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tone wall (2) (6/23)

Stone wall (2)


“미심쩍은 행동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죠. 장 중령이 그 친구를 워낙 예뻐하니 우리도 어영부영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육군사관학교 수석 수료 출신이라고 해도 통제가 되지 않는 군인은 우리로서도 곤란합니다. 솔직히 군 기강도 그 친구가 많이 버려놓지 않았습니까?”

“장군님들, 그렇게 말씀하셔도 솔직히 곽수환 소령 한 사람의 전력이 S클래스 한 소대급 아닙니까? 다들 장 중령이 예뻐하니까 봐준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거야말로 장 중령에게 책임을 전부 전가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럼 이참에 곽수환의 소령 계급장을 떼어버립시다!”

헌병대를 비롯해 장군들이 참여한 군부회의가 군사회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곽수환은 재판대에 선 범죄자처럼 저를 빙 둘러싼 장군들의 중앙에 서 있었고, 이야기가 어디까지 흐를 셈인지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솔직히.”

조용히 듣고만 있던 열쇠 부대 소장이 입을 열었다.

“자살폭탄 테러가 에덴동산의 짓이라는 것은 다들 우리 추측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연태 중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자신의 보좌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떼어냈지만, 저게 우리 쉘터 벽면에 붙어있던 대자보입니다.”

보좌관은 그을음과 핏자국이 묻어 있는 커다란 천조각을 그들의 앞에서 펼쳐 보였다.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창세기입니까?”

열쇠 부대 소장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신이 뱀에게 내린 벌입니다. 그리고 그 뱀은 서펀트라고 불리죠. 에덴동산이라고 정확히 표기는 하지 않았지만 대자보만으로도 충분히 그들의 짓이라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쾅! 여의도 지부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포스타인 윤 대장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래서 곽 소령이는 그 시간에 대체 뭘 하고 있었다고?”

이제 화살은 곽수환에게 향했다. 곽수환은 장군을 향해 각 잡힌 자세로 섰다.

“수석 연구원 석화 박사님을 피신시키고자 바이올렛 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래, 그건 알지. 근데 왜 우리 여의도 쉘터가 이런 꼴이 날 때까지 무전을 받지도 않고,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연락이 되지 않은 건가? 이 쉘터 내에서 아담이 나타났다네. 우리 쉘터는 분명 아담 클린 구역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담이 없는데 어떻게 감염이 이루어졌냐는 말이야. 심지어 곽수환 소령 자네가 데려온 정체 모를 아이가 아담의 혈액이 담긴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지? 물론 자네가 감염 전에 목숨을 처리를 했다는 건 보고 받아 알지만, 그 점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게다가 지프의 영상기록장치도 꺼놨더군. 우리가 곽수환 소령 자네를 의심하는 건 합리적일세.”

아, 역시나. 곽수환은 속으로만 웃었다.

여의도 쉘터 윤 대장은 평소에 유정경만큼이나 불패 소대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다.

제가 전체 지휘관이건만 공로는 불패 소대가 다 가져간다면서 분개하는 장면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속 좁은 영감 같으니라고. 어차피 불패 소대도 제 관할인데 부하들이 공로 좀 올리는 게 어때서. 제가 현장에 나갈 자신이 없으니 괜한 열등감에 침까지 튀기며 흥분하는 것이다.

곽수환은 시선을 한 번 바닥으로 내리깔았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이내 말을 시작했다.

***

그와 같은 시각, 석화는 헌병대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곽수환과 석화는 여의도 쉘터로 돌아오자마자 각자 다른 군인들에게 연행됐고, 또 각기 다른 곳에서 조사를 받았다.

석화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유정경의 면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살면서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유정경만큼은 아니었다.

니네는 이제 진짜 다 끝이야, 하고 신이 나서 흥얼대는 걸 보니 세상에는 타고나길 못된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석화는 제주도에서 쉘터로 올라온 후 벌써 두 번이나 이 조사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말 고문이라도 할 심산인지 날카로운 송곳을 위로 던졌다가 잡기를 반복했다.

“박사님, 이거를 손톱 사이로 푹 쑤셔 넣고 밑으로 누르면 손톱이 쏙 빠지거든.”

그 말에 당연히 겁이 났지만, 다행히도 얼굴에 감정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얹은 손을 스윽 구부려서 손톱을 숨겼다.

“이번엔 곽수환이 새끼가 박사님 구하러 못 와요. 그 새끼도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니까요. 하, 나 참. 그 새끼 무슨 든든한 백이 있는지 몰라도 말이야, 그날 박사님한테 자백제 투여했다고 내가 우리 상사한테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요? 근데 박사님,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나한테 많이 혼나야 돼.”

유정경이 석화의 팔을 휙 잡아채서 테이블에 올렸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을 때마다 손톱 하나씩 날아가요. 자, 곽수환이랑 왜 바이올렛 구역에 가서 한 시간이나 연락이 안 됐어?”

“사람을 고문하는 걸 즐기십니까?”

쿡, 유정경이 송곳으로 중지 끝을 눌렀다. 그대로 힘을 주면 안으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사람을 고문하는 걸 즐기는 게 아니라 나쁜 사람 혼내주는 걸 즐기는 거지.”

“일전에 그러셨죠. 오양석 박사님 허벅지를 송곳으로 이십 번은 찔렀다고요. 그때 오양석 박사님은 죄가 없으셨는데요.”

그때 조사받은 이후로 오양석이 다리를 절고는 했는데, 그게 유정경의 솜씨라는 것을 석화는 자백제를 맞았던 날 알게 됐다. 석화는 그래서 이 남자가 더 싫었다. 왜 상부에서 이 남자에게 조사를 맡기는지도 모르겠다. 고문을 해서 억지 자백을 뱉게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 그거? 그래서 그때 사과도 했어요. 나야 뭐,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면 해야지. 나라고 피 튀기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아? 박사님, 백숙은 맛있었어? 근데 박사님 옆에 있던 놈이 아담 혈액을 스스로 제 몸에 주입했다잖아. 그거 석 박사가 준 거 아니야? 쉘터에 바이러스 퍼뜨리라고 말이야.”

석화는 처음으로 비웃음을 내뱉었다.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짧은 코웃음에 그러한 태도가 확연히 드러났다.

“상식적으로 제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제가 제일 먼저 피해를 입을 텐데요, 윽!”

이번에는 새끼손가락으로 송곳이 파고들었다. 내려다보니 손톱 가운데까지 송곳이 들어온 게 보였다.

“그 잘나빠진 주둥이로 다시 나불대 봐. 뭐라고?”

석화는 입을 꾹 다물고 시큰거리는 통증을 참아냈다. 육체의 고통에는 취약한 저이기에 이런 아픔은 충격적이었다.

1차 통증이 빠른 신경으로 전달되고, 이어 2차 통증이 느린 신경으로 뇌에 다다랐다. 어째서 통각은 신경섬유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어 두 배의 고통을 받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 자기 스스로 아담 혈액을 주입한 놈은 일단 석화 박사님 짓이 아니라고 치자고. 그건 양상훈이 새끼도 아주 의심이 가는 행동을 했으니까. 그럼 곽수환 소령과 왜 밖으로 나가서 연락이 안 됐는지부터 말해 봐.”

꾸욱, 송곳의 심을 눌러 안쪽의 연한 살을 파헤쳤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손톱이 떨어져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석화의 등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그래봐야 작은 새끼손톱인데 이렇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유정경은 삽시간에 하얗게 질려버린 석화를 보면서 이죽거렸다. 박사들은 원체 연약해 빠져서 윽박지르고 조금만 고통을 주면 없던 일도 줄줄이 내뱉고는 했다. 유정경은 연구소에서 온갖 대우를 받으며 콧대 빳빳이 높은 박사들이 자신의 앞에서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려댈 때 희열을 느꼈다. 특히 저 무표정한 석화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저를 보면서 울면 얼마나 짜릿할까 싶었다.

쾅! 조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유정경은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또 곽수환일까 싶어 잔뜩 인상을 쓰고는 돌아봤는데, 제 직속상관인 차학현 중령이었다.

“중령님, 오셨습니까!”

유정경은 석화의 손톱에서 송곳을 빼내고 거수경례를 했다.

“쉬어.”

이마로 각을 세운 손을 내린 유정경은 대체 차 중령이 왜 왔지? 싶은 눈을 했다. 차 중령은 새끼손톱을 쥐고 있는 석화를 봤다가 다시 유정경을 돌아보았다.

“내가 취조할 테니까 넌 나가 봐.”

“예?”

퍽, 차 중령이 유정경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 새끼가 감히 건방지게 어디서 되물어. 까라면 까, 새끼야.”

“그렇지만 중령님! 이 건은 제가 맡았습니다.”

차 중령이 이 새끼가 돌았나 싶은 표정을 하고 손을 올렸다. 유정경은 조사 테이블에 놓여 있던 임명장을 휙 들어 보였다.

“보십시오! 윤 대장님께서 제게 임명하신 일입니다. 저보고 석화 박사님을 취조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손을 올리고 있던 차 중령도 눈에 띄게 굳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의도 쉘터 최고 관리자 중 하나인 윤 대장의 지시라니……. 유정경도 심상치 않은 반응에 상사를 향해 히죽 웃었다.

‘새끼야, 나 줄 잘 탔거든? 너도 조심해.’

그런 분위기가 농후했다. 차 중령은 하는 수 없이 석화를 향해 그저 걱정스러운 기색만 내비쳤다.

“석화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석화는 새끼손가락을 감싼 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의문을 가진 것뿐인데 왜 이런 상황까지 몰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박사님한테 고문 같은 건 함부로 하지 마라, 응?”

“그냥 겁만 준 것뿐입니다.”

차 중령은 곽수환에게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제 관할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윤 대장 지시라고 하니 말이다.

차 중령은 손으로 유정경을 밀치고 조사실을 빠져나갔다. 유정경이 잇새로 좆같은 새끼, 욕을 하는 소리가 석화의 귀에도 들렸다.

“박사님, 지루했죠? 그럼 우리 다시 가볼까요?”

유정경이 빨리 손을 내놓으라며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말할게요.”

“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겠습니다.”

“에이, 박사님. 재미없게 왜 이러시나.”

아쉬워하는 티를 풀풀 내면서 책상에 삐딱하게 걸터앉았다. 석화는 눈을 한참이나 감고 있더니 이윽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

“야, 이 새끼야! 그걸 믿으라고?”

윤 대장이 호통을 쳤다.

“그게 진실입니다. 감히 대장님 앞에서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몇몇 장군들은 뜨악한 얼굴로 제 이마를 문지르거나 턱을 매만졌다.

“영상기록장치를 끈 이유가 그거라고?”

“예, 그뿐입니다.”

곽수환은 정말 사실만을 고하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굴었다.

“그러니까 곽 소령 네놈이 석화 박사와 그렇고 그런 관계고, 야외로 종종 데이트를 나갔다고? 너, 대가리에 총 맞았어? 쉘터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데이트를 나가?”

“위층이 폐쇄되었으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무전에서 제1식당도 정리가 완료되었고, 5층부터 방역이 시작됐다고 들었습니다. 지하에 있던 저와 석화 박사는 그 상황에서 위로 올라갈 수도 없었고, 전 박사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고요. 또한 저희가 이동하는 것까지 보고하고 허가도 받았습니다.”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던 장 중령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새끼야, 넌 빠져. 또 저 새끼 감싸주려는 거 모를 것 같아?”

장 중령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내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연태 중장이 손을 쓱 들었다.

“이연태, 넌 또 뭐야.”

아무래도 제 바로 밑의 중장인지라 대장도 크게 화를 내지는 못했다.

“곽수환 소령의 말이 거짓은 아닐 듯합니다. 그…….”

“그, 뭐. 말을 해!”

이연태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놈 같았으면 목이 날아가든 말든 무시했을 테지만, 전력의 중심인 곽수환을 그냥 보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곽수환 소령이 석화 박사를 보고,”

“뭐!”

“자기……라고 부른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이연태는 제가 제 입으로 말하고도 뜨악했는지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윤 대장에게서 곽수환을 사수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말씀까지 드리기는 외람되지만, 저희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하는 수 없이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곽수환은 심각하게 미간을 구겼다가 곧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진심을 토해냈다.

“석화 박사님께서 야외 데이트를 좋아하십니다. 일전에도 야외로 같이 데이트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건 영상기록장치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보호구역 레스토랑으로 가는 길이었고, 이걸 그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곽수환은 검은 제복 안쪽에서 USB를 꺼내 윤 대장의 앞에 쓱 밀어두었다.

윤 대장이 손으로 그걸 툭 치더니 제 부하에게 틀어 봐, 하고 거칠게 말했다. 부하는 곧장 USB를 노트북에 연결하더니 군사회의실 메인 화면으로 띄웠다. 지프의 영상기록장치는 뒷좌석에 있었기 때문에 둘의 목소리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석 박사 은근히 음흉한 구석이 있어. 데이트를 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돌려 말해.]

[제가 데이트를 하자고 했습니까?]

[나한테 귓속말을 하면서 내 귓불을 슬쩍슬쩍 입술로 문 건 뭔데.]

[제가 그랬습니까?]

[내가 연애소설을 제법 봐서 아는데, 그거 다 알고 끼 부리는 거라고 하더라고. 일부러 내 귀를 희롱했던 거지?]

[하아…….]

[이거 봐, 또 한숨 야하게 쉬네.]

평소 곽수환이 장난스레 내뱉는 그런 말들이었다.

실제 중요한 이야기는 레스토랑 안에서 했기에, 그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한 말들은 다 저런 종류였다. 듣다 못한 윤 대장이 손을 내저으며 때려치우라고 성질을 냈다.

“석화 박사 데려와.”

곽수환이 속으로 씩 웃었다. 쉘터에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게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나름 다행인 셈이었다.

지하 3층에 있던 석화가 군사회의실로 올라오기까지는 약 15분. 문이 열리고 석화가 군사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속으로 웃고 있던 곽수환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석화는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얼굴은 마치 지금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석화를 데려온 유정경은 곽수환을 보자마자 픽 웃었다.

곽수환은 그제야 저 새끼를 과천으로 내려 보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석화는 장군들이 앉은 U자 형태의 테이블에서 뚫려 있는 중앙에 앉았다.

