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으아, 덥다. 인간적으로 여기 너무 더운 거 아닌가요?”
“그렇지.”
“덥긴 하지.”
날씨도 날씨였지만, 엄청난 덩치의 남자들이 한 방에 모여 있으니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저기, 에어컨 좀 켜면 안 될까요?”
“안 돼.”
검은색 양복을 입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특수체질 국도해 씨가 단칼에 거절했다.
“왜 안 되는데요?”
“에어컨 공기가 마음에 안 드니까.”
휙하고 작은 쪽지가 날아 들어왔다.
「예전에 서울에서 청소 안 한 에어컨 필터를 보신 이후로 절대 안 키심. 나중에 형님 나가고 나서 켜 주겠음.」
멧돼지가 저 멀리서 손으로 브이 사인을 그리면서 씨익 웃고 있었다.
하긴, 나도 학교 도서관에 있던 에어컨 필터 보니까 현기증이 나긴 하더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멀쩡히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도 못 켜게 하다니.
“안 더우세요?”
“참을 만해.”
국도해는 셔츠 단추를 위에까지 모두 꼭 채우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여름 양복이라고는 해도, 지금 입기엔 무리가 따르는 차림이었다.
“혹시 파충류나 양서류 아니야.”
조그맣게 중얼거리니 건너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억눌렀다. 언제나처럼 연필이 날아와 탁자에 꽂혔다. 연필이 표창도 아니고 어떻게 던지면 던지는 대로 책상에 꽂히는 걸까. 인간 진기명기 이딴 걸로 비디오나 찍어 보내면 김치냉장고를 탈 수도 있을 텐데.
“여기요.”
연필을 빼서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연필심이 부러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깎아 드릴까요?”
“됐어.”
“에이, 그러지 말고 제가 깎아 드릴게요. 칼 주세요, 칼! 칼 있는 사람.”
“여기.”
박건우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잭나이프를 꺼내어 주었다.
“…….”
“왜? 선생님 마음에 안 들어?”
“이놈아가 생각이 있나 읍나. 연필 깎으라고 그런 칼을 주면 우짤낀데. 자, 선생. 이거 갖고 깎아라.”
하면서 그가 내민 것은 잭나이프보다 한 뼘은 더 큰 사냥용 나이프.
“제발 정상적인 칼을 빌려주시면 안 되나요?”
“여기, 내 거 써.”
꼬마 녀석이 필통에서 커터 칼을 꺼내 내밀었다.
“그래, 고마워.”
칼로 연필을 깎으려고 하자, 문제를 풀던 두목이 살짝 고개를 들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제대로 못 할 거면 하지 마.”
“아직 깎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
연필깎이도 하는 일을, 이 천재님께서 못 하실 리가 없지.
“길게 해 드릴까요. 아니면 짧게 해 드릴까요?”
“니가 무슨 미용사냐, 크큭.”
“성새민.”
이름을 불리는 것뿐인데도, 몸이 흠칫 떨릴 만큼 박력 있는 목소리다.
“……죄송합니다, 형님.”
과외 시간에 나를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선생 네 마음대로 해.”
“알겠습니다.”
솟아 나오는 웃음을 누르며, 자못 진지한 얼굴을 하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칼질부터 엇나가는 것이 영 예감이 좋지 않았다.
“허걱.”
급기야는 헛손질에 의해 연필심이 처참하게 드러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문제를 풀던 사람들이 모두 흘깃거리면서 비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다들 문제나 푸시죠. 오늘 끝나기 전에 시험 볼 거라고 말했잖아요.”
“뭐?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지금이요.”
비열하게 웃으면서 시험을 선언하자 모두 머리를 쥐어뜯으며 열심히 손을 놀렸다. 하지만 첫 쪽지시험부터 올백을 유지하는 국도해만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요.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연필의 운명 감상 중.”
“…….”
쪼잔하기가 둘째가라면 땅을 치고 통곡을 할 인간이여!
“계속 해 봐.”
“잘 깎아 드릴 테니까, 걱정 말고 문제나……컥.”
이번에는 연필을 감싸고 있는 반대편 나무가 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크핫.”
“풋.”
“키킥.”
“다, 다듬으면 되잖아요!”
연필심만 앙상하게 남은 부분을 뚝 분지르고, 다시 나무에 칼을 갖다 대고 슥슥 깎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음산하게 드러난 연필심과 마주해야 했다.
“그만하지 그래.”
“예? 아니요. 괜찮아요. 깎을 수 있어요.”
“널 위해서가 아니고, 내 연필을 위해서.”
“할 수 있다니까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을 잘할 수 없는데 그걸 지적받으면 울컥하고 만다.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심한 좌절을 맛봤다.
“그냥 놔둬. 내가 할 테니까.”
단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비율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자, 나의 짜증은 배가되었다. 빌어먹을 이놈의 칼은 왜 이렇게 안 드는 거야!
“할 수 있다고……, 윽!”
연필의 나무 틈에 칼날이 걸려, 그걸 빼낸다는 게 힘 조절을 잘못해서 그대로 쫙 밀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밀어 버린 대상에는 나의 엄지손가락도 함께였다.
“으악! 젠장.”
칼과 연필을 집어던지며, 다른 한손으로 재빨리 엄지손가락을 꾸욱 눌렀다.
“뭐야, 다쳤어? 관표 형님 약상자요!”
“많이 다쳤냐?”
“어디 좀 봐봐.”
“그라게 뉘가 그래 무리를 하라 했노!”
붉은 핏방울이 투두둑 공책에 흩뿌려졌다.
“멍청하긴.”
깨끗하게 다려진 손수건이 내 손수건을 휘어 감았다.
“어?!”
“꽉 누르고 있어라.”
“예? 아아……, 네.”
이 인간이 뭘 잘못 처먹었기에 순순히 자신의 손수건을 내주는 거지? 자신의 몸에는 물론, 자기 물건에도 누가 손을 대는 것은 끔찍이 싫어해서 방 청소도 혼자 한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부르는 소리를 들은 관표 형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약상자 가져와서 이거 치료해라.”
자신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주저 없이 이거, 라고 가리키며 국도해가 말했다.
“손을 베셨군요. 알겠습니다.”
금세 흰색 손수건이 붉게 물들었다.
“많이 다친 거 아니야?”
가장 마음이 여린 박건우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몰라. 피가 안 멈춰. 죽으면 누구 연필 깎다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비석에 새겨 줘.”
농담으로 맞받아쳤지만, 손수건을 다 적시고도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고 나 역시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 마. 예전에 나 여기에 칼 맞은 적 있었는데 피를 거의 한 대야 넘게 쏟았는데 안 죽었어. 아, 물론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피를 많이 흘리면 뭐라더라? 쇼킹사? 아무튼 그런 거 한다고 그러더라.”
의기양양하게 멧돼지 녀석이 옷을 걷어 올려 배에 난 상처를 보여 주며 말했다.
“쇼크사겠죠. 아무튼 위로 고마워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정상적인 걱정과 위로가 간절했다.
“손가락 움직여 봐.”
국도해가 말했다.
“네?”
“움직여 보라고.”
저게 다친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냐! 쓰라려서 눈물이 날 것 같구만 왜 호통을 치고 난리야!
하지만 워낙 매서운 눈으로 국도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수건으로 칭칭 감고 있는 엄지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보였다.
