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7/10)

7장

사각사각사각.

연필이 스케치북 위를 움직이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흐아암.”

“입 다물어.”

여지없이 날아오는 싸가지 없는 한마디.

“언제 끝나요?”

“글쎄.”

“뭐든 확실한 거 좋아하시는 분이 왜 그렇게 모호한 대답을 하세요.”

“그러게.”

스케치북 건너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서 웃음이 묻어난다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이겠지.

“정물화라면 다른 정물도 좀 그려 보세요. 저만 그리지 말고.”

“정물이 너무 많으면 구도가 산만해.”

“…….”

아무리 그래도 스케치북에 사람 하나 날름 그려 놓으면 그게 인물화지 정물화냐!

아니 애초에 사람을 정물로 삼는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데. 하아, 내가 사과나 북어 대가리랑 동급 취급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그림은 왜 그리세요?”

“좋아하니까.”

예상외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림에서의 세계는 온전한 나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잖아.”

“……네에, 그러시군요.”

한마디로 그 이해하기 힘든 결벽증과 편집증을 받아 주는 존재라 이거잖아. 그림을 통해 그 병을 고치기는커녕 점점 더 완고해지겠군.

국도해는 눈을 살짝 내리감은 채 진지하게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뉘 집 아들인지 아따 그놈 한번 허벌나게 잘생겼구만, 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의 감탄에 진심으로 동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쌍꺼풀이 있는 오른쪽과 그렇지 않은 왼쪽. 어느 쪽에 선다 하더라도 모든 여자를 만족시킬 만한 외모였다. 나에게는 왼쪽에 서라고 했던가? 있으나 없으나 나는 상관없는……헉, 시방 내가 뭐하고 있다냐. 사춘기 소녀맨치롬 감상에 젖어서 워째 심장을 벌렁거리고 있는 것이여. 아니, 사투리는 왜 또 튀어나오는 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예?”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네 머릿속은 감당하기 힘든 구성일 것 같아.”

“하하하. 그, 그런가요. 제가 좀 델리케이트하고 디피컬트한 남자이긴 하지요.”

식은땀을 흘리며 큰 소리로 웃어 주었다.

“무질서한데 재미있어. 이상하게.”

그의 입가에 창밖의 차나무보다 더 향긋한 웃음이 머물렀다. 심장이 불수의근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의 의지를 개무시하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이러면 안 돼! 아무리 잘생겨도 저건 천하의 국도해란 말이다. 얼굴에 넘어가지 말자!

“아하하하. 국도해 씨는 애, 애인 없으세요? 있을 것 같은데. 있죠? 있으시죠?”

젠장, 왜 하필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내뱉은 말이 저딴 거냐.

“그런 건 왜 묻지.”

방금 전 보였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 아니. 하하하. 요즘 외로워 보이셔서. 하하하핫, 저희 학교에 예쁜 애들도 많거든요. 워, 원츄하시면 소개팅이라도.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필요하면 내가 구해.”

그가 단칼에 내 어색한 제안을 거절했다.

다시 방 안 가득 무거운 침묵이 만개했다. 태생적으로 침묵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로서는, 일 분 일 초가 고역이었다. 말을 꺼내 볼까 하다가도 괜히 말실수라도 해서 총이나 맞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선생.”

차갑고 습한 밤안개 같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네?”

“저번에 물었던 것 기억하나?”

“어떤 거요?”

그가 그림을 그리던 것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서 내 앞으로 걸어왔다. 평소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이거.”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입술이 다가왔다. 왼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가오는 얼굴을 보고,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국도해는 커다란 손으로 내 볼을 눌러 억지로 입을 벌리게 했다. 지독히도 무례한 키스였다. 눌린 볼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났지만, 상대는 키스를 하는 것 외에 조금도 관심 없단 태도였다. 뭔가 화가 난 듯했지만 입을 봉쇄당한 채라 이유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밀어내려던 내 손도 그가 붙들어 버렸다.

괴로운 것은 생리적인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묘한 쾌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 일부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그가 세차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어느새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나를 압박했다. 그는 흐르는 타액까지 모조리 핥아냈다. 이대로 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아, 아프잖아요! 뭐하는 겁니까!”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그를 밀쳐 내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고 크게 소리쳤지만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손수건이 닿을 때마다 지끈거렸다. 아무래도 또 입술이 찢어진 모양이었다.

“주세요. 제가 닦을게요.”

손수건을 낚아채려고 했지만 그가 내 손을 쳐내 버렸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해 줄게.”

몸을 숙여 꼼꼼히 피를 닦아내 주는 그가 방금까지 나에게 짐승 같은 흉포한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키스를 하면 충치가 옮을 수도 있다는 사실, 혹시 알아?”

“……저 충치 없습니다.”

“오른쪽 두 번째 어금니. 치과 가 봐. 충치 생겼을 거다.”

“…….”

치대를 보내 줘야 하는 건가.

“제 충치 어디 있나 진료해 주시려고 키스하는 거면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입술을 닦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아니.”

그가 손수건을 테이블에 던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어째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너에게 키스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는 거다.”

“…….”

“생각해 봤나?”

가설 44번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입이 찢어져도 말 못 한다.

“아, 아니요. 왜 본인 머릿속을 나보고 맞히래. 그런 건 스스로 알아서 하세요.”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 대답하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돌려 마주보게 했다.

“내가 답을 낼 수 없으니까 너에게 묻고 있잖아. 내가 갖고 있는 법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까 너한테 묻고 있는 거잖아.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이 선생의 의무 아니었나?”

“……고민해 보겠습니다.”

