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am's apple (3)
[구원 받고 싶은 자, 에덴동산을 믿으십시오. 레인보우 시티는 시민을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인 생명의 나무와, 나무를 지키는 지혜의 뱀이 함께합니다. 에덴동산은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합니다. 믿는 자, 인내하면 에덴동산이 그대를 마중하러 가리니……치직, 칙.]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에덴동산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마저도 전파 방해를 받았는지 끝까지 나오지 못하고 곧 잡음으로 가득해졌다.
“이대로 시티가 무너질까요? 아담도 판을 치는 와중에 에덴동산이라니요.”
교육센터에서 자란 연구원이 불안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에덴동산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겠죠?”
이어지는 연구원의 말에도 석화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6차 백신을 투여 받은 사람의 혈액에서 에덴동산 백신이 반응을 보였지만, 그마저도 움직임이 미비했다.
분명 7차 변이 아담들 중 몇몇은 말을 하거나 후퇴하는 행동을 보이고는 했다. 석화도 동물원에서 그들이 이브라고 입을 뻐끔거린 것을 봤고, 그 아담들은 전부 13구역에서 나왔다. 또 최호언은 자신을 오양석의 자택이 있던 13구역으로 불러들인 뒤 여의도 쉘터를 공격했으며, 13구역에 폭발사건도 일으켰다.
설마 그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건가? 아니, 그랬다면 자신을 생명의 나무라고 운운했을 리가 없다. 앞선 역사만 들여다봐도 폭발사건은 그릇된 사상을 가진 테러범들의 짓이거나 기밀을 없애기 위한 자들의 소행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한들 에덴동산은 폭발사건으로 얻어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봐야 여의도 쉘터에 걸어두었던 대자보뿐이었다.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당시 그 대자보 이야기가 뒤에서도 오고갔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구절이라는 것을 석화도 안다. 그건 신이 뱀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런데 만일 뱀이 아니라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들에게 경고를 한 것이라면?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는다……. 팔다리를 쓰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아담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있으라는 기계적인 방송 외에는 다른 내용이 전혀 없었다. 석화는 가운을 벗고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어디를 가느냐는 다른 연구원들의 말도 무시한 채였다. 걸어 나가면서 제법 칼로리가 나가는 과일즙을 마시고 제가 해야 할 말을 다시금 정리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복도 스피커에서는 마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쉘터는 안전합니다. 쉘터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금지되었습니다. 군인을 제외한 모든 쉘터 내의 인원은 20층 밑으로 이동을 금지합니다.]
최종 방어선인 48층이 아닌 20층까지도 무사했으니 아직 여의도 교차로가 뚫리진 않은 듯했다. 석화는 그곳에 있을 곽수환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화는 다른 때보다도 부산히 걸음을 옮겼다. 전부터 이상하다고 느꼈건만 어느 순간부터 체력이 전보다도 훨씬 좋아진 것 같았다. 예전 같았다면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에도 몇 번이고 기절했을지 모른다. 그뿐이랴,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곰곰이 되짚어 생각해보면 그 기점은 아담에게 물려 호되게 앓았던 이후였다.
석화는 고개를 한번 털었다. 사념에 잠기지 말자. 아직은 좀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58층에 내리자마자 앞을 지키는 군인이 석화의 신분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석화 박사님.”
“이연태 중장님을 다시 뵙고 싶습니다.”
무장상태의 군인은 무전으로 석화의 용무를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의 길을 터주었고, 석화는 여전한 걸음으로 이연태의 집무실을 찾았다. 그 앞도 군인이 지키고 있었으나 미리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지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이연태는 유선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로 말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미친 연구원의 가설이요? 그게 아니라 당신들이 치부를 인정하기 싫은 거잖아! 씨발 개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밖이 어떤지나 알아?!”
이연태의 수화기는 벌써 반쯤 금이 가 있었다. 몇 번이고 내리쳤던 것이 분명했다. 쾅,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연태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석화 박사.”
“왜 방송을 안 합니까?”
석화는 쉘터에 돌아오자마자 이연태에게 에덴동산 백신에 대해 방송을 해달라고 부탁했었다. 여의도 쉘터 내에서 상급자이며 이따금 자신의 편을 들어준 이연태를 믿고 선택한 건 당연했다.
“실험 결과는?”
“6차 백신이 투여된 혈액과 오염된 에덴동산 백신이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7차 아담 바이러스냐고. 석화 박사, 내가 또 석화 박사 대변인이라는 이야기를 저 윗대가리들한테 들어야겠어?”
그는 짜증을 가득 담아 석화를 쏘아봤다. 그러더니 곧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석화 박사가 말한 건 가설에 지나지 않잖아?”
“에덴동산 백신이 오염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걸 투여하지 못하게 막아달라는 겁니다.”
이연태도 석화를 오래도록 알아왔지만 늘 멍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선고받은 노인 같은 눈을 하고 있었건만 지금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된 소년처럼 힘이 실려 있었다. 그래봐야 기운 넘치는 군인들에 비하면 여전히 기력이 쇠해 보이기는 했다.
“이미 전부 회수했다고 발표를 했으니 그런 방송은 의미가 없지. 게다가 오염된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에게 혼란만 심어주는 셈이야.”
“그럼 지금 대대적인 감염 사태 때문에 에덴동산 백신을 맞는 사람들이 생긴다면요?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왜 회피하는 겁니까?”
“레인보우 시티는 회피와 타협으로 만들어진 시티잖나.”
이연태 중장이 이상할 것 없다면서 쓰게 웃었다.
“치료제를 만들거나, 오염된 것 말고 에덴동산 백신에 정확히 무슨 문제가 있는지 결과물을 가져오게.”
치료제. 말은 쉽다. 여태까지 만들지도 못하게 압박을 줬으면서 당장에 결과물을 가져오라니, 이거야말로 모순이 아닌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생각은 해. 과감히 실행하지 못할 뿐이지. 내가 상부 놈들의 말을 무시했다고 치자, 이번 일이 정리되면 나를 가만히 놔둘 것 같나? 어차피 쌍욕을 퍼부었으니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자네보고는 미친 연구원이라더군.”
이연태가 헛웃음을 피식피식 흘렸다.
“방송을 해주세요. 가능하시잖아요. 이번 사태가 안정되더라도 다시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미비하지만 분명 혈액에 변화가 있었어요. 혼란이 야기된다면 에덴동산의 백신이 오염됐다는 말은 하지 말고, 유통기한이 굉장히 짧으니 투여를 금지한다고만 전달해주세요.”
이연태가 가죽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 가설이 맞다면 13구역에서 나온 7차 변이 아담들이요. 그자들이 후퇴를 하거나 말을 반복한 건 아담에게 지능이 생겨서가 아니에요. 아담 바이러스에 노출됐지만 감염 속도가 현저히 늦어진 것뿐이라고요. 오청운 박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현상은 이연태도 알고 있었다. 아담인 오청운이 말을 했다고 곽수환과 석화가 보고를 했으니까.
이연태는 어디론가 전화를 연결하더니 달싹거리는 입술을 떼어냈다.
“나 이연태 중장일세. 지금부터 내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레인보우 시티 정규 라디오 방송으로 모두 내보내게.”
이연태는 피곤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 중, 오염이 된 백신 때문에 각지에서 아담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의 투여를 전면 금지한다. 투여를 받은 자는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가족과 친구들을 자택의 방공호로 대피시키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꼭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이연태가 수화기를 내려두었다.
“이 정도로 타협했으면 윗대가리 놈들도 처형까지는 안 시키겠지.”
석화는 이연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하지만 쉘터 내부도 부산스러웠다.
엘리베이터도 한참을 기다려야했기에 석화는 그동안 다시 한번 그를 떠올렸다. 곽수환에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했으니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먼저였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구실로 돌아간 때였다. 연구원이 석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왔다.
“박사님, 박사님! 빨리 이것 좀 보세요!”
조급하게 팔을 잡아끄는 연구원을 봤다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전에 오청운의 혈액세포를 이용해 배양을 했을 때, 난폭하게 활동하던 아담 바이러스가 정체된 것처럼 아주 느리게 움직였었다.
그때는 그게 치료제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조차도 치료제를 운운한 서펀트의 간사한 혀에 말려버린 것이다.
이제야 가설이 맞아떨어졌다.
오염된 에덴동산 백신을 멀쩡한 혈액에 투여한 뒤, 아담 바이러스를 심으면 그 순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투입됨과 동시에 휴면 말라리아 기생충이 자극을 받아 활동을 시작한다. 그렇게 기생충은 한동안 아담 바이러스를 막는 역할을 했다.
기생충으로 적혈구가 파괴돼 혈소판이 감소하면, 혈액의 응고와 지혈이 더뎌진다. 이윽고 혈소판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을 때, 느리게 퍼져나가던 바이러스에도 속도가 붙었다.
또한 6차 백신이 체내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에덴동산 백신이 투입돼도 마찬가지로 혈소판이 감소했다.
감소의 끝에 6차 백신의 구성성분 중 독성을 약화시킨 아담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했다. 오청운의 혈액에서 바이러스가 느리게 이동했던 이유도 선배가 완벽하게 변이되기 전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석화는 등이 스산해지는 것을 느꼈다.
