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ne wall (4)
“흐음.”
남자는 목을 낮게 울리면서 바닥을 훑어봤다.
여의도 쉘터 연구원인 석화의 급작스러운 이동 소식이 들려온 건 오늘 오전이었다. 곽수환과 그렇게 쉘터를 나가고 난 뒤의 일이니, 그사이에 뭔가가 있었겠지 짐작할 뿐이었다.
연구와 관련해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상부의 허가를 받고, 석화의 방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이런.”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 중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을 주워들었다.
“접선을 원한다라…….”
남자는 그 종이를 입술 가까이 가져다댔다. 조용히 입매를 끌어올리고 나머지 것들을 주워들기 시작했다. 여러 장 중에 단 한 장만이 글씨체가 달랐다. 보아하니 석화 박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한 것 같은데, 남자는 직감했다. 이걸 해독한 사람이 곽 소령일 것이라고.
나머지는 악필인 석화의 글씨가 종이 곳곳에 빼곡했다.
[기생충 박멸로 자가면역질환이 늘어난 사실이 유력. 기생충이 사라짐으로써 기생충을 공격하던 면역계가 오류를 일으켜 다른 조직을 공격함. 오청운 선배에게 크론씨병과 다발성경화증이 있었음. 기생충. 마이코플라스마……. 아담에게 지능이 생긴 것은 타의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으며……. 미완성의 치료제를 맞았을 가능성 유효. 연구지원금 불허.]
종이에 두서없이 적힌 글을 읽어가던 남자가 좀 더 기분 좋게 웃었다.
아버지, 우리가 틀리지는 않았나 보네요.
“최 박사님이 왜 여기 계세요?”
최호언이 여러 장의 종이를 한데 뭉치며 뒤를 돌아봤다. 열린 문 밖에 서 있는 건 이채윤이었다. 케이프가 거추장스러운지 어깨에 뒤집어 얹고 있었고, 그녀는 제 몸만 한 커다란 박스를 질질 끌며 들어왔다.
“석화 박사님 방은 제가 정리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경계심을 잔뜩 세운 이채윤에게 최호언은 사람 좋은 인상을 지었다.
“다른 건 아니고, 박사님이 이동을 하신다는데 인수인계도 없었고 어디로 이동하시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필요한 게 있을까 싶어 직접 들어와 봤습니다.”
“전 이야기 못 들었는데요? 그래도 석화 박사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되죠.”
“상부의 허가를 받았습니다.”
하여간 상부새끼들, 이채윤이 대놓고 구시렁거렸다.
“어쨌거나 지금 들고 있는 그 종이요. 여기 넣어주세요.”
빈 박스 안을 검지로 가리켰다.
“이채윤 소령님께서 석화 박사님의 짐을 대신 정리하는 겁니까?”
“그런데요?”
“그럼 석화 박사님께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아십니까?”
최호언은 종이뭉치를 박스에 가지런히 놓으며 물었다.
“알죠. 과천이에요.”
이채윤은 어려울 것 없다면서 쉽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더니 책상에 놓여 있던 몇 개의 돌과 석화의 옷가지 그리고 책을 박스에 투척했다. 아무렇게나 넣으니 사과상자의 세 배나 되는 박스가 가득 차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다 됐어요.”
이채윤은 별 힘을 들이지 않고 박스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몸이 박스에 가려 앞이나 제대로 보일까 싶을 정도였다. 최호언은 두 번 도움을 권하진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최 박사님.”
그가 문 앞에 다다른 때였다. 최호언은 무표정한 얼굴에 웃음을 덧칠하고는 뒤를 돌았다.
“말씀하세요.”
박스 옆으로 이채윤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몸이 엄청 좋으시네요?”
최호언은 시선을 내려 몸을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쑥스럽다는 듯 뒷목을 쓸어내렸다.
“과찬이십니다.”
“칭찬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녀는 안고 있는 박스로 최호언을 밀어내면서 밖으로 나왔다. 밀려난 최호언이 넉살좋게 웃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채윤은 박스를 바닥에 내려두고 최호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고는 허벅지를 꽉 쥐었다. 이미 아문 상처가 의아하게도 욱신거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놈의 체구가 익숙했던 이유가 있었다.
이채윤은 박스 안에 손을 넣어 작은 돌 하나를 찾아냈다. 여기서 놈의 뒤통수를 향해 돌을 던지면 뇌수가 터져 나오려나? 그랬다가 정말 죽으면 어쩌지? 그래도 일단 던져보자. 자세를 잡는 그때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최호언이 불현듯 뒤를 돌았다.
