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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 city (3) (17/23)

Rainbow city (3)


우욱, 석화가 구역질을 했다. 손에 닿은 최호언의 서늘한 체온에 소름이 돋다 못해 속이 뒤집혔다. 최호언이 고개를 비틀더니 웃음기를 싹 지웠다.

“비포장도로라 멀미가 나나 봐요.”

“……아뇨.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설마 내가 구역질나서요?”

“…….”

최호언은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며 생수만 내밀었다.

“곽 소령과는 서로 붙어 지내고는, 나는 그저 내 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기억을 찾는데 내가 구역질이 난다고?”

석화는 제주 학습센터에 있을 당시 묘한 동기 한 명을 알았다. 대체로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석화에게는 친절했다. 그런 그가 자신이 키우던 봉숭아나무에 해충이 생기거나 누군가 흙을 파헤쳐 장난을 쳤을 때 180도로 변해 난동을 피우고는 했다.

원래도 혼자 지내는 게 더 좋았던 석화는 그 이후로 그를 더 철저하게 피해 다녔다. 무언가에 병적으로 집착을 발휘하는 상대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 화를 내고 날뛸지 가늠할 수 없으니 조금 두렵기도 했다. 마치 미지의 심해를 볼 때 막연한 공포가 찾아오듯이 말이다.

“내가 구역질나요?”

꼭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최호언에게 석화는 무감각하게 대꾸했다.

“네.”

“어째서? 우린 가족인데?”

“우리는 가족 아닙니다. 제 가족은 곽 소령님뿐이에요.”

최호언이 마스터로서 엄청난 지지율을 자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겉모습에 있었다. 젊은 지도자이자 미남형인 마스터는 사람들에게 묘한 고양감을 심어주었다. 겉으로는 부족함 하나 없이 완벽해 보였기에 제 손으로 뽑은 지도자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다.

석화 역시 최호언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면 마스터로 적합한 차세대 지도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본 그는 아니었다. 석화는 뒤를 돌아 곽수환의 지프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려 했다. 최호언이 얼굴을 거칠게 잡아 돌지 못하게 만드니 다시 구역질이 치솟을 것만 같았다.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죠. 원래 가족이란 다 그런 거니까.”

“최 박사님과 저, 몇십 년이나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나는 알았죠.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와 제주도에서 함께 사는 것도 알았고. 어머니가 내 이야기는 정말 한 번도 하지 않던가요?”

“네.”

그가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놨다.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면서요. 대량 생산이 가능하도록 도와줄게요.”

최호언은 조금 피곤한 듯 아직도 피가 흐르는 팔을 압박했다. 석화는 저자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담도 전부 없애고.”

석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낙오된 자들도 전부 포함해서.”

최호언의 하얀 붕대가 질척하고도 붉은 피로 물들었다. 석화는 낙오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지 않으려 했다. 서펀트에게 휘둘려봤자 좋지 않은 일만 생기는 것을 이미 몇 차례나 겪었다.

“마스터.”

눈을 감고 있던 최호언에게 앞좌석의 군인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최호언은 말하라는 대답만 주었다.

“2호 지프와 무전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당황한 건 오히려 석화였다.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요?”

석화가 바짝 조수석으로 몸을 가져갔다.

“직접 확인하고 와요.”

“예, 확인하고 합류하겠습니다. 만일 합류하지 못하면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스터.”

품에는 권총과 어깨에는 소총, 그리고 무전기까지 챙겨 무장한 군인이 풀썩 내려섰다. 석화도 이참에 내려 보려고 했지만, 최호언이 벨트를 끌어와 몸을 고정시켰다. 퍽, 벨트꽂이 버튼에 잭나이프를 내리꽂아서 빼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다시 출발해요.”

석화는 연방 뒤를 돌아봤다. 무장한 군인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은 곧 어둠에 파묻혔다. 그가 탄 지프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곽수환이 탈출에 성공한 거라 믿고 싶었다.

“한숨 자둬요, 갈 길이 머니까.”

석화는 잭나이프의 손잡이를 잡고 위로 잡아당겨 올려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내 제 몸을 가로지른 벨트만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몸을 시트에 늘어뜨리고 잠을 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러시아에서 내려온 지 그래봐야 며칠이건만 제대로 잠을 자지를 못했기에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어차피 온 신경이 곽수환에게 향해 있었기에 편히 잠들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에서 살 걸 그랬나. 죽을 때까지 곽수환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았다면 이런 불안함은 없었겠지? 석화는 아직도 이런 감정들이 버거웠다. 곽수환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고통이었다. 실제로 몸에 상처가 나면 치료할 곳이라도 확실하게 보이지만, 감정이 아플 때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몰랐다.

석화는 눈을 감고 있는 최호언을 곁눈질했다. 저와 형제라고는 하지만 어느 한 곳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건 세컨드 마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죽음에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여겼건만 석화는 저 자신이 생각보다 감상적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했다. 최호언을 쏘라며 소리치던 모습이 생생한데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도 살아있던 사람이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래요.”

시선을 느꼈는지 최호언이 눈을 슬며시 떴다. 눈이 마주쳤고, 석화는 그를 향한 경계심과 불손한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설마하니 세컨드를 죽인 것 때문이라면,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살려둬봤자 후환만 생길 뿐이죠. 세컨드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부족합니다. 오히려,”

최호언은 말을 하다가 저 스스로 멈췄다.

“변명처럼 느껴지나 보네요. 그래요, 인정하죠. 그냥 죽이고 싶어 죽였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고 싶었거든요.”

곽수환과 밖으로 나와 수많은 아담의 죽음을 봤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곽수환은 저를 살리기 위해 수많은 아담을 죽였어도 멀쩡한 군인이나 사람을 살해한 적은 없었다. 러시아에서 저희들이 가진 식량을 뺏고자 쳐들어왔던 불한당을 상대할 때 역시 그는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죽이기가 더 쉬운데, 그런 건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거라서.’

불한당을 제압한 뒤, 거처를 옮기던 곽수환이 말했다. 그때는 그 자신이 살인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다짐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를 걱정한 거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누군가가 칼을 들이밀 때 두 팔을 펼쳐 그자를 품을 선인은 되지 못했다. 죽음은 회피해야 할 장애물이며, 사신을 일부러 마주할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살고자 곽수환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해도 그건 정당방위일 뿐인데, 그는 인간다운 긍지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줬다.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진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기에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세상에서 곽수환이 저를 지켜준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세컨드의 죽음도 애도할 수 있었다.

[마스터.]

지프로 무전이 들어왔다. 석화가 움찔 놀라며 반응을 보였고, 운전병이 최호언에게 무전기를 넘겼다.

“말해요.”

[지프가 계곡에 추락해 있습니다. 물에 잠겨 있기에 들어가 확인을 해봤고, 시체 네 구를 발견했습니다.]

“시체가 네 구라고?”

최호언이 이마에 인상을 썼다.

[예, 추락의 여파로 사체가 워낙 훼손되어 있지만, 네 구가 확실합니다.]

“지원팀 보낼 테니 시체 수습해서 돌아와요.”

[알겠습니다, 마스터.]

최호언이 무전기를 다시 돌려주고는 석화를 쳐다봤다.

석화는 굳어 버린 채로 정면만 응시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시야에 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가 네 구라고 했다. 지프에 탄 사람은 곽수환을 포함해 총 네 명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계곡으로 추락해 모두가 죽었다는 말은 쉽게 믿기 힘들었다. 그러나 석화도 그 가파른 절벽의 계곡을 봤다. 제아무리 곽수환이라고 해도 지프에 갇힌 채로 추락했다면…….

동상처럼 굳어있던 석화가 잭나이프의 손잡이를 쥐고 잡아 올렸다. 손에 땀이 차 미끄러져 내려 칼날과 손잡이의 중간을 잡았더니 그 밑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석화 박사, 그만.”

최호언이 석화의 손을 억지로 떼게 만들어냈다. 진흙을 삼킨 것처럼 목이 꽉 메었다. 놓으라고,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밭은 숨만 새어나왔다. 최호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누가 성대를 망가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정작 곽수환에게 사신은 자신이었다.

***

칼에 베인 두 손은 붕대가 감겨 있었고, 머리카락은 덜 마른 채 숨이 죽어있었다. 눈앞에 그간 볼 수 없었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 아직도 목이 막혀있는 듯하여 그 어떤 음식물도 넘길 수 없었다. 누군가가 상처를 치료해줄 때도, 식탁에 앉혔을 때도 석화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최호언의 멱살을 쥔 뒤로는 마치 배터리가 다 나가버린 물건처럼 얌전했다.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기로 했다. 곽수환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니까. 굳게 믿고 있는데도 확신을 가질 수가 없으니 자꾸만 누가 뒤통수를 쥐고 뒤로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뒤로 고꾸라져 쓰러지고만 싶었다.

“석화 박사님, 백숙 좋아한다면서요.”

최호언의 말대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백숙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석화는 붕대가 감긴 손으로 어설프게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한 스푼 떠먹었다. 괜찮다, 괜찮을 거다. 그러니 곽수환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고 들을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만일 그래서 그가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저도 죽으면 된다. 죽음을 회피하기는 어렵지만, 두 팔을 벌려 죽음을 마주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마음이 아픈 건, 저에게 죽음은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곽수환이 즐겨 보던 사랑 이야기처럼 다시 태어나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곽수환 소령이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요? 나도 안 믿겨서 지원팀이 시체를 수습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데.”

“……그래서 먹잖아요.”

석화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잔뜩 갈라져 있었다.

“수환이는 살았는데……. 나 먼저 죽으면 안 되니까.”

다시 수저를 움직여 기계적으로 입에 넣기만을 반복했다.

***

추락을 바로 앞둔 곽수환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충격에 대비해 앞좌석을 두 다리로 밀어 버텼고, 양 팔뚝 사이에 머리를 넣어 꽉 고정했다.

펑! 수면과 지프가 마찰하는 굉음이 터졌다.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리던 차가 수면과 부딪치니 온몸의 근육이 울렸다. 뚫린 뒷좌석으로 물이 삽시간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프 전체에 충격이 온 덕분에 손잡이가 조금 느슨해졌다.

부력에 움직임이 둔해지기 전에 곽수환은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 뜯었다. 이제 보니 손잡이 안쪽이 철로 되어있었고, 천장 안쪽으로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수갑이 채워진 채 손목을 빼내자 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곽수환은 점차 가라앉는 지프를 뒤로하고 위로 올라가려다가 멈칫했다. 벨트를 하지 않았던 터라 조수석에 앉아있던 대위의 몸 절반이 앞 유리를 뚫고 나가 있었다. 뽀글, 그가 혀를 차자 물방울이 올라왔다. 곽수환은 앞 유리를 뜯어내고 대위를 붙들었다. 계곡의 수심이 제법 깊어 데리고 위로 올라가는 데만 해도 한참이었다.

“하아!”

수면 밖으로 얼굴을 빼내자마자 곽수환이 숨을 토해냈다. 머리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대위의 목에 수갑을 찬 손목을 걸어서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발에 닿는 곳부터는 두 다리로 걸었지만, 옷이 흠뻑 젖어서인지 물 밖으로 나온 몸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게다가 중심이 한쪽으로 유독 처진다 싶더니 추락했을 때 충격을 받은 왼쪽 어깨가 빠져 있었다.

곽수환은 대위를 자갈 바닥에 눕히고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컥! 물을 토해내는 놈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머리가 어찔해 이마를 꾹 눌렀다.

“캑, 쿨럭! 컥!”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 물을 전부 토해낸 대위는 멍청한 눈을 했다.

“……정신 차렸으면 수갑 열쇠나 내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곽수환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피와 뒤섞여 흘러내렸고, 손목의 살점은 넝마가 되다시피 했다. 대위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피가 나는 제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곽수환뿐만 아니라 대위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열쇠.”

곽수환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면서 낮게 목을 긁었다.

“씨발놈들이 무슨 수갑을 외계 운석으로 만들었나.”

그는 더 이상 앉아있지 못하고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대위도 그제야 곽수환이 저를 물속에서 구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단 제 목을 조른 건 둘째 치고 말이다. 핏물 때문에 시야가 빨갰지만, 대위는 제복의 포켓을 열어 수갑 열쇠를 꺼냈다. 손에 쥐고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곽수환은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새끼야, 너 하나쯤은 지금도 어떻게 할 수 있거든. 죽고 뺏길래, 그냥 풀래?”

대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곽수환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에 빠진 어깨를 잡고 끼워 맞췄다. 우득, 하는 소리에 대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존나 아프네.

곽수환이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다시 뱉어냈다. 대위도 곽수환을 따라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꼴로 어디 가십니까? 치료부터, 윽.”

목소리를 키운 대위는 부러진 갈비뼈를 감싸고 신음했다.

왜, 내 꼴이 어떤데. 곽수환이 자문하며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셔츠는 원래 붉은색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피에 절어 있었고, 제 몸에서 떨어져 자갈을 물들이는 색 또한 검붉었다. 누가 보면 아담이라고 착각할 법도 한 모양새였지만, 곽수환은 앞으로 걸었다.

“곽 소령님……!”

“씨발! 석 박사한테 가야 할 거 아니야!”

곽수환이 소리치자 푸드덕, 나무에 앉아있던 검은 구경꾼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저도 말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태로 가봐야 최호언에게 곧장 제압당할 테고, 석화의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괜히 피나 질질 흘리는 모습을 보여 봤자 우리 석 박사 마음 아프기나 하지. 곽수환이 다시금 핏물을 뱉어냈다. 안쪽의 어딘가가 상했는지 핏물이 끊임없이 역류했다.

한참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저 뒤에 드러누워 있는 대위가 보였다. 다리가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을 태어나 처음 경험해보고 있었다. 이 정도로 크게 다쳐 운신이 힘들 정도였던 적은 드물었기에.

아마도 피를 많이 쏟아서 그런가 보다. 문득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보니 석 박사 몸은 맨날 이렇게 무거우려나. 그런 몸으로 잘도 날 따라다녔지. 세포 하나하나에 돌덩이가 매달린 것처럼 딱 죽을 맛인데 말이야.

곽수환이 무너지는 몸으로 나무를 붙들고 간신히 섰다. 나무에 손바닥 모양의 핏자국이 길게 번져 나갔다. 퉤, 다시 핏물을 뱉고 고개를 들었다. 저 앞에서 강렬한 빛이 얼굴을 쏘았다. 설마 죽을 때가 되어서 신이 후광을 내뿜으며 내려오는 건가 싶었다.

