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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프 컷-45화 (45/49)

러프 컷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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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희가 눈을 떴을 땐 어두운 창고 안이었다. 남자는 의자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여전히 머리 쪽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니 어깨와 팔 부근에 여기저기 피에 젖었다 마른 흔적들이 보였다.

"깼어?"

흠칫 고개를 들자 창고 안쪽에서 무언가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김한준."

사내가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떠보이다 씨익 웃었다.

"오랜만에 듣네, 그 이름."

김한준은 재희 앞으로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이름이야 진작에 바꿨지. 새 출발하려고. 아, 얼굴도 그때보다 낫지?"

재희가 그를 처음 봤을 때 왜 바로 알아볼 수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수술을 했는지 남자의 얼굴은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어때. 각오가 느껴져? 나도 나름 회개하고 잘 살아보려는데 왜 이제와 들쑤시고 다녀, 꼬맹아."

라텍스 장갑을 낀 사내의 손이 재희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쓸모없는 인생이라도 얌전하게 살았음 목숨이라도 부지했을 텐데."

혀를 찬 김한준은 몸을 일으키더니 손목시계를 힐끗 봤다.

"이따 출근하려면 조금이라도 자고 가야 돼서 안 되겠다. 이제 그만 안녕하자. 너도 가족들 꽤 그리웠을 거 아냐."

남자는 친절이라도 베푸는 양 웃어 보이곤 창고 한 구석에 놓여있는 커다란 가방 쪽으로 다가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그를 보며 재희는 허망하게 웃었다.

이제야 애써 범인을 찾았는데 ...이렇게 끝이라고?

묵직한 연장을 손에 쥔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 녀석은 무사한 걸까.

비극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에 어린 재희의 인생까지 망치게 된 것은 아닌지 남자는 두려웠다.

너라도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바람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웃는 순간 불현듯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닫히는 시야 안으로 점점 제게로 다가오는 구둣발이 보였다. 아득한 공포 속에서도 남자는 한 번 더 간절히 빌었다.

재희야, 그래도 네 인생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어.

연장을 쥔 남자의 손이 올라가는 게 보였다. 동시에 한재희의 눈이 무겁게 감겼다. 그것은 현재가 바뀔 것을 예고하는 정전이었다.

“컷! 좋습니다.”

선우는 느리게 눈을 떴다. 미지의 어둠 속에 갇혔던 한재희처럼 선우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 속에서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근처에 있던 소품팀 스태프가 다가와 선우의 몸을 감고 있는 줄을 풀어주었다. 선우는 문득 눈앞을 가리는 거대한 그림자에 시선을 들었다.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익숙한 스킨향에 심장이 빠르게 반응했다.

“고생했어요.”

서해경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앞부분에 얽힌 줄을 풀어냈다. 보통 굳이 감독까진 거들지 않는 작업이었으나 남자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손을 놀렸다. 당황한 스태프가 눈치를 보다 발길을 돌려 장비를 철수하는 팀에 가담했다.

선우는 해경의 어깨너머를 힐긋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김한준’ 역을 연기했던 최경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비웃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경원은 선우와 시선을 마주치자 연기를 하듯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당신은 뭘 원하지?

당장이라도 그의 의도를 파헤치고 추궁하고 싶었다. 최경원과의 촬영은 오늘로써 마지막이었다. 그 사이에 딱히 걱정스러운 일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함으로써 어떤 위험을 방지할 수 있었다면 그다지 쓸모없는 과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경원의 움직임을 좇는 선우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해경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하게 해 줘요.”

선우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려 눈앞의 남자에게로 가 닿았다. 이미 단단한 결박은 다 풀린 상태라 줄만 몇 번 휘두르면 될 것 같은데 언제부터였는지 해경의 손은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의도적인 게으름을 눈치챈 선우의 입가에서 작게 바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요.”

그렇게 말하는 해경의 눈가 역시도 조금 느슨하게 휘어져 있었다.

“새삼 무척 자상한 감독님을 만났구나 싶어서요.”

잠시 멀리 떨어졌던 스태프들이 다시 근처로 다가와서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나가기는 불가능했다. 감독님! 조연출의 부름에 해경이 줄을 마저 풀었다. 그는 선우와 잠시 눈을 맞추고는 등을 돌려 조연출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선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묶여 있느라 미미한 고통이 남아있는 손을 느리게 폈다가 말아 쥐며 움직여보았다. 진수가 선우에게로 다가와 대견하다는 듯이 어깨를 다독였다.

선우는 소품팀이 아직 철수하지 않아 덩그러니 남겨진 의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선우야?"

