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 wall (3)
곽수환은 지프를 몰며 의정부에서 과천으로 돌아가는 동안 달려드는 아담 몇을 차로 들이받아야 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그 숫자가 많았고, 하나같이 군복 차림이었다. 이 구역에서 에덴동산 놈들이 군인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석화가 과천을 내려왔는지 이유는 듣지 못했다. 설마 자신이 보고 싶어서 내려온 건 아닐 테고. 심지어 목소리조차도 밝지 않았다.
“뭐, 언제는 해맑았냐마는.”
곽수환이 창문을 열고 몸에 남은 담배 연기를 털어냈다. 의식적으로 틀어둔 라디오에서는 레인보우 시티의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이따금 레인보우 시티의 지령이 담긴 *난수방송(암호방송: 숫자나 단어, 문자의 나열을 조합한 난수를 이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파방송)이 나오는 때가 있기 때문에 지프에 탈 때는 웬만하면 라디오를 틀어두고는 했다. 퍼스트 마스터 놈들의 꿍꿍이가 담긴 난수방송을 해석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신흥종교 에덴동산이 평화로운 레인보우 시티를 뒤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파수를 해킹하는 중범죄를 저질렀으며, 확실하지도 않은 백신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신흥종교라고는 하지만, 실제 에덴동산이 만들어진 건 생각보다 꽤 오래됐다. 그때는 그만그만한 신흥종교 중 하나였으니 덩치를 키운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이 어지럽고 살기 힘들수록 종교가 좀 더 힘을 발휘하고는 했는데, 그런 면에서 에덴동산이 백신을 들고 나온 건 엄청난 믿음을 불러일으킬 구원이었다. 이번에 제대로 자리를 잡는다면 아마 레인보우 시티도 다루기 힘들 만큼 신도가 많아질 거다.
[우리 훌륭한 시민들은 잘 들어주십시오. 방금 레인보우 시티의 여의도 쉘터, 강남 쉘터, 강북 쉘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같은 결과가 전달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을 조사한 결과, 아무 효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창문을 열어둔 터라 바람소리가 시끄러웠기에 볼륨을 한껏 올렸다.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니 시민들은 절대, 절대로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을 투여하지 마십시오. 각 지역에 군대가 투입되어 에덴동산이 뿌린 가짜 백신을 회수중입니다. 직접 백신을 가져오는 시민에게는 레인보우 시티의 포상금이 주어집니다. 현명한 시민들은 가짜 백신과 거짓 이야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선량한 시민을 지킬 울타리는 오로지 레인보우 시티뿐입니다.]
곽수환이 픽 웃었다.
백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보니 여태 봐온 레인보우 시티의 특성상 백신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스터들이 똥줄 좀 타시겠는데.
곽수환은 다시 담배를 꺼내들까 하다가 과천 쉘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고 마음을 접었다. 가뜩이나 약한 석 박사가 폐까지 아프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여태 여러 돌연변이를 보면서 별의별 이상한 특성을 봐왔지만, 돌에 집착하는 사람은 석화가 처음이었다.
사실 돌을 모으거나 가지고 다니는 건 딱히 제어할 필요가 없는 특성이기는 했다. 돌을 좋아한다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니, 어쩐지 그마저도 석화답다 싶었다. 만약에 석화의 집착특성이 성욕이었다면 큰일 날 뻔했겠지.
곽수환은 과천 쉘터 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신분을 확인받았다. 몇 대의 지프가 과천 쉘터를 벗어나는 게 보였는데 백신을 회수하러 가는 길인 듯했다.
그는 여의도 쉘터와는 다른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프에서 내렸다. 겨울이 지나가려면 아직 멀었는지 하얀 입김은 여전했다. 그래도 습한 여름보다는 겨울이 더 낫지. 여름에는 아담 바이러스만큼이나 전염병도 기승을 부리는 데다가 아담 썩는 냄새도 최악이었다.
곽수환은 방역소로 들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봤다. 아담의 피가 묻은 제복을 벗은 뒤 전라가 돼서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석 박사를 만나러 가는데 말끔은 해야겠지. 턱에 튄 피를 샤워기의 물로 씻어내고 세균 제거력이 높은 비누로 제 몸을 닦았다.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리고 머리는 대충 손으로 세팅했다.
쉘터 직원이 준비해둔 제복과 평상복 중 편한 옷을 선택해 군번줄을 셔츠 안으로 넣었다. 혈액 검사까지 마치고 나오니, 석화가 무전을 울린 시간으로부터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라지는 것을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방역소 지하에서 로비까지 한달음에 달려 올랐고,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석화 박사가 나 찾아왔다며.”
곽수환은 쉘터 로비를 지키는 군인에게 대뜸 물었다.
“예, 안 그래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곽수환이 주변을 둘러보는 때였다.
“야! 새끼야! 넌 어디 갔다가 이제 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니 이채윤이 케이프를 날리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손님용 긴 의자에 앉아있는 석화가 보였다. 일전에 봤던 통통한 배낭이 옆에 놓여 있었고, 그사이 계란을 까먹었는지 휴지 위에 껍데기가 보였다.
커다란 눈을 한 석화와 시선이 마주쳤는데 어쩐지 평소보다 핏기가 더 없어 보였다.
“재수 없어. 그렇게 아이컨택 하지 마.”
이채윤이 우웩 토하는 시늉을 했다.
“사람을 볼 때 눈을 봐야지, 그럼 어디를 봐.”
석화도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껍데기가 놓인 휴지를 감쌌다. 이리로 걸어오는 것보다 빠르게 곽수환이 석화에게 다가갔다.
“야, 박사님이 나보고 과천 가자고 했다?”
이채윤도 바짝 옆에 붙어서 걷는 중이었다.
“전에도 그랬다면서.”
“아냐, 전에는 내가 가자고 한 거고. 오늘은 박사님이 말한 거야.”
뭐야, 전에는 이 소령이 가자고 한 거였어? 하긴, 아무렴 어떤가.
곽수환은 석화를 보고 씩 웃었다.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어디 다녀오세요?”
석화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확실히 더 기운 없었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곽수환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이채윤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이 소령, 여기 3층에 매점 있거든? 가서 까까 사 먹어.”
“까까 같은 소리 하네. 그냥 자리 비켜달라고 하지?”
“그런 눈치도 있었어?”
이채윤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서 엿을 날리더니 석화를 향해서는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석화가 이채윤에게 고개를 꾸벅했다. 3층으로 이동하는 이채윤의 뒷모습을 보다가 곽수환이 먼저 석화의 배낭을 들었다. 뭘 잔뜩 넣어 가지고 왔는지 생각보다 무게가 느껴졌다.
“사람이 없는 데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무슨 심각한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었다.
곽수환은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쉘터 내부가 아니라 밖을 선택했다. 한쪽 어깨에 배낭을 메고 나서야 석화의 손목을 쥐었다. 나가자. 말을 하자 석화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은 건물을 나와 벤치가 놓인 정원으로 걸었다. 이 시간에 산책을 하는 군인은 없었기에 벤치 주변으로는 둘밖에 없었다. 곽수환은 얇은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지만 크게 추위를 느끼지는 못했다. 석화도 시원하게만 느껴지는 공기에 갑갑했던 숨통이 좀 트이는 것도 같았다.
“석 박사, 안 그렇게 봤는데 엄청 끈질기네.”
벤치에 나란히 앉고 나서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곽수환이었다.
“여기까지 정자를 얻으러 와?”
석화는 곽수환을 향해 휙 몸을 틀었다. 몸을 제게 더 기울여 오는 바람에 곽수환은 진짜 석화가 몸이 달아서 왔나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하얗고 무기력해 보이는 입김이 석화에게서 흘러나왔다. 하얀 얼굴에서는 한기마저 느껴졌다.
“백신이 진짜인데 가짜라고 발표를 한대요.”
꽉 쥔 주먹을 허벅지 위에 얹으니, 티슈에 싸인 계란 껍데기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곽수환은 석화의 손을 펴서 껍데기가 박힌 데는 없나 살폈다. 대신 티슈를 가져가 돌돌 말아서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그래서?”
곽수환은 뭐가 문제냐는 듯 웃는 낯으로 물었다. 석화는 입을 작게 벌리고 당황스러운 눈을 들었다. 무표정한데도 어느 순간부터 석화의 감정이 잘 읽혔다. 다른 곳은 몰라도 눈만큼은 감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곽수환은 그 까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가짜라고 발표를 했거든. 레인보우 시티에서 가짜라고 하면 가짜인 거지.”
“진짜인데도요?”
“라디오에서 들어보니 각 쉘터에서 시험해본 결과 효용이 없었다던데.”
“아니에요. 아직 사람에게 투여한 적은 없지만, 쥐들은 백신이 효과가 있었어요.”
석화는 곽수환이 한쪽에 메고 있던 배낭으로 손을 뻗었다. 그랬더니 곽수환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팔짱을 꼈다.
“그거 때문에 나를 찾아온 거야?”
그가 무감각하고도 냉랭하게 말하니 석화는 말문이 막혔다.
“백신이 진짜인데 가짜라고 발표했다는 것 때문에? 내가 전에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박사님은 다른 생각 말고 연구나 하면 된다고.”
하아, 숨이 길게 나와 눈꺼풀에 습기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백신이 진짜면, 성분을 알아내서 레인보우 시티에서 만든 거라고 발표하면 그만이잖아.”
순간 착각할 뻔했다. 그는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었다.
원래는 이곳의 시민이 아니었다는 말에 혹시나 저에게 동조해주지 않을까 싶었던 건가.
석화는 무엇 때문에 과천으로 왔는지조차 혼란스러워졌다. 백신이 효용이 있다고 윤 대장에게 보고를 하니, 그는 레인보우 시티의 안정을 위해 일단은 가짜로 발표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 말은 곽수환과 같았다. 우리가 대량 생산하면 그만이라고.
“왜 거짓말을 해요?”
“연구랑 정치는 별개고, 정치에 거짓말은 필수니까.”
“그럼 에덴동산이 더 나은 거 아닙니까? 거긴 적어도,”
“석화 박사님.”
곽수환이 석화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에덴동산 놈들이 백신을 개발하던 지하벙커에 다녀왔거든. 근데 거기에 아담이 꽤나 많더라고? 그 아담들이 전부 우리 군인이었어.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에덴동산 놈들이 우리 군을 납치해서 실험을 하고 아담으로 만든 거야.”
“…….”
“여의도로 돌아가. 그리고 오양석 박사는 내가 진범 잡아서 석 박사 앞에 데려다 줄 테니까 이제 그만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고.”
석화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더니 곧 손을 쓱 뻗었다. 곽수환이 걸치고 있던 배낭을 가져와 팔을 하나씩 넣어 직접 등에 멨다.
