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city (2)
덜컹, 방지턱에 지프가 흔들리자 석화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걱정 마, 이 정도로는 안 터져.”
지프가 덜컹거릴 때마다 다이너마이트도 달그락거렸다.
“빵!”
곽수환이 한 손을 펼쳐서 석화의 얼굴에 들이댔다. 정말 놀랐는지 석화가 꼼짝없이 굳어 있었다. 차라리 핀잔이라도 주지, 이런 반응이면 괜히 미안해진다. 곽수환은 뒷머리를 감싸서 제 쪽으로 끌어와 입술을 쪽 맞췄다.
“그냥 뽀뽀하자는 신호였어.”
민망하지도 않은지 당당히 말하고는 다시 속도를 올렸다. 다시 한번 덜컹 하는 순간에 이번에는 석화가 손을 가져다 펼쳤다.
“빵.”
“뭐야, 불발탄이야?”
그래도 뽀뽀 신호가 왔으니 한 번 더 해야지. 룸미러를 봤다가 석화를 끌어안아 입술을 맞추는 그때였다. 빠아앙- 경적소리가 거세게 났다. 옆 차선으로 질러나가는 또 다른 지프 안에서 부하가 소리쳤다.
“대장! 저기 한 놈 있는데 준비할까요?”
“어, 시작해.”
추월해 나간 지프 앞에는 변이한 지 꽤 오래돼 보이는 아담이 있었다. 달려드는 차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담을 지프로 처박았다. 뒤따라오는 나머지 지프도 점차 속도를 줄였고, 선두에 선 부하가 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부패한 내장에서 풍기는 악취는 마스크를 뚫을 정도로 고약했다. 부하는 다리가 뒤틀린 아담을 포박해 입에 수건까지 물렸다. 이빨도 다 빠진 터라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위험에 대비하는 건 몸에 밴 습관이었다.
“미안하게 됐수다. 할 거 다 하면 편히 보내줄 테니 좀 참으쇼.”
부하는 곰 같은 손으로 아담을 잡아 올려 트렁크에 고정시켰다. 두 팔을 핸들에 기댄 곽수환은 정면을 향한 채로 물었다.
“꼭 이래야겠어?”
“전 괜찮아요.”
석화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곽수환은 뭔가 달리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준비가 다 됐다는 신호를 받자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들의 목적지는 에덴동산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차 중령이 체크한 바에 따르면 여기서 약 30km 떨어진 지역에 에덴동산 북부 지부가 있었다.
도로를 달리며 심심치 않게 아담을 볼 수 있었지만, 힘이 없거나 육신이 썩은 변이체들이 대부분이었다. 바닥을 기는 아담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갓 변이한 아담은 두려운 존재였으나 썩어버린 아담은 세 살배기 아이만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안일하게 대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돌팔매질에 튄 아담의 피가 상처에 닿는 경우도 있었다. 감염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경로로 퍼져나가고는 했으니까.
[레인보우 시민 등록 허가 기간, 시민 등록세 1그린 소지자에 한함.]
약 10km 거리마다 매달린 현수막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다.
최호언은 시티 바깥 사람들까지 흡수해 지지율을 올렸지만, 시티의 돈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밖에서도 유산계급에 속했다. 결국 마스터가 바뀌었어도 누구나 시민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석화는 점차 가까워지는 현수막을 올려다보다가 지프가 그 밑을 지나가자 시선을 내렸다. 허벅지 옆에 놓아두었던 돌을 쥔 채 보조 서랍을 열었다.
두 번 다시 못 볼 돌이라고 생각했는데 차 중령이 챙겨준 덕분에 제 손에 돌아왔다. 곽수환의 부대원들은 대장인 그를 닮아서 그런지 그간 봐왔던 군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거들먹거리지도, 약한 자신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결정적으로는 저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괜히 말이라도 붙였다가는 곽수환의 살기 어린 눈빛이 내리꽂힌다는 이유는 있었지만 말이다.
석화는 그의 수첩과 큐브 옆에 얌전히 돌을 뉘려다가 멈칫했다.
곽수환.
이름 석 자가 수첩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 안에 그가 글씨를 연습한 흔적과 한 장의 메모지가 있던 것을 기억했다. 두 글자에 서린 염원 또한 여전히 석화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석화는 보고도 보지 못한 척 조심스럽게 배낭 안에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레인보우 시티 핵심 지구에 들어서기 전이었다. 산으로 이동한 바이올렛 대원들은 풀과 나뭇가지로 지프를 감싸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티의 군인과 얽힐 수가 있기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대장, 여기서 10시 방향으로 쭉 내려가면 산장이 나옵니다.”
컨트롤러였던 곽수환은 지역마다 포인트를 하나씩 두어 무기나 차량을 가져다 두고는 했었다.
“내부는 확인해봤어?”
“예, 대장과 접선하기 전에 확인해봤는데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문길이는 나 따라오고, 석 박사도 제복으로 갈아입자. 나머지는 얼굴 팔린 놈들 많으니 여기서 대기해.”
곽수환의 부름에 러시아 곰만 한 사내가 포박한 아담을 끌고 나왔다.
곽수환은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버리고 준비해 둔 레인보우 시티의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문길도 오랜만에 입는 제복에 혀를 찼다. 생긴 것만 그럴싸하지 치렁치렁한 케이프 때문에 실용적이지도 못했다. 그래도 십 수 년간 입던 옷이기에 옷매무새를 다듬는 손길은 막힘이 없었다.
불행 중 다행히 곰 같은 근육을 자랑하는 군인을 위한 사이즈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석화에게 맞는 것도 있었다. 석화는 어디에 끈을 매야 하는지 헤매는 중이었다.
“내가 해줄게.”
곽수환은 크로스 벨트와 가죽 끈을 교차해 둘러주면서 허리 벨트는 당겨 고정했다. 이어 석화의 머리를 쓱쓱 손으로 헤쳐 정리했다. 제복을 입고 있는 석화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하얀 가운이 더 익숙해서 그런가. 그래도 잘 어울리네.’
그런 마음과는 반대로 석화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제복 차림에 또다시 미안한 눈을 했다. 그는 일부러 웃기만 했다.
이동할 채비를 마치고 나니 부대원들이 앞에서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다.
“좋아. 니들은 지금부터 24시간 이내로 내가 복귀하지 않으면 다시 위로 올라가. 거기서 일주일 이상 연락 받지 못하면 차 중령, 네가 알아서 애들 정리해주고.”
“예, 명령 하달 받았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남은 녀석들에게 돈을 나눠주라던 곽수환의 명령은 아직 유효했다.
컨트롤러였을 때 받았던 활동비는 턱없이 적었지만, 윗대가리 놈들의 구린 주머니를 털어서 모아둔 돈이 상당했다. 추운 날에는 지폐를 땔감 삼아도 되겠다면서 차 중령이 우스갯소리를 내뱉을 정도였다. 물론 그마저도 최호언이 지폐개혁을 해버리면 쓸모없는 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닛에 올라타 있던 곽수환은 명령을 마친 뒤 훌쩍 뛰어내렸다.
“시간 잘 세.”
배낭도 챙기고는 차 중령에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동안 문길은 포박한 아담을 비닐 시트로 돌돌 말았다. 이도 없고, 손가락도 다 썩어문드러진 아담이었지만 업었을 때 풍기는 악취가 문제였다. 그나마 살점은 거의 다 썩어 들어간 터라 무게는 제법 가벼웠다. 문길은 노끈으로 비닐을 묶고 제 등에 아담을 멨다. 곽수환은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나서야 가자면서 문길의 종아리를 툭 쳤다.
석화는 그중 가벼운 배낭을 들었는데, 곽수환이 대신 들어준다고 채 가버렸다. 앞으로 갈 길이 멀기에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려면 쓸데없는 고집은 버려야 했다. 그래서 석화는 고맙다는 말만 하고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혹한의 러시아에서 모든 짐을 메고 걷던 곽수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돌이켜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저희들은 이렇게 무사히 레인보우 시티로 돌아왔다. 종이의 염원처럼 자신들은 아직 살아있었다.
곽수환은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남은 부대원들은 지프가 지나온 바퀴 자국을 지우는 작업에 들어갔고, 셋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원래는 등산로로 이용됐던 곳이지만, 식물이 땅의 주인이 되어 사람의 앞길을 막았다. 앞장선 문길이 우거진 풀숲에 정글도를 휘두르면서 길을 텄다. 아담의 머리도 단박에 날릴 수 있는 칼은 사탕수수나 나무줄기를 베는 데도 그만이었다.
“대장, 그냥 지프 타고 도로로 가면 안 됩니까?”
문길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라면서 나뭇가지를 휙휙 쳐냈다.
“왜, 아예 확성기도 꺼내서 수배범들 돌아왔다고 광고하지?”
서울까지는 거리가 꽤 있기에 군인들이 쫙 깔려 있지는 않겠지만, 도로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것보다 산길을 이용하는 게 더 수월했다.
석화는 가장 꼴찌로 따라가면서 문길이 메고 있는 아담을 몇 번이나 쳐다봤다. 안구도 썩어버렸기에 그 안에서는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 하루 이틀이면 신체의 움직임이 정지될 듯 보였다.
“좀 멀쩡한 걸 구하든가 해야지. 오늘내일하는 새끼를 가져와.”
곽수환도 아담을 보고는 나직하게 욕설을 뱉었다. 차 중령이 말한 산장이 저 밑으로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리막길이 지나치게 가팔랐기에 곽수환은 석화에게 업히라는 신호를 보냈다. 석화가 곽수환의 배낭을 도로 맡고는 제 등에 멨다.
“문길, 달려라.”
“예, 대장.”
문길이 등에 정글도를 확 꽂았다.
꾸에엑……!
그와 동시에 마지막 비명을 지른 아담의 몸이 완전히 늘어졌다. 습관처럼 등의 칼집에 정글도를 꽂으려다가 일어난 참사였다.
“저 병신 새끼.”
곽수환이 석화를 업은 채로 이마를 꾹 눌렀다. 문길도 놀라 얼른 어깨에 묶어둔 노끈을 풀었지만, 이미 아담의 정수리에 정글도가 직격타로 꽂힌 뒤였다.
곽수환은 문길에게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하려다가 생각해보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대, 대장. 뒈졌어도 그냥 업고 갈까요?”
“놔둬. 그냥 가자.”
“소령님.”
석화가 곽수환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그를 불렀다.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석 박사, 그냥 가자고. 거기서 속삭이면 나 못 달려.”
“크하학, 대장 거시기 선다고요.”
문길이 배를 잡고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문길이 새끼야?”
“아닙니다, 대장! 시정하겠습니다!”
곰이 낄낄거리는 것 같은 모양새로 배를 두드리던 문길도 곧 정색하고 정글도를 잡아 뺐다. 걸쭉한 피를 털어내어 칼집에 제대로 꽂았다.
“달려.”
곽수환이 군화 앞코로 돌을 툭 쳐서 문길의 다리를 맞혔다.
신호를 받은 문길이 내리막길을 구르듯이 달리기 시작했고, 곽수환도 중간중간 박힌 돌을 브레이크 삼아 누르며 산장까지 이동했다. 석화는 혀라도 깨물까 이를 가볍게 물고 곽수환만 꽉 감쌌다. 혹시 이 산 어딘가에 다른 아담이 있나 동공도 부지런히 굴렸지만, 이런 곳에 뚝 떨어진 아담이 있을 리가 없었다.
멀리서 볼 때는 티가 잘 안 났는데 산장 근처에 다다르니 산의 일부분처럼 위장해놓은 커버가 보였다. 곽수환이 커버를 벗겨내자 나름 상태가 멀끔한 오토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곽수환은 지체 없이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문길은 정글도를 산장 계단 밑에 숨긴 뒤 마찬가지로 다른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석화가 배낭 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문길에게 내밀었다.
“혹시 검문을 받게 되면 이걸 쓰세요.”
러시아에서 위조해 온 시민증 중 하나였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저 새끼 얼굴하고 완전히 다른데 믿겠어?”
곽수환이 시민증의 얼굴이 저 새끼 반쪽이라면서 손가락질했다.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석화는 그의 뒤에 올라타고 허리를 붙들어 안았다.
“가요.”
신호와 함께 곽수환이 핸들을 틀어쥐었다.
“앞으로 20분, 그 안에 목적지까지 간다.”
문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가 먼저 산장 밑으로 질러 나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수풀이 우거진 길이었지만, 저 멀리로 건물이 하나둘 보이니 확실하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정말로 레인보우 시티에 돌아왔다고.
***
“처음 뵙는 군인분들이신데, 등록은 하셨나요?”
차트를 가슴에 품고 있는 여성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녀가 입은 하얀 사제복의 가슴팍에는 생명의 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에덴동산 북부 지부이자 기도를 드리는 건물은 제법 눈에 띄는 곳에 있어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내부로 진입하는 일이었다. 기도원은 시티의 제복을 입은 군인 몇몇이 경비인지 감시인지 모를 자세로 주변을 돌아다녔기 때문이었다.
문길이 죽여서 없애자는 소리를 해대자 곽수환이 정강이를 두 번이나 깠다. 놈들의 초소를 급습해 교대하는 놈들을 묶어두고, 문길에게 딱 30분만 버티라는 명령을 내렸다. 분명 30분이면 충분할 터였다.
“저희는 오늘부터 이 지역으로 전출을 나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곽수환이 호감 가는 얼굴로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그렇군요. 그런데 신자 등록은 하셨나요?”
여자도 마찬가지로 좀 전과 같이 미소를 마주했다.
“이건, 아담의 피예요.”
불현듯 석화가 앰플을 하나 들이댄 채로 말했다. 여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 가져왔으니 걱정 마세요.”
석화는 다시 앰플을 제복 주머니에 넣었다. 대체 무슨 의미로 아담의 피 운운한 것인지 몰라 그녀는 경계심 어린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경비라도 부를 심산처럼 보였기에 곽수환이 거리를 좁혔다.
“에덴동산의 장로가 이곳에 있습니까?”
“……장로님이요?”
시티의 군인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으나 이 둘이 진짜 군인일까 의심스러웠다. 전출 예정이 있었다면 미리 이야기를 전달했을 텐데 금시초문이었다.
“장로님이 계시다면 뵙고 싶습니다.”
석화는 정중하지만 확고하게 말을 꺼냈다.
“장로님은 뵙고 싶다고 아무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 말은 지금 이곳에 장로가 없다는 소리도 아니었다. 앞으로 25분, 한가하게 대응할 여유는 없다.
“상부에서 내려온 전언이 있으니 그것만 전달하고 가겠습니다.”
“그럼 저에게 말씀하세요.”
“그쪽이 뭔데.”
곽수환이 위협적으로 여자를 내려다봤다. 권력의 주축이 되는 시티의 군인에게 감히 맞서지 말라는 이야기는 세 살짜리 아이들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 알고 있었다.
“저는 이 북부지부를 책임지고 있는 인도자예요.”
의심만으로 군인에게 맞설 자신은 없었기에 여자는 조금 누그러진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장로님은 지금 출타중이세요.”
“그럼 전달할 것만 전하고 갈 테니 안으로 들어갑시다.”
“뭘 전달하시려고요?”
“인도자라고 했나? 군에 뒷배라도 있어?”
“그게……. 다짜고짜 연락도 없이 오셨으니…….”
연락? 곽수환이 황당하다는 듯 짧게 웃었다.
“시티에서 지원을 해준다고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지.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하는 건 그쪽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뿐이야. 내가 되지도 않는 예의 차리고 있을 때 그냥 알아들으셨으면 얼마나 좋아. 북부지부? 한 시간 만에 잿더미로 만들어줄까?”