안 한다고 하면 그대로 목을 조를 기세에 놀라서, 눈을 껌뻑거리며 대답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피나 제대로 닦아.”

그가 손수건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잘 다려진 손수건에서는 그가 쓰는 고급 비누향이 묻어났다.

그에게 받는 두 번째, 손수건이었다.

“짱! 너 진짜 저걸 형님한테 먹이고 온 거야?”

“겁나게 멋지다 안카나!”

모두들 반이나 비어 있는 죽 그릇을 들고 내려온 나를 둘러싸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설마 했는데.”

3시간 동안 정물 노릇을 했던 나는, 힘없이 쟁반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설마하신 분이 문까지 잠그시나요.”

나만이 그 인간에게 밥을 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관표 형님은 매번 나에게 쟁반을 내밀며 그의 방 안에 집어넣고 문을 잠가 버렸다. 처음엔 앉아만 있으면 되겠지 했던 정물 노릇은 시간이 지날수록 장난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여지없이 국도해의 호통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정물 주제에 왜 움직이냐고? 젠장, 진짜 나를 사과랑 꽃병 취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지? 기왕 그릴 거 모델이라고 하면 어디가 썩어 문드러지냐고!

“너 진짜 재주 좋다. 어떻게 먹이는 거야? 설마 네가 퍼먹은 건 아니지?”

김유수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웃으며 과일을 깎던 관표 형님의 손이 멈칫하며, 과도에서 스타워즈의 광선검 저리 가라 싶을 정도의 검기가 흘러나왔다.

“아니야! 니네 형님한테 물어보라고! 물어보면 되잖아!”

“하하, 화내지 마세요. 아무도 그런 의심 안 합니다.”

관표 형님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

모두의 얼굴에 일제히 거짓말,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개구리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니, 정말 대단해요. 선생님.”

“굼벵이겠지!”

내 손을 잡으려고 드는 박건우를 밀쳐 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3시간을 무생물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앉아 있으려니 온몸이 쑤셔댔다. 텔레비전을 켜자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어떻게 식사를 하게 한 거야? 도해 형님이 순순히 드셔?”

“순순히 먹을 리 있냐!”

“그러면?”

모두 눈을 반짝 빛내며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림 그리신다고 해서 도와드렸다.”

“어? 뭘 도와드린다는 긴데? 어케 도와드렸나?”

“……되어 달라고 해서.”

“뭐? 뭐가 되어 줘?”

“정물이 되어 달라고 해서 정물 노릇 했다! 됐냐! 됐어요!”

“크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 미쳐! 미치겠다. 정물? 정물?! 모델도 아니고 정물!?!”

“……몰라!”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을 쿠션에 묻으며, 단어 선택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국도해를 원망했다.

“형님이 한 선생님을 그리셨다고요?”

“그래요. 정물이 되어 달라고 해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어요. 됐어요?”

“……이상하군요.”

관표 형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걸핏하면 키스하고, 몸을 더듬어 대는 국도해 때문에 나의 정신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뿐인가? 어서 답을 찾으라고 윽박질러 대니 내가 살 수가 있어야지.

“우아! 잠깐 쟤들 그때 그놈들 아니야?”

“뭐가? 누구?”

“쟤들 말이에요. 새민 형님.”

김유수가 가리키는 곳은 텔레비전의 화면이었다. 험상궂은 놈들이 굴비 엮듯이 묶여 경찰서로 연행되고 있었다.

“어라? 저놈들?”

“그때 그놈아들 맞나?”

“조용히 해 보세요. 뭐라고 하는지 듣게.”

「경찰청 마약수사대는 지난 7일 미국의 필로폰을 국내에 밀반입해 유통시키려 한 서른두 살 정 모씨 등 5명을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밀수업자 김 모씨(50)에 대해 같은 혐의로 구속 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나쁜 놈들. 약 갖고 장난치는 놈들은 다 잡아뿐져야 한다 안카나.”

“헤, 왜 이러시나. 다들 약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 보셨어요?”

화면 속의 놈들을 순식간에 죽사발을 만들어 놓던 남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미쳤냐. 그런 거 했다가 도해 형님한테 걸리면 어떻게 되는데.”

“이거야, 이거.”

성새민이 손으로 목을 그어 보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하고 있는 약 있으면 끊어라. 형님한테 걸리면 목숨은 보장 못 하니까.”

“미쳤어요! 내가 약을 왜 해요!”

“잠깐만, 조용히 해 봐요.”

관표 형님이 우리를 조용히 시키며,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 등은 지난달 23일 시가 9억 원 상당의 필로폰 270g을 여행용가방 손잡이에 숨겨 수입용 의류 샘플로 위장한 뒤 속칭 ‘보따리 상인’을 통해 밀수입해 친구 진 모씨(50)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씨로부터 필로폰을 전달받은 진 씨는 이 가운데 일부를 국내 판매책 정 씨에게 천만 원을 받고 판매했습니다. 이들은 상당량의 필로폰을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에게 빼앗겼다고 진술했지만 경찰은 또 다른 판매책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필로폰 17.5g과 대마초 135g을 압수하고 나머지 필로폰을 건네받은 자들의 행방을 추적 중입니다.」

“크억! 저거 지금 우리 얘기 하는 건가요?”

“……문제가 골치 아프게 돌아가네.”

“어때, 어차피 우리가 누군지 알 게 뭐야.”

「정 모씨의 진술에 따르면 물건만 건네받고 사라진 판매책의 인상착의는, 굉장한 미남형의 남자를 포함한 6명의 남자라고 합니다.」

“으아악! 어떡해요. 나 때문에 딱 걸린 거 아니에요?!”

