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Rainbow city (4) (18/23)

Rainbow city (4)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서 두 손을 앞으로 깍지 낀 남자는 가면 안의 눈꺼풀을 느릿하게 내리깔았다가 떴다. 묘하게 권태롭고 지루해 보이는 자세였다.

“아담이 말하길, 이브가 열매를 내게 주었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신이 이브에게 묻길, 너는 어찌하여 그 열매를 아담에게 주었느냐. 이브는 답하길, 뱀이 나를 꾀어냈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고했다. 그리하여 신이 뱀에게 말하길, 너는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저주를 받아,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어야 하리라.”

천장이 높은 예배당 중앙에서 연설을 토해내는 젊은 남자의 표정엔 신념이 가득했다. 그는 서펀트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좀 더 흥분해 평소보다 더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신의 분노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우리는 항상 고통을 받았지요. 아담 바이러스 또한 신이 내린 원죄! 간악하고 사악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신께서 최후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있나니! 아담에게서 자유로운 구원자가 육신을 빌려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구원받은 북부 지부의 형제자매님들은 간악한 무리의 질시로 삶을 달리 했으나 모두 인간으로서 삶을 마감했으니, 이 또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하얀 가면 속 최호언의 얼굴에는 곧 옅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연구원들이 만들어낸 신흥종교 에덴동산은 일종의 연막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연구에 타당성이 필요했고, 그것을 신의 뜻이라 덮어씌웠다. 수없이 많은 실험체가 필요했기에 에덴동산 신도들을 상대로 인두겁을 쓰고 백정 짓을 벌인 것이다.

신이 내린 원죄? 아담 바이러스를 어떻게 신의 철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담 바이러스는 언제고 일어났을 그저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제약회사의 실수일 뿐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으로 세계대전이 발발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던 것처럼 아담 바이러스가 전 세계의 인구를 비약적으로 감소시키리라고는 제약회사조차 예측하지 못했다.

최호언은 네 개의 강들이 만든 에덴동산이 자의식을 가진 듯 교리를 끊임없이 생성해내고 저들끼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 것이 퍽 신기했다. 저는 사실 구원자를 언급한 것 외에 딱히 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 한 줄뿐인 희망이지만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이 오히려 에덴동산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에덴동산의 목적이 실험체를 공급하기 위한 사육장이었다는 진실을 안다고 해도 이제 와 저들의 믿음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다.

최호언은 예배당 지하로 발걸음을 틀었다.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 잠겨 있는 철문을 열쇠로 돌려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잠그니 긴 복도에 불이 순차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걸어 나가던 최호언은 하얀 가면을 벗어 끈을 손에 걸었다. 좁고 습한 공간이 익숙해 불현듯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세컨드 마스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너는 첫째니 이해해야 한다.’

왜 더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지, 왜 시티 밖에서 살아야 하는지 물었던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놈들은 시티를 지킬 돌연변이를 만들길 바랐지만, 그건 잘못된 일이지. 돌연변이들은 한낱 시티를 지키는 도구로서 사용될 자들이 아니야. 완벽한 돌연변이일수록 더더욱 시티에 소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 저는 완벽한 돌연변이인가요?’

‘완벽한 건 비손과 기혼의 첫째 아들이지. 그 아이를 우리가 데려와야 하고.’

‘저는 완벽하지 않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앙상한 팔뚝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첫째야, 너를 위해서다. 고통은 곧 진화의 시작이니까.’

수천 마리의 개미 떼가 혈관을 갉아먹으며 진입하는 고통이 닥쳐왔다. 개미 떼가 지나간 자리는 뼈와 살이 통째로 사라지는 듯 했다. 어깨를 이빨로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자 아버지는 소년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전부 너를 위해서야.’

최호언은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깨닫곤 눈썹을 늘어뜨렸다가 곧 무표정하게 돌변했다.

좀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자 또다시 복도의 불이 순서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괴한 울음소리는 투명하고도 단단한 유리창을 뚫고 들려왔다. 복도 양옆은 동물원 우리처럼 구역이 나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실험체가 들어있었다.

최호언이 지나가는 동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담도 있었지만, 시각이 퇴화되지 않은 구역의 아담은 피에 젖은 손을 미끄러뜨리며 괴성을 질러댔다. 최호언은 그 어떤 곳에도 관심을 두지 않으며 목적지까지 걸어갔다.

그는 가장 끝 방에 다다라서야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벽에 길게 세워진 의자를 끌어와 펼쳐 앉고는 다리를 꽜다. 넝마가 된 옷을 입은 남자는 등을 돌린 채로 모서리에 서 있었다.

천장에 나 있는 동그란 구멍이 열리고 철퍼덕, 전라의 사람 하나가 떨어졌다. 우리로 떨어진 사람은 눈앞에 최호언을 발견하자마자 유리창으로 내달렸다. 크악! 그보다 더 빠르게 모서리에 서 있던 아담이 그의 목을 물어뜯었다. 피가 솟구쳐 유리창에 점점이 묻어났다. 그러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해서 최호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위에서 떨어진 개체는 사람이 아니라 감염된 아담이었다.

방의 원주인은 침입자의 뱃가죽을 이로 물어뜯어 긴 내장을 빠르게 끄집어내고 두개골을 으깨 뇌수를 파먹었다. 마치 식탐 가득한 괴물처럼 보였다.

최호언이 그 모습에 홀린 듯 일어나며 유리창에 이마를 가져다댔다. 방의 주인은 석화의 피를 주입 받은 실험체였다.

“아버지 말씀이 전부 다 옳았어요. 고통은 곧 진화의 시작이라고.”

고통스러워하던 석화를 생각하면 마음은 좋지 않았지만, 진화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고통이라면 참아내야 한다. 저는 가족으로서 석화를 보듬어주고 안아주면 된다. 뜨거운 체온과 고통에 신음하는 숨은 분명 애처로웠다. 그런데 어째서 애잔함과 중첩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는 걸까.

아버지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너무나 슬펐지만 반대로 아버지의 뜻을 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먼저 있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동생과 함께 나눠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알립니다, 경보 발생]

마더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딴 경보음이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최호언은 고개를 들어 스피커를 바라봤다.

[경보 발생, 위기 1호 경보 발령합니다.]

그 소리에 청각이 예민한 방의 아담이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여의도 7, 10, 12, 15, 17, 그린 구역 테러 발생. 위기 1호 경보 발령합니다.]

최호언은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전기를 빼 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마스터!]

조언가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렀다. 마스터의 무전이 있기 전까지는 그의 일정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여의도에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피신이요?”

그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의자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긴급 상황입니다! 이희찬 가문을 필두로 처리하지 않은 퍼스트와 세컨드 라인의 가문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최호언은 천천히 들어온 길을 되돌아 올라갔다.

“여의도 쉘터부터 봉쇄하세요. 쉘터 위기 상황 1급 발령합니다. 서울 내 정예 부대는 전부 여의도로 집결해 모든 다리의 길목을 차단하라고 전해요.”

[명령 하달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곧장 마스터를 방공호로 모시겠습니다.]

조언가는 최호언과 동행했기 때문에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도 여의도 쉘터로 갑니다.”

[마스터!]

최호언은 무전을 끊어버렸다.

쉘터 위기 상황 1급 발령은 일종의 방역을 뜻했다. 쉘터를 봉쇄한 뒤 지하에 갇힌 아담을 풀어 적과 아군 할 것 없이 아비규환을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최호언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적어도 두 시간이면 꼭대기까지 감염이 퍼질 테고, 최호언은 한 시간 안에 최상층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면을 뒤집어쓴 그는 건물을 나와 뿌연 하늘을 마주했다. 비가 오기 전의 우중충한 날씨 때문은 아니었다. 여의도 하늘은 건물에서 치솟는 연기로 가득했다. 헬기 몇 대가 최호언의 머리 위를 연달아 지나가며 소음을 동반했다.

지프에서 뛰어내려 문을 연 조언가는 한껏 겁에 질려 있었다. 만일 반란이 성공해 저들이 시티의 정권을 쥔다면 최호언 라인에 섰던 이들은 전부 죽은 목숨이었다. 기존의 수뇌부들에게 자비는 없었다는 것을 조언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스터, 출발해야합니다.”

조언가는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는 최호언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늦은 것 같죠?”

최호언은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리더니 곧 지프에 올라탔다. 설마 포기한 건가? 싸워보지도 않고서? 조언가는 초조하게 최호언의 지시를 기다렸다.

“지금부터 상공의 헬기 전부 격추시켜요.”

***

[풍산, 진도, 삽살 총 3대, 여의도 상공에서 격추당했습니다.]

“돌았어! 헬기를 격추시켜?”

이희찬이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하긴, 반란이라는데 헬기가 아니라 비행기라도 격추시켰겠지.

“곽수환은?”

[한강밤섬으로 이동 중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곳에서 저희 군과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이희찬 역시 현 마스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차라리 퍼스트나 세컨드처럼 권력욕에 찌든 사람이었다면 대하기는 편했을지 모르나, 뭘 원하는지 속내가 보이지 않는 마스터이기에 일부러 확고한 거리를 두었다.

게다가 자신의 딸에게 전해들은 바도 있었다. 최호언이 서펀트이고, 마스터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떤 짓을 벌였는지 말이다. 탐욕스러운 놈과 사이코 중에서 제가 모실 사람을 고르라면 차라리 전자가 나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여태 기회만 보며 웅크려 있었다.

‘백신을 그쪽 가문에서 독점 배포하게 해주겠습니다.’

때마침 곽수환이 달콤한 제안을 해왔다.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시체처럼 짠내를 풍기던 곽수환은, 당장에 선택을 하라며 형형한 눈을 했다. 곽수환이 러시아로 넘어간 후에도 차 중령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았으니 백신 개발은 사실이었다. 이희찬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배포만? 개발법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더니 곽수환이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뜸들이지 말라고 다그쳤다. 대신 쉘터를 제외한 여의도 외곽 건물에 불을 질러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마스터가 석화 박사를 구금한 상태입니다. 박사를 구해 와야 백신도 대량 생산 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일에 발 담그는 건 사양이지만 무려 백신이었다.

철새, 하이에나. 명예 가문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별명이었다. 이희찬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그간 가문들 사이에서 서러움을 받아왔기에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헬기에 탄 우리 애들은 다 탈출했어?”

그녀는 한숨을 숨긴 채 수화기에 대고 말을 이었다.

[부상자는 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그보다……. 이번 사태의 주동자가 저희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뭐?”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 이희찬이 더할 수 없게 인상을 구겼다.

[펭귄이요.]

“제대로 말 안 해?!”

[황제 펭귄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펭귄의 날갯짓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며 백신을 배포하리라. 이 선전문구가 퍼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곽수환이 탄 헬기는 펭귄 마크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 어쩐지 쉽게 전부 넘겨준다 했어. 그 새끼가 잘도 날 이용했지.

게다가 채윤이까지 같이 데리고 갔으니 제대로 핏물에 발 담가버린 셈이었다. 그래도 놈 부모 덕분에 몸 건강한 채윤이를 가질 수 있었으니 이걸로 보답 한번 한 셈 치자고.

사람들을 이상한 방향으로 현혹시키는 에덴동산도 슬슬 밀 때가 됐다. 종교와 정권의 일체화라니, 지금 최호언을 막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손쓸 수 없어질 거다. 이성으로는 이해하지만, 울분이 풀리지 않은 그녀는 쾅 소리가 나도록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소령님.”

“응?”

석화는 헬기 안에서 마구 날아다니던 종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했다. 마이크가 탑재된 헤드셋을 꼈기에 헬기 내부에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은 무리 없이 가능했다.

“펭귄은 못 날아요.”

“그래?”

곽수환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온갖 산짐승은 다 봤는데 그도 펭귄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날개는 뒀다가 뭐 해. 하긴 서펀트도 발기는 되는데 고자잖아? 아니 근데 그 씹새끼는 왜 아침발기를 보여주고 지랄이야.”

하여간 저 새끼, 석화 박사님이 했던 말 때문에 제대로 뒤끝이 남았구만. 귀가 썩는다, 썩어.

이채윤이 제 헤드셋을 확 벗었다. 너무 솔직한 것도 독이 되는 법인가 보다.

“미안해요.”

“자기가 왜 미안해. 최호언 새끼가 노출증 환자인 걸 어쩌겠어. 그렇지?”

절대 최호언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그가 보여준 게 아니라 아침이라 그랬던 것뿐이었다. 석화는 아무래도 조금만 솔직해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헤드셋을 약간 빗겨 썼다. 그리고는 그의 말이 맞는다는 듯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 그러나 혹시나 또 코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돼 연방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곽수환은 석화의 머리를 쓱 끌어안아 걱정 말라는 듯 입술을 맞댔다.

밤 모양을 닮은 한강밤섬의 한 곳에서 불빛이 깜빡 빛나고 있었다. 헬기가 불빛을 찾아가 착륙을 시도하자 프로펠러 밑으로 수풀이 소란스럽게 몸을 부딪쳤다. 완전히 안착하기 전에 기우뚱거리는 헬기 밖으로 곽수환과 이채윤이 뛰어내렸다.

먼저 나간 곽수환이 마중하듯 두 팔을 벌렸고, 석화는 미끄럼틀을 타듯 헬기 밖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우리 형 용감하네.”

여간 대견한 게 아닌지 석화의 어깨를 꽉 끌어 안고 외쳤다.

“한강 줄기 따라서 곧장 여의도 쉘터 라인으로 날아!”

“여의도 쉘터 말씀이십니까?”

파일럿은 명령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되물었다. 여의도 쉘터 옥상에는 비행물을 피격할 수 있는 소구경 대공포가 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격추된 헬기에서 피어나는 불길도 봤기에 명령을 철회해줬으면 했다.

“쉘터 대공포는 내가 박살내놨으니까 그냥 믿고 날아! 합류 인원 보낼 때까지 과천 쉘터에서 대기해.”

곽수환의 고함에 조종사가 고개를 한번 끄덕했다.

헬기가 떠날 동안 풀이 공중으로 회오리쳐 석화는 손으로 눈가를 막았다. 밤섬의 11시 방향으로는 정박 중인 보트 5대와 서른 남짓한 용병들이 대기 중이었다. 헬기와 다르게 펭귄 마크는 꼼꼼하게 가려져 있었다.

본래 레인보우 시티는 어느 가문이든 사병을 거느릴 수 없지만, 황제 펭귄가는 시티 밖의 A급 이상 능력자들을 추려 용병으로 이용했다. 말이 용병이지 오합지졸인 시티의 B급 군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채윤이 보트에 훌쩍 올라타더니 모터에 손을 올렸다.

“과천에서 합류해?”

“아니, 바로 영종도로 가.”

한강 물길이 서해까지 이어진 데다 아라뱃길을 따라가면 거의 직진코스나 마찬가지였다.

“영종도? 지금 거기 아담 밭인 건 알지?”

“왜, 무서워?”

“지랄.”

이채윤이 백신 주사를 맞은 제 팔뚝을 툭툭 쳤다. 영감이 가져온 백신은 펭귄 용병들에게 투약해도 될 만한 숫자였다.

곽수환의 바이올렛 대원들도 앞서 백신을 맞은 상태였기에, 차 중령과 합류해 과천 쉘터를 장악할 수 있었다.