곽수환이 자신의 견장을 가리켰다. 길 가던 사람을 잡아가 없던 죄도 만들어 낼 기세였다. 석화는 불한당처럼 구는 곽수환이 낯설었지만 그저 연기겠거니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인도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사색이 된 여자가 길을 터주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곽수환이 석화를 보더니 마치 ‘다 연기인 거 알지?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석화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긴 복도의 벽에는 붉은 손바닥자국과 핏자국이 빼곡했다. 이어 피웅덩이 속에서 절규하는 아담의 괴이쩍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좀 더 걸어갈수록 핏빛은 옅어지고 환한 배경이 드러났다. 그곳부터는 아담들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이 보였으며, 아담이 손을 뻗는 저 환한 빛 앞에는 다섯 사람이 서 있었다.
벽화를 보던 곽수환과 석화는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인도자가 뒤를 돌았다. 벽화에 시선을 빼앗긴 둘에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되돌아왔다.
“정말로 성스럽죠? 현신한 생명의 나무와 초창기 장로님들이세요. 저기 장로님들이 에덴동산을 설립하신 분들이죠. 휴거에 성공하셨고 은혜를 내리실 때가 되면 다시 지상에 현신하시어 후계자를 선정하신답니다.”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가 의인화된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 얼굴들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돌아가신 뒤로 한 번도 못 뵀는데, 현신까지 하신다고.”
곽수환이 냉소적으로 지껄였다.
장로의 모습은 곽수환의 부모와 석화의 어머니, 그리고 원호 박사와 닮아 있었다.
“네?”
인도자는 무슨 말이냐는 듯 뒤늦게 반문했다. 곽수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다시 앞장서라고 턱짓했다. 인도자는 곽수환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석화를 쳐다봤다. 벽화를 한참이나 바라보는 옆모습이 저 벽화 속 생명의 나무를 고스란히 빼닮아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인도자를 보자마자 곽수환이 혀를 찼다.
“가자고, 석 소령.”
그는 석화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며 인도자보다 더 빠르게 복도를 걸었다. 통로의 끝에는 커다란 홀이 보였고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새로운 가족이 오신 건가요? 시티의 군인이시군요! 정말로 환영합니다.”
바닥에 앉아 기도를 드리던 신자 한 명이 격한 환영을 해왔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 뭐 그런 슬로건을 내세워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 같은데, 가족 행세를 하는 말투가 듣기만 해도 불쾌했다. 곽수환이 다가온 이를 무시하고 단상으로 성큼 뛰어 올라갔다.
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를 쥐고 무심하게 말을 하자 곽수환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석화는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내려 박스 하나를 꺼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만 말하자면, 지금부터 백신을 배포할 겁니다.”
웅성거림이 점차 소란스러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곽수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 수는 스무 명 남짓했고, 하나같이 하얀 옷에 생명의 나무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백신이요? 무슨 백신을 말하는 겁니까?”
나이 지긋한 남자가 손을 들고 외쳤다.
“아담 바이러스 백신입니다.”
반응은 하나같이 다 똑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벌린 입으로는 저마다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때 인도자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백신이요? 저는 들어보지도 못한 일인데요? 정말 시티의 군인이 맞으세요?”
“좋은 일을 한다는데 왜 불신하시나.”
“그럼 일단 마이크부터 주시고, 장로님과 대화를 나누신 뒤에.”
인도자가 곽수환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으려 했지만, 그가 손을 위로 들었다.
“여러분! 확실하지 않은 사실이에요. 이렇게 쉽게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인도자는 마이크를 빼앗지 못하니 목소리를 키워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소동이 벌어지자 지하로 이어져 있는 계단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석화는 그사이 단상으로 올라가 백신 박스를 마이크 지지대가 놓인 탁상에 올려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양일 거예요.”
석화가 사람들을 향해서 말을 했지만, 제대로 들은 이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면서 곽수환에게 따지는 자들과 시티가 드디어 백신 개발에 성공했느냐며 화색을 띠는 자들도 있었다. 위로 올라와 손을 뻗어 백신을 가로채가려는 사람도 있었으며 진짜 군인이냐면서 신분을 확인해달라고 목청을 키우는 사람도 존재했다.
다수가 각자 생각을 가지고 말을 내뱉는 바람에 홀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곽수환은 마이크를 석화의 손에 쥐여주고 총을 꺼내 허공에 발사했다.
탕-! 총성이 메아리가 되어 홀을 울리니 단숨에 고요해졌다.
“이야기해.”
석화는 사람들을 향해 반듯하게 섰다.
“혼란스러우신 마음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백신은 확실합니다. 물론 백신을 투여 받았다고 해서 아담에게 물리는 일을 우습게 보시면 안 됩니다. 독감 백신을 맞았다고 한겨울에 반팔을 입지는 않으니까요. 무조건 조심해야 합니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해본 경험이 없었기에 수많은 시선이 마치 바늘처럼 온몸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백신이 맞는다면 왜 시티의 정규 방송에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죠?”
곽수환이 너 말 잘했다면서 그자를 검지로 가리켰다. 이번엔 곽수환이 마이크를 건네받고 입술에 가져다댔다.
“오는 23일 2시, 우리 위대한 마스터께서 중요한 연설을 한다고 하셨죠.”
그건 라디오를 통해 대대적으로 방송이 됐기에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몇몇이 수긍하자 곽수환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그 연설의 핵심이 바로 아담 바이러스 백신입니다.”
사람들에게서 탄성이 터졌다. 사실 연설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알 바 아니었지만, 백신이 개발됐다는 소문이 퍼지면 최호언도 마냥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시티에서 에덴동산을 국교로 만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죠. 믿음이 훌륭한 여러분께서 가장 먼저 백신을 투여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겁니다.”
당신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그런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니 들뜬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그래도 그 백신이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직접 보여드릴게요.”
석화가 불쑥 끼어들어서 곽수환이 들고 있는 마이크 가까이서 말했다. 곽수환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지만 불안했다. 어째서 석화가 실험체가 되어야 하는지, 믿지 않는 새끼들은 그냥 맞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석화는 싸늘한 기운을 스멀스멀 풍기는 곽수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약속했잖아요.”
“약속은 했지. 그래도 싫어.”
석화는 떼를 쓰는 동생을 달래듯 곽수환의 등을 토닥였다.
“생명의 나무님이다.”
엄마를 따라 에덴동산의 신도가 된 어린아이가 석화를 손으로 가리켰다. 엄마는 무슨 위험한 소리를 하느냐며 아이의 입을 막았지만, 신도들이 모두 들은 뒤였다.
벽화에서 수없이 봐왔고, 또 교리책에 초상화로도 등장하기에 생명의 나무의 생김새는 눈을 감고도 그릴 만큼 선명했다. 그들은 그 모습이 저 앞에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과 심히 닮았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러면서도 그저 닮은 사람일 뿐일 거라며 다들 부정하기 바빴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이 믿는 신이 직접 눈앞에 나타난다면 쉽게 믿지 못할 테니까.
석화는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이번에는 마이크 없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이 백신이 미심쩍겠죠. 쉽게 믿기 힘들다는 건 압니다.”
주머니에서 앰플을 꺼내 보였다.
“아담의 피예요. 아시다시피 아담의 피에 노출되면 시간차를 두고 변하지만, 제 체격 정도면 약 10분 내로 완전히 전이되죠.”
석화는 빈 주사기에 백신 용액을 채웠다. 다짜고짜 제복 소매를 걷어서 백신을 투약했다.
단상 밑에 모인 사람들은 침묵 속에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전 사실 백신을 미리 투여 받았지만, 혹시 믿지 않는 분들이 계실까 봐 주사했어요. 그리고 이제 아담의 피를 투여할 거예요.”
“그게 정말 아담의 피가 맞아요?”
“그러게요. 멀쩡한 혈액을 가져와서 거짓말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니들이 직접 해보든가.”
곽수환은 지금 당장이라도 아담의 피를 입에 처넣을 기세로 험악하게 굴었다. 석화는 그가 왜 화가 났는지 알기에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한 바였다. 아담을 직접 잡아와 확신을 주려던 것뿐인데, 문길이 썩은 아담을 완전히 승천시킨 바람에 바이러스가 심어진 혈액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석화가 또다시 빈 주사기에 혈액을 채우고 숨을 한번 들이켰다. 무사할 것을 알고 있으나 저조차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석화가 바늘을 제 손목에 찔러 넣으려는 때였다.
“하지 마.”
곽수환이 석화를 막았다.
“그냥 내가,”
“안 돼요.”
곽수환의 혈액은 백신으로도 항체가 생성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총 오십 명의 혈액을 제공 받아 백신을 실험했는데, 항체가 생기지 않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곽수환만이 예외였지만, 세상에 그 같은 사람이 또 존재할지도 모르기에 백신을 맞아도 항상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사람은 석화 자신밖에 없었다.
“나 화낼 거예요.”
분명 약속했잖아요. 석화가 곽수환을 올려다봤다. 말과는 달리 화는커녕 미안함에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석화는 그를 바라보면서 주사 바늘을 손목에 찌르고 피스톤을 눌렀다. 그는 석화의 양 팔뚝을 쥔 채로 계속해서 석화를 바라봤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행여 석화가 아담으로 변할까 싶어 뒤로 물러서는 이들도 있었고, 막연한 희망만 갖고 살던 이들은 완벽한 백신이기를 바랐다. 자신들을 구하러 온 생명의 나무가 저 군인이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곽수환은 하얗게 질린 석화에게서 눈도 떼지 않았다.
다 없애 버리고 싶었다. 최호언도, 백신을 믿지 않는 놈들도. 석화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사람들을 구하려 하는지도 곽수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는 해도 석화가 희생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석화 너는 내 건데, 생명의 나무 같은 게 아닌데, 모두의 구원자가 아니라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데……. 곽수환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머리가 열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도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생각했었다. 그냥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면 안 되는 것인지.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우리만 멀리 떠나서 오순도순 살면 안 되는지 말이다.
레인보우 시티를 무너뜨리려 했었지만, 이제는 석화와 자신이 안전한 곳에서 사는 게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수환아……. 나 죽고 나면 어떻게 해. 혼자 남게 되잖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러시아의 밤이었다.
먼저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석화가 혼잣말을 했다. 왜 제가 더 먼저 죽을 것처럼 말하는지 화가 났지만,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좆같게도 그 말이 사실처럼 다가오는 것만 같아서 울 것만 같았다.
십 분이 백 분 같던 시간이 지나고 석화는 마이크를 쥐었다.
“원래는 아담을 붙잡아서 그 피를 사용하려고 했어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런 식으로 보여드리게 됐지만, 믿어주세요. 정말 백신입니다. 물론 안 믿으셔도 좋아요.”
“믿어요.”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앞으로 걸어왔다. 석화는 그 여성을 보자마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분명…….
“돌아오실 거라고, 기적을 행하실 거라고 믿었어요, 저는.”
그녀는 부산의 저택에서 만난 적 있는 에덴동산 신자였다.
“장로님! 대체 뭘 믿고 저 백신을!”
인도자가 막자, 장로라 불린 여자는 강경한 눈을 하고 뒤를 돌았다.
“구원자는 자신이 구원자라 말하지 않는다! 구원자라 사칭하며 우리를 현혹하지 않는다! 저를 부정하는 구원자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나무이니라!”
그녀는 그날과 한 치도 다름없는 말을 하며 사람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쳤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을 거라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굳게 믿었어요.”
그녀는 어서 백신을 놓아달라며 팔을 내밀었다. 장로의 말에 신자들도 저마다 생명의 나무가 맞았다며 석화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환멸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쇼들을 하네. 장로가 죽으라면 자살이라도 할 놈들인가? 불신만 가득해 믿지 않던 자들이 오히려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흡사 기생충 같았다. 석화는 제가 다 놓을 수는 없기에 백신과 함께 새 주사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석화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기 위해 손을 뻗는 자들이 생기자 곽수환이 그 앞을 막고 섰다.
“백신이나 받아가.”
곽수환이 정확히 남은 인원만큼 백신을 내려두고는 석화를 붙들었다.
“가자.”
“어디를 가세요? 저희와 함께하시는 게 아닌가요?”
장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남은 백신을 다른 곳에도 지급하려고 합니다.”
석화의 말에 장로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군요.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담에게서 자유롭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석화가 다급하게 말을 했으나 장로는 흐뭇하게 미소만 지었다.
“가야 돼. 시간 없어.”
“백신은 만병통치약 같은 게 아니에요. 피치 못할 위험에 대비할 뿐입니다.”
호소했지만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한 이들이 과연 있을까 싶었다. 곽수환에게 손목이 붙들려 밖으로 나가는 동안 사람들이 뒤따랐고, 곽수환이 더 따라 나오는 새끼들이 있으면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내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건물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올라타 문길에게 무전을 보냈다.
다시 부대원들에게 합류하기 위해 오토바이의 속도를 올렸다. 석화가 뒤에서 몇 번 그를 불렀으나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몸에 닿는 근육이 평소보다 더 딱딱한 것 같아 엄청나게 화가 나 있다는 것만 알아차렸다. 산길 중턱에서 문길이 합류했는데, 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피가 튀어 있었다. 문길이 다친 것은 아니라 슬슬 다시 출발하려는 때였다.
“……대장.”
“뜸들이지 말고 말해.”
“대장은 알고 계셨습니까?”
“뭘.”
문길이 안 그래도 험악한 인상을 더 일그러뜨렸다. 포효하기 직전의 곰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끼야, 제대로 말 안 해?”
“군인 놈들이 거길 지키고 있는 이유요!”
“1초 준다.”
“대장! 거기에 아담이 있다고요! 그래서 군인들이 지키는 거였다고요! 대장은 알고 계셨어요?”
그릉거리는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다. 곽수환이 시동을 꺼버린 탓이었다.
“뭐?”
“제가 초소에서 제압한 놈들이요. 그놈 중에 한 놈을 제가 아는데, 우리가 아담을 처리하러 온 줄 알았대요. 북부지부에 실험실이 있다고요. 그런데 그 새끼들이 엄청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초소에 있던 놈들은 어쨌어.”
횡설수설하는 문길이 제 셔츠에 묻은 피를 내려다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 개새끼들이 우리도 다 실험체가 될 거라고…….”
결국 다 죽였다는 소리였다.
“대체 왜 실험실이 북부지부에 있는 겁니까? 대장, 놈들이 또 뭔 짓을 벌이는 건데요.”
“넌 석 박사 모시고 애들하고 합류해.”
곽수환이 오토바이에서 내린 뒤 석화를 들어 내렸다.
“소령님은요?”
“내 눈으로 봐야겠어.”
“소령님……!”
버둥거리는 석화를 문길의 뒤에 억지로 앉혔다.
곽수환은 오토바이의 핸들을 쥐고 앞바퀴를 들어 방향을 반대로 바꿨다. 훌쩍 올라타더니 시동을 걸자마자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석화는 꼼짝 없이 그가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만 지켜봐야 했다.
“걱정 마세요, 박사님. 우리 대장 엄청 세잖아요.”
문길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석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보다 엄청 위험했던 일도 많았는데, 늘 대장은 무사했어요. 꽉 잡으세요, 출발할게요.”
석화가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하자 문길은 오토바이를 위로 몰기 시작했다. 석화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문길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순식간에 가버린 곽수환을 붙잡을 수도, 그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었다. 항상 저는 짐이니까.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전 제가 너무 싫어요.”