“갈게요.”
“들어줄게.”
곽수환은 배낭 고리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곽 소령님은 이 모든 게……. 이상하지 않으세요?”
겉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지만, 석화의 안에서는 용암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좀 이상하면 어때. 등 푹신하게 잘 수 있는 침대 있고, 밥 제때 나오고, 물도 마음대로 마시고 쓸 수도 있는데. 석 박사가 의문을 갖는 거 나도 충분히 이해해. 근데 때로는 그냥 수긍하면서 사는 게 답일 때도 있어. 엘리트로 자라신 박사님은 신나고 스릴 있는 모험이 그리울지 모르겠지만,”
“갈게요.”
석화는 곽수환이 잡고 있는 배낭 고리를 제 힘으로 떼어냈다.
“데려다줄게.”
“이 소령님과 가겠습니다.”
배낭의 양 끈을 손으로 꽉 잡고는 건물 안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석화를 따라가려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목소리만 키웠다.
“내가 직접 헌병대로 넘기기 전에 그만 생각 접어.”
천천히 뒤를 돌아본 석화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이거 마지막 충고야.”
아무래도 석화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
같은 시각, 제주도 우도.
지잉, 지이잉, 전동휠체어가 방향키를 잡은 남자의 손에 움직였다.
거실의 유리창 가까이 휠체어를 이동하자 저 반대편에 있는 가파른 절벽이 보였다. 고즈넉한 풍경에 어우러지는 저택은 철창도, 아담의 공격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었다. 밤낮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공기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마더에게서 영상이 도착했습니다.”
남자는 집사의 목소리를 듣고도 새까만 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지치고 무료하지 않나?”
주인의 질문에 집사가 휠체어로 다가왔다. 집사는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는 방향을 돌려주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안전하고 여유로운 곳이 달리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지 않아.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마스터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희는,”
“어차피 농담에 불과하지.”
세컨드 마스터는 손잡이를 잡은 집사의 손을 두드렸다. 집사도 더는 말을 않고 마스터의 집무실로 휠체어를 끌었다. 문이 잠긴 집무실은 세컨드 마스터만이 개폐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 올려 패드에 지문을 인식했다.
“여기부터는 나 혼자 이동하겠네.”
“예,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마스터는 다시 방향키를 조종해 복도를 거쳐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집무실 중앙에는 책상이 놓여 있었고, 왼쪽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짜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벽면은 세컨드 마스터가 정리 중인 에덴동산과 연구에 필요한 내용들이 적힌 유리 보드가 있었다. 휠체어에 타 있었기 때문에 일정 높이 이상부터는 유리가 깨끗했다.
“마더, 레인보우 시티 세컨드 마스터의 접속을 허가하라.”
메인 컴퓨터에 접속한 마스터가 목소리를 냈다.
[세컨드 마스터 음성인식 완료. 마더 서버를 전부 개방합니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AI기능이 탑재된 지금의 마더를 각 쉘터에 구축한 사람이 세컨드 마스터였다. 그는 학자이며 정치가였고, 레인보우 시티의 마스터이기도 했다.
마스터는 과천 쉘터에서 송출해온 마더의 영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로비에 있던 곽수환과 석화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감시 카메라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모습을 다시 드러낼 때까지 마스터는 책상에 놓인 둥근 마노를 굴렸다. 푸른빛이 도는 석영광물은 말의 뇌수를 닮았다 하여 마노라 불린다 했다. 마치 제주 바다의 색을 담은 듯 오묘하게 일렁이는 마노는 마스터가 아끼는 광물 중 하나였다.
로비로 들어온 석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 어딘가로 향했고, 이후에 이채윤과 합류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 이후로는 곽수환이 그들에게 다가갔으며, 지상 주차장으로 가는 뒷모습이 찍힌 게 전부였다.
석화가 곽수환을 찾은 이유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었다. 어쩌면 에덴동산이 내놓은 백신 때문이겠지. 한데 의아한 건 제가 아는 석화는 이다지도 능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엇이 석화를 자극한 것일까? 오양석의 죽음을 비롯해 납치사건이 한몫했던 건가.
그것도 아니면 곽수환이…….
마스터는 쓸데없는 사견을 집어치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마더, 서펀트의 위치가 확인되나?”
[로딩 중. 서펀트의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외모, 나이조차 확실하지 않으며 서버에는 서펀트의 음성 자료만 등록되어 있습니다. 음성 자료를 바탕으로 추적 중입니다.]
“목소리 변조 프로그램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서펀트의 보이스 프린트를 분석한 결과, 거센소리의 자음을 발음할 때 음성이 분리되는 현상이 보입니다. 인간의 청각 영역대로는 듣지 못합니다.]
“알겠네. 서버를 닫지.”
[개방한 서버를 닫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마스터.]
톡, 톡, 마노로 책상을 두드리던 마스터가 피곤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원호에 이어 오양석마저 죽었다. 심증은 늘 그렇듯 충분히 있었다.
마더의 감시 카메라를 중지시킬 수 있고, 편집할 수 있는 건 퍼스트 마스터도 해당됐으니까.
“오 박사, 당신마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세컨드는 퍼스트 마스터처럼 원하는 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원호가 죽고 나서는 오양석 박사의 연구조차도 이곳에서 지지했을 뿐이었다.
그때 퍼스트가 석화를 제주도로 돌아가게 하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지는 않았을 거다. 저에게서 대체 얼마나 더 빼앗아가야 만족할 것이란 말인가. 마스터는 마노를 쥔 손에 잔뜩 힘을 줬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퍼스트 마스터와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이파전도 버거운 마당에 삼파전이 발발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레인보우 시티에 필요한 건 혁명이 아닌 개혁이었다. 그렇기에 에덴동산이 여기서 더 힘을 키우면 곤란해진다. 골치 아픈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곽수환. 지금이야 제 지시를 따르지만 머리가 너무 커버렸으니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세컨드 마스터는 유리창에 다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비손: 곽재원. 기혼: 강손은. 티그리스: 원호. 유프라테스: 오양석. 서펀트: ?]
어째서 전부 원호와 뜻을 함께한 걸까. 당신들도 정말 혁명을 원했나? 같은 사상을 가지고 하나로 뭉쳤던 동료였건만 어느 순간 모두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마스터는 비손부터 유프라테스까지 찍 펜을 그었다. 이제 모두 죽고 없다. 남은 것은 서펀트뿐이었다.
그는 펜을 쥔 손을 기운 없이 늘어뜨리고 휠체어에 몸을 한껏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세컨드 마스터는 오래전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곧 외로워졌다.
***
‘내가 직접 헌병대로 넘기기 전에 그만 생각 접어.’
곽수환이 그렇게 나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레인보우 시티의 다른 시민보다 충성도가 낮을 것이라 석화는 저 혼자 착각했다. 그는 규율을 어겨가며 술집을 털기도 했고, 예의를 차린다지만 상사에게 불량하게 군 적이 더 많았다. 그런 군인은 몇 명 보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착각할 만도 했다.
새끼손가락은 새 손톱이 자랐는데도 시큰거렸다. 석화는 왼손을 감싸고 곽수환의 옆모습을 흘끔 봤다. 이채윤과 같이 올라간다고 했으나, 곽수환은 그녀에게 담배 두 보루를 양보하고 직접 운전대를 쥐었다.
“여의도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어. 좀 자둬.”
“괜찮습니다.”
석화는 더 이상 곽수환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행여 그가 정말 헌병대에 자신을 밀고하면 곤란해지니까.
어째서 레인보우 시티에서는 질문을 해서도 안 되고, 상부의 행동이 전부 옳다고 생각해야 하며,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해야 하는 건지 이상했다. 저는 마더처럼 입력된 시스템 값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오양석 박사가 상부의 지시가 의아하지 않느냐는 말을 몇 번 흘렸는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없이 넘겨듣고는 했다.
상부가 안 된다고 하니까, 지원할 돈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 말을 전부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라디오도 거짓말을 했고, 제 눈으로 본 진짜 백신조차도 가짜라고 발표했다.
만일 이 모든 게 반군 사상이라면, 이미 저는 반군으로 확정이었다.
“설마 삐졌어?”
곽수환이 핸들을 쥔 채로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를 밀고한다고 하셨으니까요.”
석화가 다시 새끼손가락을 손으로 감쌌다.
“아픈 건 싫잖아.”
“싫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석 박사가 원호나 오양석 박사처럼 개죽음을 당하길 바라지는 않아.”
개죽음이라니? 표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석화는 그저 무릎 위의 배낭만 꾹 내리눌렀다.
“곽 소령님은 레인보우 시티…… 시민이 아니었다면서요.”
내내 정면만 보던 곽수환이 고개를 틀어 석화를 보았다. 속도를 줄이자 뒤따라오던 이채윤이 클랙슨을 울리고는 추월해 나갔다. 번개가 치는 것처럼 이채윤의 헤드라이트가 내부를 한껏 비췄다가 사라졌다.
“그건 왜. 이제부터 차별해보려고?”
“아뇨.”
“근데 그런 걸 왜 물어. 다 각자 사정이 있는 거지.”
가벼운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지만, 더는 묻지 말라는 분위기가 농후했다.
“능력이 뛰어나서 시민으로 받아들여진 겁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애매한 대답이었다. 석화가 다시 입술을 떼려 하자 곽수환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오양석 박사의 추천이 없었다면 쉽게 군에 입대하지는 못했겠지. 오양석 박사가 내 보증을 서줬으니까.”
“……박사님이요?”
“혼자 남겨진 내가 안타까웠다는 것 같은데, 나도 잘은 몰라.”
“시민이 아니었는데 박사님이 어떻게 곽 소령님을 압니까?”
끼익-!
고라니 한 마리가 도로로 튀어나왔다. 곽수환은 순식간에 브레이크를 밟고는 석화의 가슴을 손으로 막았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고라니가 이쪽을 휙 쳐다보는데 눈이 멀쩡한 놈이었다. 체구도 작은 것을 보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 같았다. 귀를 쫑긋 흔든 녀석이 이내 반대쪽 숲으로 뛰어들었다.
초식 동물은 천적이 없으니 날로 개체 수가 늘어가고만 있었다. 로드킬을 해도 그 누가 뭐라고 하지 않지만, 저 조그만 녀석을 쳤다가는 석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힐 것만 같았다.
괜찮은가 싶어 석화를 살피던 곽수환이 순간적으로 헛바람을 뱉었다. 가슴을 막은 손을 석화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돌 안 가져왔어?”
돌? 그건 왜?
