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ool's paradise (4) (4/23)

Fool's paradise (4)


[개방합니다.]

[코드 넘버 310 석화 박사님의 숙소를 강제 개방합니다.]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던 석화의 몸이 밀려났다. 석화는 문에 밀린 채로 잠기운 서린 눈을 들었다. 군 제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팔뚝에는 완장이 둘려 있었는데 석화도 익히 알고 있는 독수리 마크였다.

저들은 레인보우 시티의 헌병대였다.

“석화 박사님, 벨을 눌렀는데도 답이 없으셔서 강제로 개방을 했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리셨으면 저희와 함께 이동해 주셔야겠습니다.”

설마 싶었다. 어제 하던 우려가 오늘 현실이 된 건가? 그러나 석화의 얼굴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헌병대 군인 두 명이 다가와 석화의 몸을 일으켰다.

“샤워 좀 하고 가면 안 될까요?”

“예, 기다리겠습니다.”

다짜고짜 끌고 가지 않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중대한 사안은 아닌가 싶었다.

석화는 서랍의 초코바를 꺼내 먹으며 정신을 좀 더 다잡았다. 시간을 들여 먹는 동안 헌병대 군인들이 지루해하는 게 보였지만, 천천히 당분을 채워 넣었다. 욕실로 이동해 찬물로 샤워를 하고 이도 깨끗하게 닦고 나오니, 이제 그만 나오라는 듯 헌병대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체력보강용 알약 세 개를 차례대로 먹고는 생수로 목을 축였다.

석화는 헌병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원래는 주차장으로 운용됐던 곳인데 현재는 개조를 거쳐 헌병대의 집무실과 조사실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석화가 이곳에 온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음습한 분위기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러 개의 집무실을 지나니 저 끝에 철문이 보였다. 조사실이라고 적힌 팻말을 본 석화의 눈꺼풀이 몇 차례 경련했다. 무서워할 건 없다. 두려울 것도 없고. 저는 반군에 가담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오양석 박사의 죽음에 대해 의심만 가졌을 뿐이니까.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조사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석화는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또 철문이 달린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석화는 그중 제3조사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매직미러를 중심으로 대기실과 취조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마이크와 영상기록장치가 돌아가는 곳에서 매직미러 너머를 바라보니, 한 남자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석화는 그 옆의 문으로 또 한 번 떠밀렸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화색을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박사님?”

안에서 본 매직미러는 거울처럼 남자와 자신을 비출 뿐이었다. 다가와 악수를 청한 남자의 견장은 은색이었다.

“저는 헌병대 소속 유정경 소령이라고 합니다.”

“연구동 소속 석화라고 합니다.”

석화는 내민 손만 보고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보이는 의자로 갔다. 딱딱한 의자를 끌어내 앉고 손도 허벅지에 얹었다.

유정경 소령의 목덜미에는 헌병대 마크와 동일한 독수리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몸에까지 그려 넣을 정도니, 자신이 소속된 부대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이시면 이쪽으로 식사를 가져다달라고 하겠습니다.”

“초코바 먹었습니다.”

“하하, 초코바라니.”

유정경이 겨우 그게 뭡니까, 하고 묻는 듯 입매만 끌어올려 웃었다. 마주 바라보고 앉은 소령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서류철을 휙 돌려 석화를 향해 바로 놓았다. 내려다보니 자신이 마더에 접속한 시간과 함께 이연태에게 보고했던 일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갑자기 조사실에 불려오게 돼서 놀라셨을 겁니다.”

“안 놀랐습니다.”

하하, 그렇군요. 유정경은 거짓웃음으로 석화를 대했다.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단지 좀 더 확실하게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모셔온 겁니다. 아무렴, 우리 레인보우 시티의 수석 연구원이신데 막 대할 수는 없죠.”

“진행하시죠.”

유정경은 여태 수많은 군인들과 연구원, 그리고 반군들을 취조해왔다. 그들은 대개 얼굴이나 행동에 감정이 드러나고는 했는데, 눈앞의 박사만큼은 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정말로 놀라거나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헌병대 놈들에게 쳐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무전으로 물었을 때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는 말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제는 많이 고생하셨을 겁니다. 갑작스럽게 납치도 당하셨고요. 여의도 쉘터의 자랑이라는 불패 부대의 이채윤, 양상훈, 그리고 곽수환 소령과 동행하셨는데, 박사님이 타고 있던 차가 전복이 됐죠?”

“그렇습니다.”

“운전은 양상훈 소령이 했고요. 그런데 양상훈 소령이 달려드는 차를 피하지 못했다는 게 참 의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차가 전복됐다고 하더라도 S클래스가 셋이나 되는데, 박사님을 눈앞에서 놓쳤다니요. 물론 박사님께서는 기절하셨다고 하시니 상황을 모르셨겠죠.”

설마하니, 지금 불패 부대를 의심하는 건가?

석화는 지금부터는 더 말을 아껴야 한다는 예감을 했다.