나 죽으면 석 박사 엄청 슬퍼할 텐데. 가뜩이나 기운도 없어 얼굴 표정조차 퇴화한 석화가 이제 좀 사람답게 웃는 것도 같았는데. 뭐, 그 미세한 입꼬리의 변화는 남들은 모르고 저만 알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감상은 때려치웠다.

곽수환은 셔츠를 찢어내 후들거리는 손목에 감쌌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며 손의 감각을 일깨우곤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려는 때였다.

치직, 직.

“지프가 계곡에 추락해 있습니다. 물에 잠겨 있기에 들어가 확인을 해봤고, 시체 네 구를 발견했습니다.”

무전을 보낸 군인이 손전등과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군인이 무장을 푸는 건 곧 항복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놈을 노려보는데 왈칵, 입 밖으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다. 곽수환은 그대로 쓰러졌다.

***

러시아에 도착해 혹한을 견디고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거처를 산중턱으로 이동했다.

오래전에 산장으로 이용됐던 곳을 나름 집답게 바꾸고 지냈더니, 근처에 노루 두 마리가 빠끔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인적이 없는 산속에서 지낸 탓일까, 암수 두 녀석은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곽수환과 석화를 물끄러미 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하루가 지나고 또 이틀, 그렇게 일주일이 되었을 때쯤인가 노루 두 마리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석화는 같은 자리에서 유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모포로 몸을 감싼 채 하얀 입김을 내뱉는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장난기가 들었다.

“워!”

곽수환이 노루 두 마리를 겁을 줘 내쫓았다. 너무 극적으로 후다닥 도망가는 터라 쫓아낸 제가 더 민망할 정도였다.

“왜 그랬어요?”

석화가 원망 섞인 눈을 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저는 고라니부터 시작해 온갖 산짐승들을 봤지만, 석화는 밖을 나돌아 다닌 적이 없으니 동물을 제대로 본 일도 드물었을 것이다.

“아마 다시 올 거야. 쟤들도 신기해서 온 거라.”

되는대로 말을 뱉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바람을 타고 묘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노루 둘이 나타나기 전에 항상 맡아지던 향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 마리가 아닌 한 마리였다.

석화는 다시 모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고 곽수환도 마찬가지로 뒤따랐다. 넓적한 귀를 쫑긋거리는 녀석은 몸집이 꽤나 작았다. 어제의 일도 잊었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노루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렇게 녀석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자 향이 더 짙어졌다.

“묘한 냄새 나지?”

“나요.”

“저거 사향노루거든.”

석화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향기를 더 깊숙이 맡았다.

“너무 그렇게 맡지 않는 게 좋을걸.”

“왜요.”

“저거, 저 새끼 좆에서 나는 냄새라.”

정확히는 고환을 감싼 향선낭이라는 데서 나오는 냄새였다. 석화는 또 곽수환이 농담을 한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상관하지 않고 냄새를 맡고 있는데, 다리를 구르던 사향노루가 그들의 뒤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석화의 엉덩이를 코로 툭 찔렀다.

“왜 이래요?”

“글쎄,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곽수환이 앞발을 팍 쳐서 겁을 주는데도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가 도로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개랑은 잘 통해도 노루랑은 대화가 안 통하는데.”

일전에 개자식이라고 했던 말을 재차 끌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향노루의 행동이 이상해 가만히 지켜봤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듯 몸을 밀었다가 앞으로 가서 저희들을 다시 뒤돌아봤다. 곽수환이 산장 안에 걸어둔 소총을 어깨에 메고 나왔다. 둘이 함께 뒤따라가기 시작했는데 눈이 녹아 있어 산길에 발이 푹푹 잠겼다. 대신 사향노루 두 마리가 항상 다니던 길인지 다른 곳보다 길이 완만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니 저 앞에 쓰러져 있는 노루가 보였다. 곽수환이 천천히 걷던 석화를 업고 한달음에 달려 올라갔다. 곰이나 스라소니 같은 천적에게 공격을 당했는지 내장의 절반은 사라지고, 또 절반은 튀어나와 있었다. 수컷은 이미 죽어있는 제 짝을 주둥이로 밀었다. 그러면서 저희들에게 어떻게 해달라는 듯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석화는 그의 등에서 내려와 우울한 얼굴을 했다. 시체가 된 사향노루의 동공은 생기가 빠져나가 혼탁했다.

“살려달라고 온 건가 봐요.”

곽수환은 이미 죽은 놈은 어쩔 수 없다면서 다시 석화를 안아들려 했다. 아무리 날이 풀렸다지만 샌들 안의 맨발이 거슬린 탓이었다.

“가서 아침이나 먹자.”

석화는 곽수환이 자신을 다시 업자 말리지 않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수컷은 왜 그냥 가냐는 듯 둘을 빤히 쳐다봤다. 곽수환이 일부러 수컷이 있는 쪽으로 총을 발사했고, 녀석은 저 깊은 숲 안쪽으로 후다닥 달려 들어갔다.

“왜 그랬어요?”

“다시 오지 말라고. 제 짝 시체를 계속 찾아오면 뭐 해.”

석화가 곽수환을 좀 더 꽉 끌어안았다.

이제 러시아에 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으려나. 이렇게 단둘이 함께 있으면 세상에 사람은 저희뿐인 것 같았다. 그의 온기는 제게 안정감을 주었고, 빈말로도 맛있는 식사라고 할 수 없지만 배는 항상 든든했다. 그러나 사향노루의 시체를 본 순간 둘 다 알게 됐다. 이 깊은 산에서 어느 한쪽이 다치거나 죽는다면, 다른 한쪽만 남아 평생 외로움에 고통 받으리라는 것을.

……곽수환. 수환아.

석화는 중요한 말을 전하고자 그의 어깨에 얼굴을 대고 이름을 불렀다.

“우리도 이제 그만 도심으로 내려가요.”

곽수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

헉, 곽수환이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폈다. 온몸이 아직도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도로 누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방금까지만 해도 석화의 뜨거운 살갗이 느껴졌는데 빌어먹게도 한낱 꿈이었다. 곽수환은 제 팔에 길게 이어진 링거 줄을 바늘 째로 거칠게 떼어냈다.

“대장!”

차 중령은 그 소란에 벌떡 일어났다. 대장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자리를 지킨 탓에 잠시 졸고 있던 터였다.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여기, 어디야.”

곽수환은 목을 울려 잠긴 목소리를 다시 일깨웠다. 어디냐고 물었지만 간이침대와 선반이 놓인 이 장소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시티로 내려가기 전에 석화와 함께 지냈던 하산의 집이었다. 순간 레인보우 시티로 내려갔던 그 며칠이 전부 꿈이었나 싶었다.

“하산(Xacah)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티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곽수환은 곧장 침대를 벗어나 입고 있던 셔츠를 뒤집어 벗었다.

“이대로 시티로 내려간다고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일단 안정부터 취하십시오.”

차 중령은 아직 몸이 성치 않다면서 염려를 토로했다. 곽수환도 알고 있었다. 맨몸뚱이로 가봐야 석화를 무사히 데리고 나올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러시아 말씀입니까?”

“여긴 러시아 아니야?”

별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면서 군화 끈을 단단히 고쳐 맸다. 그런데 그사이 근육이 퇴화하기라도 한 듯 몸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차 중령의 말처럼 다친 곳이 성치 않은 건가 싶어 턱을 쓸자, 손바닥에 느껴지는 까슬한 감촉이 낯설었다.

“차 중령, 나 얼마 만에 일어난 거야.”

차 중령이 곽수환에게 미지근한 물을 내밀었다. 목 안쪽이 빡빡해 한꺼번에 넘기지 않고 석화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천천히 흘려 넣어야 했다.

“오늘로 일주일 채우셨습니다.”

지프가 추락한 날로부터 일주일, 곽수환은 그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공복감이 지나치면 위를 통째로 도려낸 것처럼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는데 지금이 딱 그 상태였다.

“그동안 제가 몸을 움직여드리기는 했지만, 출발하려면 하루 정도는 더 쉬셔야 할 겁니다.”

돌겠군. 곽수환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옷장 문을 열어 반으로 쪼개진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봤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하얀 붕대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얼굴의 상처는 딱지가 떨어져 옅은 생채기만 남아 있었다. 다만 팔을 올릴 때마다 옆구리가 결렸다.

보통 사람보다 상처가 빨리 아무는 편인데 일주일이나 지나도 이 꼴이면 상태가 제법 심각했다는 소리였다. 피까지 토했으니 부러진 갈비뼈가 장기 어디를 찢어놓은 듯도 했고.

“제복은?”

차 중령이 재빨리 구석에 놓인 바구니를 들고 왔다. 피가 많이 묻어 있는 제복은 낡은 바구니 안에 대충 쑤셔 박혀 있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고 넣은 터라 물에 흠뻑 젖었던 제복 코트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곽수환은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방공호에서 챙겨두었던 세컨드의 물건이었다. 전원을 켜봤지만 방전이 되었는지 아니면 물에 빠져 고장이 났는지 액정은 묵묵부답이었다.

휴대폰을 침대로 던지고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켰더니 아직도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석화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소식이 있었다면 차 중령이 먼저 언급을 했을 것이다. 곽수환은 최호언이 개 같은 짓거리만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막연하게 바라기만 하는 제 처지가 엿 같았다.

몸의 감각을 깨우듯 가볍게 팔다리를 움직이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한반도와 경계가 맞닿아 있는 하산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였다. 그에 들짐승들이 판을 치고 다녀 사는 동안 식량 수급에 부족함은 없었다. 다만 본능으로 사는 짐승들인지라 석화는 밖에 함부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면 늘 저 건물 창에서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고개를 들어 작게 난 창을 바라봤지만 석화가 보일 리는 없었다.

곽수환은 전라가 되어 지하수를 끌어올린 물을 몸에 끼얹었다. 저 뒤편에서 늑대 몇 마리가 먹잇감을 탐색하듯 그르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 새끼가 보기에도 내 꼴이 만만한가 본데. 그는 대야째로 들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고 물을 뿌렸다. 늑대 두 마리의 기척이 바로 뒤에서 느껴진다 싶었을 때 탕, 총성이 터졌다. 물건을 챙겨 나온 차 중령이 늑대가 있는 곳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이다. 괜한 살생은 피하고 싶었는지 겁을 줘서 내쫓고만 말았다.

아담 바이러스가 세상에 나타난 뒤 생긴 특이점 중 하나는 멸종위기종의 개체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동물원을 탈출한 보호종들이 산으로 가 새로이 삶의 터전을 잡았고, 그 덕에 바이러스 감염 경로에서 일정 이상 떨어질 수 있었다. 짐승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담에게 감염된 종이나 사체에 입을 대지 않았다. 그 또한 일종의 진화 본능이겠고, 저 늑대의 조상도 아담 바이러스를 피해 하산으로 터전을 이동해 온 개체였다.

“대장, 아무리 대장이라도 피 냄새를 맡은 짐승은 위험합니다.”

“설마 늑대한테 물려 죽을까.”

곽수환은 차 중령이 건넨 비누와 면도기로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석화와 산에서 지낼 때는 예리한 칼날로 수염을 밀고는 했었다. 보호구역인 제주도 출신인 데다 물 부족함 없이 산 석화는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전염병은 대체로 비위생적인 상태에서 더 잘 퍼진다고도 했지. 물론 아담 바이러스처럼 예외인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굳은 핏물을 비누로 닦아내니 피로감은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다. 그러나 석화를 생각할 때마다 미칠 것 같은 초조함에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박살내고만 싶었다. 그래서 차라리 짐승이 덤비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흥분은 일을 그르치게 한다는 걸 알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허비했으니 저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애들은?”

“일단 시티 군의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 나눠 배치했습니다. 아무래도 대장은 최호언이 가장 집중적으로 찾을 테니 여기로 왔고요.”

“나 도와준 놈, 누군지 알아?”

무전을 하며 총을 내려놓던 군인은 그 이전에 봤던 기억이 없었다.

“예, 사실 하산에 도착하고도 대장 상태가 심각해서 러시아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나 싶었는데.”

불현듯 좁은 골목을 통로 삼아 엔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물기를 다 닦아내지도 않고 옷을 걸쳐 입었다. 다가오는 군용 지프를 유심히 쳐다봤더니 그 안에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한 놈은 제가 구한 놈이고, 한 놈은 저를 구한 놈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둘은 평범한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에라이, 씨불놈들.”

그들의 뒤에서 사투리는 아니지만 묘한 말투가 들려왔다. 한국말임에도 러시아어의 억양이 한껏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뒷좌석에서 내린 노인은 칵 퉤, 하고 걸쭉한 가래침도 뱉어냈다.

“운전 한번 개좆같이 하네.”

영감이 내뱉는 욕설의 대부분은 곽수환에게서 습득한 것이었다. 곽수환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곤 다가온 영감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영감이 왜 여기 있어.”

“내가 네놈을 찾았으니까. 개잡놈이 뭐가 그리 급해서 다리까지 부수고 시티로 쳐 내려갔냐?”

영감이 나를?

“그러는 네놈도 날 찾은 건 아니고?”

“그러게. 덕분에 발품 팔 일은 덜었네.”

백신 개발에 지대한 도움을 준 영감은 전처럼 술에 찌들어 있거나 미친 사람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생명력이 넘쳐나는 게 그간 회춘약이라도 개발한 건가 싶었다.

“네놈 박사는 어쩌고.”

영감의 직설적인 물음에 오히려 차 중령이 당황했다.

“영감, 온 김에 나 좀 도와줘.”

곽수환은 건조하게 부탁했다. 그런데도 거절한다면 목을 꺾어버릴 기세였다.

“쯧쯧, 미련한 잡놈아. 애초에 누가 말도 없이 떠나라고 했냐.”

곽수환과 석화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철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산으로 내려간 건 영감에게는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람들은 곽수환과 석화가 함께 살아주기를 원했기에 인사도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사실을 알자마자 영감이 뒤를 따라왔고, 늙은 몸을 이끌고 도착한 지 이제 꼬박 하루였다. 아직 하산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둘은 이미 시티로 내려갔다가 한바탕 일을 벌인 뒤였다.

러시아를 떠난 지 단 며칠 만에 피 칠갑이 돼서 돌아온 곽수환을 보고 영감은 혀를 수백 번이고 찼더랬다.

“병신 같은 놈아, 네놈이 빠진 어깨를 대충 끼워놔서 진짜 어깨 병신 될 뻔했어. 갈비뼈나 어깨는 그렇다 쳐도, 전쟁나면 사람이 단순히 총 맞아서 죽는 줄 알아? 첫째가 과다출혈이고 둘째가 상처 감염으로 죽어. 네놈도 죽을 뻔했다고.”