석화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하핫, 전 박사님 좋아요.”
귀가 밝은 문길이 위로를 해주었지만, 석화는 자꾸만 사라지던 곽수환의 등이 눈에 밟혔다. 문길의 말처럼 무사히 돌아올 거라는 말만 굳게 믿을 뿐이었다.
***
“무슨 일이세, 컥!”
곽수환은 제 앞을 막아선 놈의 멱살을 잡아들어서 던졌다.
그는 재빠르게 제복의 밧줄을 떼어내 북부지부 문을 봉쇄하고, 두 손에 장갑까지 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순간 천장을 향해 총을 발포하자 홍해처럼 주변이 갈라졌다. 곽수환은 아까 봤던 지하로 막힘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케이프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마저도 떼어서 던져버렸다.
지하의 습하고 눅눅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계단 곳곳은 전기 대신 촛대가 불을 밝혔고, 밑으로는 또 다른 홀이 보였다. 장로와 인도자는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돌아오셨군요! 구원자님과 함께 돌아오신 건가요?”
장로는 곽수환을 보더니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한 번 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다만 내려가는 입구가 철창으로 막혀 있었다.
“저 밑은 뭐야.”
장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술만 길게 끌어올렸다.
“죄수들을 가둬둔 감옥이랍니다.”
“니들은 서펀트가 마스터인 거 알고 있지?”
불빛이 일렁거리자 장로의 미소 위에 그림자가 져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전에 어머니께서 그러셨죠. 구원자를 인도해줄 자가 슬프게도 악마가 되어버렸다고요. 당신이 그자인가요?”
곽수환이 장로의 어깨를 밀쳐내고 철창에 달린 자물쇠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그러자 장로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비켜, 아니면 죽는다.”
“서펀트를 방해하지 마세요. 그의 깊은 뜻을 당신같이 하찮은 사람이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구원자가 백신을 창조해냈으니, 이제 남은 건 사람들에게 백신을 퍼뜨리고 에덴동산의 교리를 알리는 일뿐이에요. 모두가 구원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맞아, 그게 당신들이 할 일이지.”
“이해해주시는군요! 이미 남부와 동부로 구원자님의 이야기를 전달했답니다. 이제 백신을 가지고 그쪽으로 이동하시면 되는 거예요.”
“너 인도자라고 했나?”
아무 말도 없이 등 뒤에 서 있기만 하던 인도자가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이 밑에 아담이 있어?”
철창의 자물쇠가 박살나자마자 그 누구보다 큰 동요를 보였던 게 인도자였다.
“넌 장로와는 다르지? 사실 생명의 나무 같은 건 믿지도 않잖아? 그냥 몸 편히 위탁할 곳이 필요해서 믿는 척하는 게 아니고?”
“인도자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누구보다 우리 교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인데 어디서 감히!”
“너도 솔직히 장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생명의 나무 같은 게 어디 있어. 백신을 개발한 건 그냥 아담 바이러스 수석 연구원인데 말이야. 일개 사람이 무슨 구원자야. 만일 최호언이 몰락하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선두에 서있던 너희들부터 무사하지 못할 거야. 곽수환은 흔들리는 인도자에게 쐐기까지 박아줄 생각은 없었다. 장로를 옆으로 밀쳐내고 불빛조차도 들지 않는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제복 안쪽에서 휴대용 손전등을 꺼내 앞을 비췄다. 더는 장로와 인도자가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 안에 저들이 피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는 거다.
쿵! 안쪽에서 파열음이 앞으로 뻗어 나왔다. 곽수환은 손전등으로 정면을 비추며 다시 달려 나갔다. 크륵거리는 아담의 소리가 어둠을 긁어댔다. 짐승소리도 이보다는 선명하고 깨끗할 터였다. 지나온 철문은 여러 개였으나 문이 닫혀 있는 방은 지금 이곳뿐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올려 철문을 비췄다.
[3호 실험실]
쾅!
크악, 크륵! 네모난 창에 아담이 번뜩거리는 눈을 하고 얼굴을 부딪쳐왔다. 살아있는 사람을 발견하자 누런 이를 창에 미끄러뜨렸다. 한 놈에서 두 놈, 이제 적어도 다섯은 되는 놈들이 서로 곽수환에게 닿겠다고 철문에 몸을 들이받았다.
마치 불나방 같았다. 저놈들이 홀리듯 달려든 불은 최호언이었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불을 향해 직진해야 할 세상에 태어났던 걸까. 다만 적어도 차 중령을 따랐다면 이 꼴은 되지 않았을 거다.
배신하고 떠났으면 욕이라도 실컷 할 수 있게 한 자리라도 차지하든가, 꼴이 이게 뭐냐.
“등신 같은 새끼들.”
곽수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대장이라면서 따르던 놈들이 내장을 바닥에 질질 흘려댔고, 사람으로서의 모든 긍지를 버려둔 채 살아있는 생명을 질투라도 하듯 이나 다닥거리고 있었다. 남은 탄환을 확인하고 총을 재장전했다. 썩어도 제 부하들이었다. 손으로 머리를 박살내는 짓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곽수환은 철문의 문고리를 쥐었다. 잠금 장치가 밖에 달려있어 문을 열기는 손쉬웠다. 놈들에게 자유를 주듯 옆으로 밀어젖혔다. 뒤로 물러선 그는 놈들이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권총을 쥔 손목 위에 손전등이 있는 손을 얹었다.
칵, 크각! 제일 처음 문을 벌리고 나온 놈은 제 내장에 미끄러져 자빠졌다. 곽수환은 정수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고, 이어 달려드는 놈들도 재빨리 캐치해 미간을 꿰뚫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안에서 굶주려 있던 건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느 아담보다도 악취가 지독했다. 총 다섯 발의 총성이 터졌으나, 관자놀이를 빗맞은 한 놈이 기운도 좋게 달려들었다. 살아있을 때도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었는데 아담이 된 뒤에도 똑같았다.
미안하다.
곽수환은 입을 커다랗게 벌린 부하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엎어진 몸에 올라타 연거푸 주먹을 내리쳤다. 퍽, 퍽, 두개골이 박살나는 감각이 손등을 타고 머리를 찌르르하게 울렸다. 푸들거리던 몸은 금세 축 늘어졌다. 그는 아직 빠끔히 열려있는 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문을 차고 들어가니 구석에 죽은 동태 같은 눈을 한 부하가 보였다. 하반신이 완전히 망가져서 허벅지 뼈가 밖에 드러나 있었다. 무슨 실험을 당한 것인지 다리가 썩어서 빠진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썽둥 잘려 있었다. 그런데도 괴이쩍은 소리나 내면서 곽수환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오려고 했다. 마치 그 소리가 대장이라며 저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남은 탄환이 없기에 잭나이프를 놈의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그는 죽은 부하 앞에서 한참을 쭈그려 앉아 있었다.
부모와 동생도 제 손으로 죽였다. 겨우 이깟 일에 마음을 쓸 여유는 없었다. 잭나이프를 뽑아내고 몸을 일으키니 머리 위에서 감시카메라의 불빛이 붉게 점멸했다.
그는 피웅덩이 속에서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어깨에 힘을 실어 피가 묻은 잭나이프를 날려 카메라를 박살냈다. 그럼에도 붉은 빛은 여전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
“대장, 이게…….”
피가 말라붙어 있는 수 개의 군번줄을 받아든 차 중령이 입을 벌렸다.
“그거라도 산에다 묻어줘.”
설마 배신한 놈들을 찾아내 죽였느냐는 의문을 담았다가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길에게 대충이나마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부하들이 실험체가 됐던 것이다.
“일단 이동하자. 곧 군이 수색에 나설 거야. J타입 야전훈련 때처럼 네 조로 찢어진다. 합류 장소는 지금 불러줄 테니 조장들이 적어.”
곽수환은 보닛에 군사지도를 펼치고 군사좌표에 따라 성남에서 가까운 곳에 거점을 두었다. 오래전 과학연수원으로 사용된 건물이 있는 자리였다.
석화는 곽수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무사히 돌아왔음을 감사하기도 잠시, 곽수환은 전에 없이 지쳐 보였다. 언제나 제가 버거울 정도로 기운이 넘치던 그였기에 석화는 말없이 그의 지프 옆자리에 올라타 앉기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괜찮으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문길이가 잘 운전했어?”
시동을 건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배고프죠?”
석화는 보조서랍에서 에너지바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곽수환에게 넘기자 두 번에 걸쳐 입에 넣더니 우물우물 씹었다.
“피곤하면 제가 운전할게요.”
“아직은 괜찮아.”
석화는 피 묻은 군번줄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에너지바만 베어 물었다.
“지하에 갔더니, 실험실이라는 데가 있더라.”
석화의 궁금증을 아는 건지 그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겠는데 혹시나 싶어서 가져와봤어.”
그는 검붉은 혈액이 담긴 바이알 병을 석화에게 넘겼다.
“실험실에 있던 놈 중 한 놈 피인데, 그 병이 백신이 담겨있던 빈 병이라 피가 오염됐을 수도 있어.”
석화는 수건으로 바이알을 감싸 보조서랍에 넣어두었다.
“아는 군인들이었어요?”
“내 부하였던 놈들.”
석화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직접 그들의 숨통을 끊었을 곽수환을 생각하니 그 어떤 말도 위선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석 박사.”
석화는 어쩐지 긴장이 돼서 먹던 에너지바도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체온이 올라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벌레 같은 새끼들 제대로 봤어?”
“벌레요?”
“장로가 구원자다 뭐다 운운하니까 백신을 가지려고 개떼같이 몰려드는 게 딱 벌레 같잖아. 나는 왜 자꾸 화가 나지?”
그는 헤드라이트도 밝히지 않고 어두운 숲을 달렸다. 불빛이라고는 안에서 바닥을 비추는 램프뿐이었다. 그 빛은 곽수환의 얼굴에 닿지도 않아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새끼들을 살리려고 석 박사가 실험체가 되어야 해? 안 믿으면 맞지 말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저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떻게 제 말을 다 믿겠어요.”
“그러니까 안 믿으면 때려치우면 그만 아니야. 믿는 놈들만 주면 되잖아. 가짜 에덴동산 행세 다 좋아. 근데 신도들이라는 놈들을 직접 보니, 내 눈에는 전부 쥐새끼들이나 다름없게 보여. 대체 그 인간들이 여태까지 해온 게 뭐야? 아무것도 안 하고 수긍하며 살았는데 왜 그런 놈들까지 챙겨야 해?”
석화는 반쯤 남은 물을 조금씩 나눠 마셨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러시아에서 수도 없이 이야기했잖아요. 아담이 없는 세상이 정상이었다고요. 감염만 막을 수 있다면 아담을 전멸시키는 건 조금 더 손쉬워져요.”
“글쎄. 난 그냥 레인보우 시티가 망하길 바랐던 것뿐인데, 석 박사 만나서 정의의 사도 행세를 하려니 나랑은 너무 안 어울리는 것 같잖아.”
“소령님은……. 세죠. 아담을 두려워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전 두려워요.”
아담에게 물렸을 때 죽고 싶지 않았고, 아담처럼 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코앞에서 아담이 덤빈다면 힘으로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아담이 존재한다는 건 커다란 우리에서 호랑이와 함께 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받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해야 했고, 늘 불안함이라는 무거운 감정을 등에 지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맹수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지만, 아담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무조건 공격했다.
“어차피 내가 있잖아.”
곽수환은 별 걱정을 다 한다면서 핀잔을 줬다.
“소령님이 없었다면 전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들 소령님 같은 사람과 동행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왜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거지.”
“잊었어요? 나 아담한테 물렸었어요. 원래였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어요.”
핸들을 움켜쥐는 소리가 여실하게 들려왔다.
“소령님도 시티의 기술로 태어난 인류잖아요. 완벽한 유전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희생당한 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요.”
“내가 언제 이렇게 태어나고 싶다고 했어?”
“그럼 지금이라도 러시아로 가요. 가서 그냥 나는 철창이 둘린 집 안에만 있고, 소령님이 없으면 어디도 못 가는 그런 짐덩어리가 돼서 같이 살아요.”
석화 역시도 정면만 보고 말을 내뱉었다. 곽수환은 그제야 석화를 바라보더니 기막히게 웃었다.
“석화 형 이럴 때는 참 말 잘해. 사람 오장육부 뒤틀리게 하는 말 말이야.”
석화는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지만 이번에는 물러날 수 없었다. 물론 알고 있다. 그가 항상 자신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일어난 다툼이라는 것도.
“저는……. 아담이 없는 세상에서 소령님과 살고 싶어요. 정의감 같은 건 저도 몰라요. 그냥 오늘처럼 나를 두고 사라지는 소령님 모습을 봤을 때처럼 불안함에 떨고 싶지도 않고,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 채로 일 분이 한 시간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요.”
석화는 점차 가빠지는 호흡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자꾸만 골이 지끈거려 다시 물로 입을 축였다. 이 느낌은 마치 아담에게 물려 고열을 앓았을 때와 흡사했다. 설마 감염 증세가 일어난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열이 좀 나는 것 빼고는 멀쩡했다.
“그래도 난 석 박사 방식대로는 못 해.”
그의 목소리가 낮게 스며들었다.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평소에도 말씨름은 없다시피 했지만 오늘만큼은 더더욱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제 손으로 부하들을 죽이고 온 그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석화는 차창에 욱신거리는 머리를 기댈 뿐이었다.
눈을 좀 붙이면 괜찮아지겠지. 아니면 열이 난다고 말을 할까? 눈꺼풀을 슬쩍 들어 그를 봤지만 끝끝내 입을 떼지는 못했다. 지프가 덜컹거려 창에 댄 머리가 몇 번 튕기는 바람에 의자만 뒤로 젖히고 똑바로 몸을 뉘었다.
“어디 안 좋아?”
“아뇨, 그냥 좀 자려고요.”
곽수환이 손을 뻗어 석화의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 석화는 그 손길을 따라서 눈을 감고는 다시 뜨지 않았다.
***
허리께 오는 앵두나무에 붉은 알이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손을 내밀어 앵두 몇 개를 따먹다가 개미들이 줄지어 개미굴로 이동하는 걸 보았다. 그 모습이 퍽이나 가학심리를 자극해 발로 밟을까 했지만, 그래봐야 도망치는 개미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았다.
최호언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끓는 물을 가져와 구멍에 퍼붓기 시작했다. 뜨거운 홍수에 개미들이 와글와글 밖으로 나와 도망치기 바빴다.
“마스터, 뭐 하십니까?”
“오셨나요, 이연태 중장님. 보다시피 해충구제 중이죠.”
퍼스트나 세컨드 마스터에게 눈에 띄게 편승했던 사람들은 전부 시티 밖으로 내쫓기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아담감염 사태가 터졌을 때 이연태는 석화의 말을 믿고, 에덴동산이 퍼뜨린 백신이 문제였다고 방송을 내보냈었다. 그에 대해 신임 마스터가 무슨 말이라도 꺼낼 줄 알았건만, 최호언은 오히려 이연태를 곁에 두었다. 어쩌면 이연태가 그 누구의 라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살려둔 것일 수도 있었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개미가 죽습니까?”
“전부는 아닙니다. 안쪽에 있는 개미들은 무사하죠.”
“그럼 해충구제가 제대로 되지 않을 텐데요. 제가 살충제를 구해오겠습니다.”
“중장님, 참 신기하죠?”
“예?”