에덴동산이 노린 건 치료제가 아닌 속임수였다.
백신은 전부 거짓이었다.
기생충이 감염의 진행을 더디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혈소판이 지나치게 감소하면 바이러스가 즉시 퍼져나간다. 더 위험한 건 혈소판 감소 때문에 피하출혈이 훨씬 쉬워진다는 점에 있었다. 쉽게 말해 잇몸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출혈이 지속되니, 바이러스가 퍼져나가기는 더욱 용이했을 것이다.
“석화 박사님…….”
연구원도 하얗게 질린 석화를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생각 이상으로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에덴동산은 시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던 것이 아니었나? 이 결과만 놓고 보자면 새로운 세상이 아닌 완벽한 말살을 뜻하는 듯해 보였다.
석화는 정신을 차리고자 웬일로 찬물을 들이켰다.
이걸 누구에게 전달해야 하지? 아니, 전달한다고 해도 감염을 해결할 뾰족한 수가 있을까? 석화의 머릿속을 스친 건 다름 아닌 곽수환이었다.
맨몸으로 아담을 상대하는 곽수환이 손쉽게 출혈을 일삼는 아담에게서 안전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게다가 아직 변이가 되기 전인 아담 바이러스 감염자가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사람을 구하려다 혈액을 통해 감염되기라도 한다면……?
석화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도 전력질주를 해본 적이 없어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엘리베이터를 초조하게 기다려 다시 이연태 중장에게 향했으나 그는 부재중이었다. 집무실에 두고 온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제발, 군인이면 시티를……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빨리 알려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전화를 쓰게 해주세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석화의 절박함에도 군인은 그럴 수 없다면서 앞을 막았다.
“저 수석 연구원입니다. 지금 손을 쓰지 않으면 정말 다 죽습니다……!”
군인도 저 밖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칫하다가 시민들이 거의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군인은 주인이 없는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마치 저절로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석화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게 군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석화는 고맙다는 말도 못 하고 서둘러 이연태의 유선 전화기를 들었다.
그의 책상에는 통신 센터와 각 지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석화가 가장 처음으로 선택한 곳은 여의도 요새의 통신 센터였다.
“여의도 쉘터입니다. 구출된 사람들도 전부 아담 키트로 검사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유선 접속 불량인지 감이 멀게만 들렸다. 석화는 숨을 한 박자 고르고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여의도 쉘터, 수석 연구원 석화입니다. 이연태 중장님이 부재중이신 관계로 제가 대신 전달합니다. 구출된 사람들 모두를 아담 혈액 키트로 검사해주십시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아담 바이러스 보균자일 수 있습니다.”
[……현재 서울교 교차로, 생존자 확인되지 않습니다.]
석화는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한 것을 간신히 고쳐 쥐었다.
“……곽수환 소령님은 무사한가요?”
[혹시 모를 생존자를 구출하러 나가셨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곽수환 소령님께 꼭 전달해주세요. 생존자들을 전부 격리해야 합니다. 정신없으시겠지만 전부 아담 키트로 꼭 검사를 진행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재차 감염이 확산될 겁니다.”
[수석 연구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군 상부도 아닌 연구원의 지시였기에 군인이 의문을 띤 건 당연했다.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전달은 하겠습니다.]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끝으로 연결이 끊겼다. 석화는 이어 세컨드 마스터에게 향할 직통 번호를 눌렀다. 투박한 신호가 혼선이 되는 것처럼 겹쳐 들렸다. 달칵,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 석화입니다. 마더 시스템을 통해서 여의도 쉘터 제 연구소 서버로 접속 부탁드립니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에 대한 정리가,”
[쉬엄쉬엄 말해요. 우리 구원자님 숨넘어가겠어요.]
석화는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최호언 박사.”
[세컨드 마스터가 우도에 처박혀 계시는 동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해킹에도, 혼선에도 무방비하지 뭡니까. 그보다 석화 박사님 벌써 알아냈어요? 난 적어도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이 상태라면 전부 감염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직한 웃음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인류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아요. 어떤 시대든 살 사람은 살아남죠. 흑사병을 보세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답니다. 그래도 역사는 이어졌잖아요? 지금 시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에덴동산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하기 위해 한 차례 솎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뿐이죠.]
“……아니잖아요.”
석화는 두 손으로 수화기를 꽉 붙들었다.
“아닌 거 다 압니다.”
손이 떨렸지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석화는 분노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냥 전부 다 죽이려는 거잖아. 에덴동산도 사실은 아무 의미 없잖아요.”
감염자 중에는 에덴동산의 신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로 감염 속도가 빠르다는 건 오염된 백신을 맞은 그들의 신도가 시티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거다.
[……온실 속에서 자란 내 동생. 세컨드 마스터를 만났으니 많은 이야기를 들었겠죠?]
서펀트가 정말 형제라고 해도 가족으로서의 애틋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 남보다도 못한 존재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남이었다.
[봐요, 이 사달이 났는데도 시티의 수뇌부들은 제주도로 피신하거나 안전한 곳에서 지시나 내리고 있죠. 민간인까지 전부 사살 명령이 떨어진 건 알고 있어요? 우리 동생은 너무 순진해서 그럴 리 없다는 말을 하려나?]
“최호언……. 당신이 벌인 일이잖습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죠. 내 구원자, 어서 내게로 와요. 내 가족은 이제 석화 박사뿐이에요. 아버지 때처럼 힘없이 잃지는 않을 거니까.]
석화는 더는 듣지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뚜르르, 뚜르르르, 전화기에 붉은 불빛이 점멸하면서 수신음 소리가 들렸다. 최호언일 수도 있기에 수화기까지 가는 손이 더뎠다. 석화는 망설임을 지우듯 다시 수화기를 확 들어올렸다.
[곽수환 소령입니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령님!”
[……석 박사?]
“무사해요? 이야기 전해 들었어요?”
[나 무사하니까 일단 진정해. 아담 키트로 멀쩡한 사람까지 확인하라는 건 무슨 소리야? 이미 통제 전에 여의도로 들어간 시민들도 있잖아.]
아……. 석화의 입에서 생각이 끊기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긴급상황, 긴급상황, 여의도 쉘터 아담 출현, 최종 방어선 48층까지 폐쇄 카운트 360. 카운트 들어갑니다.
석화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스피커를 향했다.
긴급상황 발생, 여의도 쉘터 아담 출현.
마더는 계속해서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석 박사!]
수화기 반대편에도 마더의 알림이 들어갔는지 곽수환이 외쳤다.
[정신 차려. 지금 이연태 중장 방이지?]
“……네.”
[문 잠그고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갈 테니까.]
“아뇨, 안 돼요.”
그 혼자의 몸으로 1층부터 58층까지 뚫고 올라오는 건 말도 안됐다.
“일단 더 위로 이동해볼게요.”
[아직 48층까지 뚫리지는 않은 거지?]
“그런 것 같아요.”
[헬기 보낼 테니까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어.]
쾅! 이연태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앞을 지키고 있던 군인이 들어왔다. 칵, 크륵, 괴이한 소리를 내는 군인은 이럴 리 없는데, 없는데,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피를 토해냈다.
“소령님…….”
석화는 수화기를 든 채로 괴소리를 내며 각혈하는 군인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밑의 서랍을 열어 권총 한 자루를 찾아냈다.
[방금 그 소리 뭐였어? 석 박사, 대답해!]
지금 제 눈앞에 아담이 되려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전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그에게 전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제가 아는 곽수환이라면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 때 분명 자기 자신을 질타할 것이다. 혹여 잘못되더라도 그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
[석 박사. 석화야.]
곽수환의 목소리에 절망이 가득했다. 석화는 침을 꿀꺽 삼키고 권총을 꽉 쥐었다. 군인은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가 고개를 흔들고, 제 머리를 주먹으로 치기도 했다.
“옥상까지 가볼게요. 나 믿으라고 했잖아요. 괜찮아요.”
석화는 자신을 세뇌하듯 그렇게 말을 반복했다. 곽수환이 더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어쩐지 그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석화는 군인을 향해 권총을 조준했다.
***
“석화야!”
곽수환이 수화기에 대고 석화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가 기어코 끊긴 것이다.
저 밑은 피바다였고, 눈을 찡그리고 올려다본 하늘은 흐렸다. 마치 비가 올 것 같았다. 그러나 레인보우 시티는 그저 흐리기만 했다. 비의 흔적은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곽수환은 거추장스러운 제복 코트를 벗고는 통신병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설마 58층까지 감염이 확산된 건가? 그렇다면 이연태 중장 방에 있는 전화 또한 울려서는 안 됐다. 석화가 있는 곳으로 놈들이 몰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이 시간 이후로 이 중장 방으로 전화 걸지 마.”
“알겠습니다.”
“조 대위.”
요새 위에서 참담한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는 대위를 급히 불렀다.
“아담 키트 여유분 얼마나 있어?”
“교차로 창고에 백 개 정도는 구비되어 있습니다.”
“일단 격리한 생존자들 위주로 아담 키트 실시해봐. 생존자 확인되는 대로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검사하고, 자리 지키고 있어. 난 여의도 쉘터로 돌아간다.”
