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tone wall (4) (9/23)

Stone wall (4)


백록담에서 터져 나온 용암이 한라산을 타고 흐른다.

굼실거리며 산을 녹여 내리는 검붉은 용암은 아담의 피와도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휴화산이 결국 활동을 시작한 건가? 지나치게 뜨거운 열기에 온몸이 삽시간에 증발할 것만 같았다.

석화는 코앞에서 흘러내려오는 용암을 봤지만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두 다리가 돌처럼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더워, 뜨거워.

몸의 모든 곳이 지글지글 들끓고 있었다. 열기에 고막도 부어 땡땡하게 올라붙은 듯했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열이 45도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정신을 차린다고 해도.’

‘혈액은? 변이는?’

너무 더워 몸을 뒤척이려 했지만 표본이 된 곤충처럼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차가운 무언가가 손에 닿았다. 시원한 두 손이 제 손을 맞잡아 주었다. 석화는 분출하는 화산을 바라보며 간신히 입을 떼어냈다.

……더워요. 탈 것 같아.

‘격리실로 옮기고 얼음 준비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점차 멀어졌다. 지진이라도 이는 듯한 감각에 석화는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괴로워, 차라리 잠들고 싶어.

그럴수록 열에 들끓는 몸의 모든 세포가 일깨워지듯 신체의 고통은 선명해졌다. 등에 닿는 시린 감각에 석화는 두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그러나 실제로 손을 허우적거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체를 눕혀두는 스테인리스 염습대의 냉기는 금세 석화의 열로 달궈졌다.

나 안 죽었어요.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차갑고 좁은 냉동고 안으로 몸이 넣어지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체온을 낮춰야 합니다.’

‘얼려 죽일 셈이야? 얼음이나 더 가져와!’

익숙한 목소리가 고함을 내질렀다. 달뜬 숨을 내뱉으니 어느덧 화산은 사라져 있었다. 숙인 고개 밑으로 하얀 눈만 듬뿍 쌓여 있었다.

한 걸음 내딛으며 걸으니 발자국이 닿았던 곳은 눈이 녹아 물로 흥건해졌다. 석화는 흑백의 뽀얀 눈길을 걷고 걸어서 세화해변 근처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엄마, 저 왔어요. 오늘 눈이 왔어요. 삼 년 만에 내린 눈이래요.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요.

내려다 본 제 손은 제주도 특산물인 고사리같이 작고 얇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오 선배는 우리와 달라요.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달라진 것뿐이죠. 내 아이를 실험대에 올릴 수는 없어요. 어차피 후계자로 삼을 수도 없는 하자품이라면서요.’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도 보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네가 숨기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능이 부족하다고? 그거야 학습센터로 가게 되면 알겠지. 사용할 구석이 있다면 철저하게 사용해야지.’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서요?’

‘…….’

‘정말로 알 것 같아요. 곽 선배와 강 선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너무 잘 알겠어요. 나는 내 아이에게 절대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레인보우 시티? 그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희생을 해야 하나요.’

‘이진연, 반군사상으로 처형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 영상 종료해.’

석화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청마루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더니 발밑에 축축한 물이 고였다. 석화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마루에 모아둔 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소리에 석화의 엄마가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 방 안에는 그간 보지 못했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이진연은 다 젖은 석화의 꼴을 보고는 걱정스레 다가왔다.

‘화야, 너 또 맨발로 다녔어?’

‘눈 왔어요.’

‘그러네.’

‘삼 년 만에 내린 눈이래요.’

석화는 멍한 시선으로 아직도 내리는 흑백의 눈을 바라봤다.

고작 여덟 살인 석화는 이 근처 사는 사람들에게 불쌍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돌이나 줍고 있으니, 지능이 부족하다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진연은 아이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중얼거렸다.

‘학교에 가고 싶니?’

‘……안 가도 돼요.’

석화는 학습센터에 가는 일을 어머니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찬가지로 그 마음을 아는 이진연도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조그만 아이는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았다.

‘학습센터에 가면 널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이 많을 거야.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어.’

‘아버지가 없다고 왜 손가락질을 해요. 그건 이상한 거예요.’

‘우리 석화는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궁금해도 어쩔 수 없어요.’

석화는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제가 모은 돌 중에 가장 매끄럽고 예쁜 것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상냥하게 웃은 어머니는 석화의 두 뺨을 앙상한 손으로 감쌌다. 귀까지 감싸여 있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물속에 잠긴 듯이 들려왔다.

그녀는 느릿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걸쳤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지. 아담은 인간이 창조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단다.’

석화는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에 제 뺨을 비볐다.

‘에덴동산에서 갈라져 나온 강물은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였고 그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지. 아니, 비옥하게 만들고 싶어 했지만……. 석화야. 그 누가 뭐라 하든 너는 실패작이 아니야. 유프라테스가 낳은 완벽한 아이지.’

‘날 낳은 사람은 엄마예요. 엄마 이름은 이진연.’

‘그래, 우리 똑똑한 석화.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는 유프라테스이기도 했단다. 비손과 기혼의 두 아이는 어떨지 모르겠구나. 티그리스도……. 한곳에서 파생되어 나왔지만 네 개로 갈라진 강물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몰랐지.’

알 수 없는 말을 석화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담에게는 이브가 필요해. 그러나 우리는 실패했고, 또 사상을 달리했지.’

‘아담은 무서운 거라고 했어요.’

‘사람도 무섭단다. 너에게 아담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야. 사람을 조심하렴. 내일부터는 학습센터에 가자꾸나.’

어머니의 앙상한 손이 가루가 되어 눈바람처럼 날리고, 몸에 열이 다시 한번 올랐다. 장소는 곧 여의도 쉘터로 뒤바뀌었고, 연구복을 입은 오양석 박사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어서 오게나. 참으로 이 박사를 많이 닮았군.’

깜빡, 석화는 눈꺼풀을 털어냈다. 이 박사? 그게 누구지?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낯선 연구소에서 석화는 주어진 일만 할뿐이었다. 다만 치료제에 몰두하는 오양석과 뜻을 같이해 석화도 연구를 거듭했다.

‘석 박사, 내 할 말이 있다네.’

어느 날 밤, 오양석의 자택에서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양석의 목소리는 희열에 차 있었다.

‘말씀하세요.’

‘석 박사가 말했던 것 있지 않나. 거기에 희망이 있을 것 같아. 전화로는 설명이 어려우니 내일 당장 연구소로 돌아가겠네.’

석화는 속으로만 의문을 띠고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누군가가 자신의 방 문을 급히 두드렸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더니 침통한 얼굴을 한 군인이 서 있었다.

‘박사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박사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석화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멍한 눈을 들었다.

‘……뭐라고요?’

‘집 안에서 쓰러지신 것을 이웃 주민이 발견했고, 제주도 병원센터로 이송됐지만 이미 숨이 끊긴 뒤였습니다. 제주도로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

‘박사님?’

군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석화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부고에 가슴이 수십 개의 칼로 난자당하는 것 같았다. 익사 직전의 사람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뻐끔거렸다.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제주도로……. 가야겠어요.’

휘청거리는 몸을 군인이 부축했지만 석화는 스스로의 힘으로 간신히 섰다.

세상의 오롯한 제 편은 이제 단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오롯이 편을 들 수 있는 대상도 사라진 것이다. 석화의 세상에 마음 둘 곳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그 상실감은 모든 것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외로워.’

소리 냈더니 정말 더 외로워졌다.

***

“……워.”

석화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던 곽수환이 놀라 바짝 다가갔다. 방금 분명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대장, 위험합니다.”

격리실 문을 지키고 선 차 중령이 목소리를 키웠다.

“입 다물어.”

바이올렛 구역으로 석화를 다시 데려왔지만, 아담에게 물렸으니 즉결처분을 해야 한다는 의무원의 충고를 무시했다.

그때부터 차 중령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담으로 변한다고 해서 곽수환이 석화의 공격에 다칠 일은 없겠으나, 자신의 상사가 평소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석화가 아담으로 변이한 것은 아니니 지켜보는 게 옳을 테지만…….

“그렇게 다가갔다가 물리면.”

“지금 네 눈에는 석 박사가 아담으로 보여?”

“그건 아닙니다. 변이가 늦을 수도 있으니 염려하는 것뿐입니다.”

“나가 있어.”

차 중령은 뭐라 한 마디를 더 보탤까 하다 포기했다. 곽수환의 험악한 분위기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격리실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곽수환은 온몸이 포박된 석화를 내려다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과천 쉘터 방역소로 행방불명 됐던 군인 몇 명이 돌아왔다. 다들 멍한 구석은 있었으나 말은 잘 통했기에 오랜 굶주림 때문이라고 방역소는 결론 내렸다. 다만 에덴동산에서 탈출한 것으로 짐작되는 군인들이었기에 곽수환을 호출한 것이었다.

몇 놈은 문제가 없어 쉘터로 진입을 한 뒤였으며, 단 한 놈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증세를 보였다. 감시 카메라로 상황을 지켜보던 곽수환은, 방역소 놈들이 일을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놈은 마치 오양석 자택에서 마주했던 오청운과도 비슷해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방역소로 쳐들어가 놈의 숨통을 끊어내려 했으나 놈이 변이한 것이 더 빨랐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군인들과 의무원들이 아담에 감염됐고, 방역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양 소령, 방역소 내부부터 정리해.”

“야! 너는?”

양상훈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방역소 감시실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씨발! 위로 진입시킨 놈들 있다며!”

방역소를 양상훈에게 맡긴 곽수환은 곧장 석화에게로 달려갔다.

잠을 자고 있을 텐데, 아니 그것보다 수갑을 채워놨기에 운신도 자유롭지 못할 석화였다. 아니나 다를까, 취조실 복도도 아담으로 변이한 놈들과 그걸 막으려는 군인들의 싸움으로 엉망이었다.