“공항철도로 들어가서 대기할까?”

“아니.”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시티의 전술훈련과는 다른 방식을 차용해야 했다. 또한 감시자인 마더의 눈을 피하려면 추적 칩이 없는 사람들이어야 했고.

“여기 사병들 전부 시티 놈들은 아니지?”

“응, 아니야.”

“여기서 시티 지도 있는 놈 있어?”

“예, 저희 다 가지고 있습니다.”

보트에 몸을 싣고 있던 사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가져오라는 말 대신 곽수환이 물속으로 저벅저벅 들어가 지도를 건네받았다. 이채윤이 있는 보트에 쭉 펼치고는 펜 형태의 손전등을 켜 지도를 비췄다. 반대편 손에는 군사용품으로 지급되는 매직을 들었다. 그는 영종도 내의 공항 중앙 지점에 쓱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2공항의 제2등화제어소를 집결지로 해. 문제없이 진행된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제주도로 이동해야 하고.”

“제주도? 가서 뭐 하게?”

“거기가 시티 기술의 집약체잖아. 일단 영감도 보내놨고.”

“영감은 또 누군데?”

이채윤은 아리송한 것투성이라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러시아에서 백신 개발 도와줬던 영감인데, 이야기가 좀 길어.”

“영감님이 왔어요?”

석화가 불쑥 끼어들었다. 석화가 아는 영감은 러시아 노인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 영감탱이 원래는 시티 연구원이었대.”

이채윤은 모르는 사람이니 눈만 멀뚱거렸지만, 석화도 놀라지는 않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면서 코피가 나지는 않는지 또다시 코만 훌쩍거렸다.

“그러니까 백신 개발을 도와준 영감을 제주도로 보냈다고? 백신을 제주도에서 개발하려고? 이거 엄마도 알아?”

이채윤이 말을 다다다 쏟아내니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당연히 알지.”

동해로 넘어오자마자 거진항에서 저와 차 중령이 탈 보트를 한 대 더 훔쳤고, 그곳에서 두 팀으로 나눴다.

제주도까지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 두 대위와 영감에게 가지고 있던 지도도 넘겨야 했다. 보트의 기름을 채울 곳과 총기를 구비해둔 버려진 모텔을 지도에 체크했고, 대위들에게는 숨겨둔 총기와 수류탄을 빠짐없이 배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고가의 보트는 해역 정밀지도를 탑재한데다 어군 탐지기까지 갖춰져 있었다. 영감 일행은 무사히 우도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러시아 놈도 보트를 다시 돌려달라고 사정한 거겠지만.

“그리고 영종도로 가는 길에 여기, 신도 보이지?”

한강에서 서해로 빠져 영종도를 가기 전에 그 위에 떠있는 섬이었다.

“여기도 사람이 숨어 사는데, 시티 사람들은 아니야. 시티한테 많이 배타적이니까 이왕이면 제복은 입지 말고 들어가. 가서 내 이름 대면 문제는 없을 거야. 거기 아저씨들 먹을 것만 주면 좋아 날뛰니까 먹을 거 있으면 좀 가져가고.”

그는 섬 안에 있는 (구)여객터미널 위에 점을 콕 찍었다.

“보면 이 근처에 버려진 학교가 있거든?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내가 철판으로 막아놨는데 너라면 충분히 치울 테고, 그 안에 돈하고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기관단총, 소총 웬만한 거 다 있어. 무기 부족할 테니까 알아서 나눠 쓰고 남은 건 우도로 전부 실어 나르면 돼. 제주도 본섬은 시티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무사히 우도에 도착할 때까지 전면전만큼은 피하자고. 제주도 본섬은 우리 애들만 가도 충분히 진압 가능하니까. 이해했지?”

석화는 곽수환의 어깨너머로 설명을 들으니, 세컨드가 왜 그를 컨트롤러로 지정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전시상황에서 믿음직한 지휘관만큼 중요한 건 없다.

“똘수환, 너 설마 백신 개발하면 반란 일으키려고 준비했던 거야?”

이채윤이 지도를 접어 제복 안에 넣으며 기막혀했다. 컨트롤러인 사실도 한참이나 숨겼기에 솔직히 배신감도 적잖이 들었다.

“나라고 백신이 개발될 줄 알았겠어? 한 마흔쯤 되면 한번 시도나 해보려고 했지.”

“마스터 선거에?”

“가라.”

곽수환이 이채윤의 보트를 두 팔로 힘껏 밀쳐냈다. 그 신호를 시작으로 보트가 연달아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어 보트 안의 생수병 몇 개를 섬으로 던졌다. 그리고는 재빨리 운전대를 쥐었다.

펄럭거리는 케이프를 여기서 보니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해 곧 보트의 흔적은 물결조차도 남지 않았다.

물가에서 나온 곽수환이 풀을 밟고 서 있는 석화에게 쓱 뭔가를 내밀었다. 견과류를 물엿으로 뭉쳐놓은 바였다. 석화는 그제야 제가 뭔가를 먹은 지가 오래된 것 같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비닐까지 벗겨준 견과류바를 입에 넣고 씹으니 단맛이 확 퍼져나갔다.

“맛있어요.”

“그게 뭐가 맛있어. 배나 채우는 거지.”

석화는 러시아 시절부터 뭔가를 주기만하면 맛있다는 말을 종종했다. 어떻게든 구해온 정성이 고마워하는 소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모두가 떠난 밤섬에 둘만 남자, 개구리와 맹꽁이 울음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요?”

“지금은 안 가.”

석화는 멀뚱히 서서 그를 쳐다만 봤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사람들이 있을 때와는 다르게 그가 약해진 채로 괴로워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석 박사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내 탓이야.”

어째서 그가 저 자신을 탓하는 말을 하는지 석화는 알 것도 같았다. 피를 바꿔치기한 일 때문이겠지. 석화는 속으로만 조용히 웃었다. 곽수환의 탓이 아니라고 확신하지만 그냥 모른 체하기로 했다.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그에게 먼저 다가갔다.

“소령님 아니었으면 나 벌써 수십 번이고 죽었을 목숨이었어요.”

“석 박사는 둔해서 모르는 거야. 내가 멍청한 새끼였어. 다 나 때문이야.”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달싹거리는 입술을 뗐다. 석화는 지체 없이 곽수환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폭 하는 감촉이 느껴질 정도로 깊게 닿았고 석화는 혀를 내밀어 그의 아랫입술을 빨고 핥았다. 목석처럼 굳어있던 곽수환은 석화의 혀가 안으로 파고들자마자 몸을 단숨에 끌어안았다.

“흐읏.”

온몸의 장기가 뼈에 짓눌리는 듯 너무 거센 힘이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곽수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입을 전부 삼키다시피 했다. 입이 달아서 더 애가 타 혀를 잘근 깨물고 빨아들이며 석화의 허리를 더욱 더 끌어당겼다.

“석 박사, 어디도 안 갈 거지? 나랑 같이 있을 거지?”

품에서 놓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곽수환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하아, 저 아직 살아있는데요.”

곽수환은 그딴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라면서 욕설을 목 안으로 삼켰다. 그 묵직한 고통을 석화의 키스로 희석해나갔다.

“우리 정말 여기 있어요?”

석화도 그의 허리를 안은 채로 속삭였다. 섬이라고는 해도 육지와 가까워 여의도 쉘터가 보이는 거리였다.

“최호언이 원하는 게 나랑 같으니까.”

최호언이 원하는 건 진화한 인류만 남기고 멀쩡한 사람들을 감염시켜 죽이겠다는 건데, 곽수환과 같을 리가 없다.

“최호언의 목적이 뭔지 알아요? 곽 소령님과 다를 거예요.”

“그 사이코 새끼 목적은 모르지. 다만 놈이 석 박사를 원한다는 건 알아. 자기, 이건 진짜 별 건 아니지만 괜히 나 신경 쓴다고 거짓말하는 걸지도 모르니까, 다시 한번 물어보는 거야.”

대체 뭘 물어보려고 하기에 저렇게 긴 포석을 깔아두는지 의아했다.

“정말 그 새끼가 성적으로 이상한 짓 한 건 아니지?”

“……절 성적으로 보는 사람은 소령님밖에 없어요.”

곽수환이 석화의 양 팔뚝을 잡고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은 잘 하지 못하는 석화였고, 눈빛은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내가 석 박사를 의심하거나 그런 거 아니야. 그 새끼 집착이 많이 이상하잖아. 내 말 알지?”

제 집착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나 지금 석화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소령님, 들어 봐요.”

이제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말라는 듯 석화가 표정을 진지하게 굳혔다. 조금 전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곽수환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치 이제 헛소리는 그만두라며 형에게 혼난 기분이었다.

“여태 변이한 아담 중에 딱 두 번, 이브를 말한 아담이 있었어요. 동물원하고 오늘 쉘터에서요. 언어를 내뱉은 걸 봐서는 완전히 변이하기 전인 개체들일 가능성이 커요.”

석화는 그의 품에서 떨어지더니 무거운 뇌를 돌리려 남은 견과류바를 조금 빠르게 씹어 먹었다. 곽수환 역시 뻑뻑한 칼로리바 하나를 억지로 입에 넣어 삼켰다. 공복을 채우고자 뭔가를 먹어야 한다는 건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이채윤이 던지고 간 생수병의 흙도 툭툭 털어내 하나는 석화에게 넘겼다.

석화는 웬일로 한 번에 물을 절반이나 들이켰다.

“동물원에 있던 아담도 결국 최호언이 뿌린 가짜 백신을 맞았던 개체였잖아요. 그러니까……. 최호언이 사람들을 상대로 실험을 벌이는 게 틀림없어요.”

“그럼 최호언만 뒈지면 끝나겠네.”

바로 그게 내가 원하는 거고.

“아마 그걸로 끝은 아닐 거예요.”

석화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젖은 진흙이 쌓인 물가로 몸을 돌렸다. 곽수환이 갑자기 석화의 팔을 콱 쥐었다.

한껏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는,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가 뭔가 큰 결심을 한 것처럼 석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세화 해변에서요?”

“그것도 있고.”

그저 모지리인 줄로만 알았던 박사가 이렇게 제 인생의 전부가 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

“군에 있으면서 실수한 적도 없고, 사과할 일도 없었거든. 근데 석 박사한테는 처음부터 미안했던 것뿐이더라.”

‘그리고. 그, 저기, 뭐냐. 그,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난 그쪽이 그렇게 한참 기절해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석화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을 기절시킨 일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그때도 익숙해 보이지는 않았다.

“영감이 그러더라. 내 피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데, 내 피를 수혈 받은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활동한다고. 그래서 그 영감탱이가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거래. 그러니까 내 탓 맞아.”

곽수환은 결국 북부지부에서 피를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 말을 하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행여나 제가 원망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석화는 그의 커다란 몸을 껴안고 손으로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다 알고 있었어요.”

“뭐?”

“곽 소령님 잘못 아니에요. 수혈을 그때 처음 받은 것도 아니었잖아요.”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기에 그도 마음 놓고 바꿔치기 한 것이다.

“영감님이 말한 가설은 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그랬다면 저도 몇 분 안에 변이를 했어야 해요. 그러니까 전 괜찮을 거예요.”

석화는 저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확답을 주었다.

“괜찮은데 코피가 나.”

“소령님 만나기 전에는 자주 쓰러지기도 했는데, 오히려 지금이 더 건강하잖아요. 지금은 달리기도 하는데 학습센터에 있을 때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에요.”

지금은 코피도 안 나니 괜찮다면서 다시 나뭇가지를 들고 걸었다. 석화는 견과류를 씹으면서 진흙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바를 입에 다 밀어 넣은 석화는 바닥에 [∞] 기호 하나를 그렸다.

“고환이야?”

같이 쭈그려 앉은 곽수환이 석화를 봤는데 미묘하지만 웃고 있었다. 일 년이 넘도록 둘만 붙어 다녔으니 어느새 유머에도 익숙해진 건가 싶다가도 곽수환은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은 적잖이 놓였다.

“소령님, 우리가 백신을 조류가 가진 신종인플루엔자에서 찾아냈잖아요. 이 모양이 우리 백신의 주요 요소라고 치면.”

그 옆으로는 아담 바이러스를 뜻하는 모양인 ◇(다이아)를 그렸다.

∞+◇=반응 중지

“백신과 아담 바이러스가 만났을 때는 분명 바이러스 활동이 중지되는 효과가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끝이 잘린 뫼비우스띠 모양인 비례기호를(∝) 예시로 그려봤다.

∞+◇+∝(곽 소령님 체내 바이러스)=발열, 폭발적인 적혈구 수치 저하, 과다출혈-> 변이

석화가 진흙 위에 열심히 글을 정리했다.

“저는 과다출혈에서 변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진행이 멈췄어요.”

석화는 화살표 가운데를 작대기로 찍 길게 그었다.

그가 죄책감을 가질까 봐 그간 말하지 않았던 사실도 이제는 고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처음 러시아에서 곽 소령님의 피를 수혈 받았을 때 발열이 있었거든요. 수혈 부작용 현상인가 생각했는데, 어쩌면 제가 면역체인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지금 변이 아담 바이러스를 품고도 아직은 무사한 거고요.”

그게 발열이었다고……. 곽수환은 또 한 번 제 어리석음에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석화의 손에서 나뭇가지만 건네받았다. 하얀 손바닥에 거뭇한 흙이 묻어나 있어 툭툭 털어내 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제주도로 가야 하는 거야.”

세컨드 마스터의 실험실이 있던 우도 말이다.

***

석화는 풀잎 위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혹시 피가 났나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매만졌지만 축축한 건 빗물 때문이었다.

“내가 깨울 건데 왜 벌써 일어났어.”

분명 바닥에 누워 잤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단단한 허벅지에 머리가 뉘여 있었다.

“소령님도 좀 자요.”

석화가 몸을 일으켜 등에 묻은 풀잎을 툭툭 털어냈다. 곽수환은 무슨 신호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여의도 쉘터 방향을 향해 있었다.

“버틸 만해. 48시간도 안 자본 적 있는데 이 정도야, 뭐.”

딱히 허세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는 어떻게 가요?”

“날아서.”

그가 잠기운을 물리치는 석화를 웃으며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우리가 여의도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할 테니, 여의도로 집결한 군인들도 분산됐을 거야.”

석화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저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일지 최호언도 확신하지는 못할 거다. 단지 군인들이 몰린 여의도를 빠르게 빠져나갔을 것이라 예상하겠지.

“그리고 펭귄하고는 다르게 올빼미랑 부엉이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바로 발 뺄 가능성이 커. 그래서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해.”

펭귄 가문이야 제가 목줄을 잡아놨으니 빼려야 뺄 수도 없을 테지만, 나머지 올빼미가와 부엉이가는 제 손이 닿기엔 멀었다. 그들을 끌어들인 것도 이희찬이었으니 그녀가 그 두 가문의 목줄을 쥐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일 최호언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앞으로 황제 펭귄 마크는 레인보우 시티에서 찾아볼 수도 없을 테니까.

“남아 있는 백신은 황제 펭귄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뿌리는 중이야. 최호언만큼이나 이희찬도 시민들이 좋게 보는 편이거든.”