“쉘터도 아담 감염이 시작됐다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곽수환이 대답 없이 가죽 장갑을 끼고는 요새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는 내려가면서 서울교 우측에 내려와 있는 헬기를 확인했다. 지프를 타지도 않고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니, 어깨에 총을 걸친 두 놈이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달려온 곽수환을 보자마자 군화를 딱 붙이고 서서 거수경례를 했다. 곽수환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놈들을 제치고 헬기 안으로 들어갔다.
“파일럿, 지금 여의도 쉘터로 이동 가능한가?”
파일럿이 벗어둔 헤드셋을 쓰며 말했다.
“바람 영향이 적어서 바로 이륙 가능합니다.”
“쉘터로 지원 간다. 밖에 너희 둘도 합류해.”
수다를 떨다 한껏 긴장했던 두 놈이 곽수환의 명령에 바로 탑승했다. 두 놈은 아직 여의도 쉘터가 뚫린 것을 모르는 듯했지만, 상관의 명령에 의문을 띠지도 않았다. 그만큼 레인보우 시티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여기서 여의도 쉘터까지의 거리는 그래봐야 몇 분이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기우뚱하던 헬기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리에 곽수환이 목소리를 키웠다.
“여의도 쉘터에 아담이 출현했다. 마더 방송에 따르면 48층은 지금쯤 폐쇄됐을 예정이고, 그 위층으로도 아담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담을 발견하면 즉시 사살해.”
긴장을 풀고 있던 두 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최종 방어선이 뚫렸을 수도 있다는 말은 여의도 쉘터마저 괴멸 상태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 위를 나는 헬기는 쉘터 주변을 선회하며 고도를 점차 상승시켰다. 곽수환은 가죽 장갑을 낀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손 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이연태의 방이 고층에 위치해 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랐지만, 분명 아담의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렸었다. 늘 솔직한 석화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괜찮다는 그 말이 저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로만 다가왔다. 행여 아담에게 물린다고 하더라도 석화는 면역체니까, 하고 안심할 수도 없었다. 아담에게 물려 과다출혈이 지속되면 석화도 죽는다.
“착륙 준비합니다!”
파일럿이 소리를 치자마자 곽수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지대를 잡고 밑을 내려다봤다.
옥상에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고위간부들이 모여 있었고, 그 안에 석화는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착륙할 때까지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곽수환은 착륙까지 몇 미터를 남겨두고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마찬가지로 뛰어내려야 하나 눈치를 보는 두 놈을 향해 옥상을 엄호하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헬기를 피해 저기 멀찍이 서 있던 고위관리 몇몇이 곽수환을 보고 그에게 달려왔다.
“우리 여의도 쉘터가 대체 왜 뚫린 건가?!”
인상을 잔뜩 쓰고 화를 내는 놈의 견장을 보니 원스타나 마찬가지인 준장이었다.
“대체 어떻게 군대를 관리했기에 이 모양 이 꼴이야!”
곽수환이 제 앞을 막아선 준장을 손으로 밀쳐냈다.
“지금 여의도 쉘터 내부 정확히 파악되시는 분 있습니까?”
곽수환의 고함에 준장이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저희들부터 어서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라면서 헬기로 탑승하려고 했다.
“쉘터 내부에서 아담을 보신 분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헬기에 두 놈은 장전된 총을 들고 있다가 헬기로 달려드는 준장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까마득하게 높으신 상관인지라 준장이 헬기를 출발하라고 지시하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준장이 헬기에 올라타더니 어서 출발하라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곽수환이 헬기로 달려가 준장의 목덜미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다.
“네놈이 감히! 명령 불복종으로 죽고 싶어?!”
준장이 권총을 꺼내들어 곽수환에게 겨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빠르게 곽수환이 준장의 손목을 거칠게 쳐서 총을 떨어뜨렸다.
“니들 두 놈 뭐 해! 이 새끼 체포 안 하고!”
우왕좌왕하는 군인 두 놈이 곽수환을 향해 총구를 조준했으나 쏘는 자는 없었다.
“병신 같은 새끼들! 기강도 없고 상관 말도 무시하니까 시티가 이 꼴이 난 거야! 네놈은 내가 반드시 헌병대에 잡아 처넣겠어!”
곽수환이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군번줄을 잡아 끌어냈다. 쓱, 손으로 밀어 레인보우 시티에서 인정한 컨트롤러 인식표를 드러내보였다.
“레인보우 시티 컨트롤러 곽수환이다. 오선범 준장은 헬기에 태우지 않는다. 여의도 쉘터를 책임지고 지켜야 할 준장이 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니 사건이 마무리되면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만일 불복할 시 준장을 사살해도 좋다.”
헬기에 타 있던 두 놈도 안쪽의 인식표를 확인하더니 헬기 입구를 막고 섰다.
“오선범 준장을 제외하고, 순차적으로 생존자들을 실어 나른다. 2인 1조가 되어 헬기에 탑승하며, 장소는 레인보우 시티 1급 사태 안전 방공호인 여의도 학교다. 여의도 쉘터 인원은 중학교 건물로 이동한다.”
1급 위기 사태의 방공호는 초중교가 한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쉘터 생존자들도 전부 아담 키트로 혈액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양성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격리해. 그리고 방공호에 있는 헬기 더 지원 요청해서 순차적으로 날라.”
두 놈이 그제서야 빠릿빠릿하게 사람들을 헬기에 태우기 시작했다. 준장은 인식표를 봤으면서도 전부 거짓말이라는 듯 시끄럽게 굴었지만, 그를 아는 나머지 고위관리들은 그가 컨트롤러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태껏 기행을 일삼았나 싶기도 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준장을 향해 장전된 총을 겨누자 놈이 입을 다물었다. 곽수환은 옥상으로 올라오려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개중에 연구원도 보였고, 고층에서 상주하는 직원들도 섞여 있었다. 무장한 군인들이 사람들을 인솔했지만 그 와중에 석화는 보이지 않았다.
곽수환은 인솔 중인 대위 한 명을 붙잡았다.
“아담이 저층에서부터 올라왔어?”
“그렇습니다. 정확한 사고경위는 파악되지 않으나 감염자 중에 군인도 있습니다. 폐쇄된 각 층마다 아마 생존자도 존재할 것으로 보입니다.”
각 층마다 아담 출현 시에 대피할 공간은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담이 끼어있다면 그 안에서 모두가 갇혀 죽게 되는 셈이었다.
“헬기 지원 나왔으니 합류해서 사람들 인솔해. 생존자 모두 인솔한 뒤에는 남은 군인들 전부 옥상에 집결시켜. 그 안에 내가 합류하지 못하면 김 대위 네가 위에서부터 다시 밑으로 아담을 밀고 내려간다.”
각지에서 아담이 출현했기에 지휘관인 소령이나 중령급 대다수가 현장으로 나가 있었다. 쉘터에 남은 건 고위간부와 위관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위에게도 두려움은 존재했으나 이곳의 아담을 소탕할 군인은 저희들뿐이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48층 폐쇄 완료. 58층 아담 발견으로 58층 출입구 폐쇄합니다. 폐쇄 카운트 10, 9, 8…….]
마더의 방송에 곽수환이 사람들을 밀치고 밑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이연태 중장의 방은 58층에 있었다. 만일 석화가 58층을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그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곽수환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사람들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석화는 없었다.
[3, 2, 1. 폐쇄를 시작합니다.]
곽수환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철문 밑으로 몸을 내던졌다.
덜컹! 안으로 굴러들어가자마자 58층의 출입구가 전부 폐쇄됐다. 곽수환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복도를 향해 겨눴다. 엘리베이터는 작동이 중지되었고 복도 천장에 달린 전등이 깜빡거렸다.
곽수환은 복도에 서 있는 군인을 총으로 겨누면서 다가갔다. 놈이 제 머리를 벽에다 쿵쿵 찧고 있었다. 그러다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곽수환을 쳐다봤다. 눈이 시뻘겋고 입가에 피가 가득해 놈이 아담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곽수환은 저에게 달려드는 놈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런데 왜 한 놈밖에 보이지 않지?
곽수환은 시체를 발로 걷어차고 이연태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 박사, 무사한 거 맞지? 아담이 출현했다는데도 지나치게 고요한 58층 분위기에 오히려 불길함이 더 짙어졌다.
깜빡, 깜빡, 전력에 이상이 생겼는지 전등마저 불안했다. 더 의아한 건 복도에서 보이는 각 사무실이 전부 닫혀 있다는 것이었다. 강당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고, 준비실 문은 제복에 매달려 있는 밧줄에 꽁꽁 둘려 있었다.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잠가둔 것처럼 보였다.
이 안에 아담을 가둬놓은 건가? 설마…….
곽수환은 최대한 기민하게 움직여 이연태의 방으로 향했다. 코너를 돌자 이연태의 방이 바로 보였고, 문은 빠끔히 열려 있었다. 곽수환은 다시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저벅저벅 걸어가 문을 확 열었다. 널브러져 있는 시체 한 구가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놈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내려다보니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게 보였다.
