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야화 (5)
이런 식의 합류 메시지가 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뭘 그렇게 놀라?"
"그게…… 사실은"
최기석은 표정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이 저를 지목하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막 레지던트가 됐을 뿐이라서……."
"레지던트라는 건 단순한 허울이지."
"허울이라면……."
"오늘 수술실에서 보여 준 네 어시. 그게 레지 1년 차의 어시라고 생각해?"
권일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본래 레지 1년 차의 수술 어시는 인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혈이 심할 때 석션기 정도를 잡는 게 전부다.
수술에 참여할 권한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경험 부족으로 각종 수술 도구를 잘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의 최기석은 견인기를 끌면서 제1보조를 돕는 신기를 보였다.
"너도 알잖아. 네가 동기들하고 다르다는 거."
"……."
"수술 기술은 송 교수님에게 배운 건가?"
"네."
최기석의 대답에 권일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다.
송명진이 애지중지 키워 온 제자를 팀에 데려올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게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제안을 수락하면 넌 노우드 팀의 정식 스태프가 된다. 정식으로 제2보조가 돼서 거의 모든 수술에 참여하지."
위이이이잉.
때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최기석은 카운터에서 커피를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때? 노우드 팀에 들어올 생각 있어?"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그렇게 해."
권일수가 흔쾌히 허락했다.
최기석은 권일수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동으로 올라갔다.
* * *
일과가 끝났다.
최기석은 담당하고 있는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100일 당직 기간에는 영어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다.
송명진의 부름이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
회화 공부와 리스닝 공부를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이 윌 킵온 스터딩."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리스닝 교재의 음성을 들으며 직접 입 밖으로 냈다. 처음에는 어눌한 발음을 입 밖으로 내는 게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어색함을 극복했다.
하늘이 돕는 걸까.
두 시간이 넘도록 응급실 콜이 없었다.
덕분에 영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드르르르륵.
문이 열리고 윤지혜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
윤지혜는 최기석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사건을 겪은 후부터 유일하게 최기석에게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에게 최기석은 믿을 만한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교수님."
윤지혜가 최기석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혁필과 과에 온 후부터 윤지혜는 별 탈 없이 의진대 흉부외과에 자리를 잡았다.
송명진이 맡았던 관상동맥 파트 수술도 문제없이 소화했다.
스태프에게 쌀쌀한 맞은 것도 여전해서 여전히 얼음마녀로 불렸고 말이다.
"아직도 영어 공부?"
"네. 혹시 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할지도 모르잖아요. 평소에 열심히 해 둬야죠. 교수님은 책 출간으로 바쁘시죠?"
최기석의 질문에 윤지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교에서 심장 수술 서적을 출판하는데 그녀가 관상동맥 파트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레지 생활은 어때?"
"할 만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당직을 선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가?"
윤지혜가 최기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최기석의 상태는 좋아 보였다.
눈은 평소처럼 또랑또랑했으며 피부도 매끈했다. 피로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제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최기석의 지적에 윤지혜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닌데?"
"그럼……."
"너무 멀쩡한 걸 보니까 농땡이 치는 것 같아서. 혹시 당직 때 잠만 자는 거 아니지?"
"절대 아니에요. 응급실에 물어보면 아실 거예요."
최기석은 서둘러 대답했다.
그가 팔팔한 것은 어디까지나 역환단과 환자 바라기의 효과 덕분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윤지혜가 먼저 운을 뗐다.
"장 교수님은 별말 없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직 못 들었나 보네. 그럼 됐어. 내가 껴들 일은 아니니까."
윤지혜의 말이 궁금증을 키웠다.
대체 장혁필이 하려는 이야기는 뭘까.
"난 그만 갈게."
"네. 수고하세요."
최기석은 의료 서적을 챙겨서 나가는 윤지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냉기가 펄펄 날리는 듯한 윤지혜지만 잘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아마 다른 스태프들은 모르리라.
영어 공부를 조금 더 하다가 병원 바깥으로 나갔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걸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만에 환자에 치이지 않는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 참."
최기석은 상태창을 띄우며 잊었던 작업에 나섰다.
[강화석 3개를 사용하여 환자 바라기(+2)를 강화합니다.]
위이이이잉.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환자 바라기(+3)이 완성되었습니다. 환자 바라기의 활력 효과가 4퍼센트 증가합니다.]
'10강까지만 하면 좋을 텐데.'
최기석은 환자 바라기를 응시하다가 상태창을 껐다.
막간의 산책을 마치고 복귀하는데 방송이 귓가를 때렸다.
"흉부외과 코드 블루. 흉부외과 코드 블루.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흉부외과 코드 블루."
응급 CPR 방송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기석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번개처럼 병동으로 달려갔다.
한 병실 앞에 환자들이 몰려 있었다.
"잠시만요."
환자들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위에 의식을 잃은 환자가 누워 있었으며 이영호가 흉부압박을, 강하나가 앰부백을 짜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보호자가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살려야 한다 스킬을 사용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각성 CPR: 특수 버프가 30분간 지속됩니다.]
"CPR 중단하고 환자 일으켜 세우는 거 도와줘요."
"선배, 환자는 지금……."
"내 말 들어!"
최기석의 호통에 이영호가 움찔거렸다.
