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5장 (5/10)

5장

“흑……으흑…….”

“울지 마세요. 그래도 아무 일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아무 일?! 아무 일이 없다고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질렀다.

독을 제거한다는 명목 하에, 시퍼런 하늘 아래서 남자의 입으로 응응을 당한 나는 쇼크로 기절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일어나니 병원 치료까지 마쳐, 이 집으로 이송된 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시기를 문 뱀은 독이 없는 일반 뱀으로 판명되었고, 응급실에 실려 간 나는 간단한 상처 치료와 파상풍 주사만 맞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국도해의 믿기 힘든 그 행위는 완벽한 뻘짓이라는 얘기.

“어떻게 그게 아무 일도 아니에요! 하필이면 그 인간 입으로! 게다가!”

상황이 상황이지만, 건강한 대한의 건아가 타인의 입으로 그런 일을 당하는데 어떻게 반응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독을 빨아내는 도중에 발딱 세운 나를 바라보던 국도해의 표정은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너 그거 영광인 줄 알아!”

“영광은 얼어죽을!”

“형님 성격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냐? 형님은 오……거시기, 그거는커녕, 키스도 안 하시는 분이라고. 아마 이 얘기를 서울에 올라가서 하면, 아무도 안 믿을걸!”

“제가 그럴 줄 알고, 증거품으로 뱀을 잡아왔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박건우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너덜너덜해진 채 소주에 푸욱 담겨 있는 뱀술을 내밀었다.

“크하하하핫, 니 이건 또 언제 챙겨왔노?”

“그 술 아마, 한 잔에 백만 원씩 팔아도 팔릴 걸요.”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멧돼지가 손바닥을 비비며 뱀술을 바라보았다.

“안 돼요. 안 팔아요!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 거라고요.”

박건우가 보물이라도 끌어안는 듯 술통을 품에 가두며, 머리를 내저었다.

“버려! 그딴 거 내다 버리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모든 일의 원흉인 뱀을 가리켰다.

인간의 원죄를 도운 장본인이기도 하고, 악의 근원을 상징하는 뱀! 결국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빌어먹을 생명체! 크아아악. 저걸 그냥 산 채로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흐음, 한눈에 봐도 독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관표 형님이 뱀 머리를 보며 눈가를 설핏 좁혔다.

“네? 뭐라고요?”

“우리나라에 있는 독사는 살모사인데, 세 종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 세 종류 모두 머리가 삼각형이고요. 이 녀석은 머리가 둥글고요. 확실히 보이죠?”

“그……렇네요.”

눈물을 닦아내며, 들여다본 병 안에는 반쯤 날아간 둥근 머리의 뱀이 둥둥 떠다녔다.

“이상하군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냉철하신 형님이 그런 것도 알아채시지 못하다니.”

관표 형님이 이상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때 워낙 정신이 없었다카요. 저놈아가 뒈지삔다고 빽빽 울어싸는 바람에, 다들 정신이 백만 리 나갔었다카이.”

지용재가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대답했다.

“제가 언제 빽빽 울었어요!”

“우아, 너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니 고추 물은 뱀 새끼보다 도해 형님이 더 싫다고 꽥꽥 소리지르면서 울었잖아!”

“죽기 직전에 무슨 소리를 못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여 년 동안 쌓아 온 나의 스마트한 이미지를 배신하고, 뱀에게 고추가 물려 사망한 고추밭집 아들로 기억에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비극들을 상상하며 좌절했고, 절망했으며, 포효했다.

“그런데, 너 어쩔 거야. 살아 버렸잖아. 그것도 형님의 ……을 받아서!”

중요한 단어가 생략된 문장이 나의 가슴을 후벼팠다.

“크억!”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던졌던 말들이었다.

……이렇게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게 될 줄은 추호도 몰랐다 이 말이지.

“넌 이제 죽었다.”

“내 생각에도, 행님이 니 살린 건 다 행님 손으로 손수 죽이삘라고 그러신 걸끼다. 그냥 뒈져뿐지면 열받으시니까, 살리신 거다 안카나.”

“또, 이별인가요.”

박건우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이별은 얼어 죽을! 저리 가! 이 언어지진아야!”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아까부터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고 계신 관표 형님에게 물었다.

“그 사람 어디 있어요, 지금.”

“네? 누구 말씀이신가요.”

곡선을 그리고 있는 저 눈이 지금 내가 누구를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털어놓고 있다.

“국도해 씨요! 나 살린 사람!”

그리고, 조금 있으면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남자.

“욕실에서 양치하고 계십니다.”

어마어마한 그의 청결주의를 떠올리고, 왠지 그럴 거라는 예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를 찾아가서 아까 전 내가 한 말은, 쇼크에 의해 나도 모르게 나온 헛소리라고 설명을 해 줘야지.

뱀이 거시기를 물었다니! 얼마나 놀랍고도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 제가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겠어요, 라고 말하며 포인트는 커다란 눈망울에 맺힌 촉촉한 눈물 한 방울. 이 정도면, 내게 덧칠된 죽음의 검은색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을 테지. 아암, 그렇고말고!

“방 안쪽에 있는 욕실 말씀이죠?”

국도해가 사용하는 침실에 붙어 있는 전용 욕실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붕대가 감긴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활로를 확보하기 위한 나의 눈물겨운 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 선생님, 그런데 말입니다.”

“네?”

일어서려는 내 옷깃을 잡은, 관표 형님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세 시간째, 양치 중이십니다.”

다시 나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이런 문제는 꼭 그래프를 그려서 풀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일치되는 범위를 찾은 다음에 주어진 답을 대입시키면 됩니다.”

다행히 나는 살해당하지도, 잘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잠깐,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데.”

“어느 부분이요?”

철컥―――.

설명을 위해, 책상 위에서 몸을 살짝 굽히자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다.

“분명히 접근 금지라고 했다.”

“…….”

젠장 빌어먹을. 욕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다. 내가 무슨 사이코 스토커도 아니고, 반경 1미터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총을 겨누고 난리래! 오해하실까 봐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도 너 싫어! 그때 말했듯이 지금은 술병에 둥둥 떠다니는 그 뱀보다 네가 더 싫다고! 인간아!

내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몸을 뒤로 물리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난리가 났다. 아무래도 나 말고, 모두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 체크해서 책 던져 주세요.”

그가 잘 깎은 연필로 책에 살짝 표시를 해서, 내 앞으로 휙 하고 던져 주었다.

“미만과 이하는 다르니까, 여기는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헷갈리실 테니까, 아예 그림을 그리실 때 점선으로 표시하세요.”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의 진도를 봐 주기 시작했다.

학습에 있어서 심각한 장애를 보이는 김유수에게 미지수 엑스(x)를 이용한 일차방정식의 개념에 대한 설명을 10번째 반복하고 있을 때,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시선의 발원지를 바라보았지만, 국도해는 시선을 내리깔고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문제, 다 푸셨어요?”

“아직.”

저 인간 내 셔츠의 칼라 부근을 보면서 대답한다. 그 일이 있은 후 변한 두 번째 부분은, 국도해가 나하고는 죽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은 어디 가야 하니까 수업 일찍 끝내지, 선생.”

연필 끝을 질겅질겅 씹으며 문제를 풀고 있던 멧돼지가 말을 꺼냈다.

“어딜 가시는데요?”

“비밀인데, 크크.”

“……땡땡이치시는 건가요?”

“아니, 내가 허락한 거야. 그렇게 하도록 해.”

