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a Vie en rose (23/23)

La Vie en rose


석화는 누구보다도 곽수환과 밤새도록 붙어있고 싶었다.

기운이 넘쳐 그에게 맞춰 성행위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석화는 기다란 봉을 심각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도로 서랍에 넣어두었다.

부우웅, 서랍 위의 물체가 진동했다. 곽수환이 사준 휴대폰이었다. 아직 전파가 이곳저곳에서 막힘없이 터지는 건 아니라 사용하는 일은 집 외에는 거의 드물었다.

“여보세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오늘 석화는 비번이었다. 곽수환은 출근하는 날이라 이른 오전부터 침대 한쪽이 비어 있었다.

[목소리 좀 들려줘 봐.]

“……목소리.”

[그게 뭐야. 점심 먹었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대화는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몇 시에 와요?”

[형도 나 보고 싶지? 6시에 곧장 출발할게. 일부러 나 강남 보내고 자긴 여의도로 찢어놓은 거 알지? 하지만 내가 누구야, 여기 일 해치우고 바로 여의도로 복귀한다. 자기 혼자 밥 먹으면 안 되니까.]

사실 요즘은 연구동 동료들과 같이 점심을 하고는 했다.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지만, 그만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알았어요.”

[존나게 사랑해.]

고백과 함께 뚝 끊겼다. 그래서 ‘나도’라는 말은 그가 들을 수 없었다. 석화는 아직도 어색한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무슨 일 있어?]

곽수환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끊자마자 전화가 걸려오니 무슨 일이 있는 줄 안 듯했다.

“나도.”

[……하, 죽겠다. 최대한 빨리 출발할게.]

이번에는 석화가 먼저 종료를 했다. 그의 주변에서 동료들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석화는 휴대폰을 벨소리로 바꿔두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집을 구하고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생활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구만 들어차 있었는데, 이 근래 샹송에 재미를 들인 곽수환은 나팔꽃 모양의 축음기까지 사들였다. 축음기를 구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LP판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석화는 거실을 돌아다니다가 지하 벙커로 이어진 바닥의 문을 들어봤다. 아직 대다수 시티의 집들은 이런 벙커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 지어지는 집도 벙커를 포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아담 사태가 다시 발발할 일은 없을 테지만, 아직 사람들의 마음에서 완벽히 두려움이 사라진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석화는 바닥의 문을 열고서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계단의 끝에서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켰다. 곽수환과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간직해야 할 비밀이 이곳에 있었다.

스테인리스 원형 통 안의 바이알 병은 조각난 채로 새까맣게 타 있었다. 최종 진화 아담 바이러스의 최후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는 불에 의해 이렇게 사멸했다.

아직 레인보우 시티가 타 협력국들과 완전히 열린 교류를 하지 않는 것은 혹시나 싶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도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면, 시티의 백신은 효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석화가 알기론 자신이 있던 러시아 쪽은 시티의 백신으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

의회에서도 백신을 더욱 대량 생산해 국외로 팔아 국력을 올려야 한다는 파와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쇄국 형태로 가자는 파로 나뉘어 연일 싸워댔다.

곽수환은 육군 대표 중의 한 명으로 참석했고, 집에 와서는 무능하면서 부지런한 새끼들이 꼭 일을 벌인다고 욕을 해댔다.

석화는 여의도 쉘터 연구원 대표로 단 한 번 참석한 게 다였다. 저는 의회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싸우는 것만 보고 있어도 기가 빨렸다. 그날도 제 책상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는 척을 해서 장장 네 시간 만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의회는 다섯 시간이나 계속 진행됐다고 들었다. 끔찍한 일이다.

백신이 팔리는 만큼 석화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는 법안은 여의도 연구원들이 힘을 모아 의회에 상정했다가 묵살당했다.

명예가문들은 방송을 함부로 장악한 박사와 중장에게 아무런 페널티도 주지 않았으면 됐지, 로열티까지 지급할 수는 없다고 거품을 물었다. 그 와중에 저 두 사람에게 징계를 안 내린 게 분하다, 군의 기강과 시티의 안전까지 위협당했다며 핏대를 세운 여타 대표들도 존재했다.

피식, 석화는 스테인리스 통 앞에서 웃어버렸다.

‘불법 방송장악에 관한 법률은 아직 상정되지 않았고 누구 하나 다친 사람도 없지만, 한 1년 나랑 석화 박사가 교도소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에도 로열티를 지급하고, 나와서도 계속 지급하시죠. 깔끔하네.’

곽수환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자 의회는 한바탕 정적이 흘렀다. 결국, 로열티는 없는 일이 됐다. 이제는 돈이 우선인 거다.

벙커까지 울리는 현관 벨소리에 급히 스테인리스 통을 닫아 봉인했다. 석화는 계단을 올라가다가 발을 헛디뎠지만 금세 균형을 찾았다. 벙커 문을 반듯이 닫고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저희 왔어요, 박사님.]

석화는 목소리만으로도 방문객이 누군지 금세 알아차렸다. 비번인 오늘에 맞춰 학습센터에서 외출을 나온 두 친구가 방문하기로 했었다.

“금방 나가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온 터라 준비를 못 한 석화는 슬리퍼만 신고 나가서 대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와요.”

정원을 질러가는 동안 숨이 조금 차 버렸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이건 집들이 선물이에요. 집에 처음 방문하면 이렇게 해야 한대요.”

말을 할 수 없는 현강과 석화를 사칭했던 대훈이었다. 석화는 대훈이 내민 두루마리 화장지 세트를 놀라 바라봤다.

“용돈도 적을 텐데.”

“이 정도 살 만큼은 있어요.”

“고마워요. 얼른 들어와요.”

석화가 화장지 세트를 대신 건네받자 얼굴색이 많이 밝아진 두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요?”

“아직 저희 둘 다 감시 기간이거든요.”

대훈이 눈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제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스쿨버스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자유인이 되려면 올해는 지나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안타깝지만, 감시관이 있어야 외출이 가능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학습센터에서 생활하기는 괜찮아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박사님, 그때보다 더 나빠질 삶은 없어요. 지금은 하루하루가 꿈 같아서 저희도 익숙해지려면 올해는 지나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들이 외출이 가능하게 된 이유도 학습센터에서 잘 적응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돌이 진짜 많네요.”

대훈이 정원을 보고 킥킥 웃었다. 그건 현강도 마찬가지였다.

안에 작은 연못도 하나 있었는데, 그 둘레를 감싼 돌은 전부 제주도의 집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곽수환이 제주도에서 배로 실어 온 돌하르방도 옆에 우뚝 서 있었다.

“맞아요, 돌이 좀 많죠. 다음에 자유 외출이 가능하면 꼭 연락해 줘요.”

“네! 군인 형들이 자꾸 눈치 줘서요, 이만 가볼게요.”

“정말로 연락해요. 휴지도 잘 쓸게요.”

현강도 잘 있으라며 고개로만 인사를 했다. 눈치를 준다는 말과 다르게 둘은 스쿨버스를 지키는 군인과 나름대로 친해 보였다. 버스로 올라타는 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으니 싫지는 않은지 기분 좋게 웃었다.

대훈과 현강은 바이알 병에 담겨있던 바이러스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법한데도 끝끝내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석화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방송을 통해 돌연변이에 대해 알렸지만, 정말 저희만 알고 가야 할 진실 또한 발설하지 않았다. 최종 진화 형태의 아담 바이러스가 있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석화는 구멍이 숭숭 뚫린 돌하르방을 보면서 멋있는데,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새집에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왔다. 지금은 강남 쉘터에 있는 영감도 둘러보고 혀를 차고 갔고, 이채윤이나 양상훈은 와서 술을 먹고 뻗을 때마다 곽수환에게 쫓겨났다. 돌하르방 코 한쪽에 금이 가 깨져있는 건 내쫓긴 이채윤이 열 받는다고 주먹질을 하고 간 결과물이었다. 석화는 그다음 날 접착제로 돌하르방 코를 복구해줘야 했다. 그래도 금이 간 건 눈에 잘 보였다.

집으로 돌아와 다용도실에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다 놨다. 세트라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워 소파로 돌아와서 잠시 드러누웠다. 제 안의 정자는 속된 말로 미쳐서 날뛰는 수준인데, 몸은 여전히 허약체질이었다.

석화는 곽수환이 알려준 대로 운동을 하려고 소파에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소파 밑에 접어둔 매트를 펼쳐서 그 위에 또 대자로 뻗어 누웠다. 한 몇 분 그렇게 체력을 비축하고 나서 일어났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무릎을 접으면서 하체를 지탱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하반신만 움직이는 터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어날 때는 엉덩이의 힘으로 올라오라고 했는데 석화는 전신의 힘이 다 들어갔다. 10회를 하고 나서는 다시 매트에 뻗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늘었다. 처음은 겨우 3회였다. 게다가 조금 욕심을 들여서 운동하면 다음 날 꼭 탈이 나서 하루 종일 앓아야 했다.

몇 회 더 할까 하다가 그냥 드러누웠다. 어쩔 수 없이 낮잠이 몰려올 시간이었다.

***

시티는 나날이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 노하우는 이미 옛사람들에게 있었으니 아담이 사라지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회사들이 들어서고 자영업도 성행했다.

그러나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수많았으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몇몇 군인이었다.

며칠 전 강남의 금은방에 강도가 들어 조사해보니 군인의 소행이었다. 금은방이니만큼 감시카메라를 갖추고 있었는데, 군인은 예전 생각만 한 건지 아예 대놓고 금과 보석을 털었다. 도둑질한 사유는 더 가관이었다.

여자 친구한테 주려고 했는데요.

양상훈이 죽여 버린다는 것을 부하들이 간신히 말렸고, 놈은 헌병대 조사실로 인계됐다.

아담이 사라졌으니 한가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큰 오산이었다. 다른 놈들의 말처럼 할 일이 산더미로 변했다. 아담이 없으니 군법도 대대적으로 개편 중이었고, 변화에 불만을 가진 군인들이 속출했다. 시민들을 협박하고 돈을 뜯는 버릇을 못 버린다 싶은 놈들은 군에서 퇴출당했으며 헌병 교도소는 연일 포화 상태였다.

이제는 군대가 모든 시민과 군인을 전부 제어할 수는 없었다. 곽수환은 삼권분립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조차도 세밀하게 분리가 되려면 적어도 몇 년은 소요될 것이다. 아담 출현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놨으니 사라진 뒤에도 이렇듯 영향은 남아 있었다.

“지리산에서 아담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곰을 발견했습니다.”

하아, 곽수환이 혼을 내뱉듯이 한숨을 쉬었다.

보고를 해온 이는 곽수환을 보필하고자 발탁된 정보보안부의 소령이었다. 마지막 아담 사태 때 부엉이 가문을 도와 정보보안부 소대를 이끌어 현장 정보를 제공했고, 그 덕에 훈장을 받은 전력도 있었다.

“지리산은 반달곰이냐? 어쨌든 그건 경남 놈들한테 맡겨.”

“아담이 된 곰이, 일가족이랍니다. 한두 마리가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그쪽에서 저희에게 지원을 요청해왔습니다.”

“조운이 보내.”

“조운 중령님은 지금 강원도에 가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조운도 엊그제 동해에서 일어나는 방화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지원을 나가 있었다.

“그럼 여기 애들 A급으로 세 명으로 구성해서 내보내고, 48시간 이내로 해결하고 복귀하라고 해. 이 시간 이후로는 차학현 소장한테 상황 판단 맡겨. 난 퇴근한다.”

곽수환이 책상에서 일어나며 케이프도 떼어내 옷걸이에 걸었다.

“내일 비번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혹시 모르실까 봐 알려드렸습니다.”

너 내일 비번인데 오늘도 일찍 퇴근하냐? 그 뜻이었다.

“인간적으로 나한테 일 장난 없게 쏟아지는 거 인정하지?”

“의전 하겠습니다.”

“됐어. 차 소장한테나 가 봐.”

곽수환은 차 키를 챙겨서 재빨리 강남 쉘터 지하로 내려갔다. 석화가 나도, 라고 했다. 그럼 당장에 가줘야지. 그리고 제 피와 살을 다 내어주면서 군에 희생해봤자 저만 손해다. 딱 할 일만 해야지, 쓸데없이 일을 잘하면 더 쏟아지게 주는 법이다.

이제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으니, 20분이면 도착할 거다. 곽수환은 군용 지프를 몰았다. 최근 도로에는 지프가 아닌 일반 자동차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군 지프를 만들던 공장이 생산라인을 따로 개설해 자동차를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도로는 여전히 한산했다.

예전에는 도보로 10분밖에 안 되는 거리가 밀리면 한 시간도 정체될 때가 있었다던데, 지금 시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구가 전과 비교해 턱없이 줄어들었고, 그간 인구 규제 정책을 펼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시티가 내건 슬로건은 전과 반대였다.

[아이는 우리의 미래, 아담이 없는 세상에서 여러분이 꿈꾸던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세요.]

곽수환은 현수막 밑을 빠르게 지나갔다. 모든 학습센터는 전면 무료로 이용 가능했고, 시민으로 등록되면 나이가 찼을 때 무조건 입학을 해야 했다. 20대 미만의 문맹률이 현저히 줄기 시작했다니 잘된 일이겠지.

대문 앞에 차를 세우고 그는 문을 여는 대신에 담장을 뛰어넘었다. 집 키를 가져오지 않은 것도 맞고, 석화를 놀래주고도 싶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돌하르방 코가 잘 붙어있나 두드리고 곧장 현관을 열었다. 문은 항상 잠그고 있으라니까. 분명 낮잠이 들었는지 문단속도 잊은 모양이었다. 곽수환은 현관에 놓여있는 석화의 슬리퍼를 보고 안심했다.

곽수환은 곧장 군화를 벗고 저희의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거실 소파 밑에서 매트를 깔고 자는 석화가 보였다.

저기 TV 장식장에는 좆돌이 당당히 올라와 있었다. 전보다 돌에 대한 집착은 줄었는데 막상 주면 좋아했다. 그 돌 옆에는 폴라로이드 필름 사진이 담긴 액자 두 개와 낡은 큐브가 놓여 있었다.

“행복한 가정.”

곽수환이 현수막 문구를 중얼거렸다. 순간 용솟음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살아.

그래, 어머니가 맞았다. 살아있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곽수환은 매트에 누워서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석화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으읏!”

