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tone wall (6) (11/23)

Stone wall (6)


세컨드가 저를 기소했다면 이유는 석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서펀트처럼 아담에게 감염된 석화를 숨겨두었다는 사유가 가장 그럴싸하겠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면역체로 추정되는 석화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점을 기소 이유로 삼을 거다.

곽수환은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면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차들을 피해나갔다. 기름은 아직 충분했으니 부산 그린 구역에 도착해 주유를 할 셈이었다. 일단 양상훈이 시간을 벌겠다고는 했지만, 세컨드가 마음먹고 칼을 쥔 이상 어떻게든 저를 끌어내리려고 할 터였다.

퍼스트가 에덴동산과 세컨드를 한데 엮어 보내버리려고 하는 중이니 그동안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딴 것 다 차치하고서라도 석화를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제 인생은 늘 그랬다. 소중한 것을 지켜본 적이 없었다. 늘 잃기만 했고, 주변은 죽음 천지였다. 그런 상실뿐인 삶에 석화가 나타났건만 또다시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지키는 일 하나뿐인데 왜 이렇게 쉽지 않지?

분기점을 지키고 있는 초소에서 불빛이 깜빡거렸다. 차를 세우라는 신호였지만, 곽수환은 무시하고 페달을 밟았다.

빵, 빠앙- 거친 클랙슨 소리와 함께 강한 불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룸미러를 흘끔 보니 곽수환의 지프를 몇 대의 차가 쫓아오고 있었다. 아직 수배 명령이 전달됐을 리는 없고, 레인보우 시티 군용 지프인 것을 확인했을 텐데도 클랙슨을 연방 울려댔다.

계기판의 바늘이 한계치까지 넘어가기 시작했다. 빠아앙, 역주행을 해오는 트럭의 헤드라이트에 곽수환은 핸들을 급히 옆으로 틀었다. 급작스러운 방향 변경에 타이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스키드마크를 새기며 지프가 커다랗게 도는 동안 곽수환은 브레이크를 짧게 반복해서 밟으며 차를 세웠다. 머리가 어찔할 정도의 관성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순식간에 뒤따라온 차들 또한 곽수환의 지프를 포위했다. 곽수환은 조수석 바닥에 떨어진 기관단총을 쥐었다.

백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 둘러보니 차에서 내리는 놈들은 총을 든 상태였고,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의 견장이 일반 사병임을 알렸다.

똑똑, 곽수환의 지프 유리창을 한 놈이 두드렸다.

“차에서 내리시죠. 이 시간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역주행해온 트럭은 놈들과 한 패인 것으로 보였다. 지나온 초소는 오렌지 구역인 데다 레인보우 시티에서 손을 놓은 도시였다. 그런 곳에 초소를 세우고 불심검문을 한다는 건 지나친 전력낭비다.

“차에서 내리라고 했습니다.”

곽수환은 앞을 보고 있다가 창문을 한 뼘만큼 내렸다. 고작해야 스물 남짓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 더 자세히 보였다.

“어디 소속이야?”

“저희는 열쇠부대 소속입니다. 차에서 내려서 신원을 밝혀주시죠.”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는. 여의도에 있는 열쇠부대가 왜 여기를 지킨단 말인가.

놈들의 정체는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범죄 집단중 하나일 뿐이었다.

곽수환은 저를 둘러싼 차들을 보고는 그대로 돌진하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차 문 레버를 잡아당겨 문을 확 열어서 서 있던 놈의 몸통을 가격했다. 그리고는 총구를 자빠진 놈에게 겨눴다.

“앞에 트럭 치우라고 해.”

뒤늦게 놈이 총을 꺼냈지만 탕, 곽수환이 손을 저격했다. 으악, 으아악. 놈은 제 손이 날아간 줄 알고 바닥을 굴렀다. 실제 탄환이 지나간 건 놈이 가진 총구일 뿐이었다.

“안 치우면 다 죽는다.”

손을 감싸 쥐고 있던 놈이 그제야 곽수환이 입고 있는 군복을 확인했다. 일반 배급병인 줄 알았는데, 어깨의 견장을 보니 대위 이상급이었다. 차에서 내린 놈들이 총을 장전해 점차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바닥을 짚고 눈치를 살피던 놈은, 저희 숫자만 믿고 호기롭게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지프하고 그 총, 그리고 가진 지폐 전부 내놔. 그럼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말에 어폐가 있었다. 이 고속도로에서 차를 가져간다는 건 한 마디로 죽으라는 뜻이었다. 전방에 한 놈, 후방 둘, 네 시 방향에 하나, 처리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치직, 칙. 무전기에 잡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하라. 곽수환 소령. 들리면, 응답하라.]

이채윤의 목소리에 곽수환이 무전을 떼어와 대답했다.

“말해.”

이채윤이 본가 위치를 알아냈다면서 부산항에서 가까운 지도상 좌표를 불렀다.

그 틈을 타 날아간 총을 주워온 놈이 곽수환에게 발사했지만, 곽수환의 총이 더 빨랐다. 기어코 총알이 놈의 팔을 관통했고, 곽수환의 지프를 향해 총탄이 함부로 박히기 시작했다. 방탄유리로 제작되어 있지만 내구성은 그리 좋지 못했다.

곽수환은 다시 차량 거울로 놈들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닫았던 문을 열었다. 너덜거리는 팔을 감싼 놈을 데려가려는 동료의 다리를 총으로 쏘고, 지프에서 내려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이거 놔! 악!”

버둥거리는 놈의 뒤통수를 긴 탄창으로 후려치자 적어도 동료애는 있는지 총질이 멈췄다. 곽수환은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목소리를 키웠다.

“트럭 치워, 아니면.”

그는 차 문을 방패 삼아 열린 창에 총을 걸쳐두고 있는 놈의 귀를 저격했다. 한쪽 귀가 터져 나가자 비명 소리가 더해졌다.

“전부 죽인다고 했다.”

팔을 다친 놈에게 다시 총구를 들이대니 엄청난 고통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네가 대장이야?”

“흐윽……. 대장 없어요. 그냥 우린……. 애들 죽이지 마세요. 소령이면……. A급이죠? 잘못했어요. 죽이지 마세요.”

“그래? 너희들도 니들한테 목숨 구걸하던 놈들 살려줬어?”

“…….”

놈이 흐느끼는 소리를 짜냈다. 그저 살기 위해서였다고 변명까지 더했다.

씨발, 이 무슨 신파극이 다 있나 싶었다. 곽수환은 트럭 운전석에서 핸들을 쥐고 있는 놈을 쳐다보며, 옆으로 치우라고 총구를 까딱거렸다.

“여기로 나 말고 지나간 차 있었어?”

출혈이 심해 얼굴이 하얗게 뜬 청년이 영문도 모른 채 고개만 저었다. 지금은 살려달라며 빌고 있지만, 곽수환은 이놈들의 손도 깨끗하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살기 위해서 도둑질을 했을 테고, 놈들이 입은 군복의 주인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놈들을 살려두고 가면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을 테지만, 곽수환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무법지대를 만든 게 바로 레인보우 시티였으니까.

목덜미를 잡아들어 올렸던 놈을 바닥에 던지고 나서야 다시 운전대를 쥐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한 게 아니라면 더 정리되지 않은 국도일 리도 없고, 아마도 철길을 따라 내려갔을 것이다. 서펀트가 석화를 데리고 군인들이 포진해 있는 서울이나 근교로 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곽수환은 트럭을 비껴 지나가다가 끼익,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 옆면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난 뒤였다.

생명의 나무.

수십 개의 나무줄기와 커다란 몸통, 의정부 벙커에서 봤던 그림과 거의 일치했다. 곽수환이 차를 돌려 돌아오자 동료를 챙기던 놈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을 했다. 가다가 마음이 뒤바뀌어 저희를 죽이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곽수환은 재빠르게 지프에서 내려서 군홧발로 놈들에게 다가갔다.

“니들 에덴동산 신도야?”

팔을 다친 녀석이 눈을 부릅떴다.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희는 반군이 아니에요!”

곽수환이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다시 녀석을 향해 겨눴다.

“살려주세요! 저희는 먹을 걸 준다고 해서 신도로 들어간 거예요. 정말이에요!”

트럭 운전사였던 놈이 그 앞을 막고 섰다.

“에덴동산이 배급은 어디서 하는데.”

“보통은……. 레인보우 시티에 속하지 않은 구역에서 나눠주는데……. 저희는…….”

진실과 거짓말을 교묘하게 섞으려는지 말꼬리를 흐렸다.

“너희 어디 출신이야?”

“추, 출신이요?”

“부산이야?”

녀석들은 고개를 저었다가 끄덕였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행동했다. 이럴 때는 협박보다는 회유가 낫다.

“내가 아는 사람이 에덴동산에 심취해서 신도로 들어가게 됐거든? 니들이 에덴동산 신도든 뭐든 상관없이 난 그 사람만 빼오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신도들이 어디서 모이는지 알려주면.”

곽수환은 말을 하다 말고 제복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레인보우 시티 인장이 새겨진 지폐 여러 장을 빼서 대장으로 보이는 놈에게 내밀었다.

“브로커만 있으면 적어도 일 년치 생활비는 될 거야.”

낡아빠진 천으로 팔을 동여맨 녀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희는 부산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배급받아요.”

“야!”

“돈 준다잖아!”

저희들끼리 내분이 일어났기에 곽수환이 사람이 없는 공간을 향해 총을 한 번 갈겼다.

“부산 어디.”

“우룡산……이요.”

곽수환이 놈들에게 지폐를 건네주고 빠르게 지프로 돌아왔다. 일단은 이채윤에게 받은 좌표가 우선이었다. 지금이라도 철로를 따라 가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 차가 있기 때문에 지프의 속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

석화는 잠들지 못한 채로 창밖의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두 팔은 이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부산이라는 도시에 온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곽수환을 만나기 전까지 행동반경은 제주도나 여의도뿐이었다. 그조차도 연구소와 집이 전부였다. 석화는 새삼 레인보우 시티가 참 크다고 느꼈다. 오래전에는 시티가 아닌 한 나라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우물 안 개구리는 바로 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석화는 철로를 따라가면서 불을 쬐고 있는 부랑자들과 아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어린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나마 예전 역사로 사용되던 곳이 시티 바깥 사람들에게는 쉘터나 마찬가지였다. 최호언은 사람들의 교류가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합니다. 다들 너무 지쳤어요.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또 실험실의 쥐 대신이 되기도 하죠. 밖의 사람들에게 아담만큼이나 두려운 게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과 수뇌부들입니다.”

딜레마였다. 최호언의 말은 틀린 데가 하나도 없었지만, 저는 에덴동산이 쌓아둔 수많은 군인들의 시체를 봤다.

“에덴동산은……. 시티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요?”

“아뇨,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죠.”

“그런데 왜 군인들을…….”

최호언은 부산항을 지나치고 있었다.

“석화 박사님, 배고프시죠?”

“저는 최호언 박사님도 똑같아 보여요. 궤변입니다.”

“레인보우 시티의 공격에 저희도 대비를 한 것뿐입니다.”

에덴동산도 군인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했지 않느냐는 말까지는 꺼내지 못했다.

“사실 곽수환 소령님도 원래는 저희와 합류할 예정이었는데, 사람 일은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더군요.”

석화는 아예 귀를 닫기로 했다. 최호언의 말을 신뢰할 수는 없었다.

“곽 소령님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제 아버지가 먼저 곽 소령님을 데려오려고 하셨죠. 그런데 당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오양석 박사가 곽수환 소령님께 도움의 손길을 뻗었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데 최호언의 목소리가 자꾸만 뇌를 파고들었다. 그는 내뱉는 모든 말에 힘을 가진 사람 같았다.