곽수환은 제게 덤벼드는 놈들을 전부 벽에다 처박아 머리통을 부수고 취조실로 달려갔다. 석화가 있던 방 앞의 깨진 전구를 보자마자 피가 얼음장처럼 식어나갔다. 그와 반대로 가죽 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깨진 전구까지 밟으며 재빨리 문을 차니 발버둥치는 석화가 보였다. 아담에게 짓눌린 앙상한 몸이 위태로웠다. 젠장! 이를 따닥거리며 석화를 공격하는 놈을 떼어냈다. 순식간에 머리통을 박살내고 나서야 차갑게 식어 내린 한숨을 돌렸다. 괜찮냐고 물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고, 석화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어둠에 좀먹히는 석화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어째서인지 지나치게 무거웠다.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던 몸인데 중력이 엄청난 세기로 저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양 어깨를 잡고 일으키니 잇자국을 따라 파인 손목의 살점이 드러났다.

석화의 흔들리는 시선이 곽수환에게 닿았다.

곽수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오래전 보내버린 부모님과 동생을 떠올렸다. 안 된다.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어. 절망스러움에 석화의 어깨를 더 거세게 쥐었다.

……살고 싶어요.

석화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잇새로 터져 나오는 자신에 대한 욕을 삼키고, 셔츠를 찢어내 석화의 팔뚝에 꽉 묶었다. 이것으로 감염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석 박사가, 석화가, 아담이 된다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짓궂은 장난으로 선물한 돌을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엉뚱한 박사가, 기운이 없어 덥석 잘도 업히던 석화가 사람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곽수환은 누군가가 제 숨통을 꽉 틀어쥐는 기분을 맛봤다. 석화를 안고 달리면서 길을 막는 아담을 총으로 갈겼다. 저는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놈들이라 두렵지 않았지만 석화는 아니었을 거다.

“아담 키트 가져와!”

곽수환은 의무실 침대에 석화를 내려두고는 고함을 내질렀다.

“무, 물렸습니까?”

“입 닥치고 키트나 가져와!”

의무실장이 다급하게 서랍을 열어 아담 키트를 꺼내왔다.

곽수환은 키트를 감싼 덮개를 벗겨내고 석화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피를 묻혔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 붕대로 석화의 손목을 강하게 압박해 감쌌다.

20초, 20초면 충분하다.

곽수환은 기절한 채 숨을 색색거리는 석화를 끌어안았다. 빌어먹게도 기나긴 20초를 기다리며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두려움에 질린 의무실장은 석화를 피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나가지 마!

곽수환이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문을 열자마자 아담이 덤벼들었고, 의무실장의 목에서 피가 튀었다. 여의도와 다르게 열악한 환경인 데다 낮은 클래스 군인들이 포진한 과천 쉘터는, 온갖 절규가 난무하는 지옥의 한 구석처럼 변했다.

20초가 지나도 키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곽수환은 테이블을 뒤집어 콰직, 발로 차서 다리를 꺾어 떼어냈다. 뒤에서 덤벼드는 아담의 아가리에 테이블 다리를 꽂고 석화를 고쳐 안았다.

새로운 키트를 찾아서 제복 안쪽에 넣고, 변이된 의무실장의 머리를 으깼다. 하얗게 질린 석화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 목을 물어뜯으려고 이를 다닥거리지도 않았으며, 약하게 앓는 신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아담으로 변할 거였으면 이미 충분히 감염이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곽수환은 혹시나 싶은 생각을 했다. 물렸어도 혈액이 침투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다시 석화의 피를 묻혀 키트를 확인했을 때였다.

양성 반응.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아무래도 키트에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곽수환은 키트를 집어 던지고 석화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열이 엄청났다.

과천 쉘터에 그대로 둘 수가 없기에 그는 아수라장을 헤치며 바이올렛 구역으로 향했다. 지프 조수석에 벨트를 채워 눕힌 석화를 연방 확인했다. 사납게 차를 모는 동안에도 석화가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제 관리하에 있는 쉘터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격리실로 향했다.

멍청한 새끼들이 석화를 시체보관소에 처넣으려는 것을 막고, 얼음을 퍼부어 엄청나게 들끓는 석화의 열을 식혀나갔다. 그러나 재차 확인한 키트는 여전히 양성 반응. 정말로 아담에게 물린 것이다. 곽수환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그 키트를 분질러버렸다.

그는 차 중령을 제외한 모든 군인과 의무진들을 격리실에서 물리고, 계속해서 석화를 지켜봤다. 그게 벌써 만 하루가 넘었다. 과천 쉘터는 양상훈의 주도로 정리가 완료됐고, 아담으로 변이한 군인들이 어떻게 다시 복귀를 하게 됐는지 역학조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또한 석화가 아담에게 물린 사실은 극비였다.

곽수환은 때때마다 키트로 석화의 혈액을 확인했는데, 벌써 이십 개를 더 넘게 썼다. 여전히 전부 양성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키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믿었지만, 스무 개 전부 불량품일 확률은 극히 적었다.

젠장, 변하지 마. 석 박사……. 곽수환은 석화의 뜨거운 두 손을 붙잡았다.

……시원해요. 곽 소령님.

마치 석화가 그런 말을 꺼낸 것만 같았다. 곽수환이 퍼뜩 고개를 들어 석화를 쳐다봤다. 피부는 여전히 사람의 그것이었지만, 지나치게 하얬다. 이렇게 뜨거운 몸을 하고서 눈 같은 살갗을 가진 석화가 아담일 리가 없다.

의무실장은 열이 45도까지 치솟았기에 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어쩌면 시각과 청각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치료제……. 곽수환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석화가 그렇게 치료제를 만들고 싶다고 말을 했을 때는 무시했다. 왜? 저에게 치료제는 지금 당장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치료제가 있었다면 석화가 이렇게 누워있을 일도 없었을 거다.

석화가 아담으로 변한다고 해도 한 주먹거리도 안 되겠지. 그래도 저 가는 목과 동그랗고 예쁜 머리를 박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괴롭게 바라보고 있다가 곽수환은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다시 키트를 들었다. 바보처럼 진실을 부정하는 꽉 막힌 머저리가 된 듯했다. 그래도 엄지에 바늘을 찔러 넣어 키트에 피를 흡수시켰다. 20초의 시간이 또다시 길고도 길다.

음성.

곽수환은 키트를 확 들고는 제 눈을 의심했다. 서둘러 또다시 새로운 키트를 들어서 석화의 피를 묻혔다. 총 다섯 개의 키트가 전부 음성 결과를 내보였다. 바닥에는 그가 내던졌던 키트가 음성과 양성으로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아파요.”

뒤에서 들린 석화의 목소리에 곽수환이 놀라 손을 콱 붙들었다. 석화는 슬며시 눈을 뜨고는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들어?”

멍한 동공을 둘러싼 흰자는 다행히도 맑았다.

앞이 흐릿한지 미묘하게 미간을 구겼다가 약한 숨을 내쉬었다. 곽수환이 미지근한 물을 입가에 흘려줬지만, 석화는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기침을 토해냈다. 그는 석화의 마른 등을 손으로 끌어안고 제가 입에 물을 머금었다. 입으로 직접 옮겨주려고 하자 석화가 고개를 돌렸다.

“……물렸어요.”

곽수환이 입 안의 물을 삼키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괜찮아. 다행히 혈액이 침투하지는 못했나 봐. 음성이야.”

그는 진심 반, 거짓말 반을 전했다. 그런데도 석화의 멍한 눈에 이채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너무 더워요. 온몸이 탈 것 같아. 그런데도 추워요.”

중구난방으로 말을 내뱉는 석화는 열에 들뜬 눈으로 허공을 덧그렸다.

“머리가……. 너무 아파. 깨질 것 같아. 눈이 내려요. 소령님…….”

석화는 고통스러움에 몸을 뒤척이며 얇고 긴 환자복을 끌어올렸다. 열을 식히고자 전라에 긴 상의만 걸쳐놓은 꼴이라 전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곽수환은 통에 담긴 얼음을 쥐어 석화의 겨드랑이에 끼웠다. 석화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웅얼거렸다.

“추워요. 소령님…….”

“열을 식혀야 해서 그래.”

혼탁하던 동공이 곽수환에게 다다랐다.

“……흐릿해.”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시력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그저 오랜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곽수환이 석화를 다시 고쳐 안고 물을 들이켰다. 또다시 입에 흘려 넣으려고 하자 힘없는 고개를 틀었다. 어차피 입에서 입으로 물을 흘려주는 일은 음성이든 양성이든 상관없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몸을 안고 입 안에 담긴 물을 천천히 흘려 넣어주었다. 처음에는 마시지 않고 전부 흘려보내던 석화가 두 번째부터는 꼴깍꼴깍 받아먹기 시작했다.

……시원해요.

다소 기분 좋은 듯이 숨결을 내뱉자 곽수환의 얼굴이 와작 구겨졌다. 정신이 들면 저에게 욕설을 퍼붓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이 바보 같은 박사는 시원하다는 말이나 한다.

겨드랑이와 등, 두 허벅지 사이에 놓았던 얼음은 삽시간에 녹아서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곽수환이 또다시 석화의 팔을 들어 얼음을 넣으려고 하자 석화가 신음했다.

“열이 아직도 심해.”

괴로워. 머리가 너무 아파.

석화는 고통스러움에 제 몸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가 기운이 다 빠져 숨만 몰아쉬었다. 시선에 초점이 없는 석화는 마치 강물에 잠겨 죽어가는 시체 같았다. 곽수환은 제복 상의를 벗고 셔츠도 전부 풀어 내렸다. 얼음을 손에 쥐고 석화의 몸과 제 몸 사이에 그것을 두고 마찰했다. 그런데도 차가운지 석화는 곽수환의 커다란 몸을 애써 끌어안고 신음했다.

양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음성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변화였으나 석화의 상태가 무사한 것이 가장 중요했다. 곽수환은 석화를 짓누를 수는 없어 제가 침대에 드러눕고, 석화를 그 위에 올렸다. 금세 녹아버린 얼음을 다시 석화와 자신 사이에 넣었다. 석화가 몸을 바르작거리자 물기에 서로의 몸이 질척거리듯 마찰했다.

“하아……. 오 선배…….”