두목의 명령이라면, 이 집에서는 법이었다.

“알겠습니다.”

씁쓸하게 대답하며, 책을 덮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요. 질문 있으신 분.”

박건우가 손을 번쩍 들었지만 사뿐히 무시하면서, 책을 챙겨들었다.

“예, 없으시군요. 그럼 내일 뵙죠.”

“얼라라, 점심도 안 먹고 가? 점심 먹고 갈 시간은 있는데?”

“오늘 관표 형님이 칼국수 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먹고 가지.”

모두 의외라는 얼굴로 나를 말렸다.

“저희 집도 쌀 많습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외를 취소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사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없다는 부분에서 확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선생인데 이렇게 무시를 해도 되는 건가.

“먹고 가.”

차가운 목소리가 등뒤에 꽂혔다.

“집에 가면…….”

“먹고 가라고 했다.”

“……예.”

집에 가면 고추조림도 있고, 고추볶음도 있고, 고추무침도 있을 텐데.

식탁으로 걸어가니,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칼국수의 그윽한 냄새가 진동했다.

“칼국수 좋아하신다면서요. 많이 드세요.”

“예, 감사합니다.”

히죽 웃으면서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꼬마 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면박을 주었다.

“뭐야, 안 먹는다면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내 신조야.”

젓가락을 집어 들며 당당하게 변명해 주었다.

“먹고 모자라면 말해요.”

“감사합니다. 혹시 고추가 필요하다거나, 고춧가루가 필요하다거나, 고추장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양질의 고추로 보답할게요.”

“말씀만 들어도 감사해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관표 형님을 보면서, 삭막한 첫인상으로 이 사람에 대해 평가를 내렸던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대체 어쩌다가 이 길로 들어서고, 눈 밑의 상처는 무슨 일로 생겼을까.

“무슨 할 말 있어요?”

“네?”

“빤히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웃으면서 반찬을 나르며, 관표 형님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상처를 살짝 가리켰다.

커헉,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아, 아니. 그냥요. 궁금해서.”

식탁에 머리를 박아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그것이 말이다, 형님이 워쩌다 그런 게 생겼는가 하면은!”

남의 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지용재 씨가 재빨리 입을 열었지만, 식탁의 상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물컵을 세게 내려놓음으로써 그 입을 봉쇄했다.

“식사는 조용히.”

평소에는 왁자지껄해도, 별말 없이 잘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래. 웃기셔, 정말.

그 이후 누구도 식탁에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관표 형님을 향해 인사를 했다.

“잘 먹었습니다. 제가 설거지라도 할까요?”

“아니요. 제 일인데요 뭘.”

“그래도 항상 이렇게 신세만 지고 얻어먹는 것 같아서.”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예, 말씀만 하세요. 살인 청부, 마약 밀매 이런 것만 아니면 다 해 드릴게요.”

싱긋 웃으며 농담이라고 던졌는데, 분위기가 얼음장을 밀고 지나간 것처럼 싸늘했다.

“농담……인 거 아시죠?”

“하핫, 예. 내일 시간 있으세요?”

“내일이요? 네, 여기 안 오니까 아마도.”

남는 게 시간이겠지. 여기서 돈을 번다고 어머니나 아버지 둘 다 요즘에는 밭일을 하라고 종용하지 않으시니까 말이다.

“그럼 내일 이 집으로 와 주시겠어요?”

“네? 예에. 뭐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뻘쭘하게 대답을 하는 나의 눈에는 왜? 라는 물음표가 어렸다.

“내일 저희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깐 서울에 갔다 와야 하거든요.”

“다 가는 건가요?”

“네.”

오오,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집만 봐 드리면 되는 건가요?”

애당초 이 집을 설계할 때 문을 잠그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는 설명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집을 볼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도둑이라도 들면…….”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둑계에도 소문이 퍼져 이 집에 다시 도둑이 들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말이다.

“형님이 계시니까 상관없습니다.”

“아, 진짜 상관없겠네요. 형님이 계시……에엑?! 형님이요? 설마 국도해 씨?”

“예, 그런데요?”

사람 좋은 미소가, 끔찍하게 다가왔다.

“왜, 왜, 저 사람은 같이 서울로 안 가는데요? 저는 왜 또 이 집에 와야 하는데요?”

“첫 번째 질문에는 노코멘트이고, 두 번째 질문에는 형님의 점심과 저녁을 차려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밥을, 차리라고요?”

살짝 인상을 쓰며, 무표정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 국도해를 흘깃 바라보았다. 민간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외모는 묘한 비현실감을 주었다. 그 흔한 칼국수를 먹고 있는데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광고 촬영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긴 저런 인간이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 먹는 장면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는군.

“됐어. 그럴 필요 없어.”

“도해 형님. 부엌에서 조리하시는 거, 끔찍이 싫어하는 거 압니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 같은데 밥은 제대로 드셔야죠.”

“몇 시간 잠을 설친다고 해서 죽지는 않아.”

옆에 앉아 있던 꼬마가, 요즘 저 사람이 하루에 2시간 이상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안 됩니다. 어떻게 감히 형님 식사를 거르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 관표 형님만 남으시면 되잖아요.”

조심스럽게 제안해 보았지만, 감히 형님의 식사를 거르게 할 수 없다 말하던 그가 아까보다 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은, 제가 꼭 있어야 하는 자립니다.”

“다른 사람은요?”

“다른 사람들 모두.”

“……국도해 씨만 필요 없나요?”

겉으로 보기엔 제일 필요 있어 뵈는데…….

“사정이 있습니다.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관표 형님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아, 이러지 마세요. 알았어요. 제가 와서 밥 차릴 테니까 고개 드세요.”

“정말인가요?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죠.”

여전히 국도해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온다고 하면, 못 오게 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말끔히 뒤집혔다.

쳇, 밥은 굶기 싫다 이거냐?

“그럼 내일 부탁합니다. 반찬하고 밥은 모두 해 놓고 갈 테니, 차려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예, 그렇게 할게요.”

그런 수월한 일조차 자신의 손으로 하지 않는, 오만한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밥을 차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지 뭐.

“점심은 12시 30분. 저녁은 6시다.”

“네?”

“1분도 늦지 마.”

그날 처음으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따, 봉팔아. 안 일어나냐? 오늘 영화배우 씨 댁 안 가는 거여?”

어머니가 이불을 걷으며, 내 엉덩이를 철썩 내려쳤다. 이 동네에서 그 집은 고래집에서 어느 사이엔가 영화배우네 집으로 명칭이 바뀌어 있었다. 그 이유의 핵심에는 가끔 예의, 그 검은 양복을 차려입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국도해라는 인간이 있었다. 밭일을 하던 건넛집 택구네 아주머니는 담배를 피우면서 지나가는 국도해를 보고, 들고 있던 낫을 놓쳐 한동안 발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고 한다. 그 아주머니뿐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국도해라는 존재는 모일 때마다 화젯거리가 되었다.

과연 그 저주받은 성격을 알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자게 좀 내버려 두세요. 늦게 가도 돼요.”

아침잠이 많은 편인 내가, 오랜만에 맞이하는 달콤한 늦잠이었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어머니는 늘 그렇듯이 강경했다.

“그라서. 지금 몇 시인데 여태 자빠져 자는 거여? 후딱 일어나랑게!”

“좀 내버려두세요. 어제 늦게 잤단 말이에요.”

