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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ne wall (5) (10/23)

Stone wall (5)


“빌어먹을 자식!”

분개한 세컨드 마스터가 유리잔을 내려쳤다.

세컨드 마스터가 저렇게 광분한 모습은 여자의 죽음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집사는 서둘러 마스터에게 다가가 유리에 찢긴 상처를 살폈다.

“마스터, 진정하세요.”

“집어 치워!”

마스터가 다시 주먹을 쥐니 피가 뚝뚝 카펫으로 떨어졌다. 세컨드 마스터는 전동 휠체어의 방향키를 쥐고 책상을 돌아 나왔다.

대가리가 너무 크게 놔뒀어, 곽수환……. 석화의 연구원 직위를 박탈하고 일반 시민으로 강등시켜? 게다가 어딘가에 숨겨두기까지 하다니! 마더를 통해 본 영상에서 석화는 분명 아담에게 물렸다. 아니, 취조실은 어두워 사람의 인영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의무실부터는 선명하게 보였다.

아담키트로 석화의 혈액을 검사했고, 분명 양성이었을 것이다. 영상을 확대해도 음성인지 양성인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곽수환의 표정을 보고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절망했으니까.

“면역체였던 거야. 석화가…….”

세컨드 역시 곽수환이 퍼스트와 접선했던 건 알았다. 다만 설마 놈이 정말 자신의 뒤통수를 칠까 싶었다. 사리분별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 아닌데 퍼스트의 편을 들 리가 없지 않나.

마스터는 상처를 살피고자 전전긍긍하는 집사를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흐르는 피 때문에 패드에 지문을 인식하는 일조차 번거로웠다. 그는 긴 복도를 지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목소리를 키웠다.

“마더! 레인보우 시티 세컨드 마스터의 접속을 허가하라.”

집무실의 조명이 순차적으로 켜지고 마더의 화답이 들렸다.

[세컨드 마스터 음성인식 완료. 서버를 전부 개방합니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지금 당장 세컨드 마스터의 권한으로 곽수환의 컨트롤러 직위를 박탈한다.”

[마스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뭐?”

불가능하다니? 세컨드 마스터는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부릅떴다.

[레인보우 시티 개정법 제 213조에 의거. 퍼스트 마스터의 허가 없이 현(現)컨트롤러의 직위를 박탈할 수 없습니다. 퍼스트 마스터의 동의를 얻어주세요.]

그게 곽수환이 퍼스트 마스터와 접선했을 당시 부탁했던 일이었다.

‘제가 퍼스트 마스터의 손을 잡는다면, 가장 먼저 세컨드 마스터가 제 컨트롤러 직위를 박탈하려고 할 겁니다. 퍼스트 마스터께서는 그걸 막아주십시오.’

빌어먹을!

세컨드 마스터는 아끼던 마노 광물을 들어 벽으로 내던졌다.

***

석화는 창문에 올려둔 귤껍질을 무심히 바라봤다. 하룻밤 사이에 수분기 없이 바짝 말라버렸지만 상큼한 향은 아직 머물러 있었다.

석화는 책상에 놓인 소형 라디오의 안테나를 길게 뽑아 올렸다. 귤껍질 옆에 그 라디오를 놓아두었다.

치직, 치지직. 잡음이 들리지 않도록 라디오 주파수를 세심하게 돌렸다.

[……쉘터는 재정비가 끝났습니다. 우리 시민들이여, 아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천 쉘터로 진입한 아담은 우리의 주적인 에덴동산의 소행으로 밝혀졌습니다. 헌병대 조사를 통해 여의도 쉘터 김석태 박사가 서펀트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아직 남은 에덴동산 반군들을 소탕하고자 우리 군은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뭐?

석화는 눈꺼풀을 한 번 털어냈다. 스피커의 볼륨을 조금 더 높였다. 그러나 김 박사나 에덴동산에 대한 뉴스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머지는 항상 듣던 레인보우 시티의 세뇌 방송이었다.

제가 만난 서펀트와 체형도 말투도 전혀 다른데 김 박사가 에덴동산의 서펀트라니? 혹시 그날 만난 서펀트는 사칭이었던 건가? 아니, 오히려 김 박사가 누명을 썼다는 쪽이 더 그럴싸할 것이다. 자신도 여의도 쉘터 식당에서 일어난 아담 사태 때문에 김 박사를 의심한 적은 있었으나 그가 서펀트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추론이었다.

만일 김 박사가 구금된 상태라면, 에덴동산에 대해 파내기 위해 그를 심문할 가능성이 높았다. 말이 심문이지, 고문일 거다. 어쩐지 손톱이 시큰거리는 것 같아 석화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을 매만졌다.

곽수환이 두 번째로 선물해줬던 돌은 첫 번째보다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벼웠다. 게다가 컨디션도 여의도 쉘터에 있을 때보다 좀 더 좋았다. 잠도 편히 자고, 타인과 엮일 일도 거의 없고 식사도 제때 하니 건강 상태가 양호해진 거겠지.

똑똑.

이 방의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석화는 라디오를 들은 이후부터 곽수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할까?”

보통 그가 식판에 먹을 걸 담아오고는 했는데, 안으로 들어온 곽수환은 빈손이었다.

“옆 건물로 가서 먹자.”

“여기서 먹어도 돼요.”

“답답한 것 같은데 나가서 공기 좀 쐬자고.”

곽수환이 ‘이것 봐, 얼마나 자유로워?’라는 듯 입술을 쓱 끌어올렸다.

석화는 라디오를 원래 자리에 내려두고 그가 준비해두었던 코트를 걸쳤다. 보들보들하고 포근한 재질이어서 몸의 열이 더 오르는 것만 같았다.

“연구는 잘 돼가고?”

석화의 보폭에 맞춰 나란히 걷던 곽수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백신 가져다달라고 했으니까 오늘 중으로 올 거야.”

“……네.”

석화가 단답형의 대답만 하자 곽수환이 시선을 흘끔 내려 얼굴을 살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아뇨.”

“갖고 싶은 건?”

석화는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원래도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는데 지금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하는 게 있으면 다 해주겠다는 말들이나 꺼내고 있었다.

“없어?”

“네.”

그는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처럼 한숨을 짧게 내뱉었다. 정말 갖고 싶은 게 없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나보다 밥 먹은 날도 더 많으면서 왜 자꾸 애들처럼 굴어.”

“제가요?”

“전하고 다르게 굴잖아.”

“저는……. 전하고 똑같은데요.”

건물 밖으로 나오자 곽수환이 바람에 날린 머리를 손으로 정리했다.

“석 박사는 전하고 똑같은데 내가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네.”

그가 멈춰 섰기에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는 석화도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섰다.

“대답도 그렇고 얼굴 표정도 그렇고 자꾸 살피게 되는데, 나 이런 건 처음이라 좀 적응 안 되거든?”

딱딱한 제복 차림인 그는 석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는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초조해진 애들처럼 짜증스러운 기색이 머물러 있었다.

“됐다, 밥이나 먹자.”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잡아끌자 석화가 신음 소리를 냈다. 세게 잡힌 탓에 뼈까지 욱신거렸기 때문이었다. 잇새로 혀를 찬 곽수환이 팔을 놓더니 다시금 보폭을 맞춰 걸었다.

바이올렛 쉘터라 불리는 옆 건물의 입구는 세 명의 군인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그린 구역 군인들보다 한참이나 각이 잡혀 보였고 표정이라 부를 것도 없었다. 곽수환과 석화를 확인하고는 곧장 길을 터주었을 뿐 석화에게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았다.

쉘터 내의 2층 식당은 점심시간이 지난 터라 지나치게 한산했다. 이곳은 여의도와 다르게 식당 직원들조차도 전부 군인들이었다. 음식이 아직 스테인리스 반찬통에 남아 있었기에 석화는 식판을 들었다.

“자리에 계시면 준비해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주방 안쪽에서 얼굴을 내민 취사병이 걸걸하지만 정중하게 말했다.

“됐어, 남은 거 먹지 뭐. 어차피 석 박사는 먹고 싶은 것도 없을 텐데.”

먹고 싶은 게 왜 없나. 있다면 닭백숙인데. 지금 당장 만들 수도 없는 음식이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석화는 식은 밥을 푸고, 옆에 있는 반찬들을 남기지 않을 만큼만 담기 시작했다.

“거, 빨리빨리 좀 풉시다.”

뒤에 있던 곽수환이 식판으로 툭 옆구리를 찔렀다. 돌아보니 조금 짓궂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심술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다.

애처럼 구는 게 누군데……. 저는 곽수환을 전하고 하나도 다름없이 대하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아담이 될 상황까지 갔어도, 대외적으로 연구자의 지위를 박탈당했어도 말이다. 사실상 곽수환이 저를 어딘가에 묻어 죽인다 해도 자신을 찾아줄 사람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혼자가 된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존재를 아무도 떠올려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펐다. 이제 저를 기억해주는 건 여기 있는 곽수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가 김 박사에 대해서 물어봐도 될까……?

석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눈치를 적잖이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샬레나 백신을 달라고 했을 때도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던 것이다.

신변을 보호해주는 건 곽수환이지만, 반대로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도 그였다. 삶에 큰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아담에게 물렸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살고 싶다는 거였다.

“햄 못 먹은 귀신이 처붙었나, 새끼들이 햄만 싹쓸이했네.”

소시지와 채소를 볶아둔 통에는 정말로 소시지는 조각밖에 보이지 않았다. 석화도 채소보다는 소시지가 더 좋았지만 아쉬운 대로 남은 것을 긁어모아서 그의 식판에 덜어주었다. 곽수환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키웠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빈자리를 찾아서 식판을 내려두었다. 그랬더니 곽수환은 주머니에서 아주 작은 귤 몇 개를 꺼내 석화의 빈 식판에 올렸다.

모양이 귤과 똑같은데 어떻게 까먹어야 할지 모를 만큼 크기는 한참이나 작았다.

“그거, 금귤이라고 부른대.”

“금귤이요?”

“껍질째 먹는 거라던데 안에 씨도 있다더라.”

생김새는 귤하고 비슷하지만 먹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이것도 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귀한 과일일 것이다.

석화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천천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반으로 잘린 소시지 한 점을 석화의 수저에 툭 올렸다.

“……라디오를 들어보니까 서펀트가 누군지 밝혀졌다던데요.”

석화는 먼저 운을 떼어봤다.

“믿어?”

곽수환은 취사병 새끼가 썩은 양파도 안 걸러냈다면서 한마디를 더 보태기만 했다.

“김 박사님이라던데……. 저도 믿기지는 않아요. 그럼 김 박사님을 심문 중인가요?”

“죽었어.”

석화는 수저를 든 채로 굳어버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곽수환은 식사를 이어나갔다. 석화도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기계처럼 손과 입을 움직였다.

“이 장소는 상부도 몰라요?”

“설마, 세컨드 마스터는 알아. 알아도 어쩔 거야. 하반신 불구라서 웬만해서 우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데. 원래는 세컨드 마스터를 지키기 위해 만든 부대였는데, 여기 애들 내가 거둔 놈들이라 레인보우 시티가 아니라 나한테 충성하거든.”

상부가 알게 된다면 즉결처형을 내릴 만한 말을 함부로 뱉어냈다.

21 바이올렛 구역에 거주하는 컨트롤러의 직속 부대는 스무 명 안팎이었다. 대신 특수부대라고 부를 만큼 개개인 한 명의 전력이 뛰어난 편이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몇 명이서 레드 구역 소탕 정도는 손쉽게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에 속하지만, 차 중령이나 곽수환과 달리 정식 직위가 없기에 마더에 등록되지 않은 유령들이었다.

세컨드 마스터는 자신을 위한 군대를 만들고자 했지만 결국 곽수환의 부대가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우습지 않아?”

곽수환이 짧게 비웃음을 내비쳤다.

“어떤 게요?”

“나는 시티의 허락 없이 태어나서 밖으로 방출됐잖아. 내 동생도 마찬가지지만 살아있다고 해도 레인보우 시티에 등록되지 못했을 거야. 선천적인 병이 있었거든. 여기서 불치병을 앓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어?”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다면 철저히 버림받는다. 그건 레인보우 시티의 인구정책 중 하나였다. 시민들을 지키며, 아담과 반군이라는 주적을 해치우기 위해서 다른 복지에 힘을 쓸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티의 대가리 중 한 놈이 하반신 불구야. 또 한 놈은 몸은 멀쩡하지만 뇌에 똥만 가득 찼지. 그런 놈들이 인구정책을 그따위로 펼치니 아이러니하지?”

바이올렛 구역에 온 뒤로부터, 조금 더 정확히는 자신이 아담에게 물리고 살아남은 뒤부터 곽수환은 솔직하게 제 생각을 전달해왔다.

석화는 수저를 꽉 쥐었다. 이어 조용하지만 고저 없이 물었다.

“곽 소령님은……. 레인보우 시티가 망했으면 해요?”

곽수환은 턱을 괴더니 눈만 올려 석화를 바라봤다. 응. 그는 입술을 다문 채로 목만 울렸다. 오히려 석화가 당황해 작게 입을 벌렸다.

“실질적으로 시티가 무너지는 건 어렵겠지. 다만 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야. 아담이 사라지는 거지. 뭐, 이건 세 살 애도 아는 이론일 테고.”

“세 살은 이론이라는 표현도 모를걸요.”

곽수환이 모양 좋은 눈을 길게 휘었다.

“그리고 이건 나보다 석 박사가 더 잘 알 거야. 백신이 나와도 아담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듭하는 이유가 자연발생인지 아닌지 말이야.”

“…….”

석화는 한동안 말을 아꼈고, 곽수환은 다시 식사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밥을 절반도 먹지 않은 석화는 앞에 놓인 금귤 하나를 들었다. 무슨 맛인지 궁금해 깨물었더니, 엄청나게 신 맛에 어금니와 맞닿아 있는 뺨 안쪽의 점막이 시큰거렸다. 그런데도 단맛이 느껴지니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석화는 공을 들여 씹어 먹다가 씨를 손바닥에 뱉어냈다.

