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1화 (1/49)

러프 컷   1편

<-- 1 -->  선우는 빈 나뭇가지가 걸린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휑한 목을 움츠리게 하는 이 차가운 계절이 좋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가슴이 저미도록 스산하기만 한 것 같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황량한 나뭇가지 사이로 긴 담배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선우는 연기의 주인을 시선으로 좇았다.

“이제 그만 만나자.”

눈앞의 연인은 볼이 옴폭 패이도록 담배를 빨아들이고선 무덤덤하게 말했다.

“왜...”

선우가 힘없이 내뱉은 중얼거림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가벼운 웃음이 몇 마디 말보다 더 가슴을 뾰족하게 찔러댔다. 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장점 중에 하나가 뭔지 알아?”

“......”

“현실 파악을 잘 한다는 거. 그거라도 해, 끝까지.”

남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인 긴 원형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 끈 후 선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디션 본다며. 응원할게.”

남자가 미련 없이 돌아서며 근처에 주차돼 있던 외제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운전석 문을 열었을 때 조수석에 앉아있던 긴 머리의 여성과 선우의 눈이 잠시 부딪쳤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오늘 아침 TV 광고에서 몇 번인가 봤었는데도.

자신에게로 향한 선우의 시선에 여자는 당황하기는커녕 예쁘게 생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운전석에 앉는 남자에게 바로 관심을 돌리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볼 일은 끝났어? 입모양으로 짐작되는 내용은 그랬다. 탕. 문이 닫히고 차가 빠르게 멀어졌다.

고요한 거리에 문득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나뭇가지들이 몸을 떨었다. 어디선가 빈 내부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처음 만난 건 대학교 때였다. 한국예대 연극영화과. 연기자의 꿈을 안고 입학한 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여유로운 웃음과 분위기. 과 특성상 다들 매력 있는 외모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이들에게조차 은근한 시선을 받던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선우를 첫눈에 보자마자 먼저 다가와 거리낌 없이 말했다.

“너, 예쁘다.”

인생의 전부였던 선우의 꿈은 그를 만난 뒤 전부가 아닌 반이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을 그가 차지했다.

선우는 버스로 열 정거장쯤 가야 할 길을 느린 걸음으로 진득하니 걸었다. 그 지루한 시간을 빌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선우는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사실 꽤 오래 전부터였던 것 같다. 그토록 일찍이 예상했고 그렇게나 오래 두려움에 떨었건만 이별이 닥친 순간에 받는 혜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어느새 집에 다다라 있었다. 끼릭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낡은 철문을 열었을 때 좁고 초라한 자취방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가난의 냄새와 모양. 이 방은 너무나도 자신과 닮아 있었다. 우습게도 그때서야 그의 말이, 이별이 실감이 났다. 아아. 너에게 나는 이랬겠구나. 선우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으나 곧 그마저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 * *

띠링. 그리 요란하지 않은 짧은 메시지 도착음에 선우는 눈을 떴다. 약간의 몸살기와 함께 하루를 꼬박 앓아누웠다. 휴대폰을 들자 당장 내일 있을 오디션에 대한 안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것은 그를 제외하고도 아직 자신에게 간절한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타겟〉 오디션 장소 안내.

JS 빌딩 5층 세미나실

선우는 다시 한 번 휴대폰에 찍힌 문자를 확인하며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렸다. 몇 번인가 시선을 헤매다 500m쯤 떨어진 전방에 JS가 찍힌 건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골목에서 폐지를 쌓은 이동식 카트를 끌고 나오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 인도 위를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할머니!”

한순간 엄습하는 불길함에 선우는 주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할머니를 안고 주저앉듯 쓰러지는 순간 오토바이가 바로 코앞을 쌩하니 지나갔다.

“아이구!”

“괜찮으세요?”

선우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노인의 안색을 살폈다.

“젊은이 아니었음 큰일 날 뻔 했네. 고마워요.”

그녀가 숨을 크게 고른 후 넘어진 카트를 추스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도우려 일어서던 선우는 크게 욱신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이를 어째. 어디 다친 거 아냐?”

한순간 찡그리는 그의 표정을 봤는지 자기가 한 일처럼 미안해하는 노인을 보며 선우가 애써 웃음 지었다.

“아니에요. 잠깐 삐끗했나 봐요.”

걱정하며 어쩔 줄 모르는 할머니를 다독이듯 돌려보내고 선우는 약간 긴장한 채 걸음을 떼었다.

“윽!”