어젯밤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열대야였다. 태풍이 시작되려는지 바람 한 점조차 없는 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습기가 가득한 더위에는 맥을 못 추었다. 문을 열어 놓고 잤는데도, 새벽까지 땀을 흘리며 잠을 설쳤던 것이다.

“잔말 말구 어여 일어나 씻어. 옷이 그냥 땀으로 흠뻑 젖었당게.”

몸을 일으키기 전에는 잔소리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기분도 좋지 않고 머리도 아파 왔다.

“머리 아파요.”

“그라믄, 그러케 자빠져 잤는데 안 아프고 배겨? 후딱 일어나서 밥 먹고 씻쳐라.”

한숨을 푸욱 내쉬며 욕실로 걸어가다 몇 번이나 자리에 주저앉았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 같았다.

“낮술 먹었냐아?”

참을 드시러 오신 아버지가 나를 보며 던진 한마디였다.

“아니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괜찮아지겠죠.”

“그라겠지. 오늘 억수로 덥네.”

“씨언허게 냉수마찰 좀 하시요.”

“그라지.”

어렸을 적부터 느낀 것이지만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서, 아프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워메 그러냐잉? 하고 넘기시곤 하는 것이다.

한참 자리에 앉아 있다 비틀비틀 걸어 후줄근한 욕실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찬물을 뒤집어쓰면서도, 헛구역질이 나와 몇 번이나 변기를 부여잡아야 했는지 모른다.

샤워를 간신히 끝마치고 나오니 머슴밥처럼 밥을 퍼 놓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라지셨다.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양치를 한 다음 집을 나섰다. 그리 멀지 않은 그 거리가 오늘만큼 길게 느껴진 날이 없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힘들어서 가능하다면 앞으로 남겨진 수명 10년을 떼어 주고, 텔레포트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드디어 대문이 보이자 다리에 힘이 쭈욱 풀렸다.

안 돼, 꼭 가야만 해. 안 가면 내가 죽는다. 저 안으로 12시 30분까지 1초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만 해!

머릿속이 뜨겁게 엉켰다. 무슨 정신으로 대문까지 기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잠시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떠 보니 몸의 반을 대문에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국도해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하고 있는 거지.”

얼굴만큼 차가운 목소리.

뇌까지 녹아 버릴 것 같은 이 상태에서 저 목소리에 얼굴을 부비고 싶다는 괴상망측한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쓰러져 있어요.”

“왜.”

“더위, 먹은 것 같아요.”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한심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하자 싶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정확히……12시 30분에 쓰러졌어요. 이 앞에서.”

“그런 것 같군.”

그가 시계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몇……시예요?”

“33분.”

3분 늦어서 밖으로 나와 봤다는 얘기구나. 독한 인간 같으니.

하지만 오늘만큼은 저 인간의 독한 성격이 고마웠다. 안 그랬으면 나는 여기서 말라 비틀어져 죽어 갔을 테니까. 이제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국도해는 나를 지나쳐 안으로 쑤욱 들어가 버렸다.

“자, 잠깐만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짜내서 그를 불렀다.

“왜.”

살짝 고개만 돌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서는 관심이 터럭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 싫어하시는 것은 잘 알고 있는데, 살려 주셔야죠.”

“…….”

순간 국도해의 표정에 당황이 스쳐갔다. 정곡을 찔려서 아프신가.

“기다려.”

그 말만을 남기고 국도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철푸덕 누워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들의 숫자를 세고 있을 무렵, 그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설마 거기 위에 절 태우실 건 아니죠?”

“그럴 건데.”

무정하게 대답하며 그가 내 등을 잡아채 번쩍 들어, 리어카에 짐짝처럼 실었다. 난생처음 리어카에 실린 나는 그대로 집안까지 배달되어 마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려.”

“그럴 힘이 있으면, 이딴 거 안 탔죠.”

“하는 수 없지.”

그가 다시 내 어깨를 잡아 마루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어디 가서도 환자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분이 북받쳐 올랐다. 마루에 누워, 한참을 씩씩거리고 있는데 차가운 무언가가 내 이마 위에 얹어졌다.

“――――?”

“누르고 있어.”

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셔 온 그가, 옆에 앉으며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수건을 이마 위에 대니, 아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이 가시자, 그제야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괜찮은가 보군.”

“예, 덕분에.”

“설마, 무슨 병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설핏 인상을 쓰며 물었다.

저 망할 인간. 사람이 쓰러졌는데 고작 묻는다는 것이 그런 거냐? 왜? 설마 전염병이라도 걸렸을까 봐! 캬악.

“아니요. 그냥 더위를 먹은 것뿐입니다.”

수건을 끌어다 눈을 다시 덮으며 대답했다.

“더위를 먹은 것만으로도 쓰러지나?”

그가 다시 내 수건을 위로 끌어올려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라 했으면서, 그 일이 있은 후 제대로 한 번 눈도 안 마주치던 인간이었다. 어쩐 일이지? 밥을 제시간에 안 먹어서 혹시 뇌가 고장났나?

“원래 더위에는 약해요.”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를 풀며 대답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도해가 곧 다시 엄격한 손놀림으로 단추를 채워 버렸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단추 채우기.”

“저 지금 더위 먹어서 쓰러진 사람입니다. 응급 처치를 할 때 환자의 옷을 편안하고 느슨하게 해 준다가 제1순위라고요.”

“입 놀리는 거 보면, 환자 같지도 않은데.”

“환자예요.”

다시 단추를 풀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한 개 더 풀어서, 아예 셔츠 자락을 젖혀 버렸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면서, 내 옷깃을 그러잡았다.

“단추, 잠그라고 말했다.”

단추를 풀어 놓은 것이 무슨 죽을죄를 진 죄인 취급을 하며 그가 다시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포기를 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자 그가 두 번째까지 채운 후 입을 열었다.

“하나는 남겨두지.”

“예,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

단추 하나 내 마음대로 못하는 인생아. 대체 왜 사냐, 왜 살아.

머리 위 수건을 펼쳐서 얼굴을 감쌌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 뜻대로 되진 않았다. 바로 그가 수건을 걷어 버렸다.

“숨막힐 텐데.”

“…….”

저 얼굴을 보다 혈압이 올라 죽으나, 물에 젖은 수건을 코에 대고 숨이 막혀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이지만.

“좀 누워 있어. 불편한 곳 없나?”

“친절하시네요.”

무섭게 말이야.

“환자니까.”

이제야 받아 보는 합당한 환자 취급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목이……마르네요.”

“그래.”

그가 곧 생수에 얼음까지 띄워 가져왔다. 몸을 바로 세우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비척거리고 있으니 뜻밖에 그가 자신의 팔로 나를 지탱해 주었다.

“―――!”

“마셔.”

“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물기가 스며들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꼴딱꼴딱 마시고 나니, 어지러움이 가셨다.

“이제 좀 어때?”

“괜찮아요.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은 것만 빼면.”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구겨졌다. 그만큼 방금 전 나의 대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증이겠지.

“토할 것 같으면 말해라.”

언제나 양복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총의 홀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만약 이 인간 앞에서 토했다간 바로 총살이겠구나. 누워 있는 게 불편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니 말도 하지 않았는데 뒤통수에 쿠션이 받쳐졌다.

“감사합니다. 저기, 밥 아직 안 드셨죠?”

“그렇지.”

“조금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차려 드릴게요.”

“됐어.”

그가 손목시계를 흘깃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차가워 보이는 은색의 메탈이 그의 성품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니요. 조금만 누워 입으면 괜찮아져요. 관표 형님도 부탁하고 가셨고…….”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관표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건가?”