꾸벅, 인사를 해오니 이채윤은 돌을 손 안에 숨겼다. 최호언에게 구린 구석이 있는 것 같으니 잘 지켜보라고 했던 게 곽수환이었다. 안 그래도 석화 박사의 방에 들어와 있던 것도 구렸는데, 이제는 당황스럽게도 팔뚝에 솜털이 전부 일어서 있었다.
“씨발, 뭐야 이거.”
이채윤은 제복에 가려진 팔을 쓱쓱 비볐다. 그녀도 이 감각이 소름이라고 불린다는 걸 알지만, 살아오며 경험한 적은 손꼽았다. 이채윤은 곧장 박스를 들어 올리고는 지하에 있는 자신의 지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박스에 시야가 가려졌어도 나자빠지지는 않았다.
***
“야! 대체 그 새끼 뭐야?”
과천 백호 소대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박스가 말을 했다. 박스를 쿵 바닥에 내려두자 목소리의 주인이 그제야 보였다.
“뭐가.”
심기가 불편한 곽수환은 두 다리를 책상에 길게 걸쳐 올린 채로 입만 움직였다.
“그 박사 새끼, 뭐냐고. 석화 박사님 방에 나보다 먼저 가 있더라?”
곽수환이 눈을 움직여 관심을 보였다.
“먼저 가 있었다고?”
“어. 그 새끼가 뭐라더라? 인수인계 못 받았다면서 종이 뭉치 쳐다보고 있던데? 그래서 내가 여기 담으라고 했지.”
여의도 쉘터로 석화의 이동명령을 내린 게 오전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석화의 방에 들어갔다니, 관심이 지나쳤다.
“네가 보기엔 어떤데.”
“뭐가?”
“최 박사라는 새끼.”
“음? 존나 세 보여.”
이채윤이 다시 제 팔을 쓱 문질렀다. 곽수환보다는 이채윤이 좀 더 본능적이었다. 돌연변이 체질상 그렇게 타고났고.
“그리고 그 새끼, 내가 돌 던지려고 하니까 귀신같이 돌아보더라?”
“그러게. 구린 게 있는데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지.”
인기척이 느껴졌다고 말한 것과 자신과 힘겨루기를 한 일만 봐도 그랬다. 놈의 정체가 뭘까. 돌연변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채윤은 곽수환을 향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뭔가를 가늠하듯 굴었다.
“양상훈이나 너나, 백 미터쯤 떨어져 있어도 내가 단박에 알아볼 수 있거든? 사람 골격이 비슷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되게 다르거든. 눈코입 달려있는 건 매한가지인데 생김새도 다 다르듯이 말이야.”
“그런데.”
“그 박사 새끼. 흰 가면하고 체격이 비슷해.”
이채윤은 말을 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곽수환이 발로 책상을 밀어 의자를 뒤로 뺐다.
“서펀트?”
“서펀트라니?”
“그날 모텔에서 붙었던 놈 말하는 거냐고.”
“어어! 그 새끼.”
곽수환이 의자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이채윤에게 다가갔다.
“뭐야, 왜 그래?”
“올라가서 그 새끼 만나면 옷 벗겨서 상체 확인해봐.”
“미친 새끼야. 내가 왜 최 박사 상체를 봐. 그 새끼 내 취향 아니야.”
툭툭, 이채윤의 오른쪽 어깨를 곽수환이 두드렸다.
“여기 상처 자국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하고.”
그날 도주하던 놈에게 총을 쐈고, 분명 어깨를 스쳐 지나갔기에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상처가 아물었다고 해도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면 자국은 분명 남았을 것이다.
“야, 옷을 어떻게 벗기냐고.”
“찢어, 그냥.”
“무식한 새끼. 그럼 담배 두 보루.”
“콜.”
지나가는 최 박사를 붙잡고 북 옷을 찢고는 힘이 좀 들어갔다며 사과하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 일에 담배 두 보루면 그녀로선 남는 장사였다.
“석화 박사님은?”
이채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박사님 어딨냐고.”
“이만 올라가. 확인하면 바로 연락주고.”
곽수환이 대충 손을 흔들고는 소대장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이채윤이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석화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겁 없는 석 박사에게는 충격요법이 필요했는데, 행여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릴까 봐 자못 걱정도 됐다. 언제가 되든 치료제를 개발하기는 해야 할 테니까.
