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am's apple (2)
최호언은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봤다.
그는 주택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서서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린 구역이었던 곳에서 비명과 사이렌 소리가 마구잡이로 섞였다. 굉음과 함께 커다란 불기둥이 치솟은 곳은 주유소였다. 최호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만족스러움에 입가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갔다.
비좁은 언덕 계단으로 사람들이 마구 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길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래보다 위를 향하고는 했다. 바삐 도망치던 사람 중 몇 명은 가만히 서 있는 최호언에게 어서 도망치라며 소리를 질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시하고 내달렸다.
사람들의 이동 반경을 쫓아 아담도 언덕을 뒤따라 달려왔다. 이제 갓 변이한 아담들은 기세가 엄청났다. 크어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아담이 서 있던 최호언에게 달려들었지만 총알이 이마를 뚫은 것이 더 빨랐다. 수박 터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이곳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따라붙은 아담을 하나, 둘, 정확히는 다섯 놈을 해치우니 멀쩡한 인간들만 남아 있었다. 때마침 아담에게서 튄 뇌수를 뒤집어쓴 사람이 절박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시티에서 나온 겁니까?! 살려주세요! 어디로 대피를 해야 하는지! 컥.”
최호언은 절규하는 사람의 머리에 총을 발사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눈을 뜨고 죽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뒤늦게 달려 올라온 사람이 경악스러움을 담아 최호언을 쳐다봤다. 최호언은 남자의 소매를 총구로 쓰윽 걷어 올렸다. 죽은 남자의 손목에는 아담에게 물린 잇자국이 선명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하는 수 없었습니다. 더 위로 달리세요. 그곳에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버스가 있습니다.”
“시티에서 나오신 겁니까?”
최호언이 애석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에덴동산이라 불리는 단체입니다.”
주변에 몇 사람이 더 있었는데 다들 경계하고 겁먹은 분위기였다. 저 밑에서 또다시 괴성과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또 다른 무리가 이 위로 달려 올라온다면 아담도 다시 가세할 것이다.
“레인보우 시티는 긴급 상황이 발생해도 시민을 지킬 전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할 권리를 추구합니다. 우리 모두가 보호받아야 하죠.”
불길이 치솟고,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난리통 속에서 최호언의 음성만은 부드러웠다. 반군이라는 말에 겁은 났지만 최호언의 말에는 힘이 있었으며 두려움의 대상인 아담 또한 아주 손쉽게 처리했다. 지금 밑으로 내려가면 죽게 되는 건 분명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시티의 지원을 기다리는 것도 목숨을 사지로 내모는 꼴이었다.
여태 레인보우 시티가 모든 시민을 살리고자 힘을 썼던가? 사람들은 그 물음에 긍정할 수 없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레인보우 시티는 어떤 확신도 주지 못했다.
“선택은 시민들의 몫입니다.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버스의 자리도 한정적이고요.”
최호언이 총구를 들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 밑을 향해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됐고, 달려오는 사람을 덮치려던 아담이 뒤로 나자빠졌다. 팟, 설상가상으로 언덕의 계단을 비추던 가로등의 전력도 끊겼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 흐릿한 밤은 마치 극야였다. 최호언은 수트 주머니에서 휴대용 손전등을 꺼내 한 남자에게 건넸다.
“언제까지 엄호할 수 있을지 모르니 일단 이동하세요. 어딘가에 숨어도 되고, 저희와 함께 하셔도 됩니다.”
손전등을 건네받은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제가 받으면,”
“저는 밤눈이 밝아서 괜찮습니다.”
최호언이 호감 가는 인상으로 미소 지었다. 그러자 손전등을 켠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듯 보였다. 남자는 달려가야 할 방향을 비추고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막연하게 시티의 지원을 바라지는 맙시다. 우리 스스로 살아남아야 해요.”
“그래도 에덴동산이 확실히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일단 살아남는 게 먼저죠.”
“맞아요, 그린 구역에서 아담이 창궐하면 시티는 바로 지역을 버리고 나중에 군인들을 투입해 방역을 했잖아요? 우리가 다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에요.”
사람들이 하나둘씩 말을 내뱉었다. 손전등을 든 남자는 더 지체하지 않겠다는 듯 선두에 서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주저하던 사람들도 사실상 선택권은 없었다. 몇몇은 이탈을 했지만 또 몇몇은 남자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최호언만 반대로 계단을 내려가며 무전기를 들었다.
“17 구역은 3분 뒤 철수한다.”
[감지, 지원 세력도 전부 이상 없습니다.]
에덴동산은 버스를 아담이 발발한 각지에 두었고, A급 이상이 최호언처럼 주변을 엄호하고 있었다. 물론 최호언이 손전등을 건넨 남자 또한 에덴동산의 신도였고 일명 바람잡이라고 불렀다. 최호언은 장갑을 낀 손으로 사람의 뒤를 쫓는 아담의 머리뼈를 깨부쉈다. 개중에 변이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어차피 일정 이상 목적은 이뤘으니 상관없었다.
곽 소령, 석화 박사. 이제 슬슬 우도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어?
최호언의 머리 위로 떠 있던 희끄무레한 달이 완전히 구름에 가려졌다.
***
“상황 파악된 곳부터 병력 투입하세요. 긴급 상황이니만큼 중령까지 각 현장으로 지원 가고, 현장으로 나간 지휘관들은 전부 대대장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급히 말을 끝낸 세컨드 마스터가 수화기를 내려놨다. 각지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마더의 서버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곽 소령, 자네는 지금 당장 이채윤 소령과 함께 제주 병력을 모아서 당장 서울로 복귀하게.”
심각하게 실황을 지켜보는 석화와는 다르게 곽수환은 심드렁한 분위기였다.
“제가 왜 갑니까.”
“뭐?”
세컨드가 책상을 손으로 내리쳤다.
“네놈!”
“말했던 것 같은데, 난 레인보우 시티가 망해도 상관없다고. 내가 지켜야 할 석 박사는 여기 안전하게 있는데 어째서 가야 합니까?”
“네놈이 컨트롤러니까! 아무리 시티에 반감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네놈의 직위가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아! 퍼스트 편에 편승해서 컨트롤러 직위 박탈도 막은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아, 예상대로 움직여주셨네.”