“결국 곽수환 소령님은 레인보우 시티로 들어가게 됐죠. 저 또한 석화 박사님과 곽수환 소령님에게 접선하기 위해 시티의 시민이 되어야 했고요.”

서펀트다. 서펀트는 간교한 말을 일삼는 뱀이다.

“아버지가 석화 박사님에 대해 종종 말씀을 하셨죠. 절대 실패작이 아닐 거라고.”

석화가 무심함을 가장해 최호언을 향했다. 최호언은 낡은 목조 주택 앞에 차를 세우고 석화를 마주 봤다. 곽수환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다. 거친 면은 존재하지만 수만 번 사포질을 한 듯 겉만큼은 아주 매끄러워 보였다.

“아버지가…….”

“박사님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최호언은 위로 들린 석화의 한쪽 손목을 풀어주었다. 스르륵, 중력의 무거움을 느끼며 내려온 손이 저릿저릿했다. 수갑을 풀어주지는 않고 다시 반대쪽 손에 채웠다.

“식사부터 하죠.”

운전석에서 내린 최호언이 조수석으로 돌아와 석화를 붙잡아 끌어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는 석화를 애석하게 내려다보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들쳐 멨다.

석화는 최호언의 등에 손을 깍지 껴 쳐 내릴까 했지만, 차라리 힘을 비축해 빈틈이 생기면 도망쳐야겠다는 그럴싸한 목표를 세웠다.

목조 주택 안은 겉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깔끔한 편이었다. 얼마간 집을 비웠다는 것을 알려주듯 테이블 위에 먼지만 옅게 쌓여있을 뿐이었다.

주방으로 걸어간 최호언이 석화를 식탁 의자에 내려두었다. 최호언은 오랜 운전 끝에 찌뿌둥한 몸을 풀듯 팔을 가볍게 교차시키고는 찬장을 열었다. 저 여유로운 행동은 납치범의 태도로 보기 어려웠다.

“신선한 식재료가 없어서 통조림으로 때워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호언은 옥수수와 소시지 통조림을 꺼냈다. 버너에 냄비를 올리고 생수를 따서 물을 부었다.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는 지역이다 보니 수도꼭지도 전부 녹슬어 있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최호언은 지금은 돌아가지 않는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 하나를 떼어왔다.

“아버지는 언제나 소중한 건 절대 은밀한 곳에 보관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죠. 그래도 자식과 찍은 단 한 장의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둔 건 좀 그렇죠.”

석화는 그가 내민 사진을 내려다봤다. 물이 슬슬 끓기 시작하는지 최호언은 소시지 통조림을 따서 냄비에 넣었다.

“그냥 먹으면 비린내가 나서. 배고파도 조금만 기다려요.”

“……원호 박사님.”

석화는 사진의 남성을 보고 중얼거렸다. 원호 박사는 겨우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배경은 바로 밖에서 봤던 이 목조 주택이었다.

“이제 남은 건 사진뿐이더라고요. 모두가요.”

서펀트가 원호 박사의 아들이라고? 원호 박사에게 자식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결혼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툭, 석화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소시지가 담긴 그릇이 놓였다.

“석화 박사님은 유프라테스에게서 났고, 비손과 기혼의 남은 아이는 곽수환 소령, 마지막으로 티그리스의 아이는 저죠.”

석화는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 채 식탁만 내려다봤다. 최호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좀체 알 수 없었다. 네 개의 강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왜 저희가 그들의 자손이라고 하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항상 위험한 일은 피해가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에덴동산을 만든 사람일 리가 없다.

아니, 그 어떤 것보다 지금은 그저.

“……저는.”

최호언은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곽 소령님이 보고 싶어요.”

석화가 고개를 들었다.

***

치지직, 지직.

[……백호, 3121, 참매, 먹이비행, 개인행동 금지.]

암호와도 같은 단어가 차량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최호언은 군용 CB무전을 도청하는 중이었고, 레인보우 시티는 군법을 따라 암호로 교신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석화는 집에서 나오기 전 소시지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 곽 소령에게 보내달라는 말에 최호언은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주었다. 그러니 여기서 더 체력이 떨어지면 곤란했다.

“방금 무전, 해석이 가능해요?”

석화는 다시 두 팔이 천장 손잡이에 묶인 채로 대꾸했다.

“아뇨.”

“3121은 곽수환 소령님의 코드 넘버고, 참매는 추적자죠. 아무래도 곽 소령이 도주 중인 것 같군요.”

서펀트도 아닌 곽수환이 도주 중이라고?

“아마도 상부에 누군가가 중간에 끼어든 것 같습니다. 석화 박사님이 면역체인 사실을 곽수환 소령님이 숨겼으니까요.”

아닌 척하지만, 그 사실을 밀고한 사람이 서펀트일 수도 있었다. 석화는 무심을 가장해 입을 열었다.

“……저 면역체 아닙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레인보우 시티로 돌아가면 박사님은 아담 혈액을 투여 받게 될 겁니다.”

“최 박사님이 저에게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겠고요.”

최호언이 의외라는 듯이 석화를 봤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우린 한 곳에서 파생되어 나온 형제나 마찬가지인데요.”

여전히 서펀트가 세 치 혀를 놀리는 것이라 믿고 싶지만, 방공호에서 봤던 사진이 그의 말을 뒷받침했다. 만일 이 사실마저 상부가 알게 된다면, 저뿐만 아니라 곽수환은 더 위험해질 거다. 명확히 저희들은 반군의 자식들이었다.

“곽수환 소령님과 잤어요?”

뜬금없고도 불쾌한 물음에 석화가 미묘하게 표정을 구겼다. 대체로 무표정한 석화이기 때문에 그 변화가 확연히 도드라졌다. 최호언은 석화의 눈가와 뺨 언저리 그리고,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의도 쉘터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군요.”

“대체……. 저를 납치해서 얻는 이득이 뭡니까?”

최호언은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어딘가로 계속 차를 몰았다.

그린 구역이라고 하지만, 서울보다는 군인들의 숫자가 현저히 적었다. 몇몇 부유층들이 사는 지역만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했을 뿐, 그 외는 길거리에 나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물통을 들고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자들만 있었다.

한참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 언덕을 넘어서자 방치되어 수풀이 우거진 숲이 보였다. 길도 나지 않은 곳을 차로 밀고 들어가니 석화는 불안한 마음이 배가 됐다.

시티에서조차 곽수환을 추적한다는데 혹시나 그가 저를 찾으러 오다가 어디 다치지는 않을는지, 아니면 지금쯤 어디로 도망을 가고 있는 건지 걱정이 앞섰다. 사실은 제 코가 석 자인데 말이다. 오히려 곽수환에게 저라는 짐이 없으니 그는 더 안전할 것이다.

최호언이 차를 세운 곳은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서양식 저택이었다. 최호언은 석화의 두 손목에 채운 수갑을 이번에는 완전히 풀어주었다. 오랜 시간 수갑에 시달린 손목은 생채기와 멍이 생겨 있었다. 게다가 응급조치만 한 팔뚝의 총상은 몇 번이나 욱신거림을 호소했다.

“여기서 혼자 도망가기는 힘들 겁니다.”

혹시나 싶어 경고하는지 모르지만 최호언의 말대로였다.

적어도 차를 훔쳐서 달아나야 하는데, 석화는 배운 적이 없어 운전을 할 줄 몰랐다. 다만 최호언이 기어를 넣으며 운전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훔쳐봤고, 머릿속으로 운전하는 시뮬레이션을 그렸다. 저 자신이 차를 몰기가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했다. 다만 최호언은 차키를 차에 두지 않고 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차 밖으로 나가는 그를 시선으로 쫓던 석화는, 문득 저택의 긴 창문으로 사람의 형상을 엿봤다. 마치 눈이 마주친 것 같았기에 물끄러미 쳐다봤지만 인영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조수석 문을 열자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야 했다. 일단은 최호언의 말을 잘 듣는 척하면서 경계심을 허무는 게 우선이었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저택은 겉보기와 달리 현관에서 지문인식을 거쳐야 했다. 최호언이 지문을 인식하자 달칵, 문이 열렸다. 평범한 집과 다르게 현관의 턱도 없어 신발을 신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천장이 높았다.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는 전구가 깨지거나 빠져있는 게 태반이었다.

석화는 시선을 돌려 집 안의 구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중앙에 놓인 나무계단에 눈이 닿자, 그 위에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한 명이 아니라 적어도 서너 명은 되어 보였다. 경계하는 석화만큼이나 그들도 석화를 경계했다.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녀석은 그래봐야 스물도 되지 않은 듯했다.

최호언이 석화의 어깨를 끌어안고 계단의 녀석을 향해 말했다.

“구원자가 오셨다.”

목소리만으로도 신뢰가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이었다. 동시에 눈을 크게 뜬 녀석들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식구를 들이는 짐승처럼 석화의 주변을 맴돌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을 살펴봤다.

“……두 번 다시 우리를 버리지 않을 거죠?”

겁에 질려 눈썹을 잔뜩 늘어뜨린 소년이 석화에게 애원하듯 굴었다. 석화는 최호언의 손을 떼어내면서 옆으로 비켜섰다.

“아담에게서 우리를 보호해줄 거야. 우리 구원자님이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가 소년을 토닥였다.

지하와 2층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다리를 절거나 신체 어디 하나가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청결을 소홀히 하지 않은 사람처럼 아주 깨끗했다. 이들은 에덴동산의 신도들이었다.

“교주님, 각 지부에 알리겠어요! 우리에게 드디어 생명의 나무가 오셨다고요.”

감격스러워하는 중년 남성이 가슴 앞에 두 손을 꼭 모았다. 석화가 뒷걸음질 치자 최호언의 가슴팍에 등이 부딪혔다. 최호언은 아주 온화하게 어깨에 손을 얹고는 속삭였다.

“다정하게 대해줘요. 박사님은 저들의 구원자니까.”

***

석화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앉은 의자 뒤로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수시로 다가와 저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삶의 고충을 토로했으며, 그에 대한 답을 주기를 바라는 자들도 있었다. 아담에게서 가장 자유로운 구원자, 네 개의 강이 낳은 마지막 희망이라고도 했다.

석화는 그들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에게는 그 어떤 종교적 신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종교는 곧 삶으로 보였다. 만면에 머물러 있는 희망에 가슴이 답답했다. 저는 일개 사람일 뿐인데 왜 구원자라는 가면을 뒤집어씌운 걸까? 이건 최호언의 거짓말이다.

“저는, 그런 게 아니에요.”

“네?”

자신의 차례가 되어 석화의 손을 맞잡은 여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전 생명의 나무가 뭔지 몰라요. 저는 구원자도 아닙니다. 최호언 박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석화는 마음을 다해 앞의 여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최호언은 저기 벽에 기대 장로 중 한 명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여인은 더없이 자애롭게 미소를 지었다.

“구원자는 자신이 구원자라 말하지 않는다. 구원자라 사칭하며 우리를 현혹하지 않는다. 저를 부정하는 구원자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나무이니라.”

그녀의 말에 석화는 그들을 설득시키기를 포기했다. 이후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손을 맞잡는 사람들에게 시선도 두지 않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전 같으면 이미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정신력으로 버티는 건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호언이 다가오자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이 물러났다.

“피곤하시죠?”

하얗게 질린 석화를 최호언이 부축했다.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려 하시니 무척 힘이 드시나 봅니다.”

최호언이 신도들에게 말을 전달했다. 전부 모이니 족히 서른은 넘어 보였고, 그들은 에덴동산 신도중에서도 직급이 높거나 가장 신실한 자들인 듯했다. 백신 방송 이후로 에덴동산의 신도는 적어도 천 단위가 넘어섰다. 백신의 배포는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적이었다.