“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됐다고 하면 된 거니까.”

“예에. 뭐, 그러시면.”

우물쭈물 대답하며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그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다시 찾아든 정적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죄송해요.”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내 쪽이었다.

“뭐가.”

“괜히 더위나 먹어서 폐만 끼치고. 밥도 못 드시고.”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열린 창으로 대나무향이 나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왔다. 셔츠 자락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언제나 긴장과 완벽함으로 꽉 조여진 그의 주변 공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아아, 더위를 과식했구나. 이젠 헛것도 보이고.

부드러운 바람이 내가 누워 있는 자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더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잠을 채워 놓았다. 몇 번 눈을 감았다 떠 보았지만, 조금씩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누군가가 내 이마를 만지는 것 같아 눈을 뜨고 싶었지만, 이 안에서 그럴 만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뜬 것은 해가 저물고 나서 한참이 지나고 난 후였다.

“왜.”

무뚝뚝한 물음이 들려왔다.

“저기, 제 생각에는 그렇게 정확하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5분 동안 소금의 양을 맞추고 있는 국도해를 보며 말했다.

“반 티스푼. 그렇게 써 있잖아.”

국도해가 요리책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요리책에 써 있는 것은 대충 그 정도로 넣으라는 거죠. 기호에 따라 조미료의 양은 조금씩 변하는 거잖아요. 뭐든지 기준에 맞춰 살 필요는 없어요.”

“난 있다고 생각하는데.”

“…….”

잠에서 깨어나 보니, 국도해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내가 아직도 꿈을 꾸는 줄 알고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 봤다.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시퍼런 식칼을 들어 보임으로써,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고는 한 시간이 넘게 본 요리가 아닌 요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지경이었지만, 차마 식칼을 옆에 두고 있는 국도해를 재촉할 용기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반 티스푼이 계량되었는지, 버섯 위에 골고루 뿌린 그가 이번에는 요리책의 다음 줄을 읽어 내려갔다.

“청양고추 조금?”

“예, 조금이요.”

무성의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그는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책장을 휘리릭 넘겼다.

“왜요? 또 뭐가 문제인데요.”

“조금에 대한 기준이 이 책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군.”

“네?”

“전화기.”

“네?”

“전화기 달라고.”

엉겁결에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뭐하시는 건가요?”

“보시다시피.”

“어디에 전화를 거시는 건데요?”

“출판사.”

“네!?!”

전화가 연결되었는지, 그가 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문의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예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이 남자 발음이 아나운서보다 더 정확하다. 저 확실한 발음과 저음으로 협박이라도 듣는다면,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말 것이다.

“지금 장난하시는 겁니까. 조금에 대한 기준을 모른다니.”

그래. 저렇게 말이다.

“3분 후에 다시 전화 드리죠. 그때까지 책에 적힌 조금에 대한 기준을 설명하실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시에는.”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찾아가겠습니다.”

별것 아닌 서술어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들다니. 브라보. 무서운 놈.

잔인한 통보를 마친 그가 핸드폰을 도로 내게 내밀었다.

“왜 그런 표정이지.”

“아니요. 삼 분 후에 좋은 대답이 있었으면 해서요.”

불쌍한 출판사. 어쩌다 저 책이 이 인간 손에 들어가게 돼서 그런 불운을 겪는지.

정확히 3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건 그는, 얇게 저민 청양고추를 정확히 일곱 조각 넣어야 한다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냈다. 그 후 그는 기계처럼 정확히 계량하여 한 시간 가량에 걸쳐 버섯볶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 관표 형님이 끓여 놓고 가신 국과 반찬들을 데워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그가 나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멀쩡해요.”

이런 취급을 받는 게 황송하다 못해 무서울 만큼, 멀쩡해지고 있다.

“잘됐군.”

그가 밥을 퍼서 넘기면서,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중얼거리듯 인사하며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오로지 밥을 씹는 소리와 숟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식탁 주위를 맴돌았다.

“맛이 없나?”

“아, 아니요. 맛있어요.”

“그런데 젓가락도 갖다 대지 않는군.”

그가 자신이 만든, 버섯 요리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먹을게요. 먹을……, 쿨럭.”

허겁지겁 버섯과 밥을 입 안에 쑤셔 넣다가 사레들리고 말았다. 밥풀을 뱉어내지 않게 필사적으로 참으며 주먹으로 가슴을 퉁퉁 두드리고 있자 그가 물컵을 내밀었다.

“쿨럭, 가, 감사합니다.”

물을 꿀꺽꿀꺽 삼키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억지로 먹으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예.”

저 인간한테 그런 말 듣고 억지로 안 먹을 인간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봐라.

사레들려 밥풀이라도 뱉어냈다간 내 묏자리가 될 식탁에서, 조용히 식사를 끝냈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말을 꺼냈지만, 단호하게 기각되었다.

“됐어. 담가 두기만 해.”

“그래도…….”

“담가 두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에 밥그릇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만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잠깐.”

“네?”

그가 식사를 마쳤는지 밥그릇을 설거지통에 담가 두고 나를 따라나섰다.

“나가지.”

“네?”

“데려다 줄 테니까.”

“…….”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와 마주하니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제가, 무슨 잘못했나요?”

머리를 데굴데굴 굴린 결과 얻어낸 최고의 결론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요. 왜 이렇게 갑자기 잘해 주시나 해서.”

“글쎄.”

그가 장식장에 놓여 있는 담배 케이스를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환자니까, 정도로 해 두지.”

“……예.”

나에게도 그게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국도해가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친절을 베풀다니. 새삼, 소름이 돋는군.

내가 운동화를 신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가 천천히 보조를 맞춰 걸었다.

여기저기서 우는 풀벌레 소리가 신경 쓰여 자꾸 걸음이 꼬이는 것만 같았다.

“쌍꺼풀 말이에요.”

“―――?”

무슨 얘기라도 꺼내야겠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짝짝이면 바람둥이라던데.”

그의 눈을 가리키며 어색하지만, 필사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왜?”

“쌍꺼풀을 좋아하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 둘 다 만족시킬 수 있잖아요.”

“너는? 없는 쪽, 아니면 있는 쪽.”

“그, 글쎄요. 없는 쪽이 괜찮은 것 같은데. 시원해 보이니까 앗…….”

갑자기 그가 내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왼쪽에 서게 했다. 쌍꺼풀이 없는 쪽이었다. 국도해의 손이 닿은 팔목이 이상하게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사람한테 닿는 거 싫다면서요.”

그가 잡았던 손목을 문지르며 물었다.

“내가 원해서 닿는 건 상관없어.”

원해서, 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이기적인 버릇이네요.”

“알고 있어.”

담배 연기와 미소.

아마도 여자들은 이 남자의 사악해 보이는 저 미소에 꼼짝 못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와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이다. 사악함에 우아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처음 깨달았다.

최초의 악마가 타락천사였다는 성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그의 옆모습을 다시 한 번 훔쳐보았다. 미간에서부터 이어지는 콧날이 절제된 선을 이루고 있어 한층 더 날카로워 보였다.

“뭘 그렇게 봐.”

“네?”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는 건 실례라는 것도 모르나?”

“아, 죄송해요.”

그 성격이 슬슬 발휘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무례를 저지르는 건 저쪽이 되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궁금해서.”

“뭐가요?”

“네 얼굴.”

“네?”