석화가 중얼거리며, 곽수환의 어깨에 뺨을 비볐다. 곽수환은 석화의 등에 손을 두르고 있다가 움찔했다. 오 선배라니, 설마 오청운을 말하는 건가.

‘사귀었던 사람도 몇 명 없었다는 것 같던데?’

왜 이런 상황에서 이채윤의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석화의 열을 식히는 일이 우선이니, 석화가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도 손등에 힘줄이 바짝 서 버렸다. 그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삼십 분도 더 넘게 석화를 안아 열을 식히자 숨소리가 조금은 편안해져 가는 듯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석화는 곽수환의 피부에 얼굴을 문질렀다.

약간의 안도가 머무른데다 뜨거운 생명체가 몸을 맞대어오니, 별 수 없이 아래에도 반응이 찾아왔다. 곽수환은 얼음을 쥐어서 상체에 이어 하반신에 가져다댔다.

“흣.”

차가운 충격에 석화가 눈꺼풀을 여러 번이나 깜빡거렸다. 몸 중에 가장 시원하고 차갑게 해야 할 곳인데, 석화는 고환마저도 열기로 뜨거웠다. 석화는 시린 얼음을 치우기 위해 기운 없는 손을 내렸고, 그러다가 곽수환의 성기 밑에 손이 닿았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드는지 손바닥을 댔다가 또 손등을 대기도했다. 시원한 고환을 흡사 돌처럼 주물럭거렸다. 곽수환은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사람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곽수환은 제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그랬어요.”

“응?”

“오 선배……. 또 비손과 기혼의 두 아이는 어떨까요. 티그리스는……. 내가 이 박사를……. 닮았어요.”

아직 고열에 헛소리를 하는 듯했다. 석화가 계속 아래를 주물거리자 곽수환이 그 손을 떼어냈다. 시원한데 왜 그러느냐며 불편한 숨을 내뱉는 석화는, 그의 쇄골에서 녹고 있는 작은 얼음을 입에 물었다.

달그락, 달그락 작은 입 안에서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담에게 물리면 음란하게 변하는 사람도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곽수환이 쓰게 웃었다. 본능적으로 시원함을 찾는 행동일 뿐인데 저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석 박사, 대체 정체가 뭐야.”

그뿐이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 그보다 정말 문제없는 거 맞지?

곽수환도 이렇게 몸을 맞대고 있으니 조금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는 석화의 뜨거운 이마를 차가운 손으로 문질렀다. 석화는 그 손길이 기분 좋은지 이마를 더 깊숙이 비벼왔다.

앞은 녹아버린 얼음으로 차가웠지만, 등과 엉덩이 안쪽에서는 아직 열이 엄청났다. 석화는 무의식적으로 축축해진 손을 제 뒤로 가져다댔다. 이어 저 스스로 입에 있던 얼음을 빼서 등에서부터 엉덩이 사이에 대고 문질렀다.

더워요.

곽수환은 석화의 뒷목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제 품에 확 껴안았다. 그리고는 가장 열이 높은 석화의 안쪽에서부터 회음부를 얼음으로 마찰했다. 석화의 달뜬 숨이 쇄골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며 내려왔다.

하아……. 속의 열이 여전한지 어깨로 흩어지는 입김이 습하고 뜨거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반응을 보이는 본능에 곽수환은 낭패한 얼굴을 했다.

미끄덩거리는 얼음은 삽시간에 녹아 두 손을 흥건하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통 안의 새 얼음을 꺼내 석화의 열을 식혀 내렸다. 정신 차리라며 제 것에도 가져다대자 맞닿은 석화의 성기가 오히려 수축했다. 그는 천장을 본 채로 끌어안은 등을 토닥거렸다. 축축한 손바닥은 더 찰지게 석화의 피부를 마찰했다. 할딱이던 숨이 점차 고르게 잦아드니 초조했던 심장도 제 속도를 되찾아갔다.

재차 키트를 쥐려고 몸을 일으키자 늘어진 석화의 몸이 고스란히 딸려왔다. 서로의 몸은 마치 물속에서 빠져나온 듯 물기로 가득했다. 키트로 다시 한번 혈액을 확인했고, 결과는 음성이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안도했다.

***

축축한 무언가가 등줄기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곽수환은 달걀이 깨져있는 배낭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

“지환아, 형 왔어.”

똑똑똑, 문을 두드리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나와 문을 열어주던 동생이었다.

문고리를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고치는 일이 더 골치 아픈 법이었다. 그러나 곽수환은 망설임 없이 발을 들어 문을 박살냈다. 문고리가 안으로 밀려나가고 끼익, 철문이 열렸다.

거실 창문에 덕지덕지 붙여둔 낡은 신문지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곽지환!”

곽수환이 다급히 외치자 타다닥, 욕실에서부터 맨발로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드는 이를 확인할 새도 없이 배낭을 풀어 막았더니, 멀쩡했던 계란마저 깨지는 감각이 뒤따랐다.

크억, 크헉! 배낭을 이로 씹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일주일에 겨우 한 번 볼까 말까 했던, 그것도 제 나이 열세 살, 동생의 나이 열한 살 되던 때부터 얼굴을 드러낸 부모였다.

기억의 시작부터 곽수환과 동생을 돌봐준 건 같은 층에 살던 베트남 출신의 아주머니였다. 맹장이 터져 고름이 배 속으로 퍼진 아주머니는 수술도 받지 못한 채 고통만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부모가 나타난 것이 바로 그 직후였다. 자신들이 돌봐줄 수 없기에 베트남 아주머니에게 저희 둘을 부탁했고, 그녀가 죽었으니 이제부터는 직접 돌봐주겠다는 것이다.

동생은 레인보우 시티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곽수환은 아니었고, 그의 예상대로 동생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도 없었다. 이따금 찾아오던 부모의 손길은 따뜻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늘 의문이 따라다녔다.

‘레인보우 시티 연구원이라면서 왜 우리를 돌봐 준 아주머니를 죽게 놔둔 거야? 거긴 수술도 가능하다면서? 시민이 아니면 치료도 받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시민이 아닌 우리를 이렇게 몰래 보러 오는 거고?’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던 질문이었고, 이제 아버지는 대답해 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컥, 크헉!

아버지가 제 아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자 붉은 눈을 번뜩거렸다. 곽수환은 괴로운 시선을 내렸다가 배낭을 방패 삼아 아버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는 벽에 붙어서도 곽수환을 공격하려고 위협적인 이를 드러냈다.

“누가 풀어줬어요? 지환이는 아니죠?”

크륵, 칵!

곽수환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광인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 안쪽의 닫힌 방문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형이 말했잖아. 얌전히 있으라고.

주변을 둘러봐도 아버지를 묶을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나이에 비해 발육이 좋고 힘이 세다 할지라도 하루 내내 쉴 새 없이 달려온 터라 힘에 부쳤다. 이윽고 아버지의 힘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배낭을 바닥에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캭! 카캭!”

나자빠진 몸에 올라타 코를 물어뜯으려는 아버지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코뼈가 무너진 아버지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지 또다시 덤벼들기에 이르렀다.

곽수환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방에 있는 무딘 칼을 쥐었다. 레드 구역의 마트를 몇 번이나 털러 들어갔지만, 실질적으로 아담과 맞닥뜨린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식료품이 가득 담긴 배낭을 메고 미친 듯이 도망쳐 떼어냈던 경험이 전부였다.

크어억!

달려드는 아버지를 보던 곽수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손을 뻗어 옆구리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래도 여전히 공격을 멈추지 않으며 이를 다닥거렸다. 제발……. 미끄러진 손이 칼에 베이자마자 손을 확 뒤로 빼냈다.

흐르는 피가 저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것과 섞였는지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학습한 적은 없지만, 저도 혈액을 통해 감염이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아담의 신체를 정지시키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곳의 어른들은 아담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라고만 했으니까.

칼에 찔려도, 코뼈가 무너져도 아랑곳 않고 공격해오는 아버지를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게는 동생이 있었다. 곽수환은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를 팔뚝으로 북북 문질렀다.

낡아빠진 식탁 의자를 들어 덤벼드는 아버지를 몇 번이나 내리쳤다. 피가 튀고 살점이 파이는 소리에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수십 번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내려치니 파들파들 경련하던 몸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곽수환은 비척거리며 일어나 여전히 닫혀 있는 방문을 봤다. 동생보고 먹으라고 한 통조림 소시지는 닫힌 방문 앞을 굴러 다녔다.

“……지환아.”

곽수환은 방문에 다가가 이마를 기댔다.

“어머니…….”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득했다.

쿵! 쿵쿵!

울리는 문의 충격에 이마로 파동이 느껴졌다.

“지환아?”

쿵! 쿵!!! 크륵, 컥.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소리였지만, 톤이 높은 소년의 음성은 분명 제 동생이었다. 곽수환은 흐느끼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 바보 같은 새끼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아버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

발밑을 나뒹구는 통조림을 봤을 때 이미 직감했었다. 바보 같은 놈이 말라가는 아버지에게 소시지를 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하고.

“형이 말했잖아. 치료만 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된다고.”

곽수환이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지환아. 형이 미안해.”

널 두고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해.

곽수환은 쿵쿵대는 소리가 문을 열어달라는 동생의 부름으로 들렸다. 형이 꺼내줄게, 지환아. 그는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차라리 저도 이대로 아담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러나 묵직한 무언가가 문에 밀려나고 있었다.

“……지환아.”

문고리와 동생의 손목에 수갑이 한쪽씩 걸려 있었다. 코피가 흥건한 동생이 발버둥 치면서 곽수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시 눈을 질끈 감아 눈물을 털어냈지만 물기가 차오르는 건 삽시간이었다. 그리고 저기 아버지를 묶어두었던 안방의 철제 침대 위에는 어머니가 누워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 벌어진 참상을 알려주듯 바닥과 유리창에는 피가 잔뜩 튀어 있었다.

어머니의 팔뚝과 목덜미는 이에 뜯겨나간 살점이 선명했다. 그녀는 손에 자동권총 한 자루를 쥐고 있었고, 관자놀이에 검붉은 구멍이 보였다.