기겁하면서 소스라치게 눈을 뜬 석화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너무 놀라기에 곽수환이 미안하다면서 연신 이마를 쓸어주었다.

“미안, 놀랐어?”

석화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갑자기 놀라게 할 때 경기를 일으키는 건 아마 석화뿐만 아니라 시티의 모든 사람에게 심어진 트라우마일 거다.

“이제 여기에는 아담 같은 건 없어. 자기가 다 조져놨잖아, 안심해도 돼.”

석화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석화는 아담인 줄 알고 놀랐던 게 아니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악몽의 반복일 뿐이었다.

꿈에서는 제가 산장에 홀로 남아 있는 게 바로 현실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그 대신 제가 총으로 쏜 최호언이 나타났다. 최호언은 이미 시체가 된 곽수환의 팔을 붙들고 산장을 기웃거렸다. 더는 살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저도 죽고자 곽수환에게 달려 나가는 순간, 갑자기 몸에 닥친 충격에 소스라치게 놀라버린 것이다. 그래서 석화는 그의 팔과 얼굴을 손으로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쪽, 쪽쪽, 손바닥에 키스를 해오는 그가 이내 입술로 다가왔다. 포개어지는 입술이 조금 찼지만, 봄은 머지않았다. 벌써 정원에도 파릇한 새싹들이 올라왔고, 돌하르방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목련 나무도 봉오리를 틔웠다.

석화는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이로 깨물고 혀를 굴렸다. 곽수환도 키스를 이어나가며 제 제복 상의를 벗었다. 석화가 넥타이에 검지를 걸어 쭉 끌어내려서 풀어 던졌다. 목까지 꽉 채운 단추를 눈을 감고도 잘도 찾아 풀었다.

석화는 그의 셔츠를 완전히 개방해 단단하고도 상처투성이인 등을 손으로 감쌌다. 온몸의 피를 쏟아낸 흔적이자, 자신을 지켜준 증표에 마음이 저몄다. 손끝으로 덧그리며 그를 잃을 뻔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아팠지?’

속삭였다.

‘아니, 죽을 것 같아서 더 강해질 수 있었어. 어떻게든 살아서 형에게 돌아갈 생각만 해서 아무 감각도 없었어.’

이제 그 누구도 저희를 방해할 수 없다는 듯 그도 확신을 속삭여주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바지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운동복 차림이라 단숨에 내려가 발목에 매달렸다. 기나긴 키스에 입술을 떼어내며 또 쪽쪽, 가볍게 입맞춤했다. 그는 석화를 들어 안아서 매트가 아닌 소파로 올렸다. 이러려고 대형 소파를 산 건 아니지만, 둘이 붙어 있기에는 침대 못지않았다.

곽수환이 소파 끝쪽에 놓인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자신은 내일 비번이지만 석화는 아니었다. 행여 고생이라도 시킬까 봐 콘돔을 꺼내는데 손에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 나머지 손으로는 석화의 셔츠를 벗기고 있다가 멈칫했다. 콘돔과 함께 가늘고 단단한 막대를 꺼내 보니,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봉이 나왔다.

“이건 뭐야?”

곽수환이 그걸 눈앞에 가져오자 석화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게 사정을 방지해준대요. 익숙해지면 기분도 좋고.”

“누가 그래?”

“……방송에서.”

곽수환은 골이 지끈거렸다. 요즘 성인방송도 속속들이 의회의 허가를 받아 나오는 추세였다. 그간 기존 마스터들이 허가해주지 않았던 스포츠 경기도 다양해졌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 현재는 강압적인 체제 때문에 막혔던 모든 욕구를 분출하는 시기였다.

“근데 이걸 어떻게 쓰는 건지는 알아?”

“넣어서 요도를 막는 거예요.”

“패스야, 버려.”

곽수환이 요도 막대를 쓰레기통에 요령 좋게 던져 넣었다. 그리고 서랍에서 젤도 마저 한 통 꺼냈다.

“항상 내가 먼저 지치니까.”

석화는 그에게서 콘돔을 가져와 비닐을 뜯었다. 고무에 조예가 깊은 노인이 만들었다는데 얇고 강해 요즘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이었다.

석화는 곽수환의 브리프를 쑥 내려서 벌써 빳빳하게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끼워 맞췄다. 말린 고무 부분을 빙글빙글 내리는 건 심혈을 기울여야 했는데, 석화는 이 감촉이 좋아 늘 제가하고는 했다.

곽수환은 시각적으로도 미칠 듯이 흥분되는 바람에 제 허벅지를 쥔 채로 덤벼들지 않도록 꾹 참아냈다.

“저런 걸 쓴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리고 난 형 어디에도 나 말고 다른 거 들어가는 거 싫어.”

이제 다 참았다는 식으로 석화의 두 다리를 확 올려 회음부부터 구멍에 젤을 한가득 다 짜 넣었다. 석화의 아래가 연방 움찔거렸다. 그래도 금방 따뜻해질 것을 알았다. 어젯밤에도 가벼운 페팅을 했었기에 아래는 무리 없이 풀려 있었다. 석화는 스스로 손을 내려서 그의 성기를 제 아래에 대고 비볐다.

“하아, 형. 나 진짜 일찍 오길 잘했지?”

“흐응, 잘했어, 수환아.”

석화가 속삭이자 그가 저를 쪼아대는 안으로 허리를 들이밀었다. 입을 벌린 석화는 녹아내릴 듯한 신음을 흘렸다. 삽입과 동시에 스스로 제 성기도 쥐어 압박했다. 성기에도 젤이 붙어 있어 손이 끈끈해졌다. 음란한 감촉이었다.

“자기, 점점 이렇게 밝혀서, 어떻게 해? 나 좋아 죽으면?”

“나도……. 좋아.”

솔직한 석화 때문에 이러다가 제가 먼저 쌀지도 몰랐다. 그는 젤을 들어서 석화의 배에 가득 짰다. 배 안쪽이 차가운 젤에 움찔거렸다. 그대로 손바닥을 미끄러뜨려 젖꼭지까지 밀어 올렸다. 달뜬 숨이 터지고 석화의 뺨에 홍조가 서렸다. 곽수환은 양쪽 젖꼭지를 손으로 굴리면서 좆을 처박아댔다. 젤이 사방으로 튀어 가죽 소파까지 미끈거렸다.

“하아, 으읏.”

온몸이 곽수환과 하나로 녹아들고 있었다. 제 몸이 젤처럼 전부 흘러내리면 어떻게 하지, 석화는 흐린 눈을 떠서 그를 바라봤다. 저 표정이 좋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담고 있는 곽수환의 조금 인상 쓴 이마하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저 입술이 좋았다.

“하아, 수환아, 아! 아아!”

젖꼭지를 콱콱 쥐어짜니 신음이 더 높아졌다. 곽수환은 또다시 손을 미끄러뜨려 매끈한 배를 마사지하듯 원을 그렸고 옆구리를 간질였다. 하읏! 석화는 그의 어깨에 얹은 다리에 힘을 주어 아래로 내리눌렀다. 안달이 나는 무게감에 허리를 일으킨 그가 두 다리를 한데 모아 안았다. 아래를 쉼 없이 쳐대니 구멍이 말랑말랑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석화는 제 성기를 꽉 쥐고 사정을 막았다.

“괜찮아, 하아, 해도 돼, 응?”

그가 종아리에 계속 키스를 퍼부었다. 곽수환이 움직이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손으로 흔드는 것도 한참 뒤처져 오히려 아래에 더 신경이 몰렸다.

나 못 해. 수환아, 못 해. 석화가 중얼거리자 곽수환이 대신 성기를 확 쥐었다. 그리고는 제 속도에 맞춰 쿠퍼액을 쏟아내는 성기를 거칠게 수음했다. 훑어주면 훑어주는 대로 곧장 기세 좋게 정액이 튀어 올랐다. 석화에게 듣기로는 자기 정자가 전보다 훨씬 활발하다던데, 그래서 요즘 더 적극적인 건가 싶었다. 체력을 키우려는 이유도 곽수환이 보기엔 참 음흉했다. 근데 그건 저에게 좋은 쪽의 음흉함이다.

“하읏! 아!”

사정하는 동안 긴장한 내벽을 마구 후벼 파면서 쑤시니 석화는 뒷머리카락을 소파에 함부로 비벼댔다. 곽수환은 뒤통수가 닳을까 싶어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바짝 닿아 저도 참아왔던 사정감을 동시에 분출하기 시작했다.

콘돔을 뚫을 기세로 내뿜는 정액에 석화는 그럴 리 없음에도 배 전체가 뜨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석화는 그가 사정을 끝낼 동안 젤과 정액으로 범벅이 된 아랫배를 손으로 감쌌다.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고르는 모습은 곽수환의 눈에 독이었다. 곽수환은 폐를 크게 부풀렸다가 차분히 호흡을 뱉어내고 석화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안쪽에 삽입했던 성기를 느릿하게 빼내자 석화가 몸을 조금 떨었다. 그는 다시 입을 맞추고 제 좆을 갑갑하게 감싼 콘돔을 확 벗겨냈다.

매듭을 지어 던지려는 때, 눈을 힘겹게 뜨고 있는 석화가 팔을 막았다.

“……나 줘요.”

샬레에 못 가져간 게 한이 되었는지 석화가 매듭진 콘돔을 챙겼다. 발가벗은 채로 뒤를 돌아 힘겹게 서랍까지 가서는 빈 통 하나를 꺼냈다. 그동안 곽수환은 빠끔거리며 좁아지는 밑을 고스란히 봤다. 꾸욱, 아직도 기세가 흉흉한 제 좆을 아래로 내리눌렀지만, 손을 떼자마자 퉁 튀어 올랐다.

석화는 빈 통에 콘돔을 넣고 천장을 보고 소파에 누웠다. 아까만 해도 잠기운이 조금 서려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물러난 듯했다. 대신 사정 한 번에 힘을 소진해 기운을 비축하고만 있었다.

곽수환이 석화의 상체를 맨몸으로 둘러 안고는 휙 들어서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 물을 미리 받아둘걸. 근데 저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석화와 섹스를 할 줄은 몰랐다. 저를 그렇게나 반겨주는데 안 덮치고 배길 수가 있어야지.

곽수환은 일부러 커다란 욕조가 있는 집을 사들였고, 그는 따뜻한 물속에 잠겨 석화를 닦아주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욕조의 모든 방향에서 물을 틀었다. 조금씩 수위가 올라오는 물 안에 석화를 내려두고 종아리를 꾹꾹 눌렀다. 요즘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온몸의 근육을 풀어주는 것도 곽수환의 일과 중 하나였다. 물론 근육이 뭉칠 정도로 운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석화는 저도 손을 천천히 움직여 곽수환의 팔과 어깨, 가슴팍에 물을 묻혔다. 그가 다리를 풀어주려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예뻤다. 예쁘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으나 물방울이 그의 상체의 잔 굴곡을 타고 흐를 때는 시선을 고스란히 빼앗길 정도였다.

“……수환아.”

석화의 목소리가 또다시 졸음에 잠겨 있었다. 봄이 오니 춘곤증이 남들의 배로 오나 보다.

“왜, 석화 형.”

“나……. 이제 돌에 집착 안 해.”

좋긴 한데 비싼 돈 들여서 돌하르방 같은 거 안 옮겨도 돼.

“그래도 좋아하긴 하잖아.”

그건 그렇다. 석화는 점차 물에 더 잠기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내 체질이……. 너처럼 변하는 것 같아.”

“그럼 진짜 곰하고 싸울 수 있겠네?”

그가 석화를 부드럽게 안아와 자신의 위에 얹혔다. 욕조 깊이가 상당해서 늘어진 석화는 가슴께까지 잠겨 있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허벅지와 배, 가슴까지 손으로 어루만져줬다. 저의 취미생활이자 치유 시간을 떠올리면 하루도 금세 지나갔다. 우리 석 박사는 내가 얼마나 온종일 붙어있고 싶어 하는지 알까 모르겠다.

“수환이 너는……. 없었지?”

석화가 곽수환의 어깨에 뒷머리를 비볐다. 단단한 느낌이 좋아 안정감도 들어 더 잠이 쏟아졌다.

“뭐가?”

상냥한 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석화는 눈을 감았다.

“집착 같은 거…….”

그가 석화의 어깨에 쪽 키스했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상체를 계속 어루만지면서 귀와 뺨에도 입술을 맞댔다.

“아마 나는 처음일 거야. 그 감정은 전부 형이 알려준 거니까.”

곽수환이 귓바퀴에 쪽, 키스하면서 말했다.

“자기, 내가 존나게 사랑하는 거 알지?”

“……나도.”

석화는 물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편히 잠이 들었다.

***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돌연변이들은 하나같이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석화는 곽수환의 집착 특성이 번식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애초에 전제가 틀렸다. 곽수환은 완벽한 돌연변이였다.

가수면 상태에 빠진 석화의 손을 곽수환이 꾹꾹 지압해줬다. 그는 욕실을 나와서까지도 계속 떨어지지 않았다.

곽수환은 해가 지고 밤이 오는 게 싫었다. 그럼 또 새벽이 와서 석화가 출근을 해야 한다. 물론 그보다 지금은 저녁이 더 먼저였다. 곽수환은 침대에 눕힌 석화의 가슴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둘 다 요리는 잘할 줄 모른다. 지금 곽수환이 할 수 있는 것이라 봐야 계란말이 정도인데, 다행히 석화보다는 솜씨가 더 나았다.

그는 도마를 꺼내놓고 파를 송송 썰었다. 계란 10개를 풀어서 휙휙 젓고 그 안에 후추와 소금, 파를 한데 넣었다. 달군 프라이팬에 계란을 쏟고 익는 동안 레토르트 미역국도 데웠다.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멸치와 깻잎절임, 김치까지 상에 올려놓으니 나름 차림이 그럴싸했다.

이채윤은 음식을 해줄 사람을 고용하라고 했지만 곽수환은 차라리 제가 요리를 배우고 말지, 했다. 이 집은 온전한 저와 석화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다른 놈들이 오는 것이 싫었다.

즉석밥도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거실로 나가 축음기의 바늘을 레코드판에 올려두었다. 샹송 가수의 LP판 가격이 집값보다 비싼 건 석화는 알지 못했다. 선명하지 못한 음질이었지만 과도기인 시티에 퍽 잘 어울렸다.