최호언의 자택은 여의도 쉘터에서 약 십 분 거리에 있었다. 퍼스트 마스터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거주했던 곳인데 정원은 그때보다 훨씬 정돈된 모습이었다. 나무들도 잎이 무성하게 피어나 자연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이 개미들은 신의 분노가 내린 줄 알 것 아닙니까. 뜨거운 비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하하. 개미가 사람처럼 생각을 할까요?”
그래서 네가 신이란 소리냐? 속마음을 숨긴 이연태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개미보다 게으르고 생각 없는 사람도 세상에는 넘쳐나죠. 투표를 통해서 내가 마스터가 된 걸 보세요.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모두가 에덴동산이 퍼뜨린 백신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을 해요. 기존 시티의 수뇌부들은 시민을 버렸고, 시민을 구제한 건 다름 아닌 에덴동산이었으니까요.”
최호언이 서펀트인 것을 아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연태였다. 그러나 그는 말을 아꼈다. 석화의 말처럼 에덴동산 백신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들 지금 철퇴를 들고 있는 건 최호언이었다.
에덴동산을 국교로 만들려는 목적은 아마도 종교와 정권을 일체화시키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최호언이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가 가진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건 오히려 퍼스트 마스터가 더 심했다.
“이렇게 맛있는 열매를 먹고 있으니 문득 동생이 보고 싶네요. 온갖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했을 텐데요.”
최호언은 종종 동생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연태는 그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러시아까지 가서 백신을 만들어올 줄이야, 대단하지 않나요? 이래서 내가 동생을 놓지 못합니다.”
러시아에서 백신을 만들어왔다는 말에 속으로 놀라움을 삼켰다.
에덴동산 북부지부 근처 초소가 무너졌으며, 신전에서 백신이 배포되었다는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찾아온 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심인물들이 바로 석화와 곽수환이었다.
“이미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보고만 받나요, 선전포고도 받았죠.”
최호언이 앵두나무에서 또다시 앵두 몇 개를 따서 이연태에게 넘겼다. 터진 앵두물이 이연태의 손을 지저분하게 물들였다.
“동생이 잘해줬는지 얼굴이 좋아 보이던데, 질투가 다 나더라고요?”
마스터는 앵두를 입에 넣고 굴렸다.
“다들 성남 일정을 바꾸자고 하더군요. 이연태 중장의 생각은 어때요?”
“위험……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곽수환 소령이 온다면 말입니다.”
“그렇죠? 저도 곽수환 소령과 석화 박사가 전면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지 뭡니까. 예상외예요.”
마스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이연태 중장의 다 터진 앵두 열매를 가리키며 먹어요, 다정하게 말했다.
***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과학연구소까지는 이제 약 3km를 남겨둔 지점이었고, 곽수환은 운전을 하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화에게 화풀이를 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남을 위해 희생하는 건 자신의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석화가 원한 아담이 없는 세상을 위해서 피를 봐야 된다면 피로 강을 만들 거고, 형제고 나발이고 석화의 눈앞에서 최호언의 살점을 조금씩 발라줄 수도 있었다. 뼈가 드러날 때까지 아주 천천히,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선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게 최호언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방치된 지 십수 년은 되어 보이는 연구소는 덩굴과 잡초들이 무성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곽수환이었기에 시동을 끈 채로 석화를 바라봤다. 아직은 창백한 빛에 석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듯 보였다.
“석 박사.”
분명 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석화가 이마에서 식은땀을 쏟고 있었다. 다시 한번 석화를 부르자 신음만 작게 내뱉을 뿐이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평소보다 열이 더 높았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석화야, 정신 차려봐. 응?”
곽수환은 운전석에서 튀어나가다시피 내려 조수석으로 이동했다. 정리되지 않은 건물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기에 석화의 몸을 안아 뒷좌석에 눕혔다. 수건에 물을 적셔서 석화가 입고 있던 제복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일단 열부터 내려야 한다. 그는 석화의 마른 팔부터 겨드랑이, 가슴까지 수건으로 닦아 내렸다. 차가웠던 수건이 석화의 열에 금세 달아올랐다. 다시 새롭게 물을 적셔 열이 떨어질 때까지 석화의 전신을 계속해서 문질렀다.
“……추워요.”
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제복을 찾아 덮으려는 것을 막았다.
“조금만 참아. 열부터 내려야 돼.”
종종 열에 시달린 적이 있었기에 곽수환의 대처법은 능숙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제가 다 불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백신에……. 문제가 있나 봐요.”
이 와중에도 혹시 백신에 이상이 있을까 봐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몸을 뒤척거렸다.
“그냥 평소처럼 가끔 열 오르는 걸 거야. 괜찮아.”
곽수환은 수건으로 몸을 툭툭 두드려주면서 마사지를 병행했다. 만일 정말 아담의 피를 주사한 뒤에 이렇게 열에 시달렸다면, 지금쯤 자신은 아마 눈 돌아가 미쳐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화가 주사한 건 아담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아담 피에 노출되겠다던 석화의 의견에 이미 곽수환은 절대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거라고 결심한 지 오래였다.
“미안.”
아담의 피와 자신의 피를 바꿔치기 했다는 진실은 말하지 않았다. 조금씩 열이 내리기 시작한 석화의 다리와 팔을 주물러줄 뿐이었다.
“소령님이……. 왜 미안해요.”
기운 빠진 목소리가 곽수환을 위로하듯 다가왔다.
“그냥 다 미안해.”
러시아에서 석화에게 수혈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괜찮았다. 그래서 안심했건만, 열이 나는 줄도 모르고 제 성질 못 이겨 석화를 보지도 않고 운전이나 처했던 병신새끼가 저였다. 그래도 거짓말한 건 사실대로 말 안 할 거다. 이런 일쯤은 속여 넘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신과 석화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 줄까?”
석화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했다.
곽수환은 누워있는 석화의 몸을 받쳐 올려서 제 입에 물을 넣고는 조심스럽게 가져다댔다. 물을 받아먹는 석화를 거세게 끌어안지 않으려고 팔에서 힘을 뺐다. 간신히 물을 삼킨 석화의 몸에 흰 셔츠 한 장을 입혔다. 어느 정도 열이 내리면 얇은 모포라도 둘러줘야 더 앓지 않았다.
만일 신이 있다면 진정 얄궂은 자였다. 저와는 정반대인 사람을 눈앞에 가져다두고 보기 좋게 빠지게 했다. 석화가 아플 때마다 저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옆에서 숨만 쉬어준다면 그것으로도 좋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정말 아프다면 제 눈앞에서만 그랬으면 했다. 나 없는 데서 석화 혼자 아프다고 생각하면 이거야말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일이다.
“수프 먹을래?”
그래봐야 미지근한 물에 타서 흔들어 먹어야 하는 인스턴트가 고작이었다. 시티 안에 있었다면 의식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다. 석화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듯 곽수환도 그 못지않았다.
“조금 있다가 먹을게요.”
석화는 좀 더 자야겠다며 몸을 웅크렸다. 곽수환은 뒷문을 열어둔 채로 앉아 저 밖을 쳐다봤다. 등에 닿는 석화의 맨발바닥에 아직 열기가 서려 있었다. 앓는 소리를 숨기려는 듯 얼굴을 시트에 묻는 것 또한 느껴졌다.
러시아에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사람들과 얽혀 지냈지만, 이런 비참한 기분은 느껴본 적은 없었다. 시티로 돌아오니 너무나 뼈저리게도 제가 가진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최호언은 마스터 자리에 올라 온갖 것들을 누리고 있겠으나 저는 지금 해열제 하나도 가지지 못해 내 사람이 아픈 걸 지켜봐야 했다.
마스터가 별 거야? 곽수환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보다 마스터 가까이에서 수뇌부들과 함께 있었던 그였다. 권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고, 그따위 지폐 다발도 별 미련 없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된다면 얼마든지 갈취해 차지해야했다.
치직, 칙, CB무전에 신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 ……2조 이동……. 합류 불가……, 뒤가 밟혔다.]
몸을 일으킨 곽수환이 손을 뻗어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합류할 필요 없어. 지금부터 세컨드 마스터에게 이동한다.”
명분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
전국적 아담 감염 사태가 발발한 이후로 레인보우 시티의 인구는 제법 줄어들었지만, 존속을 위협당하는 일은 없었다. 생존본능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선천적인 행동인지라 제아무리 아담이 날뛴다고 해도 살아남을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초창기 적자생존 양상으로 살아남았던 이들이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고 꾸린 나라 또한 레인보우 시티였다.
오랜 기간 세뇌학습을 거듭했어도 시티가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 대부분은 약 460일 전의 그날, 라디오 방송을 듣고 문을 걸어 잠갔다. 비상식량과 상비해둔 식수로 버티면서 군인들이 상황을 정리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나름 부유층에 속했다. 식량을 구비해두지 못한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시티가 마련한 보호소에서 감염되거나 멀쩡한 상태에서 사살당했다.
세컨드 마스터는 이 모든 사태를 우도에서 지켜보면서 한 가지를 확신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다가는 제 목이 언제 날아갈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담 감염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분명 두 명의 마스터였다. 제아무리 막강한 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시민들의 반감은 곧 마스터 투표로 나타날 것이었다.
세컨드는 혁명이 아닌 개혁을 원했다. 퍼스트는 현상 유지와 권력 승계를 원했으며, 세컨드가 보는 서펀트는 대체 뭘 원하는 것인지 애매했다.
최호언이 자신의 양모를 밀고하고 퍼스트와 손을 잡은 게 확실시되었을 때 세컨드는 우도를 빠져나와 몸을 숨겼다. 그의 유일한 희망인 석화는 곽수환과 러시아로 이동했다는 사실만 접할 수 있었다.
“마더로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세컨드의 곁을 지키는 집사는 초췌함이 가득했다.
“내 자식을 적에게 빼앗긴 꼴이지. 이보게, 강 집사.”
“예, 마스터.”
마스터라는 호칭을 때려치우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듣지 않아서 이제 정정해주기도 지쳤다.
“자네가 보기엔 최호언이 대체 뭘 원하는 것 같은가.”
집사는 반쯤 깨진 안경의 중심을 손으로 꾹 눌렀다. 우도에서 해남으로 도피했을 때 차 중령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컨드는 자신이 아닌 곽수환에게 충성하는 차 중령에게 분노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차 중령은 당시 곽수환과 세컨드를 연결해주는 파랑새 역할을 했는데, 아무래도 곽수환에게 목줄을 잡힐 듯해 세컨드 나름대로 은신처를 다시 찾았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마스터를 찾아내 없애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집사의 현답에 설핏 웃고는 두 다리로 거실을 걸었다.
“저마저 속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스터.”
집사는 아직도 섭섭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내가 어떻게 세컨드 마스터로 계속 당선될 수 있었겠나. 퍼스트 놈이 운신이 불편한 이 두 다리에 속아 넘어간 덕이지. 그러니 석화 박사가 내 자식인 것도 알 수가 없었을 게야.”
세컨드는 생각했다. 석화가 면역체가 아니고 하자품에 불과했다면 절대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을 거라고.
유전자를 제공했긴 하지만 특별히 애틋한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이제 와 아비 행세를 할 뜻도 없었다. 단지 세컨드는 레인보우 시티에 누구보다 큰 애착이 있었다. 자신이 반평생 이상을 가꾸고 키워온 시티였고, 연합국이 무너졌던 때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수뇌부의 동요는 시민들에게 불안함만 심어주는 꼴이니, 내일 당장 지구에 혜성이 충돌한다고 해도 세컨드는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누구보다 마스터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확신도 했다.
“마스터……. 불빛이 보입니다.”
집사가 감시카메라 화면을 보고 당황했다.
“뭐?”
“아마도 군용 지프인 것 같습니다.”
“보안등급을 최대로 올리게.”
“예, 마스터.”
지하 벙커의 남은 식량은 이제 보름 치 정도였다.
***
석화의 열이 내린 건 과학연수원을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잠을 좀 자둔 덕인지 개운한 감이 맴돌았지만, 땀을 흘린 터라 몸이 찝찝했다.
“부대원들 뒤가 밟혔대요?”
“그 정도는 예상했어.”
분명 그는 무사한 대원들에게 세컨드 마스터에게 이동한다는 전언을 보냈었다. 열 기운에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서 석화가 다시 운을 떼었다.
“우리 세컨드 마스터한테로 가요?”
곽수환의 옆모습을 보는데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하기만 했다.
“어디 있는지 알아요?”
“몸은 괜찮아?”
딴소리하는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를 짚었다. 평소의 온기로 돌아와 있어 그는 안심하고 다시 핸들을 쥐었다.
“세컨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석화는 화는 내지 않고 담담하게 재차 물었다.
“예상하는 데는 총 세 군데니까 첫 번째에 찾기를 바라야지.”
“어떻게 알아요?”
벨트를 맨 채로 곽수환을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석화도 세컨드가 잠적했다는 소식은 러시아에 있을 때 그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때부터 세컨드의 거취를 이미 짐작하고 있던 듯했다. 곽수환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다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못 미더운 건 알지만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돼요? 그를 탓하는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이제와 따져봐야 서로 감정만 상하는 꼴이 될 거다.
석화는 짧게 고심을 마치고 더는 그 점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소령님 말대로 첫 번째에 찾았으면 좋겠어요.”
비꼬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진심을 담아야 했다.
“우리 레인보우 시티로 돌아오고 나서 자꾸 부딪치는 거 알지?”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곽수환이 그렇게 뜻을 전해오고 있었다.
“그냥 저한테도 이야기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았어요.”
그가 잠시 시선을 위쪽으로 했다가 차를 멈춰 세웠다.
“뭘 이야기할까?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앞서 몇 번 그와 이랬던 적이 있었다. 그건 오양석 박사 피살 사건을 파헤치던 때였다. 그는 자신이 뭔가에 몰두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꺼렸다.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여태 내색하지 않았으나 곽수환의 아버지가 아담으로 변이한 일도,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도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기에 묻어뒀을 뿐이었다.
앞뒤 정황을 따져봤을 때 그의 부모나 제 어머니는 오양석을 처치했던 것과 같이 퍼스트의 계략이었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퍼스트가 아닌 최호언이나 다른 누군가가 관련되어 있다면……?
우리는 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굳게 믿어왔던 연합국이 무너진 것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알게 되지 않았나.
“석 박사 능동적인 거 좋지. 근데 그 약한 몸 이끌고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나한테는 부담이야.”
곽수환이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석화에게 진실을 고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며 반박할 거리도 없었기에 석화는 침묵했다. 다문 입 안으로 지독하게 쓴 독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제가 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독이 퍼진 몸이 시큰거렸다.
“내 인생에서 석 박사가 일 순위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고생시키기 싫다는 거야.”
지금 석화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희미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쾅! 곽수환이 갑자기 핸들을 내리쳤다. 한번 더 후려치더니 두 손으로 핸들을 짧게 움켜쥐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마를 거세게 처박았다.
“난 씨발, 왜 말을 이따위로밖에 못하지? 그냥 내가 속상해 뒈지겠다고, 석 박사.”
그가 충혈된 눈을 하고는 고개만 돌려 석화를 쳐다봤다.
“너 아플 때마다 내가 무력해 죽겠다고.”
오히려 곽수환을 만나기 전보다 지금이 더 좋아졌다는 말 같은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제가 아플 때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알았고,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화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쥐었다.
“가요. 세컨드에게로.”
여전히 자괴감을 갖는 그를 대신해 석화가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의 엔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
러시아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곽수환은 한 가지 자신에게 다짐한 게 있었다. 적어도 우리 석 박사 춥거나 굶게 하지는 말자고.
