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프 컷 22편
<-- --> (1/2)
선우의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선우는 대기실에서 몇 번인가 안면을 익힌 분장 스태프와 인사를 나눈 후 얼굴을 시작으로 분장을 받기 시작했다.
“선우씨 은근 몸 좋네요.”
선우의 셔츠를 풀어헤쳐 찢어진 상처를 만들어내고 있던 남자 스태프가 가볍게 감탄하며 말했다. 전체적으로 마르긴 했지만 꾸준히 다진 듯한 잔근육이 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탄탄한 이런 몸이 오히려 만들기도 관리하기도 어려웠다.
“운동해요? 웨이트 트레이닝?”
“아뇨. 한동안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자주 했더니 그게 아무래도 운동 효과가 있었나봐요.”
사실 누가 감탄하거나 부러워할 만한 몸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선우는 조금 민망했다.
“아, 알바 많이 했었구나. 몸 쓰는 거면 건설 쪽?”
“주로 건설 현장이나 상하차 일을 많이 했습니다.”
최대한 늘 현장 가까이에서 무언가를 배우고싶어 돈이 필요하더라도 단역 알바를 많이 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일용직 알바를 주로 했었다.
“와, 상하차. 그거 한 번 하면 며칠은 못 일어난다는데. 꽤 고생했겠어요.”
정작 실제로 경험한 저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악마의 알바’ 운운하는 스태프를 보고 선우는 조금 웃었다. 저도 진짜 처음 했을 때는 말 그대로 죽는 줄 알았었다. 단단히 각오를 했는데도 그랬다. 그 때를 떠올리며 대기실에 앉아 분장을 받고 있으려니 기분이 어쩐지 묘했다.
“잘 됐네요.”
스태프의 한마디에 선우가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열심히 노력해서 결국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네. 감사해요. 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주어진 하루하루가 무척 귀하고 소중하기만 했다. 가끔씩은 꿈에서 깰까,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울 만큼.
천지훈의 헝클어진 셔츠 사이로 울긋불긋한 멍과 생채기들이 눈에 보인다. 사내는 입가와 복부에 피를 흘린 채 사무실 의자에 묶여 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지훈이 가물거리는 눈을 뜨자 겁을 먹은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지훈이 짧게 피식하고 웃는다. 가벼운 웃음에도 전신이 고통스럽게 죄어 온다.
"막내야. 왜 그렇게 서 있어."
"혀, 형님..."
막내 장우식의 손이 움찔거린다. 사내는 의자에 묶인 지훈에게 다가가다 주춤 물러서는 동작을 정신 사납게 반복하고 있다. 끝내 마음을 먹은 듯 자신에게 다가서는 막내를 저지하듯 지훈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네가 이럴까봐 카메라 달아둔 거잖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막내가 소심하게 뒤쪽을 돌아봤다. 그 전까지 사무실에선 볼 수 없었던 낯선 미술품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막내는 울상을 짓고 있다.
"앞으로 어머니 속 썩이지 말고 잘 보살펴드리고."
"마, 말 좀 그만 해요! 상처가 더 벌어지잖아!"
"우식아. 두 사람 무사히 도망간 거 맞지."
"아씨! 그런 거 챙길 시간에 형님 살 궁리나 하라고!"
막내의 성난 고함이 사무실을 울리지만 지훈의 귀에서는 모든 소리들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싶게 늘 목소리가 우렁찬 녀석인데 참 별일이지 싶다. 우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연락하려 하자 지훈이 쿨럭거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만 둬. 어차피 늦었으니까. 나, 너까지 데리고 가기 싫다. 나중에 죄송해서 너희 어머니 얼굴 어떻게 보냐.”
힘없이 웃는 지훈의 두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었다. 그러나 사람 생명 둘 살렸다고 생각하면 시궁창 같았던 삶이 막판에 꽤 그럴 듯한 모양새로 마무리되는 듯 싶다. 감긴 두 눈 안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간다. 굳어가는 몸과는 상관없이 지훈은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다. 긴 시간 끝에 너를 또 한 번 만날 수 있어서, 그 또한 참 좋았었다고. 지훈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끝내 눈을 감았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컷! 오케이! 하는 외침과 함께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가 달려와 선우의 묶인 손을 풀어주었다. 선우는 느릿느릿 눈을 떴다. 이번에 자주 같이 촬영하면서 친해진 막내역의 고동현이 여전히 훌쩍거리면서도 주절주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 기분이 참...그러네. 연기라는 거 아는데도 형 눈빛이 어우 막."
동현이 민망한지 부러 유난을 떨며 눈물의 흔적들을 닦아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선우형도요."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후에 쭈뼛거리던 동현이 선우를 꼭 끌어 안아왔다. 선우가 그의 옷에 촬영용 피가 묻을까 조심하며 그를 마주 안았다. 세트장 정리에 나선 스태프들 사이에서 찍은 화면을 돌려보고 있던 재철이 선우를 향해 손짓했다.
"선우씨, 볼래요?"
"네."
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니터 화면으로 향했다. 단번에 오케이 싸인을 받은 마지막 씬을 보며 선우는 속으로 안도했다.
죽기 직전의 몸 상태로 묶인 상황이라는 제약 때문에 눈빛과 표정, 대사와 절제된 움직임 모두 표현이 까다로웠다. 그를 조율해 천지훈의 감정과 서사를 함축적으로 모두 보여줘야만 했기에 선우는 부담감과 긴장감 속에 마지막 장면을 준비했다. 그 결과물이 스스로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안도감이 일었다. 동시에 방금 전의 자신인데도 화면 속 남자의 모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이런 괴리감은 꽤 자주 느끼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좋네."