석화도 시선을 내리더니 곧 손을 펼쳐 놨다. 하도 급하게 나오느라 그의 말대로 돌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방금은 단순히 반사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곽수환은 천천히 액셀을 밟으며 이번에는 일정 이상 속력을 올리지 않았다.
“내가 레인보우 시티 시민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시민이었어. 그리고 그 두 분도 석 박사랑 비슷했고.”
설마 그의 부모가 돌을 좋아하셨나 싶다가도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았다.
“오양석 박사랑 같은 연구소에 있었다고는 하는데, 나도 그분들이 뭘 했는지는 잘 몰라. 자주 못 봤거든.”
곽수환 소령의 부모가 연구원이었다고……?
오양석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할 이유도 없었겠지만.
석화는 그럼에도 놀라운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다. 연구원이었다면 그의 부모에 관한 기록이 분명 쉘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근데 어째서 소령님은 시민이 아니게 됐어요?”
“시티의 허가를 받지 않고 태어났거든. 그렇게 되면 시민으로 받아주지 않아. 석 박사, 진짜 하나도 몰랐어? 제주도 출신이 좋기는 좋네.”
그는 자신보고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 그 점에 대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저도 알고는 있어요. 그런데 연구원이셨고 시민이었는데, 출산 허가를 못 받은 게 좀 이상해서요.”
속도가 일정하니 멀미도 적당히 일었다. 석화는 배낭에서 물을 꺼내 수분을 보충하고 사포닌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건 또 뭐야.”
군것질부터 시작해 이상한 알약을 자주 복용하는 석화였다.
“이것저것 실험해보는 거예요. 체력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는지.”
인삼은 구하기가 힘드니, 콩에서 사포닌을 분리해 복용해보는 중이었다. 물론 연구실에 있는 분취기는 이러라고 구해다놓은 건 아니었다. 그래봐야 삼 일째 복용 중이라 어떤 효과도 보지 못했다.
세상의 어떤 약도 타고난 허약한 체질을 단번에 바꿔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걸었다.
“곽 소령님.”
“응.”
“부모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결혼에 앞서 호구조사 해?”
“그냥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소용없어. 부모님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은 없거든.”
“그래도 성함 정도는,”
“막판에 레인보우 시티에서 눈 밖에 난 것으로 알고 있어. 몰래 아이를 가졌고 숨겨두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내 이야기는 됐고, 설마 석 박사 이름에 ‘화’자가 ‘꽃 화’자는 아니지?”
곽수환이 말을 돌리고 있었다.
“말씀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석화도 더 파고들지는 않고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기만 했다.
“아냐, 진짜 궁금해서 그래. 아니면 ‘불 화’자야?”
석화는 무시했다.
“아아, ‘재앙 화’자구나.”
“이름에 재앙을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쓰면 쓰는 거지 못 쓸 건 뭐야. 성은 ‘돌 석’자 맞잖아.”
정곡이었기 때문에 석화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돌꽃이네.”
곽수환이 소리 내서 웃었다.
“석 박사랑 진짜 잘 어울려.”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전에 석화가 굴이라고 하지 않았나. 손자 성하고 맞춰서 굴 이름을 붙여줄 정도면 할머니가 굴을 엄청 좋아하셨나 봐? 물질하다가 몰래 굴 따 먹고 그러신 거 아니야?”
대체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말하기 싫으면 그냥 말지. 석화는 고개를 창으로 돌렸다.
“음, 굴 맛있지. 야들야들하고.”
곽수환은 살면서 딱 한 번 먹어본 굴의 맛을 떠올렸다. 사실 그 맛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단맛은 인간 석화가 훨씬 뛰어났다.
“굴은 수질 정화능력이 뛰어나대요. 바다의 꽃이라고요. 할머니가 그렇게 남을 도우면서 살라고 하셨거든요.”
어머니는 위험한 일은 다 피하라고 하셨지만.
“좋은 분이셨네.”
“무척이요.”
“그러니까 그 좋은 분 말씀 잘 들어서 시민들을 위해 연구를 하는 게 우리 굴 박사가 할 일이지. 내 정자 받아가기 위해서 야한 짓도 좀 해줘야 하고.”
곽수환이 한 손으로 핸들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엄지를 척 들었다. 이 남자를 알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다. 장난도 곧잘 하고 야한 말도 틈틈이 꺼내는데, 늘 의식적으로 띠고 있는 미소만큼이나 그게 가면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전부 다 지어낸 것은 아니며 좀 전의 웃음처럼 진심이 섞여있을 때도 있었다.
그는 불투명한 세포막에 감싸인 미지의 생명체 같았다. 그래서 석화는 그가 조금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곽수환을 끌어안거나 그가 몸을 만져주는 건 기분이 좋았지만, 이제 머릿속에 있는 건 쉽게 꺼내 보이지 않기로 했다.
여의도 쉘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그제야 속도를 올려서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한 이채윤은 지프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석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또 놀러 와.”
곽수환이 방역소 입구에 차를 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석화는 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곽 소령님, 집착 특성이 뭐예요?”
제가 보기에 그에게는 딱히 집착적인 구석이 없어 보였다.
“맞혀봐.”
“못 맞히겠어요.”
“박사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 있잖아.”
“굳이 연구할 가치가 없는데요.”
순간 곽수환의 입술이 불시에 덮쳐왔다. 석화는 놀란 눈을 하고는 눈만 깜빡거렸다. 키스가 아닌 쪽 소리가 나는 뽀뽀로만 그쳤다.
“데려다준 값.”
조수석의 헤드를 한 팔로 감싼 곽수환이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여기로 다가오는 이채윤이 썩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곽수환은 석화의 배낭을 그녀에게 휙 던졌다.
“잘 모셔가라.”
석화는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눌렀다가 떼어내며 지프 밖으로 두 다리를 내렸다.
그가 집착하는 게 키스인가? 아니, 그건 또 아닌 것도 같았다. 석화가 혀를 슬쩍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곽수환이 조수석 문을 닫기 전에 소리쳤다.
“석 박사, 다음에는 굴이나 같이 먹자고.”
석화는 이채윤에게서 배낭을 건네받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저 굴 못 먹어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쉘터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핸들에 턱을 기대고 석화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봤다. 석화와 함께 방역소로 들어가는 이채윤이 머리 위로 엿을 들어 보였다. 한번 웃고는 석화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핸들을 틀었다.
앞으로 석화가 말을 잘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대놓고 눈 밖에 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지 싶었다. 적어도 제 손으로 석 박사를 잡아 뜯고 싶지는 않았다. 약한 생명을 거둬가는 일도 두 번 다시 사양이었다.
곽수환은 담배를 꺼내 물려다가 또다시 그만두고야 말았다. 아직 석화의 말캉한 입술 감촉이 남아 있던 탓이었다.
***
곽수환을 만나고 온 이후로 석화는 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조심스레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더의 감시 카메라에 띄어 좋을 것도 없기에 방에서만 펜을 끄적거렸다. 컴퓨터가 아닌 암호화된 서면으로 남기는 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에덴동산에서 만들어 낸 백신은 아직 대량 생산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동물에게는 백신이 효과가 있었지만 아직 사람에게 시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발적으로 나선 시민이 백신을 맞을 테고, 그 사람은 레인보우 시티에서 엄청난 포상금을 안겨 줄 거다.
저혈압을 물리치면서까지 오전 8시에 일어난 석화는 맛없는 콩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석화는 오양석과 에덴동산을 연결해 보다가 어쩌면 박사님이 그들에게 백신을 준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치료제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연구결과를 에덴동산과 공유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서펀트가 만나자고 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저에게 접선한 이유조차 오리무중이 됐다. 석화는 서펀트와 접선할 방법을 어떻게든 짜내보려 펜을 굴렸다.
[석화 박사님, 지금 55층 연구원 회의실로 와주세요. 제주도에서 조언자가 도착하셨습니다.]
벽에 내장된 스피커를 통해 방송부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일 제가 안 일어나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시계를 보니 벌써 9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 보면 한두 시간이 날아가는 건 이렇게 우스웠다.
책상을 붙잡고 일어나다가 현기증이 이는 바람에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전보다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침마다 이 모양이었다. 한 발 옮기자 또다시 머리가 울렸고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제주도로 내려간 조언자가 왜 다시 왔지?
석화는 이마에 손을 얹고 숨을 차분히 골랐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꼼짝도 하기 싫어서 천장만 보고 누워 있었건만, 지치지도 않고 문을 두드려댔다. 헌병대에 끌려갔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석화는 이를 악물고 침대를 벗어났다. 제가 정리한 서류는 급한 대로 책상 서랍에 쑤셔 넣었다.
또다시 똑똑,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는 자를 확인하려고 문으로 걸었다.
“누구세요?”
왜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건가. 석화가 빠끔히 문을 여니 눈앞에 가슴팍이 보였다. 시선을 천천히 올려 방문객을 쳐다봤다. 석화와 시선을 마주한 남자 또한 사람 좋은 인상으로 웃고 있었다.
“석화 박사님, 아직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
석화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박사님?”
‘일어나셨습니까, 박사님?’
이상했다. 처음 보는 남자인데 말투와 목소리가 낯설지 않은 듯했다.
“혹시 석화 박사님이 아니신가요? 조언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방에 계신다고 하던데.”
“석화……. 맞습니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얼굴이 많이 창백하시네요.”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방으로 찾아와서 놀라신 거라면, 안심하세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안심하세요. 박사님을 위협하고자 모셔온 게 아닙니다.’
석화는 ID카드를 보여주려는 남자에게 손을 뻗어 그의 입술 가까이 제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남자는 석화를 내려다보며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가느다랗게 접고 웃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손바닥에 부딪힌 남자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익숙한 말투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석화는 손바닥을 떼어내고는 바지에 쓱 손을 닦았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남자는 박사님 참 재미있는 분이라면서 또다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저는 오늘부터 여의도 쉘터에서 근무할 최호언이라고 합니다. 김 박사님과 석 박사님을 도와 연구실을 사용할 연구원이고요. 미리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최호언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악수를 청해왔다. 그의 목소리가 왜 서펀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듣다 보니 이 남자의 목소리가 훨씬 더 낮은데 말이다.
“잘 부탁드려요.”
석화가 최호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런데 앞으로는 방까지 안 찾아오셔도 됩니다.”
석화는 손을 뒤로 빼고 꾸벅 인사를 한 뒤 문을 닫았다.
책상 서랍에 넣어둔 반군 사상 가득한 자료들을 들킬까 봐 괜히 제 발이 저렸다. 물론 암호화해 저만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뒀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최호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지 확인했다. 나름 방음이 잘 되어 있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똑똑, 화들짝 놀란 석화가 띵 울리는 골을 손으로 꾹 눌렀다. 왜 또 두드리는 건가 싶어서 경계심을 가득 띠고 문을 열었다. 이중잠금장치인 사슬고리를 안전바에 끼우는 일은 잊지 않았다.
