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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0/10)

epilogue

추운 겨울이었다. 전국적인 폭설이니, 한파니 뉴스에서는 한참을 떠들어 댔다.

“……뭐라고요?”

「컵 가지고 나오라고.」

처음에는 이 남자가 뭔가 잘못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날 전화를 걸어, 대뜸 한다는 소리가 마실 컵이 없으니까 집에 있는 것을 갖고 오라니?!

“컵이라니요? 물이나 음료수를 따라 놓고 마시는 손잡이가 달린 그 흔하디 흔한 물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혹시나 하고 확인차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정했다. 아니 요즘 바빠서 사흘 동안 집에 들어오지도 않던 인간이 다짜고짜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컵이 어쩌고 어째!?

“아니, 이렇게 눈이 오는데 무슨 놈의 컵을……!”

「빨리 와라. 용재 보냈다.」

뭐라고 항변할 사이도 없이 전화가 뚝 끊어졌다. 기가 막혀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야아아아! 국도해! 이 망할 인간아아아아!”

들릴 리는 없겠지만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분통을 터트렸다.

국도해와 동거를 시작한 지도 어언 몇 개월. 2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자기의 집으로 강제 이주시키더니, 들어올 때도 자기 마음이지만 나갈 때도 자기 마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던 그 인간.

당신이 질리면 나는 언제든지 나가야 하냐는 나의 악다구니에 그는 픽 하고 웃더니 대꾸했다.

「살아 있는 것을 들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살아 있는 한 나갈 수는 없을 거다.」

집착을 넘어선 그의 광기에 머리카락 끝까지 오싹했지만 이미 나는 그의 인생에 발을 걸친 후였다.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사시를 패스해서 네놈과 원수가 되어 주겠어! 하고 소리 질렀다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물론 이를 악물고 하던 공부를 포기하기까지 단 삼 일.

쾌락과 편안함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내가 이 자리에 적응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는다는, 바퀴벌레와 쥐가 넙죽 엎드려 형님! 이라고 외칠 만한 나의 적응력이었다.

“크아아! 내가 갈 줄 알아! 내가 무슨 자기 심부름꾼인 줄 알아! 나쁜 놈아! 썩을 새끼야!”

씩씩거리고 소리를 지르다가 잘못 놓인 전화기를 슬쩍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혹여 그가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통화 중이기라도 하면, 그날이 내 제삿날이 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리더니, 낯익은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봉팔아, 컵 챙기라. 후딱 가자. 행님 기다리신다.”

“알았어요!”

내 몸 어느 한 곳 입을 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침대에서는 쪽쪽 빨아 대는 주제에, 실수로라도 내가 입을 대면 불같이 화를 내는 국도해의 전용 컵을 챙겨들었다.

문을 열자 지용재가 시계를 보면서 나를 재촉했다.

“뭐하나. 행님이 니 후딱 안 오면 가만 안 둔다캤다 안카나. 눈 와서 길도 미끄러운데, 빨랑 가자.”

“컵만 데리고 가면 안 되나요.”

“……내 죽는 거 보고 싶나.”

“알았어요.”

투덜거리면서 코트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차 어디 있어요?”

“차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이거 써라.”

하며 지용재가 내게 내민 것은 오토바이 헬멧.

“……설마 이 눈길에 오토바이를 타자는 말씀은 아니시죠?”

“누구는 타고 싶어서 타나! 지금 길이 다 얼어서 차는 꼼짹을 못하는 거, 나보고 어카라고 하는데! 잔말 쌔비지 말고 후딱 타라.”

“미쳤어요! 이런 날에 같이 오토바이라니! 같이 죽자는 거죠? 국도해 씨도 알아? 그 사람 내가 이런 취급 받는 거 아냐고요!”

“……행님이 타라캤다.”

“…….”

“컵은 품에 잘 넣어둬라. 깨지면 니캉내캉 나 뒈지는기라.”

“알았어요.”

헬멧을 쓰면서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고마 미쳐 부리겠다. 우짜 내 팔자가 이래 됐노. 아무리 보고 싶다고 해도, 하이고 참말로 유별나다, 유별나.”