다시 주방으로 가 김이 올라오는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겼을 때, 그는 슬슬 석화를 깨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심전심인지 석화가 비척거리면서 주방으로 오고 있었다. 무표정하지만 어째 미안한 기색이 훤히 느껴졌다. 곽수환은 폭신한 방석이 있는 의자를 끌어냈다.

“앉으시지요, 석화 도련님. 도련님의 곽 머슴이 음악과 함께 식사를 나름대로 준비를 해봤습니다.”

“내일은 내가 할게요.”

“내일은 일 끝날 때 데리러 갈게. 나 비번이잖아.”

그가 밥그릇에 즉석밥을 옮겼다. 두 개를 내려두고 국그릇에도 각각 미역국을 펐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과 계란말이를 보니 석화도 군침이 돌았다. 석화는 젓가락을 들어 그가 만든 계란말이부터 집었다. 반으로 쪼개 먹어야 편할 텐데도 두꺼운 몸통을 그대로 가져가 깨물어 먹었다.

뜨거움에 저절로 하아, 바람이 새자 석화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솟았다.

“맛있어요.”

석화는 입 안에서 포슬포슬하게 흩어지는 계란에 온몸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는 저로 인해 집착하는 것이 생겼다고 했다. 완벽한 돌연변이인 그에게 이제 저 또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피를 수혈 받음으로써 그에게 있는 진화 형태의 바이러스가 자신의 DNA 염색체를 바꾸었다. 마치 방사능에 노출된 현상처럼 말이다. 어쩌면 저는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피를 수혈 받는 대다수의 사람은 아마도 사망에 이를 테니까.

인체란 인류가 태초에 생겨난 이래로 언제나 정복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나 두려운 건 그와 자신의 세포 노화 속도가 마치 멈춘 듯한 이상이 생겼다는 거다. 그 또한 저희 둘에게만 일어난 일이니 비교군이 없어 이유에 대한 실험을 거듭해야 할 거다.

곽수환의 자손은 전부 바이러스 면역을 가질 텐데, 저 또한 그의 자손이나 다름없어졌다.

자신도 돌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시작한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의 피를 수혈 받은 이후였다. 그는 정말 어떤 집착 특성도 없었을지 모른다.

“뭐 해?”

‘뭐 하냐.’

우습게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이렇게 그와 사랑하게 될 줄은.

석화는 곽수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떼지 않고 검은 눈동자에 석화를 가득 담았다.

“이제는 이렇게 봐도 안 체해?”

그는 흡사 턱까지 괸 채 대놓고 봤다.

‘곽수환 소령님, 그렇게 계속 보시면…… 체하겠습니다.’

석화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과거의 서로와 현재의 우리가 교차해 하나로 융화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한 집에서, 한 식탁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가족이자 연인이었다.

세상에 아무도 혼자인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도 끝까지 함께할 게 분명했다.

“이제……. 내가 집착하는 모든 건 수환이 너뿐이야.”

눈을 조금 키웠던 그가 곧 씩 웃었다.

“난 이미 한참 전부터 그랬어.”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그다웠다.

핏빛에 물든 소매 대신 하얀 소매가 보였고, 피로 만들어진 도시는 이제 종말을 고했다. 우리의 울타리는 안전했지만, 저 밖은 아직 핏빛이었으니 언젠가 또 이곳까지 스며들려고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진화했듯 어느 날 바이러스도 진화하겠지만, 결국 살아남는 건 생존하고자 하는 집념이다. 적어도 바이러스보다는 우리가 더 강하지 않을까.

석화도 마주보며 웃었다.

장밋빛 인생을 염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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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의자는 두 개뿐이라 이채윤과 양상훈은 식량 박스를 끌어와 엉덩이를 붙여야 했다.

“이야, 생선까지 구워다 잡수시고 우리보다 낫다?”

“드세요.”

석화가 자신의 몫인 송어를 둘에게 나눠주었다. 곽수환은 그걸 도로 가져와 석화의 그릇에 모았다.

“하긴 사랑해 마지않는 박사님을 위해 친히 얼음물에 뛰어들어 잡으신 걸 텐데 우리 입에 붙일 게 있겠냐?”

양상훈도 이채윤만큼 날이 단단히 서 있었다. 그 바탕은 서운함이었다.

“송어는 석 박사가 잡은 거거든? 러시아의 석태공이야.”

테이블에는 둘이 지프에서 가져온 양주 세 병도 올라와 있었다. 아무래도 술판을 벌여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 같았다. 식사를 아직 끝내지 않았지만, 이 정도 음식을 네 명이 먹기란 무리였다. 석화는 생선을 구웠던 냄비를 옆으로 치우고 구겨진 양은냄비에 물을 한가득 따랐다.

“미역국, 황태국, 햄버거 패티, 닭죽, 라면……. 그렇게 있는데 뭐 드실래요?”

“아냐, 박사님. 물 안 올려도 돼.”

이채윤이 거추장스러운 케이프를 떼어내더니 다시 지프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그녀는 아이스박스를 들고 있었다. 식탁 밑에 두고 뚜껑을 열자 석화도 순순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안에 담긴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족히 열 근은 넘어 보였다. 자연해동이 됐는지 핏물이 아직 선명했다.

“날이 추워서 다행이야. 시티부터 가져온 건데 마블링도 짱짱하지?”

꿀꺽, 석화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식탐이 거의 없는 석화의 목젖이 울리는 걸 보니 곽수환은 괜한 심술이 났다. 석화가 아닌 저 둘을 향해서.

“왜 왔냐.”

이채윤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일단 고기부터 굽자고.”

애써 인내한 그녀는 버너를 거칠게 식탁에 내려두고 아이스박스에 준비해온 불판도 꺼냈다. 문을 박살내놨기에 차가운 바람이 산장의 온기를 빼앗아갔다. 곽수환은 물이 담긴 양동이를 이용해 산장 문을 닫아두었다. 벽난로에 땔감도 몇 개 던져놓고 석화의 옆에 앉았다.

곽수환이나 동료들은 이따금 산짐승을 잡아 배를 채운 적은 있지만, 석화는 본격적으로 고기를 구워 먹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반가운 사람들과 한 식탁에 둘러 싸여 앉아있다니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치이익, 가장 먼저 삼겹살이 불판에 올라왔다. 석화가 좋아하는 목살은 곽수환이 따로 한쪽에 올렸다. 고기가 익는 동안 그들은 양주를 따 플라스틱 잔에 따랐다. 양상훈은 하나씩 따르기도 귀찮은지 컵을 연달아 놓고 한 번에 따라 부었다. 이채윤은 빈속에 술을 들이켜기 전에 익힌 숭어로 위를 달래고만 있었다.

“일단 곽수환이 개새끼인 건 확실하니까 짠부터 하자고.”

이채윤이 잔을 들어올렸다.

“짠은 무슨.”

그는 그냥 술을 들이켰다. 그건 양상훈도 마찬가지였다. 석화는 다른 이보다 현저히 적은 양으로 아랫입술만 적시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찾았냐?”

그건 석화도 의문이었다. 이 산장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곽수환과 저뿐이었다.

“이역만리 러시아에서 레인보우 시티 출신의 동양인이 그리 흔한 줄 알아?”

“이역만리가 뭐냐?”

양상훈이 대뜸 이채윤에게 속삭였다.

“졸라 먼 나라.”

“여긴 그렇게 안 멀잖아.”

“이야기하는데 딴죽 좀 걸지 마.”

이채윤은 반으로 자른 삼겹살을 위로 들어 입에 쏙 넣었다. 물론 입가심은 양주였다.

“하산에서 멀리 안 떨어진 곳일 거라고는 예상했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따라서 박사님이 혼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기는 너무 힘들잖아. 곰도 존나 많다며? 그래서 하산 근처 민가를 수소문하면서 이 사람들 아냐고 물어봤지.”

이채윤이 내민 건 저와 곽수환의 초상화였다. 연필로 그렸지만 사실적인 초상화는 하나의 미술작품 같았다.

“직접, 그리셨어요?”

“응. 나 그림 잘 그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는 법이지.”

“하, 저거 저 새끼, 저 주둥이 털고 싶어서 그 다섯 달 동안 어떻게 참았대?”

곽수환이 그간의 이야기를 하면 가만 안 있겠다는 듯 이채윤을 향해 눈에 힘을 줬다.

“박사님, 이 새끼 진짜 괴물 새끼예요. 황천길 다녀오고 나서 다들 맛탱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섯 달 만에 근력 싹 복구해서는 말도 없이 떠난 새끼라고요. 저 새끼 깨어났을 때 근육량이 박사님 수준도 안 됐을걸요?”

막상 문제는 이채윤이 아니라 옆의 양상훈이었다. 석화는 목살을 소금에 찍다가 멈칫했다.

“입 다물어라. 대체 왜 찾아왔는지 이유나 말해.”

“와, 똘수환 저거 진짜 사이코 새끼 아니냐? 우리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물론 미안한 마음은 석화가 집고 있는 목살 한 점만큼은 있었다.

“이 소령 말이 다 맞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박사님, 저 새끼요, 손발 달달 떨면서 수저도 못 들 때 제가 몇 번이나 떠먹여 줬거든요? 근데 저게 은혜를 원수로 갚네요.”

그렇게 피를 쏟았으니 당연히 크게 아팠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다섯 달이나 돌아오지 못했던 그였기에 회복 기간이 길었다고도 생각했고. 그런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저에게 오기 위해 몸을 복구하는 데만 다섯 달이 걸렸다니…….

“왜 말을 안 했어요?”

“지금 건강하면 된 거야.”

“후유증은요?”

“딱 봐도 없잖아.”

크게 당황하는 석화 때문에 양상훈이 머쓱해했다. 대충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불댄 것뿐이었다.

“그래! 몸 건강하면 적어도 인사는 하고 갔어야지, 새끼야.”

양상훈은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고 노력했다. 그사이에 이채윤은 열심히 고기를 집어 먹는 중이었다.

“그럴 정신이 없었어. 석 박사 찾으러 가는 것만 생각했지. 그건 미안했다.”

“미안한 건 아냐? 뭐, 우리도 사과 들었으면 된 거야.”

이채윤이 큼지막하게 자른 삼겹살을 석화와 곽수환의 그릇에 놓아두었다. 그녀가 먹을 것을 나눠준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먹성 좋게 젓가락을 놀리는 셋과는 다르게 석화는 소금만 끄적거렸다.

“빨리 먹어. 안 그러면 쟤네가 다 처먹는다? 저 새끼들 위장 블랙홀이잖아.”

곽수환은 따뜻한 목살 한 점을 억지로 석화의 입에 넣었다.

“맞아, 박사님. 지금 멀쩡하면 된 거라구. 빨리빨리 먹어.”

“그럴게요.”

석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처럼 지금 건강하면 그만인 거다. 지나간 다섯 달은 그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으니 다시 돌이켜 고통 받을 필요가 없었다. 혼자라는 두려움이 트라우마로 남을지언정 같이 있는 현재가 훨씬 중요했다.

셋이서 양주 두 병을 탈탈 터는 동안 석화는 고작 한 모금을 마실 수 있었다. 마지막 양주를 깔 때 양상훈은 몇 병 더 있으니 걱정 말라며 자기 잔에 한가득 부었다. 산장이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 또 처음이었다.

레인보우 육사는 목청 크기로 소령을 뽑은 건가 의심할 정도로 셋의 성량이 어마어마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걸 증명하듯 타인의 의견에 반박할 때는 목소리가 더 거세졌다. 그런데 그게 또 듣기 싫은 건 아니었다. 낡은 테이블을 둘러싼 기운은 그야말로 생기가 넘쳤다.

석화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또 가만히 듣기도 했다. 아침부터 여태까지 깨어있었기에 몸이 조금은 노곤했다.

“야, 그래도 찾는 데 한 일주일 걸렸다? 이대로 시베리아 열차길 따라가야 하나 싶었는데, 여기 밑에 사는 사람들이 너랑 박사님을 안다더라고?”

“너 러시아말 못하잖아. 한국말도 잘하진 않지만.”

“꼭 한 마디가 많어. 손짓발짓은 만국공통이야. 사는 곳을 알고 싶으면 먹을 걸 달라는 거야. 줬더니 바로 이실직고하던데?”

곽수환이 쯧 혀를 찼다. 그간 석화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일 텐데 식량 하나에 이렇게 쉽게 밀고를 하다니 기가 찼다. 막말로 저희들을 잡으러 온 군인이었으면 어쩌려고.

곽수환은 쓱 석화의 눈치를 살폈다. 서운해할지도 모르기에 위로라도 해줄까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평소보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고, 움직임이 슬로모션처럼 느릿하기까지 했다.

“졸리지? 쟤네 내쫓고 한숨 자자.”

“괜찮아요. 아직 자기 싫어요.”

석화는 기운도 얻을 겸 바짝 익은 목살을 두 점이나 입에 넣었다.

“그러게, 박사님 전보다 말랐어도 뭔가 더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야. 전에는 유령 같았다면 지금은 좀 선명하다, 그치?”

“응. 석화 박사님 전보다 혈색도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여기서 살면서 체력이 좀 늘었나 봐요.”

그들도 내심 석화 혼자 여기서 다섯 달이나 살았다니, 하고 놀라워했다.

“근데 박사님……. 여기서 계속 혼자 지냈던 거야? 주변에 늑대도 많은 것 같던데?”

“살려고 하면 어떻게든 살게 되더라고요.”

겉으로는 생에 집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 물론 그것도 곽수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가 아니었다면 생의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테고, 러시아로 홀로 올라올 생각도 못 했겠지.

“신변잡기는 그만 풀고, 찾아온 이유는 언제 말할 거야?”

“이유가 있기는 하지.”

이채윤이 돼지고기를 클리어하고 소고기를 얹기 시작했다. 돼지보다는 빨리 익는 소고기에 젓가락이 몰렸다. 석화가 가장 마지막으로 뻗었는데 곽수환이 자기 것을 대신 넘겨주었다.

“소령님도 먹어요.”

“다른 것도 금방 익어.”

석화는 육즙이 터지는 부드러운 등심에 몽롱하던 정신이 일깨워지는 듯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부드럽고 맛있는 소고기는 또 처음이었다. 웬일로 많이 먹는 석화가 보기 좋아 곽수환은 계속해서 고기를 조달했다. 그래도 먹는 속도가 워낙 느려 남들의 절반도 먹지 못했다.

“시티로 내려가자고.”

이채윤이 떡심이 달린 부분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박사님도 같이.”