경찰서에 줄줄이 엮여 들어가는 장면이 떠오르자 몸이 오싹 떨렸다.

“……왜 너 때문에 딱 걸리냐?”

“굉장한 미남이라고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내 얼굴 기억하고 있나 봐. 몽타주 같은 거 막 붙는 거 아니에요? 어떡하지? 선글라스 쓰고 다녀야 하나?”

“선생님 아니다.”

“설마 너겠냐.”

“너면 손에 장을 지진다.”

“걱정하덜 마라.”

모두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무시했다.

“형님은……, 이럴 때는 확실히 불리한 얼굴이란 말이지.”

“하긴,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얼굴이니까.”

“저주이자 축복 아니겠어요.”

……뭐야, 내 얘기가 아니고 국도해 얘기였어?

“아무튼 형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야겠군.”

“왜요?”

모두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지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라믄, 니는 니가 가방 바꿔서 우리 몽땅 빵에 들어가게 생겼다는 얘기를 하고 싶나?”

“아, 아니요! 절대!”

지금도 구박의 강도가 이 정도인데 그렇게 되었다간 상상도 하기 싫은 나날이 이어질 것이다. 절대 싫다.

“그러니까 조심을 하자는 겁니다. 안 그래도 형님이 지금 이 상황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고 있지 않으시니까.”

관표 형님이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기 때문에 차마 지금이 어떤 상황이냐고 묻지 못했다.

“무슨 얘기 중이었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정확한 발음에 화들짝 놀랐다.

“기척 좀 내고 다니시라니까요!”

“네가 둔한 거겠지.”

국도해빠들도 그 말에는 수긍하지 못하겠단 표정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바로 지척에 올 때까지 못 알아채.”

국도해의 시선이 관표 형님에게 머물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채널은 이미 드라마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그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옮겨졌다.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아하하, 저 댑따 좋아해요. 옛날부터 드라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꼭 챙겨 봤다니까요.”

“흐음.”

그가 못마땅한 얼굴로 우리를 둘러보았지만, 모두 필사적으로 태연한 척 쓸데없는 대화들을 나누었다.

“오늘 날씨 참 좋다.”

“저는 빨래나 해야겠습니다.”

“이 근처 어디 놀러나 가 볼까.”

“나는 총 손질이나 해야지.”

모두 주고받기가 전혀 되지 않는 대화들뿐이었다. 나는 이 어색한 자리를 피하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지.”

킬리만자로의 만년설보다 차갑고, 백 일을 쉬지 않고 숫돌에 간 회칼보다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나를 잡아 세웠다.

“머리가 좀 아파서, 약 먹으려고요.”

“아프다고?”

그의 목소리의 온도와 날카로움이 정도를 더해 갔다.

“아, 아니. 조금이요.”

“관표.”

“네, 형님.”

“약상자 어디 있어.”

“부엌 찬장 옆에 놓여 있습니다.”

“아, 아니. 괜찮아요. 제가 무슨 어린애입니까. 누구처럼 밥을 챙겨 줘야 하는 것처럼 약을 챙겨 줘야 먹게. 그냥 두통약 한 알만 먹으면 싸악 나아요, 하하하핫.”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 재빨리 부엌으로 건너왔다.

“하아, 미치겠다.”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두통약이나 몇 알 삼키자.

컵에 물을 따르고 찬장 문을 열었다. 상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봉지에 든 알약을 발견했다. 어렸을 적부터 두통이 심해서 척 보면 뭐가 두통약인지 정도는 구별해 낼 줄 아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그것이 마이드린 캡슐인 것을 알아냈다. 입안에 두 알을 털어 넣고 물을 삼킨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가 이런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것일까.

조폭의 선생이 되고, 결벽증이 있는 조폭 두목에게 키스도 당하고, 정물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가방을 바꿔 버려 마약 사건에까지 엮이다니.

……역시 위풍당당에게 거는 게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편안해지면서 몸도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약기운이 퍼지는 건가? 역시 두통에는 마이드린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빨리 약기운이 돌았던가? 이상하네.

“야! 새민 형님이 근처에 있는 호수에 낚시하러 가자는데.”

그때 부엌으로 들어온 김유수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읏.”

“뭐야, 너 어디 아프냐? 열 나? 얼굴이 빨가네.”

녀석이 손으로 내 이마를 짚자 온몸으로 퍼지는 간지러운 불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 만지지 마.”

“뭐? 너 왜 그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넘어진 나를 김유수가 일으켜 세웠다.

“야, 인마. 너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냐?”

“읏. 만지지 말라니까!”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머릿속에 팬히터가 열 개쯤 돌아가는 것 같았다. 대, 대체 왜 이런 거지?

“어? 잠깐, 형님 불러 올게. 관표 형님! 여기 좀 와 보세요! 빨리요!”

“무슨 일인데.”

꼬마 녀석의 외침에 관표 형님뿐만 아니라 거실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부엌으로 몰려왔다.

“얘 이상해요. 미친 거 같아요.”

“미, 미치긴 누가……, 읏.”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느낌에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 느끼는 중력의 붕괴와 함께 엄청난 쾌감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과유불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쾌감이 느껴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정 직전의 짜릿한 감각이 온몸을 사정없이 내달리자,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하아……, 나 이상해……, 흐윽.”

“야 와 이라노? 와 야시런 신음 소리를 내고 지랄해 쌌노. 발정기가?”

“한준 씨. 지금 내 말 들리십니까? 들리세요?”

“귀에 대고 말하지 마세요. 들리니까……, 읏.”

“약 드셨습니까? 오른쪽 찬장에 있는 약상자에서 꺼내 드신 거 맞아요?”

