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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s apple (1) (12/23)

Adam's apple (1)


가야 하는데 가기 싫다고 말을 한다면 곽수환이 위험해진다. 석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움찔, 안쪽의 좆이 한 번 더 팽창했다. 석화는 벗어나고자 몸을 비틀었지만 엄청난 힘이 제 몸의 자유를 빼앗았다. 여태 타인이 힘으로 저를 좌지우지하는 게 가장 싫었다. 그걸 아는지 곽수환은 억지로 저를 대한 적이 없는데, 막심한 힘의 차이에 석화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두 다리 사이를 옆으로 툭 쳐서 벌리게 만든 그가 양 팔뚝을 거세게 쥐었다.

소령님……! 나지막하게 부른 순간이었다.

“흐앗!”

눈앞이 새하얗게 바랬다가 칙칙한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좆을 집어넣은 그의 음모가 엉덩이에 맞닿았다. 뒤로 확 잡아 뺐다가 안으로 들이닥치니 내장이 밀리는 충격에 헛구역질이 솟았다. 붕대 밑의 팔뚝을 쥐고 있었지만 압박감에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엄청난 세기로 아래를 오가는 동안 함부로 비벼지는 전립선이 붓기 시작했다. 그의 성기가 들락날락할 때마다 일그러진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쾌감과 고통이 동시에 내려지니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그렇게 쉬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곽수환이 퍽 좆을 뿌리까지 처박았다. 벌어진 석화의 입에서 삼키지 못한 침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석 박사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흣!”

날갯죽지가 거세게 깨물렸다. 그는 깊숙이 처박아둔 상태로 탁탁탁 반복해서 안을 때려댔다.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석화의 성기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덜렁거리며 발기한 채였다. 위로만 때려 올리는 게 아니라 옆으로도 세차게 빗겨 치니 왈칵, 액이 쏟아졌다.

곽수환이 그 성기를 붙잡고는 손으로 함부로 굴려댔다.

“이렇게 밝히는데 씨발, 나 없이 어떻게 하려고. 나만큼 잘해주는 사람 있어?”

“……싫어요. 이거 싫어요.”

석화가 어쩐 일로 얼굴을 한껏 구기고 흐느꼈다.

몸이 마구 떨려 좆을 꽉 물고 있는 내벽까지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곽수환은 그제야 진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하얗고 매끄러운 등에 잇자국들이 선명했고, 팔을 감은 붕대에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좆을 확 빼내자 석화의 몸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차갑게 젖어있는 부스 바닥에서 석화가 계속 몸을 떨었다. 곽수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괴감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다. 그냥, 석화가 너무 쉽게 자기를 놓아버리려고 하니까…….

곽수환은 벗어둔 제복 코트를 주워와 석화의 몸을 감쌌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엉망이었다.

석화는 대체 그가 왜 화가 났는지도 몰라 의문만 담고 바라봤다. 곽수환은 인상만 잔뜩 쓰고 있었다. 일을 벌여 놨지만, 뭐라고 혼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속상해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석화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었다. 그는 그 손길을 애써 떼어내며 조용히 말했다.

“춥지?”

곽수환이 석화를 안아 들어 일으켰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가 간이매트를 감싼 비닐을 벗겨내고 그 위에 석화를 내려두었다. 그가 하의를 갖춰 입고는 앞에 놓인 기름 난로의 불을 켰다. 그러고 나서 이쪽은 보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석화는 급히 손을 뻗어 곽수환을 붙들었다.

“가지 마요.”

“밖에 있을게. 석 박사도 그게 더 나을 거야.”

“같이…….”

석화가 쉰 목소리로 다시 그를 붙잡았다.

“왜, 마지막이니까 제대로 기분 좋게 박아줄까?”

곽수환은 제가 뱉어놓고도 제 혀를 뽑아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머리 좀 식힐게.”

석화는 그의 손목을 꾹 쥐었다.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곽수환은 한풀 기가 꺾인 짐승처럼 얌전히 있었다. 석화가 제 쪽으로 곽수환을 잡아당기자 그가 매트에 끌려와 앉았다. 기름 냄새가 매캐하게 난다 싶더니 금세 열기가 주변을 달구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요?”

까만 눈이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물어오니 곽수환은 제가 왜 그랬는지 솔직히 말하기가 힘들었다. 석화가 알게 되면 얼마나 병신같이 볼까. 저만큼 석화가 자신을 생각해주지 않는다며 혼자 열이 뻗쳐 발광을 해댄 셈이니 비루하기까지 했다.

“왜 화났어요?”

“화 안 났어.”

“났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분명 화가 났던 그였다.

“말해요. 아니면 몰라요.”

지나친 솔직함은 때로는 분란을 야기할 때도 있지만, 자칫 한참 돌게 될 문제를 곧장 해결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곽수환은 솔직한 석화가 좋기도 했다. 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석화만큼은 청정하게 다가왔으니까.

“석 박사가 나보다 돌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래도 석화만큼 솔직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곽수환의 뺨이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열로 일렁거렸다.

“곽 소령님도 좋아해요. 위험할 때도 절 항상 구해주셨고요.”

남들은 다 뭐라고 하는데 유일하게 돌을 선물해 줬고, 늘 혼자였던 자신을 따라다녀 준 사람도 곽수환뿐이었다.

“그거 흔들다리 효과라고 부르는 거거든.”

“흔들다리요?”

“위험한 상황에서 여기가 뛰는 걸 사랑으로 착각한다는 건데.”

곽수환이 석화의 심장 부근을 톡톡 두드렸다. 손끝에 젖꼭지가 걸리는 바람에 서둘러 빼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그러니까 석 박사는 좋아 죽는 돌하고 살라고.”

곽수환은 말이 뾰족하게 나가니 유치해도 별수 없었다. 석화는 밑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림에 잠시 몸을 움츠렸다가 그의 손을 또다시 붙들었다. 돌과 그를 왜 비교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

“돌은 많을수록 좋지만, 곽수환 소령님은 하나예요. 돌은 다른 돌로 대신할 수 있지만, 곽 소령님은 아니에요.”

석화에게서 나온 말이니 입 발린 소리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곽수환에게는 석화뿐이었다. 아줌마가 그랬지. 너도 구원받지 않았느냐고. 진심으로 이게 구원이지 달리 구원이 있나 싶었다.

“그렇지? 난 세상에 딱 하나지?”

금세 자신만만한 얼굴로 돌변한 곽수환이 쓱 몸을 가까이 가져왔다. 석화는 당연한 말을 한다 싶어서 눈만 끔뻑였다.

“하나뿐인데 안 볼 생각 하면 아깝지도 않아?”

“…….”

곽수환의 손등에 힘이 바짝 들어가자 대답을 주저하던 석화가 움찔했다. 아까의 기억 때문에 혹시나 경계심을 갖게 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곽수환은 석화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제복을 좀 더 단단히 여며줬다.

“아까우면 놓지 마.”

“짐이 되는 건 싫어요.”

그놈의 싫다는 소리는.

곽수환이 석화를 확 매트에 눕혔다.

“석 박사는 나한테 짐 수준도 안 돼.”

좀 전의 실수를 만회하듯이 석화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댔다. 속눈썹이 제 얼굴을 간질이는 것마저 음심을 돋게 했다.

“부드럽게 해줄게. 기분 좋게.”

곽수환은 석화가 아닌 저에게 말하는 듯 중얼거리고, 조심스럽게 키스했다. 뜨끈뜨끈한 입 안을 혀로 휘저으니 어떻게든 석화도 저를 따라오려고 했다. 손을 내려 석화의 좆을 감싸 쥐고 입으로는 계속 뺨 안쪽과 천장을 달래줬다.

점차 달아지는 입을 젖꼭지로 내렸다. 작은 알을 혀끝으로 굴리며 쪽쪽 빨아 들였다. 배꼽과 갈비뼈를 혀로 쓸어주며 석화의 좆을 빨려는 때였다. 석화가 저 스스로 두 허벅지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 광경에 곽수환은 하반신에 곧장 피가 쏠렸다. 고환에 모여 있는 정액이 터질 것같이 탱탱한 두 알을 두드려댔다.

“삽입하고……. 싶어요.”

혹사당했던 구멍이 빠끔거리며 움직였다. 석화는 손을 그곳에 가져다대고 긴장을 풀려는 듯 직접 비부를 마사지하듯 비볐다.

“석화야, 석화 형. 어디 가서 그러면 진짜 안 돼.”

석화는 설핏 미간을 구겼다.

“저는 곽 소령님하고만 하고 싶은데요.”

그러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곽수환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이제는 흡사 석화의 말이나 행동만으로도 좆물을 싸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곽수환은 입을 일자로 다물더니 그대로 푹, 단단한 좆을 꽂아 넣었다.

“하읏!”

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온 좆에 석화가 밭은 숨을 토해냈다.

꾹, 곽수환이 석화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누르자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밖과 안에서 전립선과 함께 눌려 비벼지니 석화가 쾌감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발기한 석화의 좆구멍에는 묽은 쿠퍼액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손바닥으로 배를 좀 더 누르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하으. 기분 좋……아……. 좋아……요.”

석화는 흐린 눈을 하고는 탄성을 뱉어냈다. 제대로 느끼고 있는지 성기를 감싼 압박감이 엄청났다.

“한 번 싸고, 시작해도 돼?”

나 너무 많이 참아서. 그가 귓불을 씹으며 속삭였다. 석화는 말뜻을 완전히 헤아리지도 못했음에도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하반신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일방적이던 아까와는 달랐다.

곽수환이 무릎을 들어 올려 석화의 두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밑에서 위로 허리를 재빠르게 쳐대자 석화가 매트를 긁어댔다. 그 손을 제 등에 두르게 하고 바짝 몸을 맞붙였다. 삽입의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로 안쪽을 괴롭혔다.

점막은 연해졌지만 여전히 좆을 움켜쥐듯 굴었고, 한계까지 늘어진 구멍은 버겁게 벌어진 채로 달라붙었다. 밑에 깔린 석화에게서 새된 신음이 마구잡이로 터졌다. 벌어진 입에 곽수환이 키스를 퍼부었다.

초점 없는 시선을 하고서도 혀를 내밀어 그에게 숨을 전부 맡겼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치대던 그가 퍽, 안을 완전히 꿰뚫을 기세로 몸을 전부 박아 넣었다. 안쪽, 그 어떤 것도 닿지 않았던 곳으로 거센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움찔거리면서 정액을 방출하는 기둥이 배 속을 울렸다. 몇 번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사출되는 정액에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시원한 체온과는 다르게 내부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했다.

“……배 꽉 찼어요. 흐으, 터져요.”

사정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석화가 그의 성기를 빼내려고 했다. 곽수환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석화를 끌어안고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안을 꽉 메우다 못해 밖으로 역류하려던 정액이 그의 좆에 막혀 버렸다. 어서 그의 것을 빼내고 속을 꽉 채운 정액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반대로 온몸 전체가 곽수환으로 가득 해지는 열기는 중독성이 있었다.

“하아, 내 정액 받은 사람 석 박사가 처음이니까, 끝까지 책임져야 돼.”

책임을 지라니, 석화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책임이라는 어감은 묵직하지만 좋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쾌감 속에서도 곽수환의 시선이 선명했다.

***

석화의 뱃가죽 위로 끈끈한 정액과 묽은 액이 뒤엉켜 있었다. 안을 오가는 곽수환의 좆은 여전히 기세가 흉흉했지만, 미끄러운 내벽이 무리 없이 성기를 받아들였다. 대신 안쪽 전부를 그가 정액에 흠뻑 젖은 좆으로 문질러대고 있었다.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건만 석화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부지런히 허릿짓을 따라왔다.

“괜찮아?”

