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8/10)

8장

“우아악, 젠장. 대체 여기가 어디야?”

방향 없이 달리다 힘이 빠지면 걸었다. 그것을 반복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은 차밭이요, 내 뒤에 둘러져 있는 것도 차밭이었다. 나의 과오를 죽어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이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잃었군.”

입 밖으로 내어 중얼거리니 어째 한층 더 처량하게 들리는구나.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주변에는 차밭밖에 없으니 위험하거나 그러지는 않잖아! ……심하게 차밭밖에 없다는 것이 위험하면, 좀 위험하달까.

허리까지 올라오는 차나무를 헤치며 다시 한참을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녹색이란 것이 이토록 무료하고 끔찍한 그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는데. 하늘도 정말 대책 없이 파랗다. 파란색과 녹색 외의 다른 색이 절실히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니들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간간히 빨간색 열매라도 맺으면 오죽 좋아. 고추밭 봐라. 빨갛고 파랗고. 음양의 조화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냐.”

찻잎을 퉁기면서 중얼거리다가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사물에 말을 건네는 자신을 깨닫고 두려워졌다. 그나마 내 혼잣말을 걱정해 주던 인간은 국도해뿐이었지. 그날도 약 처먹고 할딱거리는 나를 가둬 버리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침대로 데려가 해결해 준 것도 그 인간이고, 예전에 거시기에 뱀 물렸을 때 다들 작별인사를 건네는 상황에서도 독 빨아 주겠다고 달려든 것도 그 인간, 저번에 더위 먹고 쓰러졌을 때도 병간호 해 주며 생전 안 하던 밥까지 해 준 것도…….

“하하하하.”

힘없이 웃으며 머릿속에 솟아나는 국도해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 냈다. 왜 자꾸 이러냐. 아무리 잘생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란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저 멀리서 흐릿한 인간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 만에 보게 된 인간의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저기요!”

손을 옆으로 붕붕 흔들면서 마구 달려갔다. 그쪽도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히익!”

비명을 삼키며 브레이크를 걸려 했지만 그 사람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검은색 양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한 남자의 포스는 범인(凡人)의 것이 아니었다. 안 돼. 이대로 갔다간 또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우아아아, 날씨 좋다아아!”

나는 그대로 두 팔을 활짝 펴고 나비처럼 파닥거리며 지나가는 방법을 택했다. 제발 속아 넘어가라.

“어이, 거기.”

“…….”

속아 넘어갈 리가 없지.

“사람이 말을 걸면 들은 척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등 뒤의 사람이 녹차 이파리에 말을 건네는 취미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네! 부르셨어요?”

그건 역시 무리라고 결론짓고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나?”

“네? 그, 그런가? 하하하핫.”

애매하게 대답했다. 지금 머물고 있는 펜션도 이 근처이고, 사는 곳은 순천이니 보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터다.

“그렇다면 혹시 이 근처에서 요즘 수상한 사람들 못 봤어?”

“수상한 사람이라니요?”

수상한 사람이라면 내 근처에 잔뜩 있긴 하지. 수상하기만 한가? 다들 하나같이 정상에서 이만큼, 벗어나 있다.

“봤어! 못 봤어? 그것만 말해.”

굉장히 무례한 남자였다. 생긴 것은 번듯했지만 한여름에 새카만 양복에 검은색 가죽장갑까지 끼고 있는 모습이 음산해 보였다. 한마디로 수상한 것은 이쪽이었다.

“본 거야, 못 본 거야! 왜 대답이 없어!”

윽박지르기까지. 같은 검은 양복이라도 국모 씨와는 천양지차구만. 그 인간은 화가 나도 총질은 해댈망정 어지간해서 소리 지르지 않는다.

……잠깐, 총질 쪽이 훨씬 문제 있잖아.

“사람 무시하는 거야!”

멱살이 잡히고 공중에서 발이 떴다.

“켁. 아, 아니요. 수상한 사람이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본 것뿐이라고요!”

“그래. 그럼 기억을 더듬어 본 결과는 어떤데?”

“어, 없는 것 같아요.”

“같은 거야, 없는 거야! 확실히 말해!”

“없어요!”

그제야 남자는 바닥에 나를 내동댕이쳤다.

“켈룩. 쿨럭, 큭.”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나는 제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요. 됐습니다.”

손바닥이 따끔해서 보니 차나무 가지에 긁혔는지 붉은 생채기가 길게 두 줄 가 있었다. 핏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으로 대충 동여맸다.

“으이씨, 아파.”

대놓고 화도 내지 못하는 소심한 나는 괜히 차나무를 슬쩍 걷어차며 남자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려 했다.

“어이, 너. 잠깐.”

“네?”

속으로 나쁜 새끼라고 욕했는데 설마 들린 건 아니겠지?

“손 좀 보여 줘 봐.”

“네?”

“손 보여 달라고!”

“알았어요.”

소리는 왜 지르고 지랄이래.

“그쪽 말고.”

남자가 내 왼손을 내리치며 손수건을 감은 오른손을 가리켰다.

“그쪽.”

“네? 이쪽이요?”

못 줄 거야 없지만, 갑자기 왜 저런대? 없던 양심이 돋아나서 내 상처가 딱해 보이기라도 한 건가.

