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20/23)

에필로그


곽수환은 최호언이 죽고 나서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깨어난 곽수환은 더 이상 그들이 알던 곽수환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을 덜덜 떨었으며 누군가가 떠넘겨주는 음식도 잘 삼키지 못했다. 심지어 석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들 곽수환이 지나친 총상에 백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양상훈은 자신이 석화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면서 곽수환에게 사죄했지만, 누가 뭐라고 하든 그는 늘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여전히 죽도 삼키지 못해 턱밑으로 줄줄 흘렸고 움직이지 못하는 몸은 근육이 퇴화해 말라갔다. 러시아 영감은 레인보우 시티에 남아서 백신과 불에 타버린 연구소들 재건에 힘썼지만, 곽수환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보통 사람이면 이미 죽고도 남을 만큼 피를 쏟았다. 곽수환은 심장이 멈춘 채로 실려 왔고, 의료진이 한 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인 끝에 그의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박동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곽수환의 몸에 남은 피는 다섯 살 아이 수준도 되지 못했다. 영감은 아마 피가 돌지 않아 뇌가 잘못되었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백치가 된 것이라고.

황제펭귄 이희찬은 시티의 정권을 잡았으나 백치가 된 곽수환을 버리지 않았다. 곽수환에게 중장 직급을 하사했으며, 다른 가문들에게 석화 박사는 죽었다고 발표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백신을 개발해 사람들을 아담에게서 자유롭게 해준 박사는 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째 되었을 때 곽수환은 손을 떨지 않게 되었다. 그는 그때부터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 밥을 먹었고, 쉘터 밖으로 나가 걷고, 또 어느 날이 되자 달렸다.

또 어느 날은 새벽녘부터 훈련실에 들어가 운동을 했으며 퇴화된 근육을 일깨웠다. 그러나 그 누가 말을 걸어도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시 전처럼 몸을 만들고 건강해지는 데만 집중하는 로봇처럼 다른 외부의 자극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섯 달째 되던 날이었다.

오전 식사시간이 지났는데도 곽수환이 보이지 않았다. 그를 돌보던 양상훈이 혹시나 싶어 훈련실에 가봤지만, 내부는 조용했고 식당에 가도 곽수환은 없었다. 곽수환의 방에 가보니 옷장이 반쯤 열려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곱게 다림질해 걸어둔 시티의 제복이 없어져 있었다. 뭔가를 챙겨 간 듯 배낭과 책상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국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양상훈이 놀라 통제실로 달려갔다. 혹시 백치가 되어버린 녀석이 무슨 짓이라도 벌이는 건 아닌지 걱정된 탓에 주변의 감시카메라를 전부 확인했다.

정적만 흐르는 밖을 보니 이미 이곳을 벗어난 지는 꽤 된 듯했다. 양상훈은 녹화된 카메라의 시간을 앞으로 돌리고 나서야 곽수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쉘터 밖으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자세는 올곧았고, 가야 할 방향에 확신 또한 있는지 걸음걸이에 막힘이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군용 지프가 있는 주차장이었다. 양상훈은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곽수환과 시간차를 두고 눈을 마주했다. 전처럼 씩 하고 한번 웃은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다시 곱게 접어서 제복 안쪽에 넣었다.

그가 훌쩍 쉘터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이내 한쪽 어깨에 배낭을 메고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만 잔상처럼 남았다.

여태 잘못 알고 있었다. 곽수환은 제 몸을 정상으로 돌리는 데 집중한 게 아니었다.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곽수환의 모든 정신은 석화에게 가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떠나기 위한 몸을 만들고자 하는 껍데기만 남아있었다.

양상훈은 곧 지프 한 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추적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 둘이 그들의 고향인 레인보우 시티로 돌아오기를 이곳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레인보우 시티 完 / 6권(외전에서 계속)]

***

마스터 최호언 사망일로부터 150일 뒤, 레인보우 시티 자치정부 발표일로부터 151일 뒤.

백신 ‘이브’ 전 국민 배포 완료로부터 60일 뒤인 오늘.

현(現) 협력국 러시아 하산(Xacah)

땔감을 안고 가는 사람의 입가로 하얀 입김이 뭉개졌다.