아마 그 비슷한 이유로 찾아오지 않을까 했지만, 대뜸 목적을 뱉어낼 줄은 몰랐던 터라 대답에 틈이 생겨버렸다.

“……그건 좀 곤란해요.”

“왜?”

“혹시 박사님, 그 신종 변이 아담 바이러스인가 그것 때문에 그러세요?”

직설적인 양상훈의 질문에 석화는 잔잔하게 미소만 지었다. 쉘터에 있을 때는 마네킹 같았는데 자연인이 되니 사람다워진 건가? 곽수환만 알 수 있던 표정 변화가 그들에게도 보였다.

“설마하니 니들 독단으로 행동한 건 아니겠고, 이희찬이 우리 찾아오래?”

“똘수환 이 새끼야! 남의 엄마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냐? 근데 맞어. 엄마가 찾아서 데려오라고 하더라? 그리고 이건 엄마가 준 선물.”

이채윤이 바닥에 내려두었던 군용 배낭을 들어서 내용물을 탈탈 털어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물건은 수십 개의 아담 검사 키트였다.

“차에도 있어.”

양상훈이 엄지를 뒤집어 지프를 가리켰다.

“엄마가 박사님 검사 결과가 음성 뜨면 꼭 데려오래.”

“음성이 아니면?”

곽수환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두 녀석을 한 명씩 살폈다.

“우리가 박사님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러냐? 안 해. 그냥 양성 뜨면 포기하라고 했어.”

양상훈이 섭섭한 티를 팍팍 냈다. 저희가 박사님을 해칠 일은 없지만, 만일 그런 기색을 내비쳤다가는 동료고 뭐고 죽기를 자청하고 싸워야 할 판이었다.

“해볼래?”

곽수환이 떨어진 키트를 하나 들어서 석화에게 내밀었다. 석화는 키트를 쥐기까지 꽤 오랫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실제로는 몇 초에 불과했겠지만 뇌에서는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이곳에 남아서 곽수환과 단둘이 살고 싶은 마음과 또 시티로 돌아가 그와 좀 더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상충했다.

“해봐, 박사님. 우리는 진짜 박사님이 양성이어도 괜찮아.”

고민할 필요 있느냐며 이채윤이 간단한 답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석화는 키트를 쥐고도 바늘에 손을 쉽게 찔러볼 수가 없었다. 몸 어디가 아픈 사람이 진료 받기를 거부하듯이. 저에게 필시 큰 문제가 있을 것이기에 병명을 확인받기도 두려워하는 불치병 환자와도 같았다.

만일 양성이 나오면…….

저 혼자만을 위한 치료제를 개발해야 하는 건가.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현미경 정도는 제 힘으로 만들 수 있지만, 치료제를 배양하고 지속적인 연구를 이어가려면 이곳에서는 어림도 없다. 그래도 단 하나의 희망은 몸에 어디 아픈 곳이 없다는 거다. 바이러스가 활동 중이라면 여전히 코피를 쏟아냈을 테니까.

석화는 키트 뚜껑을 열었다. 나머지 셋도 석화의 행동에 집중했다.

“이 소령님, 양 소령님.”

“어?!”

“네?”

갑작스럽게 불린 둘이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믿을게요.”

양성이 나오더라도……. 부탁드려요.

석화는 면목이 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곽수환만큼은 허리춤에 꽂아둔 권총의 위치를 재차 확인했다.

석화는 키트 뚜껑에 들어있던 소독솜으로 엄지를 닦아냈다. 싸한 알코올 기운이 사라지기 전에 톡, 키트 바늘에 엄지를 눌렀다. 붉은 피가 안으로 스며드는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키트 하단 원의 반쪽은 황색, 반쪽은 푸른색이었다. 양성일 경우 온통 황색으로 물들고, 음성일 경우는 반대가 됐다.

“아…….”

어느 한쪽이 색을 넓혀가니 양상훈이 크게 탄식했다.

“박사님……. 그래도 박사님 몸은 건강하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 새끼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곽수환이었다.

“하나 더 해볼게요.”

석화가 허리를 굽혀 바닥의 키트를 주워들었다. 두 번이나 반복했어도 여전히 같은 반응이 나왔다. 양상훈은 그만 됐다면서 침통한 얼굴을 했다. 우락부락한 덩치로 눈시울까지 붉히는 바람에 석화도 적잖이 당황했다. 곽수환과 이채윤이 뭐라고 따지기도 전이었다.

“양상훈 소령님, 혹시 이게 무슨 색으로 보이세요?”

“예?”

석화가 내민 키트를 양상훈이 유심히 내려다봤다.

“……노, 노란색이요?”

“어? 이게 노란색이야?”

이채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양상훈, 술 적당히 마셔라.”

곽수환은 검사 결과가 나온 두 개의 키트를 탁 식탁에 올려두었다. 그는 실실 웃고만 있었다. 아니, 분명 제 눈에는 양성인데 다들 왜 저런 반응인지 양상훈만 아리송해했다. 설마 석화 박사가 양성인 게 좋은 건가? 아니, 당연히 음성이 좋은 건데 양상훈은 저 자신이 겨우 양주 한 병에 취했나 의심할 지경이었다.

“양 소령님, 이건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는 건데. 평소에 청색하고 황색이 구별이 잘 안 되세요?”

석화는 새 키트를 꺼내서 그의 앞에 들이댔다.

“어, 음. 여기 반원씩, 둘이 색이 다르긴 한 것 같은데. 어…… 그게, 진하기도 조금 다르긴 한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석화가 다시 한번 손을 따서 키트를 확인시키자 양상훈이 뒷목을 긁적거렸다.

“이건 황색이고, 저건 청색이고. 아, 아닌가. 허? 지금은 전부 청색이네?”

“특이하네요.”

석화는 자신의 음성 키트보다 양상훈의 특징에 더 놀라워했다. 아마도 제3색맹인 청색맹 같은데 거기서도 한 단계 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난 듯했다. 황색과 청색이 함께 있을 때 양상훈은 먼저 인지한 색으로 둘 중 하나를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양상훈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대뜸 소리쳤다.

“뭐야, 그럼 음성인 거지!? 축제인 거네?”

“어, 있잖아, 양상훈아. 너 혹시 견장 색도 구별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전에 김 대령님한테도 반말했던 거고?”

이채윤은 너무 익어 바싹 타버린 고기를 과자처럼 씹었다.

“아니거든?! 살면서 문제 있던 적 없거든? 병 같은 거 아니야! 그때는 대령인 걸 몰라서 그랬던 거고.”

돌연변이 청색맹은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양상훈의 말이 맞았다. 그런데 본인이 가장 처음 인식한 색으로 황색과 청색을 구별한다면…….

“양상훈 소령님은 제가 양성이기를 바랐어요?”

“바, 박사님!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세요!”

석화는 농담을 던졌는데 양상훈은 진담으로 생각해 정색했다. 핀치에 몰리는 양상훈을 보고 곽수환이 오랜만에 낄낄댔다.

“석 박사, 저거 봐. 저 새끼 무의식중에 양성이라고 생각한 거야. 난 당연히 음성일 거라고 확신했거든?”

그런 사람이 쥐도 안 잡겠다고 하고……. 석화는 따져도 될 말을 입 안에서 뭉그러뜨렸다. 대신에 컵에 있는 양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박사님, 진짜 오해이십니다. 저는 양성이 아니었으면 해서 양성 색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겁니다.”

제 무의식이 벌인 일이라며 어찌나 억울해하는지 농담을 한 석화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알고 있어요. 제가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양 소령님, 이 소령님.”

석화가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무슨! 백신 개발해준 박사님한테 고마워해야 할 건 우리지! 근데 박사님은 신종 아담 바이러스라며. 혹시 신종은 키트가 잡아내지 못하는 건 아니야?”

석화가 이채윤의 빈 잔에 대신 술을 따랐다. 마치 좋은 질문이라며 상품을 주는 것도 같았다.

“지금 레인보우 시티에서 사용하는 키트는 제가 재개발한 거예요. 아담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핵심은 이런 형태를 띠고 있거든요.”

석화는 식탁에 ‘◇’ 모양을 손으로만 덧그렸다.

“음?”

“다이아몬드처럼 생겼네?”

“식별 가능하게 바이러스 생김새를 형상화하자면 그런 건데……. 물론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고요. 아담 바이러스가 새롭게 변이를 했다고 해도 감염을 일으키는 핵심인 이 부분은 사라지지 않아요. 사라진다면 그건 더 이상 아담 바이러스라고 부를 수도 없고요. 기존의 키트는 정확성이 많이 떨어졌거든요. 아담 바이러스만 검출 가능한 게 아니라 아데노바이러스도 같이 인식해서 양성 반응이 나왔어요. 그 때문에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됐었죠.”

“그렇구나.”

“그렇군요.”

이채윤과 양상훈은 마치 영혼 없이 대답만 하는 학생들 같았다.

“뭘 알아야 대단한 줄 알지.”

곽수환이 플라스틱 잔을 들고 웃으니 안에서 술이 출렁거렸다.

“넌 아냐, 새끼야?”

“아데노바이러스, 그거 감기잖아.”

정확히는 감기와 다르지만, 비슷한 증상이 발현되는 경우가 많아 충분히 착각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 역시 백신은 개발됐으나 치료제는 아직이었다.

“박사님, 똘수환 말이 맞아?”

“아……. 네.”

정확히는 틀리지만, 저는 좋은 선생이 될 자질이 없어서 뭉뚱그리고만 말았다. 교육센터에 있을 때도 저에게 뭔가를 물어보려고 왔던 동기도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오지 않게 됐다. 설명을 너무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새끼들은 꼭 내가 지들하고 같은 수준인 줄 알아요.”

[병원균, 어디까지 정복 가능한가?] 과천쉘터에서 대충 훑어본 책에서 나온 내용이었기에 곽수환은 허세를 부렸다.

“어? 눈 온다!”

바이러스 이야기가 듣기 싫어 건수만 찾던 이채윤이 창밖을 가리켰다.

“원래도 자주 오거든?”

“우리 밖에서 모닥불 피워놓고 더 마실래?”

“난 좋지.”

고기와 술도 다 비웠겠다, 양상훈이 얼른 나가자고 턱짓했다. 그는 벽난로로 가 타고 있는 장작을 부지깽이로 꽂아 들었다. 나가기에 앞서 두꺼운 코트를 걸친 석화는 플라스틱 컵을 밖으로 옮겼고, 곽수환은 식탁을 정리했다. 그사이 이채윤은 지포라이터 충전용 기름을 쌓아둔 장작에 뿌렸다.

삽시간에 규모가 상당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눈에도 굴하지 않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곳에서 불새 한 마리가 탄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열기가 어마어마했다.

“산장 태울 일 있냐?”

“눈 오니까 꺼지면 안 되잖아.”

곽수환은 식탁 의자 두 개와 박스도 가지고 나와 모닥불 근처에 놓아두었다. 그중 의자 하나를 가볍게 낚아채 올렸다. 모닥불 위에 대고 초벌구이를 하듯 앞뒤로 의자를 데웠다.

“아직 배고프냐? 나무도 구워 드시게?”

“몰랐어? 은근히 별미야.”

따끈해진 나무 의자에 석화를 앉히니 지켜보던 둘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졌다. 엉덩이와 등받이가 따끈따끈해 석화는 추위를 느낄 새조차 없었다.

“박사님, 저 새끼 저거 수작 부리는 거야. 원래 자기만 아는 존나 재수 없는 새끼야.”

“잘해줘요.”

저한테는. 석화가 컵의 술을 홀짝거렸다.

“와씨, 우리 진짜 불청객인갑다.”

“그렇지 않아요.”

석화도 고마운 그들을 몇 번이나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럼 이참에 저희하고 다 같이 시티로 내려가요. 여기서 언제까지고 살 수는 없잖아요.”

말은 간단해도 상황은 늘 복잡한 법이었다. 올빼미와 부엉이는 시티를 점령할 때 석화를 사살하라고 요구했으며, 현재는 바이러스를 이겨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믿어줄지는 미지수였다. 게다가 백신 개발의 공을 돌려주리라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하늘로 치솟아 있는 불길에 불나비처럼 눈발이 덤벼들었다. 결정은 불꽃에 닿기도 전에 녹아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시티는 많이 안정됐지?”

새로운 술을 깐 곽수환이 제 잔에 따르고 병째로 양상훈에게 던져 넘겼다.

“무슨, 아직은 헬게이트야.”

“왜요?”

양상훈의 말에 관심을 보인 건 석화도 마찬가지였다. 이채윤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솟아올랐다.

“아담은 거의 전멸한 게 맞지. 백신이 전면 배포된 것도 맞고. 그런데 또 그게 완벽히는 아니야. 시티 중심에서 떨어진 지역에 아직 아담이 남아있어서 감염된 사례가 있어. 거기까지 백신이 가지 못한 거지.”

“백신은 있어도 치료제는 없으니까요.”

석화가 씁쓸하게 내뱉었다.

“치료제보다 백신이 우선인 건 맞아. 게다가 아담화가 된 지 며칠이나 혹은 몇 달 된 사람들을 치료했다고 생각해 봐. 아마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닐걸.”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곽수환의 이론이 맞기는 했다 이미 괴사한 부분은 치료제가 있어도 살릴 수가 없다. 항상 아담 바이러스의 최종 목적지는 뇌였으니까.

“우리 부모님도 골머리를 썩이는 이유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 하나가 신흥종교 세력이고 또 하나가 범죄자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명예 가문 놈들이래.”

“명예 가문은 왜?”

“왜겠어. 아담이 사라졌으니 명예 가문들이 새로운 대항마로 나타난 거지.”

“오, 대악마가 나타났어?”

양상훈이 불쑥 끼어 들어오자 이채윤은 헛소리 말라며 빈 술병만 옆으로 던졌다.

“막상 쿠데타를 성공시킨 건 우리랑 올빼미, 부엉이인데, 눈에 띄지 않게 퍼스트나 세컨드에게 편승했던 가문들이 갑자기 기세등등해진 거지. 자본주의 자유경제를 운운하면서 공장까지 독점하려고 한다던데 난 그건 관심 없고, 내가 가장 짜증 나는 건 그 새끼들이 돌연변이들 출산 반대 법안을 냈다는 거야.”

석화는 마시지는 않고 쓰디쓴 알코올로 입을 슬쩍 헹구기만 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돌연변이들의 후손들은 대체로 일반인보다 훨씬 월등한 능력치를 타고날 터였다. 돌연변이를 데리고 있지 않은 가문들이 반대에 나섰거나 이제 아담이 없으니 또 다른 위험분자를 토사구팽 하겠다는 속내였다.