“됐어요?”
“그래.”
“……다 된 거예요?”
“응.”
저 인간이 지금 다친 사람 가지고 장난하자는 거야! 아파 죽겠는데 손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한 다음에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래’ 이거냐!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관표 형님이 구급상자를 찾아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좀 보자. 손수건 치워 봐요. 피가 많이 났네. 깊이 베였나 보군요.”
다정하고, 정상적인 걱정을 듣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많이 아파요? 손가락 움직여 봐요.”
“네?”
“손가락 움직여 보라고요.”
“이렇게요?”
이 사람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기로 작정을 했나.
“움직일 수 있는 거 보면 신경을 다친 건 아니니까 괜찮아요. 좀 깊게 베인 것뿐이니까 지혈제 뿌리고 붕대 감으면 피 멎을 겁니다.”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아까 그 행동이 내가 걱정이 된다거나, 안심을 시켜 주기 위해서 그런 거 아니겠지, 당신?
“소독 먼저 해.”
국도해가 수십 년 된 베테랑 의사처럼 짧게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헉, 지금 소독약 바르실 건가요?”
“당연하죠. 원래 상처 치료에는 기본입니다.”
상처 치료에 소독이 기본인 것은 물론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엄청나게 따갑다는 것도.
“크윽―.”
소독약이 상처에 스며들자, 날카로운 고통이 찌릿하고 전해졌다.
“엄살 피우는 것 봐.”
“크크크, 머스마가 뭔 엄살이 그리 많노.”
“얼마나 아픈 줄 알아요! 으악, 살살 좀 하세요.”
“예, 조금만 바르면 돼요.”
도대체 직업이 무엇일까 의심할 정도로 관표 형님은 솜씨 좋게 상처에 약을 바른 후, 붕대를 매 주었다.
“자아, 됐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주면서, 그가 말했다.
“에? 이렇게요?”
“피 빨리 멎어야 하니까. 저는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얼른 인사를 건네자, 관표 형님이 씨익 웃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방을 나섰다.
“넌 가만 보면 관표 형님한테는 엄청 실실 쪼개더라.”
“좋은 사람이잖아, 안 그래?”
“하긴 그렇긴 하지.”
꼬마가 연필의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 우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야그처럼 들리는데?”
“하하핫, 눈치도 참 빠르시군요. 책들 펴시죠.”
“됐어.”
“네??”
“오늘은 여기서 끝내지. 손도 아플 텐데.”
“…….”
설마 걱정해 주고 있는 건가.
“그럼 먼저 일어난다.”
자리에서 국도해가 일어나자 모두들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쉬십시오, 형님.”
“푹 쉬십시오, 형님.”
“조금 있다 뵙겠습니다, 형님.”
나도 인사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라 주춤주춤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뵙죠.”
“그래.”
고개를 까딱거리며 방에서 나가자마자 담배를 입에 무는 그의 옆모습은 화보집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아후우, 에어컨 틀어! 빨리 틀어!”
두목이 방에서 나가자 성새민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외쳤다.
“알겠습니다, 형님!”
꼬마가 기쁜 얼굴로 에어컨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찬바람에 숨이 탁 트였다.
“으아. 극락이다, 극락.”
“너도 땀 좀 식히고 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네요.”
“상처는 괜찮냐? 너?”
“예, 그렇겠죠.”
수업 시간이 끝나자 모두, 호칭이 너로 바뀌어 있었다.
“손가락 하나 베었는데 무슨 놈의 피가 그렇게 많이 나냐.”
김유수가 상 위에 몸을 쭈욱 누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형님이 손수건 건네주실 때 나 깜짝 놀랐다.”
“나도!”
“나도 억수로 놀랐다아이가!”
“왜요?”
나는 피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손수건을 들며 물었다.
“형님이 자기 물건은 남한테 안 주시거든.”
“나한테 준 건가요? 이걸?”
“크하하, 그럼 준 거지. 다른 사람 피 묻은 손수건을 돌려받으시겠냐? 형님이.”
“살균 세탁 소독을 열 시간 해도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실걸.”
평소 그의 행적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수긍했다.
“난 우리 행님이 다른 사람한테 자기 물건 주는 거 처음 봤다. 돈을 줬으면 줬지, 자기 손에 들어온 건 절대 밖으로 돌리지 않는 게 우리 도해 형님이다!”
“참……, 절약 정신이 투철하신 분이군요.”
“절약이라기보다는.”
“그거라기보다는.”
“그쪽이라기보다는.”
“흐음…….”
모두들 먼 곳을 응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생략된 문장에는 ‘집착’이라는 단어가 쓰이겠지. 그것도 병적인 집착.
“형님이 그래도 꽤나 너 마음에 들어하시나 보다.”
“그러게 말이다, 크크.”
“뭐? 마음에 들어한다고요?”
내가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로 되묻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봐라, 봐라. 우리 도해 행님이 연필도 이 따위로 만들었는데 별말씀 안 하신 거 봐라. 다른 아새끼들 같았으면, 손가락을 잘라야 했을지도 모른다카네.”
“자르긴 뭘 잘라요!”
재빨리 손가락을 상 밑에 넣으며 대답했다.
“게다가 얘 다쳤다니까 과외도 미루셨잖아. 서울에 계실 때는 누가 옆에서 죽든 말든 눈 하나 깜짝 안 하시고 일정을 지키시는 분인데.”
“그러게.”
“그러긴 뭐가 그래요! 저번에 내가 문제 하나 잘못 풀어 줬다고 죽일 듯이 노려본 거 못 봤어요? 한번은 헷갈려서 자기 컵에 물 좀 따라 마셨다고 컵을 던져 버리질 않나. 게다가 저번에는 책상 옆에 땅콩이 놓여 있어서 내가 몇 개 먹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또 그 사람 땅콩이었나 봐요.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보는 앞에서 그 땅콩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릴 건 없잖아요. 안 그래요? 어제도 그래. 나란히 복도 걸어가다가 내가 조금 미끄러졌거든요. 웃지 마세요! 누가 그렇게 마루에 왁스를 박박 발라 놓으래요! 파리도 미끄러져 죽을 정도였다고요! 아무튼 중심을 잡으려다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그 사람 옷깃을 잡았는데, 그 인간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그대로 그 옷을 벗어서 세탁실에 던져 버리더군요. 아니 내가 무슨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야, 말하는 쓰레기야.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정말!”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다 쏟아내니 모두들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흠, 결론은 당신네들 형님은 나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나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그것이 처음에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인류에 대한 행운이라고 믿었다. 성격이 고슴도치 등딱지처럼 까칠한 저 인간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면, 그 다음날 지구는 반드시 멸망하고 말 테니.
“……말도 안 돼.”
“뭐가 또 말이 안 돼요?”
“너 어떻게 그딴 일을 저질러 놓고도 아직도 살아 있냐?”
“네?”
“내 머릿속의 시뮬레이션에서는 한준 너, 네 번 정도는 죽었을 거야.”
“난……다섯 번.”
박건우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가락을 쫙 펼치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요.”
“야들 말이 맞다. 내가 아는 도해 형님이 맞나 싶네. 너 진짜 아직도 총이나 칼 안 맞았나?”
“……안 맞았으니까 여기 있죠.”
“희한하네.”