“이것도 심으면 자라겠죠?”

“엄청 오래 걸리겠지만.”

“바이러스도……. 오래 걸리지만 자연적으로 변이하는 경우가 존재해요. 페니실린에 내성을 가진 베타 락타메이스라는 박테리아도 나타났으니까요. 이후에는 아예 페니실린이 듣지 않는 균도 나왔고요.”

석화는 한숨도 돌릴 겸, 손바닥에 놓인 씨를 빈 물컵에 톡톡 털어 넣었다.

“그런데 그건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지금처럼 짧은 기간에 7차 변이까지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 하고요.”

석화는 제가 말하고도 이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없다고 봐야 할 거예요.”

“그렇지?”

곽수환은 저의 생각도 그렇다면서 깔끔하게 식사를 끝마쳤다.

“레인보우 시티가 이 체제를 유지하려면 아담이 필수로 존재해야 하거든. 그렇다면 백신이 듣지 않는 새로운 아담 바이러스도 계속 필요하겠고, 이 또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거겠지.”

그렇다면 쉘터에 있는 멀쩡한 박사들은 전시용이나 다름없다. 레인보우 시티가 이렇게 열심히 백신을 만들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석화도 전이었다면 엄청난 비약이라며 흘려듣고 말았을 테지만, 지금은 곽수환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런 짓을 벌이는 걸까…….

현재의 레인보우 시티가 유지되길 바라는 사람일 테고, 자연스럽게 위에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석화는 문득, 레인보우 시티의 최대 연구센터가 우도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했다.

“설마 마스터들이…….”

“그런데 석 박사는 내 경고를 깨끗이 말아 드시더라고.”

곽수환이 제 앞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켰다.

앞서 처형을 당한 박사들도 진실에 근접해 갔기에, 마스터나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상부에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그런 운명이 됐을지도 모른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석화도 식사를 더 할 생각이 없어서 금귤만 주머니에 넣었다. 식판을 수거함에 올려두고 이번에는 한 손만 주머니에 넣었다. 코트 주머니 한쪽은 금귤로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곧장 제 연구실이 있는 건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곽수환은 식당 반대편에 있는 무기고로 향했다. 석화는 진입이 불가능했기에 무기고에서 떨어진 복도에서 그를 마냥 기다렸다.

무기고로 들어갔던 그가 나올 때는 K3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석화는 곽수환이 현장이라도 나가나 싶었다. 그가 이쪽으로 오기까지 기다렸다가 다가온 타이밍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입구를 빠져나와 제가 거주하는 건물로 걸어가려는 때였다.

“어디 가.”

“연구실에요.”

석화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대답을 꺼냈다.

“이리 와.”

조금 떨어져 있던 그가 손을 까딱까딱했다. 다가가서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올려다보자 곽수환이 잘생긴 얼굴을 쓱 내렸다.

“석 박사, 무지개 본 적 있어?”

“……아뇨.”

무지개가 뭔지는 알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보다 안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서일 수도 있었고, 레인보우 시티는 이름과 대조될 만큼 비도 자주 내리지 않았다.

곽수환이 저 뒤쪽으로 가자며 턱짓을 했다. 석화는 딱히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해서 그를 따라갔다. 설마 뒤편으로 데려가서 자신을 총살하려는 건가? 하는 이상한 상상도 하지 않았다. 총알을 낭비할 필요 없이 그가 목만 꺾어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쉘터 건물 뒤편에는 오래전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연못이 있었다. 아직 찬바람이 기승인 터라 연못은 꽁꽁 얼어 있었고, 그 밑의 물풀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멈춘 상태였다.

“좋은 거 보여줄게.”

곽수환은 기다란 총을 앞으로 장전하더니 꽁꽁 언 연못의 한 부분에 대고 총을 연사하기 시작했다. 투투툭, 그 타격에 꽝꽝 언 얼음이 깨지며 물보라가 분수처럼 일었다. 위로 분사된 물방울을 따라 오묘한 색이 희끄무레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작고도 귀여운 무지개였다.

곽수환은 무지개가 뜨자마자 사격을 멈추고 어깨에 총을 들쳐 멨다. 그는 태어나 처음 무지개를 감상하는 석화를 구경했다. 물론 무지개의 원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빛이 물방울을 통과할 때 생기는 굴절에 의한 색의 향연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석화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총으로 무지개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발상은 여태 해본 적이 없었다.

“……신기해요.”

솔직한 감상에 곽수환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편으로는 환심을 사고자 하는 아이 같기도 했다.

“죽이지?”

물론 본인이 발견한 게 아니라 양상훈이 알려줬다는 사실은 숨겼다. 그러다 곽수환이 갑자기 낭패한 얼굴을 했다. 석화의 턱에 붉은 상처가 올라와 있던 탓이었다.

얼음 조각이 튀어 오를 때 스친 건데, 그것도 모르고 석화는 의아하게 곽수환을 쳐다봤다.

“피 나잖아.”

그제야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손을 댔다가 떼어냈다. 큰 상처는 아니라 피가 조금 묻어날 뿐이었다. 곽수환이 상처에 손을 대려고 하자 석화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먼저 들어갈게요.”

웬일로 석화가 황급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턱을 손으로 감싸고 걸어가는 석화를 곽수환이 곧장 따라잡았다.

“많이 아파?”

“아뇨.”

“상처 좀 봐봐.”

곽수환이 턱을 가린 손을 낚아채서는 저를 보게 만들었다.

“안 돼요. 피가,”

석화는 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입술을 다물었다.

곽수환도 석화가 왜 이러는지 대충은 짐작했다. 아담에게 물렸으니 혹시 혈액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 싶어 조심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음성인데 뭘 걱정해.”

“그래도요.”

석화는 강경하게 상처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눈을 했다. 아담을 때려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바로 저인데 고작 개미눈물 같은 피가 두려울 게 뭐가 있나.

“그렇게 걱정이 많아서 앞으로 사람들하고 스킨십은 어떻게 하려고.”

“아담 바이러스는 혈액을 통해 전염돼요. 그리고 스킨십은 안 하고 살 수도 있어요.”

석화는 제 턱을 다시 손으로 감쌌다.

“난 안 하고는 못 살 것 같은데.”

곽수환이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시선만큼은 홧홧하게 다가왔기에 석화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고 있으면서 석화 또한 곽수환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와 껴안는 건 저도 좋다. 그의 성기는 크지만 모양도 거부감 없이 예뻤고, 심지어 제가 입에 물기까지 했으니까. 다른 타인의 손길은 모르겠지만, 곽수환이 몸을 만져주는 감각도 몇 번이나 머리에서 맴돌았다.

“여의도에 있을 때는 정액 달라면서 졸졸 쫓아다니더니 구하기 쉬운 지금은 왜 달라고 안 해? 이제 필요 없어?”

“줄 거예요?”

석화가 턱을 감싼 손을 내렸다. 곽수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낚아챘다. 석화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는 턱을 살짝 깨물었다.

읏! 놀란 석화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는 별 타격도 받지 않은 듯 허리만 더 꽉 끌어안았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상처를 핥더니 턱을 물고는 거세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령님.”

안에 있는 피가 빨려나가는 것만 같았다. 흡혈귀에게 물려 꼼짝도 못 하는 사람처럼 곤란하게 눈썹만 일그러뜨렸다. 너무 거세게 빨리는 바람에 입에서는 밭은 숨이 샜다. 그는 울혈이 생길 정도로 빨고 또 피를 핥았다.

“……아파요.”

곽수환이 입술을 떼어내자 턱은 타액으로 축축했다. 얼마나 세게 빨아댔는지 상처보다도 빨린 주변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턱만 불그스름하니 입이 메말랐다. 석화는 열이 오른 눈으로 곽수환의 젖은 입술을 바라봤다.

……젠장, 못해먹겠네.

갑작스러운 그의 거친 언사에 석화는 홀린 듯한 기운을 털어냈다. 그는 제복 안쪽에서 울리는 무전을 들고 말했다.

“먼저 들어가.”

걸음을 먼저 옮긴 건 오히려 곽수환이었다. 석화는 균열이 간 연못 앞에 서서 손으로 금귤만 굴렸다. 그가 왜 갑자기 짜증을 낸 건지 이유를 따져보려 했지만, 저는 그냥 아프다는 이야기를 한 것밖에 없었다. 석화는 화끈거리는 턱을 손으로 꾹 눌렀다. 아래가 발기했다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

석화는 밤이 되자마자 버릇처럼 라디오를 틀고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확인했다. 레인보우 시티의 방송을 전부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싶었다.

곽수환이 안전하다며 자부하는 이곳에 자신을 감금한 건 어쩌면 그에게는 위험천만한 일일 것이다. 완벽한 면역체는 아니지만, 아담의 피에 노출되고도 살아남았다. 그는 이 사실을 상부에 숨겼을 테고, 그래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거니까.

[레인보우 시티의 마스터 투표일이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가 그대로 연임을 하느냐 아니냐가 관건일 텐데요. 마스터들이 공략과 업적을 발표하기에 앞서, 세컨드 마스터가 이례적으로 전언을 보내왔습니다. 현재 아담 바이러스의 치료제 개발이 약 80퍼센트 이상 진행됐다고 합니다.]

석화는 너무 많이 굴려 미지근해진 금귤을 꽉 쥐었다.

치료제 개발? 이자들이 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다시 한번 라디오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세컨드 마스터를 찬양하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샤워를 하고 방치해둔 머리가 금세 말라 있었다. 석화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곽수환이 마련해준 깨끗한 이불이었지만, 매트에서부터 지울 수 없는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어둠이 가득했다. 차량의 엔진 소리가 몇 번 들려오고 나서는 총성도 들렸다. 아마 불빛을 따라온 아담에게 발사한 듯했다.

석화는 이불을 좀 더 몸 위로 끌어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혼자 자는 건 익숙했지만 이 커다란 건물에 저 혼자밖에 없다는 고독감은 공포심을 동반했다. 석화는 손에 쥐고 있던 금귤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마음의 안정을 주는 건 늘 돌이었는데, 이 금귤도 그 못지않았다.

쿵!

엄청난 굉음에 석화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방패도 되지 못하는 이불을 쥐고 벽에 등을 댔다. 설마 아담이 여기까지 올라온 건가? 아담에게 감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심장이 마구 박동했다. 덜컥, 덜컥, 문을 잠가뒀기에 문고리가 흔들렸다.

“……소령님?”

입 밖으로 소리를 내뱉었지만 제가 듣기에도 너무 작았다.

석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고리가 부서지면서 끼익, 문이 열렸다. 백열전구의 빛은 복도를 타고 방을 비췄고,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검은 그림자가 졌다. 실루엣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불을 켠 석화는 한숨을 돌리고 이불을 내려두었다.

안으로 들어온 곽수환은 평범한 바지에 편한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는데, 손에는 위스키가 들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책상 의자를 끌어와 침대 앞에 내려두었다. 그리고는 털썩 앉았다. 석화는 말없이 술을 마시는 곽수환을 살피다가 마찬가지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가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매도 나른하게 풀려 있었고 자세도 평소보다 흐트러져 보였다.

곽수환은 손을 뻗어 책상의 컵 하나를 쥐더니 술을 조금 따랐다. 석화는 제게 내민 그 잔을 받고 입을 열었다.

“술 못 마셔요.”

“알아.”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있는 석화의 얼굴이 조금 긴장돼 보였다. 곽수환은 그걸 알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석 박사.”

부르고는 다시 술로 입을 축였다.

“우도로 갈래?”

잔에 담겨있던 누런 빛깔의 술이 한 차례 요동쳤다.

“우도요?”

“세컨드 놈이 치료제 개발 명목으로 박사 몇 명을 우도로 불러들인다는데, 그중 하나가 석 박사야.”

“저는 직위가 박탈됐는데요.”

“세컨드가 다시 부활시켰어.”

자신의 컨트롤러 직위를 박탈할 수 없으니 석화를 표적으로 삼은 것 같았다.

“상부는 치료제를 만들길 원하지 않는다면서요.”

“치료제를 세컨드가 독점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지금도 아담을 없애지 않는 건 저들의 안위와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니, 세컨드가 치료제를 만들어낸다면 오히려 퍼스트를 견제할 수도 있을 거야. 물론 그건 만들 수 있을 때의 이야기고, 그냥 석 박사를 우도로 끌어들일 구실일 수도 있겠지. 석 박사가 아담에게 물렸다는 걸 세컨드가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아.”

설마 인체실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석화는 잔을 들어 입술에만 대고 떼어냈다.

“……가야 되면 가야죠. 제가 안 가면 소령님이 위험해지잖아요.”

그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했다.

“과천 쉘터에서 저를 데리고 나온 사람이 곽 소령님인 걸 상부도 알겠죠. 그런데 가지 않으면…….”

석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렸다. 짙은 눈꺼풀에 그림자가 졌고, 곽수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주먹을 쥐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런데 석화가 내 것이 맞긴 한가?’

과천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곽수환은 이 건물을 보면서 위안을 받았다. 마치 돌아올 집이 생긴 것만 같았다.

나갔다 돌아오면 반겨주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안전한 곳에 머물러 있는 석화가 있었으니까. 반면에 곽수환은 석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같고, 또 아닌 것도 같았다. 석화의 턱에는 제가 빨아놓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뻗어나간 손으로 석화의 뒷목을 감쌌다. 끌어당기자 약간의 경계심 어린 눈빛이 솟았다. 기분 좋게 해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앞서 몇 번 쾌감에 약한 모습도 보여주던 석화였으니 말이다.

곽수환은 제가 만들어놓은 울혈을 혀로 쓱 핥았다. 석화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입술을 조금 더 위로 올려 말캉한 아랫입술에 맞대니 석화의 입술이 벌어졌다.