걸음을 우뚝 멈추고, 이 남자 머리가 진짜 어떻게 된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잘해 주는 것도 이상한데, 갑자기 매일 보는 내 얼굴이 궁금하다니? 설마…….

“알츠하이머라고 아세요?”

“잘 알고 있는데.”

두 번째 담배를 피우기 위해, 그가 주머니에 있는 케이스를 꺼내며 대답했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권총 홀스터가 나의 심장에 각인되었다.

“그, 그냥 물어본 거예요. 다른 뜻 없는 거 아시죠? 아하하핫, 아실 거라고 믿어요. 믿습니다, 하하핫.”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고개를 돌려 제기랄을 중얼거렸다. 이럴 때마다 난 내 입을 재봉틀로 박아 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옥수수밭 옆을 지나, 우리집이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섰을 때 윗집 복구가 꼬리를 흔들며 나타났다. 망설이지 않고 손을 내밀어 복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국도해를 복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 개가 저보다 편하세요?”

“뭐?”

“그 개를 만지는 것이 저를 만지는 것보다 편하다고 하셨잖아요.”

그가 자신이 만지고 있는 개와 나를 한 번씩 훑어보고는, 픽 하고 웃어 버렸다. 요즘 따라 저 인간이 자주 픽픽 웃는단 말이지. 더위를 드셨나?

“왜 웃으세요. 중요하다고요.”

“뭐가 중요한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데 신경이 안 쓰이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저 복구 새끼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요. 복구도 수놈, 나도 수놈. 복구 새끼가 영리해서 말귀 잘 알아듣는다고 동네에 소문은 자자해도 나보다 공부 잘하나요? 게다가 얼굴도 내가 더 예쁘잖아!”

버럭 외쳐 놓고,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습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개와 외모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복구의 턱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본 후, 대답했다. 혀를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는 복구를 뻥 하고 걷어차고 싶다는 유치한 생각까지 했다.

“그래서! 내가 그 똥개보다 못하다는 겁니까!”

“아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예상외로 너무나 깔끔하게 대답해 줘서, 오히려 분노한 내 쪽이 뻘쭘해졌다.

“뭐, 그러시다면. 흠흠, 밤에는 참 시원하네.”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게 빛나는 별들이 모두 나를 보고 비웃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그가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선생.”

“네?”

“답이 안 나오는 문제가 하나 있어.”

사시사철 이십사 시간 칼날처럼 단호한 그의 표정에, 무거운 고민의 흔적이 머물렀다.

“네? 어떤 문제요?”

아니,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려고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

“물어봐도 될까.”

“네, 당연하죠. 제가 아는 것은 물론이고, 모르는 것도 답을 내 드릴게요.”

그래. 기분이다. 오늘 이 인간한테 생각지도 못한 친절과 식사까지 대접받았으니까 이 정도 봉사는 해 줘야지? 게다가 명색이 월 250 받고 일하는 선생인데 대답 못 하면 개쪽이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묻지.”

그가 살짝 눈을 내리감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귓속말이라도 하려나 했던 내 생각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박살났다.

“―――!”

예상하지 못했던 입술이 나에게로 부딪히듯 다가와 키스를 시도했다. 놀라서 뒷걸음치려는 내 허리까지 꽈악 끌어안고 그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입안까지 침범해 왔다. 입으로 들어온 혀가 탐욕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조금씩 뒤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싹 끌어안은 단단한 그의 팔 때문에, 넘어지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온몸의 모든 감각이 입술로 몰린 것처럼, 키스가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나를 끌어안은 몸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끌어안겼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숨을 몰아쉬며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외치려고 했지만 다시 저지당하고 말았다. 아까보다 한층 더 격렬한 기세로 입술을 물어뜯는 남자의 기세에 놀라,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국도해가 내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오른손으로 목과 머리 뒤를 잡아채듯 쥐고 입을 맞추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는 나를 쥔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하얀 치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져 나갔지만 국도해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혀를 움직였다.

“자, 잠깐……읏!”

간신히 입을 떼어냈다.

이대로 먹혀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당혹, 머릿속에 열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에 머리가 흔들렸다.

오만가지 생각에 익사당할 것만 같았다.

겹친 가슴을 통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격한 울림에 내 몸의 피도 뒤죽박죽 들끓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각도를 바꿔 입을 맞추던 남자가 큼직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다리 끝부터 찌르르한 감각이 전해져 올라왔다.

“무, 무슨……큭!”

입을 열려고만 하면, 사정없이 입술을 깨물어 온다. 약간의 틈도 내주지 않는 맹수의 사나운 본능이 그대로 전해졌다.

몇 분, 혹은 몇십 분인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는 처음 허리를 굽혔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아……. 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항의했지만, 그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채 생각에 잠겼다.

화가 치밀었다. 피해자는 머리가 흔들릴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가해자는 잘난 머리를 기울여 생각에 잠기다니!

“장난이 심하잖아요!”

“누가 장난이라고 했지.”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의 밤길은 매우 어둡다. 도시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어두움으로 온 공간이 채색된다. 울퉁불퉁한 흙길 위에 흠뻑 뿌려진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차갑고 날카롭게 빛났다.

“자, 장난이 아니면 뭡니까. 대체!”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며, 아까보다는 줄어든 목소리로 물었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람하고 닿는 것이 싫다고, 상대방 손가락까지 잘라 버린 인간이 장난으로 누군가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키스할 리는 없으니까. 게다가 두 번째로 키스했을 때부터, 남자의 것은 반쯤 발기한 상태였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바싹 끌어안긴 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양복 사이로 느껴지는 뜨겁고 단단한 그것은 도저히 농담으로 넘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지나친 장난으로 치부하고 싶을 뿐이었다.

“역시 그렇군.”

“뭐, 뭐가 역시 그래요!”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버럭 소리질렀다.

“키스, 한다는 상상이 기분 나쁘지 않아서.”

“예에?”

“계속, 머릿속에 떠올라서 말이지.”

그가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살짝 누르며 말했다. 뭐야, 요즘 잠도 못 자면서 생각했던 게 설마 인간 한봉팔과의 키스 시뮬레이션이었냐!

“왜 그런 거지.”

“네?”

“왜 싫지 않은 건가?”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소매로 입술을 북북 닦아내며 대답했다. 이해가 안 가는 문제가 있다고 해서 질문하라고 했더니 누가 다짜고짜 입술을 들이대래!

“닦지 마.”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움켜쥐고 멈추게 하더니, 다시 허리를 굽혀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입술의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의 스칠 듯한 키스였다.

“역시 싫지 않잖아.”

“…….”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나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이유가 알고 싶은데.”

“저야말로……, 그런데요.”

천하의 국도해가 나에게 키스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면 내가 한준에서 다시 한봉팔로 개명을 하고 말겠다. 대체 이유가 뭔데!

“그렇다면.”

그가 다시 내 목을 끌어당겨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술을 갖다 대며 중얼거렸다.

“차차 알아 나가도록 하지.”

“윽!”

살을 빨아올린 후 세게 씹어 버리는 바람에 고통 어린 비명이 새어나갔다.

“그럼 이만.”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국도해의 뒷모습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날 넋이 나간 상태로 본능적으로 집으로 걸어온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냉정하게 상황 정리를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탐욕스럽게 내 입술을 집어삼키던 그의 키스와 허리를 안아 올렸던 단단한 팔의 감촉. 귓가에 맴도는 차갑고 습한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새벽닭이 울었다.

