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 wall (1)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 말거라. 그것을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반드시 선악을 알아야 할 때가 존재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더라도.]
석화는 오양석 박사의 필체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하나는 창세기의 구절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 오양석 박사의 사견이었다. 석화는 여태 연구 자료를 제외한 오양석 박사의 일지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에덴동산이 엮임에 따라 무심히 넘겼던 부분까지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됐다.
지금까지 내린 가설 중 가장 타당성이 높은 것은, 오양석 박사가 레인보우 시티의 구조에 의문을 가졌고 에덴동산과 손을 잡았으며 그로 인해 살해를 당했다는 가설이다.
선악을 알아야 할 때…….
납치범, 아니 자신을 서펀트라고 말했던 자가 이야기한 접선 날이 불과 삼 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담이 소탕된 13 레드 구역으로 혼자 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과연 가도 되는 것일까?
그것보다 7차 백신을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도 온갖 불온한 생각들이 가시지를 않았다.
전과 같이 아담 바이러스에서 감염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잘라내 감기 바이러스에 삽입한 뒤 장비를 이용해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그렇게 생성된 백신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백신 연구가 늦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직접적으로 실험할 대상이 연구소에 없다는 데에 있었다. 동물을 이용해 실험을 하기에는 아담 바이러스가 너무도 치명적이었고, 날뛰는 동물들을 상대로 박사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바이러스가 변이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점막이 아닌 호흡기로도 전염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다뤄졌다.
오래전 에볼라 바이러스도 BL4(생물안전 4등급 연구실)에서만 다룰 수 있었고, 그 연구실이 한 국가에 단 한 곳만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막강한 아담 바이러스는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아담 바이러스가 속수무책으로 퍼져나갔을 때처럼 레인보우 시티도 손쓸 새 없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도 동물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 단 한 군데 존재하기는 했다. 동물원처럼 레드 구역으로 지정된 연구소였는데, 쉘터에서 개발된 백신을 그곳으로 이동시켜 실험체에 주입하는 형식이었다. 그곳에서 백신의 유효 유무를 검사하고 또 실험 결과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들은 대개 군인으로 구성된 연구자들이었다.
다만 모든 동물이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감염이 되지 않는 개체 중 하나는 새였다. 물론 1차 아담 바이러스가 나타났을 때 새 역시 감염이 되었으나 3차 이후로는 제외됐다. 연구원들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해 연구를 거듭했지만, 딱히 이렇다 할 결과는 없었다.
제아무리 머리가 뛰어난 자들이 태어나고 연구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모든 것은 레인보우 시티의 통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어떤 달은 연구 지원비가 부족하다면서 연구동이 마비상태로 들어갈 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 뛰어난 자들이 나타났지만, 아담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일도 없듯이.
“……박사님?”
제 몸만 한 유전자 조합 장비를 바라보고 있던 석화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
돌아보니 김 박사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오늘 상부 미팅 날이잖아요.”
석화는 이내 소식을 떠올리고는 아, 하는 작은 목소리만 냈다.
“지금 몇 시인가요?”
“2시 50분이요. 슬슬 이동하실래요?”
“그러겠습니다.”
석화는 가운을 벗고 노트북을 챙겼다.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 만들어진 노트북인데 최근에 나오는 것만큼이나 성능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에덴동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인류는 쇠퇴했다고. 석화는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인구가 넘쳐나고 각 나라가 무리 없이 돌아가던 때와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도 평화의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이 시대는 디스토피아라고 불려도 충분하겠지. 다른 나라와 교류도 끊긴 마당에 레인보우 시티의 내수시장은 그야말로 간신히 유지중일 것이다.
“근데 오늘 하루 종일 곽 소령이 안 보이네요? 박사님 뒤만 졸졸 쫓아다니더니 말입니다.”
현장에 나갔다 온다고는 했는데 별 관심을 갖지 않아 모르겠다. 그날 곽수환과 오양석 박사에 대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 일부러 더는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더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도 그렇고, 헌병대에 불려 갔다 왔으니 눈 밖에 날 행동을 해봤자 저만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곽수환은 밤이면 위스키를 동내고는 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제 방에 찾아온 남자에게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저는 곽수환 소령 영 별로예요.”
“그렇습니까?”
“만날 술이나 퍼 마시고, 멋대로 행동하고, 그리고 그……! 석 박사님한테도 추근댄다고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곽수환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딱 그랬다.
힘세고 얼굴만 잘생긴 망나니.
“조심하세요. 곽수환 소령이랑 얽혀서 좋은 꼴을 못 봤어요. 솔직히 오양석 박사님도 그렇고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오양석의 이야기에는 김 박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김 박사는 벌써 커피를 절반 이상 마신 뒤였다.
“오양석 박사님이 왜요?”
김 박사가 말을 이으려는 것보다 빠르게 석화가 관심을 보였다.
“오 박사님이 곽수환 소령하고 술자리도 꽤 같이 가졌거든요.”
그건 곽수환에게 지나가는 말로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런데 박사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슬퍼하지도 않고, 연구실에 들어와서 뭘 뒤지기나 하고……. 하여간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니까 석화 박사님도 상종을 말아요. 오자마자 이상한 소문 난 게 누구 때문인데.”
김 박사는 늘 시큰둥한 사람이 저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게 기뻐 입을 쉴 새 없이 나불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석화는 뭔가 의아했다. 힘이 센 건 맞지만 얼굴만 잘생긴 망나니는 좀 아닌 듯했다.
적어도 시늉일지언정 저를 걱정해주기도 했고, 행여 반군으로 몰릴까 봐 헌병대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설렁설렁 웃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의 간극을 안다. 곽수환이 석화를 탐색한 것만큼이나 석화 역시도 그간 그를 꾸준히 지켜봤다.
“뭐 하세요, 얼른 타세요.”
김 박사가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석화를 재촉했다. 연구자들의 미팅은 58층에서 열렸으며 군인들과 다름없이 연구의 진행과정이나 상부의 지시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미팅 날짜와 시간은 그때그때 달랐다.
[연구자 회의실]
팻말이 달린 룸 안으로 들어가니 아직 상급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연구동의 박사 몇 명만 와 있었다. 여의도 말고 다른 쉘터에도 연구동이 존재했는데, 연구 결과를 주고받을 때를 제외하면 직접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다고 같은 쉘터 박사들끼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석화와 김 박사는 다른 박사들을 향해 고개만 꾸벅하고 말았다.
“오양석 박사님 돌아가시고 나서 저 자식들이 한동안 얼마나 뻗대고 다녔는지 몰라요.”
김 박사가 옆에 찰싹 붙어 앉았지만, 석화는 이번에야말로 가장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언제나 파벌 싸움은 관심 밖이었다.
한 십 분 정도 기다렸을까. 저희들이 들어온 문이 아닌 안쪽 문이 열리고, 상부 인원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레인보우 시티의 상부는, 장군에 속하는 대장들과 정치를 하는 조언자 그리고 최종 관리자인 두 명의 마스터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사에 관련한 모든 것들은 그들이 결정하고 진행했다. 두 명의 마스터는 십 년마다 투표로 뽑혔고 연임이 가능했으며, 실제로는 세습 형태에 가까웠다. 마스터를 뽑는 투표 권한은 쉘터의 시민에게만 있었기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이 뒤에서 나올 정도였다.
오늘은 육군 대장 한 명과 조언자 둘이 회의에 참석했다. 미팅 시간과 날짜도 저 상급자들이 결정하는 이유는, 저들이 제주도에서 올라오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다 참석하셨지요?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장군 하나가 앞으로 나와 위풍당당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우리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입니다.”
박사들은 웅얼거리는 수준으로 같은 말을 쏟아냈다.
“여러분을 근 일주일 만에 뵙습니다. 석화 박사님께서 여의도 쉘터로 다시 복귀하신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는 조언자 두 명 중 하나가 말을 하고는 박수를 쳤다. 그러자 나머지 인원들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석화는 아무 표정 없이 다시 고개만 꾸벅했다.
“우리 바쁘신 레인보우 시티의 연구원 분들을 너무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으니 마스터의 메시지부터 전달합니다.”
단상에 선 상급자들이 옆으로 비켜서서 연구원들이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자리를 텄다. 이어 침통한 표정을 한 퍼스트 마스터의 얼굴이 화면에 떠올랐다.
[안녕하십니까? 레인보우 시티의 퍼스트 마스터입니다. 미팅을 시작하기 전, 오양석 박사의 죽음을 애도하겠습니다.]
녹화된 영상이며 날짜는 알 수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마스터의 얼굴은 전에 봤을 때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 당연하겠지만.
[박사님들도 다들 아시다시피 아담이 7차 변이를 이뤄냈지요.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백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사님들의 연구가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박사님들께서는 누구보다도 강한 사명감을 품고 계실 겁니다.]
예!
석화가 어깨를 움찔했다. 저 대각선 방향에 앉아있는 박사 하나가 감명 깊은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석화도 그렇고 이곳에 있는 박사들은 전부 태어날 때부터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었고, 아주 어릴 적부터 레인보우 시티가 얼마나 시민들에게 수혜를 주는 곳인지, 또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학습했다.
그것이 세뇌라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단지 석화는 애초에 그런 점에는 별 생각이 없었기에 사명감 같은 감정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의 역할이 가장 컸을지도 모른다. 절대 그 무엇을 위해서도 희생하지 말라는 말을 학습 비디오보다 더 많이 들었으니까.
[우리의 적은 아담뿐만이 아닙니다. 호시탐탐 안전한 울타리를 노리는 반군들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반군들에게서 시민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박사님들께 무수한 지원을 하고 싶으나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 점에 깊이 통탄하고 있습니다.]
“울겠네, 아주 울겠어.”
김 박사가 저쪽 박사들을 흘끔 보고는 중얼거렸다. 물론 그 말은 석화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필요한 물자나 연구에 필요한 지원금이 필요하다면 우리 조언자들에게 전달해주세요. 최우선으로 조달하겠습니다.]
미팅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퍼스트나 세컨드 마스터의 응원 녹화가 대부분이었고, 이어지는 건 조언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전달하는 순서였다.
“퍼스트 마스터의 전언은 여기까지입니다. 박사님들께서는 필요한 것들을 앞에 놓인 종이에 적어 제출해주세요.”
불현듯 석화가 손을 들었다. 석화의 돌발행동에 김 박사뿐만 아니라 상급자들이 적잖이 놀란 얼굴을 했다.