서서 취조를 받는 것이 정상이지만 박사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름의 배려를 해주었다. 석화는 딱딱한 철제의자에 앉아서 두 손을 허벅지에 얹었다. 그 옆에는 곽수환이 서 있었는데, 마치 둘이서 공개재판을 받는 듯한 모양새였다.

“석화 박사.”

정면 중앙에 앉은 윤 대장이 석화를 불렀다.

“예.”

윤 대장은 유정경이 가져온 서류를 쓱 눈으로만 훑어보더니 나름대로 인자한 얼굴을 지어냈다. 그러나 퍼그처럼 주름이 잔뜩 잡힌 얼굴이 밝게 보이는 일은 없었다.

“우리 레인보우 시티가 박사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압니다.”

여의도 쉘터에 와 온갖 일들을 겪고 나니 제가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인지도 깨달았다.

“유정경 소령이 거친 방법을 썼다면 미안하게 됐어요.”

윤 대장은 석화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어리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어쩐지 갓 스물을 넘긴 청년을 대하듯 타이르는 말투가 나와 버렸다.

“손은 괜찮습니까?”

“아파요.”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할 만한데 석화는 솔직하게 말했다. 윤 대장이 서류철을 들더니 제 뒤에서 대기 중인 유정경의 머리를 후려쳤다.

“취조를 하라고 했지, 고문을 하라고는 안 했어.”

“예,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냥 겁만 주려고 한 건데 박사님께서 손을 확 빼시는 바람에.”

“바람에?”

“손톱이 부러지셨습니다.”

윤 대장은 퍽, 퍽, 연거푸 소리가 나도록 유정경의 머리를 내려쳤다.

곽수환은 그동안 석화의 왼쪽 손을 내려다봤다. 새끼손톱이 부러졌는지 그 부분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홀스터와 함께 총기를 반납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유정경의 대가리를 쐈을지도 몰랐다.

“유정경 소령이 좀 과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를 해줘요. 석화 박사, 우리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는데, 혹시 곽수환 소령에게 협박을 받은 건 아닙니까?”

“아닙니다.”

“알다시피 우리 레인보우 시티는 군인들과 시민의 연애까지 개입하지는 않아요. 자유로운 것은 참 좋은 일이고, 젊은 친구들이니 충분히 연애도 할 수 있지요.”

레인보우 시티는 허가된 출산 외에 연애에 대해서는 윤 대장의 말대로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특히 쉘터는 혈기왕성한 군인들이 넘치는 만큼 피임만 잘하면 눈감아주는 편이기도 했다. 그게 동성이든 이성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고 너희들 마음대로 실컷 연애하라는 건 아니었다.

군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레인보우 시티를 지키는 일이고, 연구원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의약품과 백신을 개발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곽수환과 석화는 그 가장 중요한 일을 뒤로 방치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윤 대장은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저들이 연애를 한다는 변명을 댄 이유는 무언가 구린 구석이 있어서라고. 연애 따위는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확신했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유정경이 대장에게 발언권을 허락 받았다. 여기서는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듯이 운을 떼자 윤 대장이 밖으로 따라 나오라고 손짓했다.

유정경은 쪼르르 윤 대장을 따라가 군사회의실 밖으로 나간 뒤에도 대장만 들을 수 있게끔 조용히 말을 시작했다.

“대장님, 둘이 그런 사이라는 게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라도 있어?”

윤 대장이 담배를 꺼내자 유정경이 서둘러 불을 붙여주었다.

“예, 아직 개통이 안 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윤 대장은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인상을 구겼다.

“개통? 통신사 기지국이 무너진 게 언제인데.”

“그게 아니라, 그 거기 개통이요.”

“제대로 이야기해, 새끼야.”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곽수환 소령이 석화 박사와 그런 사이라면 분명 몸에 흔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인 것 같습니다. 그 관계가요. 그런 뜻으로 개통이 안 됐다고……. 드린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유정경이 네 말은, 저놈들 둘이 작당을 해 연애를 한다고 거짓말한 거다 이거지?”

“예! 역시 대장님답게 현명하십니다.”

“넌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윤 대장이 손을 펼쳐 유정경의 뺨을 툭툭 쳤다. 점차 강해지면서 퍽퍽 하는 소리로 변했다. 유정경은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데도 꼼짝 않고 대장의 손찌검을 받아냈다.

“누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몰라서 장군들 불러놓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로 보이냐고.”

“그러시다면…….”

윤 대장은 유정경의 견장에 제 담배를 비벼 껐다. 더는 알 거 없다는 듯한 태도에 유정경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윤 대장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고, 석화는 자꾸만 시큰거리는 통증에 손을 간간이 떨었다. 윤 대장은 자리에 도로 앉고도 한참이나 생각에 잠긴 듯이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런 방법은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곽수환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윤 대장은 퍼스트 마스터의 라인이었다.

사실 불패 소대는 곽수환의 육사 기수로 세컨드 마스터가 구성한 신생 소대였다.

퍼스트와 세컨드는 서로 손을 잡고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그 둘의 기 싸움은 늘 존재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는 말을 그 둘이 손수 보여주고는 했다.

“그간 곽수환 소령이 보여준 공로를 나는 높이 평가하고 있네. 곽수환 소령 말대로 쉘터가 정리됐다고 하니 안심하고 석화 박사와 바이올렛 구역으로 간 것이겠지. 그러나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라면 자고로! 늘 대비를 해야 하지. 그 점에 대해서 변명할 게 있나?”

“없습니다.”

곽수환은 석화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윤 대장을 향했다.

“그럼 다들 바쁠 터이니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네. 육군 소령 곽수환은 오늘부로 과천 지부 쉘터로 발령한다.”

곧 회의실에 술렁거림이 찾아왔지만, 그 누구 하나 직접적으로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곽수환은 이 정도면 나름 양호한 결과인가 싶었다.

“불패 소대 지휘권을 빼앗고, 과천 지부 백호 소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불패 소대의 지휘권을 빼앗겠다는 건 한마디로 저희 소대 자체를 무너뜨리겠다는 뜻이었다. 너무도 빤히 보이는 윤 대장의 심보에 곽수환은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거기엔 세컨드 마스터의 세력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

곽수환은 덤덤한데 옆에 앉아있던 석화만 놀라 그를 쳐다봤다. 그가 과천 쉘터로 이동한다면, 앞으로 저와는 만날 일도 요원할 거다.

“석화 박사.”

석화는 생각을 멈추고 윤 대장을 봤다.

“석화 박사는 죽은 오양석 박사를 대신해 수석 연구원으로 여의도 쉘터에 왔기 때문에 변동사항은 없을 걸세. 여태 그래왔던 대로 여의도 쉘터 연구실에서 힘을 써주게. 이상, 군사회의를 마친다. 그리고 양상훈 소령은 예정대로 헌병대가 조사를 이어가게나.”

윤 대장이 일어나자 모든 장군들이 기립했다. 석화도 의자를 내리누르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윤 대장이 나가고 나서야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아?”

“예.”

장군들 중 몇몇은 둘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더럽다는 듯이, 또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잇새로 욕을 뱉고 나가는 자들도 있었다. 붙어먹을 게 없어서 남자 새끼와 붙어먹느냐며 아예 대놓고 말을 하는 장군도 있었지만, 둘에게 그런 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 중령도 다가와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지금은 역효과라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회의실만 빠져나갔다. 모두가 회의실을 나간 뒤 마지막으로 곽수환과 석화도 문으로 향했다. 서로 침묵한 채 복도로 한 발 뻗었을 때였다.

“이야, 운도 좋아. 수석 연구원이시라 잘도 빠져나가고, 한 놈은 모가지 날리는 게 아니라 과천으로 보내버리고. 물증이 없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주 대단하셔?”

석화는 유정경이 뭐라 하든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컥!”

그 소리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석화는 황급히 곽수환을 바라봤다. 곽수환이 검은 장갑을 낀 채로 유정경의 목을 쥐고는 벽에 밀어붙여 들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떠서 버둥거리는 유정경의 눈알은 마치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곽수환 소령님.”

석화는 흡사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제 소란은 그만 벌이고 들어가서 쉬고만 싶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널 죽이고 영창을 가도 일 년이면 나와. 아니 어쩌면 한 달일 수도 있지.”

캑, 캑,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밭은 숨을 내뱉는 유정경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곽수환에게 흔들었다. 곽수환은 그 손을 잡아 비틀어 버렸다. 크아아악, 비명소리에 석화는 골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곽수환은 기괴하게 틀어진 손가락을 놓고 새끼손가락 하나도 뒤로 넘겨 분질러버렸다. 그리고는 잡고 있던 목을 바닥을 향해 내팽개쳤다.

“쿨럭, 컥……. 씨발 새끼야! 너 가만 안 둬! 아아악!”

제 손을 감싸고 바닥을 구르는 유정경을 곽수환이 군홧발로 걷어찼다.

“과천에서 보자고.”

한 번 더 걷어차고 석화를 보는데,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휘청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곽수환이 얼른 석화를 따라잡았다. 그런데도 석화는 저를 보지 않고 바닥만 보면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숙소 층에 도착할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으니 곽수환은 붕대가 감긴 손만 계속 눈에 밟혔다.

“내가 말했잖아. 쓸데없는 일에 관련돼서 좋을 게 없다고.”

석 박사도 이제 눈 밖에 났으니 그 나름대로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어차피 유정경은 제가 머리채를 끌고 과천으로 데려갈 테지만, 식당에서 뜨거운 국그릇에 얼굴을 박는 석 박사는 누가 막아줄까, 자못 걱정됐다.

여의도 쉘터는 뉴스 속보와는 다르게 10층까지만 불길이 번졌고, 그 위층들은 다행히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제대로 전소된 저층들을 수리하려면 아마 꽤 시간이 걸릴 듯했다.

석화가 자신의 방 앞에서 손을 뻗으려고 하자 곽수환이 그 앞을 쓱 막아섰다. 지금 석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또 자신과 눈도 마주쳐주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일 과천으로 바로 좌천될 텐데 이참에 정자 줄까?”

“됐습니다.”

비키라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석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좌천은 내가 되는데, 왜 석 박사가 그런 얼굴이야.”

“저 때문에 피해만 보셨으니까요.”

제가 서펀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거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의문을 갖는 일은 그만한 대가를 수반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여태 그래본 적이 없어서, 늘 수동적으로 살아왔기에 저 자신은 안전했던 거다. 원호도, 오양석 박사도 의문을 갖고 행동하다가 그렇게까지 되었겠지.

“미래 창창한 소령의 싹을 날려버린 게 미안하면 한번 대주든가.”

곽수환이 한쪽 눈썹을 슬쩍 찡그리고 짓궂게 말했다.

[개방합니다.]

석화가 자신의 지문을 인식시켜 문을 열었다.

“그럼 잘 자요, 석화 박사님.”

석화가 문고리를 쥔 채 서 있자 곽수환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도 석화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을 좀 더 넓게 벌려 열었다.

“들어오세요.”

곽수환은 뭔가 난감한 듯 찡그렸던 눈썹을 손으로 쓱 훑었다.

“아무리 미안해도 대달란다고 대주면 안 되지. 석 박사 맹한 구석이 있어서 걱정인데, 다른 놈들한테도 그러지는 마. 간다.”

이 남자는 항상 그랬다. 입으로는 뭘 해 달라, 또 뭘 하자고 하지만 실제로 실력행사에 들어간 적은 없었다.

“정자 준다면서요.”

곽수환의 등에 대고 석화가 목소리를 키웠다. 석화는 까만 눈으로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손에는 붕대를 두르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사람 기분을 또다시 묘하게 했다.

“갖고 싶습니다.”

석화는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 말했다.

“곽수환 소령님 거요.”

젠장.

성큼성큼 걸어온 곽수환이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섰다. 석화도 그제야 문고리에서 손을 놓았고, 두 남자를 가둔 방문이 닫혔다.

“후회할 텐데.”

곽수환이 석화의 허리를 둘러 안고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봤다.

“안 하는데요.”

까맣고 큰 눈으로 곽수환을 올려다보는데 다소 힘이 없었다. 오늘 하루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용했다. 석화가 곽수환의 가슴팍을 손으로 지그시 밀어내자 그는 쉽게 뒤로 물러나주었다.

그도 석화의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는데, 방에 돌이 빼곡할 줄 알았건만 몇 개 보이지 않았다. 그중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남근석은 책상 중앙에 놓여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석화가 저걸 보고 또 만질 걸 생각하니 어쩐지 제 하반신이 어루만져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석 박사.”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답이 없었다. 석화는 서랍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손에 끼워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오른손만 장갑을 꼈다. 설마 싶다 했지. 곽수환이 픽 웃었다. 정말 정자나 얻어갈 심산으로 저를 안으로 들인 거였다.

석화는 다시 다가가 곽수환의 팔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착취만 당하다가 가네.”

어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석화가 하라는 대로 전부 따랐다. 손목을 감싼 석화의 열이 피부로 고스란히 전달되니 그 부근이 홧홧해졌다.

케이프와 제복 상의를 옷걸이에 걸쳐둔 곽수환은 흰 셔츠에 바지차림으로 침대에 앉았다. 이어 의자를 끌어온 석화도 그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는 깨끗한 샬레와 은색 통도 책상에 올려두었다.

“시작할까요?”

석화가 손을 뻗어 버클을 풀었다.

“내가 아무리 성욕이 왕성하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발기는 힘들 것 같은데.”

마치 성기를 검사받으러 온 환자가 된 기분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지퍼를 내리고 브리프에 손가락을 걸어 당기자 하반신이 반응을 보였다.

석화는 전에 턱을 맞았던 기억 때문에 좀 멀찍이 떨어져 앉았는데, 자세가 적잖이 불편했다. 의자를 뒤로 물리고 바닥에 앉고는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곽수환의 성기를 감쌌다.

돌겠네.

곽수환은 석화를 잡아 누르지 않도록 인내심을 발휘해야했다. 점차 서기 시작하자 석화가 고개를 휙 들어올렸다. 마치 펠라를 하다가 올려다보는 것처럼 음란한 시선으로만 다가왔다.

“자위 하실 수 있겠어요?”

“이거 진짜 고문인데.”

아무래도 정자는 못 주겠다면서 일어나려는데, 석화가 단단한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야한 영상 같은 건 없어서요. 곽 소령님, ‘선생님과의 하룻밤’ 저도 봤는데요.”

“그건 또 뭐야.”

곽수환이 지퍼를 채우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석화가 막았다.