내 목을 치려고 했다고. 곽수환이 무성의하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지금껏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아담이 출현한 적이 있었나요?”
분개한 세컨드에게 석화는 담담하게 물었다.
“아주 없다고는 못 하지만 이 정도 규모는 없었다고 봐야 하지.”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출현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뜻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아담이 나타났다는 건 누군가가 아담을 각 구역으로 운반해 놓아주었다는 건데, 제아무리 에덴동산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석화는 그 점이 이상했다.
“곽 소령,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명령불복종으로 헌병대에 넘기는 수밖에 없어.”
곽수환의 능력치가 뛰어나도 그는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이었다. 세컨드의 말처럼 긴급상황시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군사재판에 회부될 게 분명했다.
“저도 소령님과 같이 갈게요.”
“우도에 있어.”
곽수환도 한번 배짱을 부려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은 석 박사가 세컨드에게 잡혀 있는 꼴이니 명령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잘 생각해보게, 곽 소령. 내가 석화 박사에게 출마를 권한 이유가 뭐겠나? 석화 박사가 믿는 네놈이 나는 탐탁지 않지만 그걸 감수하겠다는 의미지. 그러니 네놈은 나를 좀 더 신뢰해도 돼. 적어도 나는 피바람이 불지 않는 개혁을 원하는 사람일세.”
세컨드는 개혁 온건파고, 퍼스트는 독재체제를 원하는 특권세력이었다. 상식적으로 퍼스트보다는 세컨드가 더 나을 테지만, 곽수환은 굳이 한쪽을 선택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양쪽 다 자멸하는 게 곽수환이 그려온 그림이었으니까. 세컨드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운 피인 석화를 수혈하려고 했다.
“석 박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접어서 넣어둬요. 아니면 다른 면역체를 찾아서 꼭두각시로 세우던가.”
“다른 면역자는 필요 없지. 내가 분명 명분도 있다고 말했을 게야.”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곽수환이 석화의 손을 잡았다. 석화도 애초에 세컨드의 권유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석화 박사는 여기 안전한 곳에 두고 가게나. 곽 소령 자네가 아무리 아담이 두렵지 않다고 한들,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기란 버겁다네.”
“안전한 곳은 내가 정합니다. 당신을 뭘 믿고.”
“적어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를 해하지는 않지.”
곽수환과 함께 걸어나가던 석화가 걸음을 멈췄다. 팔이 잡아당겨졌지만 곽수환도 곧 멈춰 섰기에 충격이 일지는 않았다. 분명 석화는 집무실의 광물을 보던 때부터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세컨드 마스터도 돌연변이일까 하는 것이었다. 세컨드 마스터는 자신만큼이나 광물에 집착을 하는 듯 보였고, 어머니는 우도를 몇 번이나 방문했었다.
“그게 내 명분일세.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가 내 후계자가 되는 것 말이야.”
곽수환이 고개를 삐딱하게 했다.
“그 개소리를 믿는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동안 석 박사를 방치했다가 아쉬우니 내 자식이오, 하고 앞세우려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왜 여태 안 밝혔습니까?”
아버지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어머니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아주 솔직하게는 친부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몰라도 그만이었다.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도 컸기에 석화의 마음에 빈 구석은 없었다. 그런데 세컨드 마스터가 자신의 친부라고 한다.
석화는 곽수환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화가 나서도 아니고, 감동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유전자상의 아버지일 뿐 감정적인 교류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신과 체온을 나누고 있는 곽수환이 훨씬 더 가족 같았다. 그래서 더욱 곽수환의 손을 세게 잡았다. 그는 그 행동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는지 석화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시해, 개소리야.
“석화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밝힐 수가 없었네. 때가 되면 언제든 밝히고 내 후계자로 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지.”
‘내 아이를 실험대에 올릴 수는 없어요. 어차피 후계자로 삼을 수도 없는 하자품이라면서요.’
‘나이가 찼는데도 아직도 보내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네가 숨기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능이 부족하다고? 그거야 학습센터로 가게 되면 알겠지. 사용할 구석이 있다면 철저하게 사용해야지.’
아담에게 물려 열이 들끓던 날 꾸었던 꿈이자 과거의 편린이었다.
‘정말로 알 것 같아요. 곽 선배와 강 선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너무 잘 알겠어요. 나는 내 아이에게 절대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거예요. 레인보우 시티? 그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희생을 해야 하나요.’
‘이진연, 반군사상으로 처형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 영상 종료해.’
곽 선배와 강 선배.
그건 어쩌면 곽수환의 부모를 뜻하는지도 몰랐다. 석화는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던 상대의 음성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건 아마도 세컨드 마스터였을 것이다.
“세컨드 마스터.”
석화가 일자로 다물린 입을 뗐다.
“저는 후계자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 말대로 하자품이거든요.”
세컨드가 인상을 쓴 것보다도 더 먼저 곽수환이 석화를 끌어당겼다.
석 박사가 무슨 하자품이야. 상등품이야. 아니, 나한테는 최고야.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곽수환의 속마음이 다 들려오는 것 같았다.
“석화 박사.”
나이 탓일까, 세컨드의 눈에는 총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다행인 건 세컨드가 자신을 아들이라는 말로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후계자는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저는 그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석 박사 그릇은 충분한데, 레인보우 시티의 마스터로는 아깝지.”
세상에 완전한 제 편이 있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석화는 든든함과 동시에 이제 그가 없으면 엄청난 상실감에 사로 잡힐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너희들을 만들어 낸 게 바로 우리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해. 곽수환 네놈도 우리의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갖추고 태어날 수 있었던 게야.”
세컨드는 분노했지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당신이 말하는 그 기술 이름이 복불복이라도 돼? 내 동생을 봤다면 그딴 소리는 못하지.”
“네 동생은 너희 부모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지. 그러나 너는 아니야.”
곽지환은 부모가 직접 관계해서 낳은 아이고, 곽수환은 실험에 의해 태어난 아이라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알게 뭡니까.”
