌 좋아하는 건 석 박사지 내가 아니잖아?”
“감사……인사를 못 드려서요.”
그 감사인사를 하려고 새벽 5시에 자는 사람을 깨워? 곽수환은 확실히 석화의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감사 인사를 할 거면 술이나 담배로 가져와. 문 닫는다.”
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석화가 성큼 한 걸음 다가왔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더 보들보들해 보였다. 밑에서부터 풍겨오는 향기도 제법이고.
“뭐 해?”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돌을 거절당할 줄은 몰랐는지 어쩐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물론 여전히 무표정했기에 곽수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왜?”
“혹시……. 곽수환 소령님은 저를 납치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곽수환은 가뜩이나 날아간 잠기운이 이제는 아예 레인보우 시티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갯짓으로 안을 가리켰다. 석화가 안으로 들어온 뒤에 문고리를 놨다.
석화는 닫히는 문을 돌아보면서 그를 향해 다시 섰다.
“석 박사를 납치한 놈이 누구인지는 나도 정확히 몰라.”
“그렇습니까?”
“그러는 박사님은 알고?”
“알 것 같습니다.”
석화가 주저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곽수환은 다시 물을 마시고는 생수통을 든 채로 팔짱을 꼈다.
“근데 왜 이연태한테는 이야기 안 했어?”
“확실한 게 아니어서요. 이채윤 소령님 다리 다치게 만든 사람이, 저를 납치한 사람이겠죠?”
“그렇겠지.”
“이연태 중장님께 일련의 사건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제 이해도가 부족해서 새벽 내내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를 납치한 반군은……. 신흥종교인 에덴동산 같습니다. 오양석 박사님의 살해사건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고요.”
석화가 웬일로 곽수환을 빤히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처럼 멍하지 않은 깨끗한 동공이 마치 수정처럼 선명했다. 하긴 다이아몬드도, 수정도 따지고 보면 다 돌이지.
곽수환이 생수통을 내려두고는 석화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석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다가오는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스윽, 서로의 몸이 맞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곽수환이 좀 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마치 거기서 조금만 더 고개를 비틀어 숙이면 키스를 할 것 같은 자세였다.
“석화 박사님.”
곽수환은 평소보다 더 잠겨있는 목소리를 내뱉고는 냉랭한 눈을 한 번 털어냈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그가 씩 웃었다.
“뭘 해요.”
“설마 그 이유 때문에 이런 야심한 시각에 날 찾아온 거겠어?”
“그 이유 맞는데요.”
석화는 어쩐지 곽수환이 말을 돌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원래도 정자니 뭐니 장난스럽게 굴 때가 있었는데, 문을 열고 저를 쳐다보던 남자는 낯설었다. 자던 사람을 깨워서 짜증이 났다기보다 오히려 무표정하고 냉한 기운이 도는 쪽이 진짜 곽수환에 더 가까워 보였다. 얼굴을 알 수 없던 납치범만큼이나 눈앞의 남자를 알 수가 없었다.
“에덴동산, 곽수환 소령님이 제게 먼저 언급하셨죠.”
곽수환은 그제야 의자를 끌어와 석화의 앞에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의자는 등받이를 앞으로 해 두 다리를 벌려 앉았다. 곽수환은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석화에게 앉으라는 시선을 보냈다.
“오늘 납치범이 제게 그랬거든요. 자신이 에덴동산 소속이라고요. 레인보우 시티는 썩어있고 그 썩은 도시를 지키는 수호자가 곽수환 소령님이라고도 했습니다.”
곽수환의 눈썹 한쪽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오양석 박사님의 유언도 들었습니다.”
그가 닫고 있던 입술을 벌렸는데 말을 잘라내고자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좀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바로 총성이 들렸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앞의 내용은 제주도에 있던 저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고요.”
“그럼 그건 내일 이연태 중장에게 보고하면 되겠네.”
더 이상 제가 들을 필요는 없다면서 일어나려는 곽수환의 손목을 석화가 먼저 붙잡았다.
“납치범은 자신이 에덴동산……. 서펀트라고 했어요.”
마치 불을 삼킨 듯 뜨거운 열기가 석화의 손에서부터 전해졌다.
“서펀트?”
“예. 그런데 이상한 건.”
석화는 자신의 의구심을 곽수환에게 풀어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생각은 충분히 했다. 서펀트라던 자가 곽수환을 믿지 말라고 했지만, 애초에 자신은 그에게 엄청난 신뢰 따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자가 자신을 서펀트라고 말했다고?”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곽수환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다.”