“곽 소령님이 보는 소설이요. 거기서.”

석화는 뭔가 결심을 한 사람처럼 숨을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뜨거운 숨결이 하반신으로 곧장 전달됐다. 석화는 은색 통에서 소독솜을 꺼내 곽수환의 것을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이건 또…….”

곽수환이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딱 죽을 맛이었다.

시원하고도 미묘하게 불쾌한 감각이 신경을 내달렸고, 라텍스 장갑 너머의 손은 뜨거웠다. 담금질을 당하는 것도 아닌데 뜨겁고 차가운 느낌이 반복해서 찾아들었다.

“전에도 느꼈는데 곽수환 소령님 성기는 모양이 좋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공용욕실을 쓸 일도 없었을 텐데, 타인의 성기를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나 싶었다.

“칭찬 고마운데 아까 방역하면서 샤워도 했거든?”

그 순간 곽수환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낼름, 석화가 혀를 내밀어 곽수환의 성기를 혀로 핥았다. 움찔, 석화의 손에서 좆이 엄청난 크기로 부풀기 시작했다. 또 낼름낼름,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말캉한 혀로 성기를 자극했다. 곽수환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목까지 힘줄이 바짝 섰다.

미치지 않고서야 석화가 제 좆을 빨까. 그것도 아니면 과천으로 좌천된 게 그렇게 미안한가. 어쨌든 석화가 먼저 이렇게 나와 버리니 저도 참을 재간은 없었다.

“책에서는 이러면 금방 사정한다고 하던데요.”

손으로 하면 오래 걸리고 힘들 것 같아서.

좆을 앞에 두고 속삭인 석화는 또다시 혀를 쓱 내밀어 핥았다.

하룻밤인지 뭔지는 빌려와놓고는 아직 보지 않은 소설인데, 아마 쉘터에 같은 책이 몇 권 더 있었나 보다. 곽수환이 석화의 장갑 틈새로 제 손을 넣어 천천히 뒤집어 벗겨냈다.

“그걸로는 턱도 없어. 석 박사도 자위 정도는 해봤을 거 아니야. 혀로 핥는다고 사정하면 일상생활이 가능하겠어?”

석화는 여전히 곽수환의 허벅지 양쪽에 손을 하나씩 얹고 있었다. 곽수환이 손을 내려 석화의 말랑한 입술을 문지르고는 검지를 쑥 안으로 넣었다. 석화는 불쾌한 듯 미간을 아주 미세하게 구겼지만, 그가 천장을 긁자 눈꺼풀이 깜빡 떨렸다.

빙글, 안에서 손을 돌린 곽수환이 혀를 꾹 눌렀다.

“미끄러뜨리듯이 삼키면서 이 안쪽까지 넣고 쭉쭉 빨아올려야지.”

“책에서는.”

그의 검지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했다.

“해봐.”

툭, 아랫입술에 일부러 검지를 걸었다가 떼어냈다. 석화의 입술이 금세 축축하게 변했고, 작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도톰한 귀두를 입에 넣으니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저렇게 돌도 선물해줬고, 한 번 거짓말을 했던 저를 믿어주기까지 했다. 위험할 때면 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인데,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참에 정자도 얻을 수 있을 테고.

게다가 곽수환에게서는 코끝을 간질이는 좋은 향이 났다. 코를 콕 박고 깊이 숨을 들이켜고 싶을 만큼 달달하고 시원한 향이었다.

귀두만 문 채로 우물우물하는데 곽수환은 두 번째로 죽을 맛이었다. 석화의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에 손을 넣고 그대로 제 쪽으로 확 잡아당기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인 탓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석화의 입 속에서 아래가 녹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조금 더 깊이 넣을 수 있겠어?”

석화는 평소보다 더 낮고 느릿한 울림에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늘 그럴싸한 웃음만 걸치고 있던 남자가 나른한 눈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한 팔은 뒤로 뻗어 침대를 눌렀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뺨을 어루만지니 석화도 뭔가 제 안에서 이상한 불씨가 지펴지는 것 같았다.

무릎을 들어 올려 허벅지를 좀 더 꽉 쥐고 더 깊이 성기를 넣으려고 시도했다. 입에 넣고만 있는다고 사정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석화도 그것을 알기에 천천히 고개를 뒤로 뺐다가 안으로 넣기를 반복했다. 커다란 성기에 입 안이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하아, 곽수환이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었는데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고개를 뒤로 빼 쪼옥 귀두의 끝을 빨아들이는 때였다.

“흡!”

좆이 목구멍을 타고 단숨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목젖이 뒤로 넘어가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석화는 놀란 눈만 연방 깜빡거리며 그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으흡. 읍!

목구멍보다 더 큰 성기가 억지로 안쪽을 늘리고 있었다. 그가 그대로 허리를 탁 쳐올리자 헛구역질이 솟았다. 산소가 부족해 곽수환의 허벅지를 두드리던 손에서도 점차 힘이 빠졌다. 버둥거리는 미약한 마찰마저도 쾌감으로 다가왔고, 함부로 경련하며 좆을 감싸는 점막의 감촉에 곽수환은 낮은 숨을 토해냈다.

조금 더 깊숙이 넣으려고 머리를 내리누르려던 때 밑에서 흐으, 하는 약한 신음이 샜다. 그 바람에 정신이 바짝 들어 손을 떼어냈더니, 석화가 좆을 뱉어내고 잔기침을 토해냈다.

“하아, 하…….”

석화는 곽수환의 허벅지에 얼굴을 늘어뜨리고 호흡을 골랐다. 벌어진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허벅지를 적셨다. 곽수환은 재빨리 석화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휙 들어 올렸다.

“괜찮아?”

석화는 경황없는 눈으로 여전히 숨만 몰아쉬었다. 저도 이성이 잠깐 나가버려 조금 거칠게 군것인데 상대가 무려 석화였다. 곽수환은 자신의 다리 위에 석화를 앉히고는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목 안쪽이……. 아직도 뚫린 거 같아요.”

“원래 입으로 하는 건 다 여기까지 넣는 거야.”

그가 석화의 쇄골 중앙에 움푹 들어간 부분을 쓱 훑었다. 마치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는 듯 변명을 꺼냈다. 그냥 내가 손으로 할게. 곽수환이 석화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신 같이 좀 즐겨줘.”

새끼손가락도 불편할 테니. 곽수환이 석화의 하반신에 손을 가져다대자 허리를 움찔했다.

숨이 막혀 거의 교살 직전이어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석화의 성기도 반쯤 발기해 있었다. 기력이 달려서 그렇지 석화도 남들만큼 성욕은 있었다. 남자의 몸을 생각하며 자위를 할 때도 있었는데 석화는 그저 자기보다 육체적으로 뛰어난 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아닐까 짐작했다. 정신이 멍한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곽수환은 허리를 한껏 끌어안은 채로 지퍼를 내려서 석화의 것을 꺼냈다. 손에 닿는 감촉이 황당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일전에 발가벗겨둔 석화의 알몸을 본 적이 있었는데, 유두와 성기가 사람 식욕을 돌게 하는 색을 띠고 있었다. 제가 아담도 아닌데 식욕이 돈다니.

곽수환이 낮게 웃고는 석화와 자신의 것을 겹쳐 쥐었다.

“혹시 저걸로 연습한 건 아니겠지?”

곽수환이 뭘 말하는지 알았기에 석화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고개만 저었다. 몸에 기운은 하나도 없고 정신도 몽롱해 그런지 성기에 닿아오는 커다란 손의 자극이 좋았다.

제가 하는 것과는 악력과 흔드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석화는 벌써부터 사정감이 치달아오는 것을 느꼈다. 성욕 억제제를 맞았는데 이렇게 빨리 흥분과 사정감이 몰려온다니 신기했다.

“석 박사가 나한테 주는 포상 한번 엄청나네.”

곽수환이 석화의 목덜미를 잘근 깨물었다. 세게 깨물었다가는 멍이 들 것만 같아 주인을 무는 짐승처럼 턱에 힘을 빼고 잘근잘근 씹었다.

하아……. 석화가 사정을 하려는 듯 몸을 굳혔을 때 곽수환이 석화를 침대에 눕혔다. 성기에서 손을 떼어내고는 허리만 움직여 석화와 자신의 것을 마찰시켰다.

“이상해…….”

달뜬 숨을 내뱉는 석화가 저를 가둔 곽수환의 팔뚝을 쥐다가 읏, 소리를 냈다. 새끼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통증이 닥쳐왔기 때문이었다. 석화는 감질 나는 감각을 참지 못하고 오른손으로 제 것을 잡아 흔들었다. 그동안에도 그의 성기가 몇 번이나 저를 찔러왔다.

발끝이 꼿꼿하게 서고 핏, 하고 튀어나가는 정액이 그와 자신의 상체로 흩뿌려졌다. 안 된다. 정작 필요한 건 곽수환의 정액인데 이렇게 뒤섞여서는 곤란했다.

“하아, 소령님……. 소령님 거는 여기에 해줘요.”

사정의 기운도 못 물리치면서 그 와중에 제 손을 내밀었다. 곽수환이 그 손바닥을 혀로 쓱 핥아 올리자 까끌한 감촉에 석화가 몸을 떨었다.

“석화 박사님.”

깜빡, 석화는 멍한 눈으로 곽수환을 쳐다봤다.

“근데 나 사정하려면 멀었어.”

꾸욱, 바짝 선 좆으로 말랑거리기 시작한 석화의 것을 눌러왔다.

“이왕 상줄 거면 끝까지 가보는 건 어때?”

“끝까지?”

이런 허공의 좆질로는 사정하기 힘들다고. 그리고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어림없다고 말했다.

“억제제에 진짜 부작용이 있긴 해. 발기는 잘 되는데 사정이 엄청나게 지연되거든.”

성욕을 억지로 감퇴시키는 약인데 곽수환의 몸에는 잘 듣지 않으니 오히려 한껏 발기된 채로 사정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물론 그것도 저 혼자 자위를 할 때지, 밑에서 붉은 얼굴을 하고 가느다란 숨을 내뱉는 석화가 있는 지금은 아니었다.

“내 집착 특성이 뭔지 아직 감 안 와?”

곽수환은 석화의 셔츠를 위로 끌어올리면서 배꼽부터 천천히 입을 맞추며 올라왔다.

잘근, 배꼽 위의 부드러운 살을 깨물고는 쭉 빨아들였다. 목덜미와 상체 여기저기 그가 깨물고 지나간 자국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깨무는 거……?”

짧게 웃은 곽수환이 석화의 셔츠를 완전히 벗겨내고 등 뒤에 손을 넣어 감쌌다.

석화는 몸에 넘쳐나는 모든 열기를 그와 나눠 갖는 시원한 기분이 좋았다. 목구멍은 아직 좀 쓰라리지만, 곽수환은 마치 자신의 열을 식혀주는 돌 같았다.

“하…….”

가슴을 크게 베어 깨무는 그의 어깨를 저도 모르는 사이 껴안았다. 가슴을 빨리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으니 석화는 정신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곽수환에게 깨물리고 빨린 유두가 금세 붉게 달아올라 나머지 멀쩡한 한쪽과 대비됐다. 그가 뾰족해진 젖꼭지를 혀끝으로 굴리다가 잘근 깨물었다. 그때마다 석화의 몸도 함께 움찔거렸다.

남은 한쪽도 얼른 자극을 해달라면서 저 혼자 딱딱해지니 곽수환은 손등으로 그 부분을 쓱 쓸었다. 젖꼭지가 완전히 솟자 콱, 잡아서 한 번 비틀었다.

“아!”

처음 노출되는 쾌락에 잠식되어 가는 석화 때문에 곽수환도 정도를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바지를 벗겨내고 전라를 만들어 엉덩이 사이에 손을 넣었다. 부드러운 틈 안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빨리 제 안으로 들어와 달라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을 비부로 쓱 미끄러뜨리자 석화가 갑자기 경계심을 갖고 어깨를 밀어냈다. 그 와중에 새끼손가락이 아픈지 앓는 소리도 같이 새어나왔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

아무리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공부만 했다고 하더라도 성교에 대해서는 알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석화는 왜 자신의 엉덩이 구멍에 손을 가져다 대냐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차피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는 곽수환은 회음부를 꾹 누르면서 목덜미와 귓가를 입술로 간지럽혔다.

“해파리랑 말미잘이라고 했나, 걔들은 입하고 여기가 같다며. 그럼 그것들은 입으로 성교를 하겠지? 사람은 입하고 여기, 둘 다 쓸 수 있잖아?”

곽수환은 제가 말하고도 거지같은 소리라고 여겼다. 그래도 구멍에 은밀하게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말미잘은……. 포자 번식을 하는데요.”

석화는 빨린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의 손이 아래에 닿은 일도 처음이라 감각은 생경했지만, 그게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박사님, 인간은 말미잘보다는 고등생물이잖아요? 아무데나 뿌리는 하등생물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꾸욱, 곽수환이 딱딱하고도 커다란 것을 엉덩이 사이에 가져다댔다. 양 허벅지가 잡혀 위로 들린 석화의 몸은 무방비 그 자체였다. 놀란 석화가 손을 내려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굴곡진 뱃가죽을 따라 손이 미끄러지기만 했다.

“거기…… 목보다 좁은데. 읏!”

허벅지 양쪽을 잡아 한데 모은 그가 퍽! 하고 고환을 치고 올라왔다. 움찔거리는 구멍을 빗겨 올라와 허벅지 사이에 제 좆을 가두고는 복숭아뼈를 이로 잘근 씹었다.

탁, 탁, 소리가 나도록 쳐대자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맞물린 허벅지로 그의 좆을 감싼 바람에 곽수환이 움직일 때마다 안쪽의 연한 살이 같이 쓸려나갔다가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화끈거리다 못해 허벅지가 마치 성기가 된 것만 같았다.

석화는 한 팔을 뻗어 곽수환의 팔뚝을 그러쥐었다. 곽수환이 이번에는 허벅지를 둘러 안더니 허리를 더 위로 뜨게 만들었다. 석화는 힘이 없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제 목덜미에 가져다댔다. 매만져달라는 신호인가 싶어 부드러운 살을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쳐대는데 석화가 중얼거렸다.

“꼭…….”

“응?”

“해줘요.”

