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3편
<-- --> 나비의 날갯짓 같은 작은 떨림 후에 선우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잘 잤어요?”
눈을 뜨자마자 눈가에 약간의 웃음기를 담은 채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단숨에 잠이 달아난 선우는 빠르게 몸을 세우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죄송합니다. 서PD님도 피곤하셨을 텐데 옆에서 잠이나 자고...”
선우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그가 아니라며 바로 부정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나한테도 나름 휴식이었으니까.”
알쏭달쏭한 그의 말에 눈을 잠시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선우는 차 내부의 시계를 확인하곤 재차 당황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서PD님도 얼른 돌아가셔서 쉬세요. 오늘 여러 모로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요. 선우씨도 오늘 고생 많았어요. 집에 가서 푹 쉬어요.”
선우가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등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선우씨.”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자 그가 평소보다 어딘가 좀 느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휴대폰에 내 번호 제대로 저장된 거 맞습니까.”
“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걸까. 여전히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그가 선뜻 답을 내주었다.
“그럼 연락해요. 쓰라고 준 번호니까.”
그에게 무슨 이유와 내용으로 연락을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어 선우로선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 마음을 헤아리듯 남자는 친절하게 예시까지 들어주었다.
“오늘처럼 술이나 사달라는 말이어도 좋고 흔한 날씨 얘기든 뭐든.”
그는 이유를 불문하고 아주 사소한 잡담이어도 좋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선우의 성격상 그런 식의 연락은 오랜 친구인 경훈과도 잘 주고받지 않았지만 남자의 두 눈이 어쩐지 기대감을 담고 있는 듯해 선선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그 말이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고 다시 한 번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는 어서 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집을 향해 걸어가는 선우의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선우는 괜히 걸음걸이조차 의식돼서 애를 먹어야 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차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 *
「신성데일리 조형건 기자입니다. 오늘 촬영 끝나고 대기실에서 인터뷰하기로 한 거 잊지 않으셨죠?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선우는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며칠 전 자신의 연락처를 통해 직접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 정오의 이별이 나름 호응을 얻으면서 조연인 선우에 대한 자잘한 기사 몇 개가 나오긴 했지만 언론사 인터뷰는 연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선우는 미리 프린트해서 꼼꼼히 코멘트를 달아 놓은 질문지를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촬영이 끝나고 대기실에 들어서자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30대 남자가 웃으면서 일어섰다. 한 눈에 그가 오늘 인터뷰하기로 한 기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우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촬영이 조금 늦어져서요.”
“아유, 아닙니다. 저도 막 방금 왔습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눈 뒤 대기실 한 켠에 놓인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아, 같이 오기로 했던 사진 기자가 급하게 다른 취재 대타로 불려가게 돼서요. 오늘 사진은 인터넷 상에 있는 연선우씨 사진이나 이번 드라마 캡쳐로 대체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의상과 스타일링이 나름 신경 쓰였던지라 선우로서는 문제될 게 없는 부분이었다. 남자가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는 동안 선우는 대기실에 비치돼 있던 생수를 따서 마셨다.
“하하, 긴장하셨나 보네.”
“네, 좀 긴장되네요.”
선우는 솔직하게 털어놨고 기자는 다시 너털웃음을 지었다.
“참고로 질문지를 미리 보내드리긴 했지만 그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질문을 따로 또 드릴 텐데 그냥 평소에 대화 나누듯이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사실 처음 하는 인터뷰가 내내 신경 쓰였던 터라 메일을 통해 미리 보내준 질문지를 공부하듯이 읽고 또 읽었던 선우였다. 긴장되기도 하고 실수하지는 않을까 싶어 사전에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했었다. 그렇기에 조금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사전 질문지 없이 진행되는 인터뷰가 다반사니 앞으로 적응해나가야 할 일이기도 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기자는 사전 질문지에 포함시켰던 무난한 질문들로 인터뷰 스타트를 끊었다. 언제 처음 연기를 시작하게 됐는지,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하게 된 소감이 어떤지, 조연이지만 꽤 반응이 좋은 것에 대해 어떤 기분인지 등에 대해 물었다. 그렇게 인터뷰를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미리 주의를 줬듯 예고에 없던 질문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태형씨랑 같은 학교 나오셨던데. 그것도 딱 같은 학번 동기라면서요.”
“네.”
“인연이네요. 두 사람이 나란히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났으니. 이태형씨 대학교 시절 때는 어땠나요?”