에덴동산이 석화에게 접선을 한 건 치료제나 백신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부의 눈 밖에 나서 석화가 처형당하는 건 시티로서도 엄청난 전력 손실이었다. 그뿐인가, 겉모습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제 취향이었고, 보여주는 반응 또한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고는 했다. 멍한 얼굴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반응을 한다. 정작 석화 자신은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안에 숨겨진 불은 몸만큼이나 홧홧했다.
체력만 좋았다면 반군의 수장이 돼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타도 레인보우 시티’, ‘타도 에덴동산’을 외쳤을지도 모르지.
“소령님.”
백호 소대 강 대위가 저쪽에서 거수경계를 해왔다. 쉬어, 그 말을 하고 지나가는데 할 말이 있는지 다시 한번 곽수환을 불렀다.
“양상훈 소령님께서 지하 방역 센터로 내려오셨으면 하는 말씀을 전달해오셨습니다.”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많이 급한 사안이신 듯했습니다.”
귀찮게. 중얼거린 곽수환은 취조실로 가던 발걸음을 방역소로 틀었다. 한 시간 전에 석화를 확인했을 때 자고 있었으니 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을 듯했다.
과천 쉘터는 여의도 쉘터 면적의 10분의 1 수준이었다. 굳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아도 방역소까지 내려가는 건 금방이었다. 곽수환은 주머니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돌을 한 번 매만져봤다. 석화가 입고 있던 가운에 담겨 있던 것이었다.
이게 그렇게도 좋은가.
어젯밤 연구직을 박탈한다는 말을 듣고 완연하게 사색이 된 석화는 그 이후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급으로 대우해주는 거야, 석 박사.
일반 시민으로 내린 마당에 제가 해코지를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억지로 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몸 달아서 상대가 덤벼드는 게 낫지. 물론 사람 눈 돌아가게 제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석화가 이제는 눈도 마주쳐주지 않았다. 성욕보다 분노가 더 앞서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뭐, 아무렴 어떤가. 앞으로 마스터들의 싸움은 저들끼리 하게 놔두고, 자신은 예기치 못하게 세력을 키운 에덴동산을 무너뜨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석화의 그 정의감이 필요하겠고.
여태껏 생각해 왔던 계획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듯했다.
***
‘석 박사, 아담의 변이도 이상하지만 진화의 속도를 무시한 돌연변이도 참 이상하지 않나? 아니, 석 박사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닐세. 허허. 그냥 내 기우일 뿐이지. 돌연변이들은 뭐 하나 부족한 것들이 꼭 있지. 그런 것을 레인보우 시티에서는 하자라고 표현하지 않나. 그런데 인간이 상품이나 개량종도 아닌데 하자라는 표현이 참 이상하지. 만일 하자가 없는 돌연변이가 있다면 그건……. 신인류라고 불러야 하는 겐가? 그렇다면 마스터의 자리는 그자에게 가야겠지. 아마 마스터들은 돌연변이에게 하자가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게야. 안 그랬다면 자신들의 자리가 위태로웠을 테니까.’
석화는 두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뜻 정신이 들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최근에 오양석 박사가 이렇듯 꿈에 자주 나왔다. 아마 자신이 박사님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일 거다. 돌이켜보면 돌이켜볼수록 오양석은 반군 성향이 가득했던 것만 같았다.
석화는 긴 의자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바이올렛 구역에서 과천으로 이동한 게 어제 새벽이었다. 백열전구는 그곳과 똑같이 방의 중심에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곽수환이 자신을 죽이지 않고 연구원직만 박탈한 일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겨우 한 사람의 독단으로 사람의 직급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레인보우 시티의 이상한 법에 대해서 말이다.
짓궂게 웃으며 돌을 선물해주던 남자와, 연구직을 박탈하고 수갑을 채운 남자가 여전히 전혀 다른 이로만 느껴졌다. 반군과 접선하려고 한 건 백번 잘못한 게 맞겠지만, 이제는 치료제를 기피하는 레인보우 시티에도 충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밖은 아담과 인체실험을 일삼는 에덴동산이 있어 어느 편에 설 수도 없었다. 석화는 홀로 섬에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긴급상황. 과천 쉘터에 알립니다. 방역소 아담 출현, 방역소를 폐쇄합니다. 긴급상황, 쉘터에 거주하는 연구원을 비롯한 민간인은 모두 세이프존으로 이동합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석화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취조실 모서리에 달린 스피커에서 여의도와 같은 마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훈련 상황일 수도 있을 테지만, 팔의 자유를 막은 수갑을 불안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나가야 하나? 일단은 여기서 기다리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데…….