“아아…….”

곽수환은 꼼짝도 못하고 서서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눈을 반쯤 뜨고 있는 어머니를 하염없이 내려다봤다.

부모가 형제를 보러 온 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건 그날 오후였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 후에 인슐린 주사를 놓고 나서, 갑자기 몸을 기괴하게 비트는 증세를 보였다. 나직한 비명을 토해낸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전선줄이나 묶을 만한 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아주 잠깐 눈물을 보였으며, 참담함에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기도 했다. 그녀는 철제 침대를 이용해 남편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꼼짝도 하지 못하게 다리를 벌려 묶고, 다닥거리기 시작한 남편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넣은 뒤에야 주저앉았다.

곽수환은 어째서 아버지가 저렇게 변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살 어린 동생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동생은 직접 아담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아버지가 아프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동생에게 차분히 설명을 해주었고, 동생은 알아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동생에게 아담은 그저 무서운 존재일 뿐이었고, 괴물이었을 테니까. 아버지를 아담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크억! 컥!

곽수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수갑은 누가 풀어준 거지?’

수갑 열쇠는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을 텐데……. 지환이가 어머니에게서 열쇠를 훔쳤던 건가?

곽수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피가 튄 탁상 위에는 색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는 큐브가 보였다. 아픈 동생이 집에서 심심할까 봐 제가 구해다 놓은 장난감이었다. 그 큐브 옆에는 종이 한 장이 삐뚤게 놓여 있었다.

종이를 들어보니 붉고도 투박한 손 글씨가 쓰여 있었다.

곽수환은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쥐었다. 검지손가락 끝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고, 아직 화약 냄새가 나는 듯했다. 곽수환은 어머니의 목에 걸린 ID카드를 쥐어뜯었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곽수환은 흐느낌을 죽여 가며 동생을 바라봤다. 한쪽 팔이 문고리에 매달린 채 이쪽으로 기어오려고 하는 동생은 제가 아는 지환이 아니었다.

“레인보우 시티가 다 뭐예요. 아버지, 어머니가……. 연구원이면 뭐 해요.”

식칼에 베인 손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아주머니는 그렇게 죽어갈 동안……. 약 한 번 못 먹었어요. 내 동생, 아프게 태어나서 매일 약을 달고 살았어요. 이게 뭐예요. 당신들이 정말 내 부모는 맞아요? 왜 우리를 숨겨뒀어요?”

곽수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또다시 오열했다.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들과 질문은 수많았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두 번 다시 저희 형제를 찾지 않을까 봐 애써 웃었다. 저 어린 동생마저도 궁금한 게 산더미 같아도 꾹꾹 목 안쪽으로 삼켜 넘겼다.

“내 동생을……. 왜 우리를 바보로 만들었어요!”

곽수환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는 채 동생을 손으로 가리켰다.

“레인보우 시티 시민으로 태어나면 학교도 간다면서요? 걔들은 아담이 뭔지 정확히 다 안다면서요? 백신도 준다면서요? 그런데 내 동생은 글씨 하나 쓸 줄도 몰라……. 그리고 나도……!”

이게 무슨 글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아이처럼, 아니 고작 아이인 곽수환은 오열하며 종이를 손안에서 구겼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안방에서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곽수환이 홀로 남게 된 신호탄이었다.

***

쾅쾅쾅! 쾅쾅!

아무것도 먹지 않아 입술이 하얗게 뜬 곽수환이 현관을 바라봤다. 환기도 하지 않은 집 안은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해 눈이 매캐할 정도였다. 까무룩 쓰러져 고열에 시달렸던 곽수환은 이대로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굶어 죽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쾅쾅!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고장 난 문이 열리지 않도록 식탁 의자를 현관에 눕혀두었기에 의자가 덜컥덜컥 흔들렸다.

거실 벽에 등을 대고 철문을 바라보니,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문고리 사이로 사람의 눈알이 보였다.

“이봐!”

3층에 사는 애꾸눈이었다.

“이봐, 곽수환이. 큭, 이게 다 무슨 냄새야. 문 좀 열어봐.”

애꾸눈이 멍해 있는 곽수환을 연방 불렀다.

“부탁했던 약 구해놨다고. 안 가져갈 셈이야?”

“……필요 없어요.”

곽수환이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애꾸눈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발로 문을 연거푸 걷어찼다. 콰직, 눕혀둔 의자가 박살나며 현관문이 열렸다.

엄청난 악취에 애꾸눈은 옷을 끌어올려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말라붙은 피가 집 안 여기저기에 튀어 있었기에, 곧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거실과 침실의 참상을 둘러보고 나서야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거실에 머리가 으깨진 남자가 형제의 아버지라는 것 또한 쉽게 알 수 있었다. 연구원 ID가 마치 군번처럼 남자의 신원을 대신해 주었으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곽수환은 아무 말도 없이 벽만 바라봤다.

“전부 네가 처리한 거야?”

꼴을 보니 아담이 된 아버지와 동생을 곽수환이 처치한 듯 보였다. 관자놀이의 총상을 보면 형제의 어머니는 자살한 것도 같았다.

겨우 열넷에 불과한 녀석이 아담이 된 가족들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평소에도 평범한 놈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실감했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는 범인보다 뛰어난 육체나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 말이다. 연구원의 자식이었으니 어쩌면 이 녀석도 그럴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쯧쯧, 대체 어디서 감염이 된 거야.”

애꾸눈은 코와 입을 막고 있던 셔츠 자락을 내려놓았다.

“이봐, 얼른 일어나. 지금 네 꼴을 봐. 네가 아담이라고 해도 믿겠어!”

곽수환은 저를 일으키려는 애꾸눈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계속 여기다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애꾸눈이 다시 한번 곽수환의 팔을 붙들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약 달고 사는 동생 놈 데리고 있어봐야 짐이나 되지. 네놈 정도면 목숨은 쉽게 부지할 것 아니야. 그러니 잘 죽었다고, 컥!”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곽수환이 애꾸눈의 목을 옥죄었다. 피죽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꼴을 하고도 손아귀의 힘이 엄청났다.

“다시 지껄여봐. 나머지 한쪽 눈알도 뽑아줄 테니까.”

멀쩡한 눈을 향해 주먹을 들었던 곽수환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내 손을 놓자 애꾸눈이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성격하고는…….”

그 또한 덩치가 제법이라 곽수환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지만, 혼자 남게 된 녀석이 무척이나 어리다는 것도 알았다.

쓸데없는 감상 따위 이 세상 사는 데 불필요하나 어릴 때부터 봐오던 녀석이었다. 저리 찬장에 쌓아놓은 식료품을 한 번도 나눠준 적 없던 야박한 녀석이지만.

게다가 녀석의 부모가 동생의 약 말고도 돈을 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혹시 저희 부부가 잘못되면 화선 강당으로 아이들을 보내달라고 했었다. 이 녀석은 레인보우의 시민이 아니니 어쩌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 애꾸눈이 이제는 썩은 시체가 되어버린 곽수환의 가족을 보고 착잡한 얼굴을 했다.

“네놈 여기 있지 말고, 화선 강당으로 가봐.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냥 죽게 놔둬요.”

“여기서 굶어 죽어봐야 개죽음밖에 더 돼? 내가 너라면 이리 개죽음을 택하지는 않아. 생각 있으면 이거 가지고 화선 강당으로 가봐. 내 추천이라고 말하면 될 거야.”

화선 강당은 곽수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끔 머리에 띠를 두른 사람들이 몰려와 외치는 구호에서도 들어봤다.

‘지옥으로! 망해라! 레인보우 시티! 구원이 내린다! 믿는 자, 화선 강당으로!’

“화선 강당이……. 뭐 하는 곳인데요.”

“뭐긴 뭐야. 무슨 동산인가 하는 종교집단이지. 애들 상대로는 먹을 것도 준다더라.”

고개를 저은 애꾸눈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외발 수레를 끌고 왔다. 곽수환은 지친 눈으로만 애꾸눈의 행동을 뒤좇았다. 그는 구더기가 들끓는 아버지의 시체를 그 안에 실었다.

“뭐 하는 거예요.”

곽수환이 날카롭게 반응하자 애꾸눈도 마찬가지로 성을 냈다.

“여기다 그냥 놔뒀다가는 쥐까지 꼬여. 옥상 소각장으로 가서 불태워야지. 원래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는 거야. 네 시체까지 치우러 오기는 싫으니 내가 말한 곳으로 가기나 해. 또 누가 알아? 밖의 사람들이 언젠가 저 대단한 레인보우 시티에 엄청난 엿을 선사할지. 나라면 그런 능력 그대로 안 썩혀. 네놈도 알 거 아냐? 너 같은 열넷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어.”

억울하지도 않아? 네놈은 연구원 자식인데도 레인보우 시티 시민도 못 됐지. 그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야. 하긴 세상은 전부 불합리로 돌아가지.

애꾸눈은 온갖 푸념을 토해내면서 수레를 끌고 몇 번 옥상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곽수환은 애꾸눈을 도와 이틀간 부모와 동생의 시체가 소각되는 순간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마지막 날에는 아주 오랜만에 비가 내렸고, 곽수환은 여기서 한참이나 떨어진 화선 강당으로 갈 채비를 했다.

동생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 되기를 꿈꿨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레인보우 시티가 저희 형제와 아주머니를 버렸다면, 저도 필요 없었다.

짐 싸는 것을 이번에는 애꾸눈이 도왔고, 곽수환은 물과 음료가 담긴 묵직한 배낭을 어깨에 멨다. 애꾸눈은 기름이 한 눈금 남은 차의 키를 곽수환에게 넘겼다.

“어차피 버리는 차니까, 여기 지도 따라서 잘 따라가 봐.”

“아저씨.”

“아저씨는 무슨. 네놈이 나를 애꾸눈이라고 부르는 걸 모를 줄 알아.”

곽수환은 애들답지 않게 쓰게 웃고 나서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뭘.”