영감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힙플라스크를 꺼내 곽수환에게 던졌다. 은색 스테인리스 술병 안에는 위스키가 반쯤 차 있었다.

차 중령이 말리기도 전에 곽수환이 술을 입에 넣었다가 헹구고는 바닥에 뱉었다.

“저, 미친놈이! 마시라고 준 술을 그렇게 버려!”

싸한 알코올 향에 오히려 정신이 더 퍼뜩 들었다. 그 바람에 다리의 통증은 좀 더 선명해졌다. 손 한 뼘만큼 찢어졌던 허벅지에는 스테이플러가 찍혀 있었고, 과다출혈을 지껄인 것을 보니 영감의 솜씨였다.

“넌 누구 쪽이야.”

곽수환은 손가락을 들어 기절 직전에 봤던 군인을 가리켰다.

“시티 육사 52기, 조운 대위입니다.”

착, 소리가 나게 두 다리를 붙이고 이마에 손까지 올렸다.

“이유가 있어서 날 구했을 거 아니야. 그 옆에 있는 놈은 멱살 잡혀 여기까지 왔을 테고.”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곽수환이 건물 안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와.”

밤이면 늑대뿐만 아니라 곰도 출현하는 곳이라 골치 아픈 일은 지금으로도 족했다. 석화와 지내던 3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 벽면에 곤충 몇 마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투명한 날개 밑의 몸통은 금속 색을 띠고 있어서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반짝거렸다. 저게 뭔지도 모르고 겁도 없이 석화가 잡아서 손에 올린 적도 있었다. 대놓고 호기심이 많아 이따금 저를 놀라게 할 때가 여러 번이었다. 하필이면 차 중령이 데려온 곳이 석화와 함께 지내던 건물이라 이성을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문득 영감이 벽에 붙은 곤충 한 마리를 떼어내더니 이리저리 돌려보고 입에 넣었다. 아득아득 씹는 소리가 나자 군인 두 놈이 경악에 찬 얼굴을 했다. 차 중령은 문을 단속하는 중이라 보지 못한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흥, 시티 놈들은 배가 불렀나 보지. 이런 딱정이인지 뭔지도 식량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고.”

그러면서 한 마리를 더 잡아서 입에 넣으려고 했다. 자신을 조운이라고 밝힌 군인이 영감의 손목을 잡았다.

“모시금자라남생이잎벌레입니다. 지금 식량이 필요한 건 아니니 놔주십시오.”

“뭐?”

“배고픈 건 아니시잖습니까.”

돌에 이어 저놈은 곤충 집착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외우기 힘든 이름이었다. 그러나 곽수환은 모시금자라남생이잎벌레, 그 이름을 머릿속에 똑똑히 담았다. 석화를 만나면 저 곤충이 그런 이름이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알려주려 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곽수환은 영감에게 휴대폰을 던졌다.

“문명의 이기! 이야, 오랜만에 보는구만.”

“전원이 안 들어오는데 고칠 줄 알아?”

“열어보면 알겠지. 원래 인간도 장기에 문제가 있을 때 살가죽을 열어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잖아? 나중에는 세포까지도 열었지만, 끌끌.”

영감이 휴대폰을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 사이 곽수환은 불쑥 바지를 벗고 브리프 차림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문 살에 파묻힌 스테이플러 심을 떼어내면서 두 군인을 쳐다봤다.

“고맙다.”

곽수환이 조운을 향해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세상에 마땅히 해야 할 게 어디 있어. 먹여주고 키워준 시티를 배신한 꼴이 됐는데, 후회 안 해?”

“저는……. 시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운이 조금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럼?”

문을 단속하고 돌아온 차 중령이 이번에는 붕대를 건네왔다.

“대장이 추천해준 인사 아닙니까? 씨를 뿌리면 알아서 자라나는 놈들은 자라고, 아닌 놈들은 놔둔다고요.”

심에 살점이 딸려 나오자 곽수환이 인상을 썼다.

아담 소탕을 다닐 당시에 홀로 남은 아이들을 학습센터로 보냈던 일이 종종 있었는데, 조운이라는 놈도 그중 하나인 듯했다. 행여 마스터들에게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고아들을 센터로 보낼 때는 늘 다른 군인을 추천인으로 앞세우고는 했다. 이제 보니 끽해봐야 스물 중반쯤 됐으려나. 만일 놈이 십 대일 때 만났다면 기억하지 못할 법도 했다.

“정말 기억 안 나십니까? 저 녀석 이름도 대장이 지어주셨잖습니까.”

“내가?”

곽수환은 혹시 저 새끼 스파이 아니야? 싶은 듯 시선을 매섭게 바꿨다. 그만큼 전혀 기억에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손은 멈추지 않고 심을 다 빼낸 허벅지에 붕대를 둘둘 말았다.

“저보고 조자룡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곽수환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아마 한창 삼국지를 읽을 때였던 것 같았다. 저놈의 이름을 조자룡이라고 지어줄 수는 없으니 본명을 붙여준 것이다.

“몰라볼 만도 하지. 많이 컸네.”

아담으로 변이한 부모 때문에 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아사 직전에야 발견된 녀석이었다. 십대 후반이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해 체구는 초등학생만도 못했다. 시티의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았기에 제 돈을 써서 학습센터로 보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어렸던 옛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그런 변덕을 부렸던 거다.

“너는 어쩔래, 다시 시티로 돌아갈 거면 가든가.”

곽수환은 말없이 서 있던 군인을 턱짓했다. 아까 보니 추락 때 다친 발목이 다 낫지 않았는지 걸을 때마다 절뚝거리기도 했다

“……정말 연합국이 없습니까?”

휴대폰을 분해하던 영감이 갑자기 껄껄거리면서 크게 웃었다.

“상병신들 천지구만! 연합국이 없어진 지가 언젠데!”

태어날 때부터 레인보우 시티의 세뇌 학습을 받고 자란 김 대위는 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 여자 친구가 사실은 남자였다거나, 부모가 알고 보니 진짜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는 게 더 그럴싸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고 있어도 모른 척하면 적어도 시티에서는 삶이 좀 편하거든. 그러니까 돌아가도 상관없어.”

김 대위도 반 만신창이 상태로 잡혀 오며 온갖 생각을 했었다. 기회를 봐서 시티로 다시 돌아가려고도 했지만, 과연 군이 자신을 무사히 풀어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곽수환을 이송하다 놓친 꼴이 되었으니 저조차 반군이라고 몰아세워 군의 실수를 은폐할 수도 있었다.

“백신……도 정말로 진짜였습니까?”

“야야, 저 새끼 버리고 가라. 두 눈으로 쳐보고 궁금한 게 저리 많아. 개좆밥 새끼인가.”

그 며칠 못 본 사이에 영감의 욕설이 한층 진화해 있었다. 영감의 수많은 단점 중 가장 참아줄 수 없는 건 시끄러운 점이라는 걸 재차 깨달았다. 게다가 욕설의 대부분을 저에게 배웠다고 우겼지만 저는 저런 말은 쓴 적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한 마디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곽수환은 영감이 들고 있는 휴대폰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럼 시티가 왜 거짓말을 한 겁니까? 왜 마스터들은. 장군들은…….”

김 대위는 과부하에 걸린 기계처럼 말을 버벅댔다. 영감이 김 대위를 향해 제 양말을 벗어서 던졌다.

“멍청한 놈아, 뭐긴 뭐야. 지들 사리사욕 플러스 우월감 때문이지. 권력이나 재력만큼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게 남들이 자기를 우러러보는 거거든. 그거에 맛 들이면 절대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남들이 다 나를 우러러봤는데 어느 날 하찮게 보게 되는 걸 버틸 수 있겠어? 그럴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괴물이 되고 말지. 뭐, 괴물이 된 인간들만 위에 가득한 게 지금의 시티가 아닌가?”

말을 바쁘게 하면서도 영감 또한 손을 놀리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분해해 후후, 칩을 입으로 불기까지 했다.

“영감님께서는 생김새는 시티 사람인데, 왜 러시아에 계신 겁니까?”

내내 침묵하던 차 중령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나? 따지고 보면 나도 시티 사람이었지. 연합국이 무너진 사실을 안 뒤에 시티를 벗어나 러시아로 넘어와 자리 잡은 거고. 애초에 내가 면역체라서 아담이고 나발이고 솔직히 관심 없지만 뭐. 이건 곽가 저놈도, 박사도 아는 사실이고.”

곽수환은 영감에게 다가가 분해한 휴대폰을 다시 순차적으로 끼워 맞췄다.

영감은 조력자였지만 세상에 제가 완벽하게 믿는 사람은 오로지 석화뿐이었다. 분해한 과정을 눈에 담고 있었기에 다시 맞추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보아하니 기계 안에 피가 스며들어 먹통이 된 듯했다. 곽수환이 전원을 켜자 휴대폰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이, 곽가. 내가 왜 아담 바이러스 면역체겠어.”

잠금을 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눌러야 했다. 세컨드가 설정한 비밀번호 값이 뭘까 가늠하며 영감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나도 박사처럼 아담 바이러스 박사이자 제주도 출신이거든.”

영감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니들은 모르지? 시티의 박사들이 만든 괴물이 바로 저놈이라는 거.”

***

코피가 나오면 고개를 뒤로 젖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지만, 고개를 가눌 수가 없었다. 목에 힘이 다 빠져 억지로 세우려고 해도 무너지고 넘어가기가 일쑤였다. 코에서 나오는 선명한 붉은 피가 목으로 역류하기도 하고 입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흐윽…….”

툭, 고개를 떨구니 흘러내리는 폭포처럼 셔츠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어 느슨히 벌어진 입 밖으로 걸쭉한 피가 또다시 흘러내렸다.

“하아…….”

동공의 초점을 다잡기가 힘들었다. 쿨럭, 피가 기도에 걸리자 기침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셔츠에 물감을 흩뿌린 듯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석화야.”

저를 다정하게 부를 사람은 곽수환뿐이었다.

최호언의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목구멍에는 피가 가득 차 그륵거리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최호언은 하얀 천으로 석화의 입술과 코를 닦아주었다. 어째서인지 손을 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나 괴로워 눈앞의 사람을 붙들고 고통을 분산시키고 싶었으나 두 손이 하얗게 바래도록 의자 손잡이만 쥐었다. 누군가가 시력을 앗아가는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컥, 석화가 다시 한번 피를 토해냈다.

“왜 이러는 거지.”

최호언은 마치 이럴 리가 없다는 듯 혼란스러워했다. 피가 멈추지 않아 적혈구 수혈을 했음에도 석화는 오히려 피를 더 쏟아내고 있었다. 동공이 돌아가고 고개가 뒤로 확 꺾이자 최호언이 급히 석화의 고개를 숙이게 했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누르고 다문 입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목에 찬 피를 뱉어내게 만들었다. 빗속을 전력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석화의 몸이 축축했다. 그러나 갓 열탕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의 열은 엄청났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최호언은 난생처음 두려운 감정을 마주했다.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기고 얼음을 쏟아 부은 욕조 안에 석화의 몸을 뉘었다. 입술이 삽시간에 새파래졌지만 흘러내리는 피는 좀 전보다 줄어들었다. 최호언은 욕조 턱에 앉아 석화의 손을 쥐었다. 힘이 없는 손을 가져와 제 뺨에 대고 석화를 내려다봤다. 석화는 하나뿐인 자신의 형제이며 구원자이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남긴 최대의 유산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욕실 문을 두드렸다. 최호언은 석화의 몸을 끌어내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안았다. 자꾸만 기울어지는 얼굴도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여전히 코에서는 미약하게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음을 삽시간에 녹여버릴 정도로 높았던 열은 최호언의 체온만큼 낮아졌다.

“들어와요.”

제복을 입은 유정경이 욕실 문을 열다 말고 움찔했다. 전라 상태인 석화의 뒷모습을 본 탓이었다. 죽은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핏기 하나 없었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염탐꾼이 된 듯했다.

“마스터, 백신을 투약 받은 이들을 찾아내 전부 처리했습니다.”

“이채윤 소령과 양상훈 소령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음, 그럼 조운과 김호일 대위는 곽수환 소령이 심어둔 사람이었다는 건가.”

정예군을 편성할 때 최호언이 모두의 인적사항을 확인했는데, 그들 중 곽수환과 접점이 있던 군인은 없었다.

아니면 곽수환이 오래전부터 생각보다 판을 크게 벌이려고 준비했다든가. 그도 아니면 곽수환에게 협박을 받고 거짓 무전을 보낸 뒤에 죽었든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이유는 대위들 몸에 심긴 추적 칩 때문이었다. 그들의 신호는 세컨드가 있던 벙커가 아닌 강원도 연천쯤에서 끊겼다. 그 이야기는 시티 관할을 벗어났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박사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유정경이 보기엔 마치 시체 같았다.

“별일 아니에요. 수혈에 거부 반응을 보인 것뿐입니다.”

최호언은 석화의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겨주었다. 이어 다시 열이 오른 석화의 몸을 욕조에 넣었다. 유정경은 순간 한 발 뒷걸음질을 쳤다. 핏물에 빠뜨렸다가 건져 올린 사람처럼 석화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최호언은 젖은 수건으로 석화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기 시작하며, 밖으로 나가라는 말 대신 턱짓을 했다.

“마스터, 감히 제가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봐요.”

최호언은 아끼는 인형을 씻기기라도 하는 듯 손길이 퍽 다정했다.

유정경은 석화를 본 이후부터 손가락에 불쾌한 통증이 일었다. 곽수환이 분질러놨던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은 지는 오래지만 완전히 뒤틀어놨던 터라 움직임에 제약이 따랐다. 마스터의 정예부대가 곽수환을 놓쳤으니 이제 기회는 유정경에게 온 셈이었다.

“제가 곽수환 소령을 찾아서 죽여도 됩니까?”

“곽수환 소령을 죽인다고요?”

내내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최호언이 관심을 보였다.

“원하신다면 생포해서 데려오겠습니다. 대신 제가 곽수환 소령을 생포해서 데려오면 컨트롤러 직위를 약속해주십시오.”

아, 재미있네.

최호언은 하나도 재미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유정경 소령은 시티 클래스 A군에 속하죠?”

“그렇습니다만, 실전에는 두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가 허락만 해주신다면 정예군을 데리고 가서,”

“곽수환 소령이 유 소령보다 부족해 보여요?”

이번에야말로 유쾌한 듯했다.

“힘만 센 무식한 놈이죠. 계율 따위도 지키지 않는 범법자이고요.”