석화는 일부러 최호언의 부축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생명의 나무실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고, 2층 가장 첫 번째 방문을 열었다. 방은 쉘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책상과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책상에는 에덴동산의 교리가 담긴 책이 보였다.

석화는 나무가 그려진 표지를 흘끔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식사는 조금 있다가 가져다 드릴까요?”

“왜 저를 구원자라고 말했습니까?”

침대에 앉은 석화가 헤드에 한쪽 어깨를 기댔다. 힘이 달려 눕고 싶었지만 최호언 앞에서 풀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면역체가 곧 구원자이니까요.”

“저들이 그걸 믿습니까?”

“제가 말했으니 믿을 수 밖에요. 이곳에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도, 밖의 사람들도 한 데 섞여있습니다. 다들 부당함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 거라고 믿고 있죠. 구원의 힘으로 자신들도 면역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치료제를 만들면 되는 겁니까?”

최호언이 의자를 끌어와 석화를 마주 보고 앉았다.

“네 개의 강이 실패했던 일을 이어나가는 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아담에게서 자유로운 인류를 이룩해내는 것이야말로 구원이고요. 하자 없는 완벽한 유전자 말입니다.”

서펀트의 말이 묘하게 이상했다.

“유전자요?”

“우리가 자연 진화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최호언은 안경을 벗어 책상에 올려두었다.

“석화 박사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티 안에서 돌연변이 연구를 하셨으니까요.”

돌연변이의 진화는 비이상적으로 빠르게 이어졌다. 마치 아담 바이러스가 변이하는 것처럼, 그 또한 인간의 간섭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석화 박사님뿐만 아니라 곽수환 소령 또한 마찬가지죠. 배아의 유전정보를 편집해 태어난 인류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석화는 골이 지끈거려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최호언은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배아의 유전자를 편집하는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에이즈에 면역을 갖고자 한다면 우리 몸에 있는 CCR5 유전자를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CCR5는 HIV 바이러스가 면역 세포 내로 침투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니 그것을 제거하면 에이즈에 면역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유전자가 어떤 질병에 걸리게 하는지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편집을 통해 질병과 감염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었다.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런 형태로 슈퍼 베이비를 만들고자 했던 자들도 수많았다. 다만 상용화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어떤 반향을 낳을지 모르기에 반발도 심하게 일었다. 불특정 배아를 상대로 유전자 편집을 한다는 건 인체실험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으니까.

“그래서 배아를 상대로 제 어머니와 박사님들이 실험을 자행했다는 겁니까?”

“수도 없이 많이요.”

석화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이 하얗게 바랬다.

“유전자 변형에서 도태된 태아들은 죽거나 밖으로 내쫓기기도 했죠. 그 모든 게 레인보우 시티의 지시로 일어난 일입니다.”

최호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인보우 시티는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썩었어요. 전부 밀어내지 않는 이상 새로운 도시가, 나라가 생긴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밖으로 나가는 최호언이 문을 닫았어도 잠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석화는 적어도 한 시간은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생각으로 들끓었다.

레인보우 시티의 지시 때문에 유전자 편집과 변형을 시도했고, 문제가 생긴 태아들은 전부 처리했다고? 그렇다면 그에 반발심을 가진 박사들이 에덴동산을 세운 것인가?

석화는 침대 위를 무릎걸음으로 이동해 창밖을 내다봤다. 저 밖의 숲은 새카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저택에는 전력이 들어오지 않아 초를 사용해 주변을 밝혔다. 석화는 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최호언의 차키를 어떻게 가져와야 할지 생각했다. 힘만 셌다면 주먹으로 흠씬 패주고 빼앗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석화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납치도 당하지 않았겠지.

무릎을 모으고 얼굴을 박고 있으니 자꾸만 꾸벅꾸벅 졸음이 몰려왔다.

석 박사.

석화는 쓱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얼굴을 묻었다. 환청이 들리는 것을 보니 정말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나 보다.

석화 형!

번쩍 고개를 들고는 창밖을 내려다봤다.

그럴 리가 없지. 곽수환이 여기를 알고 찾아올 리가 없다. 석화는 두 손을 펴서 뺨을 눌렀다. 정신 차리자. 잠들면 안 돼. 차가 없다면 걸어서라도 내려가야 해. 그린 구역에 해당하니 아담이 있지는 않을 거야. 석화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침대 밖으로 훌쩍 나가려는 그때였다. 등 뒤로 화악, 강렬한 빛이 비쳤다. 이어 쾅! 충격음이 터졌다. 놀라 밖을 보니 최호언의 차가 시뻘건 불길에 삼켜지고 있었다. 불길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였다. 석화는 망설이지 않고 의자를 들었다. 고작 나무 의자인데도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팔뚝의 고통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유리창을 부쉈다. 와장창 창이 박살나니 손에서 미끄러진 의자가 저 밖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갑자기 위에서 뚝하고 떨어진 의자를 봤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뚫린 창문 앞에 서 있는 석화가 보였다. 곽수환은 불타는 서펀트의 차에 피 묻은 장갑을 벗어던지고 두 팔을 뻗었다.

“자기, 겨우 며칠만인데 왜 이렇게 반갑지?”

그의 시원한 목소리에 석화는 박살이 난 창문틀을 밟고 섰다. 1층으로 내려가려다 서펀트에게 잡히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뛰어내릴 수 있겠어?”

그가 소리쳤다. 방문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석화는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봐야 2층이니, 그가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거다.

석화는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곽수환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나름 각도를 재서 창틀을 도움닫기 삼아 밀어냈고, 질끈 감고 싶은 눈도 억지로 떴다. 곽수환은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석화를 보며 몸의 중심을 낮춰 단번에 받아 들었다.

“읏차! 나이스캐치.”

그럼에도 중력에 석화의 전신이 찌르르 울렸다. 2층을 올려다보니 최호언이 창문에 손을 댄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곽수환은 가장 먼저 석화를 자신의 지프에 앉혔다. 내려오라는 듯 곽수환이 최호언을 향해 손을 까딱하자 석화가 말했다.

“소령님, 제가 짐이 될 거예요.”

내부에는 소년소녀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있었기에 어떤 식으로든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 서펀트는 밖으로 내려오는 일 없이 이쪽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곽수환 또한 이대로 저택을 밀고 들어갈까 하다가 세 번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기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곽수환 소령님!”

곽수환이 운전석의 문을 연 그때였다. 최호언이 웃는 낯으로 그를 불렀다.

“석화 박사님과 이야기를 잘 해보세요. 차후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곽수환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는 운전석에 훌쩍 올라탔다. 가속 페달을 거세게 밟자, 몇 번 헛바퀴를 돌던 지프가 숲을 질러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헤드라이트는 한쪽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도로로 합류할 때까지 곽수환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석화는 흘끔 그를 쳐다봤다. 곽수환도 그 시선을 느끼고는 입을 떼어내려는 때였다.

“며칠 아닌데요.”

“응?”

“하루 조금 넘었어요.”

그런가? 곽수환이 굳이 그걸 걸고 넘어져야 하느냐며 나무라듯 웃었다.

“체감으로는 며칠도 더 된 것 같았어.”

“저도요.”

솔직한 대답에 곽수환이 핸들을 꽉 쥐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팔뚝에 감긴 붕대를 봤을 때 피가 거꾸로 솟아 이성이든 뭐든 집어치우고 서펀트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저를 보자마자 의자로 창문을 박살내고 밖으로 뛰어내리는 석화를 봤을 때는, 뱃속이 묵직해지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믿고 뛰어내려야 할 상황이 온다면 저는 절대 하지 못할 거다. 그러나 석 박사는 자신을 완벽하게 신뢰했고, 놓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뛰어내렸다.

석화의 눈가와 뺨에 든 노란 멍을 보자마자 곽수환의 손등에 힘줄이 잔뜩 섰다. 얼마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남긴 흔적이라는 걸 알고 묘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은 던지고 싶지도 않았다. 겉으로만 봐도 석화는 엉망이었다. 연구실이 가장 잘 어울릴 석화가 손톱이 뽑힐 뻔하지 않나, 총상을 입지를 않나, 보통 군인들이 겪지 않아도 될 일까지 체험했다.

“어떻게 찾아왔어요?”

“왈.”

석화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나보고 개라며. 냄새 맡고 왔지.”

석화가 웬일로 농담을 깨닫고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긴장이 풀려 잔뜩 늘어진 몸은 의자에 파묻히다시피 했다.

“조금만……. 잘게요.”

곽수환과 저택을 빠져나오는 그 순간부터 석화는 급격한 피로에 휩싸이고 있었다. 곽수환이 편히 자두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석화가 먼저 곯아떨어졌다. 입을 작게 벌리고 설핏 인상을 쓴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뺨을 손등으로 한 번 훑고는 다시 핸들을 쥐었다.

곽수환은 현재 레인보우 시티에서 수배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CB무전에 따르면 몇 조가 팀을 이뤄 뒤를 추적 중이었다. 아마도 최호언이 석화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거나 세컨드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라고 짐작했다. 곽수환 또한 최호언의 정체를 까발릴 수 있었지만, 그는 바이올렛 구역에 있던 이들에게도 입단속을 시켰다.

상부에 서펀트의 정체가 전달되면, 군인들이 놈을 추적하는 동안에 석화의 목숨은 보장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석화를 구해냈으니 서펀트의 위치를 보고하는 편이 일망타진하기 수월하겠지. 그러나 수배령이 떨어진 군인의 말을 믿어줄 자는 없었다.

부산에 도착해 곧장 우룡산으로 향했던 곽수환은 어린놈들이 거짓말을 지껄인 게 아닌가 잠시 의심을 했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비탈에 놓인 몇몇 담벼락에 그려진 생명의 나무가 아니었다면, 도로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산을 타고 올라가는 길마다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간간이 떨어진 꽃잎은 늘 봐오던 핏물처럼 색이 붉었다. 다만 피와는 달리 향기가 있었다.

아담을 상대하는 현장을 나가본 건 수없이 많았지만 개화한 동백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뛰어올라가던 곽수환이 멈춰 섰던 건 서리가 얼어 굳은 동백꽃 하나를 딸 때였다. 석화에게 야생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결국 주머니 안에서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장갑과 함께 최호언의 차에 그냥 태워버렸다.

곽수환은 고이 잠든 석화를 다시 확인했다. 한 번 더 만졌다가는 잠에서 깰 것 같아 앞에 놓인 부산 지도를 보는 것으로 그쳤다. 도로 표지판은 떨어져 있거나 말라비틀어진 덩굴이 엉켜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광안대교는 아담 출현 초창기 시절 폭파되어 길이 끊겼으니, 멀쩡한 대교는 좌수영교뿐이었다. 그마저도 왕복 6차선 도로 중 이용이 가능한 건 2차선 정도였다. 곽수환은 좌수영교를 향해 차를 내달렸다.

부산을 좌우로 나눴을 때, 바이올렛이나 레드로 지정되어 있는 해운대 쪽이 지금 저희들에게는 더 안전할 듯했다. 다행히 기름은 여유가 있기에 라이트를 끄고 사람이 살지 않는 구역을 찾아 나섰다.

캄캄해서 그런가 잘도 자네. 다리를 건넌 곽수환은 좀 더 깊숙한 곳으로 차를 몰았고, 옛 호텔들이 몰려 있던 해안가는 피했다. 곽수환은 동네 안쪽의 약국 간판을 보자마자 사각지대에 주차를 했다. 시동을 끄니 히터의 열기도 끊겼다. 자고 있는 석화를 깨우기는 싫었지만 여기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어깨를 천천히 흔들었는데도 여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들쳐 메야지 했더니 석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예요?”

“일단 내리자.”