애꾸눈은 차까지 배낭을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곽수환은 말없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1층에 다다랐을 때쯤,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 동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제복 차림이었고, 남자는 은테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어? 김 대위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애꾸눈이 남자를 곧장 알아보더니 고개를 꾸벅했다. 김 대위는 레인보우 시티와 밖의 지역을 연결해주는 브로커로 불법적인 돈을 벌었다.

“시끄럽고. 여기 곽수환이랑 곽지환이라는 녀석들 살지?”

애꾸눈과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김 대위는 용건부터 꺼냈다. 곽수환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조금 눈을 키웠다.

“김 대위님께서 그 아이들은 왜 찾으십니까?”

녀석의 부모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이었다. 아담으로 변했다고 해도 아버지를 죽인 건 곽수환이었다. 혹시나 아이들을 처형하러 왔나 싶은 마음에 애꾸눈은 불안해했다.

“대가리 많이 컸네? 벌레 새끼도 안 되는 주제에 나한테 이유를 물어? 감히?”

저벅저벅 걸어 올라온 김 대위가 애꾸눈의 싸대기를 때렸다.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연거푸 내리치자 코피가 터지고, 어금니가 나가버려 이가 붉게 물들었다. 곽수환이 김 대위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뭐야, 너는.”

“너, 감히 대위님한테 무슨 짓이야! 그 손 놔.”

불분명한 말을 내뱉는 애꾸눈이 연방 김 대위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곽수환은 그럼에도 손에서 힘을 풀지 않고 김 대위를 노려봤다.

“우리 형제는 왜 찾습니까?”

애꾸눈이 그러면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김 대위는 잡힌 팔을 거칠게 빼내더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제 손목을 주물렀다.

“누가 밖에서 자란 놈 아니랄까 봐 무식하기는. 네놈이 곽수환이야?”

곽수환이 대답이 없자 김 대위가 코웃음을 쳤다.

“동생 놈은?”

“아이고, 대위님. 저 녀석 동생은 이미 죽었습니다. 불쌍한 아이인데 한 번만 봐주십시오. 이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누가 죽인대? 새끼야, 넌 운 좋은 줄 알아. 곧장 학습 센터로 이동할 거니까 그 대가리에 잔뜩 낀 무식한 때나 털어내. 그분 부탁만 아니었어도 이딴 더러운 곳에 발도 안 디뎠어. 따라와.”

김 대위가 곽수환의 머리를 쿡쿡 손으로 찔렀다.

“……김 대위님, 정말 학습 센터로 가는 거지요?”

애꾸눈이 김 대위의 팔을 붙들었다. 혹시 거짓말을 하고 처형하는 게 아닌가 싶은 눈이었다. 곽수환은 애꾸눈에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라는 말을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 대위가 권총을 꺼낸 게 더 빨랐다.

타앙-! 날카로운 총성이 계단을 타고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말릴 틈도 없었다. 아저씨! 곽수환은 뒤로 넘어가는 애꾸눈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고개가 뒤로 덜렁 넘어가 뒤통수를 받치자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뭔가가 손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멀쩡한 한쪽 눈이 총알에 뚫려 없어진 뒤였다. 곽수환은 믿을 수가 없었다. 숨이 끊긴 그를 보며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더러운 새끼가 어딜 만져.”

툭툭, 애꾸눈이 잡았던 팔을 털어낸 김 대위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래서 너는, 따라갈래? 아니면 여기서 뒈질래?”

총구가 이번에는 곽수환을 향했다.

죽은 자의 뇌수와 피로 점철된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총알 한 방에 아저씨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죽었다. 저를 도와준 남자를,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 죽였다. 저희를 벌레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했다. 이대로 달려들어 놈의 얼굴을 뭉개주고 싶었지만, 총구는 여전히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곽수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노로 경련하는 주먹을 애써 펼쳤다. 아저씨를 바닥에 눕혀두고 조끼를 벗어 얼굴에 덮어주었다.

그가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하늘로 올려 보내기 전에 했던 행동이었다.

“……따라갈게요.”

김 대위는 뻔하다는 듯, 경멸섞인 웃음을 뱉었다.

“그럼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따라와.”

그런데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지? 어째서 밖의 사람들을 벌레취급하고 이렇게 손쉽게 죽여 없애지? 그렇게 잘났다면 얼마나 잘났는지 직접 봐줘야 하지 않겠어?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도 전부 죽어 마땅하다.

곽수환은 김 대위의 뒤통수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노려봤다.

***

벽에 등을 기대어 앉은 석화의 초점은 여전히 선명하지 못했다.

눈을 뜬 건 한 시간 전이었지만, 석화는 그동안 제 몸의 감각을 하나씩 확인해봤다. 그 사이 열이 제자리를 찾은 것도 깨달았다.

석화는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손목을 감싼 붕대를 풀었다. 설마 싶었건만 정말로 아담에게 물린 잇자국이 드러났다.

석화는 이윽고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옆으로는 커다란 유리창이 있었고, 그 너머에는 온갖 약품들이 있었다. 이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이 안에도 약품을 모아둔 드레싱 카트가 보였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격리실이었다.

드레싱 카트로 걸어간 석화는 아담 키트의 포장지를 벗겨내 엄지손가락을 바늘로 찔렀다.

결과는 음성이었다.

이번에는 핀셋을 쥐고 피딱지가 굳어 있는 부분을 떼어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통증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몽글 올라왔지만, 무시하고 샬레에 피딱지를 올려두었다. 덮개를 닫고는 손에 쥔 채 침대로 돌아왔다.

테이블의 물을 마시고, 침대에 앉아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이고는 다시 행동을 멈췄다. 신체는 무리 없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었다.

아담에게 물린 것은 확실히 기억하나 열이 올랐던 동안의 기억은 뜨문뜨문 끊겨 있었다. 혼미하게나마 정신이 들 때면 계속 곽수환이 있었다. 공복감이 어마어마해 고개를 드니 유리창 밖에 제복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타인의 눈길을 잡아끄는 레인보우 시티의 컨트롤러였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손에는 그릇이 들려 있었다.

“타락죽이라는데, 괜찮아?”

곽수환이 침대 옆 테이블에 그릇을 내려두었다. 석화는 시선으로 그를 좇았지만, 곽수환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은 미소를 입술에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석화가 내려두었던 샬레를 슥 가져가는 것은 잊지 않았다.

석화는 곽수환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었죠.”

열이 내린 뒤 며칠 만에 목소리를 내는 거라 잔뜩 잠겨 있었다.

“분명……. 양성이었어요.”

그 말에 곽수환은 눈을 찡그렸다가 곧 입매를 끌어올렸다.

“꿈 꿨어? 양성인데 나랑 어떻게 대화를 해.”

“꿈 아니에요.”

“며칠이나 자더니 기운이 넘쳐? 석 박사. 아니지, 이제는 석화 씨라고 불러줘야 하지? 죽이나 먹어.”

손을 떼어낸 곽수환이 침대 끝에 붙어 있는 탈부착식 식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죽을 그 위로 옮겨두었다.

그의 말대로 며칠 내내 잠만 잔 덕일까, 몸의 컨디션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고열에 큰 고역을 치르고 난 뒤라 상대적으로 편히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곽수환이 몸을 씻겨주었는지 찜찜한 구석도 없었다. 석화는 식판 밑으로 다리를 넣고 수저를 들었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죽을 살살 긁어서 입에 가져다댔다. 곽수환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봤고, 샬레는 제복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내가 불편하면 나가 있을까?”

불편하다니?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저에게 수갑을 채워 취조실에 가둔 건 곽수환이었지만, 그건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처벌을 받은 것뿐이었다. 타이밍 안 좋게 그때 아담이 들어온 것뿐이고.

“물렸는데……. 왜 구해줬어요?”

곽수환은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죽이나 먹어.”

“먹고 있어요.”

석화가 죽의 윗부분을 살살 긁어서 제 입에 넣었다. 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죽은 빈말로도 맛있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여긴 어디예요?”

“21 바이올렛 구역.”

“왜 여기 있어요?”

“다섯 살짜리 애도 아니고 무슨 질문이 그렇게 많아.”

석화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죽을 천천히 퍼먹었다. 곽수환이 한 발 빠르게 다가왔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혹시나 제가 죽에 얼굴이라도 박는 줄 알았나 보다.

석화는 밍밍한 죽으로 빈속을 달래면서 기억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곽수환을 떠올렸다.

그는 열이 잔뜩 오른 몸을 달래주었고, 추위에 떨 때는 껴안아줬으며 몸과 몸을 맞대 얼음을 녹여주기도 했다. 몸을 어루만지던 손길은 마치 기억 속의 어머니만큼이나 다정해서 더욱 곽수환을 알 수가 없어졌다.

냉정하게 연구원직을 박탈시킨 그가, 자신이 아담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얼마나 다급해했는지 어렴풋하게도 기억했다.

“다 먹었어요. 대답해주세요.”

석화는 빈 그릇을 쓱 밀고 물로 입을 헹궜다.

“무슨 대답?”

그가 대답을 회피할 때면 질문을 되묻거나 다른 쪽으로 말을 돌린다는 것 정도는 안다.

“고열로 정신이 없을 때……. 바닥에 떨어진 키트를 봤어요. 그런데 양성이었어요. 잘못 본 거라고 말하지 말아요. 아담 바이러스 보균자에게 물린 건 사실이고, 제 몸은 제가 알아요.”

아담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나서 오히려 건강을 되찾은 건지 석화의 눈이 선명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석화는 곽수환이 다른 이야기로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압박을 가하는 중이었다.

“원망이라도 하지?”

“……제가 왜요?”

“석 박사가 아담에게 물린 데는 내 탓도 있으니까.”

서펀트와 접선하려고 했던 행위는 즉결처형이 가능한 사안이었다. 석화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이었는지 피부로 실감했고, 저 자신의 무기력함도 뼈저리게 느꼈다.

군인이 공격을 해왔을 때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해봤으나 결국 물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게 있는 거다. 그건 자신의 나약한 육신에서 비롯됐다. 석화는 그제야 떨리는 손을 식판 밑으로 가져가 숨겼다.