“허니모텔이라는 곳으로 박사님이 납치되었고, GPS를 통해 박사님을 구출했죠. 박사님은 납치범을 보지 못했다고 하셨죠?”

대답을 잘 해야 한다. 어제는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걸 다시 번복했을 때 저에게 의심이 쏠릴 수도 있었다.

“납치범의 목소리를 듣기는 했습니다.”

유정경이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어제는 못 만났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뇌진탕 때문에 기억에 혼선이 왔습니다.”

“…….”

유정경이 두 손을 깍지 끼더니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예의상 짓던 웃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저 위에서 먹잇감을 살피는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을 했다.

“계속 말해보시죠.”

“납치범이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제게 언급을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야.”

협박성을 잔뜩 띠고 있는 낮은 목소리가 부딪쳐왔다. 석화는 내리깔았던 눈을 뜨고 헌병대 소령을 응시했다.

“너 똑똑하다며? 천재라며. 근데 왜 기억에 혼선이 와.”

석화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가벼운 뇌진탕이 있었던 건 어제 검사실에서도 확인 받았습니다. 기억에 혼선이 올 수밖에요.”

“그런 새끼가 헌병대 기밀문서에 접속하려고 해?”

“기밀문서 열람이 가능한 레벨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제는 불가능했죠. 누가 막은 겁니까?”

석화는 고저 없이 물었다. 말을 할 때 힘을 실으면 금방 기운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석 박사님. 당신이 솔직하지 못해서 의심이 가니까 막은 거겠지.”

유정경은 손을 뻗어 테이블 옆에 놓인 철제 카트를 끌어왔다.

카트 위에는 위협용으로 보이는 칼이나 펜치 등이 놓여 있었다. 검붉은 피가 굳어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단순히 위협용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삼단으로 구성된 카트의 두 번째 칸에는, 원호 박사가 개발해 아직도 쓰이는 자백제가 있었다.

“상부에서 석화 박사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알다시피 애매한 대답은 상부가 원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필요하다면 자백제를 투여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박사님은 약해 터져서 이거 맞으면 골로 갈까 봐 함부로 놓지도 못하겠어요.”

“놓으셔도 됩니다. 전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탕! 유정경이 책상을 거칠게 내리쳤다. 그러더니 석화의 팔을 억지로 끌어와 테이블에 고정 시켰다. 석화는 그동안 반항하지 않았다.

“뭐 얼마나 약하면 죽는다는 소리가 나와. 근데 박사님, 생각보다 인간의 목숨은 엄청 질기거든. 그렇게 쉽게는 안 죽어.”

나도 알아. 그러니 지금껏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겠지.

석화는 비꼬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유정경이 아모바비탈 용액을 올려두고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 피스톤을 올려 치사량에 미치지 않을 만큼 용액을 빨아들였다.

헌병대가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까? 납치를 당한 건 자신인데 왜 의심하고 몰아가는 거지?

오양석 박사가 죽고 나서 제가 여의도 쉘터로 왔고, 상부는 자신과 박사의 연락을 막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 오자마자 오양석 박사의 자택을 찾아갔으니…….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상부의 의심을 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건 마치 너를 납치한 자가 에덴동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불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이연태에게도 납치범과 나눈 대화에 대해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앞으로 한 발 뻗고자 내민 다리 밑으로 올무가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유정경이 주사기를 팔에 들이댈 때 석화가 입을 열었다.

“소독부터 하죠. 그리고 제가 투여하겠습니다.”

“아~ 그래요? 난 이래서 박사라고 불리는 새끼들이 존나게 싫어요. 그냥 찌르는 대로 받아 처먹어.”

꾸욱, 팔꿈치 중앙에 바늘을 찔러 넣고는 피스톤을 밀었다.

휙, 다 쓴 주사기를 바닥으로 내던진 유정경이 석화의 멱살을 잡아서 테이블에 내리꽂았다. 그 충격에 쿨럭 하고 기침이 터졌다.

“좀 거칠어도 이해해줘요, 박사님? 애초부터 내 조사실로 온 것 자체가 저 위엣분들이 봐주지 말라는 뜻이거든. 내가 좀 많이 거칠어서 말이야. 자, 약기운 퍼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자고.”

“숨 막혀요.”

손으로 등을 꾹 내리누르고 있어서 정말로 숨이 턱턱 막혔다.

“응?”

얼굴을 가까이 내린 놈이 다시 한번 말해보라며 속닥거렸다.

“박사님 되게 좋은 냄새 나네? 좋은 것만 먹고 편하게 자라서 그런가 봐. 난 씨발, 여기서 기다리는데 그사이에 샤워도 하고 왔어? 아니 근데 온갖 좋은 대우 다 받아놓고는 왜 반군들하고 어울리려고 그래.”

다른 이였으면 제가 언제 그랬느냐며 억울함에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물론 곽수환의 말대로 상부에 의문을 가진 것 자체가 반군 사상일 수도 있겠지만.

“좀 어때? 이거 약효가 더 빨리 퍼지게 만든 거라던데. 이것도 다 박사 새끼들이 만든 거라며?”

