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19편
<-- --> 선우는 담당자에게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당장 전하는 대신 고심해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자리에서 나왔다. 메시지를 확인한 직후 단호한 의사를 전한다면 담당자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약 거절은 전화 연락으로 할 생각이었다.
조금 몽롱한 상태로 선우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동네 언덕길은 가파르진 않지만 완만한 경사에 이리저리 굽어 있어 은근히 걷는 이의 인내심을 요구했다. 그러나 선우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고르지 않게 포장된 그 길은 투박하면서도 언제나 선명하게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오래도록 걷다 보면 여러 상상과 생각들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은 선우에게 있어 하나의 특별한 일과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그 생각의 중심에는 서해경이 있었다.
그가 계약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당연히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의 의심도 의아함도 없이 단번에 그리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이 뒤늦게 문득 놀랍고 신기했다. 그를 그 정도로 믿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실감났다. 대체 언제부터 그를 믿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 됐을까. 단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낯선 타인에 불과했던 사람을.
언덕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담당자하고는 잘 헤어졌습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나른한 기운이 있었다.
“네. 지금 집에 가는 길입니다.”
[무턱대고 계약하지 말라는 얘기, 혹시 기분 나쁘진 않았습니까.]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소속사는 당장 급한 게 아니라면 조금 기다려줄 수 있습니까. 이제 시작하는 곳이긴 하지만 믿을 만한 지인이 운영하는 매니지먼트가 있어서요. 조건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습니다.”
[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후,하고 남자가 길게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묘한 위화감에 선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친구가 중요한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대가로 저를 술통에 빠뜨리기로 했거든요.]
“다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술 마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몸은 괜찮습니다. 제 몸을 걸고서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탁이기도 했고.]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들이붓는 통에 아슬아슬하긴 하네요. 평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 탓에 괜한 걱정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부르면 바로 달려와 줄 겁니까.]
“…네.”
[든든하네요.]
웃음기 밴 그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기분 좋은 울림을 전해왔다.
집에 도착한 선우는 샤워를 한 후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꽂이에서 안쪽 페이지들이 우둘투둘하게 맞물려 있는 바인더 연습장 한 권을 꺼내 펼쳤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문구점을 찾아 대본을 복사해 자신의 대사들을 오려붙여 놓은 것이었다. 언제라도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역사를 한눈에 쭈욱 훑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드라마에 나온 순서가 아닌 해당 인물이 살아온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기에 드라마 중간에 플래시백이나 회상 장면을 통해 드러난 과거의 장면들은 홀더를 열어 앞페이지에 배치하곤 했다.
이제 마지막이 될, 새로 복사해온 종이들을 꺼내 가위로 오리고 풀을 발라 바인더 속지에 붙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자신의 대사로 채워진 페이지수가 늘어날수록 뿌듯하면서도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모레 촬영과 마지막 촬영만이 남았다. 그것을 상기하자 가슴 속에 이상한 바람이 불어댔다.
풀 때문에 지저분해진 손을 씻고 나왔을 때 화면에 낯선 번호가 뜨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알 수 없었으나 개인 휴대폰 번호라 일단 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혹시 연선우씬가요?]
번호만큼이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 맞습니다.”
[아, 전 서해경 친구 이현석이라고 하는데요. 아마 곧 정식으로 인사하게 될 것 같은데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 자식이 좀 많이 취해서요. 불안해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시면 여기로 와주실 수 있나 해서요.]
“서PD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아 네 뭐 별일이 생긴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좀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일단 연선우씨가 오면 제 안위는 보장될 것 같아서. 남자의 작아진 목소리는 선우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당장 걱정할 만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닌 듯 해 선우는 작게 안도했다.
“지금 갈 수 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남자가 불러주는 대략적인 주소를 메모지에 적은 후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샤워 후 편한 실내복 차림이던 선우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전달받은 주소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 선우는 자신에게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남자는 받지 않았다. 주변의 건물들은 일관된 직사각형의 밋밋한 외형이 아니라 흡사 저마다 다 다른 건축가들이 지은 것처럼 개성 있는 모습들이었다. 문제는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간판 같은 것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자가 상호를 알려주긴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쉽게 장소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건물들 사이에서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앗,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요.]
서해경 이 새끼가 갑자기 증발하는 바람에…
“네? 죄송하지만 잘 들리지 않습니다.”
[아, 아뇨. 방금 건 혼잣말이었습니다. 거의 다 도착하셨나 봐요.]
“네. 근처인 거 같은데 건물들에 간판이 잘 보이지 않아서 찾기가 쉽지 않네요.”
[아, 이 동네가 좀 그렇긴 하죠. 지금 어디쯤 계세요? 눈앞에 보이는 특이한 건물 같은 거 있으면 설명해줄래요?]
“창문이 몇 개 없고 건물 전체가 하얀색인 곳 앞에 서 있는데…”
선우는 차분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조금만 더 걸어오시면 되겠네요. 거기서 두 블록쯤 더 걸어오신 다음에요.]
남자의 상세한 설명 덕에 선우는 목적지 앞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왜 못 찾았을까 싶을 정도로 외관 자체가 꽤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근처 주차장에는 고급 외제차와 스포츠카가 주차돼 있었다. 동네 자체는 신기하리만큼 조용했다. 특색있는 건물답게 입구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선우가 건물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불시에 눈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선우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키가 큰 남자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지?”
근처의 가로등 불빛이 남자의 등 뒤에서 쏟아졌다. 그 탓에 남자의 얼굴은 짙게 음영져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로 선우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서PD님?”
선우가 소리 내어 그를 부르자 남자가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아까와 달리 조금 빗겨선 탓에 가로등 불빛을 희미하게 받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해경은 약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무언가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선우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가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였다. …영상을 너무 돌려 봤나. 이젠 헛것까지 보이는군. 그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서PD님.”
선우가 조용하게 다시 그를 불렀다. 눈가를 잠시 찌푸렸다가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선우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의 손이 불시에 뻗어오더니 선우의 뺨에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남자의 큰 손 안에 감겨왔다.
“…진짜 연선우?”
느닷없이 다가온 남자의 손길은 조심스럽지만 간지러웠고 또 선우를 당황하게 할 만큼 낯설었다. 선우가 머뭇머뭇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답했다.
“감독님 친구분이 연락하셔서 지금 막 도착한 길입니다.”
해경이 선우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눈앞에 있는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증명해 봐요.”
“증명이요?”
“당신이 진짜 연선우라는 거.”
사실 취했다 하기에는 술 냄새보다는 평소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 그에게서 나곤 하던 옅은 스킨향만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그가 취하지 않았다면 쉽게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빛이 적은 거리에서 한층 더 어두워진 눈동자가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설프게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어떻게… 증명할까요.”
연기라도 해야 할까. 취한 서해경은 평소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달라 더 대하기가 어려웠다. 해경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키스해보면 알 것 같은데.”
놀란 선우의 두 눈이 잠시 크게 떠지며 흔들렸다. 마른 입술을 열어 선우가 간신히 반박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그게 어떻게 증명이 됩니까.”
해경이 손을 뻗어 선우의 턱을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선우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진짜 연선우라면…”
남자가 앞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선우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분명 달 것 같거든.”
========== 작품 후기 ==========
몇 가지 문제로 며칠 습작이 된 시기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완결 전까지 습작으로 전환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잠시나마 놀라거나 걱정하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40화 이내 완결을 예상하고 있으나
저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계산상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7월, 늦어도 8월까지는 완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7월 즐거운 일들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