한 번에 많이 들 수는 없어서 두세 조각씩 옮겨놓은 땔감의 양은 겨울을 날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래도 가을부터 부지런히 마른 장작을 모아둔 덕인지 아껴서 떼다 보면 이번 겨울을 무사히 나지 않을까 싶었다. 산장 안으로 돌아온 석화는 벽난로 안에 땔감 두 개를 툭툭 얹었다. 부지깽이로 재를 쑤시니 아직 살아있는 불씨가 피어올랐다.

석화는 찬장을 열어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통조림 따개의 톱니바퀴를 돌려서 캔을 여니 고소하고도 달콤한 옥수수 냄새가 올라왔다. 접시에 툭툭 덜고 딱딱하게 말라비틀어진 즉석밥을 함께 먹었다. 그러다가도 커튼을 열어둔 산장 창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럴 리 없지만 석화는 눈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눈이 시렸다.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가 뜨니 망막을 뿌옇게 감싸던 물기가 사라졌다.

석화는 덤덤하고도 차분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식탁에 놓여있는 이가 빠진 과도는 평소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아.’

그럴 때마다 곽수환이 말했다.

석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식사를 마치고 낡은 소파로 걸어갔다. 소파 앞의 테이블에는 산에서 나는 약재들이 수북했다. 흙을 털어내고 약재를 가위로 자르다가 또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산장 안에는 적어도 반 년 치 먹을거리가 있었다. 근처에 계곡이 있어 물을 조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대신 주방 안쪽에 켜켜이 쌓여있던 부탄가스는 슬슬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 년 치 식량이라고 했지만 원체도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 앞으로 두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듯했다.

러시아로 홀로 올라온 뒤 석화는 혼자 사는 법을 배웠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혼자서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지금도 대충 잘라둔 앞머리가 거슬렸지만 아직 정리하기는 일렀다. 석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곽수환이 산장에 남겨두고 간 큐브를 손으로 돌렸다. 그는 이런 일을 예견했던 걸까?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살았던 모든 곳에 혹시나 싶어 대비를 해뒀을지도 모른다. 항상 준비성이 좋은 그였으니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눈에 잠시 활기가 돌았다. 사향노루 한 마리가 산장을 배회하고 있던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면 후다닥 도망가 버리고는 해 그저 이곳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어둠이 산장을 찾아올 무렵 일렁거리던 촛불을 후 불어 껐다. 불빛을 따라 늑대가 몰려들면 하루 종일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석화는 권총을 침대 옆에 두고 몸을 웅크렸다.

그날 헬기에 매달려 이동한 석화는 곧장 양상훈과 함께 지프로 갈아타야 했다. 지프의 무전에서는 석화 박사를 사살하라는 지시가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올빼미와 부엉이 가문은 대령이 남긴 무전을 통해 석화가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숙주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도심 곳곳은 불타고 있었으나 양상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지프를 위로 몰기만 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 또다시 무전이 울렸다.

‘변이 아담 바이러스의 유일한 숙주인 석화 박사는 발견 즉시 사살하라. 마스터 최호언이 사망했으며 백신은 예정대로 개발해 배포한다.’

다행히 비가 와 도심의 불길은 더 크게 일지 않았고, 불행히 무전에서는 계속 석화를 죽이라 종용했다. 러시아와 한껏 맞닿은 곳까지 도달한 밤이었다. 석화는 지프에서 권총 두 자루와 먹을거리를 챙겨 홀로 시티를 벗어났다. 자신의 도주를 도와준 양상훈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동행은 여기까지였다.

두만강 강폭이 좁다지만, 수영해서 건너갈 수도 없는지라 석화는 너덜거리는 다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 건넜다. 철교 중심이 파이고 철로가 강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고 해도 석화 한 사람의 무게쯤은 끄떡없었다. 대신 갈 때는 곽수환과 함께였지만 돌아올 때는 혼자였다.

헤어지던 날까지 양상훈과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래도 석화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곽수환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반대로 석화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췄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곽수환이 살아있다면 자신을 죽이라는 무전을 듣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보다 저를 더 우위에 두었고,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저를 살리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고독하고 외롭지만 그가 살린 목숨이었다. 그래서 제 맘대로 함부로 버릴 수도 없으니 살아야 했다.