“…….”

유정경이 석화의 머리채를 쥐고 휙 들어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응?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잘 빠져나가자 우리, 응? 그거 알아? 한참 오래전인가, 내가 따끈따끈한 헌병대 소위로 들어왔을 때 말이야. 오양석 박사 허벅지를 내가 송곳으로 한 이십 번은 찔렀거든? 와, 그 영감 고집 엄청 세데? 이름이 뭐더라, 그 반군 노릇 해서 처형당한 영감. 원효? 아아! 원호! 그 영감 취조할 때는 어땠냐면,”

“유정경 소령.”

석화는 머리채가 잡힌 채로 놈을 불렀다.

“응?”

“머리 울려요.”

표정을 잔뜩 굳혔던 놈이 낄낄거리면서 웃더니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리고 의자에 똑바로 앉혀 놓고는 옷까지 툭툭 털어주었다.

“박사님이 그러시다면 놓아드려야지. 자, 이제 처음부터 다시 가볼까? 어제 납치범과 무슨 대화를 했어?”

“……납치범이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제게 언급을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 그래?”

열 받았는지 유정경은 코를 몇 번 찡긋거렸다.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이가 좀 전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을 하니 놀림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유정경은 약기운이 더 돌 때까지 화를 눌러가며 천천히 기다렸다. 석화에게 투여한 양은 코끼리가 와도 제가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몸으로 표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제 납치범과 무슨 대화를 했어?”

석화의 눈꼬리는 평소보다 내려가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했다.

“다시 말씀드리면 됩니까? 납치범이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대해서 제게 언급을 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기억이 뒤죽박죽이라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하아, 메마른 입을 간신히 달싹거리며 침을 삼켰다. 유정경도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갑자기 생수 하나를 가져와 석화의 앞에 내려두었다. 자백제를 투여 받았음에도 말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에 당혹감마저 느꼈다.

“석화 박사. 아이, 씨발. 이거 아니잖아. 너 새벽에 곽수환도 찾아갔잖아. 어? 니들 이상한 수작 부리는 거 내가 모를 것 같아? 뭐 했어? 어?!”

석화를 조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몰아가라는 허가는 받은 적 없었다. 그러나 유정경은 여태 반군 성향을 가진 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납치범과 조우했던 석화의 말이 번복된 것도 그렇고, 오양석 박사의 뒤를 캐고 다니는 행동도 전부 미심쩍었다. 평소 눈엣가시이던 곽수환 놈도 같이 묶어서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요행도 적잖이 바랐다.

“뭐 했냐고, 씨발! 니들 원호랑 오양석 박사처럼 반군하고 손잡으려던 거 아니야?!”

“오양석 박사가 반군과 손을 잡았습니까?”

오히려 석화가 되물었다.

쾅!!!

매직미러 옆에 있던 문짝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떨어져나가 너덜거렸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소령님!”

헌병대들이 와서 말렸지만, 이 쉘터 안에 남자를 말릴 만한 저력을 가진 자는 없었다. 곽수환은 앞을 막아선 헌병대 놈들을 들어서 벽으로 처박았다.

“관등성명 대, 씹새끼야, 누구 마음대로 석 박사 연행하래?”

“관등성명이라니, 우리 엄청나게 구면 아닌가. 곽수환 소령, 어디서 씹새끼 타령이야? 술집이나 털러 다니는 새끼 어디가 예쁘다고 봐주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곽수환이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그를 담당해온 헌병이 바로 유정경이었다. 그때마다 곽수환은 유정경을 기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하면서 속을 긁어놓은 것이지만.

다른 놈들 같았으면 진작에 영창에서 몇 년을 썩었을 텐데 상부에선 S급 능력자라는 이유로 곽수환의 행동을 눈감아주고는 했다. 유정경에게는 지독하게도 배알이 꼴리는 일이었다. 저는 온갖 궂은일을 해가면서 레인보우 시티를 수호하는데 말이다.

“일어나.”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붙들었다.

“곽 소령, 이거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냥 안 넘어가.”

콰직, 그는 자신의 발밑에서 깨진 약병을 내려다봤다. 자백제의 일종인 것을 알고는 좀 더 사나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딴 것까지 투여해서 뭘 얻었는데.”

“이제부터 알아내려고 했는데 네가 왔지.”

석화가 곽수환에게 잡힌 채로 유정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이제 대답해도 됩니까?”

중얼거리는 석화에게 두 군인의 시선이 쏠렸다.

“제가……. 새벽에 곽수환 소령님의 방에 뭐 하러 갔는지 물었잖습니까.”

“석 박사, 일단 입 다물어.”

자백제를 투여했다면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석화의 몸을 일으켜 둘러 안았다. 석화는 여전히 유정경을 바라본 채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하러 갔습니다.”

“뭐?”

중요한 말을 듣지 못한 유정경이 테이블을 밀치고 가까이 다가갔다. 둘 다 골로 보내버릴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키스……하러 갔다고.”

재차 대꾸하는 석화의 몸에 힘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목적이 어쨌든 석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또한 반군으로 의심받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다.

