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41화 (41/49)

러프 컷   41편

<--  -->  해경은 그 부탁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바로 밝히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말하면 들어달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막연한 약속이었지만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경이 부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심지어 그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일지라도. 물론 애초에 그가 선우에게 해가 될 만한 걸 부탁할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휴일에 나누었던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던 선우는 휴대폰을 꺼내 안내받은 장소를 다시 확인했다. ‘시차’의 첫 방송이 있는 오늘은 얼마 전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숙소를 빌린 채 진행되고 있었다. 오전부터 시작된 촬영이 저녁께 마무리되어 밤에는 다 같이 모여 본방을 시청하기로 했다.

선우는 숙소 1층에 도착해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넓은 방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군것질거리들이 준비돼 있었고 무리 지어 앉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MT라도 온 것처럼 편안하면서도 떠들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선우형!"

선우를 발견한 오규진이 반갑게 손을 들어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여 간단히 인사한 선우가 자리로 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해경은 보이지 않았다.

“감독님은 못 오신대요.”

“그래?”

규진이 별다른 의식 없이 꺼낸 얘기에 본능적으로 그를 찾았던 선우는 속으로 조금 뜨끔했다.

“이제 방송 나가면 아무래도 일정이 더 타이트하게 진행되니까 신경 쓸 게 많으신가 봐요.”

서해경은 효율적으로 촬영하는 스타일이었고 되도록 스태프들의 노동 시간을 준수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제작 여건이 여유롭지만은 않은 TV 드라마를 그런 식으로 찍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지휘하는 감독의 치밀한 노력과 계산이 필요했다.

방송 시작을 몇 분 앞뒀을 땐 올만한 사람들은 모두 모여 무척 크게 느껴졌던 방이 어느새 여유 없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제 한다!”

누군가의 외침에 잠시 흐트러졌던 시선들이 TV로 향했다. ‘시차’라는 제목이 뜨며 오프닝 화면이 시작됐다.

“CG팀 애썼네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프닝은 감각적인 영상미와 수준 높은 그래픽으로 그 자체로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영화 같은 장면들에 이어 제일 먼저 ‘연선우’라는 이름이 뜨자 선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찰나와 같이 느껴진 드라마 오프닝이 지나가고 긴 광고마저 끝나자 드디어 첫 화가 시작됐다. 설레고 긴장된 마음으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방 안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드라마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찍은 것에 비해 시간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 전개는 어느덧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남자는 협소한 책상 위에 올려진 세 권의 책 중 가운데 책에 꽂아놓은 만 원짜리 세장을 꺼내 주머니에 넣고 고시원을 나선다. 버스표를 끊고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을씨년스러운 느낌의 한 마을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극히 드물게 남아 있는 마을의 주민들마저도 누군가 찾아오면 극도의 경계심과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폐쇄적인 시골 마을 주민들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보기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돋보인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지독한 상실감이다. 그들은 대부분 그때의 사건으로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었다.

남자도 그들과 처지가 같았으나 지금은 외지인이 되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남자는 산길로 향하던 중에 한 노파와 마주쳤다. 백발을 풀어헤친 노인은 부릅뜬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죽은 놈이 살아있네.”

그 말에 남자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 말은 마치 어머니와 누이 대신 제가 죽었어야 했단 말로 들렸다. 남자의 가슴은 또 한 번 죄책감으로 쪼그라들었다. 관리가 제대로 안 된 두 사람의 묘에 그들이 생전에 좋아했던 약과와 젤리 꾸러미를 각각 올렸다. 남자는 그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위령제는 이미 진행이 한창 중이었다. 의식을 치르던 무속인이 불현듯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갑자기 찾아든 적요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그녀는 누군가를 찾듯 천천히 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더니 남자를 발견한 순간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붙잡고서 격렬하게 매달렸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줘!”

남자는 기겁하며 무속인을 가까스로 떼어놓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내달렸다. 10년 전 그날, 자신은 그저 인터넷으로 알게 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도시에 갔다가 살아남은 죄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저를 겨냥한 죄책감이 그랬듯이 무속인의 외침은 마치 너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고 원망이라도 하는 듯해 괴로웠다.