곽수환의 말이 맞았다. 석화도 인정했다. 최호언이 자신의 동복형제든 세컨드가 자신의 아버지이든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세컨드가 어머니와 사랑했던 사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어머니에게 처형을 하겠다고 협박했을 리가 없다.
“저도 마스터가 말하는 실험체 중 하나일 뿐이지 않습니까?”
석화는 불구인 세컨드의 하반신을 반사적으로 봤다가 눈을 떼었다.
“가겠습니다.”
“그건 시민임을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자네 둘은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될 걸세. 치료제를 만들고 싶다면서. 정말 그걸 포기할 생각인 게야?”
“아니요. 세컨드 마스터께서 저를 후계자로 지목하신 것을 철회하고, 곽수환 소령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저는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으로 남아있을 겁니다.”
“석화 박사. 내 편이 되어달라는 게 그리 어려운 부탁인가?”
“네.”
석화가 깔끔하게 대답하니 곽수환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야 석 박사지. 곽수환은 어서 가자면서 석화의 손을 잡아끌었다.
“올라가서 상황 정리에 도움은 주겠지만, 행여 다른 생각은 하지 마시죠. 어디 사는지도 훤히 알았으니까.”
도전적인 곽수환의 태도를 세컨드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곽수환 네놈은 뭘 원하는 거야. 네가 마스터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시켜줄 겁니까?”
어차피 당신 석 박사를 꼭두각시로 세우려던 거 모를 줄 알아?
세컨드도 그 속내를 유추했는지 더는 말을 아꼈다.
더는 이곳에 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 곽수환은 석화와 함께 걸었다. 석화는 그의 걸음 보폭을 버거워하면서도 부지런히 따라왔다. 번쩍 안아 들어서 더 빨리 질러나갈 수 있었음에도 곽수환도 석화의 보폭에 맞췄다.
“정말 하고 싶어요?”
“섹스?”
“마스터요.”
“하고 싶다고 하면, 자기가 시켜줄 거야?”
석화는 제게 그런 힘은 없다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세컨드는 더 몸을 사릴 테니 퍼스트와의 싸움도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퍼스트 편에 편승해서 세컨드의 약점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도 쉽지 않았다. 세컨드에게 딱히 약점이랄 건 없어 보였다. 그걸 알기 때문에 퍼스트도 거짓 정보를 퍼뜨리려는 것이다.
복도를 빠져나오니 거실에는 이채윤과 집사가 보였다. 그녀는 어쩐 일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야! 소식 들었어? 진짜야?”
“어. 복귀하자.”
다가온 집사가 곽수환에게 무전기를 내밀었다.
“제주 공항으로 가신 다음 제주 병력과 함께 이동하셔야 합니다.”
비행기까지 쓴다는 건 이번 사태가 확실히 심상치 않다는 거다.
“여기서 여객선을 준비하는 데는, 적어도.”
집사가 시계를 올려다보는 사이에 곽수환이 말을 꺼냈다.
“여기 있는 기름이나 줘요. 그리고 제트스키 남는 거 있습니까?”
“아마 해변에 레저용으로 몇 개 있을 겁니다.”
레저용이라니, 이제는 비웃음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거실은 1급 보안을 해제했는지 커튼도 다 걷혀 있었다.
저기 해변에서는 육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도 없는 듯 부모가 아이들과 불꽃놀이나 해대고 있었다. 유리창에 이마를 맞대고 밖을 내려다보던 석화도 묘한 반발심이 생겨버렸다. 정말 저들은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건가? 어째서 이런 특혜를 받지? 돈이 많아서? 정치를 잘해서?
“석 박사.”
곽수환이 뒤에서 부르니 석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마 멍들겠어.”
커다란 손으로 유리에 식어버린 석화의 이마를 문질렀다.
“방해가 되겠지만 저도 같이 가요. 쉘터에 잘 숨어 있을게요.”
당연히 우도에 두고 가는 게 안전할 테지만, 사실 곽수환은 제 눈에 석화가 안 보이는 게 더 불안했다. 또 누가 아나, 누군가가 앙심을 품고 우도에 아담 바이러스를 퍼뜨릴지.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자신의 옆이었다.
집사는 곽수환의 제트스키가 있는 해안까지 갈 준비가 되었다면서 차키를 건넸다.
“성산항에 도착하면 공항까지 모실 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곽수환은 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장 저택 밖으로 향했다. 이채윤과 석화도 같이 이동했고, 운전대는 곽수환이 쥐었다. 이채윤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기가 죽은 듯이 보였다. 뒷좌석에 앉은 석화도 그녀가 평소보다 말 수가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소령, 컨트롤러에 대해서는,”
“그건 어차피 비밀이니까 말 안 한 거 이해하기로 했어.”
곽수환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 검멀레 해안까지는 불과 몇 분 걸리지 않았다. 한적한 도로를 최고속도로 달리는 동안 이채윤이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부모님 계신 구역도 아담 떴대. 우리 아저씨 아줌마 싸움도 못하는데.”
“어차피 일순위로 보호받는데 뭐가 걱정이야. 집에 벙커도 있을 거 아니야.”
“그래도 걱정되잖아. 집사 이야기 들어보니까 1급 사태라던데.”
“그럼 서울 내리자마자 부모님 구역으로 튀어가.”
“이 새끼는, 군인 새끼가 사감으로 움직이냐?”
“어차피 너희 집까지 뚫리면 그냥 이 도시 망하는 거야.”
그러니까 걱정말라는 투였다.
둘이 투덕거리는 동안 석화는 의아한 점을 돌이켜 생각하고 또 정리하고 있었다. 아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한 이유를 말이다.
아담을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 또는 에덴동산이 각 구역에 침입해 사람들에게 아담 바이러스를 주입했다든지. 혹은…….
툭툭, 곽수환이 도착했다면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석화를 일깨웠다. 그는 트렁크 안에서 석유통과 함께 방탄조끼처럼 생긴 것을 꺼내들었다. 석화가 모래사장으로 내려서니 그가 대신 구명조끼를 알맞게 채워주었다.
“제가 몰아요?”
“아니, 내 뒤에 타고 갈 거야.”
곽수환은 성큼성큼 자신의 제트스키가 놓인 곳으로 가서 기름을 채웠다. 서핑보드가 놓여 있는 저쪽 한편에는 이채윤이 타고 갈 제트스키가 있었다.