“거참 신기하네.”
“별일이 다 있다카이.”
“죽었어야 옳은데.”
“최소한 손 정도는 잘렸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아니야. 이 정도는 마땅히 죽었어야 했다고.”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태의 미스터리에 대해 토로했다.
“누가 누굴 죽여요! 사람들이 진짜!”
“고놈 참 운도 억수로 좋네. 여태 살아 있고.”
“알 게 뭐예요. 아무튼 그럼 이 손수건 버려야 하나요? 아깝다, 비싸 보이는데.”
“네가 빨아서 쓰든지.”
“그럴까요.”
피 사이로 슬쩍 보이는 브랜드 태그를 보고,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빨아다 줄게!”
“어?”
“너 손도 다쳤잖아.”
“어, 그렇긴 하지…….”
“잠깐만 기다려. 내가 빨아다 줄게.”
“크하하하핫. 진짜 대갈빡 댓마이 때린다, 건우 녀석.”
“용재 형님 말대로 저거 완전 한 선생 충견이 됐네.”
“그러게요. 건우 형님도 고집은 엄청 세서 남의 말 잘 안 듣는데.”
고집이 세다는 것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공부할 때 머리가 너무 흘러내려와 답답해 보이기에, 머리 좀 올리라고 백 번쯤 얘기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강제로 앞머리를 올렸다가는 총을 맞을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멧돼지 씨의 충고를 듣고 나도 포기해 버렸지만.
“그래요? 난 잘 모르겠는데.”
“아마 이 모습도 서울에 있는 사람들한테 해 주면 안 믿을걸. 우리 건우 형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달려가서 손수건을 빨아 주다니.”
“서울? 다들 서울에서 온 거야? 그런데 대체 휴가를 왜 이런 깡촌으로 왔냐? 니 말대로 인터넷도 안 들어오는.”
에어컨 앞에서 과외복으로 지급받은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끄르며 말했다.
아아, 지금은 7월이라 참을 수 있겠지만 8월이 되면 과연 이 옷을 입고 과외를 할 수 있을까. 수업의 효율을 위해 에어컨 가동을 적극적으로 주장해 봐야겠군. 그나저나 왜들 저렇게 조용하지?
뒤를 돌아보니 모두들, 살짝 표정이 굳은 채로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응?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아, 아니. 야, 너 집에 안 가냐? 집에서 걱정 안 해?”
“에? 걱정은 무슨 걱정을 해요. 오늘 부모님 두 분 다 건넛마을 사람들하고 단체로 놀러 가셨는데, 여기서 그냥 저녁 먹고 갈까.”
“흠흠, 그럼 그러든지. 아이구, 나는 좀 나가서 낮잠이나 자야겠다.”
“낚싯대가 어디 있다 했지? 새민이, 니 기억하노?”
“건우 형님 손수건 제대로 빨 수 있을지 모르겠네. 가서 도와드려야지.”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일어나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 멀뚱하니 남겨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책상을 정리해 두고 복도로 나왔다. 모두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집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옷이나 갈아입을까 하다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사실을 떠올렸다. 샤워하고 싶어…….
“있잖아요.”
부엌 안으로 들어가니, 점심 준비를 위해 닭을 손질하던 관표 형님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부르셨어요?”
“우와, 오늘 점심 백숙?”
“예, 형님이 입맛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역시 이 집안의 모든 궤도는 국도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구나.
“수업은 벌써 끝났어요?”
“예, 국도해 씨가 그만하자고 해서요.”
“도해 형님이요?”
역시 관표 형님도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공부하기 싫은가 보죠. 하긴 이 날씨에 공부하고 싶으면 그게 사람인가요. 하하핫.”
“도해 형님은 날씨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닌데, 이상하군요.”
그 무엇에도 연연할 사람은 아니겠지.
“아무튼, 저 여기서 샤워 좀 잠깐 해도 될까요? 몸이 좀 찝찝해서.”
“그래요. 거실 안쪽에 있는 욕실 쓰면 돼요. 그쪽은 다들 잘 안 쓰니까.”
“고맙습니다.”
“속옷은 옷 갈아입는 방에 있는 서랍장 열어 보시면 새것 있을 겁니다. 그냥 입으시면 돼요.”
“우아, 정말 그래도 돼요?”
“당연하죠.”
눈 밑에 난 상처가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미소를 짓는다. 며칠 전에 집에 들어온 강도에게 망설임 없이 과도를 던졌던 사람과 과연 동일 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친절한 미소였다.
“그럼 샤워하고 나오세요. 저녁때는 떡갈비 할 건데, 그것도 드시고 가시죠.”
“앗싸, 안 그래도 먹고 갈 생각이었는데. 하하핫, 그럼 씻고 올게요.”
콧노래를 부르며 부엌을 나섰다.
점심은 기본이고, 가끔 이렇게 저녁까지 대접을 받고 가는 일자리가 또 있을까. 돈을 지불하는 고용주가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괜찮단 말이지. 흐흐흐흣.
옷을 벗어던지고,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을까 하다가 욕실까지의 거리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수건으로 대충 몸을 둘렀다.
복도만 가로지르면 바로 욕실이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히익―――!”
“…….”
그러니까, 복도에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난 정말 몰랐다 이 말이지.
어떻게든 이 쪽팔린 자리를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앞뒤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건너편으로 달려갔다. 물론 내 예상대로였으면 달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으악!”
붕 하고 올라가는 내 왼쪽 다리와 함께 공중에 너풀거리는 수건을, 나는 봐야만 했다. 복도에 나자빠진 나는 신음하며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고개를 들자 국도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윽……, 글쎄요.”
쪽팔려서 얼굴에서 불이 날 것만 같았다.
“내 집 안에서 옷을 벗고 일해 달라고 요구한 기억은 없는데.”
“다행히 저도 그런 기억은 없네요.”
할 수만 있다면 마룻바닥을 뚫고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저 인간은 대체 왜 눈도 안 돌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데! 내 몸에 무슨 다이아몬드라도 박혀 있냐! 시선으로 해부당하는 최초의 인간이 있다면, 아마 내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거기 떨어져 있는 수건 좀 집어 주실래요?”
멀찌감치 날아간 수건을 가리키며 부탁했다.
“……정말이지.”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건을 집어서 내 몸 위에 던져 주었다. 수건을 주섬주섬 몸 위에 두르고 일어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이만 저는.”
“잠깐.”
어째서 벗은 채로 저 목소리를 들으니 몸이 오싹 떨리는 걸까. 목소리가 몸에 직접 닿는 기분이었다.
“네, 네?!”
젠장,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삑사리가 나 버렸다. 흠흠, 긴장하고 있는 거 들키진 않았겠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흘깃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린 듯한 콧대와 한쪽만 깊게 진 유려한 쌍꺼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얼굴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조각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외모였다.
“한 번만 더…….”
현실적인 것은, 온몸에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뿐.
“네?”
“한 번만 더 벗고 다니면 가만 안 둔다.”
“…….”
파묻어 버리겠다.
바다에 던져 버리겠다.
시멘트에 굳혀서 호수에 수장시켜 주마.
뒤에 이어질 수많은 협박 문구들이 떠오르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는 내 앞에서, 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말도록.”
“…….”
옷 한 번 벗었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구나.