“뭐라고요?”

“아니다. 꽉 잡아라. 간다.”

부릉, 하고 시동 거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가 눈길을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꽉 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아슬아슬하게 달리는 지용재의 솜씨는 정말 인간의 범주가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차 안의 운전자도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면서 쳐다볼 정도였다. 물론 타고 있는 나는 백만 년 전에 혼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다 왔다. 머스마, 안 내리고 뭐하노!”

지용재가 배달을 마치고 오토바이를 세웠을 때가 되어서야 나의 혼백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비틀거리면서 오토바이에서 내려 고개를 드니, 예전에도 몇 번 심부름을 왔던 바(bar)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를 알아본 매니저가 정중하게 룸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도해 님께서 차가 막힌다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차가 막혀?”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나는 이 눈이 내리는 날 오토바이로 배달을 시켜 놓고 지는 안전하고 따뜻한 차를 타고 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힐 것 같구나! 국도해!

이를 바드득 갈면서 룸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는 벌써 국도해의 취향대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법칙과 질서에 맞춰 가지런하게 놓인 식기들을 보는 순간, 열불이 솟아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요! 여기!”

“네, 부르셨습니까.”

웨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며 대답했다.

“여기, 이거랑 이거랑 이거 가져다주세요.”

“네? 이것들을 다요?”

“네. 빨리요. 빨리 가져다주세요.”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들을 가리키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국도해, 두고 봐라. 내가 너의 그 잘난 질서를 까부셔 주마, 음하하하하핫.

벤츠가 가게 앞에 멈춰 서자, 기다리던 남자들이 달려와 문을 열고 우산을 받쳐 들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자 옆에 있던 남자가 공손히 라이터 불을 두 손으로 불을 붙였다.

“컵은.”

“잘 모셔왔습니다, 행님.”

지용재는 자신의 보스가 컵의 도착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어디에 있지.”

“룸에 계실 겁니다.”

우산을 든 남자가 대답하자, 국도해의 눈가에 잠시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지용재는 그런 불가사의한 변화가 누구로 인해 기인했는지 알기에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기 바빴다.

담배를 피우며 눈 속을 걸어가는 국도해의 모습은 단연코 시선을 잡아끌었다. 길을 가던 여자들도 한번쯤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남자는 가게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와장창창.

계단을 오르던 그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것은 질색을 하는 국도해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수행원들이 당황스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달려온 매니저가 사색이 되어 국도해에게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뭐지, 저 소리는.”

다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안쪽에서 들려왔다.

“그것이 저기…….”

매니저의 얼굴은 불쌍할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감히 입도 떼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국도해는 슬쩍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 녀석은?”

“저기……그, 그것이…….”

“똑바로 말해.”

“저 안쪽에서…….”

매니저가 가리키는 곳은 아까부터 신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룸이었다. 국도해는 들고 있던 담배를 한 번 깊게 빨아들인 후 걸음을 옮겼다.

룸 앞에는 웨이터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서서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도해가 나타나자마자 모두 복도 옆으로 늘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국도해가 빠른 걸음으로 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으하하하하하! 말 달리자아아아, 말 달리자아아아, 달려, 달려라, 빠라바라바라바밤.”

“…….”

“크헤헤헷, 눈길도 달려라, 막막 달린다, 부룽부룽, 신나게! 루루루루룰.”

거기에는 한준, 아니 한봉팔이 테이블에 올라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몸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어? 이게 누구야아, 국 씨 아냐? 국 씨!”

“…….”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아이잉, 왜 이렇게 늦게 와부렸소! 나는 오토바이 타고 달링게 여까정 이십 분도 안 걸렸는데 잉! 히히히히.”

비틀거리며 사투리를 사용하는 봉팔을 보며, 국도해가 입을 열었다.

“저거 왜 저래.”

“그게, 아무리 말려도……, 봉팔 님께서…….”

테이블 근처에 나뒹구는 술병을 보고 국도해는 상황을 바로 짐작했다.