발을 내딛자마자 쇠꼬챙이로 찌르는 듯한 무시 못 할 통증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빌딩은 여전히 500m앞에 있었고 그 거리는 결코 방금 전과 같지 않았다.

“헉, 헉...”

천금같이 무거운 걸음을 한 발 한 발 사력을 다해 내디뎠지만 겨우 반절쯤 왔을 뿐이었다. 선우는 근처 가로수에 손을 짚으며 숨을 고르다 피식 하고 웃었다. 중요한 오디션이 있을 때마다 징크스처럼 이런 불운이 따랐다. 마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이 같은 상황이 우스웠다. 동시에 그럴수록 오기로라도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식은땀으로 시작해 어느덧 방울방울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땀을 닦아내며 선우는 주위를 둘러봤다. 꽤 오래 걸어야 주택가가 나오는 회사 밀집지는 한창 근무할 시간대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멀리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장신의 사내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남자는 수많은 인파 속에 묻힌대도 단연 돋보일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어 더 존재감이 뚜렷했다.

“저기요.”

그와 가까워졌다 싶었을 때쯤 선우는 간신히 소리 내어 그를 불렀지만 남자는 흘깃하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지나쳤다. 일순 당황한 선우의 목소리가 다급히 높아졌다.

“저기요!”

순간 멈칫한 그가 뒤를 돌아봤다.

“나 말입니까?”

차가워 보이는 남자의 눈길이 선우를 향했다.

“...네.”

“무슨 일입니까.”

남자는 지나간 길을 되돌아와 선우의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위압감이 더욱 상당했다.

“죄송하지만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가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며 느슨하게 섰다. 길고 단단한 선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를 JS빌딩 5층까지 좀 부축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내의 한쪽 눈썹이 슬쩍 들렸다가 내려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바로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반응 역시 예상치 못했기에 선우는 내심 당황했다. 선우는 문득 초조해져 어느새 매달리는 심정이 됐다.

“제가 중요한 오디션이 있는데 오는 길에 사고가 나서 발목을 좀 다쳤습니다. 여기까진 겨우 오긴 했는데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도와주시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선우를 시선으로 훑기 시작했다. 땀으로 젖은 이마에 드문드문 달라붙은 머리칼과 붉게 상기된 뺨,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호흡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목울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를 짚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들. 마지막으로 남자의 시선은 바지 안에 감춰져 있을 선우의 발목 부근을 맴돌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오디션이죠.”

“드라마 오디션입니다.”

“흠.”

남자는 고개를 돌려 JS빌딩을 흘깃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연기 잘합니까?”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당황한 선우는 엉겁결에 되물었다.

“당신, 연기 잘하냐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시선이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잠시 흔들리던 선우의 시선이 고요하게 남자의 시선과 맞부딪쳤다. 짧은 사이 또 한 번의 신중한 검토를 끝마친 사람처럼 선우에게서 재차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은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린듯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단단한 선우의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부축하기는 좀 그렇고,”

“아...”

선우가 저도 모르게 체념과 안타까움의 소리를 흘려보냈을 때 남자가 갑자기 등을 보이며 앉았다.

“업혀요.”

반듯하면서도 크고 넓은 그 등을 바라보며 선우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의 목을 껴안으며 그의 등에 가슴을 맞대었다. 그에게서는 꽤 좋은 향기가 났다.

“다음, 연선우씨!”

스텝이 똑같은 이름을 세 번 더 외쳤지만 누군가의 움직임도, 돌아오는 답도 없었다. 스텝이 들고 있던 서류에 x자를 그어 체크하는 순간 불현듯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위압적인 분위기의 사내가 다 큰 성인 남자를 업고 걸어오는 그림은 꽤 기묘했다. 오디션 대기자들이 있던 복도가 술렁이고 명단을 들고 서 있던 스텝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문 열어요.”

“네?”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남자에게서 명령같은 한 마디가 떨어졌다. 그가 매서운 눈길을 꽂는 순간 스텝은 저도 모르게 공손히 문을 열어주었다. 뒤에 업혀있던 선우가 스텝에게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내려주셔도 되는데요.”

선우를 업은 남자는 그대로 꿋꿋이 세미나실 안까지 들어섰다. 그리고선 어리둥절해 하는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는 긴 테이블 앞 가운데에 선우를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 좀 늦었습니다.”

선우는 민망함에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심사위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큰 보폭으로 걸어가던 남자가 향한 곳은 출입문이 아니라 눈앞의 심사위원석이었다. 남자는 위원석 중 비어 있던 한 자리에 털썩 앉으며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쉰 뒤 정면에 선 선우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자 그럼, 오디션 시작하죠.”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떨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