***

하하, 곽수환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석화는 뒤를 돌아볼 힘도 없어 휠체어 등받이에 등을 한껏 기댔다. 업고 가도 될 것을 곽수환이 그 난리를 피운 뒤에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윽박을 질렀다.

지하 3층부터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여러 쉘터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곽수환은 그때마다 헌병대 새끼들이 우리 박사님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엄포를 놓았다.

석화는 자신의 방문 인식패드를 향해 손을 길게 뻗어 올렸다. 그런 시늉만 했을 뿐 손이 잘 올라가지도 않았다. 곽수환이 팔을 잡아서 손바닥을 패드에 대게 해주었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와서야 석화의 몸을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유정경 새끼,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 너무 분해하지 마.”

처음 조사실에서 봤을 때보다는 조금 안색이 돌아온 석화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 내렸다.

헌병대에서 사용하는 자백제는 S클래스 놈들도 본심을 술술 내뱉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독한 걸 석화에게 사용하다니, 유정경이 성과를 올리려고 무리하게 군 게 틀림없었다.

석화가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김 박사의 말만 아니었다면 데려오는 일은 더 늦어졌을 거다. 장 중령조차도 석화가 헌병대에 끌려간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고발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석화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끄러미 쳐다보니 곽수환이 수건을 뒤로 뺐다.

“좀 쉬어.”

그러면서도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자리를 지켰다. 곽수환은 눈을 끔뻑거리는 석화를 지켜보다가 빨대를 꽂은 생수도 몇 번 물려줬다.

“유정경이 뭐라고 물었어?”

“그냥 이연태 중장이 어제 물었던 거 그대로.”

자백제를 투여 받았으니 석화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전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곽수환은 의자를 끌어와 석화에게 더 가까이 앉았다.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대신 자제력을 없애는 약물이었기에 약효가 사라질 때까지는 쉽게 잠들지도 못할 터였다.

“어제 나한테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은 맞나 싶은데.”

석화가 또다시 수정 같은 동공으로 곽수환을 바라보았다.

“이참에 취조하는 건가요.”

몸은 약해빠져서 정신력 하나만은 엄청난데. 곽수환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분명 오양석 박사의 유언을 총성 때문에 끝까지 못 들었다고 했지.”

“하아…….”

헌병대에 자신을 넘긴 건 곽수환은 확실히 아닐 것이다. 유정경은 불패 소대에 열등감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건수만 있다면 곽수환까지 같이 묶어서 영창으로 보내고 싶어 하는 듯 했으니까.

“곽수환 소령님.”

평소에도 말투가 느리긴 하지만, 오늘은 나른함까지 더해지니 사람 기분을 묘하게 했다.

“대단하네. 이쯤 돼서도 소령님 자가 붙어?”

약을 맞고도 이렇다는 건, 석화가 평소 저의 반말에 별 불만이 없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편할 대로. 반말해도 되고.”

“싫은데요.”

“해도 된다는데 왜 싫어.”

석화는 생각을 거치지도 않고 곧장 말을 내뱉었다.

“저는 곽 소령님과 친해지고 싶지 않거든요.”

곽수환의 목에 설핏 힘줄이 섰다. 지금 나온 말은 완벽한 진심일 테고, 저 진심에 곽수환은 조금 부아가 났다.

“전에 군대에 자원했다고 했죠?”

“그랬지.”

그는 밥을 실컷 먹여준다고 해서 육군에 자원을 했다고 말했다.

“밖은……. 배가 고픈가요?”

흐릿한 시선이 이제는 어디를 보는지 가늠되지도 않았다.

“석 박사는 레인보우 시티 밖에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지? 굶주리고 황폐한 건 맞아. 대신 우리는 우리에 갇힌 동물이지. 성욕 억제제나 맞고 아이를 함부로 낳지도 못하고, 레인보우 시티 안에서 사육당하는 거지.”

“그거……. 반군 사상인데요.”

석화는 곽수환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사실 나는 아무래도 좋아. 배고픈 야생동물이 되느니 배부른 사파리 안의 동물이 낫거든.”

야생동물처럼 형형한 눈을 한 곽수환이 겉모습과 반대되는 말을 했다. 사육되는 동물 같지도 않은 자가 말은 잘했다.

원호가 재개발한 자백제는 약효가 사라짐과 동시에 기억도 드문드문 끊기는 현상이 있었다. 약을 투여당한 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도 못 했고,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조차 제대로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죄를 짓고 조사를 당한 자는 정신이 돌아오면 두려움에 떨었다. 그걸 알기에 곽수환도 조금 더 편히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방금 친해지기 싫다는 석화의 말에는 적잖이 심술이 날 뻔했지만.

“시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인구 규제정책을 펼친다고 했어요. 제주도 학습센터에서 그렇게 배웠고요. 오 박사님과 제가 왜 돌연변이 연구를 했는지 아세요?”

석화가 시체 같은 안색으로 입만 움직였다.