“사람 심란하게 만들지 말라고.”
“예, 예. 알겠어요.”
건성으로 대답하고 재빨리 건너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아…….”
다리가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서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기 콕을 틀며 아까 그 인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시작했다.
국도해라는 인간을 전부 이해하기란 나 같은 천재에게도 무리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까지 거하게 얻어먹고 나서 대청마루에 누운 채로, 배를 두드렸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생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니는 삐쩍 꼴은 게 뭘 그리 많이 처먹나. 그 음식이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카네.”
“머리로 가죠. 난 누구누구들하고는 달라서 머리를 많이 쓰면서 살거든요.”
“이 건방진 놈이!”
멧돼지가 굵은 팔뚝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숨막히잖아요!”
“숫자 세겠습니다. 텐! 나인!”
얼마 전에 영어로 숫자 세기를 배운 꼬마가 의기양양하게 손으로 마룻바닥을 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인……나인……나인.”
“야! 왜 나인만 하고 앉아 있어! 에잇! 세븐! 식스! 그새 까먹었냐! 대체 머리가 뭐로 만들어진 거야!”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핏대를 세워 그의 아이큐를 규탄했다.
“알아! 씨, 지금 방금 하려고 했어. 에잇! 세븐! ……음…….”
“3초 기억력.”
내가 싸늘하게 웃으며 한마디 던지자, 녀석이 시뻘게져서 발끈했다.
“아니야! 기억할 수 있다고!”
“유수야.”
옆에서 박건우가 꼬마 녀석의 귀를 잡아당겨 뭔가를 속삭였다.
“아아아, 그거.”
꼬마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박건우는 천재였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이과계의 물리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해하고 문제를 척척 풀어냈다. 그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이해를 하는지는 미스터리였다. 하지만 단연코 그는 물리에 관해서는 천재였다.
“섹스!”
박건우의 훈수를 들은 김유수가 득의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
“…….”
“…….”
그리고 박건우는 문과 과목, 특히 언어 계통에 있어서는 장애에 가까운 학습 부진을 보였다.
“왜? 틀렸어?”
이제야 겨우 한글로 받아쓰기를 자유자재로 하게 된, 꼬마 김유수가 물었다.
“됐어, 아이구.”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수박 잘라다 줄게요.”
복도를 지나가면서 관표 형님이 던지고 간 한마디에 모두들 환호했다.
“우아! 수박이다!”
“역시 우리 센스쟁이 관표 행님!”
“형님이 최고시죠, 으하하핫!”
“아싸, 형님 짱! 형님 짱!”
나 역시 열렬하게 관표 형님의 이름을 연호하며 즐거워했다. 어쩐지 이 인간들하고 급속도로 동화되어 가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지금은 무더운 여름밤의 시원한 수박만이 눈앞의 전부였다.
“여기 놀러온 거 아니다.”
날이 선 목소리가 뒤에서 날아 들어왔다. 모두들 자세를 고쳐 앉고, 침중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국도해는 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럼? 여기 놀러온 거 아니면 뭔데? 웃기네. 그쵸, 진짜 웃기지 않아요? 여기 놀러왔잖아요. 안 그래요?”
“험험, 달이 밝다.”
“엥? 갑자기 웬 달 타령. 오늘은 삭망이라서 달도 안 떴는데요?”
“아, 그러면 별이 밝구나!”
“역시 깡촌이라 틀리네. 별이 아주 반짝반짝.”
“반짝반짝 작은 별? 으하하하핫.”
모두들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리려고 애썼다. 차마 거기서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어, 그래.”
“잘 다녀와라.”
“후딱 온나.”
자리에서 일어서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체 저들이 이곳에 왜 온 것일까? 처음으로 든 의문이었다. 그냥 여름휴가를 길게 온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행동들을 보면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자리를 뜨자마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숙덕숙덕 의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입을 맞추기 위해 회의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한 바퀴 돌고 나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정처 없이 복도를 거닐다가 서재에서 무언가 정리를 하던 국도해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 청소하세요?”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
국도해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책을 가지런히 꽂아 넣기만 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이런저런 농담을 할 만큼 친해졌는데, 이 인간만큼은 그게 죽어도 되지 않는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글쎄,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 같은데.”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그래.”
대답에 일말의 망설임도, 미안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못 미더운 사람한테 과외는 용케도 받으시네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던졌다.
“가르치는 건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예?”
“실력 있다고.”
“……헤에.”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심장 쪽이 간질간질한 것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로 정리에만 열중했다.
“이거, 다 그림이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술 좋아하시나 봐요.”
“그런대로.”
“오오, 거참…….”
안 어울리네요, 라고 말하려다가 재빨리 입술을 깨물고 말을 바꾸었다.
“의외네요!”
“…….”
노려보지 마라. 내 전두엽에서 필사적으로 찾아낸 최고의 단어니까.
“앗, 이 그림 멋지네요. 누가 그린 건가요?”
뭔가 다른 화젯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쪽으로 치워 둔 유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네?”
“내가 그렸다고.”
“진짜요?!”
“왜?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아, 아니요. 그냥, 진짜 잘 그리셨네요.”
입을 헤에 벌린 채 다시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았다. 푸른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풍경화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예술에 재능이 없는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굉장한 실력이었다.
“그림 많이 그리시나 봐요.”
“시간 나면.”
이번에 수능을 준비하는 것이, 미대 입시를 위해서라는 얘기가 이제야 사실로 와 닿았다. 어느 학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학교 미대생을 위해 3초간 묵념.
“혼자 배우신 거예요? 신기하다. 난 진짜 못 그리는데. 하하하, 제가 예전에 미술 시간에 동물을 그리라고 해서 개를 그렸었거든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하필 왜 징그럽게 쥐를 그렸냐고 질색을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시간 나시면 제 초상화도 하나 그려 주세요. 혹시 알아, 유명한 화가 돼서 그 그림이 비싸게 팔릴지. 엥? 왜요?”
신나게 떠드는 나를 국도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넌 내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군.”
“예? 설마요. 무서워하는데요.”
라고 재빨리 대답한 후, 부족한 것 같아 뒷말을 붙여 주었다.
“엄청나게요.”
“불행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음, 그런가요. 제가 원래 생긴 거랑 성격이 갭이 크다는 얘기는 제법 들어서.”
“생긴 대로 노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국도해 씨도 생긴 대로 플레이하시는 것 같아요.”
“칭찬으로 듣지.”
“…….”
다시 대화가 단절되었다. 내가 말을 던지면, 국도해는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대화를 잇기가 매우 힘들었다.
“저기, 질문 하나 해도 되나요?”
“뭔데.”
“여기는 왜 내려오신 건가요?”
“사정이 있어서.”
즉답이군. 거짓말도 아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드러내지도 않은.
“사정, 사정이 있으셔서. 음, 그렇군요. 그러면 언제까지 계실 건가요?”
최소한 두 달 이상은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래야 학비랑 방세가 나올 테니.
“잠잠해질 때까지.”
“네?”
“깊게 알려고 하지 마. 스며드는 기분이니까.”
들고 있던 스케치북 모서리로 내 이마를 밀어내며, 그가 말했다.
또 스며든다는 타령이네. 내가 습기나 안개도 아니고, 대체 어디에 스며든다는 거야!