“뭡니까, 석화 박사?”
“오양석 박사님께서 살아계실 적 연구하던 7차 아담 백신 자료가 희박합니다.”
여태 아무 말이 없던 조언자가 앞으로 나섰다.
“희박하다면 그것뿐인 겁니다. 돌아가신 오양석 박사님께서도 이번 변이에 대해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셨죠.”
석화는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석화는 앞에 주어진 종이에 필요한 물자와 금액을 적는 대신, 백신과 함께 치료제 개발을 하겠으니 지원해달라는 글을 적었다.
[석화 박사.]
석화는 쓱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부른 화면 속의 퍼스트 마스터를 바라봤다. 녹화된 비디오가 아니라 어쩐 일로 실시간이었다.
[마음이 많이 안 좋겠지. 우리도 오양석 박사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백방으로 노력중이네.]
“예, 마스터.”
석화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마스터는 입술을 끌어올려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향후 일 년 뒤에 다시 마스터 투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어쩐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표정이 좀 더 인자하다 했다.
곧 퍼스트 마스터의 얼굴이 떠 있던 화면이 꺼지고, 박사들은 각자 종이를 조언자들에게 제출했다. 조언자들은 한 명씩 박사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석화의 차례가 다가오자 조언자가 그의 어깨도 두드렸다.
“석화 박사님. 납치 사건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큰일을 겪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석화가 적은 종이를 눈으로 훑은 조언자는 좀 더 진하게 웃었다.
“치료제는 저희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지원할 용의도 있고요. 다만 연구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엄청난 자본이 들어가니 쉽게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주도에 계신 석화 박사님을 다시 부르신 분이 퍼스트 마스터입니다. 그만큼 기대가 크십니다.”
그럼 왜 오양석 박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는 부르지 않았는지 궁금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석화는 그 질문을 애써 삼켜 넘겼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납치범이 들려준 오양석 박사의 음성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김 박사는 석화의 뒤에 서 있었는데, 조언자와 육군 대장에게 잘 보이려 온갖 아첨을 떨고 있었다. 이번에 부모님께서 여의도 쉘터와 가까운 그린 구역으로 이사를 오고 싶어 한다는 불필요한 개인사까지도 토해냈다.
석화는 주머니에 넣은 돌을 매만지며 밖으로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도 의혹은 가시지 않으니 이제 그 의혹을 심어놓은 자를 만나야 했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르지만…….
“자기, 나 보고 싶었어?”
고개를 드니 땅콩을 손으로 튕겨서 입에 쏙 넣는 남자가 보였다. 은색 견장을 단 곽수환이었다.
“아니요.”
석화는 땅콩을 튕겨 먹는 곽수환을 지나쳐 걸었다. 유령처럼 발소리도 없이 멀어지는 석화의 뒷모습을 감상하다가 곧 보폭을 크게 해 금세 따라잡았다.
“미팅은 잘 했고?”
옆으로 다가온 곽수환의 한 손에는 완성된 큐브가 들려 있었다. 술을 병째로 들이켜던 사람이 하루만 지나면 멀끔해졌다. 생각해보면 술을 마실 때도 만취하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곽수환이 술 마시면 개가 된다는 소문은 왜 퍼져있던 걸까. 어쩌면 제가 아직 그의 술주정을 못 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볍게 생각하고 넘겼다.
연구동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곽수환이 얼굴을 불쑥 들이댔다. 모양 좋게 올라간 입매가 석화의 눈에 비쳤다.
“이마에 멍은 다 나았네?”
엘리베이터 안에는 거울이 없어 그의 말대로 멀끔해졌는지 알 수가 없기에 석화는 손으로 이마를 문질러봤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뽀뽀 한 번 했다고 멍이 들어.”
원래 몸에 멍이 잘 드는 체질이지만, 그 정도 입술 박치기에 멍들었다고 보기에는 저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입술이 닿은 뒤에 계속 버릇처럼 이마를 문질렀는데, 어쩌면 그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석화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에 뽀뽀하면 부러지는 거 아니야?”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던 석화가 그제야 곽수환을 돌아보았다.
“성기는 부러지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건데요.”
“석 박사는 유머를 모르네.”
34층에 다다라서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연구동으로 걸어가는데 또다시 곽수환이 뒤를 쫓아왔다.
“쉘터 안에서는 각자 행동하자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석화의 앞길을 막고 선 곽수환은, 수작을 부리는 놈팡이처럼 제복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가 진짜 엄청난 물건을 가져왔는데, 안 궁금해?”
“예.”
석화가 그를 비켜 지나려고 했지만 또다시 앞을 막았다. 괜히 사람 기운 빠지게 이럴 거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때였다.
“이것 봐.”
주머니에서 손을 빼낸 곽수환이 내민 것은 커다랗고 단단한 돌이었다. 웬 돌인가 싶어 석화의 눈에도 이채가 서렸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죽이지?”
그가 흔들고 있는 돌은 마치 발기한 남근을 닮아 있었다.
“선물이야.”
곽수환이 석화의 손목을 가볍게 낚아채서는 손바닥 위에 올렸다. 하얀 손으로 잘린 좆을 쥐고 있는 광경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어쩐지 음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었다.
석화는 제 손에 얹힌 남근 모양의 돌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더럽다면서 내던지거나 차가운 눈을 들 줄 알았는데 까만 속눈썹은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고맙습니다.”
곽수환의 예상과는 다르게 석화는 얇은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었다. 그 바람에 주머니로 성기 모양의 음영이 졌다.
“마음에 들어?”
“예.”
대체 좆 돌에 어떤 매력이?
곽수환이 물어보려는 것보다 더 먼저 석화가 연구동으로 걸어갔다.
“석 박사, 보답은 조만간에 해줘.”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매만져봤다. 모양은 좀 그렇지만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이 그럴싸한 녀석이었다.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동안 풍화작용을 거쳐 이런 모양이 된 건데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모난 곳 없이 섬세하게 굴곡진 것을 보니 대견했다.
[개방합니다.]
석화는 유전자 재조합 장비로 다가갔고, 마무리까지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것을 확인했다.
만남까지는 이제 삼 일 남았는데 곽수환에게 부탁을 해볼까?
그도 오양석 박사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임무를 맡았고, 반군인 에덴동산과 접선을 한다고 하면 성과를 올리기 위해 흔쾌히 따라와 줄지도 몰랐다. 서펀트가 체포되든 말든 사실 저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서펀트도 자신과 접선을 하는 데 위험부담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테고, 어쩌면 이중함정일 수도 있으니 곽수환을 대동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듯했다.
돌을 줘서 그런 건 아니고.
석화는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태 돌을 좋아한다고 뭐라고 하는 이들만 있었지 직접 돌을 선물해준 사람은 없었다. 어머니조차도 가뜩이나 힘도 없는 애가 그 무거운 돌을 주워온다면서 핀잔도 종종 주었다. 쉘터에서도 돌을 모으는 저를 곱게 보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으니 돌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봤다.
석화는 로비의 기둥을 돌아 나와 연구소의 문을 다시 개방했다.
“어? 마중 나오신 거예요?”
보답을 바라던 곽수환은 온데간데없고, 어리둥절해 하는 김 박사만이 보였다.
“들어오세요.”
복도의 양옆을 살폈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야, 우리 석화 박사님이 마중도 나오고 이제 우리 좀 친해진 겁니까? 김 박사가 기분 좋게 웃었다.
“혹시 곽수환 소령님 못 보셨어요?”
“곽 소령이요?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보기는 봤는데 어디를 급하게 가는 것 같던데요.”
“그렇군요.”
“씨발, 엘리베이터 터지겠네.”
갑작스러운 욕설에 석화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람이 워낙 만선이라 그런지 그냥 계단 쪽으로 가더라고요. 엘리베이터 탄 사람들 들으라고 그렇게 욕하던데요. 하여간, 쯧쯧.”
“사람이 많아도 엘리베이터는 안 터지는데요.”
이래서 내가 석 박사랑 대화가 안 된다니까, 속으로만 구시렁거린 김 박사가 쓰게 웃었다.
“그건 곽 소령에게 말하세요.”
“그럴게요.”
석화는 저벅저벅 저의 자리로 향했다. 주머니의 돌을 꺼내 책상에 올려둔 순간 김 박사만이 경악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쉘터에서 따로 다니자고 말한 게 화근이었을까, 하루가 넘도록 곽수환을 볼 수가 없었다.
석화가 그의 방 벨을 눌러보기도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새벽녘에는 돌아오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지금도 허탕을 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왕 나온 김에 바람이라도 쐴 겸 석화는 빌딩의 옥상으로 향했다. 꼭대기에는 적의 헬기나 유도탄 미사일을 격추시키는 방공포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석화는 전부터 그곳에 서서 바람을 맞는 것을 즐겼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석화가 놀란 동공만 굴려 음산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치익, 포.”
동요가 이렇게 음산할 수 있다니 열이 삽시간에 식어버릴 정도였다.
“칙칙 폭폭, 칙칙 폭폭.”
도로 내려가려고 발을 물렸는데 철문이 이미 닫힌 터라 어깨를 쿵 부딪쳐버렸다. 그러자 노랫소리도 일시에 끊겼다.
“누구?”
옥상의 꺾인 코너에서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석화는 자신이 아는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양상훈 소령님?”
“어? 석화 박사님? 옥상에는 어쩐 일이세요?”
“더워서요.”
“예? 오늘 날씨 영하 7도인데요?”
저는 제복을 입고 있어도 춥다면서 입김을 뱉다가 곧 멋쩍게 웃었다.
“좀 창피하네요. 혼자 노래 부르는 걸 들키니까.”
밤에 듣기는 음산했지만 노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박사님은 돌 좋아하시죠? 전 열차 좋아하거든요. 나중에 은퇴하면 열차에서 살 거예요.”
“열차요?”
“제 동생 소원이 열차 타보는 거라고 했거든요. 어차피 버려진 열차도 많을 텐데 아무데나 들어가서 수리하고 살면 그만이잖아요. 여기서 힘 더 길러서 열차에 쇠사슬 묶어서 끌어볼까 해요.”
양상훈이 수레를 끄는 소처럼 열차를 끄는 모습이 상상됐다.
“힘내세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 슬슬 내려가 볼 건데 같이 가실래요?”
“저는 조금만 더 있을게요.”
“추우니까 적당히 계세요.”
양상훈이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석화를 비켜 지나갔다.
“저기.”
“예?”