성기가 들락날락 할 때마다 흘러나온 정액이 깔린 제복에 고였다. 곽수환은 제가 봐도 지독하게 싸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맞지 않는 성욕억제제를 만든 게 석화니 저를 탓해서는 안 된다.

“으응. 좋아요.”

몇 번이나 사정해 말랑거리는 성기를 석화가 쥐었다. 그대로 흔드니 다시 발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처럼 딱딱해지지는 못했다.

“……소령님.”

“응.”

어느새 곽수환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부러워요.”

석화가 제 것에서 손을 놓더니 고환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절반쯤 밖에 나와 있는 곽수환의 기둥을 손으로 매만졌다. 귀두는 내벽이 오물거리며 쥐어짜고 밖은 석화의 손이 닿으니 가뜩이나 후덥지근한 몸이 더 확 달아올랐다.

“뭐가, 부러워.”

“커서 좋은 것 같아요.”

“뭐?”

“커서 안에 꽉 차서, 전립선 계속……. 비비는데, 아, 안에 수분 다 뺏겨요. 너무 많이 싸서.”

곽수환이 손으로 석화의 입을 덮었다. 그가 웃는 바람에 안이 울려 석화는 몸을 움츠리고 떨었다.

“이럴 땐 적당히 솔직해도 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곽수환은 피가 비친 석화의 팔에 입술을 한 번 내렸다가 두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스프링이 움직임을 방해했기에 매트 밖에 선 곽수환이 석화의 오금을 쥐었다. 체중을 실어 몸을 꾹 내리눌렀다.

석화는 뭘 하려는 건지 몰라 기운 빠진 눈만 들었다. 그가 갑자기 좆을 확 빼냈다. 엄청난 상실감에 내벽과 구멍이 경련했지만 들이닥쳐 들어오는 게 더 빨랐다. 푸욱,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또다시 뿌리까지 집어 처넣었다가 완전히 밖으로 빼는 걸 반복했다. 도톰한 귀두가 안에 남은 정액을 긁어낼 때마다 엉덩이골을 따라 줄줄 흘려 내렸다.

“아, 아!”

석화는 입 안에서 단어를 만들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신음만 내뱉었다.

곽수환은 거칠게 안을 탐하면서도 눈을 내려 삽입된 곳을 쳐다봤다. 밖으로 뺄 때마다 좆에 맞춰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이 빨리 들어오라면서 다시 쑤시자마자 쪼아댔다. 확 뺐다가 다시 푹 넣고, 젖어버린 안을 진탕 휘저었다.

석화가 몸을 굳히면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소령님, 못 참겠어요. 그러나 말은 나오지 못했다. 다시금 사정감이 치달아 뒷머리를 마구 매트에 비볐지만, 곽수환은 봐주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아래를 범해댔다. 팟, 석화에게서 정액이 터졌는데 지나치게 묽었다.

아, 안 돼. 그만 움직여요. 혀도 굳어 흐느낌만 터졌다. 타악, 탁, 그가 허리를 기세 좋게 쳐올리는 때때마다 성기에서 액이 샜다. 석화는 동공이 자꾸만 돌아갈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구멍이 뒤집어졌다가 다시 안으로 밀리는 감각에 이제는 흡사 무서움마저 들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곽수환의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가 입술을 부딪쳐오며 석화의 몸을 반으로 접어 눌렀다. 허리는 멈추지 않았고, 완전히 엉망이 된 석화는 얼굴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곽수환의 허벅지가 더 단단해진다고 느꼈을 때, 그가 다시 안쪽에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이지 못한 내벽이 기어코 맞물린 틈새로 정액을 역류시켰다. 곽수환도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사정을 하는 채로 좆을 확 잡아 뺐다. 꿀럭거리며 정액이 쏟아졌고, 좆에서 튄 사정액이 석화의 얼굴에 흩어졌다. 한계까지 다다른 석화의 몸이 축 늘어져버렸다. 곽수환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다행히도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반쯤 서 있는 좆을 정신 차리라는 듯 꾹 내리눌렀다. 머리를 쳐드는 건 자의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젖어버린 제복만 석화의 밑에서 빼냈다. 난로의 열기도 줄이고 한쪽 박스에 담겨 있는 세면도구와 수건을 꺼냈다. 너무 심했나. 수건에 물을 적셔와 늘어진 석화를 얼굴부터 꼼꼼하게 닦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시체를 닦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을 매만지니 심장이 뛰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의 흔적이 와 닿았다. 찝찝한 구석이 없도록 몸을 다 닦아주고는 엉덩이 밑에 수건을 댔다.

곽수환은 차가운 물을 냄비에 담아 난로 위에 올려두고 나서야 샤워를 시작했다.

연방 석화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얼음물 샤워를 마치니 석화가 슬슬 몸을 뒤척였다. 여분의 제복은 따로 가져다 놓지 않았기에 바지에 셔츠만 걸쳤다. 그는 서둘러 다가가 석화의 몸을 토닥였다. 팔베개를 해주고 껴안으니 좀 더 꽉 끌어안고 싶어 애가 탔다.

“석 박사 임신하면 어떻게 하지?”

……안 해요.

중얼거림에 곽수환이 고개를 휙 내렸다. 석화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었다.

“농담인 거 알지?”

씩 웃는 그는 팔베개를 해준 채로 제 눈썹을 한 번 문질렀다. 석화는 말할 힘도 없어 그의 가슴팍에 손을 툭 올리고만 말았다. 배 안쪽은 아직도 지글지글한 열로 들끓고 있었다.

***

흐음, 음.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는 목을 울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 보이기도 하고, 잠잠했던 눈에 생기도 돌았다.

최호언은 저택의 지하로 내려가 백열전구를 밝혔다. 사복 차림의 한 남자가 손발이 묶인 채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참매가 어떻게 백호를 잡나.”

최호언을 보자마자 재갈을 문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분명 개인행동 하지 말라고 지시받았을 텐데요? 왜 말을 안 들어서 불행을 자초해요.”

최호언은 애석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 자리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스테인리스 수술대와 메스들이, 왼쪽 찬장에는 약품이 가득 놓여 있었다.

최호언은 손을 뻗어 남자의 재갈을 끌어 내렸다. 상황 파악은 하는 군인인지 소리를 지르거나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A급 추적자이니 그만큼 교육받기도 했을 테고.

공적을 세우고자 개인행동을 하다가 운 좋게 곽수환이 공중전화 앞에 내려둔 여자를 발견한 게 바로 이 남자였다. 여자가 곽수환이 이동한 방향을 안다고 해서 따라왔건만, 도착한 장소는 이상한 숲이었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나빴던 것이다.

“누굽……니까?”

추적자에게 여의도 쉘터 연구원인 최호언의 정보는 없었다.

“코피가 계속 흐르네.”

안쓰럽다는 듯이 남자의 뺨을 툭툭 두드린 최호언은 수술대 근처에 붙어 있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수도에 끼워져 있는 호스를 들고 오는 동안 물이 바닥으로 줄줄 흘렀다. 최호언은 불안한 눈을 한 남자의 머리채를 틀어쥐어 올렸다.

피가 흐르는 남자의 코에 호스를 쑤셨다. 코로 들어간 물이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커억, 켁, 쉴 새 없이 흘러 들어오는 물을 반쯤 마시고 뱉어내는 남자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위가 빵빵해질 때까지 물을 들이켠 남자는 잡힌 머리를 빼내려고 했지만, 엄청난 힘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최호언이 남자의 코에 꽂았던 호스를 뺐다. 그리고는 호스의 물로 바닥을 닦아 흘려보냈다. 남자가 기침을 하는 동안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깨끗해진 얼굴이 흡족한지 입매를 부드럽게 올렸다.

“곽수환을 추적하라고 지시한 건 세컨드입니까?”

“허억, 컥.”

입 밖으로 물을 토해내는 남자는 최호언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최호언은 남자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수술대 위에 포박된 몸을 눕혔다. 하단에 늘어진 벨트를 끌어올려 몸을 다시 고정한 뒤, 라텍스 장갑을 착용했다.

“뭘…… 하려는.”

손바닥을 배에 대고 꽉 누르자 컥, 남자가 또다시 물을 토해냈다.

“아무리 부산이라고 해도 겨울은 좀 춥잖아요? 나 어린 시절 뒷산에는 토끼가 많았거든요. 토끼 피를 전부 제거하고 귀를 잡아 몸을 훑어 내리면 항문으로 내장이 튀어나와요. 그럼 아주 깔끔하게 토끼털을 쓸 수가 있죠. 그런데 난 그게 인간도 가능할 것 같거든요.”

최호언이 메스를 들자 남자가 급히 말문을 열었다.

“세, 세컨드가 맞습니다.”

최호언은 남자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군번줄을 떼어냈다.

“정말입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저희는 지시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흘끔 직위와 이름을 확인했다. 최호언이 다시 물을 틀어 이번에는 입에 쑤셔 넣었다. 목구멍 깊숙하게 호스를 처박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가 발버둥 쳤지만 최호언은 그마저도 지루한 듯 한숨만 길게 흘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가슴팍과 배가 부풀어 오르자 호스를 빼냈다.

“잘했어요. 우리 대위님 몸 멀쩡히 살아나가야죠.”

최호언이 물을 역류해내는 남자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대위는 무슨 말을 하든 저 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가 어딘지, 또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비명횡사하는 거다.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할 거라는 게 더 두려웠다. 최호언은 대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세컨드가 곽수환만 생포하라고 했나요? 아니면 사살? 그것도 아니면 석화 박사님을 모셔오라고 했나요?”

대위는 이자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상부는 여의치 않을 시 곽수환을 사살해도 된다고 했으며 석화는 생포하라고 했으니까.

“두, 둘 다. 둘 다입니다.”

“춥고 좁은 이 지하에 갇혀 있는데, 시티는 대위님을 찾지 않겠죠?”

최호언이 정말로 안타깝다면서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게 방침이니까. 그런데 그 방침은 너무 잘못됐어요. 어떻게 내 시민과 군인을 지키지 못하는 게 방침입니까? 나라면 내 사람이 이렇게 잡혀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을 거예요.”

쿨럭, 대위가 연방 물을 토해냈다. 대위는 그제야 최호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씹새끼……. 너 반군이지?”

몸을 일으킨 최호언이 무표정하게 대위를 내려다봤다.

“이건 틀려먹었네.”

메스로 대위의 가슴을 천천히 갈랐다. 흐아아악! 듣기 싫은 비명 소리에 장갑을 벗어 대위의 입에 쑤셔 넣었다. 달칵, 최호언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를 향해 돌아섰다.

“정말 실망했어요, 어머니.”

여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곽수환이 석화 박사에게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했어요.”

여자는 변명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곽수환 소령은 어때 보였어요?”

“회유될 만큼 녹록해 보이지 않았어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저를 해하려 했고요. 대신 석화 박사가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요.”

레인보우 시티가 목표했던 진화는 시티를 지킬 소수의 돌연변이 출현이었고, 원호 박사가 이룩하고자 했던 세상은 완전한 인류의 진화였다.

곽수환은 앞서 태어난 최호언과 석화의 모든 단점을 탈피하고 나온 배아였다. 원호 박사와 곽수환의 부모는 완벽에 가까운 유전자를 탄생시켰고, 그 유전자가 가진 임무는 번식을 통한 거듭된 진화였다. 현재가 가장 진화를 이룩하기 좋은 때가 아니던가.

진화의 시작은 곧 생존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존은 번식을 통해 이어진다. 곽수환은 자신에게 새겨진 본능에 집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아담에게서 자유로운 석화는 진화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일종의 교주 역할을 맡아야했다. 레인보우 시티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군중들에 의해 무너져야 한다.

