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관장이 제안하는 일이 뭐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이건 사안이 달랐다. 다른 건 뭐든 하는 대신 국외로는 나가지 않는다. 국가기관에 소속될 당시 계약 내용에 포함시켰던 사항이었다. 버젓이 계약서가 남아 있고, 기관 쪽에서도 자신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이러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쨌든 기관 쪽에서 먼저 조건을 어겼으니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하는 임무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궁금해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정원은 관장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아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관장은 다급하게 정원의 팔을 붙들었다.
“잠깐, 잠깐!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정원 군, 란희한테 맡길 수도 있는 걸 안 그런 이유가 뭐겠어?”
김란희는 정원을 제외하면 국가기관 소속 유일한 S급 가이드였다. 그 말은 물론 허세일 것이다. 김란희는 잠재력이 높은 S급 가이드이기는 하지만 가이딩이 불안정했다. 상급 가이드들을 쌍수 들고 반기는 사기업에서도 난색을 표할 만큼의 불안정함이었다. 하지만 뭔가 정원을 설득할 패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다지 기대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원은 잠자코 관장의 말을 기다렸다.
“요즘 유럽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기현상, 들어봤나?”
“지나가다 들은 기억이 있긴 합니다.”
“발생 주기나 규모를 봤을 때 누군가 고의적으로 일으킨 사건일 가능성이 커.”
“에스퍼 테러라면 저희 측에서 나설 이유는 없을 텐데요.”
관장의 진지한 말투와 대조되게 정원의 표정에는 미동도 없었다. 고의적으로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다니는 에스퍼는 흔했다. 강한 에스퍼는 혼자 행동하기도 했고,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에스퍼가 여럿 모여 집단을 이루는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행위를 칭하기 위해 에스퍼 테러라는 말이 따로 생겨났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건 타국의 일이었다. 그 나라의 국가 소속 기관이 나서거나, 아니면 사기업들이 앞 다퉈 달려들어 사건을 해결할 것이다. 우리가 심각하게 반응할 일은 아니지 않나?
관장은 정원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현장에 인력을 파견했던 곳이 있다. 테프트야.”
테프트는 초기부터 입지를 다졌던 에스퍼/가이드 회사로, 유튜버 에스퍼레소가 속한 E&X와 더불어 국내 톱3로 꼽히는 기업이었다. 국외에서도 상당한 입지를 자랑하니 그 사건에 인력을 파견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인력을 철수했어. 테러가 아니라 자연 발생한 현상이라면서.”
정원의 표정이 점차 변했다.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제일 먼저 나선 기업 이외에 다른 곳에서 발을 뻗지 않는 것이 업계의 상도덕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대기업인 테프트였다. 그들이 나섰다가 철수한 상황이라면 달리 나설 수 있는 곳이 없을 터였다.
미묘하게 달라진 정원의 표정을 알아차린 듯, 관장이 더욱 심각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건 소문일 뿐이지만, 현장에서 누군가 ‘그자’를 봤다는 이야기가 돌더구나.”
“……!”
순간 정원의 표정이 완벽하게 굳어졌다. 저절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자라면.”
“테프트의 사장 말이다.”
그것은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정원을 충분히 들끓게 만들 수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자의 존재는 정원이 온갖 고생을 자처하며 국가기관에 붙어 있는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테프트의 사장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잠적한 지 벌써 십 수 년이다. 그동안 그를 목격했다는 제보는 흔히 들렸다. 한때 그를 봤다는 증언이 있는 곳마다 캐고 다녔던 정원이었다. 물론 그 중 의미가 있는 제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관장이 이토록 자신만만하다는 건 희망을 품을 가치가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테프트가 수상한 정황까지 보였으니, 여지는 충분했다.
더 이상 가지 않겠다고 버틸 수 없었다. 관장은 정원의 대답을 확신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소파에 기댔다.
그래도 정원은 바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마음을 진정시킨 뒤 침착하게 물었다.
“저희가 나서도 되는 겁니까? 괜히 테프트를 도발하는 꼴이 되지는 않을까요.”
“마침 이번에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 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어. 그쪽에서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니, 우리가 인력을 보낸다고 이상할 게 없지. 그리고 분란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움직일 생각이다.”
확실히, 국립 기관에서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나서면 화를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소수의 인원이라면 더욱 문제가 될 부분이 없을 거고. 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군요……. 파견되는 사람은 누가 있나요.”
정원은 국가기관에 소속된 몇 안 되는 상급 에스퍼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개개인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어도, 함께 파견된다면 도움이 될 터였다. 관장이 정원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두 명을 보낼 생각이다. 널 포함해서.”
“저까지 두 명이라고요.”