“박사님,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조언자님께 같이 가시죠. 저 많이 겸연쩍습니다.”
최호언은 민망한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석화는 솔직하게 싫습니다, 말을 하려다가 꿀꺽 삼켰다.
“그럼 오 분만…….”
“천천히 준비하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석화는 문을 닫고 책상으로 돌아와 남은 콩 샌드위치를 랩으로 돌돌 말았다. 꼼꼼하게 이빨을 닦고 나서 셔츠를 갈아입으니 족히 15분은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곽수환이 줬던 돌을 챙겨 겉옷 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어보았다.
기다리기 지루해 먼저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최호언은 손바닥만 한 메모지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준비 다 되셨습니까?”
“예.”
“조언자에게로 가죠. 아, 그 전에.”
메모지의 맨 앞장을 뜯어낸 그는 석화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석화는 덥석 받지 않고 안의 내용물부터 확인했다.
최호언의 시선으로 본 조금 전의 석화였다. 문을 빠끔히 열고 경계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림은 크로키처럼 보였다.
“우리 잘 지내봐요, 박사님.”
석화는 얼떨결에 그 종이를 받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돌에 눌려 구겨지는 바람에 석화는 반대쪽 주머니로 종이를 옮겼다.
“감사합니다.”
사실 왜 이런 걸 줬는지 모르겠지만 받았으니 일단 인사는 했다. 55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최호언이 부지런히 말을 시켰고, 석화는 아직 오전인지라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는 데만 집중했다.
도착한 연구원 회의실에는 저에게 오양석의 죽음에 관한 쪽지를 전해주고 간 조언자가 보였다. 오양석 박사에게 치매가 있다는 정보를 건네준 조언자를 더는 믿지 않았다.
석화는 조언자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석화 박사, 자주 보는 듯하니 기분이 좋군요.”
“예.”
조언자가 석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윤 대장님께 일련의 일들을 보고 받았습니다. 혹시 석화 박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생각이요?”
“우리의 결정 말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이 백신을 먼저 만들었다고 하여 박사님들을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구원들을 지키기 위해 이런 결정을 했지요. 만일 에덴동산의 백신이 진짜라는 것이 밝혀지면, 시민들은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 부었는데도 결과를 내놓지 못한 연구원들을 탓할 겁니다. 우리는 시민도 지켜야 하고, 연구원들도 지켜야 하니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능력하다는 말을 듣는 게 좀 어때서? 백신을 에덴동산이 먼저 내놓았으니 그게 사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석화는 곽수환의 충고대로 제 생각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조언자가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짙게 미소 지었다.
“역시 석화 박사님이라면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이런, 내가 너무 늦게 인사를 시키죠? 아니면 이미 통성명은 했나요?”
조언자는 석화의 뒤에 서 있는 최호언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최호언이 조언자의 옆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석화 박사는 최호언 박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들었다고 해도 관심이 없으면 굳이 머리에 담아두지 않았을 거다. 다만 최호언은 박사치고 곽수환처럼 몸이 다부져 보여, 석화가 부러워하는 체형에 가까웠다.
“그럴 수도 있을 테지요. 석화 박사가 제주도로 내려가 있는 동안 최 박사는 부산 쉘터에서 아주 많은 연구 성과를 보였어요. 내가 판단하기로는 석화 박사와 연구 스타일도 잘 맞을 것 같고, 또 이 친구 가문도 아주 훌륭합니다. 최 박사의 어머님께서는 돌연변이 연구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계시지요.”
돈깨나 있는 집안의 자제라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최호언이 입고 있는 정장은 마치 새 것같이 깔끔했고, 손목에는 시계마저 둘려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저 또한 석화 박사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최호언은 다시금 악수를 요청해왔다.
“누구에게요?”
“……하하. 이건 그냥 인사치레라고 해둬야 하나요?”
조언자가 원래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친구니 이해해달라는 듯 눈으로만 사인을 보냈다. 석화는 두 번 악수할 생각은 없기에 고개만 꾸벅했다.
“이참에 좀 친해져 봐요. 여의도 쉘터 안내도 석화 박사에게 받고.”
“그러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얼른 늦은 아침이라도 들어요. 나는 강남 쉘터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조언자는 두 남자의 어깨를 차례로 두드려주고는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석화도 양 주머니에 손을 푹 꽂고 복도를 향해 걸었다. 그 뒤는 최호언이 따라오고 있었다. 군화가 아닌 구두를 신었기 때문일까,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따라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착각할 법했다.
석화는 최호언이 먼저 앞서 걸어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석화의 느린 발걸음보다 그가 더 빠르게 걷는 일은 없었다.
“저보다는……. 김 박사님이 훨씬 더 나을 겁니다. 여의도 쉘터는 그분에게 안내 받으세요.”
“석화 박사님은 제가 별로 탐탁지 않으신가 봐요.”
좋다, 싫다, 이 남자를 향한 그런 개념은 아직 없었다.
여태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엄청 싫어한 적도 없었고, 제 한 몸 추스르기가 힘드니 감정소모도 하지 않았다. 그건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고 하더라도 흥미를 잃고 금세 떠나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최호언도 김 박사와 더 친해지게 될 것이다.
석화는 돌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불현듯 곽수환을 떠올렸다.
‘좋다, 싫다’의 부등호가 있다면 곽수환은 아마 ‘좋다’ 쪽일 것이다. 제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끝까지 찔러대는 사람은 여태 얼마 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몸도 시원하고, 그가 만지면 뇌까지 쾌감에 절여지는 듯했고, 돌도 주고…….
석화는 두 손을 펼쳐 제 가슴을 슥 만져봤다. 최호언은 부드러운 인상을 한 채 석화의 이상행동을 지켜봤다.
“재미난 석화 박사님, 혹시 식사 아직이시면 같이 할까요?”
“샌드위치 먹었어요.”
고개를 저은 석화는 다시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걷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이 근래 세컨드 마스터의 낌새가 이상했다.
곽수환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시 큐브를 매만졌다.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던 때,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를 직접 대면할 일이 있었다. 수석 수료한 자에게 특별히 대위라는 직급이 주어졌는데, 운신이 자유로운 퍼스트 마스터가 제 어깨에 견장을 달아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축하한다는 말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제가 수석으로 졸업한 게 영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레인보우 시티가 인사에 인색한 편은 아니었다. 꼰대들이 상부에 포진해 있기는 하지만, 주적인 아담이 사라지지 않는 만큼 능력 있는 자들에게 후한 진급을 선사하기도 했다.
대위를 달고 지방 헌병대에 몸담고 있던 일 년 뒤쯤인가, 어느 날 세컨드 마스터의 집사가 자신에게 접선을 해왔다. 저희들의 손을 잡지 않으면 퍼스트 마스터가 너를 제거할 가능성이 높다는 반 협박과 함께.
고작 헌병대 소속 대위가 아담을 수없이 처치해 공적을 쌓고 있으니 퍼스트의 눈 밖에 났다고도 전해왔다. 퍼스트 마스터는 날 때부터 순수 시민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자라고 했는데, 히틀러도 아니고 그때는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그러나 구미가 당기는 건 따로 있었다. 세컨드 마스터를 위한 소대를 구축해놓으면 파격적인 인사를 진행해주겠다는 제안 말이다.
필요한 군인을 선별해 그에 맞춰 소대를 만들어주겠다고 했기에, 동기였던 S급 이채윤과 양상훈, 그 둘을 추천했다. 그 둘만으로도 레드 구역 아담 소탕 정도는 손쉬웠다. 그렇게 불패 부대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아담 사냥을 자발적으로 나선 이후였다.
곽수환은 세컨드 마스터의 지령을 받고 갓 싹이 자라기 시작한 반군들, 그리고 퍼스트 마스터의 주변인을 감시하거나 행적을 추적했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은 아담 사냥을 한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또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뒤흔들어 놨다. 이번에는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최근 세컨드 마스터가 보내오는 메시지들이 영 꺼림칙하단 말이지. 오양석을 비롯해 에덴동산에 대해서도 확실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 같고……. 아니면 세컨드 마스터도 정말 모르는 건가?
곽수환이 옥상 난간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완성한 큐브를 던졌다가 잡으면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의정부 지하 벙커에서 가져온 자료들 중 건질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마치 보란 듯이 놓여 있던 나무판은 그럴싸한 실마리처럼 보였다. 그건 네 개의 강줄기를 형상화한 음각 목판화였다.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와 총 네 개로 나뉜 강줄기를 뜻했으며, 신도들이 따른다는 사인장로였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저 네 명의 장로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프라테스를 마지막으로 모든 장로들의 휴거가 끝나고,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함께한다.]
곽수환은 목판화 뒷면에 새겨진 글에 초점을 맞췄다.
휴거는 신의 부름을 받고 저 위로 올라간 것이겠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에덴동산에서 함께한다는 건 한마디로 죽었다는 뜻이 아닌가. 게다가 서펀트가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사인장로가 신도를 버리고 어디로 숨었을 리도 없는 노릇이었다.
탁, 탁, 큐브를 던졌다가 잡는 행동을 반복하던 곽수환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뒤를 돌았다.
“대장.”
차 중령이 난감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화장실은 저기.”
곽수환이 큐브를 쥔 손으로 건물 내 화장실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21 바이올렛 구역은 곽수환의 헌병소대가 관리했고, 그들은 현재 세컨드 마스터의 비밀 부대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충성하는 건 얼굴 한 번 직접 보지 못한 마스터가 아니었다. 위험천만한 아담과의 싸움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늘 선두에 곽수환이 서 있기 때문이었다. 대장을 향한 그들의 맹목적인 신뢰는 여태껏 그가 보여준 저력에 있었다. 차 중령도 그런 군인 중 하나였다.
“볼일은 괜찮습니다.”
“근데 왜 그런 얼굴이야.”
“마스터가……. 부르십니다.”
곽수환은 큐브를 탁 잡고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세컨드 마스터가 제가 의심하는 낌새를 알아챈 건가? 아직은 곤란한데…….
곽수환이 알았다면서 과천 쉘터로 돌아가려고 하자, 차 중령이 앞을 막고 섰다.
“뭐 해?”
“호출하신 분이 세컨드가 아니라…… 퍼스트 마스터이십니다.”
네모난 큐브 조각이 그의 손에서 어긋났다.
“장소는?”
“여의도 쉘터입니다.”
“마침 석 박사도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주말 부부가 이런 기분인가 봐? 곽수환은 별로 좋은 건 아니라며 짧게 웃었다.