곽수환이 고개를 끄덕이는 석화의 손목을 쥐었다.

“석 박사. 나 믿지?”

“믿어요.”

“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면 꼭 지키는 사람이야. 항상 잘 찾아왔잖아. 그렇지?”

‘석 박사, 어디도 안 갈 거지? 나랑 같이 있을 거지?’

그렇게 말한 사람이 오히려 저에게서 멀어지려는 것만 같았다. 어디를 가든 같이 가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둘 다 위험해질 거다. 석화는 일부러 덤덤히 물었다.

“우도는 저만 가요?”

“우리가 할 일을 하자는 거야. 난 최호언을, 석 박사는 영감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야지.”

곽수환의 말이 맞다. 운명에 순응할 필요는 없지만,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는 충실해야 했다.

“비밀번호 6자리는 경우의 수가 얼마나 되지?”

곽수환은 제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백만……이요?”

“그럼 이건 석 박사한테 맡겨야겠다.”

그가 휴대전화를 석화에게 넘겼다.

“세컨드가 있던 방공호에서 가져온 거야. 나머지는 최호언이 박살낸 것 같지만.”

석화는 두 손으로 단단한 기계를 붙들었다.

“비밀번호가 일정 횟수 이상 틀리면 아예 안 열릴까 봐 시도도 안 해봤어.”

저라고 세컨드가 설정한 비밀번호를 알 리는 없었다.

“……우도에 가면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세컨드의 저택이 있던 곳이니까.

곽수환은 조금 풀이 죽은 석화의 어깨를 확 끌어안았다.

“이거 봐봐. 가지고 놀다가 신기한 거 발견했다?”

휴대폰의 전원을 켜니 다행히 배터리가 아직 한참 남아 있었다. 잠금을 풀지 않은 채로 화면을 쓱 넘기자 카메라가 작동했다. 그는 이어서 카메라 렌즈도 전환시켰다.

“사진은 찍히더라고. 한번 웃어봐.”

석화는 화면에 비친 저 자신이 퍽이나 어색하고 낯설었다. 곽수환이 씩 웃기에 저도 따라 입매를 슬쩍 올렸다. 찰칵, 사진이 찍히니 하단에 조그만 창이 떠올랐다. 곽수환이 그 부분을 눌러서 석화에게 찍힌 사진을 보여줬다.

“우리 석 박사 사진발 잘 받네.”

사실 어둡기만 했고, 저 멀리로 아직 불타는 건물이 있어 인물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곽수환은 다시 전원을 끄고 석화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솔직히는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어 이 기계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남들은 눈치 못 챌 만큼 미세하지만, 석 박사 우울해하는 얼굴도 싫었고.

차악, 촥.

물살이 부자연스럽게 헤쳐지는 소리에 석화는 곽수환의 옆에 바짝 붙었다. 곽수환도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서니,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검은 덩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기야 디어차, 어기여차.”

점차 검은 물체가 가까워지고, 시동이 꺼진 보트 위에서 부지런히 노를 젓는 사람이 보였다.

“뱃놀이 가잔드아~”

노래까지 흥얼거리는 통에 곽수환의 목에는 힘줄이 바짝 섰다.

“새끼야! 빨리 안 와?”

윽박지르니 검은 인영이 노를 더 크게 저었다. 노로 물의 깊이를 잰 남자는 보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려 선체를 직접 끌고 오기 시작했다.

“……양상훈 소령님?”

제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의 양 소령이었다.

“하하, 박사님, 오랜만에 뵙는 기분이네요. 일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양상훈이 고개를 꾸벅했다. 석화도 다 이해한다면서 고개를 젓는 순간에 몸이 휙 들렸다.

“동 트기 전에 서둘러 서해로 진입해.”

곽수환은 석화의 다리가 젖을세라 번쩍 안은 몸을 보트에 올렸다.

“군산 유람선 터미널에 헬기 정박해 있으니까 중간에 해남에 들러서 점검하고 다시 날아.”

“알았으니까 숨이나 쉬고 말해라.”

“급해, 새끼야.”

석화는 보트 의자에 앉아 벨트를 채웠다. 아쉬운 마음을 내보이며 곽수환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벨트가 단단한지 확인하던 곽수환이 갑자기 양상훈의 팔을 확 낚아챘다. 반팔을 입은 양상훈의 팔뚝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거? 칩 빼내느라고. 희찬이 아줌마가 돌팔이 의사 데려오고 신호 분산시키느라 고생 좀 했다, 야. 너 오래 살겠더라?”

“뭐가.”

“아줌마가 네 욕 한 바가지로 하던데.”

“할 만했지.”

그래도 일이 잘만 성공하면 이희찬은 오랜 숙원을 이루는 거다.

“네 말대로 부산까지 총 열 부대 분산시켜놨는데, 곧 상부명령 번복될 거다. 번 시간이 길어야 하루일 거야.”

“고맙다.”

“뭘, 썩어도 컨트롤러니까.”

양상훈은 컨트롤러 지위를 이용해 각 구역에 부대를 두만강과 압록강 라인으로 나누어 올려 보냈다. 서울 과천 구역은 최호언의 직속 연락이 닿았을 테니 열외로 쳤지만.

만일 한반도 끝에 닿은 군인들이 연합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름의 쾌거를 거두는 셈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았나.

“혹시나 석 박사한테 코피가 나도 닦아주지 마. 네 상처에도 절대 피가 닿지 않게 하고.”

곽수환은 석화가 듣지 못하게끔 조용히 속삭였다.

“알았어.”

정확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상훈은 흔쾌히 대답했다. 곽수환은 이제 석화가 앉아있는 곳까지 물살을 헤치며 걸었다.

“삼 일이야. 늦어도 삼 일이면 다시 합류할 거야.”

“우도에서 기다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석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안 그랬다가는 약한 소리가 나올 것만 같았다.

“모터 켜고 달려라.”

“분명 조용히 오라던 새끼가 너였다?”

“그랬지. 모터 끄고 노 저으라는 소리가 아니라 위치를 다른 놈들한테 말하지 말라는 거였고.”

“새끼야,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해야지! 여기서부터 한 7킬로미터는 노 저어 왔는데.”

양상훈이 씩씩거리면서 억울함을 토해냈다.

“알았으니까 가라. 양상훈아, 알지? 난 너 믿는다.”

“씨발놈. 나는 항상 너 믿었다, 너는 아니겠지만.”

곽수환이 씩 입꼬리를 올리고 양상훈의 등을 확 밀었다. 양상훈이 보트의 옆 라인에 손을 얹고 훌쩍 뛰어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모터가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거센 물결이 곽수환의 다리를 휘감았다.

다시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석화를 제 손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으나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보트가 어둠을 질러가는 그 사이 곽수환이 외쳤다.

“자기야! 내가 존나게 사랑하는 거 알지?”

석화가 돌아보는 것 같았지만, 어두워서 확실하지는 않았다.

만일 십 년 전으로 돌아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알려준다면 분명 비웃음만 당했을 거다. 낯간지러운 말을 입에 담을 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니 낯간지럽기는 무슨, 하루에도 수천 번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시국에도 사랑은 꽃 피웠다니까.

쉘터 방향으로 몸을 틀어 물속으로 걸어가며 셔츠를 뒤집어 벗었다. 셔츠를 물에 흘려보내고 가슴께까지 물이 닿았을 때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곽수환은 곧 물살을 가르면서 한강을 질러가기 시작했다.

***

[나흘 전부터 배포되기 시작한 황제펭귄 마크를 단 선전물은 전부 거짓 선동 자료입니다. 백신은 개발된 바 없습니다. 황제펭귄, 올빼미, 부엉이 가문은 전부 시티를 위협하는 반군이 되었습니다. 레인보우 시티는 시민의 안전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레인보우 시티를 믿으십시오.]

라디오와 확성기를 통해 같은 방송이 수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황제펭귄을 선두로 나머지 두 가문 또한 사활을 걸었다. 그들은 직접 백신을 투약한 뒤 아담에게 물리고, 그 아담을 죽이는 무리한 일까지 선보이며 게릴라전을 뛰었다.

‘이번 백신은 진짜다.’

‘레인보우 시티의 연구원이 개발했으며, 시티는 백신의 배포를 막기 위해 연구원을 사살하려 했다. 그에 세 가문은 연구원을 지키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정말 시민들을 위하는 건 황제펭귄이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백신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백신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데요?’

누군가는 가진 자들에게만 백신을 배포하는 게 아니냐며 따졌고.

‘백신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최호언을 마스터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합니다. 마스터가 대량 생산을 막고 있어요.’

누군가는 진실을 외쳤다. 혼돈의 나흘간 사람들은 정답을 알지 못한 채 쏟아지는 유언비어와 소문에 휩쓸렸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백신이 진짜기를 바랐고, 이번에야말로 아담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여의도 쉘터 옥상에 선 최호언은 불길이 진화된 건물을 눈으로 훑었다. 동은 오래전에 텄지만 구름에 빛이 가려 시야가 희끄무레했다. 세 가문의 저택과 그들이 운용하던 공장도 군인들 손에 초토화된 지 벌써 만 하루가 넘었다.

시티 중심으로 식자재를 배급하던 황제펭귄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지만, 시민들은 비상식량을 늘 구비해두고 있으니 한 달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시간을 두고 시티 자체에서 공장을 돌리면 그만이기도 했다.

다만 황제펭귄 공장은 생선, 옥수수, 복숭아, 소고기, 돼지 통조림을 주로 만들었는데, 그들의 사육장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소나 돼지는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 개체로 보안유지를 위해 위치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한동안은 육류를 대량생산할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명예가문들이 지금 같은 힘을 가지게 된 건, 기존의 두 마스터가 각자 자기편을 만들기 위해 그들에게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체제를 굳건하게 유지하려는 수뇌부와 가문을 번영시키려는 자들이 만나 이룩된 게 지금의 레인보우 시티였다.

최호언은 마스터가 되고 난 후 명예가문을 차츰 축소해 나가려 했다. 그마저도 각 가문들의 반발이 거세 무리하게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모든 가문이 등을 돌린다면 제아무리 마스터라고 해도 제 위치를 보존하기는 힘들었다.

[가짜 백신을 레인보우 시티의 각 지역 센터로 가져오는 시민에게는 포상금이 주어집니다. 모두가 하나 되어 반군을 몰아내야 합니다.]

메아리처럼 울리는 방송을 뒤로한 최호언은 최상층의 마스터 룸으로 차분히 걸었다. 전염병 방지를 위해 시체는 전부 소각했지만, 복도는 아직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최호언은 룸 앞에 서서 인식패드에 손을 얹었다.

[개방합니다. 환영합니다, 마스터.]

이중으로 된 문이 차례로 열렸고 조언가와 장군들은 이미 원탁에 앉아 있었다.

세상은 아담이 나타나기 이전에 비해 인구수가 턱없이 줄었기 때문에 병력도 똑같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시티의 전체 장군 수는 약 300명에서 150명, 50명으로 순차적으로 줄었고, 현재는 대장·중장·소장·준장 모두를 포함해 40명 안팎이었다. 그중 대장은 총 3명으로 2명이나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마스터가 자리에 와서 앉기만을 기다릴 뿐, 그들 중 누구도 먼저 입을 떼는 자는 없었다. 최호언은 조언가가 빼준 의자에 앉아 깍지 낀 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보고하세요.”

여의도 전역을 책임지고 있는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의도 내 20층 높이의 아파트 5채, 식료품 창고 7곳이 전부 전소했고, 인명피해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반란군이 방화를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석화 박사와 곽수환 소령의 움직임은?”

“여의도를 벗어나 서해 방향으로 이동한 것만 포착됐습니다. 지금은 시티를 벗어났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좋습니다.”

여의도 부대의 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란군이야 밀어내면 그만이고, 반기를 드는 시민들은 처형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간과한 게 있다면, 일전에도 반군의 활동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 정도 세력의 가문이 뭉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는 백신이라는 막강한 무기까지 있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제 사람으로 삼기로 한 이유가 뭔지 압니까?”

“저희가 마스터에게 충성하는 충직한 부하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멍청해서예요.”

모멸감에 장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티를 통솔하는 마스터이지만 그래봐야 저보다 수십 살이나 어린 놈이었다.

“마스터!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최 장군, 그쪽이야말로 마스터께 말이 지나칩니다!”

조언가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원탁에 앉아있는 다른 이들은 마스터의 눈치만 보기 바빴다.

“솔직히 여의도가 이 꼴이 난 게 누구 때문입니까? 그리고 양상훈이에게 컨트롤러 지위를 준 것도 마스터 아니십니까? 놈이 군을 와해시켜놓은 탓에 애꿎은 시간만 버리지 않았습니까?”

“인정해요. 양상훈 소령이 그 정도로 용감할 줄은 몰랐죠. 그런데 저는 분명 양상훈 소령을 감시하라 지시했고, 그 역할은 최 장군의 몫이었죠.”

아무리 컨트롤러라지만 대장인 제가 소령 따위의 뒤나 캐고 다니는 것이 영 못마땅했던 그였다.

“제가 애들을 데리고 가서 가짜 백신을 배포 받은 지역과 세 가문과 관련된 자들을 싹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럼 일단락되겠죠.”

“최 장군은 저 바깥 사람들이 만만하고 바보 같아 보이죠?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번 백신이 진짜일 거라고 곧 확신하게 될 겁니다. 진짜가 맞으니까.”

마스터의 폭탄발언에 장군들과 조언가는 하나같이 할 말을 잃은 기색이었다.

“지금…… 진짜 백신이라고 하셨습니까?”

조언가는 큰일이라는 표정을 했다.

레인보우 시티는 통제와 강압으로 유지해온 곳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건 바로 아담이라는 존재였다. 그 아담이 더는 두려운 존재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필연적으로 통제를 거부할 것이다.

“물론 개발된 백신은 기존 아담 바이러스 백신입니다.”

최호언이 리모컨을 들어 벽면의 화면을 밝혔다.

“그에,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도 함께 출현했죠.”

송출된 화면에 떠오른 건 아담을 살해하는 아담이었다.

***

석화는 마더를 통해 송출된 지도부들의 모습을 눈도 깜빡하지 않고 지켜봤다.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백신이 진짜라는 말에 절망했다가 변이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는 수뇌부라니…….

“끌끌, 어째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아니지, 변했으면 시티가 망하고 새로운 체제로 들어섰겠지.”

곁눈질로만 보던 영감이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켰다. 영감의 한쪽 손은 수전증이 엄청났는데, 알코올 중독 현상이 아니라 전기 고문을 당하고 나서 생긴 후유증이었다.

“똘똘이 박사, 기분은 좀 어떻고?”

영감이 석화의 팔뚝을 주름진 손으로 잡았다. 체온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보다 더 높았다.

“안 좋습니다.”

“대답이 시원해서 좋아. 그래, 오늘 코피는 몇 번이나 쏟았어?”

“아직 괜찮습니다.”

석화는 자신이 변이 아담 바이러스를 품고도 무사한 이유가 남들과 다른 체온에 있지 않을까 했다. 물론 영감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애매한 대답을 주었다. 늘 그랬듯 가설을 뒷받침해줄 진실을 찾아내는 게 저희가 할 일이었다.