곽수환이 먼저 내려서 주변을 살피고 석화에게 내려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린 구역이었을 때 운영되던 약국인지 약품이 바닥이나 진열대에 흐트러져 있었다. 도망칠 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일까, 약국 문이 잠겨 있었다. 곽수환은 철제 셔터 하단을 손으로 쥐고는 위로 확 잡아뜯어 올렸다. 바닥에 박혀 있던 고정 나사가 뜯겨져 나가고 셔터가 드르륵 위로 올라갔다.

손을 턴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석화도 뒤를 따랐다. 길고 가느다란 손전등의 전원을 켜니 어두웠던 약국 내부가 밝아졌다. 레인보우 시티 산하에서 제작된 약품들의 상태는 제법 멀쩡했다. 곽수환은 약품과 붕대를 찾아내 석화를 제조실 안쪽 의자에 앉혔다.

석화는 혹시 그가 다친 건가 싶어 놀랐지만, 자신을 치료하고자 한 것을 알고 스스로 붕대를 풀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상처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 석화의 팔뚝에 생채기를 남겨 놨다. 석화는 잔뜩 화가 난 곽수환을 올려다본 다음 자신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곪지는 않았고, 빠른 처치를 한 덕에 병원체 감염 위험도 적어 보였다.

“제가 할게요.”

석화는 그의 손에 있던 소독약을 가져와 침전물이 있나 확인하더니 뚜껑을 개봉했다.

“석 박사, 내가.”

동시에 석화가 제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삽시간에 들끓는 통증에 눈을 감은 석화는 입술을 안으로 말고 버텼다. 몇 초가 지나니 살갗이 지글지글 타들어 가던 고통이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다. 표정을 굳힌 곽수환은 말없이 상처에 연고를 짰다. 출혈은 없었기에 상처를 감싸지 않는 게 더 좋을 테지만, 가만히 누워있을 수는 없으니 붕대를 둘러야 했다.

“아프지.”

곽수환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참으면 돼요.”

“참지 마. 아프다고 말해. 석 박사 사실대로 잘 말하잖아.”

석화는 붕대를 꼼꼼하게 둘러주는 곽수환의 손목을 쥐었다. 제가 알고 있던 시원한 온기 그대로였다. 곽수환은 불에 덴 듯 움찔했다가 곧 석화가 만지는 대로 그대로 두었다.

“그럼 참을 만해요.”

“그게 그 말이지, 뭐가 달라.”

곽수환이 붕대를 핀으로 고정시키고는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손전등을 들었다.

“나가자.”

석화는 쓸 만한 약품 몇 개를 더 챙기고는 다시 지프에 올라탔다. 그가 향하는 여정이 어딘지는 몰랐다. 그래도 짧지만 푹 자고 일어난 덕인지 전신을 짓누르고 있던 피곤함은 조금 가신 뒤였다.

“곽 소령님……. 최호언 박사가,”

“이야기는 나중에.”

석화는 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차가 달리는 동안 곽수환이 준 생수를 몇 모금 마시고, 전투식량인 곡물가루 팩 안에 물을 넣어 흔들어 먹었다. 맛은 밍밍했다.

“기분이 이상해요.”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을 거야.”

자기도 다 안다는 식으로 씁쓸하게 대꾸했다. 석화는 아직 생채기가 남은 그의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그랬더니 그는 피하지 않고 몸을 기대오는 커다란 동물처럼 제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그게 아니라, 한 번도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냥 연구소에서 살다가……. 어느 날 뒤나 앞으로 고꾸라져 죽지 않을까 싶었어요.”

곽수환은 약국 안쪽 골목으로 내내 직진하다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석화는 말간 눈에 곽수환을 담고 있었다.

“소령님을 통해서 다른 세상을 알게 됐어요.”

그가 핸들에 잠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동생 위할 줄도 알고, 진짜 형은 형이네.”

곽수환은 석화가 자신을 위로한다고 생각했다. 석화 또한 그걸 느꼈지만 애초에 말주변이 없는지라 오해를 풀어주지도 못했다.

“진짜 팔은 괜찮아?”

“네. 곽 소령님.”

“응.”

“고환 만지고 싶어요.”

그가 핫, 기막힌 헛바람을 내뱉었다. 곽수환은 핸들에 기댄 얼굴을 옆으로 틀었다.

“내 불알이 석 박사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만지면 나아져?”

“그럼 다시 말할게요. 맨몸 껴안고 싶어요.”

석 박사가 진짜 사람 마음도 모르고.

곽수환은 다짜고짜 석화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감내해냈다. 저 말캉거리는 입술과 매끄러운 피부를 마구 빨고 매만지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참자, 일단 차도 숨겨두고. 곽수환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바로 올게.”

곽수환이 직접 차문을 잠그고는 권총만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택은 오양석의 집처럼 정원 옆에 주차장이 있는 형태였고, 창문은 전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곽수환은 현관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과 거실, 그리고 수납장까지 전부 열어 내부를 확인했다.

욕실 문을 여니, 머리카락이 욕조 밖으로 나와 있는 게 보였다. 손전등을 비추며 권총을 장전하고 다가갔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백골화가 진행된 시체였다. 죽은 지 꽤나 오래됐는지 벌레나 곤충은 보이지도 않았다. 욕조 외에 핏자국이 없는 것을 보아 아마도 자살한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곽수환은 샤워 부스의 천을 떼어서 욕조를 덮었다.

서둘러 정원으로 나왔더니 석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에 설마 싶었다. 곽수환이 재빨리 조수석 문을 열어 젖혔다.

“곽 소령님?”

조수석 밑에 숨어 있던 석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곽수환은 심장이 밑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왜 숨었어.”

“안전할 것 같아서요.”

말 그대로 밖은 위험천만하지만, 그렇다고 석화를 시티로 보낼 수는 없었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돌파구가 생길 테니 그동안 석화가 버텨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곽수환은 뒷좌석에 놔둔 군용 배낭을 챙겨 한쪽 어깨에 메고 말했다.

“안이 안전하기는 한데, 욕실은 들어가지 마. 어차피 물도 안 나오니까.”

“그럴게요.”

두 다리를 차 밖으로 내린 석화를 본 곽수환이 먼저 현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쿵, 석화는 차에서 울린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곽수환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조수석 밑에 숨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때도 괴상한 소리가 들렸었다. 뒷좌석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미 확인했기에 이 소리의 정체는 어쩌면 트렁크일 수도 있었다.

석화는 지프의 뒤에 매달린 예비용 타이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금 더 다가가서 어둑어둑한 트렁크 유리창 안을 내려다본 석화는 놀라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뭐 해.”

저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선 곽수환이 석화를 돌아봤다.

“곽 소령님…….”

석화는 곽수환에게 제가 본 것을 속삭였다.

“트렁크 안에 누가 있어요.”

그러나 곽수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저벅저벅 걸어왔다.

“들어가자.”

“안에.”

“무시해도 돼.”

발버둥을 치지 않는 걸 보면 아담은 아닐 테고, 분명 사람일 터였다. 웬만해서 곽수환의 말을 따르려던 석화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맨몸으로 껴안고 싶다며.”

“지금은……. 아니에요.”

“석 박사 너무하네. 사람 불 질러놓고 이게 뭐야.”

곽수환이 혀를 찼다.

그가 여닫이문 형식의 트렁크 문을 열었는데, 안에는 두 팔과 두 발목이 묶여있는 여자가 보였다. 재갈이 물린 나이 지긋한 여성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누구예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가 눈을 부릅뜨더니 몸을 마구 흔들었다. 곽수환은 몸을 비트는 여자를 들쳐 메고 안으로 걸었다. 고개를 바짝 들고 제게 붉은 안광을 빛내는 여자의 시선을 석화는 피하지 않았다. 빤히 쳐다봤지만 저와 안면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먼지가 쌓인 낡은 카펫에 여자를 내려놓은 곽수환이 재갈을 확 잡아 끌어내렸다.

“쿨럭, 컥.”

마른기침을 토해내자 곽수환은 배낭에서 물을 꺼내 얼굴에 대충 뿌렸다. 여자는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경계심을 잔뜩 세웠다.

“적이에요?”

석화도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로 물었다. 곽수환이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서 묶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온 말이었다.

곽수환은 물을 벌컥 들이켜더니 손으로 쓱 잔해를 밀었다.

“최호언네 엄마. 아니, 진짜 엄마가 맞기는 한가?”

석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곽수환의 소매를 꽉 쥐었다. 돌이 없는 대신 자꾸만 곽수환을 붙들게 된다는 걸 석화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는 금붙이였고, 입은 옷도 두꺼운 모피재질이었다. 멀쩡하게 서 있었다면 한눈에 부유층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법했다.

“……나무, 우리…… 희망.”

그녀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를 하고서 석화를 올려다봤다. 석화는 저 맹목적인 시선을 이미 받아본 바 있었다. 도망쳐 나온 최호언의 저택에서 말이다.

“드디어……. 드디어.”

감격하는 중년여성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석화는 소매를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은 곽수환은 물통을 얼굴 옆에 내려두었다.

“아주머니, 우리 석 박사 무사히 못 데려오면 내가 아주머니를 좀 이용할까 싶었거든. 무사히 구출했으니 내일 어디쯤에 내려주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석 박사 호기심이 장난이 아니어서.”

휙 날카로운 시선을 든 여자가 곽수환을 향해 퉤 침을 뱉었지만, 그가 피한 게 더 빨랐다.

우룡산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타이밍 좋게도 이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경호원을 셋이나 대동하고 사람들에게 식료품을 배급하는 중이었기에 에덴동산에서 직급이 높은 자일 거라 예감했고, 생각보다 더 대어였다.

최호언에 대해서 알아볼 때 놈의 부모 사진도 확인했던 곽수환이었다. 여자가 누구인지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차피 우룡산에서 힌트를 얻지 못하면 이 소령의 좌표대로 여자를 찾으러 갈 예정이었다. 발품을 팔 필요도 없이 배급을 끝내고 차로 내려가는 걸 기다렸다가 지프로 받아버렸다.

은신처가 어디인지 죽어도 알려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기에 경호원 팔 한쪽을 분지르고, 나머지 살점을 포를 뜬다고 협박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여자는 결국 두 놈의 팔을 다 분지르고 났을 때서야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 부류는 직접 협박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게 편했다. 애초에 신도들에게 식량을 배급한다는 것 자체가 이타심이 뛰어난 사람일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서펀트가 석화를 쉽게 내놨지. 물론 석화가 2층에서 휙 뛰어내릴 거라는 변수는 서펀트에게도 없었을 테지만, 차후를 기대하겠다던 놈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석 박사.”

생각에 잠겨 있던 곽수환이 입을 뗐다.

“최호언 박사를 낳았습니까?”

석화는 대답도 하지 않고 여자를 향해 이상한 물음을 던졌다.

“원호 박사의 부인이세요?”

아무래도 그사이 서펀트에게 이상한 세뇌라도 당했는지 석화가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말을 꺼냈다.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내내 트렁크에서 시달린 탓인지 힘겹게 다잡은 동공이 돌아가려고 했다. 석화는 놀라 그녀의 이마를 짚고 숨을 확인했다. 뜨거운 손길에 닿은 여자는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길게 숨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다행히 엄청난 피로감에 기절했을 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왜 납치한 거예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어차피 이 여자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나 믿지?”

변명을 늘어놓는 곽수환이 석화의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꽉 붙들어오는 체온이 뜨거웠다. 곽수환은 석화를 데리고 그나마 깨끗한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을 닫고 석화를 그 앞에 세웠다.

“석 박사, 이야기 압축할 줄 알지?”

석화는 의미를 헤아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했다. 긴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석화는 마른침을 한 번 삼켰다.