“흐음.”

상처 난 내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을 풀어 버렸다.

“뭐하시는 겁니까?”

“미안하게 됐네. 많이 아팠지?”

“예에?”

그러면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내 손바닥에 감아 주기까지 한다.

“조심해야지. 상처에 균 들어가면 큰일 날 수도 있다고.”

“예? 아아, 감사합니다.”

뭐야 뭐야. 이건 왜 또 이래. 왜 썩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건데?!

“날도 더운데 빨리 집에 들어가 쉬어라, 아가야. 돌아다니지 말고.”

“예? 아하하, 예에. 저기 그런데 녹차밭 벗어나려면 여기서 어디로 나가야 하나요? 펜션 많이 몰려 있는 동네 쪽으로 가는 길이요.”

“여기서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냇가 나오거든? 그거 끼고 쭈욱 가면 길이 보일 거다.”

“앗! 정말 감사합니다.”

예상외로 이 남자가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뭘. 또 보자, 꼬마야.”

손까지 흔들고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지 않나, 내 손수건을 풀어 버리고 자신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묶어 주기도 하고, 마지막에 또 보자는 의미심장한 한마디까지.

“……설마.”

나에게 첫눈에 반한 것?!

예전 같았으면 상상치도 못했겠지만 금성탕지 같은 남자 국도해를 함락시키고 나니, 세상 어떤 남자도 내게 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이 치명적인 매력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

나는 남자가 가르쳐 준 길을 찾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남자의 말대로 10여 분을 걸어 내려가니 물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 그대로 달려가 냇가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꿀떡꿀떡 물을 삼켰다.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이 몸속으로 퍼지자 극락도 이런 극락이 없었다. 내친김에 세수까지 하다가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꾸질꾸질한 머리와 어제 밤새도록 시달려서 퉁퉁 부은 눈. 빙긋이 웃어 보니 칠푼이도 울고 갈 정도의 팔푼이스러운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진짜 국도해는 좋다고 하는 거야? 정말로 진짜의 진짜? 답을 찾았다는 얘기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각성했다는 얘기가 맞나? 지금이라도 가서 물어볼까나.

꼬르르르륵.

배가 세차게 용트림했다. 역시 물어봐야겠다. 절대 배가 고파서 돌아간다거나 하는 게 아니고 순전히 궁금해서 말이다.

벌떡 일어서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

나의 맑고 깨끗한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기 저 멀리서 귀신같은 얼굴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국도해 맞는 거 같은데? 아니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지? 그것보다 왜 저 인간이 여기에? 생전 달릴 것 같지 않은 인간이 필살의 기세로 달리는 모습에 겁이 덜컥 났다. 크아아악. 일단 튀고 보자. 죽을힘을 다해 달렸지만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렸다가 엄청난 얼굴을 한 국도해와 눈이 마주쳐 그대로 얼어붙을 뻔했다.

“으악!”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내 목을 움켜잡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달리던 관성과 뒤에서 작용하는 인력이 뒤엉켜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물론 넘어진 것은 나를 잡아챈 국도해도 함께였다. 흙바닥을 몇 번이나 구르고 난 후에야 풀밭에 안착할 수 있었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국도해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옷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기 때문에 흙 알갱이가 씹히는, 상큼하지 못한 키스였다. 놀랍게도 청결에 목숨을 거는 국도해는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입술 언저리를 혀로 모조리 핥아내기까지 했다. 급박한 산소 결핍으로 인해 나는 발버둥치며 그를 밀어냈다.

“푸하아악!”

눈앞에 기하학적 무늬의 별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왜지.”

“하아……, 하아. 네?”

“왜 말도 없이 나간 거냐고 묻고 있다.”

“그게……, 그러니까 산책, 산책 나왔습니다.”

내 뇌가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낸 구차한 변명이었다.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비상계단을 통해?”

“……제가 원래 기분파라서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국도해가 보였다. 어디에서부터 달려온 것인지 서늘해 보이는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국도해의 눈가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툭하고 떨어지자, 어제 침대 위의 모습과 겹쳐 보여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눈 돌리지 마.”

그가 내 턱을 고정시키며 한마디 덧붙였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눈 돌리지 마.”

“――――!”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눈은 깜빡여도 된다.”

“아, 감사합니다.”

재빨리 눈을 깜빡거리자 생리적인 눈물이 한두 방울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국도해가 손으로 직접 눈물을 닦아 주며 정나미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즉흥적으로 가출해서 고작 온 곳이 집에서 3km나 떨어져 있는 이곳이란 말이군.”

“그렇게 멀리 왔어요?!”

정말 정처 없이 걷긴 했지만 이렇게 멀리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일으켜 주고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언제나 먼지 하나 없이 완벽한 상태를 자랑하는 그의 구두가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나를 찾기 위해 이렇게까지…….

“뭘 보고 있어. 닦아.”

……걱정했을 리가 없지. 투덜거리며 손수건을 찾았지만 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가져가 버린 것을 떠올렸다. 하는 수 없이 손에 감긴 것을 풀어 구두를 슥슥 닦아 냈다.

“그건 뭐야.”

“네?”

“그 손수건.”

국도해가 내 손에 들린 손수건을 가리켰다.

“아아, 이거요…….”