“그냥...지금과 비슷했습니다.”
“비슷하다면 어떤?”
“말을 잘하고 거침없고 사람들과 사귀길 좋아하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주억이며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두 사람 많이 친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태형씨가 비교적 빨리, 너무 떠버려서 기분이 좀 그랬겠어요.”
기자가 이전보다 흥미진진한 눈길로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오. 별로 그렇진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건 순수하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에서 그런 거지 딱히 그 외에 별다른 감상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하, 딱 교과서 같은 대답이네요. 아니면 자존감이 꽤 강한 타입일 수도 있고. 사실 선우씨처럼 연기로나 외모로나 꿇릴 게 없는 배우가 조단역 생활만 주구장창 6년이라. 거기다 절친은 몇 년이나 일찍 성공적으로 데뷔해서 대세급으로 굳어가고 있고. 솔직히 나 같으면 진작 열등감 덩어리로 전락해버렸을 거 같거든요.”
“......”
딱히 어떤 맞장구를 쳐줘야 할 지 몰라 선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질문이 아니니 상관없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선우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빤히 응시해오던 남자가 침묵이 이어지자 한쪽 눈가를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럼 두 사람 사이에 뭐 특별한 에피소드라든지, 그런 건 없었습니까?”
“그다지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두 사람 다 학생이라 나름 수업에 열심히 참여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이 납니다.”
“으음...”
남자가 볼펜 끝을 수첩에 대고 딱, 딱 몇 번 튕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예대면 유제현씨도 거기 출신인 걸로 아는데. 선우씨 바로 위 학번 아니면 두 학번 위였나? 유제현씨하고는 대학교 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인연이 없나요?”
“네, 학교에서 두어번 정도 멀리서 얼굴만 본 게 전부입니다.”
“그렇군요. 흠... 요즘 라이징 중에도 한국예대 출신들이 좀 있는 걸로 아는데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하, 학교생활을 별로 열심히 안하셨나 보네.”
웃는 듯 마는 듯 기자의 표정이 교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이번에 스타들 출신학교들 묶어서 조명하는 기획기사를 하나 준비하고 있거든요. 마침 연선우씨가 한국예대 출신이기도 하고 이태형씨랑 꽤 친했다는 얘기도 있고 해서 재미난 에피들 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하하.”
아쉽게 됐네요. 아마 그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정쩡하게 말을 마무리한 남자는 힐끗 시계를 바라봤다.
“질문 몇 개만 더 하고 슬슬 마무리할까요?”
생각보다 이른 마무리에 선우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원래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것일까. 처음 해보는 언론사 인터뷰가 어렵고 긴장되긴 했지만 미리 받은 질문지의 3분의 1도 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낸다니 어쩐지 당황스러웠다.
기자는 다소 의무적으로 선우에게 맡고 싶은 배역이 있는지,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지를 묻고서 인터뷰가 끝났음을 알렸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네, 기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는 게 적절치 않게 느껴질 만큼 일사천리에 끝나버린 인터뷰였으나 선우는 다시 한 번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조형건 기자는 대기실 문을 빠르게 빠져 나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다 닫히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와 떠들썩한 대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조기자님. 오랜만에 뵙네요.”
“태형씨,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워. 갈수록 인터뷰 따기가 은근 힘들어져?”
“에이, 한창 촬영 중이니까 그렇죠. 요즘 바쁜 거 아시면서. 종방하고 나면 인터뷰 한 차례 돌 텐데 꽤 성급하시네요. 이렇게 열렬히 찾아주시니 저야 영광이긴 합니다만.”
“하하, 여전히 말빨은. 종방 인터뷰야 붙여넣기 한 것 마냥 질문이나 답이나 다 거기서 거긴데 뭐 재미가 있나. 그런 건 클릭수도 제대로 안 나와.”
툴툴대는 남자를 태형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래도 사정상 따로 인터뷰는 안 되고요. 음, 이렇게 뵌 김에 식사라도 할까요. 기자님 좋아하시는 레스토랑이 어디더라. ‘정원’이었나?”
“아이고 태형씨 정도면 우리가 대접해도 모자를 판에 이거 얻어먹어도 되나. 쩝, 근데 뭐 요즘 법 때문에...”
갑자기 주변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조기자의 말소리가 작아졌다.
“아니 무슨 놈의 법이 우리 기자님 밥도 한 번 못 먹이게 해. 일단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주차장으로 같이 가시죠.”