석화는 여전히 혼자 다니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최근 석화 옆에 어떤 놈팡이가 붙어 다닌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봐야 그 놈팡이가 석화 옆에 붙어 있던 사진은 단 한 장뿐이었지만,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다. 만일 상대가 저처럼 끈질기게 굴면 석화의 태도도 달라질 텐데…….
그가 큐브를 꽉 쥐자 완전히 분리된 조각들이 바닥으로 투둑 떨어졌다. 손을 털어낸 곽수환이 차 중령을 지나쳐 걸었다.
“세컨드도 아니고 퍼스트라니.”
중얼거린 차 중령만이 불안한 눈을 한 채 뒤따라갈 뿐이었다.
***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개체들만 전염이 안 된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닌 듯해요.’
‘1차 때 면역자들은 제주도를 다녀온 사람들이나 제주도 출신이었지?’
‘알려진 바로는 그런데 그 또한 확실하지 않아요. 아담 바이러스에 노출이 되어야만…… 면역체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요. 면역자를 찾겠다고 사람들 몸에 바이러스를 투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요.’
‘그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으니 석 박사, 천천히 말해도 되네. 허허, 시간은 아직 많지 않나.’
오양석은 미지근한 물이나 들이켜라며 석화에게 머그잔을 밀어주었다.
‘그런데 인플루엔자는 본래 한 종에만 감염을 일으키잖아요? 그러다 간혹 돼지가 조류나 인간 인플루엔자에 감염이 될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바이러스들끼리 상호 교환을 해 새로운 형질을 가진 바이러스가 탄생해요. 혹시 조류에게서 변이된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아담 바이러스와 서로 상극반응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요?’
‘이보게, 석 박사. 나 정말 걱정되네. 일단 그 물부터 좀 마시게.’
안 그래도 머리가 핑 도는 것만 같아서 석화는 물을 나눠 마셨다.
제때 잘 먹고 간식도 잘 챙겨 먹는 쉘터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종종 기절을 할 때가 있기 때문에 오양석의 걱정은 그저 노파심이 아니었다. 물론 오양석만 걱정해줬을 뿐, 다른 이들은 또 저런다며 눈살만 찌푸리고는 했다.
“……님.”
석화는 돌로 턱을 받치고 있다가 눈을 비볐다. 요즘 시간이 날 때면 오양석과 함께 한 기억들을 꺼내보고는 했다. 곽수환이 준 돌이 턱 밑을 움푹하게 짓누른 터라 아픈 부분을 손으로 풀어주었다.
“박사님.”
이번에는 그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저요?”
“예, 석화 박사님이요.”
김 박사와 더 친하게 지내지 않을까 했던 최호언은 오히려 석화에게 더 친근하게 굴었다.
석화와 김 박사는 일전에 말씨름을 조금 벌인 이후로는 서먹서먹한 상태였다. 석화는 전과 같았는데 김 박사만이 거리를 두고 있던 것이다.
“방금 강남 쉘터에서 연락이 왔는데, 백신이 사람에게도 유효하다고 하네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 중 총 세 분이 자원을 하셨고, 명예 시민상을 수여 받는다고 합니다.”
최호언이 본받을 사람들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백신이 진짜여서 다행이나 지금 석화의 최대 관심사는 백신이 아닌 치료제였다. 오양석 박사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지도 않고, 분명 에덴동산도 박사님에게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 유추했다. 힌트를 더 얻고 싶은데 그러려면 서펀트와 접선을 해야 한다.
“박사님, 같이 식사하실까요?”
여태 적어도 다섯 번은 거절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석화도 밥을 먹을 때가 되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최호언이 웃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특이하게 생긴 돌이네요.”
“그런가요.”
“돌을 좋아하세요?”
개방된 문을 빠져나오던 최호언이 물었다. 석화도 그가 부산 쉘터에서 연구했던 자료를 며칠에 걸쳐 훑어봤는데 조금 특이한 면이 있었다. 아담 바이러스와 관련된 연구가 아닌 개량종자에 좀 더 주력하는 듯했다.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개량에도 일가견이 있어 일반종의 세 배나 큰 닭을 개량하기도 했다.
“대답하기 귀찮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최호언은 무시해도 괜찮다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해요, 돌.”
“그렇군요.”
석화는 군인들이 다 빠져나간 시간대의 식당을 선호했다. 오늘 역시도 늦은 점심인지라 남은 반찬은 얼마 없었고, 국도 다 식어 있었다.
“보아하니 박사님께서 면역증강 제품이나 건강보조제 쪽으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연구 삼아 재배하는 인삼이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언제 한번 모셔도 될까요?”
“인삼이요?”
“그린 구역에서 재배하는 거라 안전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말에 같이 가보시겠어요?”
주말에는 오양석 박사의 자택에 다녀오려고 한 터라 조금 난감했다.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하하, 편히 생각해주세요.”
그의 배려에 석화는 말을 조금 더 덧붙였다.
“몸에 열이 많아서 인삼이 잘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귀한 거니까 보고 싶기는 해요.”
그 말에 최호언이 놀랍다는 눈을 했다.
“겉으로 볼 때는 체온이 많이 낮으실 것 같은데 의외네요.”
“그런가요.”
석화는 식판을 두고 앉아 시큰둥이 손과 입만 놀렸다.
저벅저벅, 한두 명이 아닌 여러 명의 군화 소리가 식당 입구에서 들려왔다. 여의도 쉘터만 해도 수많은 군인들이 있기에 모두 다 낯이 익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군인의 숫자가 제법이라 한가했던 식당이 삽시간에 포화상태가 되었다. 정신이 산만해진 석화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오늘 곽 소령 호출한 거라며?”
“하필 곽수환을?”
수저로 미역국을 뜨던 석화가 고개를 들었다. 불어터진 미역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툭 떨어졌다. 어떤 군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곽수환을 언급한 것 같은데…….
“곽수환 소령이 왔나 보죠?”
석화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던 최호언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세요?”
석화가 떨어진 미역을 건져 올리고는 물었다.
“그럼요.”
그는 가슴께에서 흔들리는 ID카드가 거슬리는지 셔츠 포켓에 꽂아 넣었다.
“유명하잖아요. 여러 의미로요.”
부드러운 인상을 한 남자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
제주도, 그것도 우도에 거주 중인 퍼스트 마스터가 여의도 쉘터로 올라온 사실은 일급비밀이었다.
퍼스트 마스터는 곽수환을 호출해 놓고도 한참이나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었다. 곽수환 또한 대기상태로 미동 없이 서 있었다. 한 번씩 공기청정기의 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케이프만 미세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내 자네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진 않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마스터가 그제야 의자를 돌려 앉았다.
“자네의 부모가 레인보우 시티의 헌법을 무시하고 자네와 자네의 동생을 몰래 출산했고, 그것을 십수 년간이나 숨겼지. 우리로서는 자네를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거네. 하지만, 오양석 박사가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 시민으로 승격시켜주었지.”
왈, 왈왈. 곽수환은 마스터의 소리를 개소리로 치환했다.
“그러나 자네가 그간 보여준 행적은 이따금 실망스럽다가도 또 어느 날은 놀랍도록 대견하기도 했다네. 우리 레인보우 시티의 그 어떤 군인이 자네만큼 강하고 현명하겠나. 물론 군 기강을 어기는 일도 누구보다 선두주자이지마는.”
여의도에 올라오면 석화의 얼굴부터 보려고 했는데, 저 모자란 면상부터 보니 기분이 저조해졌다.
“내 자네가 세컨드 마스터의 신임을 얻었다는 것도 잘 알지. 세컨드 마스터가 자네에게 특별한 자리를 주었다는 것도 안다네. 그래서 말일세.”
“예, 마스터.”
“이제는 세컨드 마스터보다 나를 따르는 게 어떻겠는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좀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주겠네. 자네도 그 때문에 세컨드에게 갔던 게 아닌가.”
듣던 중 가장 큰 개소리였지만, 곽수환은 입술만 쓱 끌어올렸다.
“마스터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스터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레인보우 시티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지. 내 말은 자네보고 세컨드를 배신하라는 게 아닐세. 아무렴, 그건 배신이 아니지.”
애초에 충성한 적도 없는데 무슨 배신씩이나.
“자네가 충성하는 우리 레인보우 시티를 망가뜨리려 하는 자가, 바로 세컨드라네.”
퍼스트가 책상 위에 주먹을 올려놓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내 더 이상 세컨드 마스터를 이대로 놔둘 수는 없어. 오양석 박사가 반군 행위로 우리에게 처형당한 건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
놀랄 노 자였다. 당연히 심증은 있었지만, 퍼스트 마스터가 제 입으로 지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곽수환은 대체 저자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이런 중요한 말까지 자신에게 내뱉는가 싶었다.
“우리로서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네. 오양석이가 원호처럼 에덴동산과 손을 잡았으니까! 그런데 그 에덴동산을 만든 놈들이 누군지 아나? 바로 그 중심에 바로 세컨드 마스터가 있었다네. 곽수환 소령, 부디 레인보우 시티를 기만한 세컨드를 몰아낼 수 있게 우리의 저력이 되어주게.”
곽수환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건 부탁도 회유도 아닌 협박이었다. 제 편이 되지 않으면 세컨드와 함께 보내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에덴동산에서 백신이 나왔으니 예상대로 제대로 똥줄이 타서 덤벼드는 듯했다. 조만간 마스터 투표도 있으니 눈이 벌게질 수밖에.
“만일 세컨드를 끝까지 보필할 셈이면 그리해도 되지만, 우리는 잘못된 상사를 따랐다는 이유로 아까운 S클래스 인재를 잃고 싶지 않다네.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을 세컨드 마스터에게 전달해도 상관없어. 전적으로 곽수환 소령에게 맡기겠네.”
세컨드 마스터에게 보고해도 된다는 밑밥을 까는 걸 보면, 세컨드에게 불리한 물증이 퍼스트에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증거도 없이 섣불리 나설 자가 아니었다.
“마스터,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일을 맡겨주십시오. 저는 말씀드렸듯이 세컨드 마스터에게 충성하는 군인이 아닙니다. 레인보우 시티의 군법과 헌법에 따른 합당한 사유가 있다면, 언제든지 명령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 세컨드 마스터의 지시도 그렇게 따라왔고요. 그런 저를 기용해주지 않으신 건 바로 퍼스트 마스터이십니다.”
퍼스트 마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 퍼스트는 세컨드의 목을 치기 전에 곽수환부터 제거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실패할 시 골치 아픈 적을 만드는 것이니, 차라리 회유하는 편이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마음만 먹는다면 제주도까지 헤엄쳐와 제 목을 따고도 남을 무식한 놈처럼 보였으니까.