말을 이으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저 더러운 성격에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른다.

“넌 손수건 없잖아.”

“아하하, 주웠어요.”

“뭐?”

“길 가다가 주웠어요.”

“내가 준 건.”

“……잃어버리고요.”

“…….”

국도해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주머니에서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내민다.

“이걸로 닦아.”

“에이, 아무거나 닦으면 어때요. 어차피 구두 닦…….”

“이걸로 해.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는 천 쪼가리 따위로 닦지 말고.”

“알겠어요.”

손수건을 건네받다가 귀퉁이에 놓여 있는 수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어라? 이거 뭐예요? DH면 혹시 국도해 씨 이니셜?”

“그런데.”

하긴 연필 한 자루에도 이름을 새겨 놓던 버릇이 어디 가시겠어.

“하하핫, 나중에 그러다가 자기 애인한테도 국도해 씨 이름 새겨 놓는 거 아닙니까.”

웃으라고 던진 농담을 국도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새길까?”

“네에!?”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나빠요! 엄청 나쁘다고요! 네버! 절대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가면서 부정의 뜻을 표했다. 흠흠, 아직 내가 저 인간의 애인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1%라도 있는 한 최대한 위험은 줄여 놓는 것이 좋다.

그가 다시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이며 키스를 시도했다.

“앗―!”

엉겁결에 뒤로 몸을 빼며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 버리고 말았다. 손바닥 사이로 보이는 국도해의 얼굴에서는 의아함과 함께 거절당했다는 분노가 묻어났다.

“싫어?”

싫으면 죽이겠다는 기세다.

“아, 아니요. 싫은 게 아니고 여긴 너무 뻥 뚫렸잖아요. 그리고 가려진 것도 없고. 으음, 하하. 제가 또 한부끄러움 하잖아요. 아시죠? 부끄러움 빼면 저 시체인 거.”

“알았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내 눈을 가려 버렸다.

“――――?!”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놀라 흠칫한 순간 축축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보이지 않아도 그것이 그의 입술이고 혀라는 것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안은 채, 그는 키스에 열중했다. 조금씩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혀가 입안을 간질이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핫, 간지러워요.”

“……평생 너 같은 건 처음 본다.”

“예?”

눈이 가려진 채 대화를 나누고 있어 상대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흠칫거리는 주제에 할 말은 다 하잖아.”

“그, 그렇게 되나요.”

“멍청한 건지 똑똑한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군.”

그렇게 말하는 국도해의 음성에서 엷은 웃음이 배어 나왔다. 순간,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내 입을 가로막는 그의 입술 때문에 나의 생각을 전달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도발적이고 원색적인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에 나도 모르게 혀를 움직이면서 응하고 말았다.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내 눈을 가리는 커다란 손도,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감촉도 이상하리만치 기분 좋았다.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심장 박동이 높아졌다. 입안에서 퍼져 가는 온기에 복잡하게 엉킨 마음들이 사르르 녹아 가는 것 같았다.

눈을 가리던 손이 사라졌다. 기묘한 느낌을 주는 국도해의 눈이 드러났다. 그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짝이 맞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게 더할 나위 없이 야릇했다. 먹으로 그린 수묵화 같은 깊은 눈으로 국도해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 사이로 향긋한 차향이 퍼졌다. 그 순간, 방금까지 그렇게 지겹게 느껴지던 녹색의 차나무들이 오롯한 생명력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우연이었다.

“앞으로.”

낮고 명확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어쩌지? 사귀자고 하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지금 이 분위기에서는 뭐든 예스, 라고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데.

“허락 안 받고 돌아다니면 다리를 분질러 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라.”

“……예.”

……정말이지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분위기였다.

국도해의 손에 이끌려 펜션 안에 도착하자마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받았다.

“지금 오시면 어쩌십니까.”

“아까부터 전화했었는데, 핸드폰은 꺼 두시고!”

“괜찮으십니까? 누구 따라오는 녀석 없었습니까?”

아니, 묻기는 왜 국도해에게 물으면서 눈들은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야. 날 밝을 때 나가서 컴컴해질 때 산책을 마치긴 했지만 그게 어째 다 내 탓인가. 갑자기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미친 듯이 키스를 한 시간 내내 하던 니네 형님 탓이지.

“어디 가게요? 왜 짐은 다 쌌어요?”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짐을 발견하고 내가 물었다.

“니는 지금 상황이 으떤지 알고 떠드나. 하이고, 참말로.”

“상황이 어떤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으면서.”

“안 좋습니다.”

관표 형님이 짧게 답해 주었다. 

기분 탓인가? 어째 대답에 가시가 서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요?”

“그건…….”

성새민이 말끝을 흐리며 국도해를 바라보았다.

“듣고 싶어?”

그가 말끝을 천천히 늘어트리며 물었다. 그 기세가 너무 살벌해서 차마 네, 라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니, 뭐 궁금하긴 하지만 말도 안 해 주고 나한테만 쉬쉬하니까…….”

“나에 대해 궁금한 거야, 아니면 단순히 상황이 궁금한 건가?”

“네?”

“둘 중 어느 쪽인데.”