피곤한 몸으로 고시원에 들어서던 남자는 자신을 붙잡는 관리인을 의아하게 돌아봤다.

“학생 오늘 택배 왔던데 지금 온 김에 가져가.”

남자는 택배로 올만한 물건을 주문한 적도, 자신에게 택배를 보낼 만한 이도 없었다. 그러나 꽤 묵직하게 느껴지는 택배의 수신인에는 분명히 제 이름이 적혀 있었고 발신인엔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택배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노려보다 밀봉한 테이프를 칼로 뜯어냈다. 거기에 들어있는 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10년 전까지 쓰던 노트북과 어댑터였다.

“이게 왜…”

남자는 10년 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거기서 살며 가지고 있던 짐들은 모두 버리거나 내놓고 왔었다. 그중엔 당연히 눈앞의 노트북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10년이나 지난 지금 이게 어떻게 자신에게 돌아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자는 잠시 고민하다 어댑터를 연결해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오래된 모델임에도 로딩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탕화면에는 단 하나의 아이콘만이 깔려 있었다. 그건 오래전에 유행했던 한 채팅사이트의 아이콘이었다.

“뭐야, 이거. 누가 장난친 건가.”

그 사이트는 이미 오래전에 망해서 지금은 아예 이용할 수조차 없었다. 터치 패드에 손을 올려 이것저것 건드려봤지만 다른 프로그램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결국 남자는 전원을 끄기 전에 한 번 시도나 해본다는 심정으로 별 기대 없이 유일한 아이콘을 실행했다. 바로 창이 하나 열리며 채팅방에 접속 중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진짜 된다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순간, 귀여운 느낌의 남자 아바타와 함께 채팅창이 켜졌다.

[응? 뭐야 갑자기. 이게 왜 켜지지. 혹시 당신이 내 컴퓨터 해킹한 거야?]

뭐? 지금 자신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데 해킹이라니. 어이없어하던 남자는 망설이다 손가락을 놀렸다.

[해킹 아니고요. 뭔가 오류인 것 같습니다. 잘못 들어왔으니 저는 그럼 이만 나가겠습니다.]

[잠깐만. 일단 나가지 말아 봐.]

[? 왜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얘기나 하자.]

뭐야, 이 삭은 멘트는.

[혹시 님 나이가?]

[나? 18.]

믿기지 않았다.

[열여덟인데 말투가…아무튼 내가 형이네.]

[온라인상에 형 동생이 어딨어. 다 친구지.]

[……]

[근데 형 이름은 뭐야?]

친구라더니 잘도 바로 형 소리가 나온다.

[인터넷에서 함부로 실명 까고 그러면 위험해.]

[왜? 범죄 때문에? 형 사기꾼이야? 난 아닌데.]

이 자식 은근히 성질을 돋우는 구석이 있다. 뭐라 하기도 전에 새 메시지가 날아왔다.

[왠지 반가워서 그래. 여긴 좀 시골이어서 내 또래나 형들이 별로 없거든.]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그냥 알려줄까. 근데 원래 꿍꿍이 있는 놈들이 말을 잘하고 사람 심리를 잘 파고드는 법이었다.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남자의 손가락이 주춤했다.

[시원하게 내가 먼저 깐다. 난 한재희.]

뭐? 남자가 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너 지금 장난하는 거지?]

[엥? 갑자기 뭔 장난? 내 이름이 맘에 안 들어?]

뭐야, 이거 진짜. 남자는 순간 안 좋은 예감으로 가슴이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한재희는 내 이름인데.]

[헐. 대박. 이 정도면 인연 아니고 운명 아님? 재희형은 어디 살아?]

열여덟의 한재희는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재밌는 듯 보였지만 스물여덟의 한재희는 전혀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남자는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지금은 서울.]

[우와. 좋겠다. 나도 언젠가 서울에서 사는 게 꿈인데.]