산속에 들어가 살 때도 산짐승이나 땔감을 부지런히 공수했고, 사람들과 안면을 터 도심으로 내려왔을 때는 나름 좋은 대우를 받았다.
부락을 이뤄 사는 사람들에게 석화는 똑똑한 의사이자 식물학자였으며 현자였다. 러시아어를 공부해 어느 정도 소통하기 시작한 뒤로는 그들에게 도움을 준 만큼 저희들도 원하는 것을 건네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바이러스 연구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됐으며, 그곳에서 여든이 넘은 영감도 만날 수 있었다. 영감은 그 옛날 조상이 러시아로 이주해온 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특이한 건 영감이 아담 바이러스 면역자라는 것이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제 몸에 별의별 실험을 다 하던 괴팍한 늙은이가 어느 날, 석화가 자고 있을 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대체 레인보우 시티에서 뭘 만든 것이냐.’
영감은 주름진 손가락을 들어 곽수환의 가슴팍을 꾹꾹 눌렀다.
‘영감, 이 환장할 근육은 레인보우 시티에서 만들어준 게 아니라 내가 만든 거거든?’
페행, 하면서 피리 같은 웃음소리를 낸 노인이 독한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본 적이 있는가.’
‘왜 내가 아는 영감탱이들은 다들 제정신이 아닌지 몰라. 영감, 내가 아담이었으면 레인보우 시티도 이미 끝장났고, 러시아까지 초토화 됐어. 아무도 나 못 죽일걸? 그보다 석 박사도 나 없으면 죽어. 저 봐, 오늘 좀 일찍 일어났다고 정신 못 차리고 자잖아.’
곽수환은 한달음에 달려가서 석화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부딪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럼 돌아가지 말어.’
‘뭐?’
‘그냥 여기서 살라고.’
‘하하, 이 영감탱이 지금 나랑 가족 놀이라도 하자는 거야?’
‘네놈……. 고열로 아팠던 적 있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나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적 없다니까.’
‘기억해봐, 곽수환이. 네놈은 독이야.’
뭔 개소리냐고 비웃어주려고 했지만, 아버지를 칼로 찔렀던 그날이 스쳐지나갔다. 베인 손에 흐르던 피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을까?
‘짐작되는 게 있나 보지.’
‘영감탱이, 그딴 건 없어. 그리고 석 박사 말 못 들었어? 나 비면역자야. 내 피로는 어떤 항체도 안 생긴다잖아.’
‘그러니까 그 망할 시티가 대체 뭘 만든 거냐고 물은 게야. 하기야 네 녀석도 알 길은 없었겠지.’
알코올에 혈관까지 찌든 미치광이 과학자의 말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종종 가족을 잃었던 날을 다시 상기하고는 했다. 상처 난 손에 아버지의 피가 뒤섞였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이 변질됐을 수도 있었다. 제가 면역자인지 아닌지 확실히 하기 위해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방법도 말이 안 됐다. 어디 죽나 안 죽나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석화를 바라보니 육포를 까서 제 입에 물려주려 하고 있었다.
“자기, 화 안 났어?”
“화가 왜 나요.”
“내가 말을 좆같이 했잖아.”
“말은……. 좆이 될 수 없어요.”
그건 그렇지. 웃은 곽수환이 입을 벌려 육포를 받았고, 석화도 남은 한 줄을 꺼내어 씹었다. 되는대로 끼니를 때우고 있기에 곽수환의 마음은 더 조급해져갔다.
그는 무전기를 들고 신호를 보냈다.
“차 중령, 들리나?”
수신이 가능한 거리인지는 알 수 없었고 답변은 치직, 칙, 하는 잡음뿐이었다.
“차 중령 말고 들리는 놈들 있어? 있으면 응답해.”
[라저, 1조. 저희는 차 중령님께 연결됩니다.]
차 중령과 거리가 꽤나 먼지 중간에 있는 1조가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했다.
“내가 지시 내리기 전까지 다시 돌아가서 대기하라고 전해. 뒤 밟힌 놈들은 알아서 떼어내고, 필요하다면 추적자를 전부 사살하도록.”
[1조, 전달합니다.]
일이 분 정도 지나서야 다시 무전이 울려왔다.
[1조 전달 완료했습니다. 대장, 뒤 밟힌 2조도 놈들 떼어냈답니다. 저희 조도 위치 대기로 들어서겠습……. 커헉!]
퍼억!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곽수환이 급격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지프를 세웠다. 석화도 분명 무전을 타고 흘러나온 둔탁한 소리를 들었다.
“1조, 방금 무슨 일이야.”
그가 무전기에 대고 목소리를 키웠으나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령님.”
석화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응답하라, 1조. 상황 보고해!”
칙, 치직, 칙.
누군가가 무전기의 버튼을 눌렀다가 떼는 듯 불협화음이 규칙적으로 잡혔다. 칙, 치직, 몇 번이나 반복되더니 곧 잠잠해졌다. 곽수환이 다시 말을 하려는 때였다.
[……오랜만이에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인보우 시티 마스터 최호언, 인사드립니다.]
석화는 허벅지에 얹은 손을 움찔 떨었다. 무전기가 최호언의 손에 들어갔다는 건 달리 말해 1조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음? 거기 교통사고라도 났어요? 왜 대답이 없을까요. 아, 교통사고는 이쪽이 났구나. 정예인 줄 알았는데 이 군인들도 별 볼 일 없네요. 실망스럽게도 시티에 쓸 만한 놈들이 참 없어요.]
곽수환은 무전기의 전선을 잡아 뜯어 차 바닥에 던졌다.
두 손으로 눈을 꾹 누르더니 화를 삭이듯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가 내뱉지도 않고 삼켰다. 그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석화는 1조 군인들이 무사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 대답은 최호언에게서 들어야 할 테지만, 그자와 말을 섞어봐야 좋을 것 없었다. 간사한 뱀의 혀를 가진 게 최호언이었기에 곽수환도 충동을 참고 무전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거였다.
“괜찮을 거예요.”
틀에 박힌 위로는 석화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적을 못 죽이면 죽는 거야. 원래 항상 그런 거야.”
계기판의 속도계가 위로 치솟았다가 옆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프의 엔진은 굉음을 내며 돌아갔고, 중간에 기름을 한 번 채울 때를 제외하고 바퀴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여름의 긴 해가 내려앉을 때쯤 시티의 관리 구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도로와 숲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아 어디가 길인지조차 헷갈렸다.
방향은 나침반으로 가늠할 수 있었지만, 끝도 없는 숲은 두 번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열대밀림 같았다. 한 뼘 정도 열어둔 창문 밖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들어왔다. 무성한 나뭇잎은 어둠에 물들어 산발이 된 머리를 잔뜩 늘어뜨렸다. 푸릇푸릇하던 한낮과 정반대로 음산한 모습이었다.
곽수환이 상향등을 켜 시야를 확보했다. 강렬한 불빛에 사슴 두 마리가 후다닥 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개구리 울음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언덕을 타고 올라가던 곽수환이 잠시 차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핸들을 왼쪽으로 틀어 무성한 풀을 밟고 지나가자 놀랍게도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이 보였다.
컨트롤러가 되고 나서 일 년 뒤였던가, 세컨드 마스터가 반군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세컨드가 지정한 인물을 잡고 났더니 골골대는 게 한눈에 봐도 반군은 아니었다.
‘위치는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에게 살려달라며 비는 남자의 말이 의아했다.
곽수환은 그자를 떠봤고, 약 반세기도 더 전에 세컨드의 가문이 은신처를 만들어낸 것을 알아냈다. 당시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은 살해당하거나 사고사로 죽음이 위장됐다. 세컨드가 죽이라 지시한 놈은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인부였기에 곽수환은 그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 물론 살려주는 대신 방공호의 위치를 넘겨받은 건 그저 기브앤테이크일 뿐이었다.
은신처는 총 세 곳. 컨트롤러로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녔기 때문에 위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중에 제가 쓸 일이 있을까 하고 알아놓은 곳이었지만, 세컨드가 먼저 굴속에 숨어 삶을 연명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문 잠가둘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봐.”
“조심해요.”
“응.”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에 쪽 뽀뽀를 했다. 지프에서 내려 문을 잠근 그는 버릇처럼 차키를 위로 던졌다가 잡았다. 주머니에 키를 쑤셔 넣고 대신 권총을 들었다.
이 계곡은 산천어나 버들치 같은 생선도 제법 살았고, 식수로 사용해도 별 문제가 없을 급수였다. 그 생선들이 별 맛이 없다는 것과 별개로 생존하는 데 나름 적합한 곳이었다.
곽수환은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며 군화로 쓱쓱 풀을 헤쳤다. 만일 드나들었던 흔적이 있다면 입구 근처에 풀들이 짓밟혀 있을 것이다. 세컨드 혼자 도망갔을 리는 없고, 분명 집사 놈이 보필하고 있겠지.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곽수환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신변을 보호 해준다고 했을 때 얌전히 있을 것이지 손 가게 만든다.
쿵, 쿵쿵. 곽수환이 풀이 짓눌려 있는 어느 한 지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흙이 아닌 단단한 철이 찌르르하게 발바닥을 울렸다. 그 부근의 풀을 다 치우고 나서야 동그란 철판 안쪽에 손을 넣을 수 있는 홈을 발견했다.
한 팔은 흙바닥에 놓아 지탱하고, 한 손으로 철문의 홈을 단단히 쥐고 들어올렸다. 꿈쩍도 안 하는 걸 보니 안에서 잠가 둔 모양이었다.
“제비를 살려줬더니 박 씨를 물어왔거든.”
생존자는 방공호의 문이 잠겨있을 때 여는 법도 알려주었는데 이건 저 혼자서는 힘들었다. 곽수환은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며 다시 지프로 달려갔다. 조수석과 운전석, 그 어느 곳에도 석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곽수환이 창문을 똑똑 두드리자 몸을 숨기고 있던 석화가 쓱 올라왔다.
“나와도 돼. 같이 가자.”
“짐은요?”
석화는 배낭을 가리켰다.
“일단 두고.”
곽수환은 숲의 색을 닮은 보호비닐 시트를 펼쳐 지프를 완벽히 감쌌다. 뒤에서 일을 도운 석화는 반쯤 풀어둔 셔츠 단추를 꼼꼼히 채우면서 방공호 입구로 함께 걸어갔다.
“저기가 입구예요?”
곽수환이 비춘 방향에 동그란 철문이 보였다.
“응. 안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문을 안 열어주는 걸 보면 없는 것도 같고, 있는 것도 같고.”
“무슨 말이 그래요.”
“나도 세컨드 속내를 모르니까. 자기, 이것 좀 위에서 비춰줘.”
곽수환이 손전등을 석화에게 내밀었다. 석화는 우뚝 서서 그가 말한 철문에 손전등을 비췄다. 철문은 한쪽에 파인 홈만 제외하고 굳게 다물려 있었다.
“힘으로 열려고요?”
“나를 힘만 센 무식한 놈으로 알아?”
“힘이 세면 무식한 게 아니라 좋은 거예요. 그래도 다치면 안 되잖아요.”
“시티 내려오고 나서 내내 굳어있더니, 긴장 좀 풀렸어?”
곽수환이 흡, 숨을 들이켜더니 힘을 주어 들어 올리는 척을 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엄살을 부렸다.
“이건 내 힘으로도 안 되네.”
“도와줘요?”
“응.”
홈은 곽수환 손 하나만 들어갈 크기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고심했다. 석화는 곧 그의 뒤에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야.”
“같이 당기려고요.”
곽수환은 순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예전에 오양석의 자택에서 엄호를 하겠답시고 등을 맞대던 모습이 생각나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꽉 껴안아 봐.”
나름대로 힘을 주었는지 몸이 꽉 조이는 느낌은 분명 들었다. 그 감촉을 곱씹는데 석화가 힘을 더 줘서 몸을 뒤로 빼려 하고 있었다.
“영차영차 할까?”
“……지금 놀린 거죠?”
“응.”
화 풀라는 듯 석화의 손을 풀어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닫힌 철문을 여는 방법은 간단했다. 홈 안쪽의 고리에 끈이나 밧줄을 걸어 반대로 잡아당기면 그만이었다. 안쪽을 좀 비춰보라며 손전등을 다시 턱짓하려는 때였다. 끼이익, 철문 밑으로 쇠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끼릭, 끼릭, 힘겹게 돌아가던 철문이 저절로 쓱 열렸다. 석화는 놀라 그 안쪽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오랜만입니다. 곽수환 소령님, 석화 박사님.”
세컨드 마스터의 집사였다.
안에 있었으면 빨리 기어 나올 것이지. 곽수환은 발로 머리통을 깔까 하다가 석화를 봐서 인내심을 가슴에 새겼다.
“다행이에요.”
첫 번째에 찾았네요. 그 말은 안 했지만 석화는 희미하게 화색을 띠었다.
“세컨드 마스터는?”
“예. 무사히 안에 계십니다.”
집사가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석화가 사다리를 잘 잡고 가는지 확인한 다음에야 제가 따라가면서 철문을 닫았다. 공조가 잘 된 편이라 내부의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아일랜드 형태 주방, 대형 가죽 소파에 계곡을 감시하는 카메라 화면까지. 백 평 남짓한 방공호는 그야말로 고급 주택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보다도 훨씬 마르고 볼품없어진 세컨드 마스터가 휠체어에 앉아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이었다. 세컨드는 몇 번 한숨도 쉬어댔다.
이렇게 편안한 곳에 처박혀 있었으면서 피난민 같은 행색을 하기는. 목 비틀어 죽여버릴까 보다.
곽수환은 석화를 스쳐 지나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이보게, 곽수환 소령.”
인사도 없는 곽수환을 향해 세컨드가 입을 뗐지만, 그는 다짜고짜 찬장부터 열었다. 안에서 이것저것 꺼내더니 버너를 켜서 물을 데우고 즉석밥을 안에 담갔다. 한쪽 통에는 집사가 잡아둔 것으로 보이는 산천어도 있었다. 요리조리 제 손을 피해 달아나는 산천어를 솜씨 좋게 잡아 잭나이프로 배를 갈랐다. 그는 펄떡거리는 산천어의 내장을 다 빼내고 곧장 팬에 얹었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집사가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 다가갔다.
“거, 밥부터 먹여야 할 거 아니야.”
석 박사 여태 밥다운 밥도 못 먹었는데. 곽수환이 집사보다 더한 인상을 와작 썼다.
“곽 소령! 감히, 말본새를 고치세요.”
어디서 하대를 하느냐며 집사가 권위를 내세웠다.
“그럼 이 지경까지 와서 대우해드릴까? 할 일 없으면 생선이나 뒤집든가.”
곽수환은 소금까지 끄집어내 배를 가른 산천어에 툭툭 뿌렸다.
“밥 먹자.”
세컨드를 빤히 쳐다보던 석화가 식탁으로 몸을 틀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곽수환이 준비해준 걸 안 먹기도 뭐해 의자에 앉았다.
두 놈이 러시아에 다녀오더니 정신이 나가버린 게 틀림없다면서 집사가 미쳤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세컨드는 휠체어를 직접 손으로 미는 대신 제 두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 마스터!”
기적을 목도한 신도의 탄성이 아니라 경악에 가까웠다. 곽수환과 석화도 두 다리로 서있는 세컨드를 꼼짝도 하지 않고 쳐다봤다. 하, 짧게 비웃은 곽수환은 데운 즉석밥을 꺼내 식탁에 내려두었다.