“이상한 건 또 뭐고.”
“오양석 박사님이 제게 남긴 전언을 그자들이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합니다. 분명 제게 반군은 쉘터에 접근하기도 어렵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전언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요? 심지어 오양석 박사님이 살해당하기 바로 전의 음성인데요.”
석화의 말을 듣고 있는 곽수환의 얼굴로 점차 웃음이 번져나갔다. 연구로만 특출난 줄 알았더니 체력만 되면 헌병대 조사팀에 들어가도 우수했겠어. 그러나 곽수환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자아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서펀트였다.
“이연태보다 먼저 나한테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거두절미하고 다시 운을 떼었다.
“헌병대 사건 기록 열람 권한이 막혔습니다.”
“레벨이 부족한가 보지.”
“저는 2급 기밀까지 열람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제 레벨조차 비공개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상부에서 행여 석화가 반군의 기질을 가지게 될까 봐 막아놓은 것이려나. 곽수환은 대충 예상만 했다.
“그래서?”
“오양석 박사님의 피살 사건과 관련해 찾아보고 싶은 자료가 있는데, 혹시 곽 소령님은 2급 기밀까지 열람이 가능하십니까?”
“설마,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석화는 역시나 싶은 얼굴을 했다. 소령 직급이라면 3급 기밀도 보기 힘들다.
“1급까지 가능한데.”
찡긋, 무표정하던 석화의 미간에 눈에 띄게 주름이 갔다. 저는 2급 기밀도 간신히 볼 수 있는데 어떻게 1급까지 열람이 가능한 거지? 그런 비슷한 속내가 느껴졌다. 석 박사, 자존심이 상했나 본데.
“돈 드릴 테니까 자료 보게 해주세요.”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게 의혹에 대한 답이었나 보다. 곽수환이 목을 울리면서 웃었다.
“보게 해줄 수는 있어. 돈도 필요 없고.”
석화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들뜬 목소리를 자아냈다.
“정말요? 감사 드,”
“나랑 섹스해주면.”
“……예?”
조금 전보다도 훨씬 미간의 주름이 깊어졌다.
“정자도 얻고 얼마나 좋아.”
정자……. 중얼거린 석화가 컴퓨터를 바라봤다가 다시 손에 쥔 돌을 보고, 이어 곽수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돈은 필요 없으니 싫으면 말든가.”
곽수환은 등받이에 얹은 팔에 제 턱을 기댔다. 좀 전부터 장난기가 다분했다. 지금 이게 장난 같아 보이냐며 웃고 있는 면상에 돌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찾아들었지만, 꾹 참아냈다.
“그쪽과 자면서까지 보고 싶은 건 아닙니다.”
석화는 빙글 몸을 돌려서 걸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곽수환 외에 부탁할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를 않았다.
“잘 가요, 박사님.”
손까지 흔들어주는 그였기에, 석화는 가슴을 크게 부풀려 숨을 들이쉬었다가 말을 내뱉었다.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됩니까?”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오양석 박사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그래도 나랑 섹스할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닌가 보네.”
너한테 오양석이 그 정도밖에 안 돼? 라고 반문하고 있었다. 살살 긁어대는 곽수환에게 열이 점차 오르던 석화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곽수환 소령님 생식기 안 선다면서요. 근데 어떻게 섹스를 합니까?”
“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만약에 지금 서면?”
곽수환이 시선만 내려 자신의 하반신을 가리켰다.
“흥정하죠.”
의외의 대답에 곽수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석 박사 입에서 흥정이라는 말도 나오고 말이야.
“지금 당장 자는 건 힘들지만 키스는 가능합니다.”
자, 석화가 눈을 부릅뜬 채로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눈은 감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곽수환도 덤벼들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부탁은 석 박사가 했는데 왜 내가 해야 해. 그쪽에서 먼저 다가와야지.”
“제가 돈 드린다고 했잖아요.”
“나 돈 많아.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의 지폐들이 저기 서랍에 가득할걸.”
눈꺼풀을 깜빡 털어낸 석화는 곽수환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어깨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이렇게 뜨거워서 뇌세포는 안 죽나 몰라. 곽수환은 어디 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슬쩍 숙여주었다. 석화의 목울대가 울리는 게 보였다. 사귀었던 사람도 있다던 사람이 왜 이렇게 긴장을 해. 1분에 1센티씩 다가오는 듯 제가 더 애가 타는 바람에 먼저 고개를 숙일 뻔했다. 웃음기 섞인 눈을 접고 석화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서펀트에 대해 다시금 떠올렸다.