진수가 의아한 기색으로 부르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선우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고생하셨어요, 형."

"선우 너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요즘 보면 가끔 넋이 빠져 보이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거 아닌가 싶다."

선우는 별다른 말없이 웃으며 진수와 함께 촬영장을 나섰다. 조연출과 이야기를 나누던 해경은 그런 선우를 의미 모를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선우는 샤워를 한 뒤 부엌을 찾았다. 남아있는 모과청으로 차를 끓이기 위해서였다. 충분히 준비해서 촬영장에서도 갖고 다니며 마실 생각이었다. 요 며칠 컨디션이 꽤 안 좋았다. 딱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종종 몸이 쳐지거나 무겁게 느껴졌다. 감기가 아니라도 목만큼은 신경 써서 관리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나았다. 주전자를 가스레인지 위에 막 올렸을 때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어, 경훈아."

[내가 지금 시청률 1위 주연 배우랑 통화하고 있는 거 맞냐?]

선우는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시간 봐서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책상 의자에 앉아 선우는 오랜만에 편한 친구와 꽤 긴 통화를 이어나갔다.

[만약에 걔가 죽으면 그 과거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경훈은 의외로 드라마 내용과 관련해 꽤 적극적으로 물어왔다.

"한재희 없이 흘러가겠지."

[야,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데... 과거랑 현재이긴 하지만 각각 분리된 세계라는 거야, 아님 하나로 연결된 세계라는 거야?]

"그걸 헷갈리게 만든 것도 작가님 의도일걸."

[그래서 그 꼬맹이 죽냐?]

"못 가르쳐줘."

[와, 10년 우정 다 소용없네.]

한동안 은혜도 모르는 새끼라는 둥 장난과 진심이 섞인 경훈의 친근한 욕설과 타박이 이어졌다.

[근데 너 뭔가 목소리에 힘이 없는 거 같다?]

"내가?"

[엉. 무슨 일 있냐?]

선우는 조금 피곤한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특별히 그런 건 없는데."

최경원의 등장 이후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촬영이 끝난 후나 집으로까지 끌고 올 만큼의 일은 아니었다. 드라마 촬영이 후반부로 접어든 만큼 최근 들어서는 더욱 작품에 치중하려 하고 있었다.

[너 혹시 그거 아냐? 너 가끔 맡는 역할 따라서 우울증 비슷한 거 올 때 있었잖아.]

"아..."

생각지도 못한 말에 무심결에 목을 매만지던 손이 우뚝 멈췄다. 몇 번인가 그런 적이 있긴 했다. 한 번은 대학교 때 연극 공연을 할 당시였고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만한 건 영화에서 불안장애를 앓고 있는 조연을 맡았을 때였다. 연극은 너무 오래돼서 잊고 있었고 영화는 촬영이 꽤 짧았던 탓에 그나마 증상이 빠르게 사라져 기억 속에 쉽게 묻힌 듯했다.

"그때 내가 혹시 너 괴롭혔었나?"

[뭐? 갑자기 그건 뭔 소리야.]

"아니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경훈이 흘흘 대며 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웃었다.

[네가 퍽이나 남을 괴롭히겠다. 연선우 넌 힘들수록 오히려 티 안 내. 너 같은 놈이랑 오래 친구 해먹기가 어디 쉬운 줄 아냐? 나같이 섬세하고 이해심 많고 배려심 깊고 잘생긴 데다...]

"경훈아."

[그래. 어쨌든 나 정도나 되니까 챙기는 거지. 아무튼 가끔 너 보면 조마조마할 때가 있는데 그때 그랬어서 기억에 좀 남아 있었지.]

"그랬구나. 네가 말하고 나니까 나도 생각나는 거 같다."

[알았으면 이제 네가 알아서 잘 챙겨. 드라마 재밌는데 가끔 어두운 부분들도 있어서 신경 쓰일 때가 있더라고.]

"그래. 마음 써줘서 고맙다."

[이젠 옆에 있는 애인한테 챙겨달라고 하든가.]

"....."

[맞지? 사귀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네가 어디 메신저 이모티콘을 살 종자더냐. 연애하니까 샀겠지. 한 번만 더 나한테 그런 거 보내면 죽인다.]

"너한텐 한 번밖에 안 보냈는데."

[그래서 네가 지금 살아있는 거야. 두 번 보냈으면 아주 넌 그냥...]