“이 소령, 짧게 설명할 테니까 들어. 다른 건 대충 네가 타면 알 거고, 후진은 안 되니까 후진할 일 있으면 크게 원으로 돌아.”
곽수환은 제트스키 핸들을 가리키며, 이채윤에게 모는 법을 뭉뚱그려 설명했다.
“장난하냐? 나 제트스키 타봤거든?”
“그럼 다행이고.”
기름을 전부 넣은 곽수환이 빈 통을 모래사장으로 던졌다. 석화도 제트스키의 생김새는 알았지만 직접 타본 적은 없었다. 뒤에서 가만히 서 있자 곽수환이 제트스키를 물로 끌고 가 띄웠다. 종아리까지 금세 바닷물로 흠뻑 젖은 그가 모래사장으로 돌아와 석화를 번쩍 들었다.
“제가 갈 수 있어요.”
“물 차가워.”
가지가지 한다! 이채윤이 제 제트스키를 힘으로 끌고 가면서 고함을 쳤다. 곽수환은 가뿐히 무시하고 석화를 제트스키 위에 올렸다. 동체가 기우뚱하는 것을 막고는 그도 훌쩍 올라탔다.
“잘 붙들고 있을 자신 있어?”
석화는 이미 곽수환의 허리를 두 팔로 꽉 감싸고 있었다. 구명조끼 때문에 곽수환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나 엄청 빨리 갈 건데, 끈으로 묶을까?”
석화는 그것도 좋은 생각 같아서 고개를 끄덕했다. 곽수환은 석화의 구명조끼 밑으로 길게 나온 끈을 제 허리에 여러 번 동여 묶었다. 손목이 묶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석화는 배 쪽으로 내밀었던 손을 교차시켜 꽉 껴안았다.
“이 소령, 저기 불 보이냐?”
제트스키 두 대의 시동이 걸리자 엔진 소리가 파도를 잡아먹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여기서 내다보니 성산항의 등대에 불이 훤했다.
“저기 불 향해서 그냥 내달려!”
곽수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채윤이 먼저 제트스키를 몰기 시작했다. 그녀가 질러나간 궤적을 따라 거센 파도가 일어나 곽수환의 제트스키가 꿀렁거렸다. 석화는 혹시 모를 멀미에 대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곽수환도 뒤질세라 제트스키를 몰기 시작했다.
이채윤과 거리를 두고 물살을 가르는 동안 석화는 곽수환의 등에 뺨을 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쳐다봤다. 까만 수면 밑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조금 공포스럽기도 했다. 그럴수록 곽수환을 껴안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바람에 몸을 실어오는 바닷물이 얼굴에 점점이 튀었다. 제주도에 살았지만 바다 중심으로 나온 적은 없던 석화였다. 감히 올 엄두도 못 냈던 깊은 바다를 곽수환과 함께 질러 나가는 이 순간이 꿈 같았다.
“석 박사, 괜찮아?”
곽수환의 목소리가 파도와 엔진 소리에 얽혀들었다.
“기분 좋아요.”
석화의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했지만, 등에 비벼오는 뺨의 감촉에 곽수환은 안심하고 속도를 더 높였다. 급한 상황인데도 저 성산항까지 거리가 좀 더 멀었으면 했다. 석화가 저만 믿고 온몸을 의지해오는 이 순간이 좋았으니까. 그러나 등대의 불빛이 삽시간에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괴로울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즐거울 때는 순식간에 흐르고는 했다. 어쩌면 시간의 상대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곽수환에게는 이 순간이 마치 찰나 같았다. 얼마나 좋았으면 찰나로 느꼈을까 싶기도 해 그는 끈을 풀면서 쓰게 웃었다.
나 석 박사 진짜 어마무시하게 좋아하나 보네.
곽수환이 제트스키에서 내려서 다시 바다에 다리를 담갔다. 손을 뻗으니 아까와는 다르게 순순히 석화가 안겨왔다. 물을 헤치고 성산항으로 걸어 나오자 제복을 입은 군인들 여럿이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거수경례를 했다.
“제주 육군 센터 저 이철헌 대위 외에 121명, 제주공항으로 집결중입니다.”
곽수환은 문이 열려 있는 지프로 석화와 같이 걸었다.
“지금 육지 상황 어떤지 짧게 보고해.”
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대위에게 말을 건넸다. 석화에게는 먼저 저 지프로 가 있으라고 턱짓을 했다.
“십 분 전까지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아담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도시 각지에서 말입니다.”
“구역별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특정 구역에서만 발발한 게 아니라 무작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린 구역에서 아담이 발생한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불과 일주일 전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도 몇 차례씩 발견됐지만, 전부 사살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들도 멀쩡하게 있다가 아담이 됐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곽수환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지프의 문을 잡고 돌아섰다.
“설마 공기전염도 된다는 소리야?”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공기전염이 될 리는 없어요.”
석화가 차에 타지 않고 불쑥 끼어들었다.
석화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중, 생각의 중심에 비어있던 퍼즐을 끼워 맞췄다.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에는 기생충이 있었다. 또한 오청운 선배는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음에도 인간의 말을 구사했었다. 그건 미완의 치료제를 투여했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오청운 선배는, 어쩌면 오랜 시간에 걸쳐 아담화가 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석화는 에덴동산의 백신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아담에게 물렸고 이후로는 21 바이올렛 센터로 향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분명 그 백신에 담긴 말라리아 기생충은 휴면 상태였다.
여기서 석화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에덴동산이 퍼뜨린 백신은, 잠복기를 가진 아담 바이러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석화가 곽수환을 황급히 올려다봤다.
“백신 배포를 막아야 해요.”
“뭐?”
“에덴동산이 무료로 배포한 백신이 전량 회수된 게 맞아요?”
아니, 전부 회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직접 병원을 찾아가 급여의 3분의 1이나 되는 레인보우 시티의 백신을 맞느니 에덴동산에서 배포한 펜 타입 주사제를 이용한 이들도 있었을 테니까. 변수는 늘 존재했다.
“일단 이동부터 하자.”