“……쪽.”

“뭐라고요?”

“왼……쪽이요. 마이드린 캡슐 두 개. 나, 나 좀 제발 어떻게…….”

미칠 지경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온몸을 달리는 쾌감에 속이 울렁였다. 차마 아까부터 형체를 완연히 드러내고 있는 아래로는 손을 뻗지도 못했다. 그 이상의 쾌감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국도해가 뒤늦게 부엌으로 들어왔다.

“넌 또 왜 그래.”

그가 바닥에 쓰러진 나를 잡아 세우며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핫, 안 돼, 잡지 마. 아니, 해 줘. 아니 하지 마요.”

스스로도 무슨 말을 내뱉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거 또 뭐한테 물린 거야.”

“물린 게 아니고 삼킨 것 같습니다.”

“뭘.”

“K 말입니다.”

관표 형님이 왼쪽 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왜 손에 닿는 곳에 뒀어! 이 녀석 생각 없이 아무거나 주워 먹는 버릇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 할 짓이야! 생각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처분하고, 몇 알만 혹시나 하고 남겨 둔 것을…….”

“누, 누가 아무거나 주워 먹는다고……읏.”

반론을 펼쳐 보려고 했지만, 다시 숨 쉬는 게 괴로울 정도로 올라오는 욕망에 말을 잇지 못했다.

“뭐 저런 아가 다 있나. 두통약 묵으러 간다카고 와 환각제를 처먹어 쌌노.”

“궁금하니까 먹어 본 거겠죠. 저 녀석 궁금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놈이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궁금하다고 약을……, 하아, 숨막혀……, 숨막힌다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셔츠의 단추를 잡아 뜯었다. 목을 감싸던 셔츠의 느낌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허리 부근이 거추장스러웠다.

“벗어야 해. 하아……더워, 숨 막히고…….”

벨트를 풀어내려고 하자, 국도해가 내 손목을 비틀어 움켜잡았다.

“아파……윽, 놔! 벗어야 해.”

“다른 놈들 앞에서 벗지 마.”

“말리지 마! 벗을……악. 제발, 제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엇을 부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국도해의 커다란 손을 부여잡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제발……해 줘. 해 주세요. 제발, 어떻게 좀…….”

“……제기랄.”

아나운서 같은 발음으로 듣는 욕설은 또 다른 맛이었다.

그가 나를 번쩍 안아 어깨에 들쳐 메고 일어섰다. 단단한 근육에 몸이 닿자, 마른 솜에 불길이 번지듯 욕망이 일었다.

“윽. 하아……하.”

“변태처럼 헉헉대지 말고 입 다물어.”

국도해가 싸늘하게 맞받아치며 그대로 부엌을 나섰다. 망할 자식, 누군 변태가 되고 싶어서 됐냐.

“형님, 어떻게 하시려고…….”

“알아서 처리하지.”

“그기 아마 환각제 성분이 강해서 그럴 깁니다. 어린 아새끼들이 흔히 그 약 처먹고 야시런 난교 파티하고 그러는 데 쓰이는 기라, 방에 가둬 두고 세 시간만 지나면 정신 차릴 텐디…….”

“시끄러워.”

그가 주먹으로 계단 옆에 있는 나뭇등걸을 후려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너희 같은 놈들도 처먹으면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강한 약을 이 녀석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형님,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혼자 두는 편이…….”

“입 다물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들고 있는 남자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을 진심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3층에 얼씬거렸다간.”

내 허벅지를 잡은 그의 손에 우악스러운 힘이 들어갔다. 고통마저 쾌감으로 승화시키는 알 수 없는 나의 감각 덕분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 소리를 참아 내야 했다.

“……죽을 줄 알아라.”

그렇게 국도해는 나를 들쳐 메고 3층으로 올라갔다.

“흐읏―. 아……하아……윽.”

국도해가 침대에 날 던져놓았다.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신음을 참는 나를 그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나, 나가! 나가라고요!”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이었다. 잡히는 대로 쿠션을 집어던지자, 그가 묵묵히 그것들을 받아 발치에 내려놓았다.

“나갈까? 어느 쪽이 편해?”

그가 땀으로 젖은 내 이마를 쓸어 주며 물었다.

“가지……마. 가지 마요.”

손으로 그 사람의 손목을 잡아끌어 내 몸에 놓으며 말했다. 수치심과 욕망이 혼탁하게 섞인 피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도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인지할 수 없었다.

“빨리, 어떻게든……아니, 나가! 하지 마……. 만지지 마. 아니 만져 줘. 빨리 해 달라고.”

그가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질이 좋지 않은 약이군.”

“흐응……윽.”

심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내 심장은 녹아내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눈물이 치솟았다.

“흐윽―. 으흑―.”

스스로 침대에 다리 사이를 비비며 엉덩이를 흔드는 꼴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 이 남자에게는.

“샤워도 안 한 상대를 안게 되다니. 아니, 너는 처음부터 계속 상식 밖이었지만.”

“……흐윽.”

약기운에 몽롱한 데다 울고 있었기 때문에 국도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풀어 침대 아래로 벗어던지는 것과 동시에 내게 키스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읍……흐읍.”

촉촉한 입술이 빨리는 느낌에 쾌감이 고조되었다. 어느새 바지는 발밑에 엉켜 있었다. 맨살에 닿는 슈트의 부드러운 느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속옷은 이미 젖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조금이라도 더 닿고 싶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남자에게 몸을 부비며 다리를 벌렸다. 셔츠를 잡아 올리던 손이 그대로 아래로 내려와 속옷 위를 움켜잡았다.