곽수환이 후, 숨을 내뱉으며 석화의 입술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 바람에 몸이 완전히 반으로 접혔고 삽입을 한 것처럼 아래가 빈틈없이 밀착했다. 석화는 그의 등을 끌어안았던 손을 스르륵 하고 침대로 떨어뜨렸다.

싸줘요……. 샬레에.

곽수환은 입까지 벌리고 두 눈을 감은 석화 때문에 잇새로 혀를 찼다. 이대로 그냥 해버려? 힘도 다 빠져있는데 아래를 풀어주고 박아 넣으면…….

곽수환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석화의 몸은 아직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울긋불긋한 자국투성이였다. 그는 허벅지를 들어 올리는 대신 옆으로 누워 뒤에서부터 석화를 끌어안았다. 뜨끈뜨끈한 몸이 제 피부에 녹아드는 듯했다.

“가기 싫어지네.”

곽수환은 그대로 석화의 어깨를 콱 깨물었다.

***

저혈압에 아침마다 뒷골이 당기는 증상을 겪어야 하루가 시작됐다. 석화는 눈을 뜨고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침대에 앉아 출타한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내 집착 특성이 뭔지 아직 감 안 와?’

석화는 그제야 휙 고개를 돌려 침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제 몸이 알몸이 아닌 것도 깨달았다. 전라에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는데 병원복처럼 길이가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대체 곽수환이 언제 나간 건가 싶어서 시계를 보니 아직 9시였다. 어제 어느 상황에서 기절을 한 건지 되짚어봤고 석화는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넣은 건지 안 넣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허벅지 안쪽이 쓰라리고 엉덩이도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당연히 저도 성교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학습센터에서 한두 차례 성교육도 받았지만, 실상은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다. 돌연변이들은 성보다 제가 집착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고, 곽수환의 말에 따르면 연구소에 처박혀 재미없는 인생만 살았다. 친구나 친한 동료도 없었기에 음담패설을 접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항문이 그런 용도로 쓰이는지 짐작도 못한 것이다. 안쪽에 전립선이 있으니 분명 쾌감은 존재할 것도 같지만…….

석화는 스스로 고개를 털어냈다. 그러자 머리가 더 울렸다.

난생처음 그런 감각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석화는 저 스스로 셔츠 안에 손을 집어넣고 유두를 꾹꾹 만져봤다. 이상하게도 곽수환이 만져준 감촉과는 사뭇 달랐다. 손의 크기도, 그리고 언제 어떻게 매만져질지 모르는 긴장감도 타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석화는 무심한 얼굴로 셔츠 안에서 손을 빼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거울에 비친 몸 여기저기에 붉은 반점이 있어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찾았다. 곽수환이 남겨둔 흔적이었다. 스펀지에 거품을 내어 몸 여기저기를 닦다가 허벅지와 엉덩이가 쓰라려 그 부분은 손으로 문지르고만 말았다.

그런데 곽수환의 집착 특성이 뭘까. 거기까지 다시 생각이 닿은 석화는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욕실을 나왔다. 책상에 올려둔 샬레를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감은 금세 무너졌지만 기절한 건 저이니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문득 시선을 돌리는데 책상의 끝 쪽에 남근석이 놓인 게 보였다. 왜 저기로 옮겨갔지 싶어 자세히 보니 그 밑에 작은 메모지가 하나 눌려 있었다.

석화는 돌을 옆으로 치우고 메모지를 들어 올렸다.

[시도해봤는데 한 방울도 안 나오더라. 잘 지내, 박사님. 어제는 목구멍 뚫어서 미안하고.]

석화는 일어난 뒤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갔구나.”

목 안쪽이 아직도 따끔따끔했다.

***

석화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김 박사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나를 버리고 저 혼자 도망을 가다니?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김 박사에게 설핏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양상훈이 아담 혈액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을 테고, 그날 소년의 옆에 앉았던 사람은 바로 김 박사였다.

김 박사보다 양상훈을 더 믿는 건가? 군인을 싫어하던 저 자신이? 또다시 혼란스러워졌지만 확실한 건 제가 김 박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대해 뭔가를 캐묻고 싶어도 입을 꾹 다물었다.

곽수환이 과천으로 내려간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그간 석화는 헌병대에 몇 번 더 불려갔고, 결백을 증명하기까지 몇 사람이나 더 거쳐야 했다. 그 와중에 양상훈도 죄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관리감독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그 역시 과천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혹시 저를 조사하는 군인이 유정경일까 걱정했던 것도 무색하게 그도 과천으로 갔다고 했다.

석화는 이 근래 7차 아담에 관해 차근히 정리를 하고 있었다. 오청운 선배의 이상행동과 지능이 있는 듯 행동하는 몇몇 아담에 대해서 말이다. 만일 그들에게 지능이 생긴 거라면 결국 새로운 종으로 분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천적으로 불려야 하겠지만.

그 외 석화의 일상은 별것 없었다. 연구를 하고 짬짬이 시간을 내어 공부도 하고, 어떤 날은 쉘터 도서관에 들어가 소설을 읽었다.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곽수환의 빈자리가 그리 큰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선물해준 돌을 종종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는 했다. 전에 쥐고 다니던 조약돌보다 커서 더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상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하니 이제 그 누구도 저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가 없었다. 서펀트에 대해서도 끝까지 함구했다.

에덴동산이 자신을 회유하거나 오양석 박사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면, 13 레드구역 초소를 불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테러를 에덴동산이 했다는 확신은 없지만 정황상 그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평범한 삶이고, 늘 자신이 지내오던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내부를 속살거리는 의문들이 증식해나갔다.

아들인 오청운조차 지하에 가둔 오양석 박사가 7차 아담에 대해 연구를 안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사망 시간도 이상했다. 치료제 개발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건 알지만, 상부가 지나치게 소극적이지 않나. 그런 생각만 반복하던 석화는 정각 1시가 되자마자 귀신처럼 스르륵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제 저와 밥을 같이 먹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도 학습을 해야 찾아오는 듯했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혼자 배급을 받고, 덩그러니 앉아 밥을 먹는 시간이 싫어졌다.

“박사님!”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저를 부른 건 아니겠지 싶어 석화는 얼굴만 푹 숙이고 국을 떠먹었다.

“박사님! 박사님!”

석화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식판이 놓인 테이블 앞을 이채윤이 탁탁탁 두드렸다.

“이 소령님……?”

“뭐야, 왜 혼자 먹어? 기다려봐. 나 밥 좀 퍼올게!”

이채윤이 케이프를 휘날리면서 후다닥 배급처로 달려갔다. 줄을 새치기 하면서 앞의 군인들에게도 저리 꺼지라며 손을 휘저었다. 어차피 이채윤이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 비켜줄 부하들이었다. 식당 직원도 이미 그녀의 먹성을 아는지 반찬과 밥을 남들의 두 배로 담아주었다.

이채윤은 잔뜩 쌓인 반찬들을 흘리지도 않고 재주 좋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석화는 어쩐지 반가움이 들었다. 그간 현장에 나가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다.

“박사님, 똘수환이랑 양상훈 새끼 왜 과천 내려간 거야?”

석화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숨을 고른 뒤에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이채윤이 훨씬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 오늘 복귀하고 깜짝 놀랐잖아. 우리 불패 소대 지휘관으로 갑자기 날 임명했는데, 난 지휘하는 건 딱 질색이야. 잘못 판단했다가 애들 개죽음 당하면 내 탓이잖아.”

이채윤이 수저 가득 밥을 퍼먹으면서 투덜거렸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저 위에 다녀왔어! 거기 엄청 춥다? 장난 아니야. 지프 예열되는 데만 해도 백 년이야.”

백 년은 아닐 텐데, 딴죽을 걸려다가 석화는 입을 다물었다. 곽수환이 종종 하던 농담처럼 이런 건 그저 관용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여의도 쉘터 난리 났었다며? 곽수환이 데려온 애가 아담으로 변하고 쉘터 내에서도 아담이 생겼다던데? 병신들, 범인도 못 찾으면서 왜 애꿎은 똘수환이랑 양상훈만 날려보내. 근데 박사님 새끼 손가락은 왜 그래? 웬 밴드야? 다쳤어?”

석화는 쏟아진 질문에 다 답변은 못할 것 같아서 가장 중요한 핵심만 말했다.

“제 잘못도 있어요.”

이채윤이 밥숟가락을 딱 내려두었다.

“왜 박사님 잘못이야? 그러게 누가 정체도 모를 애 데려오래? 안 그래도 나 이번에 다녀온 현장도 반군으로 추정되는 기지였는데, 찾고 나니까 애들이 다 튀었더라고.”

얼굴을 바짝 대고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 그녀에게 석화가 한껏 집중했다.

“그 새끼들 지하에 벙커 비슷한 걸 만들어놨거든? 근데 그 안에 말이지, 박사님 연구실 같이 기계가 막 산더미처럼 있더라? 게다가 중앙에는 이상한 나무 마크가 새겨져 있었는데…….”

석화도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가자 이채윤이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아! 이건 비밀이다.”

그녀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씩 웃었다.

“어쨌든 싹 불 지르라고 해서 태우고 오느라고 한참 걸렸어.”

석화는 이제 몇 숟갈 뜨지 못했는데 이채윤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절반이나 해치운 뒤였다. 꼭꼭 씹어 먹지 않으면 자주 체하는 석화가 보기에는 정말 부러운 위장이었다.

“이 소령님.”

“응?”

“나중에 이 소령님 위장 세포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뭐? 그럼 내 배 가르고 꺼내야 하잖아! 박사님, 아무리 내가 회복속도가 빨라도 그러면 나 죽어.”

이채윤이 자못 심각하게 대꾸했다.

“나중에 건강검진 내시경 할 때 부탁드리려는 거예요.”

군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는 했다. 그마저도 여의도나 강남 쉘터 등 몇 군데서만 실시됐으니, 다른 쉘터는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 대충 짐작만 가능했다.

“근데 박사님, 이 흉하게 생긴 건 뭐야?”

그녀가 식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돌을 가리켰다. 주머니에 넣고 밥을 먹기는 무거워서 꺼내놓은 터였다.

“돌이요.”

맨들맨들하고 색감도 훌륭한, 자연이 낳은 보배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에이, 누가 몰라. 생긴 게 꼭……. 암튼, 있잖아. 오늘 박사님 되게 우울해 보인다? 혹시 똘수환이 없어서 그래?”

석화는 금세 미지근해진 국을 떠먹었다. 그러면서 과천으로 간 곽수환과 양상훈은 잘 있으려나 생각했다. 그들은 아는 사람도 많고 에너지도 넘치니, 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전 괜찮은데요.”

석화의 말대로 표정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 돌, 곽수환이 준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저런 병신짓을 할 만한 놈이 곽수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멍한 얼굴로 수저만 들고 있던 석화의 모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더 크게 박사를 부른 것도 있었다.

“박사님, 나만 믿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석화는 웬일로 옅게 미소 지었다.

“근데 이 소령님.”

“응?”

“혹시 곽수환 소령님의 집착 특성이 뭔지 아세요?”

이채윤은 수저를 입에 쏙 넣고는 나도 모르겠네?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박사님은 알아?”

“아뇨, 저도 잘…….”

석화는 얼른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허기를 달랠 겸 식당을 들른 차 중령은, 식판을 든 채로 걷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곽수환이 부탁을 하고 간 석화가 눈에 띈 탓이었는데, 그보다 더 시선을 빼앗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저건 분명 바이올렛 구역에서 곽수환이 주워갔던 돌이었다.

대체 그딴 걸 왜 가져가나 했더니 석 박사에게 준 건가? 원래도 알 수 없는 곽수환이지만, 이번만큼은 더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고개만 저었다. 어쨌든 차 중령은 곽수환의 명령에 따라 멀리서 석화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

“빌어먹을 새끼,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뭐냐. 친구 따라 강남 간단 옛말 틀린 거 하나 없어.”

“강남은 무슨 과천이지.”

의자에 앉은 곽수환은 두 다리를 뻗어 책상에 얹어놓고는 땅콩을 던졌다가 제 입에 넣었다.

여의도 쉘터가 시청이라면 현재 과천 쉘터는 읍사무소 수준이었다. 과천에 있는 군인들은 여의도에서 내려온 둘을 신기해하면서 왜 좌천된 것인지도 궁금해했다.

땅콩을 다 먹은 곽수환이 손만 뻗어 책상의 책을 쥐었다. 여의도 쉘터에서 가져온 것인데 도로 돌려놓을 생각도 없었다.

“너 솔직히 불어.”

양상훈은 곽수환이 다리를 뻗은 책상 반대편으로 훌쩍 올라타 양반다리를 했다.

“만날 책 읽는 척만 하는 거지? 그 활자 다 안 읽지?”

“내가 너냐.”

[병원균, 어디까지 정복 가능한가?]

사실 별 관심 없던 분야였는데, 석화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공통점이라도 찾으려면 의학 서적이나 읽어봐야 할 성싶었다.

차 중령에게 듣기로는 이 근래 좆돌을 들고 다닌다던데, 혹시나 자신과 함께했던 추억을 되새기는 건 아닐까 싶다가도 그냥 좋아서 들고 다니는 거겠지 하고 말았다.

“애들은 좀 어때?”

곽수환이 책의 중간을 펼치면서 물었다.

“훈련시키면 나아질 것도 같고. 여기 영관장교 새끼들이 하나같이 빠져가지고는 상부에서 주는 떡고물만 받아 처먹던데. 그러니 애들이 더 총알받이나 되지.”

일전에 지원 나왔던 수준만 봐도 알 만했다.

“곽 소령, 오늘도 저녁에 순찰 돌 거야?”

“오늘은 패스.”

과천은 쉘터를 제외하고는 그린 지역이 몇 군데 되지 않았다.

시간도 때울 겸 양상훈과 며칠 아담 사냥을 나섰는데, 이게 은근히 구역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양상훈은 책상에 올려져 있는 큐브를 몇 번 돌리더니 곧 흥미를 잃고 지휘관실을 나갔다.

곽수환도 병원체 박테리아에 대해 읽던 도중 책을 덮었다. 메인 서버와 연결된 컴퓨터를 켜고는 세컨드 마스터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펀트가 실제 에덴동산의 교주가 맞는 듯하며, 사진으로 알려진 교주는 짐작대로 가짜 인물로 추정된다. 본거지를 급습하지 않고,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더 깊이 숨어버리는 수가 있다. 과천으로 이동해 좀 더 자유로워졌을 테니 에덴동산 추적에 좀 더 집중하기를 바란다.]