쾅! 순간적으로 터진 굉음에 어깨가 소스라치게 떨렸다. 석화는 취조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군인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군인은 정신을 차리듯 고개를 몇 번이나 털어내는 행동을 했다. 아담을 처치하고 온 건지 손과 몸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도망…… 흐으.”
말이 어눌했지만 석화는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일까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으……. 도망…….”
군인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비틀거렸다. 석화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괘, 괜찮아요?”
군인이 석화의 말에 셀 수도 없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괜찮, 괜찮…….”
석화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건 마치, 일전에 오청운 선배나 이브를 말하던 변이 아담에게서 느껴지던 기시감과도 같았다. 문에 가까이 서 있는 군인은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듯이 휘청거렸다. 석화는 벽을 타고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살금살금 걸었다.
“아……. 아파……. 아파.”
군인은 벽에다 대고 머리를 쿵쿵 박기 시작했다. 석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문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해도 밖에 아담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수갑 때문에 행동에 제약도 따랐다. 생각해. 생각해. 석화가 제 이마를 손으로 꾹 눌렀다. 어차피 생각을 해봤자 아담이 덤벼든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차라리 저 군인을 밖으로 유인해서 문을 잠근다면…….
석화는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책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취조실이다 보니 날카로운 물건이나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다.
쿵, 쿵, 계속해서 벽에 머리를 박는 군인을 경계하며 맨발로 책상을 향했다. 세 걸음 옮기고 군인을 확인하고, 또 몇 걸음을 움직여 책상 위로 올라갔다. 석화는 셔츠를 조심히 뒤집어 벗고는 수갑과 손에 한 데 감았다.
백열전구가 매달린 금속줄을 쥐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전구를 붙잡았다. 긴장된 숨을 들이켰다. 쿵쿵 하는 소리에 맞춰 전구를 돌리기 시작했다. 깜빡거리며 빛이 점멸할 때마다 석화는 불안한 눈으로 군인을 쳐다봤다.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머리를 박고 있던 군인도 행동을 멈췄다. 새까맣게 변한 취조실은 문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으로만 주변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컥, 크헉,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군인의 모습이 기괴했다. 두려움에 석화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다. 전구를 두 손으로 꽉 쥐고 머리 위로 들었다. 군인이 저를 발견하기 전에 온 힘을 다해 저 문 밖으로 전구를 내던졌다.
챙그랑! 문 밖으로 날아간 전구가 깨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군인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면 끝이다. 석화도 책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문으로 마구 내달렸다. 어깨로 문을 미는 때에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군인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허우적거리는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안간힘을 다했지만 군인의 힘이 더 거셌고, 뒤로 나자빠진 석화의 위로 군인이 올라탔다. 짐승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저를 물어뜯으려는 얼굴을 두 손으로 막아냈다. 그때마다 군인은 다닥거리는 이빨로 셔츠를 씹어댔다. 발버둥에 차인 문이 닫히니 완벽한 어둠이 찾아들었다.
“아……. 아……. 안 돼. 흐으……. 무, 물면.”
말을 더듬는 군인은 딱, 딱딱, 딱딱딱, 위아래 이를 부딪쳤다. 그 소리가 소름끼쳤다.
돼……. 무, 물어도…… 돼. 안 돼.
혼란스러울 정도로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석화는 그 틈을 타 제 위의 군인을 발로 밀쳤다. 윽! 손목으로 둔탁한 통증이 닥쳐왔다. 날카로운 이에 씹힌 살점이 아릿했다. 고막이 저릿할 만큼 괴성을 지르며 다시 공격해오는 그 순간이었다. 퍼억! 거센 파열음과 함께 군인이 석화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누군가의 힘에 목이 완전히 돌아가 나자빠진 군인은 바닥에서 몸을 버둥거렸다. 군홧발에 짓밟혀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리 또한 곧 이어졌지만, 석화는 멍하니 자신의 손목만 내려다봤다. 새어 들어오는 빛은 반대쪽을 비췄기에 시야는 어둡기만 했다.
다만 무언가가 흐르고 있는 감각만큼은 여실히 느껴졌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