“최호언 박사가……. 원호 박사님 아들이래요.”

“뭐?”

이건 너무 압축했나 싶었다.

석화는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곽수환의 허리를 껴안고 그를 차분히 가라앉혔다. 사실 곽수환이 아니라 저를 위한 행동 같기도 했다. 어깨에 뺨을 맞대고 이렇게 몸을 전부 기대고 있으면 안정감이 찾아왔다. 석화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 곽수환만 어설프게 손을 들었다가 금방 석화의 몸을 감쌌다.

“……우리 엄마, 곽수환 소령님의 부모님, 그리고 최호언 박사의 아버지 원호 박사요. 이 넷이서 같이 유전자편집 연구를 했어요. 돌연변이를 만들기 위해서요. 배아를 상대로 실험을 했고……. 우리도 그 실험체 중 하나래요. 전부 레인보우 시티가 시킨 일이고, 거기에 반발하기 위해 에덴동산을 만들었대요.”

이채윤의 말에 따르면 서펀트에게 납치당하던 순간 석화가 사진을 흘렸다고 했다. 서펀트가 그렇게 어설플 리가 없었다. 아마 사진을 떨어뜨린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놔둔 것일 테니, 결국 놈은 새로운 사과를 두고 간 셈이었다.

그 사진으로 저에게도 의심이 생겼고 부산까지 내달려오는 동안 오만 가지를 생각했다. 사진 속 단발머리 여자가 석화의 어머니이자 연구원이며, 제 부모와 같은 연구실에 있었다는 가설까지.

“돌연변이들에게 결함이 있는 게 유전자편집 때문이라고? 그럼 시티에 있는 돌연변이들이 전부 실험체라는 거고?”

“……아마도요.”

세컨드 마스터는 서펀트만큼이나 석화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면역체일 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인가?

“최호언이 원호의 아들이라면, 저 여자는 친어머니가 아니겠지.”

여자의 밀고로 처형을 당한 남자가 원호 박사는 아니었다.

“최 박사가 그랬어요. 자신도 시티의 시민이 아니었는데, 우리를 만나기 위해 시티로 왔다고요.”

석화는 고개를 휙 들었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곽수환의 입술이 가까웠다. 곽수환도 손에 힘을 주어 석화의 허리를 좀 더 바짝 당겼다.

“원래는……. 곽 소령님이 에덴동산에 합류할 예정이었대요.”

‘네놈 여기 있지 말고, 화선 강당으로 가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내 추천이라고 말하면 될 거야.’

곽수환은 아주 오래전 죽고 없는 애꾸눈을 떠올렸다. 차를 구해주고 반군 세력이 있는 화선 강당으로 자신을 보내려던 어른이었다. 그러나 브로커를 통해 오양석 박사가 저를 시민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반군과는 길을 달리하게 됐다.

설마, 그때 화선 강당에 있던 세력이 에덴동산이었나?

불현듯 곽수환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었다. 서펀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도 없고, 사실이라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석화야.”

매끄러운 입술이 벌어지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래도록 떨어져 있다가 마주한 사람들처럼 뺨을 맞대고 피부의 감촉을 재차 느꼈다. 아직 노란 멍이 들어있는 석화의 눈가에 키스를 하자, 간지러운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입술에 닿는 그 미세한 움직임에 좀 더 갈증이 나는 듯했다. 콧등을 살짝 깨물고 쓱 고개를 숙여 석화의 입술에 안착했는데, 입이 꾹 다물려 있었다.

“벌려 봐.”

“밖에, 읍.”

곽수환이 석화를 더 문으로 밀어붙이고 혀로 파고들었다. 그의 등을 껴안고 있던 석화는 어깨까지 등 뒤로 돌려 감싸 안았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곽수환의 근육이 더 단단해지니 석화는 마치 돌 같다고 생각했다. 숨이 부족해 고개를 뒤로 젖히자 따라오는 그가 쪽쪽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면서 말을 꺼냈다.

“하, 레인보우 시티고 뭐고, 둘이 도망칠까?”

“위험, 읍, 해요.”

“내가 있는데 왜 위험해.”

석화가 생명의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곽수환은 입을 빨고 안쪽을 거칠게 핥았다.

섹스를 한 여파가 아직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쩐지 석화는 뒤가 움찔거렸다. 곽수환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더 참지 못하고 몸을 확 들어 올리니, 석화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뺨을 감쌌다.

“절 넘기면 곽 소령님은 안전해질 거예요. 나 때문에 수배 받는 거니까요.”

“수배 떨어진 건 또 어떻게 알았대.”

곽수환이 턱을 잘근 깨물었다.

“넘길 거였으면 내가 부산까지 좆 빠지게 내려왔을 것 같아?”

석 박사 내 거야. 아무도 안 줘. 석 박사가 스스로 나한테 뛰어내렸잖아.

“곽 소령님.”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자못 심각한 목소리였다.

“좆 안 빠졌어요. 엄청 커요.”

석화는 밖의 사람을 의식했는지 속삭이고는 품에서 내려왔다.

곽수환은 가슴팍을 밀어내며 빠져나가려는 석화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빠진 것 같은데, 박사님이 좀 봐줘.”

어리광을 부리는 곽수환에게 석화가 잠깐 흔들렸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하자, 응?”

석화의 엉덩이에 곽수환의 단단한 게 와 닿았다. 제복 바지 겉으로 실루엣을 드러낸 좆의 기세가 엄청났다.

“사람 있어요.”

“자잖아.”

기절한 걸 잔다고 표현하다니. 석화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성욕에 간신히 방파제를 세워 막았다. 여기서 더 단칼에 잘라내지 않으면 물이 범람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싫어요.”

하, 내쉬는 한숨마저도 목덜미를 간지럽혀 몸이 움츠러들었다.

“밖에 있는 사람, 안전한 데다 내려다두고요.”

기절한 사람이 있는데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섹스하는 건 석화 나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여태 석 박사는 질질 넘치게 싸기도 했는데, 난 한 번도 못 쌌거든? 언제까지 정액 모아둬야 해. 내 불알 터지면 제일 슬퍼할 사람이 석 박사 아니야?”

휙 뒤를 돌아본 석화의 얼굴이 웬일로 붉어져 있었다. 수치심은 거의 없다시피 한 석화가 어떤 점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질질 안 쌌어요.”

“쌌는데.”

“안 쌌어요.”

석화가 강경하게 대꾸했다. 곽수환은 석화 뒤로 놓여있는 침대를 흘끔 봤다.

“다시 해볼까?”

걸어가 이불을 치우자 그 밑에 숨겨져 있던 시트는 깨끗했다. 곽수환은 제복 코트를 벗어서 시트 위에 깔았다. 석화보고 와서 누우라는 듯 검지로 콕콕 제복 위를 가리켰다.

“안 해요.”

“왜, 질질 안 쌌다며. 그럼 지금 해도 안 쌀 거 아니야.”

문 앞에 덩그러니 서 있던 석화가 꾹 다문 입술을 열었다.

“……쌌어요.”

곽수환은 참지 못하고 황당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고집머리가 있는지라, 여기서 더 밀고 간다고 해도 석화의 거절은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와서 누워봐.”

고자세로 서 있는 석화를 곽수환이 붙잡아 끌어왔다. 억지로 하는 줄로만 아는지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사람을 뭐로 보고. 곽수환은 먼지가 쌓인 베개도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한숨 자둬. 아침 되면 바로 이동해야 돼.”

“소령님은요?”

“아직은 괜찮아.”

곽수환도 석화를 찾아낼 때까지 잠 한숨 못 잤지만, 둘 다 자버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전 잤으니까 곽 소령님도 조금 자요. 제가 보초 설게요.”

“석 박사 보초 믿고 자겠어?”

그건 그렇다는 듯한 표정에 곽수환이 석화를 제복 위에 밀어 눕혔다.

“정말 졸리면 부탁할 테니까 걱정 말고 자.”

짧게 잤다고 해도 석화는 체력에 부담이 쌓인 상태였다. 전처럼 연구소에만 있는 게 아니라 돌아다녀서 그런지 체력은 전보다도 좋아졌지만 말이다.

“죄송해요.”

석화는 반듯하게 누워서 두 손을 제 가슴팍에 올려두었다. 곽수환은 그 빈손을 보더니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서 조그만 조약돌 하나를 꺼냈다. 우룡산에서 주운 모양새가 좀 특이한 돌이었다. 재질은 현무암인데 메추리알처럼 생겨서 한 손에 쏙 넣기에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망가진 야생화에 미련을 둘 필요는 없었다. 석화는 꽃보다 돌을 좋아했으니까.

석화는 그 돌이 마음에 드는지 손으로 거칠거칠한 부분을 굴렸다.

“돌이 그렇게 좋아?”

“네.”

유전자변형으로 태어났다고 하니 괴이쩍은 집착특성을 가진 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곽수환이 아는 유전자변형 돼지만 해도 몸집이 커진 대신 눈과 귀가 퇴화해 먹이에만 집착했다.

곽수환은 석화가 잠이 들 때까지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이런 먼지투성이 방에서 자는 게 익숙하지 않을 텐데, 석화는 다행히 고른 숨을 내쉬었다. 곽수환은 창문의 철창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시티에서 최호언의 어머니로 등록되어 있는 여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주방에 있던 라디오를 가져와 여자를 감시하면서 주파수를 맞춰 나갔다. 정규 라디오 방송에 중요한 소식이 전달될 리는 없으니, 군용 암호 방송 주파수를 찾아냈다.

지금은 치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 방송은 전혀 없었다. 곽수환은 볼륨을 최대로 올려두고는 주방에 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꺼내왔다. 잭나이프로 통조림을 따고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칼로 꽂아 씹어 먹었다.

희한하게도 세컨드가 석화를 데려오라고 한 시점과 서펀트가 석화를 납치한 시점이 비슷했다. 둘이 한통속이 아닐까 잠시 의심도 했지만, 서펀트는 석화가 우도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동요를 내비쳤었다.

곽수환은 나이프를 쥔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전에는 아버지가 아담으로 변한 이유에 대해서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 그 스스로 아담혈액을 주사했을 수도 있고, 인슐린 주사용액을 누군가 오염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가졌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짓인가?

헝클어져 있던 큐브가 조금씩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에덴동산을 만든 부모에게, 그것을 알아차린 시티가 보복을 한 걸지도 모르지.

그들이 한두 개의 배아로 실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수였을 테고, 신체의 결함이 있는 아이들은 아마 전부 폐기처분 했을 터였다. 곽수환은 어째서 석화의 어머니가 연구직에서 물러났는지를 짐작해봤다.

체력이 바닥으로 태어난 석화도 처분대상 중 하나이지 않았을까? 또한 저희 형제를 몰래 숨겨뒀던 이유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저보다 더 먼저 태어난 형제가 있었을 가능성.

유전적인 결함이 있어 처분을 당하고, 부모는 더 이상 아이를 잃을 수 없기에 시티 밖으로 저희를 내보냈다는 심증 말이다.

“……생명의 나무가 선악을 알게 되는 날 구원이 내릴지어니.”

곽수환이 소파에 앉아 시선만 내렸다. 정신을 차린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주머니, 정신 차려요. 구원 같은 게 어디 있어.”

“불쌍한 아이야. 폭력과 힘은 결국 구원 앞에 굴복하고 만다. 아직 너에게 생명의 나무가 함께하니 안전한 것이란다.”

아무래도 이 여자가 말하는 생명의 나무는 석화인 듯했다. 곽수환은 파인애플 하나를 더 찍어서 씹어 먹었다.

“그래? 당신네 생명의 나무가 헬기가 필요하다는데, 아줌마네 헬기 있지?”

여자는 눈에 의아한 빛을 띠었다.

“방금 석 박사 말한 거 아니야?”