나의 정체성에 대해 한마디 하려고 했을 때, 열린 문을 똑똑 두드리며 관표 형님이 말을 건넸다.
“형님, 과일 좀 드시지요.”
“책 정리가 먼저.”
“그럼 한 선생님은요?”
“당연히 전 수박이 먼저.”
“그럼 나오세요.”
두 번 권하지 않고 관표 형님은 방을 나갔다. 나는 아직도 그림과 책을 정리하고 있는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하고 지금 드시러 가시죠.”
“일에는 뭐든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알겠어요.”
또 이해하기 힘든 저 인간만의 질서 나부랭이인가 보군.
서재를 나와 대청마루로 가니 모두들 수박화채를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고 있었다.
“으앗! 뭐야, 치사하게 먼저 먹는 게 어디 있어요.”
“니는 화장실 갔다온담서, 어델 그래 싸돌아 댕기다 이제 오나.”
“아니, 잠깐 국도해 씨 서재 좀 둘러봤죠. 그림 진짜 잘 그리던데요. 나중에 나 초상화나 하나 그려 달라고 해야지. 조폭 출신 화가, 뭐 이렇게 이름 날려서 유명해질지 누가 알아요?”
숟가락으로 화채를 떠서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모두들 얼어붙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캤나?”
“네?”
“지금 이놈이 뭐라고 한 거죠?”
“내가 뭘요??”
“형님이 그림을 보여 주셨다고?”
“응, 그런데요. 엄청 잘 그리시던데요. 안 어울리게. 완전 안 어울려.”
“……미쳐 부리겠다.”
“얘가 지금 구라를 까는 건가, 아니면 우리가 단체로 미친 건가. 형님이 변하셨을 리는 없을 테고. 둘 중 하나일 텐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다들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요? 국도해 씨 그림 그리는 거 설마 국가 기밀 막 이런 건가요?”
“됐다. 말을 말자.”
“야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래 편안하게 말하지. 그래, 모르는기 약인기라.”
“저 녀석이 도해 형님 친절한 모습만 봐서, 아직도 무서움을 모른다니까요.”
“거참, 그런 행동들에 친절이란 단어를 쓴다는 것은 저 오늘 처음 배웠네요.”
수박씨를 마당에 퉤퉤 뱉어 내며 말하자 모두들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형님은? 도해 형님은 안 드신대?”
“아뇨, 정리 먼저 하고 온대요. 일에는 순서가 있다나 뭐라나.”
“크큭, 형님이 순서를 어기시는 일은 없으니까.”
“입 밖에 낸 말도 번복 안 하시고.”
또 나왔군. 그 이해할 수 없는 질서.
“난 그거 병이라고 생각해요.”
“뭐?”
“국도해 씨, 그 이상할 정도의 결벽증과 집착이요.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뭐 그렇긴 하지만서두…….”
“그렇지만…….”
“그래도…….”
“뭐…….”
다들 말끝을 흐렸다. 모두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잘생기고, 싸움을 잘하고, 일을 잘하면 뭐해요. 필통 속의 연필들도 가지런하게 줄을 맞춰서 깎아 두지를 않나. 다른 사람이 손을 댄 것은 먹지도 않고, 물도 그래요. 아니 어떻게 그 이상한 통에 든 차만 마시는 거예요. 그 차를 생산하는 회사라도 망해 봐요. 그러면 저 사람 아무것도 안 마시다 죽는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흠, 생각해 보니 그러네.”
“역시, 선생님은 똑똑해.”
박건우가 눈을 빛내며 칭찬해 줬지만, 어째 전혀 기쁘지 않다.
“치료가 필요하다고요.”
“우리가 의사냐. 그런 걸 어떻게 해.”
“게다가, 형님 그 성격이 그렇게 큰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맞아. 그렇게 비정상적인 건 아니지. 도해 형님이니까 괜찮다고.”
“충분히 비정상입니다! 아까 샤워하러 가려다가, 우연히 알몸으로 잠깐 복도에서 만났는데. 으악, 우연이라니까요! 내가 설마 그 시간에 누가 내 앞을 지나갈 줄 알았나! 아무튼 나를 보자마자 한 번만 더 옷 벗고 다니면 가만 안 둔다고 협박까지 했다고요. 물론 같은 남자끼리 벗은 몸 봐서 유쾌하진 않겠지만,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요. 분명 저 성격에 다른 사람들하고 대중목욕탕도 못 갔겠죠. 더러워서 그런 곳은 절대 못 갈 거라고요. 여기서 그 사람하고 같이 사우나 해 본 사람 있어요?”
픽하고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을 마쳤는데, 여기저기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에엑! 정말요?”
“어, 형님 그런 건 의외로 신경 안 쓰시는데.”
“도해 형님의 기준은 정말 형님의 기준이라서 아무도 모르거든.”
“맞아. 사우나 같은 것은 그렇게 안 가리시는 편인데.”
“그럼 왜 나한테만…….”
“푸하하하하. 니 혹시 짝불알 아닌기라? 형님이 짝짝이로 있는 건 억수로 싫어한다 안카나. 크하하하핫.”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짝궁뎅이는?”
“그것도 아니라고요!”
“뭔가 몸에 균형이 안 맞는 거겠지, 크하하핫.”
모두들 웃고 난리가 났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깨끗한 그릇에 두목만을 위한 화채를 만들어 온, 관표 형님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크하하하. 형님, 글쎄 얘 벗은 몸 보고 도해 형님이 열라 성질 내셨대.”
“벗은 몸?”
“아, 아까 전에 샤워하러 간다고 했을 때 귀찮아서 옷 벗은 다음에 그냥 수건만 두르고 복도로 나갔다가…….”
오늘 쪽 참으로 많이도 판다.
“큭, 놀라셨겠네요.”
“네.”
놀라서 자빠졌을 정도지.
“그런데 형님이 왜 화를 내셨어요? 설마 붙들고 넘어지셨어요?”
“미쳤어요. 그랬다간 내 손목이 이렇게 움직일 수 있었겠어요!”
저번에 복도에서 한번 넘어지면서, 그 인간의 손을 무심코 움켜잡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 됐냐고? 하하하, 내 손목을 잡고 그대로 업어치기를 했는데 땅에 떨어지기 몇 초 전에 내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 ……아무튼 그 인간은 이래저래 정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집 복도는 너무도 미끄럽고.
“어라? 그러면 왜 화를 내셨지.”
“왜긴요. 불알이 짝불알인 게 분명해요! 형님 뭔가 짝이 안 맞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크하하핫! 짝궁뎅이라니까.”
“이 사람들이 진짜! 관표 형님 한마디 좀 해 주세요!”
버럭 화를 내며 관표 형님을 돌아보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겉보기에 후자는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전자?”
“형님!”
“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핫.”
“웃지 말라고요!”
어째서 국도해의 비정상성에에서 내 신체의 불균형에 대한 주제로 흘러 버린 것일까.
“밤에 웃음소리가 너무 크군.”
“아, 도해 형님.”
“정리는 다 하셨나요?”
“그래.”
“이거 드시지요.”
관표 형님이 준비해 온 접시를 내밀었다. 전용 숟가락으로 화채를 떠먹는 옆모습을 보니, 아까 그 말대로 성격만 아니면 최고의 인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꺼풀이 없는 왼쪽 눈도 아몬드 형으로 길게 모양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수박을 먹고 있는 입술도, 독설만 퍼붓지 않는다면 정말 괜찮을 텐데.