“그렇다면 유 소령은 절대 곽수환 소령을 잡을 수 없겠군요.”

“예?”

“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이길 생각을 합니까?”

걷어붙인 소매 밑으로 붕대 끝자락이 흘러나와 있었다. 최호언은 그 끝을 잡아당겨서 다시 고정했다. 석화가 총상을 입힌 팔뚝은 아직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나가봐요.”

유정경은 좀 더 말을 보탤까 하다 거수경례만 하고 뒤를 돌았다. 곽수환에게 멱살이 잡혀 과천지부로 내려가게 된 뒤로 진급은 반쯤 포기했건만, 사람 일은 이렇게 모르는 거다. 그 잘난 곽수환은 수배자가 되었다. 그 덕에 유정경은 여의도로 복귀할 수 있었고, 현 마스터의 눈에 들고자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냈다.

생포된 석화가 고문이나 처형을 당할 줄 알고 입맛을 다신 게 조금 전이었는데, 오히려 입맛만 버렸다. 어째 곽수환이 애지중지 다루던 때와 크게 다름이 없어 보이는 건가. 아니지,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는 듯했으니 어쩌면 실험체로 삼은 건가?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석화 박사가 면역체라는 소문이 있었으니 말이다.

에덴동산 북부지부에 백신을 퍼뜨린 것도 그들이 구원자라고 부르는 석화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

유정경은 여의도 쉘터 최상층을 벗어나고 나서야 담배를 한 대 물었다. 백신 같은 건 이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제복만 보면 세 살짜리 애도 오줌을 질질 싸는데 아무렴, 감히 백신이 나와 군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생겨서는 안 되지.

유정경은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주먹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몸이 타는 듯 뜨거웠지만 맞닿아 있는 사람의 살갗은 시원했다. 석화는 그 익숙한 체온에 제 몸을 달래고만 싶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오로지 후각만이 예민하게 살아 있었다. 콧등에 닿는 살갗에서 묵직한 향이 흘러들어왔다. 인위적인 향수 냄새는 제가 아는 그의 체취와는 달랐다. 석화는 의식적으로 상대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여전히 꼼짝하지 못했다.

그날 지원팀이 계곡에서 수거해 온 시체는 단 두 구뿐이었다. 머리가 뚫린 운전병과 추락의 여파로 온몸이 으스러진 소령.

그 시체만으로도 지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석화는 분명 곽수환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시체가 인도된 이후로는 아무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

도주로를 탐색하며 주변도 경계를 세워 살폈으나 여의도 쉘터로 이송된 뒤로는 모든 탈출구가 막혀 버렸다. 단 하나의 가능성은 전처럼 낙하산을 달고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호언이 마스터로 당선되면서 쉘터 내부도 전면 개편되었기에 모든 것이 다 초면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계속 빈혈이 인다고 생각했는데, 음식을 제대로 섭취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토하는 한이 있더라도 꾸역꾸역 무엇이든 입에 집어넣었으니까. 갑자기 코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 손을 대봤더니 코피였고, 십 분이 넘도록 지혈이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피가 쏟아지니 석화는 곧 두 다리로 서 있을 수가 없어졌다.

최호언이 의료진을 불러 적혈구 수혈을 했지만 그때부터가 더 지옥이었다. 헤모글로빈 수치에 이상이 생겨 피를 쏟은 것이건만 오히려 수혈 이후에 더 많은 출혈을 봐야 했다. 혹시 수혈된 적혈구가 백신과 상극 반응을 일으킨 건가?

누군가가 저를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는 듯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문득문득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수액이 이동하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혹시, 곽수환 소령의 피를 수혈 받은 적이 있어요?’

‘석화 박사. 석화야?’

‘……지혈에 성공했습니다.’

‘감염 우려가 있으니 전부 불태워요.’

웅웅, 사람들의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두서없이 울리고 있었다. 고막이 제 기능을 잃은 듯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으니 정신마저도 아득해졌다. 이대로 눈을 뜰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

“일어났어요?”

수액조절기의 속도를 조금 늦춘 최호언이 다정히 웃었다. 검정 수트는 마치 상복처럼 보여서 석화는 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나 싶은 이상한 생각을 했다.

“배가 많이 고플 거예요.”

최호언이 침대 상단의 버튼을 누르자 침대가 천천히 접혔다. 석화는 반 타의적으로 비스듬히 앉아있어야 했다. 최호언은 컵에 담긴 유동식 수프를 가져다댔다. 빨대가 꽂혀 있었지만 빨아들일 힘조차 없었다. 다행히 출혈은 멎었는지 내려다본 시트는 하얗고 깨끗했다.

석화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최호언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을 입 속에 넣었다. 따뜻한 물을 조금씩 흘려주니 마른 목이 천천히 풀려갔다.

수프가 담긴 스푼이 입술로 다가왔고, 석화는 입술을 벌려 천천히 삼켰다. 기껏해야 목울대를 울리는 일뿐인데 온몸의 힘을 다 쏟아야 했다.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시선을 올리니 안도하는 최호언이 보였다. 알 수가 없다. 생판 남처럼 살아온 사이인데 왜 저에게 저런 애착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가 이마에 손을 올리자 시원한 체온에 곽수환 생각이 났다.

“……싶어요.”

최호언이 갈라진 소리를 내는 석화에게 귀를 가져다댔다.

수환이가 보고 싶어요. 보내줘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굽힌 허리를 펴고는 다시 수프만 입에 떠 넣었다.

“먹기 힘들면 호스라도 끼워서 넣어줄까요?”

유동식이라 괜찮을 텐데. 최호언이 동생을 위하는 형 행세를 했다. 석화는 스푼이 입술로 올 때마다 어떻게든 목 안으로 삼켰다. 머그잔의 반도 채우지 못한 유동식을 먹는 데 걸린 시간은 족히 한 시간 남짓했다. 최호언은 빨리 먹으라는 말이나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석화가 수프를 다 먹는 데만 집중했다.

석화는 시계를 올려다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또다시 수액이 몸을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끼며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손목은 주삿바늘 대신 밴드가 붙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힘이 빠지는 바람에 고꾸라진 몸을 웅크렸다. 석화는 한참이나 같은 자세로 숨을 고르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피를 많이 쏟은 탓인지 빈혈은 여전했지만 정신이 혼미한 수준은 벗어난 뒤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을 손으로 헤쳤다. 벽을 발견하자 차가운 시멘트에 기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걷고 또 걷다 보니 철로 된 문고리가 손에 닿았다. 문고리를 돌렸더니 예상외로 문이 쉽게 열렸다.

문 밖의 천장에서부터 강렬한 빛이 시야를 찔러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었다.

차차 빛에 익숙해지자 저 앞에 앉아있는 최호언이 보였다. 날이 바뀌었음을 알려주듯 그는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석화는 최호언이 있는 방을 차분히 눈으로 훑었다. 창가에는 다양한 화초와 수경재배 중인 식물이 보였고, 한편에는 화학 반응기나 샘플링 기계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연구실인 듯했는데, 최호언의 등 뒤로는 암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석화는 걸어 나와 생수 통을 쥐었다. 컵이 보이지 않아 뚜껑만 따고는 목을 축였다. 최호언이 의자를 빙글 돌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석화에게 다가왔다.

“잘 일어났어요. 계속 누워있으면 몸에 더 안 좋거든요. 기분은 좀 어때요?”

몸이 가벼운 건지, 무거운 건지 가늠되지 않았다. 물을 계속해서 들이켜는 동안 바라본 최호언은 기분깨나 좋아 보였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이곳에 시계는 있지만 달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흘쯤 됐죠.”

최호언은 석화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의자를 확 빼내고는 석화를 가죽 시트 위에 앉혔다.

“함부로 다루지 마시죠.”

가라앉은 석화의 목소리가 스산했다.

“석화 박사가 일어나길 내가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렸는지 몰라요.”

최호언은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화면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잔잔하던 표면에 균열이 일었다.

“어서 봐요.”

다정하게 석화의 양 어깨를 감쌌다. 현미경과 연결된 화면에는 얼핏 다이아몬드 모양을 닮은 바이러스가 보였다. 바로 아담 바이러스였다.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공격적인 성향을 띠는 이유는 뇌에 있었다. 세로토닌은 사람의 공격성을 억제하는 신경물질로 알려져 있는데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세로토닌 분비가 중단되고, 전두엽의 기능 또한 상실된다. 아담들이 뼈나 살점이 날아가도 움직일 수 있는 건 뇌의 비정상적인 활동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담을 사살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머리를 박살내거나 심장을 뽑아버리는 일이었다.

석화가 개발한 백신은 아담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혈액 내에서 활동이 중지되는 양상을 띠었다. 오양석 박사와 함께 세웠던 가설, 즉 조류에게 생성된 새로운 형질의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덕이었다. 현존하는 조류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신종 인플루엔자와 아담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된 종과 그렇지 않은 종.

조류가 아담의 시체를 파먹어도 감염이 되지 않는 경우는 전자에 속했다. 신종 인플루엔자와 아담 바이러스는 혈액 내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없었다.

두 바이러스에 노출된 조류가 알을 낳으면 그 새끼도 마찬가지로 보균체가 되는데, 바이러스 DNA가 포함됐기 때문이었다. 조류의 경우 인간보다 수명이 훨씬 짧기에 현 조류의 경우 대다수가 양 바이러스 보균자였다.

백신은 신종 인플루엔자에서 반응 중지를 유도하는 항원을 찾아내 석 달에 걸쳐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니터 안에서 활동 중인 아담 바이러스는 공격적으로 적혈구를 파괴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염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뇌사에 빠질 수준으로 보였다.

그간 봐왔던 바이러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셈이었다.

“이 혈액 샘플이 누구의 것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바로 백신을 투여 받은 사람의 혈액이죠.”

최호언이 석화의 두 손을 그러쥐어 박수를 치듯 포갰다.

“그리고, 저 새로운 아담 바이러스는.”

우리 석화 박사 몸에서 나온 것이고, 곽수환 소령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도 동일하죠.

뒷목을 간질거리는 숨결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최호언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아버지는 그러셨어요. 아담에게서 자유로우려면 바이러스 그 자체를 품으면 된다고.”

그는 기이하게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신인류죠.”

***

연합국 체제 아래 레인보우 시티가 세워지고 약 5년 뒤, 연합국은 제 힘을 잃고 와해됐다.

제 밥그릇이 두둑할 때야 남의 빈 밥그릇을 채워줄 여유가 있지만, 서로 자신의 나라를 돌보기에 급급하니 5년이나 유지된 것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각 국가가 제 정상 궤도에 오를 때까지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레인보우 시티도 자치정부로 거듭났다.

연합국이 존재할 때는 눈치가 보여 반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하지 못했지만, 자치정부가 된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레인보우 시티는 생존자 중 우수한 학자들을 모았다. 분야는 바이러스 혹은 생물학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학자, 고고학자들까지 모아두고 바이러스를 타파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온갖 가설이란 가설을 세워 인체실험을 강행했고, 몇십 년간의 연구 끝에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담 바이러스는 현 기술로 처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시티가 일부러 아담 바이러스를 변이시켰다는 반군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백신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시티였다. 그런데 변이 바이러스를 만든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티의 마스터들은 그 소문을 부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이용했다. 변이 바이러스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건 그만한 기술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으니까.

‘우리는 변이하는 아담 바이러스를 막을 기술이 없습니다.’보다 ‘우리는 아담 바이러스를 변형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지만, 백신을 만들어 도움을 주는 정부이니 함부로 도전하지 말라.’가 사람들을 통제하기에 훨씬 효과적이었다.

물론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치료제 없는 바이러스는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면역항체를 가진 자들을 찾아내려 했지만, 불특정다수를 잡아와 마구잡이로 바이러스를 주입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시티와 연구원들은 특정 대상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어째서 제주도에서만 면역자들이 나왔는가? 그에 대한 답도 아주 단순명료했다. 제주도 거주민을 상대로 실험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실험체로 삼은 토착민의 수가 줄었고, 외부에서 들어온 권력자들은 저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었다.

다양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유전자 편집이 시도된 건 에덴동산이 세상에 드러남과 거의 동시였다. 시작은 모두가 뜻을 같이했다. 원호 박사, 석화의 어머니와 곽수환의 부모까지.

그들은 후세대가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했고,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을 근원으로 삼았다. 아이러니하지만 네 개의 강은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인류를 말살할 파괴력을 가진 바이러스가 탄생하게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네 개의 강은 그들이 직접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생명의 창조에 도전했다. 수많은 배아가 희생됐고, 그보다 더 많게 장애를 가진 태아가 탄생했다.

“그때 말이지, 그 미친 짓을 하겠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곧장 러시아로 올라갔지.”

영감이 힙플라스크에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영감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은 마치 유령처럼 침묵했다. 할아버지 곁에 손주들이 옹기종기 모여 옛 이야기를 듣는 설렘 따위는 없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할 진실만 쌓여갈 뿐이었다.

곽수환은 섣불리 휴대폰의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한 채 몸통만 거세게 쥐었다.

“연구원놈들이 뭔가를 아주 대단하게 아는 것 같지? 아니, 그렇지 않아. 그랬다면 그 수많은 아이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야. 그중에서 멀쩡하게 태어난 놈들이 바로 지금 살아있는 돌연변이들이지. 아주 우습게도 놈들이 그랬다더군. 돌연변이의 탄생은 신의 선물이자 기적이었다고.”

영감이 뭐가 그리 웃긴지 끅끅 대면서 배를 잡았다.

“내 부모도 전부 바이러스 연구원 출신이었지만, 그들에게 반기를 들자마자 처형당해 죽었지.”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탄생한 자신과 석화, 그리고 다른 돌연변이들. 아마 시작은 세컨드 마스터도 함께했을 것이다. 그러다 네 개의 강들은 뜻을 달리하게 됐고,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는 저와 동생을 숨겼다. 석화의 어머니인 이진연 또한 석화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고 제 손으로 키워냈다.

네 개의 강이 갈라진 원인은 원호 박사에게 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나 곽수환은 그딴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왜 곽가 네놈을 꺼림칙해했는지 이제 알겠어? 곽가, 너는 지옥에 갈 거다.”

“저 영감이 감히!”

차 중령이 발끈하자 곽수환이 손을 뻗어 막았다.

“영감, 영감, 하지 마. 듣는 영감 기분 나빠. 그런데 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박사와 네가 무슨 죄가 있나 싶었지. 병신아, 이 상병신아. 쯧쯧. 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떠나래.”