“근데 우리보고 시티로 돌아오라고?”

곽수환은 이 자리에 없는 이희찬을 향해 속으로 욕했다.

“지금 우리도 간신히 나온 거야. 우리 클래스 정도 되는 놈들은 잘 시간도 없이 뺑이친다. 직급이 높아지면 뭐 하냐고.”

양상훈도 오랜만에 이렇게 쉬어본다면서 혀를 내밀어 눈까지 먹었다. 자유의 맛이었다.

“나는 나대로 이용해먹고, 석 박사는 또 연구실에서 고생시키려는 심산인가 본데, 그럼 난 안 가.”

“응, 엄마가 너 딱 그렇게 이야기할 거라고 하더라?”

이채윤이 벌떡 일어나 지프로 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글러브박스에서 뭔가를 가져온 그녀는 곽수환에게 물건을 패스했다. 스피커가 달려 있는 녹음기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재생 버튼을 눌러봤다. 장작 타는 소리가 시끄러웠지만 바로 옆에 앉은 석화의 귀에도 이희찬의 목소리는 제법 선명하게 들렸다.

[일단 곽수환과 석화 박사가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녹음을 할게. 이건 구두 약속도 아니고 확실한 약속이야. 올빼미와 부엉이 가문 대표도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서면에 사인을 했어. 또 영상으로도 녹화 중이지. 이래도 안 믿으면 하는 수 없지만, 어쨌든 할 말은 하겠어. 일단 첫째로 곽수환과 석화 박사가 레인보우 시티로 돌아오면 포상금을 줄 거야. 포상금은 말 그대로 시티를 구한 값이고, 물론 곽수환 네가 돈을 꼬불쳐놨다는 건 나도 잘 알지. 근데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은 거 아니겠니? 둘째로 석화 박사와 네 안전을 보장해주마. 석화 박사가 아담 바이러스 숙주가 아닐 시에 말이야. 그건 올빼미와 부엉이 대표도 같이 합의를 본 거고. 셋째는 아직 재개발 중인 거주지보다 쉘터가 더 안전해. 둘은 쉘터에 거주하면서 각자의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 제약회사를 비롯해 의무국을 다시 재정비할 건데 거기엔 석화 박사의 힘이 필요하고, 곽수환 넌 현장에서 필요로 해. 그리고 넷째는……. 야, 이 새끼야. 넌 나 이용해먹을 대로 다 이용해먹었잖냐? 솔직히 최호언 처리 못 했으면 우리 식구들 싹 다 죽은 목숨이었어. 지금이야 잘 해결됐으니 하하호호 웃지, 네가 우리를 이용해먹은 건 변하지 않거든? 우리가 네놈 때문에 강제로 반군이 되었는데 넌 진짜……. 하, 오해하지 마. 잠깐 흥분한 거야. 화가 난 건 아니야. 다시 녹음할까? 아니,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멀쩡히 살아있고 석화 박사도 건강한데 안 돌아오면 나도 못 참아. 치직. 치지직. 뚜, 뚜뚜, 뚜, 뚜…….]

뭘까 싶어 석화가 그 신호음에 집중하는데, 곽수환은 재생을 중지시켰다.

철컥, 석화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이채윤과 양상훈이 이쪽을 향해 기관단총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웃는 낯은 여전했다.

“네가 거절하면, 엄마가 석 박사님 데리고 튀라더라.”

“어어? 곽수환, 권총 넣어둬라. 우린 따발총이야.”

“애초에 꺼낼 생각도 없었어, 새끼야.”

어차피 놈들이 기관단총을 지프에서 꺼낸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기는 어떤데?”

언제 어느 때고 곽수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석화의 의사였다.

“……가요.”

앞의 두 군인이 안심하며 총구를 아래로 내려두었다.

“도망가요.”

“오케이!”

곽수환이 석화의 허리를 확 끌어와서 제 다리에 앉혔다. 앞의 둘이 다시 총구를 올렸지만 그들조차도 결코 쏘거나 위해를 가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저 석화 박사가 시티로 내려가자고 말을 해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박사님.”

양상훈이 석화를 길게 불렀다. 곽수환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가면 어쩌나 싶어 한껏 긴장했건만 석화를 다리 위에 앉히고만 있었다.

“농담한…… 겁니다.”

저들도 이 정도 농담은 알아듣지 않을까 싶었기에 많이 겸연쩍었다. 석화는 그의 다리에 올라타느라 손을 적신 알코올을 쓱 바지에 닦았다.

“아씨! 나 진짜 간 떨어졌어. 박사님, 농담은 얼굴에 표정을 가득 담아가면서 하는 거야. 박사님이 말하면 다 진담 같단 말이야.”

이채윤이 투덜거렸다.

“니들이 이상한 거야. 난 다 알아들었거든?”

곽수환이 제 다리 위에 올라탄 석화의 허벅지를 쓱 매만졌다.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자꾸 얼굴을 문지르려 하기에 석화가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럼 내일 바로 출발해도 되지?”

이채윤은 확답을 원했다.

“전 괜찮은데, 소령님은 괜찮아요?”

“석화 형 가라사대. 당연히 따라야지.”

양상훈이 기관단총을 툭 바닥에 던졌다.

“하, 진짜 한숨 놨다. 곽수환 저 똥고집 어떻게 꺾나 했는데. 박사님이 있어서 진짜 다행입니다.”

“왜이래, 난 처음부터 내려가서 살자고 했었어. 그런데 석 박사가 나랑 단 둘이 여기서 살고 싶어 해서 그렇지.”

석화는 쏟아지고 조금 남아버린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들과 더 함께 있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이만 들어가서 자야할 성싶었다.

“내일 출발하려면 먼저 들어가서 눈 좀 붙일게요.”

“나도 바로 뒤따라갈게.”

석화가 고개를 끄덕하고 산장으로 걸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마셨지만, 플라스틱 컵 절반 정도는 비웠다. 이 정도면 괄목할 발전이었다. 간이 전보다 건강해진 건가. 석화는 제 간이 있을 부분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벽난로에 장작을 마저 더 채워 넣었다.

남은 이불이 딱히 없어서 바닥에 그가 가져온 수건을 죽 깔아두었다. 저들도 내일 출발하려면 잠을 푹 자야 할 거다. 해진 수건까지 차곡차곡 깔아서 두 개의 이부자리를 만들었다. 술을 먹고 움직여서 그런지 전신에 열이 차근차근 올라오고 있었다.

석화는 아직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 키트를 들어 또다시 검사를 해봤다. 이번에도 음성이었다. 키트를 쥐고 있는 손이 잠깐 떨리기도 했다. 정말로 제 안에서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멸된 것이다.

석화는 시티에 돌아가는 대로 제 혈액 검사를 좀 더 대대적으로 진행해 볼 생각이었다. 만일 곽수환의 혈액으로 제 몸에 면역체계가 생성된 거라면, 아직 정복되지 않은 바이러스들의 백신을 생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조차도 가설일 뿐이다. 저만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이상이 생겼을 만큼 열이 올랐어도 무사했다. 원체 높은 체온을 가지고 있던 덕분이었다.

체력이 바닥인 대신 돌연변이 체질 때문에 살아남았다니 아이러니였다.

석화는 자꾸만 눈에 열이 올라 간단하게만 씻고 침대에 누웠다. 손을 가슴에 포개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침대가 요동치는 느낌에 눈을 슬쩍 떴다. 곽수환이 돌아왔나 싶었지만, 나무 침대인데 흔들릴 리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밖에서 그들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이마저도 참 희한했다. 여태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소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안정제 같았다.

석화는 그들의 말소리를 자장가 삼아 몸을 웅크렸다. 고작해야 반잔 먹은 술 때문에 벌써부터 숙취가 몰려오고 있었다.

***

곽수환은 양동이로 문을 막아둔 산장을 돌아봤다가 동료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단음과 장음, 휴식기로 구성된 모스부호가 이어 들려왔다. 조금 전, 이희찬의 말이 끝나고 녹음기를 끈 건 저놈들이 총구를 들이대서가 아니었다. 곽수환만 들으라며 그녀가 보내온 암호 때문이었다. 곧 잡음 섞인 녹음기가 조용해지고 이희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곽수환, 지금 정보는 듣고 바로 파기해. 우리는 아담 바이러스 백신 투여를 전 국민에게 강제 의무화할 거야. 아담이 또 어디선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이어진 대륙을 통해 넘어올 수도 있으니까. 지금이야 우리가 시티의 국경을 막아두고 있지만, 우리가 안전한 것을 알면 시티로 전(前) 연합국 시민들이 몰려들 거야. 물론 현재는 협력국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달고 있다 쳐도 일단 우리 시티부터 안정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어? 그것보다 백신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는 놈들이 생겨나고 있어. 난 백신을 국외로 팔아치우려는 놈들을 추적 중이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 그런 와중에 신흥종교 하나가 날뛰어서 내부분열 조짐까지 보이니 딱 죽을 맛이고. 일단 시티로 들어오면 날 찾아오지 말고, 석화 박사와 함께 곧장 과천 쉘터로 가. 나머지 이야기는 거기서 하자.]

녹음은 여기까지였다. 곽수환은 녹음기를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생각보다 단합이 안 되나 보네.”

이미 예상한 바였기에 무덤덤한 말투였다.

“새로 생긴 신흥종교가 부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거든? 문제는 그 새끼들이 백신을 믿지 않는다는 거야. 자기 자식에게도 백신을 맞히지 않는다더라.”

양상훈이 분개했다.

“아담이 완전히 박멸되지 않았는데 백신을 맞지 않는 건 무슨 심보야.”

“시티를 못 믿겠다는 거지. 그렇다고 기존 마스터들을 믿던 것도 아닌 듯해.”

“신흥종교 대가리는?”

“석화 박사.”

“뭐?”

곽수환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석화를 사칭하는 놈이 있다고?”

“아마도. 그리고 생각보다 내부사정을 잘 아는 놈 같아.”

“양상훈 말도 일리는 있는데 시티 시민이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어. 석화 박사님을 사칭하는 사람이 아직 특정되지도 않았고.”

곽수환은 벌컥벌컥 남은 술을 들이켰다. 아직 이들에게도 많은 정보가 없는 듯하니 여기서 이야기를 나눠봤자였다. 술이나 마시겠다고 저 산장 안에 석화를 혼자 두고 싶지도 않았다. 곽수환은 제 의자에 컵을 올려두고 산장으로 걸었다.

“니들 안에 와서 잘 거 아니지?”

“침낭 가져왔거든? 자다가 총 맞기 싫어서라도 지프에서 잘 거다, 새끼야.”

곽수환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면서 손을 흔들었다. 둘은 술을 더 마실 생각인지 새롭게 병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곽수환은 양동이가 넘어가지 않도록 살살 문을 밀었다. 틈이 조금 생기자 안으로 손을 넣어 물이 담긴 양동이를 옆으로 치웠다. 그는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원위치로 밀어 문을 막아 놨다. 나름 무게가 나가는 양동이 덕에 바람이 새어 들어올 일은 없었다.

아까 치워둔 식탁 위에 키트가 하나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그사이 석화가 다시 한번 더 검사를 한 모양이었다. 곽수환도 망설이지 않고 결과를 내려다봤고, 이번 역시도 음성이었다. 곽수환은 그 키트를 바닥에 휙 던져 버리고 석화에게 다가갔다. 끌어안고 자려다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옷을 전부 벗었다.

배수구가 있는 시멘트 바닥으로 가 찬물을 연거푸 쏟으며 머리까지 깨끗이 감았다. 이곳에 있는 동안 사용한 비누는 벌써 몇 개째였다.

석화는 청결을 중시해 밖에 나갔다가 오기만 해도 손을 닦았으니 새 비누가 닳는 건 금방이었다. 물론 저도 씻는 것을 즐겨 하는 터라 석화에게 잔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다. 물이 부족해 안 씻는 버릇이 든 군인들과 있을 때는 욕을 달고 살았으니 말이다.

“이런 게 천생연분이지, 천생연분.”

행여 물기 때문에 석화가 깰까 싶어 벽난로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침대로 파고들었다. 석화의 몸이 예전처럼 뜨끈뜨끈했다.

시원함을 찾아 몸을 감겨온 석화가 눈을 슬며시 떴다.

“미안, 깼어?”

“……아데노바이러스, 아까 곽수환 소령님이 틀렸어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자다가 따질 정도야?”

“그냥 생각나서.”

석화가 뜨거운 뺨을 곽수환의 가슴에 문댔다.

“나도 알아. 감기나 독감이랑 다른 것도 아는데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런 것뿐이야. 그러고 보니 우리 자기, 나 위신 세워주려고 거짓말한 거구나?”

“알아요?”

“그럼. 똑똑한 석 박사가 무슨 생각 하는지 궁금해서 책 좀 봤다니까.”

석화의 입에서 흩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다른 소령님들은요? 수건 깔아놨는데.”

“안 들어와. 지프가 편하다니까 걱정 말고 자.”

곽수환이 석화의 이마에 제 입술을 꾹 내리눌렀다. 발가벗고 있는 곽수환이 시원해서 좋았다. 석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 그의 고환을 주물럭거렸다.

“그렇지, 그게 석 박사 만병통치약이지.”

“아까부터 서 있어요.”

“설마 안 잔 거야?”

“잤다 깼다……. 술 취한 것 같아서.”

“그래도 전보다 잘 마시더라.”

“취하면 원래 이렇게 세상이 흔들리고 그러죠.”

“석 박사는 취하면 말이 더 빠르고 많아지는데, 지금 딱 취한 것 같네.”

석화가 곽수환의 성기를 손등으로 훑었다.

“……빨고 싶어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뭐라고?”

석화는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다리 사이로 내려갔다. 석화의 몸을 따라 이불이 봉긋 솟아올랐다.

석화는 턱을 툭툭 치는 그의 성기를 단숨에 입에 물었다. 이걸 만질 때부터 계속 메말랐던 입 안에 타액이 샘솟았다. 그의 살갗에 스며든 비누 냄새가 상쾌했다. 석화는 입을 더 벌려서 목젖까지 귀두를 밀어 넣었다. 이불 안에 숨겨진 석화의 몸은 완전히 난로였다.