“곽수환 소령님 많이 바쁘신가요?”
“곽수환이요?”
석화는 눈으로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새끼가 바쁘긴 뭘 바빠요. 바쁜 척하는 거지. 안 그래도 제 방에 있던 술도 몰래 가져가는 바람에 제대로 열 받았거든요.”
그럼 지금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아, 듣기로는 에덴동산 본거지 찾아내서 처리하러 갔다고는 했어요.”
깜빡깜빡, 석화가 웬일로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떴다.
“본거지요?”
“근데 아마 본거지는 아닐걸요. 나간 현장이 13레드 구역이라고 하니까요. 설마 놈들이 레인보우 시티 내에 본거지를 차렸겠어요?”
“그럼 언제 돌아오는지는,”
“박사님,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예요? 곽수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다는 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저는 그냥 곽수환이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본 것뿐이고, 에덴동산의 본거지가 13레드 구역이라고 하니 놀라 파고든 것뿐이었다.
석화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잠시만요, 손을 들어 보인 양상훈이 제복 안쪽에서 울리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불패 소대 양상훈 소령이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들더니 무전기의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양상훈인지 누가 몰라, 새끼야. 1층으로 내려와.]
“1층?”
[1층.]
“어어, 알았어.”
무전기를 다시 제복 안쪽에 꽂아 넣은 양상훈이 석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곽 소령 지금 돌아왔나 보네요. 볼일 있으시면 같이 내려가실래요?”
“……아뇨. 바쁘실 테니 제가 찾았다고만 전해주세요.”
“그럴게요.”
양상훈은 조금만 늦었다가는 그 새끼가 지랄을 해댈 게 분명하다면서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달려 나갔다.
석화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흐릿한 달빛에 적힌 글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한 번 봤던 내용이라 곱씹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급 기밀: 오양석 박사에게는 치매 증상이 있었다. 자신의 아들(오청운)을 인체실험 대상으로 삼았고, 치료제를 만든다는 이유로 지원금을 횡령해 반군의 자금책이 된 것으로 추정 중. 오양석 박사를 살해한 인물은 오리무중. 다만 사건 전날, 쉘터에 등록되지 않은, 현재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들어와 하루 동안 쉘터에서 지낸 것이 여러 곳에서 포착됨. 연구동에서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이유로 받아간 지원금은 백신 개발비용의 오십 배. 그런데도 이렇다 할 뚜렷한 결과가 없기에 마스터들도 쉽게 지원 허가를 다시 내리기가 힘듦.]
조언자가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 저에게 건네고 간 자료였다.
‘석 박사, 우리 사정도 알아줬으면 해요.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시민들이 있고, 그들은 결과가 쉽게 나오지 않는 연구에 지원하는 일에는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천연두를 보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그만한 자금력이 존재하지 않아요.’
14세기 당시 세계 인구의 5분의 1을 죽게 만든 병은 천연두였는데, 그 병은 기원전부터 존재하던 바이러스였다. 19세기에 와서야 우두법이 발견됐지만 실제로 백신이 대량 생산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였다. 천연두가 완전히 박멸된 건 우두법이 나오고 200년이 지난 후였고, 정교한 백신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금액은 어마어마했으니 조언자가 크게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석화는 종이를 다시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열이 내린 석화는 더 이상 옥상에 있지 않고 발걸음을 틀었다.
***
곽수환은 꼼짝도 못 하도록 포박한 남자를 1층 로비 한쪽에 밀어 넣었다. 어찌나 독한 새끼인지 저에게 잡히자마자 혀를 깨무는 것을 간신히 주먹을 날려 막아낼 수 있었다. 재갈을 문 채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놈이 지금도 어떻게든 혀를 깨물려고 용을 쓰는 게 보였다.
“곽 소령, 저 새끼는 뭐야?”
양상훈이 찬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다가왔다.
“뭐긴 뭐야, 자칭 에덴동산 신도지.”
“뭐?”
곽수환이 무릎을 꿇려놓은 놈을 발로 툭 건드렸다. 마치 아담처럼 핏발 선 눈을 하고는 발광을 하려 했지만, 버둥거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이거 헌병대에 넘겨봐야 반병신 될 테니까 양 소령 네가 좀 맡아봐.”
“내가 왜!”
양상훈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너도 레인보우 시티 밖에서 왔으니까? 동병상련이나 느끼면서 이놈 갱생이나 시키라고. 나름 쓸 만한 것 같은데 이상한 쪽으로 세뇌당한 모양이더라고. 동생 하나 생겼다 생각해.”
곽수환이 양상훈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어깨를 툭 두드렸다.
“저거 A급 이상이야. 봐서 안 되겠다 싶으면 헌병대에 넘겨버려.”
얼굴이 여기저기 터져 있고 덩치는 산만 했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아직 어린 녀석 같았다. 많이 쳐줘봐야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었다.
“에덴동산 신도라며. 바로 헌병대에 넘겨야 하지 않아?”
“저놈 자기가 에덴동산 신도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에덴동산을 사칭하는 놈들에게 이용당한 것 같아.”
13레드 구역으로 가서 먹을 것과 약을 털어오라는 교주의 지시를 받고 잠입한 거라 했다. 곽수환도 13레드 구역에서 에덴동산 신도가 잡혔다는 무전을 받고 바로 달려 나갔지만, 보자마자 반군의 사칭인 것을 알아차렸다. 진짜 에덴동산이라면 저런 소년을 상대로 허술한 짓은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대체 왜 반군을 사칭하는 놈들이 있는 거냐.”
“남 말은 말지. 너도 반군 사칭했던 놈들한테 이용당했으면서?”
양상훈이 그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인상을 구겼다.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 아닌 자들은 각자 부락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자급자족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각지에서 생긴 신흥종교에 귀의하는 자들도 수많았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고, 한 가족보다는 공동체가 더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종교를 앞세워 교주라는 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에 어린 녀석들이 착취당하는 일도 잦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에덴동산처럼 규모가 큰 반군을 사칭해서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먹을 거 실컷 먹이고 잘 회유해 봐. 어차피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학습센터에서 결정할 테니까.”
“그런 놈이 애를 떡을 만들어 놔.”
“내가 한 건 턱 날린 것밖에 없거든.”
“애 꼴을 봐라. 턱 돌아간 게 제일 커, 새끼야.”
이런 건 꼭 내 몫이지, 양상훈이 투덜거리면서도 소년을 부축해 일으켰다. 상처 난 야생동물처럼 발광하는 소년을 어깨에 들쳐 메는 것으로 제압했다.
“아, 맞다. 석화 박사님이 너 찾더라.”
“왜 저러나 했더니.”
곽수환이 픽 웃었다.
“뭐?”
“가기나 해.”
불패 소대실로 향하는 둘을 보던 곽수환이 장갑을 뒤집어 벗어 내렸다.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진다 싶더라니,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저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 뭔가를 꼭 쥐고 있는 석화였다.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석화를 향해 손을 들자, 빙글 돌아서 안쪽으로 사라지려고 하고 있었다. 소리 내서 석 박사, 불러볼까 했지만 어차피 그 걸음으로 가봐야 저가 따라잡는 건 금방이다.
곽수환은 벗은 장갑을 제복 주머니에 구겨 넣고 성큼성큼 석화의 뒤를 밟았다.
“여기서 뭐 해?”
곧 따라잡힌 석화는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손에 쥐고 있던 건 곽수환이 선물해준 남근석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볼 줄도 모르고 저렇게 대놓고 다니니, 곽수환은 어쩐지 석화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욕 억제제를 맞아도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꼴을 보면 남색에 관심 있는 놈들이 달려들지도 몰랐다.
“밖에 너무 들고 다니지 마.”
주머니에 넣으라면서 눈짓으로 코트 밑을 가리켰다.
“넣고 다니기에는 무거워서요.”
“그럼 방에다 장식해두든지.”
“감촉이 좋아요.”
허, 하는 헛바람이 목구멍에서 새어나왔다.
“난 왜 찾았어?”
“에덴동산……. 체포한 거예요?”
“내가 전에 말했을 텐데. 박사님은 연구에나 매진하시라고.”
곽수환은 석화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괜히 로비에서 저희들의 대화를 누군가가 엿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수작을 부리는 놈처럼 석화에게 치대면서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누가 연구원 아니랄까 봐 한 번 관심 가진 이상 정답을 얻을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성싶었다.
“아까 다친 사람이 많이 어린 것 같던데.”
“에덴동산은 아니고, 사칭하는 놈들한테 이용당한 불쌍한 양.”
“사람이던데요.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사람이 많아도 안 터집니다.”
앞말은 이해를 했는데, 뒷말은 도통 알아듣기 힘들었다.
“왜 찾았어? 나 이제 술 마시러 갈 건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석화가 발꿈치를 올려 곽수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제가 먼저 들이대는 건 익숙한데 석화가 이렇게 나오니 곽수환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옆으로 뺐더니 다시 석화가 따라왔다.
“뭐 하는 거야.”
“귓속말하려고요.”
무덤덤하게 대꾸하는데 당황스러워도 이건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남근석이 그렇게 마음에 든 건가? 물론 누가 손으로 깎아 만든 것보다도 더 정교한 생김새이긴 했지. 설마 돌 선물을 해줬다고 살갑게 구는 건 아닐 테고.
어디 해보라는 듯이 이번에는 가만히 있자 도톰한 입술이 귀에 슬쩍슬쩍 닿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더가 없는 곳이 있나요?
사람 성감대를 자극하듯이 입술을 놀렸지만 실제 튀어나온 말은 색기가 없었다. 마더가 없는 곳이라는 건 감시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사각지대를 뜻했다.
“그런 데가 어디 있어.”
[개방합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는데 석화는 발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곽수환이 힘으로 안에 들여놓을 수 있었지만, 그는 어깨를 두른 팔을 떼어냈다.
“지금 몇 시지?”
“새벽 1시 조금 넘었어요.”
석화보고 들으라는 듯이 한숨을 내쉰 곽수환이 길을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석화가 우두커니 서서 뒷모습만 바라보자 곽수환이 소리 내 말했다.
“뭐 해, 심야 데이트 가자.”
***
곽수환이 ‘그 녀석과 나의 사랑법’에서 본 첫 데이트 장소는 시내의 레스토랑이었다. 곽수환과 석화는 낡고 동그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멀뚱히 바라봤다.