‘뭐, 사실 나는 진화나 개혁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서펀트는 한 뼘만큼 벌어진 자상에서 피를 쏟아내는 대위를 돌아봤다.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서랍장을 뒤적여 수술용 실이 담긴 박스를 꺼냈다. 멸균된 봉합사를 건네받은 최호언이 대위의 눈앞에 박스를 가져다보였다. 죽은 생선 같던 눈에 희망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최호언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대위님, 이제 봉합할 거예요. 제가 너무했죠? 조금만 버텨 봐요.”

그러나 장갑을 물고 있던 대위의 입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동공의 초점도 사라져 이제는 어디를 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최호언은 안타까운 얼굴로 죽어버린 남자의 눈을 감겨주었다.

“어머니, 이분은 희망을 안고 세상을 뜨셨네요.”

“네, 저도 마지막 희망을 봤습니다. 제아무리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 살아온 이라고 한들, 희망을 안고 가셨으니 네 개의 강의 품속에 잠기실 겁니다.”

여자가 심장에 손을 대고 대위를 위해 잠시 묵념했다. 최호언은 수술대 위에 늘어진 대위의 몸을 뒤집었다.

“그보다, 곽수환 소령이 제게 헬기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헬기?

최호언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았다.

***

석화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곽수환을 눈으로만 쫓았다.

곽수환은 난로에 올려두었던 냄비에 라면을 끓여주고 밥까지 말아주었다. 석화는 숟가락으로 밥알을 떠먹다가 아직도 배가 화끈거려 몇 번이나 몸을 웅크려야 했다.

“다 빼냈는데도 아파?”

“아픈 건 아니에요.”

“거봐, 내가 샬레에 안 싼 이유가 있다니까.”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 틀린 말은 아니기에 석화는 다시 수저를 놀렸다.

“제가 우도로 가면 곽 소령님을 어떻게 봐요?”

“내가 언제 우도라고 했어. 제주도라고 했지.”

곽수환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서 석화가 쓸 만한 자동권총에 탄환을 장전했다.

“우도도 제주도예요.”

“그거야 옛날이나 그랬지. 지금은 다른 구역이잖아.”

“그래도 제주에 포함돼요.”

“그러네, 제주도가 곽 소령님 좆만큼 크네. 곽 소령님 생식기가 어떻게 섬만 하냐고 따지지는 말고.”

석화가 할 말을 곽수환이 먼저 선수 쳤다. 그는 권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석화가 앉아있는 매트에 올렸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어.”

석화는 두 손으로 쥐고 있던 냄비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우도가 아니면 제주도 어디로 가요?”

“안전가옥으로 가.”

레인보우 시티에서 가장 안전한 구역이 제주도인 건 변하지 않는다.

퍼스트와 세컨드의 대립이 절정에 이를 동안 석화는 제주도에서 숨어 지내면 될 테고, 저는 일단 세컨드를 치는 데 일조를 한 뒤 퍼스트의 측근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향후 10년을 바탕으로 목적해둔 일이었지만, 석화가 나타났기에 조금 빨라진 것뿐이다. 레인보우 시티의 썩은 부분은 전부 도려내야 한다. 그게 새로운 시티를 세우는 일이라고 해도.

“왜요?”

“왜긴 왜야. 석 박사 안전하라고.”

“거기서 계속 지내요?”

곽수환도 석화의 옆에 털썩 앉았다.

“밖은 위험하잖아. 마스터 투표가 끝나기 전까지만 몸 사리는 게 좋아.”

레인보우 시티는 자격이 된다면 누구나 마스터 선거에 출마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출마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지도가 높은 지금의 마스터들보다 더 많은 표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한쪽이 사멸하게 된다면, 출마를 한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가 오게 된다. 아직 출마 인원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만일 둘 중 한 명이 마스터 출마 심사에서 탈락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출마자가 마스터가 될 수도 있겠네요?”

곽수환은 석화의 입술에 키스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마도.”

“누가 출마할까요?”

석화가 새카만 눈을 하고 곽수환을 들여다봤다.

마스터 선거는 명예가문 출신들만 출마할 수 있는데 최호언은 이미 서펀트인 게 밝혀졌다. 아니 그 사실을 믿어줄 상부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곽수환의 컨트롤러 부대나 차 중령이 증언을 해봤자 최호언이 서펀트라고 입증할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오히려 면역체로 의심받는 석화를 숨겨두었던 곽수환이 반군으로 몰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설마 최호언 박사가 출마하지는 않겠죠?”

“최악의 상황은 그건데, 퍼스트는 몰라도 세컨드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최호언이 출마한다면 의심부터 할 테니까. 그리고 그놈뿐만 아니라 퍼스트와 세컨드가 서로 싸우길 기다리며 지켜보는 눈들이 더 있을 거야.”

통합국 법에 따르면 마스터는 총 두 명이어야 한다. 석화는 문득 김 박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중국 지부에 있는 친구 놈하고 간신히 연락이 닿았는데요. 듣자 하니 거긴 아담이 아직 7차 변이 전이더라고요? 어쩐지 갑자기 해외랑 전부 연락이 두절된다 싶더니……. 지금 우리 레인보우 시티만 고립된 거 아십니까?’

석화는 몸을 움직여 곽수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곽 소령님은 누구 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서 곽수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난 누구 편도 아니야. 그래도 지금 레인보우 시티의 체제가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해. 갈아치울 건 갈아치워야지. 그래야 내 동생 같은 녀석들도 안 생기고……. 그런데 지금은 석 박사 안전이 최우선이야.”

곽수환은 심각해 보이는 석화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는 에덴동산은 물론 퍼스트나 세컨드, 그 어느 쪽에도 편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혼자서 싸우기에는 상대들이 너무나 거대하지 않나? 할 수만 있다면 석화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치료제가 개발된다고 해도 사람들에게 제재 없이 제공할 수 있을 테니까.

“김 박사님이 전에 그랬거든요. 밖의 다른 국가와 연락이 안 된다고요. 우리만 7차 변이가 시작된 후로 고립됐다고 했어요.”

그건 곽수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7차 변이도 상부 놈들이 주도했다는 심증이 있었지?”

“아담 자체를 이용하는 건 상부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번 7차 변이는 상부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뭐?”

“서펀트가 저한테 레인보우 시티를 없애겠다고 말했어요. 각지의 쉘터 안에 분명 에덴동산 신도들이 있을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죠. 신흥종교가 통합국에 속한 시티를 무너뜨리겠다는 건 달리 말하면.”

“통합국이 우리를 버렸을 때 가능하지.”

석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했다.

“게다가 7차 변이가 발견된 지점이 말이죠.”

석화가 의심을 갖는 이유를 곽수환도 알아차렸다. 7차 변이 아담이 처음 발견된 장소는 오양석 박사의 자택이 있던 구역이었다.

탕탕탕!

그때였다.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석화가 어깨를 화들짝 울렸다. 너무 놀라했기에 곽수환이 괜찮다며 등을 쓸어내렸다.

야, 나와!

닫힌 철문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이채윤 소령님이에요?”

“빨리도 찾아왔네.”

곽수환이 석화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입술에 쪽 키스를 했다.

새롭게 감아둔 팔의 붕대도 재차 확인하고 셔츠 한 장을 뒤집어 씌웠다. 석화도 하반신을 감싼 군용모포를 벗어낸 뒤 그의 트레이닝복 하의로 갈아입었다.

오라고 해놓고는 어디 갔어?!

이채윤이 힘으로 문을 열려는지 철문이 끼긱끼긱 하는 소리를 빚어냈다. 곽수환이 성큼성큼 걸어가 철문을 확 열었다. 이채윤은 메고 있던 제 상체만 한 배낭을 안에 툭 던져놓았다.

“박사님 괜찮아!?”

한달음에 달려오는 그녀에게 석화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꾸벅 인사하고 보니 다행히 그녀도 어디 다친 데는 없어보였다.

“소령님은 괜찮으세요? 걱정했어요, 저도.”

“나는 어디 내놔도 잘 살아. 박사님이 제일 걱정이지.”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엄마가 여기로 가라던데?”

그러면서 잘 찾았지, 웃으며 브이자를 펼쳤다. 곽수환이 그녀가 내려놓은 배낭의 입을 확 벌려 열었다.

“따라오는 놈들은?”

“당연히 없었지. 양상훈 새끼는 과천에 대기시켜놨어. 차 중령이 나보고 이거 전해달라더라.”

곽수환은 접힌 종이에 적힌 글을 내려다봤다.

[접선 이상무. 호의]

“그게 무슨 말이야?”

세컨드와 퍼스트의 싸움에 대비해 곽수환이 접선한 상대는 다름 아닌 이채윤의 가문이었다. 줄타기에 능한 명예가문이기에 지금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퍼스트나 세컨드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새로운 세력에 편승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력이 그들 자신이 된다면 금상첨화겠고.

“무슨 말이냐고, 새끼야!”

“설명하기 귀찮아. 석 박사, 이거 받아.”

곽수환이 배낭에서 꺼낸 건 방탄조끼였다. 석화는 그가 내민 조끼를 한 팔씩 끼워 넣어서 입었다. 곽수환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말고 진짜 이동할 때 입어.”

안 그래도 조끼가 어깨를 축 늘어뜨릴 정도로 무거웠다. 석화는 조끼를 벗어서 매트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너, 진짜 무슨 생각인데?”

이채윤은 곽수환과 오래 알아왔지만, 이해 못할 행동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잘 살 생각.”

“지금 네가 석화 박사님 데리고 날랐다고 소문 쫙 퍼졌어. 다들 너 찾겠다고 난리인 건 알지?”

역시나 석화는 곽수환이 저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생각했다.

“상관없어. 제주도로 갔다가 곧장 퍼스트한테 갈 거야.”

“제주도?!”

“넌 이거 가지고 다시 여의도로 올라가.”

곽수환이 내민 물건은 석화의 피가 묻은 붕대 몇 개였다.

“차 중령한테는 암호 무전 보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전해주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때려치워라. 제주도는 어떻게 가게? 헤엄칠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헬기 타고 갈 거야.”

그는 지혈제나 진통제 같은 약품과 함께 비상식량과 물도 가방에 가득 담았다. 곽수환의 말에 놀란 건 이채윤뿐만이 아니었다.

“헬기요?”

석화가 물었다.

“응, 헬기.”

“아……. 저 미친 새끼. 아! 너 진짜! 이 개새끼!”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이채윤이 발작하듯 날뛰었다.

“헬기 잃어버렸다며! 개호로 새끼! 내가 그거 때문에 엄마한테 얼마나 깨졌는데!”

이채윤이 저렇게 화낼 만도 했다.

지방에 있던 그들이 여의도 불패소대로 배정받았을 당시, 헬기 두 대를 이채윤의 가문에서 지원해줬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지방의 급한 지원요청에 헬기를 끌고 나갔다가 이름 모를 야산에 불시착했는데 헬기를 조종한 건 곽수환이었다.

아담이 대거 출현한 구역으로 가야 하는 일이 더 급했기에 방치된 차를 타고 이동했고, 나중에 헬기를 찾으려고 하니 대체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곽수환도 도통 위치를 모르겠다고 잡아뗐다.

“나중에 찾은 거야, 나중에.”

이채윤이 주먹을 쥐자 곽수환이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꺼냈다.

“그래도 그 헬기 덕분에 석 박사가 무사히 제주도 가게 됐으니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곽수환은 트레이닝복 상의를 걸쳐 입고 지퍼를 죽 올렸다.

“곽수환 소령님.”

밖으로 나가려던 그의 앞을 석화가 막아섰다.

“응?”

“우도로 가요.”

곽수환이 눈에 훤히 보이도록 인상을 썼다. 그러나 석화는 어젯밤처럼 체념한 얼굴이 아니었다.

“우도는 안 돼.”