곽수환은 이불을 걷어내 당황한 채로 아래를 쳐다봤다. 맛있는 거라도 되는 듯 쭉쭉 빨아대는 모습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석화는 허벅지에 뜨거운 뺨을 문질렀다가 다시 좆을 입에 물었다. 저 좋을 대로 넣었다가 뱉었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진짜 나 죽이려는 거지.

곽수환이 잠시 산장 밖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석화를 침대에 똑바로 눕혔다. 제가 빨고 싶은데 왜 방해하냐는 듯 불만스러워 보였다.

“자기, 그거 마시고 취하면 어떻게 해.”

탓하는 듯했지만 결코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석화는 전에 곽수환이 했던 것처럼 입을 벌려 아랫입술에 혀를 걸쳐두었다.

“……빨리.”

무미건조한 말투지만 곽수환은 그것으로도 쌀 뻔했다. 술을 먹으니 솔직해지는 수준이 한참 올라가버렸다.

“내가 먼저 빨아주면 안 돼?”

“두 번은 힘들어…….”

체력이 좋아졌어도 여전히 두 번 사정하는 건 무리였다. 물론 곽수환이 혹사하지만 않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내벽까지 자극당하는 형편에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은 힘겨웠다.

석화가 얼른 넣어달라고 입을 더 벌리자 곽수환은 더 참을 재간이 없었다. 그는 침대 헤드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은 제 좆을 감쌌다.

석화의 말캉한 아랫입술을 귀두로 문지르다가 고른 치열을 느끼며 안으로 진입시켰다. 젖은 혀가 성기를 온통 감쌌고, 입은 연방 빨아들였다. 지나치게 뜨겁다. 혹시 이러다가 기절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좆을 가득 문 채 몽롱한 눈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뺨도 달아올라 곽수환은 그 붉은 광대를 손으로 덧그렸다.

“후, 진짜 괜찮아?”

고개를 끄덕하자 앞니에 기둥이 콱콱 깨물렸다. 석화는 몸에서 힘을 빼고 그의 것이 더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펠라는 곽수환을 통해 처음 경험해봤으며 생식기를 입에 넣는다는 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제 입 안에서 흐물흐물 녹아내릴 때, 저 단단한 남자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소년처럼 변하는 것도 흥분을 고무했다. 곽수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센 짐승이라도 고환이나 성기를 잡히면 꼼짝도 못 한다고.

목구멍을 따라 휘어진 성기가 안쪽을 꽉 채웠다. 처음엔 괜찮냐고 걱정하다가도 막상 시작하면 사정을 봐주지 않는 것도 그다웠다.

“왜 이렇게 뜨거워, 응?”

그는 팽팽하게 벌어진 입술을 엄지로 살살 달래줬다. 허리를 뒤로 슬쩍 뺐다가 다시 박으니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컥, 기침을 뱉어내고 싶지만, 그의 좆에 막혀 숨은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안에서 점성이 짙어진 타액이 그의 좆에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석화가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조금 더 넣으면 음모가 얼굴을 간질일 것만 같았다. 곽수환은 부푼 석화의 목을 달래듯 쓸어내렸다.

석화는 허벅지를 붙든 채로 얼굴을 들어 더 깊숙이 삼켰다. 순간 뻥 하고 쇄골 중심이 뚫릴 듯한 충격에 급히 뱉어냈다. 단단한 좆이 입을 엉망으로 긁으며 빠져나왔다.

캑, 쿨럭. 무슨 욕심이 들어서 그랬는지 후회 가득한 기침을 쏟아내며 이내 침대에 널브러졌다.

잘게 기침을 해대는 석화의 입술에서 곽수환의 좆까지 끈끈한 실이 이어졌다. 그는 젖어있는 석화의 입술에 제 성기를 문질렀다. 간간이 기침을 하면서도 혀를 내밀어 핥는 일도 잊지 않았다.

석 박사가 갈수록 야해지는 건지, 아니면 술 때문에 그런 건지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곽수환은 충동만 저울질 당했다. 제 마음대로 했다가는 내일 출발하기는커녕 저 밖의 두 놈들에게 멱살이 잡힐지도 모른다.

소령님…….

석화의 얼굴을 가로지른 좆에 숨결이 퍼졌다.

“젖꼭지 빨아요.”

곽수환이 헤드에서 손을 떼고 석화의 아래로 내려가며 셔츠를 걷어 올렸다.

“거기만 빨아줘?”

감질나게 옆구리에 키스만 했기에 석화 스스로 셔츠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고추는 안 빨아도 돼?”

평소 같았으면 반기지 않았을 말인데도 석화는 제 바지춤을 휙 내려서 고환에 걸쳐두었다. 가슴과 발기한 성기가 한데 드러나 버리니 그가 갈증이 이는 입술을 달싹였다.

“어쩌지? 곽 소령님 입은 하나뿐인데.”

석화가 미묘하게 인상을 썼다. 아무리 취했어도 이건 싫었나 보다. 그가 석화의 살갗에 웃음을 뱉어내면서 움푹 파인 배꼽부터 천천히 위로 향했다. 전라인 제 상체에 슬쩍슬쩍 부딪혀 오는 성기에서 쿠퍼액이 묻어났다. 탄탄한 복근이 저를 짓누르는 게 좋은지 석화가 허리도 슬쩍 움직였다.

하도 빨아 전보다 도톰해진 유두를 혀끝으로 툭툭 쳐올렸다. 석화의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오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자아냈다. 돌기만 깨물어주자 뜨거운 몸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제가 주는 자극에 고스란히 반응을 해오니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곽수환은 굶주린 사람처럼 가슴 전부를 빨아들이고 깨물었다.

판판하게 마른 몸에서 유독 빨린 곳만 붉게 부풀어 올라 음란함이 배가 됐다. 목에 걸린 셔츠를 뒤집어 벗겨내고 허리 밑으로 팔을 둘렀다. 축 힘을 빼고 저에게 온통 몸을 맡겨오는 석화에게서 안정을 얻는 건 오히려 저였다.

쾌락을 머금은 듯 벌어진 입술을 핥아 하나로 포개고 맞댄 성기도 비볐다. 살갗이 마찰하고 발치에서 밀려나는 천 소리만이 산장을 가득 채웠다. 밤사이 여러 번 울던 부엉이조차 둘의 침대를 침범하지 못했다.

석화는 아래로 향하는 곽수환의 팔을 잡았다. 키스가 끝나 아쉬운 마음에 그 손가락만 입에 넣었다. 단단한 손뼈를 감싼 피부는 전투를 자주 하는 사람치고 매끄러웠다. 장갑을 껴서 그런가. 석화는 야살스럽게 제 입천장을 긁는 그의 손에 혀를 굴렸다.

이윽고 성기는 그의 입 안에 완전히 감싸여졌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두 허벅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는 무릎을 들어 올려 석화의 허리를 띄운 채 성기를 물었다. 팽팽하게 서 배꼽으로 향하던 성기가 반대 방향으로 빨리니 전보다 기분이 이상했다. 반듯이 서고자 하는 좆이 그의 입천장을 밀어냈지만 오돌토돌한 부분에 긁히기만 했다.

“아흐.”

“하아, 진짜 이거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좋아한다니까.”

한 번 더 서비스라면서 갑자기 그가 들어 올렸던 허리를 놔주었다.

풀썩, 침대 시트에 다리가 떨어지니 그가 합 하고 성기를 물었다. 뿌리까지 완전히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 상태로 기세 좋게 빨아올리자 아래가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빠는 대로 딸려 올라가려는 몸을 그가 짓눌렀다.

“흣, 소령님!”

그것도 모자라 아랫배를 손으로 꽉 내리눌렀다. 그 부분에 핀이 박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안에 있는 액을 전부 빨아들일 기세로 입을 놀리며 아랫배까지 꽉 압박하니 이제는 요의마저 솟았다.

“수, 수환아!”

도저히 참지 못해 불러도 곽수환은 인정을 두지 않고 계속 뿌리째 빨아들였다. 마구 버둥거리는 다리에 그의 옆구리도 몇 번이나 채였다.

“싸겠어.”

흐으윽, 두 다리로 계속 밀어내려고 하니 나름 힘이 실려 있어 매섭기도 했다. 얼마나 못 참겠으면 있는 힘을 다 짜내 이럴까 싶기도 하고. 반대로 곽수환은 석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보고 싶다는 듯 몰아가려 했다.

“아, 안 돼! 안 돼……. 아!”

몸에 열이 점점 더 솟아올랐다. 조금만 더 하면 석화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랬다가는 미움 받을 지도 몰랐다. 곽수환이 그때서야 잔뜩 흡착한 입을 펑 소리 나게 떼어냈다.

“아흣!”

그는 격한 쾌감에 몸을 떠는 석화를 눈에 담았다. 얼마나 좋았으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씩 웃고는 제 젖은 입술을 손으로 쓸었다.

“진공 펠라, 죽이지?”

“……하아, 하.”

석화는 이성을 한 톨도 남겨놓지 않은 흐릿한 눈으로 숨만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손을 내려 제 좆이 잘 붙어있나 만져보기까지 했다.

곽수환은 부풀어 오른 채 방치된 제 것을 손으로 쓱쓱 흔들었다.

“알지? 나니까 이렇게 해주는 거야. 다른 새끼들은 이 정도로 못해.”

“하아, 나도……. 못해.”

곽수환이 석화의 엉덩이에 귀두를 문지르면서 낮게 웃었다.

“하긴 자기가 했다가는 심폐소생술 해야 할지도 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팍을 가라앉힌 석화는 직접 제 엉덩이를 벌렸다.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고 반박을 하는 대신 빨리, 그렇게 속삭였다.

안을 풀어줘야 할 텐데, 자꾸만 빠끔거리는 아래가 앞을 쪼아댔다. 곽수환이 침대 상단으로 손을 뻗었다. 석화가 만든 연고를 가져다 놓은 것 또한 용의주도함에 속하긴 했지만, 이건 다른 말로 배려였다. 저는 배려심 있는 남자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연고를 손으로 듬뿍 퍼 올렸다. 적당히 굳어있던 반고형 연고는 서로의 열기에 뒤섞여 금세 녹아내렸다.

그는 석화의 엉덩이 안에 한가득 퍼 바른 연고를 좆으로 문질렀다. 질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부가 쫀쫀하게 달라붙었다. 곽수환은 허리를 일으켜 세워 석화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려 쥐었다. 연고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벌어지는 아래는 여전히 버거웠다.

석화는 이를 가볍게 물고 아래에 온 신경을 쏟아 부었다. 이상하게 힘을 빼려고 의식하면 할수록 더 빡빡해졌고, 자꾸만 뒤가 가려웠다. 그는 석화의 양 발목을 쥐어 올려 종아리에 혀를 미끄러뜨렸다. 살짝만 넣었던 앞을 빼내고, 회음부와 고환을 느릿하게 비벼대며 긴장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시트를 쥐고 있는 손끝에서 힘이 빠진 것을 봤을 때, 회음부를 마찰하던 좆을 안으로 불쑥 들이밀었다.

“아! 흐읏!”

오목한 귀두 밑의 홈까지 삽시간에 모습을 감췄다.

“뒤, 뒤로 빼지 말고. 읏!”

한 번 더 탄력을 받기 위해 성기를 뒤로 무르자 석화가 신음했다. 이대로 빼면 아래가 뒤집어질 것만 같아서 힘이 절로 들어갔다.

“하아, 안이 아직 좁은데.”

그래도 괜찮다며 고개를 여러 번이나 끄덕거렸다. 나야 좋은데, 석 박사 아플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가 몸을 지그시 눌러오며 속삭였다.

곽수환의 묵직한 무게가 상체와 아래로 전부 실렸다. 석화는 몸이 반쯤 접힌 상태로 귓불을 핥는 감각을 느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핥는 듯 생생하다. 그는 고통을 상쇄해주려고 몸 여기저기에 키스하며 또 다른 쾌락을 선사했다. 차라리 빨리 들어왔으면 하는데 아직 그의 기둥은 밖으로 나와 있는 부분이 더 많았다.

얼마나 들어왔나 손을 내려서 만져보자 그가 허리를 퍽, 깊숙이 들이박았다.

아!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석화의 손을 깍지 껴서 침대에 내리눌렀다. 연고가 녹아내려 움직임은 용이했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내벽은 여전히 빡빡했다.

“석화야.”

“흐으…….”

그는 밀착되어 있는 안을 점차 밀고 들어가면서 입술을 이마에 내리눌렀다. 석화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후, 석화 형.”

음모에도 연고가 묻어버려 엉덩이를 더 간질였다. 안팎으로 다양한 신경이 석화의 뇌를 긁어댔다. 이런 통증 속에서도 쾌감이 존재하는 행위는 아마 섹스뿐일 거다. 그래서 인류는 그 기분 좋은 행위를 통해 번식을 거듭했겠고. 그와 자신은 번식은 못하지만…….

그런데 왜 이렇게 안이 미칠 것 같지?

아픈데 가려워…….

석화는 아랫배를 손으로 긁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기, 무슨 생각 해?”

오로지 저에게만 집중해주기를 바라는 곽수환의 눈이 때때로 그렇듯 낯설다.

“응?”

대답을 원하는 듯 안을 툭 치니 입이 벌어졌다.

“……섹스.”

술에 취해 그런 건지 석화의 대답을 종잡을 수가 없다. 곽수환은 석화가 다른 생각은 못 하도록 기어코 삽입에 속도를 붙였다.

쿨쩍, 쿨쩍, 마찰을 할수록 연고에 점성까지 생겨 내벽과 좆이 완전히 엉겨 붙었다. 석화는 안쪽이 지독하게 가려웠다. 그의 좆이 지날 때마다 시원했던 것도 잠시, 손가락까지 넣어서 정신없이 긁어대고 싶었다. 그만큼 내벽이 엉망진창으로 움찔거렸다.

“하아, 형……. 이거 완전, 상처가 아니라 섹스용인데.”

시티 내려가면 대량 생산해서 팔까? 자기가 만든 연고가 젤보다도 훨씬 좋은데?

간지러움과 통증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석화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나 싶어서 대견함에 쳐다보니 동공이 크게 팽창되어 있었다.

“여, 연고……. 무슨 연고 발랐어요?”

곽수환은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건가 싶어서 좆을 빼내려 했지만, 석화가 자지러지듯이 몸을 떨었다.

“약재 서랍에 쌓아뒀던 거, 큭.”

그는 제 좆을 쥐었다 푸는 아래 때문에 낮은 탄성을 뱉어냈다.

