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프 컷-48화 (48/49)

러프 컷   48편

<-- 完 -->  경훈의 줄기찬 닦달과 괴롭힘, 해경의 작은 호기심으로 인해 선우는 오늘 세 사람이 한 데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장소는 휴일을 맞은 경훈의 가게였다.

집을 나서기 전에 선우는 오랜만에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거기엔 난생 처음 보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소속사 계약금과 첫 광고 모델료, 드라마 출연료 등이 정산돼 들어온 금액이었다. 물론 돈이라는 건 상대적이니 누군가에게는 그리 많지 않은 액수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선우의 인생에서 봤을 때 이 숫자는 확실히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그리고 그것은 약간의 충격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단순한 숫자의 나열들이 마치 한순간의 도약과 추락을 암시하는 것도 같아서.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가면 되는 건지, 막연한 의문이 일었다. 지금껏 해 온대로 그저 착실히 연기를 하고, 노력을 하는 것으로 이 궤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걸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짧은 몇 달간 선우에게 벌어진 일들이 이미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다만 선우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서해경」

환희 밝혀진 화면 속에는 그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가 있다면... 아마 버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의 부름에 답하는 순간, 다시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 * *

선우는 당황을 숨긴 채 서해경과 이경훈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 가끔씩은 묘하게 적대적인 것 같았고 어쩔 땐 서로를 시험하는 듯도 했다. 은근한 기싸움은 다행히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선우씨랑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네요.”

“네, 뭐 그렇죠. 그런데... 존나 잘 생기셨네요.”

“그런 얘기 많이 듣습니다. 감사합니다.”

“허어...”

해경의 선선한 대꾸에 경훈이 입을 쩍 벌린 채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쩝, 입맛을 다시고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형보다 못 한 것보다야 바르는 외모가 백배 낫긴 하죠.”

“이제 선우씨하고 상관없는 사람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해경은 선우와 있을 때도 종종 그랬듯이 매끄럽게 웃으면서도 말로써 은근히 불쾌감을 표현했다. 다행히 경훈은 동감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딱히 안 좋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예, 뭐... 저도 그 새끼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게 좋겠네요.”

오랜만에 공감대가 형성됐다.

“경훈씨가 부럽네요.”

“제가요?”

아니, 다 가지신 분이 왜... 경훈이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자 해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10년 동안의 선우씨를 다 봐 왔을 테니까요.”

“아, 그건 너무...”

지극히 연인의 시점에서 해석한 장점 같은데요. 그 부분은 차마 동감하기 어렵다는 듯 경훈이 미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럼 아쉬운 대로 선우 고등학교 사진이라도 보실래요? 지갑 어디에 있을 텐데...”

“내 사진?”

경훈이 수북이 가지고 온 종이에 열일곱 번째 사인을 하고 있던 선우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지갑을 찾기 위해 근처를 두리번거리는 경훈을 보던 해경이 싸하게 얼굴을 굳혔다.

“선우씨 사진을 왜 갖고 다니시죠?”

아, 여기 있었구나. 지갑을 들고 돌아오던 경훈이 해경의 삼엄한 표정을 보고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우 독사진이 아니라 같이 찍은 사진인데요.”

그렇다 해도 보통 친구와 어렸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다니나? 여전히 해경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알아채고 경훈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이때가 나름 제 전성기였는데 마침 이날 사진이 기가 막히게 잘 나왔거든요. 기념비적인 사진이랄까요. 은근히 종종 써먹을 데가 있기도 하고.”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으나 해경은 어린 시절의 선우를 보기 위해 일단 표정을 풀었다. 경훈이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해경에게 내밀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선우가 고개를 조금 틀어 건네지는 것을 확인했다.

“아, 이거...”