“이 씨발놈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리도 쌓아놨어. 싹 태워버리든가 해야지.”

영감은 세컨드가 모아둔 값비싼 광물과 식수, 금괴를 비롯해 레인보우 시티의 지폐를 질린 듯 바라봤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우도가 아닌 해남 밑의 작은 섬, 당사도였다.

무인도가 된 당사도에는 버려진 폐가가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간에 조립식 컨테이너 주택이 낮고 넓게 들어서 있었다. 세컨드 마스터 가문이 만들어둔 방공호가 아닌, 세컨드 자신이 오랜 시간 타인의 눈을 피해 구축해놓은 연구소였다. 또한 연구원들이 백정 짓을 벌였던 곳이기도 했기에 폐가 뒤 모래 더미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뼛조각들이 쌓여 있었다.

석화는 휴대폰을 켜서 보안을 해제하고 사진첩을 열어봤다. 그와 같이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옆으로 사진을 넘겼다. 잘못 찍어 화면이 번진 것도 몇 장 있었고, 그의 정면 얼굴도 한 장 나왔다. 마치 자기 나 보고 싶으면 심심할 때마다 보라는 듯 자신만만하게도 씩 웃는 듯했다. 이렇게 그를 보고 있으면 불안한 기분도 한결 나아지고는 했다.

“곽가 놈이 주둥이는 싸가지라도 얼굴 하나는 잘생겼지.”

“실물이 더 잘생겼어요.”

영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석화와 영감은 김 대위만 이 당사도에 남겨두고, 조운과 양상훈은 다시 시티로 올려 보냈다. 곽수환에게 최종 위치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해야 했다.

석화는 이곳 마더 시스템을 통해서 반란군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곽수환 역시 반란군들과 합류했을 테니 분명 무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태 반란군이 진압되거나 잡혔다는 소식은 들어본 바 없었으니까.

다시 암전시킨 휴대폰을 마더 통제 시스템 데스크 위에 올려두었다. 현재 여섯 개의 모니터에서는 각 쉘터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마더는 세컨드가 구축한 인공지능이었지만 분명 구멍은 있었다. 그렇기에 일전에 최호언도 마더 시스템을 해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컨드가 평생에 걸쳐 구축한 마더는 총 두 종류로 이곳 마더가 가장 초창기 모델이었다. 명령을 하달 받지는 못하나 감시와 메시지를 송출하는 기능은 아직 건재했다.

세컨드는 제가 거머쥘 수 있는 기술은 모두 취한 뒤 시민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베풀지 않았다. 마더 시스템의 구축을 도운 박사들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은 이미 유명했다. 마스터들은 안전을 이유로 통신을 통제했고, 지식인의 증식을 막았다. 때문에 시티의 문맹률은 약 70퍼센트에 달했다.

시간을 확인한 석화는 제 팔뚝에서 피를 뽑아 다섯 개의 유리관에 나눠 넣었다. 이 위험한 피가 어디에도 흘러나가지 않도록 팔뚝도 소독솜으로 꾹 눌렀다.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석화가 어깨를 움찔했다. 뒤를 돌아보니 영감도 마더 통제 시스템 위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폭발음의 근원지는 당사도가 아니라 여의도 쉘터를 비추는 모니터였다.

석화는 나머지 화면도 여의도 쉘터로 변경해 최상층 복도와 옥상을 띄웠다. 옥상은 잠잠했기에 50층 밑으로 화면을 바꾼 때였다. 무장을 한 단체가 최상층으로 재빠르게 진입하는 게 보였다. 그들의 등에는 하나같이 황제펭귄 마크가 새겨져 있었고, 불행히도 복도는 음성지원이 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끝에서 걸어가던 남자의 뒤태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그는 무장을 하지도 않고 아래위로 검은 옷차림이었다. 어깨에 기관단총만 멘 남자가 고개를 휙 돌렸다.

석화는 곽수환과 실제로 눈이 마주친 기분을 느꼈다.

“소령님…….”

감시카메라 렌즈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총을 장전해 발사한 순간, 화면이 암전됐다.

***

같은 날, 9시간 전. 웨이하이 시.

음모오, 음모오오오.

나름 음모를 짜고 있기는 한데 말이야. 곽수환은 저 밖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 울음소리에 기함을 토했다. 소똥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한지 마스크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건장한 성인 오십 명은 수용할 막사는 소똥에 용병들의 땀 냄새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담 썩는 냄새보다는 낫다는 게 곽수환의 생각이었다.

이희찬은 팔짱을 낀 채 곽수환을 불만스레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레인보우 시티 병력은 약 일만, 어중이떠중이들을 제외하면 쓸 만한 군은 천 명 내외일 텐데, 모든 병력을 여의도에 집중할 수는 없을 겁니다. 대신 최호언이 여의도를 중점적으로 사수하려고 하는 만큼 S급 놈들이 포진해 있죠.”

밤중에 한강을 건넌 곽수환은 쉘터의 상황을 의아하게 지켜봐야 했다. 아담을 풀어서 쉘터를 괴멸 직전으로 만든 게 최호언인데, 놀랍게도 군인들은 시체 밭이 된 쉘터 방역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곳 쉘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충분하건만 그러지 않았다는 말이다.

“최호언이 왜 제주도가 아닌 여의도를 사수하려 할까?”

이희찬도 그 점을 의아해했다.

“아마도 뱀의 구덩이가 거기 있을 테니까요.”

마스터 최호언은 제주와 우도에 있는 기존 상류층들을 처형하거나 육지로 이동시켰다. 제주도에 일정 병력을 두어 육지와 같이 통제했으며, 그 본인은 시티 중심에서만 활동했다. 수뇌부들의 우려에도 마스터 관저를 우도에서 여의도 쉘터로 이전했으니, 최호언이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지역이 바로 여의도인 셈이다.

“혹시 그 새끼,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병신 같은 짓을 벌이려는 건 아니지?”

“뭐, 병신 같은 짓은 맞을 겁니다. 중심 기관을 섬에서 육지로 이동한 것만 봐도 그렇고. 섬보다 육지가 바이러스를 퍼뜨리기는 용이하잖습니까.”

“아담 바이러스를 퍼뜨리려고 한다고?”

그때 또 한 번 소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과천 쉘터에서 바이올렛 부대원들과 접선해 인천을 들렀다가 날아온 곳이 바로 소 돼지 사육장이었다. 컨트롤러였던 곽수환조차도 알지 못하던 장소였는데, 인천에서 서해를 질러가면 길쭉하게 튀어나와 있는 옛 중국 땅이었다.

선박으로는 꼬박 하루면 도착하지만 이희찬은 사육장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도축한 육류를 곧장 들여오지 않고, 포항까지 우회해 하선하게 했다.

그녀는 애초부터 연합국이 와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옛 연합국 땅의 일부분을 점거하는 대신 반경 3km 내 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황제펭귄 가문이 심혈을 기울여 형성한 요새를 넘어온 아담은 여태 없었다. 어찌 보면 그녀는 작은 성의 영주나 마찬가지였지만, 돈줄인 시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곽수환이 소 울음소리에 미간만 구기고 있자 테이블을 내리쳤다.

“지나친 억측이 아니냐는 거야. 설마 그 새끼가 아무리 미친놈이어도 그렇게까지 하겠어?”

“이 소령은 자연 돌연변이가 맞습니까?”

“뭐?”

“유전자 편집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시티에 자연 돌연변이가 있긴 하나?”

이희찬이 너도 그렇지 않느냐며 비꽜다.

“최호언 정신에 나사가 빠진 건 익히 알고 계실 테고, 놈이 원호 박사의 아들인 것도 압니까?”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원호 박사?”

“예, 놈이 원호 박사의 아들입니다. 원호 박사가 에덴동산을 구축한 인물 중 하나이고, 아시다시피 돌연변이들을 만들어 낸 박사이기도 했죠.”

최호언이 그 자의 아들이라고……? 그녀는 연합국이 망한 건 알았으면서 정작 시티의 내부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놈이 왜 서펀트겠습니까? 원호 박사의 뜻을 이어받은 거죠.”

“잠깐만.”

그녀가 그제야 팔짱을 풀고 제 이마를 짚었다.

“그럼 최호언이 너랑 석화 박사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또 뭔데?”

시티를 떠난 곽수환과 석화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안다. 단순히 수배자를 쫓기 위함이었다면 저 둘이 시티에 나타났을 때 살려두었을 리가 없다.

“그 새끼가 집착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석 박사고, 분명 내가 석화와 같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나도 찾은 겁니다.”

“그러니까 왜? 돌연변이들 모아서 제 군대라도 만든대?”

“차라리 그러면 다행이죠. 완전한 돌연변이들만 놔두고 전부 죽일 셈인가 보던데.”

이희찬이 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너, 원호 박사가 왜 처형당했는지는 알아?”

“반군이라서?”

그는 너무도 당연한 물음이라는 듯 대꾸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그렇지.”

이희찬은 두 손으로 지끈거리는 제 머리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원호 박사는 누구보다 돌연변이 연구에 심취해 있었어. 제 부모가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됐었거든. 곽 소령. 너나 나나 아담 바이러스가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의 삶을 겪어본 적이 없어. 그런데 원호 박사는 양 시절을 전부 겪은 거야. 그러다 보니 바이러스가 없는 세상을 누구보다 꿈꿨고, 또 어쩌면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세대가 탄생하기를 바랐던 거겠지.”

원호가 살아 있었다면 여든쯤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는 아담이 없을 때의 삶도 살았을 터였다.

“제 부모를 직접 제 손으로 죽였다지? 상상해 봐, 지금이야 아담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때는 그런 정보가 있었겠어? 어느 날 부모가 갑자기 괴물로 변해서 달려드니 저 살자고 죽였을 텐데.”

상상해 보라니……. 곽수환에게는 충분한 현실이었다. 곽수환은 덤덤한 얼굴을 가장하고 허벅지를 단단히 쥐었다.

“아마 그때부터 머리가 반쯤 돌아버렸겠지.”

“사감은 됐으니까, 왜 처형당했는지 이유만 말해요.”

건방진 언사에 이희찬은 혀만 찼다.

“그 인간이 돌연변이들을 상대로 아담 바이러스를 심었어. 그뿐인 줄 알아? 에볼라처럼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를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주입해 실험한 게 들켰지. 그걸 밝혀내고 연구직에서도 물러난 사람이 바로 이진연 박사였어.”

그렇다면 원호는 그 당시 처형을 당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진연이 연구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도 오랫동안 박사로 활동했다.

“그런 놈을 왜 그때 안 죽이고 살려둔 겁니까?”

“시티에서 원호 박사를 단숨에 죽이기는 아까울 노릇이었고, 솔직히 시티는 돌연변이들이 어떻게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었지. 오히려 원호의 연구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결국, 원호가 처형을 당한 건 오 박사 때문이야.”

“……오 박사? 오양석?”

그 영감 때문이라고? 곽수환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 오양석 박사. 원호의 미친 짓거리를 오양석 박사도 알게 됐지. 오양석은 정도였어.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비인간적인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 아들은 아니었어. 원호의 사상에 심취했고, 그 바탕에 에덴동산이라는 종교적 신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오 박사는 제 아들을 끌어들인 이가 원호라고 확신했으니, 제 한쪽 팔을 떼어내는 심정으로 그를 반군으로 밀고했지. 시티도 덩치를 키운 에덴동산을 눈엣가시로 여긴 데다 때마침 원호가 늙어버려 이용가치도 다 됐겠다, 처형하기 딱 좋은 시기가 무르익은 거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막사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 미련한 친구야. 왜 말을 안 했어. 왜 이제야 나를 후회하게 만들어.’

‘내 지은 죄가 크이. 지은 죄가 크니 죽어도 싸지, 암.’

‘곽 소령 자네에게도 미안한 것투성일세.’

술을 마실 때마다 횡설수설하면서 질질 짜던 오양석이었다. 그저 늙은 영감의 술주정이자 넋두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원호가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오양석이 후회했던 걸까. 그리고 자신에게 미안한 것은 또 뭐였고.

“채윤이도 내 아이라서 무사할 수 있었던 거야. 감히 내 아이에게 실험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너야말로 네가 자연 돌연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곽재원 박사, 강손은 박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습니까?”

그녀는 가볍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려 한숨을 흘려보냈다. 그들은 임신을 반쯤 포기했던 저에게 채윤이를 안겨준 시티의 박사들이었다.

“알고 있다마다. 그런데 강손은 박사가 제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지. 그런데 그게 아닌 것을 오양석 박사가 네 후견인이 되었을 때 예감했고.”

세상에…….

말을 하다 만 이희찬은 지금껏 간과해왔던 것을 알아차리고는 두 손을 모아 콧등에 가져다댔다. 기도하는 모습과도 비슷했지만, 지금은 탄식에 가까웠다.

“곽수환 소령. 넌 분명 시티 밖에서 왔다고 했지? 두 부부가 미래를 보장받았어야 할 아이들을 밖에서 키운 거야. 시티 사상에 반감을 가진 부부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야, 네가 열쇠였던 거야.”

그녀가 반대편에 앉아 있는 곽수환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봤다. 돌이켜 떠올리려고 해도 두 박사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둘 다 훤칠한 인상이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왜 아이들을 시티 밖으로 빼돌렸는가? 그녀는 당시에 그 이유가 둘째 아이에게 있다고 여겼다. 불치병을 안고 태어났으니 시티에서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시티 밖에서 키웠다고 생각했건만 그 추론은 틀렸다.

그들이 남긴 첫째 아이가 지금 여기에 있었고, 진정으로 시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세상일은 참 희한하지. 모두가 인류는 핵으로 멸망할 거라고 말했어. 그런데 보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졌지. 맞아, 눈에 보이는 위협은 차라리 대비라도 할 수 있지. 이제 보니 두 박사는 모두의 눈을 가리는 데 성공했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 부모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 널 시티 밖으로 보낸 거야. 네가 완벽한 돌연변이였기 때문이지. 너조차도 네가 완벽하다고 자신하지 않니?”

부모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곽수환을 시티 밖으로 내보냈다. 곽수환이 완전한 돌연변이임을 알았기 때문에.

만일 원호나 시티의 수뇌부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곽수환은 시티의 산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연구 자료로서 산 채로 몸을 뜯기고, 수없는 피를 쏟아냈을 거다.

그 또한 알게 되어버렸다. 한때는 부모를 원망했지만, 어떤 날은 동생이 거치적거려 제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희생한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동생이 희생당한 거였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눈조차 깜빡하지 못했다.

“비단 동생뿐일까?”

더없이 애석한 말투였다. 그러나 위로라고 부르기엔 냉정했다.

“오양석이 석화 박사를 굉장히 아낀 건 알고 있니? 그 양반이 석화가 그저 수석 연구원이라 아꼈다고 생각해? 오양석 박사는 이미 진실을 엿봤기 때문일 거야. 어쩌면 전부 짐작했음에도 자신의 일이 아니니 오랫동안 침묵했을지도 모르지. 그 양반도 제 아들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발 벗고 나섰지 않니?”

“…….”

“석화 박사가 왜 그렇게 약할까. 그가 하자 있는 돌연변이라서? 그런데 어째서 이진연 박사가 직위까지 박탈당하면서 내부고발을 했을까. 그리고 넌, 어떻게 하자가 없을까.”