“에덴동산 신도가 돼서 구원이라도 받은 건 아닐 테고, 퍼스트가 무서워 그간 불구 행세를 하셨구만.”
어쩐지 불편한 두 발로 잘도 도망갔다 했다.
곽수환이 덮개를 벗기자 즉석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수증기가 석화의 턱을 간질이며 올라와 속눈썹에 매달렸다. 석화는 눈꺼풀을 깜빡여 습기를 털어내고 수저를 들었다. 세컨드의 두 다리가 멀쩡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지만,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세컨드가 다가와 석화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간 얼굴이 많이 상했군, 석화 박사.”
“그 대단한 마스터라는 사람은 방공호에 처박혀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계시는데, 우리 석 박사는 먹을 거 제때 못 먹고 고생 많았지.”
“곽 소령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말게나, 큭.”
곽수환이 세컨드의 멱살을 쥐었다.
“곽수환!”
집사가 달려들자 그가 발로 집사의 복부를 걷어찼다. 배를 움켜쥐고 구르는 집사가 헛구역질을 뱉어냈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덤비지 마. 지금 내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면 못 그럴 거야.”
상명하복이 몸에 밴 집사는 곽수환의 행동을 믿을 수 없어했다. 제복을 입고 있지만 사실상 그는 수배자이지 레인보우 시티에 소속된 소령이 아니었다.
석화는 노릇노릇하게 익은 산천어의 살점을 발라 수저에 얹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하는 데만 집중했다. 집사는 그 모습조차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봤고, 곽수환은 세컨드를 다시 들어 의자에 밀어 앉혔다.
“이보게, 곽 소령이.”
노기는 서려 있었지만 한풀 쇠약해진 음성으로 곽수환을 불렀다.
“자네가 언제가 되든 나를 찾아올 것은 예견했었네.”
“말은.”
곽수환이 옥수수가 담긴 통조림을 따서 일회용 그릇에 탁탁 쏟아부었다. 석화의 앞에 밀어두고 제 즉석밥도 대강 덥혀서 뚜껑을 벗겼다. 한가하게 식사를 하고 있으니 세컨드와 집사는 아예 할 말을 잃어버린 기색이었다.
“이 방공호를 만든 인부들을 전부 죽여 없앴다면서. 마지막 생존자까지 죽이려고 날 이용했는데, 사실은 내가 살려 보냈거든. 제 손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다가 뒤통수 맞은 거지.”
곽수환이 수저를 들고 방공호의 천장을 가리켰다. 인부들을 죽였다고? 석화는 경멸 어린 시선을 숨기지 않고 세컨드를 쳐다봤다. 세컨드는 주름진 얼굴을 덤덤하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최호언을 저지하려고 나를 찾았다면 그만한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게야.”
“마스터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죠. 최호언이 퍼스트를 죽였고, 세컨드조차도 죽이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겼다는 변명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에덴동산의 이거가 최호언이라는 걸 만천하에 밝혀야 하니까.”
그는 제 관자놀이를 툭툭 가리켰다.
“내가 올 걸 예견했다면 이것도 짐작했겠지. 당신은 명분이고, 난 힘이라는 거.”
“애초에 네놈이 내 신변을 보호한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했지. 나를 제 좋을 대로 이용할 것이라고.”
“똑같이 해줬는데 왜.”
당신도 나와 석 박사를 좋을 대로 이용한 적이 있지 않나? 석 박사를 마스터 자리에 앉혀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했던 게 세컨드였다.
“불손하기 그지없어. 손을 잡자는 자의 태도로 보기가 어려울 정도야. 협상가로서 자질이 최악이라는 말일세.”
“협상하러 온 거 아닌데. 협박에 가깝지.”
곽수환이 거짓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매섭게 노려봤다. 세컨드는 만만한 노인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럼 죽이게나.”
“뭐가 그렇게 당당하십니까?”
세컨드는 방금 그 불손한 말이 곽수환에게서 나온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히 석화의 목소리였다. 석화는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 깨끗하고 시원한 물은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맛을 즐기기는커녕 외려 모멸감이 치솟았다.
“목숨 부지하려고 숨어 계시잖습니까. 사태가 터졌던 그날에는 뭘 하셨어요? 정작 재난이 났을 때는 아무것도 못 하셨죠.”
시티의 젊은 군인들은 방패막이가 돼서 싸웠고, 부조리한 명령을 따랐다. 세컨드는 이 안에 숨어서 지냈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날에 죽었다.
“저는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이야기 나누고 함께했던 사람들의 생사가 어떤지도 모릅니다. 소령님은 저보다 더 오래 그분들과 함께 지냈고요. 비겁한 마스터들보다 더 나은 군인들이 왜 먼저 다쳐야 하죠? 그런 우리가 왜 예의 같은 걸 차려야 합니까?”
세컨드는 멱살을 잡혔을 때와 다르게 동요하고 있었다. 지금 석화는 레인보우 시티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상을 내뱉고 있었다.
“석화 박사, 그간의 고생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닐세. 그래도 나는 분명 그때 내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었네. 전부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서였고, 그걸 거절하고 떠난 건 너희들이야.”
세컨드는 잘못은 전부 너희들에게 있다면서 애석해했다.
“거동이 불편한 행세까지 하면서 마스터 자리를 지켰죠. 레인보우 시티를 위해서라고요? 아니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겠죠. 퍼스트와 전면으로 붙을 자신은 없었던 것 아닙니까?”
고저 없이 진실을 내뱉으니 세컨드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감히 내 유전자를 제공받아 태어난 주제에 자신을 이겨먹으려고 하다니. 자식의 도발이라 생각한 세컨드는 자존심이 꺾여 체면을 차리지 못했다. 부들거리며 분노하는 그를 대신해 집사가 거들었다.
“석화 박사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세컨드 마스터께서는 독재를 꿈꾸던 퍼스트를 지속해서 막아 오신 분입니다.”
“자, 대변인 노릇은 그만하시고.”
지켜보던 곽수환이 탁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두었다.
“지지율 높은 최호언을 잡으려면 에덴동산 서펀트가 놈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죠. 아담 감염 사태는 서펀트가 꾸민 짓이라는 것도 밝혀야 할 테고.”
곽수환이 용건을 정리하자 차라리 잘됐다는 듯 세컨드가 식탁을 붙들고 일어났다. 두 다리는 자유롭지만, 근육은 한없이 퇴화한 터였다. 지팡이를 이용하지 않는 건 세컨드의 아집이었다.
“부딪쳐보니 알겠던가? 네놈들이 말하는 허울뿐인 마스터의 힘을 말이야.”
유감없이 뒤끝을 발휘한 세컨드가 거실 모서리로 걸어가더니 카펫을 벗겨냈다. 나무 바닥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잡아 올리자 작은 공간이 나왔고, 그곳에서 서류 가방을 끄집어 올렸다. 평소에도 종종 꺼내 보던 가방인지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았다.
마스터는 빈 그릇을 옆으로 죽 밀어두고 서류 가방을 올렸다.
“그래, 최호언을 잡아둘 올가미는 이 안에 있다네. 대신 놈을 끌어내리고 나면 다시 두 마스터 체제로 가겠다고 약속부터 해주게나.”
“나는 지금 당신을 죽이고 가져갈 수도 있는데?”
“명분이 필요하다고 한 놈은 곽 소령 자네지. 말의 파급력을 가진 건 세컨드 마스터인 나고.”
“그래서 당신을 또 마스터로 추대해 달라?”
“그럼 퍼스트는 자네가 맡을 텐가? 원한다면 그리해주겠네.”
곽수환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음만 먹으면 퍼스트 마스터로 추대할 수도 있다고 자신하는 꼴이 우스웠다.
“앞서서 행해왔던 마스터 투표가 정말 공정하긴 했습니까?”
곽수환의 비꼼에 세컨드가 입술을 다물었다.
“석 박사, 그거 알아? 내가 처음 육사에 들어갔을 때 가장 황당했던 게 뭐였냐면, 마스터 투표용지였거든. 학도들에게 투표용지를 나눠줬는데, 이미 투표가 되어 있는 종이였어. 군인들은 투표 때마다 전부 지정된 마스터를 뽑아야 했지. 그러지 않으면 반군으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거든.”
그 말에 석화는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저 자신도 투표용지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위에서 뽑으라는 사람을 뽑았다. 그때는 퍼스트와 세컨드가 레인보우 시티의 수장으로 있어야 사람들의 안전이 보장받는 줄 알았다. 학습센터의 선생도 말했다. 변화와 의심은 곧 지옥이라고. 아담에게서 이 정도로 안전할 수 있는 건 모두 수뇌부들과 군인들이 힘을 써준 덕분이니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레인보우 시티를 이렇게 방치한 데에 자신도 일조한 셈이었다.
“학습센터도……. 문제가 있었어요.”
“그건 동감이네. 최호언에게 충성하게 되는 교육 방식은,”
“아니요. 기존에도요.”
세컨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티 밖을 나갔다가 오더니 이상한 사상에 잔뜩 물들어 온 모양이었다.
“그럼 무슨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겠나.”
“아담이 없던 세상처럼요. 강제적인 세뇌교육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인의 선택이 보장되는 형태로요. 그래야 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유토피아군. 너무 꿈만 꾸는 것 아닌가? 석화 박사, 자네가 무사히 살아왔던 것도 다 이 시티의 체제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일세.”
세컨드가 석화를 신랄하게 비꽜다.
“이용 가치가 있어 무사했던 것이겠죠.”
석화의 말대답에 세컨드는 마치 시민들 앞에서 연설하듯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식탁을 후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아담이라는 최악의 적이 있네! 통제와 관리가 없었다면 우리 시티가 유지되었을 것 같아!?”
“그럼 왜 아담을 이용한 겁니까!”
석화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놀란 건 세컨드와 집사였지만 그 못지않게 곽수환도 눈을 크게 떴다. 석화가 이 정도로 타인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체력이 없는 만큼 스스로 억눌러왔고, 참아왔다.
“애초에 아담을 전멸시킬 생각도 없었고, 그 위험한 시한폭탄을 이용해 사람들을 억압하고 협박했어요. 아세요? 이미 아담에게서 자유로운 나라들이 있다는 걸요. 아니, 알 리가 없죠. 스스로 우물 안에 갇혀 있는데 저 밖이 보이시겠습니까?”
석화의 얼굴에 희미하게 홍조가 서렸다. 열이 오르는 듯했다. 지켜보던 곽수환이 석화에게 다가갔다. 저딴 노인네 때문에 제 사람이 쓰러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우물 속에 갇혀 있는 게 무엇이 나빠. 덕분에 안전하게 생명을 보장받았잖은가! 겪어봤으니 알지 않는가! 저 밖의 놈들은 굶어 죽어 나자빠지기 십상이야! 그래, 네 말도 맞지. 이용가치가 있으니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네놈에게 제공한 게야! 네 어미 역시 이용가치가 있었다면 그렇게 죽게 놔두지는 않았어!”
“……뭐라고요?”
주먹을 쥐고 있는 석화의 손이 하얗게 바랬다.
세컨드는 석화의 불순한 사상에 흥분해 말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퍼스트가 손을 쓸 거라는 예상은 했었네. 그런데 그게 어찌 내 잘못이겠나.”
죄책감 하나 없이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읊고 있었다. 석화는 소리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품에서 꺼낸 권총으로 세컨드를 겨눴다.
알고 있었으면서 방치했다고?
석화에게 집중하고 있던 곽수환이었지만 예상외의 행동에 먼저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막지 않았다는 것이 맞았다.
“지금, 석화 박사 자네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는 아나?”
세컨드는 총구를 눈앞에 두고도 서슬 퍼런 기세였다. 석화는 손바닥이 아릿할 정도로 총을 세게 쥐었다. 권총 손잡이는 석화의 열로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 전신이 화마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 이 정도로 분노했던 적이 있던가.
남들이 뭐라고 해도 귀담아듣지 않았고 누군가가 해코지를 해도 울분은 흘러가게 놔두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면 몸도 아팠기에 스스로 참아냈으며, 어머니가 무력한 자신을 품어주었기에 견딜 수 있던 날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면서도 세컨드는 묵인했다고 한다.
“저를……. 제주도로 보내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를 희생시킨 겁니까?”
“치료제 제작에 지나친 열의를 띠고 있으니 퍼스트가 그리 행동한 것이겠지. 오양석 박사와도 더 깊이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겠고.”
다물린 석화의 입술이 경련했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요?”
“자네가 시키는 일만 묵묵히 했다면 진연이도 살았을 게야. 나라고 슬프지 않았겠나. 나 역시 진연이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었네.”
아끼고 사랑했는데 죽게 놔둘 수가 있다고? 학습센터 선생의 말처럼 제가 감정이 남들과 달라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가?
“……소령님.”
석화가 고개를 돌려 곽수환을 쳐다봤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눈의 초점이 흐렸다. 그러나 총구는 여전히 세컨드를 향해 있었다.
“소령님은 목적을 위해서 저를 죽게 놔둘 수 있어요?”
“아니, 나라면 목적을 죽여.”
곽수환은 석화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야 할지, 아니면 세컨드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놔둬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석화를 가로막는 건 월권이었다.
제가 있기 전에 석화를 지킨 건 그의 어머니였고, 가족의 죽음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저딴 말을 지껄인 세컨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수장이었던 작자가 열등감에 사로잡혀 세 치 혀를 휘둘렀다.
“석화 박사,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야 하네. 진연이가 죽은 건 석화 박사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 셈이야.”
석화의 손이 떨리는 걸 보자마자 쾅! 곽수환이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단단한 나무판이 움푹 파이고 곽수환의 손등도 붉게 달아올랐다.
“난 당신이 어떤 부류인지 아주 잘 알아. 당신 같은 사람은 죄책감이 없거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죄책감을 가지게 만들지. 이제 보니 그 알량한 주둥이를 놀려서 마스터 자리를 지켜온 거였어.”
“육체의 힘만 힘인 줄 아나? 네놈이 말하는 알량한 입이 더 큰 힘을 가질 때도 있는 법이야.”
이성적인 달변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퍼스트 가문에 밀려 기세를 펼치지 못하는 열등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행위에 불과했다. 세컨드는 그저 패배자일 뿐이었다.
“석 박사, 권총 이리 줘.”
곽수환은 석화의 손에서 권총을 떼어냈다. 못 가져가게 힘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도 손쉽게 넘겨주었다.
“그래서, 내 도움을 받지 않을 텐가?”
찬장과 바닥에 있는 식료품을 보니 잘 버텨봐야 열흘에서 보름이었다. 자신은 세컨드의 말대로 뛰어난 협상가는 아니지만, 진창보다 더한 바닥에서 살아남은 시티의 낙오자이자 군인이었다.
탕! 짧고도 간결한 총성이 터졌고, 이어 노인의 지저분한 괴성이 들렸다. 석화는 바닥에 나자빠져 몸을 웅크리고 있는 세컨드를 쳐다봤다. 카펫을 붉게 물들이는 피를 보고 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세컨드의 다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집사와 곽수환에게 저주를 퍼붓는 세컨드의 목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불구 행세를 했으면 끝까지 해.”
곽수환이 옆에서 싸늘하게 뇌까리니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세컨드는 어머니의 죽음에 제 탓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건 퍼스트였는데, 알고도 침묵한 건 세컨드였고……. 만일 자신이 치료제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살아 있었을까?
곽수환은 휘청거리는 석화를 단단히 붙들었다. 석화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 고통에 신음하는 세컨드를 내려다봤다.