곽수환이 지휘하고 있는 부대원들조차 놈에게 막강한 믿음을 쌓고 있었다. 차라리 장기말로 사용해 세컨드 마스터를 처리한 뒤, 토사구팽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저놈들 어차피 힘만 세고 육체적으로만 진화했지, 머리는 정치를 하는 저희가 훨씬 뛰어났다. 그래봐야 아담과 싸우는 군인 놈들이지 않나.
“내 조만간 전적으로 세컨드 마스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레인보우 시티에 알릴 걸세. 투표가 있기 전에 말이야. 그러니 자네도 잘 생각해서 행동하게나.”
“예, 마스터. 대신 저도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
감히, 라는 표정이 읽혔지만 퍼스트는 어디 말이나 해보라며 턱짓했다.
퍼스트에게 있어 그리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기에 거래는 쉬이 승낙됐고, 곽수환은 퍼스트를 향해 경례를 해 보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패닉룸을 빠져 나왔다.
퍼스트와 세컨드가 본격적으로 붙으면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다. 저는 땅콩이나 먹으면서 어느 쪽이 이길지 관전하면 그만이고, 둘 다 자멸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었다. 썩어빠진 정치질을 하는 놈들의 머리를 잘라내 버리면, 이 도시가 지금보다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 애초부터 그랬다면 적어도 동생의 죽음은 피할 수 있었을 거다.
생각해보니 세컨드보다 퍼스트가 승기를 잡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퍼스트 놈은 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멍청이로 생각할 테지.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닌 게 이럴 때는 제법 도움이 됐다.
곽수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대신 계단을 이용해 석화의 연구동으로 향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렸더니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 이렇게 급하게 갈 필요가 있나 싶었다. 석 박사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34층 비상구를 나오니, 때마침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느린 걸음에 두 손을 가운 주머니에 푹 쑤셔 넣고 있는 석화였다. 주머니 밖으로 돌을 쥐고 있는 손의 굴곡도 보였다.
옆에 있는 놈은 김 박사인가 싶었는데 체구가 전혀 달랐다. 분명 사진에서 봤던 그놈이었다. 곽수환이 천천히 따라가며 아래서 위로 쓱 훑어보자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인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누가 계셨군요.”
인기척이 느껴졌다고? 곽수환이 눈을 슬쩍 찌푸렸다. 사람 좋은 인상으로 웃는 놈의 ID카드로 시선을 내려 이름을 확인했다.
“곽수환…… 소령님?”
마찬가지로 돌아본 석화가 멀거니 그를 보다가 이름을 불렀다. 곽수환은 저벅저벅 걸어가 석화를 보면서 웃었다.
“놀랐어?”
“아뇨.”
“뭐야, 내가 왔는데 왜 안 놀라.”
“오신 줄 알고 있었어요.”
석화는 물끄러미 곽수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석화의 까만 눈은 선명하고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 박사와 제법 친해졌나 본데, 그래봤자지. 어차피 이제부터는 제 덕분에 석 박사가 심심하지는 않을 거다.
“곽수환 소령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최호언 박사라고 합니다.”
최호언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손을 내밀었다. 곽수환도 마주 웃으면서 손을 맞잡자 상대가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힘을 주니 앓는 소리를 내뱉은 최호언이 먼저 손을 떼어냈다.
“이야, 역시. 소령님 손은 악력이 어마어마하네요.”
엄살은. 곽수환은 놈이 제대로 힘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챘다. 제 인기척을 느낄 정도로 감이 좋은 놈인 건 덤이었다.
“바로 과천으로 가세요?”
“아니,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어야 할 것 같아. 석 박사 방에서 잘 건데, 괜찮지?”
“싫어요.”
깔끔하게 거절당한 곽수환은 주머니에서 쓱 뭔가를 꺼내 보였다. 두 개의 언덕이 이어져 있는 모양의 조그마한 돌이었다.
“어때? 얼마 전에 현장 나가서 주운 건데, 죽이지?”
손바닥에 고개를 박듯이 얼굴을 숙인 석화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더니 전에 선물해준 좆돌과 제 손에 올려진 것을 비교했다.
“가져도 돼.”
곽수환이 석화의 반대편 주머니에 석화의 통통한 엉덩이를 닮은 돌을 쏙 넣었다.
“몇 시에 끝나? 그거 줬으니까 나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지?”
“제가 열어드리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데요.”
“들어갈 수 있으면 가도 되나.”
하아, 석화는 한숨만 쉬었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호언만이 정말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쉘터에서 도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두 분이 정말 친하신가 봅니다. 저는 석 박사님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기가 참 힘든데 곽수환 소령님이 부럽네요.”
곽수환은 예의 바른 말투를 자아내는 최호언을 향해서 여상한 얼굴을 했다.
“석 박사랑 친해지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뭡니까? 저도 돌을 드리면 되는 겁니까?”
“설마요.”
곽수환이 매력적으로 웃어 보였다.
“그냥 나처럼 생기면 됩니다.”
“어…….”
석화는 그게 아니라는 듯 말을 꺼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곽수환이 객관적으로 잘생긴 건 맞았기 때문이었다.
“어는 무슨 어야. 이따 봐,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석화의 폭신한 머리카락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석화는 제 정수리를 매만지고는 먼저 빙글 돌았다.
“일단 연구실로 갈게요.”
주머니 속 매끈한 돌을 쥐고는 다시 걸어갔다.
곽수환의 얼굴 보고 났더니 오전부터 피곤했던 눈이 좀 밝아진 기분이었다. 그의 체온만큼이나 그의 겉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실 그것보다도 새로 준 돌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는 한참을 돌아다녀도 마음에 드는 돌을 찾기가 힘든데, 그는 어떻게 잘만 찾아오는지 신기했다. 자신보다 훨씬 많은 지역을 다니니 더 좋은 돌을 찾을 가능성도 더 높은 거겠지.
석화는 혼자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
[시크릿 코드 접속 허용, 방을 개방합니다.]
곽수환은 석화의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최호언, ID카드에 적힌 놈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런 찜찜한 감각은 또 오랜만이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본 것도 그렇고, 일부러 엄살을 떨어댄 것도 마찬가지로 미심쩍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컴퓨터를 켜고는 곧장 헌병대 서버로 접속했다. 고유 암호를 치고는 여의도 쉘터에 있는 최호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이 36세, 부산 쉘터에서 전근해 온 연구원. 가족은 어머니 한 명. 레인보우 시티에서 인정한 명예가문이며, 어머니는 제주도와 울릉도 등에서 나는 특산물을 레인보우 시티로 옮겨오는 판매업을 함. 그 수익이 상당해 레인보우 시티에 매달 엄청난 상납금을 내고 있음. 최호언의 나이 5살 무렵, 홍역을 심하게 앓음. 그 외에 최호언에게서 발견된 특이사항은 없음.]
겨우 이 정도가 최호언에 관한 자료였다.
곽수환은 서버를 종료하고 나서 의자를 천천히 돌렸다. 돌아가는 천장을 보다가 세컨드에게 언질을 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퍼스트가 세컨드를 에덴동산과 엮어서 보내버리려는 것 같은데, 세컨드는 절대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돌연변이 군인들은 대개 머리가 부족하다며 무시하는 놈들도 더러 있었지만, 세컨드는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저에게 어떤 속내도 절대 내비치지 않았지.
만일 세컨드가 에덴동산과 관련이 있다면, 그간 레인보우 시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 자신을 역으로 이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세컨드에게 대충 이야기를 전하고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어쨌든 고래 둘의 싸움이 가속화될 테니, 일단은 그 소용돌이에서 석화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았다. 괜히 휩쓸렸다가는 새우 석화가 그대로 날아가 버릴라.
곽수환은 의자에서 일어나 석화의 이불을 휙 들었다가 놓고, 침대 시트도 들어 올렸다가 놨다. 충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책상을 쓱 둘러보고 서랍을 열려는데, 잠가둔건지 달칵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뭘 넣어놨기에 잠그기까지 해놔?
열쇠를 넣어둘만한 곳을 훑어봐도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서랍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온 종이만 아니었어도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곽수환은 책상 한쪽을 잡고 서랍을 뜯어내다시피 잡아 끌어냈다.
서랍 안에는 두서없이 놓인 종이들이 보였다. 누가 연구원 아니랄까 봐 알 수 없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01000 10100, 01000 10001, 00111 10010 00001…….
0과 1로 이루어진 숫자가 몇 장이나 되는 페이지에 수두룩했다.
의식적으로 입가에 걸치고 있던 미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곽수환은 손을 뻗어 펜꽂이에 꽂혀 있는 펜을 꺼내들었다. 그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적어둔 숫자들을 보면서 펜을 손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난수방송에서도 몇 번 해석한 적 있었던 이진법 암호였다. 곽수환은 빈 종이에 석화가 암호화해둔 법칙을 유추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걸릴 테지만, 암호화해서 서랍에 숨겨놓은 짓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곽수환은 제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기를 바라면서 큐브를 맞추듯 손을 움직여나갔다.
***
석화는 7시가 되자마자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최호언이 곽수환과 함께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고, 굳이 거절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7시 30분까지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될 듯싶었다.
석화는 주머니에 남겨두었던 땅콩을 꺼내 먹으면서 방까지 걸었다. 이번에 식당에 가면 견과류를 조금 더 얻어올 생각이었다.
[개방합니다.]
석화는 방문이 열리자마자 눈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바닥과 책상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종이가 보였고, 그 중심에 제복을 입은 곽수환이 서 있었다. 늘 가벼운 미소를 걸치고 있던 그였지만 지금은 싸늘한 한기만이 느껴졌다.
석화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떨어진 종이를 확인했다. 설마 싶었다. 아니, 말도 안 됐다. 문이 닫혀있지 않았다면 본능적으로 뒤로 걸음을 물렸을 것 같았다. 석화는 차가운 문에 등을 바짝 기댔다.
곽수환은 들고 있던 펜을 책상에 던져두고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군화소리가 숨통을 조이듯 날카롭게 들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가 한 장의 종이를 들어 보였다. 놀랍게도 암호로 남긴 이진법을 글자로 치환한 내용이었다. 석화가 숨을 삼키자 곽수환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석화 박사. 레인보우 시티 군법 제 25조 조항에 의거. 사상불순, 반군 행위 혐의로 현장 체포합니다.”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어올렸다.
미약하게 인상을 썼지만 곽수환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일은 없었다.
“……체포요?”
시치미를 떼는 석화의 얼굴은 평소처럼 하얗게만 보였다. 곽수환의 입술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이제 보니 기절한 척뿐만 아니라 거짓말에도 능했다. 굳이 포박을 하지 않아도 석화가 도망갈 일은 요원했지만, 제복 상의를 가로지르는 끈을 떼어내 손목을 뒤로 묶었다.