“아!”

튀어 오르는 내 몸을 자신의 몸으로 누르며 국도해가 입술을 겹쳤다. 민감해진 입안의 점막을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허리 아래가 지끈거렸다. 질척하게 젖은 속옷이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배에 닿을 만큼 단단해진 욕망이 부르르 떨려 왔다. 국도해의 커다란 손이 몇 번 훑고 내려가자 어이없을 정도로 금방 희뿌연 액체가 울컥, 쏟아졌다.

“하아……하아.”

하지만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살덩이는 전보다 더 단단하게 불거져 있었다. 셔츠를 벗은 후 벨트를 풀고 있는 국도해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왜.”

약기운 탓인지 평소 같으면 정나미 없다고 느낄 만큼 무뚝뚝한 목소리마저 미치도록 섹시하게 들려왔다.

“……해……줘.”

“뭘.”

담담하게 바지를 벗으며, 그가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브리프는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뭐든……해 주세요.”

“후회하지 마.”

그가 속옷까지 잡아 내리며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후회하면 죽여 버리겠어.”

더럽게도 살벌한 인간. 지금 이런 상황에 잘도 그런 말이 나오는구나.

온몸의 피가 바싹 타 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국도해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몸을 숙여 입술을 겹쳤다.

“흐으……윽!”

허리가 침대 위에서 격하게 흔들렸다. 몇 번이고 정액을 토해 낸 그곳에서는 이제 나오는 것도 없었다. 약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울며불며 사정을 해도 국도해는 멈추지 않았다.

“으읏―! 아악!”

아니, 오히려 거침없이 몸을 탐할 뿐이었다. 그는 억지로 내 다리를 벌리게 하고 허리를 박아 올렸다.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몇 번이나 안에 사정을 한 탓에, 허리를 밀어붙일 때마다 철퍽하는 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다리가 공중에서 바르르 떨렸지만, 발목을 움켜쥔 국도해의 손은 그의 표정만큼이나 단호했다. 몸에 남아 있는 0.001g의 약기운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그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앗……하악! 제, 제발 그만……하아.”

그의 번뜩이는 눈빛에는 오로지 먹어치우겠다는 수컷의 일념만이 엿보였다. 이제는 제발 그만해 주길 바랐지만, 그가 허리를 올려붙일 때마다 새로운 욕망이 꽃을 피웠다. 죄 많은 몸은 어쩔 수 없이 헐떡거리며 허리를 흔들고 마는 것이다.

“뜨겁고, 좁아.”

“읏!”

젠장맞을. 왜 그딴 걸 입으로 일일이 말하고 난리야. 그럼 당신은 단단하고 존나 크다고 대답해 줄까? 수치심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가 내 얼굴을 우악스럽게 쥐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다른 곳 쳐다보지 마.”

“하읏.”

일부러 민감한 곳을 푹 찔러 오며, 그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나하고 있을 때 다른 곳 보면, 눈을 파 버리고 싶으니까.”

온몸이 떨릴 정도의 집착이었다. 국도해는 연필 하나, 볼펜 하나에도 제 이름을 새겨 넣을 만큼 자기 것에 집착이 심한 편집증 환자였다. 그것이 인간에게 쏟아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고 했던 사람들의 농담이 떠올랐다.

“다른……생각 하지 마.”

그가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만 집중해. 나한테만…….”

눈물이 날 만큼 강하게 빨렸다. 내일부터 목티를 찾아 입어야 하나 하는 엉뚱한 고민도 잠시. 다시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남자의 열기에, 침대 시트를 그러쥐며 신음했다.

“허억! 아, 아파.”

“아파?”

“그래! 아파요! 아프다고!”

눈물이 쏙 나올 만큼 아팠다. 약에 취해 있어 정신이 없을 때조차 처음 집어넣자마자 울며불며 빼 달라고 사정을 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엉덩이 사이를 뜨거운 쇠막대기로 지지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럼 참아.”

그가 국도해식 결론을 지은 후, 내 허리를 잡고 살덩이를 최대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크윽! 아프다니까!”

허벅지 사이로 사정을 한 흔적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얼핏 혈흔까지 보이지만 국도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였다. 아니, 오히려 피를 보자 성난 야수처럼 흥분한 듯했다. 무리를 해서 남자의 것을 받아들인 그곳은 발갛게 부어올랐지만, 삽입과 동시에 내벽은 거짓말처럼 조여들며 남자의 살덩이를 받아냈다.

“하악! 아, 아!”

머리가 침대 턱에 쿵쿵 하고 부딪힐 만큼 강하게 밀어붙여졌다. 하지만 숨통을 조여 오는 강한 쾌감에 이대로 죽어 버려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남자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읏…….”

흐트러짐 없을 것 같았던 남자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몸에서 기묘한 불이 확 번져 갔다. 쌍꺼풀이 없는 왼쪽 눈가에 고여 있던 땀방울이 툭 하고 내 얼굴로 떨어졌다.

“아! 제발! 흐으아아아!”

열락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잡으며 소리질렀다.

“다리 벌려.”

욕망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의 목소리가 허리에 직격으로 전해졌다. 혀끝으로 유두를 스치듯이 빨아올릴 때마다 허리를 위로 올리며 음탕하게 조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빨리……흐읏……응.”

배 안까지 남자의 단단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만큼 신랄한 쾌감이 물결치듯 넘어왔다.

“읏―――!”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순간, 안으로 하얀 비말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터졌다. 국도해 역시 몇 번 피스톤질을 반복한 후, 내 안에서 뜨거운 욕망을 울컥 쏟아냈다.

온몸의 피가 저릿저릿했다.

