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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20화 (20/49)

러프 컷   20편

<--  -->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해경은 문득 움직임을 멈추고서 시선을 들었다.

“왜 아무것도 안 합니까.”

그는 약하게 떨리는 선우의 속눈썹 아래에 감춰진 순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밀칠 수도 있고 뿌리칠 수도 있을 텐데.”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해경을 보고 있던 선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자 남자가 선우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리고 나에게 입 맞출 수도 있겠죠.”

여전히 서로의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선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말없는 시선이 오고갔다. 마치 선우의 허락과 대답을 기다리듯 내내 눈앞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던 해경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그리고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치려는 순간 근처에서 반갑지 않은 소음이 끼어들었다.

“야, 서해경!”

서해경을 찾고 있는 이현석의 목소리였다.

“어디로 꺼진 거냐고.”

투덜대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선우는 안기다시피 기대있던 서해경의 품속에서 급하게 빠져나왔다. 갓 꿈속에서 헤어나듯 조금은 멍한 선우의 얼굴을 바라보던 해경은 설핏 미간을 구기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야이, 서해- 어?”

동시에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난 남자가 같이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둘이 벌써 만난 거야?”

의아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던 현석은 선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갑게 먼저 말을 붙였다.

“연선우씨죠? 제가 연락드렸던 이현석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악수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연선우라고 합니다.”

선우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이고는 남자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던 해경이 뭔가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라도 있는지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순간 해경과 시선이 마주친 현석이 어깨를 들썩이며 움찔했다.

“뭐, 인마. 악수도 못 하냐.”

“내가 뭐랬다고.”

해경이 불량한 미소를 얼굴에 덧그리자 현석이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관찰했다.

“근데 서해경, 너 지금 제정신인 거 맞냐?”

해경이 씨익 웃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어? 그냥...”

나도 살아야 하니까. 작게 중얼거린 현석은 슬쩍 눈치를 보다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곤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너 지금 꽤 취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집에 갈래? 안 그래도 대리 불러놨거든.”

현석이 구원요청을 하듯 선우를 흘깃 보자 그를 눈치챈 선우가 한 마디 거들었다.

“지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린 해경의 시선이 선우의 입술을 느릿하게 훑었다.

“아직 확인할 일이 남은 것 같은데요.”

“확인? 뭔 확인?”

현석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는 동안 선우는 해경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선우씨 갑자기 불러서 오느라 이래저래 고생 많았죠? 미안해요. 해경이 보내고 제가 술이라도 한 잔…”

“둘이서 오붓하게 술을 왜 마시는데.”

헙. 현석이 부리나케 입을 다물었다. 해경은 제 오랜 친구를 삐딱한 자세로 내려다보았고 선우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피하듯이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해경은 그것이 묘하게 불만족스러웠다. 선우는 불쑥 자신의 손을 낚아채는 체온에 고개를 들었다.

”연선우씨는 나랑 같이 가죠. 날 집까지 데려다줘야죠.”

남자가 뻔뻔하게 싱긋 웃어보였다.

선우는 대리 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해경과 나란히 앉아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해경은 취기에서 벗어나는 듯도 했고 아닌 듯도 했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이따금씩 선우를 돌아보곤 했다. 연선우를 본 것이 착각이 아니었는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그것이 몇 번 반복된 이후 뺨에 달라붙는 시선이 꽤 길어진다 싶을 때쯤 선우는 결국 외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가 눈웃음을 쳤다.

“씻고 왔나 봐요. 비누 냄새가 나는데.”

선우는 반사적으로 대리기사를 힐긋 봤다. 남자의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별 내용이 아닌 평범한 대화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지나치게 의식하는 탓인지 조금 민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서 샤워하고 난 뒤 얼마 안 지나 나온 길이라서요.”

“그렇군요.”

남자가 조용히 대답하고 나서 골똘히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허벅지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선우가 얼마 전의 부상이 생각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불편하다기 보다… 마저 다 못한 게 있어 계속해서 신경 쓰이네요.”