“생각이 있어요.”

“생각은 누구나 있지. 석 박사가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도는 아니야.”

석화는 어떤 식으로 곽수환을 설득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세컨드 마스터가 저를 실험체로 삼을 가능성은 있지만, 다짜고짜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이는 아닐 것이다. 인체실험을 강행하기보다는 자신의 혈액을 이용해 아담 바이러스를 연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각 쉘터에 마더를 구축한 사람이자 인체실험을 막는 안건을 제시한 게 바로 세컨드였다. 그렇다면 세컨드를 무작정 피하기보다 우도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7차 변이 아담을 만들어낸 게 레인보우 시티가 아닐 확률도 높으니 석화 역시도 호기심이 일었다.

“곽 소령님은 세컨드 마스터 편이었죠?”

“자꾸 편 가르기 할래. 누구 편도 아니었다니까.”

“애초에 소령님이 퍼스트가 아니라 세컨드와 손을 잡은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닙니까.”

석화가 딱딱하게 나왔지만 곽수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는 잡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이번에는 내 말 들어.”

“에덴동산 서펀트를 만난 게 저예요. 세컨드 마스터도 에덴동산을 없애려고 할 테니, 서펀트를 알고 있는 제가 접선한 뒤에 곽수환 소령님에게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곽 소령님의 수배를 푸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가 세컨드에게 가는 거고요.”

“운전대 좀 맡겼다고 실전에 뛰어들어 스파이 노릇이라도 하려고? 몸 쓰는 건 내가 알아서 하니까 일단은 피신해 있으라는 거야.”

아작아작, 석화는 라면을 씹어 먹는 소리에 옆을 쳐다봤다. 이채윤이 흥미 어린 표정을 하고 둘의 설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에 묻은 스프가루를 쪽 빨아먹은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아예 박사님을 입에 넣고 다니지 그래.”

곽수환이 농담할 상황 아니라면서 인상을 썼다.

“박사님을 세컨드한테서 빼돌리려는 정확한 이유가 뭔데?”

“실험체로 삼으려는 수작이 뻔히 보이잖아.”

“세컨드 마스터가 인체실험 금지한 거라던데?”

“그거 지지율 얻으려고 쇼한 거거든.”

“난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겉으로는 우리 집안이 퍼스트 라인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엄마도 세컨드를 훨씬 좋아해.”

“너희 엄마 취향을 내가 알 게 뭐야. 끼어들지 마.”

“이런 씹, 개불 같은 새끼야, 난 네가 무슨 생각인지 하나도 모르는데 도와주잖아.”

라면봉지 안에 손을 넣은 이채윤이 포클레인처럼 라면 부스러기를 퍼 올렸다.

“그냥 박사님이랑 내가 같이 움직일게. 아무리 세컨드라고 해도 우리 집은 함부로 못 건드리잖아. 그리고 박사님 말도 맞지. 너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일단 수배부터 풀어야 할 거 아니야.”

석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채윤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거절하려고 운을 떼려고 할 때였다.

“그럼 한 시간에 한 번씩 보고해.”

“세 시간으로 해. 이참에 나도 엄마가 부탁한 일 있어서 이 이유 대고 우도 들어가는 게 낫겠다 싶고.”

“부탁한 일?”

이채윤이 봉지에 남은 라면을 털어 넣고 말을 아꼈다.

“묻지 마. 엄마가 아직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어.”

이채윤네 가문의 꿍꿍이가 뭔지 알아내야 했지만, 핵심을 찾아내 유도신문 몇 개만 던지면 술술 불 테니 일단은 보류였다.

철문을 열고 밖에 선 곽수환이 바람의 세기를 가늠했다. 군용헬기라고는 해도 이렇게 거센 바람이 불 때는 쉽게 뜨기 어려웠다. 헬기를 가져와 이곳에 착륙을 시도하고 다시 뜰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모두가 이동을 해야 할 듯했다. 석화도 그걸 아는지 벗어둔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20분정도 더 올라가야 하는데 괜찮지?”

“우리 걸음으로 20분이면 박사님은 한 시간일걸?”

“잘 따라갈게요.”

석화는 곽수환이 건네줬던 총도 권총집에 꽂았다.

곽수환은 나름대로 무장을 하는 석화를 보며 자식에게 첫 심부름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했다. 분명 대견하긴 한데 걱정이 앞섰다. 운전할 때도 한껏 얼굴이 상기되어 있지 않았나.

인생을 연구실에 저당잡힌 데다 체력이 약해 활동적인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석화는 오히려 쫓기는 지금이 다른 때보다 생기 넘쳐 보였다.

안으로 돌아온 곽수환은 이채윤에게 기관단총 하나를 던졌다. 자신도 권총을 챙겨 허벅지에 찬 레그 홀스터에 꽂았다. 다리를 움직여 이동의 용이함을 확인하고는 물건을 넣어둔 배낭을 어깨에 멨다. 석화도 조그만 배낭에 생수 몇 통을 넣어 메었는데 수납용 그물에는 또 다른 총이 꽂혀 있었다. 난로의 불씨를 제거 한 뒤 주변을 빙 둘러본 것을 끝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채윤이 나가고 그 다음은 석화가, 마지막으로 곽수환이 나와 철문을 잠갔다.

“석 박사 업히자.”

“제가 직접 걸을게요.”

석화는 체력을 잘 비축해뒀다면서 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굵은 나무 몸통도 흔들 만한 산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이리저리 나부끼게 만들었다.

“길 따라갈 게 아니라서 업히는 게 나을 거야.”

사람들의 발길이 없어진 산은 등산로도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야생의 산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셈이었다. 석화도 저 위를 올려다보더니 하는 수 없이 곽수환의 등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배낭을 앞으로 멘 뒤였다. 쉽게 업힐 수 있게끔 몸을 낮추니 석화가 온기 가득한 손으로 목을 감쌌다.

“속은 괜찮아?”

“메슥거리지는 않아요.”

“그거 말고 안에 안 아프냐고.”

“괜찮아요.”

엉덩이와 배 안쪽의 화끈거림은 이따금씩 찾아왔지만 못 견딜 만큼은 아니었다.

“이 소령, 따라와.”

“올라가기나 해.”

이채윤이 군화의 끈을 단단히 묶었다. 곽수환은 제자리에서 한 번 다리를 구르더니 뒤를 돌아봤다. 미행이 없었다고 하지만 행여 따라오는 놈들이 있나 싶은 기우에서였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타고 스산한 바람이 교차하는 소리만 들릴 뿐 인적은 저희들이 전부였다.

“석 박사.”

“꽉 잡고 있어요.”

한두 번 업힌 게 아니라 이제 잘 아네 싶어 웃음이 번졌다.

곽수환이 석화의 허벅지를 단단히 잡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20분이라고 했지만 훨씬 더 단축할 생각이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바닥에 박힌 돌을 도움닫기 삼아 빠르게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얽혀있는 마른 나무줄기에 다리가 걸리지 않도록 방향을 틀었고, 이채윤도 뒤에서 잘 쫓아오고 있었다. 석화는 혀를 깨물지 않도록 이를 꽉 물었다. 산의 전경이 휙휙 지나쳐가는 동안 둘을 대신해 여러 번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사람의 인기척에 퍼드덕 새들이 날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산의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곽수환이 훌쩍 오른쪽으로 틀어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서도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솟아났다. 잎이 없어 앙상한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쳐내며 걷던 그가 드디어 석화를 내려두었다. 거의 절반의 시간을 단축해 오른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헤매면 어쩌나 했는데.”

물론 그럴 일은 없었을 거라면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커다랗게 솟아있는 바위 뒤로 공터와 비슷한 공간이 나왔다. 그 중앙에 흙과 마른 나뭇잎들이 잔뜩 쌓여있는 커다란 몸체가 보였다. 이채윤이 헬기로 다가가 흙먼지가 낀 문을 손으로 쓱 털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 펭귄의 옆모습이 그려진 마크가 드러났다. 바로 이채윤 가문의 마크였다.

“이 씹새.”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 황당하다는 듯 욕설을 퍼부었다.

“다 쓰면 도로 가져다 놓지 뭐.”

곽수환이 뭐가 문제냐는 듯 헬기의 문을 옆으로 열고는 내부를 확인했다. 흙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겉과는 다르게 내부는 나름 깨끗한 편이었다. 배낭을 좌석에 걸고, 놀라움에 입을 슬쩍 벌리고 있는 석화를 향해 말했다.

“타시죠, 석 박사님.”

그는 조종석 뒤쪽을 가리켰다. 소형 헬기보다는 커서 뒷부분이 길쭉했고 좌석도 옆으로 앉게끔 되어 있었다. 상공에서 군인이 총기를 사용할 수 있게 벨트도 문 앞에 달려 있었다.

뒷좌석에 올라탄 석화는 옆으로 앉았다. 달려 올라온 건 곽수환인데 오히려 제 가슴이 마구 박동했다. 곽수환은 긴장하지 말라면서 입꼬리를 쓱 올리고는 석화의 앞에서 몸을 굽혔다.

“다리 벌려봐.”

은근히 야한 어투로 말했는데 석화는 무심히 두 다리를 벌렸다. 섹시한 맛은 하나도 없지만 찰진 허벅지의 감촉을 아는지라 일부러 석화의 허벅다리를 쥐어봤다. 밑에서 배낭형 낙하산을 꺼낸 곽수환이 석화가 메고 있던 가방을 벗기고 대신 낙하산 벨트를 채웠다. 석화는 그 바람에 등이 볼록해져 엉덩이가 앞으로 밀렸다.

“혹시나 싶어서 준비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알았지? 비행기도 뜨기 전에 안전방송 듣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니까.”

낙하산을 얹어주니 행여 겁먹을까 봐 안심을 시켜주었다. 정작 석화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여기서 탈출해야하는 상황이 생기면 저기 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거야. 뛰어내리자마자 바로 펼치면 안 돼. 점프해서 내리지도 말고 그냥 수직으로 뛰어내려야 돼. 어느 정도 헬기랑 거리가 멀어졌다 싶을 때, 그때 이걸 잡아당기면 낙하산이 펼쳐질 거야. 근데 진짜 사용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비행기나 배에 비해 헬기가 조금 더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일반인들이 타기에 위험한 게 헬기이기도 했다.

“걱정 안 해요. 혹시나 그런 상황이 생겨도 잘 탈출할게요.”

곽수환이 바람에 함부로 나부꼈던 석화의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해줬다. 석화는 그 손길이 기분 좋아서 설핏 눈을 감았다.

“거기까지.”

조종석 칸에 올라탄 이채윤이 곽수환이 앉아야 될 곳을 주먹으로 퍽 쳤다. 곽수환은 굴하지 않고 석화의 머리를 완벽하게 정리해준 다음에야 조종석으로 가 앉았다. 그는 상단에 매달린 스위치를 툭툭 가볍게 쳐올렸다.

“너 얼마 만에 운전 해보냐?”

곽수환이 다시 한 번 석화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어.”

헬기를 잃어버린 뒤로 불패소대에 더 이상의 헬기 지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용헬기는 제트기용 연료(JP-8)를 사용했는데, 다행히 헬기 안에 넉넉한 양이 보관되어 있었다. 도중에 연료를 채워줘야 할 테니 아무래도 석화의 집이 있는 곳을 목적지로 삼아야 할 듯했다.

무사히 헬기의 시동이 걸리고 탁, 탁, 탁, 천천히 돌던 프로펠러가 급격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기동훈련 때 했던 것처럼 헬기를 급상승시키기 시작했다. 휘청, 바람에 헬기의 몸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석화는 제 어깨에 두른 벨트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행여나 이 안에서 낙하산을 펼치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제가 잡은 벨트를 확인했다.