눈가에 자잘한 키스가 내려앉았다. 이마를 쓸어 올려 주는 커다란 손에 안심하고 말았다.

“……이젠 이유를 알 것 같군.”

“…….”

눈꺼풀을 간신히 올렸지만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선생 하나는 잘 고른 것 같은데.”

당연하지, 내가 어떤 인간인데. 내가 어떻게 공부했는데. 따위의 주장을 펼치고 싶었지만 밀려드는 잠이 우선이었다. 까무룩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어째서 약은 기억까지 함께 들고 사라지지 않은 것인가. 제대로 된 환각제라면 기억까지 모조리 지워 버려야 옳은 거 아니야!

온몸이 깨끗이 씻긴 채 알몸으로 시트에 싸여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이토록 쪽팔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쓸데없이 좋은 나의 기억력은 어제 밤새도록 내가 내뱉은 믿기 힘든 외설적인 말까지 무한반복해 주고 있었다. 대체 어쩌자고 환각제를 처먹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거냐고! 정말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바느질을 배워 내 입부터 박음질해 버려야겠다. 그나마 국도해가 샤워를 하러 가서 옆에 없다는 것이 가장 위안이 되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침대를 빠져나와 내 방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얼마나 무리를 했는지 허리 아래로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기어서라도 가야겠다고 결심해 조금씩 움직였지만 10분이 지나도 전진 거리는 20cm가 되지 않았다. 콱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하나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 욕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는 척, 자는 척하자.

“깼군.”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저 단정적 어투를 봐라.

“아침 먹고 나서 자는 척해.”

“누가 자는 척을 했다는 겁니까!”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가 아뿔싸 하고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저주받은 주둥이.

“아침 먹자.”

“안 먹어요.”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대답했다. 이대로 시트 안에서 번데기가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 나비는 싫은데, 나방도 싫고. 그럼 번데기 안에서 그냥 죽어 버려야 하나.

“먹어.”

그가 시트를 간단하게 걷어 내며 명령했다.

“싫습니다. 안 먹어요.”

“먹으라면 먹어.”

“싫다고요! 먹기 싫어요. 생각 없응게 나 좀 내버려 두쇼!”

간이 배 밖으로 외출을 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사투리까지 쓰는 거 보니, 진심인가 보군.”

젠장, 어째서 사투리가 진심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버린 거야.

“너, 후회하냐?”

“네?”

“어제 일 후회하냐고 물었다.”

국도해의 눈동자에서 고요한 푸른 불꽃이 일었다. 내 머릿속에는 ‘후회하면 죽여 버리겠어’라는 문장이 좌우를 왕복하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 그게 후회한다기보다……, 그러니까 그것이 아무래도 약기운에 하는 것은 좀……, 인간의 도리로서, 아무튼 제정신도 아니었고…….”

서론 본론 결론 없는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다시 시트를 주섬주섬 잡아끌었다.

“그럼 맨정신으로 다시 하든지.”

“크악! 아니요. 됐습니다.”

“…….”

너무 대놓고 싫은 티 냈나.

“밥이나 먹어.”

“……진짜 생각 없어요.”

솔직히 지금 이 사람 얼굴 보고 있는 것도 얼굴에서 불이 날 정도로 쪽팔린데, 다른 사람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 없어도 먹어. 몸 생각해서.”

아니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왜 저런 다정한 발언이셔.

“한 끼 거른다고 죽지 않아요. 어차피 뭐 내가 죽어도 국도해 씨는 상관도 없잖아요.”

“상관있어.”

“네에?!”

“상관있다고.”

저 단호함이 불길했다.

“저기요. 저기 설마 그 모르겠다고 했던 질문의 대답, 찾으신 건 아니시죠?”

“찾았는데.”

이런 젠장 빌어먹을 망할!

욕을 속으로 잘근잘근 씹어 삼키며 애써 태연한 척 싱긋 웃어 보였다.

“아하하하. 그것 참 다행이네요. 하지만 모든 답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아시죠? 검토하고 또 검토하시고 아무튼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검토는 이미 마쳤는데.”

그랬겠지. 오죽하시겠어. 완벽주의자 님께서 검토도 하지 않은 답을 정답이라고 체크할 리 없겠지.

“하하하하, 그러셨군요. 그럼 모르는 답도 찾으셨고, 슬슬 공부도 혼자 잘하시니 저는 선생 자리에서 물러……, 히익!”

이마에 닿는 차가운 금속이 진짜 권총 맞는 거지?

“어딜 간다고.”

“가, 가는 것이 아니옵고 저도 이제 방학이 끝나면 서울로 가서 학교에 다녀야 하고 그러니까 제 말은…….”

찰칵하고 총의 해머를 내리는 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명확하게 울렸다.

“다시 한 번 말해.”

으악, 이 인간 진심이다. 가끔 화가 나서 위협하는 수준으로 권총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쏠 마음을 갖고 있다.

“으하하하핫, 가긴 어딜 갑니까. 아직 과외도 안 끝났고……하하하하, 가르칠 것이 산더미인데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그렇죠? 예?”

“이봐, 선생.”

그가 권총의 가늠쇠 부분으로 내 이마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네?”

“당신 머리 좋잖아. 상황 파악 안 돼?”

“무, 무슨 상황 파악이요.”

장하다. 권총이 머리에 겨누어진 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나의 담대함이여.

“내가 세균투성이인 너를 끌어안고 있는 이 상황.”

“누, 누가 세균을!”

이 인간이 끝까지 사람 빡 돌게 만드네.

“식사는 내가 가지고 올라오도록 하지. 생각 없어도 먹어.”