혹시 석화는 이미 위로 도망갔는데 자신과 마주치지 못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석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곽수환은 이연태의 방을 나오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렇다면 찾아야지. 아담 때문에 숨어있는 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그는 권총의 밑 부분으로 철문을 쾅쾅 내리쳤다. 쾅, 콰앙, 쾅. 조용한 58층의 복도를 타고 파열음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석화야!”
곽수환의 외침에 쿵-! 어딘가에 몸을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쿠웅! 한 놈이 아니라 적어도 몇 놈이 문에 몸을 박는 소리였다.
“석화 형!”
콰지직! 나무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복도의 중앙, 군사회의실의 문이 박살났다. 동시에 안에 갇혀 있던 아담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열, 많으면 스물이었다. 곽수환은 악귀같이 달려들기 시작하는 아담을 보고는 이놈들을 가둬둔 게 혹시 석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다 죽이면 그만이다. 놈들을 다 죽여 석화를 만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소령님!”
곽수환이 가장 먼저 달려든 놈의 턱뼈를 부숴놨을 때였다. 석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헛것을 들었나 싶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였다. 곽수환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가 달려드는 아담 때문에 다시 앞을 봐야 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석화의 얼굴을 봤다. 그것도 이연태 방 옆에 닫혀있던 화장실이었다. 거기서 석화가 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석화에게 달려가고 싶건만 날뛰는 놈들이 문제였다.
“문 닫고 들어가 있어!”
곽수환은 정면을 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변이된 개체는 대다수가 군인이라 체격이 좋은 놈들투성이였다. 그런 놈들을 상대하자니 곽수환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감염자들이 저마다 먼저 공격하겠다고 늘어진 시체를 밟고 기어 올라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총을 발사하지도 못하고 주먹으로 머리뼈를 깨부쉈다. 가죽 장갑에 스며들지 못하는 뇌척수액과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저 새낀 뭐야.
당황스럽게도 저 끝에 있는 놈 하나가 아담을 공격하고 있었다. 같은 방에서 나온 놈인 데다 뺨의 살점이 너덜거리는 꼴이 딱 봐도 아담이었다. 곽수환이 턱을 뜯어낸 아담의 멱살을 잡고 방패 삼아 앞으로 돌진했다. 가뜩이나 흥분해서 날뛰던 놈들인지라 곽수환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넌 뭐야, 새끼야!”
열두 놈의 머리를 으깨놓고 나니 복도는 피뿐만 아니라 피로 떡진 구불구불한 뇌가 그로테스크하게 범벅되어 있었다. 어느 도살장도 이런 참상은 없을 거다. 너덜거리는 뺨을 하고 있는 놈이 고개를 연방 경련하듯 흔들었다. 마치 아담으로 변이되기 직전의 행동처럼 보였다.
사람마다 변이 시간이 다르긴 했지만 아담이 아담을 공격한 사례는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저놈도 면역자라면……. 크르륵, 목 안쪽에서 피 끓는 소리를 내던 놈이 피를 왈칵 토해냈다. 불분명한 발음을 일삼더니 시뻘건 눈으로 곽수환을 쳐다봤다. 기괴하게 뒤틀린 다리를 하고서는 제복 안쪽으로 손을 쑥 넣었다. 돌연 놈이 총을 꺼내들었다. 곽수환도 방패 삼은 아담을 내려놓고 제 총을 꺼내 놈을 겨눴다.
탕-! 놈의 총구가 향한 건 곽수환이 아니라 저 자신의 관자놀이였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어 곽수환은 자살한 군인을 내려다봤다.
변이가 되던 도중이었던 건가? 완전히 정신을 놓기 전에 자살을 선택한 거고? 그는 놈의 군번줄을 떼어냈다. 58층을 지키고 있던 소위 중 한 명이었다.
곽수환은 인식표만 떼어내 뒷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최대한 뇌나 장기가 군화에 묻지 않을 부분으로 발을 디뎌 내달리기 시작했다.
쾅! 닫힌 화장실 문을 여니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연태나 그와 비슷한 직급들만 사용할 수 있는 간부용 화장실이 지금 이 건물 중 가장 깨끗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문을 굳게 닫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용할 수 있는 칸은 총 세 개로 그중 마지막 칸 하나만 문이 닫혀 있었다. 곽수환이 그 앞으로 다가가 석화를 불렀다.
“석 박사.”
달칵,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석화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얼마나 놀라고 겁먹었을지 눈에 선해서 제 속이 다 답답했다. 곽수환은 손을 뻗어 석화를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석화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끈따끈한 온기에 곽수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소령님은요?”
“건강해.”
그가 제 이마를 내려서 석화의 이마에 툭 부딪쳤다.
“올라가려고 했는데……. 아담이 자꾸 따라붙어서……. 가지 못했어요.”
석화가 기를 쓰고 옥상에 올라갔다면, 어쩌면 제가 도착하기도 전에 저 위는 초토화됐을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석화가 희생을 하는 건 원치 않았다. 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하지 왜 다른 사람을 생각했냐며 탓을 할 뻔했지만, 곽수환은 애써 말을 삼켰다.
“잘했어. 석 박사가 다 가둔 거야?”
석화가 이마를 떼어내더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했다.
“다음에는 무조건 피하기만 해. 운이 계속 따라준다는 법은 없어.”
“운은 아니에요. 전화를 기다렸거든요.”
“응?”
제 옷에 피가 묻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멀찍이 몸을 떨어뜨려야 할 테지만, 더는 참지 못하고 석화의 몸을 껴안았다.
얇고 말랑거리는 귀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코를 문지르며 내려왔다. 석화는 손을 들어 곽수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화의 손이 아직도 긴장으로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전화벨 울리면 감염된 아담들도 소리에 몰려들잖아요. 타이밍을 기다렸는데 전화가 안 오더라고요.”
곽수환이 하, 하고 속에서부터 깊은 숨을 토해냈다. 분명 이연태 중장의 방으로 전화를 걸지 말라고 했었다. 석화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으니 다시 걸려올 줄 알았나 보다.
“위험할 줄 알고 안 했지.”
“중장님 방에서 다른 방으로 계속 전화를 걸었죠. 아담들 몰리면 가서 문 닫고 도망오고, 그렇게요. 처음에는 멀쩡한 군인들이 더 많았고 다들 막으려고 애썼는데……. 준장이 군인들에게 쉘터를 사수하라고 명령하고 자기만 위로 도망가더라고요. 그렇게 밑에서 또 사람들이 올라오면서…….”
밑에 있던 아담들도 58층으로 올라왔을 테고, 마더의 판단으로 폐쇄가 됐던 것이다. 곽수환은 아직도 몸을 떨고 있는 석화를 단단히 안았다. 이대로 몸 어디 할 것 없이 만지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이 도시는 항상 그런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아담 키트로 생존자들 확인하라는 소리는 뭐였어?”
석화는 이제 괜찮다면서 곽수환의 가슴을 밀어냈다. 세면대로 다가가 수도꼭지를 올렸다. 물탱크에는 문제가 없는지 물이 흘러나왔고 석화는 찬물로 얼굴을 닦았다. 곽수환에게도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역시 얼굴을 물로 씻어 내렸다.
석화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에덴동산이 배포한 백신 중에 휴면 상태의 기생충이 들어간 백신이 있었어요. 그 기생충은 아담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해요. 그리고 아담 바이러스의 진행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요. 전에 에덴동산 서펀트가 백신을 맞고, 아담 바이러스를 제 몸에 투여하는 영상을 퍼뜨렸잖아요. 그 사람이 분명 최호언은 아닐 테니 대역을 썼겠죠.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시간 내에 변이를 하지 않은 건 맞아요. 그러니 에덴동산 사람들은 백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죠.”
곽수환이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석화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그 기생충이 담겨 있는 백신이, 바이러스가 진행되는 속도를 늦췄다는 거야?”
“네. 사람마다 말라리아 기생충이 일으키는 합병증이 생기는 속도도 다 달라요. 아마 이번 일 말고도 아담이 없던 지역에서 갑자기 아담이 출현했던 적도 있었을 거예요.”
석화의 말이 맞았다. 상부는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 거다.
“그럼 문제 있는 백신을 맞은 시민이 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고?”
“맞아요. 그래서 백신을 맞지 말라는 방송을 해달라고 한 거예요. 이연태 중장님이 해주셨어요.”
세면대를 잡고 있던 곽수환이 몸을 돌렸다.
“아직 변이되지 않은 아담 바이러스 보균자가 있을 거라는 말은 가설이야, 확신이야?”
“확신이요. 대피한 사람들 중에 최근에 에덴동산 백신을 맞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말라리아 감염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도 격리해야 해요. 그런데 이 악성 말라리아는 열이 일정하지 않게 올랐다가 내리거든요. 일단은 발열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을 격리해야 하는데, 문제는 감기뿐일 환자들과 뒤섞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격리실이 그렇게 많지도 않기에 이상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한데 몰아넣는 수밖에 없었다.