고등학교 때 경훈을 포함해 반 친구들 몇 명이서 계곡으로 놀러갔다가 찍은 사진이었다. 물놀이를 막 끝내고 나왔을 때 찍은 거라 둘 다 젖은 티셔츠를 입고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사진 속의 선우는 고등학생이 아니라 중학생처럼 마냥 앳되어 보였다. 동시에 보는 순간 청춘영화 한 편의 서사가 머릿속에 지나가게끔 만드는 청초하고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해경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사진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긋 바라본 선우가 조금 민망해하며 말했다.

“그거... 저는 좀 못 나왔죠?”

“이게 못 나온 겁니까?”

눈을 번뜩이며 바로 반응하는 해경의 모습에 선우가 어버버하다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못 나온 게 아닌가.”

경훈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좀 이래요. 남들이 보는 제 모습에는 좀 둔한 편이라. 근데 사진은 좀 덜 나온 것도 사실이에요. 그때 연선우 존나 예뻤거든요.”

“이경훈, 뭔 소리야.”

어딘가 간지럽다는 듯 목가를 어색하게 긁으며 선우가 눈을 흘겼다. 서해경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뭔가 진 것 같은 기분이네요.”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해경의 반응이 장난같지 않아서 경훈은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선우씨도 이 사진 가지고 있어요?”

“아뇨. 전 사진 찍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졸업앨범 외에는 남아 있는 사진이 거의 없어요.”

“졸업앨범이라. 궁금하네요. 다음에 보여줘요.”

네. 선우는 다음에 만날 때 갖고 오겠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경훈씨. 이 사진 혹시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어어... 글쎄요. 나름 잘 나온 사진이라.”

해경은 재킷 안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냈다.

“염치없지만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돈으로 해결하려는 자신의 모습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것이 상대에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경훈은 무례하게 느끼기보다는 그저 놀랄 뿐이었다.

해경이 수표 여러 장을 꺼내들자 경훈의 입이 헉, 하고 벌어졌다. 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선우가 다급히 경훈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그냥 드리면 안 될까. 내가 어떻게든 나중에 보답할 테니까.

“그냥 가지세요. 뭐 지금 제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메리트가 있으니까.”

이상하게 이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묘하게 이성의 호감도가 상승하여 종종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아쉽기는 했지만 끝까지 안 된다 거절할 만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선우의 연인으로서 서해경의 여러 면면들이 흡족하게 다가왔기에 이런 부탁쯤이야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고마워요. 이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웃어 보이는 서해경의 얼굴을 보며 경훈 또한 결국 졌다는 듯이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랫동안 제 친구가 행복해지기를 빌었다. 왠지 이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경훈은 더없이 마음이 놓였다.

해경이 차를 주차한 곳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근처에 있던 아담한 건축물을 향해 뛰었다. 경훈의 가게는 지리적으로 생뚱맞은 곳에 있어서 회원제가 아닌데도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가는 특색 있는 곳이었다. 가게와 주차가 가능한 곳까지는 꽤나 멀었고 그 사이에는 역시나 생뚱맞은 관광지가 하나 있었다. 두 사람이 비를 피한 곳은 관광안내소로 마련된 구조물의 차양 아래였다.

쏴아.

웅장한 연주곡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선우는 비의 장막 너머를 물끄러미 구경했다. 선우는 원래 비가 오는 날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비교적 남들이 우울감을 느낀다고 하는 추운 계절은 꽤나 좋아했다. 언젠가 한 번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고 나름의 결론이 나왔다. 그건 아마 제 내면의 온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때때로, 혹은 자주 선우를 선량하거나 따뜻한 사람으로 보곤 하지만 정작 선우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제 속을 사진으로 찍어 현상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놀랄 만큼 무척이나 황량한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겨울은 그런 자신과 비슷한 계절이었다. 잎과 열매가 다 떨어진 빈 나뭇가지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휑할 정도로 길가에 인적이 드문 계절이 오면 쓸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해지곤 했다. 제 마음의 풍경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우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를 보며 여전한 계절과 자신의 변화에 대해 생각했다. 선우는 지금 온 몸으로 부대껴오는 봄이라는 이 계절 역시도 좋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여름도, 그 다음 계절도, 다시 돌아오거나 반복될 모든 계절들도 좋아질 것 같았다. 다름 아닌 한 사람 때문에.