헬기가 위로 치솟는 동안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엄청난 소음을 자아냈다. 곽수환과 이채윤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정 고도에 들어서니 헬기는 안정을 찾고 앞으로 질러가기 시작했다. 바다가 바로 눈앞이었다. 다시 제주도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

같은 날, 두 시간 뒤. 제주도 세화해변 근처.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지?!

석화는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 헬기 안에서 곽수환을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관자놀이가 지나치게 지끈거렸다. 곽수환도 더는 석화를 돌아보지 못하고 조종대만 꽉 쥐고서 상승고도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조종석에 앉아있던 이채윤이 벨트를 풀고 순식간에 튀어나와 석화를 붙들었다. 그녀가 석화를 자신의 앞에 안고 벨트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박사님! 낙하산은 내가 펼칠 거야! 알았지?!

소리치며 헬기의 출입문을 힘으로 열어젖혔다.

소령님은, 곽 소령님은!

말하기도 전에 이채윤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헬기에서는 까만 연기가 쉴 새 없이 피어나오고 있었다. 석화는 위를 보려고 했지만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바람 때문에 고개를 가눌 수가 없었다.

이채윤이 낙하산의 날개를 펼친 순간,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헬기가 있는 방향이었다.

***

[세컨드 마스터, 이채윤 소령이 제주도로 접근 중입니다.]

세컨드는 마더의 비상 알림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의 집무실 책상에는 온갖 서류와 함께 오양석 주변인의 인적사항이 정리되어 있었다.

“이채윤 소령?”

[이동 속도를 계산한 결과 헬기로 추측, 15분 이내로 세화해변에 도달할 예정입니다.]

위치추적이 가능한 칩을 체내에 삽입하는 것이 레인보우 시티의 규정이었지만, 명예가문의 경우는 예외였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니만큼 감시나 사찰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곽수환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이채윤이기에 세컨드는 그녀가 신체검사를 받을 당시, 아담 백신이라는 거짓 핑계를 대고 칩을 삽입하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세컨드라고 해도 조언자의 허가가 없다면 함부로 GPS 관제를 열 수는 없었다. 세컨드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요주의 인원들 중, 제주도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면 마더에게 경고를 울리게끔 설정해두었다.

이채윤이 허가도 없이 제주도로 접근 중이라면 그녀 혼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세화 육군 본부로 연결해.”

[로딩중, 연결합니다.]

연결 신호가 몇 초에 걸쳐 이어진 뒤에야 육군 본부에서 답이 들렸다.

[세컨드 마스터, 세화 통신 센터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미확인 헬기가 세화해변으로 접근 중일 겁니다.”

[예, 저희도 미확인 헬기 확보했습니다. 격추 준비 중입니다.]

눈을 홉뜬 세컨드 마스터가 책상을 거칠게 쾅 내리쳤다.

“격추 중지하세요! 지금 당장 중지하세요!”

[……격추 중지 요청 전달합니다.]

“격추 허가를 누가 내린 겁니까?”

통신 센터 군인이 한참 말을 못 하고 있더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세컨드 마스터 아니십니까?]

“뭐라고?”

[세컨드 마스터께서 헬기 격추 요청을 하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대체 어떠한 경로로 확인을 했다는 겁니까?”

[마스터……. 마스터께서 전용 회선으로 저희에게 메시지를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세컨드는 재빨리 키보드를 가져와 육군 보안 시스템에 접속했다. 중복 접속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컨드는 대체 어떤 놈이 자신의 고유 서버로 접속을 했는지 추적하라고 지시했지만, 접속 위치 또한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이 무슨…….

[마스터, 격추 중지 요청을 하달했으나……. 이미 격추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젠장!”

세컨드가 키보드를 유리창을 향해 날렸다. 세컨드의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움찔했다. 세컨드는 자신의 하반신을 커다란 천으로 덮었다.

[마스터, 헬기는 격추됐으나 다행히 비상탈출을 한 인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비상탈출 인원에게 사격은 중지한 상태입니다.]

“비상탈출 인원이 누구인지 정확히 보고하세요.”

[예, 알아보는 대로 곧장 보고하겠습니다.]

세컨드는 전동 휠체어를 키보드가 날아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채윤과 동행한 인원이 석화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무사히 탈출을 한 사람이 석화이기를 바랐다.

세컨드는 떨어진 자판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전면의 유리창을 바라봤다.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명예 가문과 군인, 그리고 연구원 등이 방사형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몸통인 나무부터 여러 가지가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듯한 형태였다. 그 사이사이에는 네 개의 강들도 있었으며, 그들을 타고 또 곽수환과 석화가 나왔다.

석화의 동료 연구원 이름들을 타고 도착한 곳은 김 박사와 최호언.

최호언의 이름에 동그랗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

제아무리 낙하산을 타고 모래사장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충격이 엄청났다.

지상에 안착하는 순간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충격을 최소화하려 했음에도 모래에 발이 얽혀 나자빠져버린 탓이었다. 급박한 가운데 이채윤은 석화를 제 몸 위로 올려 최대한 감쌌다.

모래로 범벅이 된 석화가 손으로 낙하산의 천을 걷어내려고 허우적거렸다. 그럴수록 더 몸에 엉키기만 했다. 이채윤이 잭나이프로 끈을 끊어내자 석화는 모래사장을 기다시피 해서 앞으로 빠져나갔다. 공중에는 헬기의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저 먼 바다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만 일렁거렸다. 마치 폭발한 헬기의 잔해처럼 보였다.

“……박사님.”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난 이채윤이 석화를 불렀다. 석화는 멍한 눈으로 바다만 바라봤다.

“걱정 마. 곽수환 새끼 괜찮을 거야. 우리한테 이런 일 한 두 번 있던 것도 아니야.”

그러나 이채윤의 목소리도 불안하게 떨렸다.

“박사님, 우리도 어째 큰일 난 거 같네.”

석화와 이채윤의 주변을 세화 소속 헌병대원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채윤이 제복의 옷매무새를 제대로 여미고 인상을 구겼다.

“나 여의도 불패소대 이채윤 소령이거든? 너희 돌았어? 헬기 마크 보면 몰라? 가뜩이나 물자도 부족한데 헬기를 격추시켜?!”

허가도 없이 제주도에 들어온 게 문제였지만 이채윤은 오히려 헌병대를 향해 윽박질렀다.

“격추 요청을 받았기에 격추를 한 것뿐입니다.”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한 채 석화는 두 손에 모래를 가득 쥐었다.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모래가 마치 수백 개의 유리조각 같았다.

“격추 요청? 어떤 새끼가 지시했는데!”

파일럿을 양성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헬기나 비행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시티의 군인뿐이었다. 그마저도 조종법을 배운 군인은 몇 되지 않았다. 본래 전시상황에서도 파일럿은 포로로 삼을 뿐, 죽이지 않는 법이다. 현재 레인보우 시티 또한 전시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헬기를 격추시킬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적이라 할지라도 파일럿을 지키는 게 불문율이 아니던가.

“어떤 새끼냐고!”

이채윤이 소리를 지르자 헌병대 대위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세컨드……. 마스터십니다.”

세컨드 마스터가 격추 명령을 철회했지만, 분명 처음 지시를 내린 사람도 그였다.

허망하게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석화가 그제야 대위를 돌아봤다. 비척대고 일어나니 헌병대 대원들이 이채윤과 석화를 연행하러 좀 더 다가왔다.

“나 여기서 니들 다 죽이고 튈 수도 있으니까 피차 힘 빼지 말자고. 내가 알아서 걸어갈 거야.”

이채윤이 석화의 팔을 붙들었다.

“박사님, 괜찮아?”

석화가 제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너무 답답했다. 누군가가 제 숨통을 쥐고 있는 것 같이 갑갑했다. 분명 곽수환이 쥐고 있는 거였다. 그 때문에 이렇게 속이 아프니까.

“저희가 우도로 모시겠습니다. 세컨드 마스터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석화는 세컨드 마스터라는 말에 엄청난 반발심이 일었다. 받아들이기 버겁도록 부정적인 감정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이건 분노라는 감정과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마음에 병을 얻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동안 저는 공감하지 못할 이야기였다. 그런데 몸 안 가득 분노와 슬픔이 차서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쌓이고 쌓이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데 곽수환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무사할 거다. 석화는 불길이 꺼져가는 저 먼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곽수환이 물 밖으로 나오는 모습만 계속 상상했다.

***

성산항에서 쾌속정을 타고 약 15분, 레인보우 시티의 최후방이자 최상부들만이 거주하는 우도가 보였다.

석화는 뱃멀미에 빈속을 연방 게워냈고 이채윤은 저러다 박사님 죽겠다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석화는 선미에서 토악질을 하면서도 바다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어딘가에 곽수환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우도에 도착해 차를 타고 세컨드의 저택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곽수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는 우도는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그 어느 나라의 휴양지처럼 아름다웠다. 자연 풍화를 거친 절벽 안으로 산책코스를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석화는 이 풍경이 참으로 이상했다. 웃고 떠들며 여유 있게 산책로를 걷는 이들에게 불안한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담이 나타날까 봐 함부로 밖을 나다니지 못하는 저 육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이 모습이 마냥 낯설기만 했다.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는 모두가 이랬을까? 곽수환 소령도 위험에 빠질 일은 없었겠지? 소수가 저런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 석화는 여기서 사는 이들이 부럽지는 않았다. 하나 더없이 확신할 수 있는 건, 곽수환의 말대로 레인보우 시티는 잘못됐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세컨드 마스터님의 집사님께서 안내하실 겁니다.”

검멀레 해변을 마주보는 저택은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 족히 몇 분은 소요됐다. 총 세 개의 경비초소를 거치고 나서야 세컨드 마스터의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감시 카메라가 석화가 타 있는 차량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두렵기에 이 안전한 곳에서까지 삼엄한 경비를 갖추고 있는 걸까. 석화는 기가 질릴 정도로 커다란 저택을 눈앞에 두고 차에서 내려섰다.

파도가 절벽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택의 중앙 문 앞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세컨드 마스터가 보였다.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세컨드의 앞으로 석화가 저벅저벅 걸었다. 집사와 세컨드의 경호를 맡은 군인들이 석화를 막아섰지만 세컨드가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요? 석화 박사님.”

석화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세컨드를 쓱 내려다봤다.

“그러게요. 죽지 않고 왔네요.”

석화가 이런 사람이던가. 세컨드가 웃는 낯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

수백 수천 개의 송곳으로 변해 몸을 찌르는 차디찬 물은 이미 익숙한 감각이라 대수롭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게 있다면 바로 소금물이었다.

“후, 씨발.”

컥, 쿨럭, 모래사장까지 기어 올라온 곽수환은 구역질을 해 바닷물을 게워냈다. 물을 다 토해내자마자 벌렁 모래사장에 드러누웠다. 숨을 힘겹게 몰아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시커먼 하늘에 별이 촘촘하게도 박혀 있었다.

자기……. 설마 나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바람피우면 그 상대 가만 안 둬.

농담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지만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흠뻑 젖은 트레이닝복 상의를 모래사장에 던졌다. 이딴 곳에서 숨을 돌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해류를 타고 토끼섬까지 떠내려 온 곽수환의 뒤로 봉긋하게 떠 있는 섬 우도가 보였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해도 빛을 따라 헤엄쳐서 가기란 당연히 무리였다.

곽수환은 셔츠도 벗어던지고 군번줄만 덜렁 매단 채 토끼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얗게 꽃이 피는 여름과는 달리 휴면 상태에 들어간 문주란들이 이방인의 출입에 사삭거렸다. 토끼섬은 물이 빠질 때만 육지와 연결됐는데 빠진 물이 슬슬 들어오려는 중이었다. 곽수환은 허리께까지 차는 물을 헤치면서 육지로 향했다. 물이 들어오는 속도도 여간 빠른 게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는 헤엄을 쳐서 빠져나와야 했다.