서펀트라고 함은 알려진 바로 에덴동산의 수뇌부를 뜻했는데, 직접 실력행사에 나섰다는 게 여간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면 전면에 나설 만큼 실력에 자신 있는 자일 수도 있었다.
“곽수환 소령님.”
“응?”
“어디까지가 빈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입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가까이 다가온 석화의 눈을 들여다봤다.
“저랑 정말로 섹스하고 싶은 것도, 키스하고 싶은 것도 아니죠?”
늘 멍한 눈을 해서는 눈치 한번 재빨랐다.
“설마 기회만 된다면 당연히 다 하고 싶지.”
곽수환은 떨어져 나가려는 석화의 허리를 확 둘러 안았다. 석화도 재빨리 가슴팍을 밀어내는 바람에 상체는 떨어졌지만, 서로의 하반신은 깊이 맞닿았다. 곽수환은 일부러 안은 허리를 꾹 눌러서 좀 더 밀착하게끔 만들었다.
“입 벌려 봐.”
그럼에도 석화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개만 들었다. 잔뜩 말라서는 입술만 통통하니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묘했다.
곽수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석화의 입술에 꾹 제 입술을 눌렀다. 혀를 내밀어 입술 안을 파고드니 이를 악물고 있었다. 치열을 혀로 핥으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가 놓자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뒷머리를 붙들고 깊숙이 입술을 포갰다. 저에게 닿는 통통한 입술의 감촉에 좀 더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긴장한 석화의 혀는 안에서 어쩔 줄을 몰라 간헐적으로 떨렸고, 곽수환은 자신을 피하려는 혀를 얽어가며 거세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하아, 숨이 막혀 입술을 떼어내는 석화를 쫓아가 또다시 먹어치웠다. 석화는 또 숨을 쉬기 위해 도망을 갔고, 그걸 놓칠 곽수환도 아니었다. 그 바람에 입술과 턱이 타액으로 축축해졌다. 이런 게 키스라니, 석화는 해본 적이 없었다.
석화는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아냈다. 아직도 허리는 그에게 잡혀 있어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 채였다. 타액이 완전히 닦이지 않아 다시 손등으로 문지르려는데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또다시 키스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굳어 있자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조약돌만 입에 넣었다.
석화는 놀라서 곽수환을 바라봤다. 돌도 씹어 먹을 군인도 아니건만, 곽수환은 입 안에서 맛을 음미하듯 조약돌을 굴리고 있었다. 윽! 이어 석화의 뺨을 쥐고는 입 안으로 조약돌을 넘겨주었다. 제가 하도 들고 다녀 매끈하게 마모된 터라 거친 기운은 없었지만, 맛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무맛이었다. 석화는 혀를 내밀어 조약돌을 손바닥에 뱉었다.
휙, 곽수환이 밑에서부터 얼굴을 들이밀어 키스를 하면서 고개를 다시 젖히게 만들었다. 잘근잘근 위와 아랫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입가가 전부 홧홧해졌다. 이제 그만, 석화는 입술을 손으로 막으며 그의 얼굴도 밀어냈다. 혀로 손바닥을 쓱 쓸어 올리자 간지러움에 손이 움츠러들었다.
“돌보다는 석 박사가 더 맛있네.”
곽수환이 그제야 품에서 놔주었다. 그는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다시 돌아왔는데, 입술이 아직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마더, 코드 넘버 3121 접속 허가를 요청한다.”
[음성 확인 완료, 코드 3121 곽수환 님의 접속을 허가합니다. 1급 기밀까지 열람 가능합니다.]
석화는 축축한 돌을 쥐고 흐리멍덩한 눈을 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키스의 여운에 빠져있을 때도 아니었고, 이런 것을 여운이라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키보드를 두드렸다.
예상대로 헌병대 사건 기록은 거의 2급 기밀이었다. 곧 오양석 박사의 사건을 찾아냈는데, 어차피 제 레벨로는 보지 못했을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오양석 박사의 피살 사건은, 1급 기밀로 분리되어 있었다. 문서를 열려고 하자 스피커를 통해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헌병대 사건 기록 1급 기밀은 음성인식으로 진행합니다.]
“뭘 알고 싶어?”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곽수환이 말했다.
“말씀드렸듯이 오양석 박사님의 피살 사건이요.”