예쁘장한 사슴처럼 생겨서 고집은 미친개를 능가하는 한봉팔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워메, 기분 좋아라. 으하하하, 아이쿠, 맛있다.”

테이블에서 흐느적거리던 봉팔이 다시 술병을 들자 국도해가 소리를 내질렀다.

“당장 내려놓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흥분을 하는 일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국도해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시끄러!”

봉팔이 집어던진 술병이 국도해의 옆을 스쳐 박살이 났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모두 화들짝 놀랐지만 국도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 술맛 떨어지게 뭐라 씨부렁대능겨, 너는 누구여?”

“이제, 나도 못 알아본단 말이군.”

“히히히히, 못 알아보긴. 내가 왜 당신을 못 알아봐. 내가 그럴 리 있어! 국도해, 당신 국도해 맞지?”

국도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짧게 웃음을 삼켰다.

“국도해잖아! 국도해 맞아부러. 안 그려? 내 말이 틀렸어라? 왜 아닌 척 지랄을 하능겨?”

“당장 내려와라. 좋은 말 할 때.”

“으하하하하, 저것 봐. 사람들님아, 저것 좀 보소. 저 성깔머리 딱 국도해잖아. 또라이 또라이 왕또라이 국도해!”

모두 숨을 죽이고 겁대가리를 상실한 강력한 시체 후보 한봉팔을 쳐다보았다.

“내 말이 틀려? 잉? 아녀. 내말이 맞아부려. 맞는다니까요오오오. 국도해! 내 애인. 안 믿겨져? 안 믿어?”

미친개처럼 울부짖던 봉팔의 말을 국도해가 부정해 주길 모두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당장 내려와.”

국도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려 봤자 소용없었다. 한봉팔에게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사람들만 보였다.

“이 사람들이! 지금 내 말을 못 믿네! 봐! 보라고! 증거를 보여 준당게!”

봉팔이 바지를 벗고, 팬티를 내려 엉덩이를 까뒤집기까지 걸린 시간 2초.

“젠장!”

국도해가 발치에 떨어져 있던 사과를 집어던져, 봉팔을 맞추기까지 걸린 시간 2.5초.

“――――!”

“컥!”

“……!”

0.5초 안에 승부는 판가름이 났다.

스트라이크!

봉팔이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아! 이런!”

“괜찮으십니까!”

여기저기에서 기절한 봉팔을 잡아 주기 위해 달려갔다.

“만지지 마.”

국도해가 아까보다 한층 더 위협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테이블로 걸어갔다. 음식과 술을 온몸에 뒤집어쓴 봉팔을 국도해가 번쩍 안아들었다. 살벌한 경고가 이어졌다.

“앞으로 이 녀석 몸에 손대는 놈은 이유를 막론하고 죽인다.”

기절한 봉팔을 안고 룸을 나서는 국도해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부정하기 바빴다.

“봉팔 님 엉덩이에 그거……. ……아니지요?”

“용재 형님, 도해 형님 한자……길 도(道) 자에 바다 해(海) 자 맞습니까?”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지용재가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맞다.”

스트라이크.

정확히 모두의 심장 한가운데에 한봉팔이 시속 300으로 내리꽂혔다.

사각사각사각.

기분 좋은 연필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히죽 웃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졌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깼으면 눈 떠.”

손이 무지막지하게 내 뺨을 비틀어 꼬집었다.

“으아아악! 아프잖아요.”

달콤한 꿈은 그렇게 무참하게 박살났다. 눈을 뜨니 국도해가,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치우며 나를 스산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

새끼, 잘생겼다고 침묵시위하나.

“아우 씨, 이마는 왜 아프지? 자다가 어디 부딪혔나.”

거울을 보며 이마를 확인하자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으악, 이거 왜 이래! 내 잘생긴 얼굴에 누가 이래 놨어?”

“…….”

“누가 이랬어요! 뭐야, 이게 뭐냐고. 뭘 쳐다만 보고 있어요, 빨리 범인 잡아다가 족치란 말이야!”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그가 내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후려갈겼다.