곽수환의 말대로 지금은 시티로 이동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 제주 공항에서 합류해.”
물기를 털어낸 이채윤도 다른 지프에 올라탔다. 석화는 대위가 운전대를 잡은 뒷좌석에 앉아 옆의 곽수환에게 차분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전 처음에는 백신이 오염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최호언 박사에게 납치당해서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기생충을 일부러 심었냐고 물었거든요. 그날 최 박사가 자기들이 한 게 맞다고 인정을 했어요.”
“무슨 오염?”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 중에 말라리아 원충이 잠복 상태로 투입된 것들이요. 레인보우 시티에서는 에덴동산 백신을 믿지 말라고 방송을 했지만, 어쩌면 에덴동산에 감화된 사람들도 있었을 거예요.”
곽수환도 그 점에는 공감했다. 시티의 시민이지만, 에덴동산으로 넘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기생충이 들어있는 백신을 맞으면 아담이 된다는 거야?”
“그건 저도 그냥 가설일 뿐이에요. 위로 올라가게 되면 전 여의도 쉘터로 갈게요. 거기에 일전에 연구했던 자료들도 남아 있을 거예요.”
여태 나온 아담 바이러스 백신은, 아담 바이러스에 대한 내성을 심어주는 형태였다.
즉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는 개개인 아담에 대한 내성이 존재한다. 아직 레인보우 시티에서 7차 아담 바이러스 백신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기에 시민들에게 6차 백신을 맞히고는 했다. 물론 기생충만으로 아담이 되지는 않는다. 석화는 그 기생충이 체내에서 뭔가 다른 작용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측했다.
“여의도 쉘터는 상황 파악 가능해?”
곽수환이 운전을 하는 대위에게 물었다.
“여의도와 강남, 그리고 과천, 부산 그 외 몇몇 쉘터들은 아직 무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대가 있는 쉘터가 무너진다는 건 그 지역이 전멸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레인보우 시티가 탄생한 이래로 1급 사태는 여태 딱 두 번 있었다.
연합국이 세워진 초창기 아담 바이러스가 다시 한번 변형되어서 퍼져나갔을 때와 바로 오늘이었다. 마더가 1급 위급 상태를 알렸다는 건 감염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져나간다는 걸 입증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제주 공항은 비행기에 올라타려고 대기하는 군인들로 북적거렸다. 이동인원은 총 125명, 제주를 지키는 병력은 저 위의 시티보다 좀 더 체계적이었고 A급 세력 숫자도 제법이었다.
대기 중인 군 수송기 근처에서 곽수환과 석화가 내려섰다. 군인들은 정식 제복이 아닌 무장 상태로 방탄조끼를 비롯해 총기를 소지 중이었다.
그중 제복모를 쓴 군인 한 명이 곽수환과 석화에게 다가왔다.
“제주 쉘터 오희원 중령이다.”
곽수환도 계급 상관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과천 쉘터 소속 곽수환 소령입니다.”
“석화 박사님을 안전히 모시라는 세컨드 마스터의 지시를 받음과 동시에 1급 위기 사태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쪽 무장병력 중 80명은 C-130에, 나머지는 CN-235 수송기로 이동하겠다.”
“석화 박사님은 저와 같은 수송기에 탑승하겠습니다.”
“허가한다. 곽수환 소령이 CN-235 수송기의 지휘를 맡는다. CN-235 수송기 무장병력은 광명, 여의도, 과천 쉘터로 나누어 지원 보내고, 곽수환 소령은 핵심지인 여의도 쉘터를 지킨다.”
“명령 하달 받았습니다.”
중령이 팔을 들어 수송기 양옆을 가리키자 군인들이 수송기로 탑승하기 시작했다. 이채윤도 명령에 따라 수원으로 향하는 수송기에 탑승했고, 곽수환과 석화는 서울로 향하는 CN-235에 몸을 실었다.
수송기의 내부는 일반 여객기보다 작을 뿐 생김새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곽수환은 VIP좌석으로 마련된 맨 앞자리에 석화를 데려갔다. 벨트를 채우는 석화를 보고는 파일럿 두 명이 있는 조종칸으로 다가갔다.
“착륙 위치가 정확히 어딥니까?”
“성남 기지 활주로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파일럿 두 명보다 곽수환의 직급이 더 낮았지만, 위기사태이니만큼 S급인 곽수환의 지휘를 따르라는 전달 사항이 있었다.
“김포 활주로가 더 가깝지 않습니까?”
“현재 김포에 아담 감염이 삽시간에 확대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포 활주로는 아직 복구 중입니다.”
처음 아담 사태가 발발했던 때 다리를 폭파하거나 길을 끊으면서 이곳저곳에 폭격이 일었다. 활주로도 예외는 없었다. 현장을 다니던 곽수환도 김포 활주로의 상태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군 수송기는 역추진 엔진이 포함되어 있어 활주로의 거리가 500미터만 돼도 이착륙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 정도 거리는 멀쩡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있었다.
“김포로 갑니다.”
“예?”
파일럿 두 명이 동시에 곽수환을 돌아봤다. 마음 같아선 서울 시내의 도로를 활주로로 삼고 싶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고층 건물들이 있어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성남 기지 활주로에서 이동하면 차량 이동이 불가능한 구역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 구역을 돌아가면 시간을 훨씬 더 낭비할 겁니다.”
도심의 도로 상황은 파일럿들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실제 현장에서 활동했던 곽수환이 더 정확할 테고, 어차피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그였다.
“라져, 김포로 가겠습니다.”
곽수환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니 창가 쪽에 앉은 석화는 아직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호기심을 갖고 석화를 보는 옆 라인 군인의 시야도 차단할 겸 곽수환이 자리에 앉았다.
“김포에서 내리면 곧장 여의도 쉘터로 이동할 거야.”
“네.”
[레디 포 테이크 오프.]