후회해봤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모든 잘못은 시티의 수뇌부들에게 있었다. 결코 저의 탓은 아니었다. 세컨드의 말에 현혹되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짐이 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이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그에게 아직은 필요한 존재라면 얼마든지 살려낼 수도 있었다.
석화는 저 스스로 서서 세컨드에게 다가갔다.
집사는 바지를 찢어 상처를 드러냈어도 지혈법을 몰라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석화는 구멍 뚫린 허벅다리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를 두 손으로 막았다. 세컨드가 저리 치우라며 소리를 질렀다. 석화는 아무 표정 없이 총상을 압박했다.
“급한 대로 지혈부터 하고……. 상처를 압박하죠.”
총알이 관통했으니 탄환을 빼낼 필요는 없었다. 뼈를 건드린 것은 아니기에 곽수환이 정말 불구로 만들고자 총을 발사한 게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고통을 안겨주었을 뿐이었다.
석화는 상처를 압박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깟 말에 휘둘려 그의 손을 더럽힐 뻔했다. 만일 세컨드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울부짖었다면 곽수환은 충분히 살인을 행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석화는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어떤 간언에도 휘둘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게 제가 곽수환을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곽수환도 바닥에 무릎을 대더니 석화를 대신해 상처 부위를 압박했다. 석화는 피에 젖은 손을 털고 응급 키트에 있는 과립 지혈제를 뿌렸다. 젤리처럼 혈액이 응고돼 출혈을 막는 역할을 했지만,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지혈은 완벽하지 못했다.
석화는 라텍스 장갑을 손에 끼운 뒤 구멍 난 상처 안에 거즈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신음을 억지로 참고 있던 세컨드가 눈을 까뒤집으며 경련했다.
“엄살은.”
곽수환이 발버둥치는 세컨드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짓눌렀다. 위급상황에 부닥친 군인들은 앞서 다 겪어봤던 고통이었다. 그 또한 거즈를 직접 상처에 쑤셔 넣은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세컨드는 이런 육체적 고통을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으니 더 끔찍하겠지. 그러나 제아무리 고통에 자주 노출되었던 군인들도 통증에 내성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누구나 아픈 강도는 언제나 똑같았다.
상처 안을 거즈로 채운 석화는 진통제를 꺼내 집사에게 건넸다.
“수면 효과도 같이 들어있는 약이에요. 7시간마다 한 번씩 복용하면 되고, 거즈는 내일 한 번 더 갈아주셔야 해요.”
집사는 자신이 직접 거즈를 쑤셔 넣어야 하냐는 듯 경악했다.
“쑤셔 넣을 때보다 빼낼 때가 더 아프거든. 거즈가 아물기 시작한 살을 쓸면서 나오니까.”
일부러 겁먹으라고 한 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석화가 세컨드의 허벅지를 붕대로 감는 동안 곽수환은 서류 가방을 끌어왔다.
“비밀번호.”
세컨드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에 집사를 향해 물었다.
“……비밀번호는 저도 모릅니다. 마스터께서만 알고 계십니다.”
식은땀을 털어내는 집사는 곽수환의 눈치를 살폈다.
제어되지 않는 S급 군인이 얼마나 어려운 상대인지 떠올리며, 세컨드가 다시 마스터가 된다면 군인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다룰 수 있는 법안을 만들리라 마음먹었다.
“비밀번호. 말하기 싫으면 다른 한쪽도 날려 보내줄까?”
곽수환이 협박하자 석화는 의자를 끌어와 기절한 세컨드의 다리를 올려두었다. 단순히 지혈을 위한 행동일 뿐이었는데, 집사는 저 두 놈이 작정하고 쳐들어온 거구나 하고 이를 갈았다.
석화는 심장보다 더 높게 다리를 고정하고 그제야 한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많이 쏟아 하얗게 질린 세컨드의 얼굴을 봤는데도 다행히 안타깝다는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3초.”
“정말 모릅니다! 정말로요.”
“그래?”
곽수환은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잡고 위로 휙 들었다. 집사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막았다. 그 꼴을 한심하게 쳐다만 보고는 가방 모서리를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연거푸 내리치니 맞물린 부분이 비틀어지며 속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제법 견고하게 제작되었는지 카펫이 헤지고 시멘트 가루가 튈 때가 되어서야 손을 넣을 틈이 생겼다. 곽수환은 가방을 양쪽으로 벌려 쥐고 억지로 잡아 뜯었다.
가방 안에는 USB 한 개와, 기지국이 무너진 뒤로 사용할 수 없어진 휴대폰 몇 대가 고정되어 있었다. 터치 형식의 휴대폰은 곽수환도 쉽게 보지 못한 종류였다. 기지국이 기능을 상실한 뒤 휴대폰을 제작하는 공장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아마 충분히 정상화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시티의 높은 놈들이 시민을 통제하기 위해 통신 제품을 활성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중 한 휴대폰을 꺼내 손으로 액정을 쓱 밀자 핏자국이 번져 나갔다. 전원을 켜니 산뜻한 알림 소리와 함께 화면이 로딩되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고막을 찌르는 소음의 근원지가 이 휴대폰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소리를 접한 석화도 급히 곽수환의 뒤로 다가갔다.
곽수환이 권총을 장전해 방공호의 입구로 겨눈 순간이었다.
쿵! 누군가가 위에서부터 뛰어내렸다. 몸의 중심을 낮춰 안전히 착지한 남자는 허리를 일으키며 손까지 탁탁 털었다.
“이런. 단란한 가족 식사를 제가 방해했나요?”
검은 수트를 입고 있는 최호언이었다. 곽수환은 시선을 올려 뒤따라 들어오는 군인이 없는지 확인했다. 최호언이 두 손을 펼쳐 들어 올리더니 인상 좋게 웃었다.
“걱정 마요, 여기는 나뿐입니다. 내 동생 겁먹을까 봐, 혼자 왔어요.”
개소리를 지껄이는 최호언의 이마에 총구멍을 내주고 싶었지만, 한 번에 사살하지 못하면 놈이 석화를 저격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놈과 붙어봐서 잘 알고 있다.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면 빈틈을 내어주는 꼴이 되고 마니,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했다.
“설마 믿는 건 아니죠? 저 위에 대기 중인 S급 장성들이 한 스무 명 되려나.”
“어떻게…….”
집사가 어떻게 이 방공호를 찾았느냐며 걸음을 뒤로 물렸다. 어딘가에 패닉룸이라도 있는지 도망갈 퇴로를 찾는 모양새였다.
“마더.”
최호언이 무심하게 마더를 불렀다.
[음성인식 완료.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방공호에 마더의 기계음이 퍼져 나갔다.
“세컨드 마스터께서 마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셨는지 접속을 시도하셨던데요. 뭐, 그날 한번이었지만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 가족회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럼 마더, 카운트를 시작할까?”
[로딩 중. 카운트 들어갑니다.]
최호언이 입을 터는 동안 곽수환은 석화의 팔을 붙들었다. 놈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내려왔는지는 몰라도 카운트를 운운한 것을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위에 군인들이 버티고 있다고 한들 내려오는 입구도 좁으니 한 놈씩 처리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테지만.
“석화 박사님, 곽수환 소령님. 직접 두 눈으로 보니까 너무 반갑군요. 아무리 그래도 무전에 답은 해줘야죠. 대답이 없으니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제가 이렇게 부리나케 달려왔잖아요.”
최호언이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내딛은 때였다.
[카운트 제로, 시작합니다.]
쾅! 뒤쪽에서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태피스트리에 가려진 벽에 달려 있던 문짝이 날아가 버렸고, 유황불에서 올라온 듯 퀴퀴하고 지독한 악취가 삽시간에 흘러들어왔다. 집사는 터져나간 문을 등진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타탁, 타탁, 탁, 이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내달리는 군홧발이었다. 크륵, 크그억, 기괴한 괴성 또한 메아리치듯 구멍에서 뻗어 나왔다. 마치 포효하는 호랑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공포심에 두 다리가 묶여 버렸다. 피해요! 석화가 소리쳤고 집사가 고개를 돌린 그 순간이었다.
“으아악!”
어둠 속에서 나온 놈이 집사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뜯긴 살점과 함께 붉은 피가 공중에 솟구쳤다.
“석 박사, 지금!”
곽수환이 발로 식탁을 쳐올려서 모서리에 밀어 세우고 그 안에 석화를 숨겼다. 동시에 거센 총성이 터졌고, 최호언이 삽시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빌어먹을 놈이 안에 방탄조끼를 입고 왔는지 가슴팍에 제대로 맞았음에도 막힘없이 달려들었다.
총구를 붙잡은 최호언과 힘을 겨루는 바람에 총구가 위로 올라갔고, 발사된 총알이 천장에 박혔다. 젠장! 곽수환은 석화가 숨어 있는 식탁으로 총을 던져주고는 최호언의 턱에 잽을 날렸다.
한 방에 꽂혔으면 나자빠졌을 테지만, 중심을 낮춰 주먹을 빗겨낸 최호언이 반대로 명치를 향해 주먹을 쳐올렸다. 손을 펼쳐 충격을 막아내면서 최호언의 주먹을 송두리째 움켜쥐었다. 그대로 손목을 비트는데 잭나이프의 날카로운 끝이 가슴을 스쳤다. 제복 셔츠까지 찢겨나갔어도 뒤로 몸을 빠르게 빼낸 덕에 살갗은 멀쩡했다.
최호언의 시선이 비스듬히 서 있는 식탁 모서리로 향했다. 곽수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 발을 내딛으며 쇄골을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큭, 놈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반대편 주먹을 일직선으로 뻗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타격한 느낌이 손뼈에 와 닿았다. 그러나 안심할 여유도 없이 아담이 뒤에서 달려드는 바람에, 머리통을 쥐어 바닥에 내리찍어 으깼다.
핏물을 뱉어낸 최호언이 곧장 옆구리에서 총을 꺼내 곽수환을 저격했다. 그는 늘어진 아담을 방패 삼아 제 앞을 막았다. 탕, 탕탕! 세 번 연사한 총알이 아담의 몸에 푹푹 박히며 곽수환은 그사이 거리를 최대한 좁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담은 기절한 세컨드보다 살아 날뛰는 두 남자에게 달려들기 바빴다. 최호언 하나만 상대하기도 벅찬데 아담에게 등을 보이고 있으니 곽수환은 더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최호언과 방향을 바꾸면 석화가 있는 모서리가 사각지대가 되어버린다.
크아아! 뒤에서 아담의 숨결이 확 쏟아지자 곽수환은 중심을 낮춰 멱살을 잡았다. 주둥이를 괴이쩍게 벌린 아담을 최호언에게 내던졌다. 방향을 틀어 피한 최호언이 나자빠진 아담의 머리통을 콰직, 발로 밟아 뭉개버렸다.
“빌어먹을 새끼. 아담 푸는 건 여전해.”
“난 내 몸 하나 지키면 그만이지만, 그쪽은 석화 박사님도 지켜야 하잖아요? 유리한 건 써먹어야죠.”
곽수환은 석화를 재차 확인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잘 숨어 있었지만 안심이 될 리는 없었다. 최호언을 공격하기에 앞서 달려드는 아담들을 잡아 놈에게 보내고, 또 남은 놈들은 직접 숨통을 끊어냈다. 사람은 머리를 써서 공격하지만, 아담은 본능에 충실하기에 변수는 오히려 아담 쪽에 있었다. 최호언도 그 점을 알기에 섣불리 곽수환에게 집중하지는 못했다.
곽수환은 흘끗 뒤를 돌아 남은 아담의 숫자를 확인했다.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을까 예상했건만, 나자빠져 죽은 놈들 외에 뒤늦게 한두 놈만 기어 나왔다. 이 방공호에 퇴로는 저 철제 사다리 위의 동그란 통로뿐이었다. 21 바이올렛 부대에 쳐들어와 아담으로 물량공세를 쏟아 부었던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었다.
저 새끼 저거, 아담한테 물리면 안 되나 본데.
물론 곽수환 자신도 백신 효과가 없기 때문에 감염되어서는 안 되지만, 저만 약점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곽수환은 거버 나이프를 펼쳐 덩치가 커다란 아담의 눈알을 꿰뚫었다. 한 바퀴 빙 돌려서 안까지 후벼준 다음 아담과 대적하고 있는 최호언에게 내질렀다. 칼날이 뺨을 스칠 듯 아슬아슬하게 허공을 베었다. 간신히 피한 최호언이 눈썹을 찡그린 채 짧게 웃었다.
“곽 소령님, 안 본 사이에 많이 추잡해지셨네요.”
“추잡한 새끼 상대로 정직해봤자 나만 손해라서.”
“이야기를 하러 왔다면 믿어주시겠어요? 석화 박사님, 제 말 들리죠?”
석화는 식탁 뒤에서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귀만 열고 있었다. 곽수환이 보낸 총을 두 손으로 꽉 쥐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아담의 뼈가 으깨지는 소리도, 두 사람이 벌이는 육탄전도 오로지 청각에 의존해 분간해야 했다. 만일 아담이 저를 발견하고 공격해온다면 곽수환에게 빈틈이 생겨 최악의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퍽! 식탁에 충격이 와 놀라서 옆을 쳐다봤다. 이쪽으로 내던져진 아담이 숨어 있는 석화를 발견했다. 아래턱이 뜯겨나가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이리로 기어오고 있었다. 뒤로 몸을 옮기려 했지만 벽에 가로막혀 더는 이동할 수 없었다. 느리게 기는 아담이 손을 뻗으니 석화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총을 쏠까? 만일 총소리에 아담이 더 몰리면 어떻게 하지? 차라리 손잡이로 머리를 으깨면…….
제가 곽수환도 아닌데 사람의 머리뼈를 쉽게 부술 수는 없었다. 석화는 벽에 바짝 붙어서 아담이 더 이상 기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이 흘러내려 눈으로 들어왔다. 따끔거리는 눈을 손으로 비비지도 못하고 질끈 감았다가 뜨기만 했다.
그아아……. 아래턱이 없는지라 음성은 더없이 괴상했다. 세컨드 마스터는 아담에게 물렸을까? 좀 더 기어온 아담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자 마음을 먹은 때였다.
콰직! 그곳만 거대한 중력이 작용한 듯 아담의 머리가 바닥에 압사됐다. 깨진 이가 주변으로 흩어졌고, 위로 뻗은 팔은 몇 번 파들파들 떨리더니 이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석화는 군화를 보고 곽수환임을 확신했다. 다급히 얼굴을 내밀었더니, 직선으로 매끈하게 뻗어오는 최호언의 주먹이 보였다. 두 팔을 들어 가드를 올린 곽수환이 뒤로 밀려나면서 석화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지? 마치 그렇게 묻는 듯했다. 그는 석화가 안전한지 확인하자마자 다시 최호언을 향했고, 이곳에서 최대한 멀어지도록 힘으로 밀어붙였다. 입가가 전부 터진 그는 코에서도 피를 쏟고 있었다.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던 곽수환의 얼굴이 계속 잔상으로 남았다.
석화는 몸을 엎드려 다시 식탁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바닥은 핏물투성이에 아담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그사이에 정신을 차린 세컨드 마스터는 피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숨죽여 있었다.
곽수환과 최호언이 시체더미 속에서 서로에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타격소리가 거세 석화는 제 숨이 다 막혔다. 그가 핏물에 잠깐 미끄러진 순간, 최호언이 팔로 목을 감싸 뒤에서 잡아당겼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 팔까지 교차했기에 곽수환은 일부러 뒤로 몸을 넘어뜨렸다. 팔꿈치로 최호언의 옆구리를 내리쳐도 잡아당기는 힘은 여전히 엄청났다. 석화는 서둘러 총을 쥔 채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석화 박사!”