“곽 소령님은…….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했어요.”

석화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컨트롤러가 아닌, 실없는 농담을 던지거나 돌을 주는 곽수환이 그의 진짜 모습이라는 데에 무게를 더 실었다.

“이번에는 아니야. 석 박사가 스스로 구원했지.”

그가 그릇을 치우고 식판을 원위치로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석화도 덩그러니 앉아서 그를 쳐다봤다. 하반신이 휑했는데 긴 환자복 안으로 속옷도 입지 않은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바닥을 내려다봤다가 몸을 조금 틀어 석화를 향했다.

“석 박사가 잠들어 있던 동안 과천 쉘터로 돌아온 군인이 왜 아담이 됐는지 역학조사에 들어갔어. 행방불명되었던 놈들이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말이야.”

어쩐 일로 그가 이런 소식을 전달해주는 건가 싶었다. 석화는 곽수환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가 움찔 뒤로 몸을 무르려는 게 느껴졌어도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다.

“왜 그래?”

“마더가 지켜볼지도 모르잖아요.”

“여긴 마더 같은 건 없어.”

그래도 석화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아직 몸이 좋지 않다면 죽만 주고 나가려던 곽수환이었다. 그런데 말도 곧잘 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니 대화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 내렸다. 그보다 사실은, 석화가 혹시 저를 쏘아보거나 네가 수갑을 채워놨기 때문에 아담에게 물렸다며 화를 낼 줄 알았다.

아담에게 물린 석화를 두고 곽수환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오래전 그날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말했던 대로 석화 스스로 제 몸을 지켜낸 것이다. 그게 자신에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줬는지 아마 석화는 모를 거다.

잃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세상에서 잃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석화가 아담에게 잡아먹히는 상황이 생길지는 몰라도 아담으로 변이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의 공격쯤이야 제가 지켜주면 그만이었다. 모두를 잃었던 열넷 이후로 그 어떤 소중한 것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곽수환은 자신보다도 작은 박사가,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유일하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가지고 싶어.’

불현듯 홀로 남았던 소년의 울림이 일었다.

‘아담을 이겨낼 정도로 저렇게 강한데 참지 않고 가져도 되잖아.’

곽수환은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석화에게 손을 뻗었다. 석화는 다가오는 손을 피하지도 않고, 경계심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곽수환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말려 올라간 석화의 환자복만 끌어내렸다.

만일 석화가 마음먹고 종교 단체를 만든다면, 제 몸 하나만을 가지고도 엄청나게 신도를 불릴 수 있을 거다. 신의 뜻을 받아 아담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운 육신을 타고났다고 하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이 될 테니까. 앞서 자신이 신의 뜻을 받은 면역자라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반군들도 존재했다. 놈들은 가짜지만 석화는 진짜였다.

그러니 상부가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곤란하다. 단순히 사상이 의심되는 연구원이 아닌 반군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높았다. 제아무리 레인보우 시티의 컨트롤러라고 해도 구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잘 들어.”

한참이나 잠들어있던 건 석화인데 곽수환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깊이 잠겨있었다.

“석 박사는 그냥 음성인 거야. 아담에게 물린 것도 셔츠에 감싸여 있어서 직접적으로 물린 게 아니고.”

곽수환이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석화도 대충은 알았다. 석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티에서 역학조사를 한다고 했지? 알아보니 놈들을 실어 나른 지프가 목격됐어. 놈들은 레인보우 시티에서 지급하는 군용 지프를 타고 과천 쉘터로 들어왔고, 시간차를 두고 아담으로 변이했지. 석 박사가 보기에는 어때? 이게 가능한 일 같아?”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사람마다 변이하는 시간이 각기 다르지만, 10분 이상 넘어간 사례는 얼마 보지 못했어요. 지프에서 내려서 쉘터로 진입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얼마나 돼요?”

“방역을 마치고 올려 보냈으니 족히 20분은 더 걸렸을 거야. 말도 했으니 혈액검사도 안 하고 올려 보낸 거고.”

이 일로 과천 쉘터 방역소에 몸담고 있던 군인과 직원이 대거 퇴출됐다. 그 점은 곽수환도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저를……. 물었던 군인도 처음에는 말을 했어요. 마치 오청운 선배처럼…….”

석화는 이불 안으로 두 손을 숨겨 떨림을 감추려했다.

“그 군인의 혈액을 구할 수 있을까요?”

“구해줄게.”

석화는 놀란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분명 또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서 한 소리를 할 줄 알았다. 석화는 진심이냐고 다시 되묻지 않고 말을 차분히 이어나갔다.

“전에 오청운 선배의 혈액으로 바이러스를 배양한 적이 있었어요.”

그건 곽수환이 에덴동산에서 배포한 백신을 들고 왔던 날 상부에 보고했던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데 공격적인 일반 아담 바이러스와 다르게 오청운 선배의 혈액에서는 바이러스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어요. 항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가설을 세워봤는데, 어쩌면 오양석 박사님이 미완성의 치료제를 투여한 것일 수도 있어요.”

이야기를 듣던 곽수환이 다시 손을 뻗어 위로 뻗친 석화의 머리카락을 쓱 뒤로 넘겼다.

“석 박사, 오청운이랑은 무슨 사이였어?”

석화는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오청운 선배는…… 제 선배인데요?”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나요?”

오청운 선배가 자신이 모은 돌을 다 버렸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섹스 했어?”

석화는 웬일로 눈에 띄게 미간을 구겼다. 대체 곽수환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전혀 유추할 수 없었다.

“오청운을 죽였으니 내가 밉겠네.”

“곽 소령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물려 죽었을 수도 있어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목숨이 위험할 때 오 선배를 찾아.”

석화는 제가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은 얼굴을 했다가 곧 꿈을 떠올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오 선배는 우리와 달라요.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달라진 것뿐이죠. 내 아이를 실험대에 올릴 수는 없어요. 어차피 후계자로 삼을 수도 없는 하자품이라면서요.’

“제가 입 밖으로 말했어요?”

“오 선배를 애타게 찾던데.”

“그렇다면 오청운 선배가 아니었어요.”

“그럼 오씨 성을 가진 다른 선배가 있어?”

“……저도 몰라요.”

도돌이표도 아니고 질문을 던졌으면 답이 와야 하는데 석화는 아리송한 대답만 내놓았다.

“석 박사.”

곽수환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대외적으로 박사직위를 박탈할 건데, 괜찮겠어?”

“이미 박탈된 거 아니었어요?”

“아직 상부는 몰라. 석 박사가 과천으로 이동된 줄로만 알지. 내 권한으로 일반 시민으로 강등시킬 거고, 석 박사는 여기 바이올렛 구역 쉘터에 거주하게 될 거야. 대신 여기서 연구를 할 수 있게 내가 지원해줄게.”

석화는 곽수환의 말을 천천히 정리해봤다. 그러자 답은 하나를 가리켰다.

“……치료제를 개발해도 된다는 소리예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긍정에 가깝다는 것을 느꼈다.

“위에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만일 상부 몰래 치료제를 개발하면…….”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던 석화가 고개를 휙 들어서 곽수환을 봤다. 골이 띵하고 울렸지만 곧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이에요?”

곽수환이 손바닥을 양쪽으로 펼쳐 보였다.

“여기 세컨드 마스터가 있고, 이 옆에는 퍼스트 마스터가 있지.”

그는 왼쪽, 오른쪽 손바닥을 가리키더니 그 두 개의 손을 포개었다.

“앞으로 둘의 세력 싸움이 가속화될 테니 양쪽 다 타격을 입을 거야. 그 와중에 에덴동산은 덩치를 키우는 중이고 말이야. 어차피 저 윗대가리들에게 중요한 건 치료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지. 놈들은 잘못된 걸 알면서도 변화를 원하지 않잖아. 그 틈을 에덴동산이 파고들면 어떨 것 같아? 이보다 상황이 더 나아질까?”

그는 레인보우 시티의 컨트롤러이면서 위험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저를……. 시험하는 거예요?”

“오히려 내가 시험당하는 것 같지는 않고?”

곽수환이 픽 웃었다.

“에덴동산과 오양석 박사가 손을 잡은 건 사실이야. 상부는 그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오양석 박사를 처리한 거고.”

석화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오양석을 살해하라 지시한 건 퍼스트 마스터였어.”

“대체…… 언제부터 알았어요?”

석화의 눈이 옅은 불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나도 안 지는 얼마 안 돼. 퍼스트 마스터가 나를 제 편으로 회유하려고 입을 연 것뿐이야.”

곽수환은 제복 안쪽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더니 뚜껑을 이로 땄다.

“내가 컨트롤러로 활동하면서 알아낸 바로는 에덴동산의 사인장로가 바로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라는 거야. 그런데 이 네 명은 전부 죽은 것으로 유추돼.”

그는 네 줄기의 갈라진 강물을 그리듯 네 개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에덴동산의 시작을 생각해 봐.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인 서펀트가 있지. 아담은 바이러스가 되어 버렸고, 서펀트는 현재 모습을 드러냈어. 그렇다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에덴동산의 인물은 누구일까?”

……이브였다.

‘에덴동산에서 갈라져 나온 강물은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였고 그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지. 아니, 비옥하게 만들고 싶어 했지만……. 석화야. 그 누가 뭐라 하든 너는 실패작이 아니야. 유프라테스가 낳은 완벽한 아이지.’

‘아담에게는 이브가 필요해. 그러나 우리는 실패했고, 또 사상을 달리했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웅웅 울려댔다.

“만약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석 박사는 에덴동산의 서펀트와 다시 만났을 수도 있었을 거야. 모텔 지하에서 분명 놈이 치료제를 운운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놈들에게 이브는, 아마도 아담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브는 사람이 아닌 치료제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담도 바이러스를 뜻했으니까.

