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흐윽, 흐으윽, 크흑…….”
“그만 울어라! 누구 죽었나!”
“죽었어요! 나 죽었어요. 앞으로 나 죽었다고!”
“뽕팔이 왜? 왜 죽었는데?”
내 본명을 알고나자 곧 죽어도 뽕팔이라고 부르는 김유수가 얄밉게 물어 왔다.
“준이거든! 내 이름 뽕팔이도, 봉팔이도 아니야! 개명 신청해서 고친 지가 언제인데 봉팔이래!”
“형님이 봉팔이라잖아. 준은 안 어울린다고 집어치우라고 하셨잖아.”
“형님이 뭔데! 너희 형님이 뭐라고 내 이름 보고 감 놔라, 배 놔라야!”
“네 애인이잖아.”
김유수가 열라 씹딱구리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크허어어엉, 젠장, 흐윽.”
다시금 떠오르는 나의 처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나를 위로차(?) 만나러 온 사람들을 보자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우냐고. 봉팔이 주제에 감지덕지지.”
내 이름은 아예 봉팔이로 통일한 모양이었다.
“감지덕지는 얼어죽을! 사람이 오바이트 좀 했다고 걷어차는 남자가 어떻게 감지덕지예요! 민간인이 손가락 잘린 거랑 손바닥 뚫린 거 보고 즉석 기절 안 한 게 다행이지! 오바이트했다고 몇 분 전에 사귀자고 했던 상대를 걷어차는 게 그게 정상이야!”
“……난 니가 안 죽은 걸 보면, 형님이 널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성새민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형님이 너 걷어찬 거, 토한 것보다는 안 사귄다고 해서 더 화가 나신 것 같던데.”
그렇다고 허리가 꺾일 정도로 걷어차냐! 덕분에 아직도 내 허리에는 손바닥만한 파스가 붙어 있다. 뿐인 줄 아냐. 토하다 기절한 나를 그대로 서울까지 납치해서 자기 방에다 6박 7일 동안 식량과 함께 가두어 두기까지 했다. 일주일 만에 그 집 문이 열렸을 때, 그 순간 느꼈던 기쁨은 에덴 동산에서 이브를 만났던 아담 같은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이브가 아닌 아담, 그것도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무시무시한 아담이었다는 것이지만. 아무튼 돌아오자마자 국도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두 시간 동안 쳐다보았다. 결국 나는 울부짖으면서 사귀겠다고 두 손을 들었다. 차라리 윽박지르거나, 화를 내거나, 협박이라도 하든지. 어떻게 인간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두 시간 동안 쳐다보고만 있냐고!
내가 사귀겠다고 말하던 순간에도 국도해의 얼굴에는 기쁨도 놀라움도 없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생각했다, 는 한마디뿐. 심지어 내가 삼 일 동안 머리를 감지 않았다고 하니까 쓰다듬던 손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치기까지 했다.
나쁜 인간. 인정머리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귀신같은 놈.
“허어엉, 젠장. 내 팔자야…….”
가슴을 텅텅 내리치면서 서럽게 울자, 과일을 깎아 온 관표 형님이 혀를 차며 한마디 하셨다.
“형님이 한 선생님을 위해 이 일주일을 어떻게 지내셨는지 아십니까?”
“흐윽……, 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문제 해결을 하시는 분이, 급작스럽게 모든 걸 뒤집어엎으셨다 이겁니다.”
“뭘 뒤집어엎어요? 그리고 그때 이윤기인가 뭔가 하던 사람이 한 얘기가 뭐예요? 국도해 씨가 왜 도망을 다녀요?”
기회는 이때다 싶어 눈물을 닦으며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그때 얘기는 대충 들어 아시겠지만 이윤기 씨가 도해 형님의 윗분 즉, 흑건파의 보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습니다. 도해 형님이 보스를 치고 올라가서 흑건파를 장악할 계획이란 얘기죠.”
“장악은 무슨 얼어 죽을. 형님이 언제 그런 것에 욕심 부리는 거 봤냐? 빌어먹을 새끼들.”
“그러니까 말이야!”
김유수와 성새민이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엥? 보스라면 그쪽들한테도 대빵 아니에요?”
“틀려. 우리는 도해 형님을 모시는 거지, 그 사람 때문에 있는 게 아니니까.”