전자가 2할 섞인 8할의 후자라고 대답했다간 요절날 분위기다. 게다가 주변에서 모두 어서 첫 번째를 택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르자면 전자인가? 하하하핫, 생각해 보면 국도해 씨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서울로 올라가면서 천천히 알려주도록 하지.”

“도해 형님!”

“형님, 지금 서울로 올라가실 생각입니까?!”

서울로 올라간다는 한마디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서울에 빚이라도 지고 내려왔나. 다들 왜 저러지.

“형님, 방금 전에 말씀하신 거 진심이십니까?”

관표 형님이 정색하며 물었다.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

여기서 나는 그거 봤다고 손들면 두들겨 맞겠지. 그럼에도 손을 들어 보고 싶은 것은 전철이 지나갈 때 다리를 내밀고 싶은 심정과 같은 맥락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서울로 가신다는 거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 줄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이유가…….”

관표 형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거기에는 착각이라고 넘길 수 없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제가 올라가자고 안 했는데요.”

일단 대뜸 끼어들었다.

“가만히 있어.”

국도해가 손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고, 다시 말을 시작했다.

“내 결정이다.”

“형님!”

“도해 형님!”

“형님, 지금은 양쪽 모두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일단 연락이 닿는 대로…….”

“언제부터 네가 내 행동을 결정하게 되었지.”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오만이었다. 하지만 모두 거기에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게 만드는 힘이, 그에게는 있다.

“죄송합니다.”

“식사하고 나서 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지.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눈에 고요한 의지가 엿보였다.

“알겠습니다.”

모두 대답은 하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궁금해서 입이 근지러워 죽겠지만 차마 왜 그렇게 우울해하는 거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저기요.”

그래도 중요한 것은 콕콕 짚어 줘야지.

“왜.”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고속버스 타고 집으로 내려가요?”

보성에서 순천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을 감안하면, 그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고속버스를 타는 곳까지만 바래다 달라고 할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같이 서울로 가.”

“예? 서울이요?”

“그래.”

그러니까, 이런 대답을 얻으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란 말씀이지.

“형님! 그건 안 됩니다.”

“위험하잖아요!”

모두 극구 반대했다. 나 역시 구석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반대 시위에 동참했다.

“한 선생님이 위험에 처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관표 형님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요청했다. 나 역시 바닥에 엎드려 통촉해 달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이 녀석을 위험에 처하게 할 정도로 한심해 보이나.”

두근.

방금 전 말이 심장에 직격으로 닿았다.

“다른 분이라면 몰라도 한 선생님이라면 위험에 스스로 몸을 던지시고도 남을 분입니다.”

“예! 형님. 저 녀석이라면 자기가 문제를 일으키고도 남는다고요.”

“이런 상황에 어떻게 쟤를 서울로 데리고 갑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관표 형님의 침통한 선언에 힘입어 모두 나를 트러블메이커로 만들기 여념이 없었다.

“아니, 잠깐. 누가 위험에 다이빙을 한다고……앗!”

갑자기 집안의 모든 불이 퍽 소리와 함께 점멸했다.

“뭐꼬?”

“정전인가?”

창가에 서 있던 박건우가 커튼을 열어 본 후,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은 괜찮은데요. 정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민이랑 유수, 가서 두꺼비집 확인하고 와라.”

“예!”

“으악, 너 왜 내 발 밟아!”

“형님 발이었어요? 그러게 좀 비키시지.”

역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가만히 서 있기가 뭐해 소파 쪽으로 슬금슬금 가고 있는데 자꾸 뭔가에 부딪혀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 누구십니까.”

관표 형님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물었다. 동시에 불이 들어오면서,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들이.

“오랜만이다, 국도해.”

검은 양복 무리 사이에서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긴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헉!”

나의 기억 세포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저 남자는 분명 낮에 만났던…….

“쥐새끼처럼 이런 곳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천하의 국도해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이죽거리는 모습에서 상대에 대한 증오가 완연히 묻어났다.

“누가 쥐새끼처럼 졸졸 쫓아다닐 줄은 몰라서.”

“뭐, 뭐라고!”

남자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던지는 말마다 칼끝 같은 국도해의 독설에 새삼 몸이 떨려 왔다. 천하의 나도, 저 인간하고는 입으로는 맞짱 뜨고 싶지 않다니까.

“하핫, 그래. 흑건파와 해서파 둘 모두에게 쫓기는 기분이 어떨까 궁금해서 찾아왔지.”

“별 게 다 궁금하군.”

국도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상대했다. 그런데 해서파와 흑건파 둘 다라니? 분명 흑건파의 차기 보스가 국도해라고 하지 않았었나?

“하루아침에 꼬리를 말고 사라진 국도해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크하하하핫!”

“말씀 삼가시죠. 누가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는 겁니까.”

성새민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대꾸했다.

“그러면 흑건파의 넘버 투가 하루아침에 패배자가 돼서 두 파에게 쫓기는 것을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그쪽이 한 번 말해 보지.”

“그건 이윤기 씨가 생각해 낸 더러운 계략이었잖습니까!”

“설마 한 번 찔러본 것인데 강대길이가 넘어올 줄 내가 알았나. 국도해가 치고 올라갈지 모른다는 그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서 이쪽이랑 손잡을 줄 내가 알았느냐고. 하하핫, 그렇게 보면 국도해 너란 놈도 참 대단하다. 너무 잘나서 문제잖아.”

