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7편
<-- --> 책대본을 받기 전 파일로 받은 대본을 태블릿으로 훑어보고 있던 태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혹시나 하고 살펴보던 대본에는 조연인 연선우의 분량이 이전보다 꽤 늘어 있었다.
“무슨 문제 있어?”
태형이 찾는 특정 카페에서 커피를 사가지고 들어오던 매니저가 심기 불편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아니, 전개가... 내 예상이랑 조금 달라서.”
“그래?”
매니저 현철은 순전히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대꾸를 하면서 커피를 앞에 내려놓고 슬쩍슬쩍 태형의 눈치를 봤다. 그런 매니저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태형은 대본 파일을 계속 넘겨보며 자기가 본 것을 재차 확인하려 들었다.
‘연선우, 네가 또 내 발목을 잡으려 하는구나.’
사실 태형은 그것이 자신의 피해 의식이자 열등감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불안과 분노, 초조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배우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가 질리고 짜증스러웠다.
연애 초반, 태형이 그를 좋아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꿈이 같다는 것이 태형에게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연선우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결과적으로 보면 연선우가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 사실을 본인 또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 *
선우는 극중에서 남자 주인공을 위협하는 권력의 하수인이자 어린 시절 짧은 인연으로 여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역할이었다. 일찍이 촬영장에 도착해 있던 선우는 블랙 슈트에 화이트 셔츠를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대체로 말이 없으면서도 한 번씩 입을 열 때마다 날카로움이 배어나는 그의 캐릭터에 맞춘 차림새는 절제 되면서도 은근한 섹시함이 묻어났다.
흘끔흘끔 그를 보는 스텝들 사이로 태형이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옮겨졌다. 이태형은 지금 가장 잘 나가는 20대 배우 중에 하나로 현장에서도 꽤 매너가 좋아 이래저래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이 배우, 오늘도 멋있네.”
“저야 직업이 배우지만 감독님은 어째서 저보다 더 멋있으십니까.”
“허허, 적당히 해. 뭐 아부도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어야 기분 좋게 속아주지.”
“왜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그의 립서비스에 현장 분위기가 적당히 달아오르면서 느슨해졌다. 평소처럼 묵묵히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 사이에 섞여 대기하던 선우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태형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송 보니까 선우 너 역시 멋있게 나오더라. 악역인데 반응도 뜨겁고. 앞으로 더 자주 같이 촬영하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해.”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할게.”
사실 두 사람이 만난 첫 촬영 때는 태형의 감정이 미처 다 수습되지 못했던 때라 이렇게 여유로운 연기를 보일 틈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태형은 능숙하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면을 쓰고 선우에게 너스레를 떨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튀어나오려는 찰나 선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사로운 감정들이 거두어지고 의도한 장막이 드리워졌다.
“슬슬 촬영 들어갑시다.”
태형은 귓가로 울려 퍼지는 PD의 말보다 느리게 한 번 감았다 뜨는 선우의 눈짓이 더 신경 쓰여 눈매를 살짝 구겼다. 태형에게도 익숙한 저 동작은 선우가 연기를 시작하는 일종의 스위치였다. 그 스위치가 한 번 켜지고 나면 그는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누군가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때로 지켜보는 어떤 이에게는 고통스러운, 찬란한 재능이었다.
* * *
“컷!”
“죄송합니다.”
연속해서 NG를 낸 태형의 얼굴이 굳었다.
“요즘 촬영이 너무 빡빡하긴 했지. 다같이 10분만 쉬다 갑시다.”
장PD가 넉넉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넘어갔다. 휴식을 권하는 그의 배려마저 자신의 결함을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것 같아 태형의 속은 편치 못했다.
태형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스태프 둘이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았다.
“어려운 대사는 아닌데 너무 틀리네요.”
“원래 좀 NG가 많은 편이라 하더라고.”
매니저 현철이 안절부절못하며 태형에게 다가갔다.
“물 줄까?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어?”