과천 쉘터도 마더라는 메인 서버가 있었고, 여의도와 큰 차이는 없었다. 곽수환은 시크릿 메시지를 영구 삭제하고 차 중령이 보내 온 메시지를 열어봤다.

옥상에 앉아 멍하니 초코바를 먹는 석화의 사진이었는데, 옆에는 차 중령의 말대로 좆돌이 있었다. 하여간 진짜 웃기다니까. 그러니까 쓸데없이 반군 사상 같은 데에 물들지 말고 말이나 잘 들으라고, 석 박사.

곽수환이 모니터에 뜬 석화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화면을 전환해 세컨드 마스터가 첨부한 오양석 박사의 사건 파일을 열었다.

[본 사건에 퍼스트 마스터가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내 쪽도 관련 자료가 빈약하지만, 알아낸 것은 다음과 같다. 오양석 박사의 사망 시각은 새벽 5시가 확실함. 오양석 박사의 시신을 소각하기 전 박사를 봤던 이들이 했던 말에 따르면 몸 여기저기에 멍 자국이 있었고, 마치 고문이라도 당한 듯 허벅지와 가슴팍에 인두로 지진 자국이 있었다고 함. 운신이 불편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곽수환은 이마저도 영구 삭제를 눌렀다. 세컨드 마스터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지금까지 하반신을 자유롭게 쓰지 못했다.

다만 그의 부모는 통합국에서 인정한 레인보우 시티 감독관이었기에, 자식인 그는 어렵지 않게 세컨드 마스터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세컨드가 저렇게 된 데에 퍼스트 마스터의 가족이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독을 탔거나, 암살을 하려했거나. 어찌 되었든 곽수환에게는 관심 밖인 일이었다.

곽수환은 재차 석화의 사진을 열어봤다. 섹시한 구석은 한 군데도 없이 뚱한 표정이지만, 저 얼굴이 침대에서는 어떻게 변하는지 안다. 곽수환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프를 걸쳤다. 그리고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차 중령의 사무실로 연결했다.

[차학현입니다.]

“김 박사도 잘 지켜보고 있지?”

[예, 헌병대 조사 결과 아직 반군과 접점은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곽수환은 전화를 끊고는 큐브를 손에 쥐었다. 양상훈이 엉망으로 뒤틀고 간 큐브를 솜씨 좋게 맞추고는 자리에 다시 탁 내려두었다.

그는 이채윤과 맞붙었던 하얀 가면의 남자를 떠올렸다. 놈은 적어도 S클래스급이었다.

“그 새끼가 서펀트라는 말이지.”

놈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석화에게 접근한 것 자체가 아무래도 찜찜했다.

***

“빨리빨리! 박사님 왜 이렇게 굼벵이 같아!”

이채윤이 배낭을 준비하는 석화를 재촉했다.

석화는 필요한 물과 돌, 그리고 간식거리를 배낭에 차곡차곡 담았다. 마지막으로는 모포를 돌돌 말아 안에 쑤셔 넣었다. 슬슬 배낭을 메려는데 이채윤이 직접 와서 낚아챘다.

“저희 진짜 이렇게 나가도 되나요?”

“괜찮아. 소령부터는 외출 보고만 하면 밤에 나가도 상관없어. 박사님 아까 보니까 약 먹던데 어디 아파?”

이채윤은 을씨년스러운 석화의 방을 둘러보면서 걱정했다.

“괜찮아요. 체력을 보충해주는 약이에요.”

“그런 게 있어!? 나도 줘!”

“지금 이 소령님한테는 드려봤자 효과 없을 거예요. 나중에 임상시험 끝내면 드릴게요.”

“임상시험? 박사님……. 임신했어? 설마 똘수환이가……!”

“아뇨. 전 임산부도 아니고 임신도 안 했습니다.”

임상과 임신을 헷갈릴 리는 없을 텐데……. 석화가 의문을 띠자 그녀는 농담이야 농담, 하면서 혀를 쏙 내밀었다.

이채윤은 더 지체 말고 빨리 나가자며 석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도 제 걸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석화에게 보폭을 맞춰 주었다. 석화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다리 길이를 확인했다. 키는 저가 더 큰데 어째서 걸음은 그녀가 더 빠른 건지 아이러니했다.

최근 석화는 헌병대에서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외출을 하려면 정확한 장소를 보고해야 했다.

지하 주차장에서 이채윤은 과천 쉘터에 다녀오겠다는 보고를 하고나서야 석화도 대동한다고 덧붙였다. 대체 석화 박사님은 왜 가냐는 병사의 물음에 이채윤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연인들을 생이별 시켜놨으면 좀 만나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야!”

씩씩 성을 내는데, 석화는 그제야 그녀가 과천에 가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마 자신과 곽수환이 연인 관계라고 생각해서 배려를 해준 것만 같았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곽수환의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연인은 아니지만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저도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석화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채윤의 지프에 올랐다. 그녀는 시동을 걸자마자 주차장에서부터 격렬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벨트를 꽉 붙든 석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채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더니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 채널은 고작 다섯 개 안팎, 그중 노래가 나오는 채널은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레인보우 시티에 관련한 홍보 방송이거나 뉴스에 가까웠다.

노래 채널에 주파수를 맞췄지만, 수신이 안 좋은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몇 번 용을 쓰던 이채윤은 곧 포기했다. 이번에는 석화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레인보우 시티의 홍보 방송을 듣기 싫어하는 건 석화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이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전에는 아무 의심도 갖지 않았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제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인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아담에게서 우리를 보호해줄 곳은 오로지 레인보우 시티뿐입니다!]

주파수를 돌리다가 석화도 그냥 포기해버렸다. 이런 방송만 제대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도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아담은 우리의 주적, 반군을 물리치자, 레인보우 시티 안에서 안전과 행복을, 우우~ 랄라라 랄라라.]

레인보우 시티의 주제곡이나 마찬가지인 시티송이 흘러나왔다.

“박사님, 그냥 라디오 끌까?”

“그럴게요.”

석화가 전원을 끄려는 때였다.

[예, 방금 저희 측으로 긴급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속보인가 싶어 이채윤도, 석화도 둘 다 놀란 눈을 했다. 물론 이채윤은 조금 극적이었고, 석화는 그 표정이 눈에 드러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이 속보는, 저희……. 이……. 어떻…….]

치칙, 치지직. 지직. 라디오에 잡음이 섞여들었다.

“하여간 이 고물 새끼, 또 말썽이야.”

이채윤이 주먹으로 차체 가운데를 퍽 내리쳤다. 저러면 보통 제대로 나오고는 했는데 이번만큼은 지직거리는 잡음만 이어졌다. 다시 한번 쾅 내리치자 석화가 어깨를 울렸다.

“원래 기계가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때려줘야 해. 그래도 안 나오면 더 때려줘야 하고. 그렇게 망가지면 위에서 새 거로 바꿔준다?”

이참에 완전히 망가뜨리겠다는 듯이 한 번 더 때리려는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목이 타 배낭을 열던 석화가 행동을 멈췄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익숙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레인보우 시티의 여러분, 저희는 레인보우 시티보다 더 먼저 7차 백신, 즉 7차 이브의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생수통을 쥐었지만,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라디오에 더 집중할 뿐이었다.

[전국 각지에 백신 배포를 시작했고, 또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나무, 에덴…….]

지지직, 지직, 또다시 잡음이 섞여 들어왔다. 방송을 완전히 차단했는지 이내 정적만 흘렀다.

[……치직……. 긴급상황, 긴급상황. 외부에 있는 전 부대원들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자신들의 쉘터로 복귀하라. 다시 한번 알린다. 모든 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쉘터로 지금 당장 복귀하라.]

방송이 중단되자마자, 지프에서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무전이 쏟아졌다.

“우리……. 안 돌아가도 되나요?”

“그냥 무시하고 과천 가면 안 돼?”

석화가 안 될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던 목소리는 분명 똑똑하게 뇌리에 남은 서펀트인데다, 에덴동산이 7차 백신을 개발했다고 했다.

자신이 여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과물이 아직이어도 상부가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에덴동산이 먼저 백신을 개발했다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생각보다 더 체계적이고 규모가 큰 집단인가? 그것도 아니면 거짓말일까?

[지금 당장 쉘터로 복귀하라.]

“시끄러워 죽겠네. 무전도 끌까?”

[야! 이채윤 소령! 너 여의도에서 점차 멀어지게 레이더 잡히거든? 당장 복귀 안 해?!]

무전을 통해 들려오는 장 중령의 고함에 이채윤이 쳇, 혀를 찼다.

“하여간 귀신이라니까. 우리 돌아가야겠다. 박사님, 꽉 붙들어!”

그녀가 급격하게 브레이크를 밟고는 한 손으로 핸들을 반 바퀴 이상 돌렸다. 끼이이익, 빈 도로 위에서 지프가 유턴했고, 석화는 장기가 죄다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을 맛봤다.

“박사님, 토할 것 같으면 말해. 알았지?”

“……죄송합니다.”

석화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있었다.

“응? 왜 그래?”

“이미…….”

아까 마셨던 생수가 역류해 손 밖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급격하게 유턴을 할 줄은 몰라 대비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채윤이 허둥지둥 손만 뻗어 운전석 문에 달린 수납함에서 물티슈를 통째로 건네줬다. 석화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한 채 물티슈로 손과 입술을 꼼꼼하게 닦았다. 그래도 직선코스로 달리기 시작하니 뒤집혔던 속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엔진이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가 차체를 가득 메웠다. 이채윤은 연방 걱정을 했고, 석화는 괜찮다면서 정면을 응시했다. 상향등까지 켜고 달리는 중이지만, 여의도 쉘터로 복귀하는 차량의 속도가 엄청났기에 마치 어둠에 잡아먹히는 듯했다.

***

처음 아담이 나오고 세상이 뒤집어졌을 때는 사형수들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담을 고치겠다고 몇몇 죄 없는 사람들을 데려와 일부러 감염을 시키고, 입 밖으로 내뱉기조차 힘든 실험마저 자행했다.

통합국은 그걸 알면서도 묵과했고, 그 비밀을 대대적으로 폭로한 건 세컨드 마스터의 가문이었다.

그들은 레인보우 시티의 감독관으로 매달 시티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합국에 보고하고는 했다. 폭로는 어떻게 보면 통합국에 반기를 세운 꼴이었는데, 워낙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의 숫자가 막강해 함부로 세컨드 마스터 가문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 이후 새로 개정된 법안이 있었다.

[백신 개발 시,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물론 거센 반발도 일었다.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찬밥 더운밥을 가리느냐, 사형수들은 어차피 죽을 놈들이니 가져다가 실험용으로 쓰자는 의견도 많았다.

당시 몇몇 박사는 아담 바이러스가 사람만 감염시키는 종류가 아니니, 전처럼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인체실험은 필수라고 주장하던 이도 있었다. 젊었을 적의 원호는 그 말을 했던 박사에게 말했다. 네 몸에도 직접 실험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의견을 계속 피력해보라고.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유명한 일화였다.

그때는 각지의 쉘터가 지금처럼 정리되어 있지 않아 시민뿐만 아니라 박사들, 군인들의 피로감도 상당했다. 상충하는 의견으로 계속 싸움을 벌이다가는 순식간에 분열이 찾아온다는 것 또한 앞서 경험한 바 있었다.

결국 레인보우 시티는, 세컨드 마스터 가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도적인 방법으로 백신을 개발하게 됐다.

이 모든 건 석화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지만, 나이가 제법 있는 군 장교들은 직접 겪어온 일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윤 대장은 편하게 나고 자란 박사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백신은 손에 넣었나?”

‘U’자 형태의 테이블에 군 장교와 박사들이 함께 참석해 있었다. 석화도 쉘터로 돌아오자마자 사건을 다룰 한 사람으로 불려왔다. 질문을 던진 윤 대장은 담배만 줄곧 피워대고만 있었다. 석화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지만 닫힌 공간인지라 숨쉬기가 답답했다.

“손에 넣었냐고 내가 묻지 않았어?!”

여의도 쉘터 수송대 대령이 윤 대장을 향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에덴동산이 백신을 배포하는 장소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손에 넣는 대로 가져오라 지시했는데, 현재는 과천 쉘터만 손에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곧 과천 쉘터의 군인들이 여의도로 합류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라디오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됐기에 에덴동산 새끼들 목소리가 나오냐고!”

군방송국 담당자 또한 윤 대장의 호통에 어렵사리 운을 떼기 시작했다.

“저희는 중파대역을 이용하는데, 할당받은 군용 주파수로 방송이 송출됩니다. 그런데 송출 도중 전파방해가 들어와 해킹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방송이 나온 시간이 밤인지라 추적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가 사용하는 중파는 낮보다 밤에 송출 거리가 훨씬 길기 때문에…….”

윤 대장이 ‘대체 무슨 소리야?’라는 표정으로 방송 담당자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찾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최대한 빠르게 위치를 추적하겠습니다.”

장군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가 더욱 나빠졌다.

“석화 박사.”

순서대로 날아간 화살은 이제 석화에게 향했다.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윤 대장이 인상을 와작 구겼다.

“석화 박사?”

석화는 주머니에 든 돌을 매만지며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예.”

“무려 반군인! 저들이 백신을 개발했다는데 우리는 결과물이 없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게 박사가 할 말입니까?”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투로 석화를 압박해왔다. 저딴 게 수석 연구원이라니. 윤 대장은 혼잣말을 했지만 모두가 들을 만큼 언성이 높았다.

“외람되오나 박사님께서 제주도에서 올라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7차 변이 아담에 대해서도 올라오신 뒤에나 인지하셨습니다.”

“이연태 중장, 네가 석화 박사 대변인이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이연태는 보지 못했지만 석화는 그를 향해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꾸벅했다. 자신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으니 스스로 받아내야 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기절을 한다고 해도 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석화는 정신을 바짝 다잡았다.

“앞으로 마스터들과 조언자들을 내가 무슨 낯짝으로 보겠어, 어?! 근데 정말 백신이 맞긴 해? 저것들이 거짓말한 건 아니고?”

“그 역시 백신을 손에 넣은 과천 쉘터 군인들이 와야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든 아니든 에덴동산이 우리 레인보우 시티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꼴이 되었습니다!”

“이 사태를 누가 책임질 겁니까? 군방송국, 당신네들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어?”