“어라? 웬 똥개?”
멧돼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 커다란 똥개가 코를 킁킁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윗집 복구네요. 문을 열어 놓으니까 도둑도 들어오고 개도 들어오죠. 복구야, 이리 와 봐. 쭈쭈.”
손을 들어 부르는 소리를 하자, 마당을 둘러보던 복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너 여기는 왜 왔냐. 이 집 주인들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데. 잡아먹힌다. 잡아먹혀.”
“나 개 안 먹거든!”
꼬마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복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들어오면 안 된다, 복구야. 특히…….”
저 사람을 조심해야 해, 라고 말하려던 상대가 손을 뻗어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관표, 가서 저녁때 먹다 남은 고기 좀 가져와라.”
“네, 형님.”
“자, 잠깐.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개잖아요!”
“그런데.”
개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지 않고, 그가 대답했다.
“지금 당신 개를 만지고 있다고요! 개! 어디를 뒹굴었을지 모르는 개! 똥개!”
“그래서?”
“하……핫.”
기가 막혀.
관표 형님이 그릇에 고깃조각을 담아 가져왔다. 국도해가 그것을 복구에게 내밀었다.
“먹어.”
짧은 명령형 어조였지만, 나에게 건넬 때보다 몇 배나 친절한 목소리였다.
“원래 형님 동물은 좋아하셔.”
박건우가 내 옷깃을 잡아끌면서,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내가, 이 내가 저 똥개 새끼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인가!
“있잖아요, 국도해 씨.”
“왜.”
“저기, 저기 있는 개하고 저하고 둘 중 누가 더 더럽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질문은 왜 하는데.”
“궁금해서 합니다! 궁금해서! 궁금하면 잠이 안 오는 인간이라서 그러니까 제발 좀 대답 좀 해 주시죠!”
마루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깨를 흔들며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 한봉……아니 한준이 윗집 똥개 복구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글쎄, 굳이 만지기 곤란한 상대를 고르자면.”
그가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을 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
……나를.
“뭐라고?”
“특별 활동이요. CA. 공부만 하다 보면 인성 교육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미쳤어? 다 늙어서 무슨 인성 교육!”
“교육은 원래 평생에 걸쳐서 하는 거라고요. 특히 인성 교육은 더더욱.”
눈을 부릅뜨면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상석에 앉은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며칠간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지만 내가 복구보다 못한 점은 한 가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복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저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앞으로 매일매일 이걸 해야 한다는 거야?”
“아니요. 일주일에 한 번이요. 일주일에 한 번만 세 시간 동안 한다는 거죠.”
“……세 시간씩이나.”
공부라면 치를 떠는 김유수가 오만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토요일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이라고 할 수 있지요.”
“대체 뭘 할 건데!”
“아, 진짜 골 때린다 아이가.”
뭔가 새로운 과목을 시작한다니까 다들 부담감을 느끼는지 투덜거렸다.
“도해 형님, 진짜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심한 말투로, 그가 대답했다. 저 정도 대답이면 허락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모두 투덜거리면서도 수긍했다.
“세 시간 동안 무슨 공부를 할 건데? 국어 빼면 다 좋아.”
“……물리 같은 거면 좋겠네.”
“수학만 아니면 괜찮을지도.”
“양키 말도 싫다 안카나.”
대체 그것들을 빼면 무슨 과목이 남는다는 건데.
“그런 건 안 해요. 오늘은 야외 학습을 갈 겁니다.”
“야외 학습? 그기 뭔데?”
“형님도. 무식하긴. 밖에서 텐트 치고 공부한다는 거 아닙니까. 젠장, 이렇게 더운 날 무슨 놈의 텐트를 치고 공부를 하냐.”
“성새민 씨는 오답입니다. 말 그대로 밖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므로, 호수 근처로 나가서 자연을 통해 직접 지식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어? 그러면 담배 피워도 되겠네?”
두목 다음으로 이 집에서 골초의 계보를 잇는 꼬마 놈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뭐, 상관없죠.”
“아싸! 나는 야외 학습 찬성!”
단순한 녀석.
“음. 그럼 돌아다니면서 공부하는 건가?”
다리가 길어 앉아 있는 자체를 괴로워하는, 박건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돌아다니시다 다리 아프면 앉으셔도 되고요.”
“대찬성.”
역시 두 번째로 단순한 인간이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졸리면 자도 되나?”
잠이 많아 수업 시간마다 꾸벅꾸벅 졸다 두목의 호통을 몇 번이나 받은 전적이 있는 지용재가 물었다.
“공부를 하다가 졸리면 그것도 괜찮겠네요.”
“무조건 찬성.”
“낚시해도 되냐?”
낚시광인 성새민이 방구석에 세워 둔 낚싯대를 흘깃 보며 물었다.
“예, 좋아요.”
“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가 외쳤다.
모두 찬성표를 던졌지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관문이 남아 있었다. 영어 책을 읽던 국도해가 천천히 얼굴을 들면서,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호수는 깨끗하겠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준비해라.”
모두 만세를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관표 형님은 점심을 준비하는 대로 따라오겠다고 했다. 집을 나서는 모두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 역시 어제 집에 가자마자 세운 계획들을 떠올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름하여 「국도해 터치 미! 예 베이베」.
프로젝트 명이 야리꾸리하긴 하지만, 계획 자체가 원색적이고 유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1. 일주일에 한 번, 집안이나 집 밖에서 간단한 놀이를 한다. 간단한 놀이를 통해 사람들(특히 나!)과의 접촉을 늘린다.
2. 놀이를 거부하면 위급한 상황을 연기한다. 예를 들면 둘만 남아 있을 때, 맹장인 척한다거나,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척하기 등등.
3. 사소한 접촉을 거듭하다 보면, 인간에 대한(특히 나!) 거부감이 줄어들 테고 그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학습을 통해 나 한준이 복구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 아름다운 계획이란 말이냐! 뜨거운 감동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슨 꿍꿍이지.”
“네?”
“너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인 그가 살짝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목소리 때문일까? 더운 여름임에도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가 차가운 입김처럼 보였다.
“꿍꿍이라니요. 그냥 공부만 하다 보면 답답하실 것 같아서요.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시간은 효율성을 위해 좋거든요. 저도 고3 공부할 때 주말에는 항상 푸욱 쉬었어요.”
거짓말. 말에 색을 칠할 수 있다면 방금 전 내 말에는 눈이 아플 정도의 새빨간 색을 칠해야만 한다. 나의 허영을 채워 주기 위한 대학을 가기 위해, 나는 고등학교 시절 삼 년 내내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입가가 풀어져 있잖아.”
“입가요?”
손으로 입매를 만지면서 물었지만,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원래 입술 끝이 고양이처럼 올라가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한걸.”
“네에에?”
거울이라도 있으면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항상 그렇던데. 심술이 나서 숙제를 왕창 내 주기 직전이나 쪽지시험을 보기 직전. 그런 얼굴을 하더군.”
“그, 그런가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정말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거야? 심술 난 고양이처럼 웃고 있다고?
“잠깐.”
그가 뭔가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나를 멈춰 세웠다.
“네?”