국도해는 그 까다로운 성격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외모도, 머리도, 공부도, 그리고 그림. ……심지어는 침대에서의 테크닉까지.

뭐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능숙하게 해내는 그 인간이 부럽기도 했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조금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국도해가 살짝 턱을 올리며 대답했다. 석고상보다 더 반듯한 콧대가 오만한 음영을 띠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 칭찬해 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

“――――!”

KO패다. 같은 팀조차, 지금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고 있잖아!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국도해가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담배를 빨아들이며 살짝 눈을 내리감는 모습이 관능적이었다.

“넌 나에게 너무 관심이 많아.”

“뭐, 뭐라고!”

“피차 관심 끄고 살지.”

“이 새끼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알고 까부는 거야!”

이윤기의 외침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집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처음 들어온 숫자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것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들어온 것 같았다.

“크크큭, 내가 오늘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다고. 국도해, 너만 생각하면 손마디가 쑤셔 잠이 와야 말이지.”

이윤기가 끼고 있던 검은 가죽장갑을 벗어던졌다. 흉한 흉터가 남은 손에는 네 번째 손가락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뭐라카노. 시끄러 죽겠네. 또 들어올 아새끼들 있으면 빨랑 들어오라카이. 한번에 쓸어 버리게.”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지용재와 성새민이 키득거리면서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매번 문제를 일으키는 주둥이를 이번에는 고이 다무는 편을 택했다.

자아, 있어 봤자 도움도 안 되는 나는 이쯤에서 퇴장을……헉.

“호오, 이게 누구신가.”

“아, 안녕하세요. 하하하핫.”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나를 이윤기라 불리던 남자가 잡아 일으켜 주었다.

“또 보자고 했더니 바로 보네, 크큭.”

“둘이 아는 사이야?”

성새민이 멧돼지 같은 윗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물론 아는 사이지. 이번에 어떤 찌질한 녀석들이 필로폰 들여오다가 걸려서 경찰서에 잡혀갔잖아. 우리 애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중간에 판매책이 아니고 가방을 도둑맞았다고. 하하핫, 어떤 간 큰 놈인가 했더니 굉장한 미남을 포함한 여섯 명의 남자라잖아.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생겼나 애들 시켜 네 사진 좀 들려서 확인 좀 해 봤지.”

국도해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단번에 알아보던데, 하하핫. 다른 놈들은 몰라도 국도해 네놈 얼굴 하나는 기억에 똑똑히 남는다고 하더라.”

……그러게 작작 잘생길 것이지.

“이래저래 알아보니 보성 휴게소 근처에서 마주쳤다고 하기에 혹시나 싶어서 여기에 들러 봤지. 그래도 이 넓디넓은 곳에서 널 어떻게 찾을 수 있겠어.”

이윤기가 갑자기 나를 자신 쪽으로 잡아끌면서 소리쳤다.

“이 녀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지.”

“니 또 뭐라 씨부렸노!”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수상한 사람 못 봤냐고 물어봤는데 못 봤다고 진짜 리얼하게 뻥깠단 말이에요!”

“수상하긴 누가 수상해!”

“당신들! 당신들 열라 수상하잖아.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 가면서 의리를 지켜 줬는데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저놈아 우리 편인 기가?”

“……아닌 거 같죠.”

나로 인해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걸 갖고 있더군.”

이윤기가 주머니에서 국도해의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자기 물건에 이름 쓰는 버릇은 여전해. 혹시 이 녀석의 몸에도 이름 써 둔 건 아닌가 모르겠군.”

이윤기가 내 목에 시퍼런 사냥칼을 들이댔다.

“크악. 왜, 왜 이러세요. 전 민간인이라고요.”

“하하하핫, 그래 민간인이긴 하지. 국도해하고 얽혀 있는.”

칼날이 내 목에 와 닿는 감촉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놔라.”

국도해가 말했다.

“오호, 이거 봐라. 손수건을 정표로 주셨기에 혹시나 하고 짚어 보니 진짜였잖아. 크하하핫, 천하의 국도해가 저런 표정을 하다니!”

이윤기의 말대로 국도해의 표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내 장담하건대 남극에 얼어붙어 있는 빙하도 저것보다는 따스할 것이다. 국도해가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던졌다. 청결 최우선주의자인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심각하게 화가 나 있다는 증거였다.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는데, 안 되겠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죽고 싶지 않으면 놔라. 마지막 경고다.”

“크하하하, 대체 그 좆 같은 여유는…….”

웃고 있던 이윤기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이마를 따라 움직이는 붉은 불빛이 그의 웃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머리에 구멍 나고 싶지 않거든 그 더러운 손 놔.”

“그, 그랬다간 이 녀석도 무사하지 못할걸!”

사냥용 칼이 목을 누르자 핏방울이 툭하고 옷깃을 적셨다.

“으윽!”

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과는 상관없이 국도해는 여전히 냉정한 태도로 일관했다.

“다른 놈이라면 그렇겠지만, 저 녀석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국도해가 가리킨 곳에서 총을 들고 있는 박건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윤기의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설마 건 아냐?”

“건이 왜 여기에 있어!”

“제길, 하필 왜 건이야.”