“곽수환 소령님,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석화는 손목이 묶인 채로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현장 체포 권한은 모든 군인들에게 있었지만, 그건 일반 시민일 때나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쉘터에 거주하는 박사와 군인들은 헌병대만이 체포할 수 있었다. 석화는 방 밖으로 자신의 등을 미는 곽수환에게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곽수환 소령님은 어떤 이유에서든 저를 체포할 권한이 없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석화는 곽수환의 존대에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나 물러설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풀어주시죠.”
그가 내민 종이에 적혀 있던 건 암호를 거의 완벽하게 해독한 글이었다. 다만 곽수환이 어떻게 해독을 했는지 혼란스러움만 가중될 뿐이었다.
“오양석 박사의 일로 접선을 원함. 암호를 해독하면 날짜와 시간을 남겨두길.”
그는 이진법을 글자로 치환한 부분을 직접 입으로 읊었다.
“지금 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정확했으며, 그건 서펀트에게 보낼 메시지였다. 석화는 까만 동공으로 곽수환을 응시했다.
‘내가 분명 더는 파고들지 말라고 했지.’
곽수환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몇 번이나 경고했고, 그 경고를 어긴 건 석화 자신이었다. 설마 곽수환이 암호를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는 전에도 편견을 갖지 말라고 했었지. 그런데 에덴동산은 백신을 개발한 데다 무상으로 배포했고, 반대로 레인보우 시티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곽수환은 그걸 알면서도 폭신한 침대와 넉넉한 식사와 물이 제공되니 뭐 어떠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안락함을 제공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건 비겁했다.
석화가 쉽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자 곽수환이 뒷깃을 확 잡아들었다. 마치 짐승을 다루는 듯한 태도에 석화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전에도 말했듯이 쉘터 내에서 직급은 제가 곽수환 소령보다 더 높습니다. 체포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힘으로 저를 다루지 마시죠.”
원체 힘이 약한 터라 누군가가 힘으로 짓누르거나 마음대로 신체를 다루는 일이 극도로 싫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곽수환은 여태 힘으로 좌지우지하지 않았건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석화를 밖으로 밀어내고 뒤로 묶인 팔뚝마저 콱 쥐었다.
“군법에 어긋나는 행동은 지금 곽수환 소령님이 하고 있습니다.”
두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몸이 단단히 붙잡혀 반쯤 끌려가고 말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곽수환이 낯설었고 어쩐지 두렵기까지 해 자라난 새끼손톱이 시큰거렸다. 석화는 힘이 없어 짖기만을 일삼는 짐승처럼 또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군사재판에, 윽!”
쿵, 벽으로 몸이 밀리고 어깨가 짓눌렸다.
석화는 마른침을 간신히 삼키고 곽수환을 쳐다봤다. 그는 제복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군번줄을 휙 꺼냈다. 코드 메이저 넘버가 적혀 있는 익히 봐온 인식표였다. 그러나 그가 엄지와 검지를 교차해 인식표를 밀자 마치 큐브처럼 밀려났다. 이중으로 겹쳐 있던 인식표 안쪽에 곽수환의 또 다른 신분이 드러났다.
[MP- Controller]
Military Police는 레인보우 시티 헌병대를 뜻했고, 컨트롤러는 신분을 막론하고 대장까지도 체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위치였다. 컨트롤러의 경우 대체로 4년마다 교체되는데 그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석화조차도 곽수환이 컨트롤러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석화 박사, 이제 체포해도 됩니까?”
석화는 언뜻 자신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컨트롤러가 정체를 드러냈다는 건 결국 저의 목을 날려버리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곽수환이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늘 가볍게 걸치고 있던 웃음도 짓궂은 농담을 던지던 모습도 어쩌면 전부 거짓이었을지 모른다.
“……오해가,”
“있다면 조사를 하면서 확인하면 그만이고.”
군번줄을 되돌린 곽수환은 다시 석화를 붙들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 앞에 서고 나서야 그가 제복 코트를 벗어 석화의 몸에 둘러주었다. 그 바람에 뒤로 묶인 손이 보이지 않았고 그는 석화의 어깨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때마침 최호언이 타 있었는데, 그 역시 놀란 눈을 했다. 그러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박사님과 곽 소령님이 오시지를 않기에 직접 모시러 왔습니다.”
곽수환이 석화의 어깨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탔다.
“최 박사님이 나와 석 박사를 왜 기다립니까?”
“박사님께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최호언이 눈을 내리깐 석화를 바라보자 곽수환이 어깨를 더 안쪽으로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지하주차장 버튼을 누르니 최호언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식사를 하러 나오신 게 아닙니까?”
“식사?”
곽수환이 석화를 향해 묻자 석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웬 날파리가 이렇게 꼬이는지. 곽수환이 석화의 정수리에 턱을 가볍게 올린 채로 최호언을 응시했다.
“오늘 식사는 둘이 할 생각입니다. 그렇죠, 석 박사님?”
“…….”
석화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최호언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곽수환을 밀치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최호언은 석화의 몸을 감싼 코트를 유심히 바라봤다. 커다란 코트 안에 숨겨진 몸이 조금 부자연스럽게 보인 탓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코트를 확 잡아 끌어내리려는 것과 동시에 곽수환이 최호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뭐 하는 겁니까?”
“모양새가 마치 곽 소령님께서 박사님을 납치하는 것처럼 보여서요.”
최호언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코트를 끌어내리려 했고, 곽수환은 그 행동을 막았다. 힘겨루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석화가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가 재빠르게 바뀌면서 어느새 지하에 다다랐다.
최호언이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코트에서 손을 떼어내자 곽수환도 손목을 쥐고 있던 힘을 풀었다. 최호언은 손목을 빙글 돌리면서 인상을 썼다.
“석화 박사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뇨.”
최호언이 눈을 더 크게 떴고, 곽수환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반대로 냉랭한 눈은 어디 최호언에게 도움이라도 청해보라고 비웃는 듯도 했다.
“그럼 제가,”
나서려는 최호언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곽수환 소령님 따라갈게요.”
석화는 스스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곽수환이 컨트롤러인 것을 알게 된 이상 석화는 최호언이 끼어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일전에는 서펀트를 같이 만나자고 했으니, 입을 벌리고 있는 범에게 날 잡아잡수쇼 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던 셈이었다.
“헌병대로 가나요?”
곽수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자신의 지프로 석화를 끌고 갔다. 석화를 조수석에 태우고 벨트를 대신 끌어와 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도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석화는 뒤로 묶인 손목이 불편해 몸을 여러 번 뒤척거렸다. 곽수환이 벨트를 앞으로 끌어당겨 여유 공간을 만든 다음에야 석화의 손목을 묶은 제복 끈을 풀어주었다. 계속 포박한 상태로 심문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석화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곽 소령님.”
정말 헌병대로 가느냐고 다시 물으려는 때였다.
“석화 박사님이 생각하는 그 꽃밭 박살내주려고.”
곽수환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석화를 보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액셀을 거세게 밟아 여의도 쉘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레인보우 시티는 공식적으로 전시상태였으며 군인이 가진 권력은 과장을 조금 더해 무소불위에 가까웠다.
자신의 판단으로 시민을 체포할 수가 있었고, 벌금 또한 마음대로 산정할 수도 있었다. 오래전에는 경찰이 치안을 담당했다면 이제는 군인이 그 모든 역할을 맡았다.
군인이 시민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르거나 폭력을 행사했을 때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건 석화가 군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복합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석화 자신이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은 드물었지만, 군인에게 생리적인 거부감부터 들었다. 곽수환과 그의 동료들은 예외였으나 이제는 양상훈과 이채윤마저도 의심이 갔다. 그들도 곽수환이 컨트롤러인 것을 알까? 소령이라는 직급은 대외적인 가면일 뿐이라는 것도.
곽수환의 지프는 막힘없이 의정부를 향해 달렸다. 이 상황에서도 석화는 몇 번이나 힘에 부쳐 고개를 떨궜다가 올리기를 반복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선 곳은 진입불가 테이프가 둘려 있는 한 벙커의 입구였다. 시동을 끈 곽수환이 먼저 내려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석화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쓱 둘러봤지만 헤드라이트는 벙커의 입구만을 비출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암흑 천지였다. 두 다리를 바닥에 내리니 곽수환이 다시 팔뚝을 잡아서 벙커로 끌고 갔다. 석화의 입에서 밭은 숨이 샜다. 곽수환은 그걸 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설마 여기가 처형 장소인가.
석화는 들어온 길을 다시 돌아봤는데, 차량의 불빛도 보이지 않아 제가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달칵. 손전등을 꺼낸 그가 내부를 비추니 계단에 눌어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
석화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엄청난 악취가 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오염된 공기가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물로 씻어도 그 냄새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지옥에 유황 냄새가 있다면 이 벙커는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석화가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곽수환은 계속해서 앞으로 끌고 나갔다. 계단이 끝나니 벙커 안의 넓은 공간이 드러났고 그가 비춘 벽면에는 생명의 나무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는 또다시 검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단지 말라붙은 피 냄새만으로 이런 악취가 날 리는 없을 것만 같았다.
“……소령님.”
얼마나 독한지 이제는 눈까지 시큰거렸다.
그는 여전히 침묵한 채로 벙커 끝에 연결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코너를 꺾자마자 곽수환이 그 내부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
석화는 숨을 들이켜지도 못하고 선 채로 굳어버렸다. 교도소처럼 철창이 줄지어 박혀 있는 감옥 안에는 추위에 서서히 썩어가고 있는 시체가 보였다. 적어도 삼십구는 되어 보였는데, 하나 같이 레인보우 시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시체는 마구잡이로 쌓아 올려져 쓰레기를 함부로 방치한 듯 보였다.
“직접 보니 어때?”
곽수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저것들이 전부 아담 같아? 어때, 혈액도 채취하게 도와줄까?”
그가 석화의 팔뚝을 그러쥐어 안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다리는 그의 힘에 밀려 함부로 끌려갔다. 힘의 차이는 무기력함을 동반했고 삽시간에 온몸의 진을 다 빼놨다.
“왜 그래? 서펀트를 만나고 싶다며. 연구원인 석화 박사님도 서펀트가 사람을 상대로 어떤 짓을 벌였는지 확인하셔야죠.”
하아, 하아. 석화의 숨이 가쁘게 새어나왔다. 철창 앞까지 끌려가서 겨우 고개를 돌리자 곽수환이 턱을 확 잡아서 앞을 보게 만들었다.