그는 결국 최기석이 시키는 대로 환자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최기석은 환자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환자를 안은 후 단단하게 말아 쥔 주먹으로 복부를 밀어 올렸다.
다섯 번 가량 복부를 밀어 올렸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제발.'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임리히 법으로 기도폐쇄를 해결하지 못하면 기관절개술을 해야 한다.
물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환자가 져야 하고 말이다.
"크에에에엑."
괴성과 함께 환자의 입에서 토사물이 흘렀다.
"넌 앰부백 짜고 강 선생님은 에피네프린 재서 가져다주세요."
휘이이이잉.
지시를 내리는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얼어붙은 심장'의 특수효과 혹한이 발휘됩니다.]
[혹한: 자신 뿐 아니라 힘께 처치를 하는 동료 또한 감정의 동요가 줄어듭니다. 응급상황에 따른 능력치 감소폭이 줄어듭니다.]
혹한 효과 때문일까.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이영호와 강하나의 얼굴이 펴졌다.
퍽! 퍽! 퍽! 퍽!
최기석은 각성 버프를 받은 채 흉부압박에 나섰다. 곁에서는 이영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앰부백을 짰다.
"에피네프린 가져왔어요."
최기석은 강하나가 내민 주사기를 받아들고 망설임 없이 혈관을 찔렀다.
푸우우우욱.
에피네프린을 정맥주사로 놓고 CPR을 이어갔다.
몇몇 의사들이 방송을 듣고 흉부외과 병동을 찾았다. 덕분에 CPR을 하면서 환자를 중환자실로 옮길 수 있었다.
환자 감시 장치를 달면서 추가적인 처치가 이어졌다.
다행히 제세동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환자가 자발순환 상태로 돌아왔다.
"나 좀 보자."
최기석은 이영호를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이영호가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민주혁 선배가 환자에게 비위관을 넣으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비위관을 넣는데…… 튜브가 계속 겉돌아서요. 그렇게 다섯 번째 삽입을 하는데 환자가 갑자기 쓰러져서……."
"엘 튜브를 연속으로 다섯 번이나 삽입했다고?"
"……네."
"환자 상태를 봐 가면서 했어야지. 무리하게 하니까 쇼크가 오잖아!"
최기석이 언성을 높였다.
"게다가 CPR을 할 거면 기도 확보부터 하는 게 기본 아니야? 생각 없이 앰부백만 짜면 끝이야?"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혹시 너 처치할 때 보호자도 옆에 있었어?"
"네."
"돌겠네."
최기석은 한숨 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무리하게 계속되는 콧줄 삽입, 창백해지는 환자의 얼굴, 그것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보호자의 모습 등등.
"따라와."
최기석은 이영호를 데리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선생님. 우리 남편은 어떻게 됐나요?"
환자의 보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최기석에게 다가왔다.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은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기석의 말에 보호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그의 뒤에 숨어 있는 이영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순간 보호자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최기석은 놓치지 않았다.
다시 나서야 할 때가 왔다.
"이 선생. 미쳤어?"
"……."
"환자분이 이 선생 가족이었다고 생각해 봐. 그런 식으로 처치할 수 있어?"
"아닙니다."
"아닙니다? 뚫린 입이라고 대답은 잘하네."
최기석은 성질내며 이영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그러고도 의사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끝나나? 쓰러진 환자분과 여기 있는 보호자분이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은 해봤어?"
최기석이 언성을 높이며 멱살을 흔들었다.
"선생님. 그만하세요."
험학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보호자가 말렸다.
"평소에는 잘해 주시던 선생님이에요. 오늘만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용서해 주세요."
"병원에서는 작은 실수가 사람을 죽입니다."
최기석은 말을 마치고 이영호와 바짝 얼굴을 붙였다.
"또 이딴 식이면 내 손에 죽어. 오늘은 당직실 설 생각하지 말고 밤새 윤호진 환자 킵(곁에서 환자를 지켜보는 일) 해. 알았어?"
"……네."
"꺼져!"
최기석이 이영호를 밀치자 이영호가 힘없이 밀려나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보호자분 앞에서 안 좋은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도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인턴 선생님인데……."
"인턴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죠."
최기석은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당직실로 돌아갔다.
이영호를 혼낸 것이 가시처럼 가슴에 박혀서 영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과거 진성대에서 인턴 생활을 했을 때 이영호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큰 사고를 많이 쳤다.
그럼에도 보호자 앞에서 이영호를 야단친 것은 다 그를 위해서다.
만약 최기석이 나서지 않았다면 보호자가 이영호를 잡아먹으려고 날뛰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클레임으로까지 발전한다면 이영호의 인턴 평가는 바닥을 찍는다.
레지던트가 되는데 큰 불이익을 받았을 테고 말이다.
즉 아까는 이영호를 몰아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후우……."
최기석은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 *
다음 날 아침.
모든 스태프가 참석한 가운데 흉부외과 오전 회의가 진행됐다.
수술환자 브리핑, 입원환자 브리핑, 조은지의 컨퍼런스 발표가 차례대로 이어지면서 회의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럼 슬슬 저번 달 통계를 볼까요?"
조지환이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통계자료를 손에 들었다.
순간 회의실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