내 뒤에 있는 이윤기도 놀랐는지,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한 번에 다섯이다. 허튼 수작하지 마라.”

총을 겨누고 있는 박건우는 평소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얼빵해 보일 정도의 미소도 어눌한 말투도 오간 데 없었다. 거기에는 스나이퍼 건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 좋아. 어디 한 번 해 볼까? 내 머리에 구멍이 나는 한이 있어도 네 애인 목구멍에도 구멍을 낼 테니 말이야.”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공포를 느꼈다.

“으윽―――!”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아 냈다. 괜히 아픈 척해서 국도해에게 폐라도 되면…….

“아니다.”

“뭐?”

국도해가 나를 정확히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녀석 내 애인 아니라고.”

“뭐, 뭐라고? 거짓말하지 마! 어디 누굴 속이려고!”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나.”

차갑게 가라앉은 국도해의 눈과 마주하는 순간 내 안의 이성이 핏, 끊겼다.

“이 망할 인간아!”

국도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망할……, 인간?”

국도해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망할 인간이지 뭐여! 이번이 대체 몇 번째인 거여! 내가 뭐땀시 목구녕에 칼을 대고 이 지랄을 해야 하능겨!”

“부탁인데.”

그가 손으로 미간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너, 그 입 좀 다물어.”

“시방 부애가 나서 뒈지뿐지겠구만 아구지 다물게 생겼어라! 뭐여 이것이! 워째 내가 이런 지랄을 겪어야 하는데! 막말로 내가 니 애인이라도 된다냐! 왜 날 미끼로 잡아 부리는 거여! 옘병! 왜 다들 나를 못 잡아 처먹어 지랄들이야! 이 쎄가 오댓발이나 빠질 것들아!”

“뭐, 뭐라는 거지?”

“몰라. 거의 외국어 수준인데.”

사투리도 못 알아 처먹는 무식한 것들 같으니.

“놓드라고, 나가 저놈 애인도 아닝께 이제 고만 하드라고!”

이윤기를 보면서 외쳤다.

“뭐라고?”

“나가 저 인간 애인도 아닝께…….”

“그럼 할래?”

뜻밖의 말이 국도해의 입에서 던져졌다.

“뭐시라?”

“그럼 지금부터 애인하자고.”

“시, 시방 뭐라는겨. 애인을…….”

“지금부터 사귀자고. 못 알아듣냐.”

“무, 무슨 소리를…….”

“서울로 가서 상황 정리하고 정식으로 말하려고 했다. 지금 네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니 지금 여기서 해야겠군. 나랑 사귀자. 내 애인 해라, 너.”

……나의 정물이 되어라와 지금 변한 게 없는 말투인데?

“자, 장난하십니까?”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형님! 진짜 저 녀석하고 사귀실 생각입니까?!”

“도해 형님! 지금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말도 안 됩니다! 왜 국도해 님이 저런 걸 애인으로 삼습니까!”

“맞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내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저 항의는 분명히 이윤기 뒤에서 터져 나온 것인데. 왜 적들까지 흥분해서 난리야!

“잠깐,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이만하면 어디 가서 안 빠지거든!”

“선생님. 혀, 형님하고 사귀는 거냐?”

스나이퍼 건이 평소의 어벙한 박건우로 돌아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누가 사귄데!”

“그럼 뭐야! 왜 둘이 그래! 수상하잖아!”

거의 울 기세였다.

“내가 언제 너희 형님하고……!”

“사귈 거야, 말 거야. 애인이라면 목숨을 걸고라도 구해 줄 테니까.”

“말도 안 돼! 어째서 국도해 님이!”

“행님, 안 됩니더!”

적군이고 아군이고 난리가 났다.

“뭔 상관들이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만――――!”

등뒤에서 이윤기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장난해? 이게 장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사냥용 칼이 살갗을 파고들자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히익―――!”

눈물이 떨어질 만큼 아팠다.

“어쩔 건데.”

“뭐!”

저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도 어째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저 지랄이야.

“사귈 건지 아닌지 묻고 있잖아.”

사귄다고 하면 인질로서 가치 상승.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인질 구출 가치 하락.

앞으로는 국도해, 뒤로는 이윤기였다.

자아, 확률을 계산해 보자. 이쪽은 국도해를 포함해 다섯, 저쪽은 하나 둘 셋……족히 서른은 넘는군. 게다가 다들 손에는 쇠파이프 내지는 사시미 칼. 머리야, 어서 숫자를 계산해 내라!

“……해.”

“뭐?”

“뭐라고?!”

“뭐라카노?”

모두 나의 입을 주시했다.

“안 해! 안 사귄다고. 나, 나도 굳이 편한 쪽을 택하라면 이쪽입니다.”

예전에 복구와 나 사이에서 말했던 국도해의 제스처를 그대로 따라하며 말했다.

“그래.”

예상외의 담담한 국도해의 반응.

“뭐꼬? 그럼 저놈아가 지금 우리 행님을 찼단 말인 기가?”

“말도 안 됩니다! 왜 저런 사람이 도해 님을 찹니까?!”

“야! 너 우리 형님이 어디가 어때서!”

어째 사귀겠다는 반응보다 이쪽이 더 거칠잖아?

“내가 누구랑 사귀든 내 마음이잖아요!”