석화가 두 손으로 제 눈을 꾹 눌렀다가 떼어냈다. 엄청난 피로감에 휩싸였지만 그걸 애써 막아내고 있었다. 곽수환이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58층이 폐쇄됐기 때문인지 제가 저질러놓은 참상만 펼쳐져 있었다. 그는 석화의 손을 잡고 화장실을 나와 이연태의 방으로 걸었다. 참상을 봤다면 석화가 구토를 했을지도 모르기에 방이 바로 옆이라 다행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잡아끌어서 밖에다 내놓은 곽수환이 문을 잠갔다. 물걸레가 지나간 것처럼 시체가 끌려간 자리에는 쓸린 핏자국이 남았다. 석화는 그 핏물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시선을 위로 들었다. 이 방에서 처음 변이를 시작했던 군인을 쏘려고 했던 건 맞았다. 그러나 그 군인은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고, 스스로의 힘으로 복도로 나갔다. 그 이후로 석화는 군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이 안에 있던 시체는, 변이된 군인들을 준비실에 가두고 돌아왔을 때 들어와 있던 아담이었다. 전화벨을 계속 준비실로 울리게 놔두었기에 수화기도 책상에 올려둔 상태였다. 석화는 수화기를 타고 울리는 신호음에 반응을 보이는 아담을 가만히 보다가 슬그머니 중장의 방문을 닫았다.
그 기척을 느낀 아담이 뒤를 돌았고, 석화는 눈에 잔뜩 힘을 주어 이마를 향해 발사했다. 학습센터에 있을 때 몇 번이고 모의 사격을 했었지만, 저 혼자서 아담을 상대하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게다가 몇 번 구내식당에서 보았던 군인이었다. 일전에 곽수환이 그랬다. 이들은 다 누군가의 아는 사람들이고 이웃이고 가족이었다고.
그때는 그저 그가 냉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가족을 제 손으로 죽였다던 그가 어느 날 말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아프다고.
중장의 컴퓨터에 컨트롤러 코드로 접속하는 곽수환의 얼굴은 담담했다. 피가 옷 여기저기에 튀어 있었지만 그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석화는 자신보다 몸도 훨씬 크고 강한 곽수환이 왜 안타깝게 느껴지는지 몰라 했다. 저 역시 살기 위해 아담을 죽였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저도 이런데 곽수환은 얼마나 더 많은 자괴감을 가졌을지 가늠하는 것조차 주제넘었다.
이제 저희는 58층에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늘 그래왔듯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소령님. 아까 전에 제가 세컨드 마스터에게 연락을 했는데, 최호언이 받았어요.”
설마 최호언이 우도까지 간 건가 싶은 표정이었기에 석화가 서둘러 말을 더했다.
“해킹이라는 말도 운운했는데, 아마도 세컨드 마스터 이야기인 것 같아요. 세컨드에게 걸었던 전화가 최호언에게 돌려지더라고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최 박사는 혁명이나 개혁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아요.”
“내 생각도 그래. 그 새끼 무슨 매드 사이언티스트야? 신인류로 세상을 재구성하기라도 한대? 마더, 컨트롤러 권한 접근을 허가하도록.”
곽수환이 빈정거림을 숨기지 않으면서 용건까지 막힘없이 내뱉었다.
[허가합니다. 컨트롤 타워에서 전체 알림이 내려왔습니다.]
컨트롤 타워라 함은 퍼스트 마스터와 세컨드 마스터, 조언가를 뜻했다.
석화도 곽수환의 옆으로 다가가 마더의 말을 경청했다.
[군인들의 살신성인과 뛰어난 위기대응 능력을 갖춘 상부의 노력으로 에덴동산이 살포한 아담 바이러스는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에덴동산의 백신은 앞서 경고했듯 레인보우 시티를 괴멸시키기 위한 아담 바이러스가 내포되어 있었다. 백신을 투여 받은 자에게도 해결책이 있으니 군인에게 자진 신고를 하도록 한다. 앞으로 3일 안으로 아담 소탕이 완료될 것이며, 자택에서 피신 중인 시민들은 방역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도록 한다.]
석화는 흐린 눈을 하고 입술을 벌렸다. 곽수환은 한 번 헛웃음을 흘린 게 다였다.
“상부도 기생충과 바이러스 사이에 작용이 있었다는 건 눈치챘나 봐요.”
아마도 세컨드 마스터가 가장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싶기는 했다.
[컨트롤러 접속 시,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곽수환은 전달 사항을 열람했다.
[29 그린 구역 생존자인 오산 쉘터 대위가 바이러스 감염 경로 없이 아담으로 변이, 현장 사살함. 15 인디고 생존자 2인 아담으로 변이, 현장 사살함. 모두 에덴동산의 첩자로 확인. 또한 아담이 발생한 격리실에 모여 있는 시민은 전원 사살함. 여의도 쉘터 역시 생존자들 중 아담 감염 증세를 보이는 자가 있으면 즉시 사살하도록 한다. 이 전달사항을 마지막으로 곽수환의 컨트롤러 직위는 해제한다.]
마더의 목소리에 감정 따위는 담겨있지 않았다. 석화는 놀란 채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컨트롤러 직위가 박탈됐다는 건 퍼스트와 세컨드 마스터가 모두 동의했다는 말이었다.
퍼스트는 아마도 곽수환이 세컨드를 만나고 온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뒤통수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해 직위를 해제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새끼들 그냥 다 뒈지라고 하고, 우리 둘이 어디 도망가서 살까?”
달콤했다. 석화라고 해서 흔들리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그와 몰래 어느 섬이라도 들어가서 살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혹시 자신이 먼저 죽는다면?
그럼 곽수환은 완전히 홀로 남을 테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령님…….”
[마지막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마더가 석화의 말을 끊다시피 했다. 곽수환이 확인을 눌렀음에도 빈 창만 떠올랐다.
[암호를 입력해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컨트롤러 코드 넘버나 암호로 유추될 만한 숫자나 글을 적어 넣었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마지막 전달 사항을 남긴 사람을 확인할 수 있나?”
[가능합니다.]
“말해봐.”
[세컨드 마스터입니다.]
곽수환은 불안한 눈을 한 석화를 중장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영감이 왜 암호를 걸어놨을까?”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나 봐요.”
컨트롤러 직위까지 해제한 마당에 전달할 게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곽수환은 되는대로 아무거나 키보드를 두드렸다. 에덴동산, 서펀트, 비손, 티그리스 등등 이것저것 막힘없이 쳐보다가 설마 이거겠어? 하고 암호를 입력한 때였다.
[암호 확인되었습니다. 세컨드 마스터의 음성을 전달합니다.]
의자에 앉아 기운을 비축하던 석화도 눈을 조금 키웠다.
“암호가 뭐였어요?”
“몰라, 이것저것 치다 보니까 열렸어.”
[컨트롤러 직위가 박탈된 점에 대해서 길길이 날뛰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내 말을 끝까지 듣게나.]
세컨드는 저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흥분할 일이 뭐가 있나. 어차피 늦든 빠르든 제 권한을 거둬갈 건 분명했는데 말이다.
[최호언이 퍼스트와 손을 잡은 정황이 있네. 최호언이 아둔한 퍼스트를 이용한 게지. 퍼스트와 조언가들의 반발이 거세 곽수환 자네의 컨트롤러 직위권한을 해제하는 수밖에 없었네. 벌써 천 명이 넘는 시민이 죽어나갔어. 이게 혁명을 말하던 최호언이가 벌인 참사지. 우도에 손발이 묶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정말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뿐일세. 그러니 석화 박사를 내게 보내고, 곽수환 자네는 여의도 쉘터를 사수하기를 바라네.]
전언이 끝나고 곽수환의 컨트롤러 직위가 해제되며 연결도 끊겼다. 곽수환은 하루 만에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은 석화를 눈에 담았다. 아무런 고생 없이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석화에게는 있었다.
“진짜 우도 가서 살래? 거기 사람들 봤잖아. 엄청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거.”
“곽 소령님 없으면 싫어요.”
곽수환이 손을 뻗어 석화의 몸을 제 쪽으로 끌어 올렸다. 그가 어리광을 부리듯 석화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그 말 듣고 싶어서 일부러 빈말 해봤어.”
석화는 두 다리를 벌리고 그의 허벅다리 위에 올라탄 꼴이 됐다. 석화는 거부하지 않고 곽수환의 등에 손을 감았다.
“자기, 나 믿어?”
“믿어요.”
싫다, 아프다, 부정적인 말도 잘 내뱉지만 그만큼 긍정적인 말도 마찬가지였다. 고민 없이 확답을 주는 석화가 얼마나 제게 안정감을 주는지 석화는 모를 거다.
곽수환이 석화의 뒷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쌌다. 이럴 상황은 아니라는 듯 약간 곤란해 보이는 석화의 입술을 쪽 빨아들이고 혀를 안으로 미끄러뜨렸다. 석화는 입술을 슬쩍 벌렸다. 그의 등에 달라붙은 셔츠를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입술의 움직임을 부지런히 따라갔다. 그가 입 안을 거세게 빨아들이고 떼어내자 석화의 혀가 아랫입술에 걸쳐 나와 버렸다.
혀 아래쪽이 아릿아릿해 제자리로 넣으려는데, 말캉거리는 혀를 한껏 깨문 곽수환이 다시 입술을 깊숙이 탐했다. 가슴을 손으로 만지작거려 기어코 젖꼭지까지 찾아내 주욱 잡아당겼다. 흣, 하고 석화가 몸을 움츠렸다.