더럽게 춥네.

곽수환이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해 물을 털어내는 듯싶더니 민가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쩡한 헬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은 적어도 대장급 이상이 내렸을 테고, 이곳에서 그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저희를 주시할 수 있는 놈은 세컨드뿐일 것이다.

곽수환은 석화가 이채윤과 함께 뛰어내린 것을 확인한 뒤에야 바다로 이동해 헬기를 버렸다. 바다에서 낙하산을 펼쳐봐야 물에 빠져 죽을 테니 펼치지 않은 배낭을 튜브 삼아 여기까지 떠내려 왔다.

해변도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계속 내달리자 득실득실한 갯강구들이 현무암 사이로 숨었다. 입 안에 남아 있는 까슬까슬한 소금기를 뱉어내고 도로 옆에 붙어 있는 민가로 향했다.

한때 관광지로 성행해 타운 하우스나 게스트 하우스가 남아있었지만, 상하수도 시설은 전처럼 건재하지 않았다. 건설 중이던 도시가스 공사도 아담의 출현으로 중지됐기에 기름보일러나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집에만 사람이 살았다.

곽수환은 대문이 열려 있는 집 하나를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 마당에 떠놓은 물로 입을 헹구고 몸에도 뿌렸다.

“뉘, 뉘쇼?”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에게 놀란 노인이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곽수환은 바가지로 물을 퍼서 다시 몸을 닦고, 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는 목에 걸려 있는 군번줄을 노인을 향해 보였다.

“레인보우 시티 육군 소령입니다. 사정이 생겨서 신세 좀 졌습니다.”

군인이라는 소리에 노인이 한껏 긴장을 했다. 청정구역인 제주도라고 하지만 여기서도 군인들의 영향력은 저 육지 못지않았다. 몇 달 전인가, 쌀을 배급받던 하도리 주민 중 한 명도 군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오, 옷은 어쩌시고.”

얼굴과 상체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있어 노인은 좀 더 불안해하고 있었다.

“제주도로 오던 도중에 문제가 생겨서 토끼섬에 불시착하게 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옷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곽수환은 노인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집 쪽으로 걸어갔다. 온몸의 짠 기운을 다 털어낸 대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들어가도 될까요?”

노인은 곽수환을 올려다보면서 고개만 한 번 끄떡했다.

군화를 벗고 안으로 들어간 곽수환이 빨래건조대에 올려둔 수건으로 제 몸을 털어냈다. 허벅지에 매달린 레그 홀스터를 떼어내고 입을 만한 옷을 둘러보는데, 사이즈가 전혀 맞지 않는 바지나 셔츠밖에 없었다. 그것도 색이 아주 알록달록했다.

“저기.”

안쪽 방으로 들어갔던 노인의 손에 트레이닝복이 들려 있었다.

“그, 오래전에 육지에 나간 아들놈이 입던 건데,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의류 회사 로고가 새겨진 감색 트레이닝복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투명한 비닐에 감싸인 새 속옷도 건네왔다. 행여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두려워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것을 알았기에 입맛이 조금 썼다. 곽수환은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노인이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의는 바람막이 형태였는데 생각보다 보온성이 제법이었다.

그는 벗어둔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냈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지갑을 열어보니 지폐도 완전히 소금에 절어 있었다. 얼마의 돈을 건네주니 노인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렇게 많은 돈은…….”

“감사해서 그럽니다.”

곽수환은 수건으로 지갑의 물기를 닦아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노인이 운동화 한 켤레를 내밀었지만, 괜찮다면서 군화 안쪽만 수건으로 닦았다. 들어온 지 이제 5분이나 됐을까. 나갈 준비를 마친 곽수환이 군화 끈을 질끈 동여맸을 때였다.

[……알립니다. 제주도에 있는 레인보우 시티 시민들에게 알립니다. 레인보우 시티 육군 소령 곽수환의 행방을 발견하시는 분께서는 곧장 육군 센터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해변에 떠내려 온 시신이 있을시 군번을 확인해주십시오. 인상착의를 다시 한번 알립니다. 지직,]

노인이 일상처럼 틀어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건 구좌읍 전용 군인 방송이었다. 방송에서 나오는 인상착의와 흡사한 곽수환을 본 노인은 지폐를 두 손에 꼭 쥐었다. 이어 노인의 시선은 곽수환이 들고 있는 홀스터의 총에 닿았다.

“사, 살려주시오.”

곽수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없이 군화를 벗고 노인의 등을 밀어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살려달라는 말을 반복하는 노인을 붙들고 유선 전화기가 있는 방을 찾았다. 세이프 센터나 육군 센터의 번호가 적힌 메모지가 벽에 붙어 있었다.

곽수환은 수화기를 들지 않고 스피커 기능으로 전환했다. 메모지에 큼지막하게 써진 육군 센터의 번호를 눌렀다.

[우리는 위대한 레인보우 시티의 세화 육군 센터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위대고 나발이고.

“나 왜 찾아.”

[……예?]

“석화 박사와 이채윤 소령은 구금 중이야?”

[누구십니까? 성명을 대십시오.]

“내 발로 찾아가기는 할 건데, 석화 박사와 이채윤 소령이 무사한지나 말해.”

[혹시……. 곽수환 소령이십니까?]

스피커 너머가 조금 소란스럽다 싶더니 혼선되는 듯한 신호음이 잡혔다. 하여간 고물. 인상을 쓴 곽수환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곧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곽수환 소령.]

곽수환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가 떴다.

“……세컨드 마스터.”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네는 대체 왜 내게 반기를 세우려는 건가? 난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자네가 내 말만 잘 따라주었다면 일이 이렇듯 복잡해지지는 않았을 걸세.]

“석화 박사는 세컨드 마스터가 데리고 있는 중입니까? 만약에 석 박사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그렇다고 해도 곽 소령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왜 없습니까. 세컨드 마스터 목 하나는 충분히 따고 죽을 수도 있는데.”

곽수환은 차갑게 식은 몸과 다르게 손에 땀이 배어난 것을 깨달았다. 세컨드가 섣부른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지만, 혹시 뛰어내리다가 어디 다친 건 아닌지, 행여 세컨드가 석 박사를 고문이라도 했을지 걱정이 앞섰다.

[네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 사상불순 그 자체야.]

“그러니까 석 박사가 지금 어떤지 말하라고.”

세컨드 마스터는 노기를 누르 듯 낮은 침음을 흘렸다.

[우도로 오게. 여기서 이야기합세.]

“석 박사 진짜 당신이 데리고 있는 건 맞아? 적어도 목소리라도 들려줘야 내가 믿지 않겠어?”

[팔에 아직 총상이 남아있더군. 그 때문에 위치추적칩도 사라졌고. 이러면 답이 되겠나?]

뚝,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이제 보니 육군 센터에서 세컨드가 있는 곳으로 회선을 연결한 듯했다. 곽수환도 스피커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고는 허벅지에 레그 홀스터를 매달았다.

“할배, 그거 내려놔요.”

노인은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르는 프라이팬을 위로 쳐들고 있었다.

“그, 그냥은 나도 못 죽어!”

석 박사보다 더 비실비실하게 서서 온 힘을 다 짜내는 걸 보니 정말 제가 악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곽수환이 노인에게서 프라이팬을 휙 뺏어서 바닥에 내려두었다.

“여기서 우도로 가려면 성산항에서 배 타야 하죠?”

곽수환은 지갑에서 지폐를 좀 더 꺼내 프라이팬 옆에 내려두었다. 그런데도 노인은 쉽게 경계를 풀지 못했다.

“할배, 내가 할배 죽일 거였으면 이렇게 돈 줄까요? 나 지금 엄청 바쁘거든요?”

여전히 주름진 입술만 꾹 다문 채였다. 곽수환도 더는 됐다면서 나가려는 때였다.

“……성산항에서 갈 수는 있는데, 우도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아무나 가지 못해.”

한 꺼풀 누그러진 목소리가 곽수환의 등에 부딪쳐왔다.

“그리고 배도 하루에 한두 번밖에 안 떠. 이렇게 컴컴하니 오늘은 더 이상 안 뜰 거야.”

내일까지 기다리라는 건 나보고 기다림에 목말라 죽으라는 거지.

곽수환이 노인을 향해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하고 밖으로 나가 군화를 재차 신었다.

“이봐.”

따라 나온 노인이 곽수환을 불렀다.

두려워 마지않는 군인이라고 하지만 저 자는 분에 넘치는 돈도 줬고, 경우 없게 굴지도 않았다.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죽이고 필요한 물건을 강탈했을 것이다. 노인도 그걸 깨닫고 나니 곽수환이 달리 보였다.

“근데 우도는 왜 가게? 우도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군인이면 알 거 아니야.”

곽수환은 군화 끈을 꽉 잡아당겨서 묶었다.

“애인 찾으러 가요.”

노인이 침침한 눈을 끔뻑거렸다.

“애인?”

“이만 갑니다, 오래도록 편안히 잘 사시고.”

“잠시,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간 노인이 뭔가를 부산하게 찾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도 부족한데 그냥 가버리자 싶어 마당을 걸어 나가는데 노인이 달려 나왔다. 노인은 뭔가를 곽수환의 손에 올려주었다. 뭔가 싶어서 내려다보니 낡은 열쇠였다.

“지금은 기름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데, 옛날에 내가 쓰던 게 남아있거든?”

“설마 할배, 배라도 있어요?”

곽수환도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 물었다.

“그런 비싼 게 어디 있어. 있다고 해도 다 레인보우 시티 소유지. 이리 와 봐. 오래되긴 했는데 내가 애지중지 아끼고 관리해서 굴러가긴 할 거야. 아무렴 나한테 있어봐야 썩어가기만 할 테니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게 낫지.”

노인은 곽수환의 팔을 붙들고 집 뒤편으로 향했다.

나무로 된 창고 문을 열자, 낡은 트럭 뒤로 조악한 색의 제트스키가 보였다. 오래된 제품은 맞는지 몇 번이고 페인트를 다시 칠한 흔적이 있었다.

“어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아? 기름은 알아서 충당해 봐.”

곽수환이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름을 대체 어디서 채우나. 육군 센터도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곽수환은 재빨리 트럭의 기름칸을 확인했다. 아직 한 눈금 정도 남아 있었다.

“이 트럭에 있는 기름 정도면 우도까지 가요?”

“거리가 멀진 않으니 아슬아슬하게 되긴 할 거야.”

“할배, 내가 돈 더 줄 테니까 트럭에 있는 기름 제트스키로 옮겨요.”

“그럼 제트스키는 어떻게 옮기고.”

제트스키는 트럭에 매달아 옮길 수 있도록 쇠로 된 카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곽수환은 제트스키가 놓인 카트의 앞머리를 잡고는 한번 끌어봤다. 힘은 좀 들어도 밑에 바퀴가 달려 있어 무리 없이 끌려오니 노인이 입을 벌렸다.

“힘이 장사네. 자네도 돌연변이야?”

“이 정도는 웬만하면 끌어요.”

무게는 족히 150kg 이상은 나갔지만, 곽수환의 말대로 힘 좀 쓴다하면 옮기기 어려울 건 없었다.

노인은 트럭에 있는 기름을 전부 빼내 제트스키로 옮겨 담았다. 젊었을 적,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제트스키를 타고 바다에 나가 놀았던 노인이었다. 군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숨겨두었지만 창고에서 썩어 없어지는 건 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곽수환은 카트의 앞머리에 두른 밧줄을 끌어와 어깨에 걸었다. 두 손으로 밧줄을 꽉 쥐고는 바다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육지는 어때? 여전히 아담들이 판을 치나?”

“항상 똑같죠.”