손전등의 빛이 한 군인에게서 흘러나온 탁한 눈알에 반사됐다. 석화는 시체를 더는 보지 못하고 구역질을 토해냈다. 곽수환이 석화의 몸을 놓아두고는 철창문을 걷어찼다. 쌓여있는 한 시체의 팔을 잡고 끌어내리자 뚝, 종이보다도 더 쉽게 팔이 찢겨 나왔다. 벽에 손을 대고 토악질을 하는 석화에게 다가가 그 썩은 팔을 내밀었다.
“확인해보시라고.”
석화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건만 악취는 오히려 정신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석화를 곽수환이 고쳐 안았다. 그는 허리를 들어 올리다시피 해 계단을 다시 올라갔고, 석화는 그동안 널브러진 시체처럼 얕은 숨만 쉬어댔다. 곽수환은 악취를 풍기는 팔 한쪽도 끝끝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
***
일전에 지프를 갈아탔던 21 바이올렛 구역은 곽수환의 헌병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21 바이올렛 외곽에서 중심가로 들어가면 각지의 쉘터를 닮은 고층 건물 하나가 관리된 모습으로 서 있는데, 군법을 어긴 군 장성들을 취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석화는 그중 제1 취조실이라고 적힌 방의 의자에 몸이 결박되어 있었다.
저 앞에 기다란 삼각대에 카메라가 놓여 있었으나 전원은 꺼진 채였다.
머리 위로 백열전구가 열을 뿜어댔고, 석화 혼자만이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를 이 건물로 끌고 온 곽수환은 군인에게 제 신병을 넘기더니 체감상 몇 시간이 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 도망갈 수도 없는데 군인은 아주 꼼꼼하게도 자신과 의자를 일체화하듯 묶어두었다.
석화는 자꾸만 눈앞의 테이블로 향하려는 시선을 애써 저 문으로 돌렸다. 곽수환이 뽑아온 팔 한쪽이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서펀트와 접선을 시도해보려고 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변명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만일 그가 자신을 고문한다고 해도 말이다. 해석본이 틀렸다고 말을 하려면 다른 답을 내놓아야 할 텐데, 곽수환이 직접 풀어낸 이상 속여 넘기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그것보다 지하 벙커에 있던 수많은 시체의 잔상이 잊히지 않았다. 에덴동산이 생체실험을 했다면 그들이 레인보우 시티보다 더 빠르게 백신을 개발한 것도 이해는 갔다. 그러나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다. 그렇기에 세컨드 마스터도 인도적인 방법으로 백신을 개발하라며 법을 개정하지 않았나.
‘에덴동산 놈들이 우리 군을 납치해서 실험을 하고 아담으로 만든 거야.’
곽수환이 마지막 경고를 했던 날이었다. 철창 안에 있던 시체들은 아담이 아니었으며 마루타와 홀로코스트를 방불케 하는 학살의 현장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군인의 팔뚝은 갓 부패해가는 듯 보였으나 셀 수도 없는 주사 자국이 듬성듬성 보였다.
에덴동산에게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은 주적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체실험을 해도 된다는 법은 없었다. 철창 안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 실험을 당한 군인들의 공포가 어땠을지 떠올리니 숨통이 갑갑하게 조여 왔다. 석화는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등받이에 한껏 기댔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 연구원 자리도 박탈당하고 처형을 당하게 될까? 곽수환이 정말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갑자기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연구나 할 것을 괜한 선악과를 베어 물어 안락한 쉘터에서 내쫓기게 되어 버렸다.
만일 자신을 처형한다면 목숨을 건질 뚜렷한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거래로 내걸만한 것도 없었다. 상부는 치료제를 원하지 않고, 곽수환은 레인보우 시티의 병폐를 눈감는 군인이었으니까.
점차 몸에 열이 올라 습관적으로 돌을 찾았다. 그러나 몸은 결박된 데다 지금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
달칵.
석화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건지 눈 바로 앞에 팔 한쪽이 보였다. 다시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밧줄로 묶여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썩은 팔과 입을 맞췄을 터였다.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가 앉았고 드륵, 드륵, 큐브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렸다. 석화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군화부터 시작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케이프를 매단 제복차림의 곽수환은 상체를 느슨히 굽힌 채 큐브를 돌리고 있었다. 여유 있는 자세였지만 빈틈은 없어보였고, 누구보다 딱딱한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곧 큐브를 책상에 내려두고 앞의 팔을 쓱 들어 올렸다.
“선물이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네.”
팔을 뒤로 휙 던지자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둔탁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지 걱정되는 사람이 경고를 무시하고 사람 속이는 짓을 합니까?”
심드렁한 말투에 석화가 입을 달싹거렸다.
“죽나요?”
곽수환은 목 안쪽에서부터 헛웃음을 내뱉었다.
“군법상 즉결 처형이 가능한 사안이긴 하죠.”
“……그렇게 오양석 박사님도 죽인 겁니까?”
만일 컨트롤러가 처형을 한 거라면 오양석 박사의 죽음이 베일에 싸인 것도 이해는 갔다. 그렇다면 곽수환은 그간 자신을 완벽히 속여 온 거다.
“오 박사를 살해한 사람은 분명 내가 찾아내주겠다고 약속했을 텐데.”
그는 여전히 아니라고 말했다.
“곽 소령님……. 정말 돌연변이는 맞습니까?”
“편견에, 호기심 덩어리에, 애매한 정의심에 아집까지. 굳이 아담 바이러스 연구원에게 필요한 자질은 아니니 레인보우 시티의 연구원으로서 가치가 없지 않나.”
곽수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석화가 몸을 움찔했다. 군홧발로 다가온 그가 뒷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칼날이 펼쳐지는 순간 석화가 등을 더 뒤로 물렸고, 백열전구 불빛에 예리한 칼날이 번들거렸다. 그대로 제 가슴팍을 꿰뚫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뚝, 곽수환은 몸을 묶은 끈만 잘라냈다. 몸을 포박하고 있던 줄이 끊어져 나갔는데도 여전히 묶여있는 기분이었다.
곽수환은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생수통이 들려 있었다. 내민 생수통을 향해 손을 뻗었더니 수전증 환자처럼 잔 떨림이 한동안 이어졌다. 석화는 한 모금 입을 축이고, 두 번째는 물을 조금씩 삼켜 넘겼다.
그동안 곽수환은 뒤에 놓인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붉은점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뒤 좀 전과 같은 자세로 큐브를 쥐었다.
물을 마시니 머리가 좀 더 맑아진 석화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암호를 작성했을 때 한 번도 서펀트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일전에 오양석 박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곳에 암호를 가져다두고 에덴동산이 접선을 해올 일에 가능성을 둔 것뿐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곽수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 암호 해석은 제대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건 반군과 접선하기 위한 암호문이 아니었고요.”
“주어는 없었지만 정황상 파악이 가능했죠.”
“반군이 아니라 여의도 쉘터에 있는 사람들 중, 오양석 박사님의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접선을 해오길 원했기에 적어둔 것뿐입니다.”
석화는 느릿하지만 정확하게 말을 전달했다.
“그냥 호기심이 생긴 것뿐이었다, 실제로 접선을 한 적이 없으니 그냥 봐달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편이 좀 더 수월하지 않나.”
곽수환이 큐브를 빙글 돌렸다. 그간 군기를 느끼지 못했던 건 그가 군 장성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그의 기행은 컨트롤러임을 숨기기 위한 연막처럼 느껴졌다.
“정황만으로 저를 체포한 것이야말로 권력남용 아닙니까?”
석화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단순히 힘에 부쳤기 때문이지 두려움은 아니었으므로 물로 다시 입만 축였다.
‘그자를 가장 조심하십시오. 그자야말로 썩어빠진 레인보우 시티의 수호자이죠.’
설마 서펀트는 곽수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걸까?
“석 박사님.”
존대를 하는데도 예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퍼스트와 세컨드가 대립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는 늘 피바람이 불어오기 마련이고. 적어도 내 경고는 석 박사님의 안위를 생각해서 내뱉은 말이라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 즉결 처형이 가능했을 테니 목숨을 살려둔 것을 봐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레인보우 시티도, 에덴동산도 전부 문제가 있다면,”
탁, 곽수환이 큐브를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그럼 석 박사가 새로운 나라라도 세우려고? 정도를 지나치지 않는 호기심은 가져도 좋지. 그런데 박사님은 이미 그 선을 넘었고, 나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려는 거야. 수석 연구원 목 하나 날리는 거 레인보우 시티에서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 거 알잖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은 이제 석화에게도 해당됐다. 그러나 곽수환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게 의아했다. 앞서 보여줬던 모든 모습이 거짓이라면 그냥 저를 처형하면 그만일 텐데 말이다.
“그럼 저는 아무 의심도 갖지 않고 연구만 하면 되는 거고요?”
곽수환이 박수를 가볍게 두 번 쳤다.
“어렵지 않은 일이잖아.”
“만일 치료제를 개발하려고 하면 저는 처형당합니까?”
석화가 생수통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렇다면……. 지금 죽이세요.”
“어차피 내가 죽이지 않아도 죽게 될 텐데. 아니 어쩌면 석 박사 얼굴 반반하니 상부 놈들이 굴려먹다가 죽일 수도 있겠고.”
곽수환이 좀 더 석화에게 몸을 기울였다.
“부당한 대우 당해본 적 없지? 그래서 하지 말라는 짓도 겁 없이 하고.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시간부터 석 박사 직위 전부 박탈해버리면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게 돼. 내 입맛대로 박사님을 가지고 놀아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거야.”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곽수환 소령님도……. 분명 아시잖아요.”
곽수환이 고개를 슬쩍 틀었다.
“모든 게 다 이상하게 돌아간다고요. 의식주가 해결된다고 해서 아닌 일에 수긍하는 건……. 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석 박사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나가서 아담이라도 때려잡을 수 있어? 아니면 지금 당장 치료제를 내놓을 수가 있나.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수천수만 번 실험을 해도 완벽한 치료제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잖아? 지금까지 세상에 나와 있는 온갖 백신, 치료제가 전부 단숨에 나온 게 아닌 건 나도 알지. 길게는 몇십 몇백 년씩 걸려서 완성되는 게 태반이었고.”
“아담이…… 말을 했어요. 곽 소령님도.”
봤잖아요. 그 말이 나와주지를 않았다. 석화는 눈을 감았다가 숨을 고르고는 빨간 불이 들어온 카메라를 쳐다봤다.
“보셨잖아요. 아담에게 지능이 생긴 게 우연일 리가 없어요.”
곽수환은 발로 테이블을 밀치며 일어났다.
어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거지. 저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의도 쉘터 석화 박사.”
곽수환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오후 9시 25분 기점, 헌병대 컨트롤러의 권한으로 연구원 자격을 박탈한다.”
그가 카메라를 들었고 붉은 점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