“왜요! 내가 왜 먹어요! 왜! 왜! 왜! 먹고 누구 좋으라고? 세균이나 키우라고?”

세균덩어리인 내가 분노에 가득 차 외쳤다.

“아니.”

그가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를 바로 해서 내 위에 올려 주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에는 예전에 보였던 고민의 흔적도, 방황의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몸서리가 쳐질 만큼 단호한 진심과 집착만이 엿보였다.

“앞으로 나와 상관있는 몸이니까.”

방을 나가는 국도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가설 44번에 불이 들어온 그날이 내가 도망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사실을.

내 인생의 행복은 종지부를 찍었다.

“싫어! 싫다고요! 내려놓으세요! 후딱 내려놓으랑게!”

“가만히 있어.”

“내가 내려가겄소. 내가 갈 텡게 이것 좀 놓지라! 다시는 안 개길 텡게 이것 좀 놓아 보드라고!”

“입 다물라고 했다.”

아무리 지랄발광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위로 가져온 밥을 안 먹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쟁반을 엎어 버렸다. 솔직히 난 그때 내가 총알 박힌 시체로 내일 조간신문 1면을 장식할 거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국도해는 무서운 얼굴로 내게 다가와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차라리 짐짝처럼 어깨에 매달려 가는 것이 낫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난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음, 그건 아플 텐데 어떻게 안 아프게 죽는 다른 방법은 없으려나.

“어, 한 선생. 목소리 들으니까 쌩쌩한데 어제 약 먹고 너……, 헉!”

“도해 형님, 잠깐 크헉!”

“헉!”

“세상에.”

모두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아니 정확히 나를 안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국도해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표.”

“…….”

“관표!”

“네, 네? 형님.”

처음 봤다. 천하의 관표 형님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모습은.

“식사 다시 준비해라.”

“식사……요?”

“그래.”

“먹을게요. 먹겠습니다. 먹을 테니까 제발 이것 좀 놔주세요. 정말 왜 이러십니까. 국도해 씨답지 않게!”

“그, 그러게요. 형님 괜찮으십니까?”

“뭘.”

“아니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그렇게 안고 오시는 건…….”

“여기, 여기 티슈에 손 닦으세요.”

박건우가 후다닥 티슈를 내밀며 외쳤지만 국도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발버둥치는 나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결국 나를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국도해는 바로 옆에 앉아 깍지를 낀 채 나를 노려보았다.

“먹어.”

관표 형님이 차려 준 밥을 가리키며 그가 짧게 말했다.

“알겠어요. 먹을 테니까 제발…….”

“제발 뭐.”

“……어디로 사라져 주세요.”

숟가락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건넨 한마디였다.

“알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관표 형님을 보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 먹는지 지켜봐.”

“……예, 형님.”

국도해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야! 너! 형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시껍하겠네. 별죽시럽게 지금 이기 뭐꼬!”

“으아악. 몰라요, 몰라. 나한테 묻지 말라고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국도해의 열렬한 빠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너 형님한테도 약 먹인 거지? 너, 이 새끼!”

국도해를 신처럼 모시는 김유수가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미쳤냐!”

“그렇지 않고서 우리 도해 형님이 왜 너 같은 놈을 장갑도 안 끼고 안고 내려오시는데! 어제야 네가 약 처먹어서 그렇다 쳐도! 오늘은 왜 너를 손수 데리고 내려오시냐고! 정상이 아니잖아!”

맨손으로 사람 데리고 내려오는 게 정상이지, 장갑 끼는 게 정상이냐! 고 버럭 외치고 싶지만 상대는 천하의 국도해다.

“내가 데려다 달라고 했어? 왜 나한테 그래. 나 좀 제발 가만 내버려둬. 어제 밤새도록 시달려서 허리에 힘도……, 헉.”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싸늘히 굳어 있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허리가, 허리가 어쨌다고?”

“밤새 시달렸다고 했나?”

망할 주둥이. 강판에 박박 갈아도 시원치 않을 주둥이.

“허리가 왜요? 어제 밤에 잘 못 잤어? 선생님 많이 아파?”

그 중 눈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박건우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형님하고……, 일 있으셨죠.”

국자를 들고 있던 관표 형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일이야 만날 있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국에 밥을 말아 퍽퍽 입안에 쑤셔넣었다.

“이놈아가! 너 뭔 짓 했노! 뭔 짓 해서 행님을 저래 만들었는데!”

“……역시 같이 약 먹은 거야.”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형님이 너 같은 놈하고 했을 리가 없잖아!”

“뭘 해.”

박건우가 다시 한 번 끼어들었다.

“넌 입 다물고 있은나.”

“뭘 했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미친개처럼 물고 놓지 않은 박건우였다.

“뭘 한 건데. 뭘 해? 왜 나한테는 말 안 해 줘.”

“거 있잖아. 빠로 시작해서 리로 끝나는 그거.”

성새민이 얼굴을 붉히면서 설명했다.

“빠리바게트?”

“그래! 나 니네 형님하고 빠리바게트 했다. 됐냐? 됐어!”

숟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빠리바게트는 또 뭐야? 빠구리를 영어로 하면 빠리바게트인가?”

“빠리바게트건 지랄이건 나 좀 제발 내버려 두드라고! 니들이 시방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알기나 혀! 내가 미쳐 부렀제. 여길 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꼴리지도 않는 거 요로코롬 따라와서 이 경우를 겪는다냐!”

사투리의 둑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자, 잠깐 진정하고.”

“진정허게 생겼어라? 밥만 먹으면 되는 거제?!”