노인이 도와준답시고 뒤에서 미는데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다.

“내 아들도 육지로 차출되어 나갔는데 나간 지 몇 달 만에 아담한테 물려 죽었다대. 난 내 아들 유골도 못 받았어. 사는 게 늘 전쟁이지 뭔가. 젊은 놈들만 죽어나가지.”

꽤나 오래전 일인지 노인의 목소리는 제법 덤덤했다. 곽수환은 더 걸음을 빨리해 해안도로를 건너 바다와 연결된 콘크리트 도로로 향했다. 제트스키를 밀어 물에 띄우고 발판을 딛고 올라탔다. 엔진이 꺼져 있는 제트스키는 잔잔한 파도에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곽수환은 열쇠를 꽂아 돌렸다. 시동이 걸리지를 않아 조바심이 났지만, 다행히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워터제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누르면 속도가 붙어. 후진 기능은 없으니까 방향을 틀 때는 크게 돌면 돼!”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곽수환이 손잡이를 잡아당긴 뒤였다. 동체가 앞으로 확 튀어나갔다. 제트스키의 조작법은 자동차보다도 훨씬 간단했다.

“나중에 돌려주러 올게요.”

노인이 됐다면서 손을 흔들었다. 곽수환은 손잡이에 달린 액셀에 힘을 주어 저 멀리 보이는 섬으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살이 얼굴에 튀었지만 옷이 흠뻑 젖는 일은 없었다. 파도를 거스를 때마다 제트스키의 몸체가 요동쳤다. 어쩐지 뒤에 석 박사를 태우면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려면 떨어지지 않도록 두 팔을 끌어와 자신의 허리 앞에 묶어야겠지만 말이다. 마음이 급한 까닭인지 우도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멀었다.

***

소금이 나오는 요술부채를 바다에 빠뜨린 남자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고 했었다. 곽수환은 어릴 적 베트남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때는 바닷물이 짠지 어떤지도 모를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부채를 잃어버린 새끼를 저주할 정도로 바닷물을 지겹게도 맛봤다.

우도 주변을 돌던 곽수환은 저 꼭대기에서 강렬한 불빛을 내뿜는 저택을 올려다봤다. 세컨드 마스터의 저택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전력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곳이 놈의 집이 아닐까 싶었다.

검멀레 해안까지 제트스키를 끌고 가 해변 근처에서 시동을 껐다. 동체를 끌어 올리니 앞에서 산책을 하던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도를 직접 방문한 건 곽수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변에 놓인 벤치와 이인용 그네, 그리고 언제든지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마트는 불이 훤했다. 우도의 밤은 기다란 등대 몇 개가 쉴 새 없이 주변을 감시하듯 비추고 있었다.

저기 모래사장 끝에서 군인들이 탄 지프가 달려와 멈추는 게 보였다.

세컨드가 파놓은 함정이라고 해도 올 수밖에 없었다. 곽수환은 제 허벅지에 매달린 권총을 내려다봤다가 지프로 시선을 던졌다. 문을 열고 내린 사람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 추위에 하얀 맨발을 드러낸 모습이 꼭 처음 본 그날 같았다.

곽수환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석화를 바라봤다.

상처자국은 없는지 낙하하면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석화가 사박사박 모래를 헤치며 걸어왔다. 등대 불빛이 둘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서로의 모습이 자세히 들어왔고, 석화도 곽수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석화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소령님이에요?”

달려와서 안기는 것까지는 안 바라지만, 제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질문이라니.

“내가 누군데?”

곽수환이 무표정하게 대꾸하자 석화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추락을 하면서 기억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석화치고 너무 극적으로 놀라했기에 곽수환은 순간 미묘한 죄책감마저 느꼈다.

“오늘도 슬리퍼 신고 돌 주우러 나왔어?”

석화의 눈썹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농담한 거예요?”

“화내지 마. 나 석 박사 만나겠다고 시커먼 밤바다 건너서 왔잖아.”

곽수환이 두 팔을 벌렸다. 그런데 석화는 오지도 않고 모래에 발이 파묻힌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성큼성큼 걸어가 석화를 끌어안으려는데 방해꾼이 뒤에서 다가왔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던 세컨드 마스터의 집사였다.

“세컨드 마스터님의 자택으로 모시겠습니다.”

“다 같이 죽으라고 헬기를 격추시켜놓더니 이건 무슨 심보입니까?”

“뭔가 큰 오해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격추 중지 요청을 하신 분이 바로 세컨드 마스터이십니다.”

곽수환이 석화의 앞을 막고 섰다.

“육군 센터와 녹음한 내용도 남아 있으니 오해는 얼마든지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조작과 음모를 수백 개는 만들어낼 수 있으니 녹음본 따위에 신뢰는 없었다. 제트스키에 석화를 태워 데리고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나 기름이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어차피 우도에 들어온 이상 세컨드 마스터의 마수를 피하는 일은 쉽지도 않을 테고.

“곽 소령님.”

석화가 곽수환의 팔을 꽉 붙들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석화는 그제야 눈앞의 그를 실감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한 말을 했을 때는 발밑이 무너지는 충격이 닥쳐왔지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가 무사하면 그만이었다.

“나 쉽게 안 죽어.”

“이채윤 소령님과 세컨드 마스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는 더 시간을 지체하지 말라는 투로 딱딱하게 말했다. 세컨드와의 만남을 피할 수는 없기에 곽수환도 정차 중인 지프로 석화와 함께 걸었다.

“다친 데는 없고?”

“없어요. 소령님은요?”

“바닷물만 한껏 마신 것 빼고는.”

그런 것치고 차에 올라타 보니 곽수환의 턱에 상처가 생겨 있었다. 옆에서 턱을 만지자 곽수환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쳤어요.”

“이런 건 금방 나아.”

“한참 못 볼 줄 알았어요.”

“그럴까봐 제트스키로 날아왔잖아.”

조수석에 앉아있던 집사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세컨드 마스터가 했던 말이 정말인가 싶을 정도로 둘 사이가 끈끈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집사도 석화나 곽수환에 대해 적잖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석화가 관심 두는 건 오로지 돌뿐이고, 곽수환은 진짜 정체를 숨기기 위해 가벼운 행동을 일삼는다는 것쯤은 말이다. 그런 둘이 만나서 애틋함을 흉내 내고 있으니 혹시 연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룸미러로 뒤를 들여다보니 귀신같이 시선을 눈치 챈 곽수환이 눈을 마주쳐왔다.

“세컨드 마스터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곽수환이 명백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런 사람이 수배명령을 내립니까?”

“에덴동산에게서 두 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곽수환은 귀를 휘적거리고 싶을 정도의 개소리라고 치부했다.

석화는 뒷좌석의 자리를 나누는 볼록한 중앙 시트에 앉아서 곽수환의 소매를 꽉 붙들고 있었다. 불편한 자리인데도 행여 곽수환이 어디론가 사라질 것처럼 온기를 실어 몸을 맞대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곽수환은 석화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눌렀다. 아무래도 오늘 일이 석 박사한테 엄청 충격이었나 본데…….

석화는 자신을 만나서 더없이 많은 고생을 하게 된 것만 같았다. 연구실에만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갔을 텐데. 아니, 최호언이 석화를 눈독들인 이상 오히려 제가 있기에 다행이었다. 최호언이 석화를 손에 쥐고 뒤흔드는 생각만 해도 놈의 얼굴과 몸통을 분리해버리고 싶었다.

“세컨드 마스터가.”

석화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저택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을 건넸다.

“최호언 박사가 서펀트인 걸 알고 있어요.”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세컨드도 여러 정보를 취합해 의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었다. 그러나 세컨드가 최호언을 향해 저놈이 서펀트다, 라고 확실히 지목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적어도 세컨드의 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으니까.

“세컨드 마스터가 뭐라고 말했든 곧이곧대로 너무 믿지 마.”

“저도 확실한 사실만 믿어요.”

무기력해 보여 자칫 쉽게 휩쓸릴 것 같지만, 석화는 생각이나 사상이 확고한 편이었다. 곽수환은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꾸만 저에게 몸을 붙여오는 석화 때문에 몸이 닳을 지경이었다.

어디 으슥한 장소로 이동해서 몸 여기저기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고 키스를 하고 싶었다. 뒷목뼈 부근에는 자신이 씹고 빨아 놓은 자국들이 아직 선명했다. 전에는 이 정도로 인내심이 적지는 않았건만 석화와 몸을 섞고 나니 좀 더 성욕이 들끓었다. 따뜻하게 감싸는 석화의 체온을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석화는 곽수환의 트레이닝복 하의로 시선을 던졌다.

“왜 섰어요?”

꼭 그걸 말로 해야 해. 그래도 어느 정도 수치심은 있는지 대놓고 크게 말하지는 않고 곽수환의 귓가에 속삭였다. 곽수환은 뒷좌석 그물에 놓인 물만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석 박사가 섹시해서.”

일부러 웃음기를 섞어 말한 곽수환이 석화의 발을 쓱 끌어 올렸다. 그 바람에 문 쪽으로 밀린 자세가 된 석화가 의문 섞인 눈만 깜빡거렸다. 많이 걷지도 못해서 그런지 발바닥은 부드러웠지만 바닷물처럼 차디찼다. 몸에 열이 많아 양말을 잘 신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다 왔습니다. 내리시죠.”

집사는 일부러 뒤를 보지 않고 먼저 차에서 내려섰다. 곽수환은 석화의 발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가 다시 놔주었다. 석화는 그의 행동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발에 닿았던 온기가 기분이 좋아서 슬리퍼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곽수환이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분명 자신은 세컨드와 대립하게 됐을 것이다. 세컨드가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다한들 분명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 석화는 늘 완벽한 몸을 가진 자들을 부러워만 했는데 이번만큼은 그가 튼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 곽수환이 제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를 잃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목이 졸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으니까.

집사가 열어준 문으로 걷는데 복도 끝에 이채윤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입에 문 소시지를 손도 대지 않고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안 죽었냐?”

말은 그렇게 해도 이채윤의 눈에서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고맙다. 고생했어.”

“세상에, 한 번도 못 듣던 감사인사를 석화 박사님만 얽히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다, 야. 우도가 좋기는 좋더라? 우리 집안도 쉽게 못 들어오는데 여긴 먹을 거 천지더만?”

지잉, 투박한 기계소리에 곽수환이 이채윤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전면 유리창 밖으로 절벽과 함께 해안이 보였고, 복도 벽과 거실 곳곳에는 동양화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거실의 중심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세컨드가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군, 컨트롤러.”

소시지를 씹어 먹던 이채윤이 세컨드를 휙 돌아봤다가 다시 곽수환을 향했다.

“이 소령, 내가 컨트롤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좀 피해주게.”

두 번에 걸친 이야기에 이채윤은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씹새끼라는 욕을 하면서 곽수환을 노려봤다. 너 나중에 이야기해. 이채윤이 곽수환을 지나쳐가면서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석화는 그녀의 반응에 어쩌면 양상훈조차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할 거라고 짐작했다.

“석화 박사도 마저 이야기 계속하지.”

세컨드는 주름진 눈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며칠이나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지독하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곽수환은 저 영감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몰라 평소보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정치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인간이라 약간의 틈을 보이면 한입에 삼켜버리고야 마는 놈이었다.

“둘 다 이리로 오게나.”

휠체어를 돌려 유리창으로 다가간 세컨드가 창밖을 바라봤다. 곧장 다가가 목을 따버려도 좋을 만큼 무방비해 보였다.

“석화 박사는 내 말을 신뢰하지 않더군. 그래서 곽수환 소령 자네가 필요했네.”