[넌 어디 사는데.]

[거의 시골이라 형은 아예 못 들어봤을 수도 있을걸. 여기 소천리라는 곳인데. 그래도 나름 유명한 것도 있어. 약과랑 복숭아.]

뭐? 남자는 순간 너무 놀라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뭐야. 무슨 이런 장난이 다 있어. 남자의 몸이 급격히 떨려오고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소천리. 그곳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자 몇 시간 전까지 머물고 있었던 마을이었다. 그리고 불행이 휩쓸고 간 그 마을에 10대 남학생은 더 이상 살지 않는다.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고 자신이 직접 연기한 장면인데도 선우는 이렇게 방송으로 마주하는 장면들이 낯설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자리해 있던 모든 이들이 숨죽이고 있던 공간은 드라마가 끝나자 뒤늦게 숨이 트이듯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목소리 연기하기 힘들지 않았어요?”

“응?”

“서로 나이대도 다르고 두 인물 성격이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니까 은근 까다로울 것 같아서요.”

“어렵긴 한데 한편으론 재밌었어.”

“와아. 역시. 잘하는 사람들은 다르구나.”

혹시 잘못 말한 건가. 느낀 그대로를 얘기했다가 되돌아오는 규진의 반응에 선우는 차분히 자신의 대답을 되짚어보았다.

“으으. 1인 2역 겁나 빡셀 것 같은데. 전 캐스팅 들어와도 못할 것 같아요. 연기 다 들통날까봐.”

그때 오규진의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팔로 툭 그를 쳤다.

“인마, 너한텐 애초에 그런 제안이 안 가.”

“와아, 보셨죠? 얘 인성.”

나란히 앉아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촬영 전부터 이미 꽤 친한 사이 같았다.

“야,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오래 참아서 죽겠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지. 형은 안 피워요?”

“응. 난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 이제 방에 들어가려고.”

“알았어요. 그럼 잘 쉬고 내일 봐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멀거니 보고 있는데 그 사이 선우 옆 빈자리에 냉큼 누군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가까이서는 거의 처음 보네요.”

“아, 안녕하세요.”

얼굴은 알지만 아직 겹치는 씬이 없어서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남자배우였다.

“형이랑 친해지고 싶었거든요. 이제야 기회가 좀 생기네. 혹시 제 이름 아세요?”

“최경원씨 아닌가요.”

“와아, 그 얘기 진짠가 보네요. 단역이나 다름없는 조연들 이름에 웬만한 스태프들 이름까지 다 외운다더니.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네요. 근데 여기 술 없어서 아쉽다. 그쵸?”

선우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있으면 분위기가 더 좋을 것 같긴 하네요.”

“형은 술 안 좋아해요?”

“솔직히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에요.”

“그래요? 친해지는 데는 술이 직방인데. 그래서 여기 합숙 촬영 끝나고 괜찮으시면 형이랑 언제 한 번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거든요.”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니니까 언제 기회 있으면 같이 한잔해요. 다만 촬영 기간에는 좀 어려울지 모르니까 이왕이면 전체 촬영 다 끝나고 나서요.”

“윽. 그거 종방 때까진 안 된다고 돌려 말한 거죠? 그럼 최소 몇 주는 더 기다려야겠네. 형 듣던 대로 진짜 모범생 스타일인가 봐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웃었다. 딱히 악의는 없어 보였으나 선우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동료였고 이쪽 일을 하며 사람을 완벽히 가려가며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리를 둘 순 있지만 같이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그마저도 한계가 있었다.

배우와 스태프들 몇이 각자의 사정으로 숙소로 먼저 돌아갔다. 선우는 좌식 테이블에 놓여있던 음료를 홀짝 마시며 자신도 이제 곧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최경원이 주위를 휘 둘러보더니 비밀이라도 있다는 듯이 선우에게 바짝 몸을 붙이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근데 형, 이태형 선배랑 사귀었다면서요?”

선우가 애써 동요를 숨긴 채 돌아봤을 때 남자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시고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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