하아, 젖꼭지가 잡힌 채로 입술을 떼어냈다. 양쪽 젖꼭지를 잡아당긴 채 손으로 굴리는 곽수환 때문에 달뜬 숨만 내뱉어야했다.
곽수환은 자석처럼 자꾸 석화의 몸에 달라붙으려는 제 본능에 혀를 찼다. 책상에 눕혀놓고 질펀하게 뒹굴고 싶은 사람 마음은 모르는지 석화는 얌전히 가슴을 내어주고 있었다. 마치 더 만져달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석 박사 빨고 싶은 거 꾹 참고 있거든.”
안 그래도 침이 고여 젖꼭지가 퉁퉁 부르틀 때까지 물고 빨고 싶었다. 곽수환은 대신 입술을 맞추고는 석화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일단은 여기부터 탈출하자.”
석화는 대답 없이 고개로만 대답했다. 몽롱하게도 야릇함이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유두에 감각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솜씨 좋게 그에게 잡힌 뒤로는 셔츠가 스쳐도 저릿저릿했다. 그 바람에 더 딱딱하게 솟고 있는 듯했다. 석화는 뾰족하게 솟은 것을 가라앉히려는 듯 손으로 제 가슴을 비비며 마사지했다.
중장의 옷장을 열던 곽수환이 석화를 바라봤다. 사람을 나무라는 듯한 시선이었기에 석화는 사실을 고했다.
“젖꼭지가 서서 쓸려요.”
“석 박사, 젖꼭지가 뭐야.”
곽수환이 제 인내심 박살내지 말라는 듯 말했다.
“유두요.”
석화의 솔직한 화법을 막을 재간은 없기에 짧게 웃고만 말았다.
그는 피가 묻은 셔츠를 벗고, 중장의 옷장에서 이동하기 편한 일상복을 꺼냈다. 한쪽 바닥에 놓여 있는 비상용 배낭을 휙 들어 올리니 이 정도는 석화도 충분히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통통한 배낭을 들고 가 석화에게 메게 했다.
“무거워?”
“들 만해요.”
안에는 물통 몇 개와 응급처치 약품들 그리고 전투식량이 들어 있었다. 아담이 뒤에서 공격을 해와도 배낭이 방패 역할을 해줄 테니 일거양득이었다.
배낭을 다시 끌어내린 곽수환은 중장의 두꺼운 코트를 꺼내 석화에게 입혔다. 봄은 멀지 않았건만 추위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권총 두 자루를 석화의 주머니에 넣어두고 이번에는 저 자신의 몸을 무장했다.
석화는 서둘러 나갈 준비를 하는 곽수환을 보다가 제 손목에 테이프를 두르기 시작했다. 중장의 두꺼운 코트 덕분에 팔꿈치 밑 부분까지 그럴싸한 방어막을 만들 수 있었다. 곽수환은 검은색 하의에 마찬가지로 어두운 색 재킷을 마저 걸친 채였다.
“학습센터에서 알려준 거야?”
테이프를 두른 두 팔은 그야말로 둔해 보였다.
“학습센터는 이런 거 안 알려줘요.”
곽수환은 잘했다는 듯이 석화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다시 배낭을 메준 그는 테이프로 감긴 석화의 두 팔을 가져와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팔에 상처는 어때?”
“괜찮아요.”
그럼 됐다며 곽수환이 보일 듯 말 듯이 고개를 끄덕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봤자 여의도 방공호로 이동하게 될 텐데, 컨트롤러 직위도 박탈됐으니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이번에는 석화가 알아들었다는 듯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비상구를 통해서 위가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 거야. 58층에서 1층까지 돌파할 거니까 많이 힘들 테고.”
“전부 잠겼잖아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하고 48층만 폐쇄됐을 테니, 나머지는 비상구 이용이 가능해.”
말이 58층이지 1층까지의 여정은 족히 하루가 넘을 수도 있고, 그사이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소령님, 쉘터 내에 낙하산 있죠?”
곽수환이 눈 한쪽을 살짝 찡그렸다.
“있긴 하지.”
“차라리 뛰어내려요.”
곽수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과연 석화가 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1층까지 뚫고 내려가는 게 더 위험해요.”
쉘터 내에 구비되어 있는 낙하산은 1인용으로 곽수환이 석화를 안고 뛰어내리기란 무리였다. 제주도에서 이채윤과 같이 뛰어내릴 수 있었던 건 낙하산이 수용할 수 있는 무게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1층까지 내가 뚫고 갈게.”
“할 수 있어요, 저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석화는 현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제아무리 곽수환이라고 한들 숫자도 가늠되지 않는 아담을 헤치고 무사히 내려갈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게다가 1층까지 따라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일 테니까.
“준비실에 아담은 몇 명이나 가둬놨어?”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다섯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강당이 제일 많아요.”
다행히 철로 된 강당문은 아담의 힘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준비실은 나무문이지만 양문형이어서 석화는 밧줄을 이용해 문고리 두 개를 묶어 놨었다.
“내가 신호할 때까지 문 열지 말고 기다려.”
도와줄게요,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가 혼자 준비실에 가게 놔두는 게 외려 도와주는 일이었다. 석화는 테이프를 가져와 곽수환의 팔에 칭칭 둘러멨다.
“난 이런 거 안 해도 돼.”
“혹시 모르잖아요.”
“모양 안 사는데.”
“목숨이 더 중요해요.”
“알았어, 석화 형.”
곽수환의 팔에 테이프를 감는 석화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양쪽 다 마무리를 지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테이프를 다 쓸 때까지 감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석화는 곽수환이 말하는 석 박사라든지 석화 형이라는 부름이 좋았다. 또 어떨 때는 석화야, 하고 부르기도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간 모두가 자신을 석 박사 혹은 석화 박사라고 불렀고, 학습센터에서조차 제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줬던 이는 없었다. 곽수환이 감정을 담아 이름을 불러주니 석화는 자신의 존재가 특별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도 그랬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꽃이 되어서 제 품에 왔다고.
“수환아.”
석화는 다 쓴 테이프를 내려두었다.
덤덤한 석화와는 다르게 곽수환만 놀란 눈을 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그런 의문이 섞인 눈이었다.
“곽수환.”
석화는 저의 부름이 그에게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갔으면 했기에 말에 마음을 담았다.
“무사히 와요. 그리고 같이 여기서 나가요.”
그는 전에 없이 가슴이 지끈했다. 아, 젠장. 곽수환이 고개를 푹 숙이면서 나직한 욕설을 터뜨렸다.
“감탄사인 거 알지? 다음에는 좀 여유 있을 때 불러줘.”
곽수환이 쪽, 석화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문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문고리를 쥐고는 다시 석화를 돌아봤다.
“술이 식기 전에 다녀올게.”
“술이요?”
“그런 게 있어.”
문을 열고 나간 곽수환의 귀 끝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석 박사 솔직함에 충분히 면역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바로 비면역자였다. 그는 애꿎게 귀만 손으로 꾹 누르고는 준비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깜빡깜빡, 기어코 복도 천장의 전등이 나가고 바닥에 비상전력이 들어왔다. 그마저도 달려 나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할 뿐 시야확보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필 손전등도 없어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곽수환은 준비실 문 앞에 서서 석화가 묶어둔 밧줄을 손으로 쓱 훑었다. 급한 와중에도 꼼꼼하게 묶어두어서 풀기에 애를 먹을 게 분명했다.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밧줄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 덜컹거리는 소리에 문에 몸을 부딪쳐오는 놈들이 문을 뒤흔들었다. 곽수환은 밧줄을 절반쯤 잘라내고는 뒤로 재빠르게 물러섰다. 바닥의 비상 조명이 들어오는 곳까지 이동해 총을 겨눴다.
콰직, 콰지직, 나무가 갈라지는 괴이한 소리와 함께 밧줄이 끊어져 나갔고, 문이 거칠게 열렸다.
바닥의 빛을 길 삼아 달려드는 놈들의 머리를 총탄이 관통했다. 움직임이 불규칙한 몇 놈은 다리를 쏴서 자빠뜨렸고, 그 틈을 타 어둠을 질러온 한 놈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곽수환이 일부러 놈의 입에 제 팔을 물렸다. 그 상태로 나머지 놈들의 머리를 가격했다. 팔을 문 놈의 머리채를 쥐고 떼어내 이마에 구멍을 냈더니 후두둑, 피와 뇌수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여섯이잖아, 석 박사.”
곽수환은 탄환을 다시 채우면서 권총을 재장전했다. 준비실에는 놈들이 토해놓은 피로 비린내가 짙었다. 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 손전등부터 찾아내고 내부를 비췄다. 배낭형 낙하산은 한쪽에 놓인 관물대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재빨리 낙하산 두 개와 아날로그 방식의 군용 무전기, 수류탄을 챙겨서 도로 밖으로 나왔다. 복도의 불빛을 지표삼아 석화에게 달려갔다. 이 소란에 저 뒤편 강당 문이 덜컹거렸지만 듣기 불편한 소음만 자아낼 뿐이었다.