“하모! 지금에 와서 하는 소리지만, 강대길이 그놈아는 아무리 봐도 대장감이 아니었다 안카나.”
“뭐 이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 도해 형님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했던 것이겠지요.”
국도해에 대한 이 사람들의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한 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내가 보스라 할지라도 불안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 인간의 카리스마와 존재감은 아무리 같은 무리라 할지라도 위협적일 정도였다.
“아무튼 국도해라는 존재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보스가 해서와 손을 잡고 수배령을 내린 것입니다.”
“크하하하핫, 그때 참말로 웃겼데이. 너도 나도 몰려와서 도해 행님한테 어서 도망가라고 하는데, 아무도 보스 명은 듣지도 않고 말이다.”
“그래서 순천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순천의 그 집은 형님이 은퇴를 하시면 지낼 생각으로 지어 둔 곳이었고요.”
그날 아이스크림 사건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그와 만날 운명이었단 얘기군.
“도해 형님은 보스 자리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적당히 은퇴하실 생각이었는데 주변에서 가만 두질 못한 거지, 젠장.”
국도해 팬클럽을 만들라고 하면 회장 자리를 꿰찼을 김유수가 말했다.
“그래서 숨어 있었던 거예요?”
어쩐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용하고 트러블을 싫어하긴 하지만, 무작정 숨어 있을 성격은 아닌데.
“숨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깐 자리를 비우셨던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님이 나서면 오해는 해소되겠지만 아무래도 불필요한 희생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셔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게다가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고…….”
아무리 흑건파 내부에 국도해를 지지하는 세력이 많다 하더라도, 해서파까지 나섰으니 상황이 불리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생각해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요? 갑자기 서울로 올라왔잖아요.”
“예. 올라오셔서 흑건파를 본인 중심으로 재정비하신 거죠. 말이 재정비지 전쟁이었습니다.”
“난 진짜 이번 일주일이 일 년처럼 느껴졌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지요.”
모두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형님이 마음을 바꾸셔서 한마디로 판도가 뒤집힌 겁니다. 물론 뒤늦게 연락이 닿은 회장님도 원래 보스보다는 형님을 아끼시던 분이라서 전적으로 도와주셨지만,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원래 형님은 회장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기다리신 후, 조용히 일을 해결하시고 물러나실 생각이었습니다.”
“맞아! 도해 형님이 평화주의자 이기 아니가. 근데 나는 행님이 다 뒤집어엎고, 흑건파를 쓸어 버릴 줄 몰랐다카이.”
“쓰, 쓸어요?”
청소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 인간일지라도 설마 빗자루를 들고 흑건파 사무실을 쓸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니겠지.
“싹 쓸어 버렸어.”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러게나 말이야…….”
모두의 뾰족한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 일주일 동안 아마도 가장 최전방에서 싸웠을 그들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내가 뭘요. 내가 뭘 어쨌는데! 저 아무 말도 안 했다고요.”
“니는 존재 자체가 문제인기라.”
“제 귀한 존재가 어디가 어떻다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너 같은 놈 때문에 형님 손바닥 그렇게 된 거 알려지면 너, 골목 가다 칼 맞아. 알아?”
교제 사실이 공인되었을 때, 소주를 병째 들이켰던 김유수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너 숙제는 했어?”
내가 대뜸 공격했다.
“하, 하면 되잖아. 요즘 바빠서 책 펴 볼 시간도 없었단 말이야.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술 마실 시간은 있고?”
“이잇!”
“난……, 했어요. 봉팔이 선생님.”
봉팔이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박건우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나에게 뜻깊은 연모를 품었던 박건우는 자신의 라이벌이 국도해라는 사실을 깨닫고 총을 잡고 몇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성새민에게 전해들은 바론 울면서 한 번에 다섯 명씩 쏘아 쓰러트리는 박건우의 모습은 호러 그 자체였다고 했다. 내가 내준 것 외에도 몇 과나 예습을 한 공책을 내밀며 박건우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선생님.”
“뭔데.”
공책을 보니 답은 물론 풀이 과정 역시 완벽했다. 아니 어떻게 배우지도 않은 부분까지 혼자 터득할 수 있는 것일까. 저 능력이 언어 쪽으로 1%만 가도 좋을 텐데 말이지.
“남자끼리 하면 누가 애를 배는 거야?”