“저희 방송은 해킹에 취약하다고 몇 번이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원이 전혀 없지 않았습니까? 이건 이미 예견된 사태입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또 책임을 회피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윤 대장이 그만 하라면서 책상을 내리쳤다.

“석화 박사, 그래서 만일 그 백신이 진짜면 어떻게 할 겁니까?”

석화는 윤 대장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백신이 진짜면……. 대량으로 생산해 상용화해야죠.”

우문현답에 이연태만이 속으로 웃었다.

쾅! 테이블을 내려친 윤 대장이 위협적으로 석화를 노려봤다. 그러나 석화는 좀 전부터 대장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저 힘이 실리지 않은 커다란 눈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박사 스스로가 무능하다고 말하는 거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쪽 박사들이 더 뛰어나다면 제가 무능한 거겠죠. 그럼 백신을 개발한 쪽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술렁이는 소리가 한 차례 더 커졌다.

“석화 박사, 지금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이 안 돼요? 반군 놈들이 여의도 쉘터를 습격했고, 우리 군인들이 몇이나 감염되어 죽었어요. 그런데 그런 놈들과 손을 잡자고?”

“실언했습니다. 그럼 백신이 오면……. 그 백신이 효용이 있다면 제가 참고해서, 좀 더 정교하게 만들겠습니다.”

“…….”

말문이 막힌 윤 대장은 앞의 재떨이를 석화에게 집어던지고 싶은 행동을 꾹 참았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이 만든 것을 우리가 베껴서 내자?”

석화는 손바닥이 아릴 만큼 돌을 더 꽉 쥐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 생수로 천천히 목도 축였다.

“이번 백신이 효과가 있다면 그렇게 해야죠.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의 안전이니까요.”

“이 새끼야! 너 돌았어!?”

기어코 윤 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거 이제 보니까 수석 연구원이 아니라 미친 새끼였구만!”

삿대질을 하면서 얼굴색까지 시뻘겋게 변했다. 박사에 대한 예우는 이제 남아있지도 않았다. 주변 군인들이 대장을 말리지도 못한 채, 석화에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표정으로만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석화는 어느 쪽이든 백신을 개발했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라고 생각했다. 백신만큼 중요한 진짜 핵심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백신이 효과가 있다면, 앞으로는 치료제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해주십시오.”

“뭐? 치료제? 새끼야, 넌 백신도 개발 못 한 새끼가 무슨 치료제야!”

이번에는 정말로 재떨이가 날아왔다. 물론 석화의 방향이 아니라 애꿎은 이연태에게였다. 이연태는 얼굴로 날아온 재떨이를 반사적으로 피하고는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그냥 맞아야 하는 건데, 하는 표정도 고스란히 드러나 버렸다.

“그간 변이된 7차 아담 중,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담들에 대해서 연구를 해봤습니다.”

곽수환이 과천으로 내려간 뒤 혼자 남은 석화는 거기에만 정신을 몰두했다. 안 그러면 자꾸 그날 밤이 생각나서 제 몸을 만져보기도 하고, 겪어보지 못했던 쾌감을 되새기다가 멍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곽수환은 자신에게 뱀 같은 존재였다. 먹지 말아야 할 사과를 먹게 만들어 평생 몰랐어도 될 감각을 일깨워주었으니까.

석화는 저를 향한 부담스러운 시선에 지금 당장이라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싶었으나, 다시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긴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숨을 들이켰다.

“7차 변이 아담은 전과 같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공통점 외에,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지능이 없어 보이는 예전의 개체와 비슷한 습성을 띠지만, 또 다른 하나는 어설프게나마 말을 구사하거나 상황을 봐서 후퇴를 합니다. 그 두 종류의 아담 혈액을 분석한 결과…….”

석화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바이러스의 패턴이 서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치료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이미 얻은 것도 같고요.”

이상 행동을 보인 오청운 선배와 일반적인 아담의 혈액을 비교분석해봤는데, 후자가 훨씬 공격적이고 세포가 움직이는 모습 또한 불규칙적이었다. 그건 익히 봐오던 아담 바이러스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청운 선배의 혈액세포를 이용해 배양을 했고, 거기서는 놀랍게도 여태 봐왔던 양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난폭한 속도로 멀쩡한 세포를 감염시키던 아담 바이러스가 마치 정체된 것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인 것이다. 마치 면역 반응을 보이듯이 말이다. 아담 바이러스는 오청운 선배의 몸에서 한 차례 더 변이한 듯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항원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오양석 박사가 어떤 약을 투약했던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만일 그 점을 정확히 연구한다면 치료제 개발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석화는 이들에게 더 확실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연구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연구실로 내려가려고 일어나자 다들 의아한 얼굴을 했다.

“제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실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됐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이 사람아!”

새끼에서 사람으로 다시 승급했지만, 석화는 윤 대장이 자신을 뭐라고 칭하든 상관없었다. 치료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남았다.

그때 군사회의실의 문을 열고 윤 대장의 보좌관이 들어왔다. 보좌관이 대장의 뒤에서 뭔가를 속닥거리자 대장이 고개를 끄덕했다. 석화는 일어선 채로 열린 문을 응시했다. 곧 군화를 신은 장신의 남자가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백신이 담긴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곽수환이었다.

석화는 눈을 조금 더 키웠다. 과천 쉘터에서 백신을 발견했다고 해서 혹시나 곽수환이 아닐까 싶었는데 진짜였다.

“과천 쉘터 백호 소대 지휘관 곽수환 소령, 지금 도착했습니다.”

곽수환은 군 장교들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면서도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는 서 있는 석화를 발견하자마자 씩 웃었다.

거의 일주일 만인가? 사진은 몇 번이고 봤지만 역시 실물만 못했다. 그런데 애꿎은 석화를 쥐어짠 건지 안색이 종잇장 같았다.

주머니에서 느릿하게 손을 빼낸 석화는 마치 반갑다는 듯이, 그러나 딱딱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의외의 행동에 곽수환도 경례 중인 팔을 내리면서 손을 살짝 흔들었다. 다른 장교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바람에 석화도 보지 못했다.

“그게 백신이야?”

“일단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곽수환이 윤 대장 앞에 백신 박스를 내려두었다.

“석화 박사, 이리 와서 확인 한번 해봐요.”

석화는 뒤로 돌아 테이블을 빙 둘러서 윤 대장에게 다가갔다.

대장의 뒤로 곽수환이 서 있었는데 그가 자신이 걸어오는 길을 눈으로 좇았다. 다가갈수록 그의 얼굴이 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마르지도, 살이 찌지도, 일주일 사이에 늙지도 않았다. 떠나기 전날의 모습과 너무도 똑같아서 그간 잘 지냈나 보다,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석화는 백신 박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손으로 열어보니 10개가 한 세트로 보이는 키트가 들어있었고, 놀랍게도 백신이 담긴 건 바이알(유리용기)이 아니었다. 펜 타입 주사제로 일반인도 손쉽게 투여할 수 있는 형태였다.

여태 레인보우 시티에서 판매했던 백신은, 유리용기에 담긴 백신을 주사기에 담아 피하주사를 놓는 식이었다.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스스로 백신을 투약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야 했고, 백신 투여 비용은 급여의 3분의 1이나 됐다.

백신 가격이 비싼 게 아니라 진료비를 그만큼 많이 뜯어간 게 문제였다.

석화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개인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전충전형 주사기나, 바로 지금 이 눈앞의 펜 형태를 제안한 적이 있었지만 모두 상부에서 기각 처리했었다. 물론 그것도 제주도로 내려가기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종교단체에서 이 정도의 제품을 개발할 수가 있다니…….

“석화 박사?”

눈 뜨고 기절한 게 아닌가 싶어 윤 대장은 석화를 불러봤다. 곽수환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서 있는 석화를 유심히 봤지만, 다행히 기절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도 눈으로 봐서는 모르겠습니다.”

나온 말이라고는 그뿐이었다.

“그럼 여기 서서 그냥 있지 말고, 뭐라도 확인을 해보게.”

석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신 상자를 챙기자, 윤 대장이 키트에서 세 개의 백신을 쓱 빼냈다.

“곽 소령이 너는 이 백신이 어디서 났어?”

윤 대장이 미심쩍다는 눈을 하고 곽수환을 돌아봤다.

과천으로 내려 보내서 저 재수 없는 상판 한동안 안 보겠다 싶었는데 하필 저놈이 백신을 발견했다니. 그런 반감이 고스란히 읽히는 듯했다. 곽수환은 나름대로 대답을 잘 해야겠다는 예감을 했다. 이 일을 엮어 더 멀리 보내버리려는 농간을 부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말씀드리자면 엄청나게 깁니다. 족히 30분은 걸릴 것 같은데 할까요?”

“축약해, 새끼야.”

원하신다면. 곽수환이 입꼬리만 쓱 올렸다.

“과천으로 내려간 뒤에 쉘터 정비부터 들어갔고, 밤마다 구역 정리도 할 겸 양상훈 소령과 아담 사냥에 나섰습니다.”

석화가 백신 박스를 들고 휙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양상훈과 잘 지낸 것만 같아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걸 무슨 심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나쁜 심보인 것은 맞았기에 석화는 생각을 재빨리 털어냈다.

“오늘은 제가 일이 있어 양상훈 소령이 먼저 나갔고, 저와는 경마장에서 합류했죠. 실험센터가 있는 건물에서 가까운 곳인데, 그 부근에 아담이 출몰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놈이 저 박스를 들고 어슬렁대더군요. 잡고 나니 아쉽게도 반군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석화의 손에 있던 상자를 대신 빼앗아 들었다. 별로 무겁지도 않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할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반군이 아니면?”

“마더 서버에 등록된 레인보우 시티 시민이고, 자신은 돈을 받고 배달하러 왔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누군가에게 직접 전달받은 게 아니라 집 앞에 편지와 돈이 함께 놓여 있었다는데, 배달을 하면 돈을 더 주겠다고 적혀 있었답니다. 일단 과천 쉘터 헌병대로 넘겼으니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윤 대장이 골이 아프다는 듯 주먹을 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렇게 한참이나 말없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대장님.”

“뭐요, 석화 박사.”

윤 대장이 흐릿한 눈을 떴다.

“저 연구실로 가도 되나요?”

긴 한숨이 윤 대장의 입에서 나오고 어서 가라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석화가 백신 박스를 다시 달라며 손을 내밀자 곽수환은 그걸 옆구리에 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나가 봐. 나머지 장교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의견을 더 나눠봅시다.”

곽수환이 석화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석화는 고개만 저었다. 아직 저 스스로 걸을 기운 정도는 있었다. 군사회의실을 나와 주머니에서 물엿에 굳힌 견과류 두 개를 꺼냈다. 석화가 그중 하나를 곽수환에게 내밀었다.

“자기, 그동안 나 보고 싶었어?”

그가 입으로 직접 견과류를 물어갔다. 곽수환의 입술이 닿았던 엄지와 검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석화도 느지막이 견과류를 씹었다.

“……예.”

순간 곽수환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석 박사 당신 진짜, 하면서 다가가려 하자 석화가 저기 복도에 선 양상훈을 향해서도 말했다.

“양상훈 소령님도요.”

지금 누굴 동급으로 치나 싶은 곽수환이 짙게 웃었다. 마치 두고 보자는 악당처럼 보이기도 했다.

“응? 저 불렀어요? 박사님, 그간 잘 지내셨죠?”

“예. 잘 지냈습니다.”

석화가 주머니에서 견과류를 하나 더 꺼내 양상훈에게도 내밀었다. 직접 넣어줄 듯 입술 가까이 다가가자 곽수환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입으로 받아먹으면 뒈진다?’

양상훈이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는 감사히 잘 먹겠다면서 두 손으로 공손히 견과류를 받아갔다. 터덜터덜 걷는 석화와 걸음을 맞춰 두 남자도 석화의 양쪽에 서서 걸었다.

“박사님, 저게 진짜 백신인지 바로 확인이 가능해요?”

양상훈은 설마 진짜겠어? 라는 투로 말을 내뱉었다.

“바로는 힘들고 하루 정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진짜 백신이면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잘된 거죠.”

양상훈이 듣고 보니 그건 그렇네,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되긴 뭐가 잘돼.”

엘리베이터 앞에 선 곽수환만 일이 복잡해졌다는 뜻을 내비쳤다.

“왜?”

“이게 진짜면 우리도 골 아파져.”

“그니까 왜?”

“궁금하면 위스키 한 병.”

이채윤이었다면 꺼지라면서 넘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양상훈은 아니었다. 석화 박사는 잘됐다고 하고, 곽수환은 아니라고 하니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양상훈은 곽수환이 내보인 손을 탁 치면서 거래 성사를 알렸다.

“에덴동산이 백신을 무료로 배포하면 그 종교 위상이 올라갈 테고, 시민들은 백신과 의료비로 폭리를 취한 레인보우 시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겠지. 무료로 줄 수 있는 걸 여태까지 돈을 받았잖아?”

양상훈은 눈을 깜빡깜빡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무언의 시선이었다.

“그러니까 실상 에덴 새끼들이 시민들에게 뿌린 건, 백신이 아니라 레인보우 시티를 위협할 정신적인 바이러스라는 거지.”

아무래도 이채윤의 말이 맞았다. 곽수환이 저딴 말을 할 때면 아가리에 주먹이나 꽂아주고 싶다고. 양상훈은 아까운 양주 한 병만 날려버렸다며 혀를 찼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석화가 대신 버튼을 눌렀다.

“과천으로 바로 가세요?”

석화는 정면만 본 채로 주머니에 손을 푹 넣었다. 곽수환이 옆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서로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자고 가도 돼?”

“곽 소령님 방, 아직 안 치운 것 같아요.”

“어떻게 알아?”

“몇 번 가봤어요.”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것을 봐서는 아직 그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내 방에?”

석화가 고개만 끄덕했다. 이 근래 주머니의 돌을 만지면서 멍하니 걷다가 곽수환의 방문 앞을 지나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괜스레 그날 일이 떠올라 몸의 체온이 더 뜨거워지고는 했다.

“석 박사, 지금 이 쉘터 엘리베이터도 우리끼리는 못 타는데 방이라고 개방해주겠어?”

“……그러네요.”

평소에도 뚱한 표정이 대부분이었지만, 보고 싶었다고 솔직히 대답했던 것과 다르게 석화의 반응이 영 시큰둥해 보였다.