석화는 세컨드를 무생물 보듯 바라봤다. 사회생활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석화지만, 곽수환의 걱정과는 다르게 타인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가설은 세우되, 그 가설에 사로잡히는 연구원도 아니었다. 석화는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결과치만 중요시 여겼다. 오양석은 석화를 챙기면서도 인간미가 없는 박사라고 종종 나무랐다.

“석 박사가 똑똑하니 세컨드 마스터의 말을 걸러 듣는 겁니다.”

곽수환이 팔불출처럼 툭 내뱉었다. 끌끌, 기막힌 듯 목을 울리며 웃는 세컨드가 다시 휠체어의 방향을 조절해 둘을 향해 섰다.

한 놈은 결점 없는 신인류처럼 보였고, 또 한 녀석은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멍했지만 아담에게서 자유로우며, 연구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종교의 기능은 아주 훌륭하지. 확실한 증거나 물증이 없어도 믿음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그러니 에덴동산의 처음 취지는 좋았을지도 몰라.”

세컨드는 이불로 덮어둔 다리 위의 리모컨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커튼이 내려와 커다란 창을 가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약 30초 이내로 보안 1등급으로 전환됩니다.]

거실의 스피커를 타고 마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나.”

세컨드는 커튼이 내부를 완전히 감싼 뒤에야 말을 이었다.

“향후 마스터 선거는 내가 아니라 석화 박사가 출마하게 될 걸세.”

“저는…….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석화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세컨드가 무슨 수작을 부릴 거라고는 충분히 짐작했지만, 저딴 소리를 꺼낼 줄은 몰랐다. 곽수환은 헛바람을 내뱉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네. 그러나 혁명보다는 개혁이 좀 더 안정적인 법이지.”

곽수환이 시선을 내리자 둥그런 석화의 뺨이 보였다. 석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까만 눈으로 마스터를 응시했다. 토끼섬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석화와 마스터가 나눈 대화를 알 길이 없기에 마냥 개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이리로 오게나.”

세컨드 마스터가 방향키를 조절해 앞장을 섰다. 현관의 반대편 복도로 향하는 뒷모습만 쫓고 있으니 세컨드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보여줄 게 있으니 너무 경계 말게.”

어차피 세컨드의 저택에 들어온 이상 뭐라도 얻어 나가는 편이 좀 더 이롭다는 것을 안다. 곽수환과 석화는 뒤늦게 발을 옮겼다. 긴 복도를 지나고 나니 집무실로 통하는 보안문이 보였다. 신원을 확인한 뒤 열린 문을 따라 또 한참을 걸었고, 곧 거실처럼 넓은 형태의 집무실이 나타났다. 다만 책이 꽂혀 있는 서재 반대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집무실 진열장에는 바다를 압축해놓은 듯한 광물과 검은 광택이 흐르는 흑요암이 손이 닿는 높이에 놓여 있었다. 석화는 유리처럼 번들거리는 흑요암에 시선을 빼앗겼다. 굴곡은 있으나 마모는 없는 유리 광물은 까마득한 과거에 만들어진 용암의 흔적이었다. 주먹보다도 더 큰 흑요암은 태어나 처음 보는 크기기에 시선이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훔쳐 줄까?”

곽수환이 석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석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용암이 삽시간에 차가운 바닷물과 맞닿아 굳으면 이런 매끈한 유리질 암석이 되지. 어떻게 보면 이 녀석은 용암과 해빙의 아이인 셈이야.”

세컨드가 애정 어린 손길로 흑요암을 쓰다듬었다.

얘, 늬 집엔 이런 거 없지? 하며 감자도 아니고 돌을 자랑하는 꼴을 보니 곽수환은 배알이 꼴렸다.

“석 박사한테 애들처럼 돌 자랑하려고 데려온 겁니까?”

세컨드는 뭔가 재미있다는 듯 다시 한번 목을 긁으며 웃었다.

석화는 흑요암이 마음에 들었지만 훔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곽수환이 준 메추리알처럼 생긴 돌도 아직 주머니에 잘 있었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주머니 속의 알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컨드의 집무실에 있는 돌들은 전부 광물이었다.

광물은 암석과는 다르게 규칙적인 원자배열로 그 특징이 나뉘는데, 탄소 광물인 다이아몬드도 그 중 하나였다. 단일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은 대체로 가격이 깨나 나갔다. 석화는 집무실 책상의 중앙에 놓인 둥근 마노를 봤다. 제아무리 집사의 돌봄을 받는다지만 집무실은 세컨드 마스터의 지문이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했다. 결국 이 안은 세컨드의 손길이 가장 많이 묻어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넓은 공간에는 먼지 한 톨 없었고, 마노가 놓인 자리 또한 정중앙이었다. 게다가 각각의 사각기둥에 놓인 광물들의 위치 또한 모난 곳 없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석화는 광물에서 시선을 거두고 세컨드를 향했다. 저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들이 많았다. 딱히 일정한 광물만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무엇을 관찰하나?”

흥미 어린 시선을 한 세컨드가 석화에게 물었다.

“한 녀석은 너무도 뻔히 적개심이 보여 잘 알겠는데 말이지.”

세컨드의 말대로 곽수환은 석화와는 다른 의미로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세컨드의 목을 따버리고 도망갈 퇴로라든지, 어딘가에 패닉룸이 있지 않은지, 공격을 당할 시 방어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은 있는지 말이다. 그런 곽수환이 있기에 석화도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저를 왜 후계자로 지목하려고 합니까?”

“그럴 만한 이유도 명분도 있기 때문이지.”

곽수환이 무사하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세컨드가 그랬었다.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명분?”

석화의 앞에 서 있는 곽수환이 불쾌하게 물었다.

세컨드가 무릎 위의 리모컨을 다시 들더니 버튼을 눌렀다. 커튼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가려진 집무실 한쪽 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는 관계도가 전부 펼쳐졌다. 가장 중심에는 에덴동산이 있었으며, 에덴동산을 기점으로 네 개의 강이 뻗어나가 있었다. 석화는 마치 사진을 찍는 것처럼 한눈에 관계도를 담았다.

비손(곽재원), 기혼(강손은), 티그리스(원호), 유프라테스(이진연-> 오양석), 서펀트(최호언)

개개인의 줄기를 타고 비손과 기혼의 자손은 곽수환이 표기되어 있었고, 이진연은 석화였다. 그리고 서펀트는 티그리스의 아이였다. 최호언에게 들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석화는 줄기 가장 상단에 매달린 글귀를 봤다.

‘혁명’

그러나 곽수환은 단 한 곳, 그 한 부분에 집중했다. 석화의 어머니인 이진연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최호언.

곽수환의 손등에 힘줄이 섰다.

“무슨 수작이야.”

“말조심하게.”

막말을 하게 만든 놈이 누군데.

“석 박사, 거를 건 거르라고 내가 말했지?”

석화도 혁명을 지나쳐 밑단의 줄기에 다다른 때였다.

원호 박사와 어머니의 아이가…….

“안 믿어요.”

석화는 딱 잘라 말했다. 누구보다 제 어머니를 잘 안다. 할머니가 말하기를 어머니를 조산했기에 아이 때부터 약하다고 했었다. 그랬던 그녀였기에 석화도 간신히 가질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 우리가 함께 했던 연구는 전부 폐기 처분했고, 그걸 입증할 만한 증거 따윈 남아 있지 않으니. 그러나 석화 박사, 한 가지는 확실해. 이진연 또한 우리와 함께 연구를 해온 박사였다네.”

곽수환이 석화의 팔을 잡아 자신의 뒤로 보냈다. 그녀가 연구진이었다는 건 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컨드는 저 둘이 놀라지 않는 사실에 오히려 더 놀랐다. 어쩌면 이 우도에 처박혀 있는 자신보다 더 많은 정보를 취득했는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아담 바이러스의 첫 면역자는 제주도에서만 나왔지. 마더, 보안 서버를 열어주게.”

세컨드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마더를 일깨웠다.

[음성, 홍채인식 완료, 세컨드 마스터의 보안 서버를 개방합니다.]

“지금까지 확실히 증명된 아담 바이러스 면역자 리스트를 보여주게.”

그리 수가 많지 않은 면역자 리스트가 떴고, 그 중간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석화의 어머니였다.

“레인보우 시티는 면역자들의 혈액을 바탕으로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냈지. 그 짓을 벌인 게 퍼스트 마스터 라인이라네.”

상부가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어낸다는 심증은 있었지만, 가장 최상부의 입에서 진실이 나올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곽수환과 석화는 의심을 했다. 저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겠다는 꿍꿍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면역자였다고요?”

“레인보우 시티의 교육 센터도 이렇다시피 아주 완벽하지는 못한 게지. 레인보우 시티의 마스터인 내 말을 의심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게 진정 사람의 본성이지. 버려서도 안 되고 퇴화해서는 안 되는, 진화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야. 사람은 의심을 통해 진실을 도출해내 혁명을 일으키기도 하고, 개혁을 불러내기도 하니까.”

레인보우 시티가 시민들의 정보 습득을 막는 이유는 하나였다. 앎의 억제를 위해서였다. 그건 결국 시민들을 통제하고 저희들 뜻대로 다루겠다는 소리였다.

소수가 특권을 누리기 위해 다수가 억압당하는 형태는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때는 한 명의 성주를 위해 수많은 소작농이 고통 받는 경우가 태반이었으며, 천민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불합리함을 알게 된 사람들이 소리 내어 평등과 평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를 위해 인간은 무던히도 혁명을 반복했고 또 이룩해내기도 했지만, 어느 날 아담의 출현으로 다시 퇴화해버렸다. 그리고 현 레인보우 시티는 바로 특권층이 원하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까 세컨드 마스터는 혁명보다는 개혁을 원하고, 석화 박사를 양자로 삼아서 꼭두각시로 세우겠다, 이 말입니까?”

곽수환은 삐딱하게 말했다. 마치 꿈도 크시지, 라는 말투였다.

에덴동산이고 세컨드고, 석화가 7차 변이 바이러스의 면역체라는 것을 이유 삼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투명했다. 그걸 가만히 눈 뜨고 놔둘 곽수환도 아니었다.

“그럼 곽수환 소령, 자네는 혁명을 원하나? 이 도시가 아예 무너졌으면 하고? 그렇다면 아비규환이 될 테지. 범죄의 천국이 되겠고. 지금은 군인이 있어 통제가 되지만, 그 군인들조차도 자신들을 통제할 이들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그 어떤 법도 통용되지 않는 무정부 상태가 되는 걸세. 힘이 곧 진리가 되겠지.”

“세상의 그 어떤 혁명도 무정부 상태가 되지는 않았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 뒤 그에 따른 홍역은 당연히 치렀겠지만.”

“그래, 곽수환 소령. 자네 말도 일리는 있지. 그러나 그 혁명이 일어났을 시절에 아담이라는 인간의 천적이 있었던가?”

이번에는 석화가 곽수환의 앞으로 섰다.

“치료제를 만들 생각은 있으십니까?”

“시기상조라는 생각은 하지만, 가능하다면,”

[긴급상황, 긴급상황.]

세컨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마더가 경고음을 울려댔다.

[레인보우 시티 13 레드 구역에서 대량의 아담 출현.]

13 레드 구역이라면 오양석 박사의 자택이 있던 곳이다. 우도까지 긴급상황 알림이 온다는 건 분명 그 숫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긴급상황, 레인보우 시티 1, 3, 5 그린 구역, 다시 정정합니다. 1, 2, 3, 5 그린 구역, 2, 31, 21 인디고 구역 아담 출현. 로딩 중, 동시다발적 아담 출현에 의해 음성이 아닌 화면으로 제공합니다.]

벽면 스크린이 확 밝아지면서 레인보우 시티의 지도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다닥, 붉은 점들이 수도 없이 찍히고 있었다.

[긴급상황입니다.]

마더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고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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