“그럼 나랑 사귀어요!”

2층 계단에 서 있던 박건우가 감격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더 싫거든!”

“입 닥쳐!”

이윤기가 우악스럽게 내 목을 움켜쥐었다.

“켁!”

숨통이 틀어막히는 느낌에 발버둥을 쳤지만, 이윤기는 풀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죽는다. 목이 졸린 시체가 얼마나 흉한지 언젠가 들은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혀는 소시지처럼 입안을 비집고 나오고, 바지에는 오줌똥이 가득하다고 했었지. 아아, 안 돼……그렇게 마지막을 장식할 수는 없어. 모두의 기억에 그딴 시체로 남고 싶지는 않다고!

의식이 끊어지려는 순간 필사의 힘을 긁어모아 내 목을 조르고 있는 팔뚝에 이를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이런 개새끼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았다. 바닥에 부딪히면서, 탁자에 얼굴을 부딪쳐서 코피까지 터졌다. 코피를 닦을 새도 없이 이윤기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죽여 버리겠어!”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섬뜩한 칼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길지 않은 내 인생 이렇게 가는구나.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눈 딱 감고 국도해한테 사귄다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분명히 살아날 확률이 이쪽이 13%나 높았단 말이야. 위풍당당이 우승할 확률도 그러고 보니 13%나 높았었지. 저주받을 확률 같으니!

“한봉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칼이 살갗을 파고 들어가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얼굴로 더운 피가 훅 하고 끼얹어졌다. 이제 죽는 일만 남았다. 얼굴 가죽을 뚫고 칼이 들어왔으니. 그런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은 이유는…….

“―――!?!”

“누가 함부로 건드려도 좋다고 했지.”

“이―!”

나뿐만 아니라 칼을 휘두른 이윤기조차 놀란 것 같았다. 국도해가 맨손으로 칼을 막을 거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을 관통한 칼끝에 맺힌 핏방울이 툭하고 내 얼굴에 떨어졌다.

“……아…….”

공포와 죄책감, 알 수 없는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말을 가로막았다.

이윤기의 얼굴에 자신의 숙적에게 한 방 먹였다는 잔인한 고소가 스쳤다.

“하하하핫!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도해의 흰색 셔츠가 피로 물들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소름이 돋을 만큼.

“하하하하하하하……?”

이윤기가 칼을 빼내려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이게!”

“경고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뭐?!”

순식간이었다. 국도해가 손바닥을 관통한 칼을 그대로 움켜쥔 채 빼앗은 것은. 그러고는 말릴 사이도 없이 그대로 이윤기를 향해 휘둘렀다.

“으아아악!”

분수처럼 솟은 피와 함께 손가락 마디가 팝콘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주저앉은 내 옷 위로 떨어진 손가락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다 죽여 버려! 국도해, 개새끼 죽여 버리겠어!”

이윤기가 반대편 손으로 떨어진 손가락을 더듬어 찾으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 후 여기저기서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어우러져 한바탕 소동이 빚어졌지만, 나의 뇌는 활동을 멈추고 그로기 상태에 멈춰 있었다.

“…….”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지.

어째서 성새민은 저렇게 사람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고, 관표 형님은 무서운 얼굴로 세 명의 손을 한 번에 꺾어 버리는 것이고, 지용재는 쇠파이프를 맞고도 끄떡없는 것이며, 김유수마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인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맞는 것일까?

그리고…….

“한봉팔.”

“…….”

“어이, 한봉팔. 정신 차려.”

어째서 국도해가 내 본명을 부르며 다정하게 내 뺨을 후려갈기고 있는 걸까.

뺨에 달라붙은 피가 현실성 없이 흘러내렸다.

“정신 차리라고!”

철썩.

다시 한 번 세게 얻어맞았다.

“왜 때려요!”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다행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군.”

“제정신이라니 언제 제가……, 흐이익!”

눈앞에서 피거품을 문 남자가 꼬르륵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며 국도해의 팔을 붙들었다.

“팔 놔.”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놈의 결벽증을 발휘하고 싶냐.

“자, 잠깐만요. 으악, 어떡해. 저기 저 사람들……크아악.”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있는 힘껏 국도해의 팔을 부둥켜안았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간절히 필요했다. 하지만 다정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그는 나를 떨어트리기 바빴다.

“나중에 실컷 잡게 해 줄 테니까, 지금은 놔.”

“시, 싫어요! 안 돼. 절대 못 놔!”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총알이 날아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이 상황에서 어떻게 홀홀단신 있을 수 있겠냔 말이다.

“손가락, 내 손가락……씨발, 밟지 마! 개새끼들아, 저리 꺼지란 말이야! 뭣들 하고 있어! 얼음통 가져와! 얼음통!”

이윤기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부여잡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소리질렀다. 누군가 허둥지둥 양동이에 얼음을 담아 가져왔지만 그 안에 던져진 손가락은 두 개밖에 되지 않았다.

“손가락 찾아와! 나머지 두 개 못 찾아오면 늬들은 다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손가락에 대한 이윤기의 집념은 대단했다. 하지만 이윤기의 부하 중에 함께 손가락을 찾아 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2층에서 날아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침에 의해 대부분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고, 그나마 남은 사람은 맨손으로 곰도 때려잡을 것 같은 남자들을 상대해야 했다.

