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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21화 (120/407)

팀 세이버, 그 두 번째 (5)

'뻔하다. 너란 인간.'

최기석은 당직실을 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민우가 진심으로 뉘우쳤다는 말은 헛소리다.

뉘우침을 아는 인간이라면 애초에 이예림을 괴롭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얼버무려지면 다른 방식으로 흉부외과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말이다.

지금 싹을 자르는 게 확실하다.

회의실로 들어가서 노트북 자리에 앉았다.

수술 스케줄 관리와 입원환자 오더를 내는 동안 인턴들이 들어와 회의 준비를 했다.

"안녕하세요."

강상중의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민주혁과 낯선 남자가 막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민우를 대신할 스태프, 서지훈이 드디어 나타났다.

서지훈은 키가 컸으며 몸이 상당히 말랐다. 삼각 턱과 날카로운 눈매로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최기석은 호기심으로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썼다.

환자모드에서는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의료모드에서는 놀랄 만한 발견이 있었다.

'미쳤네.'

서지훈의 패시브 중 고속성장이 있었다.

고속성장이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스스로 노력하면 습득력이 두 배로 빨라지는 스킬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살펴봤지만 이런 스킬은 처음 봤다.

민주혁이 말한 대로 서지훈은 정말 천재일까?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민주혁이 최기석의 곁에 섰다.

"아. 죄송해요. 중요한 일을 까먹어서…… 안녕하세요, 선배님."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훈에게 인사했다.

"어. 안녕."

서지훈이 어색하게 인사를 받고 말을 이었다.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당연하죠. 선배님."

"군의관 끝내고 오니까 눈치가 좀 보이네. 기수는 내가 높지만 너나 나나 1년 차잖아."

"아닙니다. 한 번 선배님은 영원한 선배님이죠."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서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 다 끝났으면 커피나 한잔하자."

민주혁의 주도로 세 사람이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대화의 주도권은 민주혁에게 있었다.

민주혁은 서지훈에게 흉부외과에 스태프들의 성향이나 권력 관계를 알려 주었다. 최기석에게는 서지훈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었다.

"서 선배. 장난 아니다. 긴장하는 게 좋아."

민주혁이 장난스럽게 최기석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갑자기 왜 애를 겁주고 그래."

"겁주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서 선배가 원래 처치나 술기 쪽으로 대박이었어. 인턴 끝나기 전에는 모든 외과에서 러브콜이 왔다니까."

"야. 부끄럽다. 옛날이야기 하지 마."

서지훈이 휘휘 손을 내저었지만 민주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노력하지 않으면 금방 따라잡힌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아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서지훈이 운을 뗐다.

"그건 그렇고 민우는 왜 그렇게 변했어? 간만에 만나서 이야기 좀 하려 했더니 날 무시하던데?"

"요 며칠 사이에 특히 더 이상해졌어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이제 제 차례가 왔네요."

"네 차례?"

"제 일이 마무리되면 민 선배에게 가장 먼저 말씀드리기로 했잖아요. 서 선배도 간접적으로 이 일과 상관이 있으니까 말씀드릴게요."

최기석은 헛기침하고 설명에 나섰다.

한민우가 이예림 간호사를 성희롱을 해 왔다는 것. 그리고 이를 발견한 최기석이 한민우가 처벌을 받도록 움직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게 다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민주혁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너 진짜 여우 다 됐다. 까딱하다가는 나도 날아갈지 모르겠는데?"

"그런 말 마세요."

최기석의 시선이 서지훈에게 향했다.

서지훈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성추행 때문에 부속병원으로 쫓겨난 동기, 그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병신 새끼."

서지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의대 다닐 때부터 거지같은 짓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차라리 잘됐다. 나도 그놈이랑 별로 상종하고 싶지 않았거든."

"생각보다 화끈하시네요."

"화끈? 병신을 그저 병신이라고 불렀을 뿐이야."

민주혁의 말에 서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세 사람은 회의실로 돌아가서 회의에 참석했다.

케이스 발표, 입원환자 브리핑, 수술 환자 브리핑은 무사히 끝났다.

"폐암 심포지엄 준비는 잘 하고 있겠죠?"

조지환이 박용일과 윤지혜를 번갈아 응시했다.

"네. 거의 다 끝나갑니다."

"마무리 중입니다."

두 사람의 대답에 조지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안타까운 소식이 있어요.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 준 한민우 선생이 인천에 있는 브랜치로 가게 됐습니다."

"……."

"다들 알다시피 인천 브랜치는 우리보다 인력이 부족해서 P.

A를 당직으로 쓰고 있어요. 그래서 잠시 동안 한민우 선생을 인천 브랜치로 파견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 선생."

조지환의 말에 한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마치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어두웠다.

"인천에 가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민우 선생의 공백을 메워 줄 새로운 인원이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지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지훈이 일어났다.

"이번 달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서지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왔다, 지훈아."

"축하해."

서지훈의 인사에 스태프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스태프들 대부분이 서지훈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3년 전에 잠깐 근무했지만 그때 남긴 인상이 강렬했던 탓이다. 특히 폐식도 진료를 보는 박용일은 돌아온 자식을 보는 듯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회진마저 무사히 끝났다.

"너 오전 스크럽 있지? 지훈 선배 교육은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마라."

민주혁이 한마디하고 서지훈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예전이라면 후배의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고마운 선배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최기석은 달랐다.