우리 기자님 저 촬영 끝나는 타이밍은 또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아셔 가지고. 여기서 무슨 취재라도 있었나 봐요. 뭐 그냥 이것저것 겸사겸사. 두 남자의 대화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정지된 사람처럼 굳어있던 선우가 뒤늦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 움직임에 재킷 안쪽에 넣어두었던 접힌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던 질문들과 고치고 또 고쳐 썼던 답변들. 그 글자들이 의미 없이 바스락거리며 부대끼고 있었다.
어쩐지 허탈한 마음이 가득 밀려들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힘없이 한 번 웃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야 이미 숱하게 많았던 것을. 고작 거기에 하나 더하는 일일 뿐이었다.
선우는 대기실 한 켠에 놓아둔, 오늘 새로 받은 책대본을 집어 들었다. 거기엔 자신이 하게 될 새로운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었다. 이래서 연기가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연기만큼은 자신이 하는 만큼 그대로 내보일 수 있었으니까. 선우는 연기의 그 정직함이 좋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직 길들지 않아 뻣뻣한 대본의 표지를 넘겼다. 자신의 새 대사들을 손가락으로 조심히 훑으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우가 글자들을 쓰다듬을 때마다 갓 인쇄된 종이에서 나는 잉크 냄새가 공기 중에 푸릇하게 번져 나갔다. 재킷 안쪽의 바스락거림도 어느새 잊혀졌다.
똑똑.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대본에 심취해 있는 사이 느닷없이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사실 자신의 전담 대기실도 아니고 주인 행세를 하는 모양새가 조금은 민망했지만 노크한 이가 들어올 수 있도록 바로 답을 돌려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서해경이었다.
“서PD님.”
앉아서 대본을 보고 있던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가 손을 저었다.
“그냥 편하게 앉아 있어요. 대기실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잠깐 눈 좀 붙일까 했는데 지금 수면실에 코를 심하게 고는 요주의 인물이 있어서.”
“아, 네. 쓰셔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도 촬영이 끝나서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에 남자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올렸다.
“대본보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계속 봐요.”
“집에 가서...”
“그냥 여기에 있어요.”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떼를 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짐을 정리하려던 선우는 엉거주춤 행동을 멈추었다. 남자의 시선이 빤하게 자신을 향해왔다.
“네, 그럼...하던 거 마저 하겠습니다.”
선우가 대본을 든 채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해경은 선우가 앉아 있는 소파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앉아서 주무시려고요? 자리가 넓어서 편하게 누우셔도 될 것 같은데.”
“직업이 직업인지라 앉아서도 잘 잡니다.”
남자가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거기다 JBS의 몇 안 되는 장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소파거든요.”
대기실 소파가 희한하리만큼 매우 푹신하고 착석감이 좋기는 했다. 선우 또한 이용할 때마다 느꼈던 점인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던 거 마저 해요. 난 신경 쓰지 말고.”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지만 선우는 대본을 펼쳐 읽고 있던 페이지를 다시 찾았다. 남자가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기댔다. 선우가 잠시 힐끔 그의 옆모습을 살폈다. 짬을 내서 취하는 수면이 굳이 이렇게 화보가 될 일인가. 심지어 배우도 아니고 PD인 사람이. 도드라진 그의 콧대와 턱선을 그 모르게 훑던 시선이 결국 목울대에 걸리자 냉큼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현듯 어쩐지 훔쳐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든 듯한 남자의 옅은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선우의 입가가 소리 나지 않게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대본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어느새 다시 대본에 빠져들었을 무렵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선우의 어깨에 와 닿았다. 선우가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선우의 뺨을 간지럽혔다.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적당한 무게와 머리칼의 부드러움, 옅은 샴푸 냄새까지. 이상하게도 그 모든 감각들이 가슴 속을 조금 간지럽게 했다. 선우의 고개가 다시 조용히 눈앞의 대본으로 향했다.
남자가 그랬듯이 선우 또한 남자의 잠을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그 일이 그에게도 이처럼 묘하게 한가롭고 안식 같은 일이었을까.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자신에게는 그랬다.
선우는 간간이 대기실 문 쪽을 힐끔거렸다. 근처에 발소리만 들려도 불쑥 누군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 혹시나 그의 잠을 깨우진 않을까 이따금씩 초조해지곤 했다.
그렇게 조용한 대기실엔 한동안 누군가의 옅은 숨소리와 팔랑거리며 대본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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