“뭐, 뭐라고?!”
“여자랑 남자는 엄마가 아기를 배지만……. 남자는 누가 엄마가 되는 건데?”
목소리가 진지했다. 저게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나, 남자끼리 하면 어떻게 임신을 해! 말이 되냐!”
“하지만…….”
박건우가 곤란하단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은 성새민과 지용재가 숨넘어갈 듯이 웃으며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저것들이구나. 잘못된 지식의 전파자들.
“하지만, 남자끼리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물책 줄 테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봐. 수컷끼리는 교미할 수 없어.”
“크하하하, 와 뻥까노? 딱 까놓고 교미는 할 수 있지. 안 그러나?”
“애한테 이상한 거 알려주지 말라고요! 야! 박건우 너, 내가 선생이야. 선생 말이 무조건 진실인 거 알지?”
“알겠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 녀석이 뒷골목에서는 악명이 자자한 스나이퍼라는 사실을, 아마 그날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의 대다수를 잠재운 것은 박건우의 마취총이었다. 한 방이면 코끼리도 5초 만에 쓰러진다는 마취제라는데, 나중에 하나 얻어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국도해에게 생명이 위협받으면 그거라도 써서 도망치게.
“자아, 여기 숙제. 잘했어요. 풀이 과정도 다 맞았고 문제도 완벽해. 그나저나 설마 애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거나 하진 않겠지?”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박건우가 발끈하며 공책을 낚아채어갔다. 하긴 성인 남자에게 방금 전 질문은 좀 심했나.
“입으로 나오는 거잖아.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뭐!”
“크하하하하하!”
“푸하하핫!”
지용재와 성새민이 쿠션을 집어던지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오염된 지식의 근원들 같으니!
“왜들 웃어요. 형님이 그때 그러셨잖아요. 애는 입으로 토하는 거라고…….”
“으하하하, 맞다. 맞다카이. 아는 입으로 토하는기라.”
지용재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맞장구를 쳤다.
“토하긴 뭘 토해요! 아니 사람 성교육을 뭘 이딴 식으로 시켜 놓을 수가 있어요! 이래서 나중에 장가나 갈 수 있겠어요!”
“……안 가.”
“뭐?”
“나 장가 안 간다고!”
박건우의 턱을 타고 눈물이 툭 떨어졌다.
“야, 야아. 우냐? 우는 거야?”
죄책감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왜 아들을 이렇게 쓸데없이 매력적으로 낳으셔서 문제를 일으킨단 말이오.
“손대지 마세요.”
“뚝해, 박건우 씨 뚝해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을 닦아 주려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었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보지 마!”
박건우가 나를 그대로 밀어내고 후다닥 나가 버렸다.
“……어…….”
“크큭, 니도 봤나?”
“건우가 눈 가리고 다닐 만하지. 뭐든 적당한 게 좋다는 걸 난 건우랑, 도해 형님 보면서 느낀다니까.”
“아! 이거 접때 배운 고사성어인데. 과……과 뭐였지?”
“청산과부. 니는 그것도 모르나?”
“아, 맞다!”
고개를 끄덕이는 김유수와 의기양양해하는 지용재를 그대로 창밖에 던지고 싶었다.
“과유불급이겠지요. 부탁인데 어디 가서 저한테 과외 받는다는 말 하지도 마세요. 그나저나 박건우 씨 정말 눈이…….”
“예쁘지?”
“……네.”
그 말밖에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까 잠시 머리카락이 올라가면서 스쳐지나간 박건우의 눈은 텔레비전에서 봤던 어떤 여배우의 눈보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저놈아가 지 눈깔이 콤플렉스인 거인기라. 킬러는 눈매가 생명이라면서 눈깔 찢으려는 걸 간신히 말렸다.”
“하지만 저런 천사 같은 눈으로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 쏘는 거 보면, 전 소름 끼치던데요.”
“웃기까지 하니 문제지.”
사과를 베어 물며 관표 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렇게 예쁜데 가리고 있으면 아깝……, 흐익.”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감히 나의 목을 이렇게 덥석덥석 잡을 수 있는 인간은 이제 세상에 단 한 명만 존재하게 되었다.
“도해 형님!”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무슨 얘기 중이었지.”
내 입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 특히 칭찬이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국도해가 그렇게 물었다.