“에덴동산이 치료제를 개발하면 형세는 역전될 거야. 밖에 있는 에덴동산이 세력을 키워 권력을 잡고, 레인보우 시티를 무너뜨리는 수순을 밟겠지. 그런데 나는 서펀트가 결코 석 박사가 원하는 그럴싸한 그림을 그리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석화는 조금 뒤로 물러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보고 다른 건 관심 갖지 말고 연구만 하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요?”

손끝으로 시트를 꾹 눌렀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새우가 엄청 센 것 같아서.”

“새우는 고래보다 약해요.”

“누가 몰라.”

곽수환이 나무라듯 웃었고, 석화는 문득 저 표정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여태 곽수환이 저에게 경고를 했던 건 상부의 처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진법 암호를 곽수환보다 다른 이들이 먼저 발견했다면, 이미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다. 아담에게 물린 일을 비밀로 하자는 것 또한 그가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 같았다.

“소령님은…… 레인보우 시티의 수호자라면서요.”

스윽 몸을 기울여 다가온 그가 시트에 내려둔 석화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어느 날 우리 형제를 보러 왔던 아버지가 아담으로 변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맞던 인슐린 주사에 누군가가 아담 바이러스를 심어둔 것이겠지. 그렇게 아담이 된 아버지가 내 동생을 감염시켰고, 어머니 또한 아담이 된 둘의 공격을 받았어. 아니, 보지는 못했지만 그랬을 거야.”

곽수환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밖에 나가 있다가 돌아와 보니 그 참상이 벌어져 있었지. 그래서……. 내 손으로 모두를 죽였어.”

석화는 자신의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을 떼어냈다.

“어차피 흔한 이야기야.”

안전한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석화이니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죽였느냐며 경멸 섞인 눈을 할지도 모른다. 그걸 아는데도 순식간에 물러나니 마음은 좋지 않네. 곽수환이 속내를 숨긴 채 여상한 표정을 했지만, 석화는 그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마음이 아파요.”

뜨거운 손이 뺨을 감싸자 곽수환도 인정할 수 있었다.

“맞아. 나도 아파. 아직도 무척이나.”

그의 눈이 충혈된 것만 같았다. 한 번 깜빡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아졌다.

“그렇게 혼자 남은 나를 도와줬던 사람을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 죽였지. 단지 팔을 붙잡았다는 이유로 더럽다면서 총을 쐈어.”

곽수환의 서늘한 뺨을 타고 한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내가 컨트롤러가 되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이 뭔지 알아?”

석화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면서 고개만 저었다. 이제 곽수환의 얼굴에 웃음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싸늘하다 못해 오랜 시간 땅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뱀이 올라와 쌓아둔 독기를 내뿜는 것만 같았다.

“그 새끼를 찾아내 눈알을 뽑고 발버둥치는 걸 지켜봤어. 일주일 동안 지켜보다가 마지막에는 아담의 먹이로 던져줬지. 그런 내가 레인보우 시티의 수호자라고?”

그가 제 뺨을 감싼 석화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악력에 손뼈가 부딪혀 시큰거렸다.

“나는 이제 무엇도 빼앗길 생각이 없어.”

무릎을 세운 석화를 곽수환이 올려다봤다.

“내가 지켜줄게.”

그가 잡은 손을 놓고는 이번에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너무 거세게 쥐어 숨이 막히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힘을 조절했다.

석화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아담으로 변한 가족을 죽인 그가 아담에게 물린 자신을 돌봐주었다. 변하지 말라며 몸을 꽉 끌어안던 그의 행동도 기억했다.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은 못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아팠다. 석화는 축 내리고 있던 두 팔을 부자연스럽게 올려서 그의 머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곽수환의 체온만큼은 언제나 그렇듯이 제 몸을 달래주는 것만 같았다.

***

바이올렛 구역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석화는 제 혈액을 기반으로 아담 바이러스를 심었다.

레인보우 시티의 규정상 생물안전 3등급 이상에서만 아담 바이러스 실험이 허가됐지만, 어차피 여기는 마더의 감시도 없는 곳이었다. 다만 연구실 건물은 석화 외에 곽수환만 출입할 수 있었다.

수십 차례 실험을 반복했지만, 놀랍게도 제 혈액은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 석화는 그 감염된 혈액을 인간의 평균 체온보다 훨씬 높게 올려봤다.

44.1도부터 아담 바이러스의 활동이 현저히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44.3도에서는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활동을 멈췄고, 44.5도를 돌파하자 바이러스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아담 바이러스가 고열에 약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인간의 체온이 45도까지 육박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게다가 아담에게 물렸을 때 엄청난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타이밍이 몇이나 될까. 결국 아담에게 물린 인간이 스스로 열을 창출해내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쉽게 생각하면 삽시간에 열을 올릴 새로운 바이러스가 필요한 것이다. 다만 45도까지 올라가는 열을 육체가 버텨주어야 했고, 열이 내리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감염이 된 후에 치료에 성공했다고 해도 면역자로 부르기는 어려웠다. 바이러스에 다시 노출되었을 때 감염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지금 석화의 피가 그것을 알려주듯이 말이다.

과연 치료제라는 게 있기는 할까?

석화는 제 몸을 내려다봤다. 면역체계가 생성됐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분명 저는 삽시간에 열이 올라 아담 바이러스를 파괴했었다. 어쩌면 바이러스를 파괴하기 위해 열을 발생시키는 항체가 이 몸에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석화는 손목을 들어서 아직 아물지 않은 잇자국을 손으로 쓱 문질러봤다.

곽수환에게 아직 이야기는 하지 못했지만, 어릴 적 어머니에게 네 개의 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신이 유프라테스라고 했었다. 비손과 기혼의 아이들……. 설마 둘은 부부였던 건가? 석화는 의자에 털썩 앉아 견과류가 담긴 통의 뚜껑을 열었다.

이 건물로 들어온 지 벌써 나흘이었다. 그동안 세끼 식사는 옆 건물에서 미리 곽수환이 가져다두고 나가고는 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레인보우 시티에 대한 반감이 엄청난 것 같았다. 설마 싶지만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가 싸울 동안 그도 뭔가를 할 셈인지도 모른다.

석화는 땅콩 껍질을 벗겨서 휴지에 올리고 엄지와 검지로 알을 굴렸다. 곽수환도 쉘터 연구원의 아이라고 했으니 어딘가에 부모의 기록이 남아있기는 할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곽수환은 일반적인 돌연변이들과 달랐다. 육체는 이채윤이나 양상훈처럼 범인을 훨씬 뛰어넘었고, 소대를 이끌거나 컨트롤러로 몰래 활동할 만큼 두뇌도 현명했다.

“……하자 없는 돌연변이.”

석화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나는 하자품인가? 후계자가 될 수 없는 하자품……?

잊고 있을 만큼 오래된 어머니의 말은, 당시도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이상했다.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으로 레인보우 시티에서 주는 배급품을 받고 살았다.

몸이 약해 뚜렷한 일은 하지 않았으나, 제 나이 다섯 이전 무렵에는 일주일에 몇 번 배를 타고 우도를 들어갔었다. 그때마다 석화를 돌본 건 할머니였다. 그런데 아담 청정지역이자 최상부가 거주하는 우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일꾼이나 허가 받은 군인들 밖에 없었다.

우도로 향하는 배편이 있는 성산항부터 통제구역이었기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석화조차 발 디뎌본 적이 없었다. 경비가 삼엄한 우도는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의 중요 거주지이기도 했으니까.

자신을 유프라테스라고 칭하던 어머니가 어쩌면 반군이나 시티의 상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일종의 가설에 지나지 않으나 그녀가 했던 말들을 이번만큼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석화는 파괴된 아담 바이러스 샘플을 내려다보다가 저 끝에 놓인 주사기로 시선을 보냈다. 아담 바이러스를 투입해 몸에 열이 오를 때, 그 순간의 혈액 샘플을 채취하면 뭔가 특이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곽수환은 컨트롤러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김 대위를 찾아냈다.

놈은 그때도 브로커로 활동 중이었으니 처분을 내리는 것은 손쉬웠다. 두 눈알이 없이 바닥을 허우적거리던 놈이 그때 뭐라고 했던가. 그만 죽여 달라고, 아마도 그랬었다. 놈의 모습이 지금 저 남자와 비슷했었지.

곽수환은 바닥을 허우적대는 김 박사를 내려다봤다. 양상훈이 막 끊어낸 놈의 손가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나가 앞으로 제대로 된 연구는 못할 테지만, 김 박사가 살아 돌아갈 일도 없을 것이다.

“김 박사가 식당에 있던 녀석에게 아담 혈액을 줬을 거라는 심증은 다들 가지고 있었지. 단지 물증이 없을 뿐.”

곽수환의 말에 양상훈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소년이 아담으로 변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가 아담 혈액이 담긴 주사기를 줬기 때문이었다. 양상훈도 소년의 옆에 앉았던 김 박사를 처음부터 의심했었다. 게다가 주변을 경계하면서 백숙을 먹는 것을 멈추지 않던 소년이 김 박사가 나타나자마자 그릇만 노려봤었다.

“네놈이 네 개의 강 말고, 밑에 있는 장로 중 하나고?”

김 박사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소년은 자신이 장로님에게 예쁨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 장로의 명이라면 당연히 주사기를 제 몸에 찔러 넣었을지도 모르지.

“장로라니! 그런 건 난 몰라요! 흐아악! 내 손! 내 손가락!”

김 박사가 비어버린 손가락을 보면서 절규했다.

“네 개의 강이 이미 다 죽었으니 네놈이 그들의 뜻을 받든 새끼 장로가 아니면 뭐겠어.”

김 박사는 장로가 죽었다는 말에 아주 미세한 동요를 보였지만, 가운을 돌돌 말아 제 손을 감싸는 데 치중했다.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절대로요! 내가 레인보우 시티에 충성한 세월이 얼만데! 나한테 이럴 수는 없어!”

김 박사가 흡사 오열을 토해냈다. 곽수환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김 박사의 얼굴에 사진 몇 장을 던졌다. 김 박사가 몸을 일으키자 얼굴에 붙어있던 사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 봐봐, 김 박사. 나는 기회를 주려고 그쪽을 여기로 데려온 거야. 상부에 먼저 보고했으면 이렇게 변명할 시간도 주지 않아.”