해경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지만 왠지 모르게 사나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선우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을 기피하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아까부터 저도 모르게 손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차안에서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을 보낸 끝에 마침내 그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대리기사가 먼저 인사를 한 후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두 사람은 뒤늦게 차에서 내렸다.

“온 김에 안에 들어갔다가 가죠.”

“저는 여기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치 긴장이라도 한 듯 평소와 달리 딱딱한 말투에 서해경이 주의깊은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봤다.

“집 앞에서 돌려보낼 생각이었으면 여기까지 걸음하게 할 생각은 안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 마음 편하자고 한 일이라서요.”

언젠가 서해경이 한 말과 일맥상통하는 얘기였다. 잠시 선우를 보고 서있던 해경은 아쉬움을 숨기지 않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조심해서 들어가요. 대리 불러줄게요. 내 차 타고 가요.”

“괜찮습니다. 근처에서 버스 타는 게 빨라요. 어서 들어가세요. 날이 춥습니다.”

선우의 옷차림을 훑던 남자가 짧게 혀를 찼다.

“날이 춥다는 사람이 그렇게 입고 다닙니까.”

그리고는 해경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선우에게 건넸다.

“감기 걸려요. 이거 입고 가요.”

“아뇨. 저는...”

“안 입고 가면 지금 당장 어디로든 나가서 하나 사줄 겁니다.”

남자가 웃는 얼굴로 협박하자 선우가 그에게서 재킷을 건네받았다.

후우. 오피스텔 건물을 빠져 나온 선우는 하늘을 향해 긴 숨을 내뱉고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부터 가슴이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차마 서해경의 재킷을 입지 못하고 손에 든 채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너 언제 시간 있으면 가게 한 번 들러라.]

경훈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선우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나마 정신을 빼앗길 일이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 혹시나 잘까봐 문자 한 건데.]

“밖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급한 건 아니고 지금 밖이면 잠깐 가게에 들렀다 갈래? 엄마가 너 주라고 챙겨준 거 가게 냉장고에 넣어 놨거든.]

“내가 먼저 어머님 찾아 뵀어야 했는데.”

[됐어. 드라마 찍느라 바쁜 애가 뭔 인사를 가. 엄마는 네가 씻어 보낸 빈 반찬통 보는 게 그렇게 흐뭇하시대. 얼른 가져가서 먹고 깨끗하게 설거지해서 반납이나 해.]

경훈의 너스레와 경훈의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으로 선우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경훈이 운영하는 가게에 도착해 스탠드바석에 자리 잡은 선우는 무슨 생각엔가 깊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어? 별 거 아냐. 그냥.”

선우가 말없이 웃어 보이자 ‘싱겁긴’하고 가볍게 대꾸한 경훈이 와인 잔을 닦으며 심드렁히 물었다.

“참, 저번에 고이 손빨래한 그 옷은 주인한테 갖다 줬냐?”

“뭐?”

“왜 예전에 네가 갑자기 전화해서, 이거 비싼 셔츠인 거 같은데 손빨래해도 되는 거냐고 손빨래하다 말고 전화기 붙들고 난리쳤던 적 있었잖아.”

“…난리까지야.”

“아니 네가 그런 일로 전화를 한 적이나 있었어야 말이지. 너 그렇게 정신없는 거 처음 봤다. 그것도 셔츠 하나 때문에.”

잠시 어색하게 헤매던 선우의 시선이 차츰 제자리로 돌아올 때쯤 경훈이 재차 확인하려 들었다.

“그렇게 유난까지 떨었는데 무사히 제 주인한테 돌아갔나 해서.”

시선을 내리 깐 채 무언가를 생각하던 선우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쩌다 보니 아직 못 돌려줬어.”

조금 뜸을 두고 돌아온 대답에 의아하게 선우를 보던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난 또 무슨 집에 불이라도 난 사람마냥 호들갑을 떨기에 냉큼 돌려줄 줄 알았더니.”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니까.”