“그때 상부에서 그랬어요.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3할은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가 되어야 한다고요. 저처럼 하자는 없어야 하고요.”

“하자라니, 내 눈에 석 박사는 충분히 매력적이야. 일단 외모로는.”

“곽 소령님.”

석화는 그를 다시 한번 불렀다. 여태 곽수환은 뭔가 진지한 것을 물어볼 때면 말을 흘리거나 가볍게 넘어가려고만 했다.

“오양석 박사님을 죽인 사람은 외부인이…… 아니죠?”

“그럼 누구라고 생각해.”

석화는 흐릿한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자 곽수환이 몸을 기울여 석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지금 우리가 나눈 말들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적어도 무의식중에 남아있었으면 해.”

그는 마치 연인에게 밀어를 속삭이듯 다른 누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은밀한 비밀을 발설하듯이 굴었다. 이어 전희를 하듯 가슴팍에 손을 미끄러뜨렸고, 석화는 야릇하게 제 몸을 만져오는 곽수환을 밀어내지도 못했다. 차가운 손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쥐었고 향기를 맡듯이 쇄골을 타고 올라왔다. 이내 그가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오양석 박사의 피살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파고들지 마. 그래봐야 좋을 것 없어.”

“왜요.”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하고는 꾹 깊이 눌렀다.

“자꾸 의심을 하고 파고들면, 친해지기 싫어도 나와는 필연적으로 얽히게 될 거야.”

이어 맞닿은 입술이 또다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마더가 지켜보고 있어.

그가 속삭였다.

***

석화는 찌뿌둥한 몸을 풀듯이 기지개를 켰다. 약효가 떨어지고 나서 거의 반나절 이상 잠들어 있었기에 공복감이 어마어마했다. 옷장에서 카디건 하나를 꺼내 걸치고 방을 빠져나왔다. 새벽녘이라 그런지 복도를 걸어 나가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24시간 개방된 식당에 도착한 석화는 주변을 쓱 둘러봤다. 밤참을 먹으러 나온 군인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석화도 가판대에 놓인 샌드위치 하나를 들었다. 곽수환이 더럽게 맛없다고 말한, 콩으로 패티를 만든 샌드위치였다. 랩을 벗겨내고 아무 빈자리나 앉으려는 때였다.

“박사님!”

당근을 든 이채윤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석화가 꾸벅 하고 자리에 앉자 그녀가 재빠르게 이쪽으로 뛰어왔다.

“중령님이 그러는데 헌병대가 박사님한테 엄청 실수했다며? 혹시 유정경이 새끼 아냐?”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새끼 변태 새끼야. 사람 고문하면서 즐기는 새낀데 현장 나가는 건 엄청 무서워한다? 나중에 현장에서 마주칠 일 생기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이채윤이 당근 절반을 잘라내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박사님, 잠깐만 기다려봐. 그렇게 말한 그녀가 테이블을 훌쩍 뛰어넘더니 어디로인가 또 달려갔다. 돌아보니 순식간에 자판기까지 간 이채윤이 음료 두 개를 뽑아왔다. 이온음료 하나는 석화에게 건네고, 나머지 하나는 제가 따서 마시기 시작했다.

“제가 돈을 안 가져와서.”

“아니야, 이거 내가 박사님 사주는 거야. 내일 모레 급여 나오잖아.”

“감사합니다.”

쉘터의 직원들은 석 달을 기준으로 일 년에 총 네 번 급여를 받았다. 물론 그린, 블루, 인디고에 살고 있는 시민들도 각자 맡은 일을 해서 급여를 받고는 했다. 그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군수물품을 제조했는데, 세상이 변해도 화폐의 가치는 여전한 법이었다.

레인보우 시티도 화폐가 있어야 생활이 가능했기에 이따금 위조지폐를 만든 범죄자도 잡혀오고는 했다. 영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일반적인 교도소는 몇 군데 없었다. 그마저도 수용자가 넘쳐 더는 받지 못할 때가 되면, 범죄자는 시티 밖으로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특히 위조지폐의 경우 엄벌을 내리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여태 목숨을 부지한 자는 없었다.

“근데 박사님.”

음료를 벌써 다 먹어치우고 당근을 씹던 이채윤이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저보다 작은 체구인데도 훨씬 에너지가 넘치고 생기가 돌았다. 보고 있으면 타인까지도 기운 나게 만들 정도로 시원한 사람이었다.

“곽수환이랑 박사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진짜야?”

방금 내뱉은 말은 사람의 힘을 빠지게 했지만.

석화는 눈만 끔뻑이면서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그전에는 살기 위해 먹었을 뿐이라 맛 같은 건 신경도 안 썼는데, 곽수환이 맛없다고 말한 뒤부터 정말 싱겁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돌이 어떤 맛인지 안 것도 저번이 처음이었다. 사람의 타액은 달았고 돌은 무맛이었다.

“그렇고 그런 사이가 뭐예요?”

“아이, 왜, 그거 있잖아.”