***

석화는 반쯤 졸고 반쯤 눈을 뜨는 밤을 지새웠다. 동이 트자마자 권총을 챙겨 두꺼운 옷으로 갈아 입었다. 며칠에 걸쳐 썰어둔 약재와 직접 만든 연고도 지프에 실었다.

습관적으로 지프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봤지만 코피는 멈춘 지 오래였다. 또한 체온은 예전과 달리 일반인에 가까웠다. 이따금 출혈하던 몸이 안정을 찾은 건 산장에 도착하고도 일주일이 넘었을 때였다.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석화는 고개를 젓고는 지프를 몰아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프는 그와 살았던 하산의 건물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라즈보이니크라고 불리던 근처의 약탈자 우두머리는 듣자하니 차에 묶인 채 아사했다고 했다. 차에 묶인 걸 보고도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이후로 약탈자들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석화는 밑의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에게 약재와 연고를 주고는 약간의 기름과 옷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다들 석화가 벙어리 약사인 줄 알았다. 제 몸이 아직 어떤 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인 탓이었다. 석화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산장으로 차를 몰았다. 석화에게 호의를 내비치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권총 때문에 또 쉽사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남녀 가리지 않고 하반신을 휘두르는 러시아 놈 하나가 석화에게 달려들었다가 총에 맞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도 산장 가까이에 다가가지 않았다. 밤에 침입하려고 해도 늑대가 많으니 함부로 산장에 접근하는 이들도 없었다. 석화에게 늑대는 두려운 존재였지만 반대로 저를 지켜주는 아군이기도 했다.

석화는 집으로 돌아와 입구와 창문에 깨진 병이 잘 꽂혀 있나 확인했다. 그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도 또 똑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곽수환이 없는 151일이라는 것이다.

내일은 그가 없는 152일째가 될 것이다.

***

그럴 리가 없는데 밖이 소란했다. 어둠은 물러난 지 오래였기에 커튼 사이로 빛이 어른거렸다.

석화는 몸을 일으켜 경계심을 갖고 슬쩍 커튼을 젖혔다. 아마도 밑의 사람들이 계곡으로 물을 뜨러 온 모양이었다. 석화는 안심하고 싱크대로 걸었다. 물물교환해온 비누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았다. 심이 마모된 칫솔로 이도 닦고 아침을 먹기 전에 라디오를 챙겼다.

석화는 시티와 가장 가깝고 신호가 잘 잡히는 곳으로 걸었다. 옆구리에 권총은 늘 잘 있었다. 라디오의 안테나를 길게 빼들고는 신호를 찾았다.

레인보우 시티는 슬슬 안정기에 접어드는 중인지 이따금 자리만 잘 잡으면 시티의 방송이 들려오고는 했다.

[치직, 직, 직, 투표는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레인보우 시티에……. 치직, 시티의 시민이며, 각 지역의, 치직, 오시어 시민등록을 해주십시오. 치직.]

방송에서 사람들을 세뇌하는 선전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석화는 한쪽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방전이 되어서 이제는 곽수환의 사진조차 볼 수 없었다.

비밀번호를 풀지 않았다면, 당사도로 가지 않았다면……. 석화는 이 휴대폰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세컨드 마스터가 설정한 비밀번호는 끝까지 그다웠다.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이나 자식에 대한 미안함 같은 건 없었다. 그가 설정한 비밀번호는 Agate였다. 그가 그렇게도 사랑한 마노 광물 말이다. 단어를 이진법으로 치환해 끝의 숫자만 따면 11101이었다. 비밀번호 6자리를 전부 채워야 한다는 것 또한 함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컨드가 집착한 것은 오로지 광물뿐이었으니, 어쩌면 그 유전자가 남아 자신도 돌에 집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돌조차도 모으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지만 곽수환의 집착 특성은 어쩌면 번식이 아닐까 싶었다. 완벽에 가까운 유전자를 가진 곽수환이니만큼 번식을 통해 진화를 거듭해야할 임무를 타고났을지도. 돌이켜보면 그는 제가 정액을 달라고 할 때도 대충 웃어넘겼을 뿐 실질적으로 넘겨준 적이 없었다.