“무, 물론 국도해 씨 얘기 중이었습니다. 하하핫,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국도해 씨도 어쩜 그렇게 딱입니까. 하하, 전생에 호랑이였나? 그러고 보면 막 닮았네. 물불 안 가리고 물어뜯는 거나. 하하하하.”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고 애써 밝은 척해 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서늘했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험악해지는 것 같은데, 나의 착각이겠지?
“내 어디가 예뻐서 가리는 게 아까운 건데.”
“…….”
젠장, 거기까지 들었단 말이냐.
“말해 봐.”
“손이요!”
대뜸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아 붕대를 감은 국도해의 손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 예쁜 손이 붕대에 가려져서 아깝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휴, 아깝다. 손은 짝으로 봐야 기분이 좋은데 한쪽이 붕대에 감겨 있으니 기분이 나빠지고 막 그러네요, 하하하핫.”
모두 침울하게 입을 다물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나 실수한 거겠지.
“다들 뭐해.”
국도해가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끄르며 말을 이었다.
“안 나가고.”
“안녕히 계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 아니, 이 인간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사람을 다 내보내나?
“아, 아니. 다들 저녁도 안 먹고 어딜 가요! 어딜 가! 같이 밥은 먹어야지!”
“아직 2시인데 무슨 저녁을 먹냐.”
김유수가 눈치 없이 끼어들어 내 말을 잘라먹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좀 더 있다 가라고! 내 말은!”
“됐어. 난 죽기 싫으니까.”
“나도.”
“나도 그래.”
모두 나의 간절한 소망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기 바빴다.
“도해 형님.”
이 시대 마지막 이성인! 가장 믿음직한 관표 형님이 있었다. 제발 우리의 불건전한 동성 교제에 대해 따끔하게 한마디 하란 말이야!
“문은 밖에서 잠그고 가겠습니다.”
“그래.”
“크악! 잠그긴 어딜 잠가요!”
“그럼 이만.”
무정하게 사라지는 사람들을 향해 허우적거렸지만, 국도해는 넥타이를 던지고 드레스셔츠 단추를 툭툭 풀 뿐이었다.
“아하하하, 샤워하시게요?”
“아니.”
아닌 거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하핫, 그런데 옷은 왜 벗으시나 몰라……, 흐엑.”
국도해가 내 옷을 잡아끌었다.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손의 감촉에 사태가 내가 상상했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 많아.”
“하하, 그게 제 매력인……, 읍!”
나의 매력이 국도해의 입술로 원천 봉쇄당했다. 정확히 열흘 만의 키스였다. 그동안 그는 사귀자고 한 말이 농담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 접근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직의 일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순서를 매겼을 테지.
“읍.”
굶주렸다, 라는 표현이 단번에 떠오를 만큼 그의 키스는 격렬했다. 허리 아래를 더듬던 손이 내 엉덩이를 움켜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닿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흥분이 느껴졌다. 딱 한 번뿐이었지만 같이 침대에서 뒹굴었던 날이 떠올랐다. 약기운에 하면서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맨정신으로 과연 그것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자꾸 내 그곳을 단단한 허벅지로 문지르는 바람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허리를 자꾸 뒤로 빼려고 하자, 국도해가 입술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으악! 아프잖아요.”
“까불지 마.”
밑은 뜨거울 정도로 흥분해 있으면서, 얼굴과 목소리는 가까이 하면 동상이 걸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 미묘한 괴리가 어쩐지 섹시하게 느껴진다면, 나 문제 있는 것이겠지.
“튕기는 것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라고, 한봉팔.”
“자,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어때, 네 이름인데.”
“한준이라고요. 개명했어요, 호적에도 이제는 준이라고 올라가 있습니다.”
“다시 바꿔.”
“네!?”
“안 어울려. 너한테는 봉팔이가 어울려.”
“저의 엘레강스한 이미지 어디가 봉팔이랑 어울린단 말입니까?!”
귀공자 타입의 외모에, 넘치는 센스, 게다가 발군의 두뇌까지. 대체 내 어느 부분이 봉팔이라는 촌스러운 이름과 매치가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다.
“한준하고 너는 균형이 맞지 않아.”
“그 균형의 기준이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여쭤 봐도 되나요?”
“글쎄.”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의 바지 버클을 끌러 내리며 대답했다.
“한 번 부르고 나니까 입에 감기던걸, 한봉팔.”