갑자기 곽수환이 탁상의 시계를 가져와 석화의 앞에 두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두 개를 길게 펼쳐보였다. 브이 자를 그렸기에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마더, 오양석 박사 피살 사건 기록 화면에 띄워.”
[로딩중. 진행합니다.]
모니터에는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형태의 파일이 떠올랐고, ‘오양석 피살 사건 기록(진행중)’이라는 제목이 가장 첫 페이지에 있었다. 석화는 재빠르게 기밀문서를 열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베레타 M92F 구경 9mm 탄환이 심장을 관통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자료는 저에게 있는 것과도 동일했다. 사망 추정시간도 새벽 5시경이며, CCTV 영상도 복구하지 못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오양석 박사의 시신 사진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건 차마 자세히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머리에 기록물을 꼼꼼히 담기 시작했다.
[오양석 박사 피살 사건의 범인은 현재 추적중이며, 내부가 아닌 외부의 소행으로 의심된다. 매수를 당한 쉘터 관계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여러 반군의 행적을 뒤쫓고 있는 중이다. 조사임무는 헌병대 2소대를 비롯해 곽수환 소령이 맡았다.]
“접속 종료.”
[접속을 종료합니다.]
석화가 휙 뒤를 돌아서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직 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흥정 값은 여기까지.”
곽수환은 또다시 중지와 검지를 길게 펼쳤다.
“우리 키스한 시간도 2분인데, 그 이상 보는 건 내가 너무 손해지.”
뒷부분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아니, 그보다 오양석 박사 피살 사건의 조사를 맡은 자들 중에 곽수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더 보고 싶어? 그럼 키스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석화는 빙글빙글 웃고 있는 곽수환의 면상에 대고 딱딱하게 내뱉었다.
“아뇨, 자료 잘 봤습니다.”
그가 그럼 자기는 더 자겠다면서 생수로 다시 목을 축였다. 그의 뒷모습을 불쾌하게 바라보던 석화도 침대로 다가갔다.
“처음부터 자료를 열람할 필요도 없었겠네요. 오양석 박사님 피살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이 곽수환 소령님이라고 하니까요. 에덴동산도 그렇고……. 곽수환 소령님도 부정하지 않으셨죠. 박사님이 상부와 마찰이 생겨서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저기 기록물은 외부의 소행이라고 확정 짓고 조사를 하는 듯한데요.”
열 받은 석화가 말을 길고 빠르게 뱉어냈다. 곽수환은 두 팔을 뒷머리에 댄 채로 천장을 향해 눈을 감고 있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겠다는 심보로만 보였다.
“제게, 할 말이 없습니까?”
“석 박사가 본 그대로고 나 역시 범인은 확실히 알지 못해. 그리고 왜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써. 석 박사는 연구원이지 헌병대가 아니잖아?”
웃음기 섞인 그의 말에 석화는 훌쩍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곽수환이 그제야 황당하다는 듯 눈을 떴다.
“나는…….”
석화가 말을 꺼내려다가 주저하더니 두 손으로 곽수환의 셔츠를 꽉 쥐었다.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데 턱선이 매끄러웠다. 이채윤이 석화 박사 예쁘고 잘생겼다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있었다. 하물며 외모만으로는 곽수환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곽수환에게는 석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나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서……. 잘 몰라.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떠는지, 왜 아담이 사라지지 않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어. 그런데…….”
웬일로 감정적으로 구는 석화에게 곽수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러워하는 눈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뭔가가 잘못된 것 같아. 박사님이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선배가 그렇게 된 것도.”
정말로 뭔가가 이상했다. 제주도에서 평화롭게 지내느라 그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면 당연히 여의도 쉘터로 불려갈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저에게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그러고도 남을 상부였다. 그러나 상부는 자신을 제주도에 그냥 놔두었다. 오양석 박사의 말대로 서로 연락은 되지 않았다. 마치 박사님과 자신을 갈라놓은 듯이.
셔츠를 꽉 쥐고 있던 손에 금세 힘이 빠졌다. 돌을 쥔 채로 힘을 줬기에 돌에 배긴 손바닥에 아릿한 통증도 느껴졌다. 순식간에 기운이 빠져 올라탔던 몸을 뒤로 무르려고 했지만, 그에게 허리가 잡혀버렸다.
“그딴 게 다 무슨 상관이야. 석 박사는 그냥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연구만 하면 돼.”
어쩐지 그에게 잡힌 곳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뜨거운 자신의 몸과는 다르게 곽수환의 입술도, 손도 차갑기만 했다. 이게 사람의 평균 체온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시린 온도였다.