이채윤이 한 손은 오케이 사인을 만들고 반대 손은 검지를 펼쳐서 원 안으로 쏙쏙 집어넣는 시늉을 했다. 석화도 그 행동을 똑같이 따라했다.

“그래, 그거! 벌써 쉘터에 소문 다 났어. 박사님이 곽수환이랑 몰래 밤에 만난다고. 박사님이 곽수환 방까지 찾아갔다며? 아~ 진짜 그 새끼 면상만 잘났지 완전 별로인데 박사님이 아까워.”

“설마 제가 곽수환 소령님과 사귀는 사이라고 소문이 난 겁니까?”

“사귀는 거까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몸은 붙었다고…….”

설마 유정경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 곽수환의 방에 가서 뭐 했냐고 물었을 때 키스했다고 대답한 것 때문에 소문이 퍼졌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사님, 똘수환이 어떤 놈인지 알아? 현장 나가면 미쳐 날뛰어서 막 가끔은 어디 갔는지도 모를 만큼 나대. 이렇게 피칠갑하고 아담 죽이러 미친놈처럼 돌아다닌다니까? 전에는 몇 시간 동안 저 혼자 아담 사냥 나가서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쾅! 마주 본 석화와 이채윤 사이로 음료를 쥔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사람 뒷담화는 적당히 하지?”

곽수환은 일상복 차림이었는데 군에서 지급한 물자는 아닌 것 같았다. 평범한 라운드 티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모습을 보니 군인 같지도 않았다. 그는 허락도 없이 옆에 앉더니 석화의 어깨를 휙 끌어안았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나랑 자고 싶어서 방까지 찾아왔다고 하고 말이야.”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듯이 코를 가져다대자 석화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채윤도 입을 쩍 벌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몇몇 군인들도 황당해했다.

“너, 박사님 약점 잡은 거 아니지?”

“약점은 무슨. 석 박사는 기억 못 할 텐데 분명 유정경 새끼한테 그랬거든. 나랑 섹스하려고 내 방 찾아왔다고. 우리만의 비밀을 그렇게 발설하면 되나.”

석화는 손으로 그의 입술이 닿았던 머리카락을 닦아 내렸다.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거지? 석화는 제 어깨에 얹힌 곽수환의 손을 툭 밀어서 쳐냈다.

“섹스하려고 찾아갔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빼기는.”

곽수환이 능글맞게 웃었다. 석화는 도통 곽수환의 심리를 알 수가 없었다. 이자가 사람들 앞에서 이러는 이유가 뭘까.

“저는 키스라고 했죠.”

움찔, 곽수환이 웃는 낯 그대로 순간 얼굴을 굳혔다가 곧 다시 씩 웃었다.

“여기는 왜 이래.”

툭, 곽수환이 검지로 이마를 훑었다. 석화는 손바닥을 펼쳐 이마를 닦아 내렸는데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뭐야! 박사님 이마 누렇잖아! 이것도 유정경 새끼가 한 거지?!”

꾸욱 눌러보니 조금 시큰거리는 감각이 있는 것도 같았다. 헌병대에게 머리채는 잡혔어도 이마를 가격당한 적은 없었다.

“진짜 유정경 새끼가 손찌검한 거야?”

곽수환은 제가 도착하기 전에 놈이 석화에게 폭력을 휘두른 건가 싶었다. 어차피 자백제를 투여해놨으니 기억도 못 할 거라 생각해 놈이 함부로 석화의 몸을 다뤘을 수도 있다. 그간 별 거 아닌 버러지라 생각해 놔두었는데 어째 도를 넘어서려는 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뇨.”

석화가 담담하게 대답했기에 기억도 못 하니까 저러지 싶어 입맛이 썼다.

“어차피 놈이 그랬어도 기억 못 할 거야.”

“이거 곽수환 소령님이 한 거 아닙니까?”

“뭐? 곽수환 너!”

이채윤이 놀라 벌떡 일어났고, 곽수환은 석화의 기억에 혼선이 찾아온 거라 생각했다.

“몸 멀쩡히 데려다 놓은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뒤집어씌우면 안 되지.”

“곽 소령님이 제 이마에 키스했죠. 그때 너무 세게 눌러서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멍이 들었나 보네요. 근데 왜 그런 겁니까?”

하, 곽수환이 짧게 숨을 토해내며 웃었다.

이건 대체……. 마치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석 박사, 우리 얘기 좀 할까?”

“하세요.”

“여기서 말고.”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쥐고 있던 샌드위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주우려고 하는데 그가 팔을 잡고 식당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힘이 더 거셌다.

“이 소령, 그건 너 먹어.”

“꺼져! 떨어진 건 나도 안 먹거든?! 야! 박사님 어디로 데려가!”

“따라오지 마.”

석화는 샌드위치를 더 먹고 싶은데 억지로 끌려 나가는 바람에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버릇처럼 가볍게 웃고 있던 곽수환의 얼굴이 무뚝뚝하게 변했다. 복도를 둘러본 곽수환이 비상구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석화를 밀어 넣었다.