“생명의 나무의 사회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단다.”

최호언이 세뇌를 잘도 시켰나 본데.

“어쨌든 석화 박사가 헬기가 필요하다니까 좀 도와주지? 구원을 받으려면 저 구원자한테 잘 보여야 할 거 아니야. 근데 웃긴 게 그쪽 수뇌부를 서펀트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아? 서펀트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내쫓게 만든 장본인인데.”

“뱀은 지혜의 생물이지. 선악을 알게 했으니 또 다른 구원이 아니겠니? 아이야,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거라.”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종교에 맹목적인 믿음을 갖는 걸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닌데, 아주머니가 그렇게 믿고 따르는 에덴동산을 만든 장로 중 두 사람이 우리 부모님이라네? 우리 부모님에게 엄청난 신앙이 있던 것도 아니니, 뭔가 이해관계가 있었겠지. 나보고 그런 종교를 믿으라는 게 무리지 않아? 그것보다 최호언, 당신 친아들 아니지?”

“내 아이가 맞다.”

“마음으로 품은 아이?”

심드렁하게 물으니 여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곽수환은 칼에 묻은 과일즙을 툭 털어냈다.

“반군으로 활동하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인데 왜 남편을 밀고했어?”

“무지했으니까. 레인보우 시티를 믿었고, 사실대로 말하면 내 남편을 살려준다고 했어. 내가 밀고한 게 아니라 밀고를 하게끔 종용했지. 그랬더니 내 남편이 처형당했고.”

여자에게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과거인지 눈시울이 붉게 타올랐다.

“그래서 마음 둘 곳을 찾았다 이건가. 당신들이 말하는 구원자 같은 건 없으니까 헛된 희망은 버리지 그래.”

“어째서? 너도 구원받았으면서.”

움찔, 곽수환은 잭나이프를 쥔 채로 굳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따라와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겠지.”

그는 곧 사나운 눈을 하고는 여자를 노려봤다.

“맞아. 그런데 내 구원자지, 당신들의 구원자가 아니야.”

“아이야, 헛된 소유는 정작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한단다.”

소귀에 경 읽기가 이런 건가. 곽수환은 코웃음을 치더니 소파에 등을 기댔다.

“헬기가 필요하면 내어주마. 여객선이 필요하면 그것도 내어주겠어.”

“그리고 당신을 놓아 달라?”

“우리와 함께하자꾸나. 나는 네 어머니가 되어줄 수도 있단다.”

“미안하지만 내 가족은 석 박사 하나뿐이라.”

“너 혼자 품기에는 너무 거대한 나무다.”

“그 거대한 나무가 나 없이는 죽고 말걸.”

“너 없이도 잘살지 않았니? 오히려 너를 만나서 위험에 빠지고, 이렇게 힘들어졌단다.”

“아, 그건 좀 찔리는데.”

곽수환이 잭나이프의 칼날을 닫아서 뒷주머니에 꽂았다.

“서펀트는 최호언이 아니라 아줌마가 해도 되겠네.”

“곽수환, 곽지환.”

“입 다물어요.”

“우리가 품을 새로운 강이었지. 너를 데려간 오양석 박사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감화가 되었단다. 내가 너의 협박 때문에 은신처를 알려준 줄 아니? 너 또한 우리가 품을 아이란다.”

[치직, 치직, 백호 산행, 참매 35, 추적 재개]

라디오에서 암호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백호는 곽수환이며 35라 함은 부산 그린 구역을 뜻했다. 벌써 부산까지 따라붙은 듯했지만, 지프의 추적 장치를 떼어냈기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수준일 거다. 그래도 앞으로 딱 두 시간만 여유를 두기로 했다.

“너는 생명의 나무를 우리에게 이끌 인도자였지. 그 외의 감정은 필요치 않아.”

이것만큼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오양석의 자택이 있는 레드구역에 가서 분탕질을 쳤던 이유는 에덴동산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컨트롤러로서 활동을 속이기 위해 영창까지 갈 뻔했고, 사면을 받는 대신 석화의 경호를 맡게 됐다. 만약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상부에 에덴동산의 일원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전후관계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는.

곽수환의 기분이 급격하게 바닥을 쳤다. 누군가의 장기말이 되는 건 사양이다.

“골 때리네. 그래서 석 박사가 뭐로 당신들을 구원하는데?”

“그 존재가 구원이지. 우리의 신념과 신앙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됐고.”

“아, 면역체? 근데 이걸 어째. 석 박사 혈액은 여전히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되거든.”

“그러나 승리했지. 역경과 고뇌를 거친 나무야말로 진정한 구원자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지. 곽수환은 더는 말을 섞기를 포기했다. 집 안을 돌아다니며 쓸 만한 통조림과 남아 있는 생수를 차에 실어 날랐고, 담배를 태우며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그어, 그어억, 컥,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담 한 놈이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변이된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게 저대로 놔두면 조만간 신체의 움직임이 정지할 듯했다.

곽수환의 담뱃불을 본 아담이 칵, 크칵,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휘적거리며 다가왔다. 입부터 귀까지 살갗이 벗겨져 잇몸이 드러난 모습은 그로테스크했지만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곽수환은 다가오면 박살을 내버릴까 하다가 제가 먼저 걸어가서 앙상한 몸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지프의 뒷문을 열어 여분의 가죽장갑을 꺼내 손에 끼웠다. 어떻게든 기어와 저를 물려는 아담의 머리를 쥐고 바닥에 얼굴을 찍어 이를 전부 부러뜨렸다. 곽수환은 마저 피운 담배를 그 옆에 비벼 껐다.

그는 곧장 놈의 목덜미를 잡고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담을 보자마자 내내 평온을 지키던 여자가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 방에 구원자가 있다면서. 당신이 이놈한테 물려도 구원자가 있으니 구해주겠지?”

“믿음에……. 의심을 갖지 않는다.”

“대단하네.”

곽수환은 버둥거리는 아담을 바닥에 내리찍고는 감흥 없이 말했다.

“내가 봤던 책에서는 어떤 양반이 세 번이나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데, 아주머니는 그런 것도 없네. 내가 실제로 이놈을 당신에게 안 물릴 거라고 생각하지?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뻔히 아는데? 멀쩡한 군인들 잡아다가 온갖 실험까지 했으면서, 그런 사람이 석 박사를 가지고 구원자니 뭐니 하면 안 되지. 잘 가요, 아주머니.”

아담의 얼굴을 목덜미 가까이 가져다댄 순간이었다.

“곽 소령님……!”

방문 앞에 선 석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곽수환은 이가 부러진 채로 다닥거리는 아담을 뒤로 확 잡아 뺐다. 직접 머리를 부수지 않고 칼로 뒤통수를 찔러 움직임을 정지시켰다.

제복 코트를 쥐고 있는 석화는 제 눈을 의심하는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농담이야, 자기. 그냥 장난 좀 쳐봤어.”

이리 오라는 듯 두 손을 펼친 그는 곧 낭패한 듯 장갑을 벗었다.

“응?”

미소까지 덧칠하니 정말 짓궂은 장난을 치려던 사람처럼 보였다. 석화도 그가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했음에도 어째서인지 묘한 낯섦이 느껴졌다. 그에게 보호받고 목숨을 몇 번이나 빚졌지만, 곽수환에 대해 아주 잘 안다고 자부하지는 못한다. 아는 건 그가 하자 없는 돌연변이 같다는 것과 그 누구보다 자신을 잘 챙겨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방금 같은 행동은 적응되지 않았다.

“왜 벌써 일어났어?”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곽수환이 다가오니 그를 나무라는 시선을 숨길 수가 없었다. 석화는 눈을 내려 카펫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를 확인했다. 아담의 피로 모피가 물들어 있었지만 감염의 징후는 없었다.

“안 올 거야?”

곽수환은 마치 상처받았다며 눈썹을 슬쩍 찡그렸다.

“그런 장난은 하지 마세요.”

“알았어. 앞으로는 안 할게.”

석화는 그제야 앞으로 걸어갔다.

“슬슬 출발할까?”

“어디로요?”

“가면 알아.”

그는 배낭을 한쪽 어깨에 메고 여자의 다리를 묶은 밧줄을 끊어냈다. 뒤로 묶어두었던 손도 이번에는 앞으로 이동시켜 재차 포박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터라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하는 그녀를 석화가 옆에서 부축했다. 그걸 보다 못한 곽수환이 직접 여자를 들쳐 멨다. 트렁크에 실으려다가 혀만 차고 여자를 뒷좌석에 태웠다.

여자는 말없이 묶인 두 손만 잘게 떨었다. 아마 구원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아담에게 감염됐을지도 몰랐다. 장난이라고 둘러댔지만, 그때 곽수환의 얼굴은 아무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래도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석화를 향한 곽수환의 집착이 상당했기에, 무사히 돌아간다면 곽수환을 끌어들이기 어렵겠다고 보고를 할 셈이었다. 무사히 돌아갈 수나 있을까? 다만 그녀는 석화가 있는 이상 곽수환이 잔인하게 굴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석화는 곽수환이 건넨 건빵봉지를 뜯어서 여자의 손에 한 움큼 넘겨주었다. 그녀는 석화가 넘긴 건빵을 먹지 않고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아주 식량이 넘치지?”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나머지 한 움큼은 곽수환에게 넘겼다.

“석 박사나 먹어.”

그는 조수석의 벨트를 끌어와 채워주고는 시동을 걸었다.

“아줌마, 나 쫓아내려온 사냥개들 때문에 부산항에 내려줄 수는 없고, 대충 이용 가능한 공중전화 앞에 내려줄 테니까 알아서 가요.”

곽수환은 기어를 넣고 액셀 페달을 세게 밟았다. 석화는 그동안 곽수환이 기어를 어떻게 넣는지 유심히 지켜봤다. 1단, 2단, 속도에 맞춰 머릿속으로 같이 기어를 그렸고 최호언의 차에서 제대로 외운 게 맞는 듯했다.

석화는 남은 건빵을 꼭꼭 씹어 삼키며 생수로 입을 축였다. 배가 차자 보조서랍에 있는 구강티슈로 이를 꼼꼼하게 닦고, 코인티슈에 물을 부어 티슈가 부풀기를 기다렸다. 곽수환은 펼친 티슈로 얼굴을 닦는 석화를 곁눈질했다.

깔끔한 성격이니 찝찝해 하는 걸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샤워하고 싶어?”

“괜찮아요.”

도시에 비는 자주 내리지 않지만 얼어붙은 연못 정도는 찾을 수 있었다. 육사에 있을 당시 한겨울에도 연못에 뛰어들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몸을 감싼 건 물이 아니라 송곳이었다. 저는 괜찮아도 석화가 얼음장에서 몸을 씻기는 어려울 것이다.

“헬기가 필요하다면서.”

뒤에 있던 여자가 말문을 열었다.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부산항으로 갈 생각 없다니까.”

“부산항 말고 다른 곳에도 있단다.”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에 석화는 조금 신기해했다.

“내가 그쪽을 뭘 믿고.”

끼익,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은 곽수환이 공중전화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뒷좌석의 여자를 끌어내리고 잭나이프로 공중전화의 내선 끈을 끊어버렸다. 상체에 가려진 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석화는 미처 볼 수가 없었다. 곽수환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운전석에 올라탔다.

두 손이 앞으로 묶여있는 여자를 쳐다보자, 그가 급격히 액셀을 밟았다. 석화의 몸이 휙 앞으로 쏠렸다.

“곽 소령님.”

“그린구역 넘어와서 안전한 데다 내려줬으면 됐잖아. 그리고 우리 지금 쫓기는 신세거든? 부산까지 참매들 내려왔어.”