“영감은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나이 꽉 찬 영감이 자신들의 뒤를 따라왔다는 건 그가 전하고자 하는 사안이 목숨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괴팍한 노인네가 짐승이 위협하는 횡단 열차 길을 따라왔을 리가 없다.

“곽가, 네놈은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나?”

쓸데없는 개소리 지껄이면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아예 없애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몸이 먼저 굳어버렸다.

“흥, 없겠지.”

영감의 말 그대로였다. 살면서 감기에 걸려본 적은 없었다. 그게 당연했고, 워낙 건강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곽가, 시티가 너 같은 괴물을 만들었다는 말이야. 너는 모든 바이러스에게서 자유롭지. 그 이야기는 네놈이 모든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소리이고.”

곽수환은 그제야 확 손을 뻗어 영감의 멱살을 쥐었다. 자신보고 독이라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야.”

“문제는 네놈이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도 네놈들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정도로 생각하지는 못했어. 그래서 수혈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수혈……?”

곽수환이 형형한 눈을 하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박사는 지금 어디 있나.”

***

석화는 또다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쉘터 내부의 병실에 고립되다시피 했으며, 커다란 비닐 커튼이 침대 주위를 감쌌다. 정신을 차리고도 몇 번 또 까무룩 쓰러지는 바람에 또다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애매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눈을 떴던 때보다 정신은 훨씬 더 선명했다.

흐르는 피를 그냥 두었더니 침대 시트에 뚝뚝 떨어졌다.

“아, 씨발, 야!”

석화를 감시하던 유정경이 소리를 냅다 질렀다. 옆에 있던 티슈 박스를 던지자 이마에 모서리가 찍혔다.

“저 병신 새끼, 저런 것도 못 잡아요.”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유정경이 씹던 껌도 뱉었다.

“마스터가 되게 애지중지하데? 곽수환하고만 이런 거 아니었어?”

두 손을 포개 공기를 압축하는 소리를 냈다. 유정경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는 최호언의 지시를 깨고 석화에게 다가갔다. 없는 사람 취급하는 바람에 화가 나 손을 확 들었는데도 석화는 멍하니 코피만 쏟고 있었다.

전처럼 코피가 계속 나오는 건 아니었고, 멈췄다가 다시 가느다랗게 흐르기도 했다. 석화는 그럴수록 눈과 귀가 희한하게도 더 밝아지는 것 같았다. 몸에 과도하게 도는 피가 밖으로 배출되는 듯 개운한 느낌도 들었다.

“야, 너 무슨 병 있냐?”

석화는 언성을 높이는 유정경을 무시하고 최호언이 보여줬던 바이러스를 떠올렸다. 저는 면역체였고 백신이 듣는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 안에 신종 아담 바이러스가 있다고 한다. 더욱이 놀라운 건 제가 아담으로 변이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석화는 한 가지 확고한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에덴동산 북부지부에서 제가 맞은 피는 일반적인 아담의 혈액이 아니라는 가설 말이다.

‘우리 석화 박사 몸에서 나온 거고, 곽수환 소령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도 동일하죠.’

곽수환은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적이 있었을 거다. 다만 그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담 바이러스가 휴면 상태로 잔존해있었을 테니까.

곽수환이 그날, 아담의 피를 자신의 것으로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만큼 제가 아담의 혈액을 투여하는 것을 원치 않아했다.

석화가 티슈를 뽑아 코밑을 눌렀다. 이제 피는 멎어서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여태 곽수환에게는 어떤 백신도 효과가 없었다. 그건 달리 말해 백신이 필요한 몸이 아니라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자 없는 돌연변이이자 신인류, 석화는 이제 그 말을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어째서 최호언이 곽수환을 종마라고 지칭했는지도.

그는 모든 바이러스에서 자유로웠다. 바이러스 면역체계가 곽수환의 DNA 염색체에 포함되어 있으니, 그 자손은 전부 바이러스 면역을 가진 채 태어날 것이다.

곽수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들은 아담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질병에서 자유로울 거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그의 혈액을 수혈 받아 괴사하는 과정인지 융화되는 과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단 한 번 러시아에서 곽수환에게 수혈을 받았을 때, 그때도 크게 앓았지만 무사했다. 앞선 수혈로 면역체계가 생겼다면 두 번째도 무사할 가능성이 크겠으나 그날 동시에 맞은 백신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야, 너 미쳤냐?”

생각을 정리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더니 유정경이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놔요.”

“싫은데?”

“하아……. 나한테서 떨어져요.”

위험하다고 석화가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짝, 뺨에 불이 튀었다.

“이게 씨발, 나도 남자 새끼 구멍에 관심 없거든? 떨어져? 네 불알이나 떨어뜨릴까? 코피나 질질 싸대고 픽픽 쓰러지고, 남자 구실은 하냐?”

뺨을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이리저리 돌려봤다.

“이참에 내가 떼어줄까?”

밑을 잡으려고 하자 석화가 발버둥을 쳤다. 정말로 아래를 잡아 뜯을 기세로 손에 힘을 주었다.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쥐어 던졌더니 이번엔 유정경의 얼굴에 티슈 박스 모서리가 부딪혔다. 연한 눈가가 찢기면서 붉은 줄이 갔다.

“아나, 씨발!”

“상처 만지지 말아요. 그 손으로……!”

이미 유정경은 제 눈가를 손으로 거칠게 비비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석화가 또다시 막으려 하자 뺨을 한 대 더 후려쳤다.

“어차피 일 터져서 마스터도 없겠다, 너 오늘 어디 한번 내 손에 뒤져봐.”

석화는 절망에 가깝게 유정경을 바라봤다. 제 뺨을 쥐고 흔든 바람에 그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비빈 눈가에도 저의 피가 번져 있었다. 석화는 이죽거리며 다가오는 유정경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이미…… 늦었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 늦었지. 내 화를 가라앉히기에는 존나게 늦었어.”

유정경이 주먹을 쥐고는 석화의 배를 후려치려 했다. 까서 볼 거 아니면 마스터도 모를 테고, 석화가 쪼르르 일러바칠 것 같지도 않았다.

젠장…….

곽수환의 입버릇처럼 석화가 중얼거렸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냐면서 주먹을 휘두르려는 때였다. 바닥으로 뭔가가 뚝뚝 떨어졌다. 석화는 저기 떨어져 있으니 그렇다면 이 피는 저의 것이었다.

“어……. 어어?”

유정경이 코를 막더니 이내 흐르는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펼쳐봤다.

“뭐야, 이게……. 왜 이래.”

석화는 제게 뻗어오는 유정경의 손을 피해 좀 더 침대 끝으로 붙었다.

“……야. 이거……. 쿨럭.”

비틀거리면서 다가오는 유정경에게서 벗어나고자 석화는 침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로 계속해서 물러나니 등에 비닐 커튼이 닿았다. 한쪽에서 흐르던 코피가 이제는 양쪽에서 나기 시작했다. 유정경이 콸콸 쏟아지는 피를 두 손으로 막았지만 출혈은 계속됐다.

석화는 그 모습을 더 보지 못하고 바닥을 기어 비닐을 들었다. 유정경이 따라오는 소리에 황급히 나자빠지듯 나갔더니 기침과 함께 팍, 터진 피가 비닐에 뚝뚝 흘러내렸다.

석화는 다시 기다시피 해 문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피웅덩이에 쓰러진 유정경이 보였다. 석화는 문 옆에 놓인 세면대에서 제 얼굴의 피를 깨끗이 지워나갔다. 위험해. 피가 노출돼서는 안 된다. 셔츠도 벗어서 던지고 병실 옷장에 있는 긴 병원복을 꺼내 입었다.

문을 열었더니 복도에 군인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비상구를 향해 달려 나가는 때였다. 펑! 익숙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폭발음에 뒤를 돌았다. 복도 창밖으로 저 멀리 거센 불길에 휩싸인 건물이 보였다. 일렁거리는 불길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석화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비상구로 달려갔다.

문을 확 열어젖힌 순간, 제복을 입은 군인 몇 명이 보였다. 고개를 휙 쳐든 군인들 중 한 명은 잇몸이 다 드러날 정도로 윗입술이 찢겨 있었다.

저건 군인이 아니라 아담들이었다.

“위험합니다! 후퇴하세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문을 닫으려 했지만, 아담들이 밀고 들어온 게 더 빨랐다. 석화의 코에서 다시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후퇴하라는 신호를 또다시 들었음에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아담이 코앞이었다. 잇몸을 드러낸 아담이 저에게 얼굴을 확 들이밀다가 이내 우뚝 멈춰 섰다.

……ㅂ.

……이브.

크륵거리는 짐승 소리에 뒤섞인 인간의 언어가 들렸다.

***

오늘로부터 약 세 달 전, 블라디보스토크.

곽수환은 석화의 두 손을 제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평소보다 체온이 낮은 석화를 불안한 눈으로 살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미동도 없으며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한 지도 벌써 이백 일이 넘었다. 미친 영감을 만나 낡아빠진 연구소에서 둘이 같이 연구를 한 것까지는 좋았다. 무리만 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애초에 석화는 무리를 할 수 있는 체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감기라도 걸린 걸까? 발열이나 기침 증상이 없으니 대체 석화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이 거주하는 연구소는 아담 출현 전, 생물안전 3등급으로 인정받은 곳이었다. 연합국이 무너지고 시티처럼 체제가 잡히지 않은 블라디보스토크는 약탈의 온상지가 됐다. 다만 이 안은 위험균을 취급한다는 경고표지가 어딜 가나 눈에 띄어 웬만한 물건과 기계들은 무사했다. 제아무리 약탈자라고 해도 바이러스에 경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경고표지가 없는 곳은 이미 약탈자들이 쓸어간 지 오래였다.

영감이 연구소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사는?”

곽수환은 석화만 본 채로 대뜸 물음을 날렸다.

말이 도서관이지 책과 책장은 땔감으로 털려 처음엔 먼지만 가득했었다. 곽수환이 저희들을 위한 방으로 새로 꾸민 터라 지금은 침대 매트리스나 책상만 봐도 여느 방처럼 그럴싸했다.

“의사는 어디 있냐고.”

영감은 스테인리스 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다른 쪽 손에는 주사기와 빈 팩을 들고 있었다.

“여기가 시티인 줄 알아? 의사는 무슨. 그리고 시발 놈아, 내가 반 의사다.”

영감의 말투는 러시아 억양이 섞여있어 얼핏 사투리 같기도 했다.

“혹시 석 박사가 이상한 약이라도 주사한 거야?”

평소에 석화가 제 몸에 직접 임상실험을 했다는 것은 알지만, 저를 만나고 나서는 위험한 일은 피해갔었다. 그러니 그게 아니라면.

“이 미친 영감탱이 너냐? 네가 그런 거야?”

영감은 싸가지 없는 곽수환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늘 굶주린 눈으로 석화를 형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기에 한숨만 쉬었다. 제아무리 시티에서 저희 둘만 넘어왔다지만 곽수환의 집착은 타인이 보기에도 엄청났다.

혼자서는 연구소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고, 동네 사람이 와서 먹을 것과 약품을 교환할 때도 팔짱을 단단히 끼고 석화의 뒤를 지켰다. 그런 놈이 석화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저럴 수밖에. 영감은 나이도 한참이나 많은 제가 참아야지, 하고 석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피가 부족해서 그래.”

“피?”

석화의 하얗게 뜬 얼굴만 보면 흡혈귀 같기는 한데, 저 송곳니로 누굴 씹을 힘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시티에 있을 때야 영양섭취를 골고루 잘 했겠지. 박사가 저 몸을 하고도 나름 멀쩡히 산 이유가 뭐겠어. 네놈이 욕을 하는 시티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있었기 때문이지. 저 꼴을 해갖고 여기서 태어났으면 다섯 살도 못 넘기고 죽었어.”

영감의 촌철살인에 곽수환은 할 말이 없어졌다. 제아무리 석화를 챙긴다고 해도 시티에서 편히 살 때와 비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석화는 지금 겨우겨우 견디다 쓰러졌다는 소리였다.

“네놈 피를 수혈할 거야.”

“그래도 돼?”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영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놈하고 박사 혈액형도 같겠다, 뭐가 문제야. 아니면 이대로 놔두든가. 그럼 정신을 차리든지 시름시름 앓다가 더 약해져서 고꾸라지든지 하겠지.”

곽수환이 제 팔을 쓱 내밀었다. 영감은 장갑을 끼곤 혈기 왕성한 곽수환에게서 피를 빼내기 시작했다. 2리터를 뽑아도 날아다니고도 남을 놈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수작을 부리면 얼굴과 몸통을 분리하겠다는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먹을 걸 못 먹으면 피가 부족해?”

곽수환은 빈혈이 어째서 생기는 것이며 어떤 느낌인지도 알지 못했다.

“네놈은 박사가 햄스터라서 연방 땅콩이나 아몬드를 먹는다고 생각했어? 철분이 부족하니 저 살고자 어떻게든 먹는 거야. 네놈은 이해 못 하겠지만, 이백 년 전만 해도 다들 오륙십도 못 넘기고 죽었어. 특히 약하게 태어난 개체는 애초에 일찍 죽고 말았지. 뭐, 지금은 그렇게 퇴보해가는 중이지만 말이야. 결국에 신이 철퇴를 내린 거지.”

“영감, 에덴동산 소개해줘? 신 운운하는 거 보니 잘 맞겠어.”

곽수환의 정맥에서 바늘을 빼내는 영감의 손이 움찔했다. 영감탱이, 술 좀 작작 마시지. 수전증이나 있고 말이야. 곽수환은 피가 몽글몽글 솟는 제 팔뚝을 소독 솜으로 한 번 눌렀다가 바닥에 던져버렸다. 접이식 의자를 끌어와 석화가 누워있는 침대 근처에 앉아 팔짱을 꼈다.

“시티는 왜 배신하고 나온 거야.”

“충성한 적이 없는데 무슨 배신.”

“그렇다면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겠어? 왜 백신을 개발해서 돌아가겠다는 건가.”

제 피가 석화에게 들어가는 걸 보고 곽수환은 묘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마치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를 직접 잉태하는 기분이었다. 이로써 석화와 저는 정말로 한 가족이나 다름없어진 거다.

“곽가, 백신도 이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겠다, 그냥 여기서 사람들에게 좋은 일 하며 사는 게 어떤가.”

물어보면 곧잘 대답을 하는 석화와는 다르게 곽수환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좋은데, 석 박사는 싫대. 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나.”