시티가 만들어 낸 완벽한 돌연변이.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반항심으로 그의 집착 특성을 깨닫고 스스로를 통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칙, 합니다. 기지국을…… 것이며, 공정한 교육을, 치직, 합니다. 황제펭귄, 지원합니다. 우리의 백신은 완전합니다.]

석화는 라디오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산장으로 돌아가 연고를 만들고 약재를 정리할 생각이었다. 비척비척 걸어가는 석화는 살아있었으나 죽어있었다.

처음 몇 달은 곽수환의 꿈을 꿨다. 돌아온 그와 재회하고 몸을 맞대는 꿈에서 깨고 나면 더없이 살기를 그만두고 싶어졌고, 이후로는 그가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살아.

그 말은 주박처럼 붙었고, 저주처럼 저를 붙잡아 두었다.

석화는 산장으로 내려가다가 또다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다 떠난 뒤에 산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훔쳐갈 것은 식량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후에 산장으로 내려오니 집 안이 엉망이었다. 누군가가 식량을 훔쳐간 데다 약재도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분해할 것도 없었다. 그런 단순한 감정 따위는 이미 남아있지도 않았으니까.

석화는 바닥을 치우고 쓸고, 또다시 창문을 바라봤다. 눈 안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온다. 뿌연 시야 사이에 사향노루가 서 있었다. 석화는 웬일로 밖으로 나가 사향노루를 보고 싶었다. 저만 보면 도망가는 녀석이지만 문을 열었는데도 가만히 서 있었다.

석화는 모포를 어깨에 두르고 현관 옆 나무테라스에 앉았다. 바작, 역시나 사향노루가 산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작, 바작, 노루는 가만히 있는데 마른 나뭇잎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석화는 시선을 노루의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노루가 산속 깊숙한 곳으로 더 뛰어 들어갔다. 석화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배낭을 메고, 바닥에 떨어진 마른 가지들은 그에게 아무런 장해도 되지 못하는지 걸음에 막힘은 없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석화를 향해 걸어왔다. 의자에서 일어난 석화의 등 뒤로 모포가 떨어졌다.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이제는 환상까지 보는 건가. 아니면 더는 살지 않고 죽어도 된다고 허락해주러 그가 온 건가.

곽수환이 석화의 앞에 와서 섰다.

석화는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그가 신기루로 변하고 꿈에서 깰 것만 같았다.

“나 왔어, 형.”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가 이랬던가? 제 기억에 그의 목소리는 늘 시원했는데, 지금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눈에 그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가린 물기를 눈을 깜빡여 털어내도 여전히 쌓이기만 했다.

“내가 좀 많이 아팠어. 믿어져?”

그는 조금 겸연쩍게 웃었다.

“미안해, 늦어서.”

“…….”

“미안해, 혼자 둬서.”

“…….”

덤덤하게 이야기한 곽수환은 웃다가 곧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혔다. 저처럼 숨을 들이켠 그는 더는 울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석 박사, 석화야, 석화 형.”

그가 모든 이름으로 석화를 불렀다. 석화를 향한 세상의 모든 부름이 전부 자신의 것인 듯이.

석화는 그제야 울고 있는 그를 끌어안았다. 러시아의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그의 뺨을 제 뺨으로 어루만졌고 기억만큼이나 단단한 그의 몸을 한껏 감쌌다. 곽수환도 참지 못하고 석화의 몸을 제 품에 가뒀다.

그들은 틀렸다. 고통은 진화의 시작이 아니다.

모든 바이러스에서 자유롭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한 신인류도 아니었다. 바이러스는 또다시 변이할 테고, 완전한 돌연변이라 불리던 그 역시 목숨을 잃을 뻔했지 않나. 언제나 세상에 완벽한 진화란 없다.

진화의 시작은 생존에서 비롯됐다.

생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가족, 친구, 혹은 연인, 그들을 위해 생에 집착했고, 시티의 사람들도 그들과 삶을 함께하기 위해서 죽음을 물리치고 살아남았다. 저도 살아있기에 그를 만날 수 있었고, 그는 살았기에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석화에게는 곽수환이, 곽수환에게는 석화가 바로 생존의 이유였다.

그래서 그들은 또 한 번 진화할 수 있었다.

“……수환아.”

갓 태어난 아이가 첫 소리를 내듯 석화는 152일 만에 처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잘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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