파일럿의 이륙준비 완료 알림이 끝나고 랜딩기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객기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활주로를 질러나가는 군용기가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에 뜨기 시작했다. 석화는 금세 귀가 멍해져 이명까지 울렸다. 일정 고도로 올라갈 때까지 수송기의 흔들림은 온몸을 흔들었고, 덜컥거리며 마찰하는 군장비 소리마저 둔탁하게 들려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점차 제주도의 모습이 작아져 바다에 뜬 섬으로 변해갔다. 완전히 동이 터 구름 위를 나는 동안 뜨거운 태양이 어깨에 와 닿았다. 피가 튀는 육지와는 다르게 푸르스름한 하늘은 그저 평온하게만 보였다. 석화는 처음으로 직접 보는 하늘의 모습에 감탄하지는 않았다. 지금 석화의 머릿속을 차지한 건 당장 연구실로 뛰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청운 선배의 혈액이 무사히 보존되어 있어야 하며, 기생충이 담긴 백신도 필요했다. 자신의 가설이 맞는다면 잠복기가 있기에 당장에 혈액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 촉매도 필요했다.
“석 박사.”
곽수환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멀게 들리는 건 비단 기분 탓은 아니었다. 그만큼 수송기의 엔진 소리가 시끄러웠다.
“지금은 그냥 좀 쉬어. 어차피 착륙까지 40분은 걸리니까 기분 전환도 할 겸 저 바깥 구경도 좀 하고. 구름도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보지?”
“처음 봐요.”
무심히 대꾸한 석화는 VIP좌석에만 놓여 있는 담요를 들어 곽수환의 다리를 감쌌다. 바닷물에 들어갔다 온 터라 그의 군화와 트레이닝복도 젖어 있던 탓이었다. 담요를 정리해주는 석화의 정수리를 보고 곽수환이 피식 웃어버렸다.
“왜요?”
석화가 허리를 일으켜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전에 내가 석 박사 기절시켰잖아.”
“맞아요.”
“그때도 비행기로 이동했는데 기억에 없지? 그때만 해도 나 석 박사랑 이렇게 얽힐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은 이렇게 모르는 거야.”
곽수환에게 양말을 받았을 때의 인상은 그저 레인보우 시티의 군인일 뿐이었고, 자신을 기절시켰을 때도 역시 꺼림칙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여의도 쉘터에서부터 별의별 일을 겪었으며 아담에게 물리기도 하고, 전국구로 돌아다니기까지 했다. 그사이 석화도 곽수환의 존재가 제 안에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얽혀줘서 고마워요.”
곽수환이 눈을 크게 떴다가 미간에 인상을 썼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 하면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
“저는 안 죽고 싶은데요.”
“말이 그렇단 거야. 영화 봐봐. 위험한 상황에서 사랑고백하는 게 대체로 죽음 복선이라잖아.”
장난기 어린 말을 하는 곽수환을 석화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고, 레인보우 시티에서 내보내는 방송은 화면보다 라디오가 더 주를 이뤘다.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기존 영화나 콘텐츠를 접할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 시티에 도움이 될 지식을 쌓는다는 목적으로만 대여할 수 있었다.
시티 밖에 있던 곽수환은 군인이 되고 나서 온갖 서적을 파고, 때때로 악기도 배웠다. 그에게 피아노를 알려준 건 다름 아닌 오양석이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오양석 박사가 연주할 수 있는 건 도레미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감염사태 무사히 정리되고, 석 박사가 치료제 만들면 내가 피아노 연주해줄게. 아무한테도 해준 적 없는 거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왜? 싫어?”
곽수환이 괜스레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런 말 하면 죽으러 가는 거라고 했잖아요.”
무표정하게 말하는 석화의 어깨가 더 처져 보였다. 곽수환은 군인들이 있든 말든 더 참을 수가 없어 석화의 통통한 입술에 쪽 키스를 했다. 순식간의 짧은 입맞춤에 석화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일 뿐이었다. 그랬더니 곽수환이 다시 입을 대고 쪼옥, 그 타액을 빨았다.
곽수환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똑바로 했다. 물론 누군가에게 들켜서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하고 책망 받아도 상관없었다.
어떤 시국에도 사랑은 꽃 피웠거든.
“곽 소령님.”
“응.”
석화는 빨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떼어냈다. 아직도 홧홧한 기운이 남아있던 탓이었다.
“최호언 박사를 이번에는 우리가 잡아야 해요.”
“생포가 불가능하면 사살할 수도 있을 거야.”
“꼭 살려야 해요.”
설마 석화가 저의 동복형제라서 동정심이라도 드나 싶었다.
“휴면 상태의 말라리아 기생충을 구현한 걸 보면 분명 상부쪽 사람이 엮여있을 거예요. 에덴동산 혼자의 힘으로 시티만한 연구소 수준을 구축할 수는 없었을 거고요.”
“석 박사, 돌이 좋아? 연구가 좋아?”
곽수환이 자못 진지하게 물어왔다.
“……좋아하는 건 돌이에요.”
“그럼 내가 최고네.”
곽수환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일전에 돌보다 자기를 더 좋아한다고 했던 석화였으니, 연구보다 저를 더 좋아한다는 결과도 자연스럽게 도출됐다. 자신의 일순위가 석화인 만큼, 석 박사의 일순위도 곽수환 자신이어야 했다.
뿌듯해하는 곽수환을 여전히 이해 못 한 석화는 다시 귀가 아파 창밖을 내다봐야 했다. 김포 활주로로 향하는 동안 수송기의 고도가 점차 낮아지니, 까만 연기가 곳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3분 뒤, 착륙한다. 인바운드 포 랜딩.]
약 600m의 활주로를 확보한 수송기가 주변을 크게 돌았다가 다시금 착륙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고도를 최대한 낮춘 수송기에 엄청난 충격이 오고 누군가 동체를 쥐고 흔드는 것처럼 마구 떨렸다. 역추진 엔진이 작용하니 활주로를 내달리던 수송기는 가속도를 무시하고 급격하게 멈춰 섰다.
앞으로 잔뜩 몸이 쏠렸던 석화가 쿵 하고 시트에 등을 박았다. 행여 머리를 박을까 곽수환이 손을 대어주고 있어 뒤통수에는 충격이 적었다.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을까 싶은 착륙이었지만, 무사히 동체를 안착시킨 것만으로도 파일럿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수송기가 완전히 멈춰 서자 곽수환이 벨트를 풀고 일어났다.