그들은 시티의 암묵적 동의하에 갓 태어난 석화에게 실험을 자행한 것이다.

석화의 몸뚱이를 제물 삼아 탄생한 게 바로 저였다.

“……석 박사도 압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석화 박사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래도 이진연 박사가 제 아이에게 사실을 말했을 거라고 보진 않아. 만약에 나였다면 그랬다는 이야기야.”

석화에게 삼 일 안에 가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분명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러시아 영감에게 보내야만 했다. 꽉 쥔 주먹 안의 살이 하얗게 짓눌렸다.

미치광이 연구자 새끼들이 무슨 짓을 벌였든 상관없다. 남은 목표는 석화의 안전과 더불어 최호언을 없애는 일뿐이고, 다른 생각들은 불필요했다. 석화에게 가는 길에 방해만 될 뿐이다.

곽수환이 막사 천막을 들치고 나가니, 바이올렛 부대원과 용병들이 불에 달군 철판에 소와 돼지고기를 뒤섞어 구워 먹고 있었다. 비위도 좋다. 소똥 냄새가 천지인데 오랜만의 고기라며 익지도 않은 살점을 입에 쑤셔 넣는 중이었다.

“문길이 새끼야, 작작 좀 먹어라. 배 속에 기생충 굴 생기겠다.”

철판 중앙에서 맨손으로 고기를 먹던 문길이 억울한 얼굴을 했다.

“대장,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저보다 종문이 새끼가 더 처먹었어요!”

나름 고상하게 젓가락질을 하던 종문이 저게 선임만 아니었어도, 하고 이를 가는 게 눈에 선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서 기특해서 그런다. 그만 처먹고 전부 안으로 들어와.”

종문과 문길은 최호언이 공격한 1조에 속해있었는데, 다행히 도주에 성공해 차 중령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그 외 나머지 동료는 그날 죽었기에 군번줄도 회수하지 못했다. 곽수환은 막사로 들어오는 종문과 문길의 짧은 머리를 거친 손길로 쓱쓱 쓰다듬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차 중령에게 그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최호언 잡는 데 성공하면 펭귄한테 한 자리 달라고 해. 나름 개국공신이 되는 건데 그 정도는 해주겠지.”

“대장은요?”

“나? 글쎄.”

곽수환은 부대원들의 어깨를 한 번씩 툭툭 두드려주고 한쪽에 매달린 시티의 지도 앞에 섰다. 이희찬도 막사에 들어오는 용병들에게 사기를 북돋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막사의 천막을 거둬두었어도 건장한 체구들로 꽉 차니 숨이 턱턱 막혔다.

“개개인 전력은 우리가 더 막강하지만, 숫자가 부족하니 그쪽 용병들하고 우리 바이올렛 대원들이 같이 작전에 들어갈 거다. 불만 있는 놈들은 일단 넣어두고.”

딱히 불만이 있어 보이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더위에 헉헉댈 뿐이지.

“가장 먼저 여의도 쉘터를 접수할 건데, 마더도 정상화됐을 테니 1층부터 올라가는 건 무리다. 그러니 58층으로 곧장 진입한다.”

“벽 타고 올라갑니까?”

용병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저 새끼가! 대장 말씀하시는데 감히 어딜!”

“그럼 58층을 어떻게 가냐고!”

용병도 문길에게 눈을 부라렸다.

“다 시끄럽고. 헬기로 여의도 쉘터까지 이동,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곧장 착륙은 하지 않는다. 대신 헬기 한 대를 희생할 거다.”

한 마디로 헬기 한 대를 쉘터에 가져다 박겠다는 소리였다.

“창대야.”

곽수환은 헬기 조종이 가능한 제 부대원을 불렀다.

“예, 대장.”

“네가 1조 헬기 맡고, 58층 라인으로 헬기 고도 고정시켜놓고 먼저 뛰어내려야 한다, 알지?”

“걱정 마십쇼. 나는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거 한두 번 해봅니까?”

“창대 너는 무사히 낙하한 뒤에 밤섬으로 가서 대기해. 그리고 그사이 다른 놈들은 각 헬기에서 내려서 바로 합류한다. 1조부터 3조는 바로 58층으로 진입하고, 4, 5조는 옥상 막아놓고 엄호해. 그리고 6, 7조는 스나이퍼로 구성해서 헬기에서 전방위 지원해.”

용병들은 공중침투 훈련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기에 과연 제대로 해낼까 미심쩍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했다.

“그리고 최호언을 발견하면 그 즉시 사살해도 좋다. 다른 장군들도 마찬가지야.”

“곽 소령 말이 맞아. 우리가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려면 최호언의 목을 따는 수밖에 없어. 일이 다 끝나면 전부 시티 시민으로 승격시켜주고, 한 자리씩 약속할게. 내가 구두 약속이라도 항상 지켰던 거 기억하지?”

그렇기에 황제펭귄 수하에 있던 거라며 용병들이 수긍했다.

“58층에 무사히 진입하면, 전방 정찰은 차 중령과 같이 1조가 맡고 2, 3조는 사수로서 활동한다. 후방은 내가 맡는다.”

퉁, 막사 입구 밖에서 이채윤이 커다란 스테인리스 박스를 발로 걷어찼다. 박스 뚜껑을 여니 그 안에 기관총과 권총들이 일렬로 쭉 놓여 있었다. 총기류를 지급하는 동안 곽수환은 이희찬에게 다가갔다.

“이 소령은 두고 갑니다.”

“나도 보낼 생각 없었어.”

“여기에 두면 전력낭비죠. 아무래도 제가 우도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대신 이 소령을 보내야겠습니다. 상황 전달도 할 겸요.”

“석화 박사 걱정돼서 똥줄 탄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

곽수환이 그답지 않게 겸연쩍다는 듯 눈썹을 긁었다.

“걱정 마. 채윤이는 내가 바로 우도로 보낼게. 근데 너 혹시, 또 나 속이는 거 있는 건 아니지? 이번에는 뒤통수치지 마라?”

“누굴 사기꾼으로 압니까.”

그가 남은 기관단총 하나를 들어 어깨에 멨다. 군용 헬기들이 안착해 있는 들판까지 걸어가던 곽수환이 목소리를 키웠다.

“아담은 발견 즉시 사살해. 백신 맞았다고 깝치지 말고, 절대 물리거나 피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최호언이 석화의 피를 가지고 어떤 짓을 벌였을지 모르기에 곽수환은 놈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순차적으로 헬기가 오르고, 곽수환이 마지막으로 올라탄 헬기가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이나 뜯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나 의외로 석 박사는 이런 한적한 시골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곤충이나 벌레도 곧잘 구경하던 석화니까. 전부 마무리하고 일이 끝나면 석화 데리고 산에 들어가서 살까.

곽수환은 잠시나마 즐거운 상상에 저도 모르게 입매를 올렸다가 곧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석화의 희생을 바탕으로 제가 완전해졌다는 사실 같은 건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그렇다고 석화가 저를 원망하진 않겠지만 진실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체력이 좋은 저를 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이 미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석화는 충분히 강했을지 모른다. 저조차도 이렇게 울분이 터지고, 원호의 시체를 찾아내 갈가리 찢어 욕보여도 부족한데 석화가 이 사실을 알면 분명 절망할 거다.

빌어먹을 새끼들.

곽수환은 이미 죽은 놈들에게도 저주를 퍼부었다.

***

인천공항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채윤과 합류해 사육장으로 넘어가기 전, 공항에 남아 있는 모든 비행기를 전소시켰기에 열기는 여전했다.

아담 밭인 인천공항에 멀쩡한 비행기가 있다는 건 최호언이 이곳을 도주로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도주로가 있다면 전부 차단하는 게 맞았다.

공중 급유가 불가능했기에 공항 도로에서 기름을 한 번 더 채우고 여의도 쉘터로 날았다. 현재 최호언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놈이 아끼는 여의도 쉘터를 점거하면 굴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다. 쉘터 내부에 머물러 준다면 감사한 일이고.

곽수환은 허리 벨트를 단단히 고정하고 밧줄이 이어진 카라비너를 옆구리에 달았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높은 고도에 들어서자 저격총을 장전했다. 8배율 스코프로 옥상을 살핀 그는 쉘터 수비군이 렌즈에 들어오자마자 총을 발사했다. 그 신호에 맞춰 스나이퍼들이 타 있는 헬기에서도 총성이 터졌다. 쉘터 옥상을 지키던 군인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위험요소가 보이지 않자 스나이퍼건을 뒤로 던졌다.

1조 헬기가 옥상으로 고도를 낮추자 대원들은 헬기에서 곧장 쉘터로 뛰어내렸다. 헬기와 연결된 밧줄은 일정 높이까지만 지원됐기에 허리춤에 매달린 자동 후크를 떼어내고 나서야 옥상에 안착할 수 있었다.

곽수환이 손짓하자 나머지 조의 헬기가 분산됐고 1조 헬기가 쉘터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헬기의 앞머리가 유리창을 박살내는 그때, 발밑에 지진이 이는 듯한 흔들림이 일었다. 쉘터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터지고 화기가 느껴졌다. 차 중령이 창대는 무사히 낙하했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위이잉, 위이잉, 쉘터에서 비상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곽수환은 옥상 문을 연 채로 주변을 엄호하며 나머지 대원들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탕, 타앙! 밑에서 총을 발사하는 군인들을 피해 문 옆에 등을 댔다. 열어둔 옥상 문 밖으로 총알이 여기저기 박혔다. 곽수환이 차 중령에게 턱짓으로만 밑을 가리켰다. 그가 기관총의 총구만 문 안으로 넣고 발사하자 차 중령이 직접 문 앞에서 군인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용병과 대원들은 헬기에서 내릴 수 있었고, 앞서 지시한 대로 1조부터 쉘터 안으로 진입했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화재 발생, 쉘터 57층, 58층을 곧 폐쇄합니다. 카운트 30, 29, 28.]

저격 자세를 유지하며 계단을 내려가던 1조는 쓰러진 군인들 사이에서 부상당한 소령 한 명을 발견했다. 총을 주우려 하기에 차 중령은 발로 툭 쳐서 계단 밑으로 떨어뜨렸다.

변절자 새끼들.

1조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로 핏물을 토해내는 소령을 지나쳐 걸었지만, 뒤에서 총성이 터졌다. 돌아보니 소령을 사살해 죽인 용병이 어깨를 들었다가 놨다.

“같은 식구였다고 봐주기 없기입니다?”

“맞는 말이야.”

후방을 지원하던 곽수환이 제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전방 팀이 58층에 진입하자 곽수환도 뒤따랐고, 복도를 걸어 나가던 도중에 뒤를 돌았다. 마더에게 읽혀봐야 좋을 게 없다. 그는 감시카메라를 향해 서서 총구를 들이댔다. 이어 망설임 없이 감시카메라를 박살냈다.

대원들과 용병들은 58층의 각 회의실과 비품실, 강당의 문을 열어 반항하는 장군들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다. 그중 싸울 생각이 없다며 백기를 든 사람들은 반은 죽고 또 반은 살았다. 용병이 먼저 발견하면 죽었고, 곽수환의 부대원이 먼저 발견하면 포박했다. 그래서 전방조에 저희 부대원들을 넣은 것이지만, 변수는 어쩔 수 없었다.

마더의 판단에 따라 57, 58층이 폐쇄되었기 때문인지 정리된 군인 외에 더는 다른 군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마스터 룸을 1조가 둘러쌌고, 2조와 3조는 좌우를 엄호했다.

“조준 준비.”

곽수환이 명령하자 1조의 기관총구가 마스터 룸의 방탄 유리창을 조준했다.

“사격해.”

투투툭, 투툭! 탄환이 연달아 발사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방탄유리는 깨지는 게 아니라 차 유리처럼 갈라지는 형태였다. 어느 정도 균열이 갔을 때 충격을 주면 유리문은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2조가 탄환을 넘겨 새 탄으로 갈아 끼우고 적어도 이백 발 이상이 박히자 드디어 유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급 비상 상황 발생, 마스터 룸의 제1 입구가 곧 무너집니다.]

이번에는 마더가 한 박자 늦었다. 이미 첫 문은 무너지고 두 번째 방탄 매직미러도 박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리에 금이 가자 유리에 비친 1조 군인의 얼굴도 마치 박살이 난 것처럼 쪼개졌다. 곽수환이 발사를 중지시키니 탄피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만이 고요함을 질러나갔다. 인원을 전부 뒤로 물러나게 하고 그가 균열이 간 유리를 발로 두세 번 걷어찼다. 끄극, 끅. 기묘한 소리가 틈새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휙,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서 손이 빠져나왔다. 유리에 긁힌 팔뚝에서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뭔가를 잡으려는 듯 손가락을 마구 흔들어대는 모습이 기괴했다. 쑥, 팔이 빠지자 구멍으로 붉은 눈이 보였다. 부대원들과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씨발, 저게 뭡니까. 대장.”

분명 아담이었다. 곽수환은 부대원들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다들 물러나. 사격 준비.”

철컥,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순차적으로 들려왔다. 그 순간 문이 앞으로 쏟아졌다. 제복 차림의 장군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전부 사살해!”

총구가 불을 뿜으면서 탄환이 맹렬하게 발사됐다. 온몸이 벌집이 되어가면서까지 달려드는 아담의 기세가 엄청났다. 대장, 준장 할 것 없이 모두가 아담으로 변이되어 있었다.

크아아악! 곽수환은 피를 흩뿌려대는 장군의 앞을 막아 대신 피를 뒤집어쓰고 머리뼈를 박살냈다.

“씨발! 용병 니들 대가리 제대로 조준 안 해?!”

그는 늘어진 장군의 몸을 앞세우고 쏟아져 나오는 아담의 머리를 권총으로 저격했다. 대체 얼마나 이 안에 들어있던 건가.

“절대 물리지 마라!”

“어차피 백신,”

“입 다물고 죽이기나 해!”

입구에 시체가 쌓이고 그들의 군화로 핏물이 번져나갔다. 아담은 적어도 스물. 다행인 건 문에서 튀어나오는 터라 동선이 확실히 읽힌다는 것이었다. 곽수환은 확인 사살을 위해 훌쩍 시체를 넘어서 마스터의 룸으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회의라도 한 건지 깨진 컵에서 흘러나온 음료와 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시체들 중에 당연히 최호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책이 꽂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안의 책들을 전부 밖으로 끄집어내 인식 패드를 발견해냈다. 툭 손을 가져다대니 붉은 불이 점멸했다.

[보안 해제 불가, 보안등급이 낮습니다.]

최호언 새끼도 분명 이 안에 있다가 패닉룸을 통해 도주한 듯했다.

“쥐새끼 같은 놈.”

차 중령이 곽수환을 대신해 이를 갈았다.

“대장!”

밖에 있는 문길의 다급한 외침에 곽수환이 다시 입구로 달려갔다.

“아담이 몰려옵니다! 비상구가 열렸습니다!”