“개자식. 국도해 빌어먹을 새끼!”

새빨간 눈을 하고 손가락을 찾던 이윤기가 이쪽을 바라보며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들고 달려들었다.

여기서 문제.

국도해의 오른쪽 손바닥은 칼에 찔렸으며 왼쪽 손에는 내가 매달려 있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눈이 뒤집힌 이윤기는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적절한 행동을 고르시오.

1번, 울면서 기도한다.

2번, 국도해를 들쳐 업고 도망간다.

3번, 싸운다.

어처구니없이 3번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답이었지만 그때의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윽! 젠장.”

있는 힘껏 이윤기를 발로 걷어찼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그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했다.

좋았어. 나도 하면 되는구나! 이윤기를 막기 위해 일단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다. 쿠션, 슬리퍼, 책, 손가락……크엑? 손가락?!

미친놈처럼 칼을 휘두르던 이윤기가 자신의 앞으로 날아든 손가락을 솜씨 좋게 두 동강 내고 말았다. 매끄러운 손가락 단면이 그의 칼솜씨를 입증하고 있었다. 횟집 장인도 와서 한 수 배우고 가야 할 솜씨였다.

브라보, 이건 박수라도 쳐 줘야 한다. 절대로 그래야 한다.

“크아아악!”

……그렇지 않으면 저 괴물처럼 날뛰는 이윤기를 무슨 수로 달랜단 말이냐.

“너, 너 이 새끼!”

그의 분노가 단번에 나에게 꽂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으아악!”

달려드는 이윤기에게 힘차게 발길질을 하며 비굴하게 변명했다. 하지만 내 발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잡혔다. 우연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꿰매 줄게요! 내가 꿰매 주면 되잖아아아!”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지르는데 발목 부분이 허전해졌다. 이제 꼼짝 못하고 발병신이 됐구나 하고 울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이윤기는 내 신발을 움켜쥔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어이가 없군.”

국도해가 나를 매달고 선 채로, 정말 한심하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퀼트라도 할 생각이었나.”

“퀼트……라니요?”

그가 턱으로 말끔하게 두 동강 나 있는 손가락을 가리켰다. 천을 누덕누덕 기우는 퀼트가 떠오르자 피투성이 손가락을 누덕누덕 기우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윽…….”

토기가 올라왔지만 입으로 손을 틀어막으며 간신히 참아 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도해 형님!”

“손은 어떠십니까?”

상황이 정리되어 가자, 국도해의 주변에 그의 무리들이 모여들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커먼 사람 더미를 보자 다시금 한기가 올라왔다.

“손을 보여 주십시오. 뭣들 하고 있어. 가서 약상자 가져와.”

관표 형님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걱정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형님.”

김유수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 뚜껑을 열었다. 여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상처를 보는 관표 형님의 옆모습을 보자 심장이 쿡하고 쑤셨다.

설마 나……관표 형님을 좋…….

“약속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않으신다고.”

……좋아할 리가 없지. 무모한 짓, 이란 단어를 내뱉으면서 날 노려보는 저의가 뭐냐.

“무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너덜해진 손바닥을 내보이며 국도해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육점 고기가 연상되는 붉은 빛의 살점들을 보면서 무모하다에 과감하게 한 표 던지고 싶었다.

“어이, 너 괜찮냐.”

국도해가 다치지 않은 손으로 나의 턱을 잡아끌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차갑지만 어딘지 모르게 다정한 눈과 마주치자 아픔이 다시 가슴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역시 이 아픔의 진원은 국도해인가.

“한봉팔, 또 정신이 나갔군.”

국도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추었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열어 혀를 섞다가, 옆에서 경악스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헉!”

놀라서 후다닥 혀를 철수시키고 국도해를 밀어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오, 쏘아버린 화살이로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

정신이 들다 뿐이냐.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냉수마찰을 한 기분이다. 불행히도 냉수마찰을 당한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더…….”

“……더…….”

다들 필사적으로 가장 순화된 표현을 찾는 모양이었다. 국어 성적이 좋지 않은 모두의 시선이 관표 형님에게 향했다.

“더…….”

그가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가슴을 졸이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제발, 양치질을 해 주십시오.”

한마디로 정신 차리란 얘기군.

“나중에.”

국도해는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얼굴로 내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뺨에 달라붙은 응고된 혈액의 감촉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마 생명의 은인에게 손을 떼어 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까 그 대답.”

“……네?”

건더기가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침을 삼켜 안으로 내리눌렀다.

“이윤기를 혼란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건가. 그럴 필요 없었는데.”

“무, 무슨 대답이요.”

“나랑 사귀지 않는다고 했던 것.”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살점이 보이는 국도해의 손바닥으로 눈이 돌아갔다.

“……그거 진심인데…….”

나의 온 정신은 위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려는 건더기들을 억누르는 데 쓰이고 있었다. 말을 돌려서 얘기할 정신이 없었다.

“진심…….”

순식간에 얼어붙는 국도해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칼날처럼 날카로운 공포를 맛보았다.

“우에에에엑.”

그리고 그 공포는 오바이트를 참아 내던 내 정신을 분산시키기 충분했다.

“우엑. 우에에에엑―――.”

……차고도 넘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