곽수환이 혀를 미끄러뜨리자 옅은 알코올 향이 뒤섞여 석화는 그 냄새만으로도 취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벌써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엄지로 꾹 눌렀다. 먹어치울 듯이 석화에게 입술을 맞대자 그 힘에 밀려 몸이 침대로 넘어갔다.

“하아, 소령님.”

기분은 좋은데, 왜 우리가 키스를 하고 몸을 겹치죠? 관계에 대한 의문이 담긴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 친구인가요?”

곽수환이 가슴을 울려 헛웃음을 내뱉었다.

“요 근래 들은 소리 중 가장 참신한 개소리야.”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예요?”

직설적인 물음에도 곽수환은 쉽게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셔츠가 말려 올라가 드러난 유두를 입에 물고 빨아들였다.

“섹스……파트너예요?”

황당해진 곽수환이 석화를 올려다봤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몸을 겹치는 게요. 소령님이 보던 책에서 그래요.”

“나랑 섹스파트너 하고 싶어?”

석화는 달뜬 얼굴로 곽수환을 봤다가 눈만 깜빡거렸다.

“모르……겠어요.”

난 우도로 가야 하는데…….

그는 매끄럽고 마른 몸을 손바닥으로 미끄러뜨리면서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곧장 성기가 손에 닿았기에 곽수환이 손에서 말캉한 귀두를 굴렸다.

“속옷은 어쩌고.”

“원래……. 잘 안 입어요.”

열이 많아서……. 더워요.

제 성기가 만져지는 감촉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연구원 가운 안으로 속옷을 입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음란한 기분이 배가 됐다. 그런 주제에 평소에는 성에 관심도 없다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곽수환은 간신히 턱에 힘을 뺀 동물처럼 석화의 어깨를 잘근 씹었다. 연약한 피부에 잇자국이 남았고, 입술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몸이 솔직하게 부딪혀왔다.

“그럼 원나잇이에요?”

그는 가슴을 베어 물고는 혀로 젖꼭지를 깨물기도 하면서 빨아들였다. 석화는 눈만 깜빡거리면서 곽수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원나잇에 이렇게 공들이는 놈이 어디 있어.”

가슴으로 그의 숨결이 확 퍼진다고 느꼈을 때 그가 허벅지 뒤를 콱 틀어쥐었다. 그대로 들어 올리니 자신의 성기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발기한 성기가 흔들거렸고, 등까지 들린 채였다. 석화는 당황함에 손을 그에게로 뻗었다.

엉덩이가 벌어지고 아래에 말캉한 감촉이 찾아왔다. 그에게 닿지 못하고 내려온 손으로 시트를 긁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석화는 몸을 비틀면서 신음만 내뱉었다. 아니, 비틀고 싶었지만 곽수환에게 단단히 잡혀 아래가 속수무책으로 빨리기만 했다.

음습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잔뜩 핥아질 때마다 구멍이 움찔거렸다.

“흐읏……. 이상해요.”

짐승에게 아래가 먹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연한 회음부까지 혀로 쓱 올리고 고환을 빨아 들였다. 석화는 곽수환의 양 어깨에 다리를 얹고 허리를 젖혔다. 어깨를 제 무게로 짓눌렀지만 단단하게 받치고 있어 그가 물러나는 일도 없었다.

양쪽을 입에 품었다가 놓은 곽수환이 웃는 게 느껴졌다. 단단하게 선 성기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액을 그가 쭉 빨아들였다. 시원하다고 느꼈던 그의 입 안이 흡사 열탕 같았다.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로 석화가 슬쩍슬쩍 허리를 움직였다.

“……뭐야, 내 입에 박고 싶어?”

그가 귀두를 살짝 깨물었다. 어디든 좋았다. 석화는 빨리 따뜻한 곳에 감싸여 쥐어짜지고 싶었다. 한껏 빨렸던 가슴은 타액이 식어 차갑지만 홧홧했다. 곽수환은 아래를 다시 빨아달라고 종용하는 석화의 몸을 일으켜 제 위에 얹었다. 거꾸로 얹힌 터라 석화의 턱에 묵직한 성기가 맞닿았다.

“지퍼 내려 봐.”

뿌연 눈을 한 석화는 그의 버클을 풀고 지퍼도 내렸다. 브리프를 끌어내리자 갑갑하게 갇혀 있던 성기가 퉁, 기세 좋게 튀어 올랐다. 매끈한 두 다리 위로 꽉 다물린 구멍이 훤히 보이는데 석화는 감출 생각도 못 하고 그의 좆을 쥐었다. 어설프게 주물럭거리자 곽수환은 엄지로 구멍을 쓱 문질러댔다.

“잘생겼지?”

좆한테 잘생겼다는 말은 좀 그랬지만, 그의 말대로 완벽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혀를 내밀어 쿠퍼액을 핥았다. 입에 엉겨 붙는 음란한 맛에 귀두를 쪽 삼키자 곽수환이 낮게 숨을 토해냈다.

그는 침대 상단에 등을 비스듬하게 기대어 석화의 엉덩이를 벌려 쥐었다. 어설프게 빠는 터라 이에 좆이 긁히는데도 감질났다. 작은 입구멍이 더 벌어지지 않아 좆머리만 쪽쪽 빠는데 열중하는 게 또 사람 마음을 동하게 했다. 석화의 허리를 휙 잡아 올려 뒤에서부터 끌어 안고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감쌌다.

“하아……. 왜.”

마치 더 빨고 싶다는 듯 석화가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석화의 입에 넣어 천장을 살살 굴렸다. 간지러움에 비트는 몸을 꽉 붙들고 혀를 누르면서 깊숙하게 손가락을 넣었다.

“우욱. 욱.”

헛구역질에 석화의 가슴이 요동쳤다. 곽수환이 달래듯 귀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안에 더 벌려봐. 여기, 넣다 보면 넓어져.

석화가 고개를 틀어서 곽수환을 돌아봤다. 초점 없는 눈이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게 맞아요?”

손가락을 문 채로 말했기에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런데도 석화는 의심을 잔뜩 담고 있었다.

“이건 약과지.”

곽수환도 타인과 자신의 섹스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지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다만 석화가 기절할까 봐 힘줄이 불거지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석화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하더니 다시 밑으로 내려가 곽수환의 허벅지를 쥐었다. 고개를 내려 아직도 축축한 좆을 입에 넣고, 안으로 꾹꾹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 젖꼭지까지 그의 탄탄한 하복부에 비볐다.

밝히긴.

곽수환은 드러난 구멍을 젖은 손가락으로 살살 달랬다. 긴장이 풀릴 때까지 엉덩이도 주물러주자 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말랑거리는 구멍에 중지를 넣으니 아래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좆을 뱉어내려는 걸 허리를 탁 쳐서 막았다.

“계속해.”

석화는 당혹스러움에 눈꺼풀만 경련한 채 좆을 물고만 있었다. 밑이 벌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흐으, 막힌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고, 위와 아래가 곽수환에게 함부로 파헤쳐지니 제 몸이 제 것이 아니게 되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오자 성기를 입에서 뱉어냈다.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비비며 앓는 신음만 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발기한 좆이 제 가슴을 찔러대며 젖꼭지까지 마찰해 소름이 돋았다.

“빡빡……해요.”

억지로 벌어지는 아래로 온 신경이 집중되고 있었다. 가위질을 하듯 움직이는 손가락은, 한 번도 노출된 적 없던 점막에 과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아윽!”

빙글, 손가락을 돌려 뱃가죽이 있는 방향으로 꾹 누르자 비명이 터졌다.

“기절하면 안 돼.”

엉덩이가 깨물렸고 곽수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는 계속 안쪽을 손으로 누르고 비비기를 반복했다. 석화의 성기에서 흘러내린 액이 느른하게 그의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벗어나려는 두 허벅지를 한 손으로 둘러 잡고 손가락을 돌리니 흡사 울음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입 밖으로 흩어지는 숨결이 뜨겁다.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듯 밑에서 쉼 없는 자극이 쏟아졌다.

“아, 안 돼……. 흐아…….”

곽수환이 손가락을 천천히 빼자 빠끔하게 벌어졌던 구멍이 다시 좁아졌다. 그는 애써 넓혀놓은 아래가 완전히 닫히기 전에 손가락을 걸어서 당겼다. 하반신에 흩어지는 석화의 달뜬 숨에 아래가 한 번 더 팽창했다.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나버려 구멍에 윤활제 대신 침을 뱉었다.

“읏!”

석화는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돌아봤다. 비척대며 몸을 일으켜서는 제 엉덩이를 손으로 가렸다.

마치 저를 탓하는 시선이었지만, 곽수환은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미안, 짧게 말했다. 제게서 물러난 석화를 조심히 끌어와 안았다. 축축한 구멍을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제 좆과 석화의 성기를 함께 마찰했다. 동그란 이마에 땀이 송글 솟아있었다. 곽수환은 이마에 입술을 맞추고는 석화를 반듯이 눕히고 올라탔다.

다리를 들어 올려 커다란 좆으로 회음부를 문질러대니 기대감인지 긴장감인지 구멍이 빠끔댔다. 앞대가리를 가져다대자 쪼옥 저를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콘돔 낄까?”

군에서 지급되는 콘돔이 있지만 질이 안 좋아 금방 찢어지기 일쑤였다. 응? 그대로 꿰뚫고 싶은 것을 참아내며 석화에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가슴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좆으로는 아래를 뭉근하게 문질렀다.

“……있어요?”

“없지. 가져와야 돼.”

아프게 안 할게. 유혹하는 뱀처럼 그가 눈가와 뺨에 키스를 천천히 내렸다. 석화는 곽수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이 제게 주는 안정감은 여전했기에 조금 겁은 났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도 그렇게 기분이 좋았는데, 성기가 들어오면 어떨지 자못 기대도 됐다. 이런 걸 진짜 밝힌다고 하는 건가.

곽수환이 두 다리를 확 올려서는 밑을 내려다봤다. 늘 여유 만만한 웃음을 걸치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눈의 열기는 분명했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잡아 벌리더니 앞을 꾹 밀어 넣기 시작했다. 석화의 입이 벌어졌지만 새된 소리조차 새어나오지 못했다. 아래는 마치 두 번 다시 닫히지 않을 듯 팽팽하게 벌어지는 중이었다.

학, 하악……. 목에 구슬이라도 걸린 듯 간헐적인 숨이 터졌다. 곽수환은 미간을 구기고 낮게 숨을 토해냈다. 제 것을 먹어치우는 아래가 고스란히 드러나 뒷목까지 열로 지글지글 들끓었다. 그 위로는 달아오른 얼굴로 저를 보는 석화도 보였다.

성욕억제제 약효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을 뿐더러 떨어진 지도 오래였다. 자칫하다가는 이성을 잃고 덤벼들 것만 같았다. 좀 더 깊이 내리누르면서 석화의 얼굴 옆으로 팔뚝을 내려 몸을 지탱했다.

석화는 숨을 몰아쉬면서 늘어난 아래가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그때마다 조금씩 더 들어오는 좆에 제 아랫배를 감쌌다. 손가락이 닿지 않았던 곳을 그가 좆으로 길을 내고 있었다.

“아, 아윽.”

“천천히 할게.”

다정하게 말을 했지만 석화의 귀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온통 아픔만 가득한 것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오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안쪽을 느릿하게 비비다가 허리를 뒤로 빼내자 석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가 딸려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는 버티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천천히 치대던 아래에 점차 속도가 붙고 탁, 탁, 허리를 쳐올리는 힘이 엄청났다.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좆이 안을 쳐대니,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아랫배의 모양이 이상해졌다.

“아, 소령님……. 안에……. 밀려요. 밀려나요.”

두 팔 안에 석화를 가둔 곽수환은, 신음하는 입술과 몽롱해진 눈을 한꺼번에 담았다. 제 좆을 전부 감싸 쥔 밑이 주는 쾌감에 점차 행위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런 것을 열락이라고 한다면, 한 번으로는 절대 그치지 못할 거다.

힘들어하는 와중에도 저를 따라오는 석화의 안쪽 한 곳을 계속 처박아주었더니,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 하으……. 윽.”

전립선을 그대로 쑤셔 올리자 석화의 성기에서 묽은 액이 튀었다. 흘러내린 액이 고환을 타고 회음부로 내려와 구멍을 감쌌다. 석화는 동요해 그를 올려다봤다.

“이거, 왜……. 하악!”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게끔 계속 허리를 부딪치자 석화가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기분 좋지? 석 박사. 그러니까 내 거 맞지? 곽수환은 겉만큼이나 뜨겁고 좁은 내벽에 제 좆을 함부로 문질러댔다.

“기분, 좋아?”

“아윽, 이상해. 여기가 나와요. 못 나오게……. 잡아줘요.”

석화가 울상을 하고는 제 성기를 쥐었다. 그렇게 잡아도 소용없는데. 곽수환이 보일 듯 말 듯 웃고는 석화의 팔을 떼어내 위로 올렸다.

얼마나 삽입을 반복했는지 몰라도 이제 아래는 무리 없이 곽수환을 받아들였다. 귀두를 구멍에 걸쳤다가 탁 쳐올릴 때의 충격만큼은 여전해 석화는 허벅지를 바르르 떨었다. 더는 못 버틸 것 같았다. 그가 주는 진저리나는 자극에 도망치고 싶기도, 이성을 전부 놓아버리고 생각 없는 몸뚱이가 되고 싶기도 했다.

곽수환은 집착 특성이 정말 섹스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를 몰아갔고, 또 사정도 하지 않았다. 석화는 제가 언제 사정한지도 모른 채였다. 아니, 사정도 아닌 묽은 액으로 아래가 온통 젖어있었다. 그가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화는 혹시 제가 삽입의 자극에 지린 건가 싶었다.

그만해요. 소령님……. 나……. 화장실 가야……해요.

석화가 이제 안 된다고 말을 뜨문뜨문 뱉어냈다. 곽수환은 석화의 몸을 들어 올려 제 위에 앉혔다. 삽입이 좀 더 깊어지자 아래가 온통 젖은 석화가 몸을 비틀었다.