“아, 안 돼……. 거기……. 점성 때문에 넣었는데…….”

석화가 깍지 낀 손을 풀어서 손가락을 펼쳐 제 아랫배를 꽉 눌렀다. 눌린 자리마다 하얗게 자국이 남았다.

“안에, 너무. 너무 가려워. 흐으.”

제 좆은 하나도 안 가렵고 좋기만 한데 대체 뭘 넣었기에…….

“긁으면 상처 나. 미안, 미리 말할걸.”

저는 그냥 석화가 만든 연고라서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이었다.

“흐읏……. 뮤신 때문에 그래.”

그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괜찮은 것을 보니 혹시 사람마다 증상이 다른가 싶었다.

“닦아내야 돼? 뮤신이 뭔데, 씻어낼까?”

그가 성기를 빼내려고 할 때마다 석화가 그러지 말라는 듯 두 다리로 허리를 감쌌다.

“형, 그렇게 하면 내일 많이 아파. 방법이 있으면 뭔지 알려줘 봐. 응?”

“없어. 마……. 그냥 마.”

“……마? 먹는 마?”

석화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제 아랫배를 손으로 꾹꾹 눌러서 긁으려고 했다.

그 말 좆처럼 뭉툭하게 생긴 걸 말하는 건가? 마가 가려움을 유발한다니 저는 전혀 몰랐다. 게다가 연고에 그런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도 애초에 알지 못했고.

“하, 말을 하고 바를걸.”

“움직여, 빨리, 긁어…….”

석화가 제 엉덩이를 손으로 활짝 열어 벌렸다. 상황이 상황인데도 아찔했다. 빨리, 빨리, 보채면서 저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석화 형, 여기가 가려워?”

“안에……. 전부……. 수환아, 나 좀 어떻게……. 아읏!”

천천히 탁탁 쳐주다가 빙글 휘저으며 원을 그리니 석화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진짜 우리 형, 내일 어쩌지? 그러나 미래의 일을 오늘부터 걱정할 필요가 있겠냐는 듯 석화가 아래를 움찔거렸다.

“빨리…… 더…….”

왜 안 움직이냐며 보채는 석화 때문에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안쪽 허벅지를 손으로 벌려 눌렀다. 천천히 움직이면 석화가 안이 다칠만하게 엉망으로 움직이려 하기에 그는 제 식대로 점차 속도를 붙였다.

거센 몸짓에 흔들리는 성기가 배를 때려 찰진 소리가 나고, 허벅지는 빨갛게 익어 달아올랐다. 그 밑으로는 좆에 달라붙어 딸려나가는 구멍이 쫀쫀하게 늘어나고 안으로 밀리기를 반복했다.

“후우, 진짜 미치겠다.”

“아흐……. 나, 나도. 미치……겠……. 가려워.”

석화가 허리를 바짝 들어 올려 자꾸만 밑으로 손을 뻗었다. 행여 연한 피부에 상처가 날까 곽수환은 제 좆을 확 잡아 뺐다. 연고가 완전히 안에 녹아들어 있어 좆을 닦아내도 소용이 없었다.

그사이에 석화가 밑에 손가락을 세 개나 넣어서 휘젓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다친다고 억지로 잡아 빼니 앓는 신음과 함께 원망이 느껴졌다. 그는 부어있는 석화의 아래에 중지 하나를 부드럽게 넣었다. 전체적으로 달아오른 내벽은 이제 도톰한 부분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흐읏. 더 세게…… 긁어줘.”

석화를 엎드리게 한 그는 침대 밖으로 나갔다. 한쪽 무릎만 침대에 올려 석화의 엉덩이를 엄지와 검지로 벌렸다. 그 틈새로 다른 손 중지를 넣어 빙글 돌렸다.

발가락과 손가락이 함께 움츠러들었다가 펴지길 반복했고, 연고는 완전히 스며들었는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탁탁탁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으로 안을 쳐주니 석화가 누워있는 시트는 몇 번이고 젖어들어 갔다.

손가락 말고, 빨리 큰 거. 수환아.

곽수환이 안쪽 손목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연고 효과가 뒤늦게 제게 올리는 없지만 뚜욱, 잔뜩 흥분해 요도에 매달렸던 쿠퍼액이 떨어져 내렸다.

“지금 내가 하면, 너무 세게 할 것 같아.”

그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아 석화를 제 위에 얹었다. 다짜고짜 석화는 제 엉덩이를 가른 좆을 넣으려고 허리를 올려 세웠다. 천천히 하라는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푸욱, 석화가 허리를 일으켜 좆을 품고 앉았다. 양 팔뚝을 쥐었지만 완전히 뿌리까지 꽂힌 뒤였다. 석화는 두 다리를 떨면서 침을 흘렸다.

수환아, 어떻게 해. 나 너무…….

곽수환이 석화의 상체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하아, 흣. 안에 정액 넣어.”

그럼 안 가려울 것 같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알코올에 가려운 연고 이종 세트가 합쳐지니 석화에게 남은 이성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석화 멋대로 움직이다가는 정말 크게 아플지도 모른다.

곽수환은 석화를 안은 채 두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려두었다. 움직이기 편하게 자세를 잡고 석화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등을 단단히 받쳤다.

“진짜, 정액 싼다고 괜찮아질까?”

말은 그만하고 빨리 움직이라며 석화가 몸을 비틀었다.

꽉 붙들어.

석화는 곽수환의 목에 깍지 낀 손을 감았다. 그가 동시에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손에서 힘이 빠지면 뒤로 넘어가 바닥에 떨어질까 봐 두려워 잔뜩 뼈를 맞물렸다. 그가 허리 양쪽을 거세게 쥐고 위에서 아래로 연방 박아댔다.

“아, 아흣!”

“후, 가려워? 아직도?”

“아니, 아니…… 시원해.”

“시원해? 더 박아줄까? 응? 안에 계속 이걸로 긁어줘?”

“아! 아아!”

한계까지 밀어 넣은 것도 모자라 그는 쥐고 있는 허리를 좀 더 제 하반신에 짓눌렀다. 핏, 하고 석화에게서 튀어 오른 액이 아래로 흘러내려 삽입된 부분도 축축하게 젖었다. 기어코 땀에 찬 손이 그의 목에서 미끄러져버렸다. 곽수환은 그걸 놓칠세라 몸을 확 들어 일으켰다.

“아윽!”

그는 재빨리 침대 시트를 끌어내 석화를 감싸고 벽으로 밀었다.

“젠장, 나 진짜 참으려고 했는데.”

목과 팔에 힘줄이 바짝 서 있었다. 석화는 벽에 밀린 채로 그의 팔뚝을 붙들었지만, 여전히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의 허리에 감은 다리마저도 주르륵 풀려나갔다. 쑤욱, 좆이 구멍에 걸리며 빠져나오는 바람에 두 다리를 붙이고 충격에 어깨를 떨었다.

곽수환이 뒤로 돌려 세워도 다리는 여전히 부들거렸다. 그는 석화의 두 손목을 벽에 고정하고 아래서 위로 좆을 집어넣었다.

잔뜩 풀린 밑이 또다시 반기듯 쥐어짜는 것과 다르게 좆은 꼬리뼈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팔이 붙들려 있어 바닥으로 주저앉지도 못했다. 뒤로 빠졌다가 안으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처박혔다.

간지러움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대신 몸 전체가 성기가 된 듯 신경세포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눈에서 전류가 튀고 제 몸은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달려 있었다. 그만, 수환아……! 아흐, 흐윽, 이름을 부르면 늘 물러서주던 그였는데 어림도 없었다.

그가 안을 치댈수록 내벽은 점점 더 물러져만 갔다. 구멍을 귀두에 걸었다가 빼기를 수차례, 석화는 초점을 다잡지도 못했다. 더는 버틸 수 없다고 마지막으로 생각했을 때 여태 들어온 적 없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 동시에 움찔거리는 좆에서 정액이 거세게 쏟아졌다.

그는 사정을 하면서 석화의 성기를 터뜨릴 듯 움켜쥐어 흔들었다. 석화도 참다못해 벽으로 정액을 쏟아냈다.

“아흐……읏.”

안을 쑤시면서 앞을 흔들어주니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상체를 앞으로 쓰러뜨린 석화는 간신히 이마만 벽에 대고 있었다. 엉덩이는 그에게 더 맞닿아 있는 데다 발끝으로 서려도 해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곽수환의 정강이만 발끝으로 계속 문질러대기 바빴다.

곽수환은 그대로 또다시 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뜨거운 정액이 안의 가려움을 상쇄해주기는커녕 배를 더 홧홧하게 만들었다.

“수환아……. 힘들어.”

“아직 가렵지? 응?”

곽수환이 어깨를 콱 깨물었다.

“안 가려……. 흐앗!”

좆을 확 빼냈더니 와르르, 정액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곽수환이 석화의 허리를 둘러 안고 손가락으로 아래를 후볐다. 그때마다 왈칵왈칵 정액이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만해. 그만.

그는 들리지도 않는 듯 아직도 가려움을 호소하는 회음부를 손끝으로 긁었다. 곽수환은 침대를 돌아봤다가 쯧 혀를 찼다. 얇은 매트리스가 다 젖어 바닥에서 자야 할까 봐 침대를 벗어났는데, 어차피 늦은 뒤였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곽수환은 젖은 시트를 던져 버리고 매트리스로 석화를 안고 갔다.

“석화 형, 오늘은 내 위에서 자자.”

정작 석화는 기운을 다 소진해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였다. 허벅지가 하도 경련을 해서 정상위도 어려울 것 같았다.

곽수환은 석화가 편히 누울 수 있도록 엎드린 배에 베개를 받치고, 그만큼 위로 들린 엉덩이를 벌려 봤다. 잔뜩 혹사당해 부루퉁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구멍은 빠끔히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얀 정액이 걸쳐 있어 손으로 긁어냈더니 신음이 터졌다.

그가 두 다리를 벌려 석화의 뒤에 올라타고는 위에서 아래로 좆을 꾹 내리눌렀다. 석화의 엉덩이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양쪽이 움푹 패었다. 긴장 풀라면서 엉덩이를 둥그렇게 만져주자 이번에는 기분 좋은 숨이 터져 나왔다.

“후, 솔직히 이 자세 좋아하지?”

그가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면서 물어왔다. 두 다리나 팔로 지탱하는 게 아닌 일자로 엎드려 있는 자세는 솔직한 심정으로 가장 편했다. 그러나 그만큼 수직으로 꽂혀오는 좆에 아랫배까지도 밀려나니 몸서리가 쳐졌다. 세상에 다 좋은 것만은 없는 법이다. 석화는 섹스를 하면서 별 이치를 다 깨달았다.

“편한데……. 너무 깊어서 배가…….”

곽수환은 손을 석화의 배와 베개 사이로 넣어 살살 어루만져줬다. 일부러 배꼽 부분을 손가락으로 쿡 누르자 아래에서 뭔가가 왈칵 샜다.

석화가 얼굴을 찡그리고 그를 돌아봤지만, 그조차도 힘겨워 다시 매트리스에 얼굴을 묻었다.

“가려운 건……. 후, 좀 나아?”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게 다였다. 정말 그의 정액이 연고를 상쇄해준 건지 아까처럼 마구 긁고 싶은 욕망은 사라진 뒤였다. 대신에 다른 욕구가 안쪽에 자리 잡았다.

수환아, 나 자야 돼. 내일 가려면…….

매트리스가 석화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엉덩이에 그의 치골이 강렬히 치달을 때마다 삼키지 못한 침이 매트리스를 적셨다.

“미안, 동생이 힘내서 금방 끝낼게.”

응? 조금만 참자. 그가 어르고 달랬다.

석화는 그 연고를 치우지 못한 게 한이 됐다. 아직도 미약하게나마 가려움이 남아 있어 그가 긁어주는 곳마다 쾌락의 정점을 찍었다.

“하아, 우리 석화 형 자지도 힘내는 것 같은데.”

석화는 손을 더듬거려 곽수환의 팔을 끌어와 깨물었다.

“그만할게. 후, 좋아서 그랬어. 좋아서.”

그가 몸을 잔뜩 숙여와 말랑거리는 귀와 뺨에 쪽쪽 입 맞췄다.

“여기서 마지막 밤이잖아. 이렇게 우리 둘만 있는 세상은 다시없을지도 몰라.”

석화는 깨물었던 손등을 그처럼 입술로 깊게 내리눌렀다. 곽수환은 베개에 문지르고 있던 석화의 성기를 쥐었다. 끝까지 삽입한 채 치골이 닿은 상태에서 콱콱 박아 넣었다.

전립선이 찌르르 울리며 그가 쥔 성기에 신경이 내달렸다. 안이 자극 당하는데 밖은 더 단단해져만 갔다. 후읍, 읍, 베개에 막힌 석화의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곽수환은 사정 직전까지 성기를 흔들어주다가 두 팔을 잡아 뒤로 확 끌어당겼다.

“하! 아흑!”

숨이 모자라 기절 직전까지 갔던 숨통이 드디어 트였다. 푸들대는 석화의 성기는 그가 뒤에서 때리는 대로 정액을 쏟아냈다. 석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만지지 않고 사정이 가능한 건 처음이어서, 이게 가능한 건가 싶었다. 끊임없이 뒤에서 쳐대니 사정을 끝내고 수그러진 좆이 마구 흔들렸다.

“빨리, 하윽, 빨리.”

나 진짜 더는 못 버텨. 수환아.

석화가 있는 힘을 다해 나지막한 비명을 토해냈다. 그는 안쪽을 전부 긁고 나오며 잔뜩 성난 성기를 빼냈다. 땀이 솟아 차갑게 식어버린 등줄기에 뜨거운 정액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그 상반된 온도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등의 굴곡을 따라 옆구리를 타고 사정액이 흘러내렸다. 배까지 스며들어 살갗이 움찔대며 경련했다.

쪽, 하고 목덜미에 키스가 내려와 기어코 사정이 끝났음을 알았다. 발기한 그의 좆이 등을 문지르는 바람에 석화는 있는 힘을 다해 제 몸을 뒤집었다. 재차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석화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기서 더 했다가는 정말 송장을 치울지도 몰랐다.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숨을 몰아쉬는 게 고작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도 숨을 몰아쉬면서 석화의 벌어진 입술에 뽀뽀를 했다. 지금 키스까지 했다간 정말 기절하고 말 안색이었다. 곽수환은 석화의 숨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침대 밖에 나가 앉았다. 나른하게 내려앉은 눈 위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줬다. 한 번에 쓸어 넘기면 너무 아깝다는 듯 겨우 하나씩만 떼어냈다. 그사이 석화의 두 눈이 곱게 감겨 버렸다.