곽수환과 차 중령도 복도로 합류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개방된 비상구에서 아담들이 악귀같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두두두! 달려오는 아담의 머리를 정확히 조준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에 몇 놈이 코앞까지 달려들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34, 35, 36, 엘리베이터 전광판의 숫자도 삽시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1급 비상사태 해제, 전층 비상구 개방 완료. 엘리베이터 가동 정상화 완료. 각층 엘리베이터 개폐는 수동 작동이 되지 않는 이상 마더가 관리합니다.]

총소리에 마더의 방송이 섞여 들렸다.

“돌겠군.”

곽수환이 피를 닦아냈다. 그는 통신을 책임지고 있는 용병에게서 무전기를 낚아챘다.

“5조, 6조, 지금 당장 쉘터 1층으로 내려가서 전부 문 폐쇄해! 아담들 밖으로 못 나가게 막아!”

[라저, 이동합니다.]

그는 나머지 조들에게도 명령했다.

“우리도 옥상으로 이동한다. 후방은 내가 지원하니 1조부터 차례대로 올라가.”

대원들이 옥상 비상구를 향해 후퇴를 시작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아담들이 또 한 차례 쏟아졌다. 기관총의 탄환이 바닥을 드러내니 그는 개머리판으로 달려드는 아담의 머리를 박살냈다.

“대장! 올라오십시오!”

차 중령의 외침에 곽수환이 뒤도 안 보고 소리쳤다.

“그냥 가, 새끼야!”

곽수환은 비상구 문을 닫으려 했지만, 마더가 강제 개방을 한 탓에 닫히질 않았다. 힘으로 닫을 수는 있어도 잠그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왜 혼자 상대하고 그러십니까.”

아까 소령을 죽인 용병이 히죽 웃었다. 놈이 곽수환 옆에서 아담을 향해 총을 갈겨댔다.

“내가 올라가라고 했다?”

돌아보니 놈의 뺨에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너, 이 새끼.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깨가 박살난 채 기어온 아담이 놈의 다리를 물었다.

“윽, 씨바알!”

놈이 아담의 머리를 연거푸 발로 으깼다. 이제 바닥을 기어오려는 놈들 외에 새로이 달려오는 아담이 더는 없었다. 대신 엘리베이터는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곽수환은 옥상으로 올라가려는 용병의 멱살을 잡아 끌어왔다. 바지를 걷어 올려보니 아담에게 물려 핏자국이 선명했다.

“뭡니까!”

놈이 신경질적으로 반항하며 다시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잠깐 기다리라고.”

“뭐요?”

“물렸으니까.”

“저도 백신 맞았거든요?”

“너 뺨에 상처는 언제,”

곽수환이 멱살을 틀어쥔 채로 묻는데 그의 손등에 툭툭,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놈이 코에서 피를 쏟기 시작한 것이다.

어? 용병은 제 코에서 흐르는 피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닦아냈다.

“……이거 뭐야.”

백신이라며.

혼란스러운 눈을 한 용병이 곽수환을 쳐다봤다. 눈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니들이 속인 거야?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쿠에엑, 피를 분출하듯 토해냈다. 곽수환은 놈을 바닥에 던지고 권총으로 조준했다. 쉘터의 아담을 발견한 순간부터 내내 꺼림칙했던 이유를 이제 확실히 직감했다. 이 아담들은 전부 신종 변이 아담인 듯했다.

탕! 곽수환은 용병의 숨통을 단 한 방에 끊었다. 그는 권총을 쥔 손으로 제 이마를 꾹 눌렀다.

최호언…….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인 고함을 애써 꾹 내리눌렀다.

[엘리베이터 개방합니다.]

밑으로 내려갔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고, 제복을 입은 아담 몇몇이 그륵거리는 소리를 흘려댔다. 아무런 자극이 없으니 놈들을 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곽수환은 비상구의 철문을 억지로 끌어내 닫았다. 이 쉘터를 막지 못하면 레인보우 시티는 이번에야말로 괴멸할지 모른다. 일단 쉘터 내의 마더 시스템을 박살내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재빨리 계단을 뛰어 올라 옥상으로 나왔다.

뒷주머니의 무전기를 꺼내 5, 6조에게 무전을 보냈다.

“입구 폐쇄 완료했어?”

[예, 폐쇄가 안 되는 입구는 전부 차량으로 막아두었습니다.]

“시티 지원군 도착하기 전에 지금 바로 P포인트로 이동해.”

P포인트는 영종도 위의 섬인 동검도를 뜻했다.

[감지, 이동합니다.]

“니들도 전부 P포인트로 이동해. 그리고 어디서든 아담을 발견하면 그 즉시 사살하고 절대 물리지 마라.”

“대장은 안 갑니까?”

“나중에 합류할게.”

다가오는 차 중령에게 더 오지 말라며 피를 닦아 내렸다.

마더 통제실은 지하 2층에 있으니 그곳까지 내려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헬기가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저희의 적이자 레인보우 시티의 지원군이었다.

“차 중령, 쉘터 장악하면 방송 띄울 테니 놓치지 마라.”

“예, 대장.”

차 중령은 새롭게 장전한 기관단총과 권총 한 자루를 넘기고 지체 없이 헬기에 올라탔다. 2조 인원은 용병 한 명이 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굳이 찾지는 않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한 명을 구하고자 모두의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곽수환도 저희 측 헬기가 여의도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쉘터로 내려갔다. 그는 달려드는 아담을 제 힘으로 박살내며 총알을 아꼈다. 툭,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투명한 버튼은 핏물에 번져 있었다. 전광판의 숫자가 삽시간에 모습을 달리하며 58층을 향해왔다.

[58층, 개방합니다.]

곽수환은 문이 열리자마자 허탈하게 웃었다.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아담들이 살아있는 인간을 발견하자마자 악귀처럼 손을 뻗었다. 좁은 박스는 총소리로 가득찼고, 뼈가 박살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거친 숨 또한 끊이지 않았다.

***

석화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는 사람이다. 심하게 다치면 죽고 마는 사람이었다. 화면을 바라보기가 너무 힘이 드는데 눈을 떼어서는 안 되기에 그의 이동경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곳 마더는 화면 송출과 메시지 전송 기능만 심어져 있으니 그가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구역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렸다. 아담의 시체를 밖으로 빼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가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만일 최호언이 쉘터에 남아 있다면 제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을 테지만, 석화는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전송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렸다. 자꾸만 손이 말을 듣지 않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써야 했다.

총기를 점검하고 있는 그가 어서 엘리베이터 버튼 위의 내부스크린을 봐주기를 바랐다.

「소령님, 양상훈 소령님과 접선은 아직인가요? 쉘터에 있는 아담은 신종 아담이죠?」

석화는 애타게 그를 들여다봤다. 텔레파시라도 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석화는 초조하게 화면 속의 그를 손으로 훑었다.

[하, 씨발. 최호언 개좆같은 새끼.]

엘리베이터는 음성 수집이 가능했기에 그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던 그의 동공이 어느 순간 멈췄다.

[소령님……?]

그가 인상을 쓰고 화면을 들여다봤다. 지금이었다. 그가 확실히 화면을 인지했다. 석화는 얼른 메시지를 작성했다.

「저예요, 석화. 여기서는 메시지 전송만 가능해요. 소령님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최호언은 쉘터를 떠났을 가능성이 커요. 감시카메라 있는 곳을 다 살펴봐도 최호언이 보이지 않아요.」

곽수환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계속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거 함정이야?]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충분히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석화는 재빨리 자신과 그만이 알 수 있는 메시지를 작성했다.

「사향노루 향이 좋았어요. 나머지 한 마리도 잘 지내고 있을까요?」

화면을 향해 서 있던 그가 휙 뒤를 돌아 카메라를 보았다.

[큰일 날 뻔했네. 마더 조지러 가던 길이었는데, 하마터면 우리 석 박사 연락 못 받을 뻔했잖아.]

곽수환이 석화를 향해 웃고는 머리 위로 하트까지 그렸다. 분명 저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행동인 줄 알기에 심장 한쪽이 지끈했다.

[피범벅인 채로 사랑고백하면 좀 그런가? 자기 무사한 거 맞지? 내가 자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친 건 아니지?]

석화는 울컥거리는 마음을 간신히 내리 눌렀다. 늦기 전에 다시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금 전 우도에 없어요, 소령님.」

그가 비상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쉘터에서 아담들이 나오면 대혼란에 빠지게 될 거예요. 지금 올빼미랑 부엉이가 백신을 대량 생산하고 있어요. 제 메시지가 해킹당할 수도 있어서 장소는 말씀 못 드리고요.」

[석 박사는 안전한 데 있는 건 맞아? 몸은?]

「안전한 곳에 있어요. 몸도 괜찮고, 저도 보고 싶어요.」

석화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마지막에 써 넣었다. 메시지를 본 그가 화면에 이마를 슬쩍 대었다가 떼어냈다. 마치 그의 체온이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석 박사, 최호언이 안 보인다고 했지? 그 새끼가 신종 아담 바이러스를 들고 나갔으면 이 쉘터만 막는다고 해결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새끼도 여기 있어야 돼. 마스터 룸에 패닉룸이 있던데 내가 보기엔 최호언이 아직 쉘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아마도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전 층을 개방한 거야.]

생각해보면 1급 위기 상황에서 마더가 전 층을 개방했을 리 없다. 누군가가 보안 시스템에 접속해 조작을 한 거다.

[일단 지하 2층에 내려가서 마더 시스템을 종료할게. 그럼 메시지도 못 받지?]

「그럴 거예요.」

마더와 마더가 연결되어 있어 송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쪽이 끊기면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갑자기 책상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코피가 기어코 다시 나기 시작한 것이다. 석화는 재빨리 천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쉘터부터 폐쇄할 건데, 석 박사 위치를 정확히 아는 아군이 있는 건 맞지?]

석화는 코에서 손을 떼고 얼른 키보드를 두드렸다.

「두 명이요.」

당사도에 있다고 말을 하고 싶어지는 바람에 석화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적에게 제 위치를 노출해서 좋을 것이 없다. 석화는 육지로 올라간 양상훈과 조운이 그와 꼭 접선하기만을 바랐다. 단 세 글자만 적으면 제가 있는 곳을 그가 쉽게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속이 답답했다.

[삼 일 만에 간다고 했는데 그 약속 못 지켜서 미안.]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는지 그가 엘리베이터를 다시 가동시켰다.

그가 제게 미안할 일은 언제나 아무 것도 없었다. 내내 내리누르던 울컥함이 기어코 터져버려 다시 메시지를 작성했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려버렸다. 그는 안으로 덤벼드는 아담의 머리통을 잡아서 바닥에 내리꽂고 군화로 짓이겼다.

금방 찾아갈게. 그 말을 끝으로 박스 밖으로 나간 그가 지하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석화는 화면을 바꿔 지하 2층의 감시 카메라를 찾았다. 불행하게도 전부 암전된 상태였다. 엘리베이터의 조명만 깜빡거렸고, 마지막으로 적은 메시지도 화면에 꺼졌다가 들어오기만을 반복했다.

그가 보지 못했어도 괜찮다. 그의 마음과 똑같다는 제 마음은 말로 전하면 될 일이다. 석화는 몸을 돌려 분리된 컨테이너의 실험실로 재빠르게 걸어갔다. 코피를 쏟는 제 몸의 열을 재고, 보드에 현재 시간과 체온을 체크했다. 통계로 따져보니 코피가 날 때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았다. 석화는 케이지 안의 쥐를 유심히 살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당사도지만, 다행히 쥐는 존재했다. 김 대위가 잡느라고 애는 좀 먹었지만 말이다.

제 피에 노출된 쥐들은 전부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마찬가지로 출혈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존 아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 빨리 육체의 움직임이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쥐는 반나절도 못 버티고 폐사했다. 보통의 바이러스는 숙주가 빨리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럼 신종 아담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동물을 숙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숙주는…….

오로지 저 자신뿐이라는 가설에 다다랐다. 바이러스가 제 몸에서 변이했으니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자살.

그 두려운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제가 죽으면 더 이상 바이러스가 퍼져나갈 일은 없지 않을까.

“똘똘이 박사! 나와 봐!”

밖에서 영감이 석화를 불렀다. 이 실험실은 위험구역이기 때문에 영감조차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한 까닭이었다.

“30분 안에 나갈게요.”

석화는 장갑을 벗고, 해수를 담수로 걸려주는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여 눈을 뜬 채로 머리부터 찬물을 맞았다.

최호언에게 얼마나 많은 샘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염된 사람이 하루 이상 버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치사율이 높으면 그만큼 감염 경로도 짧아지니 만일 제 몸에서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감염도 막을 수 있을 거다.

어느덧 코피가 멈춘 석화는 맨몸으로 나와 자신의 체온을 다시 확인했다. 예상대로 체온이 낮아지니 코피가 멎은 것이다. 출혈 빈도수가 처음보다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석화는 제 안의 바이러스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더불어 현재 헤모글로빈 수치 또한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매시간 혈액을 검사해보면 변이 바이러스의 움직임도 둔해지는 양상을 띠었다.

그런데도 제 안의 바이러스는 여전히 감염성이 있으니…….

불현듯 고개를 퍼뜩 들었다. 몸의 물기를 전부 제거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마지막으로 실험실을 점검했다. 석화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영감이 있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영감님.”

쉘터의 카메라가 송출되는 화면을 보던 영감이 코를 찡그렸다.

“뭐야, 곽가한테 말투 옮았어? 혹시 속으로는 미친 영감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여의도 쉘터를 비추는 모든 카메라는 전부 암전 상태로 돌변해 있었다. 곽수환이 마더 시스템 종료에 성공한 듯 싶었다. 한 발 늦어버렸다. 석화는 영감에게서 조금 떨어진 상태로 말을 꺼냈다.

“소령님의 피가 필요해요.”

키스를 하면서 그의 생채기 어디에라도 자신의 피가 노출되어 그는 감염이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곽수환에게서는 그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곽수환은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없는 몸이자 현존하는 바이러스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진화된 인류였다. 어쩌면 지금 저에게 곽수환이 백신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이 신종 변이 바이러스의 하나뿐인 숙주라면 말이다.

휴면 상태의 아담 바이러스가 백신에 의해 깨어나 몸에서 출혈이 시작됐을 때, 최호언은 적혈구를 수혈했다.

어쩌면 첫 출혈은 제 몸이 바이러스를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저항 작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입증하듯 지금까지도 저는 아담으로 변이되지 않았으니까. 과천에서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도 엄청난 고열에 시달린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히려 수혈 때문에 더 극심한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거다. 그런데 누구의 적혈구를 수혈 받았던 걸까……. 혹시 최호언일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석화는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고는 영감을 향해 조금 전의 생각을 차분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고개까지 몇 번 끄덕거리며 이야기를 듣던 영감이 피식 웃었다. 석화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 가설도 일리는 있지. 그런데 전제가 틀렸어.”

“예?”

“곽가가 최후의 돌연변이는 맞는데, 석화 박사도 돌연변이잖나. 나 같은 범인이었다면 이미 아담 바이러스에 감염된 순간 변이됐겠지. 그런데 박사를 봐. 여전히 사람이지.”