곽수환은 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라도 했나 싶어서 웃음을 띤 채로 옆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전처럼 석화의 코끝은 동그랗고 입술은 말랑해 보였다. 불쑥, 석화도 고개를 돌려서 곽수환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럼 제 방에서 자고 가세요.”

이건 또 무슨 배려인가 싶었다. 아니지, 배려보다는 정자를 받고 싶어 하는 거겠지.

“설마 또 샬레를 준비한 건 아니지?”

“이제 사정 가능하세요?”

뒤에 있는 양상훈은 괜한 낯 뜨거움에 흠흠, 헛기침을 했다.

“양상훈 소령님도 자고 가세요.”

“예? 아, 아니. 저 새끼 말만 저렇지 저희 바로 과천으로 내려가야 돼요. 지금 완전히 비상 터진 거라서요. 근데 박사님. 아까 로비에서 이 소령이 그러던데 과천 내려오시던 길이었다고, 무슨 일 있으셨어요?”

서로 얼굴만 스치는 바람에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이채윤이 분명 그랬었다. 박사님과 함께 과천을 가다가 억지로 다시 불려온 거라고.

“과천은 왜?”

곽수환도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물었다.

“곽수환 소령님 보러 가던 길이었어요.”

[개방합니다.]

적잖이 놀란 눈으로 석화를 보는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를 왜 보러와? 석화는 훅 치고 들어와 놓고는 먼저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십 분, 금방 내려갈게.”

“어. 빨리 와라.”

양상훈이 오케이 하고는 저 혼자 엘리베이터에 남았다. 곽수환은 백신 박스를 이제는 한 손으로 움켜쥐고 석화를 뒤따라갔다.

별 힘을 들이지 않아도 전처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고, 석화는 주머니에 손을 꾹 넣은 채였다. 뒤도 보지 않고 연구동으로 향하는 석화를 불렀다. 두 번이나 불렀는데도 대답을 않기에 뒤에서 팔을 휙 붙들었다. 기운 없는 손이 스르륵 끌려 나와 동시에 탁, 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안 돼.

중얼거린 석화는, 여태 본 적 없던 빠른 속도로 돌을 줍고 어디 까진 데가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선물했던 돌이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든 건 알겠는데, 웬만하면 사람들 눈에 보이는 데서는 들고 다니지 마.”

쓱쓱, 먼지도 안 묻었는데 돌을 털어내더니 안심하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싫어요.”

그러시다는데 딱히 받아칠 말이 없었다.

보기 흉하니까 들고 다니지 말라고 하기에는 제가 선물해준 것을 아껴주는 거니 오히려 좋아해야 하나. 어차피 차 중령에게 석화를 지켜보라 했으니 위험한 일도 없겠지. 곽수환은 앞으로 한창 바빠질 텐데, 남은 시간 동안 저 멍한 얼굴이나 감상할 생각이었다. 양상훈의 말처럼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초비상 사태니까.

“그래, 실컷 들고 다녀. 이상한 짓만 하지 말고.”

“백신 주세요.”

연구동 앞에 선 석화가 손을 내밀었다.

“나 보러 과천 오려고 했다면서. 왜?”

곽수환이 백신을 마치 인질처럼 들어 올렸다. 석화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곧 위로 동공을 올렸다. 그러더니 손을 곽수환에게로 쭉 뻗었다.

어어, 그러면 안 되지. 백신을 든 손을 더 들어 올리는데 예상외로 반대편 손을 붙들었다. 석화가 그 손을 가져와 제 가슴팍에 가져다댔다.

“석 박사……. 지금 뭐 하는 거야.”

곽수환은 뒤로 무르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석화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얇은 가운 하나를 두고 석화의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내달렸다. 곽수환은 시선을 내려 제 손목을 꽉 쥐고 있는 석화의 손을 봤다. 새끼손가락에 아직 밴드가 감겨 있었고, 뜨거운 체온과 다르게 손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하얬다. 겉으로 보는 것과 속이 이렇게나 다른 석 박사였다.

“진짜 정자 받으려고? 10분 가지고는 턱도 없는 거 알잖아.”

바로 앞이 연구실이겠다, 그럴 생각인가 싶었는데 석화는 한참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곽 소령님이 만지면 기분 좋은데, 제가 만지면 아무 느낌도 없어요.”

지나치게 솔직한 말이었다. 곽수환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는 천장을 봤다가 다시 석화를 향했다.

“설마 그거 때문에 과천 오려던 건 아니지?”

“복합적이었어요.”

야한 기분을 들게 하는 석화의 눈은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선명했다. 그래도 먼저 불을 붙인 건 석화다.

“어디가 어떻게 다른데?”

입술을 가까이 내린 곽수환이 속삭였다. 석화는 그제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인식 패널에 손을 꾹 가져다댔다.

[개방합니다.]

곽수환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픽 웃고는 백신을 내밀었다. 그러나 석화가 그의 제복 소매를 잡아끌었다. 힘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곽수환은 연구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상해요.”

“그러게, 석 박사가 이상하네.”

곽수환이 연구실 로비의 테이블에 백신을 툭 내려놓았다.

가슴을 만지게 하지를 않나, 연구실로 저를 끌어들이지를 않나. 그러던 와중에 석화가 직접 자신의 손을 양 가슴에 올렸다. 멍한 얼굴로 쓱쓱 만지기까지 하는데 어찔했다.

“느낌이 다르거든요.”

그대로 곽수환을 올려다보며 제 젖꼭지가 있는 부분을 꼬집기까지 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하반신으로 피가 쏠리고 있었다.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는 건 곽수환이 아니었다.

석화의 가슴으로 손을 미끄러뜨리자 손바닥이 화상을 입은 듯이 화끈거렸다. 석화가 놀랍게도 제 몸을 더 맞대어왔다. 석 박사가 왜 이러는지 이제야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쾌감에 노출되어 본 적이 없어서, 낯설고 기분 좋은 감각에 저 자신을 무방비하게 내놓는 것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석화가 딱 그 짝이었다.

곽수환은 가운 안에 손을 넣어 석화의 가슴을 더 밀착하듯이 밀었다. 작고 예민한 유두가 손끝에 걸려 안 그래도 달았던 입에 갈증이 찾아왔다.

석화의 허리를 둘러 안고는 밴드를 두른 새끼손가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반쯤 잘렸던 손톱이 자라는 중이라 간지러운지 석화가 어깨를 울렸다. 스윽, 손등을 타고 올라가 손목을 감싸고는 허리를 한 번 더 끌어당겼다.

석화도 제 체온보다 시원한 곽수환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힘도 없는 주제에 평소 돌을 꼭 쥐는 것처럼 커다란 몸을 전부 감싸 안으려고 했다.

“시원해요, 곽 소령님.”

이건 그냥 저를 좆돌 취급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곽수환은 석화의 정수리에 턱을 가볍게 기대면서 다정한 말투를 자아냈다.

“석화 씨.”

그 부름에 석화가 고개를 들었다. 곽수환도 턱을 떼어내고 얼굴을 바라봤다.

“이러면 안 돼, 우리 아직 어머니가 반대하시잖아.”

일부러 짓궂게 말했으니 헛소리 말라며 인상이라도 찡그릴 줄 알았건만, 표정은 여상했고 눈도 맑았다.

“역할놀이 같은 건가요? 곽수환 소령님 보는 소설 보니까 그런 게 있던데요.”

곽수환이 웃는 낯으로 미묘하게 인상을 구겼다. 의학이나 과학서적만 보던 석화인데 이젠 별 지식이 다 생겨버렸다.

“백신을 가져온 포상이야? 아니면 좆돌을 선물한 보답인가.”

무슨 보답? 석화는 그런 얼굴을 했다가 곧 알아차렸다.

‘석 박사, 보답은 조만간에 해줘.’ 돌을 주면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과천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그럴 기회조차 생기지 못했다.

“돈 드릴까요?”

“나 돈 많다고 했잖아.”

“그럼?”

곽수환이 연구실에 걸린 벽시계를 흘끔 보더니 다시 석화를 내려다보았다.

“5분 남았는데.”

곽수환은 저를 감싼 석화를 벽 쪽으로 밀었다.

“그 시간 다 털어서 키스할까?”

제아무리 석화라도 키스는 됐다고 거절할 줄 알았다. 저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며 정자나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석화가 작게 입을 벌렸다. 처음 키스할 때 입 벌려 보라고 말했던 것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지퍼를 채우듯 꾹 다물고 있더니…….

곽수환은 이 쾌감에 약한 박사를 어찌해야 할까 싶었다. 물론 저의 인내심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곽수환이 위에서 아래로 석화의 입술을 깊숙이 포갰다.

뜨거운 숨과 함께 혀에 닿는 석화의 입 안이 달았다. 벽으로 밀린 석화도 간신히 숨을 내뱉고 또 참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귀에 웅웅 울렸다.

석화는 셔츠 안으로 손이 파고드는 것도 모른 채 온몸을 전부 곽수환에게 기댔다. 아랫입술이 살짝 깨물렸고, 빨린 혀가 그에게 잘근 씹혔다. 통증이 아닌 쾌감은 찌릿하게 손끝 발끝을 저미게 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곽수환은 깨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턱까지 입술을 쪼아대며 셔츠를 잡아당겼다.

“하아, 자국 사라졌네.”

목덜미와 상체 여기저기에 빨리고 씹힌 자국은 일주일 사이에 지워져 버렸다.

곽수환은 툭툭 석화의 셔츠 단추를 풀고는 매끈한 쇄골을 거세게 빨아들인 채 잘근거렸다. 석화의 발끝이 꼿꼿하게 섰다. 뭉근하게 비벼오는 하반신에 석화는 저도 모르게 좀 더 그에게로 몸을 한껏 맞댔다. 다시 올라온 그와 입술을 포개었다. 타액이 지나간 자리는 시원하고도 화끈한 감각을 선사했다.

“파스……. 같아요.”

돌에 이은 파스 취급에 곽수환은 기막힌 듯 웃으며 몸통을 울렸다.

“더 시원하게 해줄게. 입 더 벌려봐.”

석화가 숨이 필요해 얼굴을 피하니, 그가 부지런히 따라와 숨을 빼앗아갔다.

키스만으로는 부족해진 곽수환이 자꾸만 석화의 몸 이곳저곳으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셔츠가 다 풀어헤쳐져 석화의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식욕마저 돌게 하는 몸에 더는 참을 재간이 없었다. 젠장, 곽수환은 두 팔을 석화의 엉덩이 밑에 교차해 잡고는 확 들어올렸다. 작은 유두가 바로 코앞이었다. 크게 베어 물었더니 머리카락으로 석화의 손이 파고들었다.

“읏!”

너무 거칠었나 싶어 입을 떼어내자 한쪽 가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팠어?”

“조금……. 근데 시원해요.”

혀로 달래듯이 부드럽게 눌러주니 긴장했던 석화의 몸도 점차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엉덩이를 움켜쥐려는 때였다.

[야! 안 오냐? 20분 넘었어.]

곽수환의 제복 안쪽에서 무전이 울렸다.

쯧, 그가 혀로 나머지 한쪽 가슴도 쓱 쓸고는 들어 올렸던 석화를 바닥에 내렸다. 양상훈 덕에 정신이 번쩍 들어버린 탓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곽수환이 애써 흥분을 내리누르고, 석화의 두 팔을 제 어깨에 올리게 했다. 참느라 힘이 꽉 들어간 손으로 셔츠 단추를 꼼꼼하게 채웠다. 멍한 얼굴로 붉어진 뺨을 한 석화를 보며 웃었다.

“역할놀이는 여기까지. 갈게.”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석화의 머리카락을 쓱 헤치고는 뒤를 돌았다. 석화는 저도 모르게 소매를 잡으려 했지만, 기력이 다해 손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문을 향해 걷던 곽수환이 돌연 빙글 돌아 다시 석화를 바라봤다.

“혹시 내가 또 무리하게 덤벼들면.”

석화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른 채 키스의 여운에 멍해 있었다.

“그 좆돌로 찍어버려.”

여태 몸이 붕 뜬 것만 같았는데, 그제야 주머니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곽수환이 무리하게 덤벼든 적은 없는데……. 오히려 제가 그에게 덤벼든 것만 같았다.

[안 오냐고! 지금 빨리 복귀하라고 지랄 났어!]

곽수환이 무전기를 꺼내 거칠게 답했다.

“지금 간다고, 새끼야.”

개방합니다, 마더의 목소리도 거의 동시였다. 그가 손을 흔들고 밖으로 나가버렸기에 또 언제 오냐는 말은 미처 묻지도 못했다. 다만 곽수환의 손길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는 것, 그것 하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

‘얼굴도 들지 마. 네 얼굴 볼 때마다 내 기운도 빠져, 재수 없다고.’

석화는 한 손에 돌을 쥔 채 저에게 폭언을 퍼부은 녀석을 쳐다봤다.

같은 S클래스 수업을 듣는 학습센터 동기였는데, 늘 제게 시비를 걸곤 했다. 저 녀석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폐를 끼친 기억도 없었다.

‘돌로 나 찍으려고? 그러기만 해봐? 우리 아빠한테 얘기해서 너 가만 안 둬. 울 아빠 누군지 알지? 레인보우 시티 육군 대령이거든?’

그럴 생각도 없었던 석화는 자신이 쥐고 있던 돌을 내려다봤다. 이건 무기 같은 게 아니다.

‘……안 찍어.’

‘왜, 아빠한테 이른다니까 무섭냐? 거지 새끼 주제에 S클래스 수업 같이 듣는 것도 완전 재수 없다고.’

석화는 녀석을 무시하고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빠도 없는 새끼 주제에! 너희 엄마도 너도 기생충이야! 거지 주제에 제주도에서 기생하는 거 사람들도 다 알거든?’

그 말에 우뚝 멈춰 섰다. 석화는 돌을 쥔 채로 뒤를 돌아봤다. 씩씩거리던 녀석이 이번에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기생충은 박멸됐어.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자가면역질환이 많이 생기게 된 거야.’

제대로 알고 말해.

석화는 그 말까지는 하지 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처음 S클래스에 추천을 받아 올라왔을 때부터 호의적인 동기들은 없었다. 똑똑하고 예쁘장한 외모 덕에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에게는 예쁨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만날 골골대고 웃지도 않고,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나중에는 다들 신경도 안 쓰기 시작했다.