곽수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주어진 일 외에 다른 데에는 기운을 쏟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여력도 없었다. 그러나 다시 여의도 쉘터로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감정적이고 불온하고 의혹투성이인 일들만 산재해 있었다.
“……놔주세요.”
석화는 기운 없이 말로만 그를 떼어냈다. 곽수환도 생각보다 더 순순히 놓아주었다. 느릿하게 침대를 벗어났고, 그의 침대를 뒤로한 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석 박사.”
곽수환이 옆으로 누워 턱을 팔로 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나한테 말한 모든 것들.”
닫히는 문 사이로 그런 말이 들려왔다.
“반군 성향이야.”
***
반군 성향…….
석화는 한 번도 저의 정체성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레인보우 시티에 의문을 가진 것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갑자기 온몸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곽수환은 저의 경호원이지만,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고, 납치범의 말로는 수호자라고 했다. 만일 그가 오늘 자신과 나눈 대화를 상부에 보고한다면?
그럴 리는 없을 거다. 오양석 박사를 죽인 자가 내부인일 거라는 의심은 곽수환도 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따지면 그것도 반군 성향 아닌가. 또한 석화는 지금 어느 쪽으로든 의심을 열어두고 있었다. 신흥종교 에덴동산이라던 납치범까지도.
오양석 박사의 유언을 그들이 손에 넣었다는 건 쉘터나 헌병대에 매수자가 있거나 아니면…….
[개방합니다.]
자신의 방에 지문을 인식한 석화가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팔을 교차시켜 어깨를 감쌌다.
그게 아니면 설마 상부에서 자신을 시험한 건가?
이 정도까지 생각하는 건 억측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 말도 안 된다. 과천 지부 군인이 무려 일곱이나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석화는 알고 있다. 오래전, 여의도 쉘터에 있던 원호 박사에 대해서. 또 그의 처분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 당시 자신은 여의도 쉘터로 갓 올라온 신입 연구원이었다. 그리고 원호는 오양석과 연배가 비슷해 둘 사이가 제법 돈독했었다. 다만 원호는 사람을 잘 챙기는 오양석과 달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신입 연구원들과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았고, 걸핏하면 빈혈 증세를 보이는 석화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쉘터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원호 박사가 반군의 지시로 밀정 활동을 하고 있다고.
그 소문의 근원지가 어디인지는 몰랐고 석화에게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소문은 몇 달에 걸쳐 알음알음 알려졌으며, 헌병대는 반군과 접선 중인 원호 박사를 현장에서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원호가 손을 잡은 반군은 통합국에 소속된 레인보우 시티를 독립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진 자들이었다.
여의도 쉘터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수석 연구원이던 원호가 반군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오양석 박사도 일주일 넘게 헌병대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한때 사용이 금지되었던 아모바비탈이라 불리는 자백제 주사를 재개발한 건 원호 박사였는데, 그는 제가 만든 자백제에 모든 진실을 사실대로 불었다. 또한 원호 박사가 조사를 받을 무렵, 신입 연구원들도 헌병대에 소환되었고 그중 석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보게. 석 박사는 절대 아닐세. 내가 보장함세. 저 무고한 친구를 강도 높게 조사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네.’
우습게도 오양석의 말대로였다. 또한 헌병대도 석화만큼은 반군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밥 먹다가도 픽픽 쓰러지는 최약체가 무슨 밀정 행위를 하고 반군에 가담한다는 말인가.
나머지 박사들은 자백제를 투여 받은 뒤 무사히 나올 수 있었지만, 석화만큼은 아무 일도 없이 무사히 헌병대 조사실을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원호가 처형당했던 날 이후로 오양석은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어리석은 자신의 친구를 애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양석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인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죽음 이후로 그는 조금씩 변해갔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의 친구가 반군에 가담했는지 내내 의문을 품게 되었을 테지. 무엇이 부족해서 레인보우 시티를 배신했다는 말인가?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오양석은 점차 깊숙이 파고들어갔고, 그의 마지막 유언대로 치료제 개발을 원하지 않는 상부에게 반감을 가졌을 수도 있다.
모르겠어…….
중얼거린 석화는 문에 기댔던 몸을 옆으로 스르륵 뉘었다. 초코바라도 하나 꺼내 먹고 싶은데 손가락을 까닥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원호 박사에서 오양석 박사까지…….
마치 그들이 밟아온 길을 이제 자신이 뒤따라 걷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