반대편 책상으로 걸어간 영감이 노트 하나를 꺼내 올려두었다. 그 역시 석화의 체온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것도 러시아에서부터 말이다. 석화는 곽수환에게 첫 수혈을 받은 이후부터 미세하지만 차츰 체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곽가가 왜 다른 이들보다 낮은 체온을 갖고 있느냐? 그게 곽가가 제 몸을 지키기 유리하기 때문이지.”

“체온이 낮으면 면역력은 오히려 더 저하됩니다.”

“흥, 면역력이 강하면 아담 바이러스에 안 걸리나? 그렇게 따지면 메르스, 에볼라, 콜레라, 온갖 질병은 전부 다 이겨내겠어. 제아무리 면역력이 강하다고 해도 감기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게 인간이야. 그러는 박사는 체온이 그렇게 높은데도 왜 골골대나.”

인간은 36.5도의 가장 기본적인 체온을 유지하지만, 곽수환은 약 34도 그리고 석화는 대체로 38도를 유지했다.

“박사의 높은 체온이 돌연변이 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곽가는 그렇게 된 거야.”

어쩐지 영감은 연민을 담아 석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똘똘이 박사의 체온도 변하고 있지. 여태 멀쩡한 걸 보면 변이 바이러스에도 내성이 생기기 시작한 거라고밖에 볼 수 없어. 박사가 숙주가 아니라 아담 바이러스를 뿌리 뽑을 수 있는 백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소리기도 하고. 달리 말해 아담 바이러스의 최종 진화는 여기까지라는 뜻이야. 이미 높은 치사율이 말해주지 않나.”

석화는 영감의 노트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최호언도 높은 치사율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요?”

“원호의 아들인 데다 놈도 박사라며. 내 다른 놈들은 다 그렇다 쳐도 원호 그 인간만큼은 더 상종 못 했어. 듣기론 제 아이조차 실험대에 올렸다니까 말이야. 그러면 제 아버지한테 복수를 해야지, 왜 애꿎은 시티를 망가뜨리려고 해.”

“최호언은……. 원호 박사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부산에서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최호언은 오히려 원호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하긴 원망도 뭘 알아야 하지. 실험체로 쓰이던 어린 녀석들을 나도 몇 번 봤었지만, 그 불쌍한 녀석들은 원망조차 없더라고. 정확히는 감정이 결여된 거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런 놈이 마스터가 된 이상 가만 놔둘 수는 없지. 놈은 분명 제 아버지가 이룩하지 못한 일에 사활을 걸 거야. 그게 놈이 사는 이유이자 목적이 됐을 테니까.”

쯧쯧, 진짜 정작 미치광이 박사는 돌연변이 연구원들이었다면서 혀를 찼다.

원호가 최호언을 상대로 무슨 실험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안타까운 감정이 샘솟는 것도 아니었다. 최호언은 가족에 대한 결핍을 자신에게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에게 가족은 어머니와 곽수환뿐이었다.

“영감님.”

“그 영감 소리 좀! 듣는 영감 듣기 싫어.”

“할아버지.”

영감이 입을 떡 벌렸다.

“최호언이 저를 찾으려 할 겁니다. 제가 이 변이 바이러스의 숙주라고 생각할 테고, 백신 개발도 막으려 할 테니까요. 그런데 영감님의 말이 맞는다면 제게서도 곧 감염력은 사라지겠죠.”

“하루가 다르게 출혈이 줄어들고, 변이 바이러스의 활동도 줄고 있잖나. 이 상태라면 하루 이틀이면 해결될 거야.”

석화는 까맣게 변해버린 화면을 향해 섰다. 곽수환이 무사하기만을 이곳에서 바라는 제가 너무 한심했다.

[아……. 그게 좌표였구나.]

석화와 영감이 동시에 화면을 돌아보았다. 화면은 여전히 까맣지만, 여의도 쉘터에서 들려온 음성이었다.

[석화 박사님, 세컨드가 남긴 좌표를 풀었나 봐요.]

저 느긋한 목소리는 분명 최호언의 것이었다.

마더가 정상화된 건가? 설마, 곽수환이 최호언에게…….

석화는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에 손만 재빨리 놀려 화면을 전환했다. 다른 화면을 다 뒤져봐도 쉘터는 여전히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박사님, 내 말 잘 들어요. 서둘러 도망쳐야 해요. 이희찬이 석화 박사님을 죽이려고 용병을 보냈거든요. 석화 박사님이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전달됐어요.]

치직, 퍽. 스피커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

마더 시스템 통제실인 지하 2층은 거대한 반딧불이의 무덤 같았다. 통제 센터에 일렬로 놓인 서버는 녹색 빛과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춘 곽수환은 천장에 이어진 사람 몸통 두께의 케이블을 확인했다. 그는 쉘터의 모든 문을 강제 폐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수배자이니만큼 마더 시스템에 접속할 권한은 없지만, 어딘가에 수동으로 쉘터를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터였다.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아서 마더는 늘 사람의 손을 거쳐야 했다.

휙, 손전등을 돌린 순간 사람 형체의 무언가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곽수환은 그 방향을 향해 다시 손전등을 비췄다. 제 키만 한 서버만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서버에 매달린 케이블을 전부 뽑아내며 조금 전에 인영이 지난 곳으로 달려갔다.

삐, 삐, 삐-

외부의 침입에 경고 시스템이 울렸다. 분명 이쪽으로 달려갔는데 외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벽에 매달린 네모난 박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한 누전차단기처럼 생겼으나 크기는 그 이상이었다. 쥐고 있던 권총을 발사해 잠금장치를 박살내고 철판을 뜯어냈다. 구역에 따른 개폐 장치 버튼이 전부 ON의 상태로 올라가 있었다. 곽수환이 재빨리 OFF모드로 내리자 경고 시스템이 다시 한번 울렸다.

[수동 모드 전환. 수동 모드 전환. 지금부터 쉘터 폐쇄에 들어갑니다.]

그는 쉘터가 폐쇄된다는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서버와 연결된 전선을 뽑거나 칼로 끊어내기 시작했다. 끊어진 전선에서는 불꽃이 튀며 전류까지 찌르르하게 흘렀다.

[서버 이상이 감지됩니다. 긴급점검을 요합니다.]

곽수환은 거대한 지하 2층을 돌며 통제실을 박살내기 시작했고, 목이 잘려나간 뱀처럼 발버둥 치던 전선을 타고 불이 붙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구렁이 몸통만한 천장의 케이블을 기관단총으로 연사해 연결을 끊었다.

[서버 통제 기능을 상실합니다. 이제부터 쉘터의 모든 시스템은 수동으로 전환, 치직.]

지하를 울리는 마더의 목소리는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에 펑, 하고 기계가 터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숨을 들이켜 폐를 부풀린 채로 입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뒤에서 이는 뜨거운 불길이 길을 밝혀 시야에 막힘은 없었지만, 문이 있는 곳으로 코너를 돌자마자 권총을 들이댔다. 어깨가 잔뜩 굽은 남자 한 명이 문에 서서 제 머리를 쿵쿵 박고 있던 탓이었다. 심지어 남자는 알몸이었다.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담 같기도 했지만,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 다짜고짜 총을 갈길 수는 없었다. 곽수환은 그대로 달려가 놈의 목을 확 낚아챘다.

“이건 뭐야.”

동공이 있어야 할 곳이 퀭하니 뚫려 있었다. 억지로 눈알을 파냈다기보다 마치 녹은 것처럼 유리체가 흘러내린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은 진화의 시작이지만 길을, 찾을 수 없어.”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시체가 말을 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곽수환은 알몸의 남자를 잡은 채로 서버실을 나왔다. 뜨거운 열기에 곧 철문도 달궈졌고, 마더가 수동 시스템으로 전환된 이상 스프링클러도 작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목덜미를 쥐고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올랐다.

쯧, 그가 혀를 찼다. 아담이라면 말을 구사할 리도 없을 텐데 이 괴상한 몰골은 뭘까 싶었다.

“새끼야, 너 어디서 왔어.”

“……아주 깊은 굴……?”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곽수환은 놈을 계단에 던져두고 올라가려다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직 살아있는 놈을 버리고 가기엔 저 밑에서 올라오는 불길이 거슬렸다. 그는 남자의 몸을 들쳐 메고 지하 2층부터 위의 주차장까지 단박에 뛰어올라갔다.

지프가 듬성듬성 서 있는 주차장에 다행히 아담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봐야 아담 밭일 테니 알몸의 남자는 이곳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최호언 씹새끼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목을 그릉거리듯이 내뱉은 곽수환이 폐쇄된 비상구를 바라봤다. 58층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빠져나갈 입구는 1층밖에 없을 텐데, 놈도 밖으로 나가려면 필시 아담을 상대해야 한다. 곽수환이 발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내려둔 남자가 발목을 붙들었다. 아담으로 변해 이를 드러내려는 것이면 그대로 대가리를 박살내주려고 했다.

“서펀트를 찾아?”

고개를 들었지만 눈알이 없어 어디를 보는 건지도 몰랐다. 곽수환은 남자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그 새끼 어디 있어.”

“고통은……. 곧 진화의 시작이라고 했어. 이브는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거랬어. 그럼 나는 언제 죽을 수 있을까?”

횡설수설하는 놈을 밀쳐내고 갈 수도 있었지만 곽수환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헛소리 말고 최호언에 대해서나 말하라고 윽박지르고 싶은 충동을 잘라냈다. 오랜 시간 군대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정신 나간 놈들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고문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었다. 놈도 그에 가까워보였다.

“우리는 이브를 기다려. 아담은 우리를 시험해. 당신이 구원인 이브인가?”

남자는 얌전히 목을 내어주는 양처럼 고개를 쭉 들었다. 구원 같은 소리하네. 원래 이브는 제약회사가 내건 백신의 이름이었다.

“너, 최호언이 이렇게 만든 거지? 내가 복수해줄 테니까 어디 있는지나 말해 봐.”

이런 상대는 협박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쪽이 좀 더 다루기 효율적이었다.

“고통을 끝내줄 구원자. 이제 그만 아프고 싶어.”

남자는 비어버린 제 눈에 손가락을 넣어 휘적거렸다. 이건 아무리 곽수환이라고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린 뒤에 안에서 뭔가가 딸려 나왔다.

“내가……. 마지막이야. 다 죽었어. 모두가 나갈 수 있는 순간만을 기다렸어. 김 박사가……. 김 박사가 나빠. 김 박사가! 우리를 꼬셨어! 아아!!! 속지 말았어야 해. 배가 고팠어도 참았어야 해!”

발작을 일으키는 남자는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면서 제 눈을 손으로 가렸다. 놈이 말하는 김 박사는 아마도 서펀트의 수하이자 제 눈앞에서 자살을 했던 연구원일 것이다. 에덴동산 신도였던 소년에게 아담 바이러스를 넘겨주기도 했던 그놈 말이다. 안 된 일이지만, 곽수환은 더는 건질 것이 없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남자가 눈 안에서 빼낸 무언가를 곽수환에게 내밀었다.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건 작은 앰플 용기였다.

“실험실에서 나온 건 이게 마지막이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건 더 없어.”

“실험실이 이 지하에 있었어?”

곽수환이 받은 앰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쳐도 소용없어. 너희는 우리를 밟고 서서 웃고, 즐기고, 모든 걸 누렸잖아. 아니야, 너희는 잘못이 없어. 미안해. 아니야! 그래도 잘못이 있어! 모르는 것도 죄라고 했어!”

곽수환은 유리용기를 손으로 꾹 감쌌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그제야 실감했다. 최호언이 여의도 쉘터를 놓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남자는 놈이 파놓은 뱀의 구덩이에서 나온 생존자였다.

김 박사가 에덴동산의 일원이었음을 쉽게 눈치채지 못했던 건 놈이 쉘터 밖으로 나가 이상행동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나갈 필요가 없던 거겠지. 바로 이 여의도 쉘터 지하에서 실험이 벌어졌을 테니까.

저희가 서펀트와 접선하기로 했던 날이자 불쌍한 소년이 스스로 아담이 되기를 선택했던 날, 여의도 쉘터에 아담 감염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지하에서 감염자를 올려 보냈기 때문일 거다.

그 시작은 이 쉘터에 오래 몸담고 있던 원호일 가능성이 컸다.

“곽수환 소령이 당신을 이용하는 겁니다.”

남자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곽수환의 셔츠를 붙잡았다. 이 새끼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아나 싶어 앙상한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윽,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숙주가 바로 석화 박사입니다. 곽수환 소령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겁니다.”

예의바르지만 무성의한 누군가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방금 뭐야.”

곽수환이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변한 남자가 간신히 목소리를 긁어냈다.

“석화 박사는……. 지금 당사도에 있습니다. 전부 서펀트가 말했다. 그자가 구원자를……. 죽이고 말 거야.”

흐으윽, 남자는 또다시 두 손을 펼쳐 제 두 눈을 가렸다.

설마 마더 시스템 통제실에 최호언이 있었던 건가? 아니, 그랬다면 마주치지 못했을 리 없다. 시간상 그 새끼가 먼저 밑으로 내려가 쉘터를 전면 개방했던 거다. 지금쯤이면 쉘터를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콰아앙! 거센 폭발 소리와 함께 쉘터가 번개를 맞은 듯 뒤흔들렸다. 뒤이어 지하주차장으로 급격하게 다가오는 엔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는 바닥을 벌레처럼 기며 귀를 틀어막았다. 끼기긱, 스키드마크를 새기며 내려오는 한 대의 지프를 향해 곽수환이 총구를 겨눴다. 브레이크를 밟은 지프는 몇 미터 거리쯤에서 멈춰 섰다. 창밖으로 고개를 빼든 놈이 소리쳤다.

“병신 새끼야! 지금 뭐하냐!”

타앙, 곽수환의 옆으로 탄환이 지나가고 곪은 수박이 터지는 익숙한 피격음이 들렸다. 소리친 건 양상훈이었지만, 총을 발사한 건 조수석의 조운이었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텅 빈 눈을 한 채 뒤로 넘어간 남자를 봤다.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몸을 숙여 남자의 눈꺼풀을 닫아주었다. 살갗이 한번 내려가기만 했을 뿐 다시 비어버린 눈을 드러내 보였다.

“저 미친 새끼! 지금 아담한테 제사 지내냐? 빨리 안 타?!”

알몸에 눈 밑으로 굳어버린 피를 보니 충분히 아담으로 착각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래, 어차피 그냥 놔뒀어도 죽을 목숨이었다. 곽수환은 애써 감상을 털어내며 지프로 달려갔다. 조운이 뒷좌석으로 이동하니 곽수환이 조수석에 앉았다.

“밖에 아담들 있었냐?”

“아니?”

“시티 군은?”

“이동 중인가 봐. 헬기가 전부 밑으로 날아가던데.”

최호언 새끼가 탈출에 성공했다는 확신이 더 굳어졌다.

“근데 나 여기 온 거 안 놀랍냐? 반응이 왜 이래.”

“우리가 최호언보다 먼저 도착해야 돼. 가자, 석 박사한테.”

“안 그래도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야! 박사님이,”

“당사도로 갈 거니까 출발부터 해, 새끼야.”

그는 유리용기를 제 가슴팍 주머니에 툭 꽂아 넣었다. 당사도는 대체 어떻게 알았냐며 양상훈은 운전을 하면서도 곁눈질을 했다.