석화도 저 자신이 걸리적거리고 귀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 운 좋게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먹을 것, 입을 것을 실컷 누리지는 못했다. 아침은 배급받은 쌀로 누룽지 죽을 해 먹었고, 점심은 학습센터 급식소에서 해결했다.

원래도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 위장이 아니라, 잘 상하지 않는 빵이나 견과류 등을 반찬통에 옮겨 담아 때때마다 꺼내 먹었는데, 그걸 본 녀석은 그 이후로 거지라고 놀려댔다.

사실 누가 뭐라고 하든 석화는 별 상관 없었다. 집에 가면 저를 사랑해주는 엄마가 있었고,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도 듬뿍 받고 자랐다.

수업이 끝난 시각이면 석화는 해변에서 돌을 줍고는 했다. 그리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밖에서는 아담 때문에 많이 힘들다고 하는데 제주도는 늘 청정했다. 물론 평생 이곳에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의식주를 해결했으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또한 학습센터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매일 하루에 두 시간, 학생들은 마더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교육방송을 들어야 했다.

레인보우 시티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연거푸 반복해 말했고, 소속된 시민이 아니기에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화면에 보여주고는 했다. 또한 반군에 대해서도 절대 그 사상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며 주입식 교육을 매일같이 해댔다.

아이들은 금세 레인보우 시티에 자부심을 가졌다. 이 훌륭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며, 저 자신 또한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세뇌에 물들었다. 그러나 석화는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사상 주입은 별반 통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같은 영상이 지겨워 그 시간만 되면 다른 생각을 했다. 물론 선생들이 지켜보고 있었기에 눈은 화면을 향해 있었다. 평소에도 멍한 일이 태반인지라 영상을 멍하게 봐도 그 누가 뭐라고 하는 일은 없었다.

[행복한 도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아담은 우리의 주적, 반군을 물리치자, 레인보우 시티 안에서 안전과 행복을, 우우~ 랄라라 랄라라.]

석화는 틀어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에 설핏 미간을 구겼다. 실험용 쥐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저 노래에 정신이 들어버렸다. 에덴동산이 개발한 백신 성분은 유전자 기계가 감식했고, 석화는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녀석에게 투여한 지 12시간 정도 지났죠?”

김 박사는 실험용 쥐에게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의 일부를 주사했었다. 주사를 맞은 쥐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는 듯 여태까지 케이스 안을 돌아다녔다. 에덴동산이 백신을 배포했다 하더라도 직접 제 몸에 주사를 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기에 섣불리 주사를 놓지는 않을 테니까.

“듣자하니 이걸 뿌린 에덴동산 놈들이 지역마다 랜덤으로 영상을 띄웠다더라고요.”

석화는 그제야 김 박사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영상이요?”

“예. 백신을 직접 맞고 아담혈액을 주사하는 영상이라고 하던데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서펀트……라나? 어쨌든 에덴동산에서 높은 직급이라는데, 그자가 직접 백신을 맞은 뒤에 아담 혈액을 주사했는데 변이가 안 됐대요. 근데 뭐, 그것도 훼이크일 수도 있죠. 그걸 봐도 사람들이 쉽게 자신에게 백신을 투여하지는 못할 거고요.”

“김 박사님.”

“예.”

“김 박사님은 소식이 참 빠르신 것 같아요.”

김 박사가 놀란 눈을 했다. 석화가 이런 식으로 말에 뼈를 담아서 돌려 말한 것을 몇 번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하, 그런가요?”

그는 멋쩍다는 듯이 뒷목을 쓸어내렸다.

“오양석 박사님을……. 총으로 쏜 사람이 곽수환 소령님이라고 소문 내셨잖아요. 왜 그러셨어요?”

김 박사는 어째서인지 곽수환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에게 해코지 당한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그 소문은 제가 낸 게 아닌데……. 그렇게 너무 매몰차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기분이 좀 그러네요.”

석화는 여태 김 박사를 마주하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마음에만 담아둔 의혹이 있었다.

“김 박사님. 저도 그 소년이 왜 아담으로 변했는지 알아요. 아담의 혈액 때문이죠. 그런데 소년이 그걸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요?”

아무것도 관심 갖지 말라던 곽수환의 충고가 무색해질 만큼 석화는 좀 더 사건의 본질로 다가가고 싶었다.

“설마……. 절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헌병대에 밀고라도 하실 생각이면 아무리 저라도 화가 날 것 같은데요. 저는 이미 아무 문제 없이 조사 받고 나온 사람입니다? 오히려 양상훈 소령이나 곽수환 소령이 더 의심스럽지 않으세요? 그 소년을 데려온 게 곽수환 소령이라면서요. 그래서 과천으로 좌천된 게 아닙니까? 심지어 이번에 백신을 가져온 군인들도 그 둘이라면서요.”

김 박사의 말도 틀린 건 없었기에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그래도 몸수색을 전부 마친 소년에게 혈액을 넘겨줄 사람이 양상훈이나 곽수환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김 박사에게 의혹을 품었던 건데, 어쩌면 제가 모르는 전혀 다른 쉘터의 사람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김 박사님을 조금 의심했던 건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석화가 깔끔하게 사과하자 김 박사가 허허, 황당하다는 웃음을 흘렸다.

“섭섭하네요. 그래도 우리가 함께 지내온 시간이 더 많을 텐데, 어떻게 곽수환이나 양상훈 소령한테 마음을 더 주십니까? 그 둘 전부 다 레인보우 시티 밖에서 온 이들입니다. 애초에 우리 시민도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믿지 마시라고요. 줄을 서실 생각이라면 차라리 이채윤 소령님이 더 낫죠. 이 소령님 집안은 재력도 짱짱하고 레인보우 시티에서도 인정한 명예가문 아닙니까?”

곽수환과 양상훈이 레인보우 시티 밖에서 왔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곽수환이 밥을 준다고 해서 군대에 자원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이곳의 시민이 아니었다는 말은 없었다.

“슬슬 시간도 됐으니 진행해볼까요?”

김 박사가 백신이 투여된 세 마리 쥐가 담긴 케이스를 들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일반 연구실 안쪽에 마련된 생물안전3등급 연구실이었다.

“예, 가요.”

그곳에 7차 아담의 혈액이 있었고, 김 박사와 석화는 방역을 거쳐 전염에 대비해 안전복으로 갈아입었다. 준비 시간만 근 30분을 잡아먹은 뒤에야 보관 중인 7차 아담 혈액을 세 마리 쥐에게 투여할 수 있었다.

실험 장면은 전부 마더가 촬영 중이었다. 당연히 석화와 김 박사도 쥐의 상태를 면밀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찍, 찌직, 찍, 갑자기 그중 한 마리가 성질을 내면서 입을 크게 벌리고 울어댔다. 마치 아담으로 변이하기 직전의 모습과도 흡사했다. 그러자 나머지 두 마리도 울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진짜 거짓말이었나 본데요. 주사한 사람들 있으면 큰일이겠네.”

방호복에 가려진 김 박사의 목소리가 멀었다. 그러나 석화는 계속 쥐들을 주시했다. 이미 변이되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인데도 쥐의 면역기능이 바이러스와 싸우듯 한참을 버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박사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던 놈이 멀쩡히 케이스를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두 놈도 시간차를 두고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설마 싶었는데 어쩌면 정말 완벽한 백신일지도 몰랐다.

석화와 김 박사는 서로 마주보다가 서둘러 세 마리 쥐의 혈액을 채취했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개발한 아담 바이러스 혈액 검사키트에 떨어뜨렸고, 결과는.

“음성이네요.”

김 박사가 대신 대답을 주었다.

***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이 넷이 외부에 알려진 에덴동산의 사인장로였다.

서펀트에 대해서는 알음알음 소문으로만 퍼져 있을 뿐 정보가 희박했다. 그런 놈이 가면을 썼다고 해도 모습을 드러냈으니, 앞으로 에덴동산이 어떤 식으로든 실력행사에 나서겠다는 소리밖에 안 됐다. 그날 이채윤이 붙었던 놈이 정말로 서펀트라면 적어도 S클래스급 이상일 테고, 놈이 부리던 놈들도 최소 A급이었다.

시티의 군인 외에 그 정도 전력을 가진 반군이 있다는 건 엄청난 위협이었다. 세컨드 마스터가 에덴동산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계속 뒤를 캐던 이유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그런데 세컨드 마스터는 어떻게 에덴동산이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을 미리 예견했을까?

그건 곽수환의 머리를 맴도는 의문 중 하나였다.

“크어어! 칵!”

곽수환은 제 무덤인지도 모르고 덤벼드는 아담의 머리를 붙들어 벽에 박살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하나둘 소리를 듣고 올라오는 놈들을 향해 권총을 갈겼고, 뒤에서 엄호하는 헌병대들에게 소리쳤다.

“정리 될 때까지 진입하지 마!”

비좁은 계단인 터라 아군이 얽히면 오히려 방해였다. 변이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놈들인데, 레인보우 시티의 군번줄을 달고 있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차 중령, 권총 던져.”

뒤따라오던 차 중령이 재빨리 권총을 던졌고, 곽수환은 계단 끝까지 막힘없이 내려갔다. 코너를 꺾어 플래시로 안을 비추는 순간이었다.

캭캭! 플래시 불빛에 피칠갑 된 얼굴을 들이대는 아담이 이를 닥닥거리면서 덤벼들었다. 총알도 아까워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뜯어 버렸다. 쓰러진 놈의 머리통을 발로 밟고, 달려드는 놈들의 이마에 바람구멍을 뚫어주니 시끄러운 아담의 소리가 잠잠해졌다.

크어어어, 기괴한 소리를 내는 마지막 놈의 허벅지를 총으로 쏘자마자 뼈가 박살난 놈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와중에도 이쪽으로 기어오려고 하는 게 용했다. 늘어진 셔츠 밖으로 나온 군번줄을 끊어내 뒤통수를 가격하는 것으로 숨통을 끊어주었다.

“클리어. 진입해.”

곽수환이 무전기를 다시 제복 안쪽으로 되돌렸다. 계단에서 대기 중이던 헌병대원 다섯이 재빨리 곽수환에게 합류했다. 피비린내와 썩어가는 살 냄새는 폐쇄된 공간일수록 유독 더했는데, 지금 이곳은 시체 썩는 냄새보다는 피비린내가 좀 더 짙었다.

이런 냄새에 익숙한 헌병대들이지만, 역한 건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 금세 피로해져 무뎌질 후각을 믿을 뿐이었다.

“라이트 켜봐.”

그의 말에 헌병대원 하나가 군용으로 제작된 야간 산행 플래시를 중앙에 가져다놨다. 옆에 아담의 시체가 있었기에 뒤통수가 뚫린 기괴한 얼굴이 고스란히 빛에 반사됐다. 곽수환은 그 시체를 발로 차고는 지하 벙커를 천천히 둘러봤다.

예상하기로 7차 백신이자 7차 이브가 만들어진 장소였다.

“필요한 거 싹 다 챙겨서, 21 바이올렛 헌병대대로 가져다 놔.”

라저. 군기가 바짝 들어간 헌병대원들이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회수하라고는 했지만, 에덴동산이 이 벙커를 버리면서 웬만한 것들은 다 챙겨간 뒤였다. 남은 건 책상이나 자잘한 도구들, 그리고 저희들을 엿 먹일 셈으로 남겨둔 아담이 전부였다. 그것도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들로 구성된 아담들 말이다.

이놈들을 납치해서 인체실험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회유하려고 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변이된 지는 길어봐야 사나흘쯤 되었을 법했다.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라면 몸에 일명 개목걸이라 부르는 칩이 내장되어 있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일은 극소수였다. 석화의 경우도 수석 연구원이었기에 GPS 관제탑이 열린 것이고, 일반 군인들이 사라졌다면 아담과 싸우다가 죽었겠거니 여길 뿐이었다. 이놈들이야말로 총알받이지. 곽수환이 군번줄을 손에서 한 바퀴 굴렸다.

벙커의 중앙 벽면에는 잎이 풍성하고 수많은 줄기를 가진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생명의 나무. 에덴동산을 뜻하는 마크였다.

“백신을 배포하기 전에 이미 정리를 하고 뜬 것 같습니다.”

차 중령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생각을 전달했다.

백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고,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루트가 까다롭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산맥을 낀 지역은 아닐 터였다. 또한 레인보우 시티로 지정된 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똬리를 틀어 앉았을 거다.

곽수환이 몇 군데를 추려 조사하라고 지시한 결과, 의정부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에덴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다. 이채윤이 불태우고 온 저 위쪽은 놈들이 의정부로 내려오기 전에 거친 장소인 듯했다.

“죽은 놈들 목에 있는 군번줄 다 회수해서 유가족들한테 넘겨.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었다고 전하고.”

곽수환은 쥐고 있던 군번줄도 차 중령에게 넘겼다.

“제가 책임지고 전달하겠습니다.”

“나 먼저 간다. 대충 정리하고 여의도로 올라가.”

“예, 들어가십시오.”

차 중령을 비롯해 나머지 헌병들도 곽수환이 사라질 때까지 경례를 유지했다. 계단을 올라온 그는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었다. 하도 기괴하게 생긴 놈들만 봤더니 심미안이 망가지는 것만 같았다. 멍한 석화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저도 모르게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연비 안 좋은 석 박사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가장 마지막으로 보고를 받은 건 오늘 오전이었다. 자신의 지휘 하에 있는 바이올렛 구역의 헌병대를 소집한 게 오늘 오후였기 때문이었다. 차 중령을 통해 오전에 받은 사진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국을 떠먹는 모습이었다.

서펀트만큼이나 여의도 쉘터 윤 대장이 걸리적거렸다. 놈이 마음만 먹으면 석화에게 반군 사상을 뒤집어씌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곽수환은 한동안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라 생각했는데, 하루마다 어떤 재밌는 사진이 오려나 쓸데없는 기대까지 들었다.

[과천 쉘터입니다. 응답 바랍니다.]

곽수환의 지프에서 무전이 울렸다. 그는 담배를 태우며 느긋하게 걸어가면서 무전을 들었다.

[곽수환 소령님, 과천 쉘터입니다.]

“말해. 무슨 일이야.”

[곽수환 소령님을 뵙고자 여의도 쉘터에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여의도 쉘터? 곽수환은 무전기 가까이에 입술을 대고 물었다.

“누군데.”

치직 하는 잡음이 섞여 들리고, 그와 반대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곽수환 소령님.]

석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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