세컨드가 나직하게 불렀지만, 석화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당장 그 팔 풀어요. 아니면 쏠 겁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두 남자가 몸을 겹치고 있어서, 확실히 최호언을 저격할 자신은 없었다. 지금도 몸 대부분이 곽수환에게 가려져 있었고, 총을 발사할 때 최호언이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곽수환이 최호언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를 악문 곽수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최호언은 마치 쏴볼 테면 쏴보라는 듯이 그를 옭아맨 팔을 풀지 않았다. 석화는 문득 두려워졌다. 최호언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곽수환과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다. 석화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총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탕!
최호언의 머리 위쪽으로 총을 발사했고, 그 틈에 곽수환이 재빨리 팔을 떼어냈다. 컥, 쿨럭, 컥! 그는 오랫동안 숨이 끊긴 터라 기침과 함께 삼키지 못한 침을 토해냈다. 최호언이 바닥에 떨어진 잭나이프를 쥐어 그의 등에 꽂으려는 때였다.
타앙! 다시 한번 석화의 손에서 총성이 터졌다. 잭나이프가 푹신한 카펫으로 투욱 떨어졌다.
“그냥 이야기 좀 하자는 건데……. 왜 이렇게 힘들어요.”
수트 소매가 피로 흠뻑 젖었다. 그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팔뚝을 움켜쥔 최호언이 마치 원망하듯 석화를 바라봤다.
“곽 소령한테서 물러서요.”
“쏴……!”
뒤에서 노인의 거친 음성이 터졌다.
“뭐 해! 지금……! 지금이야! 쏘라고!”
석화가 총구를 세컨드에게로 겨누자 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석화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권총을 발사했다. 세컨드가 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럴 수는 없다. 최호언이 아닌 아비인 저를 쏘다니. 그런데도 통증은 허벅지뿐이라 세컨드는 아직 자신이 살아있는지를 확인했다. 그 옆에는 아담으로 변해버려 마스터를 공격하려던 집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석 박사.”
곽수환은 석화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대열을 맞춰 내려온 정예군이 소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만일 석화가 세컨드의 말대로 최호언을 저격했다면, 총알세례가 퍼부어졌을 것이다. 이곳에서 현 마스터가 죽는다면 정예군들이 따를 이는 세컨드뿐일 테니, 놈은 그것을 알면서도 제 아들을 희생시키려던 거였다. 늙은이의 더러운 수작에 이가 갈렸다.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그렇게 생각하죠?”
최호언이 곽수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빈틈이 많아요. 나 하나쯤 손쉽게 처리할 거라 생각했을 텐데, 석화 박사까지 지키려니 집중이 흐트러지잖아요?”
최호언은 식탁이 있던 자리로 걸어가 너덜거리는 서류가방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 흩어진 휴대폰과 USB를 챙기고는 이게 뭘까,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석화는 곽수환의 뒤에서 넝마가 된 그의 제복 코트를 움켜쥐었다. 이대로 연행되면 곽수환의 목숨은 보장받기 힘들었다. 그건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석화는 그에게 기대듯 움켜쥐었던 손을 풀고 옆에 섰다.
“……뭘 원하는 겁니까?”
“뭘 원하다니? 우리 가족이잖아요.”
최호언이 너무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오히려 석화를 나무라는 표정을 했다. 곽수환은 놈이 벙커를 돌아다니는 동안 들끓는 피를 계속해서 내리눌렀다. 이곳에 온 게 실수라면 실수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세컨드 마스터는 미련하고 하찮은 존재였다. 마더에 접속해 위치를 드러내다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대처하며 살았겠지만, 사람은 궁지에 몰릴 때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었다. 세컨드 마스터는 궁지에 몰린 쥐조차 되지 못했다.
물론 최호언이 레인보우 시티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언제가 되든 만남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가 지금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 자신은 석화가 너무 소중했기에 석화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비겁했다. 소중해서가 아니라 석화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미워할까 봐 몸을 사린 것이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목적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모두 부수고 죽였을 거다. 그도 아니면 싫다는 석화를 데리고 억지로 러시아에 남았을지도 모르지.
“자,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갈까요?”
최호언이 두 손을 모아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아, 그 전에.”
그가 군인을 향해 손을 까딱이자 달려온 군인이 그에게 권총을 넘겼다. 최호언은 총구를 세컨드에게 겨눴다. 세컨드는 지나친 출혈로 다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푸슉! 설마 싶었건만, 최호언이 세컨드의 이마를 총으로 꿰뚫었다.
이번에는 그 총구를 저희들 쪽으로 돌렸다.
“긴장하지 말아요. 우리 동생이 끔찍하게 아끼는 곽수환 소령에게 해를 가할 생각도 없고, 곽수환 소령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그쪽 싫어하지 않습니다. 특별하잖아요? 아버지께서 얼마나 정성을 쏟으셨는지 생각하면.”
휴, 마치 연극을 하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다. 곽수환은 그동안 계속해서 시뮬레이션만 그렸다. 석화와 함께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여러 경우로 돌려봤지만, 군인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함부로 총을 갈길 가능성은 낮아도 만일 총상을 입는다면 회복하는 일이 더 문제였다. 그동안 숨어서 지내야 할 텐데, 재수가 없으면 상처에 감염이 일어나 괴사할 가능성도 있겠고…….
소령님, 일단은 상황부터 지켜봐요.
석화는 곽수환이 무리한 행동을 할까 봐 그의 손목을 쥐었다. 최호언이 무슨 꿍꿍이일지는 모르겠지만, 앞서서 그래왔듯이 저희를 다짜고짜 죽이거나 처형할 것 같지는 않았다.
최호언이 턱짓하자 군인들이 다가와 곽수환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 팔을 반대로 꺾어 짓누르니 두세 명이 달려들어 곽수환을 바닥에 억지로 엎어뜨렸다. 그는 실험실 동물처럼 사지가 짓눌린 채 뒤로 수갑이 채워졌다. 저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도망가고도 남았을 거다. 그는 이런 취급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었다.
“박사님.”
반항하지 말라는 듯한 군인의 말투에 석화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갑이 감겨 손의 자유가 사라졌다.
“최호언 박사님, 저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요, 식사도 부실했던 것 같은데 우리 집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자고요.”
아직도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최호언은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지 아이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그럼 곽수환 소령님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주세요.”
“물론이죠. 우리 집 식탁에 빈자리는 많아요.”
곽수환은 군인들을 하나씩 탐색했다. 소총을 뺏어서 역으로 공격한다면 탈출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최호언이었다. 놈은 일전에도 석화가 다쳐도 목숨만 붙어있다면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게 저와 놈의 다른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 힘을 십분 다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군인 셋이 먼저 철제 사다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총을 조준한 뒤에야 곽수환을 올라가게 했다. 그의 앞뒤로 군인 두 명이 따라붙었고, 손이 뒤로 묶여있어 균형 잡기가 버거운 탓에 몇 번 멱살도 잡혔다. 이번에는 석화의 차례였다.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세컨드 마스터, 자신에게 유전자를 제공하기만 했을 뿐인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아담들과 섞여 있었다. 아담을 이용해 권력을 탐했지만, 그 말로는 아담과 함께였다.
“세컨드는 가족이 될 가치가 없는 자예요.”
밑에 있던 최호언이 말했다. 석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최호언이 위에서 내려 보낸 기름을 벙커 여기저기에 뿌렸다. 마지막 순서로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가 지포라이터의 불을 켜 밑으로 던졌다. 불길이 삽시간에 번져 세컨드 마스터의 몸도 곧 화마에 잠겼다. 지상에 도착한 최호언은 입구를 발로 밀어 닫았다. 지하를 태우는 불의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려오고 곧 잠잠해졌다.
곽수환은 첫 번째 지프에, 석화는 그 뒤의 지프에 따로 타야 했다. 곽수환은 지프로 걸어갈 때까지도 한껏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군인들의 총구는 그가 이동하는 방향과 함께 움직였다. 그는 지프에 앉기 전 석화를 돌아봤다. 수갑이 채워진 손목에서 얼굴로 천천히 시선이 올라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석화만큼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듯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솔직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방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거대한 권력 앞에 저희들은 무력했다. 목적은 아담을 없애자는 것으로 아주 단순했다. 그러나 과정은 복잡했다.
곽수환이 먼저 고개를 돌리더니 지프에 올라탔다. 까만 어둠이 도처에 내려앉아 있어 이제 그의 뒷모습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석화는 옆에 올라탄 최호언에게 입을 열었다.
“곽 소령님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불안했지만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 보여요? 난 곽수환 소령에게 항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매번 나를 방해한 건 곽 소령이죠. 형제의 재회를 막고, 내게서 석화 박사를 빼앗아갔잖아요.”
최호언이 미간을 구기더니 석화의 손을 자신에게로 끌어갔다. 놀랍게도 곽수환만큼이나 서늘한 손이었다.
“저 친구들이 좀 거칠죠.”
최호언은 앞에 탄 군인에게 수갑 열쇠를 받아 석화의 손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출발해요.”
그가 신호하자 그들이 탄 지프가 앞차를 지나쳐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석화는 뒤를 돌았지만 여전히 그가 타 있는 지프 안은 보이지 않았다. 최호언이 석화의 나머지 손까지 잡더니 제 뺨에 가져다댔다. 석화가 불쾌함에 손을 빼내려고 하자 좀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고개를 옆으로 틀어서 저를 보더니 손바닥에 뺨을 부드럽게 비볐다.
“뭐 하는 겁니까?”
“우리의 어머니가 자주 이렇게 해줬죠.”
석화는 당혹감에 입술을 벌렸다. 어머니는 정말로 두 뺨을 항상 소중하게 감싸 주고는 했었다.
“어머니도 이렇게 따뜻했는데.”
최호언은 옛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어 좋은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석화는 최호언의 힘에 손을 빼지도 못하고 연방 뒤만 돌아봤다. 제 몸을 힘으로 좌지우지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최호언이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알았다고 해도 과연 곽수환처럼 자신을 존중해줬을까 싶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곽수환 소령은 아주 우수한 종마잖아요?”
최호언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
석화가 타 있는 차가 이동하는 것을 본 곽수환은, 두 다리를 모아 조수석 뒤를 걷어찼다. 재차 수갑이 채워진 두 손목은 지프 손잡이에 걸쳐져 있었다.
“곽 소령님, 제발 얌전히 계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조수석의 대위가 운전석 뒤편에 앉아 있는 곽수환에게 사정했다.
“너 나 알아?”
“예, 저는 아는데 아마 소령님은 저를 모르실 겁니다.”
대위는 단 한 번 곽수환이 지휘하는 현장에 지원 나간 적이 있었다. 곽수환이 날뛸 때의 모습을 아는 터라 더욱 긴장을 풀지 못했다. 수갑을 채울 때도 한껏 경계했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몸을 사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저기 앞에 먼저 출발한 석화 박사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접점이 없는 박사와 군인이 대체 어떤 사상으로 뭉쳤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곽수환에게 수배가 내려졌다는 소식에 대위는 제 귀를 의심했을 정도였으니까. 곽수환은 누구보다 빠르게 고속 승진을 했기에 배경이 없는 군인들에게는 나름 선망의 대상이었다.
“소령님은 대체 왜 시티를 벗어난 겁니까?”
대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운을 떼었다. 곽수환은 대답 없이 석화가 지나간 방향만 계속 눈으로 좇았다. 그는 거리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백신이……. 정말입니까? 그 소문 말입니다. 에덴동산 신도들이 백신을 맞았다고 하던데요. 석화 박사님이 개발하신 겁니까? 시티 밖에서요?”
“시끄러. 출발 안 해?”
석화와 자신의 거리는 이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들이 저를 죽이려는 건가, 그렇다면 최호언이 이놈들을 과대평가한 것일 테고.
“곽 소령님도 백신을 맞으셨습니까?”
“씨발놈아, 소령은 나지, 이 새끼가 무슨. 이 새끼는 그냥 반군에 수배자거든?”
주위를 정리하고 돌아온 육군 소령이 대위의 뒤통수를 손으로 후려쳤다.
“범죄자 씨, 우리 문제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가자고, 어?”
소령은 소총을 옆으로 조준해 곽수환을 위협했다.
“듣자하니 너 컨트롤러였다면서? 씨발, 나 같으면 머리부터 고추까지 충성하겠다.”
이 새끼들은 촉새만 모아놨나. 곽수환은 입에 고여 있는 피를 바닥에 뱉었다. 일단 이 정도 거리에 어느 정도 힘이면 충분할 듯했다.
[2호차 뒤따라와.]
예상과는 다르게 앞차에서 무전이 울렸다. 아무래도 석화와 자신의 거리를 상당히 벌리고 나서야 명령을 내린 듯했다. 총구를 들이대고 있던 놈이 검은 천을 곽수환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여유 있는 척 비아냥거리기는 했지만 곽수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기에 잠시라도 해이해지지는 않았다.
“2호 지금 출발합니다.”
곽수환은 차가 출발하자마자 속으로 10초를 세기 시작했다. 올라오면서 봐두었던 지형을 그리기는 어렵지 않았고, 정확히 1초에 다다랐을 때였다. 물이 추락해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완전히 선명해졌다. 그는 숨을 쓰읍 하고 들이켰다. 이 반대편은 분명 계곡물이 떨어지는 절벽이었다. 기회는 지금이다.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손잡이에 매달려 몸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두 다리를 모아 안쪽으로 굽혔다가 확 펼치며 옆에 앉은 놈을 걷어찼다.
투투툭! 엄청난 반동에 소령이 문짝과 함께 밖으로 떨어져 나가며 소총을 휘갈겼다. 곽수환은 재빠르게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도 벗겨냈다.
“김 소령님!”
대위도 황급히 총구를 뒤로 들이댔다.
“야! 씨발새끼야! 차 세워! 나부터 잡으라고! 아악! 씨발, 차 안 세워?!”
불시에 공격을 당한 놈은 소총마저 놓친 채 두 팔로 조수석 헤드를 붙들고 있었다. 지프가 내달리는 속도가 엄청나, 지프 밖으로 떠밀려 나가 버린 몸을 안으로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대위가 손을 뻗어 소령을 붙들려 하자 곽수환이 한 번 더 걷어차 완전히 절벽으로 보내버렸다.
소령을 포기한 대위가 반대로 몸을 틀었으나 이 좁은 공간에서 쏴 봤자다. 제가 더 빠르다. 빠아앙- 거센 경적소리가 들렸다. 소총의 오발에 머리가 뚫린 운전병의 머리통이 기어코 핸들에 처박힌 것이다.
황급히 차를 세우려는 대위를 향해 두 다리를 뻗어 목을 끼워 졸랐다. 산소를 순식간에 차단당한 놈이 혼절해버렸고, 곽수환은 수갑이 걸쳐진 손잡이를 힘껏 밑으로 내리눌렀다. 빌어먹을. 군용 지프의 손잡이는 수갑을 걸어두는 용도로도 만들어져 있어 쉽게 부러지지 않았다.
산길을 덜컹거리며 내달리니 핸들도 제멋대로 돌아갔다. 이제 지프가 오른쪽을 향해 더 맹렬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두 다리를 뻗어 천장을 밀쳐내며 두 손목은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수갑에 살점이 파이자 얼굴로 피가 떨어졌다. 젠장, 젠장, 빨리 부서져라. 핏방울이 밑이 아닌 천장으로 역류한다 싶었을 때 차가 계곡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