“준도 감겨요. 해 보세요, 주우우운!”
앞으로 쭈욱 내민 입술을 그가 덥석 물었다. 물라고 내민 입술이 아닌데!
“이제 그만 까불어.”
어느새 바지는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대로 잡아먹히고 만다!
“나, 나…….”
“뭐.”
국도해의 유려한 얼굴에 심장이 반사적으로 쿵쿵 울렸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말을 이었다.
“나 샤워 안 했어요! 일주일 내내 안 했습니다!”
“…….”
다른 것에도 심하다 싶을 정도의 편집증을 보였지만 청결에 관한 국도해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의 한마디에 그는 천년의 사랑도 식겠다는 표정을 짓고,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안도와 섭섭함이 교차했다. 안도 8할에 섭섭함 2할이니까 일단은 그래도 참자.
“우리 집도 아니고 막 샤워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 근지러워.”
일부러 등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샤워는 물론 어젯밤에도 했다. 모든 것이 개구라 뻥이었지만 리얼한 연기를 위해, 나는 몸을 긁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하하하, 이가 있나. 왜 이렇게 몸이 간지럽지. 어떡해요. 여긴 농약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살짝 내리감은 눈에 머문 한숨이 고혹적이었다. 젠장, 얼굴에 속지 말자. 아무리 잘생겨도 저건 굶주린 야수일 뿐이다.
“그럼요. 어쩔 수 없죠. 국도해 씨는 더러운 거 싫어하시잖아요.”
“그래.”
더러운 것을 혐오하는 그가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끌며 대답했다.
“으악, 어딜 가는 겁니까?”
“씻기러.”
“뭐, 뭐요?!”
욕실 안으로 질질 끌려가면서 사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국도해가 다짜고짜 나를 샤워 부스 안으로 밀어 넣고 샤워 콕을 열었다.
“무슨 짓이에요! 옷이 다 젖잖아요.”
“벗으면 되지.”
그가 내 셔츠를 잡아 뜯듯이 벗겨 내며 간단하게 결론지었다. 알몸이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사탕 껍질 까듯 손쉽게 옷을 벗겨 내는 그의 힘과 재량은 월등했다. 게다가 내가 반항을 하면 샤워기를 얼굴에 들이미는데 이건 숫제 물고문과 다름없었다.
“우악, 하지 마세요! 푸학!”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물 때문에, 숨쉬는 것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국도해의 양복도 흠뻑 젖었지만 그는 소매를 걷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무슨 짓이에요, 이게!”
“세탁기에 넣고 돌려 줄까.”
번뜩이는 눈동자에서 진심이 엿보였다.
“내가 무슨 세탁물입니까! 애인하기로 했잖아요. 제발 인간 대접 좀 해 주세요!”
정물에서 세탁물까지 골고루 취급당한다는 생각에 열이 받아 버럭 외쳤다.
“좋아, 정 원한다면.”
그가 샤워기를 집어던지고 셔츠를 벗어던졌다.
“왜 이러세요.”
불길하다.
“애인 대접 해 달라면서.”
바지의 버클을 풀면서 대답하지 말란 말이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사람 대접을……소, 속옷도 벗으시게요?”
망설임 없이 속옷과 바지를 샤워 부스 밖으로 던져 버린 국도해가 내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뭘 그렇게 봐.”
“아니……, 그냥. 국도해 씨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거 싫어하시니까 거기도 그럴 것 같아서…….”
우물거리며 다리 사이를 가리키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궁금하단 말이군.”
“아니, 뭐. 그렇다기보다는. 하하하하.”
제대로 국도해의 맨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했을 때는 약을 먹었던지라, 폭풍 같은 기억이 드문드문 끊긴 것이다. 샤워기의 물을 뒤집어쓴 국도해의 몸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근사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 봐.”