정원이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물론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S급 에스퍼란 때로 자연재해라고 불릴 만큼 위협적인 존재였다. 여러 명이 떼로 모여도 강아지만한 괴물 한 마리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는 하급 에스퍼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이곳은 국가기관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를 관리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국립에스퍼/가이드관리본부는 에스퍼와 가이드에게 결코 좋은 직장이 못 됐다. 에스퍼가 돌연변이 취급을 받으며 감시받던 때에야 많은 에스퍼가 의무적으로 국가에 소속되어 봉사했지만, 어느 날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괴물과 원인 불명의 이상 현상을 에스퍼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는 인식이 바뀌었다. 에스퍼나, 그들을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가이드에게 대중이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거의 스타 산업의 일부가 됐다. 에스퍼를 분석하는 걸로 구독자 60만 명을 끌어 모은 에스퍼레소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일찌감치 에스퍼 양성 사업을 벌인 CEO들은 이미 돈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사기업은 상급 에스퍼와 가이드를 거액의 연봉으로 고용해 몸집을 불렸다. 그런 상황에서 여전히 소속 에스퍼와 가이드를 말단 공무원만도 못하게 대우하며 굴리는 국가기관에 소속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지간한 애국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원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고서야.
오늘만 해도 자신에게 러브콜을 보냈던 E&S의 에스퍼레소를 떠올리며, 정원이 애써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에스퍼 한 명으로는… 되는 게 없을 텐데요.”
국가기관 소속의 A급 에스퍼는 단 세 명뿐이었다. S급은 한 명도 없었다. 딱 한 명 있던 S급 에스퍼는 몇 년 전 자기 능력에 휘말려 불구가 되어 버렸고, 그 뒤로는 A급 세 명이 최고 등급이었다.
물론 A급만 되어도 웬만한 이상 현상은 단독으로 커버할 수 있었다. 컨트롤 능력이 좋고, 가이딩이 잘 받는 타입이라면 정원 한 명만 대동하고도 충분히 장기 임무를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다만 국가기관 소속 A급들은 A급 중에서도 다소, 하자가 있는 편이라는 게 문제였다. 정원은 그들 셋의 얼굴을 연달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한 명은 가이딩도 잘 먹히고 능력도 안정적이지만, 가진 고유의 능력이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는 것이라 괴물이나 이상 현상을 상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한 명은 강한 잠재력을 가진 대신 한번 능력을 사용하면 가이딩을 받고도 최소 일주일은 앓아누워 사경을 헤맸다.
마지막 한 명은 그럭저럭 안정적인 능력을 가진 대신 가이딩이 잘 먹히지 않았고, 변덕도 상당히 심해서 가이드 한 명과 오래 임무를 할 재목이 못 됐다.
그런데 테프트가 얽혀 있을지도 모르는, 이렇게 규모가 큰 해외 파견 임무에 에스퍼 한 명이라니. 대체 그들 중 누굴 보내겠다는 말일까? 정원의 타당한 의문에 관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어. 석주가 갈 테니까.”
“네?”
처음 듣는 이름이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왔다. 얼굴을 찌푸리는 정원을 보며 관장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아, 정원 군은 석주와 만날 일이 없었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나?”
“네……. 처음 들어봅니다.”
“워낙 소문이 파다해서 알 줄 알았는데. 강석주. 우리 소속 에스퍼야. 실력은 믿을 만하니 걱정할 거 없고.”
정원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으니 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 소속 에스퍼 명단을 모두 꿰고 있는 정원이 모르는 에스퍼가 있다는 건 이상했다. 소문이 파다할 정도라면 신입 에스퍼도 아니라는 뜻인데.
“그런 이름은 소속 에스퍼 목록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뭐, 정식으로 이름이 등록된 건 아니니까. 그 왜, S급 에스퍼는 이름이 알려지면 피곤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본인이 알려지지 않길 바라더라고.”
정원의 손이 멈칫했다. 소문이 파다하다는 강석주가 어떤 사람인지, 애매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테프트의 사장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찬밥 더운밥을 가릴 신세가 아니었다.
“S급 에스퍼라고요.”
그러나 상대가 S급 에스퍼라면.
“S급 에스퍼와 단둘이, 현장에 나가야 하는 건가요?”
“어, 그렇지. 전에도 S급 에스퍼랑 같이 일해 본 적 있잖아? 사기업 쪽에서 지원 요청했을 때.”
사기업의 S급 에스퍼와 함께 일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때는 단기적인 임무였으니 문제가 없었지만. 정원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존재조차 모르던 S급 에스퍼와의 동행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오히려 반겨야 할 상황이었다. S급이라면 능력 하나는 확실할 테고, 그럼 임무 수행에 도움이 될 테니까.
떨떠름한 정원의 반응을 보고 관장이 눈치를 보듯 말했다.
“몸 상태가 걱정이 돼서 그래?”
S급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데에는 하급 에스퍼 수십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도 더 많은 기력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S급보다 급수가 낮은 가이드라면 가이딩 한 번으로 돌이킬 수 없이 몸이 망가질 가능성도 있었고. 그러나 정원이 신경 쓰는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정원은 한참 만에 겨우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아뇨. 일단……. 알겠습니다.”
“음, 그래. S급이라 버겁기야 하겠지만,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닐 거야. 정원 군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데……. 동료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죠.”
입 밖으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무거웠다. 애써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쁜 기억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