손에 든 담배를 입으로 옮긴 그가, 내 목으로 큰 손을 뻗었다.
목 졸린다!
일순 떠오른 생각에 그대로 숨을 삼킨 채, 굳어 버렸다.
“채우고 다녀.”
하지만 그의 손이 한 행동이라고는, 내 옷의 단추를 채운 것뿐이었다.
“덥단 말이에요.”
단추 하나를 풀어내며 대답하자 그가 살벌한 눈빛을 하고 다시 단추를 채워 주었다.
“단추는 채우라고 있는 것이지, 풀라고 있는 게 아니다.”
“문은 나갈 때도 쓰이고, 들어갈 때도 쓰이잖아요. 모든 물체에는 양면성이 있는 거라고요. 단추도, 아얏!”
뒤에서 누군가 자그마한 돌을 집어던져 등판에 맞추었다. 돌아보니 성새민이 손으로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단추는 뭐.”
“……채우라고 있는 거죠.”
힘없는 목소리로 비굴한 대답을 택하고 말았다.
목까지 꽉 채워져 답답한 셔츠 깃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시골길을 터덜터덜 걸어갔다. 옆에서 반듯하게 걷는 국도해를 보며, 이 인간의 발자취를 그리면 정확한 직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어디로 갈 건데?”
“조금만 더 올라가면, 시원하고 좋은 곳 있어요.”
호수의 안쪽을 떠올리며 말했다. 시커먼 양복을 입은 무리들과 수건돌리기나 술래잡기를 하는 모습을 동네 사람들에게 들켰다간, 나의 고귀한 이미지에 금이 쩌적 갈 터. 반드시 인적이 드문 곳이 필요하다.
더운 여름날에 행군을 시킨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숲의 안쪽에 다다르자 반색하며 좋아했다.
“오오오오, 여기 좋은데!”
“그러게. 물도 깨끗하고 시원하네!”
“역시 이놈아가 여기 오래 살았다고 티를 내네, 크하하핫.”
모두들 시원한 그늘에서 웃고 있었지만 국도해만이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뭐할 건데.”
“수건돌리기 할까요?”
“…….”
“…….”
“…….”
“……장난하냐.”
호응이 기대보다 미약하군.
“그럼 말뚝박기?”
“간다.”
국도해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노,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요! 기다리세요!”
차마 팔을 잡지는 못하고, 앞으로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 제지하며 외쳤다.
“그러면 뭘 할 건데.”
“아, 그게, 그거요.”
수건돌리기를 하다가 벌칙 놀이. 분위기가 좋아지면 말뚝박기 이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세운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첫 단계부터 퇴짜를 받아서 차마 세 번째 단계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겠다.
“뭐할라꼬.”
“뭐할 건데.”
“빨리 말해. 심심해!”
“천천히 말해. 뭐할 건지만.”
다들 눈을 빛내며, 나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러면 일단 자, 자유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럼 난 낚시나 해야겠다.”
“이럴 거면 집에서 쉬지, 뭐할라꼬 나왔노.”
“잠이나 자야지.”
“그럼 난 사격 연습을.”
모두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을 보며, 국도해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시간 낭비하는 현장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내가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기 전에는, 시간 낭비는 필수 요소이다.
“언제까지 자유 시간?”
“글……쎄요.”
“간다.”
“아, 안 돼요!”
필사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려 외쳤다.
“이번 시간에는 반드시 국도해 씨가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고요!”
“…….”
끄악! 내가 미쳤지. 이 인간의 팔뚝을 맨손으로 잡아 버리다니.
“죄, 죄송해요. 닦아 드리겠습니다.”
재빨리 옷으로 그의 팔을 슥슥 닦아 주면서, 연신 고개를 꾸벅거렸다.
“일부러 잡은 거 아닙니다. 절대로 일부러 분노하시라고 잡거나 한 거 아닙니다. 아니니까, 아니니까…….”
“아니니까?”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국도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난다고 느낀 것은 나의 착각인가?
“……하지 마세요.”
울먹거리는 나의 눈은 호수로 향해 있었다.
“큭―.”
호수가 반짝, 하늘은 말끔, 태양은 쨍쨍, 국도해는 크큭.
크으으으윽!?!
두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보았지만 아까 전과 다름없는 입술의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대체 뭘 할 건지 궁금해지는군.”
웃고 있잖아!
동네 사람들! 여기 보세요! 얼굴 근육이 철로 만들어졌을 게 분명하다는 제 가설을 깨고 국도해라는 인간이 웃고 있습니다!
일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 장면을 보여 주려고 했지만, 거짓말처럼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젠장, 하마터면 양치기 소년이 될 뻔했구먼.
“궁, 궁금하시죠. 그래요, 하하핫. 뭘 할까나, 안 궁금하면 그건 사람도 아니죠. 하하. 생명의 위험……흠흠, 아무튼 제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기대하세요. 기대하셔도 좋다고요!”
“그래. 그럼 기대하면서 기다릴 테니까, 빨리 생각해내 봐.”
“네, 빨리 생각……, 헉.”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인간은 지금 내 계획이 아까 그게 전부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자, 잠깐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든지.”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 숲 쪽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넓적한 바위 위에 앉으면서 왼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젠장, 괜히 시작했나.”
아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나는 복구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만다.
“뭐든 해 주겠어! 두고 보라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결심을 다졌다. 하지만 생각은 여전히 물컹물컹.
대체 뭘 해야 교육적이고, 인성에 도움이 되며, 그 인간의 개 같은 버릇을 고칠 수 있는 것일까. 심리학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이 경우에 어떤 이론을 접목시켜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벽증. 조폭. 그런데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선별적 결벽증. 합병증인 완벽주의.
……대체 약이 뭔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다가, 무언가 내 발밑을 따라 스륵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청솔모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놀이를 거부하면, 역시 위급 상황으로 가야 하는 건가. 하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국도해를 이곳으로 유인한 다음, 배가 아픈 시늉을 하자. 그러고 나서 등에 업히고…….
“응?”
다리 사이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으아아아아악!!”
조용한 숲에 비명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참고로 말하지만, 아직 나의 연기는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
“무슨 일이야!”
“뭐야! 왜 그래!”
“뭐꼬!”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 비명소리를 듣자마자, 우르르 달려왔다.
“컥!”
“야! 씨발! 그게 뭐야!”
“크아아아악!”
그 어떤 영화도 이것보다 끔찍한 장면을 연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나에게 닥친 소름 끼치는 비극을 목격하자마자 입을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빨리! 빨리 떼어 주세요! 뭐하고 있어! 크아악!”
“……왜 그게 거기를 물고 있어?”
“내가 알아! 내가 아냐고!”
“미치겠다, 씨발.”
“나는 더 미쳐! 더 미친다고 빨리! 빨리!”
쪽팔림? 부끄러움? 그런 단어는 지금 이 상황에서 존재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빨리! 빨리 어떻게 좀 해 줘! 해 달라고요!”
……뱀이 내 거시기를 물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구만이 강렬하게 춤출 뿐.
“아, 알았어.”
박건우가 주머니에서 은색 총신을 꺼내들었다.
“미쳤어! 지금 어딜 쏘려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이 상황에서도, 내 거시기에 대한 방어 본능은 투철했다.
“나, 못 믿어?”