휘이잉, 깨진 창문을 타고 겨울바람이 들어왔고 서로의 입에서도 하얀 김이 부서졌다. 레스토랑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은 저번 여름에 닥쳐온 태풍에 절반이 날아가 버린 뒤였다.
“그럼 석화 씨, 뭐 드실래요.”
곽수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손을 들고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아, 지배인 왔어요?”
석화는 지금 이 군인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뚱하게 쳐다봤다.
“지배인이 추천하는 메뉴로 부탁해요. 와인은 보르도산으로 가져다줘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던 곽수환은 순간 저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하, 소리를 내뱉었다. 입을 벌린 석화의 멍한 표정이 가관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가로 하얀 입김이 시원하게 흩어졌다.
“방금 뭐 한 겁니까?”
“돈 많은 사업가 흉내? 나중에 봐봐. 그 녀석과 나의 사랑법에 나와.”
곽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폐허가 되다시피 한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고, 칵테일을 주조하던 바로 향했다. 빈병들과 깨진 유리잔이 바닥과 바에 가득했다. 보통 아담이 쓸고 간 지역은 소독과 방역을 마친 뒤 재정비를 했는데, 이곳처럼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장소도 존재했다.
곽수환은 끝이 뾰족뾰족하게 부러진 와인잔 두 개를 가져와서 각자의 앞에 놓았다.
“그럼 데이트를 시작해볼까?”
“차에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석화는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몸에 열이 많아도 오랜 시간 추위에 노출되어 있으면 석화도 똑같이 추위를 타기는 했다. 곽수환은 제 코트를 벗어서 석화에게 내밀었다. 빈말이라도 사양할 만한데 석화는 냉큼 건네받았다. 행여 몸에 열도 높은데 감기라도 걸리면 황천길을 다녀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복 코트가 어찌나 무거운지 몸에 끼워 맞추니 갑옷을 두른 기분이었다. 석화는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래, 무슨 말 하려는지 나도 알 것 같아.”
곽수환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깍지 껴서 올렸다. 자못 심각한 얼굴에 석화는 혹시 곽수환이 자신이 숨긴 사실을 알게 된 건 아닐까 짐작했다.
“……아십니까?”
“응.”
“먼저 말씀해보세요.”
“아니, 석 박사부터 말해.”
곽수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석화가 한동안 말없이 입김만 내뱉었다. 말을 해야 할 것을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정리하고 입을 열려는 때, 기다리던 곽수환도 참지 못하고 말을 시작했다.
“오양석 박사님께서 치매라고 하셨는데 저는.”
“어머니도 반대하시는데 우리 결혼은 이른 것 같지 않아?”
“…….”
거의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석화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석화는 적잖은 짜증을 담았다. 곽수환도 더는 소설의 역할극을 그만두겠다면서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웃는 낯을 싹 지우고 석화를 응시했다.
“내가 분명 말했을 거야. 관심 갖지 말라고. 이득 될 것도 하나 없는데 왜 자꾸 가시밭길을 향해 가.”
“전에 오 박사님과 술친구라고 하셨죠?”
“그 논리대로 따지면 석 박사도 내 친구지. 우리도 같이 마신 적 있잖아?”
술 마셨다고 다 친구는 아니지, 라는 듯 내뱉었다. 납치 사건 이후로 그간 하루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 생각을 해왔다. 곽수환의 말대로 전처럼 연구동에서 연구나 하고 돌이나 만지작거리기에는 너무 많은 강을 건너왔다.
“납치범에게 납치를 당하지 않았다면, 곽 소령님 말씀대로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 겁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누군데 그러느냐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날의 사고는 누가 왔어도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이 잘 안 와요. 오양석 박사님의 마지막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요. 곽수환 소령님.”
말을 하다 말고 찬바람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납치범이 제게 오양석 박사님의 마지막 음성을 들려줬다고 했었죠.”
“총성 때문에 끝까지 못 들었다면서.”
“뇌진탕 때문에 기억에 혼선이 왔다고도 했죠. 이제 제대로 기억이 났습니다.”
석화의 거짓말에도 곽수환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박사님은 7차까지 변이된 바이러스에 의문을 가졌고, 치료제를 만드는 일에는 상부가 소극적이라고도 하셨죠.”
곽수환은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만들었다.
“돈 때문이지.”
“압니다, 그건 저도. 그런데…….”
석화는 여기서 돌을 한번 던져보기로 했다. 파문이 얼마나 일지는 모르겠지만.
“헌병대가 유추하기로는 오양석 박사님의 사망 추정시각은 새벽 5시, 그 총성을 끝으로 박사님의 말이 끊겼으니 녹음 당시에 총격을 당하신 거겠죠.”
“그거야 그렇겠지?”
“인류의 보존, 인류의 새로운 번영,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그 최전방에 선 레인보우 시티, 우리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입니다.”
석화는 외우고 있는 정규방송을 읊었다. 곽수환도 석화가 이유 없이 이 말을 꺼냈다고 보지는 않았다.
“총성이 들리기 전에 나온 방송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이 저격당한 건 정오나 오후 6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석 박사가 들은 오양석의 전언은, 바이러스 변이와 치료제 개발에 대해 레인보우 시티를 의심하는 내용이고, 그 말을 하던 중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말이네.”
“정확합니다.”
“그 영감 치매 맞네.”
석화와 곽수환은 서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에덴동산하고 손을 잡은 반군이지.”
서로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은 한데 뒤엉키지 못하고 테이블의 중간에서 사라졌다.
“석 박사.”
낮게 부르니 석화는 제가 실수를 한 건가 재고해봐야 했다. 곽수환은 군인이니 이런 말을 한 저를 헌병대에 넘길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한 가지 방패를 깔아놓기는 했다. 뇌진탕 이후로 기억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았다고.
“그걸 들려준 에덴동산이 짜깁기를 한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 가능성도 생각해봤지만 희박할 겁니다. 분명 오양석 박사님께서 정규방송이 끝난 뒤에 바로 말씀하셨거든요. ‘저 소리가 들리는가?’라고요.”
석화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조금 숨이 차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삼시세끼 쉘터 내에서 잘 챙겨 먹은 덕에 제주도에 혼자 있을 때보다 건강 상태는 좀 더 나아진 편이었다.
“곽수환 소령님께서 오양석 박사를 죽인 용의자를 쫓고 계신다면서요. 애초에 사망 추정시각이 다른데요.”
“말대로 오후 6시에 저격을 당했다고 치자, 피를 흘리다가 새벽 5시에 죽었을 수도 있지.”
“불가능한 걸 아시지 않습니까?”
정오나 오후 6시에 저격을 당해서 기둥 앞에 쓰러져 있었다면, 누군가가 오양석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데이트까지 나와서 이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날 잡아가주쇼, 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소령님도 잘 아시니까 절 헌병대에서 구해준 거 아닙니까? 저에게 반군 성향은 없습니다. 오양석 박사님이 왜 돌아가셨나,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죠.”
석화의 입에서 입김이 좀 더 빠르고 가느다랗게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저렇게 숨을 몰아쉬다가는 깨진 와인에 얼굴을 박을 것만 같았다.
“일단 차로 돌아가자.”
그러다가 또 쓰러지겠네. 곽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화를 부축했다. 그 정도는 아니라는 듯 석화는 손을 내저었다. 스스로 일어나서 아직 시동이 걸려 있는 그의 지프로 걸었다. 제복 코트를 벗어 그에게 건네고 조수석에 풀쩍 올라탔다. 그사이 손이 얼어버렸는지 히터의 온기가 부딪쳐 와도 얼얼한 감각만 남아버렸다.
곧바로 지프를 타고 나온 터라 먹을거리나 마실 만한 생수가 없었다.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온 곽수환이 그걸 아는지 뒷자리로 손을 뻗어 뭔가를 가져왔다. 하얀 달걀이었다.
“물은 보조 서랍 안에 있어.”
건네받은 것을 흔들어 봤는데 날달걀인 줄 알았더니 익힌 달걀이었다.
톡톡, 석화는 조수석 창문에 달걀을 두드린 뒤 껍데기를 벗겨냈다. 소금도 없이 밍밍한 것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석화를 보며 곽수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약해 빠져서 먹는 건 또 오죽 잘 챙겨 먹는다. 어쩌면 그마저도 살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겠지. 생각해보면 석화의 연비는 언제나 최악이었다.
“갈색 닭은 갈색 알을 낳고, 흰 닭은 흰 알을 낳아요.”
실컷 달걀을 먹고 나서 하는 소리가 저거였다.
“그럼 지금 석 박사가 먹은 건 흰 닭이 낳은 거겠네.”
“그렇죠. 그러니까 박사님이 돌아가시게 된 이유도 투명해야 해요.”
석화는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기 위해 퍽퍽한 노른자를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생수로 막힌 목을 뚫었다. 곽수환이 손을 내밀었기에 생수통을 그에게 건넸다.
“서펀트가……. 이틀 뒤 오양석 박사님의 자택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콰직, 생수통을 들고 있던 그의 손에서 파열음이 났다.
“그것도 뇌진탕 때문에 잊고 계시던 건가요, 박사님?”
“예.”
“기절하는 척도 잘하고 거짓말도 잘하고,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네.”
“태어나서 기절한 척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거짓말도 몇 번 안 해 봤는데요. 그리고 혼자서 몰래 다녀올 수 있는데도 소령님께 말씀을 드린 건 제가 반군이 아니기 때문이죠.”
“상부에는 어떻게 보고할까 싶어. 석 박사가 말을 번복했다고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데.”
“승전고를 울리세요.”
“뭐?”
“곽수환 소령님이 서펀트를 잡아오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면 자신 없어요? 라는 시선으로 되묻고 있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입술이 닿았던 생수통 입구를 제 입술로 먹어치웠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축축한 입술을 하고 웃었다.
“이야, 엘리트 출신이라 그런지 박사님 무섭네. 만약에 내가 서펀트를 잡아오면 중령으로 진급하는 건가?”
“그거야 모르죠.”
“어쩌면 다이렉트로 대령이 될 수도 있겠네.”
설마 그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를 해줄까 싶었다.
“서펀트라면, 에덴동산 장로 중 한 명이거든.”
대체로 그렇게 알려져 있지. 곽수환이 다시금 생수를 벌컥 들이켰다.
***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오더래. 지렁이 세 마리가 기어가더래. 아이고, 무서워라, 해골바가지.”
양상훈이 노래를 부르며 순차적으로 해골 그림을 완성시키고는 앞의 녀석을 봤다.