이경훈 특유의 장난 섞인 비난과 욕설들이 이어졌다. 선우는 오랜만에 제 친구의 입담을 들으며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편안함을 만끽하고 나서야 상대적으로 최근 자신이 젖어 있던 감정의 결과 흐름이 낯설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선우는 책상 한편에 놓인 대본을 끌어와 손에 들었다. 기껏해야 종이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이것은 때로 황홀할 만큼 묵직하고 때로 무서울 만큼 무거웠다.

* * *

마지막 촬영은 꽤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출연하는 배우들과 참여하는 스태프들 모두에게 어느 정도 부담이 따르는 촬영이었다. 별도의 편집 컷을 고려하지 않은 롱테이크로 촬영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진수의 배려로 밴 안에 혼자 남아 있었다. 실수 없이 완벽한 촬영을 위해 선우 또한 오래전부터 나름의 준비를 해왔다. 본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선우는 얼마 전에 찍은 바로 전 장면을 대본으로 확인하며 복기하기 시작했다.

스물여덟의 한재희는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끌어올리다 멈칫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아늑한 방안이었다. 낯선 듯이 익숙했다. 조금 변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 살던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마치 아주 긴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처럼 기묘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느리게 방안을 훑던 시선이 튀어나온 못에 걸린 것처럼 어느 한 곳에 고정됐다.

"노트북이..."

바뀌었다. 남자는 몸을 벌떡 일으켜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절전 상태였던 것처럼 화면이 빠르게 켜졌다.

"......"

모니터에는 평범한 스물여덟의 청년의 일상을 보여주듯 꽤 많은 아이콘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다양한 게임과 워드 프로그램, 여러 기업의 자소서 양식과 내려받은 사진 파일 등이 구분 없이 섞여 있었다. 예의 그 채팅 사이트는 없었다.

"재희야..."

남자는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린 재희와 나눴던 채팅 한 부분이 생각났다.

[메일 계정 만들 거면 그거 말고 다른 거 써]

[왜?]

[10년 후에는 그 계정 사라지거든]

[진짜? 그럼 뭐뭐 남아?]

그때 알려줬던 게 뭐였었지. 남자는 인터넷에 접속해 한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때 어린 재희에게 알려줬던 메일 계정을 쓰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임시 메일함을 뒤졌다. 그곳에 읽지 않아 제목이 굵은 글씨로 처리된 메일 하나가 남아있었다.

재희형에게

마우스를 움직여 바로 그것을 클릭하려던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막연히 두려웠다. 남자는 조금 떨리는 손을 움직여 메일을 열었다.

재희형, 안녕. 나 재희야

솔직히 이렇게 인사하는 거 꽤 재밌었는데...

이것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어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대본을 덮은 선우의 손이 한재희의 손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선우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부터 굳이 이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곤 했다. 열여덟의 재희와 스물여덟의 재희로서 깊게 몰입하는 순간이 잦았고 그에 따라 의식할 사이 없이 낯선 감정에 휩쓸려 있을 때도 많았다. 그전에도 이런 경험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번처럼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한 경우는 없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난생처음으로 주연을 맡았다. 그 말은 이 정도로 특정 인물에 깊게, 오랜 기간 빠져본 경험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사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경훈이 말한 대로 선우는 요 근래 우울감을 느끼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해경과 거리를 유지하게 된 것도 극 속 인물에 동화되는 조건을 심화시켰는지 모른다. 그래도 배우로서 나쁘기만 한 징후는 아니라고,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위안하는 동안 진수가 밴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선우야, 이제 슬슬 리허설 하자는데.”

“네.”

고개를 끄덕인 선우는 밴의 문을 젖히며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지막 촬영은 스물여덟의 재희가 어린 재희의 편지를 읽고 난 후 처음으로 바뀐 세상 속으로 나서는 장면이었다.

S#47. 재희네 집 앞/D

낡은 철문이 조심스레 열리자 얼굴에 운 흔적이 묻어나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난다. 스물여덟의 한재희다.

다시 한번 대본을 확인한 뒤 인공눈물을 들고 선우에게로 향하던 분장팀 스태프를 향해 해경이 말했다.

“안 가져가도 될 것 같은데요.”

“네?”

어리둥절하던 표정을 짓던 스태프가 근처에 있던 모니터를 힐긋 보곤 ‘아’하고 작게 소리를 흘렸다. 화면 속에는 문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선우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막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슥슥 닦아내던 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눈가는 불그스름했고 속눈썹은 물기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서러운 마음을 아무도 모르게 눌러 담는 어린 아이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분장팀 스태프가 발길을 돌리고 조감독이 촬영에 임박했음을 알리는 사인을 큰 소리로 외쳤다.