곽수환이 이연태 중장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야.”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석화가 문을 열었다. 곽수환은 씩 웃으면서 낙하산과 무전기 함을 들어 보였다. 중장의 방은 다행히 불이 훤히 들어와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곽수환은 석화에게 낙하산 사용법을 재차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주도로 향하는 헬기를 타기 전에 들었던 내용이지만, 석화도 다시 한번 머리에 되새겼다.
어느 정도 위치에서 낙하산을 펼쳐야 하는지, 줄이 엉킬 경우에는 훅 나이프를 이용해 잘라내야 한다든지, 이론은 확실했다. 낙하산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0.1퍼센트의 위험에도 대비해야 했다.
석화가 낙하산 배낭을 메니, 곽수환이 허리와 다리에 하네스를 단단하게 고정해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낙하산을 등에 멨다.
“여기서 강당이 있는 복도로 갈 거야. 그 방향에서 뛰어내려야 앞에 장애물이 없거든. 밑에 주차장을 향해서 방향을 조정해. 알겠지?”
“네.”
“무서워도 잘 뛰어내려야 해. 주저하면 오히려 더 위험해져.”
“알고 있어요.”
“그냥 1층까지 정면 돌파 하는 게 어때?”
어째 석화보다 곽수환이 더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석화는 비상식량이 담긴 배낭을 앞으로 멨다.
“가요. 근데 창은 어떻게 해요?”
“방탄유리도 기관총으로 갈기면 깨져.”
“기관총 있어요?”
“응, 아마.”
곽수환이 이연태 중장의 옷장을 열어 서랍에 있던 장갑을 꺼내 꼈다. 이어 주먹을 쥐고 나무로 된 옷장 벽을 깨부쉈다. 부서진 나무판을 두두둑 뜯어내고는 도로 장갑을 벗었다.
“장군 새끼들은 좋은 걸 이렇게 꼭 자기 방에 꼬불쳐 두거든.”
곽수환이 그 안에서 긴 총구를 잡아 쓱 꺼냈다. Mk3라고 불리는 7.62mm형 기관총이었다. 기관총은 본래 아담이 나타나기 전에도 분대당 약 1대씩 지급됐는데, 이건 세상이 이 꼴이 나기 전부터 나름 신형기종이라 불리던 녀석이었다. 이연태 중장이 어지간히도 아끼고 닦아뒀는지 노인의 제트스키처럼 상태가 제법이었다. 총에 욕심이 없는 곽수환이지만 이건 챙겨가고 싶었다.
“내가 한 말 다 기억하지?”
“걱정 마요.”
석화는 나름 씩씩해 보이도록 문 앞으로 가더니 또 그 앞에서 곽수환을 기다렸다. 아마 석화는 학습센터에 있을 때부터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묵직한 기관총을 어깨에 멘 곽수환이 석화의 손을 잡았다. 문을 열고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다.
코너를 돌아 시체가 늘어져 있는 복도를 죽 걸어갔다. 곽수환과 석화는 저기 복도 앞, 통유리 창문에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섰다.
곽수환이 더 떨어져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Mk3 개머리판을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웠다. 탄환이 촘촘하게 박혀 길게 늘어진 탄띠가 묵직했다. 이 정도면 창은 충분히 깨부술 수 있을 것이다. 투투툭, 통유리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연발로 발사되는 동안 탄피는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에 다시금 뒤쪽 강당의 철문이 덜컹댔다. 석화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유리창을 향했다. 드디어 방탄유리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곽수환은 창을 향해 총알을 난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쾅! 기관총만큼이나 엄청난 굉음이 강당 쪽에서 터졌다. 크어, 크아악. 빠끔히 벌어진 철문을 타고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피로 젖은 수 개의 손이 태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철문 밖으로 튀어나왔다.
혈기왕성한 군인이 변이했기 때문일까, 수도 없이 몸을 부딪쳐온 철문이 기어코 열렸다. 강당 안에 갇혀 있던 아담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소령님!”
뒤돌아보지 않아도 곽수환 또한 사태는 충분히 감지했다. 그는 균열이 가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은 유리를 발로 연거푸 내리쳤다. 그 힘에 유리창이 통째로 뜯어져 까마득한 저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석 박사, 지금이야! 뛰어!”
곽수환은 기관총의 방향을 바꿔 아담을 향해 난사했다. 단 2초만 지나도 남은 탄환은 전부 없어지고 말 상황이었다. 석화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낙화하는 잎처럼 곧장 58층에서 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그가 언제 뛰어내릴까 무사할까 싶어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낙하산을 펼칠 타이밍을 놓치고야 말 것을 알았다.
58층에서 몸을 날리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주 느린 화면처럼 장면이 지나갔다. 저 멀리 아직 빛을 뿜는 건물 몇 채가 보였고, 그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헬기도 눈에 들어왔다.
뇌가 1초 사이에 수백 장의 사진을 찍는 듯 추락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시각 정보가 쏟아졌다. 이걸 주마등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보잘것없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는 게 주마등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아직은 아니다. 석화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공기 저항에 몸이 위로 딸려 올라가면서 낙하산이 완전히 펼쳐졌다.
석화는 위를 보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가 말한 주차장을 향해 양 핸들을 조절했다. 이윽고 바닥에 구르듯이 쓰러졌을 때에야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낙하산 천에 몸이 감겨 있어 시야가 갑갑했다.
석화는 손을 허우적거려 두꺼운 천을 거두고 또 거두어서 훅 나이프로 낙하산과 연결된 끈을 끊어냈다. 상공에는 곽수환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바닥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없었다.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스산한 바람만 건물을 휘감고 있었다. 석화는 두 손을 펼쳐 제 얼굴을 가렸다.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는 흉할 정도로 온 근육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퍽! 석화는 커다란 수박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에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추락해 죽어 있었다. 다시금 고개를 휙 들었다. 곽수환이 낙하산을 펼치는 게 보였다. 그를 따라 뛰어내린 아담 몇몇이 바닥으로 픽픽 떨어져 제 몸을 터뜨려대고 있었다.
석화는 두 팔을 뻗어 곽수환을 받아주고 싶었다. 그런데도 꼼짝없이 굳은 채였고, 곽수환은 이쪽으로 유유히 낙하산을 조종해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가 내려오는 순간이 참으로 더디게 느껴졌다. 석화는 두 눈으로 봤음에도 그가 무사한 게 잘 믿기지 않아 눈도 떼지 않고 그의 궤적을 따랐다.
두 다리를 굴러 땅에 착지한 곽수환은 주저앉아 있는 석화를 보며 씩 웃었다.
“석 박사, 이제 군에 입대해도 되겠어.”
그러나 분명 그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가 낙하산의 날개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을 까봐, 혹시나 바람에 휘말려 자칫 잘못됐을까 봐서.
텅, 터엉! 유리에 충격이 가해지는 파장이 들렸다.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며 여유를 즐길 시간 따위는 없었다. 곽수환은 석화를 확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모양새가 안 좋다던 팔뚝의 테이프를 북북 잡아 뜯었다. 아담이 떨어지는 소리에 몰려든 1층 감염자들이 둘을 발견하고 무리지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석화를 들쳐 메고 지프가 있을 만한 곳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석화는 악귀처럼 달려드는 아담을 바라보며 이제 시티 어디에도 더는 안전한 곳이 없다고 느꼈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표현할 말은 단 하나였다. 정말로 끔찍했다.
석화는 그의 등에 얼굴을 푹 숙인 채 셔츠를 움켜쥐었다. 곽수환이 쉘터를 두른 철조망 밖의 지프를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혀 깨무니까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곧장 앞에 있는 철조망 넘어갈 거야! 내가 뛰어서 위에 붙들면 어떻게든 넘어가, 알았지?!”
동시에 속도를 더 붙인 그가 뛰어올라 상단을 붙들었다.
석화는 그의 어깨를 밟고 올라서 철조망 끝에 몸을 얹었다. 철조망 반대편으로 무사히 기어 내려가는 것을 본 곽수환도 팔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올렸다. 훌쩍 뛰어내린 그는 다시 석화와 함께 지프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석화부터 조수석에 앉히고, 운전석에 올라타 열쇠를 돌리는데 젠장 맞게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엔진은 기운 빠진 노인처럼 희미하게 앓는 소리나 내고 있었다. 분명 문제 있는 차를 누가 버리고 간 게 틀림없었다. 철조망을 무너뜨리고자 몸을 밀어대는 제복차림의 아담이 저 밖에 바글바글했다.
“운전석으로 넘어와. 클러치 밟을 줄 알지? 여기 보면 왼쪽 끝에 있는 거 밟는 거야. 알았지?”
“소령님은요?”
“시동 걸릴 때까지 뒤에서 밀거야. 시동 걸리면 바로 따라잡아서 탈 테니까 절대 브레이크 밟지 마.”
“해볼게요.”
석화는 조수석에서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곽수환은 철조망 쪽을 다시 돌아봤다가 조금 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둔 다음 지프 뒤로 가서 목소리를 키웠다.
“기어 3단 알지?”
“기억해요.”
“기어 3단 놓고, 클러치 밟아! 지금!”