“석 박사, 딱 내 체질이야.”

그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체질……?”

“엄청 밝힌다고.”

탁, 그가 허리를 쳐올렸다. 석화는 곽수환의 어깨에 제 뺨을 힘겹게 늘어뜨렸다.

“밝히는 석 박사 분수 터진 건데.”

“그게 뭐예요.”

하긴 수치심도 알아야 있는 법이지. 곽수환이 웃자 좆이 담긴 아래가 전부 울렸다.

“……석화야.”

하읏! 그가 깊숙이 박아둔 채로 저를 불렀다. 거세게 허리를 쥐고는 어디도 가지 못하도록 내리눌렀다.

“석화야.”

얼굴을 떼어내 고개를 젖히자 그가 턱을 입술로 쪼았다.

“형.”

석화가 눈을 크게 뜨고 곽수환을 내려다봤다. 그는 올려다보며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핥고 또 빨아들였다. 겹친 몸뿐만 아니라 시선으로도 범해지는 듯했다. 형, 좋아? 기분이 이상하다 못해 아랫배와 손끝 발끝이 콕콕 쑤셔 그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곽수환이 작정하고 덤벼들었다.

불안정한 호흡이 흐트러지고, 무두질을 당한 아래는 제어를 벗어나 완전히 성기가 된 것 같았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정신이 몽롱해질 때마다 전류가 흐르는 자극이 쏟아졌다.

“하아, 힘들어…….”

좆을 뒤로 빼낸 곽수환이 단숨에 처박았다. 아윽! 위로 밀려날 정도의 충격이 뒤따랐지만, 그가 두 손목을 꽉 붙들고 있어 뿌리까지 받아내야 했다. 그가 빨아놓은 가슴이 스산해질 만큼 소름이 돋았다. 이성 따윈 다 던져버리고 몸을 치대오는 그의 눈에는 이채가 선명했다.

정신없는 저와는 다르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정도 하지 않아 무서움이 생길 지경이었다. 말캉하게 열린 구멍이 되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정……안 해요?”

“석 박사가 개발한, 억제제 때문에 그렇잖아.”

제 좆이 수그러들지 않는 걸 석화 탓을 했다. 움찔, 안에 꽉 들어찬 성기가 한 차례 더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좆을 어디 할 것 없이 내벽이 감싼 터라 미세한 움직임마저도 크게 다가왔다.

은밀한 내부가 헤집어지는데도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곳을 곽수환이 파헤치는데, 창피함이나 경계심보다 그와 좀 더 피부를 맞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이 경련하는 손을 뻗어 곽수환의 몸을 끌어안았다.

“사정해요.”

불에 덴 것처럼 근육이 놀라는 게 손바닥에 고스란히 와 닿았다. 싸요. 석화의 속삭임에 곽수환이 기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곧 화답하듯 석화의 몸을 두 팔로 꽉 껴안았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

이제 힘들어서 못 버티겠어요.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고, 꽉 껴안고 있던 손에서도 금세 힘이 빠졌다.

“나 싸려면 형이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형이라고, 생각도 안 하면서…….

곽수환이 석화의 안에서 좆을 쑥 빼냈다. 예고도 없이 빼낸 터라 상실감에 구멍이 움찔거렸다. 넓어졌던 안이 다시 수축하는 바람에 앓는 소리만 나왔다. 그는 석화의 몸을 엎드리게 해 허리를 확 잡아 올렸다. 간신히 두 팔로 침대 시트를 누르는데 타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안이 뚫린 것이다.

“아윽!”

다물어진 밑으로 진입하는 그는, 지금까지는 전희에 지나지 않았다는 듯 더 거셌다.

“아! 후으…….”

정상위보다 뒤에서 들어오는 게 훨씬 더 깊었다. 바짝 선 좆이 내벽을 긁어대는 세기에 꼬리뼈가 밀려나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 팔에 힘이 빠졌다. 손을 위로 뻗은 석화의 상체가 무너져 거친 시트에 뺨이 문질러졌다.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타액까지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잡은 손을 풀지 않고 탁, 탁, 뜨거운 내벽에 처박기를 반복했다.

석화는 시트를 그러쥐지도 못한 채 곽수환에게 시달려 성기만 달랑거렸다. 앞으로 도망가 제 안을 채운 좆을 빼내고 싶은데 힘의 차이에 그저 그를 부르기만 할 뿐이었다.

소령님, 곽 소령님…….

빠끔대는 동안 곽수환은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좆을 쑤셔 넣었다. 가장 깊숙하게 박아놓은 상태로 허리를 움직이자 배를 때려 맞는 것만 같았다. 쾌감과 고통이 교차적으로 찾아들어, 눈꺼풀이 자꾸만 까무룩 내려앉았다.

“하, 진짜 정액 필요해? 나 안에, 싸도 돼?”

“……안에? 흐읏, 어디에?”

석화는 말뜻을 인지도 못하고 되물었다.

“여기, 형 안에.”

“……윽!”

꾸욱 좆을 들이밀었더니 열이 한껏 오른 석화의 눈이 뿌옇게 변했다.

“밖에 할까?”

등에 상체를 바짝 붙여온 곽수환이 속삭였다. 그의 몸도 평소보다 열이 올라 있었는데, 탄탄하게 닿는 촉감이 좋았다.

“밖에……. 안에……. 샬레에…….”

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곽수환은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한 석화의 성기를 손으로 감쌌다. 억제제 약효가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정액보다 묽은 액이 더 많이 샜다. 주무르고 흔들어도 반쯤 서기만 할 뿐 단단해지지도 못했다. 석화의 어깨를 깨물고 빨아들이다가 다시 허리를 툭 쳐올렸다. 그때마다 아직도 긴장해 있는 몸이 반사적으로 수축했다.

“금방 할게, 금방.”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다며 따지고 싶었지만, 석화는 겨우 숨만 내쉬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여기 있으면서 체력이 많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진짜 곽수환의 말처럼 밝히는 건지 몰라도 계속 버티고만 싶었다. 무방비하게 몸이 뚫린 것만큼이나 곽수환에게 신뢰가 생기고 있었다. 예민한 내부에 그가 아닌 다른 게 들어와 있으면 두려움에 쾌감 따위도 못 느꼈을 거다. 그러나 곽수환이기 때문에 몸을 맡길 수가 있었다. 물론 지금 안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곽수환이었지만.

석화는 늘어진 몸을 간신히 움직여 엎드린 채로 웅크렸다. 머리만 동굴에 박은 어리석은 짐승 같았으나, 그의 힘에 허리가 잡혀 있는 것보다는 훨씬 편했다. 그 바람에 좆을 품고 있는 아래가 곽수환의 시선 밑으로 음란하게 드러났다. 엉덩이가 슬쩍 올라와 있었기에 삽입도 좀 더 깊어져버렸다. 뭉근하게 좆을 비비는 곽수환이 낮은 숨을 토해냈다.

섹스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을 텐데도 사람 눈 돌아가게 했다. 남의 자지는 구원해주면서 석 박사 성생활은 비루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취소해야겠네.

“하, 씨발. 내 자지 녹겠어.”

“아윽, 왜 욕 해……요.”

“그냥 감탄사야.”

모양 좋게 퍼진 엉덩이 양쪽을 움켜쥐고 곽수환이 점차 속도를 올리자, 석화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석화에게 집중하던 곽수환도 곧 그 시선을 눈치챘다. 석화가 힘들어 잔뜩 처진 눈을 하고도 저를 계속 보는 게 희한하기도 하고, 오히려 저를 부추기는 것도 같았다. 곽수환이 그 기세를 몰아 더 밑을 탐했다.

화악, 시큼달달한 향이 올라왔다. 둘의 정사에 금귤이 짓눌려 터져 있었다. 그는 군침이 도는 향에 성욕도 더 고조돼 석화의 몸을 덮치듯 끌어안았다. 석화의 신음 소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옅었다. 몸을 전부 먹어치울 듯이 더 맞대고 거센 삽입을 반복하자 어느 순간 석화의 몸이 완전히 늘어졌다.

젠장, 기절한 게 분명한데 아래는 여전히 저를 자극해대고 있었다. 곽수환은 도저히 멈추지 못하고 부드러운 목에 이를 박아 넣었다.

자제해야지, 속으로 몇 번이나 되새기면서 좆을 쓰윽 빼냈다. 제 좆에 맞춰 뻥 뚫린 구멍을 보자마자 다시금 박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아직도 기세가 흉흉한 좆을 손으로 누르면서 침대 상단으로 손을 뻗었다. 얼마나 침대가 흔들렸으면 물통도 엎어져 있었다. 반쯤 물이 쏟아진 생수통을 손에 쥐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남은 물을 제 좆에다가 뿌렸다. 미지근한 물이지만 좀 전보다는 한 꺼풀 가라앉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석화의 몸을 조심히 끌어안고 침대를 감싼 시트를 벗겨 냈다. 원래는 사용되지 않던 건물이라 새 시트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찝찝할지 몰라도 그는 석화의 몸을 이불로 돌돌 말았다.

저도 옷을 대충 걸쳐 입고는 힘없이 늘어진 석화를 안아 들었다. 방을 빠져나오다가 석화가 좋아하는 좆돌 하나를 손에 쥐었다. 걸어 나가는데 발기한 좆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아 옆 쉘터까지 가는 데도 한참이었다.

보초를 서 있던 군인 몇 놈이 석화가 죽었나 싶은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곽수환은 제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그동안 석화가 좀 깨어나 주었으면 좋으련만 침대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분 좋게 해주려고 했는데, 난감했다.

그래도 좋아했던 것 같기는 한데…….

곽수환은 데운 물로 적셔온 수건으로 석화의 몸을 꼼꼼하게 닦아나갔다. 말랑거리는 좆도 깨끗이 닦아주고 다시 다물린 구멍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석 박사, 나 인내심 끝내주지 않아?”

그런 것치고 석화의 몸은 깨물리고 빨려서 붉어진 자국들로 선연했다. 체력이 약한 것도 모자라 피부까지도 연했다. 곽수환은 마저 몸을 더 닦아주고는 마지막으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저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쥐었다.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기에 찬물 샤워를 했더니 아래가 다행히도 잠잠해졌다. 다만 샤워기를 쥔 손에는 힘이 바짝 들어갔다.

솔직히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큰일이네. 두 번 다시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타일러 봐야지. 체력은 바닥을 기면서 저렇게 밝히니 걱정이 앞서긴 했다. 그래도 석화가 또 만만한 성격은 아니니 아무하고나 섹스하지는 않겠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던 곽수환이 눈을 키웠다. 자는 줄 알았던 석화가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었다.

“깼어?”

곽수환의 물음에도 석화는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다가가니 눈을 뜨긴 했는데 초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잠버릇 같은 건가 싶어서 지켜보니 곧 쓰윽 눈을 감았다.

옷걸이에 걸어둔 제복에서 뭔가가 깜빡깜빡 점멸했다. 군용 무전기에 달린 램프였다. 무전기를 쥐고 운을 떼려는 참이었다.

[곽 소령, 지금 자리에 있나?]

차 중령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부하 직원을 대하는 듯한 말투에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1층으로 내려와 봐.]

“무슨 일입니까?”

[안녕하십니까? 곽수환 소령님.]

무전기를 타고 차 중령이 아닌 다른 놈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저는 석화 박사님의 동료인 최호언 박사라고 합니다.]

최호언?

[하하,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직접 21 바이올렛 구역까지 오게 됐습니다.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차 중령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곳에 최호언을 데려와? 그런데 차 중령이 아직 저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봐서는 컨트롤러인 사실은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내려갑니다.”

[석화 박사님도 함께 계실 테니 같이 내려오시죠.]

“나 혼자 갑니다.”

[과천 쉘터 사태에 대해 역학조사를 하던 중, 석화 박사님의 혈액이 묻은 키트를 발견했는데.]

곽수환이 무전을 끊어버렸다. 그는 군번줄을 셔츠 안으로 넣고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차 중령이 이 구역에 최호언을 데려온 건 적어도 1급 위험 사안이라는 거다. 제가 석화를 데리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자들은 최상부뿐이기도 했고.

곽수환은 홀스터에 권총을 꽂고는 석화가 자고 있을 침대를 바라봤다. 이불에 감싸인 석화가 앉아서 그를 보고 있었다.

“……최호언 박사가 왔대요?”

아까 눈을 떴던 게 정신을 차리려는 전조였나 보다. 그러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다녀올게.”

“저도 가요.”

석화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휘청했다. 부축해주기도 전에 저 스스로 옷장을 열어 곽수환의 평상복 몇 개를 꺼냈다. 곽수환은 석화의 두 어깨를 쥐고는 다시 침대에 앉혔다.

“그냥 있어.”

석화의 얼굴만 봐도 저들이 정사를 치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담 키트라니, 의무실에 남아 있던 키트는 전부 수거해서 처리한 지 오래였다. 최호언이 그저 떠보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날의 영상을 봤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만, 꿍꿍이가 있다는 건 확실했다.

석화는 곽수환의 말을 무시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석 박사, 지금 꼴이 어떤지 알아?”

그가 제복 코트의 단추를 채우며 입을 열었다. 방에는 어떤 거울도 없기에 석화는 비척대면서 욕실까지 걸었다. 셔츠와 바지 사이즈가 맞지 않아 허리춤을 한데 움켜쥐었다.

눈가와 뺨은 그가 빨아놓은 자국이 선명했고, 목덜미와 쇄골도 잇자국과 붉은 흔적으로 수없이 뒤덮여 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걸을 때마다 아직도 이물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욕실 문을 잡고 선 곽수환이 턱짓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혼자 가서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석화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방을 나섰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뒤늦게 문으로 나간 석화가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허사였다. 어쩐지 취조실에 갇혔던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저를 보호하려는 행동인 건 알고 있지만, 곽수환은 제 신변을 완벽히 통제하려고 할 때가 있었다. 제 일인데도 저를 배제하는 게 석화는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도 어차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침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마치 하반신에만 중력이 배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몸에 찜찜한 기운이 없는 걸 보고 그가 닦아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석화는 손을 엉덩이 사이로 가져다댔다. 열이 엄청났다. 안을 헤집던 성기와 아래가 팽팽하게 벌어지던 감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밑이 움직였다.