사실 그린구역은 여기서 좀 떨어져 있지만, 운이 좋다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거다. 곽수환은 주파수를 맞춰둔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헬기를 탈취할 수 있었다면 곧장 부산에서 제주도로 갈 생각이었다. 불가능한 일이 되었으니 조금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방편을 찾아냈다. 이곳에서 애써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곽수환은 레인보우 시티의 지도를 넓게 펼쳐 X 표시된 부분을 거르고, 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죽 연결했다.

“해남……?”

“알아?”

“처음 들어요.”

레인보우 시티의 지도는 지휘관이나 구할 수 있었고, 일반 시민에게 반출도 금지였다. 박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호언도 21바이올렛 구역에서 부산까지 철길을 따라 내려갔던 것이다.

지프로 달리는 동안 여기저기서 폐허가 된 곳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방치된 지 오래된 집의 주인은 이제 덩굴들이었다. 그 위에 까마귀 떼가 줄지어 앉아 지프가 이동하는 것을 지켜봤다. 감염이 되지 않는 조류는 개체수가 늘어났고, 그만큼 식량으로 삼기에도 좋았다. 시티 밖의 사람들은 대부분 부락을 이뤄 살았으며 그들의 주 식량은 저런 새들이었다.

“곽 소령님.”

“응.”

그래도 한적한 시골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쫓기는 신세라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제가……. 운전해 봐도 될까요?”

곽수환이 눈을 조금 크게 키웠다.

“배운 적 없잖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곽 소령님도 자야죠.”

부산을 뒤지고 있는 참매는 자신들의 목적지가 해남인 사실은 아마 모를 거다. 꽤나 거리를 벌려 두었으니 곽수환도 어디 풀숲에 차를 세우고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지도는 볼 수 있겠어?”

“가능할 것 같아요.”

여태 곽수환이 지도를 따라 이동할 때마다 석화도 같이 눈으로 따라갔었다.

“아담 나타나도 그냥 받아버릴 수 있어? 그럼 운전대 넘겨주고.”

“……그럴게요.”

미심쩍기는 했지만 곽수환은 일단 운전석을 석화에게 내주었다.

늘 운전은 그의 몫이었는데 서로의 위치가 바뀌니 한껏 긴장감이 솟았다. 석화는 봤던 대로 차분히 차를 몰자며 기어를 느릿하게 넣었다. 조금이라도 안 되겠다 싶으면 운전대를 뺏으려던 곽수환이었는데 문제없이 기어를 넣고 페달을 밟는 모습에 얼떨떨해졌다.

분명 동작이 느리긴 한데 차를 모는 데 지장은 없어 보였다. 곽수환은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요?”

석화는 정면만 보면서 물었다.

“나무늘보 같아서.”

“안 같아요.”

“나무늘보가 뭔지는 알아?”

“본 적은 없어요. 근데 이름이 느려 보여요.”

“나도 본 적은 없는데 책에서 엄청 느리다고 하더라.”

곽수환이 피식피식 웃음을 멈추지 못한 채 머리를 헤드 레스트에 기댔다.

“해남은 왜 가요?”

“거기 내 보물창고가 있거든.”

팔짱을 낀 곽수환이 눈을 감았다. 걱정은 되지만, 제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면 석화도 부담을 가질 터였다.

끼이익! 급작스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석화가 핸들을 꽉 쥐고 놀란 눈을 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운전대를 도로 되찾으려는 때였다.

“고라니요.”

풀숲에서 튀어나온 고라니는 이미 저 반대로 뛰어가는 중이었다.

“고라니는 치라는 말 없었잖아요.”

운전대를 빼앗기기 싫은지 석화는 평소보다 말을 빠르게 늘어놓았다. 빼앗길세라 1단 기어를 넣고는 다시 출발했다.

“잘할 테니까 걱정 마요.”

2단 기어를 넣어 가속을 붙이자 곽수환도 재차 눈을 감았다.

“잘 부탁해, 형.”

여기서 더 신경을 써봤자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자버리자 싶었다. 곽수환도 이틀 이상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살짝 멍한 상태였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자는 타입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석화는 그동안 낡은 표지판과 지도를 번갈아 가면서 확인했다. 날이 밝아서 다행이었다. 궂은 날씨였다면 운전을 직접 하겠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을 거다. 속도를 올릴 때마다 기어를 다시 넣어주고 묵직한 핸들을 꽉 쥐었다. 군용 지프는 핸들이 빡빡해 꺾을 때마다 힘을 잔뜩 줘야 했다.

운전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건 아침 10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런데도 앞만 보고 달리는 소처럼 정면의 도로를 제외한 다른 곳은 볼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밖의 세상을 알기엔 충분했다.

쉘터를 벗어나 도로를 종횡무진 다니는 모습은 꿈속에서조차 겪어본 적 없었다. 엔진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릉거리며 핸들을 울렸다. 도로를 덮친 마른 풀줄기에 차가 덜컹거리기 일쑤였지만, 직접 운전을 해서인지 멀미가 일지는 않았다.

꼬리뼈부터 머리끝까지 전기가 통하듯 찌르르했다. 그리고 어쩐지 눈에 물기가 서리는 것만 같았다.

삼십 년이 넘도록 제주도나 여의도만 알았고, 그곳에서조차 학습센터와 쉘터에서만 지냈다. 그래서 오양석은 저를 종종 집으로 초대했던 것인가? 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연구실에만 박혀 있는 연구원이 불쌍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차창을 비추는 해의 기울기가 달라지는 모습조차도 경이로웠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그 누구도 쫓아오는 사람 없이, 레인보우 시티도 상관없이 자유로워질 것만 같았다.

속박된 삶이 당연해 그게 자유인 줄로만 알았다. 자주적인 삶에 대해 돌이켜본 적도 없으니 저는 여태 레인보우 시티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희망의 시작, 땅끝 해남]

이윽고 낡았지만 선명한 환영표지판이 보였다.

***

곽수환이 눈을 뜬 건 해남에 들어와 석화가 길을 헤맬 때였다.

목적지가 있는 해남의 달마산은 어찌어찌 찾아냈는데, 헬기장까지 가는 길은 와본 사람도 헤맬 정도였다. 곽수환은 그럼에도 고개만 비스듬히 꺾어 석화를 구경했다. 정면을 향해 한껏 집중한 석화는 이제껏 중에 가장 심각해 보였다.

“석 박사, 너무 밟는 거 아니야?”

곽수환은 잠긴 목소리를 일깨우며 생수로 목을 축였다. 달마산의 비포장도로를 오르던 석화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일어났어요?”

겨울이었기에 망정이지 수풀이 우거진 여름이었다면 이미 한참 전에 길을 잃었을 것이다. 곽수환은 차체에 내장된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1시. 나름 깊은 잠을 잤던 터라 피곤함은 덜어낼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내가 할게.”

곽수환이 조수석에서 내리자 석화는 운전석에서 곧장 옆으로 이동했다. 기력이 다 빠져서 내릴 힘도 없었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운전석으로 와 핸들을 쥐니 석화의 열로 뜨끈뜨끈했다. 괜찮은가 싶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석화의 뺨에 홍조가 서려 있었다. 아픈 게 아니라 뭔가에 한껏 흥분을 한 얼굴 같았다. 그게 퍽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뒤흔들었다.

곽수환은 지프를 다시 출발시켜 헬기장이 있는 방향으로 페달을 밟았다.

“놀랐어. 운전 잘하더라.”

그의 칭찬에 석화는 괜히 찔려했다. 그가 자는 동안 몇 번이나 기어를 잘못 넣어 차가 멈출 뻔했기 때문이었다.

“잘하진 않아요.”

“아니야, 양상훈이 면허 허가 받을 때보다 낫던데. 그 새끼는 1단 기어 외우는 데만 석 달 걸렸을걸.”

힘으로 기어도 몇 번 부숴먹었지만.

석화는 아직도 손이 저릿저릿한지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십 분 정도 차를 타고 올랐을까, H 로고가 새겨진 헬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조차도 메마른 잡풀이 무성해 희끗희끗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그 반대편으로 이동식 주택이 하나 있었는데, 특이하게 목조가 아닌 철로 만들어진 집이었다.

곽수환은 핸들을 꺾어 그 뒤편에 지프를 세웠다. 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가 석화에게도 얼른 내리라며 손짓했다. 그는 뒤쪽의 철문을 툭툭 발로 차더니 도어록 덮개를 열어 비밀번호를 막힘없이 눌렀다. 석화가 차에서 내리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곽수환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철문을 힘주어 열었다. 안에서부터 매캐한 먼지 냄새가 코를 훅 스쳤다. 한동안 환기를 시킨 뒤에야 석화와 함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대신 차량용 배터리가 한쪽 벽면에 빼곡했다. 곽수환이 배터리를 이용해 전구를 밝히자 어두웠던 내부가 빛으로 환해졌다. 석화는 주변을 빙 둘러보면서 입을 벌렸다. 나머지 벽면에는 권총과 기관단총, 망원경이 달린 저격총이 수십 개나 매달려 있었으며 정체 모를 열쇠들도 다양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내 보물창고.”

곽수환이 환풍기를 가동시키고는 제복 코트를 벗었다. 이어 셔츠를 툭툭 풀면서 한편에 마련된 샤워 부스의 문을 열었다. 끼릭, 끼릭, 샤워콕을 돌리니 놀랍게도 위에 매달린 수도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마간 물을 흘려보낸 곽수환이 옷을 전부 벗었다. 전라인 그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탄탄해 보이는 피부의 굴곡이 유려해 석화는 홀리듯 그에게 다가갔다. 또한 샤워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샤워기도 아닌 둥그런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졌다.

엄청난 추위가 머무른 산이었기에 좀 더 그에게 맞닿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전라가 된 석화는 곽수환의 몸을 껴안았다. 아무리 그가 시원한 체온을 가졌다고는 해도 이런 추위에서는 뜨겁게만 느껴졌다. 얼음 같은 물을 고스란히 맞는 곽수환이 몸을 돌려 석화를 껴안았다. 거센 물줄기가 곽수환의 등에 부딪히니 석화에게는 차가움이 희석되어 돌아왔다.

둘만의 산에서 그는 웃으며 석화의 이마를 쓱 쓸어 올렸다.

“우리 아담과 이브야?”

웃음기 섞인 그의 말대로 세상에 저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석화는 곽수환의 머리를 감싸 안고 제 입술로 내렸다. 흘러들어오는 차가운 물과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뒤섞여 습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물이 매개체가 되어 둘 사이를 더욱 밀착시켰다. 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어낸 석화가 속삭였다.

“우리……. 여기서 살아요?”

“그럴까?”

이곳까지는 시티의 추적이 붙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산짐승을 잡아먹으면서 산다면 어떻게든 목숨부지 못 하라는 법도 없었다. 그러나 쫓기는 신세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석화는 곽수환의 어깨에 뺨을 기대면서 차가운 물을 한껏 맞았다.

“앞으로 석 박사는 제주도로 갈 거야.”

석화는 고개만 끄덕했다.

서울에서 부산, 그리고 해남으로 넓은 세계를 경험했으니 다시 좁은 세상으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인상 깊었던 이날들을 돌이킨다면, 적어도 상상할 것도 없던 옛날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한 가지 두려운 점은 있었다. 세컨드가 저를 우도로 불렀다는 건 실험체로 삼겠다는 뜻일 수도 있기에.