발이 뒤엉켜 휘청거렸지만, 곽수환이 단단히 잡고 있었기에 그저 벽으로 떠밀리기만 했다.

“샌드위치 마저 먹고 싶은데요.”

“그건 백 개라도 사줄 테니 아까 그게 뭔지부터나 말해.”

“뭐가 말입니까?”

“자백제 투여 받은 거 맞아?”

“그런데요.”

“그런데 헌병대에서 뭘 했는지, 내가 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한다고?”

원호 박사의 일이 있던 날 이후였다. 오양석과 함께 석화는 자백제의 내성을 기르기 위해 아주 극소량씩 아모바비탈을 투여했다. 어차피 체력증강용 약을 만드는 석화가 제 몸을 가지고 임상시험을 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 때문에 유정경이 저에게 자백제를 놓는다고 했을 때도 긴장하지 않았다.

“제가 왜 오양석 박사님의 사건을 파헤치면 위험해집니까?”

곽수환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석 박사, 자백제에 내성이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헌병대에는 티 내지 마.”

“어제 왜 저를 구하러 오셨어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나 석 박사 경호원이거든?”

“이마에 입술은 왜 눌렀고요?”

“구한 값에 대한 보수.”

“경호원이라면서 무슨 보수가 필요합니까?”

곽수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비상구의 문을 잡아 열고는 툭 내뱉었다.

“걱정돼서 그랬어. 오죽 약해 빠져야 말이지.”

석화는 저를 비상구에 두고 나가는 곽수환을 뒤따라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1급 기밀까지 열람이 가능하고, 의외로 자신을 걱정해주고, 그런데도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석화는 시선을 올려 불이 점멸하는 감시카메라를 쳐다봤다.

마더가 지켜보고 있다. 그건 어쩌면 또 다른 충고였을지도 모른다.

***

이 미련한 친구야. 왜 말을 안 했어. 왜 이제야 나를 후회하게 만들어.

곽수환은 이따금 오양석과 술잔을 기울이고는 했는데, 오 박사는 술자리 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술버릇이 나빴다. 한껏 취했을 때는 늘 눈물을 흘리면서 떠나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강둔치에 앉아 까만 강을 바라보면서 질질 짜는 오양석이 곽수환에게 제 몸을 치댔다.

“영감, 이제 그만 들어가지?”

“조금만 더 있다가.”

“난 간다?”

곽수환이 술병을 들고 일어나자 오양석이 팔을 잡았다.

“너 가면 나 여기 혼자 무서워서 어떻게 있으라고.”

밖은 나가고 싶은데 그린 구역이라고 해도 아담이 두려우니 저를 동행시킨 것이다. 곽수환은 한숨을 쉬면서 둔치에 털썩 앉았다. 매몰차게 굴기도 뭐한 게 오양석은 자신이 육군에 지원할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졸업 이후로 일산 쉘터에 배치 받았을 때도 영감은 이따금 저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두 눈을 손가락으로 찔러주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다.

“어때, 여의도 쉘터는 지낼 만한가?”

“어디든 다 똑같지. 오 박사가 이렇게 날 불러내지 않으면 좀 더 쾌적할 테고. 이제 그만 마시지?”

주름진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평소에는 허허 사람 좋은 웃음만 흘리는 이가 만취만 하면 울어댔다.

“내 지은 죄가 크이. 지은 죄가 크니 죽어도 싸지, 암.”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양석이 몸을 휘청거렸다. 원호와 함께 취조를 당할 때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추운 날이면 한쪽 다리를 절고는 했다.

“곽 소령 자네에게도 미안한 것투성일세.”

“덕분에 밥 잔뜩 먹을 수 있는 레인보우 시티 시민이 됐는데 왜.”

부모와 동생이 죽고 난 뒤에 저를 찾아온 건 레인보우 시티의 또 다른 브로커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오양석 박사의 돈을 받고 온 자였다.

“육군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자네는 지금쯤 어떻게 살았을까.”

그랬다면 아마 자신은 반군에 가담했을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혼자의 힘으로 마트를 털며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피폐했던 당시에는 어디든 의탁할 곳이 필요했다.

“영감,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아니지, 아니야. 그저 나는…….”

“그럼 이렇게 따로 불러내지 마. 요즘 영감 눈여겨보는 상부 놈들도 많아.”

오양석은 독한 위스키를 세 번에 걸쳐 삼켰다.

“누가 모르나. 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유언장도 남겨놨다네.”

“그 나이면 남기긴 해야지.”

그건 그렇지, 하면서 울던 것도 무색하게 껄껄 웃었다.

“어찌된 게 부모랑 하나도 닮지를 않았어. 그 둘은 그렇게도 살가웠는데 말일세.”

오양석이 곽수환을 찾아낸 이유는 그의 부모와 연결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곽수환의 부모는 오양석 박사와 같은 연구동에서 지내던 쉘터 연구원이었다.

“내 앞에서 부모 이야기 꺼내지 마.”

곽수환은 오양석 박사가 쥐고 있던 위스키를 뺏어서 남은 것을 전부 비워냈다.