박건우가 조금은 쓸쓸하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못 믿어부려! 못 믿는다고 이 닌장맞을 놈아!”
“또 사투리 쓰네?”
“그거이 중요하냐? 지금 그거이 중요하다냐! 빨리 이거 어떻게 하라고! 허엉―.”
사투리와 서울말을 섞어 가며 울며불며 소리쳤다.
몸을 파닥거릴수록 빌어먹을 뱀은 더욱더 힘을 줘서 내 거시기를 물어뜯는 것 같았다.
“에잇, 젠장!”
꼬마가 후다닥 달려와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쌔게 손을 놀려 뱀의 머리를 잡아채어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꼬마는 전철에서 알아주던 소매치기로 그 바닥에서 김유수라는 이름 모르면 전철을 타지 못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탕탕―――!
뱀을 정확히 겨누어서 박건우가 총을 쏘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독사 아이가? 이거 뭔 뱀인데?”
“일단 독을 빨아내야죠. 독사면 병원 가기 전에 죽는다고요!”
멧돼지가 콧김을 뿜으며 흥분해서 외친 말에 다리가 풀렸다.
“어라라. 야, 너 괜찮아?”
“몰라, 어지러워.”
독이 슬슬 퍼지기 시작한 것인가.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젠장, 독사인기가! 여 젤 가까운 병원이 차 타고 한 시간은 가야 한다고 안 그랬나? 그럼 독을 빨아내…….”
모두의 시선이 뱀이 죽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물어뜯은 부위에 머물렀다.
“……빨아내야 하는데…….”
“…….”
“…….”
“……입으로, 거길…….”
모두 말을 잇지 못했다.
“해요! 해야죠! 그럼 나 죽으라고?!”
지용재의 말대로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차를 타고 한 시간을 나가야 했다.
“험험.”
“……크흠.”
모두 필사적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이 인간들 나를 포기할 생각이다. 내 몸에 독이 퍼지기 일보 직전인데 모두 눈을 피하고 있다고!
“이봐, 노, 농담이지!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거 아니지?”
“그동안 고마웠다.”
멧돼지가 눈시울을 붉히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안 고마워해도 되거든!”
“잘 가라.”
꼬마가 이번에는 내 손을 꼬옥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딜 가라는 거야!”
“아직 키스도 안 했는데……. 너무 진도가 빠른 것 같아서…….”
박건우가 얼굴을 붉히고,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또 뭐라는 거야!”
“걱정 마라. 내가 기냥, 비석에 보석 박아줄끼다.”
굉장한 자비라도 베푸는 듯이, 지용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보석 박아 달래!”
“그놈아 마지막까지 까탈스럽긴. 그럼, 금으로 이름도 써 준다 안카나.”
“당신들 진짜 이럴 거야! 젠장! 내가 해! 내가 하면 되잖아!”
바지와 속옷을 한번에 훌렁 내리고 주저앉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 자위의 세계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을 테지.
“으윽, 젠장! 젠장!”
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까지 목을 숙여 보았지만, 빨아내기는 고사하고 입 끝조차 닿지 않았다.
“크흑. 젠장! 크허엉!”
요가를 못 배운 게 이리도 한스럽게 느껴질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건만.
굵은 눈물이 허벅지지 위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때였다.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국도해가 싸늘한 얼굴을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이게 뭣들 하는 짓이야!”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온다 해도, 저 모습보다는 무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
“왜 저게 저 상태로 있냐고 묻고 있다.”
그의 눈빛이 닿는 곳이 쫘자작 얼어 버릴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이 상황에서도 하고 있다니. 나는 정말 죽어도 싼 인생이란 말인가!
“배, 뱀에 물렸답니다.”
“뭐?”
국도해의 시선이, 총을 두 방이나 맞고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듯 꿈틀거리는 뱀의 잔해에 머물렀다.
“대체 그동안 너희들은 뭘 했던 건데!”
“……죄송합니다.”
“쓸모없는 것들.”
그가 차갑게 내뱉으며 나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굽혔다.
“어디를 물렸어. 독을 빨아내야 하잖아!”
“그게…….”
“……그것이…….”
“아, 저기…….”
“어딘지 확실히 말해라.”
불분명한 것을 싫어하는 국도해가, 단호한 목소리로 부위를 요구했다.
“거깁니다.”
“뭐?”
“……거기, 거깁니다.”
성새민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
그가 극도의 황당함을 담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바지를 벗고 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이 상황이 그제야 이해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나 거기에 뱀 물렸다! 니가 보태 줬냐! 보태 줬냐고! 나 죽으면 동네사람들이 그러겠지. 고추밭집 아들은 고추에 뱀 물려서 죽었다면서잉. 워메, 뭐 그런 것이 있당게! 흉측하네잉! 하면서. 그게 뭐야! 내가 그동안 쌓아 온 나의 완벽하고 멋진 이미지는 어떻게 되는데! 후손들이 비웃을 거라고! 이 무덤 주인은 거기에 뱀 물려서 죽었다고. 열라 웃기다고 할 거라고. 그게 뭐냐고. 허어어엉.”
“푸핫. 아, 미안해. 위급한 건 알겠는데 웃겨서…….”
“풉, 너는 왜 유언을 그렇게 웃기게……큭.”
모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웃음을 참아내기 바빴다.
“웃지들 말랑게! 웃음이 나오냐잉! 이 잡시랄 것들아!”
죽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내가 여태까지 쌓아 온 나의 엘레강스하고 스마트한 이미지는 빌어먹을 뱀 한 마리 때문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새까맣게 타는 내 속도 모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킥킥거리고 있는 조폭들을 보니 눈이 뒤집혔다. 내가 어쩌자고 이 숲 구석으로 기어와서, 라는 데까지 생각이 닿자 분노가 울컥 치솟았다.
“젠장, 나 뒈지기 전에 한마디 해야 쓰겄어! 너! 국도해. 그 따위로 살지 마라잉.”
역시 흥분하니 사투리가 나갔다.
“뭐?”
그의 반듯한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내가 복구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뭐가 있냐고! 복구는 만지면서 왜 내가 만지면 안 되는데? 내가 그 개새끼보다 못한 게 뭐가 있냐고!”
“……독이 퍼졌나 보군.”
“그래! 나 머리까지 독 퍼졌다. 독에 받친 소리니까 똑똑히 새겨들어. 인간이 싫다고? 인간들도 다 너 싫어해, 새끼야! 나도 내 거시기 물어뜯은 독사 새끼가 너보다 좋아. 알아? 너보다 좋다고!”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무서웠고, 화가 났을 뿐. 독사도, 복구도, 눈앞의 국도해도 모두 미웠다.
눈물이 다시 펑펑 쏟아졌다.
“미치겠군.”
그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중얼거렸다. 이미 미쳐 버린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목놓아 엉엉 울었다.
“다들 눈 돌려.”
“네?”
“눈 돌리라고! 못 들었어!”
“형님, 갑자기 무슨…….”
“이쪽으로 눈을 돌리는 놈은 흰자와 검은자를 분리시켜 주겠다.”
깔끔한 만큼 섬뜩한 협박이었다.
“눈 돌려!”
모두 후다닥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너도 감아.”
국도해가 울고 있는 나를 향해, 냉정하게 명령했다.
“네??”
“젠장.”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
그가 빨기 시작했다.
……목적어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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