곽수환은 턱짓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에는 여의도 쉘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폐기용 군수 창고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번호판이 없는 군용 지프에 올라타는 김 박사의 모습도 선명했다.

“이, 이게 뭡니까!”

“발뺌할 생각은 말고.”

곽수환은 끌고 온 의자를 빙글 돌려서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김 박사를 내려다봤다.

“박사님이 왜 폐기용 군수물자 창고에서 군용 지프를 끌고 나가지? 이거 그림이 좀 이상하잖아.”

김 박사가 멀쩡한 손으로 사진을 들어 콰직 구겼다.

“그냥 필요했을 뿐입니다! 그냥요! 제가 이 지프를 썼다고 이런 처벌을 내리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저 지프에 번호판이 없다고 추적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어? 군이 사용하는 지프에는 전부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거든. 그런데 네놈이 끌고 나간 지프가 우리 과천 쉘터로 군인들을 실어온 차량과 동일해.”

손가락이 잘렸기 때문일까, 김 박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김 박사. 그날 잘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나 본데, 내가 그날 이후로 김 박사한테 애들을 심어놨었거든. 그동안의 당신 동선이 전부 나한테 있다는 소리야.”

억울하다며 악을 써대던 김 박사가 사진을 툭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고는 가운을 두른 손을 꽉 감쌌다. 김 박사는 이를 악물고 고통 섞인 신음을 뱉어냈다.

“그러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김 박사는 서펀트에 대한 힌트만 주고, 레인보우 시티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자고.”

“서펀트는……. 나야.”

김 박사가 잇새로 말을 뱉어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이 개새끼!”

잔뜩 흥분한 양상훈이 김 박사의 배를 후려쳤다.

“좆 같은 새끼야! 너 때문에 죄도 없는 어린애가 죽었어!”

저걸 믿냐. 곽수환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양 소령.”

“씹새끼! 넌 진짜 나쁜 새끼야! 애들 이용하는 새끼들은 다 뒈져야 돼!”

연거푸 김 박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양상훈을 향해 곽수환이 목소리를 키웠다.

“양 소령! 저 새끼 서펀트 아니라고.”

“아니면 어때! 어차피 지가 서펀트라고 자백했잖아!”

양상훈이 돌아보는 때였다.

젠장!

곽수환이 재빨리 양상훈에게 달려갔지만, 손만 뻗으면 바로 코앞에 있는 김 박사보다는 빠르지 못했다. 그제야 씩씩거리던 양상훈도 제 허리춤이 가벼워진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김 박사가 입에 총구를 넣고 발사했다.

퍼억. 수박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터져나간 뇌수와 붉은 살점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 박사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곽수환은 시체가 되어버린 김 박사 앞에서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겼다.

“미안……. 씨발……. 진짜 미안하다, 곽 소령. 내가…….”

당황한 양상훈이 제 발치에 쓰러져 있는 김 박사를 내려다본 채로 중얼거렸다. 곽수환은 뭐라고 한 마디를 하려다가 간신히 삼켜 넘겼다.

“상부에는 즉결 처형했다고 보고해.”

“마더는?”

“여기 감시 카메라는 꺼놨어. 어차피 이놈 상부도 눈여겨보고 있었으니까 상관없어.”

“야, 진짜 미안하다. 저 새끼가 그 애한테 아담 혈액 줬다고 생각하니 눈이 뒤집혀서…….”

“됐으니까 시체나 치워놔.”

양상훈이 입을 떡 벌렸다. 한 바탕 욕설을 퍼부을 거라 생각했는데, 곽수환은 별말 없이 과천 쉘터 취조실을 나가는 게 아닌가.

“야! 너 근데 석화 박사님은 어떻게 한 거냐?! 나보고 알아보라면서 이채윤이 엄청 쪼잖아!”

별 욕도 안 했겠다, 이참에 물어보자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였다. 곽수환이 뒤도 안 돌아보고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는 마저 걸어 나갔다.

***

석화는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연구실에 있었다. 물론 그중 두 시간은 체력을 비축하느라 조는 시간이기도 했다.

곽수환이 관리하는 21 바이올렛 구역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있는 연구실이 다른 곳과 분리되어 있어 그럴지도 몰랐다.

석화는 연구실을 빠져나와 낡은 복도를 걸었다. 오래전에는 그린 구역이었던 이곳 쉘터의 연구실은 장비의 수준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곳은 총 2층짜리 건물이었고 옆으로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은 군인들이 거주하는지 지프가 왔다 갔다 하고는 했다.

석화는 곽수환이 가져다 준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직접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하지만, 창으로 밖을 바라보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바이올렛 구역인지라 가끔 밤낮으로 아담이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석화는 아몬드를 더 꺼내 씹어 먹으며 새롭게 들어오는 지프 한 대를 봤다. 운전석에서 내려선 사람은 다름 아닌 곽수환이었다. 석화는 문득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 뻔하다가 주머니에 다시 꽂았다. 곽수환이 인상을 쓰고 군인에게 무슨 말을 하는 중인데, 분위기가 영 험악했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고, 석화는 그의 눈을 피해 창문 옆으로 이동했다.

석화는 며칠 전부터 느껴지는 이 찜찜한 감각을 다시 되새겨야 했다. 물론 여의도 쉘터에 있을 때보다 여기서 더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고, 필요한 물건은 곽수환이 전부 가져다주고는 했다.

그가 자신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딜 쉽게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석화는 이곳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밖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석화는 곽수환이 마련해준 방으로 걸어가면서 마지막 남은 아몬드를 입에 넣었다. 방문을 여니 책상에는 남근석과 두 개의 언덕이 동그란 돌이 보였다. 이것도 전부 곽수환이 가져다준 거였다. 석화는 침대에 눕는 대신 돌이 있는 책상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몸의 기운을 쭉 늘어뜨리고 차가운 책상에 뺨을 기댔다. 물끄러미 돌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곽수환은 레인보우 시티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걸까? 에덴동산도 해치우고? 치료제가 개발되면 혹시 그가 그 치료제를 가지고 새로운 세력을 키울 셈인가?

의문은 내내 머리를 떠돌아다녔지만 그뿐이었다. 현재 석화의 생각은 온통 아담 바이러스에 집중되어 있었다. 저는 정치 같은 건 모른다. 다만 하루 빨리 치료제가 나와 더는 모두가 아담으로 고통 받지 않았으면 했다. 그랬다면 곽수환도 부모와 형제를 죽일 일이 없었을 테니까.

“눈 뜨고 자?”

석화는 시선을 위로 휙 올렸다. 들어온 지도 몰랐던 그가 코앞에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곽수환도 뒤로 물러나주었다. 석화는 의자를 빙글 돌려서 그를 향했다. 어쩐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착각이겠거니 했다.

곽수환은 제복 주머니에서 초코바와 귤 몇 개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곽 소령님.”

“왜 귤 싫어해?”

“좋아해요.”

귤은 특히나 구하기 힘든 과일이었다.

“까줄까?”

“저 면역체 아니에요.”

귤껍질을 까는 곽수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솜씨 좋게 단박에 귤을 까서 반으로 갈랐다.

“제 안에서 아담 바이러스는 괴멸됐는데 제 혈액은 여전히 바이러스에 감염돼요. 다만 45도 가까이 가열되면 아담 바이러스가 파괴되고요.”

말을 끝내자 입술로 말캉한 귤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귤을 씹자 달고 신 맛이 확 입 안에 퍼졌다. 석화는 그 놀라운 맛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제주도에 있을 때도 몇 번 먹지 못한 귤이었다. 과일은 엄청 비쌌으니까.

“석 박사 열이 그날 45도까지 치솟기는 했지.”

곽수환은 귤을 한 점 더 떼어내 석화의 입술로 향했다. 석화는 그 달큼한 맛의 충동을 이겨내고 고개를 틀었다.

“더 안 먹어?”

그는 대신 자신의 입에 쏙 넣었다. 시네, 그런 말을 하면서 눈썹을 슬쩍 구겼다.

“뭐 더 필요한 건 없고?”

석화는 입술을 꾹 다물고 안으로 말았다. 곽수환은 인내심을 가지고 석화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내 피딱지 가져간 샬레 다시 가져다줘요.”

“어렵지도 않은 걸 왜 힘들게 말해.”

곽수환은 아마 제 방에 있을 거라고 말을 덧붙였다. 사실은 석화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한 번 더 감염이 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꺼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의 과거를 아는 이상 쉽게 말할 수는 없었다. 연구원으로서의 자신과 감정적인 자신이 뒤엉켜버렸다.

“에덴동산이 배포했던 백신도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당시 백신에 대해 조사를 하다 쫓겨난 꼴이기는 했는데, 석화는 그 안에서 기생충을 발견했었다. 백신이 이동 과정에서 오염됐을 수도 있기에 다른 박사들에게는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거면 돼?”

“그리고……. 여의도 쉘터에 다녀오면 안 될까요?”

곽수환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돌 가지러 가려고?”

“아니요.”

“제주도 집에 있는 돌도 여기로 가져다줄까?”

석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쉘터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다녀올게.”

“제가 연구원 자격이 박탈돼서 쉘터로 출입이 불가능해진 건가요?”

허가를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석화도 알고 있었다. 곽수환이 다가가 의자 등받이를 벌려 쥐고 석화를 그 안에 가뒀다.

“여기가 가장 안전해. 내가 석 박사 뭐든지 다 하게 해주잖아.”

“안전한 건 아는데 계속 여기서 지낼 수는 없잖아요.”

“왜 없어. 여의도에서도 쉘터에서만 지냈잖아.”

웃고 있는 곽수환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 밖에 못나가요?”

“내가 석 박사 감금했어? 무슨 말이 그래. 사태 진정될 때까지 안전하게 있자는 거야.”

석화는 그제야 찜찜한 이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감금된 거나 다름없었다.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곽수환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 귤껍질을 다시 벗기기 시작했다. 석화는 매끈하게 까인 귤을 불안하게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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