“봉팔아. 일어나 아침 묵고, 워메! 깜짝이야! 너 뭐하고 있다냐!”

아침에 나를 깨우기 위해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이불을 둘둘 말고 그 안에 동물처럼 웅크려 앉아 있던 나는 퀭한 눈을 뜨고 대답했다.

“지지리 궁상이다. 후딱 인나서 세수하고 밥 묵고 건너 집으로 가야제잉.”

“예, 그럴게요.”

한숨도 자지 못하고 고민한 결과 그 집에 오래 머물러 있다간 내 인생에 크나큰 스크래치가 생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얼마 전에 미리 받은 한 달치 수표는 되돌려 주기로 결심했다.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밀어내고 주춤주춤 책상 앞으로 기어가 책상의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김소월 시인의 시집에 곱게 껴 놓은 나의 사랑스러운 푸른색 수표야, 이제 안녕……크아아악!? 어디 갔어!

“젠장! 어디 갔지?!”

정확히 100페이지에 껴 놓은 수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나 하고 1페이지서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뒤져 보았지만 나의 사랑스러운 수표 님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수표의 부재를 깨닫는 순간 손이 벌벌 떨려 왔다. 허겁지겁 방문을 열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여기 있던 제 돈 못 보셨어요!?!”

쌀을 씻고 계시던 어머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봤제. 그이 뭐시다냐. 김소녀인가 뭐시깽이인가 하는 시집에 껴 있던 돈 말하는 거 아니여? 니놈아는 돈이건 연애 쪽지건 뭐 중요한 것이 있으면 거다 꿍쳐놓드라.”

“보셨어요?”

한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봤다뿐이냐.”

커다랗고 우악스러운 손으로 쌀을 북북 씻으며 씨익 웃는 어머니의 얼굴이 그때만큼 불길하게 느껴진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설마, 혹시나, 만의 하나 그 돈 쓰신 건 아니죠?”

“말도 말랑게. 내가 고마, 딱 곗돈 낼 순번이었는데 돈 들어올 게 딱 막혔뿐졌다는 거 아니냐. 근데 거기에 돈이 딱 우연히 5백만 원 있길래 갔다 썼지라잉.”

“뭐, 뭐라고요!”

“걱정 하덜 말어. 담달에 돈 들어올 거 있응게. 그때 주면 되지 안 그러냐.”

심장이 퍽하고, 짓이겨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요! 누구 맘대로 그 돈을 꺼내다 쓰셨어요! 저한테 말씀도 안 하시고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왜 함부로 남의 돈에 손을 대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경쾌하게 쌀을 씻던 어머니의 손이 뚝 하고 멈춰 버렸다.

“……으떤 돈인데?”

“네??!”

“으떤 돈인데 시방, 니가 나한테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소리를 질러싸냐! 잉! 이런 순잡놈의 새끼가!”

생쌀이 순식간에 얼굴로 날아들었다.

“으악! 그게 아니고요!”

“그게 아니고 뭐가 아니여! 시방 너를 이렇게 키워준 게 누긴데 그 지랄을 하능겨! 엉!”

“아니라니까요! 아이씨, 바가지는 왜 또 집어던지세요!”

“아이씨이? 씨 다음에 뭐할건디? 발할 거제! 발 하려고 했제! 잉!”

“누가 씨발이라고 했어요. 으악! 좀 그만하세요!”

대파로 맞아본 적 없는 사람은, 대파의 흉포함에 대해 논하지 말지어다.

“너 시방 씨발이라고 했능겨! 모가지를 따 버릴 시키! 너 그기 안 스냐!”

한번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어머니의 성격을 아는 나는 그대로 세수도 하지 못한 채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을 뛰쳐나왔다. 신궁들이 불행의 화살을 화살통에 가득 담아, 나를 과녁 삼아 사정없이 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아침에 5백만 원을 눈뜨고 삥 뜯긴 나는, 그대로 출근지로 향했다.

“너, 꼴이 그게 뭐냐.”

대문에서 차에 짐을 싣던 김유수가 나를 보자마자 오만상을 찡그리며 던진 한마디.

“남이사.”

“남이사건 나발이건 너 그러고 어슬렁거리다가 형님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죽기밖에 더하겠어.”

언젠가 옷에 김치 국물이 묻어 있는 채 출근했다가, 하루 종일 살얼음판 위에서 수업을 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헉, 선생님 왜 그런 꼬라지를 하고 왔어?”

어디선가 나타난 박건우가 입을 떡 벌리고 서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왜? 안 귀엽냐?”

5백만 원 뜯기고, 조폭 고용주에게 키스까지 당한 내 빌어먹을 운명.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바지를 양옆으로 쭈욱 펼쳐 보이며 물었다. 웃어넘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갑자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던 박건우가 귀까지 새빨개져서, 내 귓가에 속삭이듯 대답했다.

“귀여워, 최고야.”

그러고는 미친 거 아니냐고 외칠 새도 없이, 그는 정원을 가로질러 두다다다 달려 사라져 버렸다. 차 트렁크에 짐을 정리하고 있던 김유수와 나는 그 자리에서 동시에 굳어 버렸다.

“건우 형님이 요즘 이상해……졌어.”

“그래,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켰나 보다.”

앞으로 숙제의 양을 조금 줄여야 하나 생각하며, 반짝반짝 세차된 차를 바라보았다.

“니가 세차했지?”

“아니, 차는 용재 형님 담당이잖아.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닦아 놓으신 것 같던데.”

“크하하핫, 설마 내가 이렇게 손자국이라도 찍으면 나타나서…….”

“야! 저 문디 새끼! 손 안 떼나! 당장 손 떼라카이!”

거짓말처럼 등장한 지용재 씨가 달려와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으로 손자국을 닦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차에 손대 봐라. 우짜 되는지 내, 바로 보여 준다 안카나.”

“…….”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내게, 김유수가 들어가라는 눈짓했다. 손자국 정도로 저렇게 벌벌 떠는 인간이 내가 그날 돌을 차서 차에 맞추고 있었으니, 얼마나 열받았을까. 만약 그 자리에서 잡혔다면…….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그렇게 입고 다니세요. 감기 걸리겠어요.”

딱딱하고 퍼석하게 굳어 있던 마음에 따스한 물줄기 같은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 관표 형님. 안녕하세요.”

“어제 도해 형님과 식사는 잘 하셨어요?”

도해, 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새벽 내내 나를 괴롭히던 키스 장면이 펑 하고 터졌다.

“그, 그럼요. 잘했어요. 엄청 잘했습니다!”

……키스를.

“다행이네요. 그런데, 샤워하실래요?”

관표 형님이 약간 머뭇거리며 내게 물었다.

“네? 아하하, 샤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집 주인의 까다로운 성격을 고려하자면, 이렇게 돌아다니다가는 내 생명이 위험해진다. 아마 지금 내 꼬라지를 국도해가 본다면, 그대로 번쩍 들어 세탁기에 집어넣고 돌려 버릴지도 모른다.

“옷 갈아입는 곳은 아시죠? 거기 속옷하고 있으니까, 갈아입으세요. 세탁물은 바구니에 넣어 두시고.”

“……죄송해요.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

당신 형님한테 어제 갑자기 키스를 당해 이 일을 끝내려고 결심해서 돌려주려고 한 돈을 어머니께서 곗돈으로 써 버렸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가 말실수했다는 죄목으로 쫓겨났다, 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지금 보일러가 좀 문제가 있어서, 도해 형님 방 옆에 있는 욕실만 온수가 나오니까 그쪽을 쓰세요. 지금 시간이면 형님은 운동하고 계실 테니까.”