생전 처음 경험한 신경의 자극은 중독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밀착할 때마다 그의 탄탄한 살가죽이 문질러지는 촉감도 좋았다. 가슴이 깨물리고 빨리는 것도, 그의 성기를 물었을 때는 포만감마저 들었다. 이래서 다들 섹스를 하는 건가 싶었다.

옆으로 누워있다가 잠이 좀체 오지 않아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침대와 책상, 옷걸이만 덩그러니 있었고 방은 생각보다 깔끔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여의도에서 그가 사용하던 방도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석화는 책상에 놓인 큐브를 손에 쥐었다.

도색이 벗겨진 낡은 큐브는 회전면이 마모되어 헐거움마저 느껴졌다. 이건 평소 그가 가지고 노는 큐브와는 다른 듯도 했다. 버리지 않고 놔둔 것을 보면 소중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석화는 그가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돌 옆에 큐브를 내려두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곽수환이 했던 것처럼 책상 서랍을 열어 봤다. 유치한 복수 심리는 아니었으니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런데 서랍에는 그 흔한 펜이나 종이도 없었다. 단 한 권의 책만 놓여 있었는데, 레인보우 시티의 도서관 바코드 표식이 없었다.

석화는 책을 조심히 들어 앞장을 펼쳤다.

[곽수환]

마치 책에 이름표를 붙여두듯 소유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필체는 아이의 것처럼 어설펐다. 뒷장을 넘기니 꼬릿말에도 곽수환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고, 더 넘어갈수록 글씨체가 점차 자리 잡히는 게 보였다. 한 번 더 페이지를 넘겼을 때, 책 사이에 껴 있는 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검붉은 뭔가가 묻어 있는 변색된 종이였다.

[살아]

석화는 책을 펼친 채로 한동안 굳어 있었다.

누군가의 절규 같기도 했고,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글자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만큼 이 두 글자에 담긴 염원이 느껴졌다. 저가 봐서는 안 되는 곽수환의 깊은 안쪽을 엿본 것만 같아 석화는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었다.

살아.

그 글자는 뇌리에서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

군용 지프 한 대는 시동이 걸린 채였다. 보닛 위로 하얀 김이 솟아올라 봄은 여전히 멀었음을 알렸다. 곽수환은 2층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나서야 로비로 내려왔다.

차 중령이 눈을 마주치자마자 송구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최호언은 깔끔한 검은 수트 차림이었는데, 만면에 미소를 띄고 쉘터 로비를 둘러보고 있었다.

원래 이곳은 생명공학을 연구하던 연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물론 군 시설로 탈바꿈해 그때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로비 한쪽에 방치되어 있는 연구원들의 사진 정도였다. 최호언은 깨끗한 구두로 바닥을 짓누르며 걸어가 액자를 손에 쥐었다. 깨진 액자 안에는 다양한 색의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최호언 박사님?”

계단에서 내려온 곽수환이 목소리를 냈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반갑습니다, 곽수환 소령님.”

최호언은 액자를 원래 자리에 내려두고는 차 중령의 옆으로 돌아왔다. 악수를 청했지만 곽수환은 목인사로 대신했다. 민망할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린 최호언이 진하게 웃었다.

“그런데 석화 박사님은?”

최호언이 곽수환이 내려온 계단을 흘끔 올려다봤다.

“몸이 안 좋아서 저만 왔습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놈은 부산에서 올라온 명예가문 출신이며 돌연변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다.

바이러스보다 동식물 개량에 더 일가견이 있었고, 근력은 A급 군인을 웃돌았다. 이채윤이 인정할 정도니 크게 틀린 추측도 아닐 것이다. 곽수환은 최호언을 마주보면서 마찬가지로 미소만 걸쳤다.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최 박사님과 함께 내 방으로 가지.”

둘 사이에 껴서 전전긍긍하던 차 중령이 간신히 운을 떼었다. 겉으로는 차 중령의 직위가 더 높기에 곽수환은 순순히 따르는 척해 보였고, 최호언도 배려가 감사하다면서 인사를 건넸다.

딱히 차 중령의 방으로 부르기는 어려우나 그들이 작전 회의 때 사용하는 1층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벽에 걸린 레인보우 시티의 지도는 각 구역마다 다양한 색의 압정이 꽂혀 있었다. 현재로서는 녹색 압정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붉은색이었다. 최호언은 흥미롭게 그 지도를 보더니 뒷짐을 졌다.

“곽수환 소령님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시죠, 박사님. 이야기가 다 끝나면 다시 여의도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차 중령이 문을 닫고 나간 후에야 곽수환은 책상에 걸터앉았다.

“바이올렛 구역이 쉽사리 열리는 곳도 아니고, 여기까지 박사님을 차 중령님이 데려왔다는 건 그만큼 막중한 일이 있었다는 건데.”

지도를 보던 최호언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수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투명한 팩에 담긴 키트를 하나 꺼냈다.

“이 키트에 묻어있는 혈액은 석화 박사님의 것이죠. 자, 아시다시피 키트의 결과는 양성 반응을 가리키고 있고요.”

곽수환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대응했다.

“그쪽 말대로라면 석화 박사가 아담이 됐다는 겁니까?”

“그거야 제 눈으로 봐야겠죠. 소문을 듣자하니 소령님께서는 석화 박사님과 은밀한 관계라고 하던데, 아담이 된 박사님을 숨기고 계실 수도요. 그런데 아담을 숨기는 건 중죄인걸 알고 계시죠?”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저 새끼는 분명 석화가 멀쩡하다는 것을 알고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석화 박사님의 연구원 직위가 박탈되었다가 다시 또 복귀됐다는 거죠. 그 사이에 전 이 키트를 손에 넣었고요.”

“동료라고 해봐야 며칠 같이 있었을 텐데, 석 박사한테 이만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뭡니까?”

“그거야 석화 박사님이 면역체일 수도 있으니까요.”

최호언이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한다면서 쉽게 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 석화 박사님께서 많은 일을 해주셔야 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곽 소령님?”

곽수환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돌연변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았는데도 범인 이상의 근력을 가졌다면, 상부에서 심어놓은 스파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컨트롤러를 견제할 다른 직위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곽수환의 감이 말했다. 저 새끼는 레인보우 시티의 세뇌를 당한 놈은 아닌 것 같다고.

여의도로 온 타이밍도 그렇고, 하고 많은 연구실 중에 김 박사와 석화가 있는 곳으로 전근을 왔다. 과천에 있을 키트까지 손에 넣었으니 놈은 그간 석화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소리 밖에 안 됐다. 게다가 에덴동산에 연루된 같은 연구실 동료 김 박사가 뒈졌다. 그 점에 대해서는 왜 파고들지 않는 걸까.

“너.”

무례한 언사에 최호언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서펀트지?”

“…….”

말려 올라간 뺨과 눈동자에는 어떠한 동요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곽수환도 팔짱을 낀 채로 다리만 꼬고 있었다. 얼마간 지속되는 침묵을 깬 사람은 코웃음을 친 곽수환이었다.

“현미경만 들여다봐서 그런지 농담을 즐길 줄 모르시는 분이네. 어쨌든 그 키트의 혈액이 석화 박사의 것이 맞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담 바이러스 키트의 정확도는 약 98퍼센트고, 최 박사님이 들고 있는 키트는 그 2퍼센트의 오류를 보여주는 거니까.”

최호언이 비닐에 담긴 키트를 앞뒤로 돌려봤다.

“돌연변이 데이터베이스에 곽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없더군요.”

“아, 그건 내가 밖에서 와서. 그리고 내가 돌연변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고.”

“등록은 되어 있지 않은데 주변 군인들은 다들 곽 소령님을 돌연변이로 확신하죠.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레드 구역까지 소탕하시는 분인데요.”

“그런데 그쪽도 그렇지 않나? 평범한 연구원 같지는 않은데, 마찬가지로 데이터베이스에 없더군요. 설마 당신도 밖에서 온 건 아니고?”

곽수환은 가벼운 말투로 최호언을 떠봤다.

차 중령이 놈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은 놈이 먼저 접근을 했다는 뜻이었다. 명예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걸 아는 듯한데, 차 중령과 자신의 관계성까지 캐치했다는 건 의아했다.

“내가 이 키트를 상부에 보고한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석화 박사님이 소환될 겁니다.”

“그러지 않아도 석 박사님은 곧 우도로 가게 될 겁니다.”

내내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던 최호언의 눈에 아주 짧게 경련이 일었다. 이로써 놈이 석화에게 지나친 관심을 가진 건 확실해졌다.

곽수환은 팔짱을 풀고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최호언에게 다가가 키트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우도로 보내겠다고요?”

최호언이 그럴 리 없지 않느냐며 미심쩍음을 담았다.

“곽 소령님. 아시다시피 저는 밖에서 오셨다는 곽 소령님과 다르게 아주 부유한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세상은 이 모양이지만 웬만한 것은 다 가져봤고요. 그 귀하다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키워봤죠. 다들 안전하게 살다가 늙어서 죽었고요. 그런데 단 한 번 실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자서전에나 쓰시고.”

힘쓰기 전에 키트나 내놓으라고 돌려 말했다.

“아담이 제가 살던 그린 구역에 들어와 삽시간에 감염이 시작됐죠. 그때는 새도 감염이 되는 줄 알고 아직 새끼에 불과하던 카나리아를 안고 방공호로 도망갔어요. 무사히 방공호로 들어가서 카나리아를 봤는데, 걱정이 되어 녀석을 너무 꽉 쥐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제 손에서 죽었더군요.”

“난 무식해서 그렇게 비유를 해도 이해 못 합니다.”

“석화 박사를 내게 데려와요.”

“싫다면.”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에게는 석화 박사가 꼭 필요합니다.”

“아니, 나만큼 석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어.”

안전을 주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내가 만들어줄 거야. 무사히 돌아갈 때마다 어서 오라면서 반갑게 맞아주는 그런 안전한 가정. 돌도 가져다주고 말이야. 레인보우 시티가 망가질 동안 석화는 아늑한 곳에서 지내게 될 거다.

“소령님 한 명의 욕심 때문에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는데도 못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석 박사는 면역체 아니라니까.”

“치료제 그 자체라면요?”

곽수환이 와작 인상을 구겼다.

손을 뻗어 놈의 손목을 움켜쥐고 키트를 빼앗으려 했다. 최호언은 마찬가지로 엄청난 악력으로 키트를 쥐었다. 팔꿈치를 들어 최호언의 가슴팍을 찍어 내리고 주먹으로 턱을 후려갈겼다. 그사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놈은 주먹을 빗겨 맞았다.

“큭, 곽 소령님.”

“그러니까 피차 힘쓰지 말자고.”

말로는 어렵겠다 싶은 최호언 역시 키트를 쥔 채 주먹을 날렸고, 곽수환은 상체를 낮췄다가 명치에 그대로 꽂았다. 컥, 짧게 기침을 토해낸 최호언이 넥타이를 끌어내 손에 휘감았다. 재빠르게 덤벼들어 곽수환의 목을 감쌌지만, 그는 그 틈에 손을 넣어 넥타이를 끄집어 뜯어냈다.

부유하게 자랐다고? 적어도 싸움 스타일은 엘리트스럽지 못한데.

다시금 육탄전이 벌어지며 서로의 급소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지만, 서로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해 체력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나는 곽 소령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석 박사를 데려간다면 싸워야지. 인체실험대에 올릴 게 뻔한데.”

후, 곽수환이 숨을 털어내고 주먹을 뻗었다. 콰직, 놈이 피한 바람에 대신 부딪힌 캐비닛이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멈추십시오!”

최호언은 철컥, 곽수환을 향해 총을 장전했다.

“치사하긴.”

곽수환은 움켜쥔 주먹을 한번 털어냈다. 그리고는 단박에 놈에게 접근해 탄창의 밑 부분을 쳐서 장전된 총알을 분리시켰다. 박사들에게 지급되는 자동권총은 내구성이 그리 좋지 않은데다 탄창이 헐거운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걸 모르는 것을 보니 자동권총을 제대로 사용해보지 않은 놈 같았다.

곽수환이 홀스터에서 제 권총을 꺼내 최호언에게 겨눴다.

“곽수환 소령님. 같은 편인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최호언이 두 손을 들어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번 일과 관련해 역학조사를 하던 중, 우연치 않게 차 중령님과 과천 쉘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곽수환 소령의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최호언은 천천히 손을 내리더니 키트를 바닥에다가 내려두었다.

“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이상한 점이 보이더군요. 아무 접점이 없을 두 분인데 차 중령님이 과천까지 내려가서 소령님과 만났다는 사실이요. 게다가 석화 박사님을 마지막으로 데려가신 분이 곽수환 소령님이었죠. 혹시나 싶어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먼저 차 중령님께 말을 꺼낸 것뿐입니다. 차 중령님께서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하셨는지 저를 여기로 데려오셨고요.”

최호언은 막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 키트는?”

“마더에 저장된 과천 쉘터 의무실 영상을 봤습니다.”

곽수환은 권총의 총구를 돌려 홀스터에 꽂았다.

“그 키트, 석 박사 거 아니지?”

“…….”

최호언은 안도보다는 찜찜한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돌아가.”

아무리 저라도 명예가문 출신인 놈을 죽였다가는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터였다. 여전히 꺼림칙함은 남아 있었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석화의 존재를 레인보우 시티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어째서 석화 박사님이 우도로 가십니까?”

“글쎄. 그런데 최 박사님, 아무리 생각해도 연구원보다는 현장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깨끗한 수트나 안경 그리고 마모 없는 구두는 전부 최호언을 감싼 가면 같았다. 아무리 빗겨 맞았다고 할지라도 그 정도 타격이면 평형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게 보통인데 말이다.