"내가 멋있긴 하죠. 애인이 눈을 못 뗄 만큼."

비 내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줄 알았던 해경이 오래전부터 이어진 선우의 시선을 눈치 챈 듯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왠지 나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비가 오는 것도 당신 때문에 좋아하게 됐다고, 선우는 문득 소리 내어 고백하고 싶었다. 해경은 언젠가처럼 빗방울이 튄 선우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훑어주었고 선우 역시 언젠가의 그를 흉내 내듯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 지금 부잔데... 술이나 사줄까요?"

해경은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느리게 선우를 따라 웃었다. 떨어지는 비가 번번이 발등을 적실 만큼 요란하게 쏟아지는데도 그와 비를 피하며 서 있는 좁은 공간은 아늑하기만 했다. 선우는 제게로 손을 뻗으며 고개를 숙이는 남자를 보다 눈을 감았다. 따뜻한 숨이 달게 닿아왔다. 역시 이 날씨마저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 * *

선우는 시놉 몇 줄을 읽다가도 허벅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반동을 느낄 때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느꼈다. 선우는 소파에 앉아, 그리고 해경은 선우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프린트 된 기획안들을 읽고 있었다.

원래는 각자의 차기작을 검토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해경은 본인의 것은 제쳐놓고 선우가 가져온 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선우는 읽던 것을 내려놓고 해경이 한 곳으로 밀어놓은 종이뭉치들을 들어 올렸다. 선우의 차기작 후보들 중에 해경이 탈락시킨 것들이었다.

“음...”

손에 쥔 네 개의 기획안 표지들을 차례로 훑어보던 선우가 약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서해경이 탈락시킨 작품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혹시 멜로나 로맨스는 안 좋아하세요?”

해경이 고개를 조금 올려 선우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다.

“좋아해요. 그 작품들은 기획안이 별로거나 대본이 별로라 제외한 거고.”

선우는 가느스름하게 눈가를 좁혔다. 믿어도 되는 걸까. 어딘가 조금 개운치 않았다. 이중에 확 눈에 들어오거나 마음이 분명하게 갔던 작품이 없었던 건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제안이 들어온 것 중에 로맨스 장르는 딱 이 네 작품뿐이어서 완전히 놓기에는 아쉬움이 들었다.

“별로라니까.”

선우의 미련을 눈치챈 듯 해경이 들고 있던 기획안들을 낚아채 이전보다 더 멀리 내던져버렸다.

“내용으로 승부해야지 1회부터 주인공 샤워씬을 넣질 않나 키스신까지 남발하고...”

해경이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혀를 차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언급한 작품은 확실히 시청자의 눈요깃거리만 의식하고 서사는 듬성듬성 빈 곳이 많긴 했다. 그래도 다른 세 작품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 아쉬우면 그 장르는 나랑 찍든가.”

해경이 몸을 세워 선우를 소파에 눕히며 말했다. 선우의 눈과 입가로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감독님이 찍어주실래요? 배우도 하고.”

“얼마든지. 원할 때마다 찍어줄게요.”

진득하게 겹쳐지는 입술 사이로 간간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간지럽게 새어 나왔다.

“보여줄 게 있어요.”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틈틈이 서로의 입을 맞추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내일부턴 바빠질 예정이라 선우가 속으로 아쉬워하고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해경이 선우를 불렀다.

남자는 선우를 거실로 데려가 소파에 앉게 하고는 대형 TV 옆의 조그만 기계를 조작했다. 준비가 됐는지 TV 화면에 무언가가 띄워졌을 때 해경은 대기 상태로 정지해놓곤 선우의 옆에 앉았다.