곽수환은 찌그러졌지만 깨끗한 냄비에 물을 데우면서 저는 여전히 찬물로 몸을 씻었다. 흘끔 밖을 보니 두 놈들도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잠이 든 듯 고요했다. 곽수환은 석화가 바닥에 깔아둔 수건을 찬물로 빨고 난 뒤, 뜨거운 물에 담갔다.

이제 이렇게 내가 해주는 것도 끝이네.

열악하지만 제가 해주는 것을 받는 석화가 좋았다. 이제 쉘터로 가면 뜨거운 물에 욕조 목욕 정도는 기본일 거다. 그게 석화에게도 당연히 더 좋을 테고.

곽수환은 산장에서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석화의 몸을 더 꼼꼼하게 닦아나갔다. 가지런한 손톱 발톱도, 제가 싸놓은 정액도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몸을 구석구석 확인하다 보면 말랐을 뿐 그리 작지도 않은데, 저한테는 애처로워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석화보다 작고 마른 사람들도 수없이 봐왔었다. 그들을 봤을 때 이런 감정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석 박사는 처음부터 나한테 특별했던 거지.

제 심장이고 삶이자 가족인 석화를 몸 위에 얹었다. 석화는 저를 사람답게 살게끔 구성하는 모든 것이었다.

“자기, 힘들었지? 그래도 좀 봐주라. 철없는 동생이잖아.”

석화가 깨어있었다면 필요할 때만 동생 행세한다고 투덜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수건 한 장을 들어 석화의 몸에 올렸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오르락내리락하는 숨이 사랑스러웠다.

***

군인이라고 다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나, 불패부대 셋은 군에서도 알아주는 주당들이었다.

종종 셋이서 술자리를 가지고는 했는데, 절친이라서 그렇다기보다 서로 뒤처리가 필요 없다는 장점 때문에 같이 어울렸다. 필름이 끊기는 버릇을 가진 양상훈이 있지만 그도 방까지는 어떻게든 잘 찾아 들어갔다. 그러니까 어제 침낭에 기어들어간 것까지도 기억했다.

근데 왜 석화 박사의 얼굴이, 어제 고기를 그렇게 잘 먹어놓고 하룻밤 만에 반쪽이 됐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제가 필름이 끊겼을 때 무슨 일이 있었나? 정말로 석 박사와 곽수환이 도망가려고 해서 이채윤과 한바탕 한 건가?

양상훈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수십 개나 띄웠다. 평소보다 뾰족하게 올라간 이채윤의 눈매도 곽수환을 연방 찔러댔다.

“오늘 갈 수나 있겠냐? 씨발놈아? 곰이 내려왔다가 산장 무너지는 줄 알고 올라가더라.”

“곰은 무슨. 불가항력이었어.”

곽수환은 뭔가를 눈치챈 듯한 이채윤에게 저는 죄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야, 어제 뭔 일 있었냐?”

양상훈은 필요한 짐을 옮기는 곽수환의 뒤에 쪼르르 따라붙었다.

“일은 무슨, 없어.”

“그럼 이 소령이 왜 저래? 석 박사님은 왜 다 죽어가고?”

석화도 짐을 옮기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침낭에 들어가 지프 뒷좌석에 누워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그냥 연고 때문에 그래, 연고.”

곽수환이 시티로 돌아가면서 먹을 식량도 트렁크에 실었다.

“연고?”

“야, 산장은 어쩔 거야? 불 질러?”

이채윤이 제 지프 앞에서 소리쳤다.

“죄짓고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불. 마무리는 내가 할 테니까 양상훈 너도 가서 출발할 준비나 해.”

곽수환도 오랜만에 레인보우 시티 제복을 입어야 했다. 양상훈이 대신 가져다준 군번줄을 목에 걸고 셔츠 안에 쓱 집어넣었다.

그는 마무리를 위해 군홧발로 산장에 들어갔다. 양동이에 남은 물로 벽난로의 불을 완전히 끄고 비누와 수건도 몇 장 챙겼다. 이어 이채윤이 가져온 보온통에 적당히 데운 차를 담았다. 버너는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어서 식탁에 두고만 말았다. 이곳에서 끌고 갈 지프는 총 두 대였다. 러시아와 한반도를 잇는 철교는 너덜거리는 형편이라 지프는 아예 지나갈 수조차 없었다. 육로로 가자면 시간이 배로 걸릴 테고, 도중에 약탈꾼들을 만나면 또 번거로워질 텐데…….

곽수환은 고장 나 닫히지 않는 산장 문을 놔두고 지프로 향했다. 보닛 앞에 선 두 놈은 지도를 그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그는 트렁크에 버리고 가도 될 식료품도 가득 싣고서 손을 탁탁 털었다.

“너희 여기 올 때 육로로 왔어?”

“어, 중국 거쳐서. 오다가 몇 놈하고 붙기도 했지. 왜?”

“내가 올라올 때 가져온 보트가 있거든? 아무도 못 쓰게 숨겨놔서 아마 남아 있을 거야.”

6인승이니 이 인원이 타기에도 무리 없었다.

“시티에서 보트도 훔쳤냐?”

“내가 시티에 해준 게 얼만데, 여객선을 훔쳐도 걔들은 할 말 없어야 돼.”

오만한 새끼, 이채윤이 가운뎃손가락을 착 올렸다.

“먼저 출발할 테니까 뒤따라 와. 여기서 한 삼십 분은 걸린다.”

“야, 근데 식량은 왜 이렇게 많이 가져가?”

양상훈은 곽수환이 트렁크에 가득 실은 식량을 가리켰다.

“내려가는 길에 민가 있잖냐. 버려서 뭐 하냐, 주고 가야지.”

곽수환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저거 저 새끼, 석화 박사님한테 잘 보이려고 저 지랄 하는 거야.”

“뻔하지, 뭐. 똘수환 약아빠진 새끼.”

다 들린다, 새끼들아. 곽수환은 지프 창문을 수동으로 닫아 올렸다.

그는 운전석 헤드를 붙잡고 뒤를 돌아봤다. 침낭 밖으로 석화의 눈코입만 나와 있었다. 찬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꽉 조여 놓아 여간 답답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편히 잠든 상태는 아니었기에 석화는 힘겹게 눈을 떴다. 손을 턱밑으로 끄집어내 침낭 입구의 고무줄을 늘였다.

“괜찮아?”

석화가 적당히 좀 하지 그랬냐고 할까 봐 곽수환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두었다. 어제는 저도 만취상태였다고.

“조수석으로……. 갈게요.”

그러나 원망의 눈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화는 늘 그랬다. 오히려 약한 저 자신만 탓했지. 원망도 할 만한데 바보 같은 석 박사다. 곽수환은 괜스레 속이 상했다.

“어제 내가 미쳤었나 봐. 그냥 누워 있어.”

“전 괜찮아요. 다른 소령님들한테 미안해서 그러죠.”

“어차피 힘쓰는 건 우리가 훨씬 잘해.”

남들 일하는데 누워서 쉬는 건 제아무리 아프더라도 미안했다. 물론 제가 도와주는 게 그들에게는 거치적거리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슬슬 출발할 건데, 최대한 천천히 갈게.”

“조수석으로 갈게요.”

“그냥 누워 있으라니까.”

석화는 웬일로 강경하게 침낭을 벗고 모포를 조수석으로 넘겼다. 뒷문에서 내려 조수석까지 오는데 식은땀까지 흘려대고 있었다. 곽수환은 제 좆을 떼었다가 붙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석화는 벨트를 매고 곽수환을 향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시동을 걸자 엔진의 흔들림에도 앓는 소리가 새어나올 뻔했다. 아침부터 고기를 구워 먹은 셋과는 다르게 석화가 먹은 거라고는 닭죽이 전부였다.

“이미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만 보고 한숨 더 자.”

“반성하라고 보는 거 아닌데요.”

“진짜 몰랐어. 연고가 그럴 줄은. 뮤닌? 뮤신?”

“……뮤신이요. 마에서 나오는 점액질인데, 저한테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자신은 알레르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저마저도 그랬다면 지금쯤 석화는 사경을 헤맸을지도 모른다.

“복상사라고 알아?”

“알죠.”

“그렇게 안 되게 노력해야겠어.”

작게 웃을 수도 없었다. 웃으면 배가 울려서 너무 아팠기에. 석화는 곽수환의 옆모습 너머로 보이는 산에게 속으로 안녕을 고했다. 어딘가에 있을 사향노루에게도.

“잠깐 마을에 들러서 남은 약재랑 식료품 주고 가자.”

“왜요?”

왜라니? 석화의 말에 되레 곽수환이 놀랐다. 그러나 지프의 느린 속도는 여전히 유지했다.

“그놈들이 우리 밀고한 것 때문에 그래?”

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더니 그렇지도 않았나.

“어차피 산장에 두고 가면 사람들이 알아서 가져가요.”

“그럼 그냥 마을 초입에 버려두고 가자.”

어차피 민가는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다.

“……죽었을까요?”

“응?”

“그 사람이요.”

곽수환은 직감적으로 광견병 걸린 환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가 감염시킨 것도 아닌데 마음에 담아두지 마.”

“소령님, 전 말이죠. 사람들이……. 기대하는 시선이 버거워요.”

잔뜩 쉰 목소리임에도 듣기는 좋았다.

“생필품이 필요해서 아는 대로 약재나 연고를 만들었을 뿐이지, 전 의사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기댈 사람이 아마 저뿐이었을 거예요. 그걸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는데……. 어제처럼 저한테 실망하고 돌아설 때……. 저도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들어요.”

석화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어차피 곽수환에게 석화가 아닌 이들은 전부 남이었고, 어디서 죽든 말든 관심 밖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저에게 기대를 했는데 실망을 한다? 그럼 너나 잘하라면서 침을 뱉어줄 수도 있었다.

“석 박사랑 나는 진짜 불하고 물 같지.”

“언제는 천생연분이라면서요.”

“뭐야, 그걸 들었어?”

음흉해. 석 박사. 정작 음흉한 눈은 곽수환이 뜨고 있었다.

“석 박사는 돌연변이와 아담 바이러스 연구자지, 그거 외에 또 뭘 잘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 그런 박사한테 전부 다 잘하라는 건 나보고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백신을 만들라는 거랑 뭐가 달라. 그리고 형은 항상 다 잘해왔어. 항상 노력했고, 그건 엄청난 거야.”

나도 한번 아파보니까 알겠더라. 몸이 약한 게 얼마나 살아가는 데 짐이 되는지.

“위로 받으려고 한 말 아닌데.”

“위로하려고 한 말 아니야.”

그는 눈으로만 웃었다.

곽수환은 눈이 쌓인 표지판이 매달린 마을 초입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저 안쪽에서는 연기가 쉴 새 없이 올라와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대신 알렸다.

그가 트렁크에서 식료품 박스와 약재들을 내려놓는 동안 이채윤과 양상훈은 지프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잠깐도 지루해 못 참겠다는 듯 하품까지 했다.

“이기적인 새끼들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서로 좀 돕기도 하고.”

이채윤이 열어둔 운전석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사람답게 사는 새끼가 맨손으로 머리뼈를 박살 내냐?”

어차피 이제 다시 그럴 일이 있을까? 없기를 바라야겠지. 곽수환은 가죽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꽂아두었다.

운전석으로 돌아오니 석화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배겨서 힘들 텐데 자세를 못 바꿀 정도로 아픈가 보다. 그래도 여기부터는 나름 포장 도로였다. 시멘트가 여기저기 파였지만, 산길보다는 나을 터였다.

보트를 숨겨둔 항구로 차를 몰면서 그는 보온병의 뚜껑까지 따서 석화에게 내밀었다.

“만에 하나 혹시라도…….”

석화는 뽀얀 김이 올라오는 보온병을 내려다봤다.

“내가 조금이라도 귀찮아지면……. 그때는 솔직히 말해도 돼요.”

“……씨발, 자기야. 나 울릴 거야?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 거 죽음 복선이라고.”

석화는 정말 울 것같이 화를 내는 그를 보지 못하고 마른 목만 축였다. 그냥 물이 아닌지 구수한 향도 같이 올라왔다. 아마도 제가 말려놓은 엄나무 뿌리인 듯했다.

“솔직히 석화 형이 귀찮아 봤자야. 먹는 것도 조금 먹고, 말도 잘 듣고, 야하기까지 하지.”

“어제도 소령님이 뒤처리 다 했잖아요.”

“그건 내 취미생활이자 자가 치유 시간이고.”

석화는 컵에 물을 따라서 그에게 넘겼다. 따뜻한 물을 한 번에 털어 넣더니 다시 석화의 손에 넘겨주었다. 곽수환은 저 앞에 넘실거리는 검은 바다와 항구 옆의 나무오두막을 발견하고는 조금 속도를 올렸다.

고향에 가기 위한 여정에는 늘 러시아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고향을 두 번 다시 떠나지 않을지 모르니 끝을 고할 안녕이었다. 단단히 얼어버린 계곡과 하울링을 하는 늑대, 혼자인 저를 달래주었던 사향노루도 마지막이었다.

석화는 몸을 일으켜 뒤를 쳐다봤다. 그의 동료가 탄 지프가 바짝 뒤따르는 중이었다.

제주도에서 참으로 멀리도 떠나왔다. 여의도로 올라오기 직전에 자신에게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공감하지 못하고 귀담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닫힌 세계 안에서 어머니는 저를 무척이나 사랑해주었다. 오양석 박사는 저를 동정해 이따금 집에 초대도 했으며, 학습센터에서 저에게 문을 두드린 동기 또한 있었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 가둔 세계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를 이해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 체념하고 살았다. 그러나 곽수환이 자신을 바꿔주었다. 그는 문을 억지로 비집고 열어 박살을 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는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사람을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갈까?”

조수석을 연 곽수환이 동해로 이어지는 바다를 가리켰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그의 머리카락만 뒤흔들 수 있을 뿐, 몸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다. 높은 파도에 휩쓸려버릴지언정 그가 있기에 석화는 망설이지 않고 바다를 향했다.

“돌아가요, 레인보우 시티로.”

한 번 더 열린 세계로 가게 되는 것이다.


[레인보우 시티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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