“제 몸 하나는 지켜야 할 세상이니 여러모로 호신술을 배운 것뿐입니다.”

“호신술을 길거리 깡패한테 배웠나 봐.”

이채윤의 직감적인 본능처럼 곽수환 역시 놈의 정체에 의구심이 솟아났지만 시간 낭비였다.

“최호언 박사님, 이만 차 중령님께 돌아간다고 전달하겠습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건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인데.”

“석화 박사님은 약하시죠. 그게 그분의 하자이고요.”

하자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곽수환은 제가 더 불쾌해졌다.

“나가.”

“허나, 열기로 잠재우니 육신의 속박에서 한 번 더 자유로워진다고 말씀하셨죠.”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나가라고 턱짓을 했다.

최호언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이어 가슴께에 올린 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내보였다. 마치 신의 계시를 받는 신자처럼 두 눈까지 곱게 감고 있었다. 놈의 뒤로 천사들이 내려온다면 그럴싸한 광경이 그려질 법했지만, 이 동네는 어차피 괴물들이 배경이 되는 세상이 아니던가.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은 생명의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세웠도다.”

천천히 미소를 짓는 최호언이 눈을 떴다. 무슨 개소리를 정성들여 하나 싶었지만, 비웃어주기도 전에 핏기가 가셨다. 이 새끼는 지금까지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해가면서 시간을 벌고 있던 거였다.

“우리가 바로 생명의 나무이니, 너희를 단죄하노라.”

쾅-!

소닉붐에 버금가는 굉음과 함께 온 유리창이 박살났다. 폭탄이 터진 밖에서부터 거센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크륵, 크어억! 수많은 아담의 괴성까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제기랄! 석 박사! 곽수환은 회의실 문을 다급하게 열어 젖혔다.

***

석화 박사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석화를 부르고 있었다. 석화는 흘러내리는 바지를 벗어두고는 곽수환의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끈으로 묶으니 조금 품이 넉넉할 뿐 나름 나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차 중령입니다. 방문을 열겠습니다. 한참 뒤로 물러나 계세요.”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석화는 그의 말대로 침대 구석으로 걸어갔다. 화끈거리는 엉덩이 안쪽의 이물감은 여전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멀리 계시죠?

차 중령의 목소리가 멀었다. 석화는 조금 목소리를 키워 예, 크게 대답했다. 그러자 탕탕, 몇 발의 총성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곽수환이 누구도 문을 열지 못하게 문고리를 고장 냈던 터라 차 중령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석화는 모습을 드러낸 차 중령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어쩐 일이세요?”

이런 결정을 내린 차 중령은 곽수환에게 적어도 죽지 않을 만큼, 아니면 거의 죽을 만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사님. 현재 곽수환 소령님의 상황이 많이 곤란해지셨습니다.”

“……저 때문이죠.”

차 중령이 놀란 눈을 했다. 다짜고짜 석화가 다 알았다는 듯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저를 보호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럼 제가 우도로 가겠습니다.”

“우도요?”

“네, 상부가 저를 우도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차 중령은 이게 아닌데 싶은 얼굴을 했다.

최호언은 석화가 아담에 감염되고도 살아남은 면역체이기 때문에 여의도로 데려가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과천 쉘터에서 석화를 데리고 나가는 곽수환의 영상까지도 보여줬다.

발뺌을 하려던 차 중령이었지만, 석화를 보호하는 사람이 곽수환이라는 건 이미 최상부가 알고 있었다. 단지 석화가 면역체인 것을 몰랐을 뿐이지.

차 중령은 최호언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면역체에 대한 보고가 상부로 올라간다면, 헌병대의 모든 전력이 곽수환을 제압하러 왔을 것이다.

“석화 박사님께서 가셔야 할 곳이 우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호언 박사님께서 직접 데리러 오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성적이고 신사적이신 분 같으니 석화 박사님의 신변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사실 차 중령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석화가 정말 면역체라면, 어떤 실험을 받게 될지 너무도 자명했으니까. 그러나 차 중령은 컨트롤러와 그의 부대를 지켜야 했다.

“네.”

석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 중령이 기다리고 선 것을 보니 지금 당장 나가야 할 상황인 듯싶었다. 석화는 곽수환이 선물해준 돌을 가져가고 싶었다. 그러나 서둘러 나오라는 종용에 미련만 잔뜩 남겼다.

차 중령의 뒤를 천천히 쫓아가면서 둔통에 몇 번 입술을 꾹 물었다. 다행히 느린 걸음을 탓하는 일은 없었다. 로비로 곧장 나가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차 중령이 석화의 팔뚝을 쥐었다.

큭, 크륵, 캬악! 익숙하지만 듣기 싫은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놀라 앞을 본 석화도 눈을 크게 떴다. 로비에 있던 세 명의 군인이 마치 아담처럼 고개를 휙휙 돌리며 먹잇감을 찾는 중이었다.

어째서……?

석화는 혹시나 놈들이 들을까 봐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차 중령조차도 멀쩡하던 부하가 왜 아담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담을 앞두고 생각은 필요 없었다.

차 중령은 곧바로 권총을 장전하고 석화를 확 들쳐 업었다. 석화는 흡, 하는 소리를 간신히 막아냈다. 그는 로비로 나가는 대신 왼쪽의 복도로 방향을 틀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군홧발 소리를 들은 아담이 크카각거리며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박사님!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석화는 그 말만 반복했다. 차 중령이 죄송할 것 없다면서 곽수환이 있을 회의실로 막힘없이 달려 나갔다. 아담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굳게 닫힌 문을 열려고 하는 그때였다.

쾅-!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요동쳤다. 뒤에서 따라오던 아담은 그 반동에도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차 중령이 문고리에 손을 댐과 동시였다.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대장!”

차 중령은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곽수환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마찬가지로 놀란 그였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석 박사부터!”

곽수환은 황급히 석화를 대신 받아들려 손을 뻗었다. 그의 뒤에서 시계를 찬 손이 더 먼저 뻗어 나와 석화를 잡아 끌어내렸다. 석화의 몸이 방으로 끌려 들어가 나뒹굴었고,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아담에게 차 중령이 총을 쏘았다.

“문 닫습니다! 엄호합니다!”

차 중령이 소리치며 문을 굳게 닫았다.

“그 손 놔, 씹새끼야.”

그사이 석화를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킨 최호언의 팔을 곽수환이 잡아 꺾었다. 최호언은 팔을 빼내며 재킷까지 벗었고, 다시금 목표물인 석화를 향했다.

곽수환이 옆구리에 주먹을 꽂고 총을 꺼내자, 최호언이 재빨리 손목을 붙들었다. 손등에 힘줄이 불거지고 서로에게 권총을 겨누려는 힘이 부딪히니 오히려 총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힘과 힘이 격돌하자 그 어느 쪽도 가지지 못하고, 그 반동에 권총은 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총을 잡으려고 달려 나가는 대신 둘은 서로에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석화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보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최호언이 왜 저러는 건지, 폭발은 왜 일어난 것이고 아담은 어디서 나타난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기어가서라도 저 총을 손에 넣어야 했다.

곽수환은 석화를 붙잡으려는 최호언의 어깨를 움켜쥐어 뒤로 잡아당겼다. 부욱, 하얀 셔츠가 찢겨나갔다. 최호언이 이제 그 천조각도 거추장스럽다는 듯 옷을 뒤집어 벗어 던졌다.

놈의 어깨 위로 화상 자국 같은 흉터가 드러났다. 총알이 스쳐지나간 상처였다. 이채윤에게 부탁할 만큼 찜찜했던 감각이 이거였다. 곽수환도 무거운 제복 재킷을 벗고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농담이 안 통한 이유가 있었네.”

손목시계를 흔들어 고쳐 맨 최호언이 주먹을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서펀트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는데.”

총을 주운 석화는 제 귀를 의심하며 뒤를 돌아봤다.

“가면 없이는 처음 인사드리네요, 석화 박사님.”

석화를 내려다본 서펀트가 웃었다.

“위험하니 총은 이리로 주시죠.”

“수작은.”

곽수환이 최호언을 밀어붙였다. 깍지를 낀 손으로 곽수환의 등을 내리찍는 소리가 거셌다. 척추가 부러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였기에 석화는 두 남자를 향해 총을 조준했다. 자칫하다가는 곽수환이 맞을까 싶어 쉽사리 발사하지도 못했다.

카악! 트레이닝복이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군복을 입은 아담이 깨진 창 너머에서 옷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입이 귀까지 찢어지고 유리에 찔린 팔뚝 밑으로 피가 퍼지는데, 안으로 들어오려는 힘은 막힘이 없었다. 석 박사! 곽수환의 외침이 들렸다. 석화는 망설이지 않고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탕! 발사된 총탄이 군인의 눈을 관통했다.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도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탄이 나가지 않고 덜컥거리기만 했다.

“탄피 빼고, 재장전해!”

탄피, 탄피. 석화는 그 말을 속으로 반복했다. 총이 발사되면 슬라이드가 뒤로 빠졌다가 돌아와야 하는데, 지금은 배출구에 탄피가 걸려 있었다.

석화는 깨진 창을 향해 달려드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재빨리 배출구에 걸린 탄피를 빼냈다. 철컥, 슬라이드를 재장전하고 창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삽시간에 손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거친 싸움의 흔적이 역력한 두 남자가 보였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최호언이 퉤, 하고 핏물 섞인 침을 뱉었다.

석화는 최호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최 박사가 서펀트라고? 그날 자신을 납치해서 지하에 가뒀던 자이고, 군인들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자행한 에덴동산의 수뇌부인가? 그럼에도 석화는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아담을 쏜 것도 처음인데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차라리 곽수환에게 총을 넘기고자 타이밍을 지켜봤지만, 둘의 치고받는 싸움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캬아아! 창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아담을 향해 탕, 한 번 더 발사했다. 방아쇠를 계속 누르고 있으면 연사가 가능한 권총이기에 의식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뺐다.

안에서 아담과 대치하는 컨트롤러 부대도 고전 중인지 고함과 비명이 문 밖에서 흘러들어왔다. 대체 아담을 몇 명이나 푼 건가. 석화는 남은 탄환 수를 확인하고는 창을 바라봤다. 하나, 둘, 셋까지 세고는 숫자 세기를 포기했다.

조준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권총으로, 현장 경험이 없는 제가 다 맞히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곽수환은 저를 신경 쓰느라 몇 번이나 최호언에게 빈틈을 내주어야 했다. 석화는 창문의 반대편 벽에 붙어서 목소리를 키웠다.

“멈추지 않으면 쏩니다!”

곽수환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내리꽂던 최호언이 멈칫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이 거리에서 제대로 조준하지 못할 거라고 직감했을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곽수환이 최호언을 군홧발로 걷어찼다. 곧장 제게로 달려오는 곽수환을 향해 권총을 던지려 했지만 그가 소리쳤다.

“들고 있어!”

삽시간에 다가온 곽수환이 권총을 채가 최호언에게 겨눴다.

최호언은 창을 타고 기어 올라온 아담의 뒷목을 잡아 이쪽으로 내던졌다. 곽수환은 아가리를 벌린 놈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곧이어 최호언에게 발사했지만, 깨진 창문을 넘어간 뒤였다. 놈을 뒤따라간 아담보다 이 안에 남아있는 수가 더 많았다. 위험하다. 이 안에서 석화를 엄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곽수환은 다시 권총을 석화에게 넘겼다.

“꽉 쥐고 있어. 덤벼드는 새끼 있으면 쏘고.”

“네.”

석화는 사색이 되었지만 대답은 막힘없이 했다. 곽수환이 걱정 말라는 듯 한 번 웃고는 석화를 안아 들어올렸다. 멈추지 않고 내달려 문을 발로 박살냈다. 복도는 아비규환이었다. 좁은 공간에 군복을 입은 아담과 또 멀쩡한 군인들이 뒤엉켜있었고, 총을 쉽사리 사용할 수 없어진 그들은 칼이나 주먹으로 아담을 상대했다.

“밖으로 유인해!”

곽수환이 달려가면서 소리치자 차 중령이 엄호하면서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대장! 밖은 수가 더 많습니다!”

“몇이나?”

“적어도 서른 이상입니다.”

“방공호는?”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건 옆 건물뿐일 겁니다.”

소대도 위급상황이지만 차 중령에게 석화를 맡길 수는 없었다. 곽수환은 로비까지 달려 나가서야 저를 부르는 차 중령을 돌아봤다. 석화를 업고 가기에는 뒤에서 어떤 공격이 올지 모르니 부담이 컸다. 짐짝처럼 들쳐 메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곽수환은 석화를 바닥에 내려두고 가죽장갑을 꺼내 양손에 알맞게 채웠다.

“탄약고를 폭파시키면서 트럭에 싣고 온 아담을 푼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최호언 박사를 데려올 때 적들에게 뒤를 밟힌 것 같고요. 일단 그쪽으로 무장한 녀석들을 보내놨습니다.”

“아담부터 전부 정리하고, 최호언 박사는 생포가 불가능하다면 사살해.”

“예?”

“최호언이 서펀트야.”

놀란 것도 잠시, 차 중령은 입구에서 달려드는 아담을 향해 연달아 총을 쐈다.

“알겠습니다. 대장 엄호는,”

“됐으니까 소대 지휘해.”

크아악! 바닥을 기어 곽수환을 물려는 놈을 향해 석화가 총을 발사했다. 뒤통수에 총알이 관통했고, 얼굴 밑으로 핏물이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하, 살다 보니 석 박사한테 목숨 빚질 일이 생기네.”

곽수환이 엉망이 된 얼굴을 하고 웃었다. 석화는 그의 입가에 맺힌 피를 닦아주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이대로 방공호까지 뛸 건데, 들쳐 업고 달릴 거야. 알았지?”