“으악! 왜 때려요! 왜 때려!”

“입 다물고, 죽이나 먹어.”

“죽? 웬 죽이요?”

“해장.”

짧은 대답을 남기고, 그는 침실을 나섰다.

해장? 웬 해장?

긁적이던 머릿속에 잭 다니엘을 병째 들고 나발을 불던 나의 모습이 섬광처럼 스쳐갔다.

“헉, 술을 마신 건 기억나는데 왜 그 다음 기억이 없지?”

재빨리 시트를 걷어 살펴보니 몸은 멀쩡했다. 여기저기 쑤시긴 했지만 어딘가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아, 다행이다.”

큰 사고를 친 것은 아니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나저나 저 빌어먹을 인간은 왜 아침부터 사람 머리를 후려치고 난리야. 기분 나쁘게.

두고 봐라. 오늘밤부터 당장 사시 공부해서 합격하면, 내 손으로 상해죄로 처넣어 주마!

문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음식 냄새에 식욕을 느끼고 배를 움켜잡았다.

“일단 복수도 식후경이지. 흠.”

방을 나가려던 나의 눈에 국도해의 스케치북이 들어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리던 국도해를 떠올리자, 대체 어떤 그림이 있을까 궁금했다.

“뭐 어때, 본다고 닳아?”

혼자 중얼거리며 커다란 스케치북을 열어 젖혔다. 첫 장에는 내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크로키로 그려져 있었다. 심장이 아련하게 욱신거렸다.

그 다음 장에도, 그 다음 장에도 백색 종이를 채우는 것은 나의 모습뿐이었다.

“…….”

자는 모습, 화를 내는 모습, 뭔가 읽는 모습, 티비를 보는 모습.

대체 언제 이렇게 그렸을까 싶을 정도로 빼곡하게 그려진, 나도 모르는 나의 얼굴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바보 같으니.”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티도 내지 못하고.

사시 공부는 당분간 미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케치북의 다음 장을 넘겼다.

“어라, 어째 이건…….”

좀 야한 것 같은데, 하하하하. 뭐 내가 한섹시 하긴 하지.

“하하하……핫?!”

하지만 그 다음 장도, 그리고 그 다음 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장이 넘어가면 갈수록 그 수위가 올라갔다.

“이……이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내 뒤로 서늘한 그림자가 스윽 드리워졌다.

“뭘 보고 있지.”

“……헉!”

후다닥 스케치북을 접어 멀찌감치 던졌지만 소용은 0.1g도 없었다.

“왜.”

짝꺼풀을 가진 그의 묘한 눈이 나를 주시했다.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아름다운 눈이었다. 저 눈에 내가 아까 스케치북에 있던 야시시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생각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변태.”

그의 섹시한 입술에서 나온 한마디.

“뭐, 뭐라고요?!”

“밥 먹어.”

“잠깐, 누가 변태야! 누가 변태냐고요.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요. 스케치북에 저딴 그림 그린 사람하고 나처럼 순진하고 착한 사람 둘 중에 누가 변태인지. 악! 왜 때려요. 때려 놓고 뭐가 좋다고 또 웃어요! 잘생기면 다냐! 알았어. 알았어요. 밥 먹을게요. 귀 놓으라니까! 밥 먹는다고!”

국도해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저 대책 없는 남자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먹어, 식는다.”

죽과 콩나물국을 내려놓는 국도해.

냉정함에 숨겨진 다정한 면모에 다시 마음이 스르륵 녹는다.

“먹기 싫으면 관둬.”

황홀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내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처먹여 줄 테니까.”

“―――!”

숟가락이 사정없이 입으로 쑤셔 넣어졌다.

달콤한 향에 가려진, 눈물이 날 만큼 매운 그의 맛에 심장이 아려왔다.

고추맛 아이스크림 같은 자식.

세상에 그 누구도 이런 아이스크림을 먹어 본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입 벌려.”

그 누구도.

[레드 핫 칠리 페퍼 아이스크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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