담백하지만 칭찬의 의미가 담긴 그 말에 선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우씨 덕에 나야 뭐 편하게 찍었지. 보는 입장에서 뭐랄까. 쾌감이랄까. 선우씨 연기 보면서 오랜만에 잔뜩 배불렀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재철의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에 선우는 진심으로 고마움과 벅찬 기분이 들었다.
"저도 감독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같이 촬영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선우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 장PD가 선우의 등을 따뜻하게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그를 시작으로 선우는 그동안 함께 했던 동료 배우와 스태프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성의 있는 감사를 표하고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스태프가 건네준 티슈로 대충 얼굴을 닦긴 했지만 가짜 피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 선우는 화장실에 들러 얼굴을 꼼꼼히 씻어냈다. 돌아간 대기실에는 촬영 기간 동안 대부분의 날이 그랬듯이 아무도 없었다. 선우는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팔을 괴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여러 감정이 스쳐지나갔고 선우는 오롯이 그것들을 느끼고 감당하기로 했다.
그 끝엔 무대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텅 빈 무대 밑으로 내려온 것처럼 허전함과 쓸쓸함이 밀려 왔다. 그리고 문득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선우는 휴대폰을 꺼내들어 연락처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냈다. 화면을 띄운 채로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대로라면 자칫 감정에 휩쓸려 그에게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될까 두려웠다. 대기 시간이 지난 휴대폰은 다시 까맣게 물들어 선우의 얼굴을 비췄다.
감정을 갈무리하듯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대기실 문이 열렸다. 순간 방금 전의 결심도 잊고 혹시 그일까 싶은 기대감에 젖어 시선을 들었다. 머뭇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촬영장에서 서너 번인가 마주친 적 있는 남자였다.
“저, 누나가... 대기실에서 잠깐 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요.”
그는 윤하영의 매니저였다.
선우는 옷을 갈아입고 하영의 대기실을 찾았다. 내심 찔리는 게 있어 선우는 그녀의 매니저가 자신의 대기실에 들어설 때 그랬던 것처럼 조금 쭈뼛대며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앉아있던 하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우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하영이 후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꼬리 말린 강아지처럼 들어와요?”
“안 그래도 인사드리려고 했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우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설마 끝까지 연락을 안 할까 싶어 기다려봤는데 정말로 안 하네요.”
하영이 눈을 접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물어보네. 내 쪽지 못 봤어요?”
“봤습니다.”
보기야 했다. 번호가 혹시라도 유출되면 큰일이다 싶어 집안에 고이 모셔두기까지 했다.
“봤는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보고 나서 잘...저장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저장? 저어장? 그리고 끝?”
하영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입을 조금 벌린 채 몇 번 뻐끔거리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선우씨가 은근 캐릭터가 있네.”
그녀는 돌려 말할 것 없다는 듯이 쉽게 풀이해서 설명했다.
“나 그거 선우씨한테 관심 있어서 준 거예요.”
선우는 사실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쳐 올 줄은 몰랐다. 번호를 주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단번에 상황을 정의 내리기엔 꽤 긴가민가하기도 했었고. 모든 게 명확해지자 선우는 차라리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가 쉬워졌다.
“저는...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영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바로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사겨요?”
“...아뇨.”
“그럼 됐네. 이제 촬영 다 끝났죠? 일단 지금 나하고 밥이나 한 번 먹죠. 동료로서.”
하영이 특유의 자신감 있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영은 밴을 타고 이동하고 선우는 그녀의 또 다른 매니저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녀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필요한 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좌석에 앉아 자잘한 상념들을 끼고 창밖을 보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서해경이었다.
“여보세요.”
[마지막 촬영 끝난 거 축하해주려고 했는데 차기작 미팅 때문에 조금 늦었더니 대기실에 없네요. 지금 어디예요.]
선우는 하영의 매니저가 앉아있는 운전석을 힐끔거렸다.
“식사 약속이 있어서요.”
[오늘 끝나고 일정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원래는 그랬는데 갑자기 생긴 일정이라.”
[누구랑 식사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
[지금 답하기 곤란한 상황이에요?]
“네.”
[연예인인가 봐요.]
그리고선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혼잣말을 하듯이 작게 중얼거렸다. 윤하영인가. 그 소리가 선우의 귀에도 들렸지만 굳이 맞다고 대답하진 않았다. 그러자 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혹시 윤하영이예요?]
“...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식사하는 곳이 어디예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가는 중인가 봐요.]
“네.”
운전석을 또 한 번 힐끔 봤다. 하영의 매니저는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통화하는 선우의 말을 다 듣고 있을 터였다. 상황상 선우는 계속 소극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착하면 어딘지 문자 보내요. 데리러 갈 테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따로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보고 해야 할 얘기라.]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가 윤하영과 식사하는 곳까지 굳이 찾아온다는데 신경이 더 쏠렸다.
“오래 기다리셔야 할지도 몰라서요. 끝나고 제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이동하기 편한 사람이 가는 게 낫죠. 부담 갖지 마요. 어차피 기다리는 사람은 나니까.]
자신이 기다리는 것보다 그게 더 부담스러웠다. 선우는 난감하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부터 밥이 안 넘어가는 기분인데요.”
건너편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그러라고 굳이 거기까지 가는 거라서.]
방금 전엔 중요한 할 말이 있어 오는 거라 하지 않았었나. 남자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을 던졌다. 선우는 안 그래도 불편할 식사 자리가 더더욱 불편해질 것만 같았다.
========== 작품 후기 ==========
직전 회차의 마지막 촬영은 아역배우인 유빈이와의 마지막 촬영이었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아 해당 부분의 표현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