석화의 손이 곽수환의 엉덩이에 닿자 근육이 딱딱해졌다. 석화는 굴곡진 그의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면서 고개를 들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석화는 곽수환의 몸 이곳저곳을 손에 담아두고 싶었다. 곽수환은 그런 것도 모르고 혹시나 석화가 삽입하고 싶어 하나 난감해했다. 자기는 했는데 곽 소령님은 왜 안 되느냐는 말을 한다면 그도 할 말은 없었다. 다행히도 석화는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손을 쓱 내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곽수환의 성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석화는 제 뱃가죽에 맞닿아오는 성기를 내려다봤다. 살갗을 쿡쿡 찌르는 감촉이 어쩐지 만족스러웠다. 딱딱한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 그의 좆을 가볍게 쥐니 낮은 신음이 샜다. 쓱쓱 흔들어주자 곽수환이 손에 힘을 바짝 주어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며칠이나 굶주린 사람처럼 목덜미에 이를 박고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석화는 고개를 들어 그의 귀두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새어나온 쿠퍼액이 물과 뒤섞여 적당히 끈끈해졌다. 그의 몸을 맞고 튕겨 나가는 물방울이 눈을 시리게 해 두 눈을 감았다. 그랬더니 소리와 촉감에 모든 감각이 집중됐다.

목을 핥는 질척한 혀와 손 안에서 버거울 정도로 부피를 키워나가는 성기의 팽창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곽수환도 반쯤 발기한 석화의 성기를 꽉 쥐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손힘을 조절해야만 했다. 자제하지 않으면 터뜨리고 싶을 정도의 거센 성욕에 사로잡힐 게 분명했다.

“하아, 기분 좋아요.”

석화의 목소리만 들어도 아래가 녹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 세게 만져줄까?”

“……세게.”

딱딱한 좆을 전부 감싸고 흔들어주니 석화가 좀 더 달라붙었다. 석화도 최대한 힘을 주어 곽수환의 좆을 마찰하고 있지만, 그의 손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빠르게 흔들리니 찌르르한 사정감이 허벅지부터 단박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석화는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아직 사정하기에는 이르다. 생각보다 쉽게 물러나주는 곽수환을 한 번 더 뒤로 밀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어 앉았다.

그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도톰한 귀두를 입에 물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파고든 그가 엄지로 귀를 간질였다. 석화는 성기를 문 채로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 바람에 귀두가 안을 밀쳐 뺨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입 안에서 새어나오는 액이 엄청났다. 틀어놓은 물도 같이 섞여 들어와 꿀꺽 삼켰더니, 목 안쪽에 끈끈하게 달라 붙었다. 혀를 밑으로 내리누르며 일전에 그가 알려줬던 대로 입 안의 길을 트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시선을 내려 제 좆을 문 석화를 눈에 담았다. 눈을 감고 쪽쪽 빨면서, 조금 깊이 넣었을 때는 미간에 설핏 인상이 서리기도 했다. 머리통을 붙잡고 그대로 처박고 싶어 손끝까지 저릿했다. 원래도 소극적이지는 않던 석화였지만, 오늘은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석 박사도 그동안 나랑 하고 싶었던 거지?

곽수환이 탁, 허리를 치자 석화가 시선을 들었다. 한껏 좆을 물고 저를 올려다보니 사람을 돌게 했다. 곽수환이 석화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확 들어 일으켰다. 닫지 못한 채 벌어진 입에서 주륵 침과 물이 떨어졌다. 그는 손을 뒤로 뻗어 샤워콕을 잠그고 축축한 동굴이 된 석화의 입에 제 혀를 얽어 넣었다. 석화도 말캉거리는 입술을 부지런히 움직여 그와 뒤엉켰다. 서로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곽수환은 입술과 턱을 끊임없이 핥고 깨물었다. 그와 키스를 하거나 몸을 겹칠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먹히는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착각만은 아니었다. 곽수환의 손이 잘게 떨렸다. 행여 거칠게 굴어 어디라도 다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이기는 해도 그렇게 쉽게 다치거나 하지 않는다. 그는 키스를 이어나가면서도 팔뚝을 감싼 붕대까지 살폈다. 물에 젖었지만 다행히 피가 비치는 일은 없었다.

“……곽 소령님…… 더 세게, 하아. 해도 돼요.”

석화는 두 손을 깍지 껴서 곽수환의 목에 걸었다.

“걱정돼.”

“하고 싶어요.”

귓가에서 말을 하자 곽수환이 확 엉덩이를 벌려 쥐었다. 삽시간에 안쪽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어버려 소름이 일었다. 연방 움찔대는 구멍으로 손을 미끄러뜨린 그가 입구를 문질렀다. 하, 입에서 뜨거운 열기가 터진다. 물기가 어린 손가락이 안으로 꾹 들어오자 허리가 뒤틀렸다. 그대로 석화는 몸을 뒤로 빼지 않고 그에게 더 맞붙었다.

원래 밝히는 건 알았는데 석화가 이렇게 나오니 곽수환은 뿌듯함마저 들었다. 손가락 두 개를 비틀어 넣어 꽉 다물린 안쪽을 천천히 벌렸다. 단단하게 맞물려 있을 줄 알았는데 삽입된 감각을 기억하는지 금세 말랑거리면서 손을 감쌌다.

안쪽의 살짝 튀어나온 곳을 긁어주자 석화가 자극에 눈을 깜빡거렸다. 오르가즘이 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자극이 퍼부어졌다. 석화는 이를 가볍게 물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굵은 손가락으로도 부족했다. 더 깊이, 더 꽉 안을 채우고만 싶은 마음에 팔을 풀고는 빙글 몸을 돌렸다. 손가락이 구멍에 걸렸다가 빠질 때 다리가 휘청했지만, 눈앞의 벽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석화는 허리를 뒤로 빼서 그의 성기에 제 엉덩이를 가져다댔다. 한 손으로는 팽창한 곽수환의 성기를 잡아 구멍에 문질렀다.

“석 박사……. 나 좆돌 아니야.”

탓하는 듯 말했지만 기분 좋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빨리 안으로 넣어줬으면 좋겠는데 곽수환은 장난을 치듯이 귀두로 구멍을 꾸욱 눌렀다가 툭, 위로 빗겨 올리기를 반복했다. 석화가 뺨을 벽에 문대고 자신의 성기를 두 손으로 맞잡았다. 쾌감을 어딘가로 분출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눈에 열이 가득 올랐다. 그도 인내심이 다다라 목덜미를 콱 물었다가 놨다. 흣, 밭은 숨을 내쉬는 석화를 돌려 저를 쳐다보게 만들었다.

“아까처럼 둘러봐. 응?”

석화는 곽수환의 목에 다시 깍지를 껴서 손을 감았다. 물기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힘을 단단히 주니, 그가 석화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아, 아파요. 한 번에 이렇게 다리를 찢은 적이 없던 석화였기에 다시 내리려고 했다. 그보다 빠르게 고환을 지나 그의 성기가 구멍에 맞닿아 왔다. 곧이어 확, 그가 양 허벅지 뒤편을 두 손으로 쥐고 접어 올렸다. 어깨부터 날개뼈가 벽에 짓눌렸고 아래는 허공에 뜬 채였다. 간신히 두 팔을 목에 걸어 버티고 있었지만 자세가 너무 불안했다.

그가 귀두를 꾸욱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곽수환은 그 순간부터 석화의 얼굴을 쳐다봤다. 충격에 벌어진 입에서는 밭은 소리만이 터졌다. 조금이라도 편해지기 위해 두 다리를 곽수환의 허리에 감자 그도 몸을 옥죄어 안고는 그대로 꽂아 내렸다.

“아……! 아윽…….”

안쪽이 단숨에 벌어지며 헛구역질이 솟았다. 그의 목에 감고 있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고 두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뒤로, 뒤로 할래요. 석화가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곽수환은 석화의 드러난 유두를 꼬집었다가 부드럽게 문질렀다.

“설 수 있겠어?”

“빨리.”

곽수환이 석화를 내려놓으니 좆이 저절로 쑥 빠졌다. 두 팔을 푼 석화는 반사적으로 제 엉덩이를 감쌌다. 시큰시큰한 통증에 두 허벅지를 붙이고 그 아찔한 감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 뒷모습을 보니 오히려 기다리지 못하는 건 곽수환이었다.

“얼굴 보고 하고 싶었는데.”

그는 두 손목을 붙들어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꼿꼿하게 선 성기를 슬쩍 벌어져 있는 구멍에 가져다 푹 밀어 넣었다. 팽팽하게 벌어지는 비부가 좆을 꽉꽉 물었고, 엉덩이 사이에 갇힌 기둥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툭, 곽수환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엉덩이 골 사이로 스르륵 내려온 그 물방울은 맞물린 구멍을 빙 둘렀다.

곽수환이 좀 더 안으로 좆을 넣으니 석화의 뱃가죽이 경련했다.

“다…… 들어왔어요.”

“후, 안 보이잖아.”

“아니, 근데……. 아흣, 다 들어왔어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 다 들어왔다고 우는 소리를 한다. 곽수환은 석화를 벽에 가까이 붙여 세웠다. 아픔에 조금 늘어진 석화의 성기를 쥐었다. 손으로 조였다가 풀어주면서 자극을 주자 긴장해 있던 내벽도 조금씩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곽수환이 조금씩 안으로 더 좆을 밀어 넣었다.

석화가 고개를 돌려 삽입된 곳을 보려 했지만, 곽수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키스를 퍼부었다. 다시 얼굴을 돌리려고 했더니 곽수환이 반대쪽 뺨을 밀어 꼼짝도 못하게 했다. 입술부터 아래까지 온통 그가 파고들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꾹꾹 안으로 완전히 진입한 좆이 배꼽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하아, 간신히 얼굴을 제자리에 돌리자 혀가 아릿아릿했다.

“움직여도 돼?”

“하……. 아직.”

말과는 달리 석화의 안쪽이 곽수환의 것을 감쌌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그가 허리를 탁, 세게 쳐 올렸다. 엉덩이가 때려 맞는 듯했지만, 배 안쪽이 더 화끈거려 고통 따윈 금세 잊었다. 천천히 뒤로 허리를 뺄 때면 밑이 한없이 아래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전립선을 긁고 나가는 기둥에 석화의 성기에서는 느른한 액이 주륵 흘렀다.

조금씩 속도를 올려 허리를 놀리는 곽수환이 석화의 배를 손으로 감쌌다. 마른 몸이 안타까웠지만 안을 때려 박을 때마다 제 것을 품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 자꾸 커져요.”

“괜찮아, 안 다쳤어.”

곽수환이 달래듯이 어깨에 입술을 내렸다.

“하아, 세게 해도 돼요.”

아까부터 자꾸만 그래도 된단다. 곽수환이 혀로 둥근 어깨를 핥았다.

“천천히 할 거야. 우리 아직 시간 있잖아.”

여기서 한참 굴러도 괜찮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말했다.

“마지막인데, 마지막이니까.”

움직임을 멈춘 곽수환이 의아하게 물었다.

“마지막이라니?”

석화는 숨을 고르며 젖은 입술을 떼었다.

“제주도, 가니까. 소령님, 이제 못 보니까. 읏!”

그가 석화를 두 팔로 거세게 껴안아 제 쪽으로 확 끌어 당겼다. 발끝이 꼿꼿하게 섰다.

“나 못 볼 거라고 생각했어?”

“흐읏, 아, 깊어, 너무…….”

“석 박사는 그래도 괜찮았어?”

저 때문에 쫓기고 있으니 가야 하는 게 맞았다. 석화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영 나 못 봐도 괜찮다고?”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 석화는 약한 신음을 흘렸다.

“안에, 소령님……. 배가, 아파요.”

“아니지?”

석화는 발을 들어 그의 다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미끌, 정강이에 닿았던 발바닥이 그대로 미끄러져 버리고야 말았다. 지독하게 깊은 삽입에 그의 두 팔을 쥔 채로 그를 돌아봤다. 너무 바짝 붙어있어 시야에는 그의 입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라고 말해.”

입매는 가볍게 올라가 있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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