씁쓸해하는 곽수환과 다르게 영감은 오히려 석화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곽수환은 무인도에 뚝 떨어뜨려놔도 살아남을 놈이지만, 박사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다면 죽고 말 거다. 그러다 문득 팔짱을 낀 곽수환을 돌아봤다.

“대체 두 놈은 어떻게 합이 맞은 거냐.”

서로 석 박사, 소령님, 그렇게 부르니 박사와 군인이라는 건 알겠는데, 직종이 다른 둘이 함께 시티를 벗어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석 박사가 나한테 반해서 정액 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는 바람에 마음이 좀 동했어.”

누가 들으면 석화가 곽수환에게 열렬한 구애라도 한 줄 알겠다. 여태 무식한 소령이 매끈한 흰 달걀 같은 박사에게 반해 생각 없이 따라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실제로 이곳에서 주민들과 어떤 마찰도 없었기에 곽수환은 석화 몰래 담배나 피우러 다니고 술이나 빨러 다녔다. 그뿐이랴 호시탐탐 기회를 보며 석화에게 못 붙어서 안달이었다. 그런 날은 원래도 유령 같은 석화가 더 비실대며 연구실로 내려오고는 했다. 영감 눈에는 열심히 백신을 만들고자 연구실에 틀어박힌 석화와 달리 곽수환이 한량처럼 보였다. 그저 똑똑한 박사가 좋아 보디가드를 자청하는 놈팡이였다. 쯧쯧, 저런 화상이 뭐가 예뻐서 함께 있는 건지 박사 걱정에 늘 혀만 찼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맨몸으로 온 둘이었다. 중간에 약탈자들도 만났을 테고, 곰처럼 거친 육식동물을 수없이 마주했을 텐데 그들은 아주 멀쩡했다.

“시티에서 왔으면 철길을 따라왔을 텐데, 그 주변에는 곰이 자주 출몰하지. 그것도 사람 고기에 맛을 들린 놈들이고.”

“한 번도 못 봤는데.”

“아담만큼 무서운 게 굶주린 짐승들이야. 그런데 한 번도 못 봤다고?”

“우리가 운이 좋았나 보지.”

“라즈보이니크도 운이 좋아 피했나?”

석화만 향해 있던 곽수환이 영감에게 고개를 돌렸다. 관심 갖지 말라는 듯 사나운 눈으로 돌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때마침 조용하던 침대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님.”

곽수환은 벌떡 일어나 석화에게 다가갔다. 시체처럼 고요하던 석화가 드디어 앓는 신음이라도 내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 괜찮아. 좀 더 자도 돼.”

하얗기만 하던 얼굴에 조금씩 홍조가 도는 것도 같았다. 다가가 손을 만져보니 원래 체온처럼 조금씩 열이 돌아오고 있었다. 적잖이 안심한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를 커다란 손으로 쓸어주었다.

“네놈들 나타나기 얼마 전이었나. 라즈보이니크의 규모가 갑자기 줄어들었지. 제아무리 얼치기 약탈꾼들이라고 해도 저들끼리 의리는 대단하지. 한 놈이 죽으면 복수를 하겠다고 백 놈이 몰려가는 무리야. 그런 놈들 수가 갑자기 줄었기에 다들 짐승한테 잡혀 죽었을 거라며 박수를 쳤는데……. 놈들이 가진 총기가 몇 갠데 짐승한테 죽었겠어.”

곽수환은 석화가 다시 잠들었는지를 확인했다. 숨은 잘 쉬는지 코에 귀도 가져다댔다.

“분명 사람에게 당한 게지. 그것도 한 놈한테.”

석화에게 이불을 올려준 곽수환은 저보다 두 뼘이나 키가 작은 영감을 고압적으로 내려다봤다.

“그게 뭐.”

마치 석 박사한테 입을 한 번이라도 뻥긋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이었다. 영감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어찔했다.

“곽가, 네놈도 돌연변이였군.”

그렇담 이것도 시티의 놈들이 만든 폐해가 아니던가. 기운이 넘쳐 날아다니는 놈과 비실거리며 멍해있는 박사의 조합이라니. 영감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래도 별 상관 없겠지. 제가 너무 걱정하는 것이겠지. 영감은 무리 없이 수혈 받는 석화를 보고 역시 기우였나 싶었다. 그런데도 찝찝함은 가시지 않아 곽수환이 집어던진 솜과 함께 남은 혈액을 수거했다.

백신이 완성되자 개발법만 남겨둔 석화와 곽수환이 훌쩍 떠나버린 바로 그날. 수혈 이후 가설뿐이던 곽수환의 혈액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다. 그 어떤 백신도 효용이 없던 이유를 말이다.

빌어먹을 레인보우 시티가 정말 성공한 것이다. 곽수환은 그냥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다행히 곽수환의 혈액을 수혈 받은 석화도 떠날 때까지 별반 이상은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면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석화가 개발한 백신과 돌연변이들의 특성에 있었다. 이 모든 진실을 알기까지 석 달이나 걸렸어도 여전히 확신하지는 못했다. 일종의 가설일 뿐이었지만, 영감을 움직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

석화는 숨을 삼켰다. 눈앞의 아담이 분명 이브라는 말을 했다. 동물원에서 봤던 그들처럼.

크륵, 아담은 석화를 빗겨 반대편 비상구에 있는 군인들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한쪽 팔이 없는 아담 하나는 석화를 피해가지 않고, 직접 덤벼들었다.

“윽!”

크아, 끄어억! 온몸에 자상이 가득한 아담이 괴성을 지르며 석화의 얼굴을 짓씹으려 했다. 석화는 안 돼, 안 돼!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담이 입을 벌리지 못하도록 턱을 손바닥으로 한껏 밀었다. 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석화는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아담을 밀쳐내고는 앞으로 기었다.

툭, 투툭. 피가 바닥을 적시고 그 뒤를 아담이 마찬가지로 뒤따라왔다. 한 팔로 바닥을 기어오며 핏물을 질질 흘리는 아담 피에 자신이 흘린 피도 가려져 버렸다.

반대편 비상구로 달려가야 할까? 만일 멀쩡한 군인조차도 저 때문에 감염된다면……. 석화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투명한 창문에 등을 기댔다.

“켁. 케엑.”

갑자기 목구멍에 뼈가 걸린 짐승처럼 아담이 목을 움켜쥐었다. 꾸엑 하는 구토 소리가 들리자마자 촤아악,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석화는 점차 번져오는 그 피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석화야!

그 순간이었다. 그럴 리 없으나 어디선가 곽수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환청일 것이 분명해 두 다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흐읏.”

석화는 고개를 젓고는 좀 전의 병실로 계속 내달렸다. 빠끔히 열린 문틈을 밀치고 들어가는 동안 심장이 마구 박동했다. 유정경이 살아있는 건 아닐까? 저를 칼이나 총으로 공격하면 어쩌지? 두려워하며 문을 꽉 닫고 섰다.

투명한 비닐 안에는 여전히 나자빠져있는 시체가 보였다. 이상하다. 제 몸에 신종 아담바이러스가 돌고 있다면 감염된 이들이 아담이 되어야 하는데 유정경도, 좀 전의 아담도 과도한 출혈을 일으키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석화는 유정경의 시체를 일부러 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드레싱 카트를 끌어왔다. 세면대 앞에 서서 코에서 나는 피를 계속 흘려보냈다. 지혈을 하고자 콧대를 꽉 누르고 흐느낌을 삼켰다.

괜찮을 거야.

출혈이 멈추자마자 석화는 피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도록 깨끗이 닦아냈다. 비누를 잡은 손이 떨리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찰력이 거의 없는 비누가 바닥을 쭉 미끄러져 나갔다. 바닥에 엎드려 굴러간 비누를 주우려 할 때였다.

“!”

눈을 뜨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비닐막 안에 나자빠져 있던 시체가 온데간데없었다. 석화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툭, 등에 스산한 무언가가 닿았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사람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으으- 목을 긁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석화는 그제야 튕기듯 앞으로 가 뒤를 돌았다. 붉은 피로 범벅된 유정경이 며칠 굶은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질척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유……정경 소령님?”

보통의 아담들처럼 흰자가 아주 탁했다. 석화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지만 유정경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탕! 타앙! 밖에서 터진 총성에 석화가 소스라치게 놀랐고, 유정경은 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아담화가 되었는지 지능을 잃은 채 문에 제 몸을 박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저를 공격하지 않는 건가…….

굶주린 짐승은 제 동족도 서슴지 않고 잡아먹으나 아담은 그렇지 않았다. 아담들끼리는 서로 공격을 하지 않는 게 바이러스의 특성이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을 동족으로 인식한다기보다, 서로를 없는 것처럼 취급하는 데 가까웠다.

석화는 두 눈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이럴 때일수록 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곽수환이 없다고 해서 다가오는 위험에 마냥 저를 내던져서는 안 된다.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혀나갔다.

앞서서 자신을 이브라고 부른 개체는 저를 무시하고 달려 나갔고, 다른 아담은 공격을 해왔다. 그러다 자신의 피에 2차 감염 징후를 보이곤 유정경처럼 엄청난 피를 토했다. 유정경이 일어난 시간을 따져보면, 그 아담도 지금쯤 몸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유정경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숙주라서?

석화는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문에 제 몸을 부딪치는 유정경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드레싱 카트에 놓여 있는 핀셋 하나를 들어 꽉 쥐었다. 쿵, 쿵 머리를 문에 박고 있는 유정경을 쿡 찔러봤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온몸의 혈관도 전부 팽창하는 듯했다. 다시 쿡쿡 눌러도 유정경은 저에게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홀스터에 꽂힌 권총을 빼내는 동안에도 유정경은 밖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석화는 피가 묻어 있는 병원복을 다시 벗고, 옷장에 있던 검은 바지와 검은 셔츠로 갈아입었다. 이 정도면 피가 묻어도 티는 나지 않을 거다.

권총을 허리 뒤춤에 꽂고는 내려놓았던 핀셋을 저 뒤편으로 던졌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핀셋이 바닥을 굴렀다. 유정경이 휙 고개를 돌려서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석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문 밖으로 나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문고리를 쥐고 2차 감염 증세를 보인 아담을 찾기 시작했다.

“저 새끼, 저거 뭐야! 저거 아담 맞아?!”

“아담은 맞는 것 같은데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부터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거리를 좁혀가던 군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석화도 마찬가지였다. 열린 비상구에서 들어온 아담과 2차 감염이 된 아담이 서로 천적처럼 물어뜯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란에 유정경이 밖으로 나오려 하자 석화는 완전히 밖으로 나와 쾅! 문을 닫았다. 휙, 앞서 있던 군인이 몸을 돌려 석화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석화는 놀라 반사적으로 두 손을 펼쳐 들었다.

“석화 박사?”

마치 저를 알고 있는 듯한 군인이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던 군인이 제 얼굴을 까보였다.

“위험하니 다시 병실 안에 들어가 있어!”

“……이연태 중장님?”

이게 다 무슨 일이냐며 다그쳐 묻고 싶지만 석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라니까!”

2차 감염된 아담은 다섯이나 되는 아담을 상대로 잘도 버티고 있었다.

“사살합니까?! 아담을 공격하지만, 저놈도 아담이 맞는 듯합니다!”

석화는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을 여는 순간 유정경이 튀어나올 테니…….

“석화 박사! 빨리 안으로!”

“사살하세요! 신종 변이 아담입니다!”

석화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연태는 처음 듣는 석화의 큰 소리에 잠시 당황하더니 총구를 아담들에게로 돌렸다.

“허가한다, 전부 사살해!”

탕, 타타탕! 기관총에서 총알이 난사되기 시작했다. 신종 변이 아담과 비상구를 빠져나온 아담의 몸에 무수한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져 바닥 벽면 어디 할 것 없이 뇌수가 튀었고, 총기를 난사하는 군인들은 으레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좁혀가며 확인사살을 했다. 마지막으로 비상구에 엎어진 시체를 끌어내 빈틈없이 문을 닫았다. 복도가 고요해지자 석화의 등 뒤에서 쾅쾅 하는 소리가 더욱 확실하게 들려왔다.

“병실 안에 아담이 있나?”

“네.”

그래서 못 들어간 거군. 이연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석화를 붙잡아 옆으로 보내려 했다. 석화는 이연태의 손이 닿기도 전에 지레 놀라 제가 비켜버렸다. 원체도 특이한 행동을 자주 하던 석화였기에 이연태는 별 상관 않고 부하에게 문을 열라고 턱짓했다.

조준 자세를 취하고 3, 2, 1, 숫자를 셌다. 1에 맞춰 문이 열리고 이연태는 튀어나오는 유정경의 이마를 한 번에 꿰뚫었다. 푸슉, 곪은 수박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군화로 툭 쳐서 시체를 확인한 이연태가 짧게 혀를 찼다.

“허, 유정경이잖아?”

병실 안에 또 다른 아담이 있을지 몰라 장전을 풀지 않았건만 이놈 하나였다.

“석화 박사, 이 안에 유정경이 혼자였어?”

석화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담한테 감염된 걸 박사가 가둬둔 거고?”

이연태가 매서운 기색을 내비치며 석화의 상태를 살폈다. 석화가 백신을 개발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물린 곳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기색이었다.

“걱정 마세요. 안 물렸습니다. 그래도 다가오지는 마시고요. 제게 아담 피가 튀었을 수도 있습니다.”

석화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간신히 버텼다. 그제야 이연태도 안심하고 방독면을 벗어던졌다.

“그보다 석화 박사.”

안도도 잠시, 이연태가 진지하게 석화를 불렀다.

“내가 애지중지하던 Mk3, 내 방에서 훔쳐갔지?”

“그건……. 곽수환 소령님이요.”

언제 큰 소리를 냈느냐는 듯 석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럼 공범이구만.”

이연태가 호탕하게 웃었다.

***

병실 안의 소파에 이연태 중장과 석화는 마주 본 채로 앉아 있었다. 석화는 제발 더는 출혈이 일지 않기만을 바랐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석화는 일부러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볼 말이지.”

“예?”

“석화 박사는 마스터가 원하는 게 정확히 뭔지 알고 있나?”

최호언이 원하는 것? 신인류의 탄생인가? 만일 자신이 최호언이 말한 신인류라면 기존 사람들은 전부 죽고 말 거다. 어째서 제 몸속에서 아담 바이러스가 변이를 했는가. 그 원인을 알아내려면 바이러스의 진화, 아니 변화 과정을 돌이켜봐야 했다.

처음 러시아에서 곽수환에게 수혈을 받았을 때 저는 저체온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이후 고열에 시달렸고, 그건 제 안에서 아담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곽수환은 아마 낮아졌던 제 체온이 올라왔다고만 생각했을 테고.