가뜩이나 정사로 인해 몸이 안 좋을 텐데, 석화가 직접 달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갓 변이한 아담보다 더 느린 달리기 솜씨를 가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꽉 잡아. 곽수환이 석화를 들어올려 어깨에 단단히 멨다. 잡을 데가 없어요, 곽 소령님. 하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달리기 시작했다.

석화는 몸이 반쯤 접힌 채로 권총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꽉 쥐었다. 곽수환이나 A급 군인들이 마음먹고 전력질주를 한다면 따라잡을 수 있는 아담은 없었다. 그는 앞을 막는 아담의 얼굴을 뭉개고 머리채를 잡아 벽에다 찧었다. 바로 옆 건물까지 가는 동안 뒤따라 붙은 아담의 숫자가 엄청났다.

석화는 고개를 휙 들어서 한 놈이라도 총으로 쏘려고 했지만, 너무 심하게 흔들려 조준이 불가능했다. 헛구역질이 솟을 것 같아 꾹 참고 이도 악물었다. 연구동 건물로 들어간 곽수환이 계단을 단번에 뛰어내린 순간, 반동이 엄청났다. 입을 벌리고 있었으면 혀를 깨물었을지도 몰랐다.

아담과 거리는 멀어졌지만 놈들은 여전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곽수환은 지하의 방공호를 발견하자마자 원형의 잠금장치를 한 손으로 휙휙 돌렸다. 오랫동안 잠겨있던 방공호의 문은 녹이 슬었는지 끽끽 하는 음산한 소리를 자아냈다.

육중한 문이 열리자마자 비상전력이 들어와 내부가 팟 하고 밝아졌다. 석화를 내려둔 곽수환은 총을 건네받아 내부에 두 발을 발사했다. 아까운 총알을 버리는 일이었지만, 안쪽이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나 살아있는 아담이 있다면 이 소리에 튀어나올 테니까. 그러나 방공호 안에 인기척은 둘밖에 없었다.

“석 박사, 앞으로 세 발 남았을 거야. 가지고 있어. 한 시간 안으로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석화는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스스로를 질타했다. 대체 제가 도움 되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서펀트가 찾아온 것도 아마 자신 때문일 거다. 저만 없었다면 곽수환이 위험해질 일도 없었을 거다.

곽수환이 석화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꽃밭이나 생각해. 석 박사 없을 때도 이거보다 더 위험한 일들 많았어.”

마치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보다 우리 석화 형, 내 운동복 잘 어울리네.”

씩 웃은 그가 석화를 안으로 밀고는 방공호 밖에서 문을 돌려 잠갔다. 석화는 다시 문까지 다가가 차가운 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방음이 되는 공간인지 지옥 같은 밖의 소리가 들어오지는 못했다. 언제나처럼 곽수환은 무사할 거다. 오히려 나와 같이 있으면 내가 짐이니까.

고요한 방공호 안에 남은 석화는 총만 꽉 쥐고 있었다. 몸을 돌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비상식량과 함께 쌓여있는 생수가 보였다. 먼지가 쌓인 침대는 세 개나 있었고 화장실은 사용하지 않아 물때가 곰팡이로 변해있었다. 최호언이 서펀트라니……. 석화는 생각을 정리하면서 방공호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가면을 쓰고 저를 만났을 때는 목소리를 변조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최호언을 처음 만났을 때 분명 기시감을 느꼈었다.

에덴동산의 수뇌부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저를 만나러 온 것이며, 기생충을 넣은 백신을 배포한 걸까?

석화는 무심결에 침대 사이 스탠드에 놓인 액자를 들었다. 연구원들로 보이는 자들의 사진이었는데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총을 꽉 쥐고 있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액자 안에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인 탓이었다.

원호 박사…….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얼굴이 젊었지만 딱딱한 표정 덕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

연구원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였다. 착각할 리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저 고운 얼굴을 두 손으로 만져왔었다. 늘 자식을 상냥하게 품에 안아주던 제 어머니였다. 그런데 어째서 엄마가 연구원들과 함께 있지? 어머니의 옆은 원호 박사, 또 그 옆은 다정해 보이는 남녀 둘이 같이 서 있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손이 떨려 액자도 잘게 경련했다. 말도 안 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키가 커다란 남자는 곽수환과 생김새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석화는 고개를 한 번 털어내고는 액자를 뒤로 돌려 덮개를 뜯었다. 사진 뒤편을 감싼 하얀 종이도 떼어내 낡은 사진을 직접 손에 쥐었다.

[네 개의 강이 함께하다]

사진 뒷면에 정갈한 글씨가 보였다. 석화는 사진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트레이닝 상의의 지퍼를 열어 사진을 넣고 다시 잠갔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뒤늦게 긴장감이 몰려오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 사진 때문인 걸까……. 자신을 유프라테스라 칭하던 어머니의 말이 재차 떠올랐다. 그렇다면 서펀트는 대체 정체가 뭐지?

끼릭, 끼릭, 쿵! 석화는 저쪽 모서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재빨리 권총을 고쳐 쥐었다. 앞으로 세 발이 남았다고 했다. 끼익, 끽. 조금 전 철문을 돌리던 때처럼 녹이 슨 쇠가 마찰하고 있었다. 석화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 몸을 바로 세웠다.

벽면 한쪽이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벽으로 가장해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지만 숨겨진 문이자, 패닉룸이었다.

석화는 슬라이드가 잘 당겨져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이런. 쏘지 말아요. 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칫 다정하게 들릴 법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최호언이었다. 상의가 찢겨나갔던 그는 이제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다가오면, 쏩니다.”

석화는 총구를 그쪽으로 겨누고 최대한 냉정하게 말을 내뱉었다.

“안타깝게도 우도로 가셔야 한다고요. 가면 박사님은 죽어요. 그러니 저와 함께 가시죠. 오해할만한 상황이 벌어졌지만, 저는 박사님을 구하러 온 겁니다.”

“싫습니다.”

최호언이 단칼에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면서 곤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지 않으면 곽수환 소령이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래도……. 싫습니다.”

오히려 서펀트를 얌전히 따라가면 곽수환이 더 위험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발 더 다가오려는 최호언을 향해 총을 다시 들이밀었다. 진짜 쏠 거다. 정말로 쏠 것이다. 석화는 침대 라인을 기점으로 삼고, 넘어오면 정말 발사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석화는 제주도 학습센터에서 배웠던 대로 한 손으로 반대 손목을 받치고 조준 자세를 취했다.

“더 다가오면,”

탕! 들려온 총성에 석화는 몸을 울렸다.

제가 발사한 소리는 아니었다. 뱀처럼 삽시간에 달려든 최호언이 석화의 몸을 앞으로 돌려 안았다. 윽! 손목이 거칠게 꺾여 총을 놓쳤고 그걸 최호언이 받아 들었다. 축축한 뭔가가 느껴진다 싶었더니 최호언의 팔뚝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짜증 나!”

쾌활한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최호언이 나타났던 문에서 이어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채윤이었다.

“이 소령님……?”

“박사님, 미안. 저 새끼 날려주려고 했는데, 먼저 눈치채는 바람에.”

석화를 뒤에서 끌어안은 최호언이 버둥거리지 못하게끔 몸을 더 옥죄었다.

“놀랍군요. 제 뒤를 밟은 겁니까?”

“어, 그니까 입 닥치고 박사님이나 이리로 보내.”

“힘만 센 줄 알았더니 미행도 제법이군요.”

최호언이 대단하다는 듯 이채윤을 향해 칭찬을 했다.

“애석하게도 저는 이채윤 소령님께 관심이 없으니, 이제 그만 따라다니시죠.”

“지랄. 나도 그쪽한테 관심 없거든?”

“하도 제 맨살을 보고 싶어 하셔서 제가 착각했지 뭡니까.”

곽수환에게 부탁을 받고 어떻게든 어깨를 까보려 했던 이채윤이었지만, 방어가 생각보다 막강해서 미수에 그치기 일쑤였다. 박사가 저보다도 재빠르니 아무래도 수상쩍어서 그간 뒤를 밟았고, 바이올렛 구역까지 따라오게 된 터였다.

그렇게 밖에서 동태를 살피는데 트럭 몇 대가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약고가 폭발했다. 트럭의 짐칸이 열리고 군인들이 빠져나오자 트럭은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뭔가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그때만 해도 이채윤은 놈들이 멀쩡한 군인인 줄로만 알았다. 미심쩍은 놈을 미행한 것뿐이라 대체 이 상황들이 뭔가 싶었다.

“아, 제길. 이게 무슨 상황이야. 박사님,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이채윤이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이 소령님은…….”

그녀의 제복에 피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다친 건 아닌 듯했다. 폭발이후로 안으로 진입하던 이채윤이 아담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바이올렛 쉘터의 군인들은 지금보다 더 버거운 싸움을 벌였을 거다.

석화는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오른쪽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최호언이 뒤에서 속삭였다.

‘그녀를 살리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요. 이미 바이올렛 쉘터는 우리 측 인원으로 포위된 상태입니다.’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위협에 불과한 말일까?

최호언의 총구는 석화를, 이채윤의 총구는 최호언을 향해 있었다. 석화는 최호언의 이 모든 행동들이 그저 위협일 뿐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서펀트가 접선한 이유는 필시 제게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일 테니까.

“이 소령님, 쏘세요.”

“뭐라구? 박사님?”

“쏴요.”

이채윤이 석화를 향했다가 곧바로 최호언을 올려다봤다.

“이런, 석화 박사님이 큰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탕, 바로 옆에서 총성이 들렸기에 귀가 먹먹해졌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니 급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석화는 최호언이 제 팔을 쐈다는 것을 그제서야 인지할 수 있었다.

“으윽…….”

총알이 스쳐지나가며 찢긴 팔뚝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삽시간에 곽수환의 운동복을 적셔나갔다.

“이 씨발! 미친 새끼야!”

이채윤도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 핏대를 세웠다.

“이 소령님, 그 문에서 비켜요. 지혈하지 않으면 석화 박사님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박사님, 박사님, 괜찮아?”

이채윤이 여전히 총구는 이쪽을 겨눈 채로 울상을 했다. 찢긴 곳에 심장이라도 달린 것처럼 통증이 박동했다. 석화는 제 팔뚝을 움켜쥐고 이채윤에게 재차 말했다.

“괜찮으니……. 쏘세요.”

최호언의 얼굴로 총을 겨눈 이채윤이 이를 악물었다.

“박사님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다리나 팔 하나쯤 날려 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시도해보지 그래요, 이 소령님.”

최호언은 진심이었다. 석화의 팔이나 다리 하나를 관통시키겠다는 놈의 협박에 이채윤은 쉽사리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목숨만 남겨놓으면 그만이라는 태도에 석화 또한 겁이 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서펀트에게 잡혀가면 그보다 더한 일들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최호언이 석화를 끌고 앞으로 다가가자 이채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난 못해. 박사님, 못하겠어. 그녀가 경황없이 중얼거렸다. 석화도 더는 이채윤에게 짐을 지워줄 수는 없었다. 석화는 조심스럽게 지퍼 주머니를 열어서 바닥에 사진을 떨어뜨렸다. 최호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반항하듯 몸을 움직여 정신을 분산시켰다.

“이 소령님, 곽수환 소령님한테 꼭 전해주세요.”

이채윤이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석화는 제발 그녀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어머니의 이름은 이진연. 이진연이고 유프라테스였어요. 곽수환 소령님의, 윽!”

“거기까지.”

최호언이 석화의 팔뚝에 손가락을 박아 넣었다. 석화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석화는 그럼에도 바닥에 떨어뜨린 사진을 시선만으로 가리켰다.

“거기에 엄마가 있어요.”

다급한 석화의 마지막 말은 그것으로 끊겼다. 이채윤이 총구를 들이밀며 뒤따라가려 했지만, 밖으로 나간 최호언이 문을 밀어 닫았다. 그는 쇠막대를 가로로 눕혀 문을 잠갔다. 이채윤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문을 부수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최호언도 그걸 아는지 석화를 끌고 어두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던 석화의 발이 꼬였지만, 최호언은 아랑곳 않고 석화를 들쳐 멨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무기력함은 늘 자신에게 붙어있던 꼬리표였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었다. 석화는 손에 힘을 주어 최호언의 팔을 세게 쥐었다. 울컥, 마찬가지로 이채윤의 총에 찢긴 그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최호언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석화가 이를 악물고 최호언의 찢긴 상처를 더 꽉 눌렀지만, 발걸음이 늦어지는 일은 없었다.

복도는 계단 없이 경사가 져 있었다. 최호언이 복도 끝에 가서 문을 열자 쉘터의 경계 밖이 나왔다. 철조망이 넓게 둘린 쉘터 안쪽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군인과 아담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최호언은 아직도 제 팔뚝을 쥔 석화를 떼어내 세워둔 차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 석화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가슴을 세게 눌러 보조석 수납장에 있는 수갑을 꺼냈다. 천장 손잡이에 수갑을 건 다음, 석화의 두 팔을 채웠다.

숨을 몰아쉬며 최호언을 노려보는 석화의 얼굴에 피가 흥건했다. 그 바람에 마치 아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운전석에 올라탄 최호언은 여전히 분해 하는 석화의 얼굴을 제쪽으로 향하게 했다. 휙 고개를 돌리자 한 손으로 턱을 쥐고, 석화의 입술 안으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는 앞니 끝을 슬쩍 문질렀다.

“이가 상하진 않았군요.”

최호언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뒷좌석으로 손을 뻗은 최호언이 약품키트를 앞으로 옮겨왔다.

“조금만 참아요. 진통제 효과도 같이 있으니 고통이 덜할 겁니다.”

그 안에서 지혈가루와 붕대를 쏟아냈다. 최호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석화의 팔에 응급조치를 취했다. 본인의 팔에는 지혈가루만 대충 뿌리더니 붕대를 한 번 동여매고 말았다. 석화는 그동안 아무 말도 없이 창밖만 쳐다봤다. 손잡이에 고정된 양 손목이 시큰거렸다.