관표 형님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설마 지금 샤워하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겠죠?”

“형님 성격 아시잖아요.”

자를 대고 그은 직선처럼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국도해의 하루 일과표를 떠올리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나오세요. 아침 차려 드릴 테니까.”

“감사합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 콕을 열었다. 뜨거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나오는 우리집과는 달리 이 집은 기분 좋을 정도의 온수가 쏟아져 나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대로 샤워박스 안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중학교 때였던가. 반에 돌았던 포르노 잡지를 보고 돌아온 날, 머릿속에 떠오르는 끈적한 장면들 때문에 밤새도록 수음을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다음날 그곳이 부어올라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지만, 밤이 되자 머릿속에선 다시 그 장면들이 떠다니고 손은 자동적으로 바지 아래로 내려갔었지. 아마 며칠간은 계속 그랬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심하잖아.”

차가운 타일 벽에 이마를 갖다 대면서 중얼거렸다. 성적인 흥분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는 그 끈끈함의 강도가 포르노를 처음 본 그날보다 더 심했다. 국도해의 키스는 그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도대체 그 인간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욕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

“…….”

물론 그 누군가는, 이 욕실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국도해였다.

“일부러 벗으려고 벗은 거 아니에요! 어머니가 막 양파를 집어던지시고 그래서 뛰어오느라고 세수도 못했는데, 아무튼 제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요. 관표 형님이 다른 곳은 찬물만 나온다고 해서! 으아아악, 제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아, 자비를 구걸했다. 뭔가 어마어마한 사태가 발생하리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국도해는 무표정한 얼굴로 욕실로 들어와, 정리함에 가지런히 개어진 수건 하나를 꺼내들었을 뿐이었다.

“수건……가지러 오신 건가요?”

“그래.”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언젠가 꼬마놈이 말해 준, 본인의 수건이 아니면 손도 대지 않는다는 국도해의 괴팍한 버릇이 떠올랐다. 그가 욕실을 나가자마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천만다행이라는 문구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대로 여기서 있다간 내 명에 못 죽는다. 하지만 안도는 그리 길지 못했다. 다시 국도해가 벌컥 하고 문을 열고 무서운 기세로 들어와 넘어져 있는 나를 끌어안아 세웠다. 그러고는 또다시 내 입술을 물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입을 벌리지 않고 버티려다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물렸다.

“읍―――!”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오고, 벌어진 입으로 뜨거운 혀가 들어왔다. 격렬하고 거친 혀의 움직임과는 달리 키스를 하고 있는 장본인의 얼굴은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다. 입안의 깊숙한 부분과 치열 부분을 맛보듯이, 그는 빠짐없이 혀를 놀렸다.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맨몸이었기 때문에 어제의 키스보다 수십 배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몸을 뒤로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마다 힘의 우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압사당할 것 같다는 공포와 이대로 숨이 막혀 질식사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섞여 제정신이 아니었다. 턱을 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렀지만, 닦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허리를 가두고 있던 손이 조금씩 위로 올라와 갈비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소름끼칠 정도로 침착한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국도해가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미쳤다. 미친 것이다.

심지어 내 다리 사이로 자신의 다리를 밀어 넣고 비벼 올리기까지 하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 결벽증 환자가 남자의 입에 자신의 혀를 집어넣고 돌리고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손은 갈비뼈에서 내려가서 이제는 엉덩이 부근을 움켜쥐고 있잖아! 크악!

“크……윽. 무, 무슨 짓이야.”

입술이 목 부근으로 내려온 틈을 타서,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몰라서 묻는 건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 때문에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빗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뿐인데 그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키스하고 있잖아.”

습기가 가득한 욕실 안에서 울리는 저음이 다리 아래에서부터 전해져 온다는 착각이 들었다.

“누, 누가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대체 왜 이러는지 이유를 묻고 있잖아!”

꽉 물리는 바람에 아릿한 목 부근을 움켜잡은 채 노려보며 반말로 소리쳤다.

“이유는…….”

얼굴을 바싹 가까이 갖다 대며 그가 중얼거렸다. 유려한 턱선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톡 떨어지는 순간, 그의 입술이 내 귓가에 와 닿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 기억이 있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며 외쳤다.

“뭐가.”

어둠이 낮게 깔려 있는 눈동자가 물었다.

“이유도 모르면서, 키스를 하는 게 말이 돼요! 새, 생각을 좀 해 보시라고요!”

적신호가 머릿속에 들어온 것을 느끼고 재빨리 존댓말로 바꾸었다.

“생각이라.”

그가 내 앞에서 스윽, 물러서며 대답했다. 순순히 물러났다가도 갑자기 다가와 물어뜯는 야수 같은 남자였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선반에 놓인 수건을 꺼내 흠뻑 젖은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아 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생각을 하기 전에 행동이 먼저 나가는군.”

“…….”

불길하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것만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그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냉정한 눈동자조차 숨기지 못하는 강렬한 감정을 담고 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고 있는 물이 온수임에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수건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면서 욕실을 나갔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서 만든 100가지 가설 중 최고로 불길하고 좋지 않은 번호 44번에 붉은 불이 번쩍 들어왔다.

“안 되는데.”

눈을 질끈 감으며, 어제부터 거듭된 거친 키스로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어루만졌다.

욕실을 나가기 전 나를 바라보던 국도해의 눈에 가득 담겨 있던 그 무엇은, 남자라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수컷의 본능.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욕정이라고 불렀다.

가설 44번. 국도해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뭔 놈의 샤워를 그리 오래 하나?”

“때가 안 멈추잖아요.”

지저분한 핑계를 대면서 식탁에 앉았다.

“너 때문에 삼십 분도 넘게 기다렸잖아! 관표 형님이 몇 번이나 다시 국을 데워다 주셨는지 알아!”

꼬마가 신경질적으로 숟가락을 휘두르며, 나를 노려보았다.

“누가 기다려 달래?”

숟가락을 들며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성새민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대꾸했다.

“누구는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린 줄 알아! 도해 형님이……!”

“식탁에서는 조용히 식사하라고 누누이 말했다.”

국도해발 함구령이 내려졌다.

“먹자.”

그의 한마디에 모두 분주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흘깃,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30분 전 샤워실로 무단 침입해 나에게 막무가내로 키스를 퍼부으며, 사타구니를 비벼 대던 인물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뭘 봐.”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낀 국도해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귀신같은 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후다닥 시선을 거두고, 국을 퍼먹기 시작했다. 아까 샤워를 하며 찬물로 머리를 식히면서 차근차근 가설을 보강해 보았다.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도해가 지금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그의 말대로 아마 처음 이런 느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나게 좋은 그가 자신의 감정을 깨닫기까지는 시간문제였다. 상대가 감정을 눈치채기 전에 내 쪽에서 정리를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이 끔찍해질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아, 이제 그렇다면 정리를 슬슬 시작해 볼까.

꺼억, 트림을 하면서 크게 웃어 주었다.

“하하핫, 소화가 좀 안 되나 봐요. 끄윽―. 어휴 시원하다.”

모두의 손이 멈칫하고, 국도해의 눈치를 본다. 예상대로 그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우, 간지러워.”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왜 요즘에는 머리를 감아도 계속 간지럽지? 이나 벼룩이라도 옮았나?”