저조차도 곽수환에게 아담 바이러스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혈액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내부에 휴면 상태로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가 다른 혈액에 침투했을 때 다시 활동하는 건가? 문득 소름이 돋았다.

만일 곽수환이 S클래스 군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가 쉽게 다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피에 감염된 이들이 속출했을 것이다. 어쩌면 발견되지 말아야 할 곳에서 아담이 발견된 건 곽수환의 피에 감염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채윤과 양상훈뿐만 아니라 쉘터의 모든 이들은 곽수환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지낸 셈이었다. 그러다 다른 가설 하나가 더 떠올랐다.

만일 휴면 상태로 있던 아담 바이러스가 타인에게 옮겨가도 휴면 상태로 유지된다면? 혹시 어떤 자극이 주어져야 바이러스가 깨어난다면……?

그 가설이 맞는다면 그날 제가 맞은 백신이 촉매제가 됐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쪽으로도 쉽게 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오랜 시간 바이러스를 연구해왔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하긴 쉽게 정복되는 영역이었다면 세상에 어떤 병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연태는 한참이나 말이 없는 석화를 차분히 기다려줬다.

“최호언은.”

석화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마스터의 자격이 없습니다. 레인보우 시티를, 아니 바이러스에 면역이 없는 사람들을 전부 죽게 놔두고 말 겁니다. 중장님, 중장님도 일전의 일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의 서펀트이자, 대대적 아담 감염 사태의 주범인 최호언.

이연태 또한 그날 석화의 말을 믿었기에 최호언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게 최호언이 마스터가 되기 위해 벌인 일이라면 그는 당연히 실각당해야 했다. 이연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래전부터 레인보우 시티가 변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부는 고이다 못해 썩어 있었다.

최호언이 마스터가 되고 나서 이 도시가 아주 살 만해졌다는 것은 정리된 외곽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알고도 모른 척을 했다. 썩은 곳을 도려내기 위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세뇌했다.

적어도 최호언은 자신의 사리사욕에 급급하지 않았고 시민들도 기존보다 훨씬 살기 좋아졌다고 하니까, 저 또한 최호언을 따르는 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그렇게 다독였다. 심지어 석화의 말을 믿고 에덴동산에 반하는 방송도 내보냈던 게 이연태 자신이었다. 그런데 마스터는 자신을 용서했고, 곁에 두기까지 했다. 지금의 마스터는 전과 달리 사감으로 사람을 부리는 수장은 아니었다.

“석화 박사. 내가 아직 현장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말이지, 곽 소령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잘나갔었지. 뒷배도 없어 스스로 올라가야 하니 진급에 반쯤 미쳐있었거든. 석화 박사도 내가 그 누구의 라인에 서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그게 내 처세술이었고, 그 덕에 지금도 살아있는 거겠지.”

이연태는 말을 할지 말지 잠시 고심하는 듯 입술을 다물었다. 석화는 쓴 웃음을 입에 걸친 이연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의중을 이해 못한 까닭이었다.

“오래 전 어느 날……. 그린 구역에서 아담이 발생했다는 제보가 들어온 거야. 부부와 아이, 셋이 함께 사는 가정집이었어. 집을 포위하고 안으로 진입했더니 불이 다 꺼져 있고 방에는 아무도 없더군. 그래서 지하부터 샅샅이 집을 뒤지기 시작했어. 마지막으로 다락방이 남았는데 그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났지. 나는 바로 그곳이라고 확신했어. 다급히 문을 박살내고 아이에게 달려가는 남자의 등에 총을 발사했고, 곧장 남자는 쓰러졌지. 아직도 부인의 비명소리가 잊히지 않아. 자기 남편을 죽였다고, 나보고 살인자라고 하더군. 나는 아담을 죽였을 뿐이니 확인 사살을 위해 남자의 몸을 뒤집었는데……. 아담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었어. 군인들이 자신의 집을 포위하니까 겁부터 먹은 거야. 무슨 일이냐고 따졌다간 잡혀갈까 봐 두려웠겠지. 그래서 아이와 함께 다락방에 몸을 숨긴 것이겠고……. 그런데 아주 우스운 건, 아담 제보가 허위신고였다는 거야. 전날 다툰 옆집 사람이 앙심을 품고 그따위 신고를 한 거지. 내가 직접 그 남자를 처형했고, 나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지. 석화 박사, 이게 정상인가? 나는 벌을 받지 않아도 됐던 건가?”

석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연태 중장을 만났을 때 무사히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조금 전부터 불안한 감각이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적어도 전보다 지금의 마스터가 더 나은 사람이라고 확신해. 그였다면 그날 내게 죗값을 물었을 거야. 진실을 숨기기 위해 일가족을 죽이고 신고자의 가족까지도 전부 죽인 나를 살려두지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레인보우 시티는 조금 더 나아졌겠지?”

이연태 중장이 석화에게 총구를 돌렸다.

“미안하네, 석화 박사. 나는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강을 건넌 듯해.”

석화도 허리춤의 권총으로 손을 뻗었다.

탕-!

총구가 불을 뿜는 소리가 들렸으나 불행히 제 것은 아니었다.

***

목구멍 안쪽에 심지가 타들어가는 폭탄이 걸려 있는 기분이었다. 주먹을 쥔 곽수환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꿈틀거렸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뜩이나 흐린 두만강의 물은 더 짙은 진흙색을 띠고 있었다.

시티와 러시아를 잇는 다리가 무너진 바람에 시티로 진입하려면 강을 곧장 건너가야 했다. 여의도 쉘터에서 보이는 한강대교보다 폭은 짧지만 강의 유속은 더 거셌다. 겉으로 보이는 물결은 잔잔해도 안이 거칠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저 혼자 강을 건너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육로를 이용해 시티 중심으로 가다 군인들과 마찰을 겪는다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영감의 말이 맞는다면 말이다.

곽수환은 강을 등지고 다시 지프에 몸을 실었다.

젠장, 젠장! 주먹으로 핸들을 후려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거센 고함이 터질 듯했다.

‘박사가 죽을지도 몰라. 아니, 죽었을지도 몰라.’

영감은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석화가 개발한 백신은 신종 인플루엔자에서 추출한 아담 바이러스 반응 중지 항원이었는데, 문제는 제 피에 있다고 했다.

백신을 투여한 뒤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될 경우 그 어떤 현상도 일어나지 않지만, 곽수환에게 있는 휴면 상태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죽은 듯이 활동하지 않던 바이러스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순식간에 적혈구를 파괴해 뇌까지 침투한다.

영감 새끼는 그 또한 바이러스의 신비라는 병신 같은 말을 지껄였는데, 과연 석화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보다는 제 호기심이 더 먼저 작용한 것만 같았다.

곽수환은 하산 안쪽으로 지프를 몰며 속도를 최대로 높였다. 감염 때문에 석화가 죽었을 리 없다. 최호언에게 붙잡혀가기까지 분명 최소 반나절 이상은 자신과 함께 있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도 불안함에 눈이 붉어지다 못해 실핏줄이 다 터져나갈 듯했다.

라즈보이니크. 지금 상황에서는 그놈들의 주머니를 터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두만강 줄기의 하류였고, 동해까지는 불과 15km 안팎 거리였다.

배나 보트를 이용해 바닷길을 따라 시티에 도착한 뒤 도로를 이용하면, 시간을 며칠 이상 단축할 수 있었다. 라즈보이니크 놈들의 주거지인 프리모르스키 크레이까지는 여기서 약 20분이었고, 거기서도 동해 바다로 빠지는 길이 있었다. 곽수환은 머릿속으로 시티까지 가장 빠른 길을 계산하며 시간을 단축해나갔다.

빵, 빵빵! 하산의 건물에 대고 경적을 울리자 조운과 김호일 대위가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그 뒤로 영감과 함께 차 중령도 모습을 드러냈다.

“시티로 내려갈 거야. 갈 놈들은 타고, 아니면 러시아로 올라가도 좋다.”

어차피 조운이야 곽수환과 한 배를 타기로 했고, 김호일은 혼자 러시아에서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사실상 곽수환에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따라가겠습니다.”

김호일이 발목을 한 번 돌렸다. 다리가 나았는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영감은 못 돌아가. 나랑 가야 돼.”

“쉽게 갈 거였으면 이렇게 내려오지도 않았어. 나도 고국 땅이나 오랜만에 밟아보자고.”

영감은 이미 준비만반인지 양어깨에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지프 트렁크에 배낭을 던지고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풀썩 앉았다. 항상 옆에 앉아있던 건 석화였는데 그 부재가 영감 때문에 더 실감나 버렸다.

“대장, 그럼 제가 대위들과 함께 뒤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해. 지프에 연료 남은 거 다 싣고.”

차 중령도 급박한 사안인 줄 아는 터라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 남아 있는 연료와 통조림들을 싹 가져와 지프에 실었고, 나머지 대위들도 장전한 권총과 칼을 확인했다.

“그런데 대장, 어차피 지프는 버리고 가야 하지 않습니까?”

준비를 마친 차 중령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부터 양아치놈들 족치러 간다. 바로 준다고 하면 안 죽일 거고, 안 준다고 하면 죽여서라도 뺏을 거고.”

“양아치요? 제가 아는 양아치 말씀이십니까?”

차 중령을 비롯해 다른 대위들도 당황해했다.

“끌끌, 곽가 놈이 라즈보이니크 놈들 털려나 본데. 네놈 배 타고 시티로 내려가려고 하지?”

곽수환이 고개만 한번 끄덕했다.

“그러니 시간 낭비 말자고. 조자룡하고 김 대위인가, 너희 S클래스지?”

“시티에서 판정받은 결과로는 그렇습니다.”

조운은 차 중령처럼 대장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듯했다.

“그럼 알아서 살아남아. 러시아 도적놈들 회유 안 되면 한 놈도 빠짐없이 죽이고 보트 뺏을 거니까.”

곽수환은 핸들을 한껏 감아서 프리모르스키 크레이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약탈자놈들의 본거지가 여기서 가까워 처음에는 곽수환과도 큰 마찰을 일으켰다.

러시아에 도착해 산으로 들어가기 전 이곳 하산에 제일 먼저 터를 잡았는데, 순찰 돌던 놈들이 귀신같이 알고는 저희가 가진 음식과 차를 빼앗으려고 찾아왔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두 놈 머리통을 박살내주니, 그 다음 날 열댓 놈이 우르르 몰려와 총질을 해댔다. 물론 총알 아까운 건 아는지 한 놈당 겨우 세 발에 그칠 뿐이었다.

석화의 안전이 걱정돼 다른 곳에 대피해 있다가 밤이 되자 놈들 주거지로 쳐들어갔다. 먹을거리와 유통기한이 지난 의약품들을 되레 훔쳐왔고, 거칠게 반항하는 놈들 몇 명은 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본보기로 몇 놈을 잔인하게 처리해놔야 뒤탈이 없기도 했으니까.

그날 밤, 석화에게 길가다가 주웠다면서 복숭아 통조림을 줬더니 뭐라던가.

‘소령님, 너무 맛있어요.’

정말 석 박사다운 대답이었다. 돌이켜보니 괜스레 속이 상했다. 저는 밑바닥부터 살아온 인생이라 아무거나 잘 먹지만 석화는 아니었다. 그 맛있는 걸 저는 얼마 먹지도 않고 배부르다면서 자신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 씨발, 우리 석 박사 당연히 살아있을 텐데, 이렇게 감상적으로 변하고 싶지는 않다.

비포장도로를 달려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여전히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오래전 폭격당한 건물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도시 전체가 폐허를 연상케 했다. 그중 멀쩡한 벽돌집 앞은 늑대 이빨과 뼈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무로 된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보드카를 들이켜던 배불뚝이 하나가 지프를 발견하더니 소리쳤다.

“블랴찌!(Блядь!)”(씨발!)

보드카를 들고 벌떡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놈의 발치 근처로 총을 발사했다. 악! 소리를 지른 놈은 술병을 움켜쥔 채로 인상을 콱 썼다. 저 대머리는 약탈꾼들의 우두머리였는데, 지프만 봐도 누군지 아는 기색이었다. 곽수환은 권총을 장전해 차문을 발로 차 열었다.

“블랴찌 뽐니쉬 미냐(Блядь, помнишь меня)”(새끼야, 너 나 알지)

곽수환이 너, 나 알지? 대충 비슷한 말을 했더니 대머리가 가래침을 걸쭉하게 뱉어냈다.

“빠숄 나 후이(Пошёл на хуй)”(좆까)

“저 십새끼가 어디서. 영감, 좋은 말로 할 때 보트나 내놓으라고 통역 좀 해봐.”

영감이 창 밖으로 얼굴을 쓱 내밀고 통역을 하자 대머리가 이번엔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동시에 집 안에 남아 있던 장정들도 총을 들고 뛰쳐나왔다.

“엎드려 있어.”

곽수환은 다시 문을 닫고 기어를 넣더니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바퀴가 헛돌아가다가 곧장 놈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투투툭! 놈들이 총을 쏴댔지만 지프의 방탄유리를 뚫지는 못했다. 곽수환은 망설임 없이 도망가는 우두머리를 향해 지프를 가져다가 박았다.

쿵! 대머리가 지프와 현관문 사이에 낀 채로 쿨럭, 피를 토해냈다. 곽수환은 다시 차문을 열고 뒤로 도망가는 놈들을 한 발에 한 놈씩 쐈다.

기어를 넣어 다시 후진하니 대머리가 주르륵 나무 바닥에 나자빠졌다. 곽수환은 그제야 지프에서 내려 군홧발로 저벅저벅 걸었다. 때마침 차 중령과 대위들도 도착해 후방에서부터 곽수환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곽수환은 대머리의 멱살을 잡아들어 일으켰다. 크아아악! 괴성을 터뜨리는 걸보니, 척추나 장기 어딘가가 제대로 망가졌을 게 분명했다.

“보트 내놔.”

놈이 입술을 꾹 다물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곽수환은 대각선 방향에 있는 집 거실 창문으로 탕! 총을 발사했다. 동시에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놈의 자식인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대머리를 걱정하며 창문에 붙어 숨죽이고 있던 아이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쏜다.”

총구를 아이에게 향하자 대머리가 곽수환의 바짓자락을 잡고는 제 이마를 마구 비벼댔다.

“그러니까 보트 내놓으라고, 씨발!”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거든? 곽수환이 재장전을 하니 아이가 비명을 질렀고, 영감이 하얗게 질려 지프 밖으로 튀어나왔다. 영감은 대머리를 붙들고 곽수환의 말대로 따르라고 다그쳤다.