“수송기 출구에서 3시 방향, B32 구역에 군용 지프 약 스무 대가 있다. 각 조의 대위가 지휘관이 되어서 B32까지 이동한다. 1조부터 5조는 광명 쉘터로, 6조부터 9조 과천 쉘터, 나머지는 나와 여의도로 움직인다. 이동 중 아담 발견 시 즉시 사살하되 정차는 금지하며, 민간인 구조가 일순위이나 시민들 중 반군이 섞여있을 수도 있으니 모쪼록 건투를 빈다. 1조부터 5조 먼저 이동 시작해.”
군인들이 체계적으로 수송기에서 내려 지프가 있는 구역으로 달려 나갔다. 엄호팀과 진행팀이 나뉘어 서로의 안전을 보장했고, 나머지 6조 이후 팀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정예라고 불러도 될 만한 이들이 왜 이렇게 제주도에 많이 있었는지 씁쓸할 따름이었다. 당연히 이유는 하나였다. 상부 놈들이 저희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받겠다고 능력이 뛰어난 놈들만 제주도에 배치한 거다. 모순적이게도 시티가 망해 자기들 밥줄이 끊어질까 봐 위급 시에는 또 이렇게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곽수환은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에덴동산과 상부 놈들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드러낼 생각이었다. 1급 사태가 터졌으니 시티에 충성하는 여론을 바꾸기도 손쉬울 테니까.
석화도 벨트를 풀고 일어나 내려갈 차례를 기다렸다. 한시라도 빨리 연구실로 돌아가 에덴동산 백신의 문제점을 알려야 했다. 콰앙-! 멀리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동에 수송기가 흔들릴 정도였지만, 곽수환은 에스코트라도 하는 사람처럼 고상하게 손을 내밀었다.
“석화 씨, 그럼 우리도 슬슬 여의도로 가볼까?”
***
인생의 적기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석화는 곽수환을 만난 이후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그와의 첫 만남을 곱씹었다. 곽수환이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제주도로 오게 된 것이 정말 우연의 산물일까 하고.
곽수환은 처음 장 중령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했다. 그 전에 그는 13레드 구역을 조사하며 술집을 털었다는 핑계를 댔고, 그 구역을 조사하라 지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컨드였다.
수석 연구원인 오양석 박사가 죽었으니 제주도에 있던 석화가 서울로 올라가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돌이켜보면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바로 부름을 받을 줄 알았건만 시티는 자신을 방치했다. 과연 레인보우 시티가 멀쩡한 연구원을 이용하지 않고 놔뒀던 적이 있던가?
오양석 박사와 연락을 차단한 것만 봐도 누군가는 자신이 연구실로 복귀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거다. 그런 와중에 오 박사가 죽고, 영창을 가야 했던 곽수환이 경호를 맡게 되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물론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페니실린처럼 우연히 치료제를 만들어낸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또한 완벽한 우연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뜻밖에 식당 주인이 불치병의 치료제가 될 수 있는 어떤 성분을 만들어냈다고 치자, 과연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을까? 묻는다면 아니오에 가까웠다. 식당 주인은 그 성분에 대해 조사를 할 이유도 없고,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백신과 치료제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도 대개 관련 연구자였다.
곽수환과 자신이 예기치 않게 만났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저희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알맞은 타이밍에 연결한 것일지도 몰랐다. 보호 받아야할 박사와 완벽한 돌연변이인 군인의 만남을 말이다.
물론 이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고,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게 되고, 생이별한 형제와 우연찮게 다시 재회하게 되는 단순한 인과관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연도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신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태 석화는 신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기에 인위적인 만남이 아닐까 의심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곽수환이 돌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 됐다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할까.
석화는 오청운의 혈액에 휴면 상태의 기생충을 심고는 변화를 차분히 관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멀쩡한 사람의 혈액에도 기생충을 심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가 준 메추리알 돌을 굴렸다. 일전에 선물해줬던 다른 돌들은 전부 바이올렛 구역에 있었기에 아쉬운 마음만 가질 따름이었다. 활주로에서 여의도 쉘터까지 오는 데만 해도 엄청난 수의 아담을 상대해야 했다.
아담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석화였지만, 여기저기서 불이 치솟고 사람과 아담을 구별할 수 없는 도시는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아담 바이러스가 갓 창궐하던 때의 모습도 딱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석화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에덴동산의 백신을 제 혈액에도 심었다. 배양기에 넣은 혈액들의 온도를 각각 달리 설정하고 10분마다 변화를 체크했다. 혼자서는 벅찬 작업이기에 쉘터의 연구진들 몇몇도 석화를 돕고 있었다.
아직도 석화의 귓가에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의 울음소리도 이명처럼 자꾸 귀를 맴돌았다.
***
“민간인 쏘지 말라고! 이 병신 새끼들아!”
“민간인과 아담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사살하지 않으면 전염 속도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 죽음 앞에서는 다들 어쩔 수 없다 여겼다.
초창기 아담 바이러스가 퍼져나갔을 때도 아담에게 물린 사람들이 살고자 멀쩡한 사람들이 모인 방공호로 몰래 들어오기도 했으며, 바이러스에 노출된 고위공직자들 또한 이대로 죽을 수 없다면서 바이러스 연구센터나 병원을 접수해 마비시키기도 했다.
사실은 그런 자보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앞장선 사람들이 더 많았다. 공직자 중에서도 아담화된 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방공호에 갇히기를 자처한 위인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담 바이러스는 전쟁과는 양상이 달랐고, 100명의 위인보다 악인 1명의 파급력이 더 거셌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전부 악인이었을까?
몇몇 군인은 목덜미가 물린 채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혼란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들은 총을 제대로 조준하지도 못했다. 과연 저들이 악인인가?
샛강에 둘러싸인 여의도로 들어오는 다리는 전부 폭파되거나 길이 끊긴 상태였기에 남은 건 서울교뿐이었다. 또한 현재 여의도의 경계선은 서울교 교차로였다.
수십 대의 탱크가 교차로를 막고 있었고, 그보다 더 앞에는 시티가 위기대체용으로 만들어둔 경계용 철망이 둘려 있었다. 그러나 철망도 수많은 사람의 힘이 몰리면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 최악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는 아담이었다.