“애가 아니라 이런 거는 별로 안 좋아하나? 내 동생은 되게 좋아했거든.”
혀에 깊숙한 상처가 남았는데도 소년이 하루 동안 해치운 음식은 소시지 2kg, 소보로 네 개, 식당에서 밥과 반찬을 가져온 횟수는 총 일곱 번이었다. 아담 같던 안광도 처음보다는 얌전해졌고, 배부르게 먹여놓으니 경계심도 적당히 풀어져 있었다.
“너 몇 살이야?”
“몰라.”
“누가 곽수환이 잡아온 놈 아니랄까 봐 반말이야. 너 헌병대에 끌려가면 콱 죽는 수가 있어. 그냥 여기서 말 잘 들으면 먹을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어.”
“변절자.”
“내가?”
양상훈이 검지로 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날 배부르게 살찌운 다음에 인체실험을 하려고 하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너희들이 인체실험하려고 잡아간 사람만 해도 내가 몇이나 알아!”
“그럴 수도 있겠지.”
펜을 쥐고 해골을 하나 더 그린 양상훈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뭐?”
“인체실험 같은 건 모르겠고, 이거 하나는 알아.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너 같은 아이에게 위험한 레드 구역에 들어가서 먹을 걸 가져오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
“…….”
소년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야! 장로님이 날 얼마나 아끼는데!”
“그래그래, 그럼 그냥 헌병대에 넘긴다.”
소대실 밖으로 나가려는 시늉을 하자, 소년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키웠다.
“허, 헌병대에 넘어가면!”
“넘어가면?”
“진짜로 내 몸을 가지고 실험을 해? 듣기로는……. 바이러스 같은 걸 주입해서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했어. 그래서 그럴 바에는,”
“혀를 깨물려고 했다고.”
소년은 부정하지 않았다. 양상훈은 아직도 손이 뒤로 포박된 소년에게로 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년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이름 모를 소년, 믿든 안 믿든 자유지만 나도 레인보우 시티 밖에서 왔어. 지금의 소년처럼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운 좋게 육군에 자원할 수 있었고. 보아하니 열여섯이나 열일곱 정도 된 것 같은데 너 정도 실력자면 레인보우 시티에서도 거둬줄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은,”
“죄 없는 사람들 잡아다가 죽이는 거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그랬으면 너도 이미 죽지 않았을까?”
“그건.”
소년은 논리에 부딪히고 있었다.
“너한테서 알아낼 것도 없고, 알아내고 싶은 것도 없어. 그리고 넌 네가 에덴동산 신도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간 지켜봐 온 결과 걔들은 너 같은 애들을 내세운 적도 없고, 이렇게 허술하게 굴지도 않아. 널 예뻐한다는 장로가 대체 누구인데.”
“장로님은 나보고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선택받은 아이라고 했어. 꼭 그렇게 될 거야.”
“소년, 에덴동산 같은 건 없어. 우리는 죄 없는 사람 잡아다가 죽이는 게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게끔 아담을 죽일 뿐이야. 먹을 거나 좀 더 가져다줄까?”
양상훈은 대답이 없는 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음식이나 배부르게 실컷 먹으면서 생각해 봐. 소년, 나는 소년같이 기개가 좋은 친구를 좋아하지. 곽 소령도 그래서 소년을 내게 맡겼을 거야.”
양상훈도 저 소년이 과거의 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물론 소년을 두고 나가기 전에 수갑과 벽에 박아놓은 쇠사슬과 고정 고리를 점검했다.
양상훈이 나가고 소대실에 혼자 남겨진 소년은 불안한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양상훈은 소대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로 소년을 지켜봤다. 간간이 흐느끼는 듯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학습센터에 들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언젠가 군인으로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랐다. 오래전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여겨지는 페니실린은 우연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미생물학자인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배양하고 한동안 방치했다가 확인하는데, 곰팡이 하나가 포도상구균을 전부 먹어치운 것을 알게 된다. 그게 바로 푸른곰팡이였고, 거기서 추출한 것이 페니실린이었다.
페니실린은 세균의 세포벽을 합성하는 효소를 없애는 역할을 했으며, 다행히 동물세포에는 세포벽이 없기에 페니실린을 투여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한마디로 페니실린은 미생물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는 꿈의 치료제라고 불렸다.
물론 페니실린도 대량 공급되기까지 엄청난 자본과 시간이 걸렸고, 이후로는 페니실린에 내성이 있는 베타-락타메이스라는 박테리아도 나타났다. 그에 연구자들은 페니실린의 화학적 구조를 변경했지만, 페니실린이 전혀 듣지 않는 돌연변이 황색포도구균까지 출현했다. 현재 아담 바이러스도 비슷한 양상으로 변이를 거듭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석화는 오양석 박사가 말한 그 치료제라는 것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분명 저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는데, 실제로 배양을 하거나 직접 실험을 한 적은 드물었다. 그리고 의견을 나누는 일마저도 전부 수포로 돌아갔었다.
석화는 우주인처럼 우주복과 비슷한 생김새의 방독 옷을 입고 있었다. 안전을 기하기 위함이지만, 움직이기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배양기 안으로 손을 넣어 아담 바이러스에서 추출한 단백질에 포유류·조류의 병원균인 마이코플라스마, 그리고 조류인플루엔자(avian flu)를 배양해봤다. 조류들이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에 여러 가설을 세워 실험했으나 이 또한 여태 성공한 적은 없었다.
석화는 뒤뚱뒤뚱한 걸음으로 방역실에서 옷을 벗고는 온몸을 다시 소독했다.
[개방합니다.]
안쪽에서 두 개의 문을 거쳐 나오니, 로비 옆 일반 연구실에 김 박사가 보였다.
“뭐 하세요?”
김 박사는 1급 실험실 안쪽에 석화가 있는지 몰랐던 듯 소스라치게 몸을 울렸다.
“어휴, 놀래라. 사람이 왜 이렇게 인기척이 없어요.”
저는 그냥 걸어 나온 것뿐인데 과도하게 놀라는 김 박사 때문에 마치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별 말을 않은 석화는 김 박사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하러 가려고요.”
먼저 물어온 사람이 김 박사였지만, 석화는 오랜만에 사회성을 발휘해봤다.
“김 박사님도 안 하셨으면 같이 하실래요?”
“아직은 배가 덜 고파서요, 하하. 전 괜찮아요.”
“예.”
석화는 김 박사의 거절에 괜한 짓을 했다며 연구동을 걸어 나갔다.
앞에서 곽수환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복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석화는 그럼에도 식당이 아닌 곽수환의 숙소로 향했다. 그의 방문 앞에서 벨을 눌러봤지만 답이 없었다. 당연히 없겠지 싶어 뒤를 돌았을 때였다. 곽수환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쩐 일이야?”
그는 상체를 탈의한 채로 바지만 걸치고 있었다. 갓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도 적당히 젖어 있었다. 툭, 단단한 근육의 굴곡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리니 석화는 순간 제 몸을 쓱 내려다봤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건 좋은 버릇이 아니다. 석화는 서둘러 생각을 지워나갔다.
“석 박사?”
“방에……. 계셨네요.”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냥 눌러봤어요.”
엉뚱한 대답에 곽수환이 미간을 구겼다.
“나 오늘 비번이라. 그보다 식사했어?”
“지금 하려고요.”
“잠깐만 기다려.”
안으로 들어간 곽수환이 다시 나온 건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서였다. 군용으로 지급된 티셔츠에 바지는 아까와 같은 차림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지프를 타고 돌아오던 날 이후로 쉘터 내에서 에덴동산이나 오양석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바로 만남 당일인 오늘까지도 말이다.
“곽수환 소령님.”
“예, 박사님.”
나란히 걸으면서 그를 부르자 곽수환이 장난스레 고개를 조아렸다.
“식사 후에 정자를 좀 받을까 하는데요. 고환에서 채취할 때 좀 많이 아플 텐데 마취약이,”
“대체 내 정자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하려고.”
곽수환이 몸을 석화에게 툭 기댔다. 석화는 무겁다면서 옆으로 이동했다.
“S클래스시잖습니까.”
“석 박사도 그렇지 않나? 그럼 내 정자랑 석 박사 정자 섞으면 SS 클래스가 되는 건가?”
곽수환이 그럴싸하다면서 시원하게 웃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죠.”
“고환에서 채취하면 나 아파서 오늘 데이트 못 나갈 것 같은데.”
하아, 석화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내일 하죠.”
엘리베이터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석화는 앞만 응시했다.
[개방합니다.]
기계음이 들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옆으로 스르륵 열렸다.
“석 박사 하얗고 매끈한 손으로 남근석 말고 내 좆이나 흔들어주면 금방 쌀 텐데.”
누군가가 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그게 장 중령과 그의 소대 소속 군인 몇인 줄은 몰랐다. 석화는 꾸벅 인사를 하고 곽수환의 말을 무시한 채 안으로 올라탔다.
“곽 소령……. 곽 소령아.”
장 중령이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농담인데요, 뭐.”
곽수환이 석화의 옆에 붙어 섰다.
“그거 성희롱이야, 새끼야.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곽 소령이가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저에게 말씀을 꼭 해주십시오.”
“진심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안 그래도 저놈 때문에 박사님 소문도 이상하게 퍼지는 바람에 면목이 없습니다.”
“소문이요?”
석화가 관심을 보였지만 장 중령은 차마 제 입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저 흠흠, 목만 울리면서 목적지 층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았기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고, 장 중령은 잘됐다 싶어 제가 먼저 문 앞으로 바짝 섰다.
“그럼 박사님, 저희는 이만 내리겠습니다.”
장 중령과 군인들이 내린 뒤 둘만 남은 엘리베이터에서 석화가 먼저 운을 떼었다.
“장 중령님이 말씀한 소문이 뭔지 아세요?”
“나 아까는 진심이었는데.”
자꾸 진심이 아닌 취급을 한다면서 억울하다는 투였다.
“내 정자 가져가고 싶으면 고환이 아니라 석 박사 손이나 가슴, 엉덩이로 해줘.”
“그러면 주실 겁니까?”
펄쩍 뛰지는 않더라도 경멸하듯 쳐다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하게 나왔다.
“물론이지. 밖으로 분출된 정액은 다 박사님 거 하시죠.”
“그럼 내일이요. 기대되네요.”
기대가 된다고?