그대로 국그릇을 들고 아까 말아 놓은 밥을 한입에 삼켰다. 밥만 먹고 나가 버릴 것이다. 총을 맞건 지랄을 하건 도저히 못 견디겠다.

하지만 어디론가 사라져 주었을 거라 믿었던 국도해가 그 순간 들어온 것은 정말 계산 밖의 일이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다들!”

“풉―――!”

계산 밖의 일은 언제나 예상외의 사태를 불러일으킨다.

“……아…….”

“……형님.”

“……세상에.”

씹다 만 밥풀을 뱉어 낸 나, 그걸 뒤집어쓰고 있어 악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국도해.

살인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을 모두가 수긍하고 남을 장면이었다.

“나, 나, 저기……, 저기…….”

생각을 돌렸다. 나 되도록이면 길고 오래 살고 싶다.

“밥은.”

“네?!?”

“밥은 다 먹었냐.”

“네, 다 먹었어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당신 잘생긴 얼굴에 뱉어 놓은 밥풀을 제외하면 다 먹긴 먹었지.

“그럼 가서 쉬어.”

“예?!”

“가서 죽으라는 게 아니고 쉬라고 하셨습니까? 형님?!”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김유수가 온몸을 벌벌 떨며 물었다. 믿기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못 걷겠으면 데려다 주지.”

“아니요! 걸을 수 있습니다. 뛸 수도 있고 시켜만 주시면 3층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밥풀 세례를 받은 국도해의 위력은 이 정도였다.

“그럼 가서 쉬도록. 관표는 목욕물 받아 놔.”

“……네, 형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국도해가 부엌을 나가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헉, 너 괜찮냐?”

“아니요. 나 심장이 아직도 맹장 아래서 올라올 생각을 안 해요.”

“……솔직히 나 오늘밤에 네 시체 묻어야 하는 줄 알았다.”

“저도요.”

“나도.”

나도 내가 묻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산 채로.

“전, 목욕물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관표 형님이 비틀거리며 부엌을 나서자 모두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도 이만 가서 좀 쉬어야겄다.”

“저도…….”

“나도 낚싯대 손질이나.”

“전……, 가출이나 해야겠어요.”

비틀거리며 일어나 진심을 말하자 모두 락스에 6박 7일 동안 담가 놓은 청바지 같은 안색으로 변했다.

“나가긴 어딜 가!”

“니 나갔다 하면, 우리 싸그리 죽는 기다.”

“집에 단단히 처박혀 있으라고!”

벌써부터 들어오는 압박에 혀가 내둘러졌다.

“무슨 상관이래요. 내가 나가든 말든. 으악, 총은 또 왜 꺼내. 알았어요. 집에 있으면 되잖아. 인간들이 진짜 누구 꼬붕 아니랄까 봐. 성격은……. 알았어요, 알았어. 입 다물고 올라갈게요.”

투덜거리며 부엌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와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자신의 문제에 해답을 낸 국도해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니 녹색의 파도가 끝도 없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바람 사이로 풋풋한 차 이파리 냄새가 밀려왔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보성의 녹차 밭을 배경으로 조폭과 연애물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에 울컥 슬픔이 밀려왔다.

……게다가 로맨스가 나오기도 전에 에로.

안 돼! 이런 식으로 가다간 분명히 조폭의 첩으로 들어앉게 된다고! 크아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도중, 묘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니 세수를 마친 국도해가 담배를 태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찌를 듯한 시선 속에는 노골적인 욕망이 드러났다. 그대로 서 있다간 지글지글 녹아 버릴 것 같아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이따가 누군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 들어오지 마세요!”

“누군 줄 알고.”

문 너머에서 국도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든!”

“뭐하고 있어.”

“바빠요, 하하하핫.”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역시 발코니에서의 나의 발작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망중한이었습니다. 망중한도 모르세요.”

“…….”

문 너머에서 싸늘한 침묵이 흐른다.

“할 얘기 있으니까 조금 이따 보자.”

“할 얘기요?”

“그래.”

할 얘기의 주제가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젯밤의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다.

“아하하. 그, 글쎄요. 조금 이따가도 계속 바쁠 것 같은데요.”

아직도 시큰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뻔뻔스럽게 구라를 쳤다.

“지금 문 부수고 들어갈까.”

“아니요, 아닙니다. 샤워하시거든 오세요. 저도 좀 씻어야 하니까. 아이쿠, 이런! 몸에서 쉰내가 나네. 하하하하.”

“깨끗이 씻어라. 안 그러면…….”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안 그러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내가 씻겨 버린다.”

“빡빡 씻겠습니다!”

“그래.”

문에서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하이고, 이를 어쩐다냐.”

저 타고난 헌터가 먹잇감을 확인한 이상, 그리 순순히 놓아줄 리 없다. 500만원이고 지랄이고 사채를 끌어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돈을 물어 주고 그만뒀어야 했다. 언젠가는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따라온 내가 죄인이다. 게다가 약까지 처먹고 나 좀 잡아먹으라고 달려들었으니 잡아먹혀도 싸다. 분명히 교제에 관한 얘기를 하겠지. 서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새끼손가락을 자르자거나, 피를 나누어 마시자고 할지도 모른다.

손톱을 닥닥 물어뜯으면서 창밖을 힐끔 보았다가, 아래로 이어지는 비상 철제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위기에 처하면 여지없이 생기는 나의 도피욕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복잡한 상황은 일단 도망가고 보자는 것이 나의 신조.

“좋았어.”

신발을 신고 나가려면 현관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창을 타 넘었다. 조심조심 아래로 내려가 뒷문으로 나오자마자 일단 달렸다. 목적지는 없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서 결정한다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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