“들어가자고. 영감 인중에 콧물 얼었어.”

절뚝거리는 오양석을 우악스럽게 쥐어서 쉘터로 돌아갔고, 그러고 나서 한 달 뒤쯤이었을 것이다. 오양석이 연구동에서 피살된 채로 발견됐다.

***

드륵, 드륵, 곽수환은 큐브를 돌려 색을 맞춰 나갔다.

그의 앞에는 독수리 마크의 완장을 두르고 녹색 견장을 단 군인이 있었다. 헌병대 차 중령은 각 잡힌 차렷 자세를 하고는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말해.”

곽수환이 큐브를 드르륵 돌리면서 물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 할 말이 없어. 헌병대 소속 소령이라는 새끼가 수석 연구원을 잡아다가 자백제를 투여했는데? 수석 연구원을 조사하라고 지시한 놈이 누구야.”

“이연태 중장님께서 가볍게 조사만 하라고 지시하셨는데, 유정경 소령이 지나친 충성심에, 윽!”

퍽, 날아온 큐브가 헌병대 차 중령의 이마에 부딪혔다. 이어 피가 비쳤는데 차 중령은 그것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다시 차렷 자세로 똑바로 섰다.

“죄송합니다. 유정경 소령을 과천 지부로 좌천시키겠습니다.”

차 중령은 이어 바닥에 떨어진 큐브를 들어서 곽수환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석화 박사 레벨을 비공개로 처리한 건 누구고.”

“그건 저희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원래대로 복구해놔. 그 탓에 쓸데없이 의심만 하잖아.”

“예.”

그는 멀뚱히 서 있는 차 중령을 쳐다보지 않고 다시 큐브를 돌렸다.

“뭐 해? 나가.”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거수경례를 한 차 중령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21 바이올렛 구역]

여의도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민간인 출입금지 군사구역이었다.

말이 군사구역이지 곽수환과 그가 지정한 군인 몇몇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해진 지 오래라 이런 식으로 사용을 해도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순식간에 큐브를 완성한 곽수환이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 건물은 오래전 고등학교였다는데 멀쩡한 창문도 하나 없었고, 비도 자주 오지 않아 제대로 씻겨나가지 못한 핏자국들이 벽면에 가득했다. 전에는 교장실이었던 방에서 곽수환이 나오자 차 중령이 그의 뒤를 따랐다.

거미줄이 촘촘하게 쳐진 중앙문 위에는 학교 교훈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글씨조차도 거미의 집짓기로 잘 보이지 않았는데, 한 놈의 실력이 아니라 여러 마리가 서로 거미줄을 연결해 대형 그물을 만들어낸 듯했다. 그런데도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은 한 놈 배부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떤 거미 한 놈이 옆의 제 동족을 거미줄로 꽁꽁 묶어 잡아먹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차 중령은, 배를 뒤집어 깐 채 바닥에 죽어있는 풍뎅이 한 마리를 거미줄에 걸어두었다. 아마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은 지 꽤 오래된 성체 같았다.

“……인생은 대학부터.”

“뭐?”

“저기 교훈 말입니다.”

차 중령이 거미줄에 가려진 글씨를 용케도 봤나 보다.

“대학은 무슨. 인생은 먹는 것부터 시작이지.”

“시대마다 그리고 장소마다 각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따로 있었을 겁니다.”

“그럼 지금은.”

곽수환이 홀스터에서 총을 빼내 들었다. 차 중령은 총구가 저를 향하자,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방아쇠를 당기니 푸슉 하고 총알이 어딘가에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뒤를 돌아보자 아사 직전으로 보이는 아담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남는 것부터겠지.”

곽수환이 홀스터에 권총을 다시 꽂았다.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차 중령은 제가 겁먹었다는 사실을 애써 숨기고 웃었다. 정문 앞에 세워둔 지프에 올라타기 전에 차 중령이 먼저 입을 떼었다.

“여의도 쉘터로 바로 돌아가십니까?”

곽수환이 대답 없이 지프에 올라타서는 시동을 걸었다. 그가 레인보우 시티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생인 건 어차피 군인들이면 다 알았다. 단지 지금 와서는 워낙 지랄맞은 행동을 하고 다닌 탓에 그 타이틀이 희미하게 빛이 바랬을 뿐이지. 오양석도 죽는 날까지 몰랐지만, 곽수환은 본래 육군에서도 헌병대 소속이었다. 현장에 투입되고 나서부터 불패 소대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것뿐이었다.

곽수환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그 새끼 과천으로 좌천시키지 마.”

“예?”

“두고두고 내가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겠어.”

“알겠습니다.”

“잠깐, 옆으로 비켜봐.”

차 중령이 지프를 돌리려나 싶어 옆으로 물러났는데도 곽수환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프에서 내리는 게 아닌가. 그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음,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다시 지프에 올라탔다.

“간다.”

액셀을 밟고 운동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차 중령은 차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지프의 문을 열었다. 대체 그런 건 왜 주워 간 건지, 긴 한숨은 덤이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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