“수까!(Сука!)”(개자식!)

퉤, 욕설과 함께 핏물까지 뱉어낸 놈은 분에 못 이겨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했다. 키를 가져오라는 소리에 창문에 붙어 있던 아이가 재빨리 열쇠를 들고 나왔다. 곽수환은 트렁크에서 밧줄을 꺼내고 우두머리를 조수석에 앉혔다. 몸과 두 팔을 붙여 밧줄로 꽉 메고는 보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뒷좌석에 탄 영감은 탄식만 토해냈다.

“곽가, 마음 급한 것도 알고 박사 아끼는 것도 알지만, 선은 넘지 말어.”

“어차피 넘은 지 오래야.”

곽수환은 선착장으로 향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시티까지의 거리가 멀고도 멀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정신을 못 차린 데다 그 이상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석화가 분명 저를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대머리가 알려준 방향으로 가니 은색 갈치처럼 날렵하게 생긴 보트가 보였다. 적어도 50노트는 되어야 오늘 내로 시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곽수환이 나무다리에서 훌쩍 보트로 올라타 시동부터 걸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보트를 울리는 엔진의 힘이 굉장했다.

“곽가! 이놈이 다 쓰면 부탁이니 꼭 돌려 달래. 꼭 부탁한대!”

총 8인승으로 한때 러시아 부자가 소유하고 있던 초고속보트였다.

“빠숄 뜨이(Пошёл ты)”(꺼져, 새끼야)

곽수환이 대머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영감은 저건 러시아어를 욕만 배웠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프에 있던 식료품과 무기, 연료를 옮기고 나서야 내려갈 인원을 보트에 태웠다. 여전히 지프에 묶인 대머리가 뭐라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곽수환은 무시하고 보트를 몰기 시작했다.

물보라가 얼굴을 후려치며 피부에 따갑게 달라붙었다.

우리는 혼자 남은 노루처럼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너무 늦지 않게 갈게.

***

“씨발! 이연태!!!”

뒤에서 권총을 장전한 남자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이연태는 구멍 난 한쪽 어깨를 그러쥐고 있었다. 석화를 겨눴던 권총은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 이연태는 긴 숨을 내뱉으며 뒤를 돌아봤다. 곽수환은 한 번 더 총을 쏴 양쪽 어깨를 전부 못 쓰게 만들었다. 그가 발로 이연태 중장을 밀어치는 동안 석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떨었다.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봤다. 곽수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떨어져 있던 시간보다 같이 있던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마치 백 년 만에 재회한 것만 같았다.

정말 곽수환, 곽수환이었다. 그를 부르고 싶었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와 주지 않았다. 그가 무사했다. 항상 그랬듯이 곽수환이 저를 잘 찾아와줬다.

“자기, 내가 불렀잖아.”

하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 석 박사 원래 둔한 거 안다는 듯 나무라며 웃었다.

“……수환아.”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석화의 코에서 가느다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곽수환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급히 달려가 석화를 안으려고 하자 석화가 소파 뒤로 몸을 피했다.

“오지 마요.”

석화는 셔츠를 끌어올려 제 코밑을 꾹 눌렀다.

“괜찮아, 나야.”

경기를 일으키듯 고개를 저었다.

“다가오지 마요. 피가 나서……. 안 돼요.”

영감의 말이 개소리임을 증명하듯 석화는 살아있었지만 곽수환이 안도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피를 흘리는 석화를 보니 오히려 제 피가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이연태는 양쪽 어깨에서 피를 쏟으며 소파에 간신히 몸을 기댔다. 재빨리 지혈을 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목숨이 위험해질 지경이어도 석화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칫 제 피가 이연태에게 스며들면, 그는 정말로 인간으로서 삶이 끝나고 만다.

“소령님, 저기 드레싱 카트에 지혈 스펀지가 있어요. 그걸로 중장님 출혈 좀 막아주세요.”

“지금 그게 중요해? 석 박사도 피나잖아.”

“전 괜찮아요. 제가 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딱딱하기만 하던 저 박사가 곽수환에게는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이연태는 마른기침과 함께 웃음을 토해냈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큰 미련은 남지 않는다는 듯 출혈을 막지도 않았다.

곽수환은 드레싱 카트를 돌아봤다가 오히려 석화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석화가 오지 말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곽수환이 껴안은 게 더 빨랐다. 석화는 두 손으로 셔츠를 꽉 붙들고 제 얼굴을 막았다. 곽수환은 석화가 싫어하는 행동인 줄 알면서도 힘으로 그 손을 끌어 내렸다. 석화가 고개를 확 내리자 곽수환이 제 얼굴을 더 밑으로 내려 턱에 입술을 대면서 올라왔다.

“!”

기겁한 석화가 안 된다고 발버둥 쳐도 아랑곳 않고 입술에 혀를 미끄러뜨렸다. 피가 곽수환의 입술에도 묻어났다. 그는 악문 이를 억지로 파고들어 말캉거리는 혀를 찾아내 빨아들였다. 곽수환은 석화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이 껴안고 입 안과 입술을 전부 먹어치울 듯 사납게 키스했다.

아랫입술이 깨물리고 빨리는 동안 석화는 여전히 곽수환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고 밀어내려고 온 힘을 다 짜냈다. 힘 차이가 있다고는 해도 석화가 계속 피하려고만 하니 곽수환이 숨을 씨근덕거렸다.

“바이러스고 나발이고 좆까라 그래. 난 석 박사랑 키스할 거야.”

곽수환이 석화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고 제 쪽으로 확 닿게 올렸다. 비스듬히 고개를 튼 곽수환이 점차 깊숙이 포개어 왔다. 석화는 숨이 가쁜 채로 곽수환의 등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문제가 없기를 바라면서. 거친 입맞춤에 그가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불안해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어쩔 수 없었다. 석화는 반항하기를 그만 두고 오히려 좀 더 곽수환에게 몸을 붙였다.

다행히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고, 그는 상처 난 새끼를 돌보는 어미처럼 혀로 석화의 얼굴을 핥기도 했다.

“하……. 인간적으로 날 죽이든가……. 살리든가, 둘 중에 하나는 하지 그래.”

이연태의 주변으로 피가 넓게 퍼져가고 있었다.

“뭐야, 아직 살아 있었어?”

곽수환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석화를 죽이려고 했던 놈이었다. 마음 같아선 어깨가 아닌 대갈통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석화의 눈앞에서 그딴 짓을 벌일 수는 없었다. 곽수환은 자신이 다짐했던 건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석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새끼, 큭……. 어디 상관한테 반말이야.”

곽수환이 드레싱 카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석화가 곧장 붙어 따라갔다. 그가 괜찮은지 연방 얼굴과 눈동자를 확인하며 불안해했다. 곽수환이 지혈 스펀지를 들려 하자 석화가 그의 손목을 쥐었다. 석화는 그를 향해 조용히 말을 했다.

“소령님, 지금 제 피는 독이에요.”

영감이 저에게 했던 소리를 이제 석화가 하고 있었다.

“대체 왜 키스한 거예요.”

원망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석화는 그가 키스를 한 순간부터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또 입술을 깊게 맞춰왔다.

“좋으니까 했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헬기에서 목이 터져라 불렀는데 쳐다도 안 보더라.”

그가 저를 불렀던 게 어쩌면 환청이 아니었나 보다. 석화는 그런데도 고개를 저었다.

“제 안에서 아담 바이러스가 변이했어요.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개체도 제 피에 또 감염이 돼요. 지금 제 피가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그리고 자신도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다. 불규칙적으로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면 분명 제 몸에도 이상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픈데는?”

“……아프지는 않아요.”

곽수환은 응급처치를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석화가 두고두고 마음 안 좋아할 게 분명했다. 그는 소독솜으로 손을 깨끗이 닦고 라텍스 장갑을 꼈다. 지혈용 스펀지가 들어있는 주사기를 가져가 이연태의 어깨에 입구를 쑤셔 박았다. 악! 거센 비명이 터졌어도 아랑곳 않고 피스톤을 눌렀다. 상처 속으로 들어간 스펀지가 피를 머금고 부풀어 출혈을 막았다. 반대쪽도 처리하고 나서는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죽고 사는 건 이제 당신 운이야.”

총알이 관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환을 제거하는 수술이 필요했다. 지금은 말 그대로 출혈만 막은 응급처치인 셈이었다. 곽수환은 세면대에서 다시 얼굴과 손을 닦고 있는 석화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나가자.”

“어디로요?”

석화는 이런 몸을 해서 어디를 가냐고 되물었다.

“옥상으로.”

그는 석화의 셔츠를 들어 꼬리뼈 근처에 꽂혀있는 권총을 빼냈다. 장전해서 석화에게 넘기고 저는 이연태가 떨어뜨린 총을 주웠다.

“권총은 또 어디서 났어.”

곽수환은 대견하다는 듯이 석화의 정수리에 쪽 입술을 맞췄다. 그는 병실 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복도에는 죽은 아담들만 널브러져 있을 뿐 위협적인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석화를 앞세워 내보내고 잠시 뒤를 돌았다. 정신을 잃은 채로 소파에 쓰러져 있는 이연태가 보였다.

‘석 박사는 용서할지 몰라도 나는 안 해.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을 테니까.’

겨우 석화를 찾아냈는데 눈앞에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준 놈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부러 문 밑의 도어스토프를 내려 문이 열리게 고정해두었다. 그래봐야 1초나 될까 말까 한 순간의 행동이었지만, 앞서 내보낸 석화가 제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석화는 곽수환을 쓱 올려본 다음에 도어스토프를 손으로 들어올렸다.

끼익,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가요.”

이연태가 아담에게 물려 감염돼 죽기를 바랐던 곽수환이었다.

“석 박사, 시티에서는 착하게 살면 일순위로 죽어.”

곽수환이 석화의 손을 잡고 복도를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아니, 저는 착한 게 아니다. 오히려 문을 닫음으로써 이연태 중장이 더 늦게 발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석화는 그가 제 손을 더럽히고 그걸 숨기고자 노력하는 게 싫었다. 러시아에서도 몇 번이나 그랬기에 일부러 모른 척했으나 제 눈치는 그의 생각보다 빠른 편이었다.

“업히자.”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 입구에서 곽수환이 몸의 중심을 낮췄다. 석화는 얌전히 그의 목을 끌어안고 업혔다. 그의 시원한 체온이 느껴지자마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괜찮아요, 정말?”

“내 몸이 온갖 바이러스를 다 무효화 시킨다는데 석 박사 피, 그것 좀 빨아먹었다고 이상 안 생겨. 새 발의 피라고 알아?”

“그래도 바이러스가 변이했으니까…….”

석화의 목소리는 풀이 죽다 못해 희미했다. 그래도 그를 이렇게 껴안고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이제 두 번 다시 헤어질 자신이 없어서 눈에 열이 올랐다.

“석 박사, 나 죽겠어.”

계단을 뛰어올라가던 곽수환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석화가 깜짝 놀라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는데, 곽수환이 다시 석화의 몸을 추슬러 올렸다.

“지금 자기 총구가 내 목젖 겨누고 있거든?”

석화는 권총을 쥔 채로 그를 끌어안고 있던 것도 잊었다. 얼른 총구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석 박사 그거 알아? 목젖을 아담의 사과라고 한대.”

혀를 깨물까 봐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했다.

“선악과를 처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담이 먹어서, 목구멍에 사과가 걸렸다더라.”

곽수환이 연달아 계단을 세 개씩 뛰어올랐다. 그가 걱정하는 저 때문에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게 느껴졌다.

“그러게 왜 처먹지 말라는 걸 먹어서 낙원에서 쫓겨나고 그러냐고. 근데 생각해보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섹스 같은 건 못 했을 거 아니야.”

짧게 호흡을 조절한 곽수환이 마지막 층을 남겨두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에덴동산 새끼들 교리 중의 하나가 철저한 금욕이라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한 달에 한 번만 잠자리를 가져야 한대. 최호언 새끼는 나랑 다르게 고자인가 봐.”

옥상의 문을 밀치니 비가 올 듯 우중충한 하늘이 보였다.

“발기는 해요.”

석화가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면서 대뜸 말했다.

“뭐?!”

“박사님!”

곽수환과 거의 동시에 이채윤이 소리쳤다. 헬기 밖에서 기관총을 들고 대기 중인 이채윤이 박사님! 계속 반갑게 소리쳤다. 브이 자를 그리는 그녀 앞에는 시티의 군인 대여섯 명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어깨를 잡고 충격적인 눈빛을 했다.

“그 새끼가 발기하는 걸 어떻게 알아. 설마 그 새끼가,”

“그냥 아침에 발기한 걸 봤어요.”

“설마 정액 달라고 한 건 아니지?”

“제가 정액 달라고 졸졸 쫓아다닌 사람은 소령님밖에 없어요. 그때는 반한 건 아니었지만.”

‘석 박사가 나한테 반해서 정액 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는 바람에 마음이 좀 동했어.’

그때 깨어있었나. 제아무리 곽수환이라도 이건 좀 민망했다. 그래서 더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씨발놈이라며 최호언만 욕했다. 석화는 계속해서 곽수환의 상태를 면밀히 살폈다. 신종 아담 바이러스는 폭발적인 감염 속도를 보였기 때문에 정말로 곽수환에게는 무효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도 석화의 걱정을 고스란히 읽었기에 머리카락을 새집처럼 흔들어놓았다.

“석 박사,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돼. 아담 바이러스가 수천 번 변이해도 나한테는 소용없어.”

수 천 명의 목숨을 제물 삼아 만들어진 몸이라.

쓰게 웃은 곽수환이 석화를 훌쩍 들어서 헬기에 태웠다. 총구를 군인들을 향해 겨눈 채로 곽수환과 이채윤도 헬기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허리에 줄을 채우고 나서야 문을 연 헬기에 걸터앉았다. 공중에 안착할 때까지 군인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군인들이 손가락만 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이채윤이 헬기 안으로 몸을 옮겼다.

“박사님, 똘수환 새끼 때문에 우리 다 좆됐다?! 하하하!”

이채윤이 마치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그녀의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예?”

석화는 X자로 채워진 벨트를 두 손으로 붙든 채 물었다. 이채윤이 뭐라고 덧붙였지만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버렸다. 곽수환도 옆으로 다가와 앉는 동안에, 석화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채윤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쿠데타라고!”

석화가 눈을 크게 뜨고 곽수환을 휙 쳐다봤다.

“전시상황이야.”

그렇게 됐어. 곽수환이 석화의 귀에 헤드셋을 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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