석화가 기어를 3단에 놓고 클러치를 꾹 밟았다. 군용 지프는 수동변속기어 차량이었기에 바퀴의 움직임으로 엔진을 작동시킬 수 있었다. 곽수환이 다리를 앞뒤로 놓고 힘을 주어 지프를 밀기 시작했다. 바퀴가 힘겹게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엔진이 폭발하듯 시동이 걸렸다.
석화는 차가 앞으로 굴러가니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지만 곽수환의 말을 믿었다. 빨리, 빨리 올라타요. 액셀을 밟은 석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턱! 열어둔 조수석의 문을 잡은 그가 그 반동으로 안에 올라탔다. 자리에 앉은 곽수환은 웬일로 후, 하고 들리도록 한숨을 쉬었다.
“누가 그렇게 빨리 가래. 자기, 나 버리고 가는 줄 알았잖아.”
그러면서도 뭐가 웃긴지 몇 번이나 가슴을 울려댔다. 석화는 정면만 본 채 핸들을 쥐고 아담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 어디로 가요?”
“좀 더 가다가 나랑 자리 바꾸자.”
석화는 룸미러로 시선을 들어 뒤를 확인했다. 철조망이 무너졌는지 아담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차의 속도를 이기는 놈들은 없었다.
“레인보우 시티를 벗어날 거야.”
곽수환이 말했다.
***
초창기 아담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무렵, 각 나라들은 주변국들과 연계해 생존루트를 형성하려 했다.
가장 먼저 유럽에서 둠스데이라고 불리는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아직 마비되지 않은 의회를 통해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일도 있었고, 핵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분분하게 오갔다. 그러나 그 어떤 파괴도 바이러스의 전파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둠스데이에 준비되어 있던 나라는 세상을 재건할 핵심 인사들을 추려 프로토콜을 따라 각지의 벙커로 이동시켰다. 그 과정에 아담에 감염되어 사살된 사람도 수많았다. 치우지 못한 채 방치된 시체는 또 다른 전염병을 야기했으며, 몇 개의 국가를 제외하고 대다수 나라는 정부의 기능을 상실했다.
빠른 판단과 대처로 감염의 전파를 막았던 나라들은 대부분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20개의 도시를 전부 지킬 수 없으니, 10개의 도시를 버리고 나머지 지역을 사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대륙이 이어져 있는 지역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곳에 가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생존자들은 망명을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동했으며 그에 아담도 따라붙었다.
군대는 생존자들의 망명을 막으려 애를 썼다. 멀쩡한 사람을 향해 총을 쏘는 일은 정신적, 물리적인 한계가 있었고, 장벽을 세운 것도 아니니 모든 통로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도 없었다.
결국 안전하다 자부했던 국가도 다시금 아담 바이러스가 퍼져 나갔다. 그 모든 게 겨우 3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은 혼란을 막기 위해 연합국이라는 새로운 집합체를 만들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했으며, 아담 바이러스가 완전히 박멸될 때까지 교류는 지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7차 변이 아담이 나오기 전, 석화를 비롯해 타 연구진들은 중국지부와 연락이 닿았었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는 고립되다시피 했지만 사실 그 전에도 교류가 활발하지는 않았다.
연합국이라는 게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고, 과연 멀쩡한 기능을 하는 걸까 의구심 정도는 생겼다. 제아무리 아담 바이러스가 속수무책으로 변이했다고 하지만, 생존해있는 연합국의 연구자들은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아담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워진 나라들은 다시 그들끼리 나라를 재건 중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구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었으니 재건까지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테니 말이다. 통제되고 억압을 일삼는 레인보우 시티를 벗어나면 유토피아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려서 걷자. 거의 다 왔어.”
곽수환은 버려진 차들로 빼곡하게 막힌 도로를 턱짓했다. 석화는 뒷좌석에 놓아둔 배낭을 어깨에 멨다. 다행히 식량은 여유가 있었다.
그는 차량의 배터리를 분리해 석화가 멘 배낭을 제가 다시 가져갔다. 기운이 다 빠진 석화를 보니 지금 제 판단이 과연 맞는 것일까 싶었다. 이제라도 석화를 우도에 데려다놔야 하는 건가. 벌써 두 번이나 이런 식으로 길이 막혀 차도 몇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괜찮아요.”
곽수환의 시선을 느낀 석화는 그의 손을 잡았다. 위로 올라가는 동안 레인보우 시티의 지역이 아닌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거나 곳곳에 생존자들이 살고 있었다. 다만 그들도 부락을 이루거나 모여 살지 않았다. 적자생존 방식으로 살아남았기에 행색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약탈을 일삼는 무리도 있었으나 총기를 소유하고 있는 둘에게 섣불리 덤벼드는 자는 거의 없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는 걸음이 더딘 석화를 등에 업고 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질러 나갔다.
시티에 해당되지 않는 윗 지역에 해남처럼 꾸려놓은 비밀기지가 있었다. 다른 군인보다 행동반경이 자유로운 컨트롤러였기에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차곡차곡 일을 진행시켰었다. 21 바이올렛 구역에 있던 소대와 차 중령 또한 그 진행과정 안에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니 세컨드의 눈 밖에 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밖에.
도로가 뚫리기 시작한 지점이 보이자 곽수환은 나름 상태가 나쁘지 않은 차를 선택해 배터리를 갈아 끼웠다. 조수석에 앉은 석화는 배낭을 안은 채로 눈을 감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괴롭혔지만 지금은 휴식이 더 먼저였다. 운전대를 쥔 곽수환이 시동을 걸고는 속도를 천천히 올려 차를 길들였다. 라디오 주파수도 조정해봤지만 잡음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레인보우 시티를 벗어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석화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중국 지부와 접선해 치료제를 만들려는 목적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력을 형성하려면 마더나 군의 감시가 없는 시티 밖이 용이했다.
연합국들의 조약에 따라 평소 중국으로 가는 길은 철저하게 막혀 있었다. 지금은 군 전력이 에덴동산 사태로 시티 중심에 거의 집결하다시피 해 통제를 피할 수 있었다.
“소령님.”
슬며시 눈을 뜬 석화가 그를 불렀다.
“응?”
“중국 지부로 가면 괜찮을까요?”
우리를 받아줄까요?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연합국에게 레인보우 시티의 상황은 전해야 하지 않겠어?”
연합국이 멀쩡하게 존재한다면 말이지.
석화도 말뜻에 숨겨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제가 우도를 선택하지 않은 이상 레인보우 시티에 있을 수 없을 테고, 곽수환은 상부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소령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치료제고 뭐고 다 버리고, 우리 둘이 떠나서 살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데.”
“우리 둘만 살 수는 없어요.”
“왜 없어.”
강경한 석화의 어조에 곽수환이 투덜거렸다.
“이 소령님, 양 소령님뿐만 아니라……. 곽 소령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리고 봤잖아요.”
석화는 목이 막히는지 남은 물을 아껴서 마셨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회피하는 건 안 돼요.”
죄 없는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여태 모두가 상부에게 놀아난 셈이니 레인보우 시티의 수뇌부들은 어떤 식으로든 단죄를 받고 물러나야 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담 바이러스가 되어서도 안 됐다.
곽수환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무기력하고 힘없어 보이는 석화였지만 오양석 박사의 사건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했다. 또한 학습센터에서 세뇌를 당했음에도 상부에 의구심을 가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석화는 시티에서 말하는 반군 기질이 투철한 편이었다.
석화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어 피로함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탓에 우리 둘만 있으니 한판 뜨고 가자는 말은 쏙 들어갔다. 뭐, 사실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지만.
근 몇 시간을 달려 목적지를 향하던 곽수환은, 어느 순간 차를 멈춰 세웠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빤히 바라봤다. 옛 지명으로 신의주라 불리던 이곳은 연합국에서 출입을 전면금지한 곳이기도 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곽수환의 눈이 서늘했다. 반도와 중국 대륙을 잇는 단 하나의 철교인 조중우의교가 끊겨 있었다.
아담 사태이후 폭발로 끊겼던 다리를 우리와 중국이 연합국에 포함되면서 다시 재건했다고 들은 바 있었다. 마더의 역사교육 방송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기도 한 내용이었다.
곽수환은 핸들에 팔을 기대고 목을 울렸다. 나직하지만 음산한 웃음소리에 자고 있던 석화도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다.
석화는 흐린 눈을 끔뻑이면서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을 같이 바라봤다. 시야가 차차 맑아지니 저기 끊긴 철교가 보였다. 마치 한강 철교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메마른 덩굴들만 뒤엉켜있었다.
“중국 지부와 연락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
“……네.”
“그들을 직접 본 적은?”
“……없어요.”
강 건너 저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폭파되어 무너진 상태로 방치된 채였다. 어쩌면 그 너머는 안전할지도 모르지만…….
“석 박사가 연락하던 연구원들이, 정말 중국 지부 사람이었을까?”
곽수환이 석화를 돌아보았다. 석화의 눈꺼풀이 한 차례 경련하듯 떨렸다. 이 광경을 보아하니 이제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레인보우 시티는 연합국에 속해있지 않거나, 연합국이 무너졌거나 둘 중 하나라는 사실만 확실해졌을 뿐이었다.
[Restricted area - Rainbow City Autonomy]
출입금지 - 자치정부 레인보우 시티
낡고 조악한 표지판이 철교의 입구에서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