벽에 밀어붙이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겹쳐졌다. 등에 느껴지는 차가운 타일과 허벅지 안쪽에 닿는 뜨거운 살덩이의 감촉이 대조되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입에서 혀가 부딪히는 습한 소리가 츠읍, 하고 욕실에 울렸다. 몸이 물기로 촉촉이 젖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의 손이 목을 타고 내려와 엉덩이 안쪽으로 파고들었을 때, 나도 흥분하고 말았다. 입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가자 국도해가 내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원초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으……읏…….”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가며 빨았다 깨무는 그의 움직임에 허리가 찌르르 하고 울렸다. 잊었던 그날의 기억들이 몸을 통해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엉덩이를 움켜쥐듯 주무르던 손이 앞으로 건너와 내 살덩이를 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윽.”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손에 불거지는 욕망이 이토록 기분 좋을 줄 누가 알았으랴. 선단을 타고 툭툭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가 이미 그의 손을 끈적끈적하게 적셨다. 쪽팔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심장이 터질 만큼 기분이 좋아 일단은 이 수치를 참기로 했다. 국도해가 허리를 바싹 밀어 붙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것과 내 것을 한손에 그러쥐고 같이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그만……잠깐…….”
나의 애원은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오히려 국도해의 손놀림은 더욱 거세어진 듯했다. 아픔 속에서도 고조되는 쾌감에 허리를 비틀며 숨을 할딱거렸다.
“한봉팔.”
욕실 안에서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섹시했다. 하마터면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 갈 뻔했다. 끔찍이도 싫었던 내 이름이 그토록 멋진 울림을 가진 줄, 이전에는 몰랐는데.
“……한봉팔.”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나직하게 불렸다.
“하아……. 네.”
눈이 마주쳤다. 욕망으로 탁해진 그의 눈빛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대답했으니까 이름 바꾸는 거다.”
“이――!”
사기꾼! 이라고 비난할 새도 없었다. 그가 그대로 내 다리를 들어 단단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밀어 넣었다.
“으악!”
살갗을 비집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역시 국도해는 몹시도 본인다운 태도를 일관했다. 그는 있는 힘껏 허리를 밀어 올렸다. 우직, 하며 벌어진 틈 사이를 밀고 들어온 욕망에 눈앞이 빙글 돌았다. 국도해가 타일 벽으로 바싹 몰아세운 후, 허리를 추어올렸다.
“아파! 아파! 아프다고……, 읏.”
“빡빡하군.”
누가 남의 아래 사정 설명해 달랬냐! 이놈의 인간이 빼지는 못할망정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빼요. 제발……. 윽.”
하지만 그는 내 허리를 잡고 단번에 밀어 박는 편을 택했다.
“――――!”
비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몸을 관통했다.
“힘 빼.”
“하아……, 너…….”
“뭐?”
“너나……, 빼!”
“건방진 녀석.”
퍽 하고 그가 온몸으로 부딪혀 왔다. 악소리가 날 만큼 아팠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아냈다. 남자 체면이 있지. 두고 보자고, 국도해!
국도해가 내 목덜미를 답삭 물고 혀를 굴리기 시작했다. 목선을 훑어 내려가는 혀의 움직임에 꺼졌던 불씨가 다시 몸을 지폈다. 비좁은 안을 드나들던 욕망이 조금씩 무게를 더해 갔다. 거기에서 더 이상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두려웠다.
“그, 그만하라니까……, 앗.”
“싫은데.”
짓궂은 웃음을 지은 그가 그렇게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쁜 놈, 귀신같은 놈.
“제발……, 제발. 젠장.”
아직 다 들어온 것이 아니었는데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저놈의 거시기를 무단 침입죄로 고소하면 내가 승소할 가능성은 몇 프로나 될까.
“그런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무슨……!”
국도해가 한쪽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한 후 깊게 삽입했다. 뿌리 끝까지 박히는 느낌에 목 안에서 헉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타일 벽과 국도해의 단단한 몸에 눌려 압사당할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허리를 뒤로 빼려 했지만, 그가 머리채를 잡아끌어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건 너다.”
“내가 언제……. 흐윽.”
허리 아래가 욱씬 조여 왔다. 내부의 연한 살을 단단한 것이 훑어 내려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이, 이거 지금 뭐지…….
“대체 어떻게 해야 나한테만 집중할 거냐.”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짜증이 묻어났다.
“하아……읏, 자, 잠깐 이상……. 앗.”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에 그의 팔을 부둥켜안고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남자의 욕망이 깊숙한 곳을 스칠 때마다 진저리가 쳐질 만큼 쾌감이 몰려왔다.
“아……앗. 살살……아.”
이 남자에게 중도는 없는 것 같았다. 조금만 천천히 한다 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닐 텐데,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격하게 몰아붙이기만 했다. 타일 벽에 부딪히는 등뼈가 아팠다.