해경은 화면 속의 남자를 예리하게 주시했다. 촬영 직전의 이맘때쯤이면 선우는 특유의 시그니처처럼 눈을 느리게 감는 행동을 한다. 해경은 그것이 자의적으로 최면을 거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차'의 촬영이 후반에 이른 언제쯤부터인가 연선우는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굳이 스위치를 켜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리라 해경은 짐작했다. 이미 작품 속의 세계와 현실과의 경계선이 불분명해졌기 때문에.

본인도 눈치채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연선우는 촬영 중이 아닐 때도 종종 위태로운 한재희의 모습 그대로였다. 해경은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하듯 지켜보고만 있었다. 곧 모든 게 준비됐음을 알리는 사인이 떨어졌다. 해경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마지막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직한 큐 사인이 울렸다.

시골에 있는 학교의 작은 운동장은 올림픽 축구대표팀의 경기가 한창이던 당시를 재현하듯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와 대비되게 오직 한 사람만이 주저앉아 엎드린 채 이질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거친 흙바닥에 구겨지듯 몸을 만 채 어깨를 떨고 있는 사람은 한재희였다. 원 테이크로 꽤 긴 거리를 이동한 끝에 도달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현장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가 저마다의 긴장감 속에서 해경의 사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컷! 오케이."

서해경의 단호한 외침이 드디어 마지막 촬영의 종료를 알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장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함께 끊이지 않는 인사가 오고 갔다. 운동장 전광판 앞에서 함성을 내지르던 연기자들과 보조출연자들 역시 악수를 나누며 후련함과 아쉬움 속에 서로를 도닥였다. 스크립터를 포함해 모니터를 통해 선우를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 몇몇이 훌쩍거리거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하하.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

“아, 이게 다 선우오빠 때문이라고.”

그들은 민망함을 털어내듯 부러 웃음을 짓고 가벼운 말들을 흘렸다. 조연출이 여전히 엎드린 채 몸을 떨고 있는 선우에게 다가서려는 걸 해경이 말렸다.

"잠시 그대로 둬요."

진수가 우물쭈물하며 해경의 눈치를 슬쩍 볼 때쯤 선우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선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물로 흥건해진 얼굴을 손으로 훑어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씩씩한 선우의 외침에 그를 향한 박수소리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스태프들과 악수를 하거나 깊게 포옹하며 부지런히 인사를 나누고 있는 선우를 해경은 묵묵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는 알고 있었다. 컷 사인 이후 현실로 돌아와 웃어 보이는 지금 연선우의 모습이야말로 일종의 연기라는 걸.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진수가 어딘가로 향한 사이 선우는 홀로 밴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 밴 안으로 묵직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잠시 멍하니 앉아있던 선우의 뺨 위로 예고 없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선우는 허벅지 위로 양 팔을 딛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얼마 후 선우는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이 스물여덟의 한재희처럼 어린 재희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다시 살아 돌아온 엄마와 진희, 마을 사람들을 확인했음에도 재희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선우의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순간 가슴이 턱 막힌 듯이 답답하고 목이 불편하게 조여 왔다. 그때 조용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와 선우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선우는 알아채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어가는 것에서야 선우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감독님.”

“선우씨 다치는 건 싫은데 컷을 할 수가 없더군요.”

약하게 말아 쥐고 있던 선우의 손 안에는 흙바닥을 내려치고 거칠게 긁으면서 난 생채기가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다. 해경은 선우의 손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곤 재킷 안에서 따로 챙겨 온 소독약과 밴드를 꺼냈다. 선우는 남자가 섬세한 손길로 자신의 손을 치료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밴드를 붙인 선우의 손을 잡고 해경이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숨과 따뜻한 체온이 피부에 맞닿았다.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던 선우의 두 눈에서 불현듯 주체하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해경이 손을 뻗어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선우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이제 다 끝났어, 선우야.”

그 말에 뒤늦게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선우는 두 눈을 느리게 끔벅거렸다. 아. 고여있던 눈물이 뚝 떨어지며 맑게 갠 시야 안에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가 보였다. 서해경. 자신이 사랑하고 언젠가부터 제게 소중한 일상이 되어준 사람. 그가 있는 곳이 현실이었다. 선우는 무너지듯 해경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남자는 역시나 다정해서, 자신의 어깨가 젖어가는 것을 오래도록 내버려 두었다.

========== 작품 후기 ==========

퇴고하면서 분량이 약간 줄어서 원래 두 편이었던 것을 한 편으로 합쳐서 올립니다.

10분 후에 46편이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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