열린 문으로 나가면서 말하는 바람에 곽수환은 다시 한번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연구가 중요하다고 해도 오로지 그것 때문에 남의 성기를 만질 수가 있다니……. 누군가가 저에게 만져달라고 하면 좆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남을 텐데 말이다. 하긴 저의 좆에 턱을 맞은 날도 상태를 살피겠다면서 진지하게 굴었던 사람이 석화였다.
곽수환이 피식거리면서 웃자 석화는 왜 저러나 싶어 그저 그를 두고 식당으로 걷기만 했다.
오늘은 식판이 아닌 동그란 그릇에 음식을 배급 받았는데, 특식이 나오는 날인지 닭백숙이었다. 푹 고아낸 티가 나는 게 살결이 부들부들해 보였다.
석화도 웬일로 군침이 돌아 배급처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았다. 곽수환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맞은편이었고, 석화는 젓가락으로 살점을 살살 헤쳤다. 그랬더니 안쪽에 찹쌀밥이 보였다. 푹, 수저로 밥을 떠서는 후후 불었다.
여태 곽수환이 지켜봐온 바로 석 박사는 은근히 식탐이 있었다. 집착 특성이 돌인 것을 몰랐다면 이채윤처럼 식탐이 아닐까 짐작했을 거다.
젓가락으로 닭다리의 살점을 뜯어내 찹쌀밥과 함께 올려서는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석화는 자꾸만 얼굴에 부딪히는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왜 보세요.”
“백숙 좋아해?”
“예.”
“많이 먹어. 그래야 힘내서 나랑 놀러 가지.”
곽수환도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석화는 중앙에 놓인 양념통 중 소금을 꺼내 백숙 안에 착착 뿌렸다. 혹시나 저 뜨거운 그릇에 고개를 처박지는 않을까 싶어 곽수환은 먹으면서도 내내 석화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쉘터에 올라왔을 때보다는 확실히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을씨년스럽기만 하던 제주의 초가를 생각하면, 거기서 제대로 뭔가를 해 먹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곽수환은 잠시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무전기를 꺼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무전을 울려댄 탓이었다.
“곽수환 소령입니다.”
[너 어디냐?]
석화도 무전을 통해 나온 목소리가 양상훈이라는 것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식당.”
[몇 식당?]
“1식당.”
[소년, 가자. 형이 식당 구경 시켜줄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곽수환이 무전으로 다시 말을 꺼냈지만, 양상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곽수환이 인상을 쓰고 있는 동안 석화는 부드러운 백숙을 평소보다 빠르게 입에 넣었다.
설마 이 새끼가 잡아온 녀석을 식당으로 데려오겠다는 소리인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설마 그럴까 싶었다. 그리고 곽수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봤냐? 소년? 이런 백숙 먹어본 적 있어?”
양상훈은 그릇 하나에 닭을 두 마리나 쏟아 부은 백숙을 들고 곽수환과 석화에게로 왔다. 소년은 놀랍다는 눈으로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이 많았으니 소년에게 쉘터는 신세계이자 마치 에덴동산이었다.
“여기 앉아, 소년.”
“양상훈, 미쳤냐?”
“왜?”
“잘 설득해서 학습센터로 보내라고 했지, 누가 쉘터 구경시켜주라고 했냐고.”
“뭐가 걱정돼서 그래. 애초에 몸수색도 다 끝내고 데리고 온 놈인데, 요 콩알만 한 게 뭐가 무섭다고? 그리고 식당에서 제대로 된 밥 먹어보고 싶다는데 좀 어떠냐.”
소년은 백숙에 시선을 박고 있으면서도 곽수환을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정말 저 주먹에 맞았을 때는 턱이 얼굴에서 분리돼서 나가는 줄 알았다. 백숙에 얼굴을 박다시피 하고 밥을 먹던 석화도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많이 먹어요.”
옆의 소년에게 그 말만 하더니 다시 젓가락을 놀렸다. 소년은 탐탁지 않게 저를 바라보는 곽수환이 거슬렸지만 어설픈 동작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이게 마지막 만찬이라면 태어나 처음 먹어보는 백숙이니 그럴싸했다. 그런데 옆의 남자의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연구원 ID카드가 눈에 거슬렸다. 흘끔 보니 박사라는 글귀가 보였다.
“사람들 잡아다가 실험하지?”
석화는 소년의 적개심 어린 목소리에 수저질을 멈췄다.
“당신은 간악한 자야. 장로님이 그러는데 악마는 사람을 홀려야 하니까 아름답게 생긴 거라고 했어.”
곽수환은 뭐가 웃긴지 연방 목을 울려댔다.
“불쌍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실험해서 백신을 개발한 거겠지. 나는 다 알아.”
석화는 왜 소년이 저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불가능했다. 뭐라고 대꾸해줄 말이 없어서 다시 백숙만 먹을 뿐이었다.
“말을 왜 못 해! 찔려서 그렇지?”
“소년, 백숙이나 처먹어.”
양상훈이 소년의 고개를 백숙 그릇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소년은 젓가락을 쓸 줄 모르는지 부드럽게 해체되는 닭을 손으로 잡아 입에 넣었다. 석화는 자신의 앞에 있던 소금을 소년에게 쓱 밀었다.
“이게 뭐야.”
“소금이요.”
“이상한 약 같은 거 아니야?”
“그래. 처먹고 죽어라, 새끼야.”
곽수환이 소년의 그릇에 소금을 툭툭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제 그릇에도 툭툭 뿌리고 수저로 한 바퀴 젓고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먹이고 바로 소대실로 데려다 놔. 조만간 학습센터 선생 불러줄 테니까.”
“변절자들, 나는 절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 되지 않아.”
“네가 처먹고 있는 게 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나온 건데, 그럼 그만 처먹어.”
소년이 입을 꾹 다물고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아이고, 세상에나. 오늘 메뉴가 백숙인 줄 알았으면 진작 내려왔죠.”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석화가 뒤를 돌아보니 김 박사가 백숙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있는 게 보였다.
“저도 합석해도 됩니까?”
“예.”
석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석화의 옆자리는 소년이 차지하고 있어 김 박사는 그 옆에 앉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밖에서 잡아 온 녀석인데, A급은 되는 녀석이라 잘 키워볼까 합니다.”
감시역인 양상훈은 소년의 뒤에 서서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아, 그래요?”
김 박사가 소년을 보면서 진하게 웃었는데, 소년은 여전히 두 주먹을 쥐고 그릇만 노려보고 있었다. 김 박사는 백숙이 좀 더 뜨거웠으면 좋았을 거라는 불만을 토해내면서 깨작대듯 닭을 먹었다.
위가 그리 크지 않은 석화는 반이나 남은 백숙을 더 먹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바라봤다. 소년을 힐끔 보니 여전히 고개만 숙인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괜찮으니 더 먹지 그래요, 라는 말을 어떻게든 좋게 하려는 순간이었다.
위이이이이잉-
삐이이- 삐이- 삐-
긴급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석화는 전과 달리 놀라지는 않았다.
[Emergency, Emergency, 그린 구역 여의도 쉘터에 긴급 실제 상황을 알립니다.]
혹시나 또 훈련 상황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군인들은 아니었다. 식사를 하던 이들이 전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석화의 착각을 깨듯 마더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실제 상황입니다. 그린 구역 여의도 쉘터에 긴급 실제 상황을 알립니다. Emergency, Emergency.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주세요. 5층 A구역 복도와 7층 비상구에 아담이 출현.]
“아, 아담?!”
김 박사가 입에서 살점을 튀기면서 과도하게 흥분했다.
“박사님! 얼른 이동합시다!”
그는 말만 그렇게 했지 석화를 신경도 쓰지 않고 연구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르게 도망가는지 세상만 멀쩡했다면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을 만했다. 석화도 그가 달려간 곳으로 이동하려고 했지만, 곽수환이 먼저 석화의 옆으로 다가왔다.
“위험하니까 석 박사는 혼자 갈 생각 말고, 나랑 같이 이동해.”
사태를 다시 파악한 마더의 알림이 빠르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0분 이내로 25층까지 전염 가능성 35퍼센트. 군인들은 모두 전투태세에 들어갑니다. 그 외 쉘터 직원과 연구원들은 최종 방어선 48층까지 긴급 이동을 해주세요. 다시 알립니다.]
“양 소령, 넌 그 녀석 데리고 식당 폐쇄 구역으로 가.”
소년도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두 주먹은 여전히 굳게 쥔 채였다. 식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군인들은 저들의 총기와 나이프를 점검하고는 마더가 말한 구역으로 내달렸다. 곽수환은 석화를 48층으로 향할 엘리베이터로 데려가려고 했다. 식당을 나가 복도 끝 방향에 있는 엘리베이터까지는 석화를 업고 가는 게 훨씬 빠를 터였다. 석화를 들쳐 메려는 순간이었다.
“크억!”
식당의 입구를 사수하던 상병 한 명이 갑자기 피를 뿜어냈다. 아래부터 올라오기 시작한 아담이 한두 명이 아닌지, 아니면 감염된 놈들이 삽시간에 늘어난 건지 비명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식당 직원들이 있을 폐쇄 구역으로 석화를 데려가야 할 듯싶었다.
“양 소령!”
석화도 같이 데려가라고 하려고 뒤를 돌아 놈을 불렀는데, 양상훈이 소년의 목을 움켜쥔 채 벽에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새끼야! 너 지금 뭐 하는!”
“씨발! 야! 이 새끼 폐쇄 구역으로 못 데려가! 폐쇄 구역 문 닫아! 이거 지금 변이 직전이야!”
시끄러운 목소리가 한데 뒤엉키고 석화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양상훈의 말대로 소년은 아담으로 변이하기 직전의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마치 온몸의 관절이 비틀리듯 붙들린 목 밑의 몸이 기괴하게 경련했다. 완전히 변이하기 전에 죽여야 하건만 양상훈이 쉽게 숨을 따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곽수환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식당 문은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친 상태지만, 새롭게 감염된 이들에 의해 조만간 방어막이 뚫릴 기세였다. 심지어 식당 폐쇄 구역은 양상훈의 명령에 이미 닫힌 뒤였다. 감염 증상을 보이는 소년이 근처에 있으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소령님.”
양옆으로 사면초가인 석화가 저는 신경 쓰지 말라면서 그를 밀어냈다. 곽수환은 석화를 식당의 가장 끝 모서리로 급히 데려다 놓고는 양상훈에게 달려갔다.
“병신 새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새끼 안 죽여?!”
“씨발……. 죽여야 하는데. 아, 씨발!”