간지럽지도 않은 머리를 세게 긁어 대려니 고역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최고의 결벽증을 가진 남자의 마음을 나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이나 벼룩?”

국도해의 미간에 내천 자가 그려진다. 그래! 좋았어. 계속 이렇게 가는 거다.

“관표.”

“네, 형님.”

자리에 앉아 있던 관표 형님이 일어서며 대답했다.

“저번에 화단에 썼던 진드기 제거제, 남아 있지.”

“네, 있습니다.”

“가져와.”

“잠깐, 잠깐만요. 그걸 어디에 쓰려고요!”

“네 머리에 뿌리게.”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미쳤어요! 그걸 왜 내 머리에 뿌려! 이도 없고, 벼룩도 없어요! 그냥 한번 해 본 소리라고요! 사람이 농담도 못 알아들어요?”

내 머리에 농약을 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필사적으로 말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까요.”

관표 형님이 물었다.

“앉아.”

“알겠습니다.”

이 집에서는 국도해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관표 형님 같은 경우는 평소에는 그렇게 온화하고 이성적인데도 그의 말에는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다.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내가 남자가 아니지.

“꺼억―.”

다시 한 번 트림을 크게 내뱉었다. 생리적으로 나온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크크크, 설마 농약을 먹이지는 않을……컥.

철컥――.

국도해가 홀스터에서 권총을 꺼내 나에게 겨누었다. 심장이 입으로 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설마 쏘시지는 않을 거죠?”

본인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중이다.

탕―!

“―――!”

총성과 함께 내 뒤에 있는 벽이 우수수 부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도배를 다시 해야겠군요.”

관표 형님이 총알이 박힌 부분을 손으로 만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모두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한테 총을 쏠 수 있어요! 당신은 지금 나를……!”

“너를 뭐.”

“…….”

차마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일급비밀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아, 아무리 그래도 난 국도해 씨 선생인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의 처지를 설명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총알이 조금만 비껴 갔어도 귀를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인간! 아무리 눈치를 못 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트림 좀 했다고 사람에게 총질을 해 대냐!

“그럼 입 다물고 밥 먹어.”

“알았어요. 알겠다고요.”

젠장, 트림으로 정 떼는 방법은 목숨을 위해서 그만둬야겠다. 그럼 이에 고춧가루를 끼고 웃어 볼까? 아니면 김을 붙여서 생글생글? ……그만두자. 그랬다간 생니를 뽑힐 수도 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목구멍을 타고 치솟아 오르는 강력한 압력을 느꼈다. 커헉! 안 돼!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생리적으로 올라오는 그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꺼억!”

아까 낸 소리보다 몇 배나 큰 트림이 식탁에 울려 퍼졌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총구가 일제히 내 머리에 겨누어졌다.

“……실수입니다만.”

“같은 실수도 세 번을 하면 도해 형님이 절대 살려두지 말라고 했어. 희망이 없는 놈이라고.”

꼬마가 미역국을 떠먹으면서 대답했다.

“똑같은 방정식 문제를 내도 숫자만 바꾸면 틀리는 너는 이미 백번 사형이야.”

“니 진짜 오늘따라 와 그러나. 추잡하게.”

“원래 추잡했어요.”

원래, 부분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선생님 그러지 마. 한 번만 더 그러시면 정말 제 손으로 쏴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도해 형님이 명령하시면 제 총알이 제일 먼저 나간다고.”

박건우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을 쏠 때 머릿속으로 모든 각도와 힘의 방향 등이 계산된다는 물리 천재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안 할게! 안 하면 되잖아!”

“아주 그냥 형님이 아니고 내가 죽이고 싶다. 으이구, 진짜.”

성새민이 총을 치켜 올렸다가 내려놓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숙제는 하셨나요?”

눈을 치켜뜨며 필살 공격.

“크하하하하. 숙제? 숙제 오늘은 안 해도 되지롱.”

“네? 뭐라고요? 누구 맘대로?”

“내 마음.”

물을 마시던 국도해가 대답했다.

“왜요? 숙제를 왜 안 해요.”

“당분간 어디를 갔다 와야 해서, 과외는 못 받을 것 같습니다.”

관표 형님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지만, 호기심은 가시지 않았다.

“어딜 가는데요?”

“어딜 가느냐 하면 도…….”

눈치 없이 대답하려는 박건우의 입을 지용재가 재빨리 손으로 틀어막아 버렸다.

“뭐라카노, 이 자식. 하하하하하.”

“노, 놀러가는 거야. 놀러! 음하하하하.”

성새민이 말을 더듬으면서 둘러댔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도’ 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도망. 도피. 도주.

셋 중에 고르면 되겠다.

“아니 그게 아니고, 피…….”

다시 입을 열려는 박건우의 입에 김유수가 밥덩이를 집어넣었다.

“어휴, 형님 밥 좀 드세요. 밥도 하나도 안 드시고.”

입 안 가득 밥을 물고 박건우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단어와 연결되어 다시 나의 머릿속에는 ‘피’ 자로 시작되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피신. 피난. 피재.

“피서 갑니다.”

관표 형님이 웃으면서, 힘을 주어 대답했다.

“피서요?”

“네, 피서.”

“여기도 좋은데 다른 곳으로요?”

“이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잠깐 갔다 올 예정입니다.”

부드럽게 웃는 관표 형님의 얼굴이 나무로 조각한 탈과 같아 보였다. 무서운 인간.

“언제 갔다, 언제 오시는데요?”

“오늘 출발해서 일주일 뒤쯤 올 예정입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니까요.”

“오늘이요?”

“예, 아침 먹고 바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안 그래도 댁으로 유수를 보내서 사정을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일찍 오시는 바람에, 미처 말씀을 못 드렸네요.”

“오오, 그래요오?”

안 돼. 나도 모르게 좋아서 입 근육이 씰룩거리고 있잖아.

“그래서 당분간 과외는…….”

“같이 가.”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

“네??”

“형님! 하지만!”

“도해 형님 그렇지만!”

“쟤도 데려간다고요?!”

모두 기겁하고 되물었다. 물론 그 중 가장 기겁을 하고 질색을 한 것은 나였다.

“가, 같이 가다니요! 내가? 나를? 나도 간다고요?!”

“그래.”

항상 돌아오는 간결한 대답.

“내가 왜 그쪽들하고 피서를 가요! 난 집에서 쉴 거라고요! 집에서 푸욱 쉴 겁니다!”

“공부는 하루만 걸러도 학습 리듬이 깨진다고 말했던 게 누구였지.”

국도해가 반듯한 젓가락질로 나물을 집어먹으면서 물었다.

“……접니다.”

“주 6일 근무제로 나와 계약한 사람은?”

“불행히 또 접니다.”

“선불로 이번 달 보수까지 모두 받아 간 사람은.”

“알겠어요! 가요! 가면 되잖아요!”

어머니가 말없이 가져가 버린 5백만 원의 존재가 또다시 강렬하게 부각되었다.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수표를 앞에 뿌리면서, 당당히 이딴 돈 안 받고 안 간다고 큰소리 땅땅 쳤을 텐데. 세상 그 어디에도 내 편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꾸욱 참으며 밥을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그래, 따라가서 국도해의 연심을 모조리 박살내 주마. 기대하라고! 국도해! 네 이놈!

“와아! 신난다. 우리 그럼 다 같이 수학여행 가는 거잖아!”

박건우가 손을 번쩍 들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이번에는 총구가 다시, 저쪽으로 일제히 겨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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