볼펜만 한 스캐너를 꺼낸 최호언은 갑자기 석화의 팔을 쓱 훑기 시작했다. 개미가 쏘는 듯한 따끔한 감각에 석화가 경계심을 한껏 세웠다.

“뭐하는 겁니까?”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요.”

석화도 그제야 놈이 뭘 확인하는지 알아차렸다. 불행히 피부 밑에 이식되어 있던 마이크로칩은 총상으로 기능이 정지된 상태라 스캐너에 잡히지 않았다.

두 번 일을 할 필요가 없어진 최호언은 운전대를 쥐고는 액셀을 세게 밟았다. 석화는 멀어지는 불길을 돌아보면서 차창에 이마를 기댔다. 한 시간 안에 곽수환이 돌아온다고 했는데, 저는 그 시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최호언에게 붙잡혀 버렸다.

“석화 박사님.”

석화는 대답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고 달리는 최호언은 큰 도로가 아닌 샛길로 빠졌다.

저 뒤로 레인보우 시티의 지프가 연달아 바이올렛 쉘터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바이올렛 구역에서 빛이라고는 석화가 빠져나온 쉘터밖에 없었다. 홀쭉한 달은 어둠이 좀먹은 도시에 닿지도 못해 저희들의 모습까지도 숨겨주고 있었다. 석화는 자꾸만 내려앉으려는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온몸이 아팠다. 붕대로 감싼 팔뚝만큼이나 아래에서도 열이 느껴졌다.

“……어디로 갑니까?”

석화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안전한 곳으로 갑니다.”

“목적이…… 뭡니까?”

“당연한 말을 물으시는군요. 아담 소탕과 더불어 썩은 도시를 정화하려는 거죠.”

“그래서 멀쩡한 군인들까지 감염시킨 겁니까?”

상부에 썩은 인사들이 포진해 있다는 걸 알지만, 죄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실험을 자행한 에덴동산도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백신 개발 시,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게 레인보우 시티의 방침이죠?”

“…….”

“그 말을 믿는다면 석화 박사님은 그 어떤 이면도 보지 못한 겁니다. 곽수환 소령도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말이죠. 민간인 출입이 불가능한 레드구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군 장교들은 다들 알 겁니다.”

최호언은 속도를 올려가며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켰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실험대상으로 삼는 게 일상이죠. 그들이 개발한 약물을 실험실 쥐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적어도 석화 박사님은 본인 몸으로 임상시험을 하셨지만, 저 위의 놈들은 닥치는 대로 실험해 바이러스를 변형시키고자 했죠. 이건 충분히 예상하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백신을 배포하면서 말라리아 기생충을 심은 겁니까?”

최호언이 쓰윽 핸들을 손으로 쓸었다.

“눈치챘어요?”

마치 보물찾기 놀이에 물건을 숨긴 아이처럼 별 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어차피 레인보우 시티가 개발한 백신으로 둔갑해서 나갈 테니까, 그 정도 위험은 놈들도 감수해야죠.”

“왜 저에게 접선을 시도한 겁니까?”

“저는 박사님께 사과를 드렸을 뿐이죠. 선악을 알게 하는.”

서펀트가 아니었다면 오양석 박사나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예전처럼 주어진 일만 반복했겠지.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겁니까?”

서펀트가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으니 혹시나 싶었다.

“오청운이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건 자의였죠.”

석화는 차 안에 탄 이후로 처음 최호언을 쳐다봤다. 두 팔이 위로 묶여있어 자세가 불편했고 멀미마저 일었다.

“가장 처음 우리와 접선을 한 건 오양석 박사가 아닌 오청운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교리는 있어요. 그게 종교의 가장 기본이잖아요? 레인보우 시티가 행하는 모든 일에 아담이라는 명분이 있듯이 말이죠.”

최호언이 에덴동산의 교주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는 오히려 종교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듯했다.

“그런데 오청운 박사가 그 교리에 심취할 줄은 몰랐지 뭡니까? 본인이 신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오청운은 돌연변이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요.”

거칠게 달려 나가는 것과 다르게 최호언의 목소리는 매끄러웠다.

“오양석 박사는 제 몸에 아담 바이러스를 심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치료제를 개발하려 했지만, 미완성에 그쳤죠. 오양석 박사는 치료제에 대한 힌트를 석화 박사님에게서 얻었다고 했습니다.”

석화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치료제를 개발한 적 없으니 힌트를 준 적도 없습니다.”

최호언은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차는 이제 샛길을 벗어나 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이 밑인 것을 보니 지방으로 내려가려는 모양이었다.

“한숨 자둬요. 갈 길이 멉니다.”

“그럼 손 좀……. 풀어주시죠.”

“조금만 참아요.”

덜컥, 덜컥, 석화가 매달린 손을 흔들어도 최호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이 들 석화도 아니었다.

“직접 보게 되면 박사님도 생각을 달리하시게 될 겁니다. 박사님이 곧 우리의 교리니까.”

***

백호 소대가 도착한 건 아담 소탕이 어느 정도 일단락됐을 때였다.

이채윤이 탄약고에 폭발이 일자마자 곧장 양상훈에게 무전을 넣었고, 그는 비밀리에 정예군만 데리고 과천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불타고 있는 탄약고의 불길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 떨어져 있건만 양상훈은 열기를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체 밭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난자된 몸뚱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담으로 변이되기 전에 자살을 한 듯 보이는 군인도 있었고, 군인에게 사살당한 아담도 수많았다. 양상훈의 지시에 셋, 둘, 셋이 건물 내부의 각 방향으로 흩어져 최종 정리에 나섰다.

양상훈은 9mm 기관단총의 장전손잡이와 탄창을 단단히 쥐었다. 바닥을 기는 아담을 확인사살하며 버려진 연구실로 보이는 건물로 이동했다. 그 길 또한 시체들이 즐비했고 그들은 하나같이 군복 차림이었다. 참혹한 현장은 수없이 봐왔지만, 현장의 시체가 모두 군인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양상훈은 소리를 질러 이채윤이나 곽수환을 찾을까하다 그만두었다. 남은 아담의 숫자가 얼마일지 가늠이 안 되기에 기민하게 옆 건물로 들어갔다. 휙 총을 들어서 위를 봤다가 아래로 향하니 시체가 그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양상훈은 발로 시체를 걷어차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저 아래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빠르게 빛을 향해 달렸고, 닫힐 듯 말 듯 벌어져 있는 문에 군화를 넣고 들어가 총구를 겨눴다.

“굼벵이 새끼, 존나 일찍 오네.”

얼굴을 보자마자 이채윤에게 욕을 먹은 양상훈이 이걸 쏴버려? 하는 얼굴을 했다. 등만 보이고 선 곽수환이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거칠게 던졌다.

“박사님은?”

양상훈이 묻자 이채윤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서펀트가 데려갔어.”

“뭐? 서펀트?”

“말하자면 길어.”

“GPS로 찾으면 되잖아. 박사님 직위 다시 복구된 거 아니었어?”

“GPS 관제 허가 받았는데, 신호가 안 잡힌대.”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곽수환은 이채윤이 전달했던 말만 곱씹었다.

‘석화 박사님 엄마 이름이 이진연이래. 박사님 엄마가 유프라인가 테프라인가 뭐고, 그리고 또 뭐지. 곽수환 소령님도,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했어. 그 말을 너한테 꼭 전해달라고 했거든? 그 사진 보면서 엄마가 있다고 했는데, 대체 무슨 뜻이야? 내가 제대로 기억한 건 맞아? 내가 말하고도 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아씨, 돌겠네. 나 기억력은 자신 없단 말이야.’

곽수환은 반으로 접혀 있던 사진을 펼쳐 봤다. 깊은 안쪽에서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제 손으로 죽인 아버지와 저에게 마지막 전언을 남긴 어머니가 사진 안에 있었다. 그 옆은 원호 박사이며, 또 그 옆은 누구지……?

단발머리 여자에게 연구원증이 걸려 있었지만, 화질 때문인지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석화가 이 사진을 가리키면서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괜한 말을 했을 리가 없지 않나.

[네 개의 강이 함께하다]

뒷면에 쓰인 글을 읽은 순간, 뒤통수가 싸늘하게 식는 것만 같았다.

‘비손과 기혼의 두 아이는 어떨까요. 티그리스는……. 내가 이 박사를……. 닮았어요.’

귓가에 석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한다고 치부했던 말.

석화가 이 박사를 닮았으며, 어머니의 이름이 이진연……. 그렇다면 사진의 이 여자가 유프라테스이며, 바로 석화의 어머니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분명 네 개의 강이 함께한다는데, 그중 두 사람은 자신의 부모였다. 곽수환은 사진을 꽉 쥐고는 뒤를 돌았다.

“최호언 본가가 부산이라고 했지?”

양상훈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만 깜빡거렸다.

“일단 이 소령, 너는 최호언 본가와 그놈 엄마 위치도 같이 확보해. 둘 다 내장 칩이 없는 걸 보면, 한통속일 가능성이 커.”

“야, 네가 전에 그 새끼가 서펀트일 수도 있다고 했잖아. 어깨 까보라고. 아무래도 이상해서 내가 뒤를 좀 캐봤거든?”

“핵심만 말해.”

이채윤이 발끈하려고 하다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석화가 다쳤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앞뒤 안 보고 나가려는 곽수환을 말리느라 이미 진을 뺀 그녀였다. 곽수환이 방공호로 돌아온 건 둘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 뒤였으니 어디로 갔는지도 유추가 불가능했다. 지금은 정보를 모으는 게 우선이었다.

“최호언 본가는 부산항 근처야. 그놈 가문이 여객선이랑 화물선 몇 척을 소유하고 있거든? 섬하고 육지에 물건 옮기는 역할을 하는데 존나 부자래.”

“나도 아니까 핵심만 말해.”

“이름이, 뭐였더라? 하여튼 최호언네 엄마가 보통은 부산항에 있다더라고. 내가 아빠한테 물어봤더니 그 아줌마가 어떻게 명예가문이 됐냐면, 남편을 밀고했대.”

“뭐?”

“남편이 반군으로 활동하는 걸 아줌마가 신고한 거야. 그래서 명예가문이 되고 아저씨가 하던 일을 아줌마가 하게 된 거래. 그리고 그 집 애가 어릴 때 홍역 앓느라 엄청 아팠다더라?”

이채윤의 집안은 레인보우 시티의 초창기부터 명예가문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정보는 다 꿰고 있었다.

“이 소령, 제발 부탁이니 핵심.”

곽수환의 인내심은 이미 박살난 지 오래였다.

“내가 말한 거 다 핵심이거든? 어쨌든 아빠가 그러는데 자기는 그때 애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버젓이 어른으로 나타나서 박사로 활동하는 게 좀 이상했대.”

그러니까 진짜 최호언은 홍역을 앓다가 죽었고, 지금 서펀트는 그 이름만 빌렸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었다.

이채윤의 부모는 정치의 흐름을 읽어 대세에 편승하는 자들로 유명했다. 현재는 퍼스트 측 라인이지만, 언제든지 세컨드로 갈아탈 수도 있는 시민 대표 중 하나였다. 그런 자들에게서 나온 말이니 아주 신빙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고맙다. 일단 정확한 위치 좀 알아봐.”

고맙다는 솔직한 말에 이채윤이 눈을 크게 떴다.

“근데 너희는 왜 21 바이올렛에 와 있는 거냐?”

양상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채윤의 긴급요청 때문에 왔지만, 저 둘이 여기 있다는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바보야, 똘수환이가 석화 박사님을 여기서 보호한 거잖아!”

“아, 맞네.”

곽수환이 후, 입으로 바람을 부니 앞머리가 슬쩍 들렸다.

“곽 소령, 박사님은 괜찮겠지?”

정작 곽수환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최호언이 석화와 함께 빠져나간 문을 바라봤다.

분노에 머리가 들끓었고, 서펀트 놈이 석화에게 어떤 짓을 벌일지 상상만 해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 박살내고 싶었다. 두 번이나 서펀트에게 끌려가는 석화를 놓쳤다.

아담을 풀어 주변을 정신없게 만드는 게 놈의 특기인 줄 알면서, 방공호는 안전할 거라고 착각한 제 병신 같음에 빌어먹을 찬사를 보냈다.

“곽수환아, 나도 최선을 다했다.”

이채윤이 곽수환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최호언 본가 주소랑 그 새끼 엄마 위치 바로 확보하는 대로 무전 보낼게.”

곽수환도 더 생각을 증식시키기를 그만두었다. 다만 서펀트의 간교한 혀에 석화가 넘어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레인보우 시티의 단점을 설파하며 에덴동산의 이점을 주입시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짓을 한다면…….

아니, 그렇다고 해도 석화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다.

“양 소령.”

“응.”

“너는 과천으로 복귀하고, 퍼스트 마스터가 나 찾으면 서펀트 사냥하러 나갔다고 해.”

“안 그래도 나 여기 오기 전에 상부 연락 받았거든?”

곽수환이 양상훈에게서 기관단총을 뺏어들었다.

“무슨 연락.”

“너보고 여의도로 올라오란다.”

철컥, 곽수환이 기관단총의 장전을 풀었다.

“새끼야, 너 군사재판에 기소됐다고. 세컨드 마스터가 널 기소했고.”

“세컨드가 자꾸 자충수를 두네.”

“자충수는 또 누군데. 하여튼 너 안 가면 바로 수배 명령 떨어질 거야. 어쩌려고 이래.”

곽수환은 엿이나 먹으라며 총을 어깨에 멨다. 바이올렛 구역은 차 중령이 정리할 테니 맡기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시도 출발을 늦출 수는 없었다.

계단을 달려 올라가는 곽수환의 뒤에 대고 양상훈이 소리쳤다.

“야! 어디 가냐고! 말은 하고 가, 새끼야!”

곽수환은 아담 시체를 발로 밀고는 대꾸했다.

“35 그린 구역.”

부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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