태형은 나름 가까운 상대가 말을 붙여오자 자기도 모르게 쌓였던 짜증이 튀어나갈 뻔 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주위에 있는 스태프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태형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냐, 괜찮아. 나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어, 그래. 내가 말해놓을게.”
세트장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태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철이 후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형이 사라진 곳을 힐끔 돌아보던 하영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담배 필 시간에 차라리 대본이라도 한 번 더 볼 것이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선우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가 하영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들렸나? 하영은 뜨끔하며 살짝 눈치를 보면서도 귀엽게 배시시 웃어보였다.
“어쩔 수 없이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제게 하는 말인가 싶어 선우가 확인하듯 바라보자 그녀가 선우를 다소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쩜 그렇게 한 번도 NG를 안 내요?”
너무도 직선적인 질문에 선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조금 머뭇거렸다. 딱히 뭐라고 딱 잘라 답을 건넬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사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조단역 생활을 해왔지만 외부 요인이 아니고서는 선우 스스로 NG를 내본 적이 없긴 했다. 하지만 선우가 보기에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시나마 골똘히 생각해본 그가 결론난대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분량이 적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 말에 하영이 푸훗하고 작게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고 방금 전까지 선우가 보인 태도에 대한 감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뭘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고민해요, 귀엽게.”
선우가 다소 멋쩍게 뒷목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연치고 그다지 적은 분량은 아니죠. 누구는 씬 하나 찍을 때마다 NG 3번은 옵션으로 깔고 가는데.”
굳이 이름을 담진 않았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게 태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녀가 기세를 몰아붙여 쉴틈 없이 질문을 이어갔다.
“28살입니다.”
“아, 태형씨랑 동갑이구나.”
음, 그럼 더 비교되겠다. 그녀는 안타깝다는 듯 혹은 흥미진진하다는 듯 두루뭉술한 자세로 누군가를 향해서인지 모를 말을 덧붙였다. 그리곤 아무 말도 안했다는 듯 방긋 웃었다.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해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촬영 사이에 나누기엔 다소 뜬금없는 인사가 오갔다. 그녀는 산뜻하게 말을 덧붙였다.
“솔직히 연선우씨랑 촬영하는 거 너무 재밌어요.”
“...재미요?”
무슨 뜻인지 정작 본인은 이해하기 힘든 눈빛으로 선우가 그녀를 바라봤다.
“음, 딱 꼬집어서 뭐라 말하기가 힘든데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그녀는 설명하기 힘든 게 불만이라는 듯이 살짝 인상을 썼다가 거듭 확신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선우가 기대한 설명은 없었지만 그와 촬영하는 게 재밌다는 말이 사실인지 그녀의 두 눈이 생기 넘치게 반짝이고 있었다.
촬영이 재개되고 연달아 세 씬을 찍은 후 세트장에서의 오늘자 일정이 모두 종료됐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선우 또한 고개를 부지런히 숙여가며 ‘수고하셨습니다’를 반복했다.
“그럼 모레 또 봐요.”
잠깐의 대화 덕분이었는지 하영이 한층 더 살갑게 다가오며 선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네, 들어가세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그녀가 생긋 미소 지으며 돌아서고 선우 또한 마지막으로 장PD에게 인사를 남긴 후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촬영장의 열기와 알게 모르게 내재돼있던 긴장으로 뒤늦게 더위를 느껴 선우는 복도를 걸어가다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그 때 언제부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를 종이 하나가 팔랑거리며 복도에 떨어졌다. 선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앞에서 걸어오던 누군가가 먼저 종이를 주웠다. 남자의 손에 들린 쪽지의 내용이 얼핏 선우의 시야 안으로 스쳤다.
윤하영. 거기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촬영했던 그녀의 이름과 함께 11자리 숫자가 쓰여 있었다. 당황한 선우가 고개를 든 순간 다소 가라앉은 표정의 서해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연선우씨, 벌써부터 인기가 많네요.”
입꼬리를 매끈하게 끌어 올리며 웃는 남자의 눈빛이 묘하게 차가워 보인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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