교차로의 경계 초소이자 아파트 15층에 해당하는 콘크리트 요새에서 곽수환은 저격총의 스코프 배율을 올렸다. 그는 아담을 구별해내 머리를 저격했다.
“소령님! 구축 방어기지 밖으로 전부 사살 명령 내려졌습니다.”
재차 장전을 하는 와중에 통신병이 황급히 말을 건넸다.
“뭐?”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퍼스트 마스터입니다.”
좆같은 새끼. 철컥, 곽수환이 사람을 공격하려는 아담을 연달아 사살했다. 여의도 교차로 지휘관은 다름 아닌 그였지만 상부 지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곽수환은 총구를 내리고 저 밑을 내려다봤다. 타 구역 사람들이 서울교를 타고 여의도 쉘터로 오기 위해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아담에게 물린 사람들도 변이를 해 양방향으로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곽수환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통신병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소령님, 사살명령이 전달됐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을 안으로 골라 들여보내는 일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철망을 개방하는 순간 아담까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소령님…….”
곽수환은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전부 사살하라고?
현장을 수없이 오가던 곽수환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었다. 이미 변이된 아담을 죽이는 건 손쉬웠고, 아담이 나타난 시작점을 기준으로 구역을 정리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불특정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변이된 아담이 나타났기에 모든 구역의 군인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건 수원으로 간 이채윤도, 과천을 지키는 양상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태어난 이래로 이런 대대적인 아담 청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쯤 되면 그냥 다 망하는 게 맞지 않겠어? 상부 새끼들은 알아서 살게 놔두고 나는 석 박사와 어디 섬이라도 가서 둘이 오순도순 살면 되잖아.
곽수환은 장전한 총으로 아담을 죽이고 또 죽이다가 기어코 부모가 안고 있던 아이마저 변이된 것을 봤다.
석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냥 전부 사살하라고 했을까? 아니면 이 미쳐버린 시티는 망해야 된다고 손을 놨을까. 상부의 지시라 어쩔 수 없었다면서 멀쩡한 사람까지 죽인다면 석 박사가 나를 어떻게 보려나.
곽수환의 이성도 전부 사살하는 것이 맞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쉽게 명령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교차로가 뚫리면 간신히 사수중인 여의도도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목소리를 냈다. 입에서 한기가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탕, 타앙, 타타탁. 반대쪽 콘크리트 요새에서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비명과 경악이 터졌다. 시티의 군인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뒤로 후퇴하는 자들, 철망을 어떻게든 부수고 들어오는 자들, 그리고 그저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아담으로 넘쳐났다. 곽수환은 요새 뒤쪽에 있는 통신병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유, 윤 대장님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곽수환 소령님께서 명령불복종을 하셨다고…….”
멱살을 틀어쥔 곽수환 때문에 숨이 막힌 통신병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소령님, 정말 맞습니까? 모두를 안전하게 구할 수 없으면……. 사살하는 게 맞습니까? 저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저 앞에서 기관총을 쥐고 있는 대위가 어깨를 떨고 있었다.
바람을 찢어 갈기는 것만 같은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요새를 지나 날아가는 헬기에서 지원사격이 들어온 것이다. 삽시간에 교차로는 피로 물들었다. 총에 맞아 고통에 소리를 지르는 자들과 가족을 찾겠다고 다친 몸을 이끌고 헤매는 자들로 넘쳐나는 빌어먹을 세상이었다.
곽수환은 제 몸 하나 지킬 줄만 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범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지만 아담만 싹 골라 죽일 수 있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윤 대장은 지금 어디에 있어?”
곽수환은 참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의도 쉘터에 계십니다.”
손가락 아니 목소리 하나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게 대장이라는 새끼였다.
여기서 총을 휘갈기는 놈들이 나중에 어떤 후유증을 겪을지 관심 하나 없는 새끼들이 저 쉘터 안에서 지시만 내렸다.
“사격 중지 시켜.”
“예?”
“중지 시켜.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곽수환이 요새를 등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한 차례 엄청난 폭풍이 휩쓸고 간 교차로에 남은 건 시체와 다친 사람들, 몸 어느 한쪽이 날아가도 끊임없이 생존자를 공격하려는 아담밖에 없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수록 피비린내가 짙어지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선 곽수환이 성큼성큼 철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곽수환의 명령에 모든 총격은 멈춘 뒤였다. 그는 뒤에서부터 달려 도움닫기를 해 철망을 붙잡고 올랐다. 3미터가 조금 넘는 철망을 건너서 교차로에 섰다. 찰박, 군화에 피가 묻어났다.
석 박사가 그랬지. 자기는 힘도 없어서 늘 타인에게 짐이 된다고.
그래서 석 박사도 나처럼 강했으면 좋겠다고…….
아니야, 석 박사.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치료제가 맞아. 치료제만 있었으면 이따위 참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떻게든 만들 거예요. 어떻게든 치료제를 만들 거니까.’
여의도 쉘터에 내려주던 때 석화가 그랬다.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나 믿어요.’
기어서라도 저에게 달려드는 반병신이 된 아담을 군화로 짓이겨 머리통을 깨부쉈다. 그는 피바다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리의 근원은 널브러진 시체 밑이었다.
목덜미를 잡아서 시체를 치우니 여자는 뭉친 셔츠를 목구멍까지 쑤셔 넣은 채로 죽어 있었다.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혹시나 아담으로 변해 제 아이를 물까 봐서였을 거다. 곽수환은 아이를 안아들려고 했다. 그러나 허억거리는 숨소리를 내뱉는 아이가 몸을 마구 비틀었다. 괴로운 듯이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는 아이는 바이러스를 이기지도 못하고 꺾인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부모가 살리고자 하던 아이마저 죽었고, 희망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최호언 새끼가 왜 석 박사를 이용하고자 하는지 너무도 잘 알겠다. 직접 공포를 겪은 사람들은 면역체인 석화를 신격화할 것이다. 신의 계시를 받으면 너희들도 면역체가 될 수 있을 거라며 현혹하려할 테지.
곽수환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공포만큼이나 짙게 서려 있는 감정은 군인을 향한 적개심이었다.
믿어, 석 박사.
곽수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