민주혁이 서지훈을 제 편으로 만들려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이이잉.

갑자기 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니 응급실이 아니라 정설화 전화다.

"어, 설화야. 무슨 일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깐 병동에 내려올래?]

"바로 갈게."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순환기내과 병동을 찾았다.

정설화는 1인실 바깥에서 잠들어 있는 김세찬을 응시하고 있었다.

"왔어? 바쁜데 부른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아무리 바빠도 자기가 불렀는데 와야지."

최기석의 너스레에 정설화가 밝게 웃었다.

"그냥 환자 이야기 좀 해 주려고."

"김세찬 환자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

최기석의 시선이 김세찬을 향했다.

김세찬은 세이버 팀이 수술한 첫 번째 환자다. 심장이식 후의 문제가 생긴다면 수술이 정확했느냐에 대한 잡음이 생길 수 있었다.

"어젯밤에 쇼크가 왔었어."

"쇼크?"

"급성 면역 거부 반응이 온 거 같아. CPR이 제때 돼서 다행히 위기는 넘겼어. 기존의 억제제를 중단하고 새 억제제를 쓰면서 증상이 많이 좋아졌고."

"휴우…… 다행이다."

최기석은 김세찬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서 한숨을 돌렸다.

정설화의 말대로 환자는 안정적이다.

"근데 어젯밤이면 설화, 너 당직일 때잖아."

"응. CPR 내가 했어. 기석이 네가 보낸 환자인데 허무하게 보낼 수 없잖아."

"고마워. 역시 내 여자라니까."

최기석의 칭찬에 정설화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좋은 소식 들려줄게."

"여기서 뽀뽀라도 해 주려고?"

"바보. 그런 거 아니야."

정설화가 피식 웃으며 따라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복도 끝에 있는 2인실이다.

"바로 저분이 좋은 소식이야."

정설화의 검지가 가리킨 환자는 40세쯤으로 보이는 여자 환자다.

환자는 보호자와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저분들이 왜?"

"그냥 말하면 재미없잖아. 맞춰 봐."

"으음…… 잘 모르겠는데? 환자가 좋은 소식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저 환자분 심부전증에 좌심실류를 앓고 있어."

정설화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최기석에게는 그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순간 등줄기에 짜릿한 전류까지 흘렀다.

"진짜?"

"응. 원래는 좀 더 일찍 말해 주려고 했는데, 검사 결과가 오늘 아침에 막 나와서."

"대박이다. 설화야!"

최기석은 정설화를 꼭 안아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심부전증이란 심장의 기능이 떨어져 심장이 신체에 혈액을 보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좌심실류란 심근경색 등으로 좌심실의 벽이 얇아져 늘어난 상태를 말한다.

"좋은 소식 맞지?"

"당연하지. 정말 고마워."

"오늘 중으로 협진 요청 보낼게."

최기석은 복도가 한산한 틈을 타서 정설화의 볼에 입을 맞추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찾았다.

첫 번째 세이버 수술 환자를.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입원환자들을 살핀 후 수술실로 향했다.

곧 펼칠 수술은 소아 환자의 혈관륜 수술이다.

흉부 대동맥이 활처럼 굽어진 부위를 대동맥궁이라고 하는데 신생아의 경우 이 대동맥궁에서 몇몇 혈관들이 뻗어나서 자란다.

이 혈관들 중 일부가 비정상으로 자라나서 식도나 기도를 압박하는 것을 혈관륜이라고 부른다.

혈관륜 수술은 아직 동영상으로 저장하지 않은 상황.

오늘의 수술이 큰 재산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수술실을 향하는 발걸음이 마냥 가볍지는 않았다.

'찝찝하네.'

최기석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필이면 노우드 팀 수술에 보조를 서게 되었다.

제2보조가 감기에 걸리면서 컨디션이 떨어졌던 탓이다.

비록 권일수의 부름을 받고 보조를 서게 됐지만 꼬투리를 잡히지는 않을까, 스파이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때마침 잘 왔다."

최기석이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자 권일수가 손짓을 했다.

"네, 교수님."

"설명은 한 번뿐이니까 잘 들어."

권일수가 혈관륜 수술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환자는 좌측대동맥궁과 우측대동맥궁, 더불어 좌폐동맥에 기형적인 륜을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혈관륜으로 인해 기도협착까지 앓았다.

전화로 들은 것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놀라운 것은 오늘 수술이 인공심폐기를 쓰지 않는 오프 펌프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잠시 후 브리핑과 스크럽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일제히 로젯으로 향했다.

세이버 팀은 수술 전에 스태프들끼리 파이팅을 하고 들어갔지만 노우드 팀은 그런 파이팅이 없었다.

스태프들 간에 잡담을 나누지도 않았다.

노우드 팀에 합류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세이버 팀과 비교하는 최기석이다.

스으으으윽.

마취가 끝난 후 최기석이 환부를 소독하고 방포를 덮었다. 그러자 권일수가 메스로 등부터 5번 늑간까지의 피부를 반달 모양으로 갈랐다.

흉부대동맥 환자에게 주로 펼치는 후측방 개흉술이다.

절개가 끝나고 최기석은 인턴과 함께 견인기를 벌렸다. 민주혁은 오늘 수술에서 제외됐다.

쿵쿵쿵쿵.

박동치는 아이의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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