“하악! 아앗! 좀 천천……윽! 하앗, 하악!”
헐떡거리는지, 말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변태.”
이 망할 놈이 누구보고 변태래!
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그가 쿡하고 웃으며 내 뺨을 깨물었다.
“더 헐떡거려 봐.”
“우, 웃기지 마! 누가 헐떡거린다고. 윽. 아, 안 해요!”
이를 꽉 깨물고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신음 소리를 흘리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래?”
그가 묘한 웃음을 짓더니 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또 무슨 수작인가, 하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허리가 퍽 하고 꺾였다. 그가 내 몸을 뒤집어 세면대에 손을 짚게 했다. 그러고는 뒤에서 퍽하고 밀어붙였다.
“읏―!”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단단한 살덩이가 거칠게 출입을 반복하는 바람에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 없었다.
“하읏―.”
결국 새된 신음 소리가 주인의 의지를 배신하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만다. 뒤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짜, 새겨 버리고 싶군.”
“뭐, 뭘요.”
돌아보니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엉덩이를 사악 훑듯이 만지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이름.”
“미, 미쳤어요! 안 돼요! 절대 안 돼!”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농담하지 말라고 코웃음 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 심지어는 손수건에도 머리글자를 새겨 넣는 인간이 국도해였다.
“그렇다면 좀 더 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
무슨 놈의 처지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꼼짝없이 자지러지게 헐떡거렸다.
“앗! 하앗! 앗! 흐윽!”
“……읏…….”
거울을 통해 나를 안는 국도해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가지런한 질서에 속해 있는 그의 얼굴이, 욕망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살짝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초조해 보이는 그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철의 무사처럼 고고하고 오만한 그를 무너트릴 무언가가 내게 있다는 사실은 야릇한 흥분을 안겨 주었다.
“하아……아……응.”
안쪽의 연약한 살이 지나친 마찰로 화끈거렸지만, 머리끝까지 전해지는 쾌감에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고 말았다. 남자가 난폭하게 내 어깨를 깨물었다. 발끝까지 찌릿했다. 일부러 애를 태우려는 듯한 행동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
“……뭐가……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민감한 부분을 문지르며 그가 뻔뻔스럽게 묻는다. 아까부터 머리를 든 욕망이 해소를 원하고 있는데 국도해는 모르는 척 개무시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인간 앞에서 내 손으로 그것을 쥐고 흔들 수도 없고, 미칠 지경이었다.
“……없어요. 그딴 거…….”
“그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허리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한층 더 격렬했다.
“……아! 응…….”
“평소에 기분 나쁠 정도로 솔직하면서, 왜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거지.”
“누, 누가……읏.”
기분 나쁠 정도로 솔직하다는 건 또 뭐냐.
“하고 싶은 걸 말해, 한봉팔.”
귓가에 울리는 습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듯이 그의 목소리가 열기에 들뜬 나의 몸에 각인을 새겨 넣었다.
“……줘.”
“뭐라고.”
“해 줘, 빨리. 어서…….”
어린아이처럼 보채자, 그가 웃으면서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국도해가 큼직한 손을 뻗어 이미 질척해진 내 중심을 힘껏 움켜잡았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잇따르는 쾌감에 허리가 들썩였다.
“하아……으읏……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엉켰다. 추살집이 점점 격렬해졌다. 목에서는 내 것이 아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좋아……아악! 하앗!”
호흡이 끊어질 듯한 새하얀 쾌감 속에서 절정을 맞이하였다. 욕망의 잔해를 내뱉으며 파르르 경련하는 몸을 안고 남자는 부서트릴 것 같은 기세로 몸을 박아 올렸다.
순간 욱조이는 내벽으로 뜨거운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축 늘어진 몸은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자 다리 사이로 주륵, 하고 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자, 국도해가 금세 단단해진 자신을 내 허벅지에 갖다 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한 번 더?”
“……차라리…….”
“차라리?”
“……세탁기에 넣고 돌리세요.”
유언처럼 마지막 말을 남기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꿈결에 아나운서 같은 발음으로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면서 멀어지는 남자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철썩.
뺨이 돌아갈 정도로 얻어맞았다.
“정신 차려.”
“……추맛.”
“뭐라고.”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고추맛 아이스크림 같은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던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