“그 정도가 아니긴.”

경훈이 실실 웃으며 놀려대는 투로 받아치다 화제를 전환했다.

“이 한밤중에 누굴 만나고 오는 건데.”

그러나 여전히 같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선우는 몰래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냥…드라마 감독님이야.”

대답하는 선우의 표정을 가만히 보고 있던 경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불쑥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그 문제의 옷 주인이냐?”

제 친구지만 정말 기가 막히게도 눈치 하나만큼은 빠른 녀석이었다. 그것이 오늘만큼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건 왜.”

“왜긴 왜야.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선우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한숨 쉬며 대답했다.

“맞긴 한데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내가 뭘.”

경훈이 능글능글 웃기 시작했다.

“근데 그 사람 잘생겼냐?”

선우가 눈가를 좁히며 경훈을 약하게 쏘아봤다. 자주 볼 수 없는 선우 나름의 표독스러운 표정이었다. 경훈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낄낄대며 웃다가 봐준다는 식으로 한발 물러섰다.

“아, 알았어. 그만할게. 하아, 진짜 나도 큰일이야. 20대 후반 사내자식을 놀리는 게 이렇게 재밌다니.”

끌끌대며 와인 잔을 닦는 경훈을 보며 단념하듯 고개를 저은 선우가 여기까지 온 목적을 꺼냈다.

“반찬통이나 꺼내줘. 이 놀고먹는 악덕 사장아.”

“내가 너를 좀 놀리기로서니 직원들한테는 꽤 좋은 사장이란다.”

여유롭게 씨익 웃어 보인 경훈이 가게 내부에 따로 마련된 휴게실로 향했다. 멀어지는 제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우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선우는 몇 시간 전 올랐던 똑같은 길을 또다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마다 여러 상념들이 들이닥쳤다가 파문을 남기며 사라지곤 했다. 하루 안에 같은 길을 반복해 걷는 사이 자신에게 이렇듯 엄청난 변화가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을 내버려두었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선우는 억지로 무언가를 밀어내듯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애를 쓰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집에 필요한 생활용품이라든가 촬영현장에서 오며가며 들었던 스태프들의 잡담, 이미 결정해 더 이상은 고려할 필요 없는 계약 건에 대해 쓸데없이 곱씹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눈여겨보려 애썼다. 거의 매일 봐서 익숙한 동네 담벼락 아래의 화분들이라든가 제자리를 잃고 헤매는 듯이 길 위에 드문드문 깔려 있는 돌멩이들을 집중해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집요하고도 요란스럽게.

집에 도착한 선우는 오래된 나무향이 나는 익숙한 방문을 닫고 그곳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아니 네가 그런 일로 전화를 한 적이나 있었어야 말이지. 너 그렇게 정신없는 거 처음 봤다. 그것도 셔츠 하나 때문에.’

경훈의 말이 맞았다. 어느 날엔가 누군가의 셔츠 하나 때문에 답지 않게 몹시 부산을 떨었던 자신의 낯선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남자가 자신에게 입 맞추려던 순간 자신이 마주했던 감정과 대조하자 크게 이상하지 않은 장면들이었다.

선우는 불이 꺼진 방안에 앉아 작은 창문 안으로 그만큼이나 작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엔 서해경의 셔츠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한줌의 빛이 귀한 창가를 누군가의 옷을 말리기 위해 가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선우는 무릎 위에 팔을 기댄 채 그 위로 고개를 묻었다. 저를 탓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단지 친절한 사람으로만 내버려두지 못한 것. 그저 술에 취해 기대오는 남자에게 가슴 떨려하며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한 것. 자신의 낯선 행동들이 한사람과 연관되는 동안 스스로를 말리지 못한 것까지도.

자신이 서해경을 좋아한다. 그 깨달음은 서서히 선우를 점령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갑자기 거대한 파도를 삼킨 것과 같아서, 선우의 가슴은 쉼 없이 일렁이고 들썩이고 괴로웠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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