양상훈은 눈에 핏줄이 터진 소년을 제대로 쳐다도 못 보고 제압만 한 채였다. 곽수환이 양상훈의 제복 안쪽에서 칼을 꺼내 소년의 정수리에 그대로 꽂아 넣었다. 쑥 빼내고 한 번 더 내리꽂자 발광하던 몸이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양상훈 소령, 돌았어?”
곽수환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제 동료를 쳐다봤다.
“이상하잖아! 몸수색을 전부 마쳤는데, 어떻게 변이를 해! 아담은 아직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이 자식이 갑자기, 갑자기…….”
양상훈도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지 혼란스러움에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변명하지 말고 식당 안 뚫리게 가서 사수나 해.”
설상가상으로 이채윤은 현장으로 파견을 나간 터라 쉘터 내에 있지도 않았다.
“아까 저 새끼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씨발, 저 새끼 저거 손에.”
석화도 죽은 소년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양상훈이 손짓하는 방향을 내려다보니 믿을 수 없게도 주사기가 보였다. 주사기에 들어있는 혈액은 어쩌면…….
“곽수환 소령님, 이거 수거해갈 수 있을까요?”
“헌병대 오면 어차피 하게 될 거야. 지금은 만지지 마.”
곽수환은 주사기에 관심을 보이는 석화의 어깨를 꽉 붙들고는 생각을 정리했다. 폐쇄 공간은 앞으로 한 시간은 열리지 않을 테고, 지금 식당을 뚫고 석화를 비상용 엘리베이터에 데려다놓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려가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위로 향하는 비상구는 전부 폐쇄됐을 거야. 5층에서 아담 출현이 시작됐다니까 여기부터 1층까지는 열려 있을 테고.”
후, 흐트러진 머리 위로 바람을 한 번 불어 올린 곽수환이 말을 이었다.
“지프로 가자.”
“어떻게요?”
“비상구로 가야지.”
곽수환이 폐쇄 공간 옆의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을 가리켰다. 곽수환은 무전기를 들어 상부와 소대들에게 알림을 보냈다.
“코드 넘버 3121 곽수환 소령이다. 현재 제1식당 입구에서 아담과 전투 중, 상층에 있는 군인들은 문이 폐쇄되기 전에 밑으로 내려오고, 아담이 보이는 즉시 전부 사살하라. 변이 중인 자도 바로 사살해. 나머지는 여의도 쉘터 현장 지휘권을 가진 열쇠 소대에게 맡긴다.”
실제 현장에 있는 이가 곽수환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대략적인 지휘를 내렸다.
[카피댓]
열쇠 소대 소령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중령 이상은 전부 이미 상층으로 이동했을 테고, 소령은 어떤 부대든 현장에 투입돼야 했다.
“7시 반…….”
석화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13구역에서 에덴동산을 만나기로 한 건 9시였는데, 안전하다고 자부하는 여의도 쉘터에서 아담이 나타났다니 우연치고 너무 기막혔다.
“석 박사, 아무래도 업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같이 달려 방해가 되느니 차라리 짐이 되는 쪽을 택했다. 석화가 곽수환의 등에 훌쩍 타서 매달렸다. 두 팔로 목을 꼭 붙들고는 아담과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돌아봤다. 피가 튀고 총탄 소리가 난무하는 장면에 시야가 흐려질 것만 같았다. 곽수환은 발로 비상구 문을 걷어차고 밑으로 향했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기보다 아예 뛰어내리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비상구를 타고 올라온 아담들은 없는지 계단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었고, 불행히 지프가 있을 지하 주차장에는 군복을 입은 아담이 보였다.
곽수환은 제 지프로 빠르게 내달렸다. 조수석을 열어 석화를 안에 태우고 나서야 보조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총기 세 자루가 곱게 놓여 있었다. 그중 자동권총을 석화에게 들려주었다. 나머지 두 개 중 하나는 제 뒷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손에 쥐었다.
발소리를 들은 아담이 피를 흩뿌리면서 달려들자 장전을 마친 곽수환이 곧장 이마를 저격했다. 그 총탄 소리에 그어, 그어억, 하며 저쪽에서 달려오는 아담이 보였다.
“소령님, 소령님도 빨리 타세요.”
“어차피 저 새끼들 정리하기는 해야 돼.”
곽수환은 조수석 잠금쇠를 누르고 문을 닫았다. 그가 천장을 향해 탕, 총을 쏘고는 지프 반대쪽으로 아담을 유도했다.
전방 넷, 좌측 둘, 우측 둘. 지하 주차장에 있는 변이된 군인 아담의 숫자였다. 본래 전투에서는 후퇴할 퇴로가 필요해 벽을 등지는 것이 불리했지만, 아담을 상대할 때는 아니었다.
곽수환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놈부터 총을 발사해 이마에 구멍을 뚫고, 한 발에 한 놈씩 정확히 맞혀 나갔다. 반자동권총에는 실탄이 총 8발 들어가 있기에 탄환 수는 충분했다. 여덟 발의 저격을 끝내고 터엉, 철문에 권총 손잡이 밑 부분을 부딪쳤다. 굉음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주차장에 있던 놈들은 총 여덟로 끝인 듯했다.
다시 지프로 향했는데, 두 놈이 지프의 창문을 피로 물든 손으로 미친 듯이 쳐대고 있었다.
젠장, 석 박사! 곽수환이 달려가면서 소리 내 불렀는데도 조수석에 석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차 밖으로 나간 건가? 곽수환은 뒷주머니의 총을 꺼내 한 놈의 뒤통수를 저격했다. 뒤늦게 저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나머지 한 놈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칼을 날렸다. 휘익, 날아간 칼이 이마에 꽂히고 아담이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손잡이를 잡아 빼고 내려다보니 얼굴이 익숙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애도 같은 건 할 시간도 없었고, 곽수환은 아담으로 변이한 군인에게 연민 같은 감정도 품지도 않았다. 지금 모든 신경은 석화에게 쏠려 있었다.
“석 박사!”
달칵, 달칵, 조수석문을 열려고 했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주변을 둘러보려는데 안에서 석화의 얼굴이 쓱 올라왔다. 곽수환은 저도 모르게 온 몸에 힘이 탁 빠지는 기분이었다.
톡하고 잠긴 문을 푼 석화가 두 손에 총을 꽉 쥐고 있었다. 이제 보니 아담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위해 조수석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거였다. 곽수환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뱉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괜찮아요?”
“보다시피.”
그는 뒷좌석에 놓아두었던 탄환을 빈 탄창에 재장전한 뒤 등받이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괜찮으세요?”
석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재차 물었다.
“밖으로 나간 줄 알았어.”
“나가면 죽는데요.”
“그러게.”
곽수환도 그제야 제가 왜 그렇게 삽시간에 피가 식어버린 기분을 맛본 건지 당혹스러워졌다. 수석 연구원이라서? 석화의 말대로 수석 연구원을 대신할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석화가 있어야 에덴동산과 접선하기 쉬워지니까, 라고 생각해도 제 심장이 덜컹거렸던 타당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나 생각보다 석 박사한테 정 많이 들었나 봐.”
곽수환이 시동을 걸었다. 석화는 허탈하게 웃는 곽수환을 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스스로 정자 빼서 제출해주세요.”
“그건 기각.”
그가 액셀을 밟았다.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지프에 내장된 무전기를 들었다.
[코드 넘버 3121 곽수환 소령이다. 지하 주차장 아담 전부 정리했으니 내 차가 빠져나가면 마더에게 주차장 폐쇄하라고 전달하라.]
[라저.]
방송 담당 군부서에서 무전에 답을 보내왔다.
[제1식당도 정리가 완료되었습니다. 5층부터 방역을 실시하며 헌병대가 투입됩니다. 곽수환 소령님께서는 어디로 이동하십니까?]
“지금 수석 연구원 석화 박사를 데리고 나왔다. 48층에 합류할 수가 없었기에 쉘터가 안정을 찾으면 복귀하겠다. 그리고 아담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조사결과 나오면 바로 보고하도록.”
곽수환은 무전기를 원위치로 되돌리고 석화의 안색을 살폈다. 창백하다거나 곧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으나 평소보다 더 어두운 기색이 석화의 표면에 머무른 듯했다.
“주사기가 어째서……. 그 애 손에 들려 있었죠?”
“그건 양상훈을 취조해봐야 할 문제고.”
물론 양상훈의 말이 맞다. 녀석을 데려올 때 수색을 안 한 곳이 없었고, 그랬기에 쉘터에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주사기가 어디서 난 것인가. 갑작스럽게 아담으로 변이를 했다면 그 주사기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백숙에 아담 바이러스가 들어있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소년이 식당에 나타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떠올리던 곽수환이 중얼거렸다.
“김 박사…….”
“예?”
“김 박사는 어떤 사람이야.”
“곽수환 소령님을 싫어하는 사람이요.”
“그걸 누가 몰라. 김 박사도 오양석 박사랑 친했지?”
“김 박사님은 웬만해서는 다 친하실 겁니다.”
상부에 아첨도 잘하고.
그런데 석화도 한 가지 의아함이 들었다. 소년과 마주친 인물인 데다 아담 바이러스가 담긴 주사기까지 줄 수 있는 사람은 김 박사뿐이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그럴 이유는 전혀 없어보였다. 어쩌면 전혀 다른 놈이 끼어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도무지 이해는 안 되는데……. 그 아이는 스스로 아담 바이러스를 맞은 거겠죠?”
소년 자신이 철저히 에덴동산의 신도라고 생각했다면, 쉘터에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그랬을지도 모른다. 다만 소년뿐만 아니라 쉘터에 아담이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파헤쳐야 했다. 그런데도 곽수환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양상훈이 놓지 않았다면?”
“양 소령님은……. 어떤 분이세요?”
“만약에 그 새끼가 그딴 짓을 벌였다면, 발가벗겨서 60층 꼭대기에서 던져버릴 거야.”
곽수환은 지프에 내장된 시계를 확인하고는 좀 더 속도를 올렸다.
목적지는 13레드 구역이었지만 그는 중간에 바이올렛 구역에 들렀다. 또 다른 지프로 갈아타자는 말에 석화는 의아했지만, 상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짐작만할 뿐이었다.
바이올렛 구역에서 13레드로 향하는 동안 석화는 한참이나 창밖을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의도 쉘터에 반군의 첩자가 있는 게 맞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담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전방위적인 압박 조사가 이뤄질 텐데, 우리가 이렇게 몰래 나와도 되는 건가.