“설마 박사님하고 연락 됐어?”

“이희찬이 당사도로 사람을 보냈을지도 몰라.”

‘근데 너 혹시, 또 나 속이는 거 있는 건 아니지? 이번에는 뒤통수치지 마라?’

그녀의 우려는 곧 현실이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몸에 일어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좋을 것이 없는데다 제가 아는 이희찬이라면 시티의 위험요소가 될 수 있을 석화를 없애고도 남았다.

“그럼 다행인 거 아니야?”

“석 박사를 사살하라고 지시했을 거야.”

제기랄, 큰일이라는 양상훈이 지프의 속도를 더 빠르게 올렸다. 폐쇄된 지하 주차장의 문을 수류탄으로 부쉈는지 쇠로 된 철창이 박살나 있었다. 게다가 슬슬 지하에서 불길이 위로 번지고 있어 매캐한 연기가 쉘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배로 가면 늦는다. 헬기로 가자.”

“대장.”

뒤에서 조수석 등받이를 붙들고 있던 조운이 끼어들었다.

“이건 박사님께서 전하신 겁니다.”

조운이 내민 건 세 번에 걸쳐 접힌 종이였다. 급히 펼치니 금이 간 부분이 조금 찢어져버렸다.

[저예요, 석화.]

엘리베이터 메시지도 그 비슷하게 시작하더니 편지의 시작도 너무나 석화다웠다.

[러시아에서 했던 약속 기억 하죠? 만일 우리가 만나지 못하게 되면 사향노루가 있던 곳으로 와요. 살아요. 우리 무조건.]

어머니가 남긴 ‘살아’보다 더 강렬한 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저 혼자가 아닌 우리였음에.

***

“어이, 똘똘이 박사.”

최호언의 음성은 분명 여의도 쉘터에서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몇 층에서 들어온 것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고, 쉘터와 연결된 모든 연락망이 차단되어 버렸다. 패닉룸을 통해 도망갔다고 했으니 곽수환이 뒤쫓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곽수환은 무사할까?

‘박사님, 내 말 잘 들어요. 서둘러 도망쳐야 해요. 이희찬이 석화 박사님을 죽이려고 용병을 보냈거든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 건가.

“석화야!”

석화는 영감의 고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놈 말 믿는 건 아니지? 좌표 이야기만 꺼냈지 당사도라는 위치까지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잖아. 내 말 무슨 뜻인지는 알지? 그리고 황제 펭귄이 왜 너를 죽이려고 하겠어.”

한마디로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이간질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해요. 최호언은 제가 신종 아담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걸 아니까요.”

분명 세컨드가 남긴 휴대폰에 있던 건 당사도의 좌표였다. 최호언은 좌표를 풀었냐고만 했지 영감의 말대로 정확한 위치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최호언이 제 위치를 알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느냐? 그 역시 아니었다. 연결된 마더를 통해 이곳을 찾아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 했다.

“영감님, 이동해야겠습니다.”

“어디로?”

“백신 개발법은 이미 모든 쉘터로 전송했으니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끝냈어요. 하루 이틀이면 올빼미와 부엉이도 제작한 백신을 배포할 테고요. 지금으로선 신종 아담의 숙주인 저만 사라지면 돼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백신 개발법을 가장 먼저 퍼뜨렸다. 과천 등 지방 쉘터에 잔존해 있던 올빼미와 부엉이 가문 출신 연구원들은 가문의 지원을 받아 개발에 들어갔다. 그들 또한 레인보우 시티에서 부르는 반군이 되었으나 다른 말로는 의인들이었다. 영감이 무작위로 뿌린 백신을 미리 받아봤기에 시티가 거짓으로 점철된 것을 확신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연합국이 무너졌다는 소문은 군인들에 의해 시티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이미 쉘터에 신종 아담이 퍼졌다며! 그럼 이미 늦은 게 아니겠어.”

곽수환은 분명 쉘터를 폐쇄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석화는 곽수환을 믿었다.

“저와 같이 일단 섬을 나가요. 섬을 전부 불태워야 합니다.”

영감은 세 치 혀에 속는 거라며 불만스러워 했지만, 김 대위의 생각도 석화와 같았다.

김 대위는 총 다섯 개의 컨테이너에 차례대로 기름을 들이부었다. 석화도 기름통 하나를 건네받고 자신의 실험실로 향했다. 케이지 안의 감염된 쥐들은 전부 폐사된 채였지만, 그 위에도 기름을 꼼꼼하게 뿌렸다.

석화는 영감이 준 노트와 휴대폰도 함께 챙겨 배낭을 멨다. 컨테이너 밖으로 나와 성냥에 불을 붙여 안으로 집어넣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남은 컨테이너도 전부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제 이 작은 섬 전역은 한바탕 방역에 들어가게 될 테니, 저희들도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김 대위가 군용 헬기 연료를 챙겨 엔진을 가동시켰다.

“박사님, 어디로 이동합니까?”

이렇게 또 곽수환과 엇갈리게 되겠지만, 양상훈과 조운이 무사히 그와 접선했기만을 바랐다. 하루에서 이틀이면 제 몸의 바이러스가 잠재워질 거라던 가설 또한 믿고 싶었다. 석화는 헬기 조수석에 앉아 헤드셋을 썼다. 지금껏 곽수환이 저의 안전을 하나부터 열까지 돌봐줬다면 이제는 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석화는 레인보우 시티의 지도를 펼쳐서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당사도 섬 위에 위치한 육지, 해남이었다.

“해남 말씀이십니까?”

“해남의 달마산이요.”

곽수환의 보물 창고가 있던 곳을 말했다. 제주와 쉘터에서만 살던 석화가 알고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는 곽수환과 함께 다녀왔던 곳뿐이었다.

“절 달마산에 내려주시고, 대위님은 영감님과 함께 올빼미와 부엉이 가문에게 접선해 안정을 보장받으세요. 그들이 백신을 만드는 곳 위치는.”

석화는 어느 한 구역에 X자를 표시했다. 성남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버려진 과학연구소. 일전에 곽수환의 부대원들과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나 최호언에게 뒤를 붙잡힌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던 장소였다.

“과천 쉘터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온 연락에 따르면 대략적으로 여기일 가능성이 커요. 만일 과학연구소에 사람이 없다면, 김 대위님.”

“예, 박사님.”

“세컨드 마스터가 숨어있던 방공호 아시죠?”

“물론입니다.”

김 대위는 그곳에서 곽수환에게 목숨을 빚졌기 때문에 장소를 정확히 기억했다.

“그 방공호로 가세요. 최호언이 내부를 불태웠지만 잠시 몸 숨기기는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백신이 전부 배포되면 최호언도 실각하게 될 테니 라디오에 집중하세요. 체제 변화에 성공하면 황제펭귄이 가장 먼저 방송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 대위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군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시티의 군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허여멀건 박사의 명령 따위는 무시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가 든든한 상부처럼 느껴졌다.

석화는 영감이 뒷자리에 제대로 탔는지 확인했다. 영감은 배낭을 앞으로 메고 벨트를 채우는 중이었다. 그 배낭에도 백신 몇 개가 남아있던 터였다.

“이제 출발해요.”

“꽉 잡으십시오!”

김 대위는 헬기의 고도를 급격하게 높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마구 이는 프로펠러 밑으로 불길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섬은 떠나는 헬기를 잡아먹기라도 하듯 불로 된 손끝을 뻗었다. 석화는 짠내 나는 바닷바람이 폐부에 가득 찬다고 느꼈을 때 이륙에 완전히 성공했음을 실감했다.

만일 양상훈과 조운이 접선에 성공한다면 곽수환은 당사도로 오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좁은 섬에서 이희찬 가문과 곽수환, 그리고 최호언의 삼파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곽수환은 또다시 저를 지키고자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큰 원인인 제가 떠나면 되는 거다. 백신이 배포되고 황제펭귄이 정권을 잡으면 그를 무사히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같은 날, 두 시간 뒤.

“뭐라고?”

이희찬은 전화기의 스피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우도는 완전 폐허야. 우도뿐인 줄 알아? 제주도도 싹 다 박살났어! 생존자들 못 나가게 하늘길이랑 뱃길도 다 막혔다고. 그 새끼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엄마가 말한 당사도도 싹 다 불탔어. 몇 번을 말해!]

“그럼 석화 박사는? 찾았어?”

[거긴 사람이 있던 흔적도 없어. 제주도, 당사도 싹 다 헬기나 배도 없다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하고. 넌 다시 성남으로 올라가서 연구소에서 나오는 백신부터 배포해.”

그녀는 전화를 종료하고 군사회의실을 서성거렸다. 부산 쉘터는 이미 황제펭귄 일가가 접수한 상태로 마더 시스템도 전면 종료시켰다.

부산 지역을 수호하던 박 장군은 황제펭귄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거라 예상했기에 그녀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연합국이 무너진 것을 이 근래 알았기에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지도 못했다. 시티는 군의 수뇌부들에게도 안대를 씌워놓고 있었다. 그보다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니……. 최호언이 중심 기관을 모두 육지로 이동시켜놓고 기가 막힌 짓을 벌인 거다.

놈의 목적은 정말로 시티를 망가뜨리는 데에 있어 보였다.

“곽수환 이 자식은 지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여의도 쉘터는 전면 전소되어 아직도 불타고 있었으며, 우려와는 다르게 그 부근에서 새로운 아담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곽수환의 지시에 따라 P포인트로 이동하던 이들도 부산 쉘터가 접수됐다는 소식에 여기로 합류했으나 정작 대장은 만날 수 없었다.

“설마 석화 박사가 최호언에게 잡혀간 건 아니겠지?”

차 중령이 초조해하는 이희찬에게 다가갔다. 군사회의실에는 박 장군을 비롯해 차 중령도 함께였다.

“최호언이 박사님을 납치했다면, 김 대위나 러시아 박사의 시체도 당사도 어딘가에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흔적도 없다는 건.”

“그 세 사람이 직접 불태우고 피신한 걸 수도 있겠지.”

이희찬이 말을 이어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호언이 메시지를 보내온 건 사실이었다. 마더 시스템을 종료하기 전, 부산에 있는 이희찬에게 석화가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연락을 걸어온 것이다. 석화가 있는 위치 또한 당사도라고 덧붙였다. 물론 이희찬은 서펀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만일 석화가 변이 바이러스의 숙주라면 곽수환이 이 사실을 속인 꼴이 되는데, 놈이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쯤은 그녀도 충분히 예상했다. 방탕함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컨트롤러로 활동하던 곽수환이 그간 무언가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돌연변이들은 하나같이 집착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곽수환이 집착하는 것은 오로지 석화뿐이었다. 그러니 석화 박사가 위험 요소라고 해도 이희찬은 박사를 죽여 없앨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곽수환을 적으로 돌려봤자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게다가 서펀트의 말에 놀아나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지금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고.”

까딱 잘못하면 제 식구들의 목이 전부 잘려나갈 거다.

“아마도 위치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해서 섬을 방역하고 떠난 것 같습니다. 부산 쉘터를 접수한 것을 알면 박사님들도 이쪽으로 합류하지 않을까요?”

“방송을 들었다면 말이지. 그리고 우리한테 했듯이 최호언이 또 어떤 이간질을 했을지는 모르잖아?”

현재 이 지역의 라디오 방송은 황제펭귄의 지휘 아래 송출되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껏 줄여놓았던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지금은 전시상황입니다. 시민들은 안전한 집 혹은 은신처에서 대기하십시오. 황제펭귄 마크가 새겨진 백신이 배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레인보우 시티의 시민으로서 진실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제부로 연합국은 무너졌으며 레인보우 시티는 자치정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백신의 배포로 자유와 평화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현 마스터 최호언은 시민들의 눈을 가리고 부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백신 개발 사실을 숨겼습니다. 마스터의 자격이 없는 자를 더 이상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랑스러운 시민 여러분, 백신이 안전히 배포될 때까지 결코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어제부터 연합국이 무너졌다니?

박 장군이 불신을 담아 이희찬을 봤다. 이 여자 역시 전 수뇌부들과 똑같지 않은가 싶은 눈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대놓고 내뱉었다.

“박 장군, 때로는 완벽한 진실보다 적당한 거짓을 말할 때가 더 효율적인 법이에요. 연합국이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진실이 알려지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적어도 나는 다르다. 사리사욕을 위해 아담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이희찬이 확고하게 제 의사를 전달하려고 했다.

“시작은 곽수환 그 자식의 꼬드김에 속아 이용당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난 변방의 영주가 되는 대신 중앙의 중심이 되기를 택했어요. 난 레인보우 시티가 쇠퇴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시티가 잘 살아야 우리 가문도 잘 살죠. 안 그래요?”

“내 목숨 살고자 그쪽에게 편승한 것이지만, 마스터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 혼란은 계속 야기될 거요.”

“아니, 박 장군은 이미 알고 있어요. 내가 기존의 마스터들보다 낫다는 걸. 그리고 마스터 제거는 제 몫이 아니죠.”

이희찬은 자신만만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불안함을 숨기고 있었다. 최호언의 목을 칠 사람은 다름 아닌 곽수환이었다. 그런 놈이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장급이 나만 빼놓고 다 죽었다고 해도 아직 남은 장성들이 있소.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군인들끼리 전면전이 시작될 텐데, 난 그게 가장 큰 걱정이라는 말입니다.”

군의 핵심 인사들은 여의도 쉘터에서 목숨이 날아간 터였다.

박 장군의 부하들이 부산부터 위로 올라가며 쉘터를 장악하는 중이었지만, S클래스가 포진해 있는 서울이 문제였다. 아직 최호언의 명령을 하달 받지 못한 듯 각 쉘터의 군인은 수성에만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나선다면 시티는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곽수환이도 그걸 모를 리가 없죠. 지금껏 최호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건 곽수환이 놈을 옥죄고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이보시오!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닙니까?”

“그건 희찬 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희 대장 아닙니까.”

박 장군이 매서운 눈으로 차 중령을 노려봤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바보 같은 세컨드 마스터가 제 명줄 줄어드는 줄도 모르고 호랑이들을 키워놨지.”

“저희를 키운 건 대장입니다. 목숨도 수도 없이 빚졌고요.”

“감히 어디 중령 따위가!”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이딴 신경전은 딱 질색이었다. 이희찬이 책상을 탁 내리쳤다.

“박 장군, 최호언이 실각하면 제 일을 도운 차 중령이 몇 계급이나 특진할 수도 있어요. 장군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솔직히 박 장군도 사리사욕을 꽤나 채우셨잖아요? 갑자기 최호언이 여의도로 불러들이니 이상함을 감지하고 여기에 남아계셨던 것 아닙니까?”

박 장군은 반박할 도리가 없어 말을 아꼈다. 황제펭귄이 백신을 배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던 건 맞았다. 게다가 이희찬이 질 싸움에 뛰어들 사람이던가? 아니라는 것을 이 수십 년간 겪어왔다.

최호언이 마스터가 되었듯 시티의 수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이희찬의 가문은 그 누가 마스터가 되든 변함없이 건재했다. 그 말은 황제펭귄 가문에게 마스터 이상의 권력과 재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삐익, 삐, 삐.

군사회의실의 유선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고, 이희찬이 곧장 수화기를 낚아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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