“별 건 아니고 시간 날 때마다 찍어놓은 건데 어제 편집이 다 끝나서요.”

선우를 보며 짓는 그의 미소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약간의 쑥스러움이 담긴 웃음이랄까. 해경은 리모컨을 들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암전된 화면에서 시작되었다.

새까만 화면을 뚫고 어수선한 소음들이 먼저 등장했다. 페이드인 되며 밝아진 화면 사이로 울창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눈을 감고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놀란 숨을 들이키며 눈을 크게 떴다. 그 남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당시 선우는 몰랐던 주변 풍경들이 새삼스레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촬영 직전이라 주변은 꽤 산만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태프로 보이는 누군가가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선우를 힐긋 보곤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치는 장면도 있었다. 곧 화면이 전환됐다.

유빈이를 품에 안은 채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저랬었나. 선우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화면 속 남자가 아이를 대하는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동시에 그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자주 웃었다.

“그날 메이킹 담당 카메라를 뺏어서 장난처럼 찍었던 건데, 남의 자료를 빼돌리느라 애 좀 먹었죠.”

해경이 웃으며 끌어안고 있던 선우의 머리에 턱을 기대었다.

다양한 선우의 모습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촬영장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본을 보는 모습, 민정이 무어라 얘기하는 것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모습, 장비를 옮기는 소품팀에 슬그머니 끼어 소품용 의자를 나르는 모습 같은 것들까지.

연극에서 새로운 막이 시작되듯 화면은 서서히 암전되었다 다시 켜졌다. 드러난 화면은 이전 장면들과 다르게 매우 부분적인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운동장 위에 길게 드리워진 어떤 이의 그림자와 촬영장 한편에 놓여 있는 몹시 너덜너덜한 대본. 수없이 진흙 바닥을 구른 듯한 헤진 운동화와 그 운동화를 신고 다시 힘차게 달려 나가는 누군가의 발끝. 세트장 한편에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있는 눈물자국들과 꽤 많은 땀을 닦아내고 축 쳐진 채 걸려있는, 하얗게 빛나는 수건.

눈을 깜빡거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암전이 이어지고 화면이 다시 또 밝아졌다. 이번에는 매우 사적인 장소가 나타났다. 선우는 그곳이 해경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가늘게 햇살이 떨어지고 카메라가 느리게 이동해 종착지에 다다랐다. 누군가의 시선은 다시 또 끈기 있고 집요하게 사소한 것들을 주시했다. 이불 밑으로 드러난 하얀 종아리 위로 떨어지는 빛의 조각들과 부스스하게 일어나 풀처럼 나풀거리는 머리카락, 시트를 꾹 말아 쥔 손가락 같은 것들.

그것들은 다른 이들이 본다면 몹시 지루하고 쓸모없게 느껴질 화면들이었다. 그러나 이 길고 적막한 영상이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까닭은 카메라의 시선이 화면 속의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면을 지켜보던 선우의 심장이 박동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도저히 참을 수 없어져, 선우는 몸을 틀어 해경을 끌어안았다.

“저도 사랑해요.”

그 말에 서해경이 잔잔한 미소를 덧그리며 팔 안 가득 선우를 마주 안았다.

“내 부탁 들어준다고 했었죠.”

잠시 잊었었던 약속을 언급하는 것에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살자, 선우야.”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선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바로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남자는 초조한 듯 선우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여러 조건들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저를 어르듯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서해경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게 감사하고 행복했다. 선우는 자신을 붙잡듯이 안고 있는 남자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좋아요.”

그리고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는 시간이 아까웠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이 모두 귀했다. 선우는 해경에게 입 맞추고 또 입 맞추며 생각했다. 한 컷의 버림도 없이, 그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들을 자신의 생에 새겨나가고 싶다고.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신 분들, dokhae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후기는 내일쯤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러프 컷〉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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