“서펀트가 올까요?”
“오길 바라야지. 그리고 오늘 쉘터를 저 꼴로 만들어놓은 새끼들도 같은 에덴동산이기를 바라야 하고. 그래야 덜 귀찮아질 테니까.”
13레드 구역이 불과 2km 남았을 때였다.
“석 박사, 내가 알려주는 길로 들어가. 내가 뒤에서 엄호하면서 따라갈 테니까 걱정 말고, 우린 오늘 13레드 구역에 몰래 들어가는 거야.”
석화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서펀트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오양석 박사님의 전언을 어떻게 손에 넣었으며, 박사님이 돌아가신 시각을 어떻게 정확히 알고 있는지 말이다.
곽수환은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여의도 쉘터가 돌아가는 상황을 방송으로 확인할 요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디오에서는 한창 여의도 쉘터의 아담 출현에 대해 진행자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여의도 쉘터에 아담이 나타났으나 쉘터 직원들과 훌륭한 군인들이 힘을 모아 아담을 물리쳤습니다. 현재는 방역 중이며 사상자는 스물다섯 명으로 추정됩니다. 아, 잠시. 다른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다른 속보라니? 곽수환은 13레드 구역 경비 초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라디오에 집중했다. 석화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여의도 쉘터에……. 여의도 쉘터가 38층까지 괴멸됐다는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현재 여의도 쉘터는 불에 타고 있으며, 소방국이 진화에 나선 것으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아……. 자세한 소식은 좀 더 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석화와 곽수환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순간 순식간에 둘의 얼굴로 붉은 음영이 번들거렸다.
퍼엉! 쾅!
그럴 리 없겠지만 여기까지 불의 열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방금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 곳은 13레드 구역의 경비초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폭발음이 들린 곳으로 차를 몰고 가니 새빨간 불길에 사로잡힌 초소가 보였다. 군인들이 어떻게든 불을 끄려고 시도했지만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고, 13구역을 전부 먹어치울 듯이 번져나갔다. 시간은 아직 9시 전이었다. 분명 서펀트는 9시까지 오양석 박사의 자택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이래서는 13구역에 진입할 수도 없었다.
“날짜와 시간 정확해?”
곽수환이 뭘 이야기하는지도 짐작했다.
“정확합니다.”
“돌겠군.”
곽수환은 거칠게 핸들을 돌려 다시 여의도 쉘터로 향하기 시작했다.
“소령님!”
“그럼 저렇게 불길이 치솟는데 저기를 뚫고 가자고?”
물론 석화도 그 뜻으로 그를 부른 건 아니었다.
“석 박사, 진짜 서펀트라는 놈하고 그 이야기만 한 거 맞아?”
곽수환의 질문이 이상했다.
“그럼 또 뭐가 있습니까?”
“우리 완벽하게 의심 받게 생겼거든? 속보가 맞다면 쉘터에 누군가가 폭탄을 설치한 거고, 우린 밖에 나와 있지. 만일 내가 지프를 갈아타지 않았다면 방금 13레드 구역에서 터진 저 폭탄도 어쩌면 우리가 뒤집어썼을 수도 있어.”
석화도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완전히 인지했다. 자칫 누명을 쓰게 생겼다. 쉘터로 소년을 데려온 건 곽수환이었고, 불패 소대인 양상훈이 데리고 있던 소년이 아담으로 변이했다. 그리고 자리를 비운 사이 여의도 쉘터가 불에 탔고, 심지어 13레드 구역 초소도 폭발했다.
설마, 처음부터 서펀트는 저와 만날 생각이 없었던 건가? 거미줄을 촘촘하게 쳐두고 누명을 씌우기 위해서? 그런데 그건 서펀트에게도 확신이 있어야 했다. 자신이 그를 만나러 갈 것이라는 추측이 아닌 확신 말이다.
곽수환은 좀 전과 같은 바이올렛 구역에서 지프를 갈아탔다. 역시나 그의 무전이 불 같이 울리고 있었다.
[곽수환 소령, 위치 말해! 너 이 새끼 지금 어디냐고!]
석화는 늘 열기로 뜨겁던 제 손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장 중령의 분노한 목소리가 차체의 무전기에서 엄청난 크기로 들려왔다. 곽수환은 무전기를 든 채로 톡톡 몇 번 두드리기만 했다.
[여의도 쉘터 테러 사건 난 거 몰라?! 이 새끼야! 석화 박사님 데리고 대체 어디 갔냐고! 곽수환 소령 응답하라!]
“코드 넘버 3121 곽수환 소령입니다.”
그가 답을 하는 동안 석화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야! 너 이 새끼야! 지금 어디야! 미쳤어?!]
“바이올렛 구역에서 석화 박사님 모시고 대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의도 쉘터가 테러를 당했다니 무슨 말입니까?”
저보고 거짓말을 잘한다고 했는데 곽수환이야말로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지어냈다.
[지금 설명하기는 힘들고, 당장 여의도 쉘터로 합류해. 소방국 와서 진화 중이니까. 하, 진짜 이게 다 무슨 일이냐? 여의도 쉘터 전력이 반이나 날아갔다, 어?]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석화는 벨트를 끌어와 맸고 곽수환은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세기로 가속페달을 밟았다. 계기판의 바늘이 하늘로 치솟다 못해 완전히 기울어졌다.
“제가……. 속은 건가요.”
“글쎄, 일단 여의도 쉘터로 돌아가 보면 알겠지.”
한참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뒤쪽 코너에서 새로운 헤드라이트 불빛이 나타났다.
아군인가 적군인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쉘터에 배치된 지프와 생김새가 흡사했다. 곽수환이 백미러를 응시하는 순간, 탕! 뒤의 차에서 저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총질을 해준 덕에 적군인 것을 확신했다. 석화도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곽수환이 외쳤다.
“운전할 줄 알지?”
“저 면허 없습니다.”
석화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정면만 보고 핸들 잡아. 페달은 내가 밟을 테니까 핸들 조작만 해.”
석화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곽수환이 핸들에서 손을 놨다. 석화는 다급하게 돌아가는 핸들을 쥐었고, 그는 페달을 밟은 채로 뒷좌석에 손을 뻗었다. 탄환이 담긴 가방을 끌어와 앞자리에 우르르 쏟았다. 연속사격이 가능한 기관총은 개인 지프에 소장할 수가 없기에 하는 수 없이 권총으로 뒤의 차를 겨냥했다.
군용 지프의 창문은 전부 방탄유리로 제작이 되었지만, 수십 발 이상 맞으면 내구성이 다해 깨지기 마련이었다. 뒷유리에 총알이 연사로 박혀 들어오자 곽수환은 일부러 액셀을 밟은 발에서 힘을 뺐다. 적의 차 뒤로 가는 편이 더 유리했으나 상대도 오히려 속도를 줄였다. 흘끔, 석화를 보니 하얗게 질려서 정면만 보고 핸들을 조종하는 중이었다.
곽수환은 운전석의 창을 열어 뒤따라오는 차의 바퀴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연타로 발사하자 왼쪽 타이어에 제대로 먹혔는지 끼이익 소리가 나며 도로에 스키드마크가 새겨졌다.
“석 박사, 지금! 핸들 왼쪽으로 15도 틀어.”
15도, 15도, 석화는 그 말을 속으로 반복하면서 정확히 15도로 핸들을 틀었다. 곽수환은 시야가 더 확보되자 나머지 바퀴에도 총을 발사했다. 타이어 두 개에 펑크가 나면서 속도를 버티지 못한 적의 차가 도로를 빙글빙글 돌았다. 눈앞에서 차가 전복됐으니 내려서 적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석화가 옆에 있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저자들 누구예요?”
곽수환이 핸들을 넘겨받았다.
“나도 몰라.”
“누구인지 확인해야 하지 않아요?”
“솔직히 말할까? 지금 석 박사 나한테 짐이야.”
“그렇죠.”
냉정하게 말했지만, 저도 안다는 듯 시무룩하지는 않고 담담하게 굴었다.
“그냥 짐은 버리면 그만인데 버릴 수 있는 짐도 아니라는 소리야. 일단 쉘터로 복귀부터 하자.”
조금 전 15도로 꺾으라고 지시했을 때 자칫 잘못하면 저희 차도 도로를 넘어 전봇대에 박을 뻔했다. 곽수환이 총을 쏘는 타이밍에 맞춰서 전봇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게 석화였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면 짐까지는 아니었다.
“무면허라도 방향 감각은 좋네.”
“손에 땀났어요.”
석화가 손을 펼쳐서 보여줬다. 곽수환이 제 손을 뻗어 쓱 훑자 정말로 식은땀이 배어나온 게 느껴졌다. 연구소에서 스포이트나 만져야 할 손인데 추격전을 함께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석화는 그가 직접 제 손을 확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잠시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디오에서 또 어떤 속보가 나올까 싶어 전원을 켜고 볼륨을 올렸다.
[……이번 테러는 반군 에덴동산의 짓으로 추정됩니다. 아담 출현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몸에 폭탄을 단 반군이 쉘터 로비로 들어왔고, 손쓸 수 없이 폭탄이 터져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마더가 왜 막지 못했을까요?]
[마더는 인공지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메인 서버이나 자기 판단으로 행동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지시받은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요. 이번 역시 매뉴얼대로 아담이 나타난 층부터 폐쇄를 시작한 겁니다. 다짜고짜 전 층을 폐쇄할 경우,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무방비가 된 로비로 반군이 들어올 수 있었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레인보우 시티는 이런 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화재는 순식간에 진화했고, 지금은 사태를 수습하는 중입니다. 또 다른 속보에 의하면 현재 제주도에 있는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가 내일 모레, 여의도 쉘터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에덴동산이 정말…….”
석화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라디오 방송을 전부 신뢰할 필요는 없어. 방송도 통제 하에 이루어지는 거니까, 석 박사 연구처럼 말이야. 뭐, 그래도 이번에는 에덴 놈들이 맞는 것 같기는 하네.”
저에게 몇 번 반군 사상을 들먹인 그였지만, 석화는 오히려 그가 좀 더 그쪽 성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저는 여태 라디오나 방송매체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날 때부터 그게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석화의 검은 두 눈에 붉은 기운이 번들거렸다. 그의 말대로 여의도 쉘터는 아직 불에 타고 있었고, 소방국이 한강의 물을